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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4호 - 2024.10.14. 월요일(음력 : 9.12.)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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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란 자기가 일찍이 겪지 못한 어려운 문제를 안고 고민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래라 저래라 충고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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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적다? 멋쩍다!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한국어 어휘의 개수는 50만개가 넘는다. 그런데 우리가 그 중에 실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몇 개 정도나 될까. 우리가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적절한 어휘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치 은행에 저금하는 것처럼 평소에 자신의 어휘 창고 속에 어휘들을 풍부하게 저축해 놓은 다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어휘 창고 속에서 다양한 어휘들을 꺼내 쓰도록 해야 한다.
접두사와 접미사를 많이 알아 두는 것은 자신의 어휘 창고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접두사와 접미사를 다른 단어에 접붙이면 마치 나무가 가지를 치듯 새로운 단어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접미사 ‘-쩍다’를 명사 앞에 붙이면 ‘객쩍다’ ‘겸연쩍다’ ‘멋쩍다’ ‘미심쩍다’ ‘수상쩍다’ 등의 새로운 단어들이 만들어지고, 접미사 ‘-지다’를 명사 앞에 붙이면 ‘값지다’ ‘기름지다’ ‘멋지다’ ‘살지다’ 등의 단어들이 탄생하게 된다.
흔히 ‘멋쩍다’를 ‘멋이 적다’는 의미로 해석해 ‘멋적다’로 잘못 표기할 수 있고, ‘살진 과일’을 ‘살이 찌다’의 의미로 해석해 ‘살찐 과일’로 잘못 쓸 수 있는데, ‘멋쩍다’와 ‘살지다’는 각각 명사 ‘멋’과 ‘살’에 접미사 ‘-쩍다’와 ‘-지다’가 결합한 단어이다.
‘-쩍다’ ‘-지다’ 외에 명사 뒤에 붙어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들로 ‘-나다’(유별나다) ‘-답다’(정답다) ‘-되다’(참되다) ‘-롭다’(자유롭다) ‘-스럽다’(만족스럽다) ‘-차다’(보람차다) ‘-하다’(건강하다) 등이 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된소리 바르게 내기 (1)
‘굴/꿀’ ‘달/딸’ ‘방/빵’에서 보듯이 다른 요소는 모두 같더라도 첫소리가 예사소리냐 된소리냐 하는 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단어가 된다. 따라서 예사소리를 낼 자리에 된소리를 내거나, 된소리를 낼 자리에 예사소리를 내는 식으로 아무렇게나 발음을 하면 안 된다. ‘방이 비싸다’라고 할 것을 ‘빵이 비싸다’라고 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뜻은 통한다 하더라도 된소리를 과하게 내면 듣는 사람이 불편해할 수 있으며, 좋은 인상을 남기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되도록 정해진 발음법에 맞추어 정확하게 소리를 내는 것이 좋다.
먼저, 첫 음절의 첫소리를 된소리로 잘못 발음하는 일이 많은 예는 다음과 같다. 어떤 낱말이든 첫 음절의 첫소리는 표기대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다.
건수[껀쑤(×)] 고추장[꼬추장(×)] 두드리다[뚜드리다(×)] 생맥주[쌩맥쭈(×)] 세다[쎄다(×)] 소주[쏘주(×)] 작다[짝따(×)] 잘리다[짤리다(×)] 장아찌[짱아찌(×)] 주꾸미[쭈꾸미(×)] 족집게[쪽찝께(×)] 좁다[쫍따(×)]
다음은 둘째 음절 이하에서 된소리로 잘못 발음하는 일이 많은 예들이다. 같은 ‘증(症)’이더라도 ‘체증’에서는 [증]으로 소리 나지만 ‘화증’에서는 [쯩]으로 소리 난다. 겉보기로는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혼동되는 것들은 따로 익혀 둘 필요가 있다.
간단하다[간딴하다(×)] 관건[관껀(×)] 교과서[교ː꽈서(×)] 땡볕[땡뼏(×)] 불법[불뻡(×)] 어구[어ː꾸(×)] 창고[창꼬(×)] 창구[창꾸(×)] 체증[체쯩(×)] 효과(效果)[효ː꽈(×)]
참고로, ‘김밥’은 예외적으로 [김:밥]과 [김:빱] 모두를 인정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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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방황의 도시에서 자연으로의 회귀- 문혜원(문학평론가)
(향수)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정지용은 모더니즘적인 시에서 동양화적인 산수시의 세계까지 비교적 다양한 작품의 경향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정지용시집>과<백록담>에 실려있는 시들은 이미즘적인 경향의 시 와카톨릭 귀의 시, 동양화적인 산수시로 나우어질 수 있다. 이 중 <정지용시집>에 실려있는 시들은 다시 모더니즘과 전통 지향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두 축으로 구분된다. 모더니즘 계열의 시들이 기존의 운율을 파괴하고 자유로운 리듬으로 쓰여져 있는 반면, 전통지향적인 시들은 2, 3, 4마디를 바탕으로 하는 민요나 동요의 전통 율격을 병형시킨 리듬을 가지고 있고, 전자가 슬픔과 외로움의 감정을 기본 정조로 한다면 후자는 그리움과 평온함으로 둘러싸여 있다. 표면상 모순되는 것 같은 두 경향은 <백록담>에 이르러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볼때 지용의 시세계는 크게는 <정지용시집>이 발간되기까지의 청년기와 <백록담> 시절의 장년기로 구분지어질 것이다. 전자에서 보이는 갈등과 방황은 후자에 이르러 어느 정도의 균형과 안정감을 확보하고 있다.
<정지용시집>에 실린 시들은 크게 모더니즘 취양의시와 유년의 정서를 담은 시들로 구분되지만, 둘 다 상실감에 연유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시인이 느끼는 상실감은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 픈 /청제비의 푸념겨운 지줄댐과, /꾀집어 아즉 붉어오르는 /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조약돌> 일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표면상 이국에서의 향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화자는 이국의 문물 앞에 서있는 식민지 지식인의 갈등과번민을 감추고 있다. 그 증거로 이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인 '바다'는 활기와 희망의 상징이 아닌 어둡고 쓸쓸한 화자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상관물로 등장한다. 적막한 밤바다의 물결 소리, 끼루룩거리며 날아가는 갈매기, 깜박이는 등대, 이 모든 것들은 낮 동안의 활기참 이사라진 쓸쓸한 풍경들이다. (<바다 4>, <바다 7>등) 근대 문명의 상징인 '기차'를 보면서 느끼는 화자의 감 정역시 슬픔과 우울함으로 채색되어 있다. (파충류동몰)이나 (슬픈 기차)에서 '기차'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자신만의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는 구실을 할 뿐, 근대문명이 주는 경쾌함이나 편리함의 상징은 아니다. 낯선 이국의 거리를 정처없이 해매는 화자는 '나라도 집도 없'거나(<카페 프란스>), '멧천리 물 건너' 온 바나나처럼 한밤에 누워있는 시름의 인간 (<파충류동물>)이며, <슬픈 기차>, <바다 3>, <슬픈 도회> 등의 시에 등장하는 외로움, 서러움, 시름은 화자가 느끼는 슬픔과 동일한 감정들이다. 이러한 슬픔은 유년의 평온했던 기억과 대조를 이루면서, 현실의 시간 질서에 적응하지 못하는 화자의좌절감을 두드러지게 한다. 화자가 처해있는 현실은 합리적 질서와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 지배하는 '도시'이다. 지쳐있는 화자는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의 질서뿐만 아니라 시간의 질서까지를 부정함으로써 이 좌절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때 그 돌파구로 제시되는 '고향'은 물리적인 시간과 상관없이 화자의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상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회상'은 그 자체가 정지해 있는 '경험적 시간'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기억 속에서는 모든 현재의 시간질서는 붕괴되고, 평안했던 시간의 마디마디만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이는 공적이고 객관적인 시간 또는 자연에 있어서 '시간 관계의 객관적인 구조'에 의하여 정의되는 '자연적 시간'이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또는 심리적인 '경험적 시간'의 영역이다. 화자는 유년의 기억 속으로 회귀함으로써 도시의 시간의 질서 속에서 탈출하고, 일상 의삶에서의 좌절을 무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도시에서 지친 화자가 돌아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설정된 '고향'은 정적이고 평화로우며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공간으로, 노동의 고달픔이나 가난한 생활 등 실생활이 빠져있는 곳이다. 고향을 기억하는 시인의 정신은 유년으로 돌아 가있어서 감성적인 추억만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향수)의 세계이다. 그러나 유년으로 돌아감으로써 갈등을 잊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마는데, 왜냐하면 시인은 자신이 이미'어린 아들이 버얼서 아닌것'(<슬픈 기차>)을 깨들 을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 뒤에 청년기의 갈등과 방황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종교에의 귀의로 시화되 어나타나는바, 중기시로 구분되는 카톨릭적인 시들이 이에해당한다. 이때 쓰여지는 지용의 종교시는 초기의 시에서와는 달리 '자아'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즉 초기의 시에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처지와 심정을 표현하는 시적인 화자가 존재하는 반면 카톨릭적인 시에서는 주관적인 '자아'가 사라진 대신에 오로지 신을 향 한'신앙적 자아'만이 존재하게 된다. 시의 화자는 신과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데, (임종), (별1),(은혜), (갈리레아 바다)등 <카톨닉천년>에 발표된 지용의 시들이 모두 반성의 여지없는 일방적인 믿음만으로 일관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증명해 준다. 특이하게도 지용의 종교시에는 신앙과 세속적인 자아 사이의 갈등이나 회의가 드러나 있지 않다. 지용의 종교시들이 일방적인 믿음을 보여 줌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즉 거기에는 믿음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적인 번민과 갈등의 과정이 생략된 초월적인 공간만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용의종교시는 갈등과 안식이라는 구도로 볼 때 진정한 의미의 시적 해결책이라고 보기 어렵다. 청년기의 갈등과 방황에 대한 시적인 해결책은 오히 려지용의 후기시에 나타난 자연에의 귀의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미지즘적인 색채를 선명하게 보여 주었던 초기의 시들과 비교할 때 후기의 산수시들은 표면상 상당히 이질적이다. 그러나 지용의 후기 산수시들이 자아를 감추고 풍경을 베끼듯이 그려내고 있는 점은 이미지즘의 수법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시의 소재나 배경이 동양적인 자연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시를 짓는 방법상으로는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초기의 시들이 현실 안에서 부대끼는 젊은이의 오갈 데 없는 심경을 표현한 것이라면 후기의 시는 정면에서 어느 정도 비껴선 자리에서 쓰여지는 관조의 시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동양적인 관조의 미를 보여 주는 후기의 시들은 내용상 단순히 자연을 관조하는 시와 인간적인 감상이 덧붙여진 시로 나누어진다. (옥류동), (구성동), (비로봉2) 등은 전자의 예로서, 이 시에서 시인은 화자가 그림을 그리듯이 풍경을 관찰하고 그대로 옮겨놓는 구실만을 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예찬의 마음이 극대화된 자리에서 시인은 "...나도 내더져 앉다 일즉이 진달래 꽃그림자에 붉었던 절벽 보이한 자리 우에"(<장수산2>일부)와 같이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용의 산수시에서 역시 서러움은 시인이 자연을 완상하는 가운데서도 마음을 짓누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앉음새 갈히여
양지 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
-(조찬) 중 일부
어름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긔롭어라.
옹승거리고 살어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춘설) 중 일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러움이 단순한 영탄으로 끝나지 않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슬픔을 인내하는 시인의 태도 때문이다. 자연은 적막한 곳에 변화가 있고, 변화 속에서 영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 속에서 시간은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부패가 아니라 불변하는 자연의 진리를 뜻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시인은 방황과 갈등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시적 해결책을 찾아내고 있다. (장수산1)은 젊은날의 상채기를 안으로 삭히는 장년의 어른스러움이 돋보이는 수작이며, 지용의 시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혀짐 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멩아리 소리 쩌르렁 돌아 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뫼ㅅ새도 울지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이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디랸다 차고 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장수산 속 겨울 한밤 내-
정지용 연보
1902(1세)
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에서 아버지 연일정씨 정태국과 하동정씨 정미하사이에 독자로 태어남. 지용의 아명은 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지용이란 같은 발음의 한자에 맞춘 것임.
1913(12세) 동갑인 은진송씨인 송재숙과 결혼.
1918(17세) 휘문고보에 입학, 이때부터 습작활동을 시작함.
1919(18세)12월 <서광> 창간호에 소설 (삼인)이 발표됨 지용의 유일한 소설.
<요람> 동인지를 김화산, 발팔양, 박소경 등과 함께 주도하였음.
1922(21세) 휘문고보를 졸업. 이때까지 계속 아버지 친구인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함.
1924(23세)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
1926(25세) 공적인 문단활동이 시작됨. <학조>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를 비롯하여 동시및 시조를 발표함. 1929년 동지사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 문예지 <근대풍경>에 일본어로 된 시들도 많이 투고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시인 북원백추의 관심을 받게 됨.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 (기차), (해협), (다시 해협), (슬픈 인상화), (풍랑몽), (옛 이야기 구절), (호면), (새빨간 기관차), (뻣 나무 열매), (오월 소식), (발열), (말), (내 마음에 맞는 이), (무어래요), (숨ㅅ기내기), (비둘기) 등이 있음.
1928(27세) 장남 구관이 태어남(음력 2월 1일).
1929(28세) 동지사대학교을 졸업. 휘문고보의 영어 교사로 이후 16년 간을 재직함. 시(유리창)을 씀.
1930(29세) <시문학>동인으로 참가, 1930년대 사단의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됨. 주요 작품으로는
(이름 봄 아침), (Dahlia), (경도 가모가와), (선취), (바다), (피리), (저녁 got살), (갑판 우), (홍춘), (호수 1, 2)등이 있음.
1933(32세) <카톨릭 천년>의 편집고문을 맡음. <구인회> 문학친목단체를 결성 (해협의 오전 3시), 산문 (소곡) 등을 발표.
1934(33세) 장녀 구원이 태어남.
1935(34세) 제 1시집 <정지용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출간.
1937(36세) 음력 3우러, 북아 현동 자택에서 부친 돌아가심.
1939(38세) <문장>지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킴.
1941(40세) 제 2시집 <백록담>을 문장사에서 출간.
1945(44세) 이화여자전문학교(현 이화여자대학교)로 직장을 옮김. 담당과목은 한국어와 나전어
1946(45세) 경향신문의 주간이 됨.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 출간.
1947(46세) 경향신문사의 주간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함. 서울대 문리과대학강사로 출강하여 <시경>을 강의함.
1948(47세) 2월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임하고 녹번리 초당에서 서예를 하면서 소일함.
1949(48세) <문학독본>이 박문출판사에서, <산문>이 동지사에서 출간됨.
1950(49세) 1,25동란이 일어나자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서에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같이 수용되었다가 평양 감옥으로 이감, 이광수, 계광순 등 33인이 같이 수감되었다가 그 후 폭사당한 것으로 추정(부인송재숙씨는 70세 일기로 1971년 4월 15일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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謀利輩(모리배) - 김수영
언어는 나의 가슴에 있다
나는 모리배들한테서
언어의 단련을 받는다
그들은 나의 팔을 지배하고 나의
밥을 지배하고 나의 욕심을 지배한다
그래서 나는 우둔한 그들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면서 하이덱거를
읽고 또 그들을 사랑한다
생활과 언어가 이렇게까지 나에게
밀접해진 일은 없다
언어는 원래가 유치한 것이다
나도 그렇게 유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아 모리배여 모리배여
나의 화신이여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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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정다운 것은 - 이해인
날마다 나도 모르게
먼지를 마시며 살고
날마다 일어나서
먼지를 쓸며사네.
어디서 오는지
분명치 않은 먼지와 먼지
하얀 민들레 솜털처럼,
먼지가 정다운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이지
어느날
나도 한줌
가벼운 먼지로 남게 됨을
헤아려 볼 수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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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 일기
6
바쁨 속에도 기쁨과 평화가 있다. 유순한 마음, 좋은 마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할 때는 정신없이 바빠도 짜증이 나지 않고 즐겁다. 나의 삶이 노래가 된다는 것은 그럭저럭 시간을 메우는 데 있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정성껏 살아가는 데 있는 것이다.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리는 젊음이지만 비록 나이가 들더라도 가슴엔 노래가 흐르게 하라. 혼자 있어도 즐거울 수 있는 노래의 기쁨.
7
어린시절, 혼자만의 비밀 서랍을 갖고 즐거워했던 것처럼 내 마음 안에도 작은 서랍이 있다. 사랑과 우정과 기도, 내 나름대로의 좌우명과 아름다운 삶의 비결을 모아 둔 비밀 서랍. 그래서 누가 나를 좀 힘들게 하더라도 이 서랍에서 얼른 지혜를 꺼내 최선을 다하면 슬프지 않다.
8
식탁에서 어떤 이가 나더러 `그리 복잡한 가운데서도 10여년 전 책갈피에 끼워 놓았던 자료까지 다 찾아내는 걸 보면 정말 놀랍다니까요.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할 수 있지요?` 하는 말을 듣고 그 옆자리에 있던 다른 이가 말했다. `아마 우리는 잘 이해 못하지만 하느님의 기억력은 더하시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여럿이라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사랑하시는 참 놀라운 분이시잖아요.` 수도 생활을 나보다 훨씬 오래 한 선배 수녀님의 그 진지하고도 소박한 표정이 오랫동안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 내가 방을 옮겼다고 고운 유리컵과 과자 한 봉지를 내가 없는 사이 살짝 두고 가셨던 티나 수녀님의 고운 마음 또한.
9
주일이 주는 고즈넉한 평화와 기쁨. 주일만큼이라도 평일에 숨차게 뛰었던 자신을 쉬게 해주고, 필요한 영적 활력을 채워 주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나를 위해서도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야 남을 위한 배려나 봉사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탁 트인 바다와 수평선을 바라보는 내 마음엔 그래로 푸른 시와 기도가 흐르네.
10
수평선을 바라보며 매일을 사는 것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특권이요. 기쁨인지! 오늘은 바닷가 산책중에 손을 씻으려다가 실수로 발목까지 다 적시게 되었지만 그 느낌이 매우 좋았다. 강물, 시냇물, 산골짜기에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지. 짜디짠 소금물에 발을 담갔으니 내 마음에도 조금은 소금물이 들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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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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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파는 가게 - 이연승
거울 가게에는
거울 수만큼
하늘이 있습니다.
날마다
하늘을 파랗게 닦아 놓고
해를 팝니다.
손님들
하늘 속에 비친
얼굴 보고
해가 남긴
거울을
사 가지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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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뿌리개 하늘 - 김용섭
봄비 오는
하늘은
물부리개지.
땅 속의
씨앗만큼
꼭 그 수만큼
갖가지
씨앗만큼
꼭 그 크기만큼
뚫린 물구멍
고른 물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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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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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 네루다(Neruda) / 정현종 옮김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말야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어 있었어,
열(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휘감아도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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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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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3장. 의를 기른다
46.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상, 외견상 목적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몸이 깨끗하면 마음도 깨끗해진다
어머니가 자녀들을 교육시킬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식사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손을 씻는 것뿐 아니라 자기 몸을 청결하게 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이자 최소한의 예의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마찬가지이겠지만, 유태인 가정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손을 씻고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는 절대로 입을 떼서는 안된다고 자녀들에게 엄격히 가르친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축복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추기 위함이다. 즉 우리들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이며, 그러므로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신성한 의식은 비단 식사때 뿐만이 아니라 교회에 갈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출입구에는 물을 담아놓은 그릇이 있어 그곳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손을 씻으면 마음도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이 히렐이라고 불리는 랍비의 대승정이 있었다. 그는 손꼽히는 랍비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인물로서, 그리스도의 말은 사실은 히렐의 말을 인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이 위대한 랍비 히렐이 어느 날 거리를 황급히 걷고 있었다. 제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좋은 일을 빨리 하고 싶어서 서두르고 있네."
제자는 좋은 일이란 것이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하여 스승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히렐은 공중 목욕탕으로 들어가더니 온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제자에게 히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을 깨끗이 씻는 것이 곧 선행이라네."
나는 수시로 우리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때마다 반드시 한마디 덧붙이곤 한다.
"집 안을 청소하거나 교회를 깨끗이 하는 것도 꼭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그보다 먼저 너희들 몸부터 청결히 하거라. 그것이 바로 선행의 시작이니까."
청결은 과학적, 종교적 의미가 있다
우리들 유태인의 이와 같은 청결벽은 예로부터의 전통이며, 그로 인해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까지 생기게 되었다. 중세 때 페스트가 퍼져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다. 그때 유태인이 이 무서운 페스트를 만연시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왜냐하면 오직 유태인만이 이 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태인만이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그 당시 그리스도들은 평소 목욕하는 습관이 없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모르게 돈은 감추려면 비누 밑에 숨겨라'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로 목욕하는 사람이 드물었고, 실제로 비누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태인만은 그 당시에도 목욕을 자주 하는 습관이 있었고,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물론이고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에도 반드시 손을 씻는 것은 종교상의 규칙이기까지 했다. 이 청결함이 페스트로부터 유태인을 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소문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유태인이 페스트균을 우물에 넣었다는 소문이 퍼져 박해를 받게 되었다. 우리 유태인들은 신앙심이 매우 돈독한 민족이며, 또한 현실주의적 생활 태도를 계속 유지해 온 민족이기도 하다. 몸을 청결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 연관된다는 신앙은,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건강에 관한 생활의 지혜가 고대 유태인들에 의해서 신앙으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습관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활 속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같이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청결의 필요성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경우에도, 손을 씻고 샤워를 하는 것은 질병을 예방하고 남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신앙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설명해준다. 그럼으로써 자녀들의 마음속 깊이 그런 습관이 보다 튼튼하게 뿌리내리도록 노력한다. 또 현대생활에서는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인에게 있어 손을 씻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하는 신성한 의식인 동시에 건강이나 위생이라는 과학적인 이유에도 부합된다. 이러한 의식적인 습관을 통해서 깔끔한 태도와 경건한 기분으로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기를 수도 있다.
47. 용돈을 줌으로써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인다
쓰는 것보다 저축하는 습관이 먼저
유태인 자녀들 중에는 용돈을 넉넉하게 받는 어린이도 있고 전혀 받지 못하는 어린이도 있다. 왜냐하면 어린이에게 반드시 용돈을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이 일상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부모가 알아서 사주던가, 아니면 필요한 만큼 돈을 주면 되므로 그 이상의 돈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초등학생에게는 용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유태인 부모들이 자녀에게 용돈을 준다면, 그것은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일 때가 많다. 여덟 살된 아들이 있는 내 친구는, 아들에게 처음으로 용돈을 주면서 '꼭 필요한 때만 써라'고 했더니, 곧바로 은행에 저금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은행원한테서 '저금을 해두면 이자가 불어 돈이 불어난다'는 말을 듣고 아이가 매우 불안해했다는 것이다. '이자'가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이는 자기 돈이 무사한가 매주 한 번씩 은행에 들어 확인을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유태인 어린이들은 돈을 가지고 물건을 사는 습관이 별로 없다. 대개는 용돈은 아껴서 저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린이가 많다. 다만 친구를 사귀는 데에는 얼마간의 돈을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은데 용돈을 써도 돼요?'하고 어머니에게 물어본 후 돈을 쓰는 자녀들이 많다. 나의 경우는 아이들에게 미리 용돈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경우, 그때마다 필요한 만큼의 용돈을 준다. 이 경우에도 아이들은 쓰고 남는 돈은 반드시 저금한다. 그 대신 가족의 생일 등 선물을 살 때에는 아끼지 않고 필요한 만큼 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돈을 쓸 때는 마음과 일치해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항상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친다. 가족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친구끼리의 우정의 표시인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조그마한 저금통에 자선용으로 따로 저금을 하는 마음과, 용돈을 아껴 저축하는 마음가짐은 똑같은 심정에서 출발한다. 돈이라고 하면 인간적인 정감과는 약간 거리가 먼 차가운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로는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 유태인들이 특히 돈의 사용 방법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흔히 수전노라고 손가락질 받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돈의 중요성과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태인의 격언 중에 '돈이란 벌기란 비교적 쉽다. 그러나 쓰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어린이들은 '저축'하는 행위에서 무엇보다 돈을 신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배운다. 돈을 쓸 때는 마음이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사용 방법에 따라서 얼마든지 인정이 실린 따스함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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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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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디아스포라'
전쟁 수행은 휘하 장수에게 맡긴 황제지만,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의 전후처리는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유대는 이제 더 이상 유대라고 불리지 않고, 팔레스타인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도 사라지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뀐다. 예루살렘 시내의 복구도 로마식 도시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대 예루살렘 시가지의 기본 라인에 유대 민족에게는 최대의 적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도시 계획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로마인이 만든 도시의 중앙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관통하는 것이어야 한다. 현대 예루살렘의 다마스쿠스 문에서 시작되는 중앙로도 바로 그렇게 뚫려 있다. 그밖에도 곳곳에 하드리아누스의 '손길'이 남아 있는데, 유대교도에게는 여전히 성도인 예루살렘의 현재 모습이 유대교도의 반란을 근절하기 위해 누구보다도 과격한 방책을 쓴 사람의 계획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서기 134년에 끝난 유대 반란은,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모조리 추방하라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 즉 이산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 (Diaspora)라는 말은 '씨뿌리기' 라는 뜻도 있으니까 반드시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유대인은 그리스인파 마찬가지로 옛날부터 디아스포라'의 경향이 강했다. 이익이 된다고 여겨지면 어디로든 이주하고, 거기서는 반드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어왔다. 다른 민족이 건설한 곳으로 이주하기는 할망정 그 민족과 융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주는 자발적인 '이산'이지 강제된 '이산'은 아니었다.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로는 우선 기원전 700년대에 아시리아의 강요로 이루어진 이주를 들 수 있다. 이어서 기원전 600년 무렵에는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이것은 역사상 '바빌론 유수'라고 불린다. 그리고 아득히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에서 노예가 되어있던 유대인을 이끌고 조국으로 돌아온 모세의 고사도 있다. 그 후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강제 '이산을 하드리아누스가 결행한 것이다. 다만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는 우수하고 통일된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도 목적으로 삼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목적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드리아누스가 강요한 '이산은 그 행선지를 지정하지 않았다 예루살렘 거주를 금지했을 뿐, 그 다음은 각자 마음대로 연고를 찾아 원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또한 유대인 전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도만 추방했고, 그것도 예루살렘에 사는 것만 금지했다. 예루살렘이 항상 반란의 진원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의 금지령은 예루살렘 이외의 유대, 이제 팔레스타인으로 이름을 바꾼 옛 유대 땅에 사는 유대교도는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또한 제국의 수도 로마를 포함한 해외 도시에 거주하는 유대교도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로마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지 않는 한 관용으로 대한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의 정책을 하드리아누스도 고수한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이외의 지역에 사는 유대교도라도 로마에 반항하면 당장 '이산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치세 초기에 이미 하드리아누스는 반란을 일으켜 원주민을 죽인 키프로스 섬의 유대인에 대해 키프로스 출입을 금지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유대인은 또다시 조국을 잃었다. 원로원 의결을 거쳐 135년부터 공식 발효한 '디아스포라'는 20세기 중엽에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될 때까지 계속된다. 하드리아누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던 한가지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그 후 유대교도의 대규모 저항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이제 로마사를 이야기할 때 유대 민족을 언급할 필요가 없어진 이상,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경과를 돌이켜보는 것도 로마인과 유대인의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로마인과 유대인
기원전 63년, 동방을 제패하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로마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대와 공식 접촉을 가졌다. 당시 내분상태에 있던 유대는, 명성이지 중해 세계를 뒤덮었다는 이 로마 장수에게 조정을 의뢰한다. 폼페이우스는 그런 유대인에게 정교일치의 통치체제를 재고하라고 요구했다. 로마의 종교에는 경전이 없다. 따라서 전문 사제계급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전(또는 성서)을 일반 신자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주는 것이 사제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경전이 주도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사제계급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고, 정치도 경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반면에 경전이 없고 따라서 전문 사제계급도 존재하지 않는 로마에서는 자연스럽게 정교분리가 정착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유대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는 폼페이우스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무력으로 제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한다. 석 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유대 도 로마의 패권에 굴복했다. 다만 이때는 폼페이우스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벽만 파괴되었을 뿐이고, 유대는 시리아 속주 총독의 관할 아래 들어가긴 했지만 자치는 계속 인정하는 상태였다.
기원전 47년, 폼페이우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로마 세계 최고권력자의 지위를 확립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제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대에 들른다. 지난해에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을 때지만, 정치면에서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유대인들의 부탁을 받아들여, 유대교의 최고제사장을 다시 유대 정부의 우두머리로 인정해주었다. 유대에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다. 다만 로마에 반항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명확히 한 상태에서 취한 관용정책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되었을 때 많은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고 한다. 여기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카이사르가 그린 청사진을 토대로 로마 제국을 창설한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의 다른 많은 아이디어와 마찬가지로 이 유대 대책도 답습했다면, 그 후 로마와 유대의 관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폼페이우스를 우두머리로 받든 원로원과 카이사르가 격돌한 것은 광대해진 로마 제국의 통치방식을 둘러싼 의견 차이 때문이었다. 원로원파는 로마 사회의 엘리트인 300명(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에는 600명으로 증원된다)의 원로원 의원이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정치사에서 과두정이라고 불리는 체제다. 카이사르는 이렇게 생각하는 원로원 체제 고수파와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 이유는 우선 300명의 합의로 나라를 통치해야 하기 때문에 통치 효율이 떨어진다는 것. 둘째, 원로원 계급의 경직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계급간의 유동성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 셋째, 패자까지도 동화시켜 공동운명체로 만들어야만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는 지도자 계급을 고정화하는 체제는 적절하지 않다는 것.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주창한 폼페이우스나 키케로나 브루투스 같은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로마는 계속 공화국으로 남았겠지만, 그와 동시에 후세의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본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형태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승리한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리고 로마는 본국과 속주가 일체화함으로써 공동운명체가 되어가는 보편 제국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보편 제국 로마의 전체적인 조감도는 다음과 같다.
로마가 정복했을 당시의 서방은 통일 국가가 존재하지 않고 수많은 부족인 난립하여 항쟁을 거듭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 부족들을 정복한 로마는 피정복자가 한데 모여 사는 촌락이나 그 주변을 '지방자치단체' (무니키피아)로 인정하고, 그 내부에서는 자치권을 부여한다. 부족장과 그 일족에게는 세습권인 로마 시민권을 주어 제국에 편입시켰다 그와 동시에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군단병이 만기 제대한 뒤의 정착지로 요소요소에 '식민도시' (콜로니아)도 건설한다. 당시의 고속도로였던 로마 가도는 현지인의 '지방자치단체'와 로마인의 '식민도시'를 연결하면서 그물눈처럼 깔린다. 제국 서방에서는 '무니키피아'와 '콜로니아'가 로마 패권의 '핵' 이었다. 반면에 동방은 로마인에게 정복되기 전의 역사가 서방과 달랐다. 그리스쪽 그 동쪽 지역은 '도시국가' (폴리스)와 '왕국'의 역사가 길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달인인 로마인은 동방에서는 폴리스와 왕국을 지배의 '핵'으로 삼았다. 잠재적 방어기지이기도 한 '콜로니아'도 동방에는 별로 많지 않다. 폴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리스계 도시들이 로마의 패권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도시 안에서는 완전한 자치가 보장되고, 인근 도시와 다툼이 벌어지면 중재도 해주고, 게다가 외적의 위협으로부터도 지켜주니까 로마의 지배가 그리스인에게 불편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하다 또한 로마는 중앙집권적 왕권에 익숙해져 있는 지방에서는 기존 왕국을 로마의 동맹자로 삼아서 자신의 패권 아래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택했다. 이 동방에도 제국의 동맥인 로마 가도망이 깔린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처럼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 공존한 것이 로마 제국의 모습이었고, 그 때문에 유대 일대에 특이한 통치 형태가 존속하는 것도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로마 제국의 광대함을 머릿속에 명확히 그릴 수 있었던 최초의 인물인 카이사르의 생각이 아니었을까. 물론 '보편'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특수'가 이질분자인 것은 분명하다. 유대인은 선민사상의 소유자이고,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일신교도라는 데 확고한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유대 전쟁기>의 저자인 요세푸스는 유대 민족을 변호하는 <아피온에 대한 반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대인과 같은 율법에 따라 살고 싶어하는 이민족은 환영하지 딴, 율법은 공유하지 않고 생활의 편의만 공유하기 위해 들어오려는 이민족은 거부하는 것이 옳다고 율법에도 씌어 있다.) 이것을 동시대의 로마인이 보면 어떻게 될까. 역사가 타키투스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유대교도는 자기들과 생활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때라도 항상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다.) 타키투스는 타민족의 신을 일절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는 종교가 아니라 미신에 불과하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현실 생활에서도 신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직이나 병역에 종사할 의무를 다하지 알고, 그러면서도 경제적 권리만은 평등을 요구하는 유대인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참기 어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황무지에 도시를 건설하고 항로를 개척하고 그 항로를 직접 돌아다니며 물산을 나르는 그리스계 주민들으로서는, 다 건설된 도시에 어느새 눌러앉아서, 항로를 개척하기는커녕 위험한 바다에는 나가지도 않고 그저 남들이 실어오는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밖에 생각지 않는 유대계 주민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제국 동방에서의 소란은 거의 다 그리스계와 유대계 주민 사이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알렉산드리아인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나타나 있듯이, 로마는 이 두 민족의 분쟁을 중재하는 일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패권 아래 있는 사람들을 중재하려고 애쓰는 것은 패권자의책무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로마도 거기에 필요한 노력은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나 로마 사람들과 유대인은 자유에 대한 개념도 달랐다. 자유에는 선택의 자유도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로마적인 자유의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교도와 근대까지의 기독교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자유에 포함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신의 가르침에 맞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자유다. 이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공직이나 병역을 면제받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쉴 수 있다 해도 이들 쪽에서는 자유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이 유대 민족이라면, 그 특수성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팔레스타인에 정교일치의 유대교 국가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숙원을 들어주면 되지 않는가. 다행히 선민사상을 가진 유대인은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다른 민족한테도 퍼뜨리려는 의욕이 별로 없었다 수가 너무 늘어나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희소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유대교가 포교활동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제국 한 귀퉁이에 사제계급이 통치하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도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유대인이 그것으로 만족하고 온건해진다면 제국을 통치하는 데에는 오히려 편리하지 않았을까. 제국 동방의 여러 도시에 사는 유대인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근본적으로 본국 유대에서 그 '자유'가 달성되지 않는 것을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유대인의 경제적 권리를 그리스인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카이사르의 정책도 상기할 만하다. 종교에 종속된 생활방식 때문에 고립되기 쉬운 유대인 사회와 제국을 연결하는 혈관'은 경제활동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유대 민족의 고립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은 인도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고립은 과격화의 온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면에서는 카이사르의 생각을 모두 답습했지만 유대 문제에 대해서만은 카이사르만큼 깊이 생각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보기 드문 '정치적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이었지만, 진정으로 전략적인 청사진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호모 폴리티쿠스'로서는 카이사르도 능가할 정도였던 아우구스투스인 만큼, 이 특수한 유대인에 대해서는 같은 유대인인 헤로데스(헤롯) 왕에게 통치를 맡겨 간접 통치를 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헤로데스에게 통치를 맡기면 또 한 가지 이점이 있었다. 헤로데스는 전제군주여서, 최고제사장을 비롯한 사제계급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헤로데스의 통치가 계속되는 한 유대의 정교분리도 실현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도 역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서방식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었던 것일까. 유대 문제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대처방식이 그 후 로마 제국의 유대 정책을 결정했다. 헤로데스 왕이 죽은 뒤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신정정치를 부활시키고 싶다는 유대인의 소원을 거부하고, 로마에서 파견한 장관의 직접 통치를 선택한다. 그 대신 유대인에게는 광범위한자유가 주어졌다. 살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범죄에 대한 사법권까지 인정했다. 70명의 장로로 구성된 의회까지 만들어 후원해주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관점에서 보면, '자유'는 모두 주었다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유대인은 여전히 '자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불행한 오해였다. 로마와 유대의 문제를 다루는 연구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로마가 얼마나 유대를 탄압했는가를 실증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고, 또 한쪽은 로마가 유대에 대해 계속 관용정책을 취하면서 얼마나 참을성 있게 대했는가를 실증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것도 쓸데없는 수고로 여겨진다 유대가 자신들이 얼마나 탄압 받았는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로마인은 이해할 수 없었을테고, 반대로 로마가 자신들이 얼마나 참을성 있고 너그럽게 대했는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유대 쪽에서는 여전히 자유를 달라는 외침밖에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유대인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애써도 상대는 알아주지 않는다. 그것을 보면 애당초 길을 잘못 든 폐해를 통감하게 되지만, 역사가 타키투스가 말했듯이 '티베리우스 시대에 유대가 평화로웠던"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황제가 이런 식이면, 그 신하인 장관은 오직 유대인을 자극하지 않는 데에만 집착하거나, 로마법을 어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해버리는 일까지 일어난다. 구세주를 자처하는 유대 젊은이의 죽음을 강력하게 바란 것은 예루살렘을 좌지우지할 만큼 유대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사제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사이의 중재자였던 로마인도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달라진다.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가 강경해진데 따른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칼리굴라 황제 말기에 일어난사고(제7권에서 상세히 기술)를 제외하면, 다음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유대 통치를 다시 유대인에게 맡기는 방식을 시도한 탓도 있어서 관용노선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런데도 유대 쪽의 증오는 점점 강해질 뿐이었고, 그에 따라 로마 쪽의 초조감도 높아진다 구체적으로는 유대에 파견된 장관들의 통치가 점점 가혹해졌다. 그 결과가 네로 황제 말기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이다. 카이사르가 죽은 지 110년, 여기까지 오면 이제 로마도 정교일치의 국가 건설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자신들한테는 오직 그 자유만이 '자유'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기원전 1세기에 로마가 패권자로 등장했을 당시만 해도 유대인은 그때까지의 지배자인 그리스인을 내쫓아주었다는 이유로 로마인에게 호감을 품었지만, 서기 1세기에는 이미 과거의 호의가 적의로 바뀌어 있었다. 유대 반란은 결국 로마에 전쟁을 강요했다. 서기 66년 여름에 일어나70년 가을에 예루살렘 함락으로 끝난 이 전쟁은, 네로 황제의 죽음과 그 직후의 내전으로 1년 반 동안 중단되긴 했지만, 4년여에 걸친 전쟁이었다. 이때 반란을 진압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나중에 둘 다 로마 황제가 되었다. 전쟁의 경과는 제8권에서 이미 기술했으니까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전쟁 이후의 유대는 전쟁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첫째, 예루살렘 안의 자치기구였던 '70인 장로회의'가 해산되었다. 둘째, 그때까지는 1개 대대도 상주하지 않았던 예루살렘에 1개 군단이 상주하게 되었다. 이제 내부의 자치조차 인정되지 않는 직할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셋째, 그때까지는 본국 유대에 살든 해외의 유대인 거주구역에 살든 유대교도라면 누구나 1년에 한번씩 2드라크마를 예루살렘 신전에 봉헌할 의무가 있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 신전이 아니라 로마의 유피테르 신전에 헌금하도록 바꾸었다. 베스파시아누스로서는 유대 사제계급의 돈줄을 끊어서 반로마 운동을 진정시키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유대교도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인 동시에 그들의 신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었다. 그리스 화폐인 드라크마는 로마 화폐인 데나리우스 은화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헌금액이 1인당 2드라크마였다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1인당 2데나리우스가 된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군단병의 연봉이 225데나리우스니까, 2데나리우스는 병사 연봉의 120분의 1에 해당한다. 10년 뒤인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연봉이 300데나리우스로 인상되니까, 서기 84년 이후를 기준으로 하면 병사 연봉의150분의 1에 불과하다. 물건을 살 때마다 내는 매상세(내지는 소비세) 세율은 100분의 1이다. 상당히 가난한 유대인이 아니라면 2드라크마 정도는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액수가 아니었다.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첫 번째 계명은 유대의 신 이외에는 어떤 신도 섬11지 말라는 것이다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유대교도에게는 아 무리 적은 액수라 해도 유피테르 신에게 바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의 신이 정한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다.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 서 있는 유피테르 신전에 헌금할 의무는 유대교도한테만 부과되었기 때문에 이 헌금을 '유대인세'라고 불렀는데, 이 호칭이 정착된 것은 유대인들에게 환영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년에 한번씩 내는 2드라크마를 유피테르 신에게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부과된 세금으로 여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심정이다. 하지만 이것도 로마인과 유대인 사이에 생긴 문화적 마찰이었다. 그래도 타키투스를 흉내내어 말하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그리고 트라야누스 치세 말기까지 유대는 평화로웠다. " 그러나 그 평화는 활활 타오르는 원한을 속에 끌어안은 평화일 뿐이었다. 유대 문제에 이성적으로 대처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유대인들한테도 결코 나쁜 황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트라야누스가 강대국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 배후를 찔렀으니, 서기 115년에 일어난 유대 반란에 대해 로마가 격분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로마인은 서약을 어기거나 남의 곤경을 기화로 제 이익을 꾀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게다가 로마 쪽에서는 유대인이 적국 파르티아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은 분명 배신행위이자 매국행위였다. 이때의 반란은 유대 본국보다 키프로스나 키레나이카 같은 해외의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퍼진 것이 특징이지만, 그 때문에 로마는 오히려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가 맨 먼저 해결해야 했던 과제 가운데 하나가 이 반란의 진압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일단 '평화'가 회복되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지하에 숨어 있는 마그마를 완전히 제거하여 유대를 영원히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로마와 유대의 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르는 카이사르 시대로부터 170년이 지났다. 이제 로마는 제국의 질서 유지만을 유대 대책의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드리아누스가 그밖에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굳이 할례를 금지하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하는 등의 무모한 짓을 하면서까지 유대교도를 도발한 게 아닐까.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 도발에 응해 반란을 일으키자, 그에 대한 징벌로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완전히 추방하여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단행한 게 아닐까.
하드리아누스가 유대교도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기독교도가 멋대로 설치게 해주었다고 비난하는 연구자도 있다. 하치만 하드리아누스가 탄압한 것은 로마의 통치에 반항하는 유대교도뿐이었고, 반항하지 않은 유대교도는 탄압하지 않았다. 로마에 대해 점점 급진화하는 유대과격파와 결별한 유대인들이 당시의 기독교도였다. 기독교도는 로마의 통치에 반항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계속 살 수 있었다. 다만 반항하든 않든 유대교도에 대해 하드리아누스가 냉정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드리아누스는 자신들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고 그 진리는 유일무이한 자기네 신뿐이라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싫어했다. 하드리아누스가 보기에 그것은 인간성도 분별하지 못하는 오만이었다. 그는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이들에게서 신을 사랑하는 나머지 인간을 미워하는 성향을 발견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로마 문명의 자식이라면 당연한 사고방식이다. 도그마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의심을 갖는 것이 그리스 철학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기독교도가 유대교도처럼 로마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면, 하드리아누스는 그들도 주저 없이 탄압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서기 134년 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카이사레아에서 배를 타고 어디에도 들르지 않은 채 곧장 로마로 향했다. 6년만의 귀국이었다.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다는 생각을 품고 귀국했을 게 분명하다. 그가 제위에 오른 지도 어언 17년이 지나고 있었다.
여생
서기 134년 초,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 함락을 지켜보고 뒤처리를 지시하자마자 귀국 길에 올랐다. 6년 만에 돌아온 황제에게 원로원은 개선식 거행을 허락했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이를 사양한다. 그리고 전선에서 유대 전쟁을 지휘한 총사령관 세베루스에게 그 영예를 양보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양보했다 해도, 세베루스에게는 최고사령관인 하드리아누스와 똑같은 개선식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가 아7라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제정으로 넘어온 뒤 로마에서는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은 로마군 통수권자인 황제에게만 허용되었고, 일부군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은 공화정 시대의 약식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만 갖고 있었다. 아마 세베루스는 2년 뒤에 베틸이 함락되어 반란의 불길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귀국하여 개선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그동안 원로원은 황제가 제출한 법안을 채택하여, 예루살렘에서 유대교도를 완전히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유대인의 '이산은 공식적으로 로마 제국의 정책이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유대교도에게 모욕감을 준 할례 금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6년 만에 귀국한 하드리아누스는, 6년 만에 그를 대한 원로원 의원들의 눈에는 딴 사람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사람이 달라졌다는 인상을 주었을 게 분명하다. 나중에 <황제실록>의 저자가 평했듯이, 원래부터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엄격한가 하면 상냥하고, 친절한가 하면 까다롭고, 쾌락적인가 하면 금욕적이고, 씀씀이가 야박한가 하면 시원시원하고, 불성실한가 하면 더없이 성실하고, 잔혹해 보일 정도로 무자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딴사람처럼 온화하게 관용을 베푸는 식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장기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로마 사회에서는 '장년기' (Virilitas)에서 '노년기'(Senilis)로 접어드는 나이가 되자,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다'에서 '모든 점에서 한결같았다'로 바뀌어버렸다. 매사에 엄격하고 까다롭고 쾌락적이고 인색하고 불성실하고 무자비하여, 요컨대 보통사람들이 결점으로 여기는 성향으로 일관하게 된 것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그 원인을 노령에서 찾으려고 한다. 인내심이 부족한 것이 노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귀국한 서기 134년에 그의 나이는 58세에 불과했고, 세상을 떠난 138년에는 62세였다 고대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아서 평균 연령은 낮았지만, 70세나80세가 되어도 정정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로마 시대의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누스의 변화를 질병 탓으로 돌린다. <황제실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제국 전역을 순행하고, 게다가 호우나 혹한이나 혹서를 무릅쓰고 여행할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것이 건강을 해쳐서 병상에 몸져눕고 말았다. )
귀국한 뒤, 하드리아누스가 병석에 몸져누운 채 4년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은 것은 아니다. 공적인 책무도 비난받지 않을 만큼은 해냈고, 사적인 취미에도 시간과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체력 감퇴만은 감출 수 없었다. 체력은 계속 쇠퇴할 뿐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건강에 자신감을 갖는 데 익숙해져 있어서, 육체적인 혹사도 태연히 견뎌온 하드리아누스로서는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병약하게 태어난 몸을 조심조심 어르고 달래며 살아온 아우구스투스의 노년과는 달랐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이런 '변◎에는 노쇠와 질병 이외에 또 한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해야 할 일은 이제 전부 끝냈다는 생각도 그의 변화를 초래한 원인이 아닐까. 일을 다 끝냈다고 생각하면 정신적 긴장이 풀리게 마련이다. 그것이 원래부터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자제하고 있던 긴장감을 그에게서 빼앗은 건 아닐까.
황제의 책무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시기의 하드리아누스는 권력 유지에 민감했다 권력은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절제를 잊어서는 안되었다. 바꿔 말하면 항상 남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 하지만 책무를 다 마친 이상, 권력 유지에 신경을 쓸 필요도 줄어들었다 원로원이나 민중의 평판에 신경 쓸 필요도 없어졌다. 하드리아누스가 인기보다 업적을 중시한 지도자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업적보다 인기를 중시하는 지도자라면 평생 동안 남에게 마음을 쓰고 배려해야 할 것이다. 배려가 부족해진 하드리아누스를 보여주는 두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싶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장소는 콜로세움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은 검투시합이었을 것이다. 검투시합은 로마인들이 가장 열광한 두 가지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데, 그 날도 콜로세움은 5만 명이 넘는 관중의 함성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 시끄러움을 견딜 수 없게 된 하드리아누스가 포고관을 불렀다. 포고관은 황제를 늘 따라다니기 때문에 그때도 바로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황제는 사람들을 조용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포고관은 그런 명령을 하면 관중이 황제에게 반감을 품을 거라고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포고관은 귀빈석 앞으로 나아가 관중을 향해 두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것을 본 관중은 황제가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잠잠해졌다. 조용히 황제의 말을 기다리는 관중을 향해 포고관은 외쳤다. "바로 이것을 황제께서는 바라고 계신다 "
관중은 폭소를 터뜨렸다. 하드리아누스는 비로소 자신의 명령에 사려가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포고관에게 감사의 말로 보답했다. 또 한 가지 에피소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이탈리아어로는 치르코마시모)라고 불린 대경기장을 무대로 전개되었다. 이곳의 수용 인원은 콜로세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1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조했고,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가 그것을 또 증축하여 최대 25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었다.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다 이 대경기장에서 열리는 경기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네 필의 말이 끄는 전차 경주였다. 많은 경주마와 전차와 기수를 항상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엄청난 경비가 들었고, 오늘날의 자동차 경주에서 '포뮬러 원' (Formula One)과 비슷한 팀이 조직되어, 팀끼리 겨루는 체제로 되어 있었다. 주요한 팀만 해도 네 개였고, 이들은 각각 흰색 , 붉은 색, 푸른색, 초록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네 필의 말을 다루어야 하니까, 무엇보다도 숙련된 기수가 필요했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난 소년을 스카우트하거나 적당한 노예를 훈련시켜 기수로 키운다. 전차 경주 팀은 저마다 완벽한 영업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넓은 트랙을 일곱 바퀴 돌아서 골인하면 경주가 끝난다. 이것을 하루에 몇 차례 되풀이한 모양이다. 그런데 그 날은 한 사람의 기수가 계속 승리했다. 관중의 열광은 대단했다. 귀빈석에 앉아 있는 하드리아누스를 향해 관중의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관중은 그 기수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주라는 뜻으로 계속 '자유'를 외치고 있었다. 경기장에서는 포고관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다. 또한 그 날의 포고관은 콜로세움 때처럼 재치를 부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포고관은 황제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쓴 플래카드를 들고 장내를 한 바퀴 돌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희들에게는 노예의 해방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법률 위반을 나한테 요구할 권리도 없다. "
드넓은 경기장을 둘러싼 관중석 구석구석까지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물론 하드리아누스의 대답이 옳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식으로 대답하는 것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하드리아누스라면 관중의 소원을 들어주었을 게 분명하다. 전차 경주의 꽃인 기수는 검투사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노예는 아니고, 높은 수입에 끌려 이 위험한 직업을 선택하는 자유민도 많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자기 돈으로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었다 해도 그 기수는 그대로 기수 일을 계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소유주가 우수한 기수를 잃을 염려도 없었다. 그만큼 인기있는 기수라면 소유주도 급료를 주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노예한테도 돈벌이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로마에는 스스로 번 돈으로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 '해방노예'라는 계급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당사자인기수만이 아니라 관중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 만사가 해피엔드로 끝났을 것이다. 역시 하드리아누스는 까다로워져 있었다. 매사에 까다롭게 변한 하드리아누스가 마음의 평안을 찾은 곳이 티볼리에 지은 별궁, 즉 빌라 아드리아나'이었다.
빌라 아드리아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추억을 모아놓은 곳이다. 추억이란 회상하고 싶은 대상이니까, 하드리아누스가 제 눈으로 보고 제 발로 밟은 순행지를 모두 망라하지는 않았다. 우선 브리타니아에 세운 '하드리아누스 성벽'은 티볼리의 빌라에 모아놓은 '추억' 속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가 빌라에 모아놓은 것은 아테네의 고등교육기관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설한 것으로도 유명한 리케이온(라틴어로는 리케움), 아테네 시의회인 프리타네이온, 이국 정서가 물씬 풍기는 이집트의 카노푸스 등이었다. 하지만 원래의 형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그런 건물이나 그것이 서 있는 장소가 그에게 준 인상을 상징적인 형태로 바꾸어 옮겨놓았다. 연구자들은 이건 어디이고 저건 어느 지방인가를 명확히 하고 싶어하지만, 진정한 속뜻은 하드리아누스만이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드리아누스 별궁'은 당시의 로마식별장과는 전혀 다른, '복잡한 성격'의 하드리아누스에게 어울리는 복잡한 구조의 빌라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순행길에 구입한 수많은 미술품을 이곳에 모아놓았다. 아마 순행지에서 계속 사들여 이곳으로 보냈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리스 전성기의 조각상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지만, 복제품이라 해도 그 수준은 놀라울 정도다. 원작의 복제품이 계속 만들어진 그리스에서 구입한 것일까 아니면 우수한 조각가를 찾아내어 로마로 보내서 만들게 했을까. 어쨌든 미술에 관한 하드리아누스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걸작들뿐이다. 로마인의 보통 별장과 다른 점은 조상들의 초상 조각이 없다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로마사를 빛낸 조상이 없는 속주 출신 황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로마 지도층이 자택에 즐겨 놓아둔 그리스 철학자나 시인이나 극작가의 초상도 하드리아누스의 빌라에는 거의 놓여 있지 않다. 그 대신 수없이 많은 것이 남녀의 조각상이었다. 나체도 있고 옷을 입은 것도 있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아름다운 육체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그 아름다움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나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신들에게만 나체로 표현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그래서 현실의 인간이라도 나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으면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화살 통을 매단 가죽띠를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로 비스듬히 메게 하면아폴론 신이 되고, 포도송이를 들게 하면 디오니소스(라틴어로는 바쿠스)신이 된다. 이 생각을 계승한 것이 로마인이다. 따라서 로마 황제라도 나체로 묘사되어 있으면 죽어서 신격화된 뒤에 만들어진 작풍으로 보아야 한다. 하드리아누스 컬렉션의 특징은 역사적 위인들의 초상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황제의 나체상도 없다. 그리스 신들을 제외하면 나체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젊고 아름다운 안티노의 모습뿐이다.
안티노만이 아니라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초상도 바라보고 있으면'지성'보다는 '관능'이 훨씬 강하게 다가온다. 그리스 전성기의 조각가였던 피디아스나 프락시텔레스의 아폴론 상이나, 헬레니즘 시대에 제작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초상을 본떠 만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멋진 복제품을 가까이에 놓아둘 수 있다면, 제멋대로 행동하기 쉽고 때로는 바보 같은 말도 하는 젊은이와 함께 사는 것보다 훨씬 부드러운 즐거움에 잠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드리아누스의 빌라에는, 다채로운 대리석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진 바닥에 최소한의 가구만 놓아둔 실내에도, 가까운 곳에서 강물을 끌어들인 맑은 연못가에도, 아름다운 조각상들이 말없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 빌라의 주인만은 발걸음 가볍게 그 조각상들 사이를 거닐 수 없었다. 하인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정원으로 통하는 계단도 내려가지 못하게 됐으니, 하드리아누스의 불쾌감에도 동정이 간다 체력 감퇴는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자리를 비워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내각'을 비롯한 제국의 통치기구를 정비해둔 덕에, 황제가 병석에 누워 있어도 제국을 통치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이것이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오히려 좋지 않았다. 그 자신의 뛰어난 조직력 덕분에, 예순 살이 된 하드리아누스는 빌라에 틀어박히는 것말고는 할 일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노동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일상적인 노동이고, 또 하나는 평생에 걸친 노동이다. 후자의 결함은 일을 끝내고 나면 할 일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에게 유일하게 남은 일은 자신을 뒤이을 황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후계자 문제
귀국한 지 2년이 되어가던 서기 136년, 환갑이 지난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 선정을 더 이상 미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체력 감지는 이제 숨길 수 없었고, 더 이상 후계자 선정을 미루면 황제의 직무 태만이 된다. 사비나 황후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따라서 누구를 양자로 삼느냐가 곧 후계자 선정이 된다. 이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기 때문에, 원로원 유력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이 문제를 화제로 삼았지만, 누구나 '카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가운데 '카드'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이 하드리아누스의 매부인 세르비아누스였다.
하드리아누스의 하나뿐인 누나 도미티아 파울리나와 결혼한 세르비아누스는 트라야누스나 하드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속주 출신 로마인이다. 나이는 트라야누스보다 여덟 살 위, 하드리아누스보다는 서른한 살이나 연상이었다.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에게 후계자로 지명되어 로마군 최고사령관이 되자, 그 후임으로 트라야누스의 임지였던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이 된다.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올랐을 때에도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으로서, 로마 귀환보다 라인 강 방위선 강화를 우선한 새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앞장서서 협력하기도 했다. 트라야누스가 총지휘를 맡은 다키아 전쟁에도 군단을 이끌고 참가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트라야누스가 치른 전쟁에 꼭 필요한 장군이 될 만한 군사적 재능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 덕분에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에 일어난 장군들의 숙청을 면할 수 있었다. 로마 사회의 엘리트라면 당연히 거쳐야 하·는 명예로운 경력'의 정점인 집정관을 트라야누스 시대에 두 번,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한 번, 합해서 세 번이나 경험했다. 게다가 황제의 매부니까, 원로원의 유력자로 여겨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 세르비아누스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 성격으로 보아 하드리아누스는 가족에게 냉담했을 것이다. 친어머니가 죽은 해도, 누나가 죽은 해도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하드리아누스가 가족들을 특별히 배려하거나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면, 가십을 좋아하는 역사가들이 놓칠 턱이 없다. 이런 하드리아누스를 서른 살이나 나이가 많은 매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황제의 매부에게는 손자가 있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생질 손에 해당한다. 이 손자야말로 황제의 후계자 자리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믿은 세르비아누스가 실제로는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원로원의 유력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의원들 사이에 푸스쿠스를 옹립하자는 이야기를 퍼뜨리려고 비밀 회합을 거듭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하드리아누스의 귀에 들어갔다. 하드리아누스는 남이 배후에서 무언가를 획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주도로 게다가 은밀하게 일이 꾸며지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황제 암살 음모가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 마땅히 황제가 주도해야 할 일인데 세르비아누스가 멋대로 움직인 것 자체가 하드리아누스의 비위를 건드렸다. 황제는 근위대 병사들을 세르비아누스의 저택에 보내, 황제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 든 것은 원로원 의원들이다. 90세의 노인과 성년식을 막 끝낸 젊은이가 법정에서 변명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제거되었다. 로마법은 국가반역죄로 고발하는 것을 무효로 규정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조항이 포함된 로마법 집대성을 명령하여 완성시킨 사람이다. 그런데 그 황제가 스스로 정한 법률을 어겼다. 원로원은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직후에 네 명의 유력자가 숙청된 사건을 생각해내고 태도가 강경해졌다. 사실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얼마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던 후계자 후보가 있었다. 황제는 강경해진 원로원에 대한 대책을 겸하여, 매부와 그의 손자를 죽인 일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후계자를 공표했다. 당시서른 살 안팎이었다는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름을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었다 당시에는 에트루리아라고 불린 토스카나 지방 출신이니까, 본국 이탈리아 태생의 로마인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즉위한 직후 숙청된 네 사람 가운데 하나인 니글리누스의 딸과 결혼했고, 그 사이에 낳은 아들이 당시 여섯 살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원로원의 반응은 냉담했다. 콤모두스가 미남이라서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골랐다고 말하는 의원도 있었다. 안티노가 황제의 총애를 받기 전에는 콤모두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상대였기 때문에 후계자가 된 거라고 떠들고 다니는 의원도 있었다. 아일리우스카이사르는 푸른 눈을 갖고 있었다. 2천 년 전에도 금발에 푸른 눈이 미남의 조건이었다니 웃음이 나오지만, 로마 시대에도 역시 푸른 눈은 미남의 조건이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어 다음 황제로 선정된 아일리우스는 미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에 감도는 기품도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또한 원로원 의원들의 평가와는 달리 연약한 성격도 아니었다. 우아하고 고상한 취향에, 연설할 때도 세련된 표현을 장기로 삼았지만, 듣는 사람을 설득하는 힘은 충분히 갖고 있었다. 후계자 선정에 납득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일리우스가 오비디우스나 마르티알리스의 문학을 좋아한다는 것도 반대 이유로 삼았지만, 쓸데없이 장황한 베르길리우스나 걸핏하면 장중해지는 호라티우스의 문학보다는 기지가 넘치는 오비디우스나 마르티알리스의 문학을 좋아했을 뿐이고, 이것은 개인의 취향 문제에 불과하다. 특별히 교양이 많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지도자가 되기에는 충분한 교양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남자였다. 이건 내 상상이지만, 하드리아누스가 그를 후계자로 선정한 데에는 자기가 즉위한 직후 권력 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숙청한 네 사람에게 속죄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았을까.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위에 오르면, 그 다음은 아들이 뒤를 잇는 것이 순리다. 지금 여섯 살인 이 소년에게는 숙청당한 네 사람 가운데 하나인 니글리누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 후계자 선정이, 원로원이 비난하는 것처럼 하드리아누스의 변덕이나 즉흥적인 착상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양자 결연을 공표하는 동시에 황제의 특권인 '호민관 특권'을 아일리우스에게 나누어주고, '군 통수권'도 주었다. 후계자 결정을 시민과 함께 축하하는 뜻에서, 3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들여 검투사 시합과 전차 경주대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또한 앞면에는 아일리우스의 옆얼굴, 뒷면에는 자애의 여신(피에타스)을 새긴 은화도 발행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재구축에 전념한 제국을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에게 계승시키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황제 감으로 여겨진 이 청년은 병을 앓는 몸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결핵이 아니었나 싶다. 병은 노인이나 앓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하드리아누스에게는 그런 지병을 가진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동정도 하지 않았다. 신체를 단련하면 회복될 거라고 믿어버렸다.
해가 바뀐 서기 137년, 하드리아누스는 군단 지휘를 경험해야 한다면서 그 해의 집정관에 선출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전선으로 보냈다. 그것도 충분히 도시화한 괼른이나 마인츠, 또는 쾌적한 생활이 보장되는 안티오키아가 아니라 판노니아 속주의 부다페스트로 파견했다. 부다페스트도 항구적인 기지화가 이루어져 있기는 했지만, 도나우강 연안의 최전선 기지다. 지형이나 기후에서도 로마 군단기지 중에서는 여건이 열악한 편이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아일리우스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겨울을 로마에서 보낸다는 구실로 1년도 채 안되어 귀국했지만, 원래 호리호리했던 몸이 유령처럼 변해 있었다. 이듬해인 서기 138년 1월 1일에 열릴 원로원 회의에서 후계자로 지명해준 황제에게 감사 연설을 해야 했지만, 그 전날 밤 많은 피를 토하고 숨을 거두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새해가 시작되는 1월 1일에 상을 입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국상을 금했다. 또한 이 무렵에는 걸핏하면 짜증을 내면서 "무너지는 벽에 몸을 기대버렸다'고 스스로 울화통을 터뜨리고,"3억 세스테르티우스나 낭비해버렸다"고 경망스러운 말까지 했지만, 그래도 1년 남짓한 기간이나마 '카이사르'라는 제위 계승자의 칭호를 갖고 있던 사람을 그 신분에 7울리게 장사지내라고 명령했다. 얼마 전부터 짓기 시작한 새 황제묘에 매장되는 영예는 준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황제묘가 '만원'이 되었다는 이유로 새 황제묘를 짓기 시작했다. 이 '묘 (Mausoleum)는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청 성채로 개조되어 '카스텔 산탄젤로'라고 불리게 되었고, 지금도 테베레 강 서안에 우뚝 솟아 있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졸지에 죽어버렸기 때문에, 하드리아누스는 빨리 다른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10여 년 전부터 한 소년을 주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소년이 바로 다음다음 황제가 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인데, 당시 이름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였다. 에스파냐 출신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신임이 두텁고 집정관도 두 번이나 경험한 마르쿠스 안니우스의 손자다 로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소년은 여섯 살 때 이미 '기사계급'이 되었고, 여덟 살에 제사장으로 뽑혔다 황제의 추천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출세였다. 황제가 된 뒤에 그리스어로 <명상록>을 썼을 정도니까, 소년 시절부터 공부를 좋아했고,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 철학의 일파인 스토아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진리에 대한 탐구심이 강한 이 소년을 '안니우스 베리시무스'(진리를 좋아하는 안니우스)라는 별명으로 부르면서 놀릴 정도였다. 그의 성인 '베루스'는 '참된, 진리의, 진실한'등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만든 별명이었다. 그런데 '안니우스 베리시무스'는 아직 열여섯 살에 불과했다. 마흔 살에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너무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서기 138년 1월 24일은 하드리아누스의 예순 두 번 생일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이제 친지와 친구를 초대하여 잔치를 베푸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날은 한 사람을 초대한다 황제의 초대를 받고 티볼리의 별궁을 찾아간 인물은 안토니누스였다. 아버지는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린 오늘날의 남프랑스 출신이지만, 안토니누스 자신은 로마 근교의 라누비오에서 태어났다. 나이는 52세. 물론 원로원 의원이고, 게다가 '내각의 단골 멤버이기도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장기순행을 떠날 때면 수도를 맡길 만큼 신뢰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안토니누스였다. 아들은 일찍 죽고, 슬하에는 딸뿐이었다. 찾아온 안토니누스에게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양자로 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철학을 좋아하는 안니우스와 죽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인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으라는 조건이었다. 안니우스는 이제 17세를 앞두고 있었고, 루키우스는 8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날 안토니누스는 장시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만 대답하고, 황제와 함께 황제의 생일을 축하했다. 한 달 뒤에 안토니누스는 다시 티볼리를 방문했다. 황제의 제의를 삼가 받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당장 그 사실을 공표했다. 황제는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맞이했고, 안토니누스는 안니우스와 루키우스를 양자로 삼았다고 공표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원로원 의결을 요구하지 않고 황제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잠정조치법을 발령하여, 양자 결연에 관한 법률을 개정했다. 몇 살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로마법에는 양부와 양자 사이에 일정한 나이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의 나이 차이는 열 살에 불과했다. 안토니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원로원에서 호평을 받았다. 안토니누스가 누구한테나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후계자 선정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하드리아누스도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낸 셈이 되었다. 봄기운이 티볼리의 '하드리아누스 별궁'을 감싸기 시작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황제의 가슴은 조금도 명랑해지지 않았다. 고대인이 기록한 병명은 믿을 수 없으니까 실제로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하드리아누스의 병세가 계속 악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제는 하인이 부축해도 걷지를 못하고, 하인 두 사람이 멘 가마에 누운 채 넓고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남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엘리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 뒤에도, 다시 말해서 노망이 든 뒤에도 계속 사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면 로마 지도층에 속하는 남자들은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결하는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도 충분히 납득했다.
늙은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하인들 가운데, 언행이 조용하면서도 눈치가 빨라서 하드리아누스가 특히 총애하는 젊은 노예가 있었다. 하루는 황제가 이 노예에게 단검을 건네주면서, 그것으로 내 가슴을 찌르라고 명령했다. 젊은 노예는 깜짝 놀라,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실망했지만, 그 이상은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 또 그런 명령을 받게 될까 겁이 난 노예는 이 일을 안토니누스에게 보고했다. 놀란 안토니누스는 티볼리로 달려와 황제에게 말했다. '병환 때문에 퍼할 수 없는 심신 쇠약은 위엄을 가지고 견뎌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드리아누스는 격분했다. 이런 충고를 받는 신세가 되어버린 자신에게도 화가 났지만, 안토니누스에게 알린 노예한테는 더욱 화가 나서 사형에 처하겠다고 고함을 지르며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화풀이를 했다. 노예의 신변을 걱정한 안토니누스가 그 젊은이를 숨겨버렸을 정도였다. 그 후에도 하드리아누스는 자살하고 싶다는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때마다 안토니누스는 빌라로 달려갔다. 설득한다기보다 애원했다."그런 짓을 하시면 저는 아버지를 죽인 패륜아가 됩니다. " 그리고는 단검을 숨겨버렸다. 하드리아누스는 또 울화통을 터뜨렸다. 단검을 사용한 자살은 두세 번 시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제 가슴조차 찌를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쇠진한 것을 통감할 뿐이었다. 그런데 단검마저 빼앗아버린 것은 이제 그가 철없는 어린애와 똑같이 취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티볼리의 별궁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에 줄곧 동행한 그리스인 의사가 있었다. 이 충직한 시의에게 하드리아누스는 절대 비밀로 하라는 엄명과 함께 독약 조제를 명령했다. 시의는 황제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명령에 따르면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시의는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었지만, 따를 수도 없었다. 오랫동안 모셨고 게다가 진심으로 경의를 바쳐온 사람의 부탁이기 때문에 안토니누스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시의는 스스로 조제한 독약을 먹고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하드리아누스에게 자제심을 되찾아주었다. 그는 더 이상 죽기 위한 방법을 찾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에게 화가 나있으니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병을 치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완쾌는 절망적이었다. 어디에도 터뜨릴 곳이 없는 짜증은 원로원에서 그 배출구를 찾았다. 티볼리에서 원로원을 향해 고발의 화살이 날아갔다. 안토니누스는 과녁이 된 사람들을 우선 정식 재판에 회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재판도 되풀이하여 연기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원로원 의원들의 생각은 이때 남발된 고발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악화되었다.<황제실록>의 저자는 이 하드리아누스를 "이제 누구나 꺼리고 싫어했다고 말한다. 안토니누스는 그런 '아버지'에게 바다에라도 가서 환경을 바꾸어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티볼리의 별궁은 넓고 쾌적하긴 했지만, 바닷바람을 쇨 수는 없었다.
나폴리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바닷가의 바이아에 황제의 별장이 있었다. 원래는 공화정 말기의 철학자 키케로의 별장이었지만, 키케로가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가 그 아들한테서 사들여 황제의 사유재산이 되어 있었다. 역대 황제들이 개축을 거듭하여 이제는 넓은 별궁으로 변모해 있었다. 온천도 풍부한 이 일대는 공화정 시대부터 이미 로마 상류층의 별장이 즐비한 휴양지로 유명해져 있었지만,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그 주변 도시들이 매몰된 이후로는 넓은 나폴리 만에서도 베수비오 화산과 반대쪽에 있는 포추올리와 바이아, 미세노 일대가 로마인이 즐겨 찾는 휴양지로 명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티볼리의 별궁을 떠난 하드리아누스는 티부르티나 가도' (티부르로 가는 길)를 지나 로마로 향한다. 사위에 장막을 둘러친 가마를 타고 갔을게 분명하다. 수도 로마에 들어갔다 해도 동쪽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나왔을 뿐, 가마를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근대적인 가도를 창시한 로마인도 순환선의 개념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는 로마를 통과할 수가 없었다. 로마에서는 '오스티아 가도' (오스티아로 가는 길)를 통해 해안으로 나와서 그대로 바다를 따라 남하했거나, 아니면 '아피아 가도' (아피우스의 길)를 따라 테라치나까지 곧장 남하했을 것이다. 테라치나로 갔다면, 거기서부터는 바다를 따라 남하하여 나폴리만에 이르는 '도미티아나 가도' (도미티아누스의 길)를 택했을 게 거의 틀림없다. 바이아에 갈 때는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이 길이 다른 어느 길보다도 가깝고 쾌적했다. 해외로 웅비하는 기운에 가득 차 있던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인이 이탈리아 반도에 세운 최초의 도시가 쿠마이인데, 도미티아나 가도를 지나 그곳까지 가면 바이아는 바로 코앞이다. 계절은 초여름, 카프리 섬을 포함한 나폴리 일대가 가장 아름답고 상쾌해지는 계절이기도 했다. 바이아 별장에 도착한 하드리아누스가 손을 담그면 파랗게 물이라도 들 것처럼 짙푸르고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시는 한 수 지었다.
animula vagula blandula ,
hospes comesque corporis ,
quae nunc alibis in boca
pallidula rigida nudula,
nee ut soles dabis iocos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가련한 영혼이여,
오랫동안 내 육신의 손님이고 반려였던 내 영혼이여,
이제 어둡고, 춥고,
과거의 네가 무엇보다 좋아한 농담을 나누는 즐거움도 없는 세계로, 내려가지 않으면 안될 때가 온 것 같구나.
서기 138년 7월 10일, 하드리아누스는 급보를 받고 달려온 안토니누스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두었다. 62세 5개월 16일의 생애였고, 21년의 치세 뒤의 죽음이었다. 민중의 반응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로원 의원들은 황제의 죽음을 기뻐했다. 새 황제 안토니누스가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을 보고하기 위해 소집한 원로원 회의에서 적지 않은 수의 의원이 선제의 신격화를 거부하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신격화되지 않은 황제는, 생전에 집요하게 신격화를 거부한 티베리우스 황제를 제외하면 칼리굴라와 네로, 도미티아누스뿐이다. 하드리아누스도 악명 높았던 이들 세 황제와 같은 대열에 끼게 된다. 특히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는 죽은 뒤에 로마인에게는 무엇보다 불명예스러운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기록말살형'이 원로원에서 의결되면, 생전의 모든 업적은 공식 기록에서 말소되고, 초상은 파괴되고, 비문도 그 이름 부분만 지워진다. 원로원이 하드리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는 처하지 않았지만,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의 선례가 있는 이상, 신격화 거부 결의는 '기록말살형'으로 이어지는 전 단계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안토니누스는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면서 선제의 신격화를 의원들에게 요구했다.
결국 원로원은 황제의 열의에 양보하여 하드리아누스의 신격화를 의결했다. 이때 신격화가 실현되지 않고 그 여세로 '기록말살헝'까지 의결되었다면, 제국을 재구축한 하드리아누스의 노고는 후세에 전해지지 않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이 일이 있은 뒤, 안토니누스는 '자비로운 사람'을 뜻하는 '피우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에서도 안토니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한 지 5년째, 즉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지 5년째 되는 서기 143년 4월 21일, 로마 건국 기념제가 열렸다. 이 축제에 초빙된 소아시아 태생의 철학자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는 안토니누스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강연을 했다. 그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이제는 나 같은 그리스인도, 아니 다른 어느 민족도,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신분증명서를 신청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원하는 곳으로 여행할 수 있다 로마시민권 소유자라는 것만으로 충분해졌다. 아니, 구태여 로마 시민일 필요도 없다 로마의 패권 아래서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안전이 보장된다. 일찍이 호메로스는 노래했다 지상은 만인의 것이라고. 로마는 시인의 이 꿈을 구현했다. 당신들 로마인은 산하에 들어온 모든 땅을 측량하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천에는 다리를 놓고, 평지는 물론산지에도 가도를 건설하여, 제국의 어느 지방에 살든 쉽게 왕래할 수 있도록 정비했다. 게다가 제국 전역의 안전을 위한 방위체제를 확립하고, 인종과 민족이 달라도 함께 살아가기 위한 법률을 정비했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하여 당신들 로마인은 로마 시민이 아닌 자에게도 질서있고 안정된 사회에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가르쳐주었다. )
건국을 경축하는 제전의 기념 강연을 의뢰 받은 사람이니까, 제국 전역에 이름이 알려진 학자이고 나이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와 같은50대나 선제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60대의 저명인사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리스티데스가 이 강연을 한 것은 스물 여섯 살 때였다. 황제와 원로원은 고명한 학자들은 다 제쳐놓고, 소아시아에서 태어나 아테네에서 학식을 인정받기 시작한 소장 학자를 초빙한 것이다. 이 찬사는 기득권 세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음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젊은 세대의 입에서 나온 찬사 였다. 물론 이 찬사는 로마의 모든 지도자에게 해당된다. 하지만 그 강연이 열린 것은 하드리아누스가 죽은지 불과 5년 뒤였다. 1800년 뒤의 한 연구자는 하드리아누스를 이렇게 평했다. "속주민들이 로마로 대표를 보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호소한 것이 아니라, 황제가 친히 속주를 돌아다니며 속주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 평가야말로 하드리아누스의 묘비명에 가장 어울리는 찬사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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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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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고양이의 죽음에 관하여
요전에 기르던 고양이가 죽고 말았다. 그 고양이는 무라카미 류(<수필집 1, 코끼리 공장의 헤피 엔드> 199쪽 참조)씨네서 데리고 온 애비시니언(몸체는 근육질에 꼬리가 길고 털이 짧은 고양이의 한 품종. 털은 뿌리 부분이 황갈색, 가운데 부분이 벽돌색, 끝 부분은 암갈색.)으로 이름은 '기린'이었다. 용한테서 온 것이라 '기린'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맥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이는 네 살로, 인간으로 치자면 이십 대 후반이나 서른 살 정도니까, 이른 죽음이다. 그 고양이는 방광에 담석이 생기기 쉬운 체질이라서 이전에도 수술을 한 적이 있다. 먹이도 늘 다이어트 캣 푸드(라는 게 이 넓은 세상에는 존재한다)를 주며 주의를 기울였는데, 결국 방광염을 앓은 게 목숨을 거두어 가는 결과가 되었다. 업자에게 화장을 부탁하여 그 뼈를 작은 항아리에 넣어, 가미다나(신이나 위패를 모시는 선반. 주로 옛 가옥에 많이 부착돼 있다.)에 올려 놓았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오래 된 일본식 가옥이라 가미다나가 붙어 있는 덕분에 이런 때는 아주 편리하다. 요즘 새로 지은 2DK짜리 맨션 같은 곳에 사는 사람은 고양이 뼈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적당한 장소를 찾느라 고심한다고 한다. 냉장고 위에다 슬쩍 올려 놓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우리 집에는 '기린'외에도 열한 살짜리 암코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샴종에 이름은 '뮤즈'(<수필집1, 코끼리 공장의 해피 엔드> 140쪽에 등장하는 예의 '따봉'고양이)이다. 이 이름은 명작 소녀 만화 <유리의 성>에 나오는 등장 인물에게서 따왔다. 그전에는 '푸치'와 '선댄스'라는 <내일을 향해 쏴라!>에 나오는 콤비로부터 이름을 딴 수코양이가 두 마리 있었다. 고양이를 잔뜩 기르다 보면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성가신 일이라 대개는 지극히 쉬운 이름을 붙인다. 한때는 '줄무늬'라는 이름의 줄무늬 고양이를 길렀고, '얼룩이'란 이름의 얼룩 고양이를 기른 적도 있다. 스카티쉬 포르도라고 하는 종류의 고양이를 길렀을 때는 이름을 '스코티'라고 지었다. 이렇게 되면 파생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일인데, '검둥이'란 이름의 검정 고양이가 기숙을 한 일도 있다. 요 십오 년 간 우리 집에 왔다가 간 고양이들을 더듬어 각각의 운명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A. 죽은 고양이
1.기린 2.푸치 3. 선댄스 4.얼룩이 5.스코티
B. 다른 사람에게 준 고양이
1.줄무늬 2.피터
C. 저절로 없어진 고양이
1. 검둥이 2.토비마루
D. 지금 남아 있는 고양이
1.뮤즈
돌이켜보면 집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도 없었던 시기는 십오 년 간 고작 이 개월 정도밖에 안된다. 물론 이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고양이에게도 다양한 성격이 있어, 한 마리 한 마리가 저마다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고 행동양식도 다르다. 지금 기르고 있는 샴종 고양이는 내가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출산이 불가능한 실로 흔치 않은 성격의 고양이다. 이 고양이는 진통이 시작되면 곧장 내 무릎으로 달려와서는 '으'하고 앉은뱅이 의자에 기대는 듯한 자세로 주저앉는다. 내가 그 손을 꼭 쥐어 주면 이윽고 한 마리 또 한 마리하고 새끼 고양이가 태어나는 것이다. 고양이의 출산이란 곁에서 보고 있으면 상당히 신기하다. '기린'은 무슨 이유에선지 셀로판지를 둥글게 말 때의 그 빠지직빠지직 하는 소리를 굉장히 좋아하여, 누가 빈 담배갑을 꾸기기라도 하면 어디에선가 총알같이 달려와, 쓰레기통에서 그 담배갑을 꺼내서는 한 십오 분 정도 혼자서 가지고 논다. 대체 어떤 경위를 통하여 이런 경향 내지는 버릇, 기호가 한 마리 고양이의 내면에 형성되는지는 베일에 가린 수수께끼이다.
이 고양이는 활달하고 탄탄하게 살이 찐데다 식욕도 왕성한 수코양이로 - 이 부분에 대한 묘사는 무라카미 류씨의 퍼스넬리티와는 관계없다 - 성격도 개방적이라 우리 집에 오는 손님들로부터도 상당히 반응이 좋았다. 방광의 상태가 나빠지면 얼마간 기운이 없어지기는 하지만, 죽기 전날까지도 도무지 그렇게 갑작스레 죽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동네에 있는 동물 병원에 데려가 고인 오줌을 빼 내고 담석을 녹이는 약을 먹였지만, 하룻밤이 지나고 보니 부엌 바닥에 웅크리고 눈을 딱 뜬채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고양이는 언제나 참으로 깨끗하게 죽는 동물이다. 너무나도 죽은 얼굴이 깨끗하여, 그대로 양지 바른 곳에 놔두면 해동되어 되살아 나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오후에 애완 동물 장례를 전문으로 치르는 매장업자가 밴을 타고 고양이를 가지러 왔다. 그들은 <장례식>(1984년 작. 이타미 쥬조 감독에 의한 영화. 장례식의 형식적인 절차를 다룬 작풉) 같은 영화에 나오는 반듯한 상복 차림에, 일단은 고양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사치레를 하는데, 이건 인간을 상대로 하는 조상의 말을 적당히 간략화한 것으로 상상하면 된다. 그러고는 장례비 얘기로 옮겨 간다. 화장 -> 납골 항아리 코스는 항아리 값이 포함되니까 이만 삼천 엔이다. 라이트 밴의 후미 짐 칸에는 플라스틱 의상 케이스에 들어 있는 독일 세퍼드의 모습도 보였다. '기린'은 아마 저 세퍼드와 함께 태워지겠지. '기린'이 그 라이트 밴으로 운반되어 사라지고 난 뒤, 집 안이 갑자기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마누라도 뒤에 남겨진 고양이도 안절부절 못했다. 가족이란 - 설령 그게 고양이라 해도 - 제 각각 밸런스를 맞춰 가면서 살아 가는 법이라. 그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면 한동안은 미묘하게 균형이 뒤틀리고 만다. 집에 있어 봤자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요코하마에나 놀러갈까 하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 속을 걸어 역까지 가긴 했는데, 그것 또한 왠지 내키지 않아 도중에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 지금은 '뮤즈'와 '고로케'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기르고 있습니다. '마이클'이니 '코가네'니 하는 이름의 고양이는 일본 전역에 걸쳐 제법 상당수 있을 테니까.
- 윤홍길씨는 나카가미 겐지에 대하여 첫인상을 '소도둑' 이란 말로 표현했는데, 나의 개인적인 느낌으로 무라카미 류는, 작은 혹은 세련된 소도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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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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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1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그가 역사 집필로 다시 돌아갈 당시 입에 올린 것 외에는 비극 작품을 쓴 적도 없고 또 그렇게 하려고 작정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속은 자신이 (군주론) 마지막 장에서 기원한 일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던 군주들을 마치 극 속에서처럼 준엄하게 꾸짖기에 모자람이 없을 만큼 비극적 생각들로 가득하였다. 그는 이미, 대 로렌초의 죽음에 뒤따른 (외세의 침략)에서 출발하여 미켈란젤로식의 단축법으로 묘사된 기만과 오류의 미로를 거쳐, 앞에서 말한 최근의 편지에서 스스로 예언한 그 치명적인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힘찬 필치로 그려내고 있었다.
(모로네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에게는 자신이 그리고 있던 비극 작품의 마지막 막 마지막 장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사실 파비아 전투 이후 이탈리아의 지배자들이 재개했던 그 비열한 정치 게임을 종격함과 동시에 그 성격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교황 클레멘테는 그 스스로 황제의 수중에 떨어지고 있음을 보면서도, 또다시 에스파냐를 이탈리아에서, 특히 밀라노 국에서 축출하기 위한 동맹(1526년의 코냑 동맹-옮긴이)을 결성하고자 작정하였다. 밀라노에서는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유명한 용병 대장이었다가 1450년에 밀라노 공이 된 프란체스코가 아니라, 그의 손자이자 흑안공 로도비코의 아들인 프란체스코 마리아, 즉 프란체스코 2세를 가리킨다-옮긴이)가 조약의 결과에 따라 (황제의 그늘 아래)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었다. 일을 좀더 쉽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교황은 당시의 정치 관습에 따라 가장 비틸리고도 어려운 길을 택하였다. 즉 징병은 자기 편에서 한 뒤 통합군에 대한 지휘권은 페스카라 후작에게 맡긴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출생이기는 했지만 출신 가문상으로 에스파냐계에다 이탈리아적 대의에 반하는 인물로, 더욱이 당시 교황이 싸우고자 하는 바로 그 에스파냐 군의 지휘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음모를 생각해 낸 자는 밀라노 공의 비서로 바람의 방향을 기막히게 알아냈던 지롤라모 모로네였다.
페스카라는 이러한 제의를 별다른 항변 없이 그냥 듣기만 하다가, 즉시 황제에게 알였다. 이는 필요시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배반할 여지를 두면서도 현재의 위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능란한 방책이었다. 물론 그가 이 경우만 그리고 그만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로네와 황제 사이에서도 그런 방법을 썼던 적이 있었다. 스포르차는 황제와 프랑스 왕 사이에서 그렇게 행동했고, 교황 역시 이쪽저쪽 자신의 강적들 틈바구니에서 그렇게 했다. 클레멘테는 한편으로 황제의 장국을 꼬드기면서 동시에 황제에게는 장국을 조심하라는 편지를 썼다. 그들 모두가 이중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페스카라와 모로네가 변절자라는 말이 나돌았던 적도 있지만(즉 모로네는 친구들을, 페스카라는 적에 대한 서약을 배반했다는 것), 결국 모로네는 옥에 갇히고 공국 전체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한 에스파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탈리아를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당시 클레멘테는 더울 취약해진 위치에다 황제의 의혹은 날로 커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와 힘을 합쳤으면 하고 생각했지만, 왕이 풀려나기 전에는 그쪽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왕이 풀려나는 문제 또한 칼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서 큰 난관에 봉착해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거의 절망에 빠져 있다가, 페스카라 후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적군의 주요 지휘관이 죽었다는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이점으로 느껴졌다. 그는 이처럼 쓸데없는 희망 속에서 세월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은 베르니처럼, 당신은 할 수 있느뇨, 파파 키멘티여,
그렇게 무기력하고 그렇게 우둔한데도,
하늘로 하여금 스스로를 눈멀게 귀멀게 하고
더불어 모든 감각까지도 다 빼앗아가 버리도록?
이라고 적나라하게 모욕하는 것에보다는 비극시에 더 잘 어울리는, 영원한 불확실성을 지닌 극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교황의 그러한 무기력증을 비꼰 마키아벨리의 말도 없지는 않다. (그는 시간이 있다 싶으면, 그것을 적에게 넘겨준다.) 어쨌든 당시와 같이 급박한 시점에 같은 피렌체인들의 정신과 태도를 숙고하기에 이른 그는, 자기 편이든 혹은 이탈리아의 다른 나라든 간에 (죽든 살든 무언가 대의로 삼을 만큼 명예롭고 용감한 일)이라고는 해온 적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는 이를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다 썼다. 이 내용을 제외하면 이 편지는 자신이 파엔차 체류 이후에 이미 말했던 것처럼, 교황에게 그의 세 딸을 위해 후한 지참금을 마련해 주십사 청할 것을 다시금 권하는 등, (신변잡기)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다시 단테에 의지하여 친구에게 로메오의 전례를 인용한다.
그에게는 딸이 넷 있었고, 그 각각이 모두 여왕이었지... 하지만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와는 달리 시인도, 시를 즐겨 읽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 19일자 편지에대한 26일자의 답장에서, (로메오의 동화인지 설화인지 그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로마냐에 있는 단테의 책들을 모조리 훑었고) 결국에는 주석 없이 본문만 있는 것만을 겨우 입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속직히 고백하였다. 그리고는 이 제기발랄한 친구에 대해 반은 칭찬으로, 반은 미덥지 못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평소 자네가 가지고 있던 그 끝없는 저장고 속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어.) 로메오,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여기서 로메오란 바르셀로나 백이자 프로방스 후작이었던 레이몽 베랑귀에 4세(1131-1162)의 프로방스 궁 집사였던 로미외 드 빌레뇌브를 가리킨다. 마키아벨 리가 그를 언급하고 있는 1525년 12월 19일자 편지에 의하면, 로메오는 딸이 넷이었던 프로방스 공에게 첫딸이 출가를 잘 해야 나머지도 혼인이 순조로울 것이라 조언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첫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주어 프랑스 왕(성왕 루이 9세)에게 시집보냈으며, 이어 나머지 딸들도 모두 유럽 왕가들에서 왕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키아벨 리가 로메오의 일화를 인용한 것은 귀차르디니 역시 교황에게 청을 넣어 딸에게 후한 지참금을 내리도록 해서 좋은 혼사를 마련하라는 뜻에서이다-옮긴이) 총독은 심지어 공적인 일에서조차 방향을 잃고, 모든 사람이 반대하는 그 대담한 선택에 자신은 싫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인 양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만을 남길 뿐이었다. (나는 태풍이 불어오는데도 몸을 피할 생각도 않고, 우리처럼 길 가운데에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서 있는 사람은 들은 적이 없네. 그러므로, (...)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빼앗겼다고 하기보다는 불명예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손에서 내팽개쳐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
사정이 이러하므로, 다른 것보다 (만드라골라)의 상연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는 편이 더 나았다. 사실 귀차르디니는 편지에서, (적어도 이 일만큼은 우리 권한 안에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으며, 더욱이 이렇게 뒤숭숭한 때일수록 오락은 더 요긴한 법)이라며 만사 제쳐두고 이 분제부터 챙겼다. 배우들은 모두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나, 정작 (아르구멘토 argumento), 즉 그예리하면서도 통렬한 색조의 아름다운 프롤로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식으로 고쳐 썼으면 하였다. 그러나 귀차르디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하여 청중들의 수즌에 맞추어 다른 대사를 쓰도록 하는 게 어떠냐고 제의하였다. 어차피 연극은 저자 자신이 아니라 청중들의 자화상이 될 터였다. 그는 그 해의 경우 2월 13일에 끝나는 사육제 마지막 날들 중 어느 하루를 잡아 무대를 꾸미고 싶어했고, 작가는 어떻게든 그곳에 참석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래서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정월 그믐께쯤 와서 사순절까지 머물다 가라고 권유하였다. 그때쯤이면 (귀인을 모실 방들)도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이는 바르베라를 염두에 둔 마로, 그녀는 연극의 서두에 노래하게 되어 있었다. 귀차르디니는 (이 문제가 그냥 무시하고 넘겨버릴 일이 아니라면서) 그가 어떻게 하기로 작정했는지를 (심각한 어조로) 묻고는 편지를 끝맺었다. 그 자신이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점에서 볼 때 스스로가 사용하려고 단골 인쇄업자 지롤라모 손치노에게 부탁하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작지만 훌륭한 연극 대본에서 잘 나타난다. 평소 그는 총독이 오락과는 거리가 먼 포고문 등속의 무거운 글들을 인쇄하기 위해 이용하곤 했던 사람인데, 이번에야말로 그도 맡은 일에 틀림없이 신나했을 것이다.
이 편지에는 희극과 비극이 시종일관 묘하게 뒤섞여 사람을 그는 특이한 매력이 있는데, 마키아벨리의 1월 3일자 담장 역시 그러한 분위기를 담고 있다. 희극 문제에서 그는 과연 바르베라가 올 수 있을 것인지 확답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만한 애인들이 있기 때문이네. 하지만 어떻게든 일이 되도록 할 수 있을걸세.) 오, 가엾은 니콜로여! 하지만 그나 그의 연인이나 모두가 오고 싶어했고, 바로 이때를 위하여 막간곡으로 새로이 곡을 붙인 5곡의 노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 노랫말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다. 비극의 측면을 보자. 만약 황제가 권력의 우위에 서고자 한다면 결코 왕을 풀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붙잡혀 있을 동안이라야 황제는 프랑스와든 교황과든 조약을 완전히 깨뜨리거나 혹은 거꾸로 체결해 버리지 않고 다만 조약의 가능성만을 남겨놓은 채, 그들을 가지고 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인들이 프랑스와 연합하려는 낌새가 보일 때면, 그는 또다시 프랑스와 협상에 나서 이탈리아와의 조약을 불발로 끝나게 함으로써 스스로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네.)
며칠 전, 교황, 베네치아, 프랑스가 한편에 선 이탈리아 동맹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듣기로, 상황은 매우 괜찮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왕과 황제가 드디어 협상을 끝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자신을 풀어주는 대가로 부르고뉴를 양도하고,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이탈리아를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의 황제권을 인정하고, 게다가 두 아들을 인질로 준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프랑스 왕이 받는 것은, 그것을 대가라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승리자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는다는 것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판단으로는, 칼이 그렇게 협상을 끝냈다면 그 이면으로 프랑스가 교황과의 동맹을 파기했을 것이 틀림없고, 사태가 이렇다면 그가 프랑스와 했던 약속 역시 파기될 것이었다.
교황과의 동맹이나 황제와의 협상에 관한 이처럼 삐걱거리는 소문들은 몇 주 후 약간 다른 점은 있었지만 거의 사실로 드러났다. 그러나 동맹에 대한 정보를 더 직접적으로 접하고 있던 귀차르디니는 친구가 선술집 잡담식으로 그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읽고는 틀림없이 웃었을 것이다. 그가 심중에 감춘 큰 비밀을 생각할 때, 그의 미소는 자신이 종종 마키아벨리의 입가에 번지는 것을 불안스레 바라보던 그의 조소와 그리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 비밀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1월 중순경, 교황은 어떤 중요한 일로 그를 로마에 불러들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슬쩍 전해 왔다. 프란체스코는 이리저리 숙고를 거둡하고 일에 대한 보수와 같은 (세부 조건)에서도 적지 않게 밀고 당기고 한 끝에 결국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12월 4일까지도 그는 과연 교황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맡기려 하는지 듣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추축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클레멘테가 프랑스와 연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에게 맡기려는 임무가 바로 먼저 그 문제를 담판짓고 이어서 전쟁을 치르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자, 그는 평소에는 차가운 자신의 성품에도 불구하고 즉시 몸 전체가 확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듣기로, 이제 문제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게 된 그는 (세부 조건)을 두고 그토록 밀고 당긴 자신의 태도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이 임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만족은 성하께서 가만히 앉아 굴종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를 비밀로 하였다. 하지만 그가 사육제 동안의 연극 상연 건으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하고 그와 바르베라를 초청한 것이 자신의 심중을 감추자고 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홰냐하면, 그는 자신이 언제 일을 맡게 될는지도 잘 몰랐고, 더욱이 황제의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데다 교황 역시 우유부단해서 과연 그 계획이 실행될 것인지조차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526년 1월 3일가지도 모든 것이 답보 상태였으므로, 귀차르디니는 계획이 거의 무산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6일, 움직이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20일 피렌체를 향해 길을 떠났고, 그곳에 도착하여 나흘을 머물렀다. 그는 자신이 온 이유를 비밀로 해야만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곳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비밀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즉 (만드라골라)의 파엔차 공연은 실행되지 못했으리라는 것, 설사 이루어졌다 해도 그 자리에 귀차르디니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마키아벨리도 참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에게는 위안 거리가 있었다. 바로 그 사육제 기간 동안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작품이 전례없는 호평 속에 상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곳 피렌체 사회의 요청으로 무대에 올려진 것인데, 같은 날 저녁 일단의 베네치아 신사들은 이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플라우투스의 (메니이크미 Menaecmi)를 번역하여 상연하였다. 이 연극은 최고의 배우들을 기용하고 무대와 의상에도 막대한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지만, 피렌체 희극과 비교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무대였다는 평을 받았다). 이렇게 (만드라골라)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로 그 베네치아 신사들과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극을 상연했던 바로 그 저택에서 다시 한번 그 작품으로 무대를 꾸며 줄 것을 피렌체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이 공연을 본 관객들은 커다란 만족감을 표시했고 작가와 배우에게 열렬한 찬사의 말을 보냈다. (만드라골라)가 베네치아에서 성공을 거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누도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1522년 사육제에 그것에 상연되었을 때, 엄청난 수의 관객이 쇄도하는 바람에 공연을 끝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고대인이라면 자동적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던 시대에 고대 작가와 겨류어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희극에 대한 마키아베리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
하지만 희극 작가이자 역사가이며 비극 작가인 그가 당시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은 희극 작품이 아니라 역사였다. 귀차르디니와 나눈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결코 비극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고 때로는 (그 일에 깊이 빠져 있기도) 했으나, 어쨌든 다시 역사 쓰기를 시작하였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이 끝나기 전 ante res perditas) (앞서 나왔던 (post res perditas)를 저자가 바꾸어 표현한 것-옮긴이) 피렌체 서기장들의 역사 찬술 전통을 이어받겠다는 작정으로 집무중에 수집, 발췌해 왔던 편지들을 간추리고 요약하는 작업으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벌서 20년이나 묵어버린 이 서류들 속에는 부분적이긴 하지만 이미 역사 드라마의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몇몇 인물들의 모습도 경쾌하게 스케치되고 있다. 알레싼드로 6세의 경우는 이렇다. (사악한 교황. 머리에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협잡하려는 간계가 가득하다. 하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다.) 흑안공에 대한 묘사는 또 이러하다. (로도비코 스포르차. 가벼운 성격. 이것저것 수시로 바라고 두려워하고 집착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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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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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6. 지혜의 샘
예언자와 고향
예수가 다른 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고 고향에 돌아 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지 않고 그를 배척하였다. 사람들은 예수의 아버지가 목수인 조셉이고, 어머니가 마리아이며 남동생으로 야고보, 요셉, 시몬 그리고 유다가 있으며, 여동생들이 그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물론, 예수가 아버지 밑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자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고향 사람들은 그를 거짓말쟁이로 본 것이다. 예수는 이에 “예언자들은 고향이나 가족들에게는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자신도 자기에 대한 믿음을 주지 않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못하고 그 곳을 떠나야 했다. 이런 경우는 예수만이 아니다. 공자 역시 고향에 있을 때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공자는 사리를 따지고 대의명분을 밝히는 데는 누구보다도 달변이었으나 고향에 있을 때는 말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공자의 전기 자료인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는 아버지가 천민 안씨녀와 야합하여 세상에 태어난 사생아였다고 한다. 공자가 자신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고향 사람 앞에서는 말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 그 역시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와 공자의 경우로 미루어, 사람은 자신을 잘 아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능력을 인정받거나 존경받는 것이 무척 어렵다.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 더 존경한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도 거리감을 두어야 서로 존경하게 된다. 가장 친밀한 사이이기에 자칫 말과 행동이 예절에 소홀해지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Aprophet is respected everywhere except in his hometown)
그러나 한국에서 대통령을 하려면 지역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 후보들은 ‘예언자’같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므로, ‘고향’에 가야만 존경을 받고 몰표를 받는다. 타향에서는 업신여김을 받고 표를 잘 얻지 못한다.
두 주인 섬기기
옛말에 해가 두개가 아니듯이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없다고 하였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다. ‘두 주인에게 동시에 충성할 수 없다’는 말은 현대 자동차와 대우 자동차에서 반나절씩 일하면서 두군데에 똑같은 분량의 충성심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예수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편은 미워하고 다른 편은 사랑을 하든가 아니면 한편에게 충성을 다 하고 다른 편은 무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하여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춘추는 ‘신하에게 두 마음이 없는 것은 하늘이 정한 것’이라고 전하였고 ‘의에 두가지 신의를 말할 수 없고 믿음에 두가지 명령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문은 열거나 닫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고, 초 한자루로 양쪽 두 군데서 동시에 불을 켤 수 없다. 꼭 두 주인을 섬겨야 하는 경우라면 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한 사람은 거짓으로 섬길 수 밖에 없다.
새 부인의 제사
한 노인이 과부였던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얼마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노인은 부인이 정성들여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영감이 물었다.
“ 누구 제사를 지내는 건가?”
남편의 물음에 부인은 “오래 전에 죽은 남편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은“무엇이라고, 이 방자한 년아! 내가 너에게 잘해주고 있는데 아직도 옛 서방이 그리워서 제사까지 지내, 고얀지고!“라며 노여워했다. 새 부인이 말했다.
“영감님이 저보다 먼저 돌아가시면 이와 똑같이 제사를 드릴 것입니다. 영감님도 돌아가신 후 저에게 제삿밥을 얻어드시려면 너무 심한 말씀일랑 하지 마세요.”
누구나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No man can serve two masters.)
필요와 발명
어려운 환경에 처했을 때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 보면 해결책이 나온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역경을 극복한 사례를 보자.
빈대의 노력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일화를 들어 보자. 그는 젊었을 때 막일을 하면서 인천 노동자 합숙소에서 유숙하였다고 한다. 당시 연일 계속된 중노동으로 인해 잠을 자면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를 정도로 몸이 고단하였는데, 정작 자신을 괴롭힌 것은 다름 아닌 빈대였다고 한다. 빈대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그는 빈대들의 공격을 피해 밥 상 위에 올라가서 자는 꾀를 내었다. 하지만 잠시 뜸한가 했더니 빈대들이 이내 밥상다리를 타고 올라왔다고 한다. 그는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의 네 다리를 물 담은 큰 양재기 속에 담가 놓고 잤다고 한다. 빈대가 밥상다리를 타려다가 양재기에 담긴 물에 빠져 죽게 하자는 묘안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쾌재를 부르며 편한 잠을 잔 것은 이틀뿐이었다고 한다. 불을 켜고 도대체 어떻게 양재기 물을 건너왔나 살펴보았더니 빈대들도 방법을 바꾸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빈대들이 벽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간 다음 누워있는 사람을 향하여 다이빙하여 떨어졌던 것이다.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를 뛰어넘는 법을 알기 위해 그토록 전심전력 연구하여 제 뜻을 이룬다. 하물며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고 쉽게 포기해서야 되겠는가? 연구를 거듭하면 해결책이 나온다.
핸리 포드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위독해지자 그는 서둘러 말을 타고 의사를 부르러 갔다. 말 엉덩이에 채찍 자국이 날 정도로 급히 뛰어가 의사를 모셔왔으나, 이미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포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빨리 의사를 데려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를 제작하기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그래서 개발해낸 것이 빨리 달리고 값이 싼 자동차였다고 한다. 필요란 ‘어려운 환경’을 말한다.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기 위하여 노력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무슨 일이나 구하려고 노력하면 얻어진다’고 맹자가 말하듯이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Necessity is the mother of invention.)
여기서 어머니는 무엇을 일으키는 기폭제, 또는 산실이란 뜻으로 모태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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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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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Hamlet:1600-1601)
-제4막-
클로디어스 왕은 햄릿을 한시 바삐 잉글랜드로 추방하는 것이 안전한 길이라고 믿어 이튿날 아침 배에 태워 출발시켰다. 폴로니어스의 시체는 아무도 모르게 매장해 버렸다. 그러나 가엾은 희생자가 나타났다. 오필리아가 미치고 만 것이었다. 오필리아에게는 하늘같이 자비로운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죽었으니 그것이 오필리아를 미치게 하였던 것이다. 솜털처럼 보드랍고 샛별처럼 맑은 처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크고 처참한 충격에 미쳐 버렸다. 그토록 아름답고 우아했던 오필리아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궁성 안을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애절한 노래를 불렀다. 드디어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아티즈가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급보를 받고 프랑스에서 돌아왔다. 성격이 곧고 정의감이 강한 레아티즈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사실을 그대로 둘 까닭이 없으리라. 젊은 레아티즈가 폭도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부수며 쳐들어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침내 레아티즈는 클로디어스 앞에 나섰다. 혈기에만 맡긴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를 만큼 그는 흥분하고 있었다. 왕비는 조용하기는 하나 위엄 있게 말하였다.
"레아티즈 좀 진정하라"
"진정할 수 있는 피가 제 몸에 있다면 그것은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것이오. 저의 아버지는 어디 있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게 된 연유가 무엇이냐 말이오? 저를 속일 수는 없소.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소!"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확실한 사정을 알고 싶다면 가르쳐 줄 수도있지만 그렇게 친구와 원수를 분간하지 못하면서 정작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때 오필리아가 노래를 부르며 나타나자 레아티즈의 심장은 찢어질 듯하였다.
"아, 이 가슴의 불꽃이여! 나의 뇌수를 태워 없애다오. 눈물이 피가 되어 앞도 못 보게 해다오. 나는 기어코 너를 미치게 한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다. 오 아름다운 오필리아! 5월의 장미 귀여운 내 동생! 인간이란 사랑의 극치에 달할 때 사랑하는 어버이를 쫓아 그 귀중한 정성을 사랑의 표적으로 떠나보낸단 말인가!"
그러나 오필리아는 오빠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다시는 오시지 못할 것인가? 어찌 돌아오리오, 한 번 가신 몸 차라리 이내 몸을 버릴까 보다
백설 같은 흰 수염, 삼베 머리에 이제는 영영 가고 못 오실 사람 탄식이 무슨 소용, 도리 없구나 저승에서 부디부디 잘 계시옵소서"
오필리아는 노래를 부르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레아티즈는 그것을 보자 한층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왕은 레아티즈에게 그 복수를 위해 조력을 하겠으니 자기를 따르라고 말하며 레아티즈를 데리고 갔다. 잉글랜드로 떠난 햄릿은 클로디어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보내는 서신을 몰래 뜯어 보았다. 그 편지에는 끔직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햄릿 왕자가 잉글랜드에 상륙하는 즉시 사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햄릿은 편지의 사연을 자기를 따라간 두 사람의 부하를 처형하라는 내용으로 고쳤다. 이리하여 죽음을 면한 햄릿 앞에 또 하나의 장애가 나타났다. 햄릿은 해적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된 것이다. 해적들은 햄릿이 덴마크의 왕자임을 알게 되자 그를 인질로 많은 보상금을 타먹기 위해 극진히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덴마크 왕 앞으로 햄릿의 사연을 편지로 보냈다. 햄릿이 무사히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자 간악한 클로디어스 왕은 모든 책임을 햄릿에게 돌려 버리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 햄릿과 레아티즈는 검술에 탁월한 무사들이었다. 왕은 햄릿이 살아서 돌아온다면 두사람이 결투를 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레아티즈가 차지할 칼끝에는 독약을 칠하여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삽시간에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은 햄릿을 없애 버리기 위해 레아티즈의 힘을 빌리되 국민들의 의아심을 잠재우기 위한 간계였던 것이다.
"좀 더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의 계획이 서툴러 탄로 나면 안 되니까 만일의 경우를 위해 다음 방법을 준비해야지"
"어떻게요?"
"두 사람은 정식으로 내기를 하고... 옳지! 좋은 수가 있지. 두 사람이 결투를 하면 목이 마르게 될 거야. 그럴 때 그 자는 물을 청할 테니까 그 때 미리 준비해 둔 독을 탄 술잔을 내 주면 된단 말이야. 결투에서 칼을 모면했다 할지라도 그 술 한 모금만 마시면 만사는 뜻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이렇게 두 사람이 모의를 하고 있을 때 왕비가 뛰어들어 왔다.
"재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군요. 레아티즈! 그대의 동생이 물에 빠져 죽었어요!"
"오필리아가? 어디서요?"
"개울가에 비스듬히 누운 버드나뭇가에서 오필리아는 그 가지에다 미나리아재비와 딸기풀과 실국화를 꺾어서 꽃 목걸이를 만들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꽃 목걸이를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고 올라가는데 갑자기 나뭇가지가 꺾이면서 그만 시냇물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꽃송이처럼 활짝 핀 치맛자락은 물 위에 수를 놓은 듯 오필리아를 싣고서 흘러 가더니 마침내 거센 물결이 삼켜 버렸다는군요"
여동생의 최후를 듣고 난 레아티즈는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불쌍한 누이여!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그러나 하염없이 솟구치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구나. 비웃을 놈은 비웃어라. 실컷 울고 나면 여자같이 약한 마음도 가실테지... 전하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이 마음 어리석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복받쳐 오르는 눈물에 말끝을 맺지 못하는 레아티즈는 쏟살같이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제5막-
냉기와 이상한 기운이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묘지였다. 두 사람의 어릿광대가 또 하나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무덤을 파고 있었다. 덴마크에 돌아온 햄릿은 이 묘지를 지나가고 있었다. 땅 속에서 파낸 해골이 햄릿의 발 앞에 떨어지자 햄릿은 무심코 해골을 주워 바라보았다.
"이 해골도 한때는 혀가 박혀 있어 노래를 불렀을 테지. 살인의 원조인 카인은 형을 죽이는 데 말의 턱뼈를 썼다지만 이건 그 턱뼈나 되는 것처럼 마구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군 지금 저 바보가 삽으로 파 올리는 해골도 그 옛날엔 어떤 지도자의 지혜를 돕는 사람의 해골이었는지도 모를 텐데!"
옆에 서 있던 호레이쇼는 햄릿의 넋두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더기 마나님 신세를 지게 되고 참으로 기가 막힌 변화로구나. 우리가 볼 줄 아는 눈만 있다면 더 재미있는 것을... 기를 때에는 많은 공을 들였건만 이제는 노리개가 되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구나!"
구성지게 노래를 부르며 무덤을 파고 있는 광대에게 햄릿은 물었다.
"어느 사내의 무덤이냐?"
"사내 것이 아니오"
"그럼 여자 것이냐?"
"여자도 아닙죠 살아서는 여자였지만 가엾게도 지금은 죽은 사람입죠"
"그놈 참 까다롭기도 하지... 그래 너는 언제부터 무덤을 파서 살아 왔느냐?"
"햄릿 왕자님이 세상에 나시던 날부터죠 그분도 지금은 미쳐서 잉글랜드 땅으로 쫓겨 갔지만..."
햄릿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가 쑥스러워서 시치미를 떼고 말을 계속하였다
"왕자는 왜 미치게 됐나?"
"풍문에 들은 즉 그게 이상하다는 뎁죠"
"어떻게?"
"글쎄 정신이 돌았으니까 그렇습죠"
"사람은 무덤 속에서 몇 해면 썩지?"
"글쎄올시다. 가죽을 다루는 갖바치는 9년 갑니다만..."
"그건 또 왜?"
"그야 장사가 장사니 만큼 살가죽이 무두질이 되어서 오래 갑죠"
이 때 저만치 숲 사이로 장례식에 오르는 행렬이 보였다. 햄릿은 호레이쇼를 재촉하여 나무 그늘에 숨어 엿보았다. 그 행렬 속에는 왕 왕비 그리고 레아티즈도 함께 있었다. 그것은 오필리아의 장례식이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레아티즈는 사제에게 보다 정중한 장례식을 요구하여 관은 땅 속에 묻히게 되었다. 레아티즈는 슬픈 소리로 곡하였다. 나무 그늘에서 듣고 있던 햄릿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왕비도 꽃을 관 위에 뿌리면서 마지막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처녀에게는 아름다운 꽃을... 잘 가거라. 햄릿과 백년 해로하기를 바랐건만... 이 꽃을 너의 성스러운 결혼식 자리에 뿌려 줄 날을 기다렸건만 이렇게 너의 무덤에 뿌릴 줄이야..."
참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끓여 오는 격정을 억제하던 레아티즈는 사랑하는 여동생과 함께 묻어 달라고 외치며 무덤 속으로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넋을 잃고 서 있던 햄릿은 이 광경을 보자 다음 순간 미칠 듯이 오필리아의 무덤 속으로 뛰어갔다. 햄릿을 발견한 레아티즈는 햄릿에게 욕을 퍼부어대며 덤벼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왕자님 진정하십시오!"
호레이쇼는 햄릿을 뜯어말렸다.
"나는 오필리아를 사랑해 왔다. 수 만명의 오라버니의 사랑을 다 끌어 모아 보아라! 감히 따라올 것 같으냐! 오필리아를 위해 대체 뭘 하겠다는 거냐"
레아티즈가 다시 덤벼들려 하자, 이 때 왕은 정신 이상이 생긴 햄릿을 상대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리고 어제 이야기한 것을 명심하고 잠시 참으라고 타일렀다.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잉글랜드에서 다시 살아나올 때까지의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으로 사건의 전모를 듣고 있던 호레이쇼도 새삼스럽게 왕의 흉계를 알았다는 듯이 분함과 의기에 몸을 떨었다. 이 때 클로디어스 왕의 종인 오스릭이 햄릿을 찾아와 왕의 분부를 전했다.
"왕자님, 마침 레아티즈께서 귀국하셨는데, 검술이 뛰어나다고 하시고 인품이 온유하시어 문자 그대로 완전한 신사이시어 만인이 경모할 분이라 하옵니다"
"그래서 어떻단 말이냐?"
"전하께서 왕자님과 레아티즈가 12회에 걸친 시합을 하라시는 명이십니다. 그래서 석 점은 놔주고 나머지 아홉 점으로 결승하는 데 전하께서는 왕자님이 다섯 점 득점으로 결국 이길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응답해 주신다면 곧 시합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싫다고 한다면?"
"아닙니다. 시합장에서 직접 응답하시랍니다"
"처분대로 하시오. 전하와 레아티즈가 모두 원한다면 칼을 가져오게 하라. 되도록 폐하를 위해 이기고 싶지만 시합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 소득은 망신과 놓아 주는 석 점 뿐이겠지!"
"그럼 전하께 바로 그대로 아뢰겠습니다"
검술 시합은 궁성 안 넓은 마루에서 시작되었다. 장내에는 문무 백관이 꽉 들어찼고 왕과 왕비도 나와 있었다. 호레이쇼는 끝까지 햄릿에게 이 시합을 만류하였다.
"왕자님 조금이라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소인이 가서..."
"나는 예감 같은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겠네.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늘의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 이제 오면 장래에는 아니 올 터이고, 장래에 아니 오면 이제 올 터이고, 평소의 각오가 제일이야. 어차피 우리가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하는 이상 젊어서 죽는다고 슬퍼할 거야 있나? 만사는 될대로 되는 거지!"
시합이 시작되기 전에 왕은 햄릿을 가까이 오게 하여 레아티즈와 서로 손을 쥐어 주었다. 햄릿은 레아티즈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하였다.
"레아티즈 용서하게. 요전에는 실례가 많았었네. 그러나 레아티즈에게 폭언한 것은 결코 햄릿이 한 짓은 아니었네. 그럼 누가 했을까? 그것은 나의 광증이 했네. 내가 고의로 한 짓이 아니었음을 이 대중 가운데서 맹세하네. 그리고 내가 한 짓은 마치 내 집 지붕을 향해 쏜 화살이 내 형제를 맞춘 격이라고 너그럽게 생각하게"
"그 말씀을 듣자니 저의 마음도 풀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명예에 한해서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우정은 우정으로 간직할 뿐 절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좋아. 그럼 형제 사이처럼 이 시합을 깨끗이 겨루어 보자. 칼을 다오"
네댓 자루의 칼이 나왔다. 햄릿은 별 생각없이 한 자루의 칼을 집어 들었다. 레아티즈는 이것저것 고르던 끝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칼을 재빠르게 들었다. 우렁찬 나팔 소리가 성안과 성밖에 울려 퍼지며 시합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시합은 햄릿이 이겼다. 왕은 독을 탄 포도주를 햄릿에게 권하였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햄릿의 칼 솜씨를 칭찬하며 어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하자 햄릿은 술잔을 그대로탁자 위에 놓고는 시합을 계속하였다. 시합은 차츰 절정으로 접어들었고 햄릿의 이마에는 땀이 비오듯 하였다. 손에 땀을 쥐며 보고 있던 왕비는 손수건을 햄릿에게 주며 땀을 씻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갈증이 심해지자 햄릿이 마시려다 놓은 술잔을 무심코 들었다. 이 광경을 본 클로디어스 왕은 깜짝 놀라 마시지 말라고 말렸으나 이미 술은 왕비의 입 안에서 목구멍으로 흘러내릴 때였다. 왕은 극도로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시합은 세 번째로 접어들었다. 햄릿이 피로를 풀기 위해 잠깐 쉬는 순간 레아티즈는 그 틈에 햄릿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다. 상대방의 비겁한 처사에 격분한 햄릿은 레아티즈와 맞잡고 엎치락거리다가 두 사람은 칼을 놓치고 말았다. 다시 주은 칼은 바뀌어진 채로 두 사람의 손에 쥐어졌다. 바로 이 때 왕비는 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듯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그것은 햄릿의 칼끝이 레아티즈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햄릿도 상처를 입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는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왕비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아. 이 술에는 독약이 들어 있어! 독약이!"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햄릿이었다
"음모다! 문을 잠가라! 역적이다! 범인을 찾아내라!"
신하들은 사방 문을 지켜 섰다. 그러자 레아티즈는 가빠지는 숨결을 참으며 이렇게 말했다
"왕자님 역적은 이 안에 있소이다. 왕자도 이제 죽을 것입니다. 어떠한 약을 써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반 시간 안에... 칼끝에 칠한 독약이 전신에 돌고 있으니까... 저는 제 함정에 빠졌습니다. 모두가 저 왕이 꾸민 짓이오. 왕비 전하께서도 독을..."
"천하에 둘도 없는 살인 강간자! 너도 독맛을 보아라!"
햄릿은 불타오르는 분노로 독 묻은 칼로 왕의 가슴을 찔렀다. 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햄릿은 술잔에 남아 있는 독주를 왕의 입에 부어 넣었다. 숨이 꺼져가는 레아티즈는 햄릿에게 말했다
"왕자님 서로의 죄를 용서합시다. 저와 저의 아버지의 죽음도 당신 탓이 되지 않기를. 그리고 당신의 죽음도 이 놈의 탓이 아니기를 바라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레아티즈는 숨을 거두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햄릿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30분 후면 죽어야 할 운명이다.
"레아티즈 그대를 하늘도 용서할 걸세. 호레이쇼, 이제는 나도 다 살았다. 가엾은 어머니 잘 가시오! 하고 싶은 말은 적지 않지만 죽음이 나를 재촉하니 도리가 없군. 호레이쇼 자네만은 살아야 하네. 살아서 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일의 시비를 잘 가려 주게나"
"왕자님 몸은 비록 덴마크서 태어났지만 정신은 옛 로마 사람과 다를 바 없구나. 내가 지금 살아 무엇하리. 마침 독주가 남아 있군"
"장부답지 못한 노릇! 그 잔을 이리 주게. 자손을 두어 내게 어떤 누명이 남을지도 모를 일. 그러니 자네가 나를 아껴 준다면 잠시 하늘의 은혜를 멀리하더라도 이 욕된 세상에 남아 괴로움을 참고 햄릿의 이야기를 전해 주게"
마침내 햄릿은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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