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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5호 - 2024.10.15. 화요일(음력 : 9.13.)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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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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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를 고를 때는 친구 고르듯 신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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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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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사람친구
장면1. “그때 같이 있던 사람이 여자친구니?”라는 아버지의 질문, 아들은 “아니에요. 그냥 친구예요”라고 답한다. 장면2. “그 사람이 전에 말했던 네 애인이야?”라는 아버지의 질문, 아들은 “아니에요. 아직까진 여자친구로 만나고 있어요”라고 답한다.
내겐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다. 장면1의 대답이 “아니에요. 여자사람친구예요”거나 장면2의 대답이 “네. 여자친구 맞아요”라면 난 이 대화를 무척 어색해할 것이다.
‘여자사람친구’, 줄여서 ‘여사친’은 젊은 세대가 쓰는 새말이다. 그 반대말은 ‘남자사람친구(남사친)’. 그런데 이 말들은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일어난 여러 언어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한 낱말의 의미는 다른 낱말과의 관계 안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이 관계에 변화가 생기면 그 체계에 있는 모든 낱말들의 의미도 따라 변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성 관계의 정도를 ‘애인, 여자(남자)친구, 친구’라는 세 낱말의 관계 안에서 이해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대화에서는 ‘애인’이란 말이 잘 쓰이지 않게 되면서, 이러한 낱말들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긴 듯하다. 불안정한 ‘애인’의 의미를 ‘여자(남자)친구’가 넘겨받으면서, 이성 관계의 정도가 ‘여자(남자)친구’와 ‘친구’의 관계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에 대한 연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친구’라는 말에서 또래나 동성 친구만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다 보니 꾸밈말을 덧붙여 ‘친구’의 범위를 정하게 되었다. ‘여자인 친구’이면서 ‘그냥 친구’라는 의미로, ‘여자’와 ‘사람’을 조합한 ‘여자사람친구’가 만들어진 것이다. 세상에 맥락 없이 나온 말은 없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입에 볼펜을 물고 발음 연습을 한다?
입에 볼펜을 물고 발음 연습을 하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 아나운서들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기 위해 평소에도 발음 연습을 하는데, 특히 모음의 발음은 입 모양과 혀의 위치에 따라 음가가 결정되기 때문에 정확한 입 모양을 만들어 발음하는 연습을 한다.
예를 들어 ‘ㅏ’, ‘ㅐ’, ‘ㅓ’와 같은 (반)개모음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혀의 위치를 낮추어서 발음해야 정확한 음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데 입에 볼펜을 물고 발음하면 입을 벌릴 수 없기 때문에 ‘ㅏ’, ‘ㅐ’, ‘ㅓ’ 모음을 제대로 발음할 수 없다.
다만 ‘ㅡ’, ‘ㅣ’, ‘ㅔ’처럼 입을 조금만 열고 혀의 위치를 높여서 발음하는 (반)폐모음들은 입에 볼펜을 물고 발음하면 쉽게 발음할 수 있다. (반)폐모음들은 아래턱을 위턱으로 올려 입을 옆으로 벌리면서 발음해야 하는데, 볼펜을 입에 물면 자연스럽게 입이 옆으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ㅔ’와 ‘ㅐ’의 발음을 구분하는 것을 특히 어려워하는데, 볼펜을 입에 물고 발음하면 반폐모음인 ‘ㅔ’를 쉽게 발음할 수 있고, 반대로 입을 벌려서 발음하면 반개모임인 ‘ㅐ’를 쉽게 발음할 수 있다. ‘ㅔ’의 발음이 자신 없다보니 ‘네’를 ‘니’로 잘못 발음하게 되는데, 앞으로는 아래턱을 위턱으로 올려 ‘네’를 정확하게 발음하도록 하자.
‘ㅡ’ 모음도 역시 아래턱을 위턱으로 올려 발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입을 벌려서 발음하면 ‘ㅓ’처럼 발음하게 돼 ‘마음만 턱별시민’이 될 수 있다. 각각의 모음마다 그 음가를 만드는 입 모양과 혀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입 모양과 혀의 위치를 만들어 발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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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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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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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活(생활) - 김수영
시장거리의 먼지나는 길옆의
좌판 위에 쌓인 호콩 마마콩의 멍석의
호콩 마마콩이 어쩌면 저렇게 많은지
나는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모든 것을 제압하는 생활 속의
애정처럼
솟아오른 놈
(유년의 기적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갔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
나는 자꾸 허허......웃는다
무위와 생활의 극점을 돌아서
나는 또하나의 생황의 좁은 골목 속으로
들어서며서
이골목이라고 생각하고 무릎을 친다
생활은 고절이며
비애이었다
그처럼 나는 조용히 미쳐간다
조용히 조용히......
<1959.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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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 이해인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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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 일기
11
새벽부터 나의 단잠을 깨우는 새소리. 문득 잠을 깨면 나뭇가지의 새들도, 키 큰 나무들도 내 방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것 같아 정다운 느낌이다.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정향나무 한 그루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지.
`나무야, 네 눈빛만 보아도 나는 행복해. 쓰러질 듯 가느다란 몸으로 그토록 많은 잎과 열매를 묵묵히 키워내는 너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더욱 살고 싶어져. 모든 슬픔을 잊게 돼. 바람에 흔들리는 네 소리만 들어도 나는 네 마음을 알 것 같아. 모든 이를 골고루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애쓰는 너. 우리 엄마처럼 웬만한 괴로움은 내색도 않고 하늘만 쳐다보는 네 깊은 속마음을 알 것 같단 말이야.`
12
`별을 보면 겸손해집니다` 라는 기사를 미국에 사는 진주씨가 보내 주었다. `천문학의 매력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것, 가장 멀리 있는 것, 가장 오래된 것, 가장 궁극적인 것을 찾아가는 데 있습니다. 복잡한 일상, 슬픔까지도 무한한 우주에 대비해 보면 극히 짧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라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어느 날 별을 바라보다 쓴 나의 글 `어떤 별에게` 한 편을 다시 읽어 본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르지만
산에서 하늘을 보면
금방이라도 가까이
제 곁에 내려앉을 것 같습니다
다른 별에 비하면
지구는 아주 작은 별이라는 걸
얼른 이해할 수 없듯이
때로는 그 안에
먼지처럼 작은 내가 있음을
자주 잊어버리며 삽니다
요즘은 혜성, 목성의 거대한 충돌로
온 세계가 하늘을 보고 놀라워하는데
큰 별과 별, 천체의 부딪침이 신기하고 놀랍듯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과 마음이
어느 순간 섬광처럼 부딪쳐 일어나는
사랑의 사건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것인가요?
누가 눈여겨보지 않아도
그 황홀한 내면의 빛은
소리 없이 활활 타올라
우주를 밝히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할 땐 우리도 별이 되고
이미 별나라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심하게 부딪치고도 깨어지지 않는
지상에서의 사랑을 별나라에까지 들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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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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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35 - 고욤나무 - 김관식
우리
구슬치기하자
호주머니 속에서
한 움큼
꺼내 놓는
노오란
구슬 열매
눈 부릅뜬
햇살이
겨냥한
반짝거리는 구슬들
화르르
쏟아지는
고욤의
즐거운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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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들판이 - 문삼석
초가을 들판이
노릇노릇 익습니다.
볏잎이 노릇노릇 익고
벼알도 노릇노릇 익고
은행잎이 노릇노릇 익고
은행알도 노릇노릇 익고......
초가을 들판이
달걀부침처럼
노릇노릇 익습니다.
온종일 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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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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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송 - 기타하라하쿠슈북(北原白秋)
一
落葉松 숲 속을 지나
落葉松을 다시금 보다.
落葉松 외로워라
나그네길 외로워라.
二
落葉松 숲 속을 나와
落葉松 숲 속에 들다.
落葉松 숲 속에 들어
오솔길 또다시 이어지네.
三
落葉松 깊은 숲에도
내가 지나갈 길은 있었네.
안개비 자욱 내리는 길
산바람 스쳐 지나가는 길
四
落葉松 숲 속 길은
나만이 아닌 남도 지나가네.
홀로 외로이 걸어가는 길
호젓이 발걸음 재촉하는 길
五
落葉松 숲 속을 지나
나도 모르게 죽이는 발길
落葉松 외로워라
落葉松과 속삭였네
六
落葉松 숲 속을 나와
아사마[淺間] 嶺에 오르는 연기
아사마 嶺에 오르는 연기
落葉松 위로 落葉松 숲 너머로
七
落葉松 숲에 내리는 비는
호젓도 해라 고요도 해라
울려 오는 뻐꾸기 울음
젖어 선 落葉松의 숲
八
인간 세상 덧없다 하건만
無常의 길에 즐거움 깃들었네
山川에 잠긴 山川의 소리
落葉松에는 落葉松 부는 바람
〈세계의 문학 대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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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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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3장. 의를 기른다
48.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
무엇보다 내적인 충실을 중요시한다
대개의 유태인들은 겉치레에 능숙하지 못한 편이다. 아니 경원하고 주저하며, 오히려 싫어한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항아리의 겉모양을 보지 말고 내용물을 보라'는 격언은 유태인들의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이나 생활태도는 인간에 대해서 뿐 아니라 모든 사물에 대해서도 철저하다. 예를 들어, 번지르한 포장술로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약삭빠른 상혼에 속아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가르친다. 겉모양을 치장하는 데만 집착한다면 아무래도 내면을 충실히 하는 데 소홀하기 쉽다. 즉, 내면이 알차지 못한 사람일수록 겉모양을 적당히 치장하여 마치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이러한 심리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흔히 있는 일이다.
외면을 도외시하는 만큼 내면에 충실한다
뉴욕에 살고 있는 유태계 부호 중의 한 사람인 필립 J. 구다스 부인은,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된다'라는 말을 처세훈으로 삼고 있다.
"옷을 구입할 때는 최고급 옷감에 최고의 솜씨로 지은 것을 선택해야 하지만, 야한 색깔이나 유행을 따르는 옷은 절대 입지 않으며, 밍크 코트 같은 최고급 의복은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 해도 입어서는 안된다. 또한 좋은 그림을 벽에 걸어두는 것은 좋지만 손님들 눈에 잘 띄게 거는 것은 피해야 하며, 소녀는 둥근 밀짚모자와 흰 장갑을 끼는 것이 좋다."
바로 이런 것들이 '무겁게 보이지 않는 방법'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꾸미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남으로부터 공연히 반감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 런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초대 총수였던 네이슨 로스차일드도 당시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옷 끝단 장식 등의 치장이나 허례허식을 극단적으로 경멸했으며, 오직 실력만이 전부라고 믿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유태인들은 은이 참무게를 자랑하는 것처럼 내면의 충실에 힘을 쏟는다. 비근한 예일지 모르지만. 조그마한 명함 한 장에 앞뒤가 꽉 차도록 직함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와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직함보다는, 남이 인정할 수 있는 실력 함양에 모든 힘을 경주한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뛰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킨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들은 내면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겉모양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은 내면의 추악함을 감추려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소박하고 단정하게 차려 입히고, 눈에 띄는 행동은 삼가도록 교육시켜야 단다.
49. '내 것' '네 것' '우리 것'을 구별시킨다
소유권은 명확히 구별한다
유태인들이 어린 자녀들을 교육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소유권에 관한 것이다. 소유권이라고 하면 대단한 재산이 연상되는 거창한 말 같지만, 한 가정 내에서, 그리고 비록 한 가족끼리지만 자기 물건 외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경우, 물건의 소유자를 정하는 데는 다음의 세 가지 부류가 있다.
1. 내 것(MINE)
2. 네 것(YOURS)
3. 우리 것(OURS)
나는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이나 노트 등을 자녀들이 가지고 놀 때는, '이것은 엄마가 쓰는 거니까 가지고 놀면 안 돼'라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비록 형제간이라 해도 쓰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는 '빌려줄래?'하고 동생이나 언니에게 물어본 다음 빌리도록 한다. 공놀이 등을 하다가 유리창을 깨뜨렸을 경우에는, '이 유리창은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라고 스스로 깨닫도록 부드럽게 타이른다. 한 가족이면서 왜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소유권을 분명히 하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이 '소유권'문제를 확실히 교육시켜 두면, 그들이 커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을 가족 전체의 것으로 알고 조심성 있게 다루는 어린이가 거리에 함부로 침을 뱉지는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남의 물건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어린이가 남에게 폐를 끼치는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소유권을 인식시키는 것이 결국 아이의 인격을 배양하는 더없이 훌륭한 교육 방법인 셈이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새삼스럽게 공중도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러한 예절과 질서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단 2∼3세까지는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구별해서 가르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린아이라고 해서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한 예로, 우리 딸아이는 두세 살 때까지 관엽식물의 잎사귀를 따서 씹어먹으며 '샐러드, 샐러드' 하고 뛰어 놀았다. 그러면 나는 그 현장을 목격하는 즉시, 딸아이가 보란 듯이 그 화분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옮겨놓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돼."
비록 어린아이지만 '내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유태인 어머니들은 '애들이니 할 수 없다'라는 태도는 절대로 취하지 않는다. 진정 자녀들의 '인격'이나 '인권'을 존중한다면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부터 '내 것', '네 것', '우리 것'의 개념을 이해시킴으로써 남의 물건이나 공공물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터득하도록 만든다. '어린아이니까'라는 관용적인 태도는 절대 금물이다.
50.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다
유태인은 전통의 메신저
유태의 격언에 '늙은이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젊어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젊은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미 인생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늙은이와, 인생을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엄청난 세대 차가 생기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즉 요즘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는 노인이 경멸 당하고 그로 인해서 문화의 전통성을 잃어 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문화적 전통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유태의 노인들은 전통을 전하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결코 경멸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다. 그들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지혜를 다음 세대에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또한 젊은이들도 노인들의 귀중한 체험을 통해 5천 년 유태민족의 역사와 지혜를 배우며, 아울러 생활 방법도 터득한다. 히브리어에는 경어가 없다. 대신 노인들에게는 공손한 태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존경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노인데 대해 난폭한 행동이나 예의에 어긋난 말을 하는 사람은 유태의 전통을 무시하는 자로 취급되어 멸시를 받게 된다.
노인의 '육체'가 아니라 '정신'을 중시한다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구약성서에도 언급되어 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장 32절)
젊은이들은 노인을 인간으로서의 역할이 끝난 '퇴물'정도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동양에서는 지난날 나이 많은 노인들을 깊은 산 속에 버리는 풍습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럴 만한 충분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노인을 문화의 전달자로서 존경하고 있는 유태인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육체'가 시든 노인들일지라도 경험과 지혜가 풍부한 그들의 '정신'을 높이 사는 사고방식이 뿌리 내린다면, 노인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노인은 불쌍한 사람도, 버림받을 이유도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후손들에게 지혜와 충고를 제공하는, 존경받아 마땅할 존재이다.
51.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어라
부모는 주기만 하고, 자식은 받기만 한다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언-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그만큼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유태인들은 예로부터 부모는 오직 줄뿐이고 자식은 오로지 받으면 그만인 존재로 생각한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너는 너희들로부터 아무것도 되돌려 받을 생각이 없어. 만약 내게 보답하고 싶은 생각이 있거든 이다음에 너희 아이들에게 엄마가 너희들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돼. 그것이 나에게는 제일 기쁜 일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에서이다. 나의 이와 같은 생각도 사실은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이다. 내가 IBM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언젠가 봉급에서 얼마를 떼내어 어머니의 선물을 산 적이 있었다. 무엇을 샀는지는 잊었지만, 당시 나의 형편으로는 비교적 비쌌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선물을 받고는 '왜 이런 것을 사왔느냐'고 내게 물으셨다. '어머니가 저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고요'라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손을 내저으시면서 다음과 같이 딱 잘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아니야, 내가 너를 키우는 건 무엇을 바라서가 아니란다. 내게 보답하고 싶거든 나중에 시집가서 네 아이들에게나 그렇게 해주어라."
내 친구도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젊었을 때에 집을 장만하기 위해 부모님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그 돈을 당연히 빌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3년 동안 열심히 저축을 해서 그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녀 역시 나와 똑같은 이유로 그 돈을 돌려 받았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부모들은 늙어 병이 들어도 자녀들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병든 부모를 돌볼 때만큼 신경 쓰이는 일도 없다. 병든 부모를 돌보는 것은 '보은'이 아니라, 부모에 대한 애정과 자식된 도리임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식들의 '10년후'를 생각한다
<탈무드>에는 이와 같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다룬 일화가 있다.
한 노인이 뜰에 묘목을 심고 있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그 광경을 보고 물었다.
"언제쯤 그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할 수 있습니까?"
"70년쯤 후에나 ..."
노인의 대답에 나그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었다.
"노인장께서 그때까지 사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닐세.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잔뜩 열렸었네. 아버지께서 심어두셨기 때문이지. 나도 그저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할뿐이라네."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다시 그 자신의 자녀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지금까지도 면면하게 지켜지고 있는 유태의 전통중 하나이다. 동양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고, 자식은 당연히 부모의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물론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은 소중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 애정을 새로운 세대에 쏟는 것이 미래를 위한 확실한 방법이라고 우리 유태인들은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관계는 '기브, 언, 테이크'관계가 아니다. 이를테면 부모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자식도 부모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유태인과 거리가 멀다.
52. 남한테 받은 피해는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
복수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유태민족의 역사는 바로 '박해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동안 받아온 박해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한다거나, 상대를 증오하는 내용이 담긴 유태의 문헌은 하나도 없다. 복수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태의 자녀들은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악한 자가 너에게 가한 짓을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고 배우면서 자라난다. 유태인들에게 가해진 잔인한 박해는 비단 나치스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왕 아하슈에로가 간신 하만의 말에 따라, '12월, 곧 아달의 달 13일 하루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유태인을 도륙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라(에스더 3장 13절)'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 명령은 다행히 실행되지 않았지만, 크리스트교가 유럽을 지배한 이후로 유태인에 대한 박해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자행되었다. 1215년 라테란 교회의 회의에서는, 유태인을 구별할 수 있도록 황색 또는 진분홍색의 헝겊조각을 달고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의를 했고, 심지어는 여러 사람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다니게까지 했던 것이다.
<안네의 일기>는 유태인들의 개인적 역사
그러므로 나치스에 의해서 저질러진 박해는 유태민족의 '박해의 역사'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사건에 불과하다. 유태인은 노란 색 별을 달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자전거를 공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차도, 자동차도 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만 물건을 사야 한다. 그것도 유태인 상점이라는 표시가 있는 가게에서만 살 수 있다. 그리고 유태인은 밤 8시 이후에는 반드시 집 안에 있어야만 한다.
이 글은 네덜란드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나치스 치하에서 쓴 <안네의 일기>중 일부분이다. 안네는 결국 강제수용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는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유태인의 개인적인 역사인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소년 시절을 독일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나치스에 의해 교직에서 쫓겨나고, 그 자신은 김나지움(대학 진학을 위한 정규 예비교육학교)에서 퇴학당해 부득이 유태인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가 열네 살 때까지 14명의 친척들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래서 키신저 일가는 하는 수 없이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되풀이해서 말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일 이 없도록 하라. 역사란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 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마빈 토케이어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B라는 글자로 시작한다. 히브리어의 B는 왼쪽이 열려 있는 모양이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나가므로 오른쪽의 과거는 닫혀 있지만, 왼쪽의 미래는 열려 있다." 즉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것이다.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복수나 증오는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태도이다. 그보다는 모두를 깨끗이 용서하고 미래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는 것이 더욱 건전한 삶일 것이다.
53.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
'이 사람은 유태인이다'라고 항상 말한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아들러, 트로츠키, 키신저, 프루스트, 샤갈, 로스차일드, 구다스, 미요, 토머스 만, 아서 밀러, 하이네, 프란츠, 카프카, 맨델스존 등의 유태계 사람들이 과학, 예술, 문화, 정치, 경제를 포함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지금도 많은 유태인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족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그중 반드시 한 번쯤은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유태인은 전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야기 속에 유태계 위인이 등장할 때는, 아이들에게 '이분은 유태인이다'라고 반드시 말해 준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 인물에 대해 대단한 친근감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사람의 행적을 굉장한 자랑거리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들은 긴 세월 동안 조국이 없는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민족으로서, 유태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 도우며 가까이 지낸다. 토케이어 씨는 랍비 신분으로 일본에 부임하기 전, 일본 규슈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오기 전까지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 가운데 유태인은 단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런데 단 이틀만에 그 두 사람은 서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유태인끼리는 자석같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민족으로서의 일체감이 강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위인이 유태인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이 자기 친척인 듯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고 차츰 세계사에서 유태인들이 이루어놓은 업적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되고, 아울러 그 이면에 흐르는 박해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과연 유태인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수한 유태인들이 세계 각국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태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며, 세계를 이끌어나갈 주역인 어린아이들에게도 큰 격려가 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이들에게 자기 민족의 위인들에 대해 얘기해 줌으로써 민족적 긍지를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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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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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재위 : 서기 138년 7월 10일 ~ 161년 3월 7일)
행복한 시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치세를 트라야누스 황제나 하드리아누스황제처럼 연대순으로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 그런지는 인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겠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특기할 만한 새로운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이 그가 황제로서 책무를 수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후세는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서기 96년부터 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서기 180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할 때까지를 '오현제 시대'라고 부르게 되지만, 동시대의 로마인들은 '황금 시대' (Saeculum aureum)라고 불렀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황금' (aureus)이라는 수식어를 붙일만하다고 평가한 세 황제에게는 각각 다음과 같은 수식어구를 바쳤다. 황제의 이름이 책의 제목이라면, 이 수식어구는 부제같은 느낌을 준다.
트라야누스- '지고의 황제' (Optimus Princess)
하드리아누스-'로마의 평화와 제국의 영원' (Pax romana et Aeternitas imperii)
안토니누스 피우스- '질서있는 평온' (Tranquilitas ordinis)
이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제국 전역을 평온한 질서가 지배한 것이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 23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가 되기 어렵다. 황제의 신변에 스캔들 냄새라도 진동한다면 가십을 좋아하는 연대기 작가들을 기쁘게 해주었겠지만, 그런 것도 전혀 없다. 극적인 생애를 보내지도 않았고 추문과도 무관하다면, 동시대의 역사가들만이 아니라 후세의 전기작가들에게도 '벅찬' 존재다. 덕분에 그의 전기는<황제실록>에 포함된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까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동시대인들의 호기심도 자극하지 않았지만, 후세의 학자나 작가들의 호기심도자극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피우스도 훌륭한 황제'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지도자에게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이 필수 불가결하다. '역량' (Virtus)과 '행운' (Fortuna),그리고 '시대적 필요성' (Necessita)이다. 역량이 있고 행운을 만나도,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재능이 부족하면 좋은 지도자는 아니라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생각이었다.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도 '질'은 다르지만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었다. 피통치자에게 행복한 시대란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으면서도 '질'이 다른 지도자가 차례로 배턴을 넘겨받는 시대인지도 모른다. 한때 일본에서는 국회의원 선거를 치를 때마다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내세우고 싶은 사람을 뽑자"는 말이 나오곤 했지만, 이 말은 지금도 생명력을 잃지 않은 것 같다. 이 기준에 비추어보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과 '내세우고 싶은 사람'의 비율이 반반인 타입인 듯하고,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분명 백 퍼센트 77서고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백 퍼센트 '내세우고 싶은 사람'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내세우고 싶은 사람'으로도 충분히 해나갈 수 있었던 시대에 제위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Imperator Caesar Titus Aelius Hadrianus Antoninus Augustus Pius'라는 공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안은 원래 오늘날의 남프랑스인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론강 근처에 있는 네마우수스(오늘날의 님) 출신이다. 2천 년 뒤인 지금도 남아 있는 '르 퐁 뒤 가르' (Le Pontdu Gard)라는 수도교로 유명한 도시이고, 로마 시대에는 갈리아의 주요 도시들 가운데하나였다. 이 님은 원주민인 갈리아인의 촌락을 로마가 '지방자치단체'로 인정한 곳이고,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출신지인 이탈리카처럼 로마 군단병이 만기 제대한 뒤에 정착할 곳으로 건설된 도시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덕분에 원로원 의원이 된 님 출신은 본국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아니라 '로마화한 갈리아인'이라고 불린 사람들이다. 요컨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조상은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의 조상과는 달리 로마에 정복된 갈리아인이었다. 다만 선대의 두 황제가 속주에서 태어나 로마로 이주한 제1세대인 반면,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제3세대나 제4세대가 된다. 늦어도 할아버지 대부터는 본국 이탈리아로 완전히 거처를 옮겨서, 고향에는 집도 땅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속주 출신을 새삼 문제삼는 경향은 오히려 후세의 우리에게 더 강한 것 같아서 재미있다. 로마 시대에는 속주 출신임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던 제1세대를 제외하면, 그 후로는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 제국은 하나의 대가족(라틴어로는 파밀리아)이라는 것이 속주를 포함하여 제국 전역에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3세대나 제4세대의 속주 출신 로마 시민인 안토니누스 피우스한테는 속주의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집정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몸도 마음도 완전한 로마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기 86년 19일에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 86년이면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한창 활동하고 있던 시기이고, 라누비오는 수도 로마에서 아피아 가도를 따라30킬로미터쯤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다. 아버지가 공무로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인지, 할아버지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여의었는지, 한동안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다 로마에서 아우렐리아 가도를 따라 북쪽으로 20킬로미터쯤 올라간 곳에 있는 롤리오에 외할아버지의 별장이 있었다. 그는 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철저한 교육을 받으면서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한 젊은이는 누구한테나 사랑을 받은 듯, 친가와 외가의 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많은 친척으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다.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안토니누스는 로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로마인들은 피불이에게만 유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장래가 유망한 젊은 친척에게도 그를 후원하는 의미에서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상속세'가 고대로마의 중요한 수입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통칭 '20분의 1세'인상속세는 로마 시민에게만 부과되었고, 육친이 상속하는 경우에는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원로원 계급으로 태어난 사람은 엘리트로 태어난 자의 책무인 명예로운 공직'을 맡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 시대였다 안토니누스도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인 서기 111년에 회계감사관에 선출되었다. 역시 트라야누스 시대인 116년에는 원로원에 들어가는 동시에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인 120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그 후 한동안은 순행 등으로 본국을 비울 때가 많은 하드리아누스 황제로부터 국정을 위임받은 '내각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49세부터 50세까지 1년 동안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아시아 속주 총독을 지낸다. 이때 베푼 선정은 수도 로마에서도 평판이 나서, 원로원 인사의 유효성을 보여준 사례가 될 정도였다.
이 경력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지만, 안토니누스의 경력은 원로원인사의 전형이라 해도 좋다. 황제가 임명한 직책은 하나도 없다 다시 말해서 전선에 근무한 경험이 전혀 없다. 속주 총독을 지내긴 했지만, 근무지는 문명도가 높기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소아시아 서부의 아시아 속주였다. 이곳에는 군단병도 주둔하지 않고, 관저 경비조차 현지인 보조병에게 맡기고 있다. 로마 황제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이자 제국안전보장의 최고책임자였다. 군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은 황제에게는 결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토니누스가 물려받은 로마는 트라야누스가 도나우강 방위선을 확립하고 하드리아누스가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뒤의 제국이다. 난세에는 적임자가 아니었을 게 분명한 안토니누스라도, 통상적인 행정만 관리하면 되는 평상시의 제국은 얼마든지 통치할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가 안토니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도 이런 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안토니누스 자신도 통치를 맡은 제국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를 선대의 두 황제에 버금가는 현제로 만들게 된다.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오르면, 대개는 측근을 비롯한 협력자를 교체한다.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본국 이탈리아에 상주해 있는 유일한 군사력인 근위대 대장에는 황제의 심복을 임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그 자리도 교체하지 않았으니까, 하드리아누스의 인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이 정도면 정말 철저하다. 근위대장은 그 후에도 무려 20년 동안이나 지위를 유지했고, 이제 그만 은퇴하고 싶다고 자청한 뒤에야 겨우 안토니누스가 고른 사람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의 인사는 철저한 적재적소 위주였고, 게다가 그것이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안토니누스에게도 나름대로 인간관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은 오랫동안 한 가지 일을 맡기면 그 일을 잘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름의 생각을 관철한다는 점에서는 안토니누스도 상당한 고집쟁이였다. 하루는 아내인 파우스티나가 남편의 인색함을 불평했다. 그러자 황제는 이런 말로 아내를 나무랐다. '당신도 참 어리석군. 제국의 주인이 된 지금은 전에 가졌던 것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오." 어쨌든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이다 "국가 소유로 돌려야 할 재산을 필요하지도 않은데 소비하는 것만큼 비열한 행위는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진 안토니누스 피우스인 만큼, 황제 즉위를 시민들과 함께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나누어주는 '일시 하사금'(congiarium)도 선대 황제들처럼 황제 금고에서 지출하지 않고 개인 돈으로 냈다. 수도 로마에 사는 시민권 소유자(17세 이상의 남자)가 20만 명이라 치고, 거기에 제국 방위선을 지키는 군단병 16만 8천 명을 더하면, 이때 보너스를 받은 사람은 36만 8천 명에 이른다. 그들에게 1인당 75데나리우스씩 나누어주었다니까, 안토니누스의 개인 재산에서 나간 돈은 무려 2,760만 데나리우스나 된다. 이 황제의 일상생활은 일개 원로원 의원이었던 시절과 전혀 다름이 없어서, 풍족하기는 했지만 호화롭지는 않았다. 우선 화려한 별궁 따위는 일절 짓지 않았다.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별장과 황제가 되어 상속받은 별궁을 이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안토니누스가 즐겨 찾은 별장만 해도 8개나 되니까, 새로 지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황제가 된 이상, 하드리아누스가 지은 티볼리의 빌라,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치르체오의 별궁, 티베리우스가 틀어박혔던 카프리 섬의 별장도 그의 소유가 되었을 텐데, 무엇 때문인지 이 세 곳에는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다른 어느 별궁보다도 이 세 곳이 아름다운 컷 같은데 말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안토니누스를 욕심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욕망이 적다는 것은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치세가 하드리아누스의 치세와는 다른 형태로 진행된 것도, 게다가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도, 안토니누스의 성격에는 그런 방식이 적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52세의 새 황제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자기 생각을 공표했다.
우선 순행은 떠나지 않고,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계속 머물면서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다음 두 가지를 들었다.
(1)제국의 중추인 수도로마에 머무는 편이 더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고, 그 정보를 토대로 정책을 결정하거나 긴급조치를 발령하기에도 편리하다.
(2) 황제가 순행할 때 순행지인 도시나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는 비용이 절약된다.
첫 번째는 안토니누스의 생각이 옳다. 문제는 정보가 들어오기 쉽고 명령이 전달되기 쉬운 조직이 만들어져 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황제에게 들어오는 정보는 크게 두 종류다. 첫째는 총독을 비롯한 국가공무원들의 보고, 둘째는 속주나 그 밖의 곳에서 보내오는 청원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서술할 때 막판에 소개한 아리스티데스는 서기143년에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강연할 때 이런 말도 했다. (속주 통치의 책임자인 총독이라도 정책을 결정하거나 속주민의 청원을 받았을 경우, 조금이라도 의문을 느끼면 당장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지침을 청하는 것이 로마 제국이다. 총독은 황제의 지시가 내릴 때까지 기다린다. 마치 지휘자의 신호를 기다리는 합창단처럼 )' 그리고 전쟁터로 가는 유능한 사령관과 똑같은 가치관으로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로마인은 안전하고 빠른 정보 전달에 대해서도 항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국영우편제도는, 역대 황제들이 정비에 노력을 쏟은 결과 정보 전달의 양대 요소인 안전성과 신속성이 그 시대치고는 대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육상에서는 역참마다 말을 갈아타면서 목적지를 향해 로마 가도망을 내달린다. 해상에서는 항구에 들어갈 때마다 가장 일찍 출항하는 배로 갈아타고 운반하는 방식이 민간우편에서도 일반화되어있었다. 아리스티데스는 이런 말도 한다. (황제는 정보 전달만 보장되면 어디에 있어도 통치할 수 있다. 제국변경에 있어도 편지만 보내면 통치할 수 있다. 황제의 편지는 작성되자마자 날개 달린 전령(그리스어로는 헤르메스, 라틴어로는 메리쿠리우스)이 나르기라도 하듯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닿는다.)
다음은 안토니누스가 든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자. 순행을 떠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순행지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하드리아누스가 너무 딱하다. 물론 황제와 그 일행을 맞이했는데 비용이 전혀 들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은 황후도 동행하지 않은 변경 시찰이 대부분이었고, 황제를 수행하는 일행도 주로 기술자였으니까 돈이 들지 않는 사람들이다. 숙소도 시찰 중에는 군단기지의 병영 막사이고, 겨울을 나기 위해 도시에 머물고 있을 때도 총독 관저가 있으면 거기에 머물고, 총독 관저가 없는 도시에서는 그 도시의 유력자 집에 신세를 지는 방식을 고수했다. '경제적 부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미미하다. 그리고 시찰 결과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군단병을 동원하여, 즉 국비를 들여서 방위체제를 정비하고, 가도와 다리도 놓아주었다. 경제면에서도 이익을 본 것은 오히려 순행지 쪽이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든 두 번째 이유는 구실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공표하기는 꺼렸겠지만, 진짜 이유는 오랫동안 황제의 부재를 견딘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주민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첫 번째였고, 두 번째로는 안토니누스 자신의 건강을 염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드리아누스가 말년에 심신이 무너지는 것을 안토니누스는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하드리아누스는 41세에 황제가 되었다. 안토니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52세였다. <황제실록>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안토니누스도 하드리아누스를 말년에 괴롭힌 병의 원인은 그의 오랜 변경 시찰에 있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티베리우스는 56세에 황제가 된 뒤에도 23년이나 장수를 누렸는데, 이 사람은 줄곧 본국 이탈리아에 머문 채 제국을 다스렸다. 장수하려면 몸을 혹사하지 말아야 한다고 안토니누스는 생각한 게 아닐까. 그리고 하드리아누스가 재구축한 제국은 황제가 직접 시찰하러 나가지 않아도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62세에 사망한 하드리아누스보다 훨씬 장수를 누려 75세까지 살게 된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선제의 업적을 거의 다 계승하면서 불편한 것만 조금씩 조정했지만, 즉위한 직후에 선제의 뜻에 어긋나는 일 두 가지를 감행했다. 첫째, 하드리아누스가 말년에 원로원 의원들을 마구잡이로 고발했는데, 이를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황제 즉위를 기념한 사면이라는 형태로 무효화했다. 선제의 악정을 바로잡겠다고 말함으로써 양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자신의 선정을 과시하는 따위의 야비한 짓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했을 일이라고 말하면서 고발을 취소했다. 이렇게 되면 원로원 의원들도 시민들도 정말 '자비로운 사람' (피우스)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선제의 뜻에 어긋나는 두 번째 일은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따라 양자로 삼은 안니우스와 루키우스의 약혼녀를 바꾼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두 소년의 신부 감을 간택하고 벌써 약혼까지 해놓았다. 17세인 안니우스(나중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약혼녀는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로 지명된 뒤 병사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딸이었고, 루키우스(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의 약혼녀는 안토니누스의 딸이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의 딸은 여덟 살인 루키우스의 짝이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피를 토하고 죽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애석하게 여기는 하드리아누스의 심정은 존중한다 해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두 아들이 일찍 죽고 큰딸도 해산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남은 자식이라고는 작은딸 하나뿐이다 나이로는 그 딸과 안니우스가 짝을 짓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또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자기 다음은 안니우스, 그 다음이 루키우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안니우스의 약혼녀를 자기 딸로 바꿀 수만 있다면, 피를 나눈 딸이 다음번 황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누스는 이런 일도 독단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일 사람이 아니다. 안니우스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당시 17세인 미래의 '철인황제'는 잠시 생각한 뒤에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했다.
인격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방식은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정책도 법안도 반드시 '내각'이나 '아미쿠스' (친구)라고 부른 측근 브레인들과 의논한 뒤에 결정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남의 의견을 청한 것은 아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남의 의견을 존중하고 독단을 피한 것은, 독단으로 일관한 하드리아누스의 후임 황제였기 때문이고, 그의 성격 자체가 '사전 교섭'으로 자기 생각을 정책화하는 방식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대도 그런 방식을 허용했다. <황제실록>이나 그 밖의 역사책에 따르면 안토니누스는 이런 남자였다. 미남, 그것도 군중 속에 섞여 있어도 눈에 띄는 타입의 미남이다. 키가 훤칠하고, 노인이 되어도 이 육체의 선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다만 키 큰 사람이 흔히 그렇듯이 등을 새우처럼 구부리는 버릇이 있었고, 구부정한 허리를 교정하기 위해 토가 속에 코르셋을 입고 있었다. 행동거지는 기품이 있고, 그러면서도 얼굴 표정은 늘 밝고 온화했다. 저음인데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가졌고, 연설은 평이하고 명료했다. 청중을 열광시키지는 않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깊이 파고드는 이야기꾼이어서, 연설보다는 좌담의 명수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다.
훌륭한 교양을 가진 만큼 교육을 중시했기 때문에, 후계자인 두 젊은이의 교육을 직접 책임지고 관리했다. 카르타고 태생의 철학자 프론토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고 젊은 안니우스의 교육을 맡긴 것은 하드리아누스였지만, 이 카르타고 사람에게 또 다른 후계자인 루키우스의 교육도 맡기기로 결정한 것은 안토니누스였다. 봄볕처럼 온화하고, 무슨 일이든 온건하게 해결하려고 애쓰고, 균형감각이 뛰어나고, 허영심은 전혀 없다. 이렇게 되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였다. 하드리아누스가 강행하여 유대교도에게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 할례금지령은, 서기 134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대인 '이산' (디아스포라)이 실현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지만, 안토니누스는 사실상 사문화한 이 금지령의 해제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유대교도만을 대상으로 한 예루살렘 거주 금지령까지 해제된 것은 아니었다. 해제된 것은 할례 금지령뿐이고, '이산을 명령한 법률은 계속 살아남아서 그 후 1800년 동안 유대 민족의 역사를 결정했다. 로마 황제의 최대 책무인 제국의 안전보장에서도 안토니누스 황제는 모든 전선을 시찰하며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하드리아누스의 업적을 그대로 계승했지만, 자신의 이름이 붙은 전선을 딱 하나 남겼다 '하드리아누스 성벽'에서 북쪽으로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구축된70킬로미터 길이의 '안토니누스 성벽'이 그것이다 게다가 그 북쪽에는 스코틀랜드 땅 깊숙이 뚫고 들어가듯 망루를 늘어 세우고, 그 전방에 기지까지 건설했다. 서기 139년부터 142년까지 브리타니아에 주둔한 3개 군단을 못박아둔 원주민 반란을 진압한 뒤에 이루어진 대책이다.
그러나 이 '안토니누스 성벽'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벽을 이중으로 세워 보강한 데 불과했다 '안토니누스 성벽'이 로마 제국의 국경으로 바뀌었다면, 그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도 로마화의 물결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고속도로망을 거기까지 연장하지는 않았다. 또한 요크와 체스터에 있는 군단기지를 옮기지도 않았다. 결국 칼레도니아(후세의 스코틀랜드)는 로마 문명권 바깥에 머물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의 로마 군단 주둔지에 대한 기록이남아 있다(다음 페이지의 별표 참조). 이것도 하드리아누스가 확립한 체제를 바꾸지 않고 계승한 데 불과하지만, 방위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시대, 즉 제국 전성기에 로마의 안전보장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로마의 지도자들은, '평화'란 이상이 아니라 현세에서 누려야하는 이익이고, 평화를 위해서는 물심 양면의 투자가 필수 불가결하다하다고 확신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전쟁 억지력으로서 군사력을 보유한다는 사고방식일 것이다.
억지력으로서의 군비가 이만큼 완벽하면, 로마 제국에 항거하려는 사람도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지 않을 수 없고, 섣불리 행동에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23년 치세 동안 로마 군단을 괴롭힌 것은 앞에서 말한 브리타니아뿐이었다. 다른 방위선에서도 이따금 외침이 있었지만, 황제가 사후에 보고를 받을 만큼 쉽게 수습되었다. 파르티아 왕이 여느 때처럼 국내의 압력에 떠밀려 로마에 강경한 태도로 나오려 했을 때도 안토니누스가 보낸 편지 한 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하드리아누스보다 훨씬 동방 전제군주들의 호감을 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는 로마 방문을 거부했던 카스피 해 근처의 부족장도 안토니누스 시대에는 로마를 방문하여 복종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사형통이라는 느낌으로 로마 제국은 평화를 구가하고, 제국 시민들은 평화의 과실인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의 지혜를 다 짜내도 천재지변은 피할 수 없다23년의 치세 동안 수도 로마에서 대화재가 일어나 340세대가 불에 탔고, 안티오키아에서는 지진과 화재로 도시 일부를 재건해야 했고, 카르타고 도심에서 화재가 일어나 큰 피해를 입는 등, 천재지변이 잇따랐다. 특히 지진대에 위치한 소아시아 서부 일대와 로도스 섬을 지진이 덮쳤을 때는 황제가 대책위원회를 설치할 필요가 있을 정도였다. 테베레 강의 홍수도 전혀 없지 않았고, 아라비아 속주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했고, 남프랑스의 나르보넨시스는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이런 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확립한 이후오랫동안 답습된 로마식 대책이 실행되곤 했다. 그 대책은 세 종류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선 황제가 의연금을 보내 피해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와 동시에 가까운 군단기지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기반 시설'을 복구한다. 또한 로마에서는 황제가 잠정조치법을 발령하여 속주세를 면제한다. 몇 년 동안 면제할지는 피해 규모에 따라 결정되었지만, 3년 내지 5년이 보통이었다. 통상적인 행정만 하고 있으면 무사태평하다는 느낌을 주는 안토니누스의 치세였지만, 만사가 태평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도 황제가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이 좋으면 어느새 공무원 수가 늘어나 버리지만, 안토니누스는 국가 재정이 흑자인데도 '구조조정'을 잊지 않았다 일도 하지 않고 봉급을 받는 자는 가차없이 해고했다. 그리고 안토니누스는 무슨 일을 하든 반드시 그 이유를 분명히 했지만, 공직자를 해고할 때도 다음과 같이 이유를 설명했다. "책임을 다하지 않는 자가 계속 보수를 받는 것만큼 국가에 해롭고 헛된 행위는 없다." 하드리아누스가 크레타 출신 서정시인인 메소메데스에게 주고 있던 연금도 액수를 줄였다. 작품도 발표하지 않고, 따라서 연금을 줄 가치가 있는 재능을 갖고 있는지 어떤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안토니누스는 공공을 위해 사유재산을 쓰는 것이야말로 부자로 태어난 사람의 책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에도 사유재산을 썼다. 안토니누스도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자주 공중목욕탕에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의 경우에는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만나는 사람들한테 작은 선물을 했다. 황제가 가는 날 그 목욕탕을 이용한 사람들의 입장료는 무료였다 레저 시설인 공중탕 입장료는 정치적 이유로 낮게 억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요금 자체는 대단한 액수가 아니다. 하지만 공짜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법. 덕분에 안토니누스가 가는 날은 그 목욕탕 입장객이 크게 늘어나서, 원로원 계급이나 기사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곳을 피하게 되었다. 황제란 공복 중의 공복이라고 믿은 안토니누스인 만큼, 무엇을 하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에서도 남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은 선대의 두 황제가 거의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는 어떻게 하느냐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안토니누스에 따르면 일은 철저하고 명쾌하고 간략하게 해야 하고, 공정성과 투명성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연고나 정실로 친지나 친구를 등용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 친구나 친지를 자신과 동등하게 대했고, 그래서 상대들도 지나치게 황제에게 의존해서는 안되었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민주적인 사람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로마식으로' 민주적이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하드리아누스가 10년 동안이나 계속 사양한 '국가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안토니누스는 즉위한 지 불과 1년 뒤에 수락했다. 아내 파우스티나에게도 자신이 황제에 즉위할 때 황후(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성심 성의껏 '아버지' 노릇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했느냐로 그것을 보여주려 했던 게 아닐까. 제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해에 파우스티나 황후를 여읜 안토니누스는 아내의 유산에 자신의 재산을 보태서 파우스티나 재단이라고 불러도 좋은 기금을 설립했다. 죽은 아내의 이름을 붙인 이 재단은 불우한 소녀들에게 결혼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이렇게 흠잡을 데 없는 인격자는 자칫하면 숨막히는 존재가 되기 쉽지만, 안토니누스의 경우는 유머 감각이 있고 얼굴에는 늘 온화한 웃음이 감돌고 있어서 남에게 경원 당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궁중에서는 자주 동맹국 제후나 속주의 유력자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데, 안토니누스가 주인 역할을 맡으면 로마 황제의 향연인데도 전원 별장의 만찬으로 변모해버린다. 그것은 그가 별장이나 산장에서 고기나 생선, 야채나 과일을 가져다가 요리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요리가 나을 때마다 그 재료를 어디서 구했는지를 손님들에게 일일이 설명한다 포도수확철에는 많은 로마인들처럼 일을 쉬고 별장에 가서 투니카 차림으로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그 포도로 담근 포도주가 익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안토니누스 황제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사냥을 좋아한 반면,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낚시를 좋아했다. 안토니누스에게는 완벽한 시골 신사라는 느낌이 늘 따라다녔다. 신사에게는 행동거지에서 품위와 온화함을 잃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남을 꾸짖을 때도 품위있고 온화한 태도를 허물어뜨리면 안 된다. 하루는 '아들' 안니우스(미래의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가정교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아들' 에게 말했다.
"현인의 철학도 황제의 권력도 감정을 절제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이 사나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참을 수밖에 없다.
"
하드리이누스 황제의 위탁을 받아 안니우스를 가르친 카르타고 출신의 철학자 프론토는, 그 젊은이가 성장하여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으로 제위에 오르자, 옛 제자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 편지에서 프론토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를 비교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를 대할 때면 그 명석한 사람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고작이었다. 마치 전쟁의 신 마르스나 저승의 신 플루토 앞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바싹 긴장하곤 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느냐고? 애정을 품으려면 자신감과 친밀감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친밀감이 서로 통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앞에서는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하지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안토니누스는 정반대다. 나는 해를 사랑하듯, 달을 사랑하듯, 아니 인생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사랑하듯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친밀한 애정을 품고 있듯이 그도 나에게 친밀한 애정을 느낀다고 언제나 확신할 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타인에게 주는 인상의 차이들 이 글만큼 명료하게 말해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사료는 검증하지 않고는 참고할 수 없다 가장 쉬운 검증 방법은 이 편지에 거명된 사람들이 접촉했을 당시의 나이와 지위를 비교하는 것이다. 옛 카르타고 땅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 로마로 나와서 변호사로 성공한 프론토가 하드리아누스한테 제위 계승자로 점찍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교육을 위탁받은 것은 서기 138년이었다. 그 해에 하드리아누스는 62세. 원래 복잡한 성격에다 병고까지 겹쳐서 점점 까다로워져가고 있었다. 측근에서 모시는 사람들도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종기를 만지듯 조심한 시기였다. 후계자로 지명한 안토니누스에게 황제 권한의 절반을 물려준 뒤이긴 했지만, 여전히 하드리아누스는 20년 동안 제국을 통치한 최고권력자였다.
그 앞에 선 프론토는 서기 10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까, 이 무렵에는 38세가 될까말까 한 나이였다. 38세의 젊은이가62세의 노인 앞에 서면 긴장하게 마련이다 더구나 상대는 로마 황제다. 뿐만 아니라 노령과 병고로 남을 배려할 여유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서기 143년에 또 다른 '아들'인 루키우스의 교육까지 맡겼다니까, 이 황제와 카르타고 태생의 교육자는 밀접한 접촉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와 프론토의 나이 차이는 스물네 살이었지만, 안토니누스와 프론토의 나이 차이는 열네 살에 불과했다. 스승인 프론토와 제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나이차이는 스무 살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의 차이를 고려한다 해도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의 성격 차이는 감출 수 없다. 하드리아누스는 건강할 때도 따뜻한 햇볕을 쬐어 상대의 긴장감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조용하고 맑은 달빛으로 상대의 기분을 달래주지도 못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구조조정, 즉 재구축을 이룩할 수 있었다. 원만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대개혁의 추진자가 된 경우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한테 친밀한 애정을 받는 것도 마키아벨리가 지도자의조건으로 꼽은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인 '비트투'-이 이탈리아어의 어원은 라틴어인 '비르투스' (Virtus)-임은 틀림없다. 이 경우 '비르투스'는 '역량'이라고 번역하기보다 '덕'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하드리아누스의 경우에는 '비르투스를 '역량'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고,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우에는 '덕'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런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과 깊은 관계를 가졌던 두 사람, 소년 시절부터 아껴준 하드리아누스와 제위 계승자에게 필요할 경험을 쌓을 기회를 아낌없이 베풀어준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명상록>을 읽어보면 그것을 엿볼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은 로마의 최고권력자가 쓴 저술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 이후에 나온 유일한 책이다. 그밖에도 술라,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회고록이나 전쟁기를 썼다지만, 제국 말기와 뒤이은 중세의 기독교 시대에 모두 사라져버리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저술뿐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자기가 누구한테 무엇을 배웠는가를 인명별로 열거하는 것으로 <명상록>을 쓰기 시작했다. 우선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스승(프론토도 여기에 들어간다), 몇몇 학자 등을 열거한 뒤, 양아버지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양자로 삼는 조건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제위를 물려준 하드리아누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어쩌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이 철인 황제의 견해를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후세가 '철인 황제'라고 부르게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 부분은 이렇게 시작된다. 좀 길지만 전부 소개하겠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온화한 성품과, 심사숙고한 뒤에 결정한 일은 단호하게 실행하는 불변의 의지를 가질 것을 배웠다. 사람들이 뒤쫓는 명예 따위에서 허영을 구하지 말고, 노동과 근면을 사랑하고, 공익을 위해 건의하는 말에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고, 상벌을 가함에 있어서는 그 공과에 따라 공정하게 할 것과, 상황에 따라 준엄하거나 관용을 베풀거나 해야 할 때는 경험을 통해야 한다는 것 등을 나는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또한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그분은 미소년들에 대한 정욕을 자제했다 (이것은 특히 하드리아누스를 염두에 둔 평가임이 분명하다. )또한 그분은 다른 시민들보다 당신이 더 나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신하에 대해서도 식사할 때나 다른 지방으로 떠날 때 갖추어야할 절차나 일체의 구속을 면제해주었다. 따라서 어떤 긴급한 사정으로 아버지한테 예의나 절차를 소홀히 한 사람에게도 늘 관대했고 한결 같았다. 또한 아버지는 모든 중요한 사항을 처리함에 있어 주도면밀하고 참을성있게 검토하고 연구했으며, 표면에 드러나는 사실만 가지고 판단하여 조사를 중단하게 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또한 아버지는 친구들을 오래 사귀고 보호했으며, 금세 싫증을 내거나 애정을 남발하는 일이 없었으며, 어떤 경우라도 만족스럽고 쾌활하게 처신했다. 그리고 모든 일은 미리 살펴 극히 사소한 일이라도 빈틈없이 처리했으며, 세속의 갈채나 모든 아첨은 미리 저지시켰다. 또한 국가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문제에 부단한 주의를 기울여 좋은 통치자가 되도록 노력했으며, 이런 행위들로 인해 생기는 비난에 대해서는 강한 인내로 견뎌냈다. 아버지는 신들을 충분히 신봉했으되 미신적으로 신봉하지 않았으며, 선심을 베풀어 민중의 환심을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또한 민중을 위하는 척하면서 농락한 일도 없었고, 매사에 냉철하고 성실한 태도로 임했기에 결코 비열한 사상, 비열한 행위를 내보이지 않았으며, 결코 신기한 취미에 빠지는 일도 없었다. 반면에, 생활에 유쾌함과 윤택함을 더해주는 행운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아버지는 과시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 방법들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소유했을 때는 꾸밈없이 즐거움을 누렸으며, 그렇지 못했을 때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일 없이 스스로 자유로움을 느꼈다. 어느 누구도 그분을 궤변가라든지 교양없고 경솔한 공론가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를 가리켜 원숙하고 완성된 인격의 소유자로서 아첨을 초월하여 자타의 어떤 일도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
한편 아버지는 창된 철학자를 존경했고, 위선적인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세간에서 명성이 자자해도 경멸했으며, 그들의 학설에 현혹되는 일도 없었다. 또한 좌담 자리에서도 늘 원만하여, 어떤 경우라도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이 좌중을 유쾌하게 이끌었다. 그분은 육체의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에 지나치게 집착하지도 않았다. 또한 신체적 외모에 대해서도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전혀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의사의 진찰이나 약제사의 처방을 받을 필요가 거의 없었다. 그분은 웅변이나 법률, 윤리학 등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유쾌히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그들이 실력에 합당한 명성을 얻을 수 있도록 후원해주었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제도나 법률에 위배되는 일이 없게 처신했다. 그분은 변화나 불안정을 싫어해서, 한 장소에서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를 즐겼다. 그러므로 그분은 심한 두통을 겪은 뒤에라도 즉시 기분을 바꾸어 활기차게 본래의 일로 돌아올수 있었다. 그분에겐 비밀이 많지 않았다. 있다해도 그건 극히 드문 일로서, 그것도 오직 국가의 중대사에 한정된 것뿐이었다. 그분은 공공건물을 짓거나 시민들에게 볼거리나 하사금을 제공하는 일도 늘 신중하게 경제에 주안점을 두고 시행했다. 그분은 자기가 해야 할 일만을 행할 뿐, 개인적 행위에 의한 헛된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생활에서도 많은 것을 그분에게 배웠다. 목욕은 반드시 하루 일을 끝낸 뒤에 할 것. 호화 저택을 짓는 데 열의를 쏟지 말 것. 식사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갖지 말 것. 옷의 양과 색깔에 신경쓰지 말 것. 시중드는 노예의 용모에 호기심을 갖지 말 것. 그분이 롤리오에서 보내준 편지를 보면, 그곳 별궁의 회랑을 수리할 때 낭비가 없도록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 투스쿨룸의 별궁을 수리할 때도 역시 낭비를 피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분은 공사를 불문하고 무례한 행동도, 뻔뻔스러운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남과 과격하게 맞서는 일도 없었다. 세간에서는 '땀까지 관리한다'고 말하지만, 그분의 모든 언행은 심사숙고의 결과였기 때문에 때와 장소에 완벽하게 적합했고, 그것이 그분의 언행에 질서와 일관성과 조화를 주었다. 그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향락에 빠져 있으나, 절제하면서도 얼마든지 향락을 동시에 누릴 수 있다. "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에 대해 쓴 글인데, 이 말은 그분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빠져듦이 없이 양쪽 모두 건전하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가까운 나이에도 그분은, 원기 왕성했던 시절의 건강과 기력이 쇠퇴하면 그 결함을 온건함과 차분함으로 벌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 스승이었던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도 보여준 청렴하고 꿋꿋한 불굴의 정신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이래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알 만하다. 이 말을 듣고 생각났지만, 선대의 두 황제, 특히 트라야누스 황제가 공공건물을 마구 세운 덕분에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 공공건물은 아주 적었다. '하드리아누스 영묘'라고 불리는 테베레 강 서안의 황제묘는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지 1년 뒤인 139년에 완공되었으니까, 하드리아누스가 생전에 착공한 것을 안토니누스가 이어받아 완공한 것이다. 이곳은 훗날 교황청 성채로 개조되어 카스텔 산탄젤로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 영묘에는 137년에 사망한 사비나 황후, 138년 벽두에 사망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그리고 같은 해 여름에 사망한 하드리아누스의 유해가 매장되었다. 그 후 안토니누스의 아내 파우스티나도 이곳에 묻혔고, 그로부터 20년 뒤에는 안토니누스 자신도 거기에 묻히게 된다. 테베레 강 이쪽에서 '황제묘'로 직행할 수 있도록 다리도 놓인다. 이 다리 또한 하드리아누스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안토니누스는 이 돌다리를 '폰스 아일리우스'(아일리우스다리)라고 명명했다. '하드리아누스다리'라는 뜻이다. 아일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가문 이름이었다.
안토니누스 황제가 착공한 건축물은 이 다리말고는 단 하나, 신격화된 하드리아누스를 모신 신전뿐이다. 판테온 바로 근처에 있고, 오늘날에는 관세청 따위로 쓰이고 있지만, 신전 오른쪽에 늘어서 있던 코린트식 원기둥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것도 11개의 원기는 사이가 시멘트로 완전히 메워져 있다. 하지만 건재했을 당시에는 동쪽으로 면한 입구 앞에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완성된 것은 서기 145년,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지 7년 뒤였다. 이 '신격 하드리아누스 신전' (Templumdivus Hadriani)이 다른 신격들에게 바쳐진 사원과 다른 점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을38개의 인물상이다. 벽면에 부조된 이 초상들은 로마 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38개 속주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 로마와 나폴리의 미술관에 남아 있는 것은 그 l·1운데 16개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보면 속주가 공화정 시대처럼 로마에 굴복한 형태가 아니라 대등하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음을 누구나 알아차릴 것이다. 속주민은 이제 더 이상 피정복민이 아니라, 정복자인 로마인과 동화하여 융합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 제국 전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은 서기 212년, 하드리아누스신전이 완공된 지 67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각 속주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부조는 제국 전역을 시찰하고 순행하는 데 치세의 태반을 보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전에는 정말 어울리는 장식이다. 어쩌면 이것도 하드리아누스의 아이디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밖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손댄 공공건물이 하나도 없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안토니누스는 기존 건조물이나 가도, 다리, 수도교를 보수·유지하는, 중요하긴 하지만 수수한 일로 만족하고 있었다. 행운과 행복으로 충만한23년을 보내고 찾아온 서기 161년 봄, 롤리오 별장에 머물고 있던 황제는 저녁식사를 마치자마자 먹은 것을 다 토해버렸다. 그 날 밤부터 이튿날까지 고열이 계속되었다. 수도 로마에서 제위 계승자인 40세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31세의 루키우스베루스가 달려왔다. 그 이튿날 근위대장이 불려왔다. 반년만 지나면75세가 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국장을 너무 화려하게 치르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로마인들은 노인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인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육친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토니누스의 경우에는 마치 젊은이가 요절하기라도 한 것처럼 원로원도 로마시민도 속주민도 한결같이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누구나 '안토니누스 피우스' (자비로운 안토니누스)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국가의 아버지'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서술할 때 막판에 소개한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를 다시 등장시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 대한 서술을 마무리짓고 싶다. 당시 20대 후반에 접어들었다는 소아시아 태생의 그리스인학자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이렇게 말 을이었다. (로마 세계는 마침내 광대한 지역에서 민주적 통치체제를 실현했다. 그것은 과거의 그리스 도시국가를 대형화한 것이라 해도 좋다. 지도층은 시민들 가운데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출신지는 모든 속주에 골고루 퍼져 있기 때문에,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 것은 제국 전역에서 모인 인재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태어났거나 나중에 시민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인데, 이들 개개인의 재능과 행정 및 군사 면에서의 훌륭한 조직화로 광대한 제국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제국을 대표하는 인물과 조직이 원활하게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제국이 통치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은 이제 국경에서만 벌어질 뿐이고, 제국 내부의 분쟁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제국 안에는 평화와 번영과 행복이 구석구석 침투해있다. 제국 바깥에 살면서 자나깨나 부족 싸움에 몰두하는 자들이 불쌍해 보일 정도다.
로마는 만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따라서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문화가 한데 섞여 움직이는 로마 세계는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각 분야에서 제각기 맡은 일에 힘쓰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공통된 축제일에는 황제가 주최하는 제의가 거행되지만, 민족이나 종교에 따라 각자의 제의도 자유롭게 거행되고 있다. 이는 각자가 자신의 존엄성과정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로마는 누구한테나 통하는 법률을 마련하여, 인종이나 민족이 다르고 문화를 공유하지 않아도 법을 중심으로 공존 공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생활방식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수많은 권리도 보장해주었다. 이 로마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집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로마 제국이라는 대가족의 일원임을 날마다 상기시켜주는 커다란 집이다.) 서기 143년에 강연한 내용이니까, 이 글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안토니누스의 치세 5년째에 접어든 로마 제국이고,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 마지막을 장식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사실 그 말이 옳다. 안토니누스의 치세는 그 후로도 18년이나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로마 가도망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때부터 완성될 때까지의 과정과 비교해보면 '부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개념으로 보나 철저한 시공으로 보나 오늘날의 고속도로망에 비견되는 로마 가도망은 기원'전' 312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대인 기원'S 130년 무렵까지 무려 4세기 반이나 걸려 완성되었다. 로마 세계의 형성도 이와 비슷하다 속주민에게도 원로원을 개방하여 속주까지 공동운명체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다. 그 후의 황제들도 적극적이냐 소극적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이 기본 방침에 따랐다. 그리고 로마의 이런 방식이 피정복민의 컨센서스까지 획득하려면 그들에게도 그것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군단의 신속한 이동을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 가토가 그 주변 주민들의 경제력 향상으로 이어진 것과 같은 이치다. 아무리 완벽하게 만들어진 조직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노화하여 시대에 걸맞지 않게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기능을 유지하거나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개혁이라는 이름의 대책이 필요해진다. 제9권에서 다룬 황제들만으로 한정하면,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나우강 방위선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 트라야누스와 제국 전역을 순시하여 제국의 통치체제와 방위체제를 재구축한 하드리아누스가 '개혁'을 담당한 황제였다. 이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의 책무는 '개혁'이 아니라 개혁을 '정착시키는 일이었다.
아리스티데스의 강연이 서기 143년의 로마 건국 기념일이 아니라 안토니누스가 죽기 전인 서기 170년 4월 21일에 이루어졌다 해도, 소아시아 출신인 이 그리스인은 똑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스인의 역사와 로마인의 역사를 구분짓는 가장 명확한 차이는 무엇일까. 그리스인의 역사는 도시(폴리스)들 사이의 항쟁의 역사이고, 로마인의 역사는 내부의 권력투쟁은 있었지만 도시나 부족들 사이의 항쟁은 없었다는 점이 아닐까. 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를 애호하는 네로 황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올림피아식 경기대회를 로마에 이식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4년에 한번은 도시들이 전쟁을 멈추고 올림피아에 모여 신체적 기량이나 글재주나 음악적 재능을 겨룬다는 이념이 로마인과는 무관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정복한 뒤, 서방에서는 부족집단이 '지방자치단체'로 바뀌고, 동방에서는 '도시' (폴리스)들이 저마다 자치권을 가지고 패권자 로마의 산하에 들어갔다. 이제 부족간 투쟁과 도시간 투쟁은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다. 너무 자주 말해서 지겹게 느껴지더라도 나는 몇 번이고 되풀이 말하겠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과 식량을 확보하는 것인데, '안전'이 보장되어야만 비로소 '식량'도 보장된다고. 따라서 '평화'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하드리아누스와는 달리 수도 로마에 머물면서 제국을 통치한 안토니누스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커다란 집으로서의 로마 제국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제국 안의 모든 사람이 그 큰집에서 한데 어울려 사는 대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고, 그런 통치를 실행했다. 황제에게 주어지는 '국가의 아버지' (파테르 파트리아이)라는 존칭을 하드리아누스는 줄곧 사양하다가 10년 뒤에야 받았다. '국가의 아버지'란 황제로서 이룩한 업적에 대해 주어지는 존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안토니누스는 제위에 오른 것과 거의 동시에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수락했다. 이는 안토니누스가 '국가의 아버지'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같은 로마 황제지만,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통치자로서 치세를 마쳤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아버지 역할로 일관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묘사한 안토니누스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아버지의 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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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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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대하여
나는 프로 야구팀으로는 무슨 까닭에선지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후원하고 있다. 후원한다고 해서 응원단에 들어가 응원을 한다거나, 선수에게 용돈을 준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고, 그저 혼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이기면 좋겠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 <디어 헌터>에 러시안 룰렛이라는 게임이 나온다. 리볼버 권총에다 탄환을 딱 한 발만 집어넣고 탄창을 빙빙 돌리다가, 자기 머리에다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게임이다.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는 일은 여섯 개의 탄창에 탄환을 네 발 놓고 러시안 룰렛을 하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길 확률이 대충 삼분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팀을 응원하는게 건강에 좋을 턱이 없다. 내가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응원하기 시작한 것은 십팔 년전 처음으로 동경으로 올라왔을 때이다. 그 무렵엔 아직도 팀명이 산케이 아톰즈였는데, 이름이 다를지언정 약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옛날부터 야구는 원칙적으로 홈 팀을 응원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동경에 있는 한은 동경 팀을 응원하려고. 재경 네 팀 '쿄진' '아톰즈' '토에 플라이어즈' '도쿄 오리언즈'를 여러 가지로 비교해 봤다. 그런데 결국 소거법에 의거하여 야쿠르트가 남았다. 동경 스타디움은 줄곧 다니기에는 지리적 조건이 안 좋고, 쿄진전은 워낙 붐비는데다 도무지 고라쿠엔이란 경기장이 마음에 안 든다.
그 반면 진구 구장은 제법 상쾌한 경기장이다.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고, 그 무렵엔 외야석이 편평한 둔덕처럼 되어 있어서 거기에 벌렁 드러누워 맥주를 마셔가며 시합을 보고 있으면 꽤 행복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긴 바람이 불면 모래 먼지가 심하게 일어, 마침 그때 주먹밥을 들고 있기라도 하면 모래가 달라붙어 자글자글한 게 단점이라고 하면 단점이었지만. 낮 게임 때는 상의를 훌떡 벗어 던지고 일광욕을 즐기기도 했다. 대 쿄진전을 제외하곤 늘 텅텅 비어 있다는 것도 심히 기뻤다. 요컨대 간단히 말해서 야쿠르트가 마음에 들어 진구구장에 다니게 되었다기 보다는 진구 구장이 좋아 그 결과로써 야쿠르트를 응원한 거나 다름없다.
따라서 텅 비어 있는 구장의 외야석은 여자와 데이트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이다. 맥주를 마시거나 도시락을 까먹어 가며 옥외의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고, 입장료도 극장보다 싸다. 게다가 그럴 마음이 생기면 야구 시합을 볼 수도 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게임은 십사오 년 전의 대 쿄진전 더블헤더로, 나는 그때도 역시 여자와 함께 오른쪽 스탠드의 우익수 바로 뒷자리에서 시합을 관전하고 있었다. 지금 같으면 예의 오카다 응원 군단이 시끌법석하게 진을 치고 있을 자리이지만, 당시의 응원단은 오로지 큰 북 하나에 피리가 하나뿐인 조촐한 규모여서 차분했다. 그 시합에서 야쿠르트가 이겼는지 졌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쿄진의 타자가 때린 라이트 플라이만큼은 아주 상징적인 정경으로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플라이는 실로 그림으로 그려 놓은 듯 편안한 외야 플라이였다. 타자가 야구 방망이를 경기장에 내던지고는 머리를 갸웃갸웃하면서 일루 베이스로 달려가는 그런 플라이였다. 야쿠르트의 우익수(불쌍하니까 이름은 특별히 감춘다)는 '올 라이트'라는 듯한 몸짓으로 오 미터 정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평범한 광경이다. 그러나 볼은 -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 우익수의 글로브로부터 오 미터 정도 뒤에 툭 떨어졌다. 바람도 잔잔하고, 태양빛도 그리 눈부시지 않은 오후에 벌어진 일이다. 관객들은 모두 망연자실하여 한동안은 헤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얘, 네가 응원하고 있는 팀이 바로 이 팀이니?'하고, 여자가 멋적은지 꾸물꾸물하고 있는 우익수를 가리키면서 내게 물었다. '음, 그래'라고 나는 대답했다. '다른 팀 응원하는게 낫지 않겠어?'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당연한 충고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도 한결 같이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팬이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조금씩 정이 깊어만 가는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고, 이렇게 된 게 옳았는지 어쨌는지에 관해서도 확신이 안 서는 부분이 있다. 좀 안 좋은 예이지만 '지나치다 우연히 만난 연분쯤으로 여긴 게 꼬리를 끌어' 지금에 이르렀다는 느낌이다.
그 사이에 나는 실로 어이없는 광경을 수없이 목격했다. 마츠오카 투수가 쿄진을 상대로 아마 9회 투 아웃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여, 완전 시합까지 앞으로 한 명만 아웃 시키면 될 곳에서 상대방이 홈런을 날리는 바람에 진 적도 있었다. 내가 딱히 지는 걸 좋아하여 야쿠르트를 응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역시 그 나름으로 실망하고 만다. 그러나 야쿠르트를 응원함으로 해서 얻을 수 있었던 자질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패배에 대한 관대함이다. 지는 것은 싫지만, 그런 일을 일일이 마음 깊이 묻어 두고 있다가는 도저히 오래 살아 남지 못하리라는 체념이다. 그러한 경지에 있는 내 눈으로 보면 쿄진 팬은 졌을 때의 행실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게 보인다. 야쿠르트 대 쿄진전에서 야쿠르트가 이기면 '돼지에게 채였다'고 내게 전화를 걸어대는 쿄진 팬 친구가 있는데, 이런 건 정말 좋지 않다.
- 마츠오카 투수의 은퇴 시합 관전 중, 내게 맥주를 권해 주었던 샐러리맨풍의 두 아지씨분, 정말 고마웠습니다. 마츠오카 선수도 상대편 와카나를 경원하지 않고 깨끗한 승부를 겨뤄 주어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깨끗하게 쓰리 런 홈런을 맞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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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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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2장 (육십 평생에) 1/2
(기도하라, 유대의 왕이여! 그대에게 사면을 내리노라.) 그 사악한 돈 우고와 에스파냐의 장군들이 공손하지만 완강하게 그 div에서 무릎을 꿇고는 자신들이 저지른 신성 모독적인 무도 행위를 사면해 달라고 요구하자, 클레멘테 7세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피렌체식 조소 외엔 메디치 교황이 그 정복자들에게 달리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라서 그는 넉 달 간의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동안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콜론나파를 사면하고 협정을 준수한다는 표시로 필리포 스트로치를 인질로 넘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스트로치는 교황의 인척일 뿐 아니라 몸값이 무려 백만 두카토를 넘는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조약은 체결되었고, 이제 그가 이를 지키려고 하는 한, 그의 편에서 보자면 전쟁은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마키아벨리의 군 병영 생활도 끝났다.
그토록 어리석은 행동이 가져온 그 엄청난 재앙에 귀차르디니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다. 그는 교섭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조약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항의도 하고, 이러저러한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끌어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군대를 피아첸치로 철수시키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고, 10월 9일에는 그 자신도 그곳으로 뒤따라갔다. 연하의 친구인 바르톨로메오 카발칸티에게 장문의 편지 한 통을 썼는데, 여기에는 그 스스로 사태의 요점을 간추려두자는 의미도 일부 담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찍이 빌라리가 공식 보고서라고 오인하였던 바로 그 편지였다. 여기서 그는 전쟁 과정에서 장군들이나 교황에 의해 저질러진 실수들에서부터 (그렇게 로마에 머물다 마치 어린애처럼 잡혀버린) 마지막 실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놀라울 정도로 명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테는 (어린애들의 림보에) 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전부터 정말 진심으로 그를 그곳에 보내고 싶어했음에 틀림없다.
휴전중인 상태에서 피아첸차에는 마키아벨 리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동안 비텔 리가 이끄는 피렌체 군은 로마로 향했다. 늦었지만 우선은 교황의 신변을 보호하려는 생각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교황이 그와 맺은 협정을 무시하기로 작정하는 대로, 그 신성 모두의 무례함을 안겨준 장본인인 폼페오 콜론나를 추기경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후, 그 가문의 영지를 칼과 불로 응징하기 위함이었다. 피렌체로 돌아갈 시점에 마키아벨리는 야코포 살비아티에게 자신은 군대와 동행했으면 한다는 편지를 썼다. 그것은 분명히 교황 사절의 자격으로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군대가 밀라노 인근에 주둔하고 있을 당시 이미 그의 위치가 그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강한 추측을 낳게 한다. 어쨌든 친구를 추천하는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받은 체사레 콜롬보가 이 문제를 교황에게 이야기하자 그는 (그에게 오라고 편지하라. 나도 그편이 좋아)라고 답하였고, 살비아티에게도 역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교황의 윤허가 기다리고 있는 피렌체로 곧장 가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일로 여기저기를 (둘러오라는) 귀차르디니의 부탁을 받고 있었으므로, 먼저 보르고 아 산 돈니노에 들러서 아마도 당시 휴전으로 크레모나를 떠나고 있던 에스파냐 군과 접촉하고는 이어서 모데나로 향한 듯하다. 그는 그곳에서 이틀 동안 머물려, 분노로 가득한 총감독관과 이를 감지하고는 심란해 있던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을 친구의 입장에서 위로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 하나는 그 자신 역시 전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귀도 랑고니 백작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심한 질책을 받았던 필리포 데 네를리 총독이었다. 네를 리가 불쑥 (도대체 내가 잘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라고 말을 꺼내자, 니콜로는 익살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재빨리 이렇게 말을 받았다. (총독 각하, 그렇게 놀라지 마십시오. 그건 각하의 잘못이 아니라 잘한 일을 한 사람도 잘된 일도 하나 없었던 올해의 잘못이니까요. 황제를 보십시오. 그는 금년 내내 자신의 편 사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최악의 행동이죠. 에스파냐 군도 우리를 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고, 우리 역시 이길 수 있었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지요. 교황은 교황대로 천 명의 군사보다 펜 한번 휘두르는 것이 자신을 더 잘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대로 행동한 것은 오직 시에나 사람들뿐인데, 미쳐서 돌아가는 시대에는 정작 미친 자들이 낫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지요. 그리고, 총독 각하, 실수하는 것보다 무언가 괜찮은 일을 하는 쪽이 오히려 더 불길한 징조일 수도 있답니다.) 이처럼 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데야 네를리도 웃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 랑고니가 끼어들어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총감독관께서는 여전히 화가 나 있으신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니콜로의 재바른 대답. (아닐 겁니다. 이젠 더 이상 옆에 화나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결국 모든 분노의 감정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이러한 웃음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을 법하다.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피렌체에 도착했으나, 교황이 자신에게 새 임무를 맡기도록 했다는 살비아티의 때 지난 편지를 보고 기뻐한 것도 잠시, 그가 막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출행을 취소하는 또 다른 편지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비텔리는 길을 재촉한 반면, 그는 여정을 너무 지체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누군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직 귀차르디니의 즉석 위로밖에는 없었지만, 그로서는 잃은 것이 그리 많이는 않았다. 왜냐하면 (콜론나가의 초막에) 머문다고 무슨 괜찮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은 풀리기 시작했고 이제는 교황을 위시하여 피렌체를 통치하는 사람들이 눈에도 어느 정도 들게 되었기 때문에, 비록 돈과 명예에서 얻는 것에 비해 수고는 많겠지만 소소한 일거리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끊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둘 모두를 필요로 했지만, 당분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만으로 만족하고자 하였다. 이제 막 그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던 (피렌체사)의 비극을 다시는 스스로 겪지 않을 것이었다. 이러한 속에서 그는 자질구레한 임무들을 맡고 있었고, 11월 30일에는 8인집행위원회의 명령으로 당시 모데나에 있었던 귀차르디니에게로 보내졌다.
한편, 당시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던 프룬치베르크 휘하의 독일 (란치 군 Lanzi) (Lanzichenecco(=Landsknecht)의 준말로, 16, 7세기 독일 황제력 Land 출신 용병을 일컫는다. Georg von Frundsberg가 그 지휘관이었다-옮긴이)은 베네치아 군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알프스 고갯길을 지나 포 강의 도하 지점에 이르렀고, 우르비노 공이 그곳에서 어떻게든 그들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형평이었다. 결국 모든 희망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소수의 군대와 그의 용감무쌍한 기개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11월 25일, 그는 평소 하던 대로 장군으로서보다는 병사의 한 사람으로서 싸우던 도중,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귀차르디니는 곧 이것이 단지 조반니 개인에 대해서뿐 아니라 전황 전체에 치명적 타격이 되리라는 점을 간파하였다. 이처럼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그 용감한 전사가 상처의 고통과 그것을 치료할 의사만으로 싸우고 있는 동안, 란치 군은 이탈리아의 심장을 향해 창 끝을 겨누면서 포 강을 건넜다. 그때가 11월 28일이었고, 30일에는 조반니데 메디치가 죽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키아벨리는 같은 날 훈령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 내용은 별 것 없었고, 단지 (그러한 위치의) 사절에게 (형식적으로) 주어지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행간을 잘 읽어보면 피렌체 정부는 당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니콜로의 임무는 총감독관에게로 가서 도시의 상황과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었는데, 이 점에서는 이미 귀차르디니가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또, 피렌체 시민들이 많은 돈을 주겟다는 제의보다는 조약의 체결 쪽으로 기울고 있지만, (협상 내용과 시기는 각하의 생각에 일임하겠다)는 말을 전할 예정이었다. 사절 임무치고는 참 희한한 것이 아닌가!
서둘러 말을 달리는 것이 이제는 괴로울 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해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펜니노 산맥의 세찬 겨울 바람을 헤치고 밤낮으로 말을 몰아 12월 2일 아침 일직 모데나에 도착하였다. 그는 즉시 총감독관을 만나 현안들을 상의한 뒤에, 8인집행위원회 앞으로 보낸 당일자 편지에서 그 내용과 의견들을 수합하여 보고하였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은 한 점도 더하지 않고, 오직 귀차르디니의 말만을 의도적으로 옮겨 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일은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특이한 경우이다. 간단히 말해서 결론은 이러하였다. 즉 적군의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 피렌체인들에게 희망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육칠천 명 정도의 교회 군 보병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설사 조약을 맺는다 해도, 그것은 전장에서가 아니라 로마나 피렌체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엇다. 이 지루한 편지의 말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위원님들께서는 조반니 님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은 이미 늦은 것이었지만, 무릇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을 그냥 눌러놓고 있기란 어려운 법인 것이다.
그는 다음날 8인집행위원회에다 새로운 사실을 약간 더한 다른 편지 한 통을 써 보냈다. 페라라 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자신이 황제 편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 란치 군은 피아첸차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 총감독관은 전쟁의 방향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파르마로 갔다는 것, 그래서 그 자신 역시 내일 귀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가 이 편지를 쓴 때는 3일이었지만, (쓸데없이 힘을 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5일까지 기다렸다가 그날 느긋하게 말에 올랐다.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1527년 2월 3일, 유난히도 눈비가 잦던 그 해 겨울도 한창일 무렵, 8인집행위원회의 지시로 그는 다시 한번 말을 타고 귀차르디니에게 갔다. 밀라노에서 나온 에스파냐 군은 이미 트레비아 강 쪽으로 넘어간 독일의 란치 군을 따라 포 강을 건넜다. 제국 군의 목표가 피렌체를 약탈하고, 로마마저도 약탈과 복수의 제물로 삼겠다는 것임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이제 피렌체인들은 얼마 안 되는 교황의 보병 부대와 그의 피렌체인 총감독관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는 처지였으므로, 마키아벨리는 도시 사람들의 생각과 소망을 총감독관에게 생생히 설명해 주어야만 했다. 이제 몸도 늙고 지친 상태였고 마음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갔다. 밀라노 부근의 진지에 도착할 무렵, 그는 당시 자신이 몇 통의 공한을 긁적이며 작업하고 있던 공책을 이번으로 영원히 덮어버렸다. 이후 그는 (피렌체사)를 다시는 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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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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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6. 지혜의 샘
소문난 잔치
김용옥, 세계적 명문 옥스포드대, 동경대, 하버드대에서 수학, 고려대학교 철학교수를 지내다 다시 원광대학교 한의대에 학생으로 입학하였고, 졸업 이후 현재 한의원을 개원하여 운영중인 동양철학자이다. 화려하고 특이한 이력으로 세간에 화재를 뿌린 그는 <대화>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70년대 세계 최고 명문대학을 누비며 나의 생각을 확인한 결론은 무엇이었던가? 이에 대한 답으로 나의 입버릇이 허용하는 솔직한 표현을 옮기기 위하여 독자들에게 실례를 하여야겠다."
“내가 70년대 세계 최고 명문대학을 누비며 나의 생각을 확인한 결론은 무엇이었던가? 이에 대한 답으로 나의 입버릇이 허용하는 솔직한 표현을 옮기기 위하여 독자들에게 실례를 하여야겠다. ‘아무것도 아니더라!’ 나는 옛날에 헤겔, 칸트가 굉장한 사람인 줄 알았다. 플라톤, 공자가 나의 생각과 격리된 저 피안에 우뚝 서 있는 엄청난 진리인 줄 알았다. 그리고 옥스포드대, 동경대, 하버드대가 정말 진리가 깨알같이 쏟아져 나오는 별천지인 줄 알았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천안 삼거리 능수버들 개천가에서 한밤중 쳐다보았던 밤 하늘을 수놓고 있는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는 70년대 우주여행을 한 것이다. 그 위대한 사람을 다 만나보고, 그 엄청난 별세계의 캠퍼스를 다녀 본 것이다.
그 결론은 무엇이었던가?
나는 무엇을 확인했던가?
‘아무것도 아니더라!’
칸트도, 헤겔도, 공자도, 하버드도, 캠브리지도, 동경대도 아무것도 아니더라. 나는 속아온 것이다. 나는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여 온 사람들에게 속아온 것이다. 아니 내가 속은게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우리의 민족이 속아 온 것이다. 나는 무엇도 아닌 ‘사람들’의 권위에 속아왔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 데 꼬박 20년이 걸렸다. 나의 사상적 국제화 과정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깨달음의 과정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아무것도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정말 죽어라고 공부를 해야했다.나는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자신있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가. ‘깡’이란 오직 실력과 노력에서 나온다. 실력과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깡’으로 살다가 ‘헛물’만 켜고 죽는다. 솔로몬은 그의 인생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헛되고 헛되도다
정말 헛되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구나!
세상을 살면서 ‘헛된 세상이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아야만 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Much cry and little word.) 양털을 자르는 데 양이 너무 큰 소리로 울어대서 많은 양의 털이 깎여졌나 했는데 결과는 조금밖에 깎지 못했다는 말이다. ‘태산 명동 서일필’이라고나 할까.
스캔들
‘미스 코리아’에 당선되었던 아가씨가 그 타이틀을 박탈당한 일이 있다. 과거에 결혼을 한 번 한 적이 있는 이혼녀였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실질적으로 결혼을 했더라도 호적에 오르지 않으면 그 결혼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몸과 마음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도 호적에 오르면 정식 부부가 된다. 여자나 남자가 결혼하는 것은 ‘죽 떠먹은 자리’와 같이 흔적이 나지 않기 때문에 호적으로만 판정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줌마’는 몸과 마음으로 결혼하여 호적까지 올리고, 이혼한 후 다시 ‘신장개업’하고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아내듯 진짜 처녀들을 물리치고 미스 코리아에 당선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그녀는 미스 코리아에 당선되었을 때보다 더 많이 알려졌고, 이를 바탕으로 연예계에 데뷰까지 하였다. 부정적인 스캔들이라도 당사자에게 크게 손해 날 것이 없던 경우다.
낯 뜨거운 유명인사
얼마 전 미국에서 이른바 성기 절단 사건의 피해자로 졸지에 ‘낯 뜨거운 유명인사’가 된 존 보비트(당시 나이 26세)는 땡전 한푼 없는 백수 건달로서 하는 일이라고는 밥 먹고 마누라 패는 일 뿐이었다고한다. 마누라이며 가해자인 에쿠아도르 여성인 로리나 보비트(당시 24세)는 그가 백수 건달 노릇만 하면서 구타와 성적인 학대를 밥 먹듯이 하므로 할 수 없이 ‘거시기’를 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남편의 성기를 절단한 죄로 재판을 받았고, 이 사실이 신문에 공개되자 피해자이자 그녀 남편보비트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한 케이블 TV 회사는 그에게 소송비용으로 약 3억원을 벌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 돈으로 약 3,600만 원짜리 자동차를 사러 다녀 세인의 빈축도 샀지만 땡전 한 닢 없던 사람이몇 억까지 벌었고 ‘거시기’ 역시 정밀 봉합수술로 다시 접합을 시켜 다른 여자에게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하니, 정말 꿩 먹고 알 먹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인기로 먹고 사는 연예인의 경우에, 부정적인 홍보 내용이라도 매스컴에 소개되면 손해볼 것 없는 것으로여긴다고 한다. 비싼 돈 들이지 않고 신문이나 방송에 대서특필되니, 인기관리 측면에서 큰 이익을 본다. 폭풍우가 지나면 정적이 오듯, 잠시만 지나면 대중들은 ‘스캔들’은 잊어버리고 오직 긍정적인 측면의이름만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매스컴 타서 손해 볼 것 없다. (Any publicity is good publicity.)
정치인 특히 대선후보들이 매스컴을 통해 서로 흠집내기를 하는 싸움질도 어느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오직 긍정적인 측면의 기억만 남는다. 그러므로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 말고 진흙밭 속의 개싸움같이 물고 뜯으면서 맞받아치는 것이 아주 좋다. 그럴수록 비싼 돈 들이지 않고 방송이나 신문에 대서특필되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재별기업가인 마쓰시타의 이야기다. 그가 처음 기업을 시작했을 때 가진 것이라고는 세가지뿐이었다고 한다. 돈이 없다, 공부를 못 했다, 신체가 허약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결코 성공의 조건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가난했기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한 정신력을 길렀다. 아울러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그가 가진 학력이었기에 ‘모든 사람에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전심전력으로 무엇이나 배웠다. 또한 자신의 허약체질 때문에 ‘자신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이양하여 다른 사람의 능력을 최대로 활용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고, 마침내 세계 굴지의 기업을 일으켜 세웠다.
궁하면 통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듯이,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헤쳐나갈 방법이 생기고, 죽어라 하고 어려운 일이 겹쳐오더라도 사람은 살아가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무슨 일이나 궁극에 도달하면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가 생기면 통하는 길이 생기고, 통하면 오래오래 계속된다고 주역은전하고 있다. 세상만사는 변화하고 유전하고 반복하고 순환하는 것이 역의 이치다. ‘가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하늘과 땅이 서로 교제하기 때문이다‘고 주역에서 이르듯이 세상일은 한 번 성하면 쇠하고, 넘어지면 일어나게 되어 있다. 하늘과 땅의 이치가 이러할진데 인간의 흥망성쇠쯤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러므로 ‘궁할 때 궁함을 즐기고 통할 때는 통함을 즐겨야 한다’는 장자의 지혜를 본받아야 한다. 아울러 하느님은 우리를 어려운 환경 중에 시험하고 이를 우리가 이겨내면 우리를 순금같이 깨끗이 만든다고 성경은 말한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항상 멸시당하는 것이 아니며, 가난한 자의 희망이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고 성경 시편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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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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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Hamlet:1600-1601)
맥베스( Macbeth:1605-1606)
해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제일 마지막 작품이며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1606년 여름에 덴마크 왕이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때 궁정에서 상연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한다. 맥베스는 야심의 비극이며, 양심의 움직임과 그 무리한 달성, 달성한 후에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에 대한 세밀한 연구이며 해부인 것이다. 맥베스는 바로 주인공 자신이 저지른 악에 의하여 자기 자신도 칼에 맞아 죽게 된다는 인과 응보적인 내용이다. 맥베스의 무술에 대한 자신과 이기적 야심 이상한 마녀의 숙명적 암시가 이 작품 구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과의 성격을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이에 대하여 해리슨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맥베스의 성격에는 선과 악이 혼합되어 있다. 그의 용감하고 고상한 성격은 그의 양심과 비등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압도적인 상상력으로 어떤 행동의 결과를 예견할 뿐 아니라 그 진의를 투시한다. 제1막 제3장은 예언이 실현되리라는 비극적 예감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맥베스는 마녀의 예언을 듣는 순간 그것을 수행할 방법을 예견하고 그 광경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그의 충성심은 그의 부인을 만날 때까지는 균형을 유지한다. 맥베스 부인은 자기남편보다 다 낫기도 하고 못하기도 하다. 이 부인은 맥베스와는 달리 대담한 편이지만 예민함과 지각이 결여되어 있다. 던컨 왕을 살해하고 나서 맥베스는 자신의 행위가 악일 뿐만 아니라 그 응보를 받으리라는 것을 예감한다. 왕이 살해된 후 남편과 아내의 성격의 차이는 더 뚜렷해진다. 맥베스는 그의 부정 행위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생각에 압도된다. 그러나 그 부인은 다음에 해야 할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질 뿐이다. 맥베스 부인에게는 상상력이 없다. 시역이 감행되고 나서 던컨 왕의 피가 맥베스의 뒤를 따라 계단에 떨어지고 그것이 전 우주를 둘러싸서 그는 피바다에 홀로 서게 된다. 그러나 맥베스 부인은 물이 조금만 있으면 악행을 깨끗이 씻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러한 두 사람의 인물을 중심으로 맥베스 비극은 처참하고 비장한 여러 장면을 통해 전개된다. 맥베스가 고대의 운명극과 다른 점은 그의 성격과 야심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작가 약전은 햄릿 참조)
줄거리
-제1막-
스코틀랜드의 명장 맥베스 장군은 적국인 노르웨이를 멸망시키고 대승리를 거둔 후 뱅크오 장군과 함께 당당히 돌아오는 길이었다. 광야에 이르렀을 때에 마녀 셋이 나타나서 말했다.
"맥베스 만세! 글래미스 영주께 축복을 드리오!"
"맥베스 만세! 코더 영주께 축복드리오!"
"장차 왕이 되실 맥베스 만세!"
이 말을 들은 뱅크오는 자기에게도 예언을 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마녀들은 뱅크오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맥베스만은 못하나 더 훌륭하신 분!"
"맥베스보다는 운이 좋지 못하나 운이 더 좋으신 분"
"왕이 되지는 못하나 왕을 낳으실 분 그러니까 만세! 맥베스와 뱅크오 만세!"
이 말을 남기고 마녀들은 사라졌다. 두 장군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아왔을 때 왕은 승전을 치하하며 맥베스를 코더 영주로 임명했다. 마녀들의 말이 그대로 적중한 것이다. 뱅크오가 축하의 말을 하자,
"글래미스, 그리고 코더의 영주! 그러면 장군은 자손들이 왕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지는 않으시오? 나에게 코더 영주를 예언한 그것들이 그러한 약속을 하였으니"
맥베스는 뱅크오 장군에게 넌지시 말하였다.
"예언을 믿는다면 장군은 코더 영주뿐 아니라 왕관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게 되리라"
뱅크오도 이렇게 말하였다.
승전 축하의 연회석상이다. 왕은 모든 문무 백관 앞에서 왕자 맬컴을 세자로 뽕하고 캄버랜드 공이라는 칭호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인버네스의 맥베스 성으로 가서 하룻밤의 폐를 끼치고 다음 날 떠나겠다고 말하였다.
"폐하를 위하는 것이 아니면 휴식도 고통이 됩니다. 신이 선발자가 되어 폐하의 행차를 알려 소신의 처를 기쁘게 하겠사옵니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맥베스는 왕 앞에서 이렇게 말을 하고 물러 나왔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왕과 그 일족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맥베스의 성으로 간 왕은 기쁜 얼굴로 맥베스 부인을 칭찬하며 축복하였다.
"폐하의 종복인 저희들은 항상 저희들 가족 저희들 자신 그리고 저희의 모든 것이 다 폐하로부터 빌린 것이며 언제든지 분부가 계시면 그대로 돌려 드릴 것입니다"
맥베스 부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왕에게 말했다. 왕은 맥베스 부인에게 진심으로 치하하며 값진 보석과 많은 금화를 선물로 주었다. 밤이 이슥하여 맥베스는 막상 왕을 죽이려니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다.
"우리가 만일 실패를 한다면?"
맥베스의 이러한 태도를 보고 맥베스 부인은 남편을 격려하며 죄를 범하게 하였다. 왕후가 되고 싶은 욕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실패라니요. 용기를 내세요. 실패할 리가 없습니다. 던컨 왕이 잠이 들면 그 시종 두 사람에게 마취제가 든 술을 먹여서 그들이 술에 골아 떨어진 후에는 왕에게나 그들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요?"
"옳지, 그자들의 단도를 사용하면 그자들의 소행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오 "
"그럼요. 왕의 시해 소식을 듣고 우리는 슬픔에 잠겨서 울고불고 야단을 하는거죠"
"결심을 했소. 이 무서운 모험을 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겠소. 자 갑시다. 그리고 좋은 얼굴로 세상 사람들을 속입시다. 마음의 거짓은 거짓 얼굴로 감추어야 하는 법이오"
-제2막-
다음 날 아침 일찍 귀족인 파이프의 영주 맥더프와 레녹스가 맥베스에게 찾아 와서 왕이 일찍 오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말하였다. 맥베스는 문지기를 시켜서 그들을 왕의 침소로 안내했다.
"아, 무서운 일이다. 무서운 일 입과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왕의 침소로 들어갔던 맥더프는 혼비백산하여 뛰쳐 나오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맥베스와 레녹스는 놀라서 물었다. 두 사람은 곧 왕의 침소로 뛰어들어갔다. 비상종이 울리자 맨 먼저 맥베스 부인이 나타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페하께서는 사살을 당하셨습니다 "
"저것을 어쩌나! 아니 우리 집에서 이런 일을 생기다니!"
맥베스 부인은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부왕께서 누구에게?"
왕자 맬컴은 몸을 떨었다
"침소에서 시중을 들었던 그 두 사람의 소행 같습니다. 그자들의 손과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자들의 단검 역시 피가 묻은 채 베개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마치 미친 사람 같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맡길 만한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레녹스가 왕자에게 이렇게 말을 하자 맥베스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분노에 사로잡혀 단칼에 그자들을 베어 버린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모든 장군들은 반역을 기도한 악도들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회의실에 모이게 되었다. 맬컴은 잉글랜드로 도날베인은 아이랜드로 두 왕자는 몸을 감추었다. 이렇게 되어 왕위는 자연스럽게 맥베스에게 돌아갔다.
-제3막-
맥베스는 바라던 대로 왕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으나 이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뱅크오 장군이었다. 맥베스는 결심을 하였다.
"마녀들이 처음에 나를 왕이라고 불렀으나 뱅크오에게는 역대 왕의 조상이라고 축복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 뱅크오의 자손들이 왕이 되게 하기 위하여 내 마음의 술잔을 쓰게 만들었단 말인가? 운명아 오너라! 최후까지 사생 결단을 내자! 그것이 누구냐?"
맥베스는 두 자객을 시켜 뱅크오를 죽일 간계를 세웠다.
"그 자와 그의 아들 폴리언스가 동행할 것이니-일을 깨끗이 처리하기 위하여-그의 아들까지 함께 없애버리는 것이 그 애비를 없애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폐하 소인들은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두 자객들은 맥베스 왕에게 맹세하였다. 밤이 되자 왕이 초대하는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뱅크오는 아들 풀리언스를 데리고 횃불을 들고 등청하는데 숨어 있던 자객들이 뱅크오에게 달려들었다.
"아, 살인이다! 풀리언스야, 달아나라, 달아나라! 이 원수를 갚아다오. 아 사악한 놈!"
뱅크오는 그 자리에서 죽고 풀리언스는 간신히 도망을 쳤다. 한편 궁전에서는 맥베스 왕과 왕비가 참석한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때 자객이 가만히 들어와 뱅크오만 죽이고 그 아들은 놓쳤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러면 또 불안증이 일어나겠다. 둘을 다 없앴더라면 자유롭고 유쾌한 기분이 될 수 있었을 것을... 큰 뱀이 죽었다. 달아난 새끼 뱀은 독사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독이 없다"
맥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좀 꺼림칙하였다
"폐하께서는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맥베스가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신하들이 이렇게 말을 했으나 맥베스의 눈에는 뱅크오의 유령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맥베스는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놀라면서 유령을 꾸짖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왕이 비틀거리며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러분 이것은 간혹 있는 병이오. 별것이 아닙니다"
맥베스 부인은 잔치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안녕히 주무십시오. 폐하께서 속히 쾌유하시기를 빕니다" 하며 신하들은 물러갔다. 맥베스에게 왕위를 빼앗긴 던컨 왕의 왕자 맬컴이 잉글랜드 애드워드 왕에게 도움을 받아 왕위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맥베스는 이 보고를 듣고 크게 노하여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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