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59호 - 2024.9.23. 월요일(음력 : 8.21.)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함께 웃은 사람은 잊혀져도 같이 운 사람의 이름은 못 잊는 법. - 아랍 속담
|
|
글나눔 → 말글
|
|
|
먼지떨이와 신발털이
밖에서 들어오면 신발에 흙이 묻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럴 때 신발의 흙을 ‘떨고’ 들어가야 할까, ‘털고’ 들어가야 할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떨다’가 맞다. 그런데 우리말은 참 미묘해서, 흙을 떼어 내려면 신발을 치거나 흔들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신발을 털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까 신발을 ‘털어서’ 흙을 ‘떠는’ 것이다.
이와 같이 ‘떨다’와 ‘털다’는 무엇이 대상인지에 따라서 구별해서 써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떨다’는 붙어 있는 것을 쳐서 떼어 내는 것이고, ‘털다’는 붙어 있는 것이 떨어지게 흔들거나 치는 행위이다. 즉 옷에 묻은 먼지, 눈, 재 따위를 ‘떨다’라고 하고, 먼지, 눈, 재 따위가 묻은 옷을 ‘털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먼지떨이’와 ‘신발털이’는 구별된다. ‘먼지떨이’는 벽이나 창틀의 먼지를 ‘떨어’내는 물건이고, 신발털이는 신발을 ‘털어’ 주는 물건이다. 흔히 ‘재떨이’인지, ‘재털이’인지 혼란스러워 하지만, 이제 ‘재떨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떨다’ ‘털다’가 그리 엄격하게 구분되어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 흔히 “머리의 눈 좀 털어라” “바지의 먼지 좀 털어라”처럼 ‘떨다’라고 할 것을 ‘털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두 단어의 쓰임을 달리 설명하기도 한다. 그 중 눈에 띄는 견해로는 ‘털다’는 흩어져 날리는 대상에 쓴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옷에 붙은 먼지, 눈, 재 따위는 ‘터는’ 것이 된다. 이러한 설명은 위 국어사전의 뜻풀이와는 꽤 다르다.
물론 ‘떨다’와 ‘털다’는 사전적 의미에 따라 정확히 구별해서 써야 한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그러한 구별이 잘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화자들의 실제 쓰임에 따라 국어사전의 뜻풀이를 재검토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온라인’, ‘원룸’의 발음
우리말에는 표기대로 발음하기 곤란한 단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협력’을 표기대로 [협력]으로 발음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말에서는 받침 ‘ㅂ’ 뒤에 오는 ‘ㄹ’은 [ㄴ]으로 발음해 [협녁]으로 발음하는데, 여기서 또 ‘ㄴ’의 영향으로 그 앞의 받침 ‘ㅂ’이 ‘ㄴ’과 같은 비음 계열인 ‘ㅁ’으로 바뀌어 결국 [혐녁]으로 발음하게 된다. ‘막론’의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막론→막논→망논’의 과정을 거쳐 [망논]으로 발음한다.
‘신라’ 역시 이를 표기대로 [신라]로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받침 ‘ㄴ’을 뒤에 오는 ‘ㄹ’과 동화시켜 [실라]로 발음한다. ‘인류’를 [일류]로, ‘삼천리’를 [삼철리]로 발음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온라인’과 ‘원룸’도 소리를 동화시켜 [올라인], [월룸]으로 발음하는 것일까? 아니면 ‘on’과 ‘one’의 뜻을 살려 [온나인], [원눔]으로 발음하는 것일까?
‘온라인(on-line)’, ‘원룸(one-room)’은 모두 외래어이기 때문에 표준 발음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소리의 동화는 우리 고유의 말에만 적용되는 발음 원칙이기 때문에 이를 ‘온라인’과 ‘원룸’처럼 영어에서 온 말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대신 ‘on’과 ‘one’의 뜻을 살려 [온나인], [원눔]으로 발음하는 것이 단어의 의미를 더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9ㆍ11 테러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미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 중에서 ‘빈 라덴’을 [빌라덴]으로 발음하지 않고 [빈나덴]으로 발음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덕수궁의 오후 - 천상병
나뭇잎은 오후, 멀리서 한복의 여자가 손을 들어 귀를 만진다.
그 귀밑볼에 검은 혹이라도 있으면
그것은 섬들에 떨어진 작은 꽃이파리
그늘이 된다.
구름은 떠 있다가
중화전의 파풍에 걸리더니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
이 잔디 위와 사도
다시는 못 볼 광명이 되어
덤덤히 섰는 솔나무에 미안한 나의 병
내가 모르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한다.
어리석음에 취하여 술도 못 마신다.
연못가로 가서 들을 주워 물에 던지면
끝없이 떨어져간다.
솔나무 그늘 아래 벤치
나는 거기로 가서 않는다.
그러면 졸음이 와 눈을 감으면
덕수궁 전체가 돌이 되어 맑은 연못 속으로 떨어진다.
∼∼∼∼∼∼∼∼∼∼∼∼∼∼~~~~~~~~~~~~~~~~~~~~~~~~~~~~~~~~
조찬 - 정지용
해ㅅ살 피여,
이윽한 후,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길경 꽃봉오리
흔들려 씻기우고.
차돌부리
촉 촉 죽순 돋듯.
물 소리에
이가 시리다.
앉음새 가리여
양지 쪽에 쪼그리고,
서러운 새 되어
흰 밥알을 쫏다.
~~~~~~~~~~~~~~~~~~~~~~~~~~~~~~~~~~~~~~~~~~~~~~~~~
봄 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어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척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는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1957>
~~~~~~~~~~~~~~~~~~~~~~~~~~~~~~~~~~~~~~~~~~~~~~~~~
길 - 이해인
아무래도
혼자서는
숨이 찬 세월
가는 길
마음 길
둘 다 좁아서
발걸음이
생각보단
무척 더디네
갈수록
힘에 겨워
내가 무거워
어느 숲에 머물다가
내가 찾은새
무늬 고운 새를 이고
먼 길을 가네
|
|
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
|
|
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15.이야기나 우화의 교훈은 어린이 자신이 생각토록 한다
우화는 지혜의 보고
내가 알기로는 유태인만큼 이야기를 즐기는 만족도 드물 것이다. 구약성서가 장대한 이야기의 보물창고라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탈무드> 역시 기원전 5백 년 전부터 기원후 5백 년에 이르기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들을 10년 동안 약 2천명의 학자들이 모여서 엮은, 1만2천 페이지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책이다. 이것은 평생동안 읽어도 모두 읽을 수 없는 대단한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해내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다. 이처럼 이야기를 좋아하는 유태인 부모가 자녀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교훈적인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린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는 이야기 속의 교훈을 이해하도록 노력해야만 된다. 우리 집에서도 남편이 아이들에게 우화를 들려주면서, 그 우화의 교훈을 아이들 스스로 이해하고 터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야기의 출처는 대부분이 <탈무드>인데, <탈무드>에는 사고력을 기를 수 있는 내용의 이야기가 많이 들어 있다.
유태민족의 입에 흔히 오르내리는 '두 머리의 어린이'이야기가 있다.
"만약에 머리가 둘인 아기가 태어난다면, 이 아기는 두 사람인가 한 사람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대답을 상상하면서 사고능력을 기르게 된다. 그런데 <탈무드>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만약 뜨거운 물을 한 쪽 머리에 부었을 때 양쪽이 다 비명을 지르면 한 사람이고, 한 쪽만 비명을 지른다면 두 사람이다. 이 이야기를 그저 하나의 우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태인에게는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랍비가 말한 것처럼, 유태민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유태인이 박해를 받거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고난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유태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유태인이 아니다."
이처럼 유태의 어린이들은 우화를 통해서 스스로 교훈을 터득하는 훈련을 하고, 또 그 교훈을 통해 민족애를 습득하는 효과도 얻는 것이다.
이야기의 해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성서 중에 흔히 인용되는 부분은 '창세기'의 첫 부분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6일 동안 하루가 끝날 때마다 '좋았더라'라고 말했는데, 둘째 날만은 그 말이 빠져 있다. 바다와 육지를 나누는 작업을 셋째 날로 넘기고 말았기 때문이다. 둘째 날에 하나님은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나누었는데, 랍비들은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하게 되었다. '나눈다'는 것은 천지창조에는 필요했지만, 그것은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랍비는, 그렇다면 빛과 어둠을 나눈 첫째 날에 '좋았더라'라고 한 것은 어찌 된 것이냐는 반론을 내세웠다. 그러자 '빛과 어둠은 이질이므로 동질인 물을 나눈 둘째 날과는 다르다'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하여 '태양은 밤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달은 낮에도 보이는가'라고 반박한 랍비도 있었다. 논쟁은 계속된다.
"하나님은 태양과 달을 만드셨다. 달은 하나님에게 하나의 세계에 두 개의 위대한 빛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한 달은 그 벌로 빛이 약해지고 작아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달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하고, 그 대가로 태양은 절대로 밤에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대신에, 달은 낮에도 모습을 나타나게 했다."
이렇듯 유태인 자녀들은 서로의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스스로 그 이치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유태의 이야기나 우화들은 오직 한 가지 해답, 즉 정답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물론, 동양에도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는 성서나 <탈무드>와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손치더라도, 어른들이 그것을 오직 한 가지 해석으로 국한시켜 자녀들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자녀들의 머리 쓸 기회를 빼앗아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유태의 이야기나 우화들은 오직 한 가지 해답, 즉 정답에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함으로써, 그것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16.어떤 장난감이라도 교육용 완구가 될 수 있다
유태인 엄마들은 '교육환경 엄마'
유태인 엄마들은 '교육 엄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동양, 특히 일본의 '교육 엄마'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녀들을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자녀들의 지능지수에 신경을 쓰거나 천재교육 등 남보다 특별나게 가르치려는 일 따위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린이의 지적 성장을 돕기 위해 교육환경을 정비하고, 그런 적절한 환경 속에서 자녀들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뿐이다.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장난감이다. 유태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장난감 하나를 주더라도 언제나 교육적인 면을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육완구',즉 학교 공부와 직결되는 장난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선택 방법에 따라서는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장난감은 한 살에서 세 살까지의 어린이들에게 갖가지 감각적인 자극을 주며, 운동 신경을 발달시키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구이다. 그러므로 장난감을 선택할 때 어린이의 마음과 두뇌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측면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조상 대대로 어떤 장난감을 선택해 왔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확대경.
집짓기 나무: 모서리가 정확하게 갈라진 반들반들한 것이 좋다. 정삼각형이나 정방형 등 기본적인 형태를 두루 갖춘 것이면 더욱 좋다.
록박스: 뚜껑을 잠갔다 열 수 있는 장난감 통.
플래시 라이트: 회전전등 같은 것.
단순한 리듬의 악기: 벨, 트라이 앵글, 탬버린, 드럼, 심벌즈, 실로폰 등.
분해할 수 있는 것.
소꿉놀이용 모자: 어린이가 각종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러 모양의 세트로 되어 있는 것.
큰 자석.
숫자 맞추기 퍼즐판.
완성품이 아닌 장난감 집.
농장놀이 장난감:동물 등.
세 살이 지나면 흉내낼 수 있는 장난감을 준다.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의 어린이에게는 감각이나 운동신경에 자극을 주는 장난감보다는 지적 자극을 주는 장난감을 선택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장난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집짓기 나무: 공간이 허락하는 한 큰 것을 사주는 것이 좋다. 어른 흉내를 내는 장난감: 유태인들은 어른을 흉내내는 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특히 이런 종류의 장난감을중요시한다. 병원놀이, 은행놀이, 살림살이, 목수도구, 원예놀이 등이 있는데 위험하지만 않다면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는 실제로 어른들이 사용하거나 사용하다 버린 것들이 좋다. 그림과 조각도구: 크레용, 핑거 페인트, 색연필, 분필, 칠판, 찰흙, 색종이 등. 악기: 플레이어, 드럼 등 세 살 이하 때에 가지고 놀던 것도 좋다.
연극용 소도구: 마스크, 의상, 가발, 화장품 등.
손가락으로 하는 놀이: 주사위, 퍼즐, 도미노 게임, 간단한 보드 게임등. 사람을 가르치는 장난감: 아기인형, 동물인형 등.
그러나 이상 열거한 것들을 무두 다 사준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 유태인 엄마들은 어린이에게 장난감을 구해 줄 때, 어느 한 편에 기울지 않고 전체적인 자극을 줄 수 있도록 필요할 때마다 장난감의 종류를 바꾸는 배려를 하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찮은 장난감이나 도구일지라도 선택 방법에 따라서는 기발한 지적 자극제가 되기도 한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플리니우스(2/2)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과 오리엔트 및 북아프리카를 망라하는 광대한 로마 제국을 황제들이 어떻게 다스렸는지는 누구나 품는 의문이다. 그리고 통치에는 정보가 필수 불가결하다. 로마인은 보고서나 훈령이 신속하고 안전하게 전달되도록 국영우편제도를 일찍부터 발달시켰을 정도니까,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공용을 목적으로 정비한 국영우편제도를 민간인도 차츰 활용하게 되는데, 이것은 군사전략상의 이유로 깔아놓은 로마 가도망이 민간의 물류에도 활용된 것과 같은 이치다. 로마 황제가 정보를 수집한 방법은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각 속주에 근무하는 공직자들의 보고서.
(2) 속주민의 청원이나 진정 .
(1)의 좋은 예가 바로 트라야누스 앞으로 보낸 플리니우스의 편지다.
(2)는 다시 네 가지로 분류된다.
<1>1년에 한번씩 수도 로마를 예방하는 속주 의회 대표들과의 면담. 예방이니까 원로원이나 황제와 면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정이다.
<2>요즘으로 말하면 로비 활동. 로마 시대의 표현으로는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인데, 이것은 <1>의 제도가 정착하지 않은 공화정 시대에 더 활발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할아버지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시대부터의 인연으로 북아프리카를 클리엔테스로 삼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는 자신이 제패한 오리엔트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역의 파트로네스였던 것은 유명하다. 정복해놓고 그 후로는 그 지방을 돌봐준다는 게 참으로 로마적이다.
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이런 관계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제는 정복의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공화정 시대와 같은 유명한 이익 대표는 자취를 감추었고, <1>의 제도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비 활동의 중요성도 줄어들기는 했지만, 지방과 중앙을 이어주는 존재가 있으면 유리할 건 뻔하다. 제정 시대의 파트로네스는 그 속주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속주민과 좋은 관계를 쌓은 사람이나 그 속주와 경제적으로 관계가 깊은 사람이다. 수도 로마를 예방한 속주 대표가 이런 사람들의 중개로 황제의 연회에 초대되어, 사적으로 황제와 접촉할 수도 있었다.
<3>속주가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는 방법. <1>과 마찬가지로 공식 루트인데, 청원이나 진정은 문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황제도 이를 위해 관저에 '문서' 담당 비서라는 접수창구를 마련했다.
<4>속주 총독에 대한 재판. 이것은 가장 과격한 정보 수집 방법인 동시에 중앙과 지방의 접촉 방법이기도 했다. 재판이니까 원고와 피고양쪽의 변론을 통해 총독의 통치만이 아니라 그 속주의 문제점까지 철저히 밝혀낼 수 있다. 게다가 그런 일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원로원이고, 피고도 검사도 변호인도 배심원도 모두 원로원 의원이다. 황제도 수도에 있을 때는 재판에 참관했다. 재판에 참관하기 위해 일부러 별궁에 가는 것을 연기한 황제도 있다. 속주 총독 재판은 속주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마련된 제도지만, 속주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인 황제는 이런 식으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제국 통치의 정략에 따라 잠정조치법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경우에는 훈령을 내리고, 정책화가 필요한 문제는 원로원에 돌려 법률을 제정한 뒤에 실행에 옮긴다. '전자우편'에 절대로 답변하지 않은 티베리우스 황제도 황제의 일상은 격무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로마 황제들의 치세는 암살당하지 않아도 기껏해야 20년 안팎에 불과한데, 그것도 어쩌면 이런 격무 때문인지 모른다.
트라야누스 시절에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는 것은 당대에도 후세에도 공통된 평가지만, 이런 평가를 받게 된 요인 가운데하나는 트라야누스가 남을 보살피는 일에서는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플리니우스는 어이없을 만큼 자주 친지나 친구에 대한 특별 배려를 황제에게 청탁한다. 병을 고쳐준 이집트 태생의 그리스인 의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라느니, 친구인 수에토니우스(황제열전의 저자)에게 '셋 이상의 자녀를 둔 사람의 특권'을 인정해 달라느니, 인격자인 플리니우스도 이때라는 듯 황제와의 연줄을 활용하려고 들었다. 트라야누스도 웬만하면 흘려듣지 않고 부탁을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뭐든지 다 들어준 것은 아니다. 트라야누스는 역시 양질이기는 하지만 보수주의자였다. 기득권층이라는 점에서 항상 황제보다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원로원과 사이가 좋았던 것도 이 유사점 때문이 아닐까. 제정 시대의 플리니우스도 공화정 시대의 키케로도 편지에 연줄 이야기만 늘어놓아서, 그들의 편지를 읽으면 로마 사회가 연줄로 움직이고 있었던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런데 연고에 의한 인재 등용이 그렇게 나쁜 제도일까.
로마인은 중국의 과거 같은 제도를 끝내 만들지 않았다. 당시의 대학이라 해도 좋은 그리스의 아테네나 소아시아의 로도스 섬이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했다고 해서, 단지 그것만으로 제국의 중추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엘리트 양성이나 인재 풀을 목적으로 한 기관은 원로원뿐이다. 아버지가 원로원 의원이라고 해서 아들이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계감사관이나 호민관에 당선되어 임기를 끝내야만 비로소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하지만 황제에게는 추천권이 있었기 때문에, 군단에서 잔다리를 밟아 진급한 사람도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로마인들이 인재 등용에 연줄을 중요시한 것은 그들의 현실주의적 성향의 발로라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연줄이란 책임지고 어떤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다. 인격과 재능이 모두 뛰어난 사람이 추천하면, 역시 인격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추천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항상 위험은 있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시험이라고 해서 무능하거나 악질적인 행정관이 배출될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 있을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키케로가 추천하는 젊은이라면 무조건 부하로 삼았는데, 그것은 키케로의 식견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도 플리니우스의 청탁을 거의 다 들어주는데, 이것도 역시 플리니우스의 성실성과 높은 공공심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인재 등용은 승부다. 등용하는 사람과 등용되는 사람만이 아니라 추천하는 사람도 이 승부에 참여시켜 관련자 모두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 로마인이 연고채용을 많이 활용한 이유가 아닐까.
청탁을 잘 들어준 결과든 어떻든 간에, 상대에게 호감을 사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똑같은 일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하면 원로원 의원들은 펄펄 뛰며 화를 냈지만, 트라야누스 황제가 하면 반발하기는커녕 자기들도 따라서 하고 불평도 하지 않으니 재미있다. 플리니우스가 황제 앞으로 보낸 편지는 대개 '도미네' (Domino)로 시작된다. 도미네란 나를 지배하는 자'라는 뜻인데, 이것이 기독교에서는 '신'이 되고 따라서 '주여'로 번역된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주군'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가 시문에 '도미네'라고 쓴 것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냥 두었다는 이유만으로 원로원 의원들은 화를 내고,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를 전제군주로 단정했다. 황제에 대한호칭은 '카이사르'나 '프린켑스' (제일인자)가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십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원로원 의원인 플리니우스는 황제를 '도미네'라고 부르고, 트라야누스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고,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타키투스도 그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게다가 트라야누스는 아버지와 누나가 죽은 뒤에 그들을 신격화하고 그것을 기념한 은화를 주조했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일어나지 않았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도미네'라고 불릴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도미네는 우리집 하인들이, 임페라토르는 병사들이, 프린켑스는 시민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원로원의 호감을 사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인간이란 정말 불가사의한 존재다.
어쨌든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의 평가가 아주 높은 황제였다. 원로원은 이 트라야누스에게 그때까지 어떤 황제도 받은 적이 없는 칭호를 선사한다. '옵티무스 프린켑스' (Optimus Princess) . 직역하면 '최고의 제일인자', 의역하면 '지고의 황제'. 트라야누스도 처음에는 사양했다. 하지만 결국은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일은 로마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황제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렇다면 로마인에게 이상적인 황제는 기독교도를 어떻게 생각하고있었을까. 또한 법치국가를 자임하는 로마 제국에서 변호사나 검사를 맡아 사법에 직접 관여한 경험이 있는 플리니우스는 기독교도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왕복 서한>에서 후세에 가장 유명해진 부분은 기독교도에 대한 처우를 둘러싼 두 사람의 응답이다. 그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속주 총독에게는 속주민에 대한 사법권도 부여되어 있었다.
"플리니우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주군이여, 제가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경우에는 주군의 생각을 먼저 여쭙는 것이 저의 방식이온데, 그것은 주군께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저를 인도하고 저의 무지에 빛을 던져주기에 누구보다도 적합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저는 한번도 기독교도의 재판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재판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증거가 있으면 기소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의 죄상이면 국가반역죄 또는 사교 신봉자로 처벌할 수 있는지. 그리고 피고발자의 나이는 형벌 경감의 사유가 될 수 있는지. 같은 기독교도라도 성숙한 어른과 25세 이하의 젊은이 사이에는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형벌에 차별이 적용되어야 하는지 기독교도가 된 것을 뉘우치고 그 신앙을 버린 자는 죄를 용서하고 사면해도 좋은지 아니면 지금은 아무리 뉘우치고있어도 과거에 기독교도였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야 하는지. 비난받아야 할 악행은 하나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악명 높은 조직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야 하는지. 저는 기독교도로 고발된 자들에게 일단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대처해 왔습니다.
그들에게 너는 기독교를 믿느냐고 세 번까지 묻습니다. 기독교도라고 답한 자에게는, 위증하면 고문을 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확인시킵니다. 기독교에 귀의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는 관계없이, 완고하고 무분별한 것만으로도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기독교도라고 주장한 자들 중에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도 있고, 그들은 황제에게 항소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로마로 송환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영향 탓인지, 기독교도에 대한고발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 양상도 달라졌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의 이름을 열거한 익명 고발이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첫째, 고발당한 자라도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언명한 자, 저의 첫 번째 심문에서 신들에게 기원하고 주군의 초상을 경배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매도한 자는 모두 무지 방면하기로 했습니다 그 때문에 법정에는 초상과 거기에 바칠 향료며 포도주도 준비시켰습니다.
둘째, 고발당한 자라도 처음에는 기독교도라고 인정했다가 나중에 번복한 자, 전에는 기독교도였으나 지금은 기독교도가 아닌 자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버린 것이 3년 전이든 20년 전이든 관계없이 모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물론 이 부류에 속하는 자를 무죄 방면할 때는 우리의 신들을 경배하고 기독교의 신을 매도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습니다. 우리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기독교도의 죄나 과오로 여겨지는 것은 일정한 날(아마 일요일) 동트기 전에 모여서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나면 엄숙하게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 맹세는 사회에서 비행으로 간주되는 일을 하겠다는 맹세가 아니라, 도둑질과 강탈과 간통을 저지르지 않고, 약속을 엄수하고, 보관을 의뢰 받은 물건이라도 의뢰자가 요구하면 반환에 응해야 한다는 따위를 서로 맹세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의식을 끝낸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 예사로 빵과 포도주로 함께 아침을 먹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주군의 뜻을 받들어 제가 발표한 포고령은 비밀결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회합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피고가 노예인 경우에는 심문할 때 고문을 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이 부제라고 부르는 두 노예 여자를 심문했을 때도 사악하고 광적인 미신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군의 생각을 알 때까지는 기독교와 관련된 재판은 모두 연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재결을 청할 만한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선 고발당하는 자가 너무 많습니다. 둘째, 기독교도는 나이나 사회적 지위나 성별에 관계없이 앞으로도 줄어들기보다는 계속 늘어날 추세입니다. 이제는 도시만이 아니라 지방도 이 광신에 오염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얻은 감촉으로는 오염이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치되어 있던 신전이나 사당도 참배하는 자들로 북적거리게 되었고, 오랫동안 소홀했던 제의도 부활하고 있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가축의 고기를 파는 자도 그동안 많이 줄어들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상당히 개선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도로 여겨지는 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단순히 새로운 것에 매혹되어 기독교에 귀의한 데 불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런 자들 중에서 후회하고 기독교를 버린 자에게는 처벌을 면제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트라야누스가 플리니우스에게
친애하는 세쿤두스여, 기독교도로 고발당한 자들에 대한 그대의 법적 대처는 참으로 적절했다. 이런 문제를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규범에 따라 처리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침투하기 시작한 곳은 로마 제국의 동방이고, 서기 2세기인 이 무렵에는 아직 제국 서방에까지는 미치지 않았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순교한 주교가 두 명 있는데, 한 사람은 예루살렘, 또 한 사람은 안티오키아의 주교였다.) 기독교도가 죄인이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들을 색출해내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식으로 고발되어 자백한 자는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신앙을 버린 자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한 배려가 있어야하지만, 우리의 신들을 경배하는 마음을 명확히 보이고, 후회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명확해지면 과거가 어떻든 처벌을 면제해줄 만하다. 또한 익명 고발은 어떤 법적 가치도 없는 것으로 처리한다. 그런 것을 인정하면 우리 시대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서 성 바울이 신자들에게 준 가르침도 소개해두겠다. '너희의 일상은 서로 욕이나 불평을 하지말고 싸움도 하지말고 눈에 띄지 않도록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의 자식들은 누구나 완전무결하고 천진무구하기 때문이지만, 사악하고 타락한 이 사회에 비난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사악하고 타락한 이 사회에서 살고 있어도 너희들만은 어두운 밤에 등불을 받쳐들듯 신의 가르침을 지켜가지 않으면 안 된다"
같은 일신교도라도 로마에 대한 반항을 거듭하고 있던 유대교도와 달리, 기독교도는 서기 70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 유대교도와는 분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깊고 조용히 잠행하는 방식을 더욱 강화하고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신교와 일신교의 차이는 종교보다 문명관의 차이다 이 차이에 기인하는 로마 제국과 기독교의 대립은 서서히, 그러나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3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3. 프랑스에서의 하녀
세번째 이야기에서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 르와르 계곡에 있는 브르스시에서 자신이 살았다고 기억했다. 그녀는 브르스시에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 도시에 있는 집과, 그녀가 살았다는 집의 정원과 건축양식, 긴 복도들이 있는 벽과 실내를 장식한 그림들,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정확하게 진술했다. 제인 에반스는 프랑스의 대부호였던꿰르 씨의 저택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고, 꿰르 씨에 대한 책이 영어로 발간된 일도 없었다. 전생기억에서 그녀는 꿰르의 하녀인 십대 소녀 아리종이 된다. 꿰르는 당시 프랑스 왕 샤를르 7세의 재정담당 고문으로 굉장한 부자였다.그의 인생 절정기에는 프랑스에서 왕을 제의 한다면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상당히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왕의정부(情婦)를 독살했다는 부당한 고발을 당했던 것이다. 아리종은 여기에 얽힌 이야기들을했다.
꿰르는 왕과 귀족들에게 많은 돈을 빌려 주었다. 그가 살인을 했다는 무고로 사실심리를 받지만, 판결문의 요지는 "왕이 그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과 꿰르의 채권자로서의 권리가 모두 무효화된다는 것"이었다. 꿰르의 재산 그리고 왕궁 인물들과의 관계, 왕의 정부 아녜스에 대한 꿰르의 애정 등 아리종이 말한 것이 사실이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조사한 사람들은 웨일즈 지방의 가정부인인 에반스 여사가 중세기 불란서 역사에 관하여 전문가도 놀랄 만큼의 사실을 많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생기 억들이 모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녀의 말이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었다. 꿰르가 체포됨으로써 그녀는 자살을 하게 되는데, 그녀는 비교적 과묵하고 순진한 처녀였다. 아마도 꿰르가 들려주었음직한 당시의 궁중생활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언급하고 있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진술한 대부분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아리종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다가 꿰르의 하녀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꿰르는 알렉산드리아, 베이루트, 카이로 등의 항구도시들과 통상 거래를 했는데 그의 이름과 선박은 아랍권의 여러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아랍권의 이교도들과 무역할 수 있는 특허를 얻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꿰르는 주로 그의 고향인 브르스에서 살았다. 브르스에는 그의 집이 서너 채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 쏘오세라는 이름의아름다운 저택도 지었다. 아리종은 꿰르가 많은 저택을 소유했으나 브르스에 살았다고 하며 장날마다 리옹에 가서 그의 옷감들을 팔았다고도 한다. 사실 꿰르는 리옹에서 열리는 장을 부활시킨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주인 꿰르가 왕의 정부(情婦)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한 사실도 말했다. 꿰르는 아녜스에게 다이아몬드를 주며 그것이 불란서에서 최초로 가공한 다이아몬드라고 말했다고 아리종은 진술했다. 어떤 역사가는 꿰르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일정한 모양으로 자르게한 최초의 사람이며, 아녜스가 프랑스에서 다이아몬드를 몸에 치장한최초의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녜스가 꿰르를 찾아간 것은 왕에게 필요한 돈을 빌리기위해서였다고 아리종은 말했다. 프랑스 역사가들은 샤를르 7세가 군인들 봉급을 성을 증축하는 데 다 써버리고 그의 정부를 시켜 꿰르에게 돈을 빌어오게 한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다. 꿰르와 아녜스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아녜스가 꿰르를 방문했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들이 연인관계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녀는 분명히 꿰르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궁중에서 그의 편이 되어주는 동조자였다. 아녜스가 죽은 뒤에 발견된 유언장에는 꿰르가 유언집행자로 지명되어 있다. 또 아리종은 주인인 꿰르가 금 세공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프랑스 역사가들에게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가 모피와 가죽제품을 취급하는 상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금 세공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금세공인의 아들이었다는 설이유력하다. 꿰르는 값비싼 금속과 보석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으며, 젊은 나이에 브르스시의 조폐국장이 되었을 정도로 이러한 것들에 통달했었기 때문이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의 다리가 길쭉하고 가늘어서 학의 다리와 같으며 바르와 왕가의 특징인 긴 코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샤를르 왕은 그러한 외모를 가졌다고 한다. 지금 전해지는 그의 초상을 보면 코가 아주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왕이 몸에 달라붙는 의복을 입었을 경우 다리가 너무 가늘어서 아주 우스워보였으며,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그의 다리를 학의 다리와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리종은 샤를르 7세가 어떻게 해서든 프랑스를 구하려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으며, 또, 사람들이 말하기를, 오를레앙의 처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겨준 장본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샤를르 7세가 쟌 다크를 영국인에게 넘겨 주었는지의 여부는 아직도 역사가들에게 논쟁거리로남아 있다. 1431년 쟌 다크가 화형당할 당시 왕은 그녀를 구해내려 하거나, 그녀의 몸값을 치르고 적에게서 그녀를 되찾아 보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왕에게로 돌렸다. 아리종은 아녜스가 죽자 주인 꿰르가 몹시 상심하고 있으며 그녀는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런데 꿰르의 반대파에서는 그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아리종이 몹시 상심하였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여기서도 맞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여지껏 아녜스가 독살당한 것인지의 여부를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딸을 낳고 산후병으로 죽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그러나 15세기 연대기 편자들은, 아리종처럼, 루이 황태자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사실을 의심하고있다. 그러나 아리종이 꿰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은 사실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꿰르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궁정에 펴졌고 그가 그녀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허위증언이 왕에게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1451년 아리종의 주인 꿰르는 샤를르 7세의 정부인 아녜스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인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꿰르의 몰락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리종은 말하고 있다. 사를르 7세는 꿰르의 재산을 모두 몰수해 그를 파산시켜버렸다. 그런 와중에서 꿰르는 군대가 들이닥쳐 아리종이 다칠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아리종이 도망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종은 도망가지 않았다. 그 후 아리종은 꿰르가 준 물약을 마시고 자살을 했다. 꿰르도 물약을 마셨는가 하고 브록샴이 묻자, 아리종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꿰르는 아리종을 음독케 하고 왜 자신은 음독하지 않았을까? 꿰르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해보면 그의 무정한 행동에 대해서도 합당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기독교적인 프랑스에서는 이단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했다. 꿰르가 보호하지 않았다면 아랍인들은 살기가 몹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일을 기약할 수 없는 다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약물을 먹여 그나마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한것은 꿰르의 배려였을 것이다. 꿰르는, 결국, 지하 감옥에 투옥되고 그의 재산과 소유물은 몰수당했다. 그가 아녜스를 독살했다는 고소는 중도에 취하되었고 다른 죄목들은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공판정에 올랐다. 꿰르는 변호사도증인도 부를 수 없는 가운데 심문을 받고 고문을 당한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공중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 목숨을 보존했다. 그러나 모든 관공서의 출입이 금지되고 재산을 압수당했으며 출옥을 할 수도 없었다.
체포된 지 삼년이 지나 꿰르는 감옥을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 국토를 가로질러 도주했지만, 로오느 강 가까이의 국경에서 잡혀 수녀원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꿰르는 자기를 따르는 약간의 추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 편지를 받은 그의 추종자 가운데는 과거에 선장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이십여 명의 무장을 한사람이 한밤중에 그를 구출해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로오느 강을 건너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후 꿰르는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교황의 도움으로 터어키를 토벌하는 십자군 함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이 원정에 나가 소아시아의 해안에서 싸우다가 1456년 부상을 입고 예순살의 나이로 전사했으리라고 추정된다. 아리종의 이야기는 참으로 인상깊은 전생담이다. 그녀의 폭넓은 지식은 15세기 당시 프랑스의 많은 분야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의복 형태와 복장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15세기 화가들에 대한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또 브르스에 있는 꿰르의 저택 안팎을 묘사해 줄 수 있었고, 꿰르가 소유했던 물건들과 그가 수집한 물건들에 정통했다.
역사가인 미레 씨는 그의 저서에서 "꿰르의 집과 인생은 신비로 가득차 있다"고 적고 있다. 아리종의 이야기 역시 그를 더 신비롭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리종이 15세기 프랑스인인 꿰르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희귀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아리종은 초상화와 그림들이 걸려 있는 긴 복도끝의 방에 귀한 황금사과가 있다고 말했다. 터어키의 군주가 꿰르에게 황금사과를 주었다는 것이다. 르와르 계곡에 사는 역사가나 박물관장 가운데도 이 황금사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꿰르의 집 현관 입구에 돌로 조각한 밀감나무가 있었다. 이 밀감나무는 그가 중동지역과 교역 관계를 가녔던 것을 상징하는 뜻으로 조각한 것이다.그리고 15세기 프랑스 사람들은 밀감을 황금사과라고 불렀다. 아리종이 말한 황금사과에대해서 사람들은 아무런 해명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역사학교수인 베일리 교수는 황금사과의 정체를 찾아 내었다. 그는 공문서 보관소에서 [꿰르로부터 왕실 재무성이 압수한 물품의 목록]을 뒤져 보다가 황금석류나무 열매라는 품목을 발견한 것이다. 석류나무 열매는 크기와 모양이 사과와 아주 비슷하다. 아마도 그 황금열매는 그 후 누가 녹여서 썼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어쨌든 꿰르가 황금사과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은 밝혀졌다. 이 황금사과의 발견은 요크 시에서 '성모마리아 성당'의 지하실 발견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지하실이 발견됨으로써 유태인 레베카가 학살당했다는 전생기억이 거짓이나 허구가 아니라는 구체적인 반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4장 최면술과 윤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
사람들은 브록샴 테이프에 담긴 이야기가 갖고 있는 분위기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테이프에 담긴 대화는 피술자가 그 당시를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암시해 주는 자질구레한 사항들을 쌓아 놓은 것이기도 하다.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의 목록이나 인명록을 조사할 때처럼 브록샴 테이프에 담긴 대화의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았다. 요크 지방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는 여인이 유태인 대학살 당시 젊은 츄태 여인으로서 요크 지방에서 살았다는 경험을 겁에 질려서 아주 자세하고 조금도 꾸밈없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은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조사에 참가한 이들은 제인 에반스의 전생기억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밝히기 위해 그녀가 살았다는 곳을 가 보았고,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모조리 검토해 보았다. 또 역사학자, 고고학자, 기록보관인들과 심리학자들을 찾아가 의문나는 점을 물어 보기도 했다. 그들에게 얻은 답변은 언제나 "그것은 정말이다" 또는 "그것은 정말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역사가가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답변한 경우도 있었으나 좀 더 연구하고 조사한 뒤에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고 정정한 경우도 여러번 있었다.
최면술과 전생에 대하여 서구의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그들은 인간의 마음을 미지의 땅에 비견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미지의 땅을 탐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찾아다닐 뿐 배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마음의 문제인데, 도대체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정의를 내리지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 일을 행하는가 설명함으로써 정의를 내려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영사기의 필름으로부터 투영된 한 장면을 토론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작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브록샴 씨가 제인 에반스 여사를 통해 보여준 현상을 대부분의 최면술 개업의들이 시도하여 보여주는 것과는 틀리다. 다시 말해서 최면술 피술자가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전생을 기억하는 방법은 드문 일인 것이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최면에 들어 과거를 기억하다는 것을 금생의 과거 일을 다시 경험해 보는 것으로 해석한다. 금생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서 그 때의 일을 기억하고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설사 정신과 의사가 브록샴의 이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그의 이론에 상반되는 어떤 이론들을 내세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브록샴의 이론이 그르다고 확증할 수 있는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백여 년 동안이나 사람들은 최면술을 오해하여 왔으며, 의학자나 전문인들도 또한 최면술에 대하여 그릇된 견해를 가져 왔다. 최면술의 선구자는 18세기 후반기의 오스트리아 사람인 메스메르 씨이다. 그는 최면술 Mesmerism을 시도하여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빠리의 전문가협회는 메스메르의 최면술에 대한 이론과 실례를 조사해 보고나서, 최면술은 속임수이며 메스메르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했다. 그 후 메스메르는 대중 들로부터 멀어져갔다. 의학 잡지들은 여러 해 동안 최면술에 대한 실험 보고를 게재하기를 거부했다. 1842년 마취약 대신 최면술을 사용하여 많은 수술을 한 외과의사가 있었다. 환자가 최면에 든 동안 아픔을 모르게 다리를 절단한 수술에 대하여 실험보고 형식의 논문을 발표하자, 영국 의학협회는 뒷날 그들의 의사록에서 이 실험 부분을 삭제하도록 합의했다. 그들은 "환자들이 감쪽같이 속아넘어가게 하여 환자가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가장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최면술이 메스메리즘 Mesmerism이라 불리던 단계에서 벗어나, 그에 대한 연구가 진일보하게 되면서, 히프노티즘 Hypnot-ism이라고 일컬었는데 그 뜻은 '잠을 자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자 파블로브는 "최면이란 수면의 한 형태"라고 보기도 했으나 이 역시 올바른 견해는 아니다. 뇌파전위기록기를 사용한 임상실험 결과, 최면이 일종의 수면 상태나 아니면 반쯤 의식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뇌파전위기록기란 두개골에 전극을 부착시켜 뇌의 활동을 측정하는 기계를 말한다. 뇌파 전위기록기를 최면술 피술자의 머리에 씌우고 그 뇌파를 기록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뇌파 활동은 잠든 사람의 뇌활동과 같지 않고 오히려 완전한 의식을 가진 사람의 뇌활동과 같았다. 과거에는 최면을 수면의 한 형태라고 정의했으나 이와 같은 발견이 있은 뒤부터는 최면 상태를 '의식의 변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정신과 의사들은 마치 꿈을 분석해 보듯이 전생기억을 논했다. 꿈이라고 하는 환상에 적용되는 동일한 원리를 최면 상태 속에서 경험하는 환상에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꿈과 전생기억은 지나간 인생에 근거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럴 경우, 부록샴 씨가 행하는 전생기억에서, 최면에 들어 전생을 기억하는 시간이 꿈을 꾸는 시간보다 길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원천이 되는 것은 아마도 몇해 전에 읽은 역사책일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꿈이라든지 최면에 들어 기억한 전생의내용으로부터 우리 마음에 내재한 생각과 숨은 욕망같은 것을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꿈에 대하여 서로 다른 해석들을 하고 있는데, 꿈에 관한 그들의 주장이 전생기억을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 최면에 들어 전생을 회상하는 것이 꿈보다는 브록샴 식의 전생기억 방식에 더 가까운 것이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다 큰 어른이 브록샴의 방법이 아닌 보통의 최면 상태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사건들을 회상하며 실제로 어린아이로 돌아가 지나간 시절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최면술에 대한 문외한으로서는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일 것이다. 최면에 든 사람이 시술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얼마만큼이나 환상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의문이다. 최면에든 어느 건축업자가 그가 삼십 년 전에 지은 담을설명하는데 담의 크기, 형태, 위치 그리고 담을 쌓는 데 소요된 정확한 벽돌의 수 등을 최면술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서술했다. 이 벽돌담을 나중에 조사해 보았더니 마지막 벽돌 한 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가 말한 것과 꼭 같았다. 이런 경우 건축업자는 삼십년 전의 과거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사실대로 진술했는데 아무런 과장도 없었고 환상도 없었으며 아무 것도 더 보태지 않았다. 최면과 전기 자극은 둘 다 과거를 기억시키는 자극제와 같은 것으로, 전극을 두뇌에 접촉했을 때와 같은 과정이 최면 상태에서도 일어난다고 브록샴 씨는 말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점은 최면에 들었을 때는 피술자들이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태어나기 이전의 과거에 대해서도 회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곧 마음의 어느 깊숙한 구석에만 비축되어 있는 잊혀진 전생의 흔적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전극의 자극을 통했을 때는 금생에서의 잊혀진 과거밖에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처럼 인간에게 윤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한 브록샴의 실험 외에도 서구 사람들은 윤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의 희랍인은 윤회를 미템시코우시스Metempsychosis라고 불렀다. 세계의 모든 종족과 종교가 한때는 윤회를 그들의 신조로 받아들였다. 플라톤에서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플르다크에서 헨리 포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의 저명한 사람들이 윤회를 믿었다. 버지니아대학의 스티븐슨 박사는 동, 서양의 많은 어린 아이들이 전생에 대한 기억을 하고 있으나, 성장해감에 따라 그러한 기억들을 차차 잊게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비단 어린 아이나 동양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윤회를 굳게 믿었던 사람으로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있다. 그는 출판업자이자 작가인 동시에 미국의 독립전쟁에 관계했던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열 여섯살 때 이미 그가 태어나기 전에도 살았었다는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질량 불변의 법칙을 최초로 이해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물질은 그 형태가 변하기는 하나,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완전히 멸해버리는 것은 없다. 그것을 관찰할 때, 이를태면 한 방울의 물조차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할 때, 나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죽음과 더불어 소멸해 버린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 전지전능하고 자비로운 만물의 창조주께서 지금 존재하고 있는 무수한 마음들이 매일 매일 없어져 버림으로 인해 새로운 마음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교역을 치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나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이런 모습으로 또는 저런 모습으로 이 세상에 상주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유니테리언파의 목사였던 윌리암 엘저는 윤회의 연구에 그의 반생을 바쳤다. 1860년에 발간된 [윤회설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윤회 사상은 그럴듯한 망상으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뒤 십오 년 동안 더 연구를 거듭한 후, 두번째로 발간한 책에서 그는 마침내 윤회사상에 귀의했다고 선언하였다. 러시아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블라밧스키 씨가 1975년에 창설한 신지학(神知學)협회는 근대에 와서 서방에서 가장 열렬히 윤회사상을 보급한 단체이다. 블라밧스키는 우리가 인생에서 겪게 되는 불운이라든지 사건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우리가 금생이나 전생에서 지은 업보로 인해 받게 되는 과보라고 주장하고 있다. 동방의 신지학(또는 접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업 Karma사상과 윤회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인과응보설에 따르면, 금생에 우리가 생각이나 행동으로 짓는 업이 다음 생에 우리가 언제 어떻게 태어날 것인가를 결정짓는다고 한다. 따라서 열반을 증득하여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을 가르치는 동방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독교의 발상지인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사람들은 윤회를 믿었다. 성경의 구약과 신약에서도 윤회를 암시하는 구절이 많이 보인다. 모세는 전생에 아담의 둘째 아들 아벨이었다고 믿었고, 아벨 자신은 메시아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구약은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태 어날 것이라는 예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 심지어 예수의 출현에 대해서도 유태인들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아가 다시 왔다고 말한다. 예수가 출현한 뒤로 오백 년 동안 많은 기독교인들이 윤회설을 믿었는데, 그노시스파와 마니교도들과 같은 강력한 종파들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보기이다. 그러나 서기 553년 바티칸공회는 교황의 승인없이 윤회설을 이단이라고 공표하였다. 오늘날의 천주교 신학자들은 제5회 바티칸공회의 파문 15조의 합법성 여부에 대하여 자주 논란을 벌이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교황은 파문 15조를 결코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조치로 말미암아 6세기 경부터 전 유럽에서 윤회설을 믿는 사람을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하는 종교적 박해가 일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와 윤회사상은 결별하게 되었다.
윤회사상을 가장 오랫동안 믿고 신봉해 온 사람들은 인도의 힌두교도들이다. 서양 사람들 사이에는 종교란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라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도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성품에 관한 과학의 정의도 더 이상 사람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과학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더 깊은 뜻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퍽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브록샴 씨의 테이프는 영혼의 윤회에 대한 옛 사람의 믿음을 증거해 주는 자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윤회사상은 이론으로 증명이 안 되는 유일신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내세사상에 보탬이 되는 순수한 관념일 수도 있다. 현대 심리학은 어떻게 하면 심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수 있는가에 대해 흥미있는 이론과 의학상으로 알아 두어야 할 일들을 제공하고있지만 , 브록샴 테이프나 윤회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주지 못하고 있다. 브록샴 씨의 20여년에 걸친 연구는 윤회가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사례의 하나가 될 것이다.
|
|
독서실 → 수필
|
|
|
유년 시대(幼年時代) - 톨스토이(Tolstoi)/박형규 옮김
즐겁고 행복스러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유년 시대여! 어찌 그 추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그 추억에 즐겨 잠기지 않을 수 있으랴. 유년 시대의 추억은 나의 영혼에 청신한 기운을 불어넣어,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추억은 내게 있어 더없이 감미로운 열락(悅樂)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실컷 뛰놀고 난 다음엔 차[茶] 탁자 앞에 놓인 높다란 의자에 가서 앉곤 하다. 내 좌석으로 정해진, 팔걸이가 달린 의자다. 밤도 꽤 깊었다. 설탕을 탄 우유를 다 마셔 버린 지도 오래다. 눈까풀이 무거워진다. ― 잠이 오는 것이다. 그래도 꼼짝 않고 앉아서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 어찌 그것을 듣지 않을 수 있으랴. 어머니가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그 음성이 귓전에 은은히 울려 온다. 그 음향만으로도 나의 마음에는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전달되는 것이다. 졸음 때문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몽롱한 눈으로 나는 언제까지나 어머니의 얼굴을 응시한다. 그러고 있노라면 갑자기 어머니의 몸이 조그맣게 줄어들며, 그 얼굴이 단추만한 크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윤곽만은 여전히 또렷하게 보인다. 어머니가 나를 보고 싱긋 웃는 것까지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렇게 콩알만큼 작아진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면, 어머니는 마치 눈동자 속에 비친 어린애의 영상만큼이나 작아진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이 영상은 금세 부서져 버리고 만다. 다시 몸도 도사리기도 하고 눈을 가늘게 뜨기도 하며 이 영상을 소생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해 봐도, 결국은 헛일이 되고 만다. 나는 좀더 편한 자세를 취해 보려고 두 발을 의자 위로 끌어올린다.
“얘, 니콜렌카야, 너 또 게서 자려고 그러는구나!” 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졸리거든 어서 2층에 올라가거라.”
“나 졸리지 않아요.”하고 나는 대답한다.
그러나 몽롱하면서도 달콤한 환상에 휩싸이며, 나도 모르는 새 두 눈이 스르르 감기고 만다. 1, 2부 후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어, 누가 깨울 때까지 그냥 내처 잠잔다. 하지만 누군가의 부드러운 손길이 와 닿는 것을 꿈결에도 느낄 수 잇다. 그리고 그 촉감만으로도 손길의 임자가 누군지를 알 수 있다. 그러면 잠에 취한 상태에서 거의 본능적으로 그 손을 잡아 입술에 갖다 대고 비빈다. 벌써 모두들 자기 방으로 흩어져 가고, 응접실에는 촛불이 한 자루 타오르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가 손수 나를 깨우겠다고 말한 모양이다. 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서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바로 귓전에서 너무나 귀에 익은 달콤한 음성이 울린다.
“이젠 일어나거라. 니콜렌카야. 2층에 올라가서 자야지.”
어머니의 애무(愛撫)를 방해할 그 누구의 시선도 방 안에는 없다. 어머니의 아무 거리낌없이 모든 애정을 나한테 쏟는다. 나는 꼼짝도 않는다. 어머니의 손에 더욱 세차게 입술을 비빌 뿐이다.
“어서 일어나거라, 응!”
어머니는 다른 손으로 나의 목을 잡는다. 그 손가락이 재빨리 움직이며 나를 간지른다. 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조용하다. 간지럼 때문에 나의 신경은 눈을 뜨고 예민해진다. 어머니는 내 곁에 앉아서 나를 쓰다듬고 있다. 나의 어머니의 체취를 느끼고,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다. 이 모든 것에 작용되어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두 팔을 어머니의 몸에 감고 머리를 그 가슴에 묻으며 숨가뿐 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엄아, 나는 엄마가 좋아, 엄마가 제일 좋아!”
어머니는 언제나처럼 그 서글프고도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두 손으로 나의 머리를 감싸고 이마에 키스를 한 다음 나를 무릎 위에 앉힌다.
“그렇게 너는 엄마가 좋으니?”하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나를 좋아해야 한다. 알겠니? 그리고 이 엄마를 잊어서는 안 된다. 혹시 엄마가 죽더라고 너는 잊지 않겠지, 응? 엄마를 잊지 않겠지 응, 니콜렌카야?”
어머니는 더욱 다정스럽게 키스를 해 준다.
“그런 말 하면 난 싫어! 인젠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응, 엄마!”
나는 어머니의 무릎에 입을 맞추며 이렇게 외친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린다. ― 애정과 환희의 눈물인 것이다.
그 다음, 2층으로 올라가서, 솜을 넣은 파자마를 입고 성상(聖像) 앞에 선다. ‘주여,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때 경험하는 감정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잘 돌아가지 않는 혀로, 갓 배운 이 기도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고 있노라면,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신(神)에 대한 사랑이, 기이하게도 하나의 감정으로 융합되는 것이었다. 기도를 끝내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면, 후련하고도 밝은 마음은 기쁨에 충만되곤 한다. 갖가지 공상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공상이었을까? 모두가 두서 없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순결한 애정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어두운 그늘이 없는 행복에 대한 기대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이런 때 나는 카를 이바느이치와 그의 불행한 운명을 자주 상기했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가 가장 불행한 인간이다. 나는 못 견딜 지경으로 그가 불쌍해진다. 그리고 못 견딜 지경으로 그가 사랑스러워진다. 어느 새 내 눈엔 눈물이 글썽해진다. ‘하나님, 그 사람에게 행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를 돕고 그의 슬픔을 덜어 줄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내려 주옵소서, 그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나이다.’
그 다음,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기 완구(玩具)를 ―토끼나 강아지를 푹신한 베갯머리에 놓고, 그들 장난감 동물들이 기분 좋게 앉아 있는 모양을 대견스럽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내려 주시기를, 누구나 다 만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빈다. 그리고 또, 내일 소풍을 가는데 좋은 날씨가 되게 해 주십사고 빈다.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눕는다. 사상과 공상이 뒤죽박죽 헝클어진다. 그러면 나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그냥 고이 잠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유년 시대에 내가 소유하고 있었던 그 순결성과 낙천성(樂天性), 사랑에 대한 요구와 신앙의 힘을 되찾을 날이 과연 있을 것인가? 순진 무구한 낙천성과 사랑에 대한 끝없는 요구―이 두 가지 선(善)이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던 그 시대보다 더 좋은 시대가 과연 있을 것인가? 그 때의 그 뜨거운 기도는 지금 어디 갔는가?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인 그 순결한 감격의 눈물은 어디 갔는가? 위안의 천사(天使)가 날아와서 미소지으며 그 눈물을 닦아 주고,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나의 어린 마음에 감미로운 공상의 씨를 뿌려 주는 것이었다. 과연 나의 인생이, 그 기쁨과 그 감격의 눈물을 내게서 영원히 떠나 버리게 할 만큼 그처럼 무거운 발자국을 내 가슴에 남겨 놓은 것일까? 그리고 그 기쁨, 그 눈물은, 이제는 한갓 추억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세계 문학 전집(世界文學全集)>
|
|
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
|
|
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마카아벨리 평전 - 제11장 (2/2)
가는 길에 귀환중인 대사 (그는 절친한 관계였던 알레싼드로 나시였다)를 만났던 마키아벨리는 7월7일 리룡에 도착했고, 이틀 뒤에 다시 길을 떠나 17일 궁정이 있던 블로아에 닿았다. 로베르테는 그렇지 않아도 피렌체에 전령을 보낼까 하고 생각중이었는데, 마침 때 맞춰 잘 왔다고 일러주었다. 왕은 자신이 로마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와중에 대사까지 소환된 데다, 공화국이 교황의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휘하를 떠나 교황의 명으로 제노바를 급습하려는 마르칸토니오 콜론나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소식에 접하자, 피렌체의 의도로 의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피렌체로서도 이 일들에 관해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은 도착 직후 그를 접견한 자리에서 거두절미하고 대뜸 앞의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일 교황이 자신을 괴롭힌다면 공화국이 (지체없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밝히라고 요구하였다. 사절은 이에 피렌체인들과 왕 사이에는 우호 조약이 맺어져 있으며, 이를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였으나, 이 정도로는 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왕이 대답하기를, 물론 자신은 이를 확신하고 있으나, 그 이상의 보장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정부에다 이 문제에 관해 즉시 편지를 쓰라고 명하였다. 이를 로베르테에게 주어서 왕의 전령 편으로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시키는 대로하였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어떤 답을 줄 것인지를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회답을 기다리며 궁내의 귀족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어보았다. 모두가 교황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복종의 관계를 거두어들이고 즉시 공의회를 개최하라. 그리고 그로부터 교속 양권을 빼앗아버려라. 그래도 이 정도면 후하게 대접하는 셈이다.) 그러나 궁내에는 교황 사절 역시 주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매우 분별이 있고 정치에도 정통한, 정말로 괜찮은 인물이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만난 자리에서 (어떻게 사태가 갑자기 이토록 험하게 돌아가게 되었는지 경악하면서) 침울해하였다. 궁에는 또 조반니 지롤라미라는 소데리니 추기경의 첩자도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매일같이 자기 상전의 말을 전해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곧 그와 힘을 합쳐 협상에 착수하였다. 이탈리아와 피렌체는 물론이고 추기경 자신의 사익에도 하등 좋은 징조가 못되는 이 일련 움직임에 피렌체가 조정자이자 중재자로서 개입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8월 8일, 왕이 사냥을 나간 곳 가까이까지 말을 타고 나간 피렌체의 서기장과 로베르테는 약 3레가(1lega는 약 3migli에 해당함-옮긴이)의 거리를 가는 동안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모든 문제들에 관해) 이야기하였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에다 그 내용의 핵심을 추려 보고하였다. (당신네 정부는 만일 교황과 왕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다면 양단간에 한쪽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것이오.) 이는 물론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무언가 보상이 없다면 그러한 위험에 뛰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면서, 로베르테는 우르비노 공국 정도라면 피렌체인들이 좋아하겠느냐고 물었다. 마키아벨리는 슬쩍 답을 피했으나, 정무위원회에다는 이제 루카에 관해 한번 생각해 볼 시점이 아니냐고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내 교황과의 전쟁에 (내재된 모든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프랑스에 초래할 위험들을 주시시키려고 애썼다. (만약 혼자서 전쟁을 치른다면, 그것이 쉽게 끝나지 않고 질질 끌 것이라는 점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와 힘을 합친다면, 이탈리아의 일부는 그 동맹국에 떼 주어야 할 것이고, 결국은 그 나라와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될 터인데, 이는 교황과의 싸움보다 훨씬 위험할 것입니다.) 마침내 그는 로베르테를 설득하였고, 이 때문에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줄 만 알았던 프랑스인들의 마음도 바꿀 수가 있구나 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을 뻔하였다. (지체 있는 이탈리아 사람 몇 명만이라도 여기서 프랑스인들의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들을 심어주고자 노력한다면 그들을 설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에 없었고, 이탈리아에서도 아마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동안 사태는 나름의 필연적인 행로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왕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명확히 밝히라고 압박을 가했지만, 피렌체인들은 조약의 명문 규정은 언제나 지키겠지만 그를 돕겠다는 어떤 명확한 언질도 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마키아벨리가 이 대답을 왕에게 전하자,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마키아벨리를 국무회의의 장소로 부르더니, 만일 교황이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악령의 사주를 받아) 제노바에 어떤 식으로든 해를 가한다면 피렌체 공화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쇼몽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그가, 만일 그렇게 한다면 피렌체는 곧 줄리오의 분노를 사 그의 군대를 바로 끌어들이는 상황에 처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하자, 국무회의의 제후들은 (거의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기를, 왕이 이탈리아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준비중이므로 그것은 단지 며칠 정도만 공격을 막아내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역시 마키아벨리는 정부가 무슨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어쨌든 왕의 요구를 10인위원회에 알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렇게 했고, 다시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들이 어떻게든 우리를 이 전쟁에 끌어들이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숙고할 점은(...) 질 것 같은 속에서 어떻게 승리를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나가고 사절의 부지런한 보고는 계속되었지만, 사태는 변하지 않았다. 왕은 교황과의 전쟁이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쪽으로 갔다. 그의 말이다. (당신은 짐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짐은 교황에 피배하고 싶지 않다.) 그는 다가오는 겨울 내내 사태를 관망하면서, 그 동안 줄리오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공의회를 소집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반면 교황은 군대를 끌어모으면서, 페라라를 공격하고 조약을 통해 모데나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교황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는 롬바르디아로 가는 길목마다에서 저지당해 패주하게 되고, 프랑스 궁정에서는 춘계 대공세를 두고 (사실 그건 아예 전쟁이 아니라 로마로 소풍 나가는 격이 될 것)이라며 유쾌해했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이 사제들은 이 세상에서 쓴맛을 좀 봐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 발전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사제들의 희망은 저 세상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즈음 프랑스에서는 사람들이 (코클리쉬 Coquluche)(백일해의 일종-옮긴이)라고 부르던 유행성 독감이 온통 유행가고 있었고, 마키아벨리도 이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다. 24일, 그는 변명 조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기침 때문에 5일 동안 아무하고도 만나지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침이 멈추고 난 뒤에도 (그놈이 제 뱃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는 처집니다.) 더욱이 그는 언제나처럼 돈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불만스러워하였다. 그는(제가 말을 팔아버리고 걸어서 집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이라고 썼던 며칠 전의 펼지를 상기시키며, 10인위원회에 재차 송금을 요청하였다. 몸이 아프자 그는 귀국하여 아내의 애정 어린 보살핌을 받았으면 하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지금은 잔느라는 여인이 빈 곳을 어느 정도 메워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도 얼마 후에는 심드렁하게 대하게 될 터였다. 그가 귀국할 날은 그리 멀리 않은 듯했고, 로베르토 아차이우올 리가 신임 대사로 선임되어 발걸음은 느리지만 이미 이쪽으로 길을 잡은 상태였다. 파란체스코 베토리는 그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로베르토에게 자네를 곧 돌려보내라고 부탁했네, 그래야 그는 떠나더라도 대신 자세를 보게 될 테니까 말일세(...) 필리포(카사베키아)와 나는 매일같이 자네를 학수고대하고 있네) 프란체스코는 독일 사절 이후 마키아벨리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레명만으로 서명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기꺼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가 어는 아이의 대부였는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마 1510년초에 태여났다가 1511년 2월에 죽었던 아이였던 것 같다. 마키아벨리의 아이들이 누구누구인지, 그들의 대부는 또 누구인지를 어떻게 일일이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동안 아이들과 아내는 비교적 잘 지내고 있었던 편이었다. 그가 서기국에다가 왜 가족의 근황을 그렇게 전해주지 않느냐고 불평 조로 말하자, 아드리아니가 나서서 짤막하면서도 익살맞게 말을 받았다. (자네 아내는 여기서 살고 있고, 아이들은 제 발로 서 있으며, 집에 연기가 나는 일도 없지만, 페르쿠씨노의 포도 작황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정무위원회에다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의 서기장이자 가장 가톨릭에 충실한 왕에게 파견된 사절이었던 그이지만, 이제는 정치.군사 문제에 대한 생각 외에 산탄드레아의 얼마된지 않는 농토까지도 신경을 써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니! 수확과 나쁜 날씨와 자신 소유 농토 내의 농부들이나 나무꾼들이 겪는 끝날 줄 모르는 불운들이 때로는 그를 성가시게 만들었고, 때로는 기쁘게도 했으며, 또 때로는 사무실 동료들에 대한 그의 불평 속에서 은연중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나무꾼과 농부들이라니! 지금 그는 프랑스 궁정에 있으며, 마치 커다란 청동제 화병 두 개 사이게 끼인 도자기 병 같은 형국에 있던 자신의 공화국을 어려움에서 건져내야 하는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이 사절 임무를 토해서였다. 왕과 같이 백일해에 걸려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로베르테를 방문한 그는 분별과 논지를 갖춘 말로 그와 아야기를 나누었다. 마키아벨리의 말인즉, 만일 전쟁이 계속 제 가리 길로 간다면, 왕은 피렌체를 (크게 존중해 주어야(하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커다란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렌체에다 떠맡기는 요구들과 계획들을 충분히 숙고하고 논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주장에 공감하는 듯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문제는 쇼몽이었다. 그에게는 마키아벨리 같은 인물이 곁에 없었던 데다가 이탈리아 전쟁의 짐을 온통 혼자서 짊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반드시 원군이 있어야만 한다고 고집하였다. 그러자 마키아벨리는 다시 국무회의로 돌아와 그 (제안들)을 장시간 논하였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앗다. 피렌체인들은 조약을 지킬 태세가 되어 있다. 하지만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함으로써 주위의 적에 스스로를 무방비 상태로 내맡기도록 만드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교황을 막는데는 피렌체가 군대를 도시 내에 유지하고 있는 편이 (다른 곳으로 내보내는 편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다. 국무회의는 서기장의 말을 신중히 경청한 뒤, 그의 논지가 옳다고 찬사를 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는 결국 그들 모두를 설복시킨 것이다.
마키아벨리도 프랑스인들을 설복시키는 데에는 줄리오의 호언장담도 한몫을 하였다. 당시 그는 지나치게 친프랑스적인 피렌체 정부를 무너뜨려 버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성미 고약한 교황은, 볼로냐로 가는 길에 몬테피아스코네에서 그를 만나 공화국이 교회와 왕 사이의 협상을 중재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고 전쟁으로 기우는 쪽에 평화를 권고하려던 피렌체의 사절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파문에 처하겠다고 위협했으며, 피렌체 영토를 유린하고 나아가 더 이상의 일도 불사하겠다고 으르렁거렸다. 운수 사납게도 교화의 눈밖에 난 사절들은 도매금으로 넘겨졌다. 피렌체와 똑같은 이유로 파견되었던 사보야 공국의 사절 하나나 투옥과 고문의 괴로움을 겪었다. 이보다 조금 앞서 오스티아에서는 페라라의 사절이 바다에 던져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는데, 그는 다름이 아니라 신이 내린 오를란도 시인(아리오스토를 말함 - 옮긴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성미 괄괄한 교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가운데, (이탈리아를 프랑스인들의 굴레로부터,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언명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이 말을 아무런 비평없이 기록하였다. 사실 그는 뒤에 (야만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촉구하는 유명한 글을 쓰게 될 것이었다.((군주론) 26장 참조 - 옮긴이). 빌라리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발렌티노는 그렇게 칭찬했으면서도 왜 위엄 있는 줄리오에게는 끌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교황은 피렌체의 자유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마키아벨리에게 오래도록 불행을 겪게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앞서 말한 촉구의 글을 포함하여 자신의 가장 빛나는 저술들을 쓴 것도 바로 그러한 불행의 시기 동안이었다. 그 이전에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많다. 첫째, 분노와 충동이 자신의 군주상에 적합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물론, 자신이 믿는 또 하나의 신앙인 국가마저도 타락시켜 온 사제들의 지배를 못마땅했기 때문이며, 끝으로 그는 한 사람의 피렌체인이자 이탈리아인로서 교회의 세속 권력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만족을 쫓아내려는 그 유명한 함성도 줄리오의 입을 거치면 무언가 이상하게 들릴 법했다. 사실 그 스스로가 이탈리아에 그들이 얼마나 많이 불러들였던가, 마키아벨리에게 그는 정말 (이탈리아의 우환을 매개하는 숙명적 존재) 였던 셈이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쇼몽에게로 간 왕의 편지에 그 자신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제시했던 (제안들)과 부합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알고 로베르테에게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적극적 행동으로 교황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촉구한 것은, 결코 스스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프랑스인들 좋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는 뒤에 10인위원회에다 이렇게 썼다. (그는 자신들도 교황에게 한번 호된 맛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웃음과 함께 이 말을 하면서 제 어깨를 두드렸는데, 마치 곧 그렇게 할 거라는 말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이제 끝나가고 있었다. 신임대사에게 보내는 본국의 편지가 9월초 궁정과 옮겨간 투르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10인위원회는 평소 서기장이 보여준 민첩성과 열성에 물들어서 신임대사 역시 그곳에 도착했거나 곧 도착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8월 31일이 되어서도 여전히 리용에서 어기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사절은 하는 수 없이 계속 그 앞으로 오는 편지들을 개봉하여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9월 중순에야 겨우 그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에게 일을 인계하기 위해 며칠 더 지체하였다.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언제 투르를 떠났는지, 또 이탈리아로 오는길에 언제 리용을 떠났는지 잘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가 피렌체에 닿은 것이 10월 19일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임무야말로 단순히 끝없는 마상 여행 정도가 아니라 마키아벨리 자신이 무언가 자신있게 말할 거리가 잇는 그러한 성격의 일이었다. 마치 아리오스토가 당시 스스로 겪은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던 것처럼
그리고는 그것을 나를 시인 마부로 만들어버렸다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
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곶감 먹기
곶감은 맛이 달아서 입맛에 당기지만 많이 먹으면 변비 증세를 일으킨다. 대장에서 수분을 많이 빨아들이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가 나면 홍시감이나 곶감을 먹기도 한다. 단 곶감 많이 먹다 변비 걸리고, ‘언 발에 오줌 누기’식으로 눈앞의 조그만 이익만을 즐기다가 큰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다.
지각 없는 젊은이
한 젊은이가 길 모퉁이를 돌아가다가 예쁘게 차려 입은 여인과 마주쳤다. 여인이 교태가 흐르는 몸놀림으로 다가와서는 입을 맞추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 정말 꼭 들어맞았네요. 간밤에 당신을 만나는 꿈을 꾸었거든요. 어서 제 집으로 들어가요. 남편은 먼 곳으로 여행가서 보름 후에 온답니다.“
청년은 잠시 망설였으나 달콤하고 짜릿한 쾌락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 결과, 일정을 당겨 돌아 온 여자 남편이 휘두른 칼에 맞아 비참히 죽고 말았다.
‘방탕한 여인의 입술은 꿀보다 달고 그 말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에 양날이 선 칼에 찔린 듯한 쓰라림과 고통만 남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불을 품으면 옷을 태우고, 숯불을 밟으면 발을 데듯, 잠시의 쾌락은 큰 피해를 낳는 경우가 많다. 추운 겨울날 땔감이 없다고 문짝을 뜯어 불태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자.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 (Please your eye and plague your heart.)
중 머리깎기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고, 다른 사람 수술은 잘 하는 의사도 자기 몸 수술은 못한다.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알아서 고치기는 매우 어렵다는 말이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사람들은 남의 잘못에는 한없이 엄격하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주기도문에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용서해주듯이 용서하여 주사이다’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이다. 하지만 남의 스승이 되고자 하고 남에게 충고를 하자면 자신의 수양이 앞서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망하려면 먼저 교만해지고, 존경받는 사람은 먼저 겸손해진다.’고 하였고, 맹자는 ‘존경받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엄격히 하며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하였다. 거듭 말하건대 중병에 걸린 자여! 자신의 병부터 고치고 나의 병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 제 도끼 자루를 찍을 수 없는 도끼가 되지 말고, 자기 죽는 날도 모르면서 남 죽을 날을 말하는 점쟁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 (Physician heal yourself.)
‘의사여, 너의 병이나 고쳐라.’ 예수가 한 말이다.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이나 허물을 고치라는 뜻이다.
희생
달걀 껍질은 얇고 힘이 없다. 조금만 굴려도 금방 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알 속에서 자라난 생명에게는 그 껍질같이 두꺼운 것이 없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힘과 그때 느끼는 고통이 없으면, 병아리가 태어나지 못한다.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고통이 따름은 물론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때 산모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오죽하면 산욕이나 산고라고 표현할까. 서양에서는 이를 노고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모가 아이를 낳을때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그런데 호주에서는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오도록 권장한다. 첫째 이유는 산모에게 정신적인 안정을 주기 위해서이고, 둘째로느 여자들이 겪는 고통이나 희생을 남편이 지켜봄으로써 아내의 고통을 분담한다는 측면도 있으며, 셋째로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한 남편이 분만 과정을 지켜보고 아버지로서 책임감을 더 느끼게 되기 때문이라 한다. 한국에서도 남편이 입회할 수 있게 제도를 바꾸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아이를 낳을 때 입회한 남편의 대부분이 출산 후에 부인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더욱 크게 느낀다는 호주 학회의 조사 보고서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껍질을 깨고 나올 때의 아픔 없이는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수 없듯, 무슨 일이나 고통이나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고없이 이루어지는 일이란 아무데도 없다.
희생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 (You can't make an omelette without breaking eggs.)
|
|
시나눔 → 동시
|
|
|
소나기 - 최재환
먼 곳에서 온
손님 하나,
대문을 흔들다가
되돌아간다.
풀잎들이 손짓하며
자꾸 말려도
잠든 아기 깨워 놓고
강 건너간다.
고개를 저으면서
산 넘어간다.
------------------------------------------------------------
소나기 - 김영일
소나기가 그쳤다
하늘에
세수하고 싶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