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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3호 - 2024.10.13. 일요일(음력 : 9.11.)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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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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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창조하는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자연을 표절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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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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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가된 표준어
2011년에 새로 표준어가 된 말은 ‘간지럽히다, 맨날, 개발새발, 나래, 먹거리, 손주, 오손도손, 짜장면’ 등등 모두 39항목에 이른다. 이 말들은 오랫동안 우리 말글살이에서 널리 쓰여 왔지만 표준어 대접을 받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이전까지는 어떤 말이든 한번 비표준어로 규정되면 실생활에서 널리 쓰이더라도 표준어로 인정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짜장면’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추가 표준어 발표는 앞으로의 국어 정책이 언어 현실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개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14년에는 ‘삐지다, 굽신거리다, 놀잇감, 섬찟하다’ 등 13항목이, 2015년에는 ‘이쁘다, 푸르르다, 잎새’ 등 11항목이 새로 표준어가 되었다.
올해는 6항목이 추가되었다. ‘걸판지다, 겉울음, 까탈스럽다, 실뭉치’ 등 4항목은 기존 표준어와는 뜻이나 어감이 달라 별도의 표준어로 인정한 경우이다. 예를 들어, ‘실뭉치(실을 한데 뭉치거나 감은 덩이)’와 ‘실몽당이(실을 풀기 좋게 공 모양으로 감은 뭉치)’는 서로 다른 뜻을 나타내므로 그동안 비표준어였던 ‘실뭉치’를 별도의 표준어로 인정한 것이다. ‘주책이다’와 ‘엘랑’은 비표준적인 것으로 다루어 왔던 표현 형식을 표준형으로 인정한 경우이다. 그동안 ‘주책이다’는 ‘주책없다’의 비표준형으로 다루어 왔으나, 현실에서는 ‘주책이다’도 널리 쓰이고 문법적으로도 잘못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가 없어 표준형으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엘랑’ 역시 ‘에는’과는 어감상 차이가 있고 문법에 어긋난 표현도 아니므로 표준성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서울엘랑 가지 마오.”라 써도 좋다는 뜻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내년 1월 1일에 반영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해보내기
올해 달력의 마지막 장을 넘기기 직전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교차하는 때이다. 이맘때쯤이면 마지막 해를 보내는 해넘이 행사와 새해 첫 일출을 맞는 해맞이 행사로 전국 곳곳이 북적인다. 그런데 올해는 유례없는 조류 독감으로 전국 지자체마다 행사를 취소하고 있다.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 가고 있는데, 부디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해넘이 축제, 해맞이 축제처럼 ‘해넘이’와 ‘해맞이’는 함께 쓰이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이 둘의 짝은 좀 어색한 데가 있다. 해넘이는 해가 넘어가는 일이니 해가 주체이다. 반면에 해맞이는 해를 맞는 일이니 사람이 주체가 되는 말이다. 제대로 맺어 준다면 해넘이(일몰)의 짝은 해돋이(일출)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해맞이의 짝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그 적절한 말은 없는 듯하다. 해맞이에는 떠오르는 해를 맞는다, 새해를 맞는다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어떤 뜻으로든 그 짝이 될 말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한자어로는 한해를 보내는 송년(送年), 새해를 맞는 영년(迎年)의 짝이 있지만, 해맞이에 어울릴 만한 말은 없다. 그러고 보면 달맞이는 있어도 달을 보낸다는 뜻의 말도 없는 것 같다. 해든 달이든 보내는 아쉬움이 커서 차마 말을 만들지 못했을까.
그런데 인터넷 한 귀퉁이에 ‘해보내기’라는 말이 보인다. 어린이집에서 해보내기 행사를 한다는 소식, 또 해보내기 굿이 열린다는 알림 글도 보인다. 국어사전에도, 국립국어원 말뭉치 자료에도, 우리말샘에도 없는 낱말이다. 인터넷에서도 아직 그 쓰임은 매우 적은데, 해맞이의 짝으로 널리 쓰면 좋을 것 같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 속에서도 ‘해보내기’라는 낱말 하나가 작은 기쁨을 준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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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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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정지용
창을 열고 눕다.
창을 열어야 하늘이 들어오기에.
벗었던 안경을 다시 쓰다.
일식이 개이고난 날 밤 별이 더욱 푸르다.
별을 잔치하는 밤
흰옷과 흰자리로 단속하다.
세상에 안해와 사랑이란
별에서 치면 지저분한 보금자리.
돌아 누워 별에서 별까지
해도 없이 항해하다.
별도 포기 포기 솟았기에
그 중 하나는 더 훡지고
하나는 갓 낳은 양
여릿 여릿 빛나고
하나는 발열하야
붉고 떨고
바람엔 별도 쓸리다
회회 돌아 살아나는 촉불 !
찬물에 씻기여
사금을 흘리는 은하 !
마스트 알로 섬들이 항시 달려 왔었고
별들은 우리 눈썹 기슭에 아스름 항구가 그립다.
대웅성좌가
기웃이 도는데 !
청려한 하늘의 비극에
우리는 숨소리까지 삼가다.
이유는 저 세상에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제마다 눈감기 싫은 밤이 있다.
잠재기 노래 엇이도
잠이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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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가 - 김수영
아가야 아가야
열발구락이 다 나와있네
엄마가
만들어준 빨간 양말에서
아가야 아가야
기저귀 위에는 나이롱종이가지 감겨져 있네
엄마는 바지가 젖는 것이 무서웁단다
아가야 아가야
돌도 아니된 너는 머리도 한 번 깎지를 않고
엄마는
너를 보고 되놈이라고 부르지
아가야 아가야
네 모양이 우스워서 노래르 부르자니
엄마는 하필 국민학교놈의 국어공책을 집어주지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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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위한 기도 -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맺고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내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는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해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있는
한 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 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 주시어
좀더 겸허하고
좀더 인내롭고
좀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르는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한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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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기도 일기
1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과 기쁨을 주기 위해서는 기도에 못지않은 움직임이 필요하다. 민감한 센스. 재치와 함께.
2
성서를 읽다가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성구가 믿음에 와닿았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서로 눈치챌 수도 없지만 우리 각자는 하루하루 내면의 선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기심을 버리고 좀더 넓어지려는, 좀더 깊어지려는 그리고 좀더 따뜻해지려는 선한 싸움을...
3
늘 바다 가까운 하늘에서 떠오르던 해를 보다가 오늘은 동백섬 옆산 위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 언제라도 가슴이 설렌다. 햇볕이 잘 드는 방에서 사는 고마움. 햇볕은 습기, 곰팡이도 없애 주고 우리에게 밝음, 기쁨을 선사해 준다. 나도 늘상 햇볕 같은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4
큰 수술 뒤에 깊은 잠에서 깨어난 환자가 회복실에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새삼 감격스러워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다.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나에겐 새날이요, 보물로 꿰어야 할 새 시간이요,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임을 잊지 말자.
5
`아주 작은 것, 하찮은 것에서도 이기심을 품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그러나 결국 나보다는 남을 좀더 위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만 진정한 평화가 있음을 체험했지? 좋은 일에도 이기심과 욕심은 금물이야. 이것만 터득해도 살기가 좀더 쉬워질텐데...그렇지?` 방으로 가는 층계를 오르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내가 나 자신을 향해 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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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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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 배소현
여우비
뿌려
하늘 청소하더니
아, 저편 하늘에
무지개 띄우셨네
- 해님의 선물
- 꿈의 날개
가슴 속 온갖 생각
씻고 비워 내면
내 가슴 맑은 하늘에도
무지개 하나
꿈같이 띄워 주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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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비가 그린 그림 - 이경숙
장마비가
우리 집 천장에다
그림을 그렸어요
강아지, 새, 꽃
뭉게구름도 그리고
세계 지도도 그리고
지도에도 없는
새로운 나라도
그려 넣고,
빨강 노랑 보라
예쁜 색깔 크레파스는
벌써 다 써 버렸는지
빛 바랜 색으로만
그린 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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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외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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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 - 괴테 / 김주연 옮김
그렇게 나 홀로
숲속으로 걸어갔네
아무것도 찾으려 하지 않았지.
그것이 내 생각이었어.
그늘 속에서 나는
한 떨기 작은 꽃송이를 보았어.
별처럼 빛나며,
작은 눈동자처럼 아름다운
나는 그 꽃을 꺾으려 했지.
그러자 꽃은 속삭였어.
난 꺾여
시들어져야 할까요 ?
뿌리째 온통
난 그 꽃을 뽑아 내어
집 옆 예쁜 정원으로
옮겨왔다네.
그러자 그 꽃은 조용한 구석에서
다시 살아났지.
지금 그 꽃은 가지를 쳐가고
자꾸자꾸 꽃을 피워가고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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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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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3장. 의를 기른다
44.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식탁은 인간형성의 장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자녀들이 가족의 일원으로서 교류하는 최초의 자리가 바로 식탁이다. 그것은 식탁에 둘러앉아 가족 전체가 얼굴을 마주보고 앉았을 때, 어른들은 물론이고 비록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무의식중에 '가족'이라는 집단 의식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느낌은 어린아이의 연령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한 예로, 전혀 말을 못하는 어린아이와 조금이라도 말을 할 줄 아는 어린아이가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경우, 분위기를 인식하는 차이는 아주 다르다고 하겠다. 그런데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 지나친 표현일지 모르지만, 특히 젖을 먹는 유아인 경우, 간혹 가다가 식탁의 침략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가족과 별도로 식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 유태인들은 그 경계를 첫 번째 생일날로 잡고 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아이는 비로소 부모 형제들과 나란히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다. 그쯤 되면 겨우 어른이나 다 큰 형제들의 식사법을 흉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부터 한참 동안 아이는 식탁의 불법 침입자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자녀들이 그랬듯이, 아이들은 차츰 부모 흉내를 내면서 식탁에서의 기본 예절을 배우므로 어른들은 사소한 실수쯤은 눈감아주면서 아이가 식사 예절을 터득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협력해야 한다.
먹는 방법에서도 '인간다움'을 고려한다
유태인들은 그 행위로 보아서는 인간도 동물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에 특히 주의한다. 동물이나 인간의 공통적인 행위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바로 섹스와 먹는 일이다. 그러나 섹스도 그렇지만, 먹을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해서 동물처럼 무조건 입에 넣거나 손으로 집어먹는다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게 되면 포크나 나이프, 혹은 젓가락이나 숟가락 따위의 도구를 사용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인간답게 먹는 첫 걸음이라 하겠다. 즉 이것이야말로 동물과는 구별되어지는 첫 단계인 셈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동물적인 본능에서 벗어나기 위한 초보 훈련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비로소 아이에게도 가족의식이 형성된다. 유태인들이 식탁을 인간 형성의 자리로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식탁이 한 가족이 교류하는 데 있어 절대 중요한 자리라 할지라도 자녀가 한 살이 채 안 되었을 때는 동석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45. 편식 버릇을 방관하면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게 된다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구미인들이 '유태인 어머니'라는 말에서 우선 연상하는 것은 '교육 엄마', 즉 교육에 열성적인 엄마이고, 그 다음이 식사 때 자녀들에게 무조건 '많이 먹으라'고 권하는 어머니이다. 사실 이런 지적을 받을 만큼 유태의 어머니들은 귀찮을 정도로 자녀들에게 많이 먹으라고 권한다. 구미나 동양에서는 흔히 '치즈는 프로틴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라거나 '시금치는 철분이 많은 식물이기 때문에'라는 따위의, 주로 영향학적인 지식을 과시하면서 자녀들이 싫어하건 말건 먹을 것을 강요하는 엄마들이 많다. 그런데 유태인 엄마들은 '먹어라, 많이 먹어라'고 권하긴 하지만 다른 나라 어머니들처럼 영향학적 가치까지 들먹이지는 않는다. 소박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에게는, 특히 젖먹이에게는 '성장' 이 첫째 요건이다. 더욱이 모든 음식은 성장의 필수 요건이므로, 성장한 다음 어떤 생활환경에 처하더라도, 또 어떤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남에게 절대로 뒤지지 않는 확고한 '체력'을 만들어주는 것이 부모된 자의 의무라고 우리 유태인 어머니들은 믿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좋아하는 음식, 싫어하는 음식을 가려서 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건 내가 싫어하는 음식이야, 안 먹을 테야'라는 말을 못 들은 척 묵인해 버린다면 그만큼 자녀들의 올바를 성장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행동이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물론 어린이들 자신은 그때 그때의 기분에 따라 먹는 것이 다르므로 하나 하나 영양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 준다 하더라도 이해할 리가 없다. 그래서 '많이 먹으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유일한 방법인 까닭이다. 음식점에 갔을 때, 어린이들이 간혹 자기 식성에 맞지 않는다며 먹기를 거부할 때가 있다. 이럴 경우에는 '이 음식점에는 이 메뉴밖에 없으니 정 싫으면 너 혼자 다른 음식점에 가서 먹으라'고 딱 잘라 말하라. 그러면 아이는 어쩔 수 없이 먹게 될 것이다. 또는 참을성 있게 '아이 착해, 이걸 먹으면 건강해진다'라고 타이르면 대개의 어린이들은 왕성하게 먹게 되므로 편식 습관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콜릿이나 과자 따위의 자극성이 강한 것들은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으므로 결코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만든다
자녀들이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사물을 판단하는 능력이 생기게 되어 음식이 맛있느니 없느니 하며 가려먹는 습관이 생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인간이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짐승들처럼 단지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가족이 정답게 한 자리에 모여서 연대감을 결속하는, 나아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신성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트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어쩌면 이런 위험성이 예상되기 때문에 유태인의 어머니들이 편식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기를 먹는 부모 옆에서 자녀들이 생선을 먹는다면, 한 가족이 따로 따로 생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광경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유태인 가정에서는 음식은 되도록 엄마가 정성 들여 손수 만든다. 엄마가 직접 만든 음식은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자녀들에게 식사라는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포인트!
어렸을 때의 편식 습관을 방임하는 것은 결국 가족의 일체감을 깨뜨리는 원인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태인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편식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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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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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하드리아누스 황제
(재위 : 서기 117년 8월 9일 ~ 138년 7월 10일)
이집트
이집트에는 사비나 황후를 불러들였다 그리스의 도시들은 그리스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나 흥미를 주지만, 이집트에는 일반인도 매혹시키는 이국 정취가 넘쳐흐른다. 특히 유럽인의 눈에는 이국 정서가 풍부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것은 근대와 현대의 서구인, 그 중에서도 가장 서구적인 영국인이 이집트에 강한 관심을 갖는 데에도 드러나 있다. 문화에는 취미가 없는 사비나 황후도, 그 측근인 로마의 상류층 부인들도 이집트에서는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하드리아누스는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웬일로 그가 아내한테 서비스를 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하드리아누스가 아내를 데리고 관광이나 다니면서 시간을 보낼 턱이 없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 장관이 관장하는 속주 통치기관을 순시하고, 알렉산드리아와 가까운 니코폴리스 기지로 가서 제2군단을 시찰한 뒤에는 체재 기간의 적지 않은 부분을 자기 취미에 맞는 방향으로 사용했다. 그 하나로 역사가들이 서술하고 있는 것은, '무세이온'이라는 그리스어 명칭으로 통용된 저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방문한 일이었다. '도서관'이라고 불린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대에 수집한 만 권의 서적(두루마리)을 소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서적들은 대부분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전쟁을 치를 때 불타버렸다. 그래도 그 후 서적수집이 재개되어,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규모로 회복되어 있었다. 서적이 모여 있는 곳에는 그것을 공부하려는 사람들도 모여든다. 도서관이 연구기관으로 바뀌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도 하다. 로마의 지배 하에 들어간 뒤에도 '무세이온'을 가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그리스 아테네와 소아시아 서부의 페르가몬, 로도스 섬과 더불어 로마 세계의 최고 학부였다. 아니, 인문계가 주류인 아테네나 로도스 섬과는 달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인문계와 자연과학계를 망라한 종합대학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덧붙여 말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안은 명문 중의 명문이긴 했지만 유복하지는 않아서,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상류층이 최고 브랜드로 생각한 '아테네에서 교육받은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고용할 여유가 없었다 교양이 높고 아들 교육에도 열심이었던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그래서 명성보다 내실을 택한다. 외아들의 교육을 맡을 가정교사로,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공부한 갈리아인을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영국의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 미국의 하버드나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학한 인도인이나 싱가포르 인을 가정교사로 채용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독일의 역사가 몸젠이 "로마 역사상 유일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모국어인 라틴어에서부터 당시 국제어였던 그리스어, 생각이나 시야를 넓히는 철학과 역사, 논리적 사고와 전달방법을 익히는 논리학과 수사학, 조화의 감각을 기르는 수학과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네이티브'가 아닌 갈리아인에게 배운 셈이다. 이런 카이사르였기에, 의료업에 종사하는 의사와 교육에 종사하는 교사에게는 민족이나 종교나 피부색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준다는 법을 최초로 제정하여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경제적 혜택(로마시민권을 가지면 속주세를 낼 의무가 없었다)을 주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이런 연구기관에 대한 로마 상류층의 지원은 계속되었다. 지원에는 황제가 솔선 수범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아내플로티나는 그리스 철학 연구소의 명예소장 같은 일을 맡았다.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로 학자들의 편의를 돌봐주고 연구를 후원해주는 역할이 기대되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아테네를 지원한 것도 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공부하는 학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에는 로마 황제가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주는 연금을 황제의 개인 영지인 이집트 속주에서 들어오는 세금으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드리아누스가 '무세이온'을 방문한 것은 후원자로서 자기가 후원하는 기관을 방문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심포지엄이라도 열어서 황제를 영접했을 것이다. 심포지엄은 라틴어로 '심포시움' , 그들이 사용하는 그리스어로는 '심포시온'이지만, 요컨대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그것을 통해 지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자리다 하드리아누스에게 요구된 역할은 학문 세계 바깥에 사는 사람답게 잠자코 경청하는 것이었겠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황제는 날카롭고 매서운 비판으로 학자들에게 논쟁을 걸었다. 게다가 학자들의 주장을 완벽하게 논박하기까지 했다. 이 기록을 남긴 역사가들은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지력을 과시하고 싶어했다고 평했다. 사실 그런 자리에서는 황제답게 의젓한 태도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참을 수 없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하드리아누스의 인물 평가기준이었다. 사회적 지위는 고려된다 해도 이차적인 기준에 불과했다. 그런 하드리아누스에게는 일개 병사라는 신분도, 속주 태생이라는 출신도 평가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조건은 되지 않는다. '무세이온'의 학자들은 황제한테 연금을 받고 있는 처지다. 연구에 헌신한다는 이유로 봉록을 받는 이상, 연구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학자들을 학문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어 결국 그들의 학설을 뒤엎었을 때,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게 아닐까 각자가 책임을 완수하는 것은 군대나 행정만이 아니라 학문 세계에서도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하지만 논박 당한 학자들은 이 의미를 깨닫지 못한 모양이다. 그중 한사람이 나중에 30개 군단(사실은 28개였지만)을 등에 업고 있는 사람한테 어떻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겠느냐고 불평한 말이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고명한 학자들과 황제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방청하고 있던 젊은 학자들 중에는 하드리아누스의 속내를 짐작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그 때문이라는 확증은 없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했을 당시 서른 살 안팎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로부터 몇 년 뒤 천문학과 수학, 지리학의 혁명적 집대성인 방대한 저서를 간행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했을 당시 페르가몬에서 막 태어난 갈레노스도 나중에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그 성과인 해부학 저서를 간행하여, 로마 시대의 높은 의학 수준을 후세에까지 전하게 된다. 1300년 뒤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해부학 분야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것도 갈레노스의 저서를 인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듯, 하드리아누스는 결코 만만한 권력자가 아리었다. 로마 시대 사람이 쓴 유일한 하드리아누스 전기인 <황제실록>(Historia Augusta)의 저자는 하드리아누스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시와 문학에 관해서는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수학과 기하학, 회화에도 좨 높은 수준의 이해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악기 연주와 노래도 좋아해서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악기와 노래를 연습할 때도 남몰래 숨어서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한 사람들을 노래한 사랑의 시도 몇 편 지었다. 무예에서는 제일급의 달인이었다. 검투사가 사용하는 복잡하고 위험한 무기까지도 자유자재로 다를 줄 알았다. 성격은 복잡했다 엄격한가 하면 상냥하고, 친절한가 하면 까다롭고, 쾌락적인가 하면 금욕적이고, 씀씀이가 야박한가 하면 시원시원하고, 불성실한가 하면 더없이 성실하고, 잔혹해 보일 정도로 무자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딴 사람처럼 온화하게 관용을 베푸는 식이다. 요컨대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하드리아누스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
위의 글에서 특히 '성격은 복잡했다'는 말로 시작되는 마지막 부분은 하드리아누스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일급 사료가 되어 있다. 소설가 유르스나르도 <하드리아누스의 회상>에서 이 대목을 인용하고있다.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다'는 대목을 읽고 웃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가 단순히 변덕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였을까. 아니면 위의 글을 쓴 저자와는 다른 인간관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친절'을 예로 들어 검증해보자. <황제실록>의 하드리아누스 부분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누구한테나 친절하지 않으면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는 친절하게 대할 가치가 있는 사람한테만 친절했던 게 아닐까. 누구한테나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본분인 성직자 같은 사람들은 제쳐놓고, 속세에 있는 사람이 누구한테나 친절하다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한테도 친절하지 않다는 뜻이 아닐까.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황제라는 최고권력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누구한테나 똑같이 친절하기를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엄격해야 할 때는 엄격하게, 상냥하게 굴어도 좋을 때는 상냥하게, 친절하게 대할 만한 사람한테는 친절하게,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한테는 까다롭게 굴었다. 또한 쾌락에 탐닉해도 좋을 때는 마음껏 쾌락을 맛보지만, 절제가 필요할 때는 금욕자로 표변한다. 인색할 필요가 있을 때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랑곳없이 인색하게 굴고, 포상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면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아낌없이 상을 준다. 성실하게 대할 만하다고 판단된 사람에게는 더없이 성실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 사람에게는 불성실한 정도가 아니라 거짓말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용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사람은 인정사정 없이 몰아세우지만, 반대로 상대의 공적을 인정한 경우에는 더없이 온화하고 너그럽고 정중한 태도로 대한다.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하게 행동했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던' 게 아닐까. 다만 이런 하드리아누스적 '기준'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결정되면, 같은 인물도 때와 경우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것이 사람들을 혼란시켰고, 그 결과가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다'는 평가로 나타난 게 아닐까. 하드리아누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에피소드를 하나 더 소 '7하고 싶다. <황제열전>의 저자인 수에토니우스는 하드리아누스보다 여섯 살쯤 나이가 많고, 로마의 관저에 근무하는 관료였다. 소 플리니우스가 친구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소 플리니우스나 타키투스 등의 문인동아리에 속해 있었던 게 분명하고, 관료보다는 문필가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일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부터 도미티아누스 황제까지 12명을 다룬 <황제열전>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많은 독자를 얻고 있었다. 덧붙여 말하면, 하드리아누스 이후의 황제들을 대상으로 삼아 서기 300년경에 저술된 <황제실록>은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을 이어받아 그 속편으로 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무엇 때문인지 네르바와 트라야누스는 빠져 있지만.
어쨌거나 수에토니우스가 생전부터 단순한 일개 관료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는 주인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문 황궁에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황제열전>은 나중에 씌어진 <황제실록>과 비교해도 가십적인 색채가 더 짙은 작품이다. 그런 작품을 쓴 저자라면 남들보다 훨씬 가십에 관심이 많았을 테고, 역시 입방아를 좋아하기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 궁중 여인들한테 환영받는 타입이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이 수에토니우스를 해임하여 황궁에서 쫓아냈다. 사비나 황후한테 버릇없이 굴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아내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런 아내한테 버릇없이 굴었다고 내쫓다니,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세상 사람들은 수에토니우스를 동정했다. 하지만 사랑하든 않든 사비나는 황제의 아내였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허물없이 대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반대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하드리아누스의 생각이었다. 하드리아누스처럼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다루기 어려운 존재다. 하드리아누스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늘이라도 쳐다보면서 '변덕스럽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았다'고 중얼거리고 체념할 수밖에 없다. 사비나 황후도 하드리아누스 곁에 계속 머물러 있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무의식적으로라도 깨닫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계속 옆에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도 하드리아누스 가까이에 줄곧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었다.
미소년 안티노
황후에 대한 배려라기보다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하드리아누스는 나일 강 유람을 떠난다. 나일 강 유람은 이집트를 방문하는 로마황제에게는 상례처럼 되어 있는 행사였다. 이집트는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이따금 배에서 내려 강변에 서 있는 신전을 방문하면 보아야 할 것을 전부 볼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나일 강 유람은 곧 명승고적 관광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부인들이 동행한다. 하드리아누스의 순행은 대개 몇 명의 수행원만 거느린 금욕적인 여행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여행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화려한 어용선이 알렉산드리아에서 300킬로미터 이상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 사고가 일어났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상대로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안티노가 나일 강에서 익사한 것이다. 역사가들은 하나같이 그 소식을 들은 하드리아누스가 아녀자처럼 울었고, 아무도 황제를 위로할 수 없었다고 전한다. 정말 실수로 강물에 빠져 죽었을까. 하지만 로마인들 사이에는 뜻밖에도 수영이 유행했고,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실수로 배에서 떨어진 안티노를 나일 강의 주인이라고까지 일컫는 악어가 공격했고, 변고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안티노를 건져냈을 때는 이미 악어한테 물려죽은 뒤였을까. 지금은 사라진 하드리아누스의 자필 회고록을 믿는다면, 안티노는 점술가가 예언한 하드리아누스의 죽음을 예방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일까. 그렇다면 스스로 택한 죽음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큼 지고한 사랑은 없다. 로마 사회에서는 소년에 대한 사랑이 소크라테스 시대의 아테네처럼 당당한 시민권을 얻지는 못했다. 로마의 유력자들 사이에서 아름다운청소년에 대한 사랑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은 아니었지만, 드러내놓고 공공연히 해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로마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안티노에 대한 하드리아누스의 공공연한 사랑에 차가운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로마 역사가들의 기술이 이 사건과는 거리를 두고 싶은 것처럼 냉담한 것도 저간의 사정을 보여준다. 안티노의 변사에 대한 황후의 반응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이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황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쾌하게 나일 강 유람을 계속했다니까, 안티노의 죽음을 일개 하인의 죽음 정도로 처리하고 하드리아누스를 동정조차 하지 않은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하드리아누스는 안티노가 황제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소문을 퍼뜨리려 했지만, 황후는 『황제실록』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그 말을 믿지 않았던 게 아닐까. 사고사일 가능성도 별로 없고 희생적인 죽음도 아니었다면, 안티노는 왜 자살했을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초상 조각으로 미루어보아, 안티노는 서기 131년에 죽었을 때 20대 초반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소년과 하드리아누스가 언제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드리아누스가 소년의 출생지인 비티니아를 찾은 서기 124년으로 가정하면 안티노는 당시 15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후 무려 7년 동안 이 소년을 측근에 두었다. 안티노의 초상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지성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용모는 완벽하고 게다가 관능적이지만, 지성을 엿보게 해주는 것은 그림자도 없다 무심코 볼을 만져보고 싶어질 만큼 풋풋한 소녀가 소년으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지성이 넘쳐흐르는 하드리아누스의 얼굴과 비교해보면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에 서로 융화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융화를 계속유지하기가 무척 어려운 남자이기도 했다. 후세의 연구자들 중에는,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들어 용모가 쇠퇴하는 것을 느낀 안티노가 그 때문에 하드리아누스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보통 청년이라면 20세 무렵은 응모가 쇠퇴하기는커녕 날로 아름다워질 나이지만, 소년애의 대상이 된 사람은 그 나이를 고비로 내리막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걸음 더 파고들어, 안티노를 남자가 아니라 여자로 생각하고 그의 심경에 다가가 보면 어떨까.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한 최선책은 남자 곁에 계속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낭자 곁을 떠나는 것이다. 따라갈 수도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버리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옆에서 보면 기분이 변덕스러운 남자였다. 불쾌감을 드러낼 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친절할 때도 왜 친절한지, 그 이유까지는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같은 비티니아 태생의 그리스인이라도 아리아누스는 안티노와 달랐다. 전선을 담당한 사령관이자 문인이기도 한 아리아누스와는 하드리아누스도 그리스 문화에서부터 로마군의 방위체제까지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많았다. 황제는 이 젊은 부하를 각별히 사랑했지만, 그들의 사랑은 지성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황제와 미소년 사이에는 그것이 없었다. 시를 쓰고 리라를 타고, 그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고 여겨질 만큼 완벽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하드리아누스의 마음을 붙잡아둘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의 미소년도 이제는 나이로나 육체적으로 성숙한 어른이 될 수밖에 없는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안티노는 하드리아누스의 사랑을 영원히 잡아두기 위해 죽음을 택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소원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안티노를 잃은 하드리아누스는 아녀자처럼 엉엉 울어서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었다지만, 그것만이 아7다 적어도 비탄에만 잠겨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죽은 안티노를 신격화했다. 이집트에는 나일 강에 사는 악어한테 잡아먹힌 사람은 신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으니까, 사람들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다. 이어서 황제는 사고가 일어난 곳의 건너편 강가에 '안티노폴리스'(안티노의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이 도시에 그리스계 이집트인을 대거 이주시켰다. 사람들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풍 도시로 세워진 안티노폴리스로 기꺼이 이주했기 때문에, 강제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또한 나일 강 연안의 이 도시에서 사막을 가로질러 수에즈 만까지 로마식 가도를 개설했다. 이 가도는 수에즈만을 따라 홍해까지 연장되었기 때문에, 안티노폴리스는 그 후 동방에서 들어오는 물산을 홍해에서 나일 강으로 운반하고, 나일 강을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운반하는 중계지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아녀자처럼 운 것치고는 너무나 하드리아누스적이고 제국의 최고통치자다운 냉철한 조치였다. 게다가 이 시기에 하드리아누스는 소년 시절부터 품었던 꿈까지 실현했다. 아라비아산 준마를 몰고 사자를 사냥하고 싶다는 꿈을 마침내 이룬 것이다 55세라는 나이에 도전하듯 체력을 과시했다 어쩌면 안티노가 하드리아누스에게 내려질 재앙을 막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생각을 누구보다도 하드리아누스 자신이 믿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안티노가 죽은 뒤, 하드리아누스는 여느 때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건설공사가 시작된 안티노폴리스를 떠났고, 황후 일행은 로마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가 된 황제는 우선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갔다가 거기서 소아시아를 북상하여 흑해로,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그리스의 아테네로 들어간다. 가는 길에 '하드리아노폴리스'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건설했다. 오늘날 터키의 세 번째 도시가 된 에디르네가 바로 하드리아노폴리스다. 에디르네라는 이름은 '하드리아누스'를 터키식으로 인은 것이다. 황제는 뛰어난 조각가를 쉽게 모을 수 있는 아테네에서 죽은 안티노의 초상 조각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기려고 결심한 것 같다 종교적인 느낌은 전혀 주지 않고, 그래서 고대의 관능 그 자체인데도, 긴 기독교 시대를 거치고도 이만큼 남 아 있으니까 원래는 엄청나게 많았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초상들을 그리스 동쪽의 로마 세계에는 곳곳에 뿌려놓았지만, 로마에는 사저인 빌라 아드리아나' 이외에는 어디에도 놓아두지 않은 듯하다 하물며 신이 된 안티노에 대한 신앙이 제국 서방에도 뿌리를 내리도록 애쓴 흔적은 전혀 없다. 아무리 애석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해도, 역시 이런 면에서 로마인의 심정에 대한 배려는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를 덮친 불행은 사랑한 젊은이의 죽음만이 아니었다. 그 직후 유대가 드디어 불을 뿜었다. 아테네에 머물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들은 하드리아누스는 겨울철에 접어들었는데도 당장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 정확한 정보를 모아 그것을 토대로 직접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서였다.
유대 반란
하드리아누스가 할례를 금지하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를 건설한 것은 유대교도에 대한 의도적인 도발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아무래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할례는, 다른 민족이 어떻게 생각하든 유대교도에게는 자신들의 존재 증명이었다. 이것을 금지하는 행위는 패자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온 로마의 방침에 어긋난다. 로마가 유대인과 직접 관계를 갖게 된 지 200년, 공화정 말기의 최고권력자나 제정 시대의 황제들 가운데 할례를 금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로는 유대교도의 특수성을 인정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하물며 유대교도가 성도로 여기는 예루살렘에서 엎드리면 코닿을 곳에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라는 이름만으로도 로마 도시임이 분명한 군단 도시를 건설한다는 건 아무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제위에 오른 뒤 줄곧 깊은 통찰력을 보여온 하드리아누스가 유대의 이런 특수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실제로 이 유대 문제가 '디아스포라' (이산)로 해결된 뒤, 하드리아누스는 할례 금지령을 해제하지는 않았지만 엄격한 실시까지는 요구하지 않았고, 묵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내버려두었다. 그의 참뜻은 할례를 영원히 금지하는 데 있지 않았다. 200년 동안 이따금 충돌은 있었지만, 로마는 유대교도에 대해 거의 일관되게 관용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명확한 조건이 하나 있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신교인 로마 세계에서 일신교를 믿는 것도 인정하고, 할례 관습도 인정하고, 일신교도라는 이유로 제국의 공무나 군무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는 등의 생활 습관도 모두 인정하되, 제국의 통치에 반항하는 언동만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이곳에 아라비아 속주(오늘날의 요르단)를 새로 추가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이고, 그것을 계승하여 흑해에서 홍해까지의 동방 방위선을 확립한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였다. 유대는 이 아라비아 속주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유대 땅이 로마의 지배 밑에서 안정되는 것은 제국의 방위 전략면에서도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제8권에서도 말했듯이 '보편' 제국 안에서 스스로 '특수'를 선택한 유대교도의 거주지역이 흑해 북쪽이나 어디 다른 곳이었다면 로마인도 문제삼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일대는 북쪽은 시리아 속주, 동쪽은 아라비아 속주, 남쪽과 서쪽은 이집트 속주에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게다가 유대교도는 결코 얌전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유대교도가 신정국가 건설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로마에 반항한 것은 아니다. 크든 작든 어느 도시에건 유대인 집단촌이 있다고 할 만큼 그들의 이산 경향은 강했지만, 동방의 도시에 사는 유대인들은 같은 도시에 사는 그리스계 주민과는 이따금 충돌해도 로마 제국과의 공생은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면에 유대 본국에 사는 유대인에게는 유대교도로서의 순수성이 더 강하게 남아있었다. 다른 문명과의 접촉이 적을수록 순수성을 유지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문인지 로마에 반항하는 움직임은 유대 본국, 그 중에서도 유대의 중심인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게 보통이었다. 서기 131년 가을에 일어난 유대 반란에는 지도작 두 명 있었다. 바르 코크바(Bar Kokhba)와 라비 아키바(Rabbi Akiba)가 그들이다. 코크바는 구세주를 자처하며 반란을 선동했고, 유대교회 사제인 아키바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성전이라고 주장하여 종교면에서 코크바를 지원했다. 바르 코크바는 히브리어로 '별의 아들'을 의미했기 때문에 구세주를 자칭했지만, 라비 아키바는 그 말을 받아 이렇게 절규한다. "바르 코크바야말로 유대의 왕이고 구세주다!" 유대 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 사회에서 되풀이되는 현상이지만, 과격파가 세력을 갖기 시작하면 온건파는 자취를 감춘다. 예루살렘 안에도 적지 않았던 온건파지만, 이제는 과격파로 기울거나 연고를 찾아 국외로 떠나서 순식간에 세력을 잃어버렸다. 또한 서기 131년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로마 병력은 분견대 정도였던 모양이다 유대에 주둔해 있는 2개 군단 가운데 1개는 북부의 갈릴리 지방에 있고,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기지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제10군단은 일부만 남쪽에 있고 대부분은 카이사레아에 있었다. 예루살렘이 바르코크바가 이끄는 과격파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은 간단했다. 이 급박한 소식이 아테네에 있던 하드리아누스에게 전해진 것은 이 무렵이었던 모양이다.
이듬해인 서기 132년 벽두에, 예루살렘을 장악한 코크바는 은화와 동전을 주조한다. 화폐 발행은 독립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통화의 앞면에는 '예루살렘' , 뒷면에는 '이스라엘 해방 제1년'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스라엘 해방 제2년'이라고 새겨진 동전까지는 발굴되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안에서도 로마의 화폐가 많이 유통되고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바뀌어도 발행 당시의 황제 얼굴을 새긴 화폐는 그대로 통용되었으니까, 이 무렵 예루살렘에서 유통되고 있던 화폐는 베스파시아누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발행한 화폐였다. 코크바는 이 통화들을 수거했지만, 녹여서 새 화폐로 주조하는 것은 생각지 않고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면을 망치로 두드려 짓뭉개기만 하고 다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치밀한 계획도 없고 자금도 부족하고 병력을 충원할 전망도 없이 시작한 반란이었지만, 초기에는 분명 성공을 거두었다. 해외 거주지에서도 지원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기도. 무기를 조달하는 방법은 왜 교묘했다. 로마 군단기지는 현지의 무기제조업자와 구매 계약을 맺는다. 유대인 업자들은 그 계약에 따라 제작한 무기를 기지에 반입하는데, 제조 단계에서 일부러 불량품을 만들었다. 로마군은 불량품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하드리아누스가 시찰한 뒤에는 사소한 결함도 눈감아주지 않고 퇴짜를 놓았다. 제조업자들은 로마군이 구입하지 않은 불량품을 코크바에게 빼돌렸다.
유대 상인들은 로마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데에도 활약했다. 포도주 구매 계약을 맺은 상인은 독을 섞은 포도주를 군단기지에 팔았다. 죽지는 않았지만, 앓아 누운 병사들이 많았다. 이렇게 상인들까지 협력한 결과, 유대-팔레스타인 일대의 로마군에 대한 보급은 완전히 끊겨버렸다. 게다가 때마침 지진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붕괴를 목격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는 하드리아누스가 반격을 위한 전략을 짜고 있었다. 우선 유대에 주둔해 있는 제6군단과 제10군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2개 군단이면 통상적으로는 1만 2천 명인데, 앓아 누운 병사가 많고 결원이 보충되지 않아서 1만 명 정도밖에 동원할 수 없었다. 보조부대의 기병 2개 대대와 보병 4개 대대를 합해도 1만 4천 명 정도였다. 이들의 지휘는 유대 속주총독인 루푸스에게 맡긴다. 북쪽의 시리아 속주에서는 유대와 가까운 라파네아이(오늘날 시리아의 샤마)에 주둔해 있는 제3군단에 출동 명령이 내렸다. 이 군단의 지휘는 특별히 시리아 속주 총독 마르켈루스가 맡기로 했다. 동쪽의 요르단에서는 아라비아 속주에 주둔해 있는 제3군단에 출동명령이 내렸다. 이 군단에는 보조병으로 베두인족 2개 대대가 추가되었다. 남서쪽의 이집트에서도 1개 군단이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 편성된 보조병 1개 대대가 추가되었다. 그밖에 라인 강과 다키아 속주, 도나우강 전선에도 대대 규모로 소집 명령이 내린다. 이때도 로마군은 여느 때처럼 로마인과 갈리아인, 에스파냐인, 트라키아인, 그리스인, 갈라티아인, 아랍인,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의 혼성군이었다 총병력은 4만 정도였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 진압군의 총지휘를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인 율리우스 세베루스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동 명령은 이미 내려져 있었으니까, 하드리아누스는 처음부턴 세베루스를 총사령관으로 점찍어놓았던 게 분명하다. 지난번 유대 반란 때 네로 황제가 브리타니아제패로 이름을 날린 베스파시아누스를 총사령관에 발탁한 일을 본받은 것이다. 로마군에서의 지위는 시리아 속주 총독인 마르켈루스가 훨씬 높았다. 세베루스를 발탁한 이유도 네로 때와 똑같았다. 게릴라 전술에 맞서서 훌륭한 공을 세웠다는 게 이유였다. 비가 많은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의 산야와 건조한 유대의 사막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스코틀랜드의 숲은 사막에 많은 바위 동굴과 마찬가지고, 숲속을 뚫고 들어가는 길은 현지 주민밖에 모르듯이, 사막동굴 깊숙한 곳에서 다른 동굴로 통해 있는 길은 외지인에게는 미로나 마찬가지다. 칼레도니아도 팔레스타인도 평원에 진을 치고 싸우는 회전 방식이 쓸모 없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제국의 북서쪽 끝에서 남동쪽 끝까지 먼 길을 달려와야 하는 세베루스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전선 사령부도 안티오키아에서 카이사레아로 이동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카이사레아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물게 된다 그리고 선제 트라야누스가 벌인 전쟁에 모두 참가했던 다마스쿠스 태생의 건축가 아폴로도로스도 이제는 늙은 모습으로 전선 사령부에 나타났다. 예루살렘 공략전에 사용할 병기의 개량을 하드리아누스가 의뢰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단계에서 하드리아누스의 머리에는 이미 전쟁을 끝낼 전망이 서 있었던 것이다. 이번의 유대 반란도 서기70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함락으로 끝나리라는 것을 그는 분명히 내다보고 있었다.
유대 북부의 갈릴리 지방은 간단히 제압되었다. 유대 중부로 진격한 세베루스는 전군을 대대 단위의 소부대로 나누어 반격하는 융단폭격식전술로 전략을 바꾼다. 이 전략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성공은 확실했다. 로마군의 본격적인 반격은 아무리 빨라도 132년 여름 이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유대 전쟁은 이듬해인 133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유대 반란에서는 늘상 일어나는 현상이 이때도 일어났다. 교조주의자들의 과격성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은 숙명이라 해도 좋다 순수하려고 노력할수록 약간의 불순조차 용납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바르 코크바가 용납하지 않은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금지령을 받아들인 결과든 아니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코크바는 할례를 하지 않은 남자의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했다. 할례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조건이 된 것이다. 이를 어긴 사람은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유대인 중의 온건파는 머리에 물을 뒤집어쓰는 세례로 할례를 대신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구세주를 자칭하는 코크바도, 그를 지지하는 아키바도 이 세례를 거부했다.
할례를 세례로 대신한 유대인은 대부분 기독교도였다. 이리하여 정통을 자처하는 유대교도의 기독교도 탄압이 시작되었다. 기독교도는 코크바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유일한 구세주는 예수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도 있어서, 코크바와 그 추종자들의 기독교도 탄압은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로 점점 과격해졌다.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을 때 이미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같은 유대인인데도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절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데 132년부터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는 서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적대감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감정은 20세기까지 계속된, 아니 어쩌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비극적인 적개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서기 134년 초, 느리지만 착실히 그물을 끌어당기는 느낌으로 진행되던 유대 전쟁도 예루살렘 함락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예루살렘은64년 전과 똑같이 불타고 철저히 파괴되었다. 실제로 양쪽이 맞부딪쳐 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치면 2년 만에 끝난 이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틀어박혀 있던 요새 50개는 모두 파괴되고, 985개나 되는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50만이나 되는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포로는 가축과 같은 값이나 그보다 헐값에 노예로 팔렸다. 그래도 팔리지 않고 남은 포로들은 과자로 보내져, 그들이 파괴한 도시의 복구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그래도 저항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베틸이 제2의 '마사다' (사해 서해안의 언덕 요새. 서기73년, 900여 명의 광신적 유대교도가 이곳에 틀어박혀 로마에 저항하다가 전원 자결했다)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도 136년에는 전멸한다. 바르 코크바는 전사하고, 포로가 된 라비 아키바는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마사다에서도 그랬듯이 베틸에서의 마지막 저항도 이제 로마인에게는 문제삼을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134년 초의 예루살렘함락으로 유대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원로원 앞으로 전쟁 종결을 알리는 친서를 보냈다. 다만 승전보치고는 기운이 없다. "그대들과 그대의 아들들이 건재한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나도, 내 병사들도 양호한 상태에 있음을 보고한다." 로마 쪽도 희생이 컸던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연구자가 적지 않지만, 그것을 실증할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대 쪽 사료도 바르코크바를 유대의 영웅으로 칭송하고, 베틸 항전의 마지막 불꽃이 꺼진 서기 136년 9월 26일이 공교롭게도 서기 70년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과 같은 날이었던 것이 유대 민족의 비극을 숙명 짓고 있다고 한탄하고, 독이 든 포도주로 로마 병사가 많이 쓰러진 사실은 기록하고있지만, 로마 쪽의 손실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내 상상으로는 하드리아누스도 역시 지친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나이도 벌써 58세였다. 그것도 2년 반 동안이나 시찰도 순행도 떠나지 못하고 전선 사령부에 못 박혀 있는 동안 58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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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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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관서 지방 사투리에 관하여
나는 관서에서 태어나 관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교토의 스님 자식이고, 어머니는 센바(오오사카시의 한 지역)의 장삿집 딸이니까, 백 퍼센트 관서 토박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만 관서 지방 사투리를 쓰며 살이 왔다. 그 이외의 언어는 말하자면 이단이고, 표준어를 구사하는 인간 중에는 쓸만한 인간이 없다는 몹시 내쇼널리스틱한 교육을 받았다. 투수하면 무라야마, 식사는 슴슴하게, 대학하면 교토 대학, 장어 요리하면 장어밥의 세계이다. 그러나 와세다에 들어가게 되어(와세다 대학이 어떤 대학인지도 거의 몰랐다. 그렇게 지저분한 곳인 줄 알았다면 아마 안갔을 거다) 선뜻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동경에 올라왔는데, 동경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어찌 된 영문인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일주일 사이에 거의 완전하게 표준어 - 즉 동경 사투리 - 로 바뀌어 버렸다는 점이다. 나는 그런 말은 지금까지 써 본 적도 없고, 특별히 바꿔야겠다는 의식도 없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그렇게 바뀌어 버렸다는 걸 문득 깨달은 것이다. 문득 깨닫고 보니 '그런 핑계를 늘어놔 봤자, 그거야 알 수 없지'하는 꼴이 돼 있었던 것이다. 같은 시기에 동경으로 올라온 관서의 친구들로부터 '너 말야, 그 말투, 관서 사투리 잊지 말고 써야 될 거 아니야. 엉터리 같은 말 쓰지 말라구'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미 바뀌고 만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나는 언어는 공기와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토지에나 그곳만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언어가 있어, 그것을 거역하기란 웬만해서는 불가능하다. 먼저 액센트가 바뀌고, 그러고는 어휘가 바뀐다. 이 순서가 반대가 되면, 언어는 쉽사리 마스터 할 수 없다. 어휘란 이성적인 것이고, 액센트는 감성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즉 나는 관서로 돌아가면 역시 관서 지방 사투리를 쓴다. 신칸선 코베역에 내리면 첫 마디가 벌써 관서 사투리로 돌아와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거꾸로 표준어가 입에서 안 나온다. 친구의 견해에 의하면 '너 관서 사투리 어째 좀 이상한 거 아니야'인 모양이지만, 지금 막 도착했으니 별 수 없다. 일주일 정도 있으면 완벽한 관서 사투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다. 내 마누라는 삼 대째 계속되는 야마노테선 내족(이라고 한다)(야마노테션 전철은 동경의 중심부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순환선이다. 그 안쪽에서 줄곧 살았다 함은 즉 동경 토박이를 말한다.)인데, 그녀도 얼마간 관서에 가 있으면 곧바로 관서 사투리에 물들어서는, '죄송하지만, 여기 가려면 어떻게 가면 되죠?'를 관서 사투리로 사람들에게 묻곤 한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가지고 뭐라 얘기할 수는 없지만, 곁에서 보고 있으면 놀랍다. 언젠가 함께 이치가와 콘감독(1915 - , 미에현 태생, 영화감독)의 <싸락눈(타니자키 쥰이치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 오오사카의 센바가 작품의 무대이다.)> 보고 난 다음 액센트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 한참을 애먹었다.
관서 지방을 무대로 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배우 중에도 사투리 습득에 능란한 사람과 서투른 사람이 있어 제법 흥미롭다. 능란한 사람은 공기처럼 사뿐 인토네이션을 체득하고, 서투른 사람은 지나치게 어휘에 의존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천부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싸락눈>은 언어상으로 그럭저럭 합격이고, <도톤보리강(미야모토 테루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것, 역시 오오사카를 무대로 한 작품.)>은 한심했다. 옛날 영화로는 <부부 좋을씨고(1955년작. 도요다시로 감독에 의한 토호 영화사의 영화, 우유부단한 남자 주인공이 강직한 애인의 보호 아래 어리광을 피우며 살아간다는 내용이다.)>라는 훌륭한 관서 사투리 영화가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런 차이는 그 지방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도치기 사람들은 <원뢰(1981년작. 도치기현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택지 개발로 급격히 변화하는 도시 근교 농촌의 희비극을 그린 영화이다. 네기시 기치다로 감독 작품)>를 보고, 저런 건 도치기 사투리가 아니야 라고 말하는데, 나는 왜 그런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외국어를 습득한다는 것도, 대충 이런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암만 영어 회화 공부를 해도, 실제로 외국에 가 보면 언어란 그런 인위적인 습득과는 상당히 다른 위상으로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번역 같은 것도 하니까 영어를 읽고 이해하는 데는 부자유스럽지 않지만 회화가 서툴러, 작년에 처음으로 미국 여행을 하기까지 거의 한마디도 영어를 주절거린일이 없다. 학교의 ESS나 영어 회화교실 같은 곳에서 모두들 영어로 토론을 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 한기가 들어 - 이것은 물론 편견입니다, 죄송 - 도무지 영어 회화를 해 볼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한 일주일 정도 있으면 익숙해지겠지 하고 가 봤더니, 거기에는 역시 그곳만의 공기 같은 게 있어 별다른 불편 없이 한 달 반을 지내며, 많은 작가들과 인터뷰까지 했다. 이런 것은 역시 순응력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일본에 돌아오면, 또 다시 영어로는 얘기하기 어려워진다. 관서 사투리 얘기로 되돌아가서, 나는 관서 지방에서는 아무래도 소설을 쓰기 힘들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관서에 있으면 결국 관서 사투리로 사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관서 사투리속에는 관서 사투리 특유의 사고 시스템이 있어, 그 시스템 속에 갇히고 나면, 동경에서 쓰는 문장과는 전혀 문장의 뉘앙스나 리듬, 발상이 달라지고, 심하면 내가 쓰는 소설의 스타일까지도 싹 바뀌는 것이다. 내가 줄곧 관서 지방에 살면서 소설을 썼다면, 지금과는 꽤 다른 분위기의 소설을 썼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면 좀 괴롭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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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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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20장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 니콜로 마키아벨리(2/2)
마키아벨리가 온다는 것, 그리고 그가 오는 이유에 대해서, 귀차르디니는 이미 로마의 교황궁에 심어둔 자신의 측근 체사체 콜롬보를 통해 듣고 있었다. 그는 6월 18일 자로 쓴 그에 대한 답장에서, 즉시 그의 영민하고도 실제적인 마음에 맨 처음 떠오른 의문을 써 보냈다. (나를 대신하여 교황이 어떤 목적으로 이를 계획했는지를 물어보라. 만약 그것이 당면한 위험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조치는 도저히 제때 시행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멀리 보고 있었고 귀차르디니는 가까운 것을 보고 있었다. 교황은 항상 그랬듯이 목표를 단기적인 데 둘 것인지 장기적인 데 둘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사전 귀뜀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엔차에 도착하였다. 그는 새로운 열정으로 충만된 책 6월 10일이나 11일에 로마를 떠났던 것 같다.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좀더 올려 받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기다려보지도 않은 상태에서였다. 21일 귀차르디니는 그의 측근에게 교황의 사절이 왔으며 그의 임무를 들었다고 썼다. 이 첫 편지에서 그는 적어도 그러한 계획에 담긴 위대하고도 고귀한 정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성하께서 할 수 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쓸모 있고 칭송할 만한 업적이 될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효과를 논하는 데 이르자, 그는 자신의 용의주도하고 냉혹한 실제론에 입각하여 친구의 고결한 이상론을 서둘러 격하시켰다. 그는 그 조치가 성공할 경우 뒤따를 이익은 (그것이 명약관화하다는 이유로) 뒤로 제쳐두고, 또 비록 이 사람들의 품성이 자기들과는 다르다 해도, 자신에게는 (사람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별로 어렵지도 않을뿐더러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도 없음)을 미리 전제한 뒤, 그는 이 조치가 합당치 않은 이유를 하나하나 열거하였다. 그 지방을 분열시키는 뿌리깊은 사적, 정치적 반목, 사람들의 애국심을 전제하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안과는 달리 교회를 달가워하지 않는 그곳 사람들의 성향, 교황의 복안과는 달리 빈한한 마을들에서 끌어모으기가 쉽지 않을 관련 비용 등등. 그는 이러한 난점들을 제시하는 것은 반드시 교황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만일 이 같은 것이 충분히 감안된 다음이라면, 그것을 무시하든 또는 그에 대처하든 간에 (성하께서 한때 당신의 영광과 위해함을 드높이리라 생각하셨던 그 계획에 합당하도록 모든 성심 성의를 아끼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교황에게 보일 목적으로 귀차르디니가 그의 측근에게 쓴 6월 23일자 편지에도 같은 이유들이 그리 다르지 않은 말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가 따로 보낸 훈령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최대한 면밀하게 교황의 언행을 관찰하여 나에게 그 모든 것을 알려주기 바라네.) 그는 물론 숌버그와 살비아티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원했을 것이다. 다음날, 마키아벨리는 사돌레토에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새로운 편지 한 통을 써 보냈고(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이 역시 교황에게 전해졌다. 그의 편지는 문제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베르니의 유명한 소네트에서 희화화된 바 있는 클레멘테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망설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파엔차에서는 귀차르디니아 마키아벨리가 서로 상반되는 이유로 고민하며 교황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어느 정도까지 이 친구의 실제적인 논변에 설복당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이 사안은 물론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그 소심한 교황을 자신의 반대편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미 불운과 오해에 익숙해져 있던 그는 총독 친구와의 토론과 함께, 그가 제공하는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에서 위안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가운데서도 멀리 두고 온 가족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은행에 예금하라고 얼마간의 돈을 보내려 했던 것이다. 이 돈은 그 당시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받았던 것 중 상당 부분에 해당되는 액수였다. 즉 바로 (피렌체사)의 저술에서 장차 딸 바치나의 결혼 지참금으로 쓰일 돈이 나왔던 것이다. 아니 언젠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7월 8일, 교황은 여전히 숙고의 결과를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귀차르디니는 측근으로하여금 그에게 자신들이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아무런 하명도 없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므로, 부디 사돌레토에게 빨리 명을 전하도록 재촉해 주십사)고 (마키아벨리의 안에 대한 결정)을 재차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사돌레토는 이미 6일자로 마키아벨리에게 그와 귀차르디니의 편지를 교황에게 전했다는 소식을 알려온 바 있다. 이쨌든 교황의 답은 (좀더 생각해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다른 날을 잡아 다시금 문의하였으나, 답은 여전히 더 생각해야겠으니 마키아벨리는 당분간 파엔차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사실 그 달 26일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으나, 기다릴 만큼은 기다렸다는 생각이 든 데다가 (자신의 일도 보아야 했으므로)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래서 귀차르디니는 콜롬보에게 편지를 보내, 이 사실을 교황에게 알리고, 덧붙여서 (성하의 명이 있을 시엔 언제라도 그곳으로 달려갈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점을 주지케 하라고 지시하였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이미 교황 자신보다 앞서 그의 결정, 아니 그의 끝없는 망설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전기 작가라면 누구나 그가 새로운 실망감으로 크게 가슴 아파했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마음속으로 아픔을 느꼈을 법하지마나 그러한 심정을 전하는 말은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있다. 게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가 실제적 성향의 귀차르디니에 의해 제기된 구체적 반론들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귀차르디니는 그러한 계획이 훌륭한 것이라는 점은 부인치 않았으나, 다만 그것이 바로 그 시점에 교회령 국가의 사람들, 특히 그 지방의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데서는 반대의 뜻을 나타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아마도 이 점에서 다소나마 위안을 얻었으리라.
비록 실망하기는 했어도, 그는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귀차르디니가 그에게 베풀어준 친절과 환대가 아니다. 그는 전지 작가들의 말과는 달리 마키아벨리를 결코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사실, 총독 관저의 한 지붕 아래 같이 머물렀을 파엔차에서의 이렇게 오랜 체류 기간 동안, 두 사람은 더욱 다정하고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총독은 자신의 거만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 편지에서 친구가 그를 (고명한)이라는 경칭을 붙여 부른 데 대해 그만두지 않으면 자신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겠다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한 (품위있는 궁인)이 그에게 보여준 다른 종류의 환대인 것이다. 7월 2일, 귀차르디니는 마키아벨리에게 쓴 편지에서 익살 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네가 떠난 후, 마리스코타가 자네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면서 자네의 예법과 언변을 격찬했지 뭔가. 나 역시 자네에게 항상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터라 듣기가 좋았다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독같은 어조로 8월 3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내가 마리스코타로부터 얼마나 찬사를 받았는지를 전해 준 자네의 편지를 받고 보니,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내가 받아왔던 어떤 칭찬보다도 더 기쁘다네.)
이제 이 두 명의 위대한 정치가는 서로 더 자주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파엔차 체류 동안 친구에게 약속하기를, 그가 직접 둘러보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대리인의 자격으로 사놓았던 부동산 한 건과 앞으로 살까 계획하고 있는 다른 한 건을 둘러보고 그 결과를 알려주기로 한 바 있었다. 그는 8월 3일자로 현지를 찾아본 소감을 적어보냈는데, 여기에는 그가 산 카쉬아노의 시골에서 생활한 덕을 보았다는 것이 잘 드러나 있다. (피노키에토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얘기하겠네(여기서 'Finocchieto'란 회향풀이나 그 열매를 뜻하는 'fnocchio'에다 축소형 어미를 단 것으로, '피노키에토로 시작한다'는 말은 당시 식사 끝에 관습적으로 붙이는 어구였다. 또한 피노키오란 말에는 남색가라는 속어적 듯도 들어 있으므로,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뉘앙스들을 버무려 귀차르디니에게 농담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옮긴이). 무엇보다 먼저 얘기하고 싶은 점은 부근 3밀리오 안에는 무언가 괜찮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일세. 한마디로 흡사 바위투성이의 아라비아 Arabia Petreia(요즘으로 보면 아카바 북쪽, 요르단 남서부의 험준한 지역. 그 중심지가 페트라 Petra이기 때문에 'Petreia'란 형용사형이 스이고 있다-옮긴이)와 같다고나 할까. 집은 나쁘다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생활에 불편하게 보여서 결코 좋다고도 하기 힘드네. 방이 비좁은 데다 창문은 너무 높다랗게 붙어 있어서, 마치 지하 감옥 같은 느낌이네. 앞쪽에는 풀밭이랄까 하는 것이 약간 있더군. 나가는 길은 모두가 가파른데, 단지 한군대만이 100브라초('braccio'란 토스카나 지방에서 쓰던 넓이의 단위로, 1브라초는 약 0.3364평방미터이다-옮긴이) 가량 평지를 이루고 있을 뿐이라네. 게다가 언덕배기 아래에 묻혀 있어서 기것해야 시야가 반 밀리오나 된까...) 그는 귀차르디니에게 이 당을 파는 편이 낫기는 하겠지만, 그것을 팔든 그대로 가지고 있든 당분간은 이것저것 주변 시설들을 정비해 두는 편이 좋겠다고 조언하였다. (이렇게 주변 시설을 정비해 두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 어느쪽으로든 유익할 듯 싶네. 첫째, 만일 자네가 그것을 판다고 했을 때, 그곳을 둘러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아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 흥정을 붙일 수 있을 것일세. 지금 상태로는... 자네처럼 물건을 보지 않았던 사람 같으면 모를까 누구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네. 설사 자네가 그것을 그냥 가지고 있겠다고 해도, 그렇게 정비를 해둠으로써 이곳의 질 좋은 포도주를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을 것이고, 자네가 언젠가 이곳에 오더라도 실망해서 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이러한 이야기 속에는 귀차르디니의 무뚝뚝한 마음을 자극하고 질러대는 익살 기가 다분히 묻어 있다. 이에 대해 귀차르디니 역시 피노키에토의 집 스스로가 일인칭으로 말하도록 하는 익살 조의 훈계담으로 답하였다. 그 집 아니 그곳 시골의 요정은 마키아벨리의 심술에 찬 평가를 평소 누구에게나 잘 보이려 하는 쉬운 여자와 어울리곤 하는 그의 습관 탓으로 돌렸다. 오직 자신의 주인만을 섬기고자 하는 정숙한 여인의 무덤덤함을 그는 높이 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외양에 머물지 말고 그 본질을 찾았어야만 했다. 귀차르디니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자네의 바르바라가 자네에게 깨닫게 해 주었어야 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비록 그 이름은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뜻하지만(이탈리아어로 '바르바라 barbara'란 야만적이라는 뜻. 여기서 그녀의 이름을 본래의 바르베라가 아닌 바르바라로 바꾸어 부른 것도 이런 의도에서이다-옮긴이), 자네의 말대로라면 그녀의 안에는 온 도시를 감싸안을 만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라네.)
바르베라. 바로 여기에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망각과 교황의 미적거림과 계속해서 마키아벨리의 인생사를 넘보는 희생과 치욕을 잊어버리는 길이 있었다. 바르베라와 그 사이의 쓴 사랑 이야기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도시에서의 단순한 심심풀이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한 이야기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같은 달 8월에 배당관 accopiatore(르네상스가 피렌체의 관직 선출 과정에서 관직 보유의 자격자들을 각 관직으로 배당하여 정부를 구성하는 책임을 맡은 관리-옮긴이)들이 마침내 그의 피선거권을 되살려주었을 때(그렇다고 그가 더 이상 서기관 직에 머물지 않고 정무관이나 곤팔로니에레라도 되어서 정무궁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인가?), 필리포 데 네를리는 그 특유의 심술 섞인 어조로 그같이 좋은 일은 다름아닌 (바르베리아 Barberia(아프리카 북부 해안 지대를 가리키는 옛 이름. 역시 앞의 '바르바라' 경우처럼, 마키아벨리의 애인 이름을 슬쩍 바꾸어 그를 놀리기 위해 쓴 말-옮긴이)로부터) 온 호의의 결과라고 편지에서 그를 놀릴 정도였다.
어쨌든 이제 운명은 그에게 호의적인 듯이 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올리기 위해 감행했던 짧은 로마 여행 동안 뿌려놓았던 씨앗은 싹이 터서 곧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었다. 지난 7월말, 프란체스코 델 네로는 그에게 필리포 스트로치가 교황에게서 좋은 시식을 전해 들었다고 편지로 알려왔다.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학 당국자는 교황에게서 (마키아벨리에게 스투디오화로 100피오리노가 아니라 금화로 100두카토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학교 금화가 아닌 진짜 금화로 100피오리노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원래보다 곱절의 돈이었다. 뒤이어 8월 19일, 레반테 감독위원회는 한 베네치아인이 일단의 피렌체 상인들에게 가한 투르크식 덮어씌우기(원래 투르크인들이 오리엔트 지방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데서 나온 말-옮긴이) 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베네치아로 파견하였다. 이는 별 것 아닌 임무였으나, 그로서는 머리에서 곰팡내를 걷어내고 아울러 (다양한 세대의 사람들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는 또한 가는 길에 총독 친구에게 들러 그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보고(그가 귀차르디니에게 편지에서 썼던 것처럼), 더불어 당시 날로 절박해지고 있던 이탈리아의 정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한편 마키아벨리는 소화를 돕고 변을 잘 통하게 해준다는 유명한 환약의 처방전을 그에게 써 보냈는데, 이는 평소에 그로 하여금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혹은 그토록 잦았던 일신상의 쓰라린 일들을 삭이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렇게 해서 그는 베네치아로 갔고 일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베네치아 주재 교황 사절이나, 친구인 베토리가 만나보라고 한 루도비코카노사 주교 등과 함께 정치에 관해 얘기를 나우었다. 나는 그가 이외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말이 있긴 했지만, 설사 그랬다 해도 필리포 데 네를 리가 평소의 냉소적인 어투로 편지에서 섰듯이 이삼천 두카토씩이나 따지는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9월 16일, 그는 되돌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다. 오는 길에 그가 총독 친구와 같이 보낸 날은 불과 며칠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피렌체에 도착한 것은 그 달 말이었다. 돌아온 뒤에도 그는 계속해서 귀차르디니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에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만드라골라)이다. 지금은 유실되었지만 8월 12일자 편지에서 귀차르디니는 이 작품을 크게 칭찬하면서 그곳 파엔차에서 무대에 올리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했다. 앞서 마키아벨리는 그 희극의 대본 한 부를 그에게 증정했던(직접 혹은 우편으로) 것이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자네가 메쎄르 니차를 좋아한다니 기쁘구먼. 만약 이번 사육제 때에 그것을 상연하고 싶다면, 우리가 가서 도와줌세)라고 답하였다. 그 뒤 10월 13일, 귀차르디니는 재차 편지를 보내, 스스로 피렌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에게 작품 속의 몇몇 피렌체식 농담과 속담류의 뜻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새로 편지를 써서 이에 답하였는데, 이야말로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재치가 넘친다. (사실 난 이 써레 작업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마치 티모테오 신부처럼 수많은 책들을 훑어 보았다네. 결국 부르키엘로의 작품들 속에서 나에게 딱 어울리는 것을 찾아냈지. 그의 소네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네.
황제가 쳐들어올까 두려워
실패 냄비를 사절로 보냈지...
하지만 피에솔레의 써레도 뒤따라갔다네...
이 소네트는 나에게는 매우 불가사의하게 보이는데, 잘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풍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실패 냄비를 보냈지만 지금은 실패가 마카로니로 바뀌었다는 것뿐이지. 나에게는 이 점이야말로 시간은 돌고 돌아도 사람은 언제나 같은 존재임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이네. (...) 부르키엘로가 피에솔레의 써레를 들고 나온 것은 그것이 토스카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네. 티투스 리비우스의 두 번째 십년기에서 보듯이, 이 농기구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게 바로 피에솔레 사람들 아닌가 말이야. 어느 날 한 농부가 써레로 땅을 고르고 있었는데, 전에는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던 두꺼비 한 마리가 깜짝 놀라서 저게 뭔가 하고 지켜보고 있었지. 그렇데, 아 그 써레란 놈이 다가오더니 발톱으로 등을 두 번도 더 할퀴어대는 것 아니겠나. 써레가 지나간 후, 등을 심하게 긁힌 것을 안 두꺼비는 이렇게 외쳤다지. '다시는 돌아오지 마!' 이 외침 소리는 세월 따라 속담이 되어, 사람들은 누구인가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때면 '두꺼비가 써레에게 말하듯이'라고 한다네.)
우리는 여기서 익살 조의 박식(리비우스의 두 번째 십년기까지도!)과 학자연하는 희극적 색조와 교화의 대 황제 정책을 향한 풍자가 두드러짐을 본다. 마카로니란 사행 길에 이 훌륭한 서기장을 대동하지 못했던 살비아티 추기경을 뜻한다(마카로니(이탈리아어로는 마케로니 maccheroni)에는 바보, 멍청이란 뜻도 숨어 있다-옮긴이). 그는 이 사행에서 귀차르디니가 (이탈리아사)에서 말했듯이 (그는 자신의 주인보다 더 정력적이지도 확고하지도 못했다). 그의 주인이란 물론 교황 클레멘테였다. 마키아벨리의 편지들이 모두가 걸작품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이 마지막 편지들은 메쎄르 니차의 말을 빌리자면 갈수록 빛이 난다. 그는 10월 20일 직후에 슨 편지에서, 교황으로부터 귀차르디니의 딸들에게 줄 지참금을 더 많이 받아내는 방법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모로네(밀라노 공의 비서 지롤라모 모로네. 21장 첫부분 참조-옮긴이)는 포로로 잡혔고, 밀라노 공국은 빼앗기고 말았지. 그리고 그가 무력해졌으니 다른 무든 군주들도 그럴 것이고, 달리 무슨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네. '그저 하늘의 뜻일 뿐.' 알라냐에서 돌아오는 백합을 보네. 그리고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등등...
(이 시구가 비유하고 있는 것은 미남왕 필립(1268-1314)과 교황들 간에 일어났던 분쟁이다. 알라냐란 프랑스 사제들에 대한 왕권의 확대를 추구한 필립 왕과 불화를 빚었던 교황 보니파초 8세의 궁전이 있었던 로마 동남쪽의 아냐니를, 그리고 백합이란 프랑스를 말하며, 알라냐에서 돌아오는 백합(프랑스 왕가의 문장)이란 필립 왕의 사절이었던 길로메 드 노가레가 교황을 모욕하고 돌아온 사건을 비유하고 있다. 두 번재 줄의 구절을 완성하면,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본문의 바로 다음을 볼 것)인데, 이는 단테의 (신곡) (연옥편), XX, vv. 86-87에 나오는 구절을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 여기서 그는 위그 카페의 입을 빌려 자신의 후손들을 꾸짖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지적 맥락을 감안할 때, 결국 마키아벨리는 이 시를 통해, 이탈리아가 설사 프랑스의 편에 선다고 해도 스스로를 위협하는 신성로마 황제 칼 5세의 세력을 제어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옮긴이)
'이 시구는 자네도 알겠지. 나머지는 혼자 스스로 읽어보게나.' 우리 한번 즐거운 사육제를 보내자구. 바르베라에게는 방 하나를 주어 탁발승들과 지내도록 하겠네. 만약 그들이 그녀에게 빠지지 않는다면 돈을 받지 않겠어. 마리스코타에게 날 천거해서 연극이 어디서 상연될 것인지 알게 해주게나. 자네에게 좋은 때가 언제쯤인지도. (피렌체사)에 대한 보수를 100두카토까지 올려 받았다네. 이제 다시 글쓰기가 시작되었고, 난 우리를 이 자리로 오게 하려고 최선을 다한 군주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중이라네.) (그저 하늘의 뜻일 뿐.) 이제 비극은 5막에 이르렀고, 그 주제는 이탈리아였다. 그 비극적 힘은 모두 그의 이 짤막한 글 속에 들어 있다. (신변잡기)로부터 파멸적인 정책에 대한 묵시론적인 보편 판단으로, 그리고 단테가 놀라운 예견력으로, 당신의 대리인 안에서 그리스도는 포로가 되었네
라고 읊은 시구 속의 한 줄기 섬광 같은 예언으로부터 만사 태평의 사육제적 즐거움 속으로 갑작스레 옮겨가는 그 구절들 속에 말이다. 바로 여기에 마키아벨리의 모든 것이 있으며,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그의 시대와 이탈리아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는 그같은 말을 한 뒤, 편지의 말미에다 농 반 진 반으로 이렇게 서명하였다. (역사가이자 희극 작가이며 비극 작가인 니콜로 마키아벨리.) 그야말로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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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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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6. 지혜의 샘
폭력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무식하고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예수를 체포하려는 유태인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쳐서 잘라버렸다. 이 때 예수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된다.”며 그를 타일렀다. 베드로는 결점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폭력을 쓰면 폭력으로 망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회개하고 폭력을 사랑으로 대하기 시작한 사람이다. 유태인들은 예수를 붙잡아 빌라도 로마 총독 앞에 세웠다. 빌라도 총독은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면서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면서 “그리스도야, 너를 때리는 사람이 누구냐? 알아 맞춰보아라“고 조롱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내가 아버지에게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사보다 더 많은 찬사를 보내줄 수 있으나 성경에 쓰여진 말씀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악한 자가 폭력을 쓴다고 해서 똑같이 폭력으로 대적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누가 너의 왼 뺨을 치거든 오른 뺨도 돌려 대어라. 너를 고소하여 속옷을 빼앗고자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어라. 또 누가 오리를 가라고 하면 십리를 가라“고 하여 폭력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유태인들은 겉옷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비싼 옷을 걸치나 속옷은 값이 싼 옷을 입는다. 그래서 싼 속옷을 누가 달라 하면 비싼 겉옷까지 벗어주라는 말이다. 노자는 ‘보원이덕’이라고 하였다. 원수 갚기를 덕으로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직보원 즉, 원수에게는 원한으로 갚을 수 없으니 올바른 도리를 보여주라고 하였다. 덕으로 갚으라는 노자보다 좀 더강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폭력을 쓰면 폭력으로 망한다. 폭력을 사랑으로 대하자. 개가 뒷다리를 물었다 해서 나도 개와 똑같이 개의 뒷다리를 물 수는 없지 않는가!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망한다. (He who lives by the sward dies by the sword.)
목 마른 사람과 샘
이슬람교의 창시자 모하메트(570~632)는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6세 때 부모를 여의고 사막의 베두인 상인들과 함께 살면서 장삿꾼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15세 연상의 돈 많은 과부 여인 카디자와 결혼하였다. 40세가 되던 해인 610년, 그는 알라 신의 계시를 받았다. 여기서 우선 이 모하메트의 신인 알라에 대해 알아보자. 알라는 아브라함-이삭-모세-다윗-예수로 이어지는 여호아 하느님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스마엘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본처 사라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본처 사라가 이삭을 낳기 전 사라의 하녀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이었고 그와 동침하여 서자인 이스마엘을 낳았다. 믿음의 조상도 여자는 좋아했던 모양이다. 사라 역시 폐경기가 지난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하나 낳게 해달라고 여호와 하느님께 간구하여 이삭을 낳았다. 어느 날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적자인 이삭에게 ‘알밤’을 주면서 자기가 먼저 났으니 이 집의 장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사라는 이 사실을 아브라함에게 일러바쳤고, 본처와 시앗간의 싸움에 진저리를 느낀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약간의 음식과 물통 하나만 주어 사막으로 쫓아냈다. 이렇게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막에서 고생고생하면서 살았다. 이후에 이스마엘이 이집트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 12부족을 이루었으며 이들이 믿는 하느님의 이름이 바로 ‘알라’이다. 그래서 여호와와 알라는 같은 신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회교
모하메트는 알라 신의 계시를 받아 메카의 주민에게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고 설득하고 다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메카의 쿠라이쉬 족의 박해를 받아 그는 메디나로 도망쳐야 했다. 모하메트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도피한 일을 ‘히자이러’ 또는 ‘헤지라’라고 하는데, 서기 622년의 일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는다. 모하메트는 메디나를 거점으로 사막의 모든 족속을 향해 지하드를 벌였다. 한 손에 코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사막 부족들을 정복하였고 서기 629년에는 메카로 다시 가서 회교 전파의 기틀을 잡았다. 이슬람은 유일 절대신인 알라에게 복종을 의미한다. 이슬람교는 인간 세상의 모든 악은 인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온갖 ‘오만’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알라신에 대한 복종만이 선이고 불복종은 악으로 규정하고 있다. 목마른 자가 샘터로 간다. 모하메트가 처음 이슬람교를 포교할 당시의 일이다. 메카에 살던 아랍 사람들은 모하메트에게 메카 근방에 있는 소파산을 성지 메카로 옮기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그가 정말로 하느님(알라)의 계시를 받았다면 자신들 앞에서 기적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거였다.
“소파 산이여, 옮겨 오라!”
하지만 자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산이 옮겨 오지 않자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은 참으로 자비로우신 분이로구나. 만약 소파산이 나의 말대로 옮겨져서 메카로 왔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 산에 파묻혀 죽었을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은혜를 감사드리기 위해 내가 직접 소파산으로 가야겠다.”
목이 마른 사람은 샘터에 가야 한다. 샘이 목이 마른 사람에게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쉬운 사람이 일을 서두르게 마련이다.
목이 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 (If the mountain will not come to Mohamet. Mohamet must go to the mountain.)
훌륭한 사람과 심복
인간의 모든 죄를 혼자 뒤집어 쓰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를 보자, 가장 믿었기 때문에 재정문제를 담당하게 했던 ‘유다’에게 배신을 당했다. 유다는 예수의 인간적인 약점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그를 배신하지 않았을까? 그뿐만 아니라 공자 역시 “허물을 적게 하려고 애를 쓰지만 잘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며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변명성 발언을 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가까이 가서 보면 인간적인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존경받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세계적인 철학자들의 대부분이 악처들에게 시달린 이유도 아마 ‘밖에 나가 행동하는 짓과 집에서 행동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존경을 받지 못한 것일 게다. 맹자는 “부부 사이에 분별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남편을 우러러 보면서 한 평생을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그 역시 부인으로부터 존경받지 못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심복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 아울러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듣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말을 다 듣다가는 심복이 저주하는 소리마저 듣게 될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심복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없다.(No man is hero to his valet.)
‘바렛(Valet)’은 남자 종으로서 주인 곁에서 의복이나 신변 잡사를 다루면서 일거수 일투족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은 주인의 인간적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앞에서 위신을 세우기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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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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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Hamlet:1600-1601)
해설
셰익스피어는 37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애독되고 있는 "햄릿"은 대중적 흥미가 높기 때문에 자주 상연되지만 셰익스피어 연구가들에게는 가장 힘든 작품이기도 하다. 자칫하면 복수극으로 끝나기 쉽고 신중히 처리한다 해도 일종의 윤리극이 될 수 있는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는 복잡하고 신비스러운 인생의 비밀을 파헤쳐 그 진상을 제시하려 했는데 그 비밀을 해명하는 열쇠로 햄릿의 성격을 창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햄릿을 통하여 인생의 영원한 비밀인 삶, 사랑, 번뇌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햄릿이 지니는 성격 속에서 우리는 단순한 인긴 행위의 근저에 깔려 있는 복잡하고도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파악하고 느끼는 기쁨을 알 수 있다. 햄릿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신병설 의지 박약설 우울증설 등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그것은 햄릿의 복잡한 성격의 일면을 설명하지만 그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실로 "햄릿"은 인류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인간의 감정에 감동을 주며 생각을 새롭고 깊게 해 줄 것이다. 괴테는 햄릿을 통하여 "훌륭하고 숭고한 가장 도덕적인 인간이지만 영웅적인 기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짊어지지도 못하고 던져 버리지도 못하는 무거운 짐을 진 채 거꾸러지고 만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반성적이고 외향적이며 환경에 순응하는 유형의 성격자는 햄릿의 생활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가 인간의 성격을 햄릿 형 돈 키호테 형으로 비유하여 나눌 정도로 셰익스피어는 "햄릿"으로 성격의 전형을 창조한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에는 "햄릿"외에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가 있다.
작가 약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1564년 중부 잉글랜드의 스트래트포드 안 에이번에서 태어나 1616년 4월 52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가정은 빈곤으로 겨우 국민학교 정도의 교육을 마치고 20세 때에 런던으로 나왔다. 일정한 직업 없이 전전하다가 어느 극장에서 배우 겸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26세 경에는 완전한 극작가가 되었다. 그 후로 약 23년 간 문필 생활을 하였다. 장시 2편 소네트 154편 희비극 37편을 창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나서야 진가를 인정받아 그 위대함이 연구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의 시인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그의 관찰력은 넓고 파악력은 강하다. 음악과 색채의 아름다움 재미있는 말씨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의 전개 성격이 뚜렷한 인간의 동작 싱싱한 서정시의 맛 터져나오는 웃음 가슴이 뜨거워지는 슬픔 등 예술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요소를 갖춘 것이 그의 극이다.
줄거리
-제1막-
자정이 지난 시각 덴마크 엘시노어 궁성 앞의 말루에서 버나드는 마셀러스 호레이쇼와 괴이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정이 지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이틀을 계속 두 달전 죽은 선왕의 혼령이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누군들 보지 않았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으랴. 버나드의 보고를 들은 호레이쇼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망루에 나타났다. 앞은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이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성벽의 모퉁이에 정말 혼령이 나타났다. 선왕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혼령은 생전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다. 찌푸린 표정엔 위엄과 고통이 서려 있다. 아무리 보아도 선왕 그대로의 모습이다. 놀란 호레이쇼는 공포에 와들와들 떨면서도 멀어져 가는 혼령에게 소리친다.
"너는 누구냐? 누구이기에 한밤중에 덴마크의 선왕께서 행차하시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냐? 어서 말해라!"
호레이쇼는 질려 있었다. 이것은 덴마크에 괴변이 일어날 징조가 아닌가? 평소 불평이 많은 마셀러스는 이 징조를 두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이렇듯 엄중한 말을 세워 백성들을 매일처럼 못살게 대포를 만드는가. 외국에서 무기를 사들인다 배를 만든다 하며 백성들을 괴롭히는가? 자네들 가운데 아는 바가 있으면 속시원하게 말 좀 해 주게!"
호레이쇼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선왕께서 그의 생전에 노르웨이 국왕과의 결전에서승리를 거두어 조약에 따라 노르웨이 국왕의 소유지를 바로 선왕이 빼앗았다는 것이다. 최근 선왕이 돌아가시자 노르웨이 국왕의 아들이 이를 보복하기 위해 잡병을 모아 덴마크 국경을 노리고 있으니 선왕의 혼령은 이와 관계있는 징조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 다시 혼령이 나타났다. 호레이쇼는 조금 전보다 침착해져 혼령을 향해 말을 걸었다.
"섰거라! 나에게 말을 해라 만일 네게 원한이 있다면 내가 너의 원을 풀어 주어 내게도 복이 될 일을 할 것이니 말해 다오. 무엇이건 말해다오. 이 나라의 화근의 비밀을 알거든 말해 다오. 생전에 남에게 빼앗은 재물을 땅속에 묻어 둔 채 죽은 탓으로 그것을 못잊어 나타났느냐? 어서 말을 하라"
그러나 첫닭 우는 소리와 함께 혼령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동녘 하늘엔 붉은 햇살이 뻗치고 있었다. 호레이쇼는 이 사실을 햄릿에게 보고함이 신하로서의 의무이며 친구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선왕은 두 달 전 술을 마시고 잔디밭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독사에 물려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선왕의 죽음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의 아들인 햄릿이었다. 부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자라난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져 괴로워했다. 선왕의 후임으로 햄릿의 숙부가 왕좌에 앉았으며 더욱 햄릿을 충격에 빠뜨린 것은 선왕이 죽은 지 두 달도 채 못 되어 그의 어머니가 숙부와 재혼한 데 있었다. 무엇을 믿으란 말인가? 선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덴마크 영지에서 이제 햄릿 외엔 없는 것이다. 오늘도 왕비를 옆에 거느리고 그 옛날 형이 자리잡았던 옥좌에 거만스럽게 버티고 앉은 클로디어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집정 소감을 연설하고 있었다.
"햄릿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가 두 달 전이라 만백성이 수심과 슬픔의 도가니 속에서 선왕을 추모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인정과 도리이되 언제까지나 비탄의 눈물을 흘린다고 죽은 넋이 되돌아올 리 없고 험악해진 국경 지대의 형세는 일각의 지체도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기쁨과 슬픔을 저울질하면서 나는 지난 날의 형수를 정궁으로 모셨노라 또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경들이 협조하였기에 짐도 그 월등한 지혜를 굳이 막지 않았노라"
클로디어스의 언변은 유창하고도 의젓하여 모든 신하들을 위압했다. 침통한 표정의 햄릿을 바라본 왕비는 아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사랑하는 왕자 그 어두운 얼굴빛을 던져 버리고 좀더 다정스러운 눈으로 왕을 우러러 보오. 항상 그렇게 눈을 내려 덮고 떠나신 아버님을 땅 속에서 찾은들 무슨 소용이 있소? 죽음이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현세에서 영원의 생명으로 지나가는 것을"
클로디어스 왕도 햄릿의 마음을 달래느라 무척 애를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햄릿의 마음 속에는 슬픔과 의아심과 분노가 타오를 뿐이었다. 그는 숙부인 클로디어스보다 어머니로부터 더 참을 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아! 추하고 더러운 몸뚱어리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겨우 한 달! 거친 바람이 어머니의 뺨을 스쳐가는 것도 못 마땅히 여기시던 끔직한 사랑이었건만 그런 사랑을 주던 왕의 시체가 썩기도 전에 이 지경이 되고 말다니... 생각을 말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 염치도 체면도 없는 조급한 마음 어쩌면 그렇게도 재빠르게 음탕의 자리로 달려간단말인가? 저리도 곱고 우아한 왕비의 속이 매춘부의 그것과 무엇아 다르랴 그러나 가슴이터져도 입을 다물어야 해!'
이 때 호레이쇼 마셀러스 버나드가 햄릿을 찾아와 간밤의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듣는 햄릿은 긴장하여 심상치 않게 생각한다.
"설령 지옥이 입을 벌려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해도 나는 기어코 그 혼령에게 말을 걸어 보겠다. 그리고 자네들은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는 말게 나는 혼령이 선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기어코 말을 걸어 보겠다. 오늘 밤엔 나도 말루에 가 보겠네 비밀을 지키게"
세 사람은 햄릿에게 맹세를 하였다.
'아버지의 혼령이 무장을 하고 나타났다? 심상치 않은데! 무슨 흉계가 있나보다. 어서 밤이 됐으면! 그 때까지만 참자 서두르지 말고 온 세상이 덮어 둔다 해도 나쁜 일이란 머리를 쳐들고 사람들 눈앞에 나타나지 말지니'
클로디어스 왕의 심복인 폴로니어스에게는 레아티즈와 오필리아 남매가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 레아티즈는 장부답고 오필리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더구나 오필리아의 끝없이 청초한 미모는 일찍부터 햄릿의 가슴 속에 사랑의 불꽃을 심었다. 레아티즈는 프랑스 유학 도중 클로디어스 왕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다가 다시 프랑스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에게 햄릿과의 교제는 삼가하라는 충고를 한다.
"햄릿이 너에게 호의를 표시한다지만 그건 다 한때의 기분이니 조심하여라 방춘 가절의 한 떨기 꽃이라 오래가지 못하면 향기가 달콤하나 계속되지 못한다. 왕자의 지위니 만큼 지금은 너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가 누구를 배필로 정하느냐는 덴마크 국민이 정하게 되는 법이다. 그러니 그의 고백을 너무 귀담아 듣거나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 오필리아 사랑하는 동생 내 말을 명심하겠지?"
"오라버니 말씀은 제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잠갔으니 열쇠는 오라버니께서 맡으세요"
아들을 떠나보낸 폴로니어스도 역시 오필리아에게 햄릿을 조심하라고 훈계했다. 순종과 정숙의 미덕을 간직한 오필리아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려 하면서도 햄릿의 사랑이 결코 허위가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그날 밤 성 위의 망루는 바람이 세고 참을 수 없는 한기가 들었다. 햄릿과 호레이쇼 그리고 마셀러스는 혼령이 나타나기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궁성 안에서는 왕의 즉위를 축하하는 주연이 한창이라 밤새 가무의 환성이 그치질 않았다. 자정이 넘은 시각 혼령이 나타났다. 햄릿은 무서움도 잊고 혼령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가 천당에서 내려왔건 지옥에서 솟았건 나는 그대를 나의 왕 나의 아버님이라 부르리라 당신을 격식에 따라 땅 속에 묻은 것을 이 눈으로 보았건만 당신은 무엇 때문에 수의를 찢고 나타났습니까? 어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죽어 시체가 된 당신이 또다시 무장을 하고 그믐달도 어스름한 이 밤을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서 말씀하십시오!"
"따라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전하에게 따로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눈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따라가야지!"
"안됩니다. 만일 저것이 전하를 바닷가로 꾀어내든가 무서운 낭떠러지 위로 이끌면 어쩌겠습니까? 안됩니다"
호레이쇼는 혼령을 따르려는 햄릿을 잡고 말렸다.
"나의 운명이 나를 부른다. 그 소리를 들으니 전신의 힘줄이 사자처럼 솟아오르는구나! 나를 막는 자는 목을 베어 혼귀로 만들 테다. 썩 물러나라!"
햄릿은 날쌔게 혼령이 손짓하는 대로 따라갔다. 혼령은 성벽 아래까지 갔다.
"어디까지 가실 작정입니까? 말씀을 하십시오"
"이제는 내 시간이 거의 다됐다. 다시 지옥의 유황 고열의 업화 속에 시달릴 때가 왔다..."
"가엾기도 해라..."
"너는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말고 이제부터 하려는 얘기를 명심하여 반드시 내 원수를 갚아야 하리라. 나는 너의 애비의 혼령이다.만일 네가 죽은 애비를 공경한다면, 인륜을 짓밟은 암살에 대하여 복수할 것을 잊지 말아라"
"암살?"
"그렇다.사람들은 내가 정원에서 낮잠을 자는 동안 독사에게 물려 죽은 줄로 믿고 있는 모양이니 그것은 거짓말이다.네 애비의 목숨을 빼앗아 간 독사는 지금 머리에 왕관을 쓰고 있는 바로 그 자니라!"
"아! 아버님, 저의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았군요"
"그렇다. 그뿐이랴? 그 놈은 왕비의 지조까지 정욕의 노예로 삼았다. 새벽 냄새가 풍겨 오는 것 같으니 간단히 이야기하겠다. 나는 그 날도 예전과 같이 정원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그 때 네 숙부는 무서운 힘을 가진 독약을 나의 귀에 부었다. 그 독약은 삽시간에 내 육체를 수은이 돌 듯 돌았지 그것은 마치 젖에 초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맑고 고요한 나의 피를 두부처럼 굳게 하니 나의 육체는 문둥이처럼 전신에 종기가 솟았고 보기에도 흉측스런 시체로 변하였다. 이리하여 생명도 왕관도 왕비도 친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구나 네가 나의 아들이라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아들아 네가 어떠한 수단으로 어머니는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고 가슴 속에 양심의 가책을 받게끔 내버려 두라 날이 새니 나는 가야 한다. 잘 있거라 부디 이 아비를 잊지 말기를..."
-제2막-
며칠이 지난 후 폴로니어스의 저택이다. 누구의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햄릿 왕자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풍문이 성안에 쫙퍼졌다. 오필리아는 황망히 아버지의 방문을 밀치며 뛰어들었다.
"아버지! 큰일났어요. 무서워요..."
아직도 불안에 사로잡혀 초조히 서 있는 오필리아는 방금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방금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노라니까 햄릿 왕자님께서 앞가슴을 풀어 헤치고 모자는 벗은 채 백지장 같은 얼굴로 제 방으로 들어오시잖겠어요? 그러더니 제 손목을 덥석 잡으시고는 언제까지나 제 얼굴을 바라보시는 거에요. 왕자님은 긴 한숨을 내쉬었지요..."
"음... 그거야말로 틀림없는 사랑병이다. 그래 뭐라고 말씀하시더냐?"
"아니오.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요. 한참을 그 자세로 있으시다. 저의 팔을 흔들고 고개를 끄덕거리시더니 밖으로 나가셨어요. 저의 얼굴을 보시면서 뒷걸음으로 나가셨읍니다"
"알았다. 그래서 정신이 이상해진 거야. 이건 지체 말고 왕께 아뢰어야지. 그것은 바로 상사병이라는 것이다. 오필리아 너 요즘 왕자에게 박정하게 한 적은 없었느냐?"
"아뇨 다만 아버님 분부대로 왕자님이 보내 오신 편지를 돌려 보내고 만나자는 것을 거절 했을 뿐이에요"
"내가 좀더 주의해서 살펴 볼 것을 ...이 아비는 네 몸을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서 왕자에 대해 지나친 의심을 했구나. 어서 가자.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꾸나"
폴로니어스의 보고를 들은 왕과 왕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햄릿의 병의 원인이 선왕의 죽음과 자기들의 결혼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필리아에 대한 사랑의 열병에서라니 일단 안심은 되면서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왕자께서는 이 복도를 몇 시간이고 거니는 습관이 있으십니다. 그 때에 소신의 딸을 왕자와 만나게 하고 폐하께서는 소신과 함께 휘장 뒤에서 두 사람의 언행을 엿보면 사실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때마침 햄릿은 헝클어진 차림새로 책을 읽으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러나 햄릿의 발광은 사실이 아니었다. 혼령을 만난 후부터 가슴 속에 자기 대로의 계획과 각오가 자리잡게 되었다. 햄릿은 그것을 남들이 알게 되면 숙부가 그의 복수를 눈치챌 것이 우려돼 일부러 정신병자의 행동으로 가장하였던 것이다. 햄릿은 학식이 풍부하며 문예도 능하여 귀족 자제들과 백성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명민한 머리로 복수를 계획하고 적절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복수의 계획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비록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번민은 끊이지 않았다. 햄릿을 위로하기 위해 극단의 연극을 계획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햄릿은 상연작품을 햄릿 자신이 윤색한 "곤자고의 살해"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한 사람도 햄릿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없었고 배우 외에는 그 작품 내용을 미리 눈치채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을 돌려 보낸 다음 햄릿은 복수의 일념에 몸부림쳤다. '아 복수다. 내가 얼이 빠졌어 사랑하는 아버지가 참살 당한 아들이 천지가 원수를 갚으라고 재촉하는데 나는 뭐지? 복수하라는 엄명을 받고도 창부처럼 가슴 속에 말만 늘어놓고 막상 원수를 만나면 입 속에서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매춘부처럼 가랭이를 벌리는 꼴이 참으로 장하다. 아 이게 무슨 꼴인가? 분기하라 살인의 죄는 입이 없어도 스스로 실토하기 마련이라거늘 이제 저 배우들에게 숙부의 앞에서 아버지 살해의 장면과 비슷한 연극을 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숙부의 안색을 살펴 그 급소를 찔러 보리라 그래서 깜짝 놀라면 앞으로 할 일은 뻔하다!' 햄릿은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제3막-
궁중의 어떤 방이다. 간악한 클로디어스 왕은 갖은 수단을 써서 햄릿의 광증의 원인을 캐내려고 했으나 뜻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햄릿이 잘 드나드는 방에서 오필리아와 만나게 하고 그 현장을 엿보기로 하였다. 왕과 폴로니어스는 오필리아에게 간곡히 당부하고 휘장 뒤로 숨어 버렸다. 오필리아는 마음이 아프도록 괴로웠다. 왕자가 자기 때문에 그렇게 변했다면 자기에게도 왕자를 소생시킬 책임이 있으며 의무가 있다는 들었다. 그리고 자기의 진심을 속이면서까지 왕자를 대해야 하는 자신이 부질없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햄릿 왕자는 역시 헝클어진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번민을 이기지 못하여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이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받고 참는 것이 장한 정신인가? 아니면 조수처럼 밀려드는 환난을 두 손으로 막아 그를 없애는 것이 올바른 정신인가? 죽음이란 잠자는 것 그뿐이다. 한 자루의 단도만 있다면 그 자신을 깨끗이 청산할 수 있거늘 압박자의 억울한 짓과 권세가의 무례 멸시받은 사랑의 쓰라림 법률의 태만 관리들의 오만과 덕있는 사람이 가치없는 자에게서 참고 받아야만 하는 발길질 그 모든 것을 누가 참겠느냐?"
햄릿은 경건히 기도를 올리고 있는 오필리아를 보자 미친 사람처럼 다가갔다 복수를 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도 버려야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인가?
"오필리아! 그대는 정절한가?"
"예? 무슨 말씀이세요?"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여 아름다움은 당신이 타락할 수 있는 표시. 조심하시오, 여인이라면. 나는 한때 그대를 사랑했지"
"저도 그렇게 믿었죠"
"당신은 나를 믿지 않았어야 했소. 무엇 때문에 나와 같은 사람과 함께 죄인들을 더만들어 내려는 게요. 나는 꽤 복이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었지. 그러나 차라리 어머니가 나를 낳지 않았더라면 하고 생각할 만큼 가지가지의 죄를 생각하고 있소. 나는 오만하고복수심이 강하고 야심이 많은 인간이라 나의 머릿속에 사상의 옷을 입히고 형체를 입히고 숱한 죄악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소. 나같이 못된 인간이 벌레처럼 기어다니며 할 일이무엇이란 말이오. 모두 모두 다 극악하기만 한 존재들이오. 사람이란 그렇소. 수녀원으로가시오. 왜 사내와 사귀어 죄 많은 인간을 낳겠다는 거요! 아무도 믿지 말고 어서 수녀원으로 가시오. 아버지는 어디 있지?"
"집에요"
"그럼 문 밖에서 어릿광대 노릇을 그만두라고 하시오. 집 안에 박혀 있으라고 하란 말이야 잘 있어요"
"하느님 이분을 보호해 주옵소서!"
"만약 결혼하려거든 바보와 하시오! 영리한 사람들이 당신과 결혼하면 머리에서 뿔이나오기 마련이니까 자 어서 수도원으로 가요. 잘 있어요"
햄릿은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게 된 오필리아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아아 그토록 고귀하던 분이 어쩌다 저 꼴이 되었는가? 궁중의 안목이요, 학자의 달변이요, 군인의 검이요, 국민의 기대요, 나라의 꽃이시던 높으신 정신이 마침내 땅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기약의 꿀만 빨아먹고 살아 온 나는 지금 모든 여성 중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었어. 아름답게 울리는 종소리처럼 거룩하고 장하신 이상의 조화는 간 곳 없구나 아아 몹쓸 내 팔자 옛날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아련한데 지금 이 꼴을 보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오필리아는 비통을 참지 못하여 흐느껴 울었다. 햄릿과 오필리아의 만남을 몰래 엿듣고 있던 클로디어스 왕은 햄릿이 사랑으로 인해 미쳤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미친 행동 속에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진실이 느껴지자 왕은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덴마크에 조공을 바쳐 오던 잉글랜드로 햄릿을 사절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색다른 환경에서 기분 전환 겸 여행을 떠나라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햄릿을 추방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 날 밤, 궁성 안에서는 연극 공연의 준비에 분주하였다. 햄릿은 직접 배우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연극을 지도할 때 햄릿은 생기가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햄릿의 절친한 친구이자 부관인 호레이쇼에게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숙부의 표정의 변화를 살피라고 하며 햄릿은 복수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마침내 왕과 왕비를 위시한 문무 백관이 장내에 모여들었다. 햄릿은 오필리아의 무릎을 베고 누워 희롱한다.
"무릎 사이에 들어가도 될까?"
"아이 참 왕자님도..."
"아니 무릎을 좀 베자는 거야"
"그건 괜찮아요 "
"내가 무슨 상스러운 짓이라도 할 줄 알았어?"
"오늘 밤은 퍽 쾌활하시네요"
"천만에 저기 앉으신 우리 어머니의 희색 만면한 모습을 보시오.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지 두 시간도 못 되는데!"
"아니에요. 두 달의 갑절은 되어요"
"벌써 그렇게? 그렇다면 이제 나는 상복을 악마에게 물려 주고 수달의 털가죽옷이라도 입어야겠군!"
드디어 연극의 막이 오른다. 연극은 무언극으로 시작한다. 햄릿은 왕과 왕비의 표정을 훔쳐 본다. 다음, 극중의 왕과 왕비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왕 왕과 왕비에게 자신에 대한 변심을 우려하자 왕비가 말한다.
"당치도 않을 말씀을... 이 몸이 재가할 바엔 차라리 지옥으로 가지요. 전 남편을 죽인 여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두 번 째 남편을 맞이할 수 있으리오? 두 번째 남편이 침실에서 저에게 입을 맞출 때는 저는 전 남편을 두 번씩이나 죽인 셈인 됩니다"
이 대사는 햄릿이 삽입한 것이었다. 극이 진전됨에 따라 왕비의 얼굴엔 동요의 빛이 지나갔음을 햄릿은 놓치지 않았다. 극은 바야흐로 절정에 달하여 조카가 왕의귀에 독약을 부어 넣었다. 이 때 햄릿이 말하였다.
"저 놈은 왕위를 빼앗으려고 정원에서 왕을 독살하는 거야. 저자는 머지않아 곤자고의 왕비를 농락할 것이다!"
이 말이 장내에 울려 퍼지자 클로디어스 왕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폴로니어스는 연극을 중지하라고 고함을 친다. 왕은 몸이 좋지 않다는 구실로 왕비와 궁성 안으로 들어가자 장내는 수라장이 되었다. 햄릿은 혼령의 말이 진실이었음을 확인했다. 햄릿은 앞으로의 복수에 대해 한층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폴로니어스가 황급히 나타났다.
"전하 왕비께서 드옵시라는 분부입니다"
한편 자기 방에 돌아온 클로니어스 왕은 분노와 공포를 억제하지 못하여 햄릿을 잉글랜드로 추방하라고 신하들에게 호령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신하에겐 잉글랜드 왕에게 보낼 서신을 주고 내일이라도 즉시 출발하라고 명령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고 혼자 남게 된 왕은 참회와 침울한 심정으로 괴로워했다.
"아, 나의 몹쓸 죄상! 그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기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 심정을 어디에 쏟을 것인가? 죄의 결과를 지니고 있으면서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까? 아! 처참한 신세로고... 나의 가슴은 죽음처럼 시꺼멓구나 천사들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힘을 주소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듯 왕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어머니 방으로 건너가려던 햄릿은 왕의 뒷모습을 발견하자 제자리에 섰다. 그리고 단도를 손에 쥐어 한 발 두 발 가까이 갔다. '기회는 바로 이때다. 지금은 손쉽게 해치울 수 있어 하지만 저렇게 기도하는 순간에 죽는다면 숙부는 천당으로 갈 것이니 그것은 복수가 될 수 없다. 칼이여 네 집으로돌아가거라 더 좋은 기회를 기다리자'
들었던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서 햄릿은 어머니의 거실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햄릿을 본 왕비는 엄격한 어조로 아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햄릿 그대는 아버님께 매우 불손했다"
"어머니는 저의 아버님께 매우 불손하셨소"
"너는 제 어미도 몰라보는구나?"
"천만에요. 당신은 왕비이며 당신 남편 동생의 아내이십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나의 어머니이시죠?"
"대체 이 어미가 어떻게 했기에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냐? 정 그렇다면 누구를 부를 테다"
공포와 분노를 떨며 왕비가 일어나려 하자 햄릿은 재빠르게 왕비의 손을 끌어 당겨 자리에 앉혔다. "꼼짝 말고 계세요. 그 마음 속을 거울에 환히 비춰 보일 테니. 그 때까지 못 나가십니다"
"나를 어쩌자는 거냐? 나를 죽이려는 게로구나? 사람 살려라! 사람 살려!"
왕비가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자 휘장이 흔들리며 인기척이 들려 왔다.
"이건 또 뭐냐? 쥐새끼냐? 죽어라 죽어!"
햄릿은 칼을 빼들고 휘장 안을 찔렀다. 그 때까지 햄릿은 휘장 뒤에 숨은 자는 왕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진 것은 오필리아의 아버지인 폴로니어스였다.
"햄릿! 이 무슨 잔인한 짓이냐!"
"잔인한 짓? 그렇죠 어머니 왕을 죽이고 그 왕의 아우와 사는 것은 참혹하고 잔인한 짓이 아니겠지요"
왕비는 부들부들 떨며 잠시 동안 굳어 있었다. 햄릿은 어머니의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투로 화살을 쏘았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듯 왕비는 자책과 참회의 눈물로 하염없이 흘렸다. 바로 그 때 선왕의 혼령이 소리도 없이 나타났다.
"오! 하늘의 수호신이시여! 이 몸을 지켜 주소서 이 곳까지 이렇게 나타나심은 무슨 이유이십니까? 혹시 불초 자식이 때를 놓치어 복수를 소홀히 할까보아 꾸짖으러 오셨습니까?"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이번에 찾아온 것은 네 결심의 칼날이 무디어질까 두려워 재촉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보아라. 네 어머니는 정신이 산란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구나 네 어머니를 도와 주어라 심약한 처지에는 같은 말도 크게 울리는 것이니 자 말을 주어라"
그러나 왕비는 이 혼령과의 대화를 듣지 못한다. 왕비는 햄릿이 미쳤다고 생각하였다.
"도대체 그렇게 허공을 응시하고 누구에게 말하는 거냐?"
"안 보이세요? 저기..."
"아무 것도 무엇이 있단 말이냐?"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까?"
"우리들의 말소리 밖에는"
"앗! 저기를 보십시오. 아버님이 사라져 갑니다. 살아 계셨을 때와 똑같은 차림으로 이제 문을 열고... 아!"
왕비는 햄릿이 이제는 구원받을 수 없는 미치광이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으로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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