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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325 호
단기 4341. 1. 7 (음력 11. 29)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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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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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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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모든 것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는자연의 섭리. / 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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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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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우는 아이
예수는 말했다.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놔두고 그 한마리를 찾으러 가지 않겠는가?“
의로운 사람 아흔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다는 성경의 말씀이다. 우리는 잘 사는 이웃보다 못 사는 이웃을 위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밉더라도 ‘떡 하나 더 주는 셈’ 치고 신경을 써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눈을 뜬 두 장님
예수와 제자들이 여리고(얼마 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자치국에 넘겨준 도시로 예리고 또는 제리코라고 부른다)로 갈 때 많은 군중이 그를 따랐다. 두 장님이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따라가던 군중들이 그들을 보고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으나 그들은 더 큰소리로 악을 썼다.
“주여,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예수가 그들을 불쌍히 여겨 눈을 만지자 그들이 눈을 뜨고 기뻐 날뛰면서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의 절규가 없었으면 예수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삐꺽거리는 바퀴에만 기름을 치듯, 적극적으로 뒤어들고 외치는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간다. ‘벙어리 속마음은 그 어미도 모른다’고 한다. 원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표현하자. 우는아이에게 젖준다.(The squeaking wheel gets the grease.) 삐꺽거리는 바퀴에 기름을 치듯이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나 물건에 더 관심이 간다는 말이다. 고기는 씹어야 제 맛이 나고 말은 해야 맛이 나는 법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크게 말을 해야 한다.
큰 고기와 송사리
사람들은 금고를 열고 돈을 훔쳐가는 도적을 막기 위해 자물쇠로 단단히 채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그 금고를 통째로 가져가 버린다. 범행의 흔적이 없어서 쉽게 잡을 수가 없다. 예수는 “눈 먼 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잡아내고 낙타는 통째로 빠지게 하는구나.”라며 작은 일만 신경쓰고 큰 일은 소홀히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나무랐다.
발호. 대나무로 만든 통발을 뛰어 넘는다는 뜻이다. 송사리는 통발에 남지만 큰 고기는 통발을 뛰어넘어 도망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어쩌면 거미줄 같은 세상이다.파리나 조그만 곤충은 거미줄에 걸려 거미의 밥이 되지만 큰 새는 그 거미줄을 뚫고 다닌다. 크게 나쁜 짓 하는 사람은 교묘히 빠져 나가는데, 작은 도둑은 붙잡혀서 경을 치른다. 좀도둑은 교수형을 당하고, 큰 도둑은 잘 먹고 잘 산다. 몇천만원이나 몇억원을 먹은 국회의원 ‘나리’들은 ‘떡값’이라고 법망을 피해가는데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몇천 원’ 받으면 붙잡혀서 경을 치른다.“세상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큰 도적을 위해 재물을 모아주는 사람이고, 성현은 큰 도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다.’라는 장자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게된다.
큰 고기는 빠지고 송사리만 잡힌다. (Little thieves are hanged, but great ones escap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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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상 / 지혜 / 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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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기술 - 김재은
제9장 - 시간을 만들어라 (1/2)
1. 시간을 만든다
"이거 야단났는데요. 시간이 없어서..." "바쁘면 좋지 않습니까?"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 좋은 수가 없을까요?" "그렇게까지 바쁘시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뭐지요?" "실은 말입니다. 지금 나는 책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생각의 기술"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시간을 만드는 방법도 다루려고 합니다. 생각하기 위한 시간을 어떻게 해서 만드는가를 여러 가지로 적어 보았는데 반드시 당신에게도 효과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나에겐 별로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경우는 좀 다르거든요" "뭐가 다른가요?" "실은 말입니다. 나는 생각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시간이 없어요. 놀거나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거나 할 시간이란 도무지 없어요" "원, 저런!" "그럼 바빠서 이만 실례합니다" "난 말이지요. 시간이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그것 참 좋으시겠군요" "그런데 그렇지가 못해요" "어째서 그렇지요?" "나에겐 시간은 많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요. 그저 멍하니 아무렇게나 소일하고 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이렇게 따분할 수가 없어요"
사실 세상에는 '시간이 없다', '사간을 낼 수 없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정말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잇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일까? 지금 내게는 다음과 같은 잠언이 생각이 난다. '바쁜 사람일수록 자기 시간을 잘 만들어 낸다' 같은 이야기를 거꾸로 표현할 수도 있다. '시간이 언제나 남아 돌아가는 사람은 도리어 무엇을 하더라도 시간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실상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서로 어긋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좀더진지하게 시간을 만드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그 요령으로서,
#1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 #2 시간의 낭비를 막는 방법으로 나누어서 검토해 보자.
2.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
시간이 좀더 있다면, 몸이 두 쪽이라면 하고 누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뜻대로 안되는 까닭은 무슨 일일까? "설마 말로만 그러는 것은 아닐 테지요?" 말로만 그런다고 하더라고 도리가 없지만, 하고 말하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머리 속에서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사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독자에게 반문하고 싶다. "당신은 정말로 시간을 절약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그래도 계속 당신의 고민, 즉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나 메모를 해둘 시간조차 없다는 고민이 정말로 절실한 것이라면 나는 대담한 충고를 하려고 한다. 즉 시간을 절약하려면, 결단을 내려서 과감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길밖에 적절한 방법이 달리 또 없을 줄 안다. 이 과감한 치료 방법의 대상이 되는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손쉬운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1 노는 시간-가족이나 친구와 단란하게 한때를 즐길 시간을 희생시키라는 것은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별로 즐거울 것도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흔히 있는 '노는' 시간은 절약하라는 것이다. #2 쓸데없는 잡담으로 보내는 시간. #3 별로 재미도 없고 배울 접도 없는 영화나 연극 구경. #4 별로 위안이 되지도 못하는 주말의 여행. #5 할 일 없는 사람과 어울려서 별 볼일 없이 보내는 시간.
어떤가? 당신에게는 뭔가 걸리는 게 없는가?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노닥거리다가 보면 가령 그것이 쓸데없는 노릇인 줄 알면서도 박절하게 거절하기가 인정상 어려운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당신은 일단 '시간을 만들어야 되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한 이상은 당신은 체면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시간을 내는 방법이란 요약하면 결국 이 한 가지뿐이다. 단호히 해낸다는 결심,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다. 어떤 것이 쓸데없는 시간인가 하는 문제는 실상 당신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음은 실행하느냐 안하느냐 두 가지 중의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다.
3. 어중간한 시간을 살려라
'당신은 어중간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궁리를 한 적이 있는가?' 라므와뇽가(16-17세기의 파리 의회의 초대 의장과 대법관 등을 낳은 명문가)의 한 남자는 저녁 식사 전에 의례 자기 부인을 2, 3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그는 여기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시간에 메모를 몇 줄 정도는 쓸 수가 있겠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장 이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을 위해서 식당 한쪽 구석에 펜과 종이를 마련해 놓았던 것이다. '세월은 짧고 분초는 길다'는 말이 있듯이 그가 식당에서 적어둔 메모철은 후에 몇 권의 "회상록"이 되어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다. 사람은 대부분 기다린다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을 극히 좋아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손해가 되지 않는다. 차를 타기 위해서 잠시 기다리는 시간에도 곧장 호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책, 예를 들면 엘리어트 총장의 어록을 끄집어낼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당당하게 '기다리는 것은 즐거워하는' 소수의 뛰어난 사람에 낄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 시간이 신비롭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때로는 보통 때보다도 3, 40분 일찍이 눈이 떠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는 과단성 있게 얼른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좋고, 산책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분명히 기분도 좋아질 것이고 어떤 일에 집중도 잘 될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갖는 신비성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안과의사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많은 모럴리스트들은 이것을 경계하고 있다. 지적 작업을 하고 싶거든, 당신의 아침의 작업장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펜롱(1651-1715, 프랑스의 주교, 작가)은 어떤 여성에게 이렇게 글을 써서 보낸 적이 있다. 정말로 함축성이 풍부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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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글터 → 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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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장구 치다
본뜻 : 장구를 칠 때 둘이 마주 서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치는 장구를 맞장구라고 한다. 맞장구를 치려면 서로의 생각이나 호흡까지도 잘 맞아야 장단을 맞출 수 있다.
바뀐 뜻 : 남의 말에 호응하거나 동의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맞장단을 친다'고도 한다.
"보기글. -시어머니가 야단을 치는데 옆에서 시누이가 맞장구를 치니까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더 화가 나는 거야 -아까 내가 대리점에서 항의할 때 언니가 옆에서 맞장구를 쳐줬으니까 그 쪽에서 그만큼이라도 수그러들었지
먹통 같다
본뜻 : 먹통은 먹물을 담아 두는 통이나, 목수가 먹줄을 치는데 쓰는 나무로 만든 도구를 가리킨다. 나무를 파서 만든 먹통은 한쪽엔 먹물에 적신 솜을 넣고, 다른 쪽엔 먹줄을 감아, 그 줄이 먹솜을 통과해 나오도록 되어 있다.
바뀐 뜻 : 일반적으로 '먹통' '먹통 같다'는 말은 먹통처럼 머리 돌아가는 것이 어둡고 깜깜하다는 뜻이다. 아둔하고 눈치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보기글" -그 사람 일하는 거 보면 참 먹통 같아 -먹통이 따로 있냐? 말귀를 못 알아 들으면 먹통이지
참말과 거짓말
나라 안에 거짓말이 판을 치니까 거짓말을 다룬 책들이 쏟아진다.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참말이 아닌 말이다. 참말과 거짓말은 맞서는 짝이라 참말은 거짓말이 아니고 거짓말은 참말이 아니다. 참말은 사람과 세상을 밝혀주고 거짓말은 사람과 세상을 어둠으로 가리니, 거짓말을 잠재우는 것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지렛대다.
참말과 거짓말을 가리는 잣대는 무엇일까? ‘있는 것’(사실)이다. ‘있는 것’과 맞으면 참말이고, ‘있는 것’과 어긋나면 거짓말이다. ‘있는 것’에는 바깥 세상에 있는 것, 내 마음속에 있는 것도 있다. 바깥 세상에 ‘있는 것’에는 절로 있는 것, 사람이 만들어 놓아서 있는 것, 내가 몸으로 만들어내는 짓으로 있는 것도 있다. 그래서 바깥 세상에 저절로 그냥 있는 것을 잣대로 거기 맞는 참말과 어긋나는 거짓말, 바깥 세상에 사람이 만들어 놓아서 있는 것을 잣대로도 거기 맞는 참말과 어긋나는 거짓말, 내가 몸으로 만들어내는 짓으로 있는 것을 잣대로 하여 거기 맞는 참말과 어긋나는 거짓말,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잣대로 하여도 거기 맞는 참말과 어긋나는 거짓말이 가려진다.
그런데 이 넷째 갈래의 참말, 곧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잣대로 거기 맞는 참말은 참말이라 부르지 않고 ‘바른말’이라 부른다. “어서 바른말을 해라!” 할 적에는 마음에 감추고 ‘있는 것’을 잣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참말을 하라고 다그치는 것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겨울
입동을 맞으면서 비가 오더니 기온이 크게 내려갔다. 엊그제까지 단풍이 들어 가을인가 했는데 이제 두툼한 옷을 입어야 하는 철이 되었다. 겨울은 가장 추운 계절로 양력에서는 12월부터 2월까지, 음력으로는 10월부터 12월까지를 말하고, 24절기로는 입동부터 입춘까지를 말한다.
‘겨울’(冬)은 중세국어에서 ‘겨 ·겨 ㅎ·겨을’을 거쳐 중부 방언에서 ‘겨울’로 쓰면서 표준어가 되었다. ‘겨울’은 지역 따라 음운 변화를 겪으면서 ‘겨을·결·게울·기을’을 쓰기도 하고, ‘저슬·저실·저울·절·즈을ㄱ·’을 쓰기도 한다. ‘겨 ’이 ‘저슬’로 바뀐 것을 보여준다. 한편 중세국어 ‘겨 ㅎ’에서 ‘ㅎ’이 대체로 ‘ㄱ’으로 발음되면서 지역에 따라 ‘저실ㄱ·저울ㄱ·절ㄱ·즈을ㄱ·?a’의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동삼·동샘이·삼동’은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널리 쓰는데 ‘동삼’은 ‘삼동’(三冬)과 같은 말이다. 곧, 겨울에 드는 석 달을 가리킨다.
‘세안, 시안’은 전라 방언에서 많이 쓴다. 겨울을 ‘세안·시안’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말이 바로 겨울 추위를 뜻하였기 때문이다. 곧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세한’(歲寒)을 말하는 것이다. 겨울은 계절을, ‘세한’은 추위를 말하는 것인데, 이 말이 ‘겨울’을 대신하는 말이 됐다.
중세국어의 형태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음운 변화를 일으키면서 한자어와 함께 다양하게 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오빠 부대’
‘오빠 부대’를 유행시킨 이는 가수 조용필씨가 아닌가 한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오빠 부대’라는 말도 이제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져 간다. ‘비 오빠 부대, 동방신기 오빠 부대’라는 말은 쓰이지 않는다.
요즘 등장한 ‘비빠, 동방빠’ 등의 새말에는 비난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여기서 ‘-빠’는 ‘오빠’의 뒷글자를 딴 말인데, 어린 여자가 손위 남자를 정답게 이른다는 뜻은 사라지고 어떤 대상을 맹목으로 지지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된 것이다. ‘오빠’라는 말에 담긴 남성과 여성의 관계도 허물어졌다. 국가 대표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하여 애매한 판정이 있었을 때 무조건 대표팀의 편을 드는 ‘국빠’나 일본 문화를 숭상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일빠’, 무조건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황빠’ 등의 새말은 젊은 여성들이 아니라 그런 특성을 지닌 사람들을 뭉뚱그려 일컫는다.
무조건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도 문제지만 까닭 없이 헐뜯고 비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남의 결함을 들추어 비난한다는 뜻의 ‘까다’를 줄인 ‘-까’는 ‘-빠’와 대칭을 이루어 어떤 대상을 이유 없이 헐뜯고, 한편으로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만들 때 쓰인다. ‘국까·일까·황까’ 등이 그 보기다.
말을 만들기가 쉽고 간단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빠·~까’ 반열에 오른다. 속된 새말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쓰는 것이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겠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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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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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 속에 숨어 있는 역사의 비밀(근, 현대편) - 박영수
1.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여행을 갔나
신문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뉴스의 집합체인 신문은 고대 로마에서 시작되었고, 최초의 신문은 손으로 써서 사람들 사이에 오갔던 소식지나 보고서였다. 기원전 59년 로마에서 일간 형태의 아크타 디우르나가 발간되었는데, 필사본인 이 초기 신문은 로마의 주요 지역으로 보내어져 지역 주민들에게 행정 방침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선언문, 포고문, 원로원의 정치적 결정 사항 등은 별도로 제작되는 아크타 세나투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아크타 디우르나는 내용 면에서 근대적 신문의 형태를 취했지만, 관보의 일종이어서 권력자들이 자의로 뉴스를 취사 선택했다. 아크타 디우르나에는 검투 경기, 점성술, 저명 인사의 사망, 공직 인사, 재판 등의 소식이 게재됐으며 국민 투표 결과 등도 보도되어 오늘날 신문의 운세, 사망란, 스포츠란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형태, 즉 독자를 위하여 다양한 특정 정보를 제공하는 일간지는 17세기에 '뉴스 레터'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뒤 18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발행되던 코란토는 뉴스 레터의 기원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외국 잡지에서 뉴스거리를 뽑아 1면으로 발행했다. 1704년 미국 최초의 신문으로 알려진 보스턴 뉴스 레터가 영국령 미국 식민지 주에서 처음으로 발행되었다. 신문은 18세기 초 특히 영국에서 성숙기를 맞이했다. 1702년 최초의 일간 신문인 데일리 쿠란트가 창간되었고, 1704년에는 다니엘 디포에 의해 리뷰가 창간되어 3주마다 발행되었다. 디포는 정치 현안에 대한 편집자의 의견을 게재하는 한편 '사설'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신문에 도입했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신문 발행이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1765년의 인지 조례는 신문 유행의 계기가 되었다. '인지 조례'란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발행되는 각종 법 무서, 상업 서류, 증권, 주류 판매 허가증, 팸플릿, 신문, 광고지 등에 50실링 이상의 인지를 붙이게 한 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영국 정부의 이런 조치는 식민지들을 분노케 했고, 뜻 있는 독립론자들이 그에 항의하기 위해 다투어 신문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영국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들도 지지 않고 신문 발행으로 맞대응 하였으니 독립 전야인 1775년, 13개 식민지에서 발간된 신문 종수는 무려 37종에 달할 정도였다.
이후 신문은 대중의 힘을 끌어내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냈는데, 신문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기록의 신문'으로, 독일의 알게마이네는 '의견의 신문'으로, 프랑스의 르 몽드지는 사진을 싣지 않는 전통으로 유명하다. 신문 발행이 홍수를 이루면서 갖가지 제호가 지어졌다. 가장 흔한 것이 런던 타임스, 뉴욕 타임스와 같은 '지역명+타임스' 형태였다. '신의 전달자'를 뜻하는 '머큐리'도 인기 있는 제호 중 하나였다. 신문의 속보성이나 뉴스의 신선함을 의미하는 '머큐리', '헤럴드', '익스프레스' 같은 신문의 제호는 이후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신문은 순식간에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는데, 이것은 정부의 일방적 보도 지침이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독자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했던 데 이유가 있었다. 다시 말해 독자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는 기획물이나 기사는 금방 사라지고 인기 높은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던 바, 이것이 신문의 시장 원리였다. 또한 지하철 운행은 신문 보급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버스에 비해 한결 쾌적한 지하철 환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문을 읽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는 20세기 초에, 일본에서는 20세기 중엽에,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들어 지하철 개통과 함께 가판 시장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한편 '뉴스'란 어떤 변화의 소식으로, 그 속성은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일 경우가 많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은 그런 뉴스의 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며, 신문, 방송에 보도되는 뉴스들이 밝은 소식보다는 어두운 소식 일색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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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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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안의 활성산소를 제거하라 - 이영진
제3부 활성산소의 피해를 막아주는 항산화제의 비밀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주는 교훈
무슨무슨 물질이 노화방지나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숫자 못지 않게 오히려 효과도 없으며 해로울 수도 있다는 연구도 사실은 많이 있다. 아주 알기 쉬운 예를 들어 보자. 현재는 상식처럼 정설화되어 있는 것이 혈액 내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치료를 하면 심장병 발생 위험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심장병 발생 위험과 무관하다는 연구들도 상당수 있다. 다만 이런 것은 대중의 큰 관심거리가 안되므로 매스컴에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다. 권위있는 의학잡지의 하나인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에 실린 한 연구를 보자(1994년 4월호 1029페이지). 이 연구에서는 30년 이상 매일 1갑씩 피워 온 약 3만명의 중년 남자들을 다음의 4그룹으로 나누었다. 즉 1) 베타카로텐 20밀리그램 복용, 2) 비타민E 50밀리그램 복용, 3) 둘 다 복용, 4) 가짜약 복용군으로 나눈 후 5--8년간 폐암 발생이 어떻게 다른지 관찰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타카로텐을 복용한 그룹에서 폐암이 많이 생긴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많은 다른 연구에서는 베타카로텐이 폐암 예방 효과가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 연구는 그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까? 신문은 이 연구를 가지고 '베타카로텐, 잘못 먹으면 폐암 일으킨다' 식으로 보도할 수 있는 걸까? 아니다. 이 연구자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베타카로텐을 먹으면 폐암 발생이 놓은 것으로 결과가 나왔는 지에 대해 여러 가능성이 있다. 첫째 가능성은 통계상의 우연의 일치일 수가 있고, 둘째로 베타카로텐을 먹으면 담배연기 성분과 반응해서 독성물질이 생겼을 가능성, 셋째로 베타카로텐을 복용시킨 사람들이 우연히 다른 그룹 사람보다 흡연기간이 더 긴 것, 넷째로 위 3가지가 다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은 연구 대상자들은 베타카로텐을 복용하기 36, 7년 전부터 흡연을 해 온 사람들이므로 이미 몸 안에 보이지 않는 암세포가 생겨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럴 때는 베타카로텐 투여로 암세포를 제거하기가 역부족이었을 것이다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베타카로텐이 오히려 폐암을 일으킬 수 있다가 아니라 흡연을 하는 사람에서는 베타카로텐의 폐암 예방 효과가 없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게 옳은 결론일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대세적인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런 연구가 있으므로 해서 현대의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제 여러분들은 건강이나 장수, 노화예방, 각종 질병치료에 관한 서적이나 매스컴 보도 내용의 과장성을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 아직은 누구나 인정하는 불로초나 만병통치약은 없다. 항산화제도 이점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혹시 독자 중에서 나의 잘못으로 항산화제의 비밀에 매료되어 이미 치료나 예방 효과가 증명이 된 기존의 다른 방법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고혈압이나 심장병 치료를 받는 환자가 이 책을 읽고 이미 주치의의 처방을 받아 해오던 치료를 집어치우고 항산화제를 사 먹으면 절대 안 된다. 또 항산화제가 폐암, 협심증을 막아 준다더라. 그러니 골초라도 항산화제만 열심히 먹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팽개치거나 의사의 금연 경고를 무시하는 경우가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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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4. 사림파의 수난
임진왜란을 미리 안 이이
이이(1536-1584)의 본관은 덕수이고, 자는 숙헌, 호는 율곡이다. 이이는 강릉부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의 꿈에 검은 용이 방에 들어와 아이를 품안에 껴안는 꿈을 꾸었으므로 어릴 때의 자는 견룡이라 하였다. 이이는 말을 배우면서 곧 글자를 알았으며, 그가 죽을 때에는 집안사람의 꿈에 황룡이 그의 침실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13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명종 19년(1564)에는 생원시와 문과 초시, 복시, 전시에 모두 장원하여, 호조 판서, 대제학, 병조 판서를 지냈다. 영특하고 총명하며 온화하고 낙천적이었다. 다섯 살 때에 그의 외할머니가 석류를 보여주며 물었다.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 "석류 껍질 속에 붉은 구슬이 부서졌네"
즉시 이렇게 대답할 정도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총명이 있었다. 이이는 타고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16세에 어머니 사임당신씨의 상을 당하였다. 19세에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불교에 깊이 빠져 스스로 이름을 의암이라고 하였는데, 산속에서는 덕행이 높은 중이 세상에 출현하였다고 떠들썩하였다. 이듬해가 되자 다시 불교의 그릇됨을 깨닫고 즉시 절에서 내려와 성리학 연구에 전심하였다. 사계 김장생이 한번은 이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선생님께서 금강산에 계실 적에 머리를 깎고 모습을 바꾸지 않으셨습니까?" 이이가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미 속세를 떠나 중이 되었으니 아무리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불교에 빠져 버렸는데야 무슨 보탬이 있겠느냐?"
그가 일찍이 경연에서 아뢰었다. "미리 군사 10만을 양성하여 돌발 사태에 대비하여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10년 안에 흙이 무너지듯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일이 없는데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바로 화를 양성하는 것이 됩니다" 서애 유성룡이 군사 양성을 반대하였다. 당시 오래도록 태평을 누려온 터여서 경연에 참여했던 중신들 모두가 이이의 말을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이가 나와서 유성룡에게 말했다. "국가의 형세가 달걀을 포개 놓은 듯 위태로운데 속된 선비들은 시대적 급선무를 모르니 그들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지만 그대마저 이런 말을 하는가? 지금 미리 양성하지 않으면 뒷날 반드시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일세" 그 뒤 임진왜란 때에 서애 유성룡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시에는 나도 소요를 우려하여 군사를 양성하자는 주장을 그르게 여겼는데, 이제 와서 보니 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
선조 17년 정월에 서울에 살고 있는 선비 아무개가 마침 무슨 일 때문에 강릉 지방으로 가게 되었는데 야윈 말 한 필과 종 한 명을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에 이르러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고 길을 잃어 버렸는데 날은 저물고 주막은 멀어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한 나무꾼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그 나무꾼이 건너편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넘으면 집이 한 채 있을 것이오" 선비가 그 산등성이를 넘어서 보니 정말 몇 칸 되는 초가 한 채가 있을 뿐이고 다른 촌락은 없으므로 곧장 그 집을 향해 가서 사립문을 두드렸더니 조금 있다가 동자가 나와서 물었다. "이렇게 깊은 산골에 손님께서는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선비가 그 연유를 죄다 말하였다. 그 말을 들은 동자가 안으로 들어간 지 반 시간쯤 지난 뒤에야 다시 나와서 손님을 맞이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주인을 보니 나이는 60세 남짓 되어 보이는데 해진 털모자를 쓰고 청려장을 짚고서 억지로 일어나 손님을 맞으며 인사하였다. "오늘밤에 마침 경영하는 일이 있어 정말 손님을 맞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이 깊은 산골에 날이 저물었는데 하룻밤 묵기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이 아니겠기에 하룻밤 묵도록 하였습니다만 불편한 것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그대로 조용히 앉아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데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하므로, 선비 또한 한쪽 구석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밥상을 올리는데 그때는 이미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였다. 그러자 주인이 심부름하는 동자에게 명했다. "벌써 해가 지고 어스레한데도 아직 오지 않으니 너무나 이상스러운 일이다. 네가 문 밖에 나가 내다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심부름하는 동자가 주인의 명대로 문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고하였다. "방금 앞 내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 선비에게 말했다. "반드시 잠자코 앉아 있기만 하고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시골 서생이었고 한 사람은 늙은 중이었다. 서로 안부를 물은 뒤에 다시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심부름하는 동자에게 명하여 정화수 한 그릇을 길어다 소반 위에 올려놓고 향로에다 향을 피우고는 세 사람이 함께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한참 동안 주문을 외다가 주인 늙은이가 심부름하는 동자를 불렀다. "네가 문 밖에 나가서 우러러 하늘의 기상을 살펴보아라" 조금 지나자 동자가 들어와 고하였다. "별 하나가 금방 동쪽에서부터 떨어졌는데 그 광선이 땅에 비추어 환하였습니다" 세 사람이 갑자기 서로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였다. "모두가 하늘에서 타고난 운명이니 어찌하겠소" 두 사람 모두 처참한 얼굴로 나가 떠나가 버렸다. 그러자 선비가 의심스럽고 이상함을 견디지 못하여 물었다. "여러분이 탄식한 것은 무슨 일 때문입니까?" "숙헌이 장차 죽게 되었으므로 내가 그 두 사람과 약속하고, 경문을 외우며 재앙을 물리치도록 기도하여 그의 목숨을 조금이 라도 연장시키려고 하였는데, 큰 운명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끝내 효과가 없었습니다. 조금 전에 별이 떨어졌으니 벌써 구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숙헌이 누구입니까?" "이율곡입니다" "내가 서울을 떠나올 때에 이 아무개가 바야흐로 병조 판서의 직임을 맡아 조금도 질병이 없었는데 이게 무슨 말이오?" "앞으로 7, 8년 있으면 왜병이 크게 침입할 터인데, 숙헌이 세상에 살아 있으면 거의 난리를 미리 막을 수 있겠지만 이제는 끝장이 났습니다. 온 나라가 허둥대며 모두 참살 당할 것이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소?" "국가의 운명이 이와 같다면 나와 같이 가난한 선비는 어떻게 하여야 보존할 수 있겠소?" "충청도의 당진과 면천 사이로 향할 것 같으면 거의 모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비가 또 물었다. "두 분의 손님은 누구입니까?" "선비의 의관을 갖춘 분은 성명을 드러낼 수 없고, 중의 옷을 입은 이는 바로 금단대사이니, 그대가 산을 떠난 뒤에 행여라도 소문을 퍼뜨리지 말도록 하시오" 그 뒤에 선비가 서울로 돌아와서 물어 보니 율곡이 정말 아무 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세 사람이 별에게 기도하던 밤이었다.
선생이 젊을 때에 꿈에 어느 관부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관리가 장부를 점검 열람하고 있으므로 무슨 장부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명의 길고 짧음이 모두 여기에 적혀 있다" 하면서, 한 글귀를 베껴서 주었다.
용이 새벽 골짜기로 돌아가니 구름 아직도 젖어 있고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풀이 저절로 향기롭네
그것은 대체로 그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은 마치 용이 깊은 골짜기로 돌아가는 듯하며, 사향노루가 산을 지나가는 듯하여 머무는 곳마다 명성을 드날린다는 것이었는데 춘추가 겨우 49세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에 해주의 사람들이 매번 기일이 되면 자기 어버이의 기일을 받드는 것처럼 하여 부녀자에게 이르기까지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으며, 그날은 결혼도 하지 않았다. 세월이 오래 지났는데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 이는 옛날 성현에게도 없었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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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성시 - 문 앞이 장터처럼 붐빈다는 것이니 방문객이 많음을 말한다.
후한의 젊은 황제 애제는 실권을 조모네 가문인 부씨와 외가인 정씨네 일족에게 떠맡긴 채 미남인 동현과 동성연애에 빠져 있었다. 정승 등의 중신들이 암만 충고해도 듣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힐책하였다. 정승은 명문 출신으로 아우가 부씨네 실권자와 동학이었던 연고로 대신이 된 터였는데 조창이라는 상서령이 애제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애제는 곧 정승을 불러다가 "그대의 문은 장터와 같다면서?"하고 아첨객이 많음을 지적하였다. 정승은 그에 대답하기를 "신의 문은 장터와 같사오나 신의 마음은 물과 같사옵니다." 하고 자기의 청렴함을 말하였다. 하나 애제는 그를 옥에 가두었다. 사예인 손 보가 정승을 변호하고 조창의 무고를 공격하는 글을 애제에 올렸으나 애제는 손 보를 서민으로 떨어뜨리는 한편 정승은 옥사하고 말았다. 문전성시는 본래 문여시로서 정승이 애제를 충고하는데 먼저 쓰인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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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는 나비를 낳지 않는다 - 김영웅
3. 비로자나부처님의 외출
어디서나 주인이 되게나 서 있는 곳이 다 참됨이니?
선방수좌인 J스님은 태권도 공인 4단이다. 그러나 스님은 언제부터인가 운동을 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 예불이 끝나면 처절하리만큼 산을 뛰어오르고 내리던 스님이 우울한 얼굴로 꼼짝도 하지 않는 거였다. 그런데 비가 새서 불사를 한다는 거였다. 스님은 한때 그 암자에 올라가 정권단련을 한답시고 암자의 공터에 쌓아 놓은 기왓장들을 당수나 주먹으로 깨어 노스님에게 혼이 났던 적이 있다. 기와장은 신도들이 보시한 것이었고, 또 그 기왓장을 산밑 마을에서 가져오려면 두 시간이나 걸리는 것이었다. 스님은 선방을 나와 뒷방에 머무르며 매일매일 기왓장 나르는 일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는 꼴을 보고 선방스님들이 '기왓장을 산 위 암자에 날라서 뭐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기왓장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한다'는 말로 응수하곤 했다. 스님은 산 위의 암자에 홀로 주석하고 계시는 노스님의 시봉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런데 노스님 성이 보통 꼬장꼬장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스님은 불철주야 노스님을 시봉하러 산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제가 운동을 그만둔 건 지난 전국 태권도대회였어요. 그때 결승전에 올라가 보니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올라왔더라구요."
결국 1등, 2등은 못 되고, 3, 4위전이었다고 했다. 그때 스님이 돌려차기를 했는데 상대방 선수가 그만 막지 못해 이빨이 몽창 빠지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3위는 스님이 되고 고등학교 3학년생인 상대선수는 4위가 되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망연자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는 것이다. 상대선수 학생의 집에 가니까 학생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스님께 따지더란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었다고 했다. 그 학생은 그 스님과 싸워 이겼다면 체육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음은 물론이고, 매달 생활비도 조금 나오는데 그만 스님의 발길질 한 번에 일생이 망가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합도중이었기 때문에 스님에게도 별반 항의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스님은 가책에 휩싸였다. 스님 역시 동진출가하신 분으로 어머님이 여덟 살 때 돌아가셔서 그 비애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스님은 당신의 저금통장을 학생에게 주고, 치료비와 함께 대학에 갈 수 있도록(일단 입학만 되면 또 장학생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으므로) 쫓아다니며 뒷일을 거들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려면 출입이 자유로워야겠기에 선방보다는 암자의 노스님을 시봉하겠다고 나섰다는 것이다. 난 그 스님과 함께 기왓장을 져 올리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속으로는 관세음보살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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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 이덕일
2장 제14대 선조
누가 적당한가?
선조의 가장 큰 콤플렉스는 방계 승통에 있었다. 왕위에는 올랐으나 선왕 명종이 직접 전교를 내린 것도 아니었으니 다른 종친이 왕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순왕후와 영의정 이준경, 그리고 우의정이자 인순왕후의 아버지인 심통원이 다른 종친을 선택했다면 선조는 즉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즉위 당시 선조는 가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재위 2년 12월에 박응순의 딸을 간택해 국혼을 치렀다. 그녀가 선조의 첫 번째 부인인 의인왕후 박씨이다. 그러나 의인왕후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석녀였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방계 승통이라는 콤플렉스를 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정비 소생의 원자에게 후사를 넘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박씨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선조는 여섯 명위 후궁에게서만 왕자 열세 명과 옹주 열 명을 낳았는데, 이 열세 명의 아들 중에서 누가 선조의 뒤를 잇느냐 하는 문제가 민감한 정국 현안이 되었다. 이 많은 왕자들의 어머니가 각각 달랐으므로 문제는 복잡하게 돌아갔다. 선조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아들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이외에도 순빈 김씨 소생의 순화군과 정빈 민씨 소생의 인성군 등 수많은 왕자들이 각축하고 있었다. 이럴 경우 누가 대신들의 지지를 받느냐 하는 점은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는데, 세자 책봉 이전에 대신들의 중망을 받은 왕자는 공빈 김씨 소생의 광해군이었다. 맏아들 임해군은 성격이 과격해서 대신들이 꺼려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인 선조 24년 세자 책봉 문제는 정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재위 24년이 되도록 세자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걱정한 우의정 유성룡이 좌의정 정철을 찾아가 논의했다. 이들이 마음에 둔 왕자는 둘째 광해군이었다.
"우리가 국가의 중책을 맡았으니 마땅히 큰일을 해야 할 것이오. 지금 후궁 소생의 왕자가 많이 있는데 세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세자를 세울 계책을 논의해야 할 것이오. 우리가 힘써 청해봅시다." "영상이 우리말을 듣겠소?"
당시 영의정은 북인 이산해였고 유성룡은 남인, 정철은 서인이었다. 영의정과 같은 당인 유성룡이 대답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하자고 하면 영상이 어찌 듣지 않겠소."
이렇게 하여 영의정 이산해를 포함하여 세자를 세우는 데 동의한 세 정승은 대궐에서 모여 주청하기로 했으나, 막상 약속 장소에 이산해가 나오지 않아 무산되었다. 다시 약속 날짜를 잡아 아렸으나 이번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산해는 당시 선조가 인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 아들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것을 알고, 광해군에게 뜻이 있는 두 정승과 신성군에게 뜻이 있는 선조 사이에 공백을 이용해 두 정승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했다. 이산해는 극적인 반전을 노리는 계획을 짰다. 인빈 김씨의 오라비 김공량과 주연을 나누기로 약속한 이산해는 먼저 아들 이경전을 김공량의 집으로 보냈다. 한참 후에도 이산해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이산해의 종이 급히 달려와 이경전에게 고했다.
"대감께서 오시려고 하다가 어떤 말을 듣더니 문을 닫고서 눈물만 흘리고 계십니다" 이경전이 놀라서 집으로 갔다가 곧 돌아와 김공량에게 설명했다. "부친께서 '좌상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후 신성군 모자를 없애버리려 한다'는 말을 들으신 까닭에 어찌 할 줄 모르고 계십니다." 김공량은 즉시 인빈 김씨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고했고 인빈은 선조에게 울면서 호소했다. "무슨 까닭으로 좌상 정철이 너희 모자를 죽이려 한다더냐?" "먼저 세자 세우기를 청한 뒤에 죽이려 한답니다." 선조는 일축했다. "뜬소문이지 정철이 그럴 리 있나."
그 다음날 세 정승이 함께 세자 책봉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산해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아서 유성룡과 정철만 선조를 청대하였다.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임을 말하자 선조는 "누가 적당한가"라고 물었다. "광해군이 그 중 가장 중망이 있습니다." 신성군이 아닌 광해군의 작호가 나오자 선조가 화를 벌컥 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는데 경은 무슨 말을 하는가?"
유성룡은 한 마디도 거들지 못했고 정철은 땀을 뻘뻘 흘리다가 물러나왔다. 이 사건은 거칠 것 없이 뻗어가던 정철을 거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산해의 계략이 성공한 것이다. 양사에서 즉각 탄핵에 들어갔다.
"영돈녕 정철은 조저의 기강을 마음대로 하여 그 위세가 세상을 뒤덮었으니 파직시키소서."
구체적인 혐의도 없이 대신을 탄핵하면 대간이 추궁을 받은 법인데도, "위세가 세상을 덮었다"는 모호한 혐의를 선조가 받아들임에 따라 정철은 머나먼 강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처럼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조정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그 다음해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선조의 추락, 광해군의 부상
정확하게 개국 2백년 만인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은 조선의 모든 체제를 송두리째 뒤엎었다. 조선통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일본이 침략할 것 같다"고 했던 황윤길의 보고는, "침략의 조짐이 없다"는 부사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에 묻혀버렸다. 황윤길을 야당인 서인인 반면 김성일은 집권당인 동인이었기 때문이다. 적군은 서인만을 골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공격한다는 기본적인 안조법칙마저 당리당략에 묻혀버린 것이다. 적군이 침입할 가능성이 1퍼센트만 있어도 만반의 준비를 다해야 하는 것이 국방의 기본 원칙이란 점에서, 당시 조선은 이미 정상적인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상태였다. 동래 부사 송상현을 전사시킨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해 오자, 놀란 선조는 신립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삼도순변사로 제수했다. 그러나 선조로부터 보검과 전권을 하사받은 신립은 새재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자는 장수들의 요청을 무시한 채 허허벌판인 탄금대에 배수진을쳤다 대패하고 충주는 왜적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상대당을 거꾸러뜨릴 게략을 세우느라 정신 없던 조정 신료들은, 막상 거꾸러뜨려야 할 왜군이 쳐들어 오자 도망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선조도 마찬가지 였다. 선조는 군부로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자세보다는 일신을 보존하는 일에만 골몰해, 왜적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기로 했다. 사실 조정은 선조가 도망가기 전부터 이미 조정이 아니었다. 아직은 어였한 국왕인 선조가 젊은 내시들과 판방에 앉아 있는데도, 백성들이 대궐로 난입해 값나가는 물건들을 마음대로 들고 갔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제지할 생각을 못했다. 또한 도망가는 선조의 행렬이 돈의문을 지날때는 평소 '군신의 의리'를 밥 먹듯이 읊조리던 배관들이 모두 도망가 따르는 자가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국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대궐에 난입해 노비들을 관리하던 관청인 장예원에 불을 질렀다. 왜군이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대궐은 양반 사대부의 침학에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불타고 만 것이다. 선조의 행차가 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이 어가를 가로막고 선조를 비난했다.
"상감은 그 동안 민생은 뒷전이고 수많은 후궁들 부자 만들기에만 열중하고 후궁의 오라비 김공량 사랑하는 것만 제일의 계책으로 여기다가 오늘 이 일을 당했는데 어찌 김공량을 시켜 왜적을 토벌하지 않으시오."
그 중에는 선조에게 돌을 던진 사람도 있었으니 백성들에게 선조는 더 이상 임금이 아니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한 사대부가 농민을 지배하던 조선의 국가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광해군은 이처럼 국가 체제가 붕괴된 폐허 상태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다. "내 나이 아직 마흔도 안 되었다"며 정철을 치죄하던 선조는 세자를 세워야 인심이 안정될 것이라는 조정의 중의에 부랴부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으로서는 나라가 오늘 망할자 내일 망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니, 앞으로 임금이 될지 왜적의 손에 죽을지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어렵사리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살리는 고난이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의 임무를 맡은 광해군은, 맹산, 곡산, 이천 등지를 순회하며 왜군을 교란시키고 백성들을 의무했다. 선조도 광해군의 이런 활약에 고무되어 개평역에 있던 광해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살아서는 망국의 임금이요, 죽어서는 이역의 귀신이 될 것이다. 부자가 서로 헤어졌으나 다시 볼 날이 없을 듯하다. 오직 바라는 바는 세자가 옛 판도를 다시 회복하여 위로는 조종의 영을 위로하고, 아래로 부모의 돌아옴을 맞이하라. 종이를 대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노라."
광해군은 이 편지를 읽고 목놓아 통곡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에게 돌을 맞는 수모를 당한 선조는, 해전에서 이순신의 활약과 육전에서 의병과 명나라의 도움으로 위기를 한 고비 넘기자 광해군에 대한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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