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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 165 호
단기 4340. 4. 2 (음력 02.15) / 발송인 : 윤영환 (poemserver@paran.com) / Music Off =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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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 |
편지에 행복을 첨부할 수 있다면 동봉하고 싶습니다.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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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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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명언 / 격언 |
독창성이란 탐험되지 않은 땅. 카누를 타고는 갈수 있지만 택시를 타고는 도달할 수 없는 곳. / 앨런 앨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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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고전/구비/신화 |
老子 - 道德經 : 第五十四章 (노자 - 도덕경 : 제5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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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建者不拔, 善抱者不脫, 子孫以祭祀不輟, 修之於身, 其德乃眞, 修之於家, 其德乃餘, 修之於鄕, 其德乃長, 修之於國, 其德乃豊, 修之於天下, 其德乃普, 故以身觀身, 以家觀家, 以鄕觀鄕, 以國觀國, 以天下觀天下, 吾何以知天下然哉, 以此.
선건자불발, 선포자불탈, 자손이제사불철, 수지어신, 기덕내진, 수지어가, 기덕내여, 수지어향, 기덕내장, 수지어국, 기덕내풍, 수지어천하, 기덕내보, 고이신관신, 이가관가, 이향관향, 이국관국, 이천하관천하, 오하이지천하연재, 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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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멈추는 순간 사라진다 - 유재용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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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넷째 장
직역
잘 심는자의 것은 뽑을 수 없고, 잘 껴안는 자의 것은 빼았을 수 없다. 자손이 제사지내는 것이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몸에 닦으면 그 덕이 진실하고, 그것을 집에 닦으면 그 덕이 남고,그것을 마을에 닦으면 그 덕이 자라고, 그것을 나라에 닦으면 그 덕이 풍요롭게 되고 그것을 천하에 닦으면 그 덕이 드넓게 된다. 그러므로 그 몸으로 몸을 볼 것이오, 그 집으로 집을 볼 것이오, 그 마을로 마을을 볼 것이오, 그 나라로 나라를 볼 것이오, 그 천하로 천하를 볼 것이다. 내가 어찌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알겠는가. 이것일 뿐이다.
해석
이장은 개벽장이다. 전철연의 개벽전사들의 도움으로 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장의 대부분의 설명이 개벽전사들의 머리에서 나온것임을 밝히는 바이다. 모를 잘심는 자는 땅과 모가 분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잘 껴안는 자는 껴안는 자와 안기는 것에 분리를 두지 않는다. 두 개가 하나로 합일된다. 따라서 뽑을 수 없고, 뺐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두 개는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무에 못질을 한다. 못질을 아주 잘하는 사람은 나무에 못질을 했는지 알아보지 못하게 못질을 한다. 이렇게 잘하는 것은 누구나 배울려고 한다. 따라서 그 길은 계속이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방법에 따라서 행한다. 이것은 체득이다. 그래서 그것(잘심고 잘껴안는 것)을 내몸에 닦으라고 한 것이다. 덕은 남이 닦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닦는 것이다. 남이 심는 것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모를 심어 땅과 모가 분리가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느낌으로만 전수될 수 있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남이 타는 것을 아무리 구경해도 자신이 잘타진 못한다. 용기를 내어서 한 번 타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고 그 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자신의 몸에 닦으라고 한 것이다. 스스로 느껴보아야 한다. 그래야 그것이 참된지 참되지 않은지 않다. 음식을 먹어보지도 않고 맛을 알수는 없는 것이다. 집에 닦으면 덕이 남음이 있다. 나를 보고서 가족이 따라한다. 이것은 자신의 완성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됨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따라한다. 유익한 기술은 서로 배울려고 난리를 친다. 이것이 점점퍼져나가서 천하에 드넓게 퍼진다.
이때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마라. 그 집으로 그집을 보아라. 그 옆에 집이 움막이라고하여 그 집을 높게 보지 말고, 그 옆이 대궐같은 집이라고 해서 그 집을 천하게 보지마라. 선입관을 가지지마라. 비교해서 살피지마라. 자신이 얻은 만큼 알면 된다. 굳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을 가릴 필요가 없다. 자신의 길을 가면 된다.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알지 못한다. 노자도 하늘아래의 그러함을 알지 못한다. 그러함은 하늘의 덕이 두루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노자가 어찌 아는가. 노자는 스스로 모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본것만을 말한다. 자신이 본 몸과 마을 고을 나라를 말할 뿐이다. 다른 세계에 다른 사람은 자신이 본바와 다를 수 있다. 자신이 말한 것과 전혀 다른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여유가 있다. 하늘 아래의 그러함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단지 그가 본것만을 말할 뿐이다. 그 몸으로 몸을 말할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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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래된 글 가장 새로운 글 노자 - 김석환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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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제대로 세운 것은 뽑히는 일이 없고, 제대로 안은 것은 빠지는 일이 없다. 이러한 도를 자손에게 전하여 제대로 잘 지키면 집안이 번창하여 제사가 그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로써 집안을 다스리면 그의 덕은 넉넉할 것이다. 이러한 도로써 고을을 다스리면 그 덕은 커질 것이다. 이러한 도로써 천하를 다스리면 그 덕은 넓게 퍼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몸을 미루어서 남의 몸을 살피고, 내 집안 일을 미루어서 남의 집안 일을 살피며, 내 고을 일을 미루어서 남의 고을 일을 살피고, 내 나라 일을 미루어서 남의 나라 일을 살피며, 천하 만백성의 마음을 미루어서 천하의 도를 살핀다. 나는 어떻게 천하가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바로 이와 같은 도의 위대한 공덕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주
선포자불탈: 참으로 잘 체득된 도는 빠져나가는 법이 없다. 포는 도를 간직하고 지키는 것을 뜻함. 철: 그치다, 멈추다. 이차: 위에서 말한 도의 위대한 공덕으로 이 세상의 일을 알 수 있다는 뜻임.
해
잘 세운 것은 쉽사리 쓰러지지 않고, 잘 끌어안은 것은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속에 잘 심어지고 체득된 도는 우리를 지탱케 해주는 등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참된 도에서 나온 참된 덕을 지닌다면 자자손손이 그 음덕으로 번창하여, 오래오래 제사가 이어지는 죽은 후의 경사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각자가 자기 몸의 덕으로 집안을 다스리고, 그것을 마음을 닦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몸을 살피고 미루어서 남의 처지를 알게 되면, 천하의 모든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이 장은 대학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와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의 마을을 헤아려 본다는 혈구 지도를 연상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은 후세의 유가의 영향을 받은 이의 논술이 삽입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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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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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3장 서양인의 수집
구미미술관에 들어가 있는 한국불화들
1970년대초 국립중앙박물관은 구미 각국의 주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불화들 가운데 현재 국내에선 하나도 확실한 것이 보존돼 있지 못한 고려시대의 것들이 적지 않음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71년 7월, 미국의 여러 미술관을 시찰하러 떠났던 황수영 관장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둥양관의 일본인 불화전문가 호리오카로부터 한국 전문가의 평가와 의견을 듣고 싶다는 구미미술관 소장의 한국 불화 약 50점의 사진을 복사해 받았다. 황관장이 미국에서 가져온 한국불화의 사진을 검토한 박물관의 전문가 최순우·정양모 학예연구관은 그중의 적어도 5∼6점은 분명히 고려 때 것이고 다른 10여 점은 조선 전기 것으로 보았다. 호리오카가 조사한 구미의 한국불화 소장 미술관은 그가 연구원으로 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해서 미국 안의 프리어미술관, 클리블랜드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호놀룰루미술관 외에 영국의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 독일의 베를린미술관, 벨기에의 브뤼셀미술관 등이었다. 언제 어떤 경로로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기왕에 한국에서 유출된, 국내에도 없는 귀중한 불화들이 구미의 큰 미술관에 잘 보존돼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오늘의 국내 학도로서 우리의 옛 불화를 연구하려면 불가피 일본이나 구미로 찾아가야 하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외국의 미술관 혹은 개인에게 유출돼 있는 한국불화의 대부분이 구한말 이후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약탈당했거나 일부 어리석은 중들이 그들에게 매수되어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의 일부가 일본을 통해서 구미로 전매돼 나간 것이다. 구한말 이후, 이 땅에서 각종 역사 문화재 약탈로 일확천금을 꿈꾸던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가장 손쉽고 가벼운 약탈대상의 하나가 불화였다. 큰 불상이나 석탑 같은 것을 불법반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불화는 돌돌 말면 한 손에 잡히는 가벼운 물건이었다. 한 예로 양산 통도시의 불화들이 일본인 무법자에게 약탈당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한 때였다. 1903년 2월에 일본에서 발행된 (고고계)란 잡지에 당시 도쿄 제실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불법반출의 통도사 불화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조선불화는 본시 경남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본존 2체외에 성상 혹은 천부수호신 같은 것도 있다. 또 악기를 갖고 있는 보살상 같은 것도 있다. 시대는 3백 년 전쯤 되어 보이며 착색이 선미하고 뵤법도 훌륭하여 한번 볼 만하다."
한국에서의 일본인들의 문화대 약탈과 일본으로의 불법반출은 구한말에 서울에 와 있던 서양인 외교관과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릿가 높았던 것 같다. 1906년 12월의 황태자 혼례식에 특사로 왔던 당시 일본 궁애상 다나카가 새성 남쪽의 풍덕에서 경천사 십층섭탑을 일제의 무력과 일본인 골동상을 앞세워 약탈해 갔던 사건은 이미 앞에서 소개했지만, 1907년 5월 28일자 일본의 (후쿠오카 일일신문)에 보도되었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1970년대초 서울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에서 발견되었다.
"과반, 한국의 황태자 전하 어혼례 때 특사로 파건되었던 다나카 궁내상은 그때 한국의 역사상 국보인 백옥제(흰 대리석) 다층탑이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 그 진품에 침을 흘린 나머지 둘 중의 하나인 경기도 풍덕에 있는 것을 지난 2월 4일 서울에 거주하고 고물상(일본인)으로 하여금 군민의ㅣ 저항을 물리치고 다소의 무력도 사용하여 무난히 인천으로 빼내고, 3월 15일 도쿄에 도착시켰는데, 이 탑은 값으로 치면 200만 원을 호가할 만큼 희귀한 진품인데다가 다나카가 그것을 반출해 오는 과정의 수속이 의심스러워 목하 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 비난의 소리가 높다는 것이고, 그곳(미국)에 체재 중인 구로키 대장 같은 이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몰려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한국문화재 약탈 내막을 폭로한 미국의 신문보도에 당시 일본정부는 몹시 당황했던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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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철학 |
강좌 한국철학 : 사상, 역사, 논쟁의 세계로 초대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4.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종교의 하나이며, 관련된 문헌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불교는 대립되는 사상이나 이질적 문화와 광범위하게 접촉하면서 다양하게 변화해 왔으며, 아울러 그러한 변화를 끊임없이 자기화하여 그 폭과 깊이를 더해 오는 등 연속적인 발전의 역사를 가졌다. 심지어 상호 모순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여러 다양성을 폭 넓게 껴안으면서도 불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다. 불교의 정체성은 석가의 언설로 여겨지는 "아함경"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 흔히 근본 불교라 불리는 이 부분의 사상 내용은 연기, 사성제, 팔정도, 중도 사상 등의 교설로 대표된다. 그러나 불교사의 전개 과정에서 근본 불교의 이러한 중심 사상은 부파 불교와 대승 불교의 단계를 거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입장을 달리하는 불교권 내의 분파적 대립과 다른 종교의 비판에 대응하면서 이론의 논리성과 조직성이 훨씬 치밀해졌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매우 정체된 새로운 개념을 개발하여 그 철학적 사색을 진작시키기도 했다. 더구나 인도의 불교가 서역과 중국에 전파되면서 그 지역 문화와 접촉하여 다양한 변증을 시험하고, 마침내 성공적인 자기 사상의 확대 재생산을 다각도로 입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의 정체성을 보증할 만한 초기의 중심 사상은 외견상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석가에 의해 제시된 초기의 이론들이 후기 불교에서 직접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 내재된 근본 정신과 목표만은 더욱 세차게 추구되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불교의 전체적 모습과 본질을 알아보기 위해 근본 불교의 중심 사상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파 불교, 대승 불교, 중국 불교를 통해 어떻게 계승 발전되었는지를 함께 고찰해 볼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 불교가 어떻게 수용되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한국 사상사에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고, 나아가 한국 불교의 독특한 모습을 그려 낼 수 있을 것이다.
1. 근본 불교의 중심 사상
기원전 6세기 석가가 창도한 불교는 전래된 일반적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도 없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이는 당시의 인도의 전통 사상에서 볼 때 매우 획기적인 가르침이었다. 전래된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으로는 윤회설과 업설, 그리고 해탈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인생관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 불교의 새로운 주장이며 획기적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불평등한 계급적 인간관을 평등한 인간관으로, 신 중심의 세계관을 인간 중심적인 연기의 세계관으로, 고행을 중심으로 하는 수행관을 중도의 수행관으로, 내세적 해탈관을 현세적 해탈관으로 전환시킨 부분이다. 그러나 전통적 관념을 수용한 전자의 부분도 후자의 새로운 사상이 그 내용으로 들어감으로써 많은 면에서 의미가 변화되었다. 그러니까 불교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후자의 사상이며 전자는 그 전체 혹은 설명의 수단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석가에 의해 새롭게 제기된 가르침 중에서도 중심적인 것은 연기관인데, 이것은 석가의 깨달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 흔히 인과응보로 말해지는 이 연기관은 두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불교의 목표인 해탈에 직결되어 나타나는 연기적 인간관과 수행관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으로는 해탈에 연결되지만 직접적으로는 세계의 존재를 규명하는 연기적 세계관 혹은 연기적 존재론이다. 먼저 연기적 인간관과 수행관을 살펴보자. 초기 불교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12지연기설도 바로 해탈을 시급한 과제로 삼는 삶의 문제에서 나타난 것으로, 그 해결을 위해 삶의 현실적 구조를 연기로 해석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하여 노사로 매듭되는 12지연기의 각 과정은 존재에 관한 일반적 논의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틀을 통해 세계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그 속에서 현실적 인간의 삶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지를 밝히는 이론이다. 즉 이것을 통해 불교는 현실의 인간이 본래적 삶에서 벗어나 있다는 소외론적 인간관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2지연기설은 동시에 왜곡된 삶의 구조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밝혀 주기도 한다. 말하자면 소외된 삶으로부터 본래적 삶으로 환원해 가는 수행의 방법을 인간의 생래적 틀과 관련 지어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연기적 수행론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연기론이 존재 일반에 적용되어 해석될 때, 모든 존재는 다만 조건적으로 연계된 한 현상일 뿐이고 또 그것들의 상호 관계도 결코 우연적이 아니라는 관점이 형성된다. 이와 같이 존재의 실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독특한 연기적 세계관(존재론)은 근본 불교에서 주로 '제법무아'(초기에는 개체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의미가 강조)로 표현되다가, 대승 불교에 오게 되면서 존재론의 측면이 더 강하게 부각된 '공' 개념으로 재해석되어 광범위하게 쓰임으로써 불교적 세계관 자체를 확대 심화시켰던 것이다. 연기적 존재론에서는 세계가 어떠한 정점에서 시작한다는 창조론적 해석이나 혹은 정점으로 환원시키려는 환원주의적 해석과 같은 유한론적 사고 방법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정점의 위치에 반드시 신격을 배치할 필요도 없다. 존재의 연속을 담보해 주는 것은 존재 외적인 제삼의 힘이 아니라 존재 내적인 법칙임을 강조하며, 연기론적 존재론의 당연한 귀결로서 무한 우주관을 권유한다. 시공간적으로 무한히 확장되고 또 무한히 순환하는 이러한 우주론에서는 생명의 의미마저 무한 세계 속에 해체시켜 버리기 쉽다. 그러나 불교는 바로 이러한 우주론적 무대에서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재정립하고 있다. 불교는 생명의 유한성 때문에 현생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무한적으로 반복하는 악순환의 구조에서도 탈출할 수 있고 또 어느 시점에서도 그러한 탈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의미있다는 것이다. 특히 대승 불교에서는 생명의 재탄생(해탈)이 순간에서의 질적 전환(깨달음)에서 오는 것이지, 양적인 시공간의 축적(예컨대 여러 생을 거듭한 수행 결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불교 사상의 중핵적 위치에 놓여 있는 연기론이 가진 진정한 의의는 이 연기적 세계관을 업설과 연계시켜 새로운 인간관을 제시한 점에 있다. 인도의 전통적 인간관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삶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한 개체로서의 인간은 그를 에워싼 거대한 자연의 힘이나 그것을 관리하는 신의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삶에 나타나는 문제를 자신의 결정과 의지와 노력보다는 신의 힘에 의존하여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갖가지 종교적 행위를 통해 먼저 신의 뜻을 움직여야 했다. 연기적 세계관에 기초한 불교의 업설은 바로 이러한 전통의 인간관을 거부한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당사자가 행한 것에 정확히 상응하여 결과를 얻을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타자의 행위가 효과를 미치지도 않으며, 효과의 정도는 행위한 것만큼만 나타나지 결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도 우연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고 예외 없이 상응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힘 이외에 어떠한 다른 힘도 기대해서는 안 되며 기대할 필요도 없다. 인간은 자기 삶의 완벽한 주인이며 유일한 책임자이다.
이러한 불교의 새로운 인간관은 자연의 거대한 위력 앞에 인간의 한계를 냉엄한 논리로 철저하게 인식시켜 인간을 왜소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하지만 불교 인간관의 핵심은 오히려 그 반대에 있다. 인간에게 부가되는 온갖 문제도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해결책도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획득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힘은 거대한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는 놀라운 힘이기도 하다. 석가는 이러한 능력을 두고 "정말로 기이하고 기이하다.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탄성을 발했다. 마지막으로 근본 불교의 중도 사상을 알아보자. 석가는 출가 이전 왕궁에서의 쾌락적 삶과 출가 초기 고행주의적 수행을 함께 경험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정신적 부문과 육체적 부문이 유기체로서의 인간 안에서 상응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이라는 정신적 성취는 결코 육체적 변화의 연장선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석가는 대립적 현상은 대립하고 있는 대상 그 자체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인간 마음의 작용 양식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마음은 대상을 향해 언제나 극단까지 치달리며, 또 그러는 동안 자기의 노선에 강력하게 집착되어 버린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즉 깨달음이란 마음의 문제인데 극단화된 마음의 작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중도 사상이란 결국 대상화된 양 극단의 적절한 균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으로 치달리지 않는 안정된 마음을 유지하는 데서 깨달음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석가는 이것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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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도움 → 한글 바로쓰기 |
한눈팔다
본뜻 : 한눈은, 당연히 볼 데를 보지 않고 딴 데를 보는 눈이라는 뜻이다.
바뀐 뜻 : 볼 곳을 보지 않고 딴 곳을 보는 것이나, 일을 하다 말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갖거나빠지는 것을 말한다.
"보기글"
-당신, 지금 그림은 보지 않고 어디에 한눈을 팔고 있는 거예요? -컴퓨터니 기타니 그런 데다 한눈을 팔고서야 어디 제대로 공부가 되겠니?
한 손
본뜻 : 물건 두 개를 한 단위로 세는 것을 말한다. 본래는 생선뿐만 아니라 배추, 미나리 등을 두 개를 묶어 세는 단위로 쓰이던 것이 오늘날에 와서는 생선 두 마리를 세는 단위로만 쓰인다. 배추나 미나리 등의 채소는 짚으로 묶어서 '한 단'이라는 단위를 쓴다.
바뀐 뜻 : 보통 큰 것 하나, 작은 것 하나를 한 손에 쥘 수 있다고 하여 한 손이라고 한다. 생선을 소금에 절인 자반 같은 것은 내장을 다 빼고 큰 고기 안에 작은 것을 넣어 '굴비 한 손' '고등어 한 손'이라고 부른다.
"보기글" -얘야, 오늘 장에 가거든 굴비 한 손만 사 오거라 -고등어 한 손에 얼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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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 → 세계사 |
역사 속의 말, 말 속의 역사 - 김덕수, 송충기 지음
8.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행되지 않는다
마상의 절대정신
역사에서 영웅들의 행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할까? 그리고 프랑스혁명 후 등장한 나폴레옹은 과연 진정한 영웅이었을까? 변증법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영웅적인 인물에 크게 매료되었다. 특히 당시의 역사적 인물이었던 나폴레옹에 크게 심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헤겔은 나폴레옹과 감격적인 조우를 했다. 1806년 예나 근처의 대전투에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에 패배하여 패망을 앞두고 있었다. 헤겔은 그 당시 자신의 첫 번째 책인 "정신현상학"을 집필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나폴레옹이 예나에 입성하기 전날 밤 집필을 마쳤다. 그는 집필을 끝내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나폴레옹을 직접 본 것이다. 이날의 감격을 헤겔은 평생 친구인 니이트함머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말에 올라앉아 세계를 넘나보면서 이를 송두리째 지배하고자 오직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위대한 개인을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실로 말할 수 없는 감흥이었네."
그는 말 위에 있는 세계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후 그는 나폴레옹이 유럽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역시 니이트함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큰 사건이 벌어졌다. 위대한 천재가 파멸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일이다. 무지한 대중들이 저기 높이 서 있는 황제를 저 아래로 끌어내리고 있다. 이것은 역사 전체의 전환점이다. 대중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위대한 개성조차 몰락하지 않을 수 없다."
나폴레옹에 대한 깊은 동정이 구구절절 스며 있다. 왜 헤겔은 나폴레옹을 그토록 극구 찬양했을까? 물론 나폴레옹을 찬양했던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60세에 가까웠던 대문호 괴테도 나폴레옹을 찬양했고, 헤겔과 거의 동년배인 베토벤도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인 <영웅>을 그에게 바치려고 했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하는 것을 보고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글'이 적힌 표지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가 황제에 올랐다는 말을 듣고 베토벤은 그 헌사를 찢어내고 제목을 '어느 영웅의 추억을 찬양하기 위한 영웅적 교향곡'이라고 고쳤다. 나폴레옹의 최후가 알려지자, 그는 "내 교향곡에는 그의 운명이 이미 예시되어 있었다."고 했다는데, 그것은 영국 교향곡 제2악장이 장송행진곡이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제2악장이 영웅의 죽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조국에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베토벤과는 달리 헤겔은 나폴레옹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 심취했다. 이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헤겔이 그를 그토록 찬양한 것은 나폴레옹 개인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를 세계정신이 구현되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나폴레옹이야말로 당시의 세계정신을 구현하고 있었다. 헤겔에 의하면, 개인적인 영웅이 세계정신을 구현하긴 하지만, 역사가 개인의 의도대로 항상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에는 '이성의 교묘한 술수'가 작용한다. 그래서 세계정신은 흔히 개인의 의도나 목적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진행되곤 한다. 세계사에는 많은 개인들이 등장하지만 모두 다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나폴레옹의 패배도 이와 같이 '이성의 교묘한 술수'가 작용한 결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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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 강계순
신화의 거리에서
고대문명의 발상지 그리스의 아테네는 남국의 정취와 무성한 꽃들, 고대의 신전들과 원형극장 등, 수많은 고적들로 여행객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아벨라르. 나는 그리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마치 신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신비한 기분으로 거의 꿈을 꾸고 있는 듯했습니다. 현실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몇 천년 전의 고대로 되돌아가 신화 속에 나오는 님프가 된 듯한 황홀한 상상 속에서 나는 몹시 자유롭고 신선한 느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경제를 거의 반 이상 관광수입으로 지탱하고 있을 만큼 아테네에는 세계 각 나라로부터 많은 관광객들이 와서 붐비고 있었습니다. 반나의 차림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바쁜 일이 없는 것처럼 한가하게 보였고,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여는 곳도 퍽 드물었으며, 해가 지기 전에 일찌감치 문을 닫아 버리는 상점들의 표정은 돈을 많이 벌어 보겠다는 욕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신전으로 오르는 길에는 곳곳에 대리석들이 깔려 있었고 무너진 성터에는 그 성터마다 아름다운 신화가 살아서 숨쉬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정교한 조각, 웅대한 건축양식에서 유럽문화의 발상지였던 옛 그리스의 영화를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와 소포클레스(Sophocles. 496?~406 B.C. 고대 그리스의 시인)가 걸었을 아테네의 거리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아 있는 진리와 예술의 위대함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도 가졌습니다.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제국도 그리스의 문화를 수행했다는 사실은 이나라의 문화가 어떠했는가를 증명해 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밝고 우아한 에게(Aegean) 문명의 발상지였던 에게해, 거기에는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옛날의 건축양식이 제일 많이 남아 있다는 에기나(Egina), 포르스(Poros), 히드라(Hydra) 등의 섬은 정말 그림 같은 풍물이었습니다. 당신도 편력하셨다던 그 섬들을 둘러보기 위하여 배를 타고 에게해 위를 떠다니면서 잘 익은 포도 빛깔과도 같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잉크빛과도 같은 바닷물 가운데서 갑자기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가 불쑥 일어설 것 같은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 바다와 그 햇살은 능히 신화가 탄생할 만큼 아름다와서, 나는 갑판 위에 올라가 뜨거운 햇빛에 몸을 태우면서, 표류하는 오디세우스(Odysseus:호머의 작품 <오딧세이> 속에 나오는 주인공)가 듣던 사이렌(Siren)의 노래를 듣는 듯했습니다. 반인반수의 사이렌이 신비하고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면 우리는 그 노래에 도취되어 드디어 뱃길을 잃고 표류하는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꿈 같은 상상 속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은 하프의 음률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에게해를 건너다니는 바람소리조차 신전에 바치는 음악소리처럼 들리던 그 오후의 갑판 위에서 나는 당신이 쏜 큐피트의 화살로 가슴을 앓으며, 수많은 고난을 견디어 낸 다음 비로소 사랑을 성취한 프시케(Psyche)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벨라르. 에게 바다 위의 뜨겁고 감미로운 바람 속에서 나는 반나의 몸으로 눈을 감고 누워서 빛나는 날개를 달고 내 옆에 오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프시케가 캄캄한 밤중에만 그의 신랑을 맞이해야 하고 그 모습은 결코 볼 수가 없었던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 나는 상상 속에서 당신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디오니소스(Dionysos. 술과 연극의 신)의 축제 속에서 마음껏 포도주에 취하여 음악의 신 아폴론(Apollon)이 어디선가 아름다운 하프를 켜면서 다가올 것 같은 환상적인 방에는 나 또한 고대 그리스의 산야에서 자유와 기쁨의 생활을 누리던 작은 님프가 된 듯했습니다. 그리스의 신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사랑과 질투, 그리움과 용서, 전쟁과 복수 등,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화에 대하여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사랑의 신화로 유명한 올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신묘한 황금 하프를 켜면서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와 행복하게 살았던 올페우스는 그의 아내가 먼저 죽어 저승으로 떠나자 그 슬픔과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의 나라에까지 찾아가서, 죽음의 신 하데스(Hades) 왕에게 간청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해낼 수 있었으나, 인간의 나라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므로 영영 아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이 신화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그리움, 또 사랑을 위해서는 죽음의 나라에까지도 찾아갈 수 있는 용기와 모험을 암시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음악은 반드시 하프로 연주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합니다. 신화 속에는, 하늘의 지배자인 제우스신의 막내 아들 헤르메스가 갓난아이였을 때 거북의 껍데기에 소의 힘줄로 줄을 매어 그것을 퉁기고 놀았던 것이 바로 하프의 시초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후 아폴론이 헤르메스로부터 하프를 얻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하프를 켜면서, 음악과 노래의 수호신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프가 갖고 있는 특이한 음색과 울림은 아름다운 그리스 신화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고 있지요. 거리 거리에서 혹은 신전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조각 같은 그리스인들을 보면 그들이 모두 신화 속에 나오는 신들의 자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하프의 음률이 들리는 듯하여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곤 했습니다.
아벨라르. 이 신화의 나라에서, 나는 올림프스 산의 신에게 간청하여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신탁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제단 앞에 꿇어앉아 고요히 신탁을 기다리고 싶었습니다. 아모르(Amor. 큐피트)와 프시케처럼, 올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부드러운 풀들이 흔들리는 언덕 위에서 하프의 멜로디를 들으며 사랑의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비록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얼마나 황홀할까요?
아벨라르. 당신이 만일 에게 바다의 바람을 맞고 허물어진 신전의 대리석에 발을 디디게 되면, 아마 당신 속에서도 이상하고 신비스런 소망이 우러 나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스는 신화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나라이며, 곳곳에 그 신화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에게 바다의 바람에 닿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몇 천 년 전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허망하고 불가능한 꿈을, 그 햇살과 바람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바꾸어 놓고 싶은 열망을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유일신인 그리스도교의 엄격한 계율과는 달리, 얼마든지 인간적이고 얼마든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이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우리의 사랑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쓸쓸히 웃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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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본승의 조선사 나들이
명성황후 시해, 그 '여우사냥'의 비밀
대원군의 탐욕 (1/2)
어떤 개인에게도 경험의 축적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한 국가의 발전에도 경험의 축적은 중대한 의미를 갖게 한다. 거기서 국가기능과 관리의 노하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개항하는 과정인 '명치유신'은 그들 스스로에 의해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의 개항과정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명치유신이 성사되어야 하는 근원적인 명분은 장장 3백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고, 왕정을 복고하자는 이른바 '존황토막'이라는 선동적인 깃발을 올린다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도쿠가와막부의 부패와 탄압에 시달리던 사족(사무라이)과 백성들은 한마음으로 궐기할 수가 있었고, 이로 인한 3백여 회의 무력충돌을 치르어야 하는 뼈아픈 혼란도 훌륭하게 극복할 수가 있었다. 게다가 '존황토막'을 주도한 선각자들이 그대로 개항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명치유신의 성공이 곧 개항과 개혁으로 이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 체험이 신생 일본국을 번영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또 그 체험이 오늘의 일본을 지탱하는 노하우가 돈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여기에 비한다면 우리 민족의 개항과정에는 '존황토막'과 같은 혁명적인 기치를 올릴 수 있는 명분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왕정을 타도하자는 기치를 세우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충이 되는 것이었고, 사대부를 지배계급으로 하는 이른바 신분의 벽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해도 발벗고 나서야 할 상민, 천민들이 머뭇거리기만 할 뿐, 스스로 궐기하고자 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인간적으로 대해 준 상전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한국적인 정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에 조선의 개항은 외세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개항은 자주개항의 3대 요소라고 일컬어지는 항구의 개항(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일), 철로의 개설(산업화를 앞당기는 일), 은행을 설치하여 새로운 금융제도를 확립(편리한 삶을 누리게 하는 일)하는 등 자주적인 개항을 실행해야만 체험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인을 외세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나라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경험과 경쟁력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던 것이다. 물론 '동학농민혁명', '갑신정변'과 같은 자주적인 개화의지가 분출된 일도 있었으나 그 모처럼의 기회마저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점은 진실로 뼈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명치유신'이 성공하자 수많은 외국인 사절들과 장사치들이 일본땅으로 몰려들게 된다. 그것은 서양의 문물이 밀려드는 소용돌이기도 하였다. 근대적인 학교가 세워지면서 서양식 양복이 성행되고, 석유를 사용하는 램프가 쓰여지는 등 풍물의 급격한 변화도 병행될 수밖에 없었다. 서양식 사교춤인 댄스가 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구열강의 풍속인 댄스파티가 외교의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자, 일본정부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외무대신이었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댄스파티를 할 수 있는 건물을 짓고 이름하여 '녹명관'이라 하였고, 일본정부의 고관부인들에게 애원하듯 설득하여 그녀들에게 댄스를 교습하게 하면서까지 서양의 문물을 근대국가 건설에 유용하게 쓸 줄 알았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주도되었던 양이, 보국정책의 빛이 바래면서 조선정부도 일본국과 새로운 방식의 수교를 하게 되었고 뒤이어 미국과도 수교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땅에도 미국인 사절들이 들어오게 되었지만, 워낙 완고하고 가난했던 조선땅이라 서양의 문물이 싹틀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들은 예수교의 전파를 위해 조선인 백성들과 직접 접촉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서양의 문물이 싹트게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역시 서양의 의술이었다. 조선땅에 발을 들여 놓은 첫 양의, 그가 바로 26세의 미국인 알렌이었다. 알렌,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 멜라웨어 출신이다.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신학과를 거쳐, 북장로교 외국선교부 의료선교사의 자격으로 중국 상해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하다가 고종 18년 9월 22일에 인천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알렌은 주한 미국공사 푸트의 보호를 받고 있다가 우정국 청사의 낙성을 연회장('갑신정변'의 시작)에서 온몸에 칼을 맞은 민영익을 치료하게 됨으로써 일약 그 명성을 떨치게 된다. 민영익의 몸에 난 칼자국은 무려 서른 여덟 곳, 아무도 그가 살아날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수술이라는 치료술이 없었던 조선땅에서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봉합하는 대수술에 성공한 것이었다. 민영익이 누구인가. 명성황후가 신임하는 사가의 장조카였다. 그 민영익이 서양 의술로 살아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렌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고, 고종 내외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면서 전의를 대신하게 된다. 그것은 또 알렌이 하는 일에 대한 조선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를 보장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알렌은 곧 안련이라는 조선이름을 쓰게 되면서 1년 뒤인 고종 22년에는 조선 최초의 서양병원이자 의사 양성소인 광혜원을 세우고 의사와 교수로 활동하였고, 고종 22년에는 조선조정의 참찬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고종 27년에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활약하다가 마침내 1897년부터는 주한 미국공사 겸 서울주재 총영사가 되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봉사를 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서양의 문물에 거부감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알렌이라는 선교의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민영익을 살려내는 의술을 보여 주었고, 또 그가 아닌 다른 선교사들이 키니네를 사용하여 불치의 병으로만 알았던 학질을 예방하고 치료한다는 사실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곁으로 홀연히 다가선 또 한 사람의 서양 여성이 손탁이었다. 그녀는 손탁이라는 한국명을 쓰면서 명성황후를 사로잡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창덕궁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첫 서양여성이 되었다. 조선에 있어서의 서양문물 서양인들의 생활풍습이 사대부가를 앞질러 왕실에 전파된 것은 손탁이라는 미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탁의 개인사는 좀 복잡하다. 그녀의 혈통은 프랑스였으나 국적은 독일이었고, 활동무대는 러시아였다. 그녀가 러시아인으로 오인되는 것은 당시의 주한 러시아 공사인 웨벨의 처제였기 때문이다. 웨벨 공사가 조선에 부임한 것이 고종 22년 8월 25일이니까 손탁이 조선에 온 것도 그 무렵일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서양 문물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명성황후에게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황홀한 의상이었고,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32세의 손탁의 아름다운 용모에서 풍기는 교양과 서구적인 매너는 명성황후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게 하는 교량역할을 담당하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므로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창덕궁에 서양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한 응접실, 서양식 침실은 물론 서양 요리가 등장했던 것은 당연했고, 특히 고종이 즐겨 마셨던 커피도 그녀에 의해 추천되었다. 명성황후도 그녀를 위해 여러 가지 특혜를 베풀어 주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 호텔'의 탄생이었다. 명성황후는 정동 29번지에 있는 왕실 소유의 대지 184평의 집 한 채를 손탁에게 하사했다. 손탁은 여기에 2층 양옥으로 된 새 집을 짓고 손탁 호텔을 개업했다. 손탁 호텔은 단순한 숙박업소만은 아니었다. 손탁 자신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그 건물의 아래층을 '정동 구락부'라는 사교장으로 공개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개화의 물결이 거세게 불고 있었으므로 개명한 사람들이 몰려와 커피를 마시며 서양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또 그것은 서양식 사교 분위기를 익히는 일이기도 했다. 이 '정동 구락부'에 모여들었던 면면들을 살펴보아도 그 의미를 짐작하고 남는다. 물밀 듯이 들어와 있던 각국의 공사를 비롯한 외교사절들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민영환, 서재필, 윤치호, 이학균, 이상재 등 당대 최고 지성인들의 사교장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앞을 다투어 '정동구락부'로 모여들었다. 세계의 정세를 살피면서 조선의 개화를 앞당기자는 것이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앞에서 거론한 일본의 '녹명관'과 아주 흡사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정동 구락부'가 러시아공사 웨벨의 거처였다는 점에서, 또 손탁의 인기에서 비롯되는 친로파의 소굴이었다는 점이다. 이완용, 이윤용, 이범진 등은 웨벨 공사와 더불어 여기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기도했다. 그러자니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 화제는 손탁에 의해 명성황후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에 이르렀고, 이에 따라 명성황후는 자연스럽게 친로노선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명성황후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시절이라 놀란 것은 일본 공사관이었다. 일본 공사관은 명성황후의 제거를 기도하기에 이른다. 친로노선으로 기우는 조선 조정의 분위기를 일본쪽으로 돌려 놓기 위한 특단의 조처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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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의 계교
트로야의 왕자 '파리스'가 희랍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하여 도망친데서 비롯된 트로야 전쟁은 10년의 세월이 흘러도 끝장이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희랍의 대장들이 이마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트로야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계교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목마의 계'였다. 즉 나무로 큰 말을 만들고 그 속에 골라 뽑은 용사들(9명이라고도 하고 그 이상이라고도 한다)을 숨겨 둔 다음 밤 사이에 진지를 철수하여 배를 타고 멀리 바다 가운데로 떠나가 버렸다. 트로야 시민들은 이를 보자 마침내 적이 퇴각한 걸로 잘못 생각하고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 들였다. 이때 신관 '라오콘'이 제지를 했으나 듣지 않았다. 밤이 되자 목마 속에 숨었던 용사들이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어제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희랍군을 끌어들였으며 마음놓고 잠들어 있는 트로야 시민을 닥치는대로 살육했다. 이로써 트로야는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계교를 목마의 계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들킬 듯 하면서도 들키지 않는데 묘미가 있다. 이 목마의 계를 생각해낸 것은 희랍의 대장들 중에서도 지모가 뛰어나는 '오뒤세우스' 로마에서는 '울리크크레스' 또는 '울리세스', 영어의 '율리시즈'는 여기서 나온 말. 또 트로야인을 제지하려 했던 신관 '라오콘'은 두 아들과 함께 바다 속에서 나온 구렁이에 감겨 죽었는데 이를 주제로 한 희랍의 조각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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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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