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 56 호4339.11.10 (09.20)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발행지는 그날 그날 내용의 분량이 다릅니다. 길어질 경우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조선일보 신춘문예 내달 8일 마감 국내최고 문학축제 주인공이 되십시오 조선일보 신춘문예가 2007년 새해 아침 문학 축제를 준비합니다. 1928년부터 김유정, 김동리, 정비석, 최인호, 황석영 같은, 한국 현대문학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작가들을 배출한 조선일보 신춘문예는 매년 공정한 심사를 통해 참신한 감성과 상상력의 도전을 기다려 왔습니다. 올해도 시·시조·단편소설·동시·동화·희곡·문학평론·미술평론 등 8개 부문을 뽑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실린 신문을 펼치며 온 세상이 새해를 맞게 해 보십시오. ◆접수 마감=2006년 12월 8일까지 도착해야 합니다.◆보내실 곳=우편번호 100-756 서울 중구 태평로1가 61번지 조선일보사 문화부 신춘문예 담당자 앞 ◆신춘문예 응모요령=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원고는 반드시 A4 용지에 출력해 보내십시오. 팩스나 이메일 원고는 받지 않습니다. 접수한 원고는 반환하지 않으며, 당선작 없는 가작의 고료는 반액입니다. 다른 신춘문예에 중복 투고한 원고나 기성 작가의 동일 장르 응모 또는 표절이 밝혀질 경우 당선이 취소됩니다. 겉봉투에 응모 부문과 작품 편수를 쓰고 원고 끝에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적어주십시오. 문의 (02)724-5365, 5368, 5369 ◆당선자 발표=2007년1월1일자 조선일보 ◆분야 및 고료 ▲시(3편 이상)=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500만원 ▲시조·동시(3편 이상)=각 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300만원 ▲단편 소설(200자 원고지로 80장 안팎)=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700만원 ▲동화(25장 안팎)=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300만원 ▲희곡(80장 안팎)=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300만원 ▲문학평론·미술평론(각 70장 안팎)=각 당선작 1편 상패와 고료 300만원 글터 → 명언 / 격언 권태는 도덕가의 가장 큰 문제거리. 인류가 저지르는 범죄의 적어도 절반 이상이 권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빚어지기 때문. /버트런드 러셀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신혼 여행을 세계 도처에 나는 신혼 여행을 어린이대공원으로 갔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돈이 없어서였다. 겨울이었다. 날씨가 지독하게 추웠다. 우리는 수천 마리의 비둘기떼가 박수를 치면서 날아 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를 한 바퀴 선회하면서 우리를 축복하고 환영해 주는 것을 보았다. 지독하게 추웠으므로 어린이대공원에는 거의 사람들의 발자취가 끊어져 있었다. 우리는 세계도처에서 원정 온 사자며 호랑이며 원숭이들에게도 우리가 가난 따위는 신경 하나 안 쓰고 함께 결혼 했음을 알려 주었다. 바람도 심하게 불고 있었다. 잘 사세요. 행복하게 사세요. 잎 다 진 나무들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들이 바람결에 실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아내의 얼굴은 추위에 새파랗게 얼어 있었다. 안스러웠다. 가난하다는 것은 죄가 되지는 않더라도 죄스러움을 자주 느끼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는 한대 지방이로군. 우리 열대 지방으로 갑시다. 나는 아내를 데리고 열대 식물원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열대 식물원을 생각해 낸 것은 정말 기발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거기는 굉장했다. 더워서 상의까지 벗어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굉장한 것은 화려한 꽃들과 나무들의 싱싱하고 푸르른 축복이었다. 아내는 자꾸만 야자 열매를 따 달라고 졸랐는데 차마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식물원 전체를 사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린이대공원으로의 신혼 여행에 대해처음에는 시큰둥한 표정이던 아내도 이제는 제법 행복한 표정이었다. 첫날밤을 거기서 보낼 수는 없었으므로 우리는 시내로 나왔다. 그리고 서울 사는 친구들을 만났다. 여관을 정해 놓고 친구들과 그때 왕창 마신 술이 몇 병이었던가. 그날 밤 나는 첫날밤을 치렀던가 못 치렀던가 아직도 술이 덜 깨서 기억이 아리송한 느낌 이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사회생활의 테두리 - 원님이 없어도 고을은 돌아간다 - 윤경진(서울대 강사) 지방사회 운영의 실제 담당자, 향리 춘향전을 보면 사또(수령) 변학도의 명령을 받아 각종 업무를 처리하는 이방 등이 등장한다. 이처럼 수령 밑에서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을 향리라고 한다. 수령이 지금의 군수나 구청장에 해당한다면, 향리는 군청이나 구청에 있는 지방공무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향리라고 하면 춘향전의 이방처럼 수령의 비위나 맞추는 인물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그 지위가 크게 떨어진 조선 후기의 향리를 소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 더구나 고려시대에는 그처럼 지위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고려시대의 각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된 것과는 상관없이 향리조직이 마련되어 있었다. 향리의 으뜸인 호장이라고 불렀으며, 그 다음이 부호장이었다. 그 밑에는 호정. 부호정과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병정,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창정 등이 있었다. 곧 군사와 재정이라는 행정의 중심체계가 향리조직안에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조직이 곧 읍사로서 군현의 명칭에 따라 주사, 군사, 현사 등으로 불렀다. 향리들은 군현의 구모에 따라 그 수가 정해져 있었다. 1018년(현종9)에는 전국의 지방행정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향리의 정원도 함께 제정하였다. 큰 군현의 경우에는 호장8명을 포함하여 향리가 무려 84명이나 되었고, 아주 작은 군현에도 30명 내외의 향리가 있었다. 이 해에는 향리의 공복(관원들이 입는 옷)도 등급에 따라 정해졌다. 그리고 1051년(문종5)에는 향리의 승진 규정까지 마련하였다. 향리가 지는 의무인 향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으며, 그 대가로 중앙의 관리처럼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러한 조치들은 향리가 단순한 수령 보좌역을 넘어서 실제 지방행정을 책임지는 존재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향리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향리중에서도 호장. 부호장 등 호장층은 자신들과 격이 비슷한 부류들과 통혼하였고 그 지위도 사실상 세습하였다. 그 아래의 향리들은 이보다 격이 크게 떨어졌으며, 말단 향리는 상급 향리로 진출하기 어려웠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향리들이 지방행정의 중심에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보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이들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향리에 대한 통제의 일차적인 책임은 수령에게 있었다. 1018년에 제정된 수령의 복무규정인 ‘봉행6조’에서는 향리에 대한 통제를 수령의 기본 업무로 규정하였다. 고려시대 각 관청은 5일 간격으로 행정처리를 위한 회의가 열렸는데, 이는 지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속현의 향리는 그 때마다 수령으로부터 명령을 시달받고 관할구역의 동향을 보고하였다. 또한 속관들이 속현을 순찰하면서 수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도 향리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특징적인 제도인 기인제와 사심관제도 향리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따. 기인이란 향리의 자제를 뽑아 개경에 머물도록 하면서 인질의 효과를 냄과 동시에 이들을 통해 지방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기인제는 고려 후기에 이르면 중앙관서에 땔나무를 납부하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고역으로 변질되었다. 사심관제는 고려 초기에 공신들을 연고가 있는 군현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의 향리를 통제하도록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서 996년(성종15)에 군현의 규모에 따라 2-4명을 두도록 규정하였다. 사심관은 연고지역의 향리와 결탁하여 부정을 자지를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나 친형제가 호장으로 있을 경우에는 사심관에 임명하지 않았다. 사심관은 처음에 친가 쪽에만 임명되었지만 점차 범위가 확대되어 외가나 처가 쪽에도 임명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심관은 세금의 수취과정에도 간여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고려말에 폐지되었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매일 가져오는 남편의 선물 "하하하...." 언제나 집에 들어오면서 내게 보내는 남편의 웃음소리다. 연애 시절부터 그 호탕한 웃음이 마음에 들었고 멀리서도 그의 웃음소리는 금방 식별이 가능했다. 그 속에는 늘 그의 용기와 낙관적인 생각이 숨쉬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어렵지 않으리라는 확식이 들어 평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내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남들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이 지치고 힘들어 집에 와서 짜증도 내고 말수도 적다는 데, 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항상 현관문을 들어설 때면 그 특유의 웃음 소리가 집안에 넘쳐 그것만으로도 나는 푸근함을 느끼고 걱정이 사라져 버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왜 고민이 없었겠는가. 몇 년간의 직장 생활 끝에 시작한 장사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고민하는 기색없이 매일 그의 웃음만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동에 어귀까지 나가보았다. 골목 입구에 있는 포장마차를 지나칠 때였다. 너무나도 낯익은 뒷모습이 내 시야에 확 들어왔다. 어깨가 축 처진 채로 혼자 앉아 소주를 따르는 그의 모습이 왜 그리 아프게 파고드는지. 나는 얼어 붙은 듯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색 한 번 안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뒤 볼이 발그레해진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내게 말했다. "하하하....많이 기댜렸지? 오늘도 기분 좋은 일이 있었거든. 난 정말 복이 많은가 봐. 늘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니 말이야." 나는 아무 말없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홍미라 님/서울 은평구 대조동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6 - 진실에의 길, 경험과 귀납:F. 베이컨(1561-1626년) [프란시스 베이컨] 그때 세계에서는 1520년: 명나라, "대진회통" 완성(180권) 1560년: 이어, "성학집요" 만일 모든 중세기적인 철학의 성격을 끝내고 근대적인 철학을 정착시켜준 대표적인 철학자를 꼽는다면 우리는 베이컨(F. Bacon,1561-1626) 같은 이를 뽑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프랑스의 데카르트와 영국의 베이컨을 가리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는 대륙을, 베이컨은 영국을 대표하는 새로운 철학의 개척자들이었다. 베이컨은 영국의 대법관이었다. 대륙, 특히 독일의 전통을 따른다면 교수들이 학계와 철학계를 좌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법관, 의사, 회사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철학계에 공헌하고 있다. 영국철학이 건전한 사회상식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사회적 공감대가 없는 사상과 학문은 시민들의 호응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법관으로 있으면서 새로 발달해가는 자연과학과, 경험주의적 인식과 철학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임했다. 진정한 지식의 획득을 염원하면서 새로운 논리학 체계를 시도했다. 그안에서 그는 전통과 인습적으로 주어진 철학과 학문의 대부분은 객관적 타당성이 없는 편견과 독단적 사고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베이컨의 4가지 우상론은 유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중세기를 통해 비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학문과 철학은 버림을 받아야 하는 우상적인 것이라고 질타했다. 유명한 우상(idola)설이 바로 그것이다. 옛날의 스승들이 가르친 것이면 비판 없이 진리로 받아들이며, 종교적 권위의식 때문에 비판 없이 수용하는 대부분의 철학과 지식이 그런 것들이다. 사람들은 만인이 공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의 절대적인 척도가 있는 듯이 착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하나의 우상적인 사고일 뿐이다.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을 믿어서는 안된다. 플라톤의 국가편에 나오는 비유와 같이 자연적인 광명을 배제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서 얻은 개인적인 명상의 산물과 같은 주관적 관상 등은 버려야 한다. 언제나 자연적 법칙과 이성의 빛으로 평가받는 밝혀진 지식이여야 한다. 동굴에서 탄생되는 우상적 사고는 더이상 필요가 없다. 학문과 진리는 '시장의 이돌라'에 빠져서도 안된다. 대중이 떠들고 많은 사람들이 상품화하면 그것이 곧 진리인 듯이 착각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사회가 불필요하게 생산해놓은 언어의 옷을 입은 상품 같은 것에 지나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라든지 운명이라든지 신비라는 말로 우리를 현혹할 뿐이다. 베이컨의 네번째 우상은 극장의 우상이다. 극장에서는 연극물을 만들어내며 보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인다. 그러나 극장 밖에 나오면 현실과는 일치되는 바도 없으며, 그 객관적 의미를 부여받지도 못한다. 대부분의 철학적 전통에 의한 학문과 지식들이 그런것이다. 때로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학설이 연출될 뿐이다. 이렇게 과거의 선입관이나 편견들을 우상으로 돌린 베이컨에게 그러면 어떤 학문이 철학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가? 그는 두 가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 첫째는 모든 학문은 경험적 영역에 국한시켜야 하며, 귀납적 방법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철학설들과 중세기의 철학 등은 모두가 철학자들의 자의적 인 사상과 체계에 속할 뿐이다. 생활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경험세계와 무관한 내용들이 어떻게 학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겠는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지식이 될 수 없으며,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것은 지식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면 그 경험의 내용이 어떻게 진리로서의 지식이 될 수 있는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느 여러가지 사태에서 귀납적으로 추려모은 것이 어떤 원리와 법칙이 되고, 그 원리와 법칙이 타당성을 가질 때 그것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우리에게 주는 필수적인 방법이며, 철학도 그와 같은 성격의 과학성을 가져야 한다. 자연과학은 가장 중요한 학문이다. 그것은 능력을 갖추며 모든 것을 정복할 수 있으며 지배하는 힘을 갖춘다. 아는 것이 곧 힘이다. 그리고 철학도 같은 성격과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성격과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수학이나 논리학 같은 연역적 성격을 가진 학문의 방법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면 철학은 또 하나의 독선적 과오를 범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서 베이컨은 앞으로 오래 지속될 영국적 철학의 기초를 확립시켜준 것이다. 경험과 귀납, 이 둘을 배제한다면 영국의 철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다. 베이컨의 후계자들은 그 뒤를 계승해 오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48. '학독'이란 단어의 뜻을 아십니까? 김치를 담그기 위하여 맨 처음 하는 일은 고추를 가는 일입니다. 지금은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몇 백원만 주면 고추와 양념을 갈아 주기 때문에 김치 담그는 일이 전보다 훨씬 쉬워졌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 다녀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어머니께서 고추를 갈아달라고 부탁을 하십니다. 김치를 담그려면 고추를 갈아야 하는데 고추 가는 일은 어머니께서 하시기에는 힘든 일이셨습니다. 고추를 돌확에 넣고 밥이나 풀을 쑤어 조금 넣고 마늘 등 양념을 넣은 뒤, 절굿공이로 약 20 분 정도 갈아야 했습니다. 그걸 갈고 나면 어깨에서 힘이 빠질 정도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담근 김치는 고추가루로 담근 김치보다 훨씬 맛이 있습니다. 김치를 다 버무리신 어머니께서는 김치 속을 하나 깨소금에 무쳐서 입에 넣어 주시면서 전라도 말로 말씀하십니다. "니가 고추를 학독으다가 잘 갈아주닝게 이렇게 짐치가 맛이 있는 거 아니냐?" 저녁밥을 짓기 위하여 보리를 돌확에 넣고 물을 부어 놓습니다. 예전의 보리는 껄끄럽기 때문에 약간 불려서 갈아가지고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둥그런 돌로 돌확에 있는 보리를 갈면 보리가 부드러워져서 부드러운 보리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집집마다 이 '돌확'이 하나씩 있었는데, 지금은 기계로 하기 때문에 이 돌확은 볼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골동품이 되어서 가정에서 어항으로 쓰기도 하고, 정원에 장식품으로 놓기도 합니다. 전북 지역에서는 이 '돌확'을 '학독'이라고 부릅니다. " 아 시방은 학독이 다 없어졌지만 그전으는 학독으다 다 고추 갈아서 먹었지. 고추는 학독으로 다 갈아가꼬 짐치를 담어야 제맛이 나지." 이 정도면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자주 이런 내용을 올려 드리겠습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케네디의 숨겨진 목발 존 F 케네디는 미국 제35대 최연소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재위 34개월 만에 죽었다. 달라스 시에서 오스왈드에 의한 암살이었다. 아이젠하워 스타일의 무감각 속에 위축되어 있던 미국 국민들은 젊고 미남인 청년이 내세운 뉴프런티어 슬로건이 마음에 들었다. 이 나라를 다시 한 번 활기와 움직임에 넘친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 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1961년 1월 21일. 마흔세 살의 젊은 대통령 케네디의 취임연설이 있었다. 건강에 빛나는 스포츠맨 이라는 케네디의 이미지는 그러나 속임수였던 것이다. 측근의 한 사람인 케니 오돈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케네디는 자동차 앞쪽에 항상 목발을 숨겨두고 있었습니다. 청중이 기다리는 장소로 갈때엔 절대로 그 목발을 사용하지 않는 거예요. 그는 단상에 우뚝 서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요, 그러나 연설이 끝나면 너무나 고통스러워 두 손을 틀어 쥐고 눈을 감곤 했습니다. 그리고 곧 침실어 들어가서 자기 전, 한 시간 동안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고통을 달래곤 하였지요. 그의 어머니 로즈가 쓴 가족의 보건기록을 보면 그의 병력은 이러하다. 3살 전에는 백일해, 홍역, 수두, 성홍열, 청소년기에는 충수염, 임파절염, 재발성 황달, 만성천식 그러나 문제는 19살 때의 사고였다. 하버드 대학에서 그는 미식축구팀 선수였는데 시합 중에 넘어지면서 운 나쁘게 척추의 추간판이 하나 골절되고 말았다. 그것이 그를 평생 괴롭혔다. 게다가 1943년 해군으로 참전하여 태평양으로 나갔는데 솔로몬 군도 앞바다에서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게 된다. 이때 등의 장해가 더욱 심해져서 7개월 동안의 치료를 받고 귀국했는데 목발에 의지한 그의 혈액 속에는 말라리아 균이 헤엄치고 있었다. 재클린과 결혼하여서도 줄곧 고통에 시다리며 누워지냈고 두 차례의 수술 후 간신히 회복되긴 하였다. 그는 또 아디슨병 혹은 브론즈병이라고 하는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병에 걸려 있었다. 혈압을 조정하고 심장의 작용을 자극하며 혈관을 수축시키고 모든 영양소의 대사를 관장하며, 감염, 외상 등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을 길러내는 이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점심때 코티죤 환약을 복용야 했다. 낮에도 자동차를 세우고 어딘가의 호텔로 급히 들어가야 했다. 코르셋을 벗고 천천히 욕탕에 잠겨서 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만성이 된 아디슨병은 어김없이 정신장애를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재직시에 대외적으론 미국 위신의 회복과 국내적으로는 뉴프런티어 정책을 내세워 신망이 높였으며, 62년의 쿠바 위기에서는 강한 태도속에서 유연성을 보여 이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관심과 중점은 외교문제와 노동문제였다. 그는 미국의 입법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해왔고 또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져온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재임기간 중 두 가지의 정책 과오를 지적 받았다. 그 중 하나는 핏그스만 안에 쿠바 망명자들을 상륙시켜버린 일과 두 번째로는 베트남 전쟁 때의 확대 가담이다. 그는 승전의 가망없음을 알고도 미군의 퇴각이라는 사태에 부딪치자 전쟁 확대의 결정을 내려 버린 일이다. 이때 그는 가엽게도 코티죤약을 복용하고 있었다. 스위스 정신과 의사인 워너 스톨 교수는 말한다. 아디슨병에 걸린 환자는 근육이 극도로 약해지고 많은 기능 부전이 발생하며 기억의 혼탁과 수면장애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디슨병은 환각적 정신분열증적인 두뇌장애를 일으킨다. 1963년 11월 22일. 그는 텍사스의 달라스에 접어들었다. 자동차에 탄 그의 옆자리에는 아내 재키가 정면에는 존B 코넬리 지사가 앉아 있었다. 케네디의 병을 벌써부터 알고 있던 코넬리는 그가 권력의 책무를 짊어지지엔 체력적으로 무리란 것을 예감하고 선거운동을 어떻게든 그만 두게 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케네디가 지나가는 것을 보려고 군중들은 환호하면서 몰려들었다. 그때, 창고의 위층 창가에서 젊은 광신자 리하베이 오스왈드가 탄환을 이탈리아제 칼빈 소총에 장전했다. 아직 45세 밖에 안된 존F 케네디의 길은 거기까지였다.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재클린의 절규 오! 노우 가 아직도 우리에겐 잊혀지지 않는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10. 3년이나 지속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 기원전 73년 봄 70여 명의 사내들이 베수비오 산을 향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들은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에서 탈출한 노예들이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라고 부르는 이 노예들의 투쟁은 3년이나 지속되면서 로마 사회를 뒤흔들게 된다. 로마 사회는 노예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였다. 이들 노예들은 농업과 목축, 광산 등 주요 생산 부문에 종사했다. 특히 라티판디움이라고 하는 대농장에서 포도, 올리브, 곡물 생산을 위해 매우 많은 노예가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들의 처지는 문자 그대로 비참한 것이었다. 빈틈없는 감시의 눈길 아래 쉴 새 없이 고된 일을 해야 했으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쇠사슬에 묶여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노예들을 `말하는 도구`라고 했는데 이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을 것이다. 노예는 인간이 아니고 부서지면 갈아치울 수 있는 물건에 불과했던 것이다. 생산 활동에 쓰이는 노예 이외에도 로마 시민의 오락을 위한 노예도 있었다. 이들이 바로 검투사 노예였다. 노예끼리 칼을 들고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검투사 경기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로마 시민들이 가장 즐기는 오락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들의 주요 공급원은 전쟁이었다.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이탈리아에만 약 150만 명의 노예가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로마의 대외 전쟁에서 잡혀 온 전쟁 포로들이었다. 그리고 로마가 침략 전쟁을 거듭하고 정복지를 넓힐 때마다 노예들의 수도 늘어갔다. 하지만 노예들의 수가 늘어갈수록 노예들의 반란도 많아졌다. 로마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말하는 도구`라고 했지만 그들의 몸 속에도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쿠스의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도 이미 여러 차례 노예 반란이 일어났고 그 때마다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스파르타쿠스도 어느 노예와 마찬가지로 전쟁 포로였다. 그는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사람이었는데 포로로 끌려 와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하다 카푸아에 있는 검투사 양성소로 팔려 왔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동료를 죽이고 살아 남거나 아니면 동료의 손에 죽어야만 하는 검투사 노예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와 그의 동료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기원전 73년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도망한 노예들은 베수비오 산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남부의 농장이나 목장에서도 노예들이 탈주해 와 대열에 합류했다. 그리하여 7만이 넘는 대군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들은 겨울을 보내면서 다음의 행동 방향에 대해 숙고했다. 처음에는 로마와 직접 대적하려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알프스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도 그러했지만 도망친 대부분의 노예들은 트라키아나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출신이었다.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자유를 의미했다. 기원전 72년 봄 노예 군대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알프스를 향했다. 이들은 알프스로 향하는 중에 여러 차례 로마 군을 물리쳤다. 이들은 이미 도망친 노예가 아니라 한겨울 내내 어려운 훈련을 받고 엄격하게 규율이 잡힌 노예 군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알프스의 추운 눈보라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6개월의 긴 행군을 했기 때문에 알프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서 봄이 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고 게다가 식량도 떨어져 갔다. 그들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오랜 행군으로 인해 노예군은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게다가 내부 불화마저 생겼다.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노예들은 이탈리아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예군을 이루고 있던 노예와 농민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시간이 감에 따라 로마 군은 전열을 정비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최후의 격전장은 이탈리아 남부의 아폴리아였다. 로마 군대를 지휘한 사람은 이 해에 새로 집정관이 된 대부호 크리수스였다. 그는 도망하는 병사는 사형에 처한다고 다그쳐 스파르타쿠스의 군대와 마주했다. 기원전 71년 초가을 대전투가 벌어졌다. 노예 군대는 죽기로 싸웠으니 6만 명이나 적의 손에 희생당했고 스파르타쿠스와 나머지 노예들도 포위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창에 찔린 채 숨을 거둘 때까지 방패를 휘두르며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이후 살아 남은 노예 군대는 산에 숨어 게릴라 활동을 통해 잠시 명맥을 유지했으나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의 군대에게 패했다. 이 때 사로잡힌 6,000명의 노예들은 카푸아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아피아 가도에 줄지어 십자가에 매달렸다. 결국 노예들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의 지배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갈구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었고, 이에 대한 충격은 로마 사회의 또 다른 계급 모순인 대지주를 중심으로 한 부자와 빈민 사이의 갈등과 결합되면서 공화정의 얼굴을 한 로마 사회를 제정으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글터 → 사회/문화/인물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1장 중국인의 감정과 중국의 선택 1. 내가 혐오하는 중국인 베이징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왕 아무개라는 내 친구는 북경에 온 각국의 외국인들과 교제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외국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후 이들로부터 들은 각국의 기이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 주곤 한다. 사귄 지 오래된 마이크라는 영국친구에 대해서 왕씨는 종종 우리들에게 이렇게 큰 소리로 말하곤 했다. '마이크 이놈이 어제 새벽 3시에 전화를 걸어 사람을 께웠지 뭔가.그리고는 코펜하겐에서 술을 많이 마셨고, 비행기를 납치해서 나를 보러 오겠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더군. 하하하.' 이런 종류의 이야기들이 특히 많은데 '마이크가 일본에서 비구니와 좋아지낸다는군 "이 셔츠 좀 보게, 마이크가 보낸 것인데 이 문양이 바로 옥스포드대학 마크야' 등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의 허풍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나도 그 마이크란 인물을 잘 안다. 한 번은 내가 왕씨의 집에 책을 빌리러 갔을 때 마이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통을 잡고는 아주 흥분해서 큰소리로 '어, 마이크, 어, 마이크'를 외치곤 하였다. 그런 후 옥스퍼드식임을 과장한 영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통화가 끝난 뒤 또다시 그의 수다를 듣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무 말 없이 나와 버렸다. 집으로 오는 길에 끊임없이 몸서리를 치면서 생각하였다. 저 친구는 대체 어찌된 것일까? 1995년 베이징의 후이챠오(惠儒)호텔에서, 생긴 것은 보잘 것 없으나 시를 꽤 쓴다는 여자 시인 한 명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혼자 이 얘기 저 얘기 떠들어댔다. '저는 5월에 캐나다에서 돌아왔는데, 미국에서 먼저 3개월을 지내고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갔었어요. 아, 나는 이전에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과 그렇게 좋은 날씨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어요. 마치 신이 그들만 편애하는 것 같아요.' 마치 풍자소설을 쓰는 것처럼 과장되게 들리겠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서 그녀의 넋 나간 표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지는 않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신의 느낌을 그곳의 자연과 힘껏 일치시키려는 것 같았다. 후에 나는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국에도 어느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든지 혹은 부랑아들 몇 명이 얼어죽었다는 등의 뉴스가 Tv에 자주 나오지 않았던가? 올림픽을 개최하는 애틀랜타는 여름기온이 섭씨 45도까지 올라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 시인은 아주 좋은 계절에 미국에 갔었단 말인가? 중국에도 분명히 이런 좋은 계절은 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간단히 '신이 미국인을 편애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인들 중에는 간혹 자신의 혈통을 바꾸고 싶어 안달하고, 자기가 중국어를 잘하지 못하길 바라는 사람이 분명히 있긴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인종주의 옹호자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멸시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인 셈이다. 몇 년 전에 서양의 삼류 가수 하나가 쌍하이에 왔을때 그 열기는 대단하였다. 수많은 아가씨들이 이 가수를 보려고 몰려 들어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당시 어느 신문에는 '두 명의 아가씨가 이 가수의 포스터 밑에서 그의 눈이 회색인지 푸른색인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는 토막기사가 실렸었다. 이런 현상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치명적인 병폐라 할 수 있을 것이 다. 이런 부류의 중국인이 가지고 있는 병에는 두 가지 증상이 나타난다. 첫째 서양인 앞에서는 무조건 'OK'라고 하면서 (宋强) 이 말한 것처 럼 노예가 되길 스스로 바라며, 노예가 된 뒤에도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증상이고, 둘째 중국인 앞에서는 자기가 서양인인 것처럼 갑자기 변해 중국어를 더듬거리며 하는 증상이다. 이런 부류는, 중국어로는 표현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항상 외국어 단어를 섞어 말하는 것이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다. 3월 7일 나는 베이징 지엔구오먼(建國門) 밖에 있는 무역회관에서 외국 자동차회사 북경대표와 광고업무에 관한 상담을 한 적이 있다. 나와 상담한 중국인 사원은 삼십 세가 되지 않은 젊은이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계속 영어로 지껄여 나를 당혹스럽게 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중국어를 할 줄 아는지 물어 보았더니 그는 '사장님이 회사 내에서는 반드시 영어를 쓰도록 요구하셨고 저희들도 습관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모국어로 상담하자고 하여 겨우 중국어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영어단어를 중국어 사이에 넣어 말하였다. 예를 들면 그는 부하직원에게 paper 한 장 갖다주게'라는 식이었다. 우리의 위대한 세계 4대 발명품 중 하나인 종이가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신문지상에는 가끔 프랑스인들이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영예롭게 생각하고 지키는 모습들을 묘사한 기사가 실리곤 한다. 특히 프랑스어를 사랑하고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우리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지나가는 노인에게 길을 묻게 되면 영어를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영어로 길을 물으면 노인은 노려 보고는 그냥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써야 한다는 것이 프랑스인의 신조가 되어버린 것 같다. 문화는 서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느 한 문화가 다른 문화를 정복하고 경멸할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지켜야 할 권리를 인식해야한다. 자신의 문화는 자기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소설 한 편을 읽었는데 자세한 줄거리는 잊었지만 울분을 터트리게 하는 내용이 있었다. 어느 기업의 사장이 자신이 총애하는 부하직원 한 명을 외국에 파견해 훈련시킨 후 중요 업무를 담당하게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부하직원을 양식집에 데리고 가 포크와 나이프 쓰는 법과 스프 먹는 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중 그 직원이 숟가락으로 커피를 떠마시자 사장은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제지하면서 '틀렸어. 수저는 받침 위에 놓아 두고, 잔을 들고 마셔야지 이렇게 마시면 안 된다는 걸 반드시 명심하게!'라고 하는 것이다. 서양인이 중국에 와서 젓가락을 사용할 때는 어떠한가? 서양인이 젓가락을 쓰는 모습은 당연히 가지각색이다. 그들은 이국적인 정취를 마음껏 즐기면서 크게 웃고 떠들어 대고 심지어는 젓가락을 그릇 속에 집어넣어 음식을 휘젓기까지 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절대 그들을 비웃는 법이 없다, 외국인들이 젓가락을 서툴게 사용하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면서 왜 우리들이 외국에 나가면 포크와 나이프를 숙련되게 써야만 하는 건가? 우리만 그들이 먹는 법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인가? 포크와 나이프는 문명적인 산물이고 젓가락은 회귀한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이는 정말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명으로 따지자면 포크와 나이프야말로 가장 낙후된 물건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이 철기사용법을 알게 된 후 칼을 이용해 사냥한 짐승을 자르고 익혀 포크로 먹었다. 서양인들은 포크와 나이프를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 이를 진보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젓가락의 경우는 다르다. 젓가락은 고도로 숙련된 손의 기술을 요하는 것으로 예술성과 함께 평화에 대한 상징성도 지니고 있다. 요즈음 국내의 호텔들은 우리 국민들을 씁쓸하게 만들고 있다.호텔에 전화를 걸면 들려 오는 첫 마디는 중국어가 아니라 영어이고, '안녕하세요, OO호텔입니다'라고 중국어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어떤 경우는 완전히 외국화되어 버려 외국의 호텔로 전화를 잘못했나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할 정도이다. 프런트에서 값을 물으면 하루에 몇'달러'라고 알려주고 방 안에 있는 룸서비스 차림표는 온통 영어 일색에 중국어는 괄호 안에 들어가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호텔에 들어서면 마치 외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국제적 대도시라는 의미를 이런 식 로 찾는다는 것은 너무 편협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곳곳에 외국인의 편의를 생각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이러한 것이 바로 자기 동포에게는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화란 말인가? 이런 것은 오히려 우리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상식 밖의 현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혈통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것은 심각한 정신적 위기 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위기가 만연된 후 돌아올 무서운 결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외국에 갔다오면 재빠르게 잘 팔릴 책들을 출간한다. 예를 들어 무슨 [뉴욕의 베이징인[北京人在級約] [뉴욕 하늘의 나이팅게일 [맨하탄의 중국여인[] [외국여인을 아내로 삼다[姿個外國女人倣老姿] 등과 같은 책들이다. 이런 류의 책에 나타난 공통 된 상황을 종합해 보면 모두 정신적 균형을 잃어 현실생활에서는 실패하고 자신에 의해 조종되기 쉬운 돈과 성, 호화주택과 명성에 약간의 음울한 환경을 보텐 보상수단을 허구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이런 류의 책을 쓴 작가로서는 미국이니 호주니 하는 외국에 갔다가 왔다는 명성까지 붙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다시 내 친구 왕씨에 대해 말하겠다. 하루는 그가 술에 잔뜩 취해 대성 통곡을 하면서 '중국은 정말 수준 낮고 단조로워! 이곳은 오로지 번식만있고 사랑은 없는 곳이`=. 마이크의 그런 사랑은 중국에서는 어디서고 찾아볼 수가 없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왕씨가 몇 번 실연당했다는것을 알기 때문에 그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조국에 대해 이유 없는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것이다. 왕씨는 태국에서 있었던 마이크의 연애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직업도 없이 떠도는 영국인 마이크가 -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핵물리학자라고 한다 태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그는 태국이야말로 정말 남성, 특히 부유한 남성들의 낙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동방의 소녀들과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얼마 뒤 싫증을 느끼고 - 체력의 한계를 느낀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 돌아갈 비행기표를 샀다. 방콕을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무료함을 느껴 혼자 강가의 한 자그마한 카페에 들어갔다. 한 소녀가 커피를 들고 왔을 때 그는 마치 벼락에 맞은 듯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까지 그처럼 청순한 여자를 본 적이 없었으며 그녀에게 한 마디의 말도 붙일 수가 없었다. 카페를 나오기 직전 그는 큰 결심을 하고 메모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마이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곧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반드시 다시 이곳에 와 당신을 데려가겠습니다.' 그는 쪽지를 그녀의 손에 쥐어 준 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 나왔다. 일 년 뒤 그는 태국으로 다시 와 그 카페가 있던 거리를 찾아갔다. 그러나 카페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새로 지은 호텔 하나가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보고 그는 거의 기절할 뻔 하였다. 그는 아무 술집이나 들어가 술을 퍼마셨다. 이때 누군 가 그의 눈을 가리며 천사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이크'라고 속삭였다. 마이크는 뒤돌아 보고 놀라 큰소리를 질렀다. 바로 카페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그 후 둘은 얼싸안고 호텔로 갔고....... 마이크는 끝내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였고 둘은 중국으로 왔다. 이 마이크 선생은 분명 플레이보이에 속한다. 그는 제3세계의 거리나 공원, 호텔 등을 전전하면서 자기 눈에 조금 예쁘게 보이는 아가씨를 만나면 일부러 어색해 하면서 길을 묻곤 한다고 하며. 외국 여행을 할 때는 짐 속에 늘 열 다스나 되는 콘돔을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그의 사랑은 타액처럼 끊임없이 분비된다. 그가 우리의 자매들을 유린할 때 우리는 영광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마이크의 사랑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질식할 것만 같다. 이런 부류의 중국인, 이런 서양인의 노예들, 그리고 그 노예들의 얼굴과 행위에 침을 뱉고 싶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군밤 장수를 찾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이었다. 서울 하월곡동 어두운 골목길에 허름한 신사복 차림을 한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마침 성탄 전야인데다가 날씨마저 추워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쓰러진 채 도움을 구하려고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이미 탈진 상태에 빠져 신음 소리만 내었을 뿐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행인들이 한두 명 지나갔으나 그들은 노인을 못 본 척했다. 무심코 길바닥에 쓰러진 노인을 보고는 달아나듯 그 자리를 피해 갈 뿐이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 있었다. 노인은 더욱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 노인은 이대로 길에서 객사하는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한 군밤 장수 사내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노인 앞에 멈춰 섰다. "할아버지, 무슨 일입니까?" 노인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해도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급히 노인을 잡아 일으켰다. 노인은 거의 사색이 다 돼 있었다. 사내는 리어카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로 노인을 들쳐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워낙 당뇨가 심하시군요." 응급 처치를 하고 나온 의사가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의사의 말대로 조금 있자 사람을 알아볼 정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할아버지 전화번호를 말씀해 주세요. 제가 집에 연락해 드리겠어요." 사내는 노인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면서 연락처를 알아내 가족들에게 전화를 해주었다. "여보게, 고맙네, 고마워. 어디 사는 누구인가?" 가족에게 연락을 하고 오자 노인이 사내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그런 말씀은 마시고, 속히 안정을 취하시도록 하십시오." "집이 어딘가? 좀 가르쳐 주게." "그런 건 모르셔도 괜찮습니다. 빨리 나으실 생각이나 하십시오." "아니야. 집이 어딘지 꼭 좀 가르쳐 주게. 그래야 내가 나중에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닙니다. 전 그저 군밤 장수일 뿐입니다. 몸이 불편하신데 말씀 자꾸 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십시오." 노인이 몇 번이나 집을 가르쳐 달라고 했으나 사내는 자신이 군밤 장수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노인의 가족들이 병원으로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노인은 건강이 회복된 후 군밤 장수를 찾아 나섰다. 하월곡동 시장 일대는 물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골목이나 지하도 입구를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다녀도 군밤 장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찾다 못해 일간 신문에다 광고를 냈다. "하월곡동 군밤 장수만 보시오. 요즘 보기 드문 한 군밤 장수를 찾습니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밤, 자정 넘은 시각에 하월곡동 골목에서 쓰러진 노인을 구해 준 고마운 군밤 장수에게 꼭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신문에 광고가 나가도 군밤 장수한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날 밤 노인을 돕느라 골목에 그대로 두었다가 리어카를 잃어버린 사내가 다시 리어카를 장만하기 위해 막노동을 하고 있는 줄을 그 노인이 알 리 없었다. 글터 → 이글저글 X-mas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기념되는 크리스마스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가 탄생한 후 200년 동안이나 아무도 그 탄생일을 알지 못했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4세기가 될 때까지 평범한 보통 사람의 생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보통 사람들은 생일보다 사망한 날을 기억하고 지켰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고대 역사상 많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잊혀져 버렸다. 12월 25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된 것은 순전히 공론에 의한 역사적인 것이다. 고대 이교도들은 그들의 행사를 12월 21이나 22일경, 즉 태양이 적도서 남쪽이나 북쪽으로 가장 치우친 날인 극일점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치렀다. 그 당시 신교와 경쟁하던 로마 카톨릭은 12월 25일을 축제의 날로 지정해서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354년, 로마 리베리우스 교황은 다른 이교도들 사이에서 기독교의 세력을 강화하고, 기독교 내에서 여러가지 왜곡된 관습과 형식을 일관화하려고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하였으나, 이 사실을 지지할만한 분명한 증거나 기초가 실제로는 없다. 사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참고로 10월이나 11월경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그 날을 7월 초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베드로상의 발가락은 수세기 동안 성베도로 성당을 방문한 순레자들이 입을 맞추는 바람에 마디가 거의 닳아 없어졌다. 베드로는 정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초대 교황일까?18세기경 포르투갈에서는 카톨릭 교회가 전국토의 2/3를 차지하고 있었다.기독교의 최고 신학자 중 한 명인 오레곤이 한 말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책을 6,000권이나 썼다. 오레곤 자신은 여자의 문인 음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신을 거세해 버렸다.유교의 시조 공자는 BC552년 70세된 어머니 안징재와 아버지 숙량흘의 11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