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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506 호
단기 4341. 10. 4 (음력 9. 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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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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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일보 신인문학상
한국문학을 지켜나갈 신인발굴을 위해 15회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작품을 모집합니다. 당선과 동시에 기성문인으로 인정받는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은 역량있는 문인을 발굴하는 전국규모의 문단 등용문입니다. 신인들의 많은 응모를 바랍니다. ■ 횟수별 당선자 <1회> 윤장규 박대규 김호영 윤혜숙 <2회>김병기 김원림 한혜선 이태곤 <3회>설덕영 김재순 <4회>박희선 송승환 배수원 이영창 <5회>이은희 성혜석 안희정 배기훈 <6회>고완수 유은선 유성종 박혜영 이향숙 <7회>조원진 박연혁 이혜영 임선빈 <8회>유현숙 김유 진영옥 김은미 김영호 <9회>서상규 이윤경 이인주 <10회>박영석 황성진 <11회>하봉채 최진규 김광수 양영숙 <12회>박순서 이종태 문경희 최석희 <13회>김영식 김민영 이은재 <14회>양호진 최미희 윤남석 이하영
■ 모집 부문 ▲시:5편 이상(장편 제외) ▲소설:80매 이내 1편 ▲수필:20매 이내 2편이상 ▲동화:30매 이내 1편
■ 모집 마감:2008년 11월30일(당일소인 유효)
■ 당선작발표:2008년 12월15일 동양일보 지면
■ 시 상 - 각 부문별 당선작 - 시상식 시간·장소 추후 발표 - 응모작품은 미발표되거나 현상 응모된 바 없는 순수창작품이어야 함 - 당선작에 대한 저작권은 발표일로부터 3년간 본사가 보유하고 그 이후 작가에게 귀속함 ( 당선작은 1회 당선으로 기성문인 대우) - 심사위원은 심사발표시 명단 공개 - 응모작품은 반환하지 않으며 작품끝에 주소·전화번호·본명을 명기 - 봉투에 ‘00부문 신인상 응모작품’ 을 적을 것 - 가급적 컴퓨터 사용 바람
■ 보 낼 곳: (우)360-716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1070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담당자’ 앞 ■ 문 의 ☏ 043-211-000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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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문학동네어린이 논픽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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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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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재앙이 아니라 불편이다.(플로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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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글터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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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언어예절
아무리 ‘말부자’라도 들추어 부려쓰지 않으면 그 말이 앙상해지고 재미가 적어진다.
조심스러움, 바라고 비는 뜻, 당연하고 마땅함, 될 수 있으면, 그러하긴 해도 … 같은 뜻을 담고자 할 때 앞머리에 두는 말로 삼가·부디·마땅히·모쪼록·비록 …들이 있다. 이 밖에도 모름지기·무릇·애오라지·오직·더욱이·아무쪼록·하물며·제발·여하튼 …처럼 숱하다.
이들은 말마디나 문장 앞에 두어 뒷말의 벼리를 잡아주고, 앞말이나 상대가 한 말을 받아 물꼬를 돌리는 구실을 한다. 말 중간에서 숨을 고르고 말맛을 감칠나게 하는 구실도 한다. 요즘 들어 이런 재미를 느끼게 하는 말 쓰임이 드물어졌다.
대신, 그러나·그런데·그렇지만·하지만 …들이 든 글은 넘쳐난다. 꼬집자면, 숨길이 조급하고 글투가 메말라 어느 글이나 판박이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대저·도시·도통·설사·응당·필시·황차·설령 …처럼 낡은 투를 쓰자는 말은 아니다. 대화나 글 쓰는 환경이 넉넉해진 데 견줘 배려·격식·여유가 거추장스러워진 까닭일까?
“삼가 가르치시는 대로 하려니와 ~/ 삼가 큰뜻을 이루길 바라나이다/ 부디 몸조심하여라/ 부디 국민을 섬기겠다는 초심을 잊지 말고 ~/ 애오라지 피란 매양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니어니/ 무릇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대통령을 꿈꾸기 마련이다/ 모쪼록 입법기관인 국회의 입법취지에 부합하는 판결이 나와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진퇴가 분명해야 한다 …”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량, 양
많은 사람이 '세거나 잴 수 있는 분량 또는 수량'을 나타내는 한자 '헤아릴 량(量)'의 표기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량(量)'이 홀로 쓰이거나 말의 첫머리에 올 때 두음법칙이 적용돼 '양'으로 쓰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다. '양(量)이 많다, 양껏(量-), 양산(量産), 양자(量子), 양형(量刑), 양판점(量販店)' 등이 그 예다. 그런데 어떤 말의 뒤에 붙어 쓰일 때는 어떨까? 전부 '-량'으로 적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량(量)'은 어떤 말 뒤에 붙어 한 단어가 됐을 때 앞말이 한자어이면 '량'이되고 고유어나 외래어일 때는 '-양'이 된다. 이것은 '우리말 바루기' 60회(5월 28일자)에서 다룬 '-란(欄)'과 '-난(欄)'을 구별하는 규칙과 비슷하다.
가사량(家事量), 감소량(減少量), 거래량(去來量), 노동량(勞動量), 작업량(作業量) 등에서처럼 '量'이 한자어 다음에 붙을 때에는 별개의 단어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두음법칙을 적용하지 않고 원래의 한자음대로 읽어 '-량'으로 적는다. 반면 '구름양(-量), 벡터양(vector量), 허파숨양(-量)' 등에서처럼 고유어나 외래어 뒤에 올 경우는 한자어 형태소 '-量'이 별개의 단어로 인식되므로 두음법칙을 적용해 '-양'으로 적는다.
동포, 교포
정부가 재외동포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지만 중국·러시아 국적의 동포 등은 실질적 혜택을 누리기 힘들 것으로 보여 논란이 일고 있다. 흔히 '동포'와 '교포'를 같은 뜻으로 알고 있지만 의미가 다르다. '동포(同胞)'는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들로, 동일한 민족 의식을 가진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교포(僑胞)'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동포로, 거주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동포'보다 좁은 의미다. '동포'는 국내동포와 재외동포로 나뉘며, '재외동포'가 곧 '교포'다. 따라서 '재외교포'란 표현은 어색하고, '재외동포'나 '교포'라고 해야 한다.
교민(僑民)이라는 말도 쓴다. '재일동포' '재일교포' 모두 가능한 표현이다. 다만 미국의 경우 '재미교포', 일본의 경우 '재일동포'란 말에 익숙한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주국에서의 법적 지위 등 여러 면이 자연스레 반영된 결과다. 북한 동포를 '교포'라 하지 않는 것에는 남북이 한 나라, 한 겨레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중국·러시아 역시 '교포'보다 '동포'라는 말에 익숙한 것은 그들의 이주 역사나 처지를 반영해 우리의 핏줄임이 강조된 것이다. 같은 핏줄로서 이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해야 겠지만, 중국 동포를 '조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소수 민족인 우리 동포를 부르는 이름인데 우리마저 그렇게 부를 이유가 없다. 러시아(중앙아시아) 동포인 '고려인'(카레이스키←까레이쯔)도 마찬가지다.
용트림, 용틀임
예부터 동양에서 용(龍)은 봉황·기린·거북과 더불어 사령(四靈)이라 불려온 상상의 동물이다. 용은 특히 물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물속에서 살며 때론 하늘에 오르고, 비·바람·번개·구름 등을 일으킨다고 전해진다. 지난 3일 오전 용오름 현상이 울릉도 해상에서 2001년 8월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 용오름은 거대한 적란운(積亂雲·상승하는 저기압성 뭉게구름)이 발생해 지표면이나 해수면까지 기둥이나 깔때기 모양의 구름이 드리워지면서 구름 아래에 강한 소용돌이가 생기는 현상을 일컫는다. 마치 용이 승천(昇天)하는 모습 같아서 용오름이라 불린다.
미국에서는 육지에서 발생하는 것을 토네이도(tornado) 또는 랜드스파우트(landspout), 해상에서 발생하는 것은 워터스파우트(waterspout)로 구분한다. 용이 붙은 말 중에 자주 혼동해 쓰는 표현이 있다. 바로 '용트림'과 '용틀임'인데 발음이 똑같아 표기에 혼동이 생기는 것 같다.
'용트림'은 '거드름을 피우느라 일부러 크게 힘들여 하는 트림'을 말하고, '용틀임'은 '전각(殿閣) 등에 용의 모양을 그리거나 새긴 장식' 또는 '이리저리 비틀거나 꼬면서 움직이는 모양'을 의미한다. '비짓국 먹고 용트림한다' '발끝을 딛고 용틀임을 하며 날아오르는 용의 모습과 하늘의 구름 등이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형상화됐다'처럼 쓰인다. '용틀임'은 남사당놀이의 연희자(演戱者)들이 하는 땅재주 동작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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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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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제사
제사는 통합과 일치를 위한 의식인 동시에 배제와 분리를 위한 의식이기도 하다. 이런 의식들을 통해 산자는 죽은 자에 대해 연민과 애착을 표현하는가 하면 그들을 떠나보내고, 그들이 이승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게 만든다. 인도의 화장식은, 죽은 자가 신들과 조상의 세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주는(살아 생전에 그가 신과 조상을 잘 섬겼을 경우)마지막 제사이다. 이를 위해서는 가까운 친지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실, 육신을 벗은 영혼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처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죽은 자는 자신에게나 산 자에게 위험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런 그를 두 세상 사이의 불편한 위치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예전의 몸을 대신할 수 있는 육신의 형상을 다시 갖추어 주어야 한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처음 열흘 동안은 매일 그의 이름으로 쌀 한 공기를 제상에 올리는데, 매일 바뀌는 공기의 쌀은 육체의 각기 다른 부분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하나의 육신이 완성되는 열하루째 날에, 밥공기에 생기를 불어놓고 음식물을 바친다. 그러고 나면 죽은 자를 조상들에게 합류시키는 마지막 의식만 남는다. 이를 위해 죽은 자를 상징하는 한 공기의 쌀을 셋으로 나눈 후, 죽은 자의 부친과 조부, 증조부를 나타내는 다른 세 쌀 공기와 뒤섞는다. 그때 부터 영혼은 조상들의 나라를 향한 위험한 여행을 시작한다.
불교는 부분적으로 이런 장례의 관념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사후 처음 맞는 열흘이 49재 기간에 포함된다. 이 7주간 동안 죽은 자의 넋은 그를환생으로 이끌어주게 될 단계들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 첫번째 단계에 대한 묘사는 경전이나 상황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구절은, 영혼들이 중간세계를 거치는 동안 겪게 될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올바로 안내해 주기 위해 죽은 자의 머리맡에서 낭송하는 <티벳 사자의 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후세계에 관해 매우 공들여 만들어진 불교의 여러 개념들은 원주민 문화가 담은 개념들보다 우월하다. 10세기경에는 특히 일본에서 불교 신자들이 장례식을 엄숙히 치렀다, 승려들을 위해 규정된 의례가 평신도들의 장례식에도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구원의 길에서는 승려들이 세속인들보다 조금 앞섰지만, 그들도 대부분 죽음의 순간에 목표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결과적으로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통 불교 신앙에 따르면, 한 승려가 살아 생전에 실현할 수 없었던 각성에, 죽은 후 올리는 제사에 의해 도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은 제사의식을 평신도들에게도 보편화하기 위해서 우선 이들을 상징적인 비구나 비구니로 변형시키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것이 소위장례식에 앞서 치러지는 사후 계명식의 목적이다. 그 다음에 열반에 이른 여러 붓다와 신의 이름을 낭송함으로써 그들이 이루었던 선행의 효과가 죽은 자의 영혼에 전이된다. 그들이 이루었던 선행의 효과가 죽은 자의 영혼에 전이된다. 그들의 선행이 죽은 자의 카르마에 좋은 영향을 주고, 심지어 카르마를 아주 없앨 수 있기를 희구한다. 이 의식이 끝나면, 죽은 자는 상징적으로 붓다의 반열에 들어간다. 그리고는 고인을 기념하는 제사가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사후 33주년까지, 때로는 50주년까지도 이어진다. 마침내 위패가 사원으로 보내지면 그곳에서 불태워지면서, 죽은 자는 조상의 대열에 합류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개인은 가문의 한 무명의 존재로 화해버리고 만다.
정결케 하는 불
시체를 소각하는 화장의 기원은 모호하다. 이 장례법이 힌두교나 불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시체를 화장하는 의식이 고대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증거를 베트남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와 인도의 영향을 받은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시신을 화장한 뒤에, 남은 재를 신성한 강물에 뿌리거나, 유골함 혹은 스투파(사리탑)속에 넣어 보관하다. 그들은 죽음을 누구나 거치게 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보며, 죽은 자는 장례식의 불에 의해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 반면 중국 문화권에 속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시체를 매장한다. 인도의 성지인 바라나시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아마 갠지스 강 유역에 있는 화장터를 보았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를 목격했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비슈누 신이 태초에 고행을 한 덕분에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최초의 고행 장소가 바로 바라나시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종말에 불꽃 속에서 우주가 소멸될 장소도 역시 바라나시이다. 인간의 몸은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소우주라는 원리에 근거하여, 그 소우주를 최후로 불사르는 작업인 화장식이 바로 그 바라나시에서 매일같이 행해진다. 그러나 힌두교의 시각으로 볼 때, 이 세상의 종말은 최종적이지 않다. 종말 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재창조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죽은 자가 새로운 삶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태우고 남은 재를 갠지스 강에 뿌린다. 그 진흙투성이의 성스러운 갠지스 강 하류에서는 항상 수많은 남녀들이 경건한 마음으로 목욕을 한다. 힌두교 사상에서 화장은 희생제사이자 대단원, 재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불사조 같은 부활의 서곡을 의미한다. 따라서 화장은 일종의 우주기원론과 관계가 있는 의식으로서, 우주의 파괴와 동시에 재창조를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베다의 불의 제사에서 볼 수 있었던, 프라자파티 신에 의한 최초의 불의 희생제사를 재연한 것이다.
죽음은 생기가 육체를 떠나는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생기가 육체를 떠나는 순간은 일반인들이 믿고 있듯이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숨'을 내쉬고, 육체의 모든 기관이 기능이 멈추는 순간을 말하지 않는다. 그 순간은 바로 화장이 시작되는 순간이며,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장식을 집행하는 사람이 시체의 두 개골을 부서뜨림으로써 '생명의 숨을 내보내는' 순간이다. 죽음이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바로 생기가 떠난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죽음은 화장을 위한 땔나무 위에서 이루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호흡이 멈출 때 죽음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시신을 불태우는 관습은 바로 붓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붓다는 이미 죽기 전에 매장, 수장, 혹은 시체의 유기 등 그때까지 인도에서 행해지던 장례방법을 피하고, 자기식의 방식을 선택했다. 붓다에 관한 다소 전설적인 이야기에 의하면, 붓다가 열반에 들어간 지 7일 후에나 화장식이 행해졌다고 한다. 화장이 늦어진 이유를 설명해 주는 이야기들 중 하나는, 붓다의 계승자인 카시야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드디어 그 제자가 나타나자, 그때까지 아무리 불을 지피려 해도 붙지 않던 장례식용 장작에 저절로 불이 붙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화장은 처음에는 인도에서 온 불교 선교사들에게만 행해졌다가, 점차 중국인 승려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8세기경에는 불교 승려들 사이에서 하나의 규칙이 되어버렸으나, 그렇다고 해서 매장을 제치고 그 자리를 대신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화장은 인격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사고 방식에 거슬려, 유가는 이를 몹시 야만적인 관습으로 여겼다. 12세기에 다시 부흥한 유교사상은 평신도들에게 화장을 금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화장을 관습은 20세기 초까지 면면히 이어져왔고, 공산주의 덕분에 다시 회복세를 타게 되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화장이 8세기부터 가장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이는 승려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평신도들 가운데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승에 따르면 최초의 화장은 700년에 있었던 승려 도쇼의 장례식 때 행해졌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지토 황녀와 모무 천황 역시 화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왕실의 장례식에 매장법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세기에 신도교가 부흥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화장은 종교적일 뿐 아니라 실용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성행하는 장례법이 되었다.
화장이 끝나면 뼛조각과 재를 모아서, 유골단지 안에 분리해 담아놓는다. 유골은 장례식 후 49일 동안 절에 보관되었다가 그 이후에 땅에 묻는다. 폴 클로델은 1923년에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그 왕중에 살아남아, 끔찍한 재난의 산 증인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 후에 그는 자신이 쓴 책 속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도식을 묘사했는데, 거기에는 망자의 잔해가 지니는 중요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태우고 남은 재와 뼈, 뼛조각, 뼛가루 등을 곡식 담는 버들광주리처럼 생긴 큰 상자 속에 담아놓았다... 아기를 등에 업은 아주 몸집이 작은 여인과 찢어진 기모노를 입은 한 수련생이 죽은 자들의 무뎌진 주의력을 끌기 위해 손뼉을 친다... 아들을 잃은 한 남자는 아들의 재가 섞인 잿더미 가운데 잿가루 한줌을 집어선 입에 넣고 삼켰다. 이 뼈들을 모두 모아 불상을 만들 것이라 한다." 1985년에는 일본 상공을 날던 JAL기가 폭파된 사건이 있었는데, 양심을 저버린 상인들은 공중에서 사라져버린 승객들의 잔해가 남아있으리라 생각되는 끔찍한 장소에서 흙을 날라와 희생자들의 가족에게 엄청난 가격을 받고 한 줌씩 파는 장사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인도의 초기 불교도들이 환영에 불과한 '나'를 없애려는 소망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화장으로 보았던 것처럼 보인다면, 얼마 있지 않아 화장은 인도인의 사고방식에 더욱 근접한 또 하나의 상징적 가치를 지니기에 이르렀다. 즉 정화시키는 불로 육체를 재생시킨다는 가치이다. 중국에서 받아지기 어려웠던 화장이 일본에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두 문화 속에 뿌리박힌 근본적인 태도의 차이점을 말해 준다. 중국에서는 공산주의 체제가 오늘날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로 화장을 권장하지만, 종교적 가치와 전통적 사고방식에 집착하는 일반 대중에게는 별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불에 의한 다른 의식들
중국의 장례식에서는 종이로 만든 공양물을 바치는 관습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신들을 위해서는 금박종이를 사용하며, 죽은 자의 넋을 위해서는 은박종이를 사용한다. 집, 하인, 가축, 자동차, 냉장고, 텔레비전 등 사람과 사물을 종이모형으로 만들어 태우는 이 공물은 죽은 자의 물질적 안녕에 공헌한다고 믿는다. 축소된 모형들을 보이지 않는 세계로 보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죽은 자 곁에 두려는 것이다. 이 공물들은 불에 태워짐으로써 또 다른 현실을 위임받게 되며, 보이지 않는 세계의 정수로 변형된다. 장례식과 제사의 목적을 상징하기 위하여 만든 지전의 사용은 10세기경에 중국사회가 화폐경제화된 사실을 반영한다. 그 시대에 이르면, '사후 세계의 보물창고', 말하자면 죽은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필요한 돈을 빌릴 수 있는 기관인 '저승 은행'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것을 본다. 사자가 빌리는 부채의 액수는 그의 '기본적인 운명', '삶의 행복 요소', 즉 장수와 부귀를 결정한다. '대부 받았던'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 이르면 고인의 자녀들은 고인이 죽은 지 49일만에 그 부채를 갚아주어야 한다. 만일 죽은 자가 저승 은행에서 새로이 부채를 얻는 문제를 무사히 해결하기만 하면, 삶의 사이클은 다시 시작되고 새로운 삶을 제공받을 수 있다. 때문에 전생의 '빚을 갚고' 적절한 장례식을 치러줄 수 있는 효성스런 자손을 많이 낳고 기르는 일이 중국에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처럼 뚜렷한 상업주의적 관념은, 저승에서나 이승에서나 결국 돈이 행복을 만들어 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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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터 →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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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 이외수
아이야 오늘처럼 온통 세상이 짙푸른 날에는 지나 간 날들을 떠올리지 말자 바람이 불면 허기진 시절을 향해 흔들리는 기억의 수풀 시간은 소멸하지 않고 강물은 바다에 이르러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연락이 두절된 이름들도 나는 아직 수첩에서 지울 수 없어라 하늘에는 만성피로증후군을 앓으며 뭉게구름 떠내려 가고 낙타처럼 피곤한 무릎으로 주저앉는 산그림자 나는 목이 마르다
아이야 오늘처럼 세상이 온통 짙푸른 날에는 다가오는 날들도 생각하지 말자 인생에는 도처에 이별이 기다리고 있나니 한겨울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 그 아래 어깨를 늘어뜨리고 모르는 사람 하나 떠나가는 모습에도 나는 맨발에 사금파리 박히는 아픔을 배우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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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한국사 |
우리 민족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 이이화
제2부 우리 민족의 뿌리
1.백두대간이 솟구치다.
빙하기, 으스스한 동토
지금부터 200만 년 전쯤에 지구의 북반구는 3분의 1이 얼음에 덮여 있었다. 바다에도 얼음이 두껍게 덮여 있었다. 시베리아 땅은 거의가 얼음 덩어리였고, 태평양도 얼음 구덩이였다. 위도가 높은 지역의 온도는 지금보다 연평균으로 따져 섭씨 16도 정도가 낮았으며, 열대지방의 연평균 기온도 섭씨 3도 정도 낮았다. 참으로 으스스한 동토였다. 이 시기는 지구의 나이가 마지막 단계로 접어든 신생대였다. 신생대는 제3기와 제4기로 분류되며, 제4기는 다시 갱신세와 전신세로 나누어진다. 빙하기는 갱신세에 해당한다. 이 갱신세에 얼음이 밀려온 것이다. 그 다음에 온 전시세에 후빙기가 닥쳐와 오늘의 기온으로 굳어졌다. 빙하시대는 인류에게 또 한번의 엄청난 시련을 안겨주었다. 육지에는 거대한 빙벽이 우뚝 자리잡고 바다에는 빙산들이 둥둥 떠다녔으니 오늘날의 우리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빙하가 퍼진 지대에는 풀과 나무가 살 수 없었다. 풀과 나무가 살지 못하면 동물이 살아갈 수없다. 먹이사슬은 풀이나 나뭇잎을 먹고 사는 초식동물, 초식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육식동물, 초식과 육식을 함께하는 동물과 인간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동물들은 추위를 못 견대내기도 했지만 풀이나 나뭇잎을 뜯어 먹지 못해 먹이 사슬이 파괴되었다.
새로운 생존 방법을 찾아야 했던 동식물이나 인간들은 매우 바쁘게 움직였다. 유럽의 경우, 빙하기에 추위를 견디낼 수 있는 식물은 남쪽으로 이동하였으며 남쪽에서 자라던 식물은 더 따뜻한 적도 쪽으로 옮겨간 흔적이 남아 있다. 따뜻한 기후였을 때 살았던 상수리숲과 붉은 사슴, 말 따위가 사라지고 추운 지방에서 익숙하게 살아온 매머드(털코끼리)가 빙하지대에 생존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빙하기에는 동식물이 살아남기 위해 쉴새없이 이동을 계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는 꽃이 바람이나 벌을 통해 번식하고 나무들은 열매나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사실을 안다. 동식물들도 끊임없이 후손을 퍼뜨리며 서로 대화를 한다. 또한 나름대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덜 추운 곳에서는 침엽수가 활엽수를 밀어내고 주인 행세를 하였다. 곧 소나무 종류이다. 침엽수는 지구 위 식물의 할아버지였다. 지구가 따뜻할 때에는 활엽수가 온통 땅을 차지했으나 점점 추워지자 어쩔 수없이 살던 자리를 침엽수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활엽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갔고, 지극히 적은 숫자만 살아남았다. 이는 생태계의 변화를 가져왔고 먹이사슬이 파괴되어갔다. 많은 동물이 사라졌고 환경에 잘 적응한 일부 동식물과 인간들만이 살아남았다.
빙하 작용으로 지구 위 여기저기가 꽁꽁 얼어붙어 해수면도 낮아졌다. 많은 바다와 해협이 육지로 바뀌었는데, 그 해수면을 지금과 비교하면 최고 160미터에서 130미터까지의 차이를 보여준다. 땅의 면적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빙하기가 긴 터널처럼 변화없이 계속되었던 것은 아니다. 빙하기 사이사이에 간빙기가 있었다. 간빙기는 세 차례 반복되었는제 그 기간 동안에는 지금보다 기후가 따뜻했다. 이때에는 활엽수가 다시 육지를 뒤덮고 붉은사슴과 말들이 유럽 대륙에 나타났다. 어찌 유럽 대륙뿐이었겠는가. 아시아를 비롯해 모든 대륙이 이런 현상을 보였을 것이다. 다만 그 증거를 유럽에서만 찾아낸 것이다. 빙하기의 흔적을 아직 한반도에서는 제대로 찾지못했다. 다만 중국 땅에 나타난 빙하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나라 땅은 원래 오스트레일리아의 적도 쪽에 있다가 지각 이동에 따라 오랜 여행 끝에 북쪽에 자리잡았다. 이때 중국 쪽의 황해와는 완전히 연결되어 있었다. 황해안의 평균 깊이는 44미터, 최대 깊이는 103미터이다. 이는 빙하기의 최대 해수면보다 훨씬 높다. 한반도와 일본을 가로막고 있는 대한해협은 평균 깊이가 150미터이다. 이도 당시 최대 해수면보다 약간 높다. 또 동해도 일정한 기간에는 육지로 떠올랐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작성한 지질도에는 37만 년전에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있다.
한국과 중국.일본 땅은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룡이 지구를 지배하던 중생대에 우리나라에도 공룡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경남 고성군 명덕리에는 6킬로미터에 걸친 해안에 1억 년 전쯤의 공룡 발자국이 3천개 정도 널려 있고, 경남과 경북을 합하면 5천여 개로 집계되고 있다. 이 발자국들은 둥글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널려 있으며, 둥근 모양으로 지름 20센티미너 정도의 크기이다. 공룡 발자국 이외에도 하동 수문동 해안에서 공룡 알과 껍질 화석이 나왔으며, 이어 뼈, 이빨, 똥 등을 발견하였다. 이 일대는 공룡의 서식지로 세계 학계의 공인을 받았다. 공룡이 살던 시기에 한반도에는 계속 지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반도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백두대간이 생겨나고 소백산 줄기와 같은 습곡산맥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 수십 킬로미터에서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호수가 생기기도 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믿지 못할 것이다. 쥐라기에 이은 백악기에 호수의 형성과 함께 화산 폭발이 맹렬하게 일어났다. 적어도 지금의 일본 땅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몇백 배 능가하는 수준으로 화산활동이 전개되었다. 참으로 소란스럽고 겁나는 환경이었다. 이렇게 화산활동이 격렬했던 원인은 당시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붙어 있었고 또 태평양 지판이 대륙 지판 아래로 밀려들어가면서 생긴 균열 따위로 지각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벽을 거친 뒤에 한반도의 척추라 할 백두대간과 태백산 줄기가 솟아올랐다. 이 태백산 줄기로 인해 한반도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었으며, 강도 이런 지형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신생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태백산 줄기의 융기는 일본열도가 대륙에서 떨어져나가고 동해가 생겨나는 고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때의 지형에 따라 물고기 따위가 한반도의 동서로 갈라져 종자를 달리하였다. 민물고기는 크게 여섯 종류로 갈라졌다. 지금의 중국과 우리나라와 일본이 한 육지로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동식물들이 때로는 살길을 찾아 때로는 호기심으로 여기저기 넘나들었을 것이다. 황해와 대한해협 중간 중간에는 호수가 있어 서로 길을 트고 왕래할 때 쉼터가 되었을 것이다. 그 보기로 일본의 살모사는 한반도의 살모사가 분화해나 간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서 또 중요한 변화는 침엽수의 등장이다. 침엽수는 고생대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침엽수를 대표하는 소나무는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와 일본에 널리 분포되었다. 활엽수는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하고 말라 죽어 땅속의 목탄으로 남아 뒷날 땔감이 되기도 했다. 기후 조건의 변화에 따라 동식물은 러시아의 연해주와 만주일대, 한반도, 중국, 일본을 오르내렸다. 추울 때에는 북쪽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이동을 했다. 활엽수가 먼저 이사를 하고, 침엽수는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도저히 더 살 수가 없으면 자리를 옮겼다. 풀들은 죽거나 이미 이사를 떠난 지 한참뒤였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호랑이 같은 육식동물들은 노루 다위의 초식동물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고, 토끼나 노루 같은 초식동물들은 풀을 찾아 더 남쪽으로 내려왔다. 다시 따뜻한 간빙기가 닥쳐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고향을 찾아 이동을 거듭했다. 나무들 중에 활엽수가 먼저 북상을 해서 자리를 잡아간다. 동물들도 마찬가지로 내려온 길을 따라 반복해서 옮겨간다. 이와 같은 반복은 여러 차레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추운 지방에서 살아가는 북방계동물인 매머드의 어금니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발견되었으며, 이어 매머드 화석이 길주와 화대군에서 발견되었다. 또 원숭이, 쌍코뿔이의 화석이 북위 40도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동물들이 뒤섞여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도 구석기인들이 살았다.
그러면 한반도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북한에서는 60만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 원숭이를 공동 조상으로 한 인류가 살아왔고 이들이 진화를 거듭하면서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본토기원설이다. 남한의 학자나 세계의 학자들은 이 주장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한국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근거는 유물이 없다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 구석기시대 인류가 살았다고 확인된 것은 1929년 북경원인의 머리뼈를 발견한 뒤였다. 그 뒤 몽골과 일본, 뒤이어 연해주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일제는 1935년 함경북도 온성 강안리에서 갱신세에 속하는 동물화석과 석기 따위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이 유물은 참으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거치며 조사되었다. 일제 당국은 이곳에 철도를 놓다가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에서 여러 점의 동물뼈도 함께 나왔다. 일본 학자들은 자세히 조사하지 않고 신석기 유물이 함께 나온다고 하여 구석기시대의 것이 아닌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단정했다. 그뒤로 계속 우리나라에는 구석기시대가 없던 것으로 인정하여왔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여러 학자들은 서기의 떼어낸 흔적이 단순하다는 점과 날 부분에 잔손질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 퇴적 상황과 동물화석의 특징을 밝혀 강안리 유물을 구석기시대의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를 세계 학계가 공인함으로써 한국의 구석기시대를 인정받았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몽골 계통이라거나, 중국 대륙과 황해가 연결되어 있을 때 중국에서 들어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왔다. 그런데 근래 인류학자들은 '분자 시계'로 불리는 DNA조사(각 민족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비교하여 그들의 조상이 어떻게 갈라져나왔는지 추적하는 방법)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곧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7만 년 전부터 5만 년 전쯤 몽골에 도착했다. 이들은 세 갈래로 퍼져나갔다. 한 갈래는 중국 대륙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한 갈래는 러시아와 베링 해협을 거쳐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퍼져나갔다. 또 한 갈래는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한민족과 일본족은 중국의 한족과 달리 유전적으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학설을 믿는다면 우리 민족은 몽골 계통이 된다. 초기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갔을까? 학자들은 추운지대에 살던 동물을 먹거리로 하던 구석기 사람들은 동물들이 따뜻한 후빙기를 맞이해 사라지자 함께 어디로 가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설은 확실한 증거가 없다. 이런 단절보다는 구석기 사람들이 새로운 기후와 환경을 맞이해 신석기문화를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만 년 전 후빙기의 우리나라 환경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그리 생소하지 않다. 후빙기에는 빙하 작용이 사라지고 간빙기나 간빙기 사이사이에 잠깐씩 나타나는 빙간기도 더 이상 반복 되지 않았다. 사계절이 뚜렷한 오늘날의 기후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후빙기에도 혹독한 추위와 따뜻안 기후가 열 아홉 차례나 반복되었다. 참으로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이처럼 변덕스러웠던 기후에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동양권에서는 은나라 이전부터 연대를 60간지로 따져 사용하었다. 여기의 지지는 열두 동물을 나타내는데 상상의 동물인 용과 쥐, 소, 호랑이, 토끼,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이다. 이 동물들은 후빙기 이후 살아남아 사람들과 친근하게 되었을 것이다. 코끼리나 악어 같은 남방계 또는 열대계 동물은 들어 있지 않다. 이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주는 동물인 말, 소, 닭, 개도 이 무렵부터 기르기 시작했을 것이고 많은 영양을 공급하는 밤과 대추도 이때부터 재배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런 것들은 벼농사 이전에 사람들과 친근해졌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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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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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굴비맛 보셨습니까 - 박삼중
1. 달리는 부처 기사
어느 날 만공 선사가 전강 스님에게 물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네. 전강. 저 많은 별 중에 자네의 별은 어느 것인가?” 그러자 전강 스님은 바로 땅바닥에 엎드려 손을 허우적거리며 별을 찾는 시늉을 해보였다. 이를 보고 만공 선사가 말했다. “옳다. 옳다.”
모든 일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스님, 호랑이띠는 정말 무서운가 보죠?” 어느 날, 자리에 앉자마자 택시 기사를 뜬금 없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아니, 왜요? 호랑이띠라고 무섭겠습니까?” “아닙니다. 정말이지 호랑이띠는 무섭습니다. 바로 제 마누라가 그렇지 뭡니까?” 백미러를 통해 바라보니 쉰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나이 지긋한 기사분이었다. 모처럼 속인이 아닌 가사를 걸친 나를 보니 속내를 얘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 또한 무료하지 않게 차 안에서 잠시 동안 기사분의 말 상대나 해줄 요량으로 웃으면서 가만히 앉아 얘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렸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여전히 벙글벙글 웃으면서 그 기사는 자신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결혼한지 30년이 넘도록 그들 부부는 원수처럼 서로 보기만 하면 다투고 미워하고 심지어는 마주치기가 무서울 정도로 사이가 나빴다. 시장에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부부는 오백생의 인연으로 만난다는데, 무슨 전생의 악연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 부부는 서로 마주보기만 하면 트집 잡고 원수처럼 으르렁대기 일쑤였다. 신혼 초부터 시작된 다툼은 한 달, 두 달이 지나 한 해, 두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져 서로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더해만 갔다. 결국 싸우다 못해 아예 남남으로 사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 이혼을 결심하고 도장을 찍으려고 하기를 수십 번, 그러나 자식 때문에 망설이고 또 싸우고 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집이란 아예 생각하기도 싫은 지옥처럼 여겨졌다는 것이다.
한번은 택시 일을 그만두고 궁여지책으로 자그마한 식당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더욱 진퇴양난. 아침 저녁으로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보니 아내와 그는 사사건건 부딪히기 일쑤였다. 일을 하자면 자연 말을 해야 하고 서로 일을 도와야 하는데, 다툼의 도가 지나치다보니 만나기만 하면 서로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으르렁대고 식당안이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식당이 잘 운영될 리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핸들을 잡게 됐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면 낫지 않겠는가, 남들 보기가 창피하다.`하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이가 지긋하고 점잖게 생긴 중년의 어느 여자 손님을 태우게 됐는데 근처에 있는 절로 가자고 했다. 이 기사는 무심히, “손님. 절에는 무엇하러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여자 손님은 “마음을 바꾸러 가지요.” 하더란다. “그래, 절에 가면 마음이 바뀝니까?” “그럼요, 외로운 마음도, 괴로움 마음도 겨울눈 녹듯이 사라지고 편안해 진답니다.”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이 기사는 무턱대고 그 손님을 따라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절법도 염송도 모르지만, 자꾸 절을 하다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부처님, 제발 이 생지옥 같은 내 마누라 마음 좀 바꿔 주십시오!` 난생 처음 진지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부르며 간절한 마음이 되어 절을 하고 또 하고... 그러자 이상하게도 자신보다는 아내에 대한 연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오자, 아내는 평소처럼 사소한 일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도 불같이 버럭 화를 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가 측은하게 생각됐기에 꾹 참고서, “여보 내가 잘못했소! 당신이 틀린 게 아니라 다 내가 잘못한 탓이오.”라고 말하면서 무조건 빌었다. 그러자 영문 모르는 아내는 그러는 남편의 행동을 보더니, “내가 살다가 별일을 다 보겠군. 당신이 나한테 이처럼 싹싹 빌기를 하다니! 당신, 낮에 쥐약이라도 먹었수?” 라고 빈정대면서 그의 진심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무슨 일로 싸움을 하든지 이제부터는 아내에게 먼저 져주기로 결심을 했다. 그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한 달 간을 그렇게 하자 아내도 차츰 누그러지면서 그의 진심을 깨달았는지, “그래요, 나도 생각해 보니 잘못한 게 많수.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이제 그만 싸웁시다.” 라며 남편의 손을 잡았다.
그 뒤부터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만큼 사이좋은 부부가 되었다고 한다. 닫혔던 마음의 문을 열자 서로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새로운 제2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스님! 마음 한 번 바꾸니 이처럼 세상이 편한 것을 제가 왜 진작 몰랐었는지요?”
그 기사는 내게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을 끝냈다. 그렇다. 이 기사분의 말처럼 세상사가 다 마음 먹기에 달렸다. 슬픈 일도, 아무리 괴로운 일도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라고 한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어느 짚신 장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 어느 동네에 짚신 장사를 하는 큰 아들과 우산 장사를 하는 작은 아들을 둔 노모가 있었다. 이 노모는 날이 맑으면 우산이 팔리지 않는다고 작은아들을 걱정하고, 비가 오면 짚신이 팔리지 않는다고 큰아들을 걱정하여 일 년 내내 걱정이 떠날 날이 없었다. 하루는 스님 한 분이 탁발을 왔다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시름에 잠겨 있는 이 노모를 보고, “무슨 근심이 있으신 모양인데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스님, 나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두 아들 때문에 한시도 근심이 떠날 날이 없어 마음이 늘 괴로우니 이를 어찌하면 됩니까?”하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잠시 이야기를 듣고 난 스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마음을 바궈보세요.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이 잘 팔리니 즐겁고, 날이 좋으면 짚신이 잘 팔리니 기쁘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면 일 년 내내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자 노모는 그때부터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삶이란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도 마음이요, 가장 약한 것도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마음`이란 것은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수행자들이 수행을 할 때 이 `마음 공부`를 중요시했다. 모든 깨달음이란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재미난 일화 한 가지가 있다.
하루는 어느 노 스님이 제자와 산행길에 올랐다. 그런데 제자가 힘이 들었던지 자꾸만 스님 뒤로 처지는 것이었다. 노스님도 별 어려움 없이 산길을 오르는데, 젊은 제자가 오히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힘겨워하는 모습이라니...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은 제자를 달래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스님, 이제 더 이상은 못 가겠습니다... 조금 쉬었다가 가시지요!”
산중의 어느 마을에 당도하자 제자는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침 그때, 아리따운 산골 처녀 하나가 물동이에 물을 가득 이고서 저쪽에서 오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제자도 목이 마르던 참이었다. 처녀가 다가오자 스님은 물 한 그릇을 청했다. 그러자 처녀는 다소곳이 물항아리를 내려 놓은 다음 물을 뜨려고 엎드렸다. 바로 그때 갑자기 스님은 처녀에게 달려들어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악!” 노스님의 난데없는 입맞춤에 놀란 처녀의 비명소리에 놀란 것은 오히려 제자 쪽이었다. 물항아리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여기저기서 마을 사람들이 몰려나와 이 광경을 보더니 사태를 눈치챘다. “저놈들 잡아라!” 마을 사람들은 큰소리로 외치며 두 사람을 뒤쫓아오기 시작했다. 여기서 만약 잡힌다면 두 사람 다 끝장날 판이었다. 스님과 제자는 산 속으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났는지 스님과 제자는 재빠르게 가파른 산비탈을 뛰어 넘었다. 얼마나 달렸을가, 마침내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스님은 숨을 몰아쉬며 제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봐라, 힘들지 않니?” “힘들다니요?”
스승의 물음에 제자는 무엇이 힘드냐는 듯이 태연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스님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봐라, 이놈아! 내 너에게 마음 먹기에 따라서 라고 말하지 않았더냐? 네놈 꼴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아느냐? 아까는 힘들다고 엄살을 떨더니, 도망칠 땐 네 스승을 앞질러 달리지 않았더냐? 이제보니 네 놈이 스승 팽개치고 달아날 놈이로구나, 허허허!” “...!”
잠시 멍청히 서 있던 제자는 곧 깨닫고 나서 스승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노스님은 제자에게 마음 공부를 가르칠 요량으로 처녀의 입술을 잠깐 실례했던 것이다.
`모든 일의 근본은 마음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법구경`의 말씀이 있다. 모든 선과 악의 주인도 다 마음이라고 했다. 선한 일도 악한 행위도 마음에 의해 지어지는 결과인 것이다. 세상을 보는 이의 마음이 편하면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인생이라 해도 괴롭게 여겨지지 않는 법이다. 지금 내 마음은 어떠한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 되도록 참된 마음을 지니도록 하자. 우리 모두 지혜로운 마음의 눈을 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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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수필 |
꽃삽 - 이해인
첫째 묶음 : 고독을 위한 의자
새에 대한 명상
새는 언제나 내 그리움의 대상이다. 강이나 바닷가의 모래밭에 찍힌 물새들의 가늘고 조그만 발자국들을 보면 그 자리에 새가 없어도 반갑고, 지금쯤은 그 새가 어디에 가 있는지 궁금해지는 마음이다.
어떤 분의 수필에서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들이 어디에 쉴 곳이나 제대로 있는지 측은히 여겨진다'는 구절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새들은 항상 자유의 상징으로 부각되지만 새들 하나하나는 자유로운 그만큼의 고독을 안고 사는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나도 마음이 울적해지거나 이기적인 욕심이나 미움, 절망의 어둠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될 때 문득 하늘의 새들을 그리며 기도하면 밝아지는 기분이 되곤 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귀천'의 시인 천상병님의 새에 대한 연작시들을 요즈음 자주 읽어본다.
저것은 무너진 시계위에 슬며시 깃을 펴고 피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 듯이 왔다 사라지지 않는가 바람은 소리 없이 이는데 이 하늘, 저 하늘의 순수 균형을 그토록 간신히 지탱하는 새 한 마리
새는 언제나 명랑하고 즐겁다 하늘 밑이 새의 나라고 어디서나 거리낌 없다 자유롭고 기쁜 것이다 ... 새의 지저귐은 삶의 환희요 기쁨이다 우리도 아무쪼록 새처럼 명랑하고 즐거워하자
새에 대해 시를 쓰기도 쉽지 않지만 새처럼 자유롭고 고독하게 살기도 쉽지 않은 듯하다. 세계의 새들이 종류별로 다 모여 있다는 싱가폴 어디의 '새들의 공원'이라도 한 번 가서 많은 새들을 실컷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앗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새들과 대화도 하고, 함께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귀 있는 사람은 바쁜 중에도 모르는 척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노래하던 고운 새들은 이 비 오는 날, 모두 어디에 숨어 있을까? 깊은 밤에도 문득 새소리에 잠을 깰 때가 있다. 밤의 적막을 가르고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맑고 숙연해진다. '새야, 나도 지금 깨어서 네 소리를 듣고 있단다. 살아 있음의 기쁨을 너는 그렇게 참지 못하고 노래하는거지?' 라고 속삭이며 나는 다시 잠을 청하곤 한다.
수많은 새들 중에 내가 이름을 알고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몇 개나 될까? 몇 년전 여름, 내가 송광사의 불일암에 들렀을 때 법정 스님께서 '수녀님은 그래 시를 쓴다고 하면서도 기껏 아는 게 뻐국새 소리밖에 없느냐?'고 핀잔을 주시며 쏙독새, 머슴새 등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마다 이름을 구별해서 가르쳐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요즘 우리 수녀원 언덕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가슴이 노란 새의 이름이 궁금해서 나는 아예 가장 큰 조류사전을 빌려다가 찾아보기도 하지만 그 작은 새의 이름은 꼬까참새 같기도 하고, 검은머리촉새 같기도 하고 확실히는 몰라도 하여튼 참새과라는 것쯤은 알겠다.
까마귀과, 찌르레기과, 꾀꼬리과, 종다리과, 할미새과, 제비과, 두견이과, 동박새과, 비둘기과, 휘파람새과, 두루미과, 뜸부기과 등등 종류도 너무 많고, 각 과에 속하는 새들의 이름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일일이 기억할 수조차 없다. 그러고 보니 나는 꽃이나 나무 이름에 비해 새 이름은 조금밖에 몰라 새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럽다. 새들과 더 친해지려면 그 이름을 알아 불러주고 각각의 특성을 더 구체적으로 알아서 아껴주면 좋을텐데... 그러나 우리가 가까이 가려면 이내 저만치 달아나버리고 마는 새는 그 겉모습보다 그냥 소리로 친해지고,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늘 잔걱정이 많고, 잊어도 좋을 일을 쉽게 털어버리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내가 어느 날, 본인은 생각지도 않는 어떤 일에 대해 불쑥 사과하는 말을 건넸을 때 좋은 친구 K는 날더러 '그렇게 콩새 같은 가슴으로 어떻게 사니? 좀더 대범해져야지' 하며 웃었다. 그 후로 나는 '콩새'라는 이름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그냥 '콩새 수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어린 시절 나는 '새'라는 발음을 제대로 못하고 '세'라고 하여 언니, 오빠로부터 놀림을 받곤 했는데 이제는 자신 있게 '새'라고 발음 할 수 있다. 꿈 많은 소녀 시절, 어떤 소년이 내게 보낸 첫 연서에서 나를 곧 날아가버릴 한 마리의 파랑새에 비유해서 쓴 몇줄의 글도 자세한 내용은 잊었으나 기억에 남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세상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고 수녀원이라는 큰 숲으로 날아와 새로운 비상을 꿈꾸며 사는 한 마리 새가 되었구나.
이왕이면 높이 나는 새가 되어야겠다.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희망과 사랑의 다리를 놓아주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수녀새'가 되고 싶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es)가 날개 달린 모자를 쓰고, 날개 달린 샌들을 신고 제우스 신의 심부름을 다니는 사자였듯이 나도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받는 사자가 되고 싶다. 비록 헤르메스처럼 나는 날개도 없고 그만큼 민첩할 수도 없지만 마음으로야 얼마든지 날아다닐 수 있지 않은가? 더구나 지금 내가 하는 소임은 각종 심부름을 도맡아야 하는 비서실 일이어서 나의 정신은 매일매일 새처럼, 헤르메스처럼 바쁘게 날아다니지 않으면 안된다.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창의적이며 좋은 생각을 떠올려야 하는 명상의 새, 땅에서의 일을 잘하기 위해 하늘로의 비상을 서슴지 않는 기쁨의 새, 생명의 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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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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