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 208 호
단기 4340. 6. 30 (음력 5.16)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한자가 ? 로 표시되어 안보이시는 경우 홈페이지에 오시면 해당 한자를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
문학소식 |
인문학의 官學化 우려…“學人 자성 필요” |
인터뷰: 100회 맞아 해산한 인문학담론모임 곽차섭 교수 |
|
신정민 기자 jms@dambee.net |
|
|
▲ 곽차섭 교수 |
|
인문학담론모임이 얼마 전 100회째의 모임을 갖고 자진 해산했다. 지난 1995년부터 13년에 걸쳐 꾸려온 부산지역 인문학 교수들의 자발적 학술토론 모임이었다. 마지막 총무을 지낸 곽차섭 부산대 교수(서양사)는 인터뷰에서 이 모임의 ‘사교성’을 강조한다. 정부지원금과는 아예 담을 쌓고, 순전히 학문적 관심만으로 모여서 편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브레인스토밍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곽 교수는 담비와의 서신인터뷰에서 앞으로 이와는 다른 새로운 형식의 인문학 모임이 후배들에 의해 이끌어질 것이라고 얘기했다. 새로운 전통을 위해 원멤버들은 깨끗이 손을 터는 방법을 택했다는 그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아쉬우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게 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 편집자주
- 인문학담론 모임은 언제 결성하게 됐으며 결성계기는 무엇입니까.
“1995년 3월부터 첫 발표 시작. 하지만 얘기는 93년부터 있었습니다. 가장 큰 동기는 물론 수준 높은(?) 학문적 의사소통에 있었지만, 계기는 학부제 논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10명 정도의 인문대 교수들이 만남을 가지다가 의기투합했습니다.”
- 지난 12년반동안 한 회도 거르지 않았던 자율적 모임이 100회를 끝으로 해산한다고 밝혔습니다. 해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동안 난관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보면 안정기에 접어들어 계속 개최해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타성에 젖는 측면이 있습니다. 초창기 멤버들이 여전히 주축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는 새로운 소장학자들이 뒤를 이어받았으면 하는데, 예전만큼 이런 일에 열의가 없습니다. 또한 그동안 시간이 흘러 우리가 참신하다고 여겼던 것들(조직이 없고, 지원도 없고, 주제도 제한이 없는)이 요즘같이 돈과 조직이 중요해진 시대에는 어필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하고자 자진 해산하기로 했습니다. 그것도 새로운 전통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그동안의 성과를 책으로든 어떤 형식으로든 묶어낼 계획은 없으신지요.
“체계적인 작업들이 아니었고, 일종의 브레인 스토밍이었기 때문에 책으로 묶어내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을 지향한 것도 아니었고요. 우리는 그런 종류의 학회가 아니었어요. 와서 듣고 말하고 토론하면서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그것을 자신의 작업에 적용해보는 그런 것이었으니, 성과 부분은 각자의 역량과 의지에 달려 있었던 거지요.”
- 앞으로 학회로의 발전가능성이나 그 외의 다른 형식의 모임으로 전환될 가능성은요.
“일단 원 멤버들은 관여하지 않을 겁니다. 소장학자들이 새로운(그러면서도 정신을 이어받는) 모임을 구상은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환경이 많이 변화했기 때문에 어떻게 될 지는 모릅니다.”
- 인문학 내에서의 학제적 연구나 토론 같은 것이 얼마만큼 잘 이뤄지는지, 서로 영향주고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우리나라 학회의 전반적 경향으로 보자면 진정으로 학제적인 연구라는 것은 지금까지 거의 전무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이름을 단 것은 뜯어보면 그냥 유사 주제 아래 각자 전공대로 논문 써서 책으로 묶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런 류의 연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최근에는 좀 활발해진다는 느낌은 있습니다만, 아직은 연구비 받기 위한 허울 좋은 얘기라는 자성입니다. 그런 류의 토론은 거의 없습니다. 인문학담론모임이 전국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경우였다고 자임합니다.”
- 학계의 트렌드나 담론활성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자평을 해본다면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참가 교수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강명관 교수로부터 한국과 동아시아 한문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강 선생도 제가 연구하던 미시사나 역사이론에 관한 얘기들을 관심 있게 들었습니다. 서로 배우는 것은 각자의 역량에 달린 일입니다.”
-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았던 발표나 토론은 무엇입니까.
“첫 발표. 일문과 오경환 교수가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했던 겁니다. 장소를 구할 수 없어 학교 근처 뷔페 한 구석에서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래도 의기충천한 출발이었지요.”
- 인문학담론 마지막 발표자였던 강명관 교수는 국가 자본으로 인문학을 관리·지배해, 인문학이 사실상 官學이라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떠한 의견이 오갔는지요.
“그 부분은 저의 지론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한국의 국학(특히 국문학, 한국사 등)이 대단히 관학적임을 지적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아젠다 설정이 언제나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 정책과 직결되어 있고, 그 결과 중 하나는 정부로부터 언제나 지원금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대학의 연구를 위해 지원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정치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그랬고, 최근에도 정부가 대학원 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장학금을 내려 보내면서 오직 한국사, 한국어문학에 한정했고, 돈이 남으면 국학과 관련 있는 동양사 일부 학생에게 주라는 공문을 첨부했습니다. 서양사 학생은 같은 과, 같은 역사 전공이면서도 받지 못합니다.
21세기 한국이 외부와 절연된 무슨 무인도도 아닐진대, 이런 식으로 장학금을 주는 것은 학문을 순치하겠다는 것 외에 무슨 동기가 있는지. 더 큰 문제는 관련 교수들의 무비판적 태도입니다. 아무 문제의식이 없어요. 자신도 예전에 그렇게 받았으니, 당연하다는 것인지? 더욱이 고구려재단이니 동북아재단이니 하는 것을 만들고는 막대한 돈을 퍼붓고 있지만, 학문은 그렇게 한다고 발전하지는 않아요. 지식인의 비판의식은 원래 권력과의 거리두기에서 출발하는 것인데, 민족주의란 이름, 그리고 돈이란 수단을 통해 이렇게 정부권력과 국학자들이 아무런 거리 없이 묶여있으니, 올바른 역사의식이 나올 리가 없겠지요. 강 선생은 이런 생각에 공감한 것으로 보입니다.”
|
|
|
|
▲ 지난 18일, 12년6개월동안 이어져왔던 '인문학담론모임'은 100회째 발표를 끝으로 해산했다. 사진은 100회 모임 장소였던 부산대 인덕관 앞에서 한 기념촬영. 첫째줄 왼쪽부터 정출헌(한문학과), 인성기(독어독문학), 김혜준(중어중문), 이영철(철학과), 권연진(언어정보학), 유제분(영어교육) / 둘째줄 양민종(노어노문), 박정심(철학), 윤애선(불어불문학), 김세환(중어중문학), 허영재(독어독문), 김용규(영어영문) |
- 지난해만큼 인문학 위기가 공론화 된 적은 없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차후 10개의 인문학연구소 마련하는 등 올해 370억원(향후 10년간 4천억원)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정부의 인문학진흥사업계획에 대한 생각과 함께 인문학위기에 대해 한 말씀 부탁합니다.
“기본적으로 능력있는 대학원생을 키울 수 없어서 자생적 학문 전통을 창출할 수 없는 것이 위기라면 위기인데, 요즘은 오히려 돈은 넘쳐나고 능력있는 학생은 없으니, 이야말로 정부가 주도하는 거대한 대학, 대학원 취로사업일 뿐, 학문적 미래는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돈 역시 서울 5-6개 연구소가 이미 선점, 독식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 연구소들에서 능력있는 인재와 유용한 성과를 도출해낼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별무소득일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눈먼 돈이 있으니 먹겠다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지원책은 오히려 연구비를 따기 위해 연구를 하는 부정적 상황을 산출할 가능성이 큽니다.”
- 최근 인문학 단행본 흐름을 볼 때 어떤 점이 부족한지, 눈에 띄는 긍정적 현상은 있는지요.
“좀더 진중하고 장기적인 아젠다 제시가 부족합니다. 팀 위주의 지원 정책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봅니다. 논문 하나씩 써 그것들을 묶어내는 책들이 급증하는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일간지 서평난을 보아도 주목되는 책은 별로 없습니다.”
- 부산이 여전히 서울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당연하지요. 부산은 부산이 아니라 그냥 지방의 일부일 뿐입니다. 한국에는 서울과 지방의 2분법만 존재합니다. 모든 면에서 그 격차는 엄청납니다. 서울 소재 대학(명문대가 아니라도) 교수에게 물어보세요. 이런 저런 불평은 있겠지만 지방대학으로 옮기려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테니. 다 이유가 있겠지요?
- 질문 외에 하고픈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학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사회적 원인들도 결코 무시하지는 않지만 가장 큰 책임은 교수들 자신에게 있다고 봅니다. 스스로가 하는 일이 사회에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자성이 부족합니다. 학문적으로는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들도 행동을 보면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이거나 서울중심주의적입니다. 학인의 이론과 행동이 이렇게 괴리가 심한 곳도 없을 겁니다.”
- 바쁘신데 시간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
글터 → 명언 / 격언 |
무엇을 증명하려면 논리가 필요하지만 무언가를 발견하자면 직관이 필요한 것. / H.P.
|
|
글터 → 철학 / 사상 |
숭늉 - 정약용, 이율곡, 이황
1. 다산 정약용
얼굴은 운명의 거울
얼굴은 버릇으로 인해서 변하고, 세력은 얼굴로 인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흔히 그 관상이니 사주니 말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망령스럽기도 하다. 어린아이가 엉금엉금 길 때의 얼굴을 보면 모두 아름다울 뿐이로되 자람에 따라 무리로 길러지면서 버릇이 길러지고, 버릇이 갈라지면서 얼굴도 따라 변한다.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무리는 얼굴이 아담하고, 시장 바닥의 무리는 얼굴이 검다. 짐승 치는 무리는 얼굴이 텁수룩하고, 도박 좋아하는 무리는 얼굴이 성낸 듯하면서 영리하다. 대개 버릇이 오래 되면 성질도 그쪽으로 나날이 옮겨지는데, 그 마음속에 있는 것이 성실하면 겉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사람이 그 얼굴이 변한 것을 보고는 '얼굴이 그러므로 그 버릇이 그렇다'하지만, 천만에, 그것은 틀린 말이다.
대체로 학문을 익힌 자는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판단하는 데에 재주가 있다. 장사 솜씨를 익힌 자는 재화를 모으는 데에 재주가 나고, 노동을 익힌 자는 끝내 비천하다. 나쁜 짓을 익힌 자는 마침내 패망하게 되는데 익힘은 재주와 함께 진전함으로써 재주는 얼굴과 더불어 변화하게 된다. 사람들은 얼굴이 변한 것을 보고 또한 말하기를, '얼굴이 그런 까닭으로 그 재주가 저와 같다'하니, 아아,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아이의 눈동자가 빛나면 부모가 말하기를, '이 아니는 학문을 시킬 만하다'하여, 그 아이를 위해서 책을 사들이고 스승을 정해 준다. 선생은, '이 아이는 가르칠만하다'하여, 그 아이에게 붓과 먹, 책상을 더 주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더욱 부지런해져서 나날이 힘껏 정진한다. 선비가 '이 사람은 일을 시킬 만합니다'하며 천거하고 또 임금이 그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은 총애할 만하다'하면 권장한다. 허락하고 칭찬하고 발탁하여 잠깐 동안에 재상이 된다. 아이의 뺨이 두툼하면 부모가 '이 아이는 부자가 될 만하다'하여 살림살이를 더욱 얹어 주고, 부자가 이를 보고 '이 사람은 부릴 만하다'하여 자본을 더욱더 주게 된다. 아이는 더욱 부지런해져서, 나날이 힘써 장사를 잘하게 된다. 사장 가게에 물건을 두둑하게 정리해 쌓아 두었는가를 살펴보고 객주로 삼는다. 자신은 계속 발전하는데 거기에 또 남들이 도와주니 잠깐 동안에 큰 부자가 된다. 아이가 눈썹이 덥수룩하고 콧구멍이 밖으로 드러났으면, 그 부모와 스승들이 아무리 키우고 생각하여 도와주더라도 모든 것이 이것과 반대니 그 몸이 어찌 부귀해질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은 얼굴로 인해서 그 힘을 이루었고, 힘으로 인해서 그 얼굴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얼굴이 생긴 것을 보고 또 말하기를 '얼굴이 저렇게 생겨서 이룬 것이 저와 같다' 하니, 아아,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세상에선 뛰어난 재주와 덕을 가지고도 운수가 막히고 궁해서 그 덕과 재주를 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얼굴을 탓한다.
그러나 일반인이 관상법을 믿으면 그 직업을 잃게 되고, 지도자가 관상법을 믿으면 그 벗을 잃게 되고, 임금이 관상법을 믿으면 그 신하를 잃게 된다. |
|
|
글터 → 철학 / 사상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 중세의 사상
3. 해체기/양란-개항기 이전
3. 실학
학파의 형성과 연구 분야
실학 이론은 대체로 유형원에서 시작하고, 학파의 형성은 이익에서 시작한다. 실학의 학파는 크게 성호 학파와 북학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성호 학파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안정복, 황덕길, 허전 등으로 이어지고, 북학파는 홍대용, 박지원에서 박제가 등으로 이어졌다. 정약용은 이 두 학파의 흐름을 종합하였고, 이어서 김정희, 최한기 등을 거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다. 실학파에 속한 학자들의 연구 분야는 광범위하여 백과전서적 특성을 보여 준다. 새로운 경전 해석을 통한 주자학 비판, 조선의 역사, 지리, 문화, 군사, 언어, 풍속의 고증학적 연구, 조선의 정치, 경제, 군사, 민생 문제에 관한 개혁안, 청을 통해 들어온 유럽의 과학 기술 및 천주교의 소개와 연구 등이 이들의 관심 분야에 포괄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은 현실적으로 나라의 부강에 초점을 두었지만, 더 나아가 보면 큰 전쟁과 새롭게 전개되는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 안에서 조선의 자주적 의식을 반영한 활동이라 하겠다. 실학자들의 구체적인 개혁안은 토지 제도, 상공업 분야, 과거 제도, 신분 제도, 과학 기술 분야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토의 황폐화, 인구 감소, 유랑 농민의 증가, 질서의 혼란을 틈탄 토지 겸병 등으로 농업 생산력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되었고, 그리하여 17세기 중기부터는 새로운 형태의 토지 제도 개혁론이 나왔다.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박지원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이나 정전론 등은 이 분야에 대한 실학자들의 관심을 보여 주는 개혁안들이다. 토지 제도 개혁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는 토지 겸병과 지주-소작 제도의 확대를 막아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게 땅을 돌려 주는 일이었다. 이익은 "세력가와 부자에게 토지가 몰려 가난한 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고,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시대를 개탄하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실학자들의 토지 제도 개혁론은 농업 생산력의 문제뿐 아니라 조세 제도와 신분 문제까지 포함하는 경제 및 사회 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실학자들의 현실관을 더욱 잘 드러내는 것은 상공업에 대한 개혁안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왕조는 농업 생산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 수입의 중심은 단연 토지세와 인두세에 있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농업 생산과 재정 수입에 큰 차질이 있었음에도, 집권 세력은 여전히 왕조 초기의 중농억상 정책을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실학 사상가들은 반대로 상공업의 발전을 통해 국가 재정 수입을 증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지배 계급의 경제 기반을 위협하는 이론이어서 집권 세력은 이에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조선 왕조에서는 상공업 종사자인 경우 그 자손까지도 과거에 응시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한 채 무위도식하는 양반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음에도, 이런 제도의 경직성 때문에 그들은 생업을 갖기조차 힘들었다. 실학자들은 이러한 신분제적 직업관을 타파하여 직업과 사회 신분을 분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더 나아가 신분제 자체의 문제점을 비판, 사농공상 각 계층의 기능적 유기성을 강조하였다. 17세기 이후 정기적인 장시의 수가 전국적으로 늘어가자 조선 왕조는 농민이 상업 인구로 이동하는 것을 억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상설 시장이나 상설 상점을 지방의 도회지에 설치하여 농촌 상업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상공업의 발전과 연관된 새로운 생산 도구와 운송 수단을 개혁하고 해외통상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집권 세력의 보수성과 대비되는 실학자들의 개혁안들이었다. 과학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실학자들은 새로 소개된 서구의 학술을 수용하고 연구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서구의 자연 과학과 기술은 전혀 다른 역사 배경과 이론 기반을 가진 것으로, 일식이나 월식의 예보 등에서 실제적으로 유용성이 증명됨으로써 조선 실학자들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익,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최한기 등이 서구의 자연 과학 기술, 특히 천문역법, 수학, 의학 등에 보인 관심은 실학자들의 특징적인 경향을 보여 주는 한 대목이다.
문화적인 면에서 실학자들이 보인 관심은 장기적으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주적인 의식으로 무장하고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고대사에 대한 관심과 발해사 연구, 영토 의식을 깐 요동 지역에 대한 관심 등은, 국립 대학격인 성균관에서 19세기 말에 가서야 자기 나라 역사를 정식으로 교과목에 넣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선각자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
|
|
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등용문
본뜻 : 용문은 황하 상류에 있는 급류인데 잉어가 이곳에 특히 많이 모인다. 많은 잉어들이그 급류를 거슬러 오르려 하지만 급류를 거슬러 오르는 잉어는 거의 없다. 그러나 만약 이 급류를 거슬러 오르기만 하면 용으로 화한다고 한다. 이로부터 용문에 오른다는 것은 곧 크게 된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바뀐 뜻 : 입신출세나 벼슬길에 오르는 관문 등을 통과한 것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주로 대학 입시 시험을 통과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인다. 흔히 '인재를 뽑아 쓴다'는 뜻으로 쓰이는 '등용'과는 다른 말이다.
"보기글" -우리 아이들이 이번에 대입 등용문을 통과했지 뭐예요 -신춘 문예는 문단의 대표적인 등용문이다
막론
본뜻 : 본래의 뜻만 보자면 더 이상 의논을 않고 그만둔다는 뜻이다.
바뀐 뜻 : 오늘날에는 위에 설명한 본뜻 외에도 '이것저것 따져서 말할 것도 없이, 말할 나위도 없이'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보기글" -이제까지의 실수는 막론하고 앞으로 네가 할 일에 대해서 얘기해 보거라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진을 구해 오라면 구해 오는 거야!
|
|
|
글터 → 세계사 |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 이영재
가해자와 피해자의 풀리지 않는 송사 - 아랍인과 유태인
이스라엘의 건국과 아랍인의 저항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이 진행될 동안 유태인들은 천우신조의 기회를 맞고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의 조건들이 하나씩 마련된 것인데, 유태인의 건국 열망은 시오니즘(Zionism)으로 구체화되었다. 시온은 종교적 믿음이 견실한 자들이 도달하게 되는 유태교의 이상향이고, 과거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언덕 명칭이기도 하다. 시오니즘은 고향이자 성지인 예루살렘, 즉 팔레스타인 땅으로 되돌아가 조국을 건설하려던 유태인의 열망이 이념화된 것이다. 시오니즘은 유태교에서 말하는 신과 유태인의 약속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그 뿌리는 오래 된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정치 운동으로서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고 이 시기 시오니즘을 주도한 인물이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 1860~1904)이다. 그는 1896년 <유태인 국가>라는 문건을 통해 전세계 유태인 문제는 곧 유태인 국가를 건설할 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전세계 유태인을 열광시킨다.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시오니스트 회의를 바젤에서 개최한다. 유태인의 조국 건설을 향한 소망이 최초로 조직화된 것이다. 헤르츨은 단명했기에 오랫동안 시오니즘을 지휘하지는 못했지만 이스라엘 건국에 그의 노력이 크게 기여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오니즘의 최초의 공식적 성과는 1903년 가시화된다. 영국이 아프리카 우간다의 비거주지를 유태인의 나라로 제의한 것인데, 물론 시오니스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영국이 이처럼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은 시오니즘의 밝은 미래를 예고했다. 유태인들은 과거 자신들의 왕국이 건설되었던 지역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고집했고, 이런 시오니즘의 주장은 1917년 관철되기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국내외 유태인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영국이, 벨푸어 선언을 통해 최초로 유태인의 건국을 공식화한 것이다. 당시 영국 외상이던 벨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태인 국가를 세우는 것에 동의하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선언을 발표하였다.
1922년부터 국제 연맹의 위임 아래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후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본격화된다. 팔레스타인에 들어선 유태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동족들의 자금 지원을 받아 아랍인들에게서 토지를 사들이고 공업 및 거주 시설을 세운다. 1925년에는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수가 10만 명이고 1933년에는 24만 명 정도였으니, 이주민 증가 속도가 그리 빠른 것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유태인 이주를 가속화한 것은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과 학살 정책이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탄압 정책이 시작된 직후인 1935년 한 해에만도 6만 2,000명의 유태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대거 밀입국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치의 만행은 유태인과 시오니즘에 대한 전세계적인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유태인들이 독립 국가 건설을 천명한 1942년 빌트모어 회의는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는데, 이는 미국 내 유태인의 영향력 정도를 방증하는 사례만은 아니다. 유태인에 대한 전세계적인 동정 여론도 큰 몫을 했던 것이다. 경제력의 우위와 뜨거운 열망 그리고 국제적 지지를 업고 밀려오는 유태인에 대한 현지 거주 아랍인들의 저항은 점차 거세진다. 유엔은 1948년 초 유태인과 아랍인 국가의 분리 건립을 제의했지만 아랍인들은 당연히 거부했다. 그런데 영국이 유태인과 아랍인 사이의 분쟁 조정에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그 다음 날, 즉 1948년 5월 14일 유태인들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는 2,000년 동안 유태인들에게 가해졌던 숱한 박해의 원인인 유태인 국가의 부재를 씻는 역사적 쾌거였고, 전대미문의 기적과 같은 드라마가 창조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아랍인들이 점유한 땅이었다. 유태인들의 주장처럼 이스라엘 왕국이 앞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이 붕괴된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여러 국가의 영토가 되었다. 로마, 그리스, 시리아, 페르시아 등이 이 땅의 점령자였는데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638년부터 지배하기 시작했고, 16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터키 제국이 지배하는 동안에도 아랍인들이 수십만 명 살고 있었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영국의 위임 통치도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의 자치를 위한 준비 단계였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은 곧 독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지만, 영국과 유태인의 결탁이 밸푸어 선언을 낳았고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기대는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곳은 그들의 고향이었고 수백 년간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유태교의 성지인 예수살렘도 이미 이슬람화되어 제3의 성지로 여겨진 지 오래였다. 당연히 이슬람의 발생지 메카가 제1성지이고 무하마드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가 두 번째 성지이다. 예루살렘은 초기 이슬람 교도들이 기도할 때 얼굴을 향했던 곳이고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이기에 성지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아랍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유태인들이 막무가내로 밀려와 이스라엘을 세우고 거주민을 몰아 냈으니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 그래서 팔레스타인 거주민 뿐만 아니라 주위의 아랍 국가들도 집단적으로 거센 저항을 펼치게 된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그리고 트란스요르단(현재의 요르단) 등 5개국의 군대가 이슬람의 이름으로 유태교 국가 이스라엘을 향해 진격한 것이다.
중세에나 어울릴 `종교전쟁`이 20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것인데, 이 전쟁은 이슬람의 기본적 속성 중 하나를 드러내는 사례이다. 그런데 잠시 지면을 할애해서 확인할 그 기본 속성은 서양인들의 통념, 즉 이슬람의 생래적 호전성은 아니다. 그런 통념은 보기에 따라서는 조작된 것이며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의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리어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보다는 집단적인 무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이슬람의 종교적 특징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개괄할 필요가 있다.
|
|
|
글터 → 수필 |
끼있는 여자 지적인 여자가 아름다운 이유 : 소냐프리드만
4.남자의 마음을 도마 위에 놓고
어머니를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자립도
여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여성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같은 여자로서 그 사람의 문제를 이해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남성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정확히 포착할 수 없다. 판단할 자료가 거의 없는 외계인과 같은 것이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는 여성끼리의 개인차보다 훨씬 크다. 남성은 신체적으로도 여성만큼 극적인 변화를 겪지 않는다. 남성들의 친자 관계, 특별히 어머니와의 관계는 다소 이해하기가 힘들다. 남성에게 여성이라느 이미지를 처음으로 심어준 것은 그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남성 또한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자기의 인생뿐만 아니라 아내의 인생까지도 지배하는 존재라고 날 때부터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의 개성과 인생관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되어 진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것은 어머니에 의해 서이다. 어머니의 교육의 성과, 그것이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는 남성이다.
세상에는 아들에게 집착하는 어머니가 너무 많다.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이해하기 전에 우선 전통적인 결혼의 모형이 여성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대개의 경우 여성은 결혼생활에 실망하게 된다. 결혼 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즐기며 공동의 꿈을 갖고 서로 상대방만을 생각했었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남편은 아내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을뿐더러 집에 있는 시간도 별로 없다. 남자들은 결혼하면 아내에게 구속당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주말을 가족과 지내기보다는 친구와 힘께 있고 싶어하게 되고, 부부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남편의 마음이 아내에게서 떠남에 따라 새로운 인간관계가 만들어진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는 아이에게서 위안과 마음의 유대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은 부부생활에서 남편의 대리 역할을 해줄 수는 없지만, 자기를 필요로 하고 서로 마음이 통하는, 자기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없는 이성이다. 딸은 자기와 같은 운명을 가진 사람이지만, 아들은 자기 대신에 세계까지도 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이상화하고 정신적으로 밀착해 잇는 생활 속에서 아들의 여성에 대한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이다. 억압받고 있는 여성은 대개 자기 혐오에 빠져 있고, 그것은 분노나 경멸이라는 형태로 동성에게 향해진다. 그러한 생각은 돌고 돌아서 아들의 마음에 여성에 대한 혐오와 공포와 불신의 마음을 심어주는 것이다. |
|
|
글터 → 인물 |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1. 창업의 문
죽음으로 옥새를 지킨 혜빈 양씨
양씨의 본관은 청주이다. 현감 양경의 딸이고, 찬성사 양지수의 증손녀다. 세종 때 후궁으로 뽑혀 혜빈에 봉해졌고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낳았다. 세종 23년(1441)에 현덕왕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9일 만에 죽었다. 세종이 빈 중에서 양씨를 택하여 원손을 기르게 하였다. 양씨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단종을 길렀다. 단종이 덕을 갖추어 잘 성장한 것은 실로 양씨의 공이 컸다. 세종과 문종이 차례로 승하하고 을해년(1455)에 세조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혜빈에게 옥새를 바치라고 하였다.
"옥새는 나라의 중한 보물입니다. 선왕(세종)께서 세자와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옥새를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혜빈은 목숨을 걸고 옥새를 지키다가 피살되었다. 그 아들 영풍군은 이때 운검으로서 입시중이었는데 동시에 죽음을 당하고 한남군은 함양에 유배되었다가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피살되었다.
정조 15년(1791)에 혜빈에게 민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
|
글터 → 이글저글 |
3퍼센트의 진실
경구의 대가로 꼽히는 '리히텐베르크' (1742-1799)가 한 번은 1년치의 신문을 한데 엮어 한 권의 책처럼 처음부터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의 인상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아마도 신문의 축쇄판을 맨 먼저 필요로 한 사람이 그였던 모양이다. 그는 신문을 끝까지 훑어본 다음에 말했다.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수고한 보람을 찾지 못했다. 내가 얻은 것은 50퍼센트의 그릇된 희망과 47퍼센트의 그릇된 예언, 그리고 3퍼센트의 진실뿐이었다."
오늘날의 신문에 있어서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 가지 예로 지난 67년 대통령 선거 때, 여야 후보의 강연회에서 동원된 청중 수에 신경을 쓴 나머지 도하 각 신문에 보도된 숫자가 중구난방이어서 웃음거리가 된 것은 아직도 기억에 새로운 일. 그밖에도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신문보도의 진실성이 문제될수록 음미해 봄직한 명구이기도 하다.
|
|
|
글터 → 명상/지혜/처세 |
나를 변화시키는 3분 - 하나오카다이가쿠
제2장 내가달라져야 하는 이유
일등을 하고도 나서지 않은 사람
미국 제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는 '과묵한 칼'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청년 시절의 쿨리지가 해먼드라는 변호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무렵 공화당이 전국에서 현상 논문을 모집 중이었다. 쿨리지는 몰래 그 현상 모집에 응모했는데 멋지게 일등으로 입선되었다. 그 기사가 신문에 크게 게재된 것을 본 변호사 해먼드는 그 영예의 입선자가 자신의 직원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농담 삼아 말했다.
"여기 일등 입선으로 금메달을 받은 사람 이름이 쿨리지라고 하는데, 설마 자네는 아니겠지?" 그러자 쿨리지는 얼굴을 붉히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사실은 접니다." 해먼드는 놀라서 되물었다. "뭐라고? 이렇게 대단한 영에를 얻고도 왜 말하지 않았나?" 쿨리지는 더욱 부끄러워하면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이런 일에 별로 흥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잠자코 있었습니다."
큰 기쁨을 얻었다고 그것을 남에게 알린들 사람이란 본디 남의 기쁨 따위를 별로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기쁨을 얻으면 그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광고 본능을 지니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솔하게도 그런 기쁜 일이 생긴 것은 다 자신의 뛰어난 재능 때문이라고 과장해서 떠벌리기도 한다. 나중에 다시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기 힘들지만, 자신의 기쁨과 재능을 남에게 강요하려고 잔꾀를 부리기도 한다. 그런 본능의 꼭두각시가 되어 춤추는 자신을 문득 깨달았을 때, 우리는 견디기 힘든 자기 혐오에 빠져들기도 한다. 때문에 쿨리지의 작은 일화가 빛나 보이는 것이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이것저것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우리는 겸손하게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과묵한 칼'의 자세를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중시하여야한다.
|
|
|
그림과 사진 → 풍경 - 물, 하늘 |
[ 그림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