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1. 희망에 대하여
암이 할 수 없는 것
암은 너무 힘이 약해서 사랑을 없앨 수 없고 희망을 깨뜨릴 수 없고 믿음을 부식시킬 수 없고 평화를 파괴할 수 없고 우정을 죽일 수 없고 추억을 억누를 수 없고 용기를 침묵시킬 수 없고 영혼을 침략할 수 없고 영원한 삶을 훔쳐갈 수 없고 기백을 정복할 수 없다.
작자 미상
플로라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 처음 몇달 동안 나는 육체적 치료법외에 다른 치료법은 인정하지 않았다. 병과 잘 싸울 수 있도록 도와 준다든지, 생명을 몇 달 정도 연장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테크닉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병의 완화라든지, '삶의 질' 같은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완전 회복이었다. 완전 회복을 위해서라면 난 어디라도 가고 무엇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의 수술과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나에게 남은 것은, 하루 중 밝음이 끝나고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할 때와 같은 끔찍한 정적의 상태였다. 의사들은 최선을 다했고, 이제 나는 혼자 남아서 내가 내년쯤 살아 있을 것인지 죽어 있을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굴렸다. 미치지 않기 위해서 난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모든 사람에게 거듭 이렇게 말했다. '모든게 잘 되어 가고 있으며 암에 걸렸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은 아니다. ' 라고, 당시 내 삶의 좌우명은 '암에 걸렸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였다.. 나는 모질었고 지칠 줄을 몰랐다.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이 주일이 지났다. 마음이 혼란했고 내일이 무서웠다. 한밤중, 침대에 홀로 누워, 하얀 벽을 바라보며 서른아홉 먹은 암환자를 누가 좋다고 할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아파트 안에서의 삶은 침울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런데 플로라가 내 삶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한 사주일 정도 된 고양이. 사납고 바싹 말랐고 온 몸에 쇠버짐이 피었고 벼룩과 진드기가 득실득실 했다. 주차장에 새워둔 내 자동차 바퀴 뒤에 플로라는 바들바들 떨며 앉아 있었다. 어딘가 심하게 아파 보였다. 나는 털이 다 빠진 꼬리를 움켜잡고 끌었다. 불과 몇 초 동안에 플로라는 내 손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할켜 놓았다. 그래도 난 고양이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쉭쉭대며 불평하는 놈을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그 때 내 삶은 너무도 외로웠으므로 조그맣고 성난 고양이의 소동조차 즐거웠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고양이는 내가 삶에 대한 우울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도와 주었다.
고양이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나 장래에 대해서 초조하게 추측해 보는 습관을 버렸다. 그리고 고양이를 회복시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쇠버짐과 벼룩뿐만 아니라 고양이는 바이러스 균에 감염되어서 혀와 양볼 안쪽과 목구멍에 궤양이 생겨 있었다. 나는 입 안에 생기는 궤양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였으므로 그 가여운 동물을 진심으로 동정했다. 몇 주일이 지나자 플로라는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동안 고양이와 나는 매우 친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플로라는 까맣고 하얀 털 복숭이 가 되었고, 나를 사랑하고 믿게 되었으며 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문 앞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아파트 안에 고여 있던 외로움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고양이와 내가 함께 힘써서 얻은 고양이의 건강을 소중히 여겼다. 비록 내 장래는 불확실했지만 플로라의 건강은 내가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었다. 열심히 간호한 결과로 플로라가 건강한 모습을 겨우 되찾아가고 있을 때, 수의사는 플로라 에게 고양이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암이었다. 수의사는 나를 담당하는 종양 전문의가 나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앞으로 일이 년 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내 반응은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이었다 수의사가 암 진단을 내리자마자 나는 플로라 를 이미 죽어버린 고양이로 여겼다. 망설임 없이 플로라에대한 내 감정을 걷어들였다. 플로라가 진짜 죽었을 때 겪을 고통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플로라는 죽을 것이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수의사는 플로라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고 나는 단순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나는 플로라 에게 말을 하는 것마저 그만두었다. 플로라 에게 말을 하거나 같이 놀 때마다 결국 난 그칠 수 없을 정도로 흐느껴 울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플로라 를 바라보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내가 멀어져가도록 가만두지 않았다. 내가 옆으로 지나가면 나를 쫓아왔고, 밤에는 침대로 기어 들어와서 내 옆에 웅크리며 부드러운 발로 얼굴을 건드렸다. 목에서는 가르릉 거리는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내가 매정하게 굴어도 모른다는 듯이 플로라는 고양이들이 제일 잘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플로라는 참고 기다렸다. 플로라의 참을성이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렇구나!' 하고 부르짖었다. 플로라에 대한 나의 태도를 이해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플로라에게 아무 희망도 걸지 않으면서 어떻게 내 자신의 암이 사형 선고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른 생명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희망이니 완전 회복이니 떠들고 다니면서도 결국 나는 나 자신을 무덤 속에 누워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후 나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천천히, 그러나 거세게 내 위로 우박 폭풍처럼 쏟아졌다. 이제껏 삶을 살아오며 나는 얼마나 자주 고통과 상실을 외면했으며 진실한 나의 감정을 피했던가! '반쪽' 삶을 살며 상실의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등을 돌렸다. 그러는 동안 나 자신을 잃을 뻔했던 것이다. 이런 깨달음이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저녁 나는 플로라와 나를 위해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같이 앉아서 불꽃을 바라보며 플로라 에게 맹세했다. 네가 내 곁에 있는 한 난 뜨거운 열정으로 너를 사랑할 것이다.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도 기분 좋은 일이니까. 너를 사랑하면서 나 자신뿐 아니라 암 진단과 그밖에 모든 것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것이다. 우리 둘을 위해서 나는 매일을 축복의 날로 정할 것이다.
나는 플로라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위해 시도했던 여러 가지 비전문적 치료법을 플로라 에게도 사용해 보았다. 지압을 받았고, 비타민과 약초를 복용했고, 음악과 미술 요법을 받았고, 해독에 도움이 되는 목욕을 했고, 그리고 끝없는 포옹과 사랑과 애정을 받았다. 플로라의 물 그릇 에는 여러 가지 색깔로 빛나는 조그만 크리스털 구슬들을 넣어 주었다. 플로라의 목걸이는 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초록색이었다. 이러는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어중이떠중이 치료법' (어리둥절한 내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다.)에 대한 내 태도의 변화였다. 치료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재미있고 우습기까지 했다. 유머 감각이 정말로 발달되지 않았으면 무당을 데려다 집안의 '나쁜 귀신'을 쫓아 버려야겠다는 말을 친구들에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몇 달 동안 나는 병으로부터의 회복은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회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암 진단과 치료를 받는 동안,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고생하는 동안 나는 플로라의 도움을 받아 내 마음속에서 죽어버린 삶의 환희를 되찾았다. 차분하게 끝까지 나를 믿음으로써 플로라는 내 마음에 평화를 심어주었다. 사랑과 귀여움을 한껏 독차지하며 드디어 플로라는 회복했고 그런 플로라를 바라보며 나는 나 자신에게도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 플로라는 일곱 살이며 한껏 멋을 부리는 행복한 고양이이다. 그리고 지난 세 번의 백혈병 검사를 모두 무사 패스했다. 플로라를 바라보며 '그렇구나'! 라고 깨달은 순간부터 나는 플로라가 천사라고 생각했다. 사랑을 거부하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내게 가르쳐 주려고 찾아 온 천사.
- 스잔 체나크 맥켈로이 -
함암 화학요법에서 카메라까지
믿음, 희망, 사랑, 우리는 이 세 가지 모두가 필요하지. 살고 싶으면 긍정적으로 되어야 해. 내가 종양에 걸렸다는 소문이 있네. 전에는 댄서였지만 지금은 암에 걸렸어. 전에는 머리가 등뒤로 늘어졌었어. 지금은 코작(텔레비전 시리즈에 대머리 형사)보다 짧아. 그래도 괜찮아. 이번 싸움에선 내가 이길거니까.
이건 내가 작곡한 <암 랩뮤직> 가사의 일부분이다. 1989년,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뼈암 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고 쓴 것이다. 그 후 나는 이년간의 항암 화학요법을 받았고, 왼쪽 다리를 무릎 위에서 절단하는 등 여덟 번의 대수술을 받았고, 종양이 여섯 번 재발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지금은 깨끗하다. 다름 사람이 암에 걸렸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없다. 그러나 암에 걸린 후 겪어온 일들을 나는 잊지 않을 것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며 삶을 열렬히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은 인내와 개성과 희망을 낳는다. 화학요법을 받으러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도 무척 재미있었다. 나와 다른 몇몇 환자들은(그럴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화학요법과 수액요법을 받는 동안 매일 작은 파티를 열었다. 머리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빠졌을 때 나는 젓가락을 콧구멍과 귓구멍에 꽃고 병원 복도를 걸어다녔다. 무심히 앉아 있는 다른 환자들을 웃겨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을 웃겨서 잠시나마 고통을 잊도록 해주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도와 주도록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은 결국 알맞은 직업을 찾도록 나를 이끌었다. 암에 걸리기 전 나는 <쏘울 트레인>(젊은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전문 댄서를 비롯한 관중들이 함께 춤을 추는 텔레비전 프로)에 출연하는 댄서였다. 암에 걸리고나서 의사들은 내가 다시는 춤을 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의사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아직도 춤을 추고 있으니까.
2년 전부터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남부 캘리포니아는 영화 회사들이 많은 곳이다. 처음으로 오디션을 받으러 가는 날이 왔지만 망칠까봐 걱정이 되어서 결국은 못가고 말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첫 오디션에 갔을 때는 그저 한 역할을 맡은 게 아니라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미니 시리즈에서 주인공 역할을 따냈다. <노던 익스포져>(알래스카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히트 텔레비전 미니 시리즈)였다! 그 시리즈를 찍는 데 걸린 이 주일은 내 생애에서 가장 멋진 시간이었다. 나는 킴그리어의 역할을 맡았는데, 그녀는 알래스카 주 시슬리에서 열리는 휠체어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연습을 하다가 팔꿈치 뼈를 다치고 만다, 매기(제니 터너)는 나를 에드(대렌 버로우즈)에게 데리고 가서 알래스카 인디언의 민속 요법으로 고쳐 주도록 부탁한다. 촬영장에서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잠시 말해 주겠다. 촬영 전날 저녁에 대사를 외운다. 그리고 새벽에 일어난다(새벽 세시에 일어날 때도 있다.). 네시 반에 다른 배우들과 스테프들을 만나 같이 시애틀에서 촬영장까지 간다. 실내 촬영은 워싱턴 주에 있는 레이몬드 시에서 하고 야외 촬영은 로슬린 이라는 작은 마을 (인구850명)에서 한다. 화장을 반쯤 마치고 '블럭' 장면들을 찍으러 간다. 그리고 나서 화장을 하고 나서 진짜 촬영에 들어간다. 진짜 촬영은 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되풀이 찍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다음 '현상'을 하고 '고르기'를 한다. 그 프로의 감독님은 정말 재미있는 분으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를 '연기도 하지 않으면서 연기하는 소녀' 라고 부르셨다. 오후가 되어서 내 촬영이 끝나도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장면들 찍는 것을 구경했다. 바로 그런 것이 산 교육이기 때문에다.
그 프로의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나에겐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분장 트럭을 운전하시는 할아버지가 나를 손녀 딸 로 '입양` 했을 정도였다. 그 프로그램의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지 이주일 만에 감독님은 나를 다시 부르셨다. <비벌리 힐즈 90210>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비벌리 힐즈에서 자라나는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담은 텔레비전 시리즈) 의 조그만 역할을 위해 오디션을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오디션이 끝나고 감독님은 나에게 더 큰 역할을 주기로 결정하셨다. 남자 주인공인 브랜던 윌쉬의 상대역인데 학생 운동가의 역할이다. 아직<비버릴 힐즈 90210> 의 배우들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배우들은 실생활에서는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암 때문에 다리 하나를 잃었지만 나는 암에 걸리기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한 다리로 스키 타는 법도 배웠다. 이젠 경주에도 참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키기도 한다. 양쪽 스키가 서로 부딪치는 일 따위는 우리에겐 일어나지 않는다! 내 인생의 목표가 연기와 글 쓰기이다. 하지만 암에 걸린 후 나는 삶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즐겁게 살아야 한다.
왜 암이 나았느냐구?
약 뿐만 아니라 정신도 몸 안의 면역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죠나스 설크 -
내가 졸업한 의과 대학은 미국에서 제일 좋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리고 나는 의대생들 가르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뉴욕의 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나는 의사로서 최고의 훈련을 받은 셈이다. 나는 친절했고 동정심이 많았고 환자들을 또 대부분의 환자들도 나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교육받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즉, 의학 서적에 써 있지 않거나 엄격한 실험을 거치지 않았으면 모두 돌팔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십 년을 살았다. 내가 쉰 아홉이 되기 삼 개월 전 어느 날 캘리포니아에 사는 딸 이 책 한 권을 보내 주었다. 디팩 쵸프라 박사가 쓴 <콘톰 회복> 이라는 책인데, 정신과 육체를 연결시켜 치료법을 찾는 것에 대해 씌여 있었다. 사실 건강은 무척 좋은 편이었지만 쉰 아홉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종합 건강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전립선 종양 말기라는 선고를 받았다. 의과 대학의 교수를 찾아가 보았으나 진단은 마찬가지 였다. 이제 회복의 희망은 없으며, 호르몬 치료제를 쓰면 병의 악화를 조금은 지연시킬 수 있으므로 18개월에서 24개월은 살 수 있다고 했다. 암 진단을 받고 나는 쇼크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다. 아내와 아이들이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캘리포니아에 사는 두 딸이 즉시 행동을 개시 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나는 회복에 대한 책을 읽고 테이프를 듣고, 식이요법을 시작했고, 명상에 대한 강좌를 신청했다. '암 심리학자' 와 면담을 했고, 내 몸 속의 암 세포가 파괴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머릿속에 그리는 심상요법을 시작했다. 이 중에서 정통 의학 치료법인 것은 하나도 없다. 마음속엔 회의가 가득했지만 아이들과 아내가 거의 강제적으로 설득하는 것을 물리칠 수 가 없었다. 나는 말 잘 듣는 환자가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치료법을 잘 따라했다. 그리고 벌써 51개월이 지났다. 지금 내 건강은 아주 좋다. 하지만 난 더 이상 옛날의 내가 아니다. 의학 치료에 대한 내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옛날에는 편협하고 앞만 바라볼 줄 아는 의사였는데 지금은 모든 가능성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요즈음 나는 암 환자 후원회를 운영하며, 배우자와 함께 하는 다이어트, 명상, 심상요법, 심리적인 상담 등에 도움을 주고 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매주 너서 명의 새로운 암 환자가 전화를 통해 회복을 위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일년 전부터 치료법에 기도를 넣었다. 기도의 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왔고, 우리 식구들이 날마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계속 회의적이었다. 그러다 래리 도지 박사의 연설을 듣고<회복의 말들>이라는 그 분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기도에 대한 기사나 텔레비전 프로들을 찾아가며 읽고 들을 뿐 아니라 날마다 내 나름대로의 비형식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 나의 하루는 명상과 기도와 심상요법을 한 삼 십분 정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쇼핑을 가고 요리를 하는 것 또한 즐거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육류나 지방은 전혀 먹지 않고 곡식류와 신선한 야채와 식이요법에 따르는 다른 음식의 양을 많이 늘렸다. 그리고 아직도 일년에 두 번 식이요법 전문가와 만나 상담을 한다. 버니 시겔 박사, 디팩 쵸프라 박사와 루이스 헤이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테이프를 들으며 육체와 정신을 연결시켜 치료법을 찾아 공부를 하는 것도 내 하루 중의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이런 공부를 하다보면 '비정통 치료법'을 통해 많은 '의학적 기적' 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옛날의 내 동료들은 아직도 나를 '약간 정신이 나간 경우' 로 취급하며 어쩌다 운이 좋아서 암이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왜 암이 나았느냐고? 그들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깔려죽을 만큼 사랑과 정신적 도움을 받았고 내 자신이 변하기로 결심을 했다. 바로 그게 내 생명을 구했다!
-하워드J. 푸르스트 의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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