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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09 호
단기 4341. 10. 11 (음력 9. 13)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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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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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문학의봄 신인상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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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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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계획으로 시작하고, 노력으로 성취되며, 오만으로 망친다.(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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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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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짐승이름
“남산골 한 늙은이 고양이를 길렀더니/ 해 묵고 꾀들어 요망하기 여우로세/ … 백성들은 쥐 등쌀에 나날이 초췌하고/ 기름 말라 피 말라 피골마저 말랐다네.”
다산 정약용의 우화시 ‘고양이’에 나오는 글이다. 여기서 늙은이는 일반 백성들이며, 쥐는 아전을, 고양이는 감사(수령)를 이른다.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하는 당시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혹은 고양이를 쥐 잡는 포졸에 비유한다. 고양이 묘(猫)를 뜯어보면, 해태 치에다 싹묘(苗)를 덧붙여 만든 글자임을 알 수 있다. 해태는 사람의 잘잘못을 알아차려 나쁜 사람을 만나면 받아 버린다. 싹 묘(苗)는 싹이라는 뜻 말고도 ‘작다-사냥하다’라는 말로도 쓰인다. 물론 ‘사냥하다’는 곧 악행을 저지른 이를 잡는다는 뜻으로 봐야겠다. 해서 암행어사를 해태에다 비유하여 치사라고도 이른다.
풀이에 따라서는, ‘고랑이-고앙이-고양이-괭이’로 그 바뀐 과정을 상정하였다.(서정범) 터키말에서는 고양이를 케디(kedi), 몽골말로는 고양이를 머루(mru)라 한다.
또 <계림유사>에서는 고양이를 ‘귀니’(鬼尼)라 했는데, 지금도 지역에 따라서는 ‘고내-고이’, ‘살칭이’라고 이른다. 살칭의 ‘살’은 사이를 뜻한다. 호랑이도 작은 짐승도 아니면서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 어떤 소임이 있으리라는 가정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뭔가 고양이가 신통함이 있다고 봤다는 얘기다.
정호완/대구대 교수·국어학
해거름, 고샅
'계절의 변화가 놀랍습니다. 무서운 비바람이 우리를 긴장 속에 몰아넣는가 했더니 고개 숙인 벼가 넘실대는 벌판에서는 메뚜기떼가 야단입니다. 어릴 적 추억 하나가 떠오릅니다. 몽골몽골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가 평화로운 해거름, 고샅에 나와 '저녁 먹어라'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개발 바람에 삶의 모양이 바뀌다 보니 잊혀 가는 말이 많습니다. 위 글에 나온 '해거름'과 '고샅'. 우리의 옛 정서를 담뿍 담은 고유어입니다. '해거름'은 줄여 '해름'이라고도 하는데, 해가 지기 바로 전의 시간대를 뜻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석양(夕陽)' 또는 '일모(日暮)'라고 표현합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난 후의 땅거미 질 무렵인 '황혼 (黃昏) ·박야(薄夜)·석음(夕陰)·훈일(日)'보다는 조금 이른 시간을 말합니다.
정겨운 말 '고샅'은 '고샅에서 놀다 오너라' '큰길을 벗어나 어둠이 가득 괸 고불고불한 고샅으로 들다 보면 순간 무서운 생각이 엄습하곤 했다'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길'과 관계된 말입니다. 흔히 집 밖이나 마을 밖을 '고샅'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는 집의 담과 담 사이 골목길을 의미합니다. '고샅'을 소리나는 대로 적어 일부 지방에선 '고삿'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삿'은 '초가 지붕을 일 때 쓰는 새끼'란 의미로 전혀 다른 말입니다.
참고로 표준어 규정을 만들기 전에는 이런 의미의 '고삿'과 좁은 길의 '고샅'을 구분하지 않고 '고샅'하나로만 표기해 왔습니다.
구설수
신문의 '오늘의 운세' 독자가 의외로 많다. 종합지에서 무슨 운세냐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조사해 보면 생각 외로 많이 본다고 응답한다. 운세란을 보면 몇 년생은 횡재수·요행수가 있다는 등 듣기 좋은 말도 있지만 구설수·손재수·관재수 등 기분 나쁜 말이 더 많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늘 주의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구설수(口舌數)'는 '시비하거나 헐뜯는 말을 듣게 될 운수'를 뜻한다. 주로 운세에서 나오는 말로 '구설수가 있다[끼었다]' 등의 예로 쓰인다. 그 밖에 '누가 무슨 일(말)로 구설에 올랐다'처럼 남들의 입에 좋지 않게 오르내리는 경우엔 '구설'이라 해야 한다. '구설수'의 '수(數)'가 '운수' '신수'를 뜻하므로 '구설수에 올랐다'(일부 사전에 있음)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고, '구설에 올랐다[휘말렸다]'고 해야 맞다.
벌이다, 벌리다
'벌이다'와 '벌리다'는 단어의 형태가 비슷해 혼동하기 쉽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의미가 서로 다른 별개의 낱말이므로 확실히 구분해 써야 한다.
㉮ '이미 벌려 놓은 굿판이니까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 '21세기 역사의 선두 주자들은 정보기술혁명에 힘입어 새로운 힘으로 등장한 지식력을 활용, 문제를 더욱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리고 있다.' ㉰ '삼국지에서 영웅호걸들이 스케일 크게 벌이는 인간 드라마는 정말 흥미진진하다.' ㉱ '그는 이야기를 한번 시작하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의 '벌려'는 '벌여'로, ㉯의 '벌리고'는 '벌이고'로 바로잡아야 한다. ㉰와 ㉱의 '벌이는'과 '벌린'은 바른 표현이다.
'벌이다'는 '일을 계획하여 시작하거나 펼쳐 놓다/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다(좌판을 벌이다)/전쟁이나 말다툼 따위를 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벌리다'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둘 사이를 넓히거나 멀게 하다(두 손을 벌리다)/열어서 속의 것을 드러내다(밤송이를 벌리다)/우므러진 것을 펴서 열다(자루를 벌리다)'의 뜻이 있다. 이 '벌리다'의 반대말은 '오므리다' '닫다' '다물다'이다.
둘째, (돈을)'벌다'의 피동형인 '벌리다'(새로 시작한 일은 돈이 잘 벌린다)가 있다. 대체로 일이나 잔치·사업·조사·좌판·싸움·논쟁 등에는 '벌이다'를, 간격·차이·손·양팔·입·틈새 등에는 '벌리다'를 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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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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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유골과 유골함
미이라화를 육체적 불멸의 한 방법으로 굳이 해석한다면, 반대로 불교에서 주로 행하는 장례법인 화장은 육체를 파괴하고 모든 형태의 육체적 존속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까닭에 유가들이 불교를 줄곧 비판해 왔던 것이며, 그들은 화장을 금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최근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기 원했던 저우언라이의 유언에 대해,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거세게 반대한 일 역시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우선, 화장이 끝난 후에 유골을 모아 숭배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겠다. 유골 숭배는 유골이 주술적 기능을 갖고 있다는 굳센 믿음을 내포하며, 단순히 상징적으로 고인을 기념하기 위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붓다가 죽었을 때, 불교 지도자들이 그 성스러운 유골들을 서로 차지하려는 욕심에서 전쟁까지 불사하려 했던 까닭도 이 때문이다. 전쟁이 터지려는 일촉즉발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 '유골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브라만의 한 현자가 나서서 헌신적으로 중개하여 여덟 명의 경쟁자가 골고루 유골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던 덕분이다. 그러나 그 현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보겠다는 절실한 바람에서 그런 어려운 협상을 얻어냈던 것 같지는 않다. 전설에 의하면, 이렇게 하여 그는 붓다의 치아 하나를 훔칠 방법을 찾으려 했던 것 같은데, 이 치아는 후에 다른 자에게 도둑맞았다 한다. 문제의 유골은 그래서 더없이 귀중한 것으로 받들어졌고, 분쟁이 생겼을 경우에는 최상의 무기로 간주되었다. 유골이 지닌 이러한 능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는 유골에서 나오는 광채는 순전한 영적 실체가 아니며, 강력한 물리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생전의 그 붓다른는 믿음에서 온다고 봐야 한다. 이미 붓다의 생전에 머리카락, 손톱 부스러기 같은 '사후에' 유골이 될 부분들이 사리함에 모셔져 있었으며, 붓다의 머리카락 한 타래만 소유하였어도 제자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붓다뿐 아니라 붓다보다 한 차원 낮은 성인들도 온갖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한다. 그리고 이 능력들은 사후에, 간혹 죽기 이전에도 그들의 유골(혹은 신체의 일부분)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14세기에는 케이잔이라는 선종 지도자가 자신이 창건한 사원의 영원한 번영을 보장하기 위해서, 그의 스승 드로가 사후에 유골이 될 자신의 일부를 함께 석총 안에 매장했던 일도 있었다.
힌두교에서는 흔히 유골을 여러 곳에 분산해 놓는데, 이것 역시 고인의 '사후 생명'에 대한 믿음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성스러운 강물은 불교에서의 사리탑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한편 붓다의 유골의 갠지스 강에 던져졌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그러나 유골을 강물 속에 던지는 행위는 유골을 버려서 없앤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물의 수호신인 용왕의 궁전에 있는 안전한 장소에 보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로부터 2세기 후에 아소카 왕은 이 유골들을 찾아낸 후, 나라 안 방방곡곡에 특별히 만들어진 유골함에다 분배해 모셔두었다고 한다. 8만 4천 개라는 상징적인 수만큼 만들어진 아소카 왕의 유골함(혹은 스투파)은 불교신앙과 인도문명이 만나 이루어낸 작품이다. 그 당시 아소카 제국의 영향력이 결코 중국에까지 미친 사실이 없는데도, 그 유골함 중 몇 개는 중국에서도 발견되었다. 유골을 갠지스 강물에 던지는 것은 단순히 그것을 분산 시켜 버린다기보다는 갠지스 강에 내재된 신성과 동일시하는 것임을 무엇보다 주목해야겠다. 힌두교 경전에서도 "사람의 뼈가 갠지스 강물 속에 잠겨 있는 한, 그 사람은 브라마의 세계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리라".고쓰인 문구를 찾아볼 수 있다. 사실상 붓다와 스투파의 관계처럼, 힌두교 신과 신성한 강물의 관계 속에는 신성한 인물과 신성한 장소를 동일시하는 사상잉 들어있따. 스투파는 단지 붓다의 상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붓다 자신이기도 하다. 불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특히 네팔에 있는 스와이얌부의 스투파는 이런 우리의 생각을 분명하게 뒷받침해 준다. 우선 네 바향에서 본 스투파의 얼굴 위에 그려진 눈들은 붓다가 무소부재한 존재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몇몇 참고자료에 의하면, 이 스투파의 형태 안에는 좌상한 거대한 몸집의 붓다가 내재하고 있다고 하다. 말하자면 스투파는 우리를 바라보는 붓다를 '건축물화한 신체'로 표현한 셈이다. 인도학을 연구하는 폴 뮈스(Paul Mus)는 이렇게 말한다:"무덤은 죽은 자가 거처하는 장소라기보다는 오히려 죽은 자의 몸을 대산하는 일종의 인공적인 신체, 즉 장례의 '우주적 인간' 이라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고인의 삶을 지속시키는 신비로운 실첵 존재한다. 생전에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은자는 무덤이라는 새로운 육신을 입는다." 만일 스투파가 하나의 신체라는 그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뒤집어 말했을 때, 신체는 곧 스투파이자 무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거대한 크기의 스투파들은(스투파 주변에 늘어선 돔은 중국에 들어와서는 탑이 되었다)고대 그리스인들이 죽은 자의 분신이라 여겼던 묘석들을 콜로소이라 불렀던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 스투파들 주위에는 흔히 소형의 스투파들이 발견된다. 이들 중에는 종종 죽은 자의 벼를 태우고 남은 재에 찰흙에 섞어 만든 것도 있다. 왕족이나 불자가 아닌 평범한 죽은 자들의 분신인 이 소형 유골함들을 스투파 주변에 매장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자가 해방을 어덱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숭배받고 있는 스투파 중에 가장 거대한 것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바라부드르(Barabudur) 스투파일 것이다. 불교가 관념론을 벗어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거대한 스투파를 만들어 유골을 숭배하는 데 있다. 실제로 스투파 안의 유골에 내포된 붓다으 ㅣ현존성은 생전의 붓다와 같은 효력을 지닌다. 불교는 열반의 종교이기 이전에 스투파의 종교이다. 열반에 들고자 하는 소망과 눈에 보이는 스투파 숭배, 이 두가지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다. 쉽게 말하면, 열반에 들어 사라져 버린 붓다가 동시에 스투파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유골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붓다의 양쪽 송곳니이다. 그 중 하나는 스리랑카에 있고, 다른 하나는 수수께끼 같은 경로를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으로 갔던 송곳니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불교계에서 서로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 역사의 뒷이야기에 소재를 제공해 주는 또하나의 유골로서 붓다의 손가락 뼈를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황제들은, 영적 능력과 정통성의 원천으로서 굉장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는 이 유골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정통파 유학자 한유는 황제가 황제답지 않게 맹목적 신앙에 빠져있다고 분개한 바람에 819년에 추방당하고 말았는데, 그의 주장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 한낱 미개인에 지나지 않는 붓다가 살아 생전에 중국에 왔다면 감히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물며 죽은 지 오래 된 지금에 와서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다면 부패의 유물인 썩고 마른 그의 뼈 한 조각을 궁전에 들여오라는 명령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매우 지성적이었던 한유는 황제의 열성을 비웃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러나 붓다의 유골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열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마침내 불교 성자들의 유골까지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일반적으로 '유골'이라고 번역되는 산스크리트어 사리라(Sharira)(사리)는 좀더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리는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작은 조각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붓다나 불교 성자들을 화장했을 때만 사리가 나온다고알려져 있다. 성자들의 시신이 화장되는 순간, 그간의 명상을 통해서 얻어진 능력들이 생링학적 차원에서 변화를 맞으면서, 오색영롱한 빛을 발하는 단단한 구슬로 표현된다고 생각되었다. 폴 뮈스는, "육체를 구성했던 유골은 생기를 지닌 살아 있는 존재이다."라고 말한다. 의심 많은 한 한 황제가 시험삼아 붓다의 사리를 망치로 때려보았지만 결코 부서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슬'같은 유골조각의 수는 4세기부터 계속해서 즈가하기시작했다. 성자로 추앙될 만한 불교 초기의 고승들을 화장했을때는 단지 몇 개씩만 나왔던 사리들이, 1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한 사람에게서 100여개씩이나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는 승려가 불경 외우는 것을 듣고 따라한 앵무새를 화장했을 때도 사리가 나왔을 정도라니! 사리가 나오는 것을 어렵잖게 보게 되고, 그것을 손에 넣는 일도 용이하게 된자 사리를 거래하는 장사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사리의 진가가 그만큼 떨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겨로가이다, 더욱이 화장 후에만 나오는 것인 줄 알았던 사리가, 신실한 믿음을 보여주는 행위 뒤에도 기적적으로 나타나는 일이 간혹 생기자 그런 분위기는 더욱 짙어져 갔다. 결국 이처럼 '성물의 증가'현상을 목격하게 된 유학자들의 '이성적인'항의가 드세어지고,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론도 저지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유골의 존재는 살아 있는 붓다의 존재와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유골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고인을 추억하게 해주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그것은 고인이 생전에 지녔던 모든 힘을 그대로 간직할 뿐 아니다. 그것은 고인이 생전에 지녔던 모든 힘을 그대로 간직할 뿐 아니라, 산자들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시켜 준다. 유골 앞에서 신자들은 자신이 붓다 앞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사실은 인도의 경전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수많은 경전을 통해서도 확인한다. 불자들이 붓다의 유골 앞에서, 혹은 유골을 담거나 여러 상징적 의미를 갖는 스투파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거나 해를 가하는 경우도 흔히 있다.
종교적 매저킴즘을 보여주는 이런 행동들은 첫눈에 비정상적을오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알고보면 성체변황이라는 논리에 따른 행동이다. 한유는 이런 종교의식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신자들이 "자신의 피부를 불로 지져 그 안에 붓다의 뼈를 소유하였노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붓다의 유골 앞에서 행해지는 이런 자해행위는 단순한 희생제사가 아닌 듯싶다. 이런 행위는 붓다의 유골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다는 깊은 의미를 갖는다. 불자는 자신의 몸을 스스로 태워 육신을 정화시킴으로써 자신을 살아 움직이는 성스러운 유골로 변환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붓다의 유골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자신의 소유로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성체변환을 통해 이전부터 있었던 육체적 결함을 치료 받는 일도 있다. 우티산에 있던 스투파주위를 돌면서 불경을 외우던 환관이 그의 성기능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도, 말하자면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체변환을 꿈꾸며 자신의 신체를 훼손시키는 승려들 중에서 죽은 후에 성공적으로 미이라가 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는 희생을 통한 자기 보존이라는 양자 사이의 관계를 증명해 주는 예이다.
앞에서 우리는 화제를 드리는 관습이 불교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일본의 한 불교 연대기 작가는, 불자들이 이처럼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일을 단순한 분신자살과 혼동해서는 안된다고 못박는다. 이미 세상에 대해 죽었다고 볼 수 있는 세상을 포기한 자의 삶은, 사후에 시체를 화장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 죽은 자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포기한 자도 발로 자신을 정화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불은 썩은 요소들을 태우고 썩지 않는 육체, 곧 붓다의 육체를 만들어낸다. 마찬가지로 '육신을 입고 있는 붓다', 다시 말해 미이라가 되기 원하는 승려의 고행은 탈수와 건조를 통한 정화 의식, 즉 내면의 불의 제단 위에서 드려지는 제사라 할 수 있다. 자발적 미이라화를 시도하는 불자들처럼, 자신을 희생제물로 삼아 불태우는 승려들 역시 긴 단식기간에 들어간다.
유골을 남기는 또 하나의 독특한 방법은 자신의 피로 혈서를 쓰는 일이다. 그야말로 '피의 잉크'인 셈이다. 이 행위는 극단적인 헌신 행위로 설명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혈을 통해 붓다가 되고 자신의 육체를 영원한 성서로만들기 위한 방법론적인 기도라 할 수 있다. 또한 불화상을 그리기 위해 스스로 '채혈'하는 경우도 있다. 유골은 신심이 깊지 않는 일반 대중에게는 무엇보다 영적, 물질적 이득의 원천(두 양상이 서로 구별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이 된다. 유골은 그들이 열반에 들거나 혹은 정토에서 환생하도록 도와주기 보다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물질적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며, 민간신앙에서는 부적이나 호신품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숭배 대상이 된다. 14세기에 쓰인 한 일본 문서 중에는 유골 숭배를 통해 받는 복을 열거해 놓은 부분이 있다. 내용을 보면, 카르마(업보)를 써넣어주고, 행복을 증대시키며, 우호적인 신들의 보호를 받게 해주며, 여자의 출산을 쉽게 해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붓다가 되도록 보장해 준다고 한다. 또한 나라의 수호나 풍성한 수확같이, 집단적 차원에서 이득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여러 불교 연대기들은 기우제를 중시하고 있는데, 이 기우제 동안 유골에게 올리는 기도는 늘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유골들은 신자들의 신심에 대한 기적 같은 응답처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평신도들은 유골 숭배에서 받는 복을 붓다 숭배에서 받는 복과 똑같은 것으로 여긴다. 특히 유골 숭배를 통하여 아미타불의 정토나 아니면 그보다 덜 완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정토에 가장 가까운 미륵불의 극락(그곳에는 여자들이 있다!)에 태어날 수 있다. 라틴어로 애드 상크토스(ad sanctos), 다시 말해서 성자 무덤 가까이에 죽은 자를 매장하는 습관은 바로 이런 신앙에서 연유한다. 인도 불교에 있어서 이런 습관의 중요성이 이제야 인식되기 시작한다. 그와 같은 매장지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일본 구카이 능 주변에 발달되어 있는 고야 산 묘지일 것이다.
그러나 유골이 언제나 스투파 속에 보관되는 것은 아니며, 부적 형태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 부적들은 보통 다산신앙과 성질환 치료라는 목적과 관계가 있다. 그렇게 볼 때 미이라가 된 이후에 사람들의 신심의 대상이 된, 진언밀교의 한 고행승의 경우는 의미심장하다. 우리의 오리게네우스라 할 만한 불자는 영원히 욕마에서 벗어나, 창녀였던 옛 연인의 유혹을뿌리치기 위해서 스스로 자신을 거세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생각잖게도, 그가 자신을 유혹한 여인에게 주었던 고환이 그녀뿐 아니라 매춘가에 있는 그녀의 동료들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 일이 널리 알려진 후 그 고환은 한 사원에 경건하게 모셔져, 지금까지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숭배받고 있다. 이 이야기는 최근에 발견된 또 하나의 중요한 유골을 생각나게 한다. 정력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갖게 된 나폴레옹의 성기이다.그러나 다른 시대, 다른 풍속에서, 나폴레옹의 성기는 스스로 이 유골의 소유자라 주장하는 미국인 수집가에게 현재까지는 별다른 이득을 가져다 준 것 같지 않다. 이 사실은 어쩌면 이것이 가자임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닐까? 어쨋든 유골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볼 때, 특수하게 뛰어난 고인들과 친숙한 관계를 만들어내고 서자들을 섬기는 불교예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죽음을 다스리는' 한 방법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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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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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달 - 천양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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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2부 우리 민족의 뿌리
4. 토기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
뼈도 쓸 데가 있었네
이 시기를 마제석기시대라고도 한다. 돌을 갈아서 필요한 생활도구를 만들어 쓴 시대라는 뜻이다. 이와 함께 뼈와 뿔 따위를 갈아서 생활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흙으로 그릇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가장 획기적인 일이다. 이 질그릇을 흔히 토기라고 부르는데,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간석기(마제석기)는 이제 단순한 만듦새와 용도를 뛰어넘어 본격적인 노동도구와 생활용구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도구를 어로용, 수렵용, 농경용, 일상생활용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어로용으로는 그물추와 이음식 낚시축, 작살 따위가 중심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그물추가 가장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지름 2에서5센티미터의 납작한 강돌 양쪽 옆을 조금 떼어내어 그물의 실걸이를 만든 것이다. 이것을 그물에 매달아 물고기잡이에 사용했다. 이음식 낚시축은 뼈로 만든 낚싯바늘을 묶어 사용한 것이다. 주로 바다 고기잡이에 썼다. 수렵용으로는 창끝과 화살촉이 많이 사용되었다. 화살촉의 끝은 뾰죽한 모양으로 날카롭게 만들고 활대로 묶게끔 그 끈부분에 홈을 파놓았다. 창끈은 버드나무잎 모양과 삼각 모양등 두 종류가 있는데 화살촉보다 크다. 밑둥을 약간 파서 자루를 묶게 만들었다. 창은 가까운 거리에서 사냥할 때 사용했고 활은 먼거리 사냥에 사용했는데, 화살촉 끝에 식물성 독을 바르기도 했다.
농경용으로는 낫, 보습, 괭이, 도끼가 중요하게 쓰였다. 낫과 도끼는 물건을 베거나 자르거나 쪼갤 때 사용했고 보습과 괭이는 땅을 파거나 일굴 때 썼다. 당시의 농경용 도구는 오늘날 정해지는 도구의 원형으로 그 모양새가 비슷하다. 그전과는 달리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게 되어 끊임없이 농기구를 개발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상생활용으로는 끌, 대패, 자귀, 갈돌, 갈판, 발화석, 숫돌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이 도구들은 집을 짓거나 곡식의 껍질을 벗기거나 가루로 만들 때, 또 불을 붙이거나 돌을 가는 데 사용되었다. 일상생활용 도구는 가짓수가 많은 만큼 용도도 다양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돌을 필요에 따라 골라 쓸 줄 알았다. 괭이나 도끼를 만들 때에는 섬록암, 안산암 같은 단단한 돌을 골랐고, 활촉은 갈기 쉽거나 쪼개기 쉬운 편암, 점판암을 골라 썼다. 숫돌로는 잘 갈아지는 편암, 사암을 사용했다. 단순히 단단한 돌과 그렇지 않은 돌을 구분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나아간 것이다. 석기와 함께 골각기도 많이 썼다. 전에는 짐승이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뼈와 뿔을 그냥 내버렸다. 그러다가 뼈와 뿔이 단단하고 날카롭고 잘 썩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뼈와 뿔로 살촉, 창끝, 작살, 괭이를 만들어냈다. 이런 것들은 돌로도 만들었지만 송곳과 바늘은 뼈 외에 다른 재질로는 만들기가 어려웠다. 뼈로 만든 송곳으로 가죽 따위의 물건을 뚫었고, 뼈로 만든 바늘로 그물이나 옷을 잇거나 꿰매었다. 이 무렵에 쓴 바늘은 뼈를 가늘게 쪼개서 갈고 머리 부분에 실 끼우는 구멍을 뚫은 형태이다. 궁산리 조개더미에서 나온 뼈바늘의 경우 길이는 10에서13센티미터이고 굵기는 3밀리미터이며, 머리 부분의 구멍은 1밀리미터도 안 되었다. 골각기 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이 숟가락이다. 드물게 출토되는 숟가락의 너비는 대개 5센티미터 정도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숟가락보다. 조금 크다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이들은 이토록 정교하게 도구를 만든는 솜씨를 가졌다. 원숭이처럼 손으로 열매를 서툴게 따고 고릴라처럼 손으로 우악스럽게 물건을 움켜쥐던 상태에서 여기까지 오기에는 얼마만한 시간이 걸렸던가? 이제는 돌을 두드리고 갈아 도구를 만들던 수준을 뛰어넘어 정교한 바늘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모방에서 창조로
이제 토기, 곧 질그릇을 말할 차레이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은 모양이나 무늬가 매우 다양하다. 출토된 유물을 지역적으로 분류해보면 동북지방, 서북지방, 중서부지방, 남부지방으로 나눌 수 있다. 질그릇의 특징은 한 가지로 묶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지역에 따른 문화 영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 갈래는 시베리아에서 중서부지방을 거쳐 한강, 남부지방으로 내려가서 일본 규슈로 이어지고, 동북부지방 쪽은 두만강과 연해주지방과 관련을 가지며, 서북부지방은 요령성과 길림지방 계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최근 발굴된 이른민무늬토기와 간석기를 검토해볼 때 그 기원 문제를 두고 시베리아를 거쳐 유입되었다는 설을 부정하고 백두간을 정점으로 하여 우리나라 동북지역과 만주지역에서 납작밑토기문화를 가진 토착문화가 이른 시기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전자는 북쪽의 유입 또는 영향를 말하면서 독자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전면적으로 납작밑토기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은 토기문화가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여기에 '뾰족밑'이나 '납작밑'이니 하는 용어들이 나오는데 토기의 종류와 만드는 기볍, 과정 따위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토기는 쉽게 말해 흙으로 모양을 만들어 불에 구워낸 그릇이다. 그러니 석기가 타제에서 마제로 넘어오는 변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창조였다. 토기의 종류에는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덧무늬토기가 있다. 덧무늬토기는 융기문토기라고도 하는데 겉면에 진흙대를 말아 붙이거나 손 끝으로 표면을 눌러 돋워서 여러 형태의 무늬를 배합해 만든 질그릇이다. 덧무늬토기는 주로 남부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겉면에 빗살 같은 무늬를 찍거나 그어서 새겨넣고 점, 선, 원 따위의 기하학적 무늬를 배합해 만든 질그릇이다. 이 토기에 나타난 무늬가 얼핏 보면 머리카락을 빗질한 것처럼 보여서 즐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무늬는 빗질한 머리카락을 본뜬 것이 아니라 물고기뼈 따위의 여러 모양을 그린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토기는 북쪽에서 내려와 널리 퍼지면서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그릇 모양이 다르고 무늬도 차이를 보인다. 토기에 나타난 무늬는 그은 방향이나 모양이나 배합이 복잡하고 다양하여 이러한 틀을 제시하기가 매우 어렵다. 밑이 납작한 모양을 가진 것을 납작밑토기, 밑이 둥근 모양을 가진 것을 둥근밑토기로 부른다. 납작믙토기는 함경도와 평안북도, 둥근밑토기는 덧무늬토기 지역인 중서부지방에서 출토되고 있다. 그 중간 지역에는 이런 것들이 섞여 있다. 토기의 특징을 더 추적해보기로 하자. 우선 종류를 보면 큰 것은 독과 항아리가 있고 작은 것은 잔, 단지, 보시기, 바리, 사발 따위가 있다. 토기의 형태를 보면 목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손잡이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밑이 둥글거나 뾰족하거나 납작한 것으로 나누어진다. 용도를 보면 끓이는 솥, 담는 시기, 저장하는 뒤주와 같은 용구들이 있다. 또한 물과 같은 액체를 담는 그릇과 곡식 같은 낟알을 담는 그릇으로 구분된다.
아름다운 무늬를 넣어 토기를 만들어보자
질그릇을 만들 때 바탕흙을 그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바탕흙은 모래흙이나 진흙에 돌가루, 운모, 석면, 활석, 조개껍질 가루 따위를 섞었다. 바탕흙의 점력을 높이고 수축률을 줄여 일그러지거나 찌그러지는 것을 막아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모양이 완성되면 노천요에서 섭씨 700에서 800도의 열을 가해 굽는다. 구울 때 대기 속의 산소가 그릇 안으로 유입되어 겉면의 색깔이 갈색을 띠게 된다. 고온의 열을 가할 때 화력이 좋은 참나무를 썼을 것이라는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만드는 과정은 빚기, 서리기, 테쌓기로 나누어진다. 먼저 빚기를 알아보자. 보시기 같은 작은 그릇을 빚을 때는 진흙을 그대로 이개서 모양을 만들어 굽는다. 서리기는 단지 같은 조금 큰 그릇을 만들 때 꺽가래 보양으로 빚은 진흙을 길게 서려놓아서 그릇 보양을 이룬 뒤 굽는 방법을 말한다. 테쌓기는 독이나 항아리 같은 큰 그릇을 만들 때 테두리를 가락지처럼 둥글게 빚어 쌓아올려 그릇 모양을 만들어 굽는 방법을 말한다. 테쌓기로 빚어 만든 항아리 주에 두께가 0.6센티미터 정도로 얇으면서 높이가 60에서 70센티미터, 아가리의 지름이 50센티미터가 넘는 것도 발견되었다. 테쌓기 과정에서 무너뜨리지 않고 형태를 그대로 유지시켜 구워낸 솜씨는 지금 보아도 매우 정교하다. 이 솜씨는 훗날 도자기 제작술로 이어졌다. 질그릇은 분포된 지방에 따라 각각 특징이 다르다. 중서부지방에서는 빗살무늬 토기가 가장 많이 발굴되고 있는데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토기는 달걀을 반토막 잘라놓은 모양을 한 곧추 끝난 형태의 것이 많다. 겉면의 무늬는 점, 선, 원이 뒤섞여 가로세로로 놓여 있다. 이를 두고 기하학적 무늬를 배합했다고 말한다. 이 무늬는 그저 아무렇게나 찍찍 그은 것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는 암사동에서 출토된 것처럼 대부분이 둥근 모양이다. 둥근밑토기는 청천강 이남 곧 한강, 임진강 주변에서 많이 발견 된다.동북지방은 옹기 서포항과 나진 초도, 청진 통포동, 부산 두루봉동 등지에서 발굴되는 유물을 중심으로 그 특징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납작한 밑을 가진 바리, 대접, 사발, 잔 따위가 많이 발굴되었다. 겉면에는 생선뼈, 문살, 점줄, 타래, 번개 따위의 모양을 새겨놓았다.
이 지방은 서쪽으로는 중강 토성리, 남쪽으로는 신창 강상리 등지의 납작밑토기나 둥근밑토기 지대와 접하고 있다. 이는 이들 지방과 문화적 교류가 잦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납작밑토기는 러시아 연해주, 중국의 동북지방 및 두만강 북쪽주민의 이주 또는 접촉에서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낳게 했으나 앞에서 말한 대로 이것은 독자기원설과 서로 어긋난다. 서북지방은 신석기시대 초기의 유물이 별로 드러나지 않으나 목항아리, 굽다리접시, 바리토기들이 발견되어 이웃 지방과 구별된다. 중서부지방의 토기문화가 시베리아 계통 주민의 이주에서 온것이라면 이곳은 그 경로지대가 되며, 또 이웃해 있는 요동지방은 다른 지방보다 빨리 청동기문화가 꽃핀 곳이다. 그러나 인접한 지역과의 관계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남부지방은 빗살무늬토기를 쓰기 전에 덧무늬토기를 만들어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방은 부산, 김해, 통영, 여수, 그리고 서쪽으로 소흑산도, 동쪽으로 양양 등지가 포괄되는데 이곳에서만 돋을무늬토기는 융기선의 폭에 따라 덧무늬와 돋을무늬토기는 겉면에 화살 같은 줄을 돋웠고 양쪽에 손잡이처럼 구멍을 뚫어놓았다. 이런 모양은 다른 세 지방의 것과 사뭇 구분되는데, 일본 규슈지방에서 발견되는 무늬와 비슷하다고도 한다. 따라서 일본과 교류하는 가운데 독특한 토기문화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고 있다.
질그릇이 지역에 짜라 개별적인 특징을 갖는 것은 계통을 달리하는 다른 문화의 주민들이 각기 그 지역에 정착해 살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와 달리 전체적으로 따져 신석기시대 초기부터 토착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질그릇의 모양새와 만듦새를 알아두면 우리나라 박물관 진열품의 감식 안목을 높일 수 있다. 그릇은 고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이렇게 발전된 질그릇은 농업 발전을 통한 생산경제를 그 배경에 두고 있었다. 추위와 더위를 어느 정도 가릴 수 있는 움집에서 항아리를 화덕 옆에 두고 곡식을 가득 담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투가리 같은 그릇에 곡식과 물을 부어 화덕 위에 올려놓고 밥을 짓는 정경은 확실히 삶의 질을 높인 모습이다. 돌로 만든 솥은 불을 오래 지펴야 하고 고기를 삶거나 구울 때 내용물이 튀어서 화식 도구로는 적절하지 못했다. 돌그릇은 단단해서 만드는 데도 품이 많이 들고 무거워서 옮기는 것도 어렵다. 반면에 질그릇은 대량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고 크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질그릇은 바로 정착농업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정착농업이 생산경제의 중심을 이류면서 식량 확보의 원천이 되면 자연스레 농경문화가 이루어진다. 이 시대 개량된 석기와 골각기와 질그릇은 농경문화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토기문화는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후손에게 물려준 큰 선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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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1. 달리는 부처 기사
달리는 부처 기사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쯤 수유리에 있는 화계사에 볼일이 있어 택시를 탔을 때의 일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한여름, 빗줄기가 사정없이 옷소매를 적시고 있었다. 마침 빈 택시가 내 앞에 와서 멈춰섰다. 다행스런 마음으로 차 안에 앉자마자 택시 기사는 나를 알아보고는, “아이고, 삼중 스님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하고 반겼다. “많이 젖으셨네요. 이것으로 우선 빗물을 닦으셔야겠습니다.”하고 하며 자신의 수건을 건네더니, 그는, “스님, 오늘 모처럼 이렇게 제 차에 타시게 됐으니 저로서는 행운입니다. 부디 저를 위해 법문 한말씀 해주시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다니다보면 나를 알아보는 기사분들이 더러 있고, 좋은 말을 들려 달라고 청하는 이들도 가끔 만나게 된다. 하지만 `법문`이라는 불교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불교에 관심이 많거나 아니면 불교 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적인 얘기라면 몰라도 짧은 시간에 느닷없는 법문이라니... 나는 화제를 바꿔볼 양으로, “택시 운전을 하신 지는 몇 년이나 되셨는지요?”하고 물어보았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지요.“ 내가 탄 택시는 개인택시가 아닌 회사택시였다. 내 상식으로 볼 때 택시 영업을 5년 정도 하고 나면 대형 교통사고를 내지 않는 한 으레 개인택시 영업을 할 수 있는 면허가 나온다고 알고 있다.
“오래 되셨군요.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운전을 하시다보면 사고도 한 두번쯤은 내셨겠네요. 그렇지 않고서야 20년 경력의 운전자가 아직도 회사택시를 몰고 다니시다니요?”
내가 이렇게 묻자 그는 빙긋이 웃으면서, “아닙니다, 스님. 저는 20년간 운전하면서 아직 한 번도 사고를 낸 적이 없는 무사고 운전자랍니다.” “그렇다면 그간 수입도 꽤 되었을 터인데 왜 아직도 회사택시를 몰고 다니시는 겁니까?”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했지요. 저보다는 남들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요. 제가 받으면 남들이 못 받게 되지 않습니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남들은 개인택시 면허증을 받지 못해서 야단들인데... 당신 미친 사람이오? 아니면 당신이 무슨 성자라도 되오?“ “저는 부처가 되려고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갑자기 말문을 잃었다. 불가에서 `공부한다`는 말은 곧 `수행을 위해 정진한다`는 뜻으로, 일반인들이 보통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용화사 전강 스님 아시지요? 그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전강 스님 이라면 25세에 만공 선사께 법을 인가받고 법맥을 이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유명한 선사이다. 평생을 불철주야 목숨을 아끼지 않은 수행과 고행으로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가신 전강 선사다.
“그분을 어떻게 뵈었습니까?”
나는 더욱 놀라서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얘기를 들려 주는 것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햇병아리 택시 운전기사 시절, 하루는 허름한 평복을 입고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 한 분이 그의 택시에 타셨다. “젊은이가 운전하느라 고생이 많구먼. 운전수 양반, 운전 잘해?” 말투나 행색으로 보아 시골 장터에서 흔히 마주치는 어느 촌로였다. 그는 무심코, “할아버지, 제가 이래봬도 운전 하나는 잘하지요, 걱정 마십시오.”라고 으쓱대면서 대꾸하였다. “아니, 내 말은 마음 운전을 잘하느냐고 물은 게야.” “...?” “물론 젊은 운전수 양반은 쇠 다루는 운전을 잘하겠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운전이야. 마음을 걸리지 않게 써야 진짜 운전을 잘하는 게지.”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는 도중에 그는 그 촌로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면서 어느새 가슴 한 구석이 환한 지평으로 열려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그 노인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한 번 꼭 뵈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어르신, 어디에 사십니까?”하고 공손하게 여쭤보았다. ‘저 위쪽 절에 살아. 젊은이가 나를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게나.“
그때부터 그는 어렵고 힘들 때마다 자주 절을 찾았다. 노인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듣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돌아오기를 몇 번, 차름 자신도 모르게 그분에게 이끌려 자주 가게 되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절에는 신도들이 구름떼같이 몰려왔고, 자신이 택시에 태워드린 초라한 행색의 그 노인을 보고 `큰스님`이라고 부르며 다투어 엎드리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그 절의 스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르신, 왜 어르신한테 그냥 `스님`이 아니라 `큰스님`이라고 부르는 거지요?” “그게 이상한가? 그건 내가 이 절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게지. 별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야.” 그분은 태연히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평생을 무애행으로 살다 가신 전강 스님. 그분은 생전에 많은 얘깃거리를 남기고 가신 분이다. 스물세 살에 견성하고 우주의 이치와 생의 본질을 터득한 뒤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무애행으로 한때는 해인사 홍도여관에서 머리에 수건을 질끈 매고 아무 옷이나 걸친 채 심부름꾼 노릇을 하기도 했던 분이다. 어느 날 만공 선사가 전강 스님에게 물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네. 전강, 저 많은 별 중에 자네의 별은 어느 것인가?” 그러자 전강 스님은 바로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허우적거리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를 보고 만공 선사가 말했다. “옳다, 옳다.”
그는 지금 처와 자식이 있지만 여태 사글세로 살고 있으며 집에는 전화가 없다고 했다.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살기 위해 남모르게 재활원과 양로원의 불우한 이들을 돕고 사는 게 바로 자신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랐으나 나는 그와 이대로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우리 두 사람은 차에서 함께 내려 빈 공터를 찾아 서성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더 많은, 더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무엇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내어 깨달음(보리)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 나는 그가 바로 움직이는 부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지도 이 세상에는 보살의 화현이 많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를 만나 깨달을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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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작은고모 이야기
내게는 칠순이 훨씬 넘은 두 분의 고모님이 계시다. 을미년에 태어나 을희라는 이름을 가진 큰고모님은 20대에 혼자 되시어 유복자로 태어났던 외아들 내외와 함께 사시고, 무오년에 태어나 무희라는 이름을 받은 작은고모님은 열 평도 채 안되는 조그만 아파트에서 혼자 사신다. 그 분들에겐 나까지 포함해서 친조카가 14명인데 가르멜수녀원에 들어간 나의 언니와 나를 제외하곤 거의 다 결혼을 해서 20명의 조카손자, 손녀를 두셨으므로 어쩌다 두 분이 한자리에 모이면 화제의 대부분은 조카들에 대한 것이다. 아무개가 아무개를 닮았다느니, 어린 시절의 모습과 성격은 어떠했다느니를 비롯해서 마침내는 조카 예찬으로 끝나는 그 이야기들은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어떤 종류의 가족 모임이건 두 고모가 빠지면 30명이 넘는 조카세대가 너도나도 서운해 할 만큼 그 분들의 존재는 집안에 아늑함과 따스함을 더해 주는 온돌방과도 같았다. 특히 섬세하고 잔 정이 많은 작은고모는 아이 한 번 낳지 않고도 아이들 비위를 어찌나 잘 맞추는지 조카들의 집집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의 뒷바라지를 '시간제 보모'로서 기꺼이 맡아하곤 하셨다. 정든 고모할머니가 자리를 뜰라치면 아기들이 하도 야단스럽게 울어대는 바람에 그 분은 늘 안간다고 거짓말을 둘러대며 살짝 빠져나가시곤 했는데 그것이 또 마음에 걸려 즉시 아기의 집으로 전화를 걸면, 아기 엄마는 엄마대로 '고모가 너무 받자만 해주어 내 아이 버릇을 잘못 들이잖아요'라고 볼멘소리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들었다. 외할머니, 친할머니 외에도 또 다른 할머니가 계시다는 설명을 대충 알아들은 어떤 꼬마가 그분을 '또 할머니'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 '또 할머니'라는 별칭이 따라 다니는 나의 작은고모님, 두 번이나 어느 수녀원에 들어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90세 넘어서 돌아가신 나의 조부님을 오랫동안 모시고 사셨던 고모님, 한국전쟁 후의 어려운 피난 시절에도 그 분은 우리와 함께 사셨는데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추석에 하얀 인조에 붉은 물감을 곱게 들여 치마저고리를 만들어 주시던 그 정성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반찬이 귀했던 때에도 특이한 솜씨로 만들어 주시던 비빔밥,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 등은 나의 어머니를 앞질러 늘 고모의 몫이었다. 우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올라온 뒤 고모는 몇 년 동안 부산의 어느 성당에서 친구와 함께 전교회장을 하셨는데 나와 내 동생은 그 분이 기차 타고 서울에 오시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 당시 많지도 않은 월급을 쪼개어 고모가 우리에게 사다 주던 예쁜 옷, 운동화, 학용품 등은 얼마나 설레이는 기쁨의 선물이었는지, 단순하고 순수하지만 꼬장꼬장하고 직선적인 일면도 있어서 때로는 친지들로부터 '혼자 하니까 그렇지' 하는 핀잔을 받기도 하신 고모님, 혼자 살 필요가 없는데도 끝내 동정녀로 살기를 고집했다 하여 '자존심 강한 여자'로 여김 받으면서도 혼자의 삶을 당연한 몫으로 받아들이고 만족해 하시는 고모님.
검박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그 분의 방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을 때,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그래도 갖추어 놓고 사시라고 했더니 어차피 이 세상을 떠날 때는 두고 갈 물건들을 이것저것 복잡하게 들여놓고 싶지 않고 가장 적은 것으로도 흡족하다고 하셨다. '저 작은 옷장도 네 엄마가 쓰던 것을 하도 가져 가라기에 갖다놓긴 했지만..'하고 웃으시던 고모는 어느 날 내가 들고 간 내의 한 벌도 수녀에게 더 필요한 것이라며 극구 사양하셨다.
그토록 애정과 관심을 쏟았던 조카들도 이젠 다 커버리고, 각자가 사는 일에 바빠 왕래가 뜸해지더니 조금은 서운하고 쓸쓸해 하실 고모님, 돌아가신 후를 생각해서라도 친자식 하나쯤은 두도록 진작 결혼을 했어야 옳았다는 식으로 누군가가 말을 하면 이내 정색을 하시고 , '나에겐 처음부터 하느님이 전부였어. 첫사랑을 두고 마음이 갈리우고 싶진 않았거든' 하시며 어느 수도자 못지않게 맑고 어진 극기와 인내의 삶을 살아오신 고모님이시다.
이제 작은고모의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었지만 마음은 아직 소녀 같아 그 분이 바치는 기도 또한 맑고 청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기도 속에 나도 자주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고 든든하다. 며칠 전에 나는 어머니의 오래된 편지 묶음을 정리하다가 달필로 써내려간 고모의 편지 한 통을 발견하고 매우 반가웠다.
'펜을 들어본 지도 몇 년이 되었는지 까마득하지만 귀하고 귀한 우리 클라우디아 수녀이기에 펜을 들었지. 우리 서울은 올들어 눈이 두어 번 왔단다. 그곳은 하절뿐이라니 얼마나 싫증이 나며 희생이 많겠느냐. 하지만 주 안에서의 생활이라 별일도 아니겠지. 이곳은 할아버님 뫼시고 여러 댁 가족들도 별고 없으니 안심하여라. 네 편지 받으시고 많이 기뻐하시더라. 너를 다시 보게 될는지, 하도 오래 사시니깐 증손을 본다 하시며 웃으신단다. 나도 사흘이 멀다 하고 쌍둥이 보러 온단다. 2개월쯤 되니까 방글방글 웃으며 옹알이도 하는구나. 꼭 오래비 닮았어. 너도 닮고- 아주 귀여워. 뚱보가 된 오래비는 주일이면 등산을 간단다. 나는 오늘 신세계에서 노트 몇권 사 가지고 왔고, 엄마가 보내준다 했으니 두 분 수녀님 쓰세요, 네 동생은 지금 머리를 감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며 언니한테 편지도 못한다고 하는구나. 가뜩이나 잘 쓰는 글씨를 깔고 누워서 쓰니 엉망이구만. 할 말은 많은 것 같은데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안녕할까. 1970. 12. 13. 고모서.'
이것은 지금부터 20년 전 겨울, 내가 필리핀에서 수학할 때 어머니의 편지 속에 동봉했던 고모의 글인데 다시 읽으니 코끝이 찡해온다. 세월이 흘러 편지 속의 조부님은 내가 귀국하기 몇 달 전에 돌아가셨고 오빠네 아이들인 쌍둥이 조카들은 어느새 졸업을 앞둔 여대생일 되었고, 나의 여동생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조카들에 대한 사랑이 물씬 풍기는 이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오랜만에 서울로 전화를 걸어. "갑자기 고모가 보고 싶어 전화했어요." 했더니, "그래? 이 잘난 고모를" 하며 반가워하셨다. "고모, 꼭 오래 사셔야 돼요" 하니 "응, 고마워, 허지만 이제 살 만큼은 살았다고 생각해. 그분이 부르실 땐 미련 없이 떠나야지 뭐" 하셨다. 어쨌거나 가을 들녘의 들국화 같은 삶을 살아오신 고모가 안 계신 세상은 미리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돈다. 쌍둥이를 포함한 오빠네 네 아이들로부터 '작은고모'소리를 듣는 나는 나의 작은고모님처럼 사랑 많은 고모가 되기엔 부족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비슷하게나마 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곱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나 보내주셨고 축하받을 일이면 언제나 고모님의 카드가 일착이었음을 탄생에서 지금까지 감사드려요'라고 표현한 그 애들의 카드 속의 말이 진실일 수 있도록 앞으로도 한결같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고모가 되고 싶다. 어느 날 함께 길을 걷다가 문득 내 옆에 와서 팔짱을 끼며 고모를 기리는 '고모 song(노래)'을 만들어 부르고 싶다던 조카 진이의 말을 기억하며 나도 작은고모가 된 기쁨을 새삼 고마워한다.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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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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