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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1호 - 2024.9.25. 수요일(음력 : 8.23.)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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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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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란 그 위에서 편히 쉬라고 만든 게 아니라, 한쪽 발이 버틸 동안 다른쪽 발로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만든 발판. --토마스 한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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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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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나리!
사극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부를 때 “나으리, 부르셨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데, ‘나으리’는 ‘나리’의 잘못으로, 불필요하게 모음 ‘으’를 덧붙인 것이다. 이때는 “나리, 부르셨습니까”와 같이 말해야 한다.
부사로 쓰이는 ‘그제야’ 혹은 ‘이제야’의 경우도 불필요하게 조사를 첨가해 ‘그제서야’ 혹은 ‘이제서야’로 사용하기 쉽다. ‘그제’와 ‘이제’는 모두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인데, 여기에 장소를 나타내는 처소격 조사 ‘-(에)서’를 불필요하게 붙여 사용하면 안 되고 ‘그제야’ 혹은 ‘이제야’로 말해야 한다.
동사에도 불필요하게 음운을 첨가하는 경우가 많다. ‘날씨가 개다’, ‘땀이 배다’, ‘마음이 설레다’, ‘목이 메다’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여기에 불필요하게 피동접미사 ‘이’를 덧붙여 ‘날씨가 개이다’, ‘땀이 배이다’, ‘마음이 설레이다’, ‘목이 메이다’라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이다. ‘개다’, ‘배다’, ‘설레다’, ‘메다’ 등의 동사는 모두 자동사이기 때문에 피동접미사 ‘이’를 붙여서는 안 된다.
또한 ‘삼가다’를 ‘삼가하다’로 잘못 쓰는 것도 불필요하게 ‘하’를 덧붙인 경우이다. ‘-하다’는 명사 뒤에 붙어 동사를 만드는 접미사로서 ‘공부하다’, ‘생각하다’ 등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삼가다’는 그 자체가 이미 별개의 동사이기 때문에 ‘-하다’라는 접미사를 결합해 쓸 수 없다. 따라서 “흡연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가 아니라 “흡연을 삼가시기 바랍니다.”로 말해야 한다.
뱀에게 있지도 않은 발을 덧붙여 그려 도리어 그림을 잘못되게 한 것처럼 군더더기 말은 말을 잘못되게 만드는 사족(蛇足)과도 같은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호랑이와 호랭이
‘호랑이’는 표준어이고, ‘호랭이’는 비표준어이다. 후자에서 일어나는 음운현상을 ‘ㅣ모음 역행동화’라 한다. 음운론에서, ‘역행’은 뒤에 나오는 소리가 앞에 나오는 소리에 영향을 주는 경우에 쓰는 용어이고, ‘동화’는 앞뒤의 두 소리가 같아지거나 비슷해지는 현상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러니까 ‘ㅣ모음 역행동화’는 앞 음절의 모음이 뒤 음절에 있는 ‘ㅣ’의 영향을 받아 ‘ㅣ’와 비슷해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풀 수 있다. ‘ㅣ’와 비슷해진다는 말은 같은 전설모음인 ‘ㅔ, ㅐ, ㅚ, ㅟ’ 등으로 바뀐다는 뜻이다.
‘호랑이→호랭이’는 뒤 음절 모음 ‘ㅣ’의 영향으로 앞 음절 모음 ‘ㅏ’가 ‘ㅐ’로 바뀐 것이다. ‘손잽이(손잡이), 차돌배기(차돌박이), 챙피하다(창피하다), 멕이다(먹이다), 괴기(고기), 쥑이다(죽이다)’ 등등도 ‘ㅣ모음 역행동화’로 설명할 수 있다.
표준어규정에서는 원칙적으로 ‘ㅣ모음 역행동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봄날 햇빛이 강하게 쬘 때 공기가 공중에서 아른아른 움직이는 현상을 가리킬 때는 ‘아지랑이’라고 해야지 ‘아지랭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아비, 어미, 아기’에 대해서도 ‘애비, 에미, 애기’는 모두 비표준어이다.
예외적으로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형태를 표준어로 인정하기도 한다. ‘-내기’가 대표적이다. ‘-내기’는 본래 ‘-나기’에서 온 말이지만, 지금은 ‘-내기’로 굳어졌다고 보아 ‘서울내기, 시골내기, 신출내기, 여간내기, 풋내기’ 등과 같이 ‘-내기’로 끝나는 말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냄비, (내)동댕이치다, 올챙이, 굼벵이’도 각각 ‘남비, (내)동당이치다, 올창이, 굼벙이’에서 ‘ㅣ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형태지만 표준어로 인정되는 예들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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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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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 천상병
저것 앞에서는
눈이란 다만 무력할 따름.
가을 하늘가에 길게 뻗친 가지 끝에
점찍힌 저 절대정지를 보겠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미묘하기 그지없는 간격을
이어주는 다리(교)는 무슨 상형인가
저것은
무너진 시계 위에 슬며시 깃을 펴고
핏빛깔의 햇살을 쪼으며
불현듯이 왔다 사라지지 않는가.
바람은 소리없이 이는데
이 하늘, 저 하늘이
순수균형을
그토록 간신히 지탱하는 새 한 마리.
∼∼∼∼∼∼∼∼∼∼∼∼∼∼~~~~~~~~~~~~~~~~~~~~~~~~~~~~~~~~
인동차 - 정지용
노주인의 장벽에
무시로 인동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여 붉고,
구석에 그늘 지여
무가 순 돋아 파릇 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도 없이
삼동이 하이얗다.
~~~~~~~~~~~~~~~~~~~~~~~~~~~~~~~~~~~~~~~~~~~~~~~~~
叡智(예지) - 김수영
바늘구녕만한 예지를 바라면서 사는 자의 설움이여
너는 차라리 부정한 자가 되라
오늘
이 헐벗은 거리에 가슴을 대고
뒤집어진 부정이 정의가 되지 않더라도
그러면 너의 벗들과
너의 이웃사람들의 얼굴이
바늘구녕 저쪽에 떠오르리라
축소와 확대의 중간에 선그들의 얼굴
강력과 기도가 일체가 되는 거리에서
너는 비로서 겸허를 배운다
바늘구녕만한 예지의 저쪽에 사는 사람들이여
나의 현실의 메에뜨르여
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이여
강력한 사람들이여......
<1957>
~~~~~~~~~~~~~~~~~~~~~~~~~~~~~~~~~~~~~~~~~~~~~~~~~
나를 부르는 당신 - 이해인
오를 때는 몰랐는데
내려와 올려다 보면
퍽도 높은 산을 내가 넘었구나
건널 때는 몰랐는데
되건너와 다시 보면
퍽도 긴 강을 건넜구나
이제는 편히 쉬고만 싶어
다시는
떠나지 않으렸더니
아아, 당신
그래도
움직이는 산
굽이치는 강
나를 부르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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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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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2장 정을 기른다
18.오른손으로는 벌을 주고 왼손으로는 껴안아준다
껴안아주는 것은 최고의 사랑 표현
자녀를 기르면서 이따금 벌을 주는 엄마의 행위는 어린이가 잘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잠언 22장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러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 하리라'는 구절이 있는데, 유태인들은 자녀들을 '그들이 가야 할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서만 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벌을 줄 때에도 반드시 애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 벌은 어버이의 권위에 의존해서 어린 자식들을 억누르고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살려나가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벌은 어린이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라'는 유태인의 옛 격언은 '벌은 반드시 애정을 수반한 것이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사실 유태인은 도구 같은 것을 써서 어린 자녀를 때리는 따위의 끔찍한 짓은 하지 않으며, 오직 손으로만, 그것도 머리는 피해서 때린다. 한편 유태인에게 있어 껴안는 행위는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다.
이스라엘에는 농업 생산을 축으로 삼고 있는 '키부츠'라는 공동 생활체가 있다. 이 키부츠는 이스라엘 국가 탄생에 크게 기여했으며, 동양의 젊은이들 중에는 '키부츠'를 견학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다녀간 사람들이 많다. '키부츠'에는 그들만의 독특한 육아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부모가 어린이를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주로 '메타페레트'라고 불리는 잘 훈련된 육아전문 여성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부모가 있는 자기 집이 아닌 '어린이 집'에 있는 것은 아니고, 오후 4시부터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는 각기 자기 집에서 보낸다. 너무 어려서 아직 걷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들이 와서 데려가는데, 이때 볼 수 있는 광경은 제일 먼저 어머니가 자녀를 포근하게 껴안는 모습이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는 자녀를 껴안은 채 그 아이가 기거하는 방으로 가서 다른 한 손으로 서랍을 열고는 옷가지와 기저귀 등을 챙긴다. 이런 광경은 키부츠뿐 아니라 유치원 등으로 아이를 마중 나가는 유태인 어머니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프로이트의 전기를 보면, 그의 엄마는 항상 그를 껴안고 '꼬마 무안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꼬마 무안인'은 그의 별명이다. 이처럼 오른손으로는 때리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것은, 유태의 어머니가 자녀들을 길들이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가정에서도 스파르타식으로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경우에도 때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한 쪽 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이 포인트!
벌을 줄 때에도 반드시 애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벌을 주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결과적으로 자녀들은 개성을 자유롭게 살려나가지 못하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오른손으로는 때리고 왼손으로는 정답게 껴안아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19.심한 꾸지람을 했더라도 재울 때는 다정하게 대한다
나쁜 감정을 꿈속으로까지 가져가지 않게 한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첫머리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첫째날 낮과 밤을 구분해서 나누었다는 대목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 인간들은 하루를 주기로 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낮이 지나 밤에 이르러 잠들 때까지 그날 하룻동안 있었던 모든 일은 그날이 지나기 전에 마무리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태민족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루의 일과 중 두려웠던 일이나 슬펐던 경험을 그날로써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무리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었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만은 정답게 다독거려 주어 좋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어린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마치 스폰지와 같아서, 혼을 낸 담음 다독거려 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나쁜 감정을 그대로 흡수해 버린다. 그러나 한 번쯤 정답게 쓰다듬어 두면 스폰지에서 물이 빠져나온 듯이 나쁜 감정도 쉽게 흘러나오고 마는 법이다. 공포감이나 혐오감, 증오심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의 꿈속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쁜 감정이 마음속에 남아 있게 되면, 그 다음날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다정스러운 태도만큼 평온함을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산 속의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던 어느 날의 일이다. 프로이트는 딸 안나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안나 프로이트, 딸기 많이, 딸기 많이"
안나는 그날 아침 배가 아팠기 때문에 좋아하는 딸기를 먹지 못했었는데, 그것이 '딸기 많이'라고 잠꼬대를 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갖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꿈속에까지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1처 가지나 되는 꿈의 실례를 수집함으로써 '꿈은 무의식에서 생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원시적 감정을 반영한 것이 꿈이라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실제로 누구든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불쾌했던 체험이 어른이 된 다음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고는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그날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이 무의식중에 축적되어 꿈을 꾸게 되는 셈인데, 유태 어머니들은 여러 감정 가운데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감정만을 어린이들로부터 말끔히 제거시켜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침대에 누운 자녀 곁에 앉아 정답게 껴안아주는 다정스런 어머니 ... 이것만큼 아이들에게 평온한 마음을 주는 것은 없다. 어머니의 이 다정한 배려가 아이들에게는 안정감을 주고, 하루 일과의 긴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날이 밝으면 다시 상쾌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이 되다 보며 자녀들은 지난 일을 되씹으며 과거에 얽매이는 인간이 되지 않고, 항상 산뜻한 기분으로 앞을 내다보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아무리 자녀들을 심하게 꾸짖었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만은 정답게 다독거려 주어 좋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어린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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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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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파르티아 문제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는 결국 그리스-로마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의 관계다. 페르시아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했지만, 대왕이 죽은 뒤에 생겨난 헬레니즘 국가들은 그리스인이 지배할 수 있었던 지방, 즉 과거의 페르시아 영토에서도 지중해에 가까운 서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인들을 자국 안에 끌어안고 있는 것이 로마인이다. 따라서 로마와 파르티아가 본격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폼페이우스가 헬레니즘 국가들을 제패했을 때였다. 그 후의 경과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는 헬레니즘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멸망시켜, 오리엔트 일대에 로마의 패권을 확립한다. 헬레니즘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이집트는 이미 로마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제3권 참조)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 및 카이사르와 함께 삼두정치의 한 축을 이루었던 크라수스는 당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폼페이우스나 갈리아에서 계속 전과를 올리고 있는 카이사르에게 자극을 받아, 파르티아를 제압하려고 동방 원정에 나선다. 하지만 이 원정은 1년 뒤 무참한 패배로 끝났다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도망친 카시우스를 제외하고, 총사령관 크라수스를 비롯한 장교들은 모두 전사했다. 원정군 4만 가운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기병 500기를 포함해도 1만 명이 채 안 된다. 2만 명은 전사하고, 1만 명의 포로는 파르티아 왕국 북동쪽 끝에 있는 메르부로 보내져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병역에 종사해야 했다. 메르부는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다. 변방으로 유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4권 참조) 기원전 44년, 폼페이우스를 격파하여 내전을 종식시킨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한다. 9년 전의 패배를 설욕하는 것, 그럼으로써 로마의 힘을 중동 지역에 재인식시키는 것, 1만 명의 로마 병사를 구출하는 것이 이 원정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출정을 눈앞에 둔 3월 15일, 브루투스 일당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제5권 참조)
기원전 36년,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에 맞서 동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안토니우스와 그의 애인인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야망이 일치한 결과, 두 번째 파르티아 원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번 원정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11만 명의 원정군은 8개월의 원정동안 2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파멸적인 패배는 아니었지만, 원정이 실패한 것은 변함이 없다.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려고 한 안토니우스의 야망은 이때 당한 패배의 영향으로 결국 무너지게 된다. (제5권 참조)
기원전 21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제국 동방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제국을 창설한지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문제 해결에 나선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를 군사가 아니라 외교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대화로 해결하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군대를 보내 동맹조약을 맺은 다음, 그 동맹관계를 무기로 삼아 파르티아를 우호조약 교섭장으로 끌어낸 것이다.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가 로마의 패권 아래 들어간 것을 인정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의 경계로 정하여 상호불가침을 약속하며, 양국 간 통상의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것이 조약 내용이었다. 파르티아 쪽은 이 조건을 모두 받아들였다. 교섭은 유프라테스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에서 이루어졌고, 당시 21세였던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으로 참석하여 조인을 끝냈다.
33년 전 크라수스의 패배와 15년 전 안토니우스의 패배 당시 파르티아에 빼앗겼던 독수리 깃발(로마 군단기)은 모두 반환되었다. 파르티아 병사들이 전리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로마 장병들의 갑옷과 반환되었다 그러나 포로 송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33년 전에 메르부로 보내진 로마 병사들은 이미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제6권 참조). 그 후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70여 년 동안이나 평화가 지속된다. 하지만 전형적인 동방의 전제국가인 파르티아 왕국에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그 내분이 수습되기 어려워지면 당장 대외 강경책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파르티아의 입장에서는 같은 페르시아 문명권인 아르메니아가 다른 문명인 로마 제국에 속해 있는 것을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오래 지속되고 있던 평화가 깨진 것은 네로 황제 시대에 접어든 뒤였다. 공세로 나온 것은 이번에는 파르티아 쪽이었다 로마는 명장 코르불로를 파견한다.
코르불로는 네로한테 대군의 지휘권과 문제 해결에 대한 백지 위임장까지 부여받았고, 게다가 군사적으로는 계속 이기고 있었지만, 오리엔트의 현실을 직시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 무장이었다. 그는 국가형태부터 생활 습관에 이르기까지 로마보다 파르티아에 훨씬 가까운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패권 아래 계속 놓아두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 코르불로가 제안하고 파르티아 왕이 받아들인 타협책은, 파르티아 왕이 바라는 인물을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히되 그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일은 로마 황제가 맡는다는 것이었다. 실리보다 명분을 택한 이 해결책을 네로 황제도 승인한다 서기 65년,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가 로마를 방문하고 네로 황제가 그에게 왕관을 씌워줌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다시 평화가 도래했고, 이 평화는 반세기 동안 한번도 깨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코르불로가 밥상을 차려주었다고는 하지만, 외치에서 보여준 네로의 정치 감각은 상당한 것이었다. (제7권 참조)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파르티아가 얼마나 반기고 있었는지는, 서기68년부터 70년까지 로마가 내전과 유대 반란 등으로 위기에 직면했을 때에도 파르티아가 그 위기를 틈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군을 보내주겠다고 로마 쪽에 제의한 사실에도 나타나 있다. (제8권 참조) 트라야누스가 물려받은 것은 이런 상태의 '파르티아 문제'였다. 원정이라는 군사적 해결에 호소할 필요는 사실상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오랜 평화는 당사자들을 방심시킨다. 파르티아의 도발 행위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로마인에게 '파르티아 문제'는 언제나 아르메니아 문제에서 파급된다. 그것은 파르티아 인이 아르메니아를 자국의 권역에 속해 있는 나라로 자리 매김하고, 파르티아 궁정에서도 아르메니아 왕을 파르티아 왕에 버금가는 지위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로의 평화협정이 장수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르티아 왕은 전제군주이고, 전제군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적보다 내부의 적, 즉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위험 인물은 명예와 권력과 부에서 파르티아의 2인자라고 해도 좋은 아르메니아 왕으로 삼아서 멀리 보내버리면, 파르티아 왕의 지위도 평안무사할 터였다.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는 로마의 명장 코르불로에게 심취했고, 로마를 방문한 뒤에는 네로 황제를 형으로 생각했으며 , 네로가 기술단을 파견하여 아르메니아의 수도 재건을 도와주자 감사의 표시로 수도를 네로폴리스로 개명하는 등, 대단한 로마 동조자가 되어 있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파르티아 왕가에서 태7난 티리다테스는 서기 37년 생인 네로보다 몇 살 아래였다고 한다. 그는 장수를 누렸고 오랫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까, 네로보다 서너 살 아래였다면 트라야누스가 즉위한 98년에는 아직 건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그 무렵 파르티아 왕은 들로게세스에서 파코루스로 바뀌어 있었다. 파코루스 왕은 티리다테스가 죽자마자 아르메니아 왕위에 제 아들인 악시달레스를 앉힌다 이때도 네로와의 협정은 지켜졌다니까, 시리아 속주 총독이 황제를 대신하여 아르메니아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 110년에 파코루스가 죽었다. 파르티아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파코루스의 동생 오스로에스였다. 즉위한 지 2년도 지나기 전에 오스로에스는 조카인 악시달레스를 무능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파르타마실리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임명했다. 아르메니아왕위를 둘러싸고 형제끼리 두 파로 나뉘어 싸움이 일어났다. 파르타마실리스가 파르티아 군대의 지원을 받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자, 악시달레스 왕은 로마 황제에게 도움을 청했다. 로마와 아르메니아는 동맹관계에 있다. 동맹자의 한쪽이 도움을 청하면 다른 한쪽은 거기에 응할 의무가 있다. 또한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한테 한마디 의논도 하지 않고 아르메니아 왕을 갈아치운 것은 평화협정에 위배되는 행위이기도 했다. 파르티아 왕의 방식이 로마 황제의 체면을 손상시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파르티아가 로마를 직접 공격해온 것은 아니다. 게다가 동생의 공격을 받은 아르메니아 왕 악시달레스는 백성의 지지 덕분에 뜻밖에도 선전하고 있었다. 굳이 원군을 파견한다면,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카파도키아의 2개 군단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이번 사태를 파르티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한다. 그가 생각하는 근본적 해결이란군사력으로 파르티아를 쳐부수는 것이었다. 어쨌든 장애물에 부닥치면 우회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정면 돌파를 감행하는 사람이다. 45세에 로마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도 어느덧 환갑을 맞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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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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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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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2장 12시 정오 (2/2)
피렌체 사람들은 그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알고 있었으나, 모두가 고통 속에 있었떤 것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도시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곤팔로니에레의 정적이었던 유력 시민들은 비록 그들 모두가 메디치 가의 추종자들의 예외 없이 곤팔로니에레의 적이었으므로 물론 확호작약하였다. 심지어는 메디치 가의 친구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도 아닌 사람들까지도 재정을 축내는 것을 극히 못마땅해했고, 귀차르디니의 관측과 같이 중립은 오직 강한 자를 위한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중립으로 남고 싶어했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에 사절로 가 있는 동안 이러한 사태와 이러한 분위기가 점점 더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그 병이 어떤 것인지를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피사에서 돌아와, 자신이 출발한 후 이틀째 밤에 정무궁 첨탑에 떨어진 벼락이 서기국 사무실을 통과하여 문 위에 새겨진 세 송이의 황금 백합을 찢어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곧장 프랑스 왕과 피렌체 정부 양쪽 모두에게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마키아벨리 역시 당시의 여느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전조를 믿었으며 그리하여 예감 같은 것을 느꼈다. 11월 22일, 그는 서기국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첫 번째 유언을 남겼다. 얼마 후 곤팔로니에레도 그 뒤를 따랐다. 피렌체인들은 내분과 탐욕과 시간 벌기의 정책에 막혀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1512년초 아라곤의 왕에게 도시의 비범한 청년 한 명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였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이 피렌체인들은 (그에게 동맹국들의 불쾌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을 만한 훈령을 내리지 않았다.) 훈령을 써서 그에게 넘겨준 인물은 바로 서기장이었고, 따라서 이 위대한 정치가 두 사라믐은 당시 서로 대면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냉요을 구술한 것은 소데리니와 그의 정파였다. 그로 인해, 이 임무는 (프랑스 왕을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을) 뿐, 동맹국을 달래는 데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피렌체는 점점 더 신에게서나 적에게서나 미움을 사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화국을 위해서난 그 자신의 재능에 비추어서나 그에게 주어진 권한은 너무나 미미했다. 피사에서 돌아온 뒤인 1511년 12월 2일, 그는 모병을 위한 피렌체령 로마냐로 떠났다. 이듬해 2월 19일, 그는 정무궁 광장에서 300명의 기별대로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3월 30일, 그동안 애쓴 결과로 드디어 그가 계획해 온 기병 민병대 안이 통과되었다. 5월말경엔 그는 내성의 수배대를 다시 짜기 위해 피사로 떠났다. 하지만 시에나로 가 판돌포 페트루치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당시까지도, 그는 여전히 하류 족 발다르노에서 모병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시에나를 거쳐 6월 6일 피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기병대 일을 보며 이럭저럭 보내다가 같은 달 15일 이후에야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 사이 사태는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공화국이 전쟁을 아직 먼 후의 일로 보고 그에 맞추어 대비 태세를 해나가고 있는 동안, 줄리오 2세는 그들의 코앞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용맹무쌍한 전사였던 가스통 드 푸와를 저 세사으로 떠나보낸 라벤나 대전투의 다음날, 프랑스는 전날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황제 군으로부터 이탈한 스위스 군대의 압박에 밀려 삽시간에 전쟁에서 패배하고 롬바르디아마저 잃고 말았다. 이러허게 전세가 역전된 가운데, 피아렌차, 파르마, 로마냐의 모든 지역, 그리고 볼로냐까지 교회의 손에 넘어갔다. 줄리오 2세는 승리했고, 피렌체는 그 무시무시한 노인 앞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교황은 로렌초 푸치를 보내 피렌체가 반프랑스 동맹에 들 것과 전쟁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해 왔다. 피렌체인들은 얼마간 돈을 내겠지만 동맹에 합류하는 것은 좀더 두고 보자고 응답하였다. 이는 어떤 제의를 거절하는 상투적인 방식이었다. 그 직후, 만토바에서 희동한 교황 동맹은 피렌체를 공격하여 정부를 교체해 버리기로 생각을 모았다. 그리하여 나폴리 총독인 라이몬드 다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에스파냐 군의 토스카나로 집입해 들어왔다. 메디치 추기경이 교황 사절로서 그들과 동행하였다. 그는 최근까지 프랑스에 의해 라벤나에 투옥되어 있다가 풀려났는데, 지금은 교황의 총신이 되었을 뿐 아니라 운세도 그의 쪽으로 풀려나가고 있었다.
피렌체인들은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나라 구석 구석에서 병사들을 급조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아직 미비한 민병대를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피렌체는 군대라곤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고 능력 있는 장군도 없었다. 적에 대처하기 위해 마키아벨 리가 파견되었다. 그는 이미 6월 내내 교황군의 동향을 살피느라 바뻤다. 그들내에 반정부 세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렌체 정부는 통로를 열어달라는 교황을 요구를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7월이 되자 그는 이미 전쟁의 냄새과 풍기는 무젤로에서 병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는 보병 천 명을 모아 피렌추올라에서 적군과 맞 설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급히 돌아오라는 내용으로 10인위원회가 8월 24일에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하였다. 로 스탈레를 경유하여 진군하고 있던 에스파냐 군이 지금 바르베르노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렌체 군 지휘곤들은 군대의 주력을 도시 성벽 가까이에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12시 정오에 다다른 지금, 마키아벨 리가 있어야 할 장소는 바로 그곳이 아니겠는가! 그곳에서 그는 보오나코르시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그는 에스파냐 군이 캄피에까지 들어왔음을 전하면서, 곤팔로니에레를 위해 (뭔가 좀 조치를 취해 보라고) 얘기하였다. 그는 적이 그렇게 코앞에까지 다가온 데 대해 (놀라서 마음이 영 편치 않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대체 그들이 연습 삼아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던가? 이 가엾은 위인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단지 그의 서기장이 그 다재다능함으로 무슨 기적이라도 일으켜주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총독이 그가 관직에서 물러날 것과 메디치 가 사람들이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자, 그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에게 맡긴 시민들뿐이라고 용기 있게 응대하였다. 또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의 용기로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총독은 프라토로 진군해 들어왔다. 그곳에서 3,000명의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첫 공격이 격퇴되고 적이 보급 부족과 허기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곤팔로니에레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천 소마(1soma는 70-71kg임 - 옮긴이) 정도의 빵으로 좀도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할 여지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말로는, (현자들 i Savi) (평소 그의 문투로 보건데 바로 자기 자신)이 이러한 방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곤팔로니에레는 소십한 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갑자기 지나치게 대담해져서 이를 묵살해 버렸다. 두 번째 공격 앞에는 프라토의 성벽도 민병대의 기세도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전에 한번도 적군이라는 존재와 대면한 적이 없는데다가, 그 적이란 것이 라벤나에서의 패배 이후 거의 승승장구해 오다시피한 공포의 에스파냐 군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결국 프라토는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바로 교황 사절이 보는 앞에서 살인과 성물 파괴와 강간이 수도 없이 자행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피렌체인들은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곤팔로니에레와 같이 있었던 마키아벨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여전히 (스스로의 허망한 판단에) 집착하고 있었다. 31일, 네명의 귀족 청년이 그의 마음을 바꾸기 위해 왔다. 그 중에는 프란체스코 베토리의 동생인 파올로도 끼어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보내 프란체스코를 데레오게 했다고 말했다. 이제 (홀로 두려움에 떨게 된) 곤팔로니에레는 만일 안전을 약속해 준다면 즉시 정무궁을 떠나리라 작정하였다. 프란체스코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레갔고, 밤을 도와 시에나로 향하는 그와 동행하였다. 이는 실각이라기보다는 도망에 가까웠다. 도시와 곤팔로니에레의 운명이 아직 완전히 희망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이때 이미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냉소적 행로에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소데리니의 실각으로 협상을 쉽게 마무리되었다. 메디치 가는 사인(사인)으로서 피렌체로 돌아왔고 정부가 개편되었다. 새 곤팔로니에레는 종신제에서 14개월의 임기제로 바뀌고 대평의회에서 선출하게 되었다. 이에 조밤바티스타 리돌피가 뽑혔는데, 그에게는 (유력 시민들의 수장이자,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고귀한 태생에다 위엄 있는 풍모를 갖추었으며, 그 격랑 속의 바다에서 기우뚱거리는 배를 바로 이끌어줄 훌륭한 키잡이)라는 수사가 뒤따랐다.
그러나, 바다가 거칠건 배가 기우뚱거리건, 또는 알려진 대로 메디치 간와의 친족 관계가 그를 현혹시키고 부패하게 만들었건 간에, 리돌피는 자신의 통치 초기에 보여준 단호함과 엄격함을 지속하지 못했다. 메디치 가의 문 안에서는 추기경에 의한 모의가 계획되고 있었다. 9월 16일 줄리아노를 비롯한 음모 가담자들은 무기를 숨기고 정무궁 안으로 들어갔고, 신호에 따라 광장이 병사와 사람들로 가득 차자 그들은 곧 정무궁을 장악하였다. 팔레 palle! 팔레(단수형 (palla)는 공 모양의 메디치 가 문장(문장)을 가리킴. 즉 메디치 가를 지지한다는 뜻 - 옮긴이) 간단히 말해서, 폭력과 공포 속에서 전체시민회의 parlamento((arengo)라고도 불리며, 사제를 제외한 성년 남성 시민으로 구성되는 전체 회의를 가리킴-옮긴이)를 세우는 상투적인 방시긍로 자유는 끝장나고 말았던 것이다. 일찍이 한 사제(사보나롤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됨-옮긴이)가 피렌체 사람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경고는 대평의회장의 대리석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단지 모래 위에 씌어졌을 뿐이었던가?
난 아네. 전체시민회의를 열자는 것은 정권을 빼앗아가겠다는 말이란 것을
월권적이긴 하지만 예부터 내려오던 관습에 따라 광장의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메디치 가를 지지하는 폭도들에 의해 선출된 비상개혁위원회는 행정 조직과 시민의 자유를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9월 18일, 우선 민병대를 총괄하던 9인관제위원회가 해산되었고, 마키아벨리가 만든 민병대 조식이 와해되었다. 소데리니는 추방되고 대평의회는 폐지되었다. 곤팔로니에레로 뽑힌 리돌피는 그 자리를 (두 달이 못 가 그만두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임은 사실상 등을 떠밀리다시피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도시는 로펜초와 피에로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 같았고, 모든 일이 메디치 추기경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이 같은 소란 속에서도 마키아벨리에게 관심을 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글에서조차 그는 잊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그가 리돌피 정권 아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공사를 막론하고 어떤 기록들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전기 작가들도 기록상의 공백을 메꿀 만한 어떤 그럴 듯한 추정을 해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옛 읍도파의 일원이자 소데리니의 첨예한 경쟁자이며 유력 시민 계급의 수장으로서 비중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이 평시민 출신에다가 실각한 곤팔로니에레의 행신 나쁜 (아첨꾼)정도롤 생각했든 그를 결코 좋게 볼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당시 서기장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고, 어디 서기국 한 구석에서 의기소침해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는 그곳에서 (끝없이 따라오는 스스로의 불운)을 곱씹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일거리를 후딱후딱 해치우고 있었을 법하다. 그들 둘러싼 모든 것이 변했고, 그가 보는 얼굴들도 함께 바뀌었다. 한때 그는 정무궁에서 자신의 직위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의 그는 단지 미관말직에 있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꿈을 좋아하는 시인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고, 때로는 스스로의 삶 그자체이자 소명이기도 했던 그 관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까지도 품고 있었을 것 같다. 비록 정권은 바뀌었으나, 그는 자신의 펜과 자신의 재능으로 권력에 봉사하는 문필가인 것이다. 이는 예술가, 군인, 시인과 같은 경우였다. 그는 파당이 아니라 국가의 충복이었다. 그는 평시민 정부 아래서 공화국에 충실히 봉사해 왔으며, 이는 메디치 정부 아래서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가 새로운 권력에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들 속에도 끼지 않고 얼마 후 자신의 글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스스로를 사람들과 메디치 가에 팔아넘기는)그런 유에도 속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지배자를 단지 경멸의 눈으로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친 메디치적이라는 것만 확인되는 한 이름 모를 (귀부인)에게 당시의 사건드을 설명하는 글에서 그들에게 복종의 염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느느 자신이 (메디치 가에 올리는 글 Ricordo ai palleschi)에서, 권력작에게 알랑거리기 우햬 미주알고주알 소데리니의 잘못을 파헤쳐 비난하려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짓이라고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9월 29일, 1494년 메디치 가가 쫓겨날 때 몰수된 재산을 점검하여 되돌려 주기 위해 5명의 관리가 선임되었을 때, 그는 좀더 솔직하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추기경에게 현명하고도 관대한 정치력을 발휘해 주십사 진언하였다. 아마 대(대) 로렌초 정도의 인물이었다면 러한 진언에 대해 적어도 말로나마 고마움을 표했을 법하다.
그러나 추기경은 말로든 행동으로든 아무런 고마움도 표시하지 않았다. 서기장이 아직도 환상에 빠져 재치와 우아함이 넘치는 자신의 글재주로 찬사와 호의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머지않아 그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었다. 메디치 가는 중립노선을 취했던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에게 제1서기장을 직을 그대로 수행하도록 했지만, 소데리니의 (아첨꾼)으로 행동에서나 글에서나 그토록 반 메디치적이었던 인물을 용서할 리가 없었다. 또한 물론 마키아벨리로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로마나 프랑스 궁정에서 메디치 망명객들에게 그가 보인 쌀쌀맞은 태도도 그냥 잊혀질 리 만무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뭔가 상을 주어야할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11월 7일, 정무위원회의 결저응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의 서기장 직과 10인 위원회의 서기장 직에서 (해임되어 그 일에서 완전히 격리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서기보였던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도 같은 운명이었다. 서기장 한 사람이 물러나는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적지 않았던 연대기 작가나 일기 작가들 중 어느누구도 이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마키아벨리의 불행이 자유 피렌체의 몰락보다도 더 중요한 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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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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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엄한아버지
아버지가 자식을 몹시 엄하게 다루고 있었다. 옆집 사람이 보다 못해 참견을 했다.
“애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리 엄하게 다스리는 게요?”
“아까 댁이 낮잠을 자고 있었을 때, 내 아들이 댁의 쌈지에서 만 냥을 흠쳤소. 그래서 혼내고 있소이다.” 옆집 사람이 자신의 쌈지를 열어보았다.
“내 쌈지에는 동전 한 냥밖에 없었고, 아닌 게 아니라 한 냥이 없어졌구려.”
“옛말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된다고 하지 않았소. 이 녀석이 지금 한 냥을 훔쳤으나 가만히 두면 만 냥 훔친 것과 같이 엄히 다스리고 있는 거요.”
성경의 잠언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네 자식을 엄하게 키워라. 그러면 그가 너의 마음에 평안을 줄 것이다.’
‘아이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꾸짖고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키면 지혜를 얻게 되지만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면 자식이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자식은 어릴 때 엄하게 꾸짖어 버릇을 잡고 자란 뒤에는 꾸짖으면 안 된다. 아울러, 엄하게 가르치되 자식이 부모를 두려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좀도둑때 버릇을 단단히 가르치면 큰 도적이 되지 않는다.(Hang a thief he is young, and he will not steal when he is old.)
우리는 아이들을 어릴 때‘놔 먹이다’가 어른이 되면‘바짝 다그치는’교육을 하고 있다. 어릴때는 엄하게 가르치고 어른이 되면 놔 먹이는 교육을 하는 것이 훨씬 좋다.
부자와 마누라
부부가 잘 싸우는 집에는 드나들지 말라는 말이 잇다. 그런 집안 사람과 사귀어봐야‘잘해야 본전’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잘 벌어다 주어도 부인이 이를 잘 관리하지 못하면 시루에 물 붓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집과 재산은 부모에게 물려 받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좋은 아내를 얻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은 사람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부자가 되려면 부인의 내조가 필수적임은 두말할 나위없는 사실이다.
현숙한 아내
현숙한 아내는 집안 일을 열심히 하고 남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항상 좋은 일만 하라고 충고한다. 또 먹을 양식을 준비하고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가족을 위한 식사준비를 하고, 집안 식솔들을 잘 다스리며, 모은 돈을 이익이 될 만한 곳에 투자하며, 강건하고 열심히 일한다. 그녀는 남에게 유익한 일을 밤 늦게까지 하여 주고, 가난한 사람이나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입힐 따뜻한 옷을 준비하였으므로 겨울이 닥쳐와도 염려하지 않는다. 그녀는 침실을 아름답게 꾸미고 아름다운 옷을 항상 입어 남편을 즐겁게 한다. 집에서 시간시간 사이에 만든 물건을 내다 팔아 돈을 모으고 말은 지혜롭게 친절하게 하며, 집안에서 그냥 놀고 먹지 않는다. 집안이야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부부 사이에도 평소부터 삼가고 조심하여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주부가 있는 집안은‘잘 되지 말라고 정한수 떠놓고 고사를 지내도’잘 될 것이다.
솔로몬은 이러한 현숙한 아내가 이 세상에 있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문을 표시하였다.
‘도대체 누가 이러한 현숙한 아내를 얻겠는가?’
만약 이러한 아내가 있다면 남편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날마다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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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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