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편지】: 제 55 호4339.11.09 (09.19) : Music Off = Esc- 연재되던 글이 다른 글로 바뀌면 그 책의 내용이 끝난 것입니다. 별도로 표기하지 않습니다.-- 인포메일의 발행지제한 용량은 64Kb입니다. 이로인해 발행지의 페이지가 잘려 않보이시는 분은 저의 블로그 또는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시면 됩니다. -발행지원본보기 편지 오가시며 → 자유글판 문학소식 글터 → 명언 / 격언 권리는 그것을 지킬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 로저 볼드윈 글터 → 수필 내잠 속에 비내리는데 - 이외수 한 다발의 시린 사랑얘기 춘천시 효자동 언덕배기에 월세 천 원짜리의 방 같지도 않은 방 하나를 얻어 놓고 자취 생활을 할 때였다. 살림 도구라곤 남비 한 개와 젓가락 한 개뿐인 부엌. 연탄이라곤 하얗게 사위어 버린 잿덩어리 여섯개만 나뒹굴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면 담요 한 장과 몇 권의 책, 그리고 파리들만 가득했었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있었다. 다만 못 죽고 있는 상태라고만 생각했었다. 요행히 강원일보에 나가 삽화 나부랭이를 끄적거리며 가까스로 외상술을 마실 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긴 있었다. 날마다 술을 마셨다. 밤늦게 자취방으로 돌아오면 비참한 생각뿐이었다. 여자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봄이었다. 왜 그리 날마다 햇빛이 눈물겹게 아름답기만 했었는지 차라리 막돼먹은 술집 여자라도 하나 꼬셔 가지고 들놀이를 간다해도 남부끄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외로움도 지나치면 사람을 완전히 실성케 만드는 법이어서, 그즈음 나는 아무 일도 못하고 그저 미친 놈 흉내나 내며 살았다. 더러는 다리 밑에서 거지들하고 소주를 까며 밤을 새우기도 했고 또 더러는 파출소 보호실에서 숙취의 새우잠을 자기도 했었다. 미치도록 사람이 그리워서 하루에도 몇 십 통씩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친구들에게, 또는 통속 잡지 펜팔난에서 고른 그렇고 그런 여자들에게. 그러나 모든 것은 부질없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젊음을 죽이고 생활의 멍에 속에 갇혀 있었고 그렇고 그런 여자들은 그렇고 그런 여자들대로 한 장에 몇 십 자씩이나 맞춤법이 틀리는 답장들을 보내와서 나를 실망하게 만들어 주곤 했었다. 그러한 생활의 모든 것들이 내게 있어서는 남모르는 눈물로 가슴속에 괴어서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 눈물의 무게를 혼자서는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즈음 아무 여자라도 나를 이해해 주는 여자가 있어 함께 살자고 말해 왔다면 나는 비록 그 여자가 저 노틀담의 곱추인 콰지모도처럼 생겼다고 해도 쾌히 동거를 허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그러한 여자조차도 나타나 주지 않았었다. 나는 우연히 구한 외국 잡지에서 이쁘게 생긴 한 여자의 사진을 오려 벽에 붙여 놓고 날마다 그것이나 바라보며 살았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폼나는 작품을 하나 써야지. 꿈 속에서도 문학을 고향처럼 마음 안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생활 속에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신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나도 하나님을 조금씩 미워하기 시작했었다. 교회를 나가고 싶었다. 하나님을 만나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쁘게 생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도 한 마리 훔쳐 오고 싶어서였다. 그러던 중 마침내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춘천시 명동 전원 다실에서였다. 그 다실은 특별히 주인이 내 의자 하나를 어둡고 구석진 자리에 따로 만들어 주었을 정도로 나와는 인연이 깊은 다실이었다. 그 의자에서 나는 잠을 자기도하고 편지를 쓰기도하고 담배를 구걸하기도 했었다. 그 의자는 바로 내 침실이며 응접실이며 서재이며 사무실이었다. 그날도 나는 그 의자에서 개떡 같은 내 청춘, 개떡 같은 나의 장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떡은 영원한 개떡이었다. 나는 어디 가서 술껀이나 잡아서 다시 취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맨 정신으로 어떻게 살으리. 여자도 없이 맨 정신으로 어떻게 그 아름다운 햇빛 속을 걸어다닐 수 있으리. 나는 어디 가서 또 곧 갚겠다는 거짓말을하고 한잔 꺽자고 결심했다. 그때였다. 나는 갑자기 다실 안이 확 밝아져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막 문을 통과해서 계단을 내려 서고 있는 여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기막힌 미인이었다. 첫눈에 황홀함을 느낄 지경이었다. 다실 안의 모든 남자들이 그녀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나는 의심하려 했었다. 대개 여자들이란 다실의 침침한 조명 아래서는 본래의 얼굴보다 한결 아름다와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먼 데서보면 주근깨나 여드름 따위도 보이지 않기 마련이니까. 아닐 것이다. 저 여자는 가까이 가서 보면 형편없는 얼굴일 것이다. 거리와 조명 탓일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가 내 전용 의자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나는 유심히 그녀를 관찰해 보았다. 지적이고 기품 있고 늘씬하고 뭐 하여간 끝내주게 미인인 여자였다. 애인이 있을까. 춘천 사는 여자일까. 몇 살이나 되었을까.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스쳐갔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떤 운명을 예감했다. 그리하여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슨가 말크라테슨가 하는 어느 공처가 철학자의 네 꼬라지를 알라 는 충언이 생각났다. 나는 내 꼬라지를 한번 찬찬히 훑어보았다. 더 이상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는 거지 꼬라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도 남자라는 점이었다.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그녀 앞으로 다가섰다. 그 다음 허락도 없이 그녀의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참 예쁜데요. 아니 아름다운데요. 앞으로 이 다방에 자주 좀 나와 주쇼. 내가 한번 아가씨를 꼬셔 볼 작정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곧게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건방지게 그녀의 어깨까지 두어 번 가볍게 두드려 주고는 그럼 또 봅시다 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그 다실을 나와 버렸다. 한 잔 꺽기 위해였다. 다실을 나오니 비로소 세상이 온통 밝아 보였다. 왠지 무슨 일인가가 앞으로 일어나 주고야 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봄이 가고 있었다. 좀처럼 그녀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나는 마치 한줌의 아름다운 연기를 잡았다가 놓치고 만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다시금 그 다실에서 그녀를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신문사에 나가 삽화를 그려 주고 다실로 오니 거짓말처럼 그녀가 여전히 오만하고 아름다운 자세로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혼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감격해서 숨이 딱 멎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로 곧장 다가섰다. 그리고 침착하고 느린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예언컨대 분명히 아가씨는 나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겁니다. 이왕 좋아할 거면 미리 좀 좋아해 주쇼. 그러나 여전히 그녀는 뉘집 개가 짖느냐는 식이었다. 하지만 두고 보라지. 나는 마음속으로 빙글거리며 내 전용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녀는 다시 앉아 있다가 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곧장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강원일보에 중편소설 하나를 연재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나의 서재, 나의 응접실, 나의 사무실, 나의 침대, 나의 집필실인 의자에 죽치고 앉아 되지도 않는 소설을 비비느라고 한참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게로 말을 던졌다. 여자 목소리였다. 이거 보세요. 보시라는 데를 보니까 어이없게도 그녀가 친구와 함께 내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글을 쓸 때만은 마치 무슨 종교 의식을 행할 때처럼 엄숙 경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당시의 내 뚝멋이었다. 이번에는 내쪽에서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이때 여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녀는 즉시 약이 올라 버린 모양이었다. 괜히 예술가인 척하지 말아요. 혐오감을 주니까. 이봐요, 그만 이 다방을 나가 주실 수 없으세요 ? 깔보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괘씸했다. 그러나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루치 연재 소설의 분량은 2백자 원고지로 8매였다. 다 쓰거든 두고 보자,하고 벼르면서 나는 골똘히 원고지에 낱말들을 박아 넣고 있었다. 이봐요. 엉터리 소설가님. 배고픈데 저녁 좀 사실래요. 다 쓰고 나자 그녀가 다시 내게로 말을 던졌다. 놀리는 듯한 어투였다. 그꼴에 네 까짓 게 저녁을 살 수 있겠느냐는 듯한 조롱까지 섞여 있는 것같았다. 그녀의 친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몰랐지. 내가 외상의 천재라는 것은 전혀 몰랐지. 나는 일부러 난처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저녁을 사달라고 채근해 왔다. 남자가 뭐 그리 시시하냐는 거였다. 정말 사드려요 ? 나는 자신 없는 듯한 어투로 다시 한 걸음을 물러서 보았다. 사달라니까요. 그녀는 결코 내가 저녁을 살 수 없으리라고 확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드리면 먹을 자신 있어요 ? 있지요. 따라오쇼.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다실을 나섰다. 나는 단골 분식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가락국수 한 그릇시켜 주었다. 정말 배가 고팠던 것일까. 아니면 나의 가난에 어떤 감동이라도 받은 것일까. 그녀는 묵묵히 가락국수 한그릇을 모두 건져 먹었다. 나는 기분 좋게 분식집 주인 아줌마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외상!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다. 이 녀석은 재미있는 놈이다. 그녀는 그저 그 정도로 나를 평가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당시 그녀는 약간 권태롭고 짜증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간호원이었고 그 동안의 병원 근무를 집어치운 채 일본을 갈까 독일을 갈까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그녀는 전원 다실에 나타나서 영화 구경 좀 시켜 주실래요. 짜장면 좀 사주실래요. 불쑥불쑥 내 텅 빈 호주머니를 넘보곤 했다. 하지만 나는 충성을 다 바치려고 노력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한갖 그녀의 심심풀이에 불과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신문사로 전화가 왔다. 마침 집에서 모를 심는데 모밥을 먹으러 오라는 거였다. 기분 삼삼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즉시 가겠노라고 이야기했고 그녀는 그녀의 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그 전화가 끝나자마자 급한 일거리들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나는 그 일거리들을 해넘겼지만 시간은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그만 모밥을 포기하고 말았다. 홧김에 외상술을 마셨다. 그리고 약간 취했다. 취해서 생각하니 밑지는 셈치고 한번 가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탔다. 이미 두 시간 반이나 지나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았었다. 그러나 감격스러워라. 내가 약속한 버스 정류장에 내렸을 때 그녀는 어느 건물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풀죽은 모습으로 그때까지 뙤약볕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그녀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더듬거리며 늦어 버린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그녀는 더위에 지친 모습으로 묵묵히 내 변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시에 반짝 희게 웃으며 괜찮아요 라고 간단하게 말해 버렸다. 나는 그녀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시골집이었다.나를 앉혀 놓고 새로 밥을 짓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한참 후 그녀가 다시 내게로 왔다. 그리고 불쑥 내게 말했다. 옷을 벗으세요. 나는 감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옷을 벗으라니, 옷을 벗으라니,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순간적으로 나는 몇 가지의 해괴한생각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 무슨 부끄러운 추측이냐.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하셔야 해요. 이거 내 동생 옷인데 지금 즉시 갈아입으세요. 그녀는 뒤로 감추었던 남자 옷 한 뭉치를 내게 건넸다. 그리고 방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나는 도무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다가 아무래도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그녀에게 점수를 일점이라도 더 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옷을 갈아입기로 마음먹었다. 다 갈아입으셨죠 ? 잠시 후 다시 그녀가 방 문을 열었다. 이리 나오세요. 그리고 여기 비누와 수건이 있어요. 저기 보이는 길로 곧장 나가면 강이 있어요. 시원하게 목욕하고 오세요. 그녀는 억지로 내 등을 떠다 밀었다. 나는 죽어도 목욕하기가 싫었지만 이번에도 일점이나마 더 추가하려는 욕심에서 마지못해 어슬렁어슬렁 강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이상하게도 어떤 행복감이 강물 위를 지나가는 바람의 잘디잔 비늘처럼 내 가슴 밑바닥에 반짝이며 쓸려 오고 있었다. 솔직이 말하지만 나는 그때 꼭 3년 만에 목욕이라는 걸 해보았었다. 나는 그 맑고 잔잔한 교외의 강물 속에 몸을 담그고 그 동안 개떡 같은 내 청춘의 때를 벗겼다. 내 절망의 때를 벗기고, 내 외로움의 때를 벗기고, 내 빈곤의 때를 벗겼다. 벗어지는 때의 밑바닥에는 지금까지 내가 방치해 온 내 자학의 살과 뼈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들은 비로소 신선하게 다시 눈뜨고 있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 한 살. 열 한해를 객지에서 보낸 설움의 끝. 다시 살아나는 내 살과 뼈 속으로 강 건너 포플러 숲에서들리는 매미 소리가 금빛으로 금빛으로 박혀 오고 있었다. 아, 그리고 잠시 나는 비로소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눈시울을 적시는 탕자의 새로됨을 절감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선해 보였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여. 사랑이라는 낱말이 아직도 국어 사전에 남아 있음을 찬양하라. 아직도 미처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이여. 절망하지 말라. 사랑은 모르는 사이 느닷없는 목욕과 함께 오는 것이리니. 시방 나는 설레이는 한 다발의 음악이 되어 한 여자의 곁으로 가고 있다. 나는 단숨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좋은 것일수록 더욱 아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태연히 한눈을 팔며 짐짓 더욱 느린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맑은 햇빛, 그리고 조금의 바람. 하늘을 보면 희고 깨끗한 목화 구름이피어 오르고, 여린 비행기의 엔진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멀리 논바닥에서 모를 심는 사람들의 구성진 노래 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결혼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된다 할지라도 가능하면 그 실수를 향해 차근차근 어떤 작전들을 짜보는 방향으로 나가 볼 결심도 세웠다. 만약 한 여자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나는 정말로 기똥찬 작품을 하나 쓸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나는 문득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동정받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 장의 비누와 한 장의 수건과 한 그릇의 밥이 단순히 그녀의 장난기 섞인 각본에 의한 것일는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무슨 꼴 같지 않은 목욕인가. 그녀의 가슴속에 그 어떤 자비로움이 있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가문도 별 볼일 없는, 그리고 인물도 만고강산인 나를 애인으로 삼을 것인가. 나는 문득 이대로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몸에 맞지도 않는 이 헐렁한 옷을 입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에라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이제는 바삐 걸음을 옮겨 놓았다. 내가 막 그녀의 집 대문으로 들어섰을 때 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만 숨이 콱 막혀 드는 것 같은 감동에 사로잡히면서 다시 한번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의식 했다. 바로 내 눈 높이의 허공에 가로 놓여 있는 빨래 중에는 그토록 거지 발싸개같이 때묻고 남루하던 내 티셔츠며 바지들이 아주 깨끗하게 세탁되어져 햇빛 속에 눈부시게 널려 있었다. 만약 당신이라면 이러한 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도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했을 것인가. 나는 그 순간 영원히 빨래가 되어 평생을 그 여자에게 세탁 되어지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지금 그녀는 내 곁에 있다. 아내에서 여편네로 전락했지만 우리도 꽃피는 시절은 있었다. 몇 년 동안 소설이 많은 돈과 맞바꾸어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항상 시큰둥한 얼굴이더니 자기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내 곁에 붙어 앉아 잘 좀 봐달라고 갖은 아부를 다 떨다가 두 꼬마와 함께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까 문득 다시 한번 강에 나가 목욕이나 하고 싶어지는 심정이다. 지금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글쓰는 이들의 아내들에게 나는 저 눈이 축복의 눈이 되어 주기를 빌고 있다. 글터 → 국사/세계사 -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 문화생활 이야기) - 한국역사연구회 사회생활의 테두리 - 원님이 없어도 고을은 돌아간다 - 윤경진(서울대 강사) 지방행정의 기본모습 현재 우리 나라 지방행정구역의 기본단위는 군이고, 모든 군에는 군수가 임명되어 행정책임을 맡고 있다. 대도시에는 구가 있으며, 구청장이 군수에 해당한다. 군수와 구청장 밑에는 군청.구청에 속한 지방공무원들이 행정실무를 보고 있다. 한편 군 위에는 도라고 하는 중간행정구역이 있으며, 대도시의 경우는 특별시.직할시가 도에 해당하는 행정구역이다. 여기에는 도지사 혹은 시장이 임명되어 있다. 이러한 지방행정의 모습은 사실 옛날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은 지방행정단위의 명칭이 군과 구로 통일되어 있지만 고려시대 지방행정의 단위가 되는 고을은 격에 따라 주.부.군.현등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을 통틀어 군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 군현에는 목사나 지군사,현령같은 다양한 명칭의 지방관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을 통틀어 수령이라고 하였다.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군현 위에는 도라고 하는 중간행정구역이 있었다. 조선에는 8도가 있었으며, 고려에는 5도. 양계. 경기라고 하는 세가지 형태의 중간행정구역이 있었다. 5도는 조선의 8도와 비슷한 행정구역으로서 안찰사가 임명되었다. 하지만 고려의 5도는 안찰사가 돌아다니면서 수령을 감독하는 순찰구역을 뜻하는 것으로서 조선의 8도만큼 뚜렷한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일반 행정업무는 중앙정부와 각극 군현 사이에 직접 전달되었으며, 경.목.도호부 등 계수관이 부분적으로 중앙정부와 군현을 연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양계는 지금의 평안도와 함경남도 및 강원도 동해안 지역으로서 군대 지휘권을 가진 병마사가 파견되었다. 그 밑에는 일반 군현과는 다른 방어주와 방어진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방어사와 진장이 임명되었고 국방을 위해 많은 수의 군사가 배치되었다. 경기는 중앙정부기관인 상서도성에 직접 속해 있는 군현들로서 수도 개경에 필요한 물적.인적 자원을 공급하는 역할을 띠고 있었다. 5도. 양계. 경기는 조선이 건국된 후 8도로 개편되었다. 이처럼 고려 지방행정의 모습은 조선시대나 현재와 유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볼 때 조선시대나 현재와 크게 다른, 그리고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특징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고을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지방행정단위마다 각기 행정을 담당하는 책임자가 임명되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다. 그래야 해당 행정단위의 운영에 대한 책임소재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물론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일부 군현에만 수령이 파견되었다. 그렇다면 고려는 어떻게 지방행정을 처리하였을까? 수령이 없는 고을 고려의 군현수는 시기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지만 <고려사>지리지에 수록된 군현수는 500여개가 넘는다. 그런데 고려의 지방행정이 정비된 1018(현종9)에 수령이 파견된 군현은 116곳에 불과했다. 그나마 국방을 위해 수령이 집중적으로 파견된 양계 지역을 제외하고 보면, 나머지 일반 군현에 파견된 수령의 수는 더욱 적어진다. 곧 수령이 파견된 군현보다 파견되지 않은 군현이 몇배 많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을 속현또는 임내라고 불렀으며, 수령이 파견된 군현을 통해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속현은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지만 수령이 파견된 군현과 다름없는 독자적인 행정구역이었다. 속현도 인구 규모에 따라 향리의 정원이 정해졌고, 지방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인 공해전시도 나누어 받았다. 세금을 거두거나 노역을 동원할 때도 별개의 단위가 되었다. 수령이 파견된 군현에는 많게는 20여 개 이상, 적게는 3개 내외의 속현이 배정되어 있었으며, 수령은 관할 내에 있는 속현들의 운영까지 책임지고 있었다. 우선 수령은 관할 속현들을 둘러보면서 지방사회의 정세를 파악하고 주요 업무를 처리하였다. 가장 주된 업무는 권농과 세금징수, 감창(재정감독), 재판 등이었다. 매년 봄이 되면 ‘행춘’이라 하여 수령이 속현지역을 둘러보면서 권농활동을 폈다. 권농은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것인 동시에 지방사회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지방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였는데, 속현까지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납부까지 감독하였다. 그런데 속현은 대개 규모가 작은 편이었고, 국가에 납부할 세금조차 채우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다. 수령은 속현의 세금까지 책임져야 했으므로 수령이 재임하는 군현이 부담을 떠맡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후기에 남원부사로 부임했던 이보림은 ‘제용재’라는 기금을 마련하여 그 이자로 속현지역의 세금부족분을 충당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 군현마다 한 사람의 수령을 파견할 뿐이었다. 아주 큰 고을인 경우에만 판관이라는 보좌관을 보냈다. 이렇듯 고려시대에는 수령 한 사람이 책임져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서 이러한 업무를 모두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의 수령들을 여러 명의 속관을 거느리고 있었다. 평양이나 경주 같은 큰 군현에는 판관,사록참군사,장서기,법조,의사,문사 같은 속관이 함께 파견되었고, 일반 군현도 한두 명의 속관이 함께 파견되었다. 속관들은 목사나 지군사 같은 주임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속현지역을 둘러 보는 것이 대표적인 임무였다. <동명왕편>으로 유명한 이규보는 전주의 속관으로 재직할 때 많은 시를 지었다. 이 때 지은 시에는 속관의 업무가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고을살이 도리어 걱정뿐일세 관아의 뜰은 시끄럽기가 시장 같고 송사 문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네 가난한 마을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감옥에 가득한 죄수들이 안타깝네 입가에는 웃음 띨 날 없는데 어떻게 태평하게 놀러다닐까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고을살이 걱정만 점차 새로와 성낸 얼굴로 향리를 꾸중하고 무릎 끓고 와의 사신에게 인사드리네 속군을 봄마다 순찰하고 신령한 사당에 기우제도 자주 지냈네 잠시도 한가할 때 없으니 어떻게 몸 빼낼 생각하리오 (<동국이상국집>권9, 고을살이 즐겁다 마오) 이규보의 시를 살펴보면 그는 향리들을 감독하고, 소송을 처리하고, 세금을 부과하고, 죄수들을 관리하고, 속현을 순찰하고, 사신을 맞이하는 등의 업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업무는 주임 수령의 업무와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곧 고려의 지방행정은 수령 아래에 여러 명의 속관이 여러 군현을 포괄적으로 다스리는 형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속관이 있었다고 해도 몇 명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들만으로 20여 개가 넘는 군현을 관할한다는 것은 자칫 행정적인 공백을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운영형태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각 군현마다 읍사가 있어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읍사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향리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글터 → 삶속의 글 - 행복수첩 - 김용택 : 좋은생각 주말 부부 결혼 한지 이 년이 되어가는 우리 부부는 한 달에 겨우 두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하는 주말 부부이다. 남편은 시부모님이 계시는 전라도 광주에서, 나는 경기도 고양에서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주로 주말에 내가 남편이 있는 광주로 내려가곤 한다. 결혼하고 일 년 동안 함께 살 때는 사소한 일에 오해도 많이 하고 자주 다투기도 했지만 이렇게 떨어져 살다 보니 남편의 그 미운 얼굴이 자꾸만 생각나 하루에도 몇 번씩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건 한다. 주말이면 광주까지 고속버스로 예닐곱 시간이나 걸리는 그 먼 거리가 피곤하게 생각되어 한번쯤 꾀를 낼만도 하지만 보고싶은 남편을 만난다는 기쁨이 앞선 나머지 오히려 주말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내려가는 토요일이면 중요한 약속을 모두 뒤로 미룬 채 나를 마중 나오곤 한다. 그 날도 광주에 내려갔던 내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남편과 함께 터미널에서 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손에 들린 종이가방은 시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정성스럽게 챙겨 주신 음식들로 제법 묵직했다. 나는 불룩한 종이가방이 터질까 염려되어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서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남편에게 손이라도 흔들어 주려고 창문을 내다보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항상 버스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날 배웅해 주던 남편의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벌써 가버렸나'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조금은 야속하게도 생각되었지만 곧 마음을 진정시키고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한손엔 튼튼해 보이는 부직포 가방을 들고 다른 한손엔 빵과 우유를 쥔 남편이 버스에 올라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내자리로 걸어와서 말없이 내 손에 그것들을 꼭 쥐어주고는 부랴부랴 내려가는 것이었다. 남편의 손이 스치면서 손끝으로 느껴지는 온기와 함께 남편의 사랑이 마음 한구석으로 조용히 번져왔다. 나도 모르게 또 한번 눈물이 핑 돌았다. 말보다는 늘 행동을 먼저 보여 주는 사람,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입으로 말하기 어색해하면서도 가끔씩 이렇게 나를 감동시키는 남편, 마음이 든든해졌다. 차창을 내다보니 남편은 빙긋 웃으면서 나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남편에게 눈물 글썽이는 내 모습을 보여주기가 웬지 쑥스러워 나는 그저 내 손에 놓여진 빵과 우유만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김인숙 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글터 → 철학 - 서양철학사 100장면 - 김형석 45 - 고맙지 않은 사회철학자 : N. 마키아벨리(1469-1527년) 그때 세계에서는 1440년: 독일 구텐메르크, 활자를 개량함 1582년: 그레고리 력의 채용 중세기에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모든 면에서 영향을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사회문제보다는 교회제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마치 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듯이 생각되었고, 교회는 사회의 모범인 것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사뢰로 접어들면서는 교회를 떠난 사회,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회의 위치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교회와 무관한 사회철학이 연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어진다. 몇 사람의 대표자들이 나타나 법과 법철학, 자연법 사상을 보급시키기 시작했고, 그것은 자연히 국법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어나갔다. 경제학은 아직 때가 일렀으나. 정치학에서 정치철학적인 연구는 자연히 비중 크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런 사상은 갈등과 모순이 해소된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도 키우게 되었다. 이미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에 대해 저술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과거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의 출현도 이 시대였다. 유토피아란 본래가 이 세상에는 없는 이상향을 뜻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항상 추구하는 이상향으로서 사라지지 않는 꿈을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영국의 대법관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상 때문에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상적 사회에의 꿈은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즈음에 나타난 이탈리아의 한 사회철학자, 좀더 솔직히 말하면 정치철학자가 있었다. 그가 유명한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마키아벨리(N.Machiavelli, 1468-1527)였다. 그의 사상을 간추리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는 사회문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정치권력이라고 보았다. 모든 것은 정치를 통해 해결되며, 문제는 정치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느냐에 따른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의 갈등이다. 모든 사람들은 도덕적 가치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나, 정치가치도 결코 뒤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정치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도덕적 가치가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되어도 무방하다. 결과가 좋으면 어떤 수단을 쓰거나 과정을 밟았다고 해도 문재삼을 필요가 없다. 약자보다는 강자가 정의를 집행하며 대신할 수 있다. 약자는 패자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패자의 도덕관은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어진다. 정권을 많이 수행하는 군주는 절대적이며, 그것은 신의 가호를 받아 마땅하다. 따라서 주권자는 모든 행위의 표준이 될 수밖에 없어진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러한 정치만능의 사회, 정치권력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제도를 옹호했기 때문에 왕권과 정치지도층에서는 정당성이 인정되며, 오랫동안 종교권 밑에 깔려 있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근대사회로 발전하면서는 대단히 위엄시당하는 학설이 되곤 했다. 니체의 권력의지를 숭상한 히틀러가 바로 그런 과오를 범했고,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공사주의 집권자들이 현대판 마키아벨리 정신을 실천한 셈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6 25 당시 개헌론을 앞세웠을 때 일부 학자들이 마키아벨리의 망상에 사로잡힌 처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 정치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낡은 옷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은 답답한 일이다. 한때 우리 나라의 국무총리를 지낸 이범석씨도 자기는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존경한다고 말해 지성인들을 실망시킨 일이 있었다. 여기에 나타난 두 가지 위엄한 사상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시쿄주며, 이상은 과정을 무시해도 된다는 과오를 범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을 정치의 도구와 수단으로 만드는 반민주적이며 비인도적 과오를 범할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도 폭력과 독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마키아벨리의 후계자로 보는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초기에 정치 및 정치철학적 사고가 "군주론"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점은 가볍게 볼 수가 없다. 어쨌든 "군주론"의 사상은 교회 일변도의 중세기를 탈피하는 데 큰 힘을 제공해주었으며, 대부분의 왕권국가에서 이런 정치권력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정치만능의 사고방식이나, 정권에 앞선다는 워험스러운 사상과 정신은 바삐 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인들이 이렇게 편협된 사고방식에 빠지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다. 운동권 대학생들까지 같은 사고방식에 빠지는 것도 걱정스러운 일이다. 운동권 대학생들까지 같은 사상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우려스러운 바가 아닐 수 없다. 마키아벨리를 반박하면서 스스로 그 후계자들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창작도움 → 우리말어원 '알타리무'의 표준어는 '총각무' 김장철이 다가옵니다. 시장에 나가면 배추와 무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무'는 시원한 맛때문에 김치와 반찬 재료로 즐겨 사용합니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무'를 '무수' 또는 '무시'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무수김치, 열무수, 알타리무수'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표준어로는 '무'라고 한 마디로 된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발음을 길게 하는 '무:'로 바뀌었습니다. 이 '무'의 종류에는 흔히 '알타리무'라고 부르는 품종이 있는데, '알타리무'라는 말은 표준어가 아닙니다. 이에 해당하는 표준어는 '총각무'입니다. 제가 어려서 즐겨 먹었던 밥 중에 '무'를 넣어 삶은 밥이 있었는데, 우리는 그때 그 밥을 '무수밥', '무시밥'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이야 배고픔을 달래려고 먹는게 아니라 별미로 먹는 실정입니다만, 만일오늘 우리가 그 밥을 다시 먹는다면 '무밥'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전라도 말의 '무수' 또는 '무시'는 표준어로 '무'입니다. 홍 윤 표 (단국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이 태 영 (전북대 국문과 교수, 국어정보학회 회원) 글터 → 사회/문화/인물 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2장 사라진 사람들 얄타의 세 주역 - 루즈벨트/처칠/스탈린 알바레스병과 루즈벨트 1945년 4월 세계 제2차대전이 거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 루즈벨트의 죽음이 공식 발표되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는 러시아의 얄타회담에서 돌아온 지 60여 일도 채 되지 않아서 죽었다. 루즈벨트의 알바레스병은 거의 말기증상에 이르고 있었다. 주치의 머킨타이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토록 심한 환자로 하여금 얄타에의 무서운 여행을 계획하게 했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1945년 2월 11일 일요일 12시 50분. 처칠, 루즈벨트와 스탈린. 세 사람은 최종회의를 마무리하고 나서 점심 식탁에 둘러앉았다. 식사 후 각자 준비해 온 선물을 교환하고 난 뒤, 소련군의 영웅들에게 미군 훈장이 몇 개 증정되었다. 이로써 얄타회담은 끝나고 스탈린은 철도편으로 크리미아를 향해 떠났다. 처칠은 8일 동안의 회의기간 중 루즈벨트를 지켜보면서 실망스러웠다. 루즈벨트는 자신이 스탈린에게 주거나 맡긴 것들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고 처칠은 말했다. 루즈벨트가 백악관의 주인으로 들어앉은 것은 1933년 3월 4일이다. 수백만의 실업자들로 미국은 최대의 경제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였다. 우리들은 두려워 하지 않으면 안될 유일한 것은 두려워한다는 그 자체이다. 라고 그는 역설하며 특별회의 소집하였고 뉴딜의 입법을 서둘렀다.루즈벨트는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 대전을 수행해 달라고 미국 국민들은 그를 네 번이나 연이어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39세에 바이러스가 척추를 침범해와 평생을 소아마비로 지내게 되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세계를 다니며 12년이 넘도록 백악관의 생활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얄타회담이 열리기 훨씬 전부터 이미 그의 필적은 엉망이었다. 이 중대한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대통령은 은퇴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처칠과 스탈린은 루즈벨트의 병으로 인한 허점을 이용했던 것이 아닐까? 에리아스바그 박사는 신경질환 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에게 찾아온 알바레스병이란 혈과 발작인데 뇌의 소동맥류가 터지면 그곳에 괴사가 일어나고 운동기능이 마비되며 무감각과 언어장애, 심한 피로감, 글씨조차 알아보기 힘들게 된다. 성미는 까다로워지고 현기증과 착오, 정신이 몽롱해지는 특징들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머나먼 러시아 땅 얄타로부터 돌아온 루즈벨트는 미국 동해안의 조지아주 윔 스프링에서 정양을 하고 있었다. 4월 12일 그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사촌 누이 삭크레가 급히 달려갔다. 그는 괴로운 듯 머리가 몹시 아프다 고 말했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나이는 63세, 정확한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이라고 공식 발표되었다. 처칠 우연의 일치인지 1945년 얄타회담에 참가했던 세 거두는 모두 알바레스병으로 죽었다. 윈스턴 처칠은 얄타회담이 있기 4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휴가를 즐기며 바다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거기서 최초의 뇌졸중 겪었다. 혈전이 혈관을 막았으나 처치가 빨라 최소한으로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1941년 심장발작, 그리고 고혈압, 동맥경화인 것이 분명해졌다. 그 후 두 번째의 뇌졸중은 1952년에 일어났다. 처칠은 업무를 포기하고 6월 26일 자취를 감췄다. 머리는 멍해지고 혀는 꼬부라져 발음이 분명치 못했으며, 그는 날짜며 세기를 혼동했다. 기억력도 감퇴되어 그의 주치의 모런 경은 사직을 권고했다. 1945년 4월 뉴욕타임즈 는 하원에 모습을 나타낸 처칠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윈스턴 경은 몹시도 지쳐 버린 듯 자신이 없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이미 1940년의 위대한 형해일 뿐이었다. 답변을 할 때 윈스턴 경은 앞뒤가 뒤틀린 말을 하고 있었다. 1955년 4월 6일, 80세가 넘은 윈스턴 처칠은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956년 10월 발작을 일으켜 언어기능과 기억을 상실했으나 곧 회복했다. 그러나 59년 10월 다섯 번째로 일어난 발작은 아주 가혹했다. 그로부터 6년 동안 처칠은 서서히 시들어 갔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야에서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불가지론자였던 윈스턴 처칠은 내세를 절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다만 사후의 세계를 일종의 어둠 같은 것, 차갑고 미끄러운 무한한 어둠같은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것을 직접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영면에 들고 말았다. 때는 1965년, 91세였다. 스탈린 스탈린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1953년 2월 28일 밤, 그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뇌 좌반구의 동맥이 끊어져서 왼쪽 전체에 출혈된 피가 넘쳐 있었다. 오른쪽 반신이 완전 마비되고 언어기능은 상실되었다. 곁에서 스베트라나가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가 눈썹만 한번 움직여도 온 나라를 떨게 했던 그의 얼굴이 굳어진 것은 1953년 3월 5일 21시 50분이었다. 누군가가 아버지를 죽였다. 아버지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됐다. 고 술에 취한 아들 바실리가 옆방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무쇠와 같은 사내 라는 뜻의 스탈린 은 1929년 수령의 지위에 올라 74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을 때가지 24년 동안 스탈린주의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는 피의 숙청 과 공포정치를 감행해왔다. 그는 자기의 권력의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충복도 이용한 다음 곧바로 제거해야 마음이 놓았으며, 심지어 죽음의 사자가 곁에 다가온 마지막 순간에도 사후 자기의 이미지에 흠집을 낼 우려가 있는 인물들은 가차없이 제거했다. 통치기간 동안 그는 2천 2백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나타났다. 막상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가 차가운 방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때, 측근들이 보인 것은 거짓 눈물과 보이지 않는 권력쟁탈전 뿐이었다고 전한다. 권력 무상이 아닐 수 없다. 글터 → 국사/세계사 상식 밖의 세계사 - 안효상 9. 한나라 농민은 모두 귀족이었다 흔히 백작, 남작, 후작이라고 하면 군주에게 작위를 수여받은 귀족을 말한다. 그러나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의 무지렁이 농민들이 모두 (물론 미성년자와 여자는 제외) 황제에게 작위를 수여받았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이고 여기에는 엄청난 역사적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는 보통 중국 역사에서 하은주 시대부터 신해 혁명까지 중국을 지배했던 전제군주의 성격이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진한 시대를 획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사실상 진한제국 이전의 농민들은 왕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들에게는 씨족 집단의 장이 곧 왕이요, 황제였다. 물론 은나라, 주나라의 왕들은 그 시대의 최고 지배자였지만 그 권력에는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 이 시대 사회구조의 기본 단위는 씨족 집단이었기 때문에 왕의 지배력은 씨족 우두머리의 충성을 확인하는 정도였고 씨족 내부에는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은,주 시대의 농민들은 왕을 의식하지도 못했고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씨족장만이 그들의 지배자였다. 게다가 씨족장일지라도 씨족원들의 동조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은,주의 왕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왕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은,주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의 혼란기를 거쳐 등장한 진시황제에 이르러서야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과 같은 왕권이 성립한다.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지식인들을 파묻거나 책을 불살라 버리고 지방까지 자신의 전용도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모든 백성들에게 똑같은 화폐와 길이, 무게, 부피 단위를 쓰도록 강요했고 전국의 인민을 동원, 아방궁과 만리장성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씨족을 해체하고 군과 현을 전국에 설치, 씨족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인민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는 자신이 이전의 왕들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다. 황제는 원래 중국 고대의 신을 지칭하는 말로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호칭이었다. 후일 역사가들은 이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하여 그를 시황제라고 불렀다. 이는 은주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권력이었고 이러한 황제 중심의 새 체제는 한대에 들어와 완전히 자리를 굳혀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중국 황제의 개념이 성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들은 어떻게 자신들을 의식조차 못하고 있던 일반 백성에게 `하늘이 보내신 황제`라는 관념을 주입시킬 수 있었을까? 그 미끼가 바로 작위이다. 여기서 잠시 당시 촌락 상황을 들여다보자. 씨족 집단이 유지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씨족장을 중심으로 같은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고 자연스레 형성된 서열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춘추 말 전국 시대로 접어들면서 씨족 질서가 해체되자 사람들은 질서감을 잃고 동요했다. 이 때 이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던 황제는 자신의 즉위나 황후, 황태자를 세울 때 등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전 백성에게 황제의 이름으로 작위를 하사했다. 작위의 수여 횟수를 보면 진시황제 때 1회, 전한 때 53회, 왕망 시대에 1회, 후한 때 36회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여러 개의 작위를 받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전한 무제 때의 예를 보자. 한무제는 즉위할 때 인민(성인 남자)들에게 작1급씩을수여하고 리마다 쇠고기와 술 열 섬을 하사해 5일 동안의 연회를 허락했다고 한다 (당시는 허가 없이 연회를 여는 것을 법률로 금했고 3명 이상 이유 없이 모여 술을 마시면 벌금 4냥을 내야 했다). 이 때 마을사람들은 모두 모여 조상신 또는 마을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준 황제라는 존재에게 감사하게 된다. 이 때 제사 현장에서 앉게 되는 자리 순서는 곧바로 마을사람들간의 서열이 되는데 황제가 내린 작위를 많이 가진 사람이 상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황제는 작위를 가진 만큼 형벌을 감해 주었고 사냥 노획물의 분배에서도 작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별이 가해졌다. 이렇게 되자 작위의 위력이 분명해졌고 이를 하사하는 황제의 존재는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강력한 권위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황제는 만인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글터 → 경제/경영/성공 유태인식 돈벌이 - 후지다 덴 제 1부 - 현금을 손에 쥔 나의 방법 시대가 요구하는 상품을 노려라! 일본에서도 인스턴트 라면 같은 식품의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일본에서도 팔리고 아메리카에서도 팔리고 유럽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팔 릴수 있는 '세계의 맛'을 개발하는 데는 수백억 엔이라는 거액의 투자가 필요하다. 게다가 실패를 하면 그 개발 비용은 단 1엔도 회수할 수 없다. 그런 거금을 걸고서까지 '세계의 맛' 에 도전할 기업이 일본에는 없다.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도 현재 먹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다. 나라도 가난하지만 인간의 발상법도 빈약하다. 그래서 수 세기 혹은 영원히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능가할 만한 식품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고 현재 먹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이다. 나라도 가난하지만 인간의 발상법도 빈약하다. 그래서 수 세기 혹은 영원히 맥도날드의 햄버거를 능가할 만한 식품은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즉 맥도날드 햄버거는 후개발 상품에 추월당하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안전하고도 확실하게 돈을 벌수 있는 상품인 것이다. 이 햄버거는 시대가 요구하는 식품으로서 등장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교통기관이나 과학의 발달에 의해서 근대 생활은 촌각을 다투는 아주 바쁜 형태가 되었다. 이러한 생활에서는 나이프나 포오크를 사용하는 식사로는 너무 바쁜 나머지 다 먹어 치우지 못하게 된다. 자동차를 타고서는 나이프나 포오크를 사용할 수 없다. 아무래도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것이 필요하게 되어 가는 추세이다.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미국이 연구하고 노력한 끝에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 햄버거였다. 나는 일본이 경제적으로 미국에 추종해 가는 과정으로 보아서도 틀림없이 일본에서도 햄버거를 필요로 할 때가 올것이라고 보았다. 일본에도 손에 들고 먹을 수 있는 전통적인 음식이 있다. 바로 김밥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젊은이들은 쌀밥을 잘 먹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김밥은 영양의 균형적인 섭취에 문제점이 있다. 젊은이들은 고기를 좋아하는데 우메보시(매실 장아찌) 대신에 고기 조각을 박아 넣은 김밥은 대만 요리밖에 없다. 그런 사정을 고려한다면 일본에서도 김밥 대신에 햄버거의 시대가 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햄버거를 미래의 김밥으로 보았던 것이다. 나의 착안, 발상이 어긋남이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 판매 수자가 웅변으로 잘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글터 → 명상/지혜/처세 사랑에 대한 64가지 믿음 - 정호승 나도 돈을 줍고 싶다 한 사내가 우연히 퇴근길에 돈을 주웠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입구 계단을 내려가다가 뭔가 발에 툭 채이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지갑이었다. 그는 얼른 지갑을 주워 양복 상의 안주머니 속에 넣고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갑자기 남의 물건이라도 훔친 것 같아 아까와는 달리 계단을 거의 뛰어내려가다시피 했다. 그러나 막상 표를 끊고 개표구를 빠져나가려고 하자 얼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 지금쯤 두리번거리며 지갑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지갑을 주웠던 장소로 가 보았다. 급히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만 있을 뿐 아무도 지갑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좀더 기다려 보면 지갑 주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싶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 보았으나 누구 하나 지갑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은근히 마음을 놓았다. 잃어버린 물건이란 어차피 누가 주워 가도 주워 갈 것인데 내가 주워 가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만남의 장소'라고 씌어진 나무 의자에 앉아 슬며시 지갑을 꺼내 보았다. 지갑은 까만 고급 가죽 지갑으로, 그 속엔 10 만원 짜리 자기앞 수표 두 장과 만원 짜리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지갑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명함이나 주민등록증, 운전 면허증 따위는 없고 그저 돈만 달랑 들어 있었다. '이건 정말 행운이야. 행운의 여신이 나를 도와준 거야. ' 그는 속으로 가만히 소리쳤다. 어젯밤 돼지꿈도 꾸지 않았는데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내가 이걸 마다할 리가 없지. 그래도 난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스스로 그 지갑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곧장 집으로 퇴근하려던 생각을 바꾸어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야, 기태야, 퇴근 안하냐? 내가 술 한잔 살 테니까 만나자. 내가 그쪽으로 갈까? 북창동? 그래, 그래, 북창동 입구에 있는 커피 숍에서 일단 만나자." 기태는 커피 숍에 먼저 나와 있었다. '구두쇠 같은 네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술을 다 산다고 그러냐'하는 표정으로 기태가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기태를 창동 갈비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보라구. 이 돈 이거, 조금 전에 길에서 주운 거야." 술이 몇 순배 돌자 그는 주운 돈 자랑부터 먼저 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좋았어. 가끔 가다가 이런 횡재수도 있어야 살맛이 나는 거야. 돈이란 사람이 직접 찾아 나서서는 안 되고, 이렇게 제발로 사람을 찾아와야 되는 거야. 이거, 주운 돈으로 먹으니까 술맛이 아주 좋군 그래." 기태가 멍하니 부러운 듯이 쳐다보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내가 국민학교 4 학년 때쯤이었을 거야. 우리 동네 다리 위에서 돈을 한번 주운 적이 있어. 지금 돈으로 치면 한 몇 십만 원쯤은 될 거야. 난 학교에서 배운 그대로 가까운 파출소에 갔다 주면 주인한테 돌려줄 수 있다고 배웠거든. 그래서 파출소 순경한테 돈을 주었어. 순경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어디서 주웠느냐, 이름은 뭐냐, 어느 학교 몇 학년 몇 반이냐 하고 일일이 묻고 적더군. 그래서 난 기다렸지. 이런 착한 학생이 있다고 학교로 연락이 와서 틀림없이 선생님께 칭찬을 받을 줄 알고 말이야. 그런데 그러고는 그만이야.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소식도 없는 거야. 난 다시 파출소를 찾아가서 그 돈을 어떻게 했느냐, 정말 주인을 찾아 주었느냐 하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어. 그렇지만 난 순경들이 그 돈을 어떻게 했는지는 늘 궁금했어. 차차 나이가 들고 세상 돌아가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난 순경들이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지만 말이야. 그 돈을 그냥 내가 갖는 건데,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후회가 돼. 아마 순경들은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 돈으로 자기들끼리 술 먹고 치웠을 거야. 아예 처음부터 주인을 찾아 돌려줄 생각조차 안했을 거야. 그래서 내가 지금 그때 일을 보상받기 위해 이렇게 또 돈을 주웠는지 몰라. 나로서는 정말 기분 좋은 일이야. " 그는 안주 먹는 일에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고 술잔을 홀짝거리며 내내 살맛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날, 기태는 자기도 한번 돈을 줍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일찍 퇴근하게 된 그는 돈을 줍기 위해 이리저리 거리를 쏘다녔다. 특히 돈이 떨어져 있음직한 버스 정류장이나 택시 정류장, 지하철 매표구 입구 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길 위에 떨어진 돈이라고는 없었다. 다음날 일요일에도 가족들과의 나들이 약속까지 취소하고 거리를 쏘다녀 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10원 짜리 동전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더 이상 우스워지기 전에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나선 김에 돈을 줍는 기분만이라도 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 호주머니 속에 든 만원 짜리 한 장을 꺼내 길에 던져 놓고 남의 돈을 줍는 척하고 집어 보았다. 그러나 별로 신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몇 번이나 그 짓을 되풀이해 보았다. 역시 신통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다가는 다른 사람이 먼저 주워가 버릴까 염려되었다. 염려 끝에 그는 한강 고수부지로 나갔다. 마침 저녁때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남녀 몇 명과 무심히 흘러가는 유람선만 눈에 띄었다. 그는 그곳에서도 자기 돈을 떨어뜨려 놓고 줍는 일을 되풀이해 보았다. 혹시 무슨 특별한 기분이라도 드나 했으나 역시 별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무지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해보고 그만 두자' 하는 생각을 하고 다시 돈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때 강한 바람이 획 불어왔다. 떨어뜨린 돈이 강물 쪽으로 급히 굴러갔다. 그는 얼른 돈을 주우려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때 다시 한번 획 강한 바람이 불어 돈이 그만 강물 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글터 → 이글저글 노스트라다무스는 1999년 8월 18일이 지구 최후의 날이라고 예언했다.구약의 이사야서 53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언되어 있다. 예수 탄생 500년전에 살았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절대 왕이 태어나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리라고 예언했다. 또 BC42년경에 쓰인 ‘전원시(Vergil's Eclogue)’에서도 예수의 탄생과 생애가 예언되어 있다.요한 웨슬리는 18세기 초 영국에서 태어나 감리교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생전에 40,000번 설교를 하였고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400,000킬로미터를 여행했다.구약은 39개의 책으로, 929개 장, 23,214개 절, 592,439개의 단어가 2,738,100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은 27개의 책과, 270개의 장, 7967개의 절, 132,253개의 단어가 933,380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구약을 합하면 66개의 책과 1,199개의 장, 31,181개의 절, 724,692개 단어, 3,471,480개의 알파벳이 있다. 또 시편 107편의 8절, 15절, 21절, 31절은 아주 비슷하고, 이사야서 36장과 열왕기하 19장도 아주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은 스페인 황실의 후계자 그라나다 왕자에 의해 알려졌는데, 그는 마드리드의 스컬 성에 갇혀 있는 33년 동안 성경 외에는 아무 접촉도 없었기 때문에 인류의 행복을 바라면서 이 작업을 성실하게 해낸 것이다.마귀의 숫자 666은 아마도 로마 황제 네로를 가리키는 것같다. 네로는 더 큰 도시를 세우기 위해 로마시에 불을 지른 뒤 로마 시민들의 의심을 피하기 휘해 기독교도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었다. 그리하여 많은 기독교도들이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개에게 물어 뜯기고 맹수들에게 던져졌다. 또 온몸에 기름을 발라 네로의 정원에서 화형당하기도 하였다. 네로는 그들의 불붙은 몸을 햇불로 삼고 전리품으로 잡아 온 여자들을 발가벗겨 병사들에게 범하게 하였다. 또 자신도 벗은 채 수레를 타고 돌아다니곤 하였으며 기독교도들의 처참한 몸부림을 흡족해 하며 즐겼다. 이 때 로마인들이 기독교도들에 대한 이러한 박해를 구경한 데서 본래 구경거리라른 뜻인 극장(theater)이란 말이 생겨났다.인도의 마두라 사원에 새겨진 남신과 여신의 수는 무려 30,000,000이나 된다. 그림과 사진 → 꽃/식물(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