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 - 레즐리 스티븐스
제4장 기독교 : 하느님의 구원
필자는 제1장 및 제2장에서 기독교에는 우주론과 인간론과 그리고 인간의 잘못에 대한 진단과 그 처방이 있다는 것을 제시했고, 그리고 이미 이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 몇 가지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기독교의 교리는 물론 그 천 년이라는 긴 역사를 통해 변화,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현 시대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가 바로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의 불일치가 심한 특별히 혼돈 된 시대다. 세 개의 주 종파(로마 가톨릭, 희랍 정교, 그리고 개신교) 내에도 여러 가지 많은 교파로 다시 나뉘어져 있고, 심지어 같은 교파 내에서조차도 교리 때문에 불화를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모든 교파는 그들의 교리가 신약 및 구약성서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초기 교회의 신경과 신앙서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 중 어떤 출처가 권위 있고 결정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 필자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을 지도하지 않을 것이다.(교리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성서와 여러 교파의 신앙서를 읽어야 할 것이다.) 대신 필자는 해석의 잘못을 피하기 위해 필자에게 "기독교적"이라고 부를 만한 믿음에 부응된다고 생각되어지는 몇 가지 주장들을 택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 주장들이 대면하게 되는 몇 가지 반론들을 지적함으로써, 이 장에서 해설과 비판이 함께 곁들여지게 될 것이다.
우주론
먼저 우주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 주장, 즉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근본 주장부터 검토해 보자.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어떤 종류의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일까? 물론 시공의 어딘가에 있는, 문자 그대로 "저 위"에 있는 하느님을 일컬음은 아닐 것이다. 소련의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 여행 때 하느님을 못 만났다고 보고했다고 해서, 이 사실이 확실히 기독교를 부정하는 진정한 증거가 되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분명히 우주의 다른 대상들 사이에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는 공간의 어떤 위치를 차지하거나 혹은 일정 기간 동안 계속 머물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일부 저자들(가령, 스피노자)이 말하였듯이 전 우주와,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와 동일시되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게 동일시된다면, 범신론이지 기독교가 아닐 것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하느님은 내재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존재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하느님은 어느 때나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시간적, 공간적으로 사물의 세계 밖에 있든가 혹은 그 세계를 초월해 있는 존재다(시편 90:2, 로마서 1:20).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거리낌없이 이와 같은 교리를 부인하고, 하느님을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는 구극적 실체로서 혹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 되는 존재다라고 정의하려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는 전통적으로 무신론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사상과 아주 흡사한 것 같지 않은가.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자칭 "기독교적 무신론자들"이라고 하는 자들까지도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그와 같은 사상은 기독교를 현대인의 마음에 적응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본의 아니게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를 부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 같다.
하느님이 초월적 존재라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다. 이 교리에는 순수한 철학적 이론들이 따르고 있다. 한때는 하느님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타당한 논증들이 있다고 널리 생각되어 졌으나, 18세기에 와서 그러한 논증들은 흄과 칸트에 의해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기독교인들(주로 로마 카톨릭 신자들) 중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들이 논증의 타당성은 비신도들에 의해 물론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대다수는 하느님의 존재란 단지 이성에 의해서 입증될 수도 또한 반등될 수도 없으며, 그에 대한 믿음은 논증의 문제라기보다는 신앙의 문제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믿을 때, 우리가 믿는 그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인가이다. 여기서 진술의 진위와 검증 가능성에 관한 현대적 논란이 시작되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초월적 존재라면, 그는 물론 어떠한 과학적 방법으로도 보일 수 없고 만져 볼 수 없으며, 혹은 관찰될 수 없는 존재이면서 그러나 또한 수자나 그리고 수학의 다른 대상들처럼 단순한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인격적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만일 경험적 관찰로도, 순수한 논리적 추론으로도 하느님의 존재 여부를 밝힐 수 없다면, 하느님을 믿는 자들은 대체 무엇이라 주장하겠는가? 제 2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악의 존재가 어떻게,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증거처럼 보이는가에 대해서 주목했지만,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이 사실을 자신의 믿음을 부정할 수 있는 증거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에서부터 종래에는 더 큰 행복이 온다든가, 만일 인간 스스로가 자유롭게 도덕적 선택을 하게 된다면, 십중팔구는 인간이 선택한 행동에서 악이 나올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비신도들은 여전히 하느님은 고통이라는 유일한 길을 통하지 않고도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인간이 자유롭게 옳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을 왜 창조할 수 없었겠는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이리하여 기독교인들은 마치 그들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이 세계가 보여 주는 고통과 악이라는 증거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치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하느님에 관한 기독교 교리 중 또 하나의 핵심적인 부분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창세기 1:1, 욥기 38:4). (이 교리는 하느님의 초월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세상은 부분이든 혹은 심지어 전체이든 간에 저절로 창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그 창조를 시간 속의 한 사건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 교리를 잘못 해석하는 셈이 된다. 현대 신학자들은 우주에는 시간의 시작이 없다는 일부 우주론에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역사라기보다는 신화(심원한 종교적 진리를 상징하는)로서 지금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19세기에는 이 문제가 격론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는 진화론과 아무런 마찰도 일으키지 않고 있다. 만일 어떤 기독교인이 여전히 아담과 이브를 역사적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성서(말씀)의 지나친 직역을 고집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과 세상의 창조자라는 말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말은 만일, 하느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이 세상은 어찌되었건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창조되었다든가, 혹은 하느님의 의도나 적어도 하느님의 허락하심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한때, 이 세계 특히 생물계는 마치 전지 전능한 창조자가 의도했던 바로 그대로의 세계라는 논의가 흔했다. 그러나 흄과 칸트는 이 "의도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Design)"을 효과적으로 논파하였으며, 현대 생물학은 모든 물체가 그들의 환경에 불가사의 할이 만큼 잘 적응한다는 믿을 만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는 이 세계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를 관찰함으로 해서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교리가 얼마만큼 옳은가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다시금 창조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가 어떤 종류의 진술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케 한다. 제 2장에서 언급했던 검증 원칙에 따르면, 만일 어떤 진술이 관찰에 의해 검증될 수도 없고, 논리에 의해서까지도 증명되어질 수도 없다면, 그 진술은 문자 그대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며, 사실이라는 주장도 펼 수 없으며, 기껏 해서 언어의 시적 사용, 즉 태도나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부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하느님이 존재하신다고 이야기할 때,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단지 신자로서 어떤 태도를 천명하는 것-가령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든가 마치 이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양 우리들도 사랑으로 행동해야 한다든가 하는 말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의견을 달리하는 무신론자도 기꺼이 이러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 교인이라는 이름에 진실로 합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자세와 행동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 할지라도 신자로서, 어떤 태도를 단순히 표방하는 이상의 무엇인가를 보여 주어야만 한다.
한편 일부의 다른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떤 기준에서 검증할 수 있는가 하는 비기독교인들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인간들이 겪는 특정한 경험들-도덕적, 종교적,신비주의적-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경험론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 도전에 응답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는 피할 수 없이 많은 논란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리하여 비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인간의 경험도 초월적인 하느님과 관련시켜서 해석하는 데 자연히 큰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우리의 사후의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을 일종의 관찰에 의해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또 다른 검증 가능성의 문제-어떻게 우리가 지금 이 현실에서 사후의 삶의 실재를 검증할 수 있고 그 증거를 찾을 수 있겠는가?-를 제시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는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호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최근의 철학 연구의 방법을 알고 있는 신학자들은 검증 원칙 그 자체가 진술의 진위의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를 의심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도 어떠한 사실적 혹은 과학적 진술도 반드시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검증 원칙-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어떤 것보다 한층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이 원칙-을 고려해야만 될 것이다. 만일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 어떤 증거로서도 반론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면, 우주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주장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은 과학적인 것에 입각한 믿음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할 것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과학과 종교가 서로 상반된 측면에서 동일한 구극적 실체를 기술하고 있으니까, 말하자면 우주에 대해 서로가 대립적인 설명이 아니라 보완적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도, 종교적 진술들이 원칙상 반증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진술들이 실재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있는 사실을 어떻게 기술할 수 있는가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한다. 이 문제가 종교에 관계되는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 중의 하나로 남게 되며, 이 때문에 종교 철학을 이야기할 때 오늘날 논의의 초점이 종교적 언어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로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일단 이와 같은 문제를 하나의 문제로서 소개하는 것으로만 그치겠으며, 더 이상의 논의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인간론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첫째로 인간을 우주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끔 이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관찰하고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되었다(창세기 1:26). 인간은, 일종의 자의식과 그리고 하느님 자신의 특성인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신과의 친교를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창조자를 사랑하고 섬길 때 오직 삶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다른 창조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 보이지만, 동시에 그 창조물과 계속 함께 하는 존재이며,(이것이 모순이 아니라면!) 흙으로, 즉 물질적인 재료로 창조된 존재이다(창세기 2:7). 이로 인해 기독교 교리에 대해 흔히 그리고 일정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오해가 있게 되는데, 그것은 이 교리가 물질적 육체와 비물질적 영혼의 이원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원론은 그리스 사상이며(우리는 이 이원론을 제 3장의 플라토 사상에서 주목했다), 구약이나 신약성서에서는 발견되어질 수가 없다. 교회의 초기 몇백 년은 기독교 신학이 그 교리를 공식화하는 가운데 그리스의 철학 사상을 채용하기 시작했으며, 비물질적 영혼에 대한 이론이 결국 기독교적 사상으로 고착되어, 그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적 사상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도 사후의 삶에 관한 사상이 있기는 하나, 이 사상을 물질적 육체가 죽은 후에 비물질적 영혼이 부활한다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이단이다. 사도신경은 명백히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이, 우리 인간은 물질적 육체로 죽으나 영적 육체로 부활한다고 이야기한 고린도 전서 15장 35절 이하는 이에 대한 성서적인 증거다. 물론 영적 육체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서도 바울은 "육체"를 뜻하는 소마(soma)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육체의 부활에 의한 사후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을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 중 또 다른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교리를 "자기가 행한 죄값은 자기가 받기 마련"이라는 인과 응보로서 꼭 해석한다거나, 혹은 영생 약속(요한복음 4:14)을 오직 이 현세에서 맞이하게 되는 새로운 형식의 삶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교리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 중의 하나를 텅 비게 하는 셈이 된다. 휴머니스트들도 "이기와 자만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과 의견을 같이 한다. 휴머니스트들은, 분명히 기독교의 특징이 되는 영원한 세계 속에서 각 개인이 살아 남을 수 있기를 바라지만 여전히 기독교의 본질적인 주장이 되는 초월적 요소는 철학적인 요소는 철학적인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살과 뼈로 간주되는 인간의 육체가 만일 부활된다면, 이 육체는 공간과 시간을 차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육체가 부활한다는 이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의 어느 곳에 그 육체가 다시 존재하게 된다는 뜻은 필경 아닐 것이다. 기독교인 누구도, 사도 바울이나 나폴레옹, 혹은 안더 아가타의 부활된 육체를 우주 비행사가 만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은, 부활된 육체가 존재하는 공간은 있으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시간의 문제도 공간의 문제에서처럼 반론이 제기된다. 추측컨대, 부활이 일어날 미래의 어떤 때가 있다는 뜻은 분명 아니다(비록 사도 바울이 "우리가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린토 전서 15:51-2'라고 말할 때 그런 뜻으로 들리기는 한다마는).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다른 어떤 시간 체계가 있다는 것인가, 혹은 부활된 육체는 초시간적이라는 것인가? 만일 그것이 초시간적이라는 경우라면, 부활된 삶이란 개념은 어떤 뜻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바처럼, 삶이란 시간상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선과 악의 구별을 영혼과 육체 혹은 정신과 물질의 구별과 동일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또 한번 잘못 해석하는 셈이 된다. 물질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다 근본적으로 악이라는 이와 같은 관점은, 이 관점이 비록 초기 기독교 사상에 영향은 끼쳤지만, 기독교적 관점은 아니다. 사도 바울의 영혼과 육체의 구별(로마서 8장)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별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구별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거듭남에 대한 사상을 잠시 살펴보자.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자유의 개념과, 바로 하느님의 실체인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플라토(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리스 철학)는 지적 능력, 즉 철학적, 도덕적 진실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의 진정한 목적은 그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달성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기독교는 도덕이나 고결한 삶을 강조하지 않고 이러한 삶의 토대가 되는 성격과 인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진정한 목적-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달성하는 길은 지적 능력에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다(고린도 전서 1:20). 사도 바울의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있을지라도...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고린도 전서 13:2) 라는 주장을 보라. 이 사랑(그리스 어로는 아가폐'agape'인데, 전에는 "자비"로 번역되었다)은 단순히 어떤 종류의 인간적인 애정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서, 그 본질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신성한 것이며 하느님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진단
기독교 교리는 인간을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로서 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잘못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독교의 진단은 근본적으로 자명한 것이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하느님이 주신 자유 의지를 남용하여 선보다 악을 선택하였으며, 그리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 버린 것이다(이사야 59:2). 그러나 인간의 타락에 관한 이 교리는 또다시 몇 가지 바로 잡아야 할 오해를 내포하고 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타락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즉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아담과 이브, 뱀과 사과의 이야기는 역사적 서술이기보다는 신화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기 쉽다는, 즉 우리의 본성에는 숙명적인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원죄"에 관한 교리는 우리 인간이 아주 완전히 타락한 존재, 즉 선한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하는 일은 무엇이나 하느님의 기준에서 볼 때 완벽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기독교 사상에는 죄를 육체적인 욕망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 왔으나, 죄는 그 본질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성적인 것은 아니다. 섹스는 기독교 교인들의 결혼 생활에서 정당한 것으로 성서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다. 따라서 죄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육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인간 자신의 뜻을 주장한 결과로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가 그 죄의 본질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모든 피조물을 죄악에 연루시킨다(로마서 8:22). 그리하여 모든 것이 어떻든 "하느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우주적 타락에 대한 이와 같은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인격적인 악마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악을 대표하면서 선과 한 쌍을 이루며 그 선과 똑같은 힘을 가진 인격적 악마를 믿는다는 것은 이단이다. 기독교 교인들에게는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궁극적으로 만물을 지배하시는 존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믿음은 우리가 앞에서 주목했던 바와 같이 악의 문제와 곧바로 부딪히게 된다.
처방
인간을 위한 기독교적 처방은, 이론과 진단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하느님께서 자신과의 친교를 맺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이 얼굴을 돌리고 그 관계를 끊어 버렸다면, 그럴 경우에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을 용서하고 그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에 의해서 구원과 인간의 재생이 가능하게 된다는 전형적인 기독교 사상이 나오게 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과 그의 선민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출애굽기 19:5)이 있는데, 이 언약에 의해서 하느님께서 만일 그 백성이 그가 명한 모든 말씀을 지킨다면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노예의 상태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자신의 백성이 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계율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때, 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웃 나라들에 의해 패배 당하게 한다는 식의 역사적 사건들을 하느님께서 이용한다는 생각이 나오게 된다.(이 징벌의 주제는 역사적 사건들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구약성서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다.) 그리고 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자비로운 하느님, 인간의 허물을 감춰 주시는 하느님, 그리고 인간과 전 피조물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개념이 나온다(이사야 43-66장). 그러나 신약성서, 즉 예수의 일생과 역사 속에서 우리는 뚜렷한 기독교적인(유대교적이라기보다) 구원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신약의 핵심적 주장은, 하느님께서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예수라는 특별한 인간 안에 나타나셨고,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자신과 인간간에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본질적인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믿음도 진정 기독교적이라고 일컬어질 수가 없다. 예수는 위인이라든가 천재라든가 혹은 전무후무한 지상 최대의 종교적 천재였다라든가 하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간인 동시에 신이며, 육신이 된 영원한 말씀(요한 복음 1:1-18)이라는 교리 속에 전통적 기독교적 주장으로 표명되고 있다. 이 교리의 초기 철학적 해석-한 실체 속에 두 본성 등-은 아마도 본질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 본질적인 사상은 성육화(incarnation)의 기본 사상은 하느님께서는 유일하게 예수 안에서만 존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똑같이 본질적인 사상이 있다면, 속죄 사상, 즉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건(그리고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그 사건이 계속적으로 재현되는 것)은 하느님과 그의 피조물을 화해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한 본보기가 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예수의 부활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자연 법칙과 엄청난 모순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이다(고린도 전서 15:17).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의 수태설은 예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있을 법하지는 않으나, 이보다 덜 중요하다.)
성육화와 속죄에 대한 이와 같은 교리는 인간의 이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사실 이러한 공식적인 주장은 기독교 내에서도 많은 반론을 야기시키고 있다. 한 특정한 인간이 어떻게 초월적인 하느님과 한 몸체가 될 수 있는가? 한 분의 하느님 안에 세 몸체(성부와 성자와 성신)가 있다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개념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보다 오히려 그러한 문제들을 불어나게 한다. 기독교인들의 통념적인 주장은 물론 이와 같은 것들은 모순이라기보다는 신비에 속하는 것,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무한한 비밀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믿음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것을 오직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진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은 이 진술은 이미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만 호소력을 가질 뿐, 회의론자들이 제기하는 순수한 개념적인 이견에는 전혀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속죄에 대한 교리에도 같은 이견이 제기된다. 별로 많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 교리를, 마치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기 전에 흘릴 피(어떠한 피든, 심지어 죄없는 자의 피까지도)를 요구하시는 것처럼, 구약의 보상적인 희생과 같은 것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러나 서기 30년 경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유대 율법 교사의 희생이 어떻게 전세계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엄청난 신비로 남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처방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희생된 것으로써 끝난 것은 아니다. 예수님에 의한 구원이 개인 각자에게 받아들여져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기독교 교회에 의해서 전세계에 퍼져야만 된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해 그들을 위해 역사 하신 구원을 받아들여 교회, 즉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한 편에서는 개인이 제각기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더 강조해 왔다. 그러나 둘 다 필요 불가분한 것임을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삶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되어야만, 인간과 세계의 새로운 삶이 이루어진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린도 후서 5:17)"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단 한 번에 새로운 삶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일생을 걸치는 과정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현세를 초월해서 사후의 부활로서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빌립보서 3:12).
마지막 개념적 문제(혹은 신비라고 해야 더 옳을까)는 구원이라는 연극에서 인간과 하느님께서 행하는 역할이 어떠한가이다. 근본적인 기독교 개념에서 확실히 구원은,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 주시므로 그 하느님으로부터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면, 우리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낌없는 은총에 의해 구원을 받을 것이다(에베소서 2:8). 그러나 이 사실과 못지 않게 분명한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즉 첫째로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인간은 죄를 지었고, 틀림없이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의 인생에서 새로운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신약성서는 회개하여 하느님을 믿고(사도 행전 3:19)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가능케 하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갈라디아서 5:16) 권고하는 말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다는 주장과 구원은 인간의 반응 여하에 달려 있다는 권고 사이에는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일종의 긴장이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를, 펠라기우스는 후자를 강조했는데, 이 논쟁에서 자유 의지의 문제는 기독교 신학의 내부의 한 중요한 문제로서 제기될 것이다. 비록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교리가 하느님의 만물의 완전한 지배 이론과 절충되기가 어렵지만,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로서 남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사려 깊은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그 본질적인 교리들에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개념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는 한낱 이론 그 이상의 것으로서, 삶의 한 방식이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일컬어질 수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아니라고 강조할 것이다. 그들은 교리를 실천하는 기독교인으로 만족하고 여러 반론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근본적인 이론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에서의 생활과 예배 속에서, 그들이 교회 밖에서는 찾지 못하는 내적 혹은 "영적"인 삶에로의 확실한 성장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고려되지 않는 한 기독교에 대한 완전한 평가가 기대될 수 없는 것이다.
보충 참고 문헌
기초 텍스트:성서(The Bibel) (많은 판과 번역이 있다):나는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 인용하였다. Peake의 '성서 주해(Commentary on the Bible)' 같은 것은 많은 어려움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따라서 '경외 성서를 포함한 새 옥스퍼드 주해 성서(The New Oxford Annotated Bible with the Apocrypha)'(Revised Standard Version)도 좋다. 또한 Herbert G. May와 Bruce M. Metzger가 편집한 '에큐메니칼 연구 성서(An Ecumenical Study Bible)'(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74)도 좋다.
John Hick이 편집한 '신의 존재(The Existence of God)'(Collier__Macmillan, London, 1964; Macmillan 문고, New York)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전통적 논의들에 관하여 고전적 작가들의 저술들을 모은 것으로, 그 검증 문제에 관한 근대 저술가들의 글을 함께 하고 있다.
John Hick의 '종교 철학(Philosophy of Religion)'(Prentice__Hall, Englewood Cliffs, N. J. 2nd edn. 1973, 문고판. 우리말 번역판:황 필호 역편 '종교 철학 개론', 종로서적 출판부, 1980)은 유대__기독교적 신 개념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에 관한 현대의 철학적 논의들을 탁월하게 개관하고 있다. 이들 두 책은 참조 목록을 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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