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열녀전 끼고 서방질한다?
남녀의 음욕은 사람의 대욕
과부들은 어떤 길을 택하였을까. 말할 것도 없이 열녀문으로 들어가는 길, 아니면 어떻게든 한을 푸는 방식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중봉의 <동환봉사>에는 "청상과부로 아들이 있는 자가 아들의 앞길에 꺼림이 있을까 두려워 몰래 간음하여 자식을 낳아 밤에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유몽인의 <어유야담>에는 아예 이런 이야기까지 등장한다. 한 유생이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에 왔다. 인적 끊긴 밤에 이르러 종가에 이르니 장정 넷이 골목에서 나와 유생을 밟아 땅에 넘어뜨리고 가죽 포대로 그의 몸을 싼 다음에 짊어지고 어디론가 향하였다. 한참을 달린 다음에야 포대를 열어주니 어느 담장 높은 집 안이었다. 유생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켜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힌후에 화려한 벽지를 바른 방 안에 넣었다. 문득 문이 열리더니 연소한 미녀가 시비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 의복이 신선하고 용모가 고우나 좀 누른기가 있었다. 동숙하다가 밤이 되어 정을 다하니 북소리가 둥둥 울렸다. 미인이 일어나 나가자, 장정 넷이 다시 가죽 포대로 유생을 싸서 본디 종가 자리에 부려 놓았다.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연산군 4년 단성의 훈도 송헌동은 국왕에게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남녀의 음욕은 사람의 대욕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삶에 지어미를 거느리고자 하며, 여자는 삶에 지아비를 섬기고자 한다. 이것은 삶이 비롯됨이요, 인정에 본디부터 있는 바이므로 말릴 수 없다...... 그러나 혹 사흘 만에 청상과부가 되는 이가 있거나, 혹은 한달 만에 청상과부가 되는 이, 혹은 20-30세에 청상과부가 되는 이가 있다. 30세에 아래 되는 청상과부로 아들 없는 이는 다 개가를 허하시어 생계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조선 시대에 열녀는 지아비를 바꿀 수 없었다. 대개 부인은 한 지아비를 따라 생을 마쳐야 했다. 불과 십사오 세에 청상과부가 된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으니, 참으로 개탄할 지경이었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개가를 한 집안은 벼슬길이 끊기고 문벌을 지키기 어려웠다. 따라서 과부 당사자가 수절을 원치 않더라도 부모 형제가 굳이 수절을 시켰다. 과부는 깊은 안방에 갇혀 밖과의 인연을 끊었으며 늘 감시를 당하였다. 대개의 여성들은 고운 베개를 낭군 삼아 동침하는 일이 많았다. 연암 박지원의 <열녀 박씨전>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벼슬길이 막힌 아들들이 어미에게 사연을 묻자 어미는 동전을 하나 꺼낸다. 청상과부가 된 어미는 평생을 방 안에서 동전을 굴리면서 수절을 지켜왔다.
"이것이 네 어미가 참은 신부다. 참을 수 없는 10년 세월을 만지고 또 만져서다 닳았다. 대저 사람의 혈기는 음양에 뿌리를 두고 욕정을 혈기로 나타나며 생각은 고독한 곳에서 생기며 슬픔은 생각에 말미암는다. 과부는 유독하고 상하고 슬프기가 말할 수 없는데 혈기가 있어 때로 왕성하면 어찌 과부라고 욕정인들 없겠느냐?"
이야기를 들은 아들들은 모친을 붙들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청상과부의 설움을 잘 드러내는 얘기다. 오죽하면 청상이 된 딸을 몰래 빼내어 멀리 북방으로 내보내고 다시 출가시켰던 재상까지 있었겠는가.
<기문습유>에는 구수훈이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소설(이우성, 임형택 두 분이 재편찬하면서 '의로운 환관'이란 제목을 달았음)이 하나 있다. 성불구자인 환관이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여자의 새로운 삶을 위하여 길 가는 선비를 납치하여 정을 통하게 한다. 그리고 그 여인은 선비를 따라가 살게 한다. 성불구자인 주인공이 여성의 새 인생을 열어주는 이 소설은 진정한 삶이란 규범이나 격식과는 다른 것임을 보여준다.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은 이렇게 송별시를 써서 선비와 여인에게 준다. 엄격하기만 했던 조선 시대에서조차 인간 본연의 대욕을 꺾기란 불가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만물이 음양을 갖추었는데, 나 홀로 그렇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열여섯 춘규의 여자가 석양에 꽃을 대해 눈물을 흘리놋다.
탕녀 되기가 열녀 되기보다 어려워라!
홍양호는 <열부정려기>에서 "부인의 행은 죽음으로써 열을 나타냄이니 대개 타고난 천성을 지킴이로다"고 하였다. 물론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백제의 도미, 조선 시대 경남 밀양의 아랑과 같은 열녀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요구하였던 열녀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열녀였던가. 또한 그녀들에게 그토록 지키도록 강요했던 정절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정절이었던가.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 반인간적 억압'이 아니었을까. 정조라는 것조차도 임진왜란 당시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장기간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사대부가의 부녀들이 많이 잡혀갔다. 문제는 왜병이 물러간 뒤에 그런 집안과는 혼사를 맺고자 하는 집안이 없다는데 있었다. 잡혀갔던 아내는 이미 지아비와 대의가 끊겼으니 사대부의 가풍을 어지럽힐 뿐이란 게 사대부들의 주장이었다. 그 비운의 여인들은 환향녀라고 불렀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었어야만 가문을 위한 열녀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왜적에게 손 한번 잡힌 일을 탓하여 스스로 몸을 던진 여성들도 숱하게 많았다. 그녀들은 열녀의 대열에 올라서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다. 반면에 살아 돌아온 환향녀들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죄였다. 그런 점에서 민간에서 "열녀전 끼고 서방질한다"고 한 속담은 열녀의 허와 실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까. 비록 '열녀전'을 끼고 살아야 했지만 '서방질'을 하지 않았을 수 없었던 인간의 욕망에서 우리는 오히려 삶의 진실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오해가 없길 바란다. 정조를 잘 지켜서 품행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열녀문이 세워진 여성들을 탓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 시대는 탕녀 되기가 열녀 되기보다 더 어려웠음을 실감하면서, 열녀에게서보다 탕녀에게서 민중 생활사의 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인근에 새 과부가 났다고 들으면 밤에 몰래 업고 나와 가난한 홀아비로 하여금 하룻밤 강겁을 하게 하여 짝을 이루게 하는 습속이 상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하나의 불문이었고 관아에서도 탓하지 않았다. 또한 소박 맞은 여자가 돌아갈 것이 없게 될 경우 으레 서낭당 고갯목으로 갔다. 서낭당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누구라고 먼저 '주워 가는 자가 임자'였다. 그 여자가 양반 사대부집 출신이었건, 주운 남자가 천하의 불쌍놈이었건, 그런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박 맞아 내쫓긴 마당에 '정절'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청상과부가 된 여인이 남자를 접한 사실을 알고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한 친오빠가 직접 나서서 여동생을 연못에 밀어넣은 일도 있었다. 아니면 청상의 한을 뭇남자와 풀어내고 난 다음에 자살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수절을 하다가 뭇남성에게 '강간'이라는 공격을 받고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누가 그녀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는 여성들의 정조가 학문의 대상으로 올라 있었다. 앞의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이런 견해를 내놓았다.
동시대인들의 일치된 비판에 따르면 부부의 정조란 아주 희귀한 꽃과 같았다. 희귀한 꽃을 찾아 하루 종일 헤매더라도 그 꽃을 찾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 꽃은 '두 번 다시 피지 않는' 잡초로 결혼식날에 심어졌다가 바로 그 다음날에는 시들고 마는 하루살이 꽃이었다. 반대로 '의롭지 못한' 잡초는 모든 사람의 정원에서 피어나고 또 도처에서 번성하는 꽃이며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꽃이었다.
서방질의 연원을 생각하며
우리네 속언에 여자들의 간통을 '서방질'이라고 불렀다. 서방이란 무슨 뜻일까. 함경도 지방에서는 남자가 장가드는 것을 '서방간다'고 한다. 여자가 불의의 남녀관계를 맺는 것을 서방질이라고 하는 속어도 바로 서방이라는 사위집에서 나온 것이다. 남자가 여자집으로 장가드는 집을 서옥이라고 하였으니, 서방질은 남녀의 침실로 감을 뜻함이다. 서방질의 '질' 자체가 이미 하대하는 말투다. 전통 시대에 여성은 일단 성적 대상물로 간주되었다. 가령 우리말에서 몸을 상징화하는 표현을 보면 대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것들이 많다. '배 지나간 자리'라고 하여 여성을 염두에 두고 성적 행위의 결과를 판단한다. 남녀의 상관을 '몸 섞었다' '정을 통했다'는 표현을 쓰면서도, 여성들의 수동성, 피동성만을 강조한다. 몸을 바친다, 몸을 빼앗겼다, 몸을 판다, 몸을 주었다 등은 모두 성에서의 남녀 불균등을 전제로 한 말투다. 여성들의 몸은 대개 바치는 대상물로 상대화되어 있고, 남성들의 역할은 대개 '몸을 빼앗는다', '몸을 차지한다' 등의 정복자로 남는다. '몸을 더럽혔다'는 말은 남녀가 같이 몸을 섞으면서도 어느 한쪽만 '더럽혀졌다'는 뜻을 강하게 내포한다. 그리하여 '이왕 버린 몸'이란 체념형의 말투도 나온다.
여성들의 몸은 보통 때는 금기의 대상이지만 성적인 충동을 유난히 많이 지닌 것으로 판단되기도 하다. "계집과 아궁이불은 쑤석거리면 탈난다", "계집과 옹기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 "고운 계집은 바람 탄다" 같은 말에서는 충동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여자들의 간통 대상은 남자들의 매춘과는 달리 합법성을 지니기 어렵기 때문에 '개구멍 서방', '샛서방'이란 별칭이 붙었다. "샛서방 고기맛이다", "서방질 한 번 하나 열 번 하나 말 듣기는 매 한가지다", "말 헤픈 년이 서방질도 헤프다", "미운년이 벌리고 덤빈다", "밑구멍에 불나겠다", "바람둥이 여편네 속곳 가랑이 펄렁이듯", "열 서방 사귄 계집 늙어서 서방 한 명도 못 챙긴다", "계집은 상 들고 문지방 넘으며 열두 가지 생각을 한다", "늦바람난 여편네 속곳 마를 새 없다", "서방질도 하는 년이 한다", "같잖은 서방질에 쫓겨만 났다" 같은 속담이 생겨났다. 서방질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면서, "골난(속상한)김에 서방질 한다"고도 하였다.
이렇듯 당대 사회의 속언을 살펴보면, 여성들의 간통은 '서방질'이란 공격을 받고는 있었지만 적지 않은 여성들이 도리어 '사회질서 파괴'에 뛰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굳이 당대의 음녀 '어우동'을 예로 들 필요도 없이 상당수의 여성들이 남성들의 성적 지배구조에 반기를 든 것이다. 당대에는 '음란한 여성'으로 돌을 맞았을지 모르지만 인간 본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선구적인 여성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여성들이 대거 안방을 나서고 있다
여성들이 대거 외출을 시작하고 있다. 텔레비전 연속극, 신문 잡지, 주부들의 일상적인 대화로 미루어볼 때 여성들의 외출은 이미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여성들의 외출은 단순한 외출로만 끝나지 않는다. 때로는 영영 돌아오지 않는 가출이 되기도 한다. 남성들은 이제 저녁밥을 지어놓고 여성들을 기다려야 할 것만 같다. 남성들의 외도만이 문제가 되던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외도가 장안에 화제를 뿌리고 있다. 현실생활에서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텔레비전 연속극상으로는 그렇다. 일부 남성들은 충격을 받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다. '간통'이란 문제를 놓고 사회 전체가 호들갑 떠는 사실 자체가 아직도 우리 사회가 덜 '진화'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나는 늘 우리 문화의 변법자강과 법고창신을 부르짖는 편이지만, 우리 사회의 남녀불평등 문제에 있어서는 '개벽'정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구의 여성해방론'을 그대로 들여오는 '수입오퍼상'식 논리에는 늘 반대하는 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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