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질에 관한 일곱 가지 이론 - 레즐리 스티븐스
제2장 이론에 대한 비판
우주에 대한 기독교적 근본 주장, 즉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물론 많은 회의적인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일례를 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하느님의 존재는 부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하느님께서 전지하시다면, 그 분께서는 악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만 할 것이요, 만일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면, 그 분께서는 그 악을 제거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리고 만일 하느님께서 완전한 자비를 지닌 분이라면, 왜 그렇게 행해 주시지 않는가, 특히 왜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에 널려 있는 수많은 고통을 덜어 주십사 하는 신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기본 주장, 즉 경제적 발전의 단계를 통해서 인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한다는 주장 역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러한 진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정말 조금이라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가? 이 진보는 미리 결정되어 지지 않는 많은 비경제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닌가? 특히 공산주의 혁명은 서 유럽의 산업 국가들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 사실은 마르크스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직접적인 근거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문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에 관한 기독교인이나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 곧바로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야기한다. 개개 인간은 진정 자유로운 존재인가? 또,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인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유전과 교육과 그리고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인가? 육체는 사후에도 계속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들이 제기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보편적이고 명백한 사실 앞에, 사후의 부활을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빈약하고 매우 의심스럽기조차 하다. 그렇다고 인간들이 물질로서만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의 견해가 정말 옳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제각기 다른 처방을 대할 때도 의심이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특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는 신이며,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라는 기독교적 주장은 인간의 모든 이성적인 사고에 도전하는 것이다. 반면 공산주의 혁명이야말로 인간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보편적인 큰 문제를 한 특정한 역사적 사건 속에 소속시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이 두 주장 가운데 어느 하나도 보편적인 진실을 띠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시작된 이래, 개인과 제도에 그리고 국가의 후속 역사에는 그들이 이야기했던 새로운 삶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 이래 교회의 역사나 1917년 이후 러시아의 역사는, 다른 모든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마찬가지로, 선과 악으로 점철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독교적 생활이나 공산주의 생활을 실천해도 혼란과 논쟁과 이기심과 박해와 폭정과 고문, 그리고 살인 등은 제거되지 않고 있다.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적인 반론들은 지금까지 계속 많이 이야기되어 지고 있다. 그런, 재미있는 사실은 이들 중 어느 사상도 그 반론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기독교는 최근 수세기에 걸쳐 점차 그 영향력이 침식당하고 있으며, 공산주의 국가의 인구 중 극소수만이 마르크스주의의 철저한 신봉자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이론 모두가 여전히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철의 장막 양편에는 각각 수많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신봉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이론은 일요판 신문의 지면 한 구석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산업 국가 사회에서 사라져 버린 마술이나 점성술처럼 사라지지는 않고 있다.
수많은 온전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로 계속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를 믿는 것일까? 첫째로, 그 신봉자들은 보통 정당한 반론을 맞이할 때 교묘한 변명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려는 방법을 찾는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이 곧 악을 제거하지 않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좋지 않게 보이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가장 이로운 것을 위해 잠시 존재하는 필요악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서방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노동자 계급이 높은 생활 수준의 임금을 양도받음으로써 "돈으로 무마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이해가 자본주의 사회의 타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정론이나 자유 의지 혹은 유물론이나 인간의 부활 같은 커다란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한 논의는 다른 방향으로 그 문제의 초점을 바꾸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두 이론의 신봉자들은 그래도 미래에는 인간의 완전한 새로운 삶이 도래할 것이며, 기독교나 공산주의 역사에 나타나는 무서운 일들은 기독교나 공산주의가 성취하고자 하는 세계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각기의 이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난점들을 교묘한 변명으로 합리화하고, 그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이상적인 미래에 호소함으로써 그 신봉자들은 각기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믿음을 계속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나 공산당의 이론가들은 하느님의 길이나, 당의 길을 이처럼 정당화시키는 일에 잘 훈련되어 있다.
둘째로, 그 신봉자들은 비판가의 비판 동기를 공격함으로써, 그 비판에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에 대해 지적 반론을 끈질기게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죄에 눈이 멀었고, 그들 스스로 자만심을 가졌으며, 기꺼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공박할 수 있다. 이와 흡사하게 마르크스주의자도 역사와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 분석의 진실을 깨달을 수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허위 의식" -사회에서 그들의 경제적 지위로 인해 생겨난 사고 방식과 태도-에 의해 기만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연히 그 사회에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 가운데서 "부르즈와 계급 의식"을 낳게 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올바른 진실을 가질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이든 마르크스주의이든 간에, 그 신봉자들은 비판가의 비판 동기를 바로 자신들의 이론에 입각해서 분석할 수 있으며 그들은 그 비판이 환상에 기초를 둔 것으로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지적인 반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주된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만일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론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에 의해 지속되어 진다고 할 때, 필자는 그 이론을 "폐쇄된 체계(closed system)"라 부르겠다. 그 두 가지 방법은 (1) 자신들의 이론을 반박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증거라면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는 방법 (2) 비판가의 비판 동기를 자기 이론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그 비판을 묵살해 버리는 방법이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은 면에서 보면 이 두 이론은 폐쇄된 체계로서 여겨질 수 있겠다. 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에 집착하는가? 여기에는 자신의 믿음이 그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타성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가령 어떤 삶이 한 가지 특정한 신앙과 생활 방식에 의해서 교육받았거나 혹은 그 신앙에 귀의하여 그것에 따라 생활해 왔다고 하면, 자신의 과거를 포기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 어떤 믿음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한 사회 집단의 생활 방식의 근원이 된다고 할 때, 그 집단의 구성원들이 그 믿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통상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 신봉자들은 그 믿음을 계속해서 받아들이게끔 심한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그 믿음을 폐쇄된 체계 내에서 자연스럽게 지탱해 나갈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믿음의 체계가 설령 반론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본질적인 진리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어떤 통찰력, 즉 어떤 비젼을 가지고 있다고 느낄 것이다. 따라서, 그 신념을 포기한다는 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희망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책에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여러 가지 이론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그 이론들을 합리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논의한다는 게 가능할 것인가 라는 의혹이 생긴다. 왜냐하면 이런 이론들이 (일반의) 생활 방식 속에 실현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그 이론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을 지닌 자들에겐 어떤 논리적인 반론도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위에서 언급했던 폐쇄된 체계에 의해서, 비판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난공 불락의 성을 스스로 쌓을 수 있는 것 같고, 궁극적인 호소의 대상은 믿음이나 권위일 수밖에 없으며, 이미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 마음에 드는 물음, "왜 나는 이것을 믿어야만 하나?" 또는 "왜 나는 이 권위를 받아들여야만 하나?"에는 어떠한 대답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대립적인 이데올로기에 대한 객관적인 논의가 가능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책의 계획은 처음부터 끝장이난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포 자기는 시기 상조라고 믿는다. 이는 필자가 논의하고자 하는 이론들 모두가 이데올로기인 것은 아니며, 그 중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우에는 그것이 폐쇄된 체계로서 여겨질 가능성은 훨씬 희박해 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어떤 믿음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몇몇 신봉자들에 의해 폐쇄된 체계로 간주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것을 논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면 합리적인 논의가 아직은 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사람이 하는 말과 그 말의 동기를 따로따로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할 때에 그 말의 동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될 것이나, 만일 우리가 말의 진위에만, 그리고 그 말을 믿게 할 만한 타당한 이유에만 신경을 쓴다면, 말의 동기와는 무관해 진다. 또, 말하는 사람이 제시할 수 있는 이유들이 반드시 최선의 이유가 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순전히 그 사람이 한 말의 진가만을 토대로 논의할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위에서 지적한 폐쇄된 체계의 두 번째 특징, 즉 비판가의 비판의 동기를 공박함으로써 그 비판에 대항하는 수법은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논의의 주제는 이론의 진위나 근거에 관한 것인데, 그 진위나 근거에 반박하는 사람의 반론에서는 그 숨은 동기를 문제로 삼을 수는 없으므로 반론 그 자체의 진가에만 반응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하는 사람의 동기는 어떻게 보면 괴팍하고 부당하나 그가 실제로 한 말은 옳을 수도 있고, 그럴 만한 이유로 해서 정당화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령 반박의 동기가 꼭 고려되어져야 하는 경우에라도, 그 동기를 자기 이론에 입각해서 분석한다면, 그 이론이 옳다는 것은 이미 가정하는 것이 되므로, 논점을 교묘히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어떤 이론에 대한 반론이 있을 때 그런 식으로 그 이론을 거듭 주장한다고 해서 그 반론이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폐쇄된 체계의 첫 번째 특징, 즉, 이론에 반박하는 온갖 증거에 대해서 묘한 변명을 하는 수법 역시 다소 의구심을 가지고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종종 "묘한 변명을 하는" 이러한 방법이, 그 이론을 믿기로 이미 작정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별로 미덥지 않다는 느낌을 가진다.(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답변이나, 서구 사회에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답변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묘한 변명이 어느 때 이치에 맞게 정당화되며, 또 어느 때는 그렇지 못한지를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은 한 진술의 찬반에 대한 증거가 어느 정도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보다도 어떤 종류의 진술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첫째로, 진술은 어떤 사실의 진술보다, 다시 말해서 사실이 어떠한가에 대한 진술보다 오히려 사실이 어떠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말해 주는 하나의 가치 판단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동성애는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라고 말한다고 하자. 이에, 거의 대부분의 인간 사회에는 상당한 정도의 동성애가 있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다시 그 사람이 "각 사회에서 동성애는 소수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그 반론은 자기의 진술을 논박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고 하자. 아마도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사회의 대다수가 이성과의 사랑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빠질 수도 있다(사실 고대 그리스에서 이런 현상이 성행했던 것 같다)고 넌지시 비칠 것이다. 그 사람은 "나는 그래도 그 행위는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이야기하겠다"라고 응답할 것이다. 이때 이러한 응답은 결국 사람들이 실제 어떤 행위를 하는가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해야먄 하는가(혹은 하지 않아야만 하는가)에 대한 자기의 의견 표명이다. 그러한 인상은 그 말하는 사람이 동성애를 하고 있다는 어떤 사람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못마땅한 반응을 할 때 더 확실해 질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진술이 실상 사실적(factual)인 것이 아니고 평가적(evaluative)인 것이라 해도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가지고 논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모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 진술이 정당하게 증거와 무관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가치 판단으로 인식시켜야 하고 사실을 말하려는 것으로 여기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 진술은 물론 증거를 가지고 뒷받침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일어나는 것(사실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평가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진술은 이런 유의 애매성에 빠지기 쉽다. 사실 "본성"이나 "본성적"이라는 말들은 혼란의 잠재적 징조를 보이는 위험 천만의 언어 기호로 여겨질 만하다. 만일 누가 "인간은 본성적으로 X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즉시 그에게 "당신은 모든 인간이, 혹은 대부분의 인간이 실제로 X라는 의미냐?" 또는 "우리 모두가 X이어야만 하는가를 의미하느냐?"라고 물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치 판단의 진술과 사실의 진술을 구별할 때에, 가치 판단의 진술은 단순한 개인적인 취향의 표현이라든가, 객관적으로 그 진술에는 (그 진술에 찬성, 반대 여부를 막론하고)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든가 하는 의미의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다. 가치 판단의 본질은 그것이 "객관적"이 될 수 있건 없건 혹은 궁극적으로 사실적 진술과 다르건 간에, 도덕 철학의 중심적인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서 가치 판단에 대한 어떠한 편견도 배제하려 한다. 다만 그 두 종류의 진술을 확연히 분류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론들을 논의할 때, 이따금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반증에 흔들리지 않고 진술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두 번째 다른 방법이 있다(이는 정의에 관계되는 문제이긴 하지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떤 증거를 대면서 그에게 반론을 제기해야 할지 분명치 않다. 진화론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 다시 말해서 결국 우리 인간은 다른 종(species)과 같은 공통의 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고 가정하자. 우리 인간이 특수한 종류의 동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먹고, 생식하고 죽기 때문에, 역시 동물이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사람처럼 먹고, 자식을 낳지는 않지만, 사람들처럼 걷고 말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을 생각해 보자. 그 로봇을 동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여길 수 있는가? 마치 동물로 불려질 수 없는 한 어떤 것도 인간으로 일컬어질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진술은 인간에 관계되는 사실에 대해서 사실상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의 일부분을 드러내 줄 뿐이다. 그 진술은 정의상으로는 옳다. 철학자들의 전문 용어를 빌리면, 그 진술은 "분석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진술은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용어들의 의미를 분석함으로써 옳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분석에 의해서 한 진술이 사실이라고 나타난다면, 이 진술은 어떤 증거에 의해서도 논박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도 틀리지는 않지만, 또 한편 그 진술이 어떠한 증거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물론 사실이다. 왜냐하면 예컨대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그 진술은 인간 일반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동물이다"라는 예의 진술은 인간 본질과 관계 있는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한 정의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의에 관계되는 모든 문제들이 하찮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만일 어떤 단어가 이미 한 언어 체계 내에서 고정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 때, 미리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그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면 극단적인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종종 여러 이론들이 새로운 용어를 소개하거나, 혹은 기존의 단어들을 새롭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겠는데,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정의를 주어서 그 정의가 단지 정의일 뿐 어떤 사실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정의란 금방은 환히 들여다 보이지 않는 결론을 내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모든 사람은 동물이며 모든 동물들은 먹이를 먹는다는 진술이 분석적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먹이를 먹는다는 것도 분석적이랄 수 있다. 따라서 분석적 진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거짓 없이 진술하는 종합적 진술과 뚜렷하게 구별될 때만이 그 나름대로의 쓰임이 있게 된다.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두 진술 사이에 처음에 보이듯 그렇게 명확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 나아가 그 차이가 근본적인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그런 이론적인 난제에 뛰어들 생각은 없고 몇 가지 사실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은 X다"라고 주장하면서 "일부는 X가 아닐 수 있다"는 제안을 검토치 않고 무시해 버린다고 치자. 그럴 때, 우리는 그에게 다음의 질문을 해야 마땅하다. "인간이 X임에 틀림없다라는 진술이 인간에 대한 당신의 정의 중 일부분인가, 아니면 어떤 사람은 X가 아닌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인가?"라고. 그리하여 그가, 자신의 진술이 정의상의 문제라고 인정하게 된다면, 더 이상 검토할 것도 없이 그는 자기가 증거를 무시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치 판단과 분석적 진술은 이제껏 본 바와 같이 단지 증거의 검토에 의해서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그런 중류의 진술이 아니다. 만일 진술이 증거-여기서 증거란 궁극적으로 사람이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사용해서 관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된다-에 의해 입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을 경우, 철학자들은 이러한 진술을 "경험적 진술"이라고 일컫는다. 진술에 관계되는 문제들을 위와 같은 식으로 분명하게 밝혀 두면, 어떤 진술이 경험적인 것인지 아니면 평가적인 것인지 혹은 분석적인 것인지의 여부를 보통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질상 어려운 때는 어떤 진술이 이 세 가지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을 때이다.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적 주장과 역사의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을 고려해 보자. 그들은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고 우주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주장하고자 하여, 자기들의 주장이 대부분 가치 판단이라거나 단순한 정의의 문제일 따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순전히 경험적인 것인지의 여부도 확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상대방의 이론을 서로 반박할 만한 신빙성 있는 증거들이 많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각각 그 증거들을 반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묘한 변명으로 빠져 나갈 길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론의 신봉자가 그의 이론을 반박하는 온갖 증거로부터 묘한 변명으로 (필요한 경우 자신의 이론을 보충하면서까지), 빠져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면, 우리는 그 신봉자를 경기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쉽게 승리를 갈취하는 사람인 양 여기게 될 것이다. 원칙적으로 한 진술이 어떤 종류의 관찰에 의해서 검증이 될 수 없는 한, 실제로 그 진술은 사실에 대해 어떤 주장을 펼 수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많은 철학자들이 이른바 "검증 원칙(the verification principle)"에 매력을 느껴 왔는데, 이 원칙에서는 비분석적 진술이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한,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가치 판단은 사실상 전혀 진술이라고 할 수 없는 한갓 감정의 표현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만일 우리가 이 원칙을 받아들일 경우, 우리는 분석적인 것도 아니고 혹은 경험적인 것도 아닌, 이른바 "형이상학적 진술"을 거짓된 것으로서라기 보다도 무의미한 것으로 무시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와 역사의 필연적인 진보에 대한 문제, 그리고 많은 다른 문제들이 (영혼의 불멸성과 같은, 인간의 본질에 보다 더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들을 포함해서) 검증 원칙의 주창자로 일컬어졌던 "논리 실증주의자"들에 의해서 사실상 무의미한 것으로서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검증 원칙은 이러한 큰 문제들을 다루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20세기의 중요한 철학 논쟁 중의 하나로 등장해 왔던 것이 바로 이 검증 원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 논쟁에서 모종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한 진술이 분석적인 것인가, 혹은 경험적인 것인가, 아니면 이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구별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 아무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진술들도 무의미한 것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진술들은 마치 뒤죽박죽이 된 가방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 진술들의 다수는 개별적인 관심을 쏟을 만하다. 관찰에 의한 검증 가능성(testability)은 어떤 진술이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진술이 과학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데 대체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그리하여 검증보다 반증(falsification)에 더 강조를 두어 오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적 방법의 본질은 가설들이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반증을 들 수 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도 과학적인 것으로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론을 반박할 수 있는 어떤 관찰이라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느님이나, 역사의 진보나 혹은 불멸의 영혼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그럴싸한 어떤 증거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의 이론은 반증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론이 비과학적이다라고 해서 반드시 그 이론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비과학적 이론은 잘 체계화된 과학적 이론만큼 명쾌한 자기 주장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비과학적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비합리적이라고 우리의 감각은 느끼도록 하는 것도 사실이나, 과학적이라고 주장되어 온 인간의 본질에 관한 많은 이론들이 반증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비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도 역시 사실인 것이다. 이 경우 그 이론들에 대한 사실을 입증하는 데는 이론이 비과학적인 것일 수 있음은 어떤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기본이 되는 이유 중 하나를 제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혹시 비과학적인 이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이유들을 조심스럽게 검토해야 한다. 평가적 진술, 분석적 진술, 그리고 경험적(즉 과학적) 진술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우리는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개별적인 이론들에 대한 고찰을 시작해 보겠다.
보충 참고 문헌
"폐쇄된 체계"에 관한 나의 개념 사용은 Arthur Koestler의 '기계 속의 유령(The Ghost in the Machine)'(London, 1967; Pan 문고 1970; Regnery 문고, Gateway, Chicago, I11.)의 p.300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 책은 이 책의 제 8장 및 9장에서 논의된 주제에 관해 많은, 흥미롭지만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주장들을 지니고 있다).
검증 이론에 관한, 그리고 윤리적이고 신학적인 진술들의 무의미성에 관한 영어로 쓰인 고전적인 저서로는, A. J. Ayer의 '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초판 1936년, 현재는 Penguin, Dover 문고, New York)가 있다.
한 이론이 과학적인가에 대한 반증 가능성의 기준은 Karl Popper에 의거한다. 그의 책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초판 1934, 현재는 Hutchinson 문고 london, 1959, 개정판 1968; Harper & Row Torchbook 문고, New York)의 특히 1~4장을 보라. (후반부는 고도로 기술적이다.)
도덕 철학에 대한 평이한 입문서로서는, J.D. Mabbott의 '윤리학 입문(An Introduction to Ethics)'(Hutchinson, London, 1966)을 볼 것.
분석, 종합의 구별에 대한 철학적 의심에 대해서는, W. V. O Quine의 '논리적 관점으로부터(From a Logical Point of View)'(Harper & Row Torchbook 문고, New York, 2nd edn. 1961)에 실린 에세이 '경험론의 두 독단론(Two Dognas of Empiricism)'을 볼 것. 그러나, 독자는 이것이 철학자들의 철학으로서 과거의 철학적 논의들과 기초적인 현대 논리학에 대한 소양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언급은 위에 추천한 Ayer와 Popper를 읽는 데도 적용된다. Popper에 대한 Bryan Nagee의 책(Modern Masters Series, Fontana, London, 1973; Viking, New York, 1973)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쉬운 소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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