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종교와 죽음 - 베르나르 포르
여러 가지 형태의 죽음
천의 얼굴을 지닌 죽음
신화적 기원
서양에서는 죽음이라고 하면 곧 죽음의 천사나, 혹은 낫을 들고 있는 불길한 사자의 모습을 오래 전부터 상상해 왔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아시아에서는 죽음을 의인화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아시아의 여러 문화권 속에서는 최초의 신이 희생제사를 드림으로써 우주가 태어났다고 하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흰두교 이전에 있었던 베다교에서 이 희생제사는 프라자파티 신이 드린 제사를 말한다. 창조자인 동시에 파괴자이기도 한 프라자라티는'죽음'이나 '시간'과도 동일시되는데, 우주를 지탱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피조물 안에서 찾아내기위해 모든 피조물을 삼켜버리는 것이 바로 이 '시간'이다. 프라자파티는 희생제사를 집전하는 제관이면서, 제사의식 자체이면서도 또한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물이기도 한다. 그의 희생, 그리고 불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서서히 진행되는 그의 회복은 소우주적 차원에서 우주의 소멸과 재생의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힌두교에서는 창조자로서의 파라자라티가 브라마로 대치된다. 이때 생명의 번식에 대응하기 위해 죽음의 개념이 나타나는데, 이는 생명의 끊임없는 번식이 세상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브라마는 '죽음'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신에게, 우주의 존재들 사이에 공백 상태를 만들라는 명령을 내린다. 죽음의 여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하지만(그녀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사실이 적어도 우리한테는 경의를 표할만한 일로 보인다), 결국 그 명령을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신도 그의 제자인 아르주나에게 나타나,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이므로 망설이지 말고 용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하라고 설득한다. 그런데 죽음의 신이자 시간의 바퀴를 돌리는 주인이며, 동시에 자신이 소생시킨 세상을 파괴하는 존재로서 등장하는 신은 시바이다. 죽음은 비슈누신이나 시바 신이 벌이는 '신성한 게임'이라 생각되는 우주적 과정에서 본질적인 부분처럼 보인다.
우주의 기원을 말하는 중국의 신화 역시 최초의 희생제사를 근거로 한다. 그 신화에 의하면 우주는 반고라고 불리는 거인의 육체라고 한다. 이 거인의 왼쪽 눈은 태양이며, 오른쪽 눈은 달이고, 머리는 곤륜산, 배는 바다, 손가락은 다섯 봉우리, 머리카락은 나무와 화초, 숨결은 바람, 눈물은 강,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우레라는 것이다. 도교 철학자인 장자의 설명에 따르면 우주의 출현은 황금시대의 몰락, 즉 인간의 모습을 한 혼돈이라는 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장자는 그 신의 죽음을 혼돈 신화 속에 등장시킨다. 즉 혼돈에게 매우 깊은 호의를 가졌던 두 친구가 그를 위해 일곱 구멍을 뚫어주는 바람에 혼돈이 우주의 알로 완성되었다는 신화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신화 속에서 죽음은 화신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다. 화신의 어머니인 이자나미는 출산중에 화상을 입고 죽어 지하세계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자 그녀의 오빠이자 남편인 이자나기는 아내를 찾으러 지하세계로 따라 내려간다. 이자나미는 남편에게, 자기를 보려하지 않고 떠나면 자신도 그의 뒤를 따라 산 자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행히도(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자나기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함으로써 그만 해체되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 이자나미의 시체를 보고 만다. 오로지 공포감밖에는 느낄 수 없었던 그는 격분한 아내를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나 간신히 지하세계를 빠져 나온다. 그러자 등 뒤에서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닫힌다. 그후로 산자와 죽은 자의 세계가 분리되고, 남편과 자손들에 대해 이자나미가 퍼부은 저주로 인해 생명은 가까스로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 보아 그리스 신화와 비슷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두 신화 모두 호기심은 치명적인 것으로 드러나나,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해 비탄의 심정만을 간직한 데 비해 이자나기가 이자나미에게 느끼는 감정은 혐오감과 공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의 죽음
불교 교리에 의하면 붓다는 마치 불어 꺼버린 촛불의 불길처럼 열반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붓다의 장례식은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믿음을 내포하지 않은, 기념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장례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붓다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둔다. 이처럼 불교 전통에는 상실감과 회복된 존재에 대한 소망이 함께 공존한다. 간단히 요약해 붓다의 가르침은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사성제로 나타낼 수 있다. 그것은 존재 자체가 지닌 고통을 뜻하는 고제, 고통의 원인인 집제, 고통을 끝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일컫는 멸제, 그리고 그 가능성에 도달하기 위한 길, 또는 방법이 되는 도제를 말한다. 처음의 두 명제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 즉 삼사라와 관계가 있다. 세 번째 명제는 모든 열정이 소멸될 때 얻을 수 있는 지고의 평안한 상태인 열반과 관계된다. 윤회의 동력이 되는 요소는 '욕망'인데, 그것은 무지에서 초래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무지가 바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이자 의식상태로만 존재할 뿐인 나라는 존재를 믿게 만든다. 처음 두 진리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기에 앞서 감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물려받은 왕좌와 남편,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내던지도록 만들었던 것이 바로 이 비영속성에 대한 자각이었기 때문이다. 전설에 위하면, 궁궐 밖의 현실로부터 아들을 떼어놓으려 했던 아버지의 노력에다 불구하고 고타마 와아자는 병자, 노인, 시체, 고행승을 차례로 만나고 난 뒤 존재의 허무를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네 가지 만남의 주제는, '황금 전설'을 통해 중세기에 유명해진 붓다의 삶을 기독교화하여 만든 이야기, 성자 조자 파트의 생에서도 등장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보다 개인의 유한성에 대한 성찰이다. 불이 난 집안에서 태평스럽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상황에 인간의 상황을 비유한 우화가 증명해 주듯이, 죽음에 대한 성찰은 붓다 설법의 중심을 이룬다. 말하자면 전 우주가 불타오르는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인간은 이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불은 바로 죽음으로 이끄는 욕망의 불을 의미한다. 잘 알려진 또 다른 우화는, 자식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죽은 아이를 안고 붓다를 찾아가 살려달라고 간청한다. 붓다는 그녀에게, 죽음을 한 번도 맞은일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구해오면 아이를 살려주겠노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녀보아도 그런 집을 찾지 못한 아이의 어머니는 결국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도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붓다의 교훈은 나사로를 부활시킨 그리스도의 교훈과는 사뭇 다르다.
죽음의 수용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죽음을 우주의 순환에서 꼭 필요한 단계, 혹은 희생제사로 이해하여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기거나, 아니면 죽음에 중요성을 부여하길 간단히 거부해 버릴 수도 있다. 도가는 대부분 후자의 태도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장자는 현자를 이렇게 정의했다: "현자는 인간들이 중요한 문제로 여기는 죽음이나 살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다.(중략) 그는 사물의 변형을 필연적인 것을 여기고 사물의 원리에 몰두할 뿐이다." 장자의 주장에 의하면, 우월한 인간의 관례를 따르지 않고, "삶이란 것을 그저 종양이나 종기쯤으로 여기며, 죽음이란 그 종양을 터뜨리거나 혹은 잘라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도교의 스승이었던 그는, "하늘의 기쁨을 알고있는 자, 그의 삶은 하늘이 행위이며, 그의 죽음은 하나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기 때문에 제자들이 죽음을 앞둔 그에게 장엄한 장례식을 치르겠다고 하자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쓸데없는 일이다. 하늘과 땅이 바로 나의 이중관이다. 태양과 달은 옥으로 빚은 두 장식원반이고, 별들과 북극성은 진주장식이며, 우주의 모든 생물이 내 장례의 행렬을 이룰 것이다. 장례식을 위한 도구가 이처럼 모두 준비되어 있는데 거기에 너희들이 무엇을 더하겠단 말이냐?" 공자도 같은 말을 한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바람직한 죽음
인도의 일반 대중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는 죽음은 '생명의 물'인 갠지스 강이 흐르는 성스러운 도시, 바라나시에서 행해진다. 화장한 유골의 재를 갠지스 강물에 뿌리면, 그 유골의 주인은 더 이상 이 고통의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속세를 포기한 인간은 '살아있는 사자'가 됨으로써 삶과 죽음의 악순환을 깨뜨리고자 한다. 그의 고행은, 고행이라는 불 속에서 제물인 자신을 천천히 태워 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말하자면 그는 알맞게 구워진 재물이다. 그는 이미 내적으로 다 타버렸으므로 죽은 후에 다시 화장될 필요가 없다.
불교에서 '바람직한 죽음'으로 여겨지는 감동적인 예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예견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선종지도자들의 '여로의 변경'이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면 그들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전해준 뒤,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함축한 최후의 시를 한 편 짓는다. 그리고는 명상할 때처럼 가부좌를 튼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그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들의 시신은 명상의 자세 그대로 관 속에 안치되며 그 자세로 화장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서 매장되기도 한다. 바람직한 죽음의 전형인 이런 죽음은 선종에서 확고한 권위를 갖는다. 심지어 오랜 질병 끝에 죽게 된 경우일지라도, 선종의 지도자가 이같은 의식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만일 스승이 붓다처럼 침상에서 죽게되면, 제자들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시신을 일으켜 즉시 명상의 자세로 만들어놓곤 했다.
혐오스러운 죽음
바람직한 죽음에 대립되는 것은 꽃같은 나이의 젊은이에게 갑작스럽데 다가오는 참혹한 죽음, 즉 횡사이다. 이런 죽음에 관해서는, 희생자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많은 문학작품이나 부화들을 보면 인간의 생명을 몹시 연악한 것으로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언젠가는 불법이 쇠퇴하고 만다는 말법사상 덕분에, 사물의 아름다움은 덧없는 것이라는 자각이 더욱 강조된다. 말법사상은 붓다의 시대러부터 멀어질수록 인간의 생명은 점점 줄어들며, 불법도 쇠퇴하기 때문에 구제될 수 있는 기회도 점점 줄어든다고 믿는 사상이다. 장례식 장작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야 말로, 선종의 스승인 이쿠선사의 어록에서 발췌한 시에서처럼 덧없는 인생의 상징이다: "헛되고 헛되도다! 오늘 아침 내가 보았던 그의 형체가 저녁에는 하늘에 떠도는 연기 구름이 되었나니."
'부정한 것에 대한 명상' 혹은 '시체에 대한 명상'이라는 종교의식과 관련된, '죽음의 아홉 가지 양태' 라는 주제는 인도불교에서 나온 것으로서, 여러 번 반복하여 나타나는 중심사상이다. 죽음 이후 육체-주로 지체 높은 집안의 여성-의 아홉 가지 상태에 대해 여러 경전은 이렇게 표현한다. : 첫째, 얼굴이 창백하다. 둘째, 신체가 부어 올랐다. 셋째, 문드러졌다. 넷째, 부패중이다. 다섯째, 동물의 먹이가 된다. 여섯째, 썩어서 푸른빛을 띈다. 일곱째, 신체의 각 부분이 흩어진다. 아홉째, 잡초가 무성하게 덮인 무덤만 남았다. 중국과 일본의 유명한 시들에 반복되어 등장하는 이 묘사는 서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프랑수와 비용의 <목메달린 자들의 발라드 Ballade des pendus> 에서, 그리고 기독교의 묘비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부패된 시체들이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다는 걸 몰랐던 사람들도 이런 곳을 방문하면 젊은 고타마 왕자가 시체를 처음 본 그 불길한 만남의 순간을 재연하게 되었다.
힌두교에서는 여전히 '부정한 것에 대한 명상'이 행해진다. 극단적인 경우는 아고리라고 하는 고행승들의 경우인데, 그들은 썩은 송장을 먹고산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나돈다. 화장터에서 사는 아고리들은 시체의 상반신 위에 앉아 명상을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통제할 수 있는 함을 얻기 바라며, 마침내 혼령과 의사소통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인정된 그들은 불 사자로 여겨진다. 아고리들처럼 '위법의 성사'를 전문으로 하는 고행승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잊으려고 애쓴다. 죽음이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애쓴다. 죽음이란 부정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장례식에는 반드시 정결의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정하다고 여겨진 사람들이나 백정, 무두장이, 망나니 등과 같은 직업으로 인해 불결하다고 취급된 천민들의 시신과의 접촉은 한층 부정탈 만한 일이므로, 이들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이들에겐 몇 가지 주의사항과 정화의식이 추가된다.
중국과 일본에서 가장 부정스럽게 여겨지느 것 중 하나는 해산하다 죽은 여자이다. 그녀들은 분만을 하여 피로 땅을 더렵혔다는 이유로 악취 풍기는 피의 호수 속에 영원토록 잠겨있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현재까지도 타이완에서는 '피의 그릇'이라고 불리는 장례식이 행해지는데, 이때 죽은 여인의 자녀는 자신이 태어날 때 어머니가 쏟은 피(붉게 물들인 쌀로 빚은 술)를 상징적으로 마심으로써 어머니의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킨다.
자발적인 죽음
속세를 포기한 자, 그리고 그들의 내면화된 브라만식 회생제사와 더불어 인도에서는 아힘사(비폭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으며, 생물을 해치지 않는 것을 뜻한다.)라는 개념과 채식주의가 등장한다. 속세를 포기한다는 것은 동물 제사뿐 아니라 육식마저도 포기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동물로 환생할 수도 있다는 사상 속에 자리잡는 불교의 자비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까지 포괄한다. 중국에서는 불교신자들이 '방생'의 의식을 관습화하기 시작했는데, 이 기간중에 새나 불고기를 사서 놓아준다. 그러나 불교와 힌두교는 때대로 의로운 전쟁과 살인을 합법화하기도 한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 신은, 사촌과 싸우러 전쟁에 나가야 하는 아르주나 앞에 나타나, "그들을 죽여라. 그들은 이미 나에 의해 죽음을 당한 자들이다."라고 선언한다. 살인을 합법적이고 우주적인 행위로 여기는 이와 똑같은 시각을 불교의 몇몇 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붓다는 존재에 대한 갈증과 비존재에 대한 갈증, 모두를 거부했다. 그렇게도 갈망하는 나르바다는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불교의 법이 공식적으로 자살을 금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해서 욕망으로 초래되는 환생의 굴레를 피해갈 수는 없다. 이 경우는 비존재를 원했다는 모순된 욕망이다. 단 한 가지 예외는 있다. 바로 성인의 자발적인 죽음이다. 모든 욕망을 멸한 성인은 온전히 각성된 상태로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 성인들은 모두 죽음의 순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붓다가 죽을 때 수많은 제자들이 붓다를 따라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자발적인 죽음의 또 다른 형태는 중생의 구제를 바라는 자비심에서 나온 희생이다. 불교의 '황금 전설'은 스스로 자신을 죽여 열반에 들거나, 혹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내놓은 성인들을 찬양하고 있다. 그 성인들 중 어떤 이들은, 수많은 전생에서 자비심으로 인해 다름 이를 위해 여러 번 자신을 희생시킨 붓다를 닮고자 하였다. 붓다의 희생에 관한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굶주린 어미 호랑이와 새끼 호랑이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준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스승을 찬양하기 위해 산 횃불로 변한 붓다의 신비한 제자처럼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자들도 있다. 7세기경에 인도에서 종교적 자살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이런 현상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5세기경부터는 '육체를 포기하는' 다른 방법들과 함께 분신자살이 유행하는 바람에 정부당국에서 법으로 금지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분신자살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휘발유를 몸에 뿌린 채 불꽃 속에서 타들어갔던 홀쭉한 실루엣의 베트남 승려가 우리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다. 그러나 관습화된 자살이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니는 곳 역시 일본이다. 군인답게 죽기 위해 인간 폭격기가 되어 목숨을 던지는 관례와 세부쿠라는 할복의식(서양에서는 하라키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이다. 일본인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 자살은 서방세계에 그 신화를 퍼뜨리는 데 공헌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행위들은 특별한 종교적 동기를 갖지 않았으며, 때로 의무적일 때도 있었다. 그것이 가까스로 위장되어 행동에 옮겨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