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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8호 - 2024.9.21. 토요일(음력 : 8.19.)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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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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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망치밖에 없을 땐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대가리로 보이게 마련. - 에이브라함 마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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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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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형어미
‘동명사’란 동사와 명사의 기능을 겸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는 동사에 ‘-ing’를 붙여 만든다. 국어에서 이와 비슷한 것이 ‘-기’와 ‘-ㅁ/-음’이다. 이들을 ‘명사형어미’라고 한다. “우리는 네가 성공하기를 원한다.”에서 ‘성공하기’는 ‘네가 성공하기’라는 안긴문장의 서술어이면서, 조사 ‘를’이 붙어서 안은문장(전체 문장)의 목적어가 된다. 서술어가 되는 것은 동사의 속성이 있어서, 조사가 붙는 것은 명사의 속성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나는 네가 집에 있음을 알고 있다.”에서도 ‘있음’은 안긴문장의 서술어이자 안은문장의 목적어가 된다. 이런 점에서 ‘-기’와 ‘-ㅁ/-음’은 ‘-ing’와 닮았다. 그런데 ‘-ㅁ/-음’을 적을 때에는 언제 ‘-음’을 쓰고, 언제 ‘-ㅁ’을 쓰는지를 잘 알아두어야 한다.
“다름, 돌봄, 설렘, 만듦, 베풂”처럼 모음이나 ‘ㄹ’ 받침 뒤에는 ‘-ㅁ’을 쓴다. 그런데 ‘만듦, 베풂’을 ‘만듬, 베품’으로 잘못 적는 경우가 많다. 소리는 [-듬, -품]으로 나지만 적을 때는 ‘ㄹ’을 살려서 겹받침으로 적어야 한다. ‘살다, 알다’의 명사형을 ‘삶, 앎’으로 적는 이치와 같다.
“적음, 좋음, 했음, 있음, 없음”처럼 ‘ㄹ’을 제외한 받침 뒤에는 ‘-음’을 쓴다. 그런데 ‘있음, 없음’을 ‘있슴, 없슴’으로 잘못 적는 경우도 잦다. ‘-읍니다, -습니다’를 구분해서 쓰던 것을 1988년에 표준어규정을 개정하면서 ‘-습니다’로 통일하기로 함에 따라 ‘있습니다/있읍니다’도 ‘있습니다’로만 적게 되었는데, ‘있음’도 ‘있슴’으로 바뀐 것으로 잘못 알려지면서 혼란이 생기게 된 것이다. 애당초 ‘-슴’이라는 어미는 없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혼란이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우리말샘
지난주에 국어사전의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일이 있었다.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이 개통된 것이다. 이 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의 50만 단어에 새로 일상어, 지역어, 전문어 등 50만 단어를 더해 약 100만 어휘를 수록한 방대한 웹 사전이다.
무엇보다 이 사전은 국민 참여형 사전으로서 일반 사용자가 직접 사전의 정보를 추가하고 수정할 수 있는 점이 큰 특징이다. 이른바 한국판 위키피디아 사전인 셈이다. 이런 방식을 통하여 실생활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어휘가 폭넓게 수록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전에는 ‘꽃할배, 아재개그, 치맥, 심쿵, 금수저, 웃프다, 힐링하다’ 등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단어들이 올라 있다. 독자들도 사전 집필자가 되어 얼마든지 새로운 단어를 올릴 수 있다.
한 가지 개인적인 바람은 이 사전으로부터 표준어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것이다. 표준어는 보수적인 면이 강하여 어떤 말이 표준어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근래 새로 표준어가 된 예만 보더라도 ‘뜨락, 내음, 속앓이, 손주’ 등이 표준어 자격을 얻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또 반대로 이미 가치를 잃은 말들이 계속 표준어 지위를 누리기도 한다. ‘게으르다, 게르다, 개으르다, 개르다’를 보면, ‘게으르다’만 주로 쓰이는데도 나머지 세 단어까지 모두 표준어이다.
이런 말들에 비하면, 오히려 새로 생겨나 쓰이는 말들 가운데 더 표준어 자격을 얻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들이 개방형 사전에 오르면 좀 더 어엿한 국어로 대접받고, 좀 더 활발히 표준어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말샘’으로부터 고여 있는 표준어에 새 물결이 일기를 기대해 본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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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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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2 - 천상병
1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골목에서 거리로,
옆길에서 큰길로.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과 건물이 있습니다.
상관 않고 그는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까지 가겠느냐구요?
숲으로, 바다로,
별을 향하여
그는 쉬지 않고 걷고 있습니다.
2
낮에는 찻집, 술집으로
밤에는 여인숙.
나의 길은
언제나 꼭 같았는데
그러나
오늘은 딴 길을 간다.
∼∼∼∼∼∼∼∼∼∼∼∼∼∼~~~~~~~~~~~~~~~~~~~~~~~~~~~~~~~~
옥류동 - 정지용
골에 하늘이
따로 트이고,
폭포 소리 하잔히
봄우뢰를 울다.
날가지 겹겹이
모란꽃잎 포기이는 듯.
자위 돌아 사폿 질ㅅ듯
위태로이 솟은 봉오리들.
골이 속 속 접히어 들어
이내가 새포롬 서그러거리는 숫도림.
꽃가루 묻힌 양 날러 올라
나래 떠는 해.
보랏빛 해ㅅ살이
폭지어 빛겨 걸치이매,
기슭에 약초들의
소란한 호흡 !
들새도 날러들지 않고
신비가 한꺼 저자 선 한낮
물도 젖여지지 않어
흰돌 우에 따로 구르고,
닥어 스미는 향기에
길초마다 옷깃이 매워라.
귀또리도
흠식한 양
옴짓
아니 긴다.
~~~~~~~~~~~~~~~~~~~~~~~~~~~~~~~~~~~~~~~~~~~~~~~~~
瀑布(폭포) -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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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이해인
오늘은 가장 깊고 낮은 목소리로
당신을 부르게 해 주소서
더 많은 이들을 위해
당신을 떠나보내야 했던
마리아의 비통한 가슴에 꽃힌
한 자루의 어둠으로 흐느끼게 하소서
배신의 죄를 슬피 울던
베드로의 절절한 통곡처럼
나도 당신 앞에
겸허한 어둠으로 엎드리게 하소서
죽음의 쓴잔을 마셔
죽음보다 강해진 사랑의 주인이여
당신을 닮지 않고는
내가 감히 사랑한다고
뽐내지 말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했기에
더 깊이 절망했던 이들과 함께
오늘은 돌무덤에 갇힌
한 점 칙칙한 어둠이게 하소서
빛이신 당신과 함께 잠들어
당신과 함께 깨어날
한 점 눈부신 어둠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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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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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13.형제간의 두뇌 비교는 둘을 다 해치지만, 개성의 비교는 둘을 다 살린다.
키신저 형제의 건전한 라이벌 의식
유태인들은 형제 자매를 서로 다른 인격체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형과 동생을 비교하는 일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형은 저렇게 공부를 잘하는데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
이런 식으로 형제간의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동생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셈이 되고, 그렇게 따진다고 해서 동생의 성적이 오를 리도 없다. 그것은 오히려 그를 점점 더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형과는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마저 자르는 결과를 낳기 십상이다. 다시 말하면 형제를 한 가지 능력, 예컨대 학교 성적만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해독만 끼칠 뿐 아무런 이득이 없다.
미국의 국무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의 동생 월터 키신저는 언젠가 이렇게 회상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 형제는 라이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엇나간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둘은 성격이 달랐고, 커서는 직업도 전혀 달랐다."
이는 유태인인 부모로부터 서로 다른 인격체로 인정받은 결과였다. 월터 키신저는 앨런 전기회사 사장으로서 형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존경받는 비지니스맨이 되었는데, 그는 형에게 열등감을 갖기는커녕 '신문사는 헨리의 뒤만 쫓는데, 내가 업계에서 성공한 비화도 탐색할 만한 가치가 있지'라며 건전한 라이벌 의식을 강조했다고 한다. 비록 형제간이라고는 하지만 각기 다른 인격체라는 사고방식은 유태인에 있어서는 실로 수천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신명기 24장에, '아비는 그 자식들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은 그 아비로 인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가족 중 한 사람이 죄를 범하게 되면 가족 전체가 벌을 받게 되어 있었지만, 그 당시에도 유태인들은 개인의 책임을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비록 한 가족이라 하더라도 개인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형제가 함께 어울리면 서로의 개성을 기를 수가 없다
유태인 부모들이 자식들을 대할 때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그들 사이의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각각의 개성'이며, 서로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유태인들은 자식들이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결코 형제를 함께 보내지 않는다. 서로간의 취미가 다를 것이므로 같은 장소에 가기보다는 각자 다른 장소로 가서 서로 다른 세계를 접하는 편이 그들의 장래에 훨씬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태인들의 형제 자매가 우애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그들의 관계를 느긋하고 경쾌한 관계로 만들어주기 위해 여러 가지로 배려하기 때문이다. 유태인 출신의 음악가 레너드 번스타인과 잡지 편집인인 샤리버튼 형제의 우애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처음으로 가졌던 책은 누나와 형이 준 몇 권의 컬러북이었는데, 그는 나중에 '만약에 나를 다시 한 번 파리로 보내준다면 책을 사기 위하여 내 헌 옷을 팔아서라도 세느 강가를 헤매련만 ...'하고 술회했을 정도로 억척스러운 책 수집광이 되었다. 유태인들은 자식들이 각자 개성에 따라 성장하는 한편, 서로를 아끼는 마음을 평생 유지해 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이 포인트!
형제간의 두뇌와 우열을 비교하는 것은, 각기 개성이 다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싹마저 자르는 결과는 낳기 십상이다.
14.외국어는 어릴 때부터 습관화시킨다
동양인들은 왜 외국어에 약한가
내 친구의 남편 중에 일본인 행세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일본인을 가장해서 일본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전혀 유태인이라고 눈치채지 못하리만큼 그의 일본어 발음은 정확했다. 보통 외국인이 일본말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모국어의 악센트를 감출 수가 없는데, 그는 5개 국어를 사용하는 가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일본어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뿐만이 아니라 유태인이라면 누구나 2개 국어 이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것은 유태인이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널리 흩어져 살고 있고, 오랜 세월 박해를 받아 각 나라를 떠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국어를 잘하는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다 보니, 유태인들은 어릴 적부터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유능한 '언어 학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지만, 나는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동양인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시가가 너무 늦은 탓이 아닐까?
외국어는 가능하다면 어릴 적부터 가르쳐주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젖먹이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치라는 얘기가 아니다. 아직 말을 배우기 전이라도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려주라는 것이다. 언어란 말하기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유태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처한 특수한 환경 덕분에 최소한 몇 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데 많은 도움을 준 마잘 토케이어 씨는 모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라비아어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현재 이스라엘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데, 그는 히브리어, 아라비아어, 아르메니아어, 영어까지도 능통하게 구사한다고 한다. 또한 마잘의 남편은 그 외에도 독일어와 스페인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고, 나 역시 히브리어, 영어, 헝가리어, 이디슈어(독일어와 히브리어 등의 혼성어), 그리고 프랑스어도 조금은 한다. 나의 남편도 이디슈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들어서 좋지 않은 말을 할 때는 둘만이 통하는 이디슈어로 얘기한다.
어학에 능통했던 프로이트
프로이트 역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고 한다. 전기 작가 라시엘 베이커가 쓴 <프로이트의 사상과 생애>에는, 프로이트가 겨우 열 살 때 라틴어의 의미변화와 그리스어의 문법을 외우기 위해서 벽을 두드리면서 방 안을 빙빙 돌아다녔다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는 프로이트가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초등학교 시절부터 배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어를 자주 접하는 유태인들은 단일어만 쓰는 사람보다 언어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발음도 1개 국어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원어에 가까운 발음을 습득할 수 있다. 그런데 동양의 언어는 구라파나 영어권 말과는 그 구조가 전혀 달라서 배우는데 어려운 점이 많다. 히브리어도 구미 각국의 언어와는 구조가 전혀 다르므로 중학교 때부터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유태인들 역시 동양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의 체험으로 미루어볼 때, 어려서 외국어에 접한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장 후 어학 습득 능력에도 많은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외국어의 조기교육의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포인트!
언어를 습득하는 데는 말하는 것보다는 듣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듣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접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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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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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플리니우스(1/2)
제8권 <위기와 극복>에서도 인용한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Caecilius Secundus)는 대작 <박물지>의 저자인 큰아버지 플리니우스와 구별하기 위해 서양에서는 '주니어', 동양에서는 '소'를 붙여서 부른다. 인품이 훌륭한 인물로서, 동료 문인들한테도 질투나 편견을 갖지 않고 상대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원로원 계급이라는 로마 사회의 지도층에 속할 뿐 아니라 그 책임도 충분히 완수했고, 게다가 재산가로서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고, 남을 잘 돌봐주고, 제정 로마에 만족하고, 제 작품을 아내가 즐겨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사람, 요컨대 행복한 로마인의 한 사람이었다. 동시대인으로는 조국의 결함을 논하며 비분강개한 나머지 염세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타키투스가 있다. 이 두 사람이 같은 문필가로서 친구였을 뿐 아니라 같은 변호사로서 팀을 짜는 사이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하지만 염세주의자와 낙천주의자를 모두 내포하는 게 인간 사회일 것이다. 이 플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타키투스는 플리니우스보다 대여섯 살 위였다.
"당신은 절대로 자신의 작품을 자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의 저작을 칭찬할 때만큼 정직하게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낼 때는 없습니다. 후세인들은 과연 우리를 기억해줄까요. 기억될 만한 가치가 우리한테도 조금은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의 천분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오만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부지런함, 우리의 열성, 우리의 명예심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런 덕목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인생이지만, 그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빛나는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도 최소한 무명이나 망각에서 구원받을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요."
이런 말을 접하면 나는 당장 동정심이 솟아나서, '걱정 마세요, 내가 인용해 드릴게요' 하고 중얼거리며 그의 작품을 읽어 나가게 되지만, 이 편지를 타키투스는 어떤 심정으로 읽었을지 궁금해진다. 타키투스는 답장을 쓰지 않은 것 같다. 그는 재능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겸손했던 플리니우스와는 달리, 역사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고 있었다. 빛나는 명성을 후세에 남길 사람은 자기라고 확신했다. 타키투스도 원로원 계급에 속했고, 따라서 상당한 재산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도서관을 기증하거나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위한 육영자금에 재산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동료 문필가를 돕지도 않았고, 하물며 황제에게 천거하는 등의 방식으로 친지를 돌봐준 일도 없었다. 자기 작품을 자찬하지도 않았지만, 친구의 작품을 칭찬하지도 않았다. 플리니우스의 작품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행복한 로마 행정관의 먹물 방울'인 반면, 타키투스의 저작은 '로마 제정 시대의 최고 역사가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플리니우스는 친구로 삼기에는 좋은 사람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통일된 작품을 창조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악의나 '독'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트라야누스 황제와 주고받은 서신, 그리고 보결 집정관에 취임했을 때의 연설문밖에 남아있지 않다. 다른 글도 쓴 모양이지만, 기껏해야 아내의 칭찬을 받는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세인들은'부터 끝까지를 다시 한번 읽어보라. '우리'로 되어 있는 부분을 '로마인'으로 바꾸면서. "후세인들은 과연 로마인을 기억해줄까요. 기억될 만한 가치가 로마인한테도 조금은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로마인의 천분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오만합니다. 그러니까 로마인의 부지런함, 로마인의 열성, 로마인의 명예심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런 덕목을 가승에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인생이지만, 그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빛나는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도 최소한 무명이나 망각에서 구원받을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요."
나는 이 대목을 <로마인 이야기> 가운데 한 권의 첫머리에 놓고 싶다는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그만큼 매력적인 구절이다.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는 둘 다 원로원 의원이고, 둘 다 혹평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밑에서 공직 경력을 쌓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보결이긴 하지만 집정관에 당선된 것도 공통점이다. 연상인 타키투스는 네르바 황제 밑에서,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집정관을 지냈다. 하지만 속주 총독을 지낸 것은 플리니우스뿐이다. 타키투스는 끝내 공직 경력의 마지막을 총독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쳤다.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속주에 파견될 당시 타키투스는 아직 건재했는데도, 그리고 둘 다 자식이 셋은커녕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자녀를 둔 원로원 의원 우대법'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은 법률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조건도 같았는데도, 플리니우스만 총독을 지낸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이 법률은 지도층의 소자녀화 방지책이다 관직 선거에서도 셋 이상의 자녀를 둔 사람이 우선된다. 또한 모든 관직에는 몇 년의 휴직 기간이 설정되어 있었지만, 셋 이상의 자녀를 둔 사람에게는 그것도 면제되었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다. 황제는 자녀가 없는 사람도 이 법의 적용 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플리니우스에 대해 이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타키투스는 확실히 로마 제정 시대 최고의 역사가였을 것이다. 동시대인들도 동감이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유능한 작가가 반드시 유능한 행정가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공정한 통치로 알려진 트라야누스 시대다. 타키투스와 플리니우스가 팀을 짜서 변호한 아프리카속주 총독 프리스쿠스 재판 때는 트라야누스가 직접 재판장 자리에 앉았다 트라야누스가 타키투스 대신 플리니우스를 기용한 것은 단지 비티니아에 대한 플리니우스의 식견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용적인 로마 황제들 중에서도 특히 실용적인 트라야누스가 원한 사람은 훌륭한 문장으로 보고서를 써서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는 행정관료였기 때문일까.
타키투스도 속주 총독을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는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린 공직, 원로원 의원이라면 당연히 맡아 야 하는 국가 관직은 회계감사관도 법무관도 집정관도 모두 수도 로마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속주 총독은 다르다. 프로콘술은 단순히 원로원 의원이 밟아가는 공직 경력의 종점은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 임지를 선택할 수도 없다. 추첨으로 결정된 임지에 부임하여 통상적인 정무나 사법을 집행하는 한편, 1년밖에 안 되는 임기 동안 그 속주의 문제점을 밝혀내어, 총독의 권한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원로원에 보고하여 해결책을 입법화해야 하는 직책이다. 이미 건설이 끝난 로마 가도를 보수하여 계속 기능을 발휘하도록 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속주가 아니라 제국 전체를 상대로 이와 똑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황제였다. 타키투스도 속주 총독을 경험했다면, 황제의 책무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가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평론가의 입장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타키투스는 '로마 제정 시대 최고의 역사가'에 머물지 않고 '공화정과 제정을 통틀어 로마 최고의 역사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장력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쌍벽을 이루었다. 비판력은 역사서의 걸작을 낳는 중요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조건은 아니다. 후세에 '행복한 로마 행정관의 먹물 방울'로 평가받게 되는 플리니우스의 저작 가운데 백미라 해도 좋은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왕복 서한>은 모두 124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73통은 플리니우스의 편지이고 나머지 51통은 트라야누스의 답장이다. 플리니우스의 편지는 그가 직접 쓴 것이 분명하지만, 트라야누스의 답장은 정말로 황제가 직접 썼을까 하는 의문이 우선 떠오른다. 실제로 황제 측근에는 '서신' 담당 비서가 있었다. 트라야누스 앞으로 보낸 플리니우스의 편지도 이 비서가 먼저 인고 그 내용을 황제에게 보고했겠지만, 황제의 답장도 이 비서가 작성하여 비티나아로 보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라틴어 원문을 낱말 하나하나까지 분석하여 연구한 학자의 결론은 거의 모든 답장이 트라야누스의 구술로 작성된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능력까지는 없지만, 관료가 쓴 문장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다. 말을 하든 글을 쓰든, 입에서 나오는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트라야누스 황제는 이처럼 성실하게 제 생각을 플리니우스에게 전하려 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트라야누스는 비티니아 속주를 원로원 관할에서 황제 관할로 변경하면서까지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그 속주 총독으로 파견한 사람이 플리니우스라는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 속주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이제 트라야누스 황제 자신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밖에도 숨겨진 속사정이 있었다. 비티니아 지방은 원래 미트라다테스 왕 시절에 융성한 폰투스 왕국이다(제3권에서 자세히 서술함). 로마의 속주가 된 뒤에도 도읍인 니코메디아를 비롯하여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이스탄불이 된 비잔티움, 니케아, 푸르사, 흑해 남안의 헤라클레아와 시노페 등 역사가 오래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가 많고 인구도 많은 지방이다. 게다가 북쪽은 흑해에 면해 있고 동쪽은 아르메니아 왕국에 근접해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전략 요충이었다. 플리니우스를 이곳에 보냈을 당시, 트라야누스는 몇 년 뒤에 실현된 파르티아 원정 계획을 마음속에서 다듬고 있었다. 파르티아 왕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원정을 실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배후의 안정이다. 비티니아 속주는 그 배후의 하나였고, 게다가 그 경제력 때문에도 중요한 배후지였다. 그러나 황제는 그의 특명으로 전권을 위임받은 플리니우스 총독한테는 이 생각을 귀띔조차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플리니우스는 순진하게도 트라야누스가 요구하는 재정 재건과 사회 질서 유지가 비티니아 속주를 위해서라고 믿고, 그 임무를 완수하는 데 정력을 쏟는다.
각 도시를 돌아다니며 재정 파탄의 이유를 조사한 플리니우스는, 로마를 방문한 사절단 파견 경비, 주둔군이 없는 비티니아 속주의 방위까지 떠맡고 있는 모에시아 속주 총독을 예방하는 데 사용한 경비가 1만 2천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것은 낭비라고 판단하고, 방문 대신에 문서로 경의를 표하도록 하고 사절단 파견은 폐지했는데 괜찮으냐고 황제에게 묻는다. 트라야누스는 "잘했다, 나의 친애하는 세쿤두스여"라고 쓴 답장을 보낸다. 재정 재건이 급선무라고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세출을 줄일 수는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주민들의 위생을 위해서는 수도 공사를 감행한다. 다만 공사를 발주할 때 부정이 있었다는 의혹은 밝혀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 추궁은 총독에게 일임되었다. 앞에서 말한 체육센터 건립은 그 지방자치단체의 재정 규모에 적합한 규모로 만족하라는 황제의 지침에 따라, 적당한 규모로 줄여서 재공사가 시작된다. 재정을 재건하려면 강제적인 금리 인하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플리니우스의 질문에 대해, 황제는 그 필요성은 이해하지만 국가가 금리를 내리라고 강제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정신인 '공정함'에 합치하지 않는다면서 동의하지 않는다. '민'에 대한 '관'의 강제적인 금리인하는 강제 공출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했을 경우속주민의 반발을 피할 수 없다. 트라야누스는 그런 사태를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트라야누스는 비티니아 속주의 재정 재건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일까. 재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러 소수만 이익을 얻고 나머지대다수는 피해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시치는 불안정해진다. 선정은 요컨대 정직한 사람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사회 안정을 해치는 적은 일부가 권력을 독점하고 폐쇄적인 조직으로 남을 배제하는 경우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소방관 조합을 허가하는 게 어떠냐는 플리니우스의 소청에 대해 트라야누스는 소방관들끼리 서로 돕는 것은 좋지만 조합으로 인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변한다. 소방관조합이 정치적 결사로 바뀌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거야 어쨌든, 둘 다 정말 잘도 썼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상대가 한 사람인 플리니우스가 한 달에 평균 네 통을 쓴 것은 이해가 가지만, 트라야누스의 상대는 한 사람이 아니다. 황제 속주에 부임한 총독만 해도 13명, 각처에 파견된 군단장에서부터 장관이며 재무관까지 합하면 100명을 웃돈다. 게다가 일반인이 보내오는 청원서나 진정서. 이래서는 마치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거기에 들어오는 전자우편에 일일이 대답하는 회사 사장 같다. 나는 누가 제발 되어 달라고 사정해도 로마 황제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황제에게 귀중한 정보원이 아니었을까 비티니아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로 상황은 얼핏 비티니아 속주 총독의 직무와는 무관해 보이는데, 플리니우스는 그것까지 트라야누스에게 소상히 보고했다. 그리고 황제의 대리인 자신의 비티니아 입성을 속주민들이 어떻게 맞이했는지, 그 자초지종도 상세히 써서 보낸다. 부지런하다는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를 줄곧 따라다닌 동시대인의 찬사 가운데 하나다. 티베리우스 황제도 '홈페이지'를 개설하긴 했지만 회답은 일절 하지 않은 반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일이 성실하게 답변한다. 티베리우스는 평판이 나쁘고, 트라야누스는 평판이 좋았다. 특히 원로원 계급의 평가가 이들 두 황제로 대표되는 타입 가운데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는지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그들이야말로 '전자우편' , 즉 보고서를 자주 보내야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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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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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3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1. 요크 시에서의 유태인의 아내
제인 에반스는 최면 상태에 들어서 레베카라는 이름의 유태여인이 되었다. 레베카는 요크대성당의 외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기 1189년 유태인인 레베카는 과일과 채소를 사느라고 인근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죠셉으로 돈많은 고리대금업자이며, 나이가 사십대인 이들 부부에게는 열여덟살 난 아들 죠셉과 열한살난 딸 레이첼이 있었다. 레베카의 가족은 커다란 돌집에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유태인 부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거주하는 요크 시의 북쪽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그러한 것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없다. 다만 유태인 공동체에 속했다는 소수의 유태인 이름이 전해질 뿐이다. 레베카는 할아버지가 지중해에 위치한 사이프러스 섬 출신이고 나머지 가족들은 영국에서 출생했지만 영국인은 아니었으며 사회에서 버림받은 계급이었다고 자기의 혈통을 설명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있었지만, 당시 체스터, 링컨, 런던 등지에서 유태인을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자 불안한 나날이 시작되었다. 레베카는 플란타지니트 왕가 출신인 헨리 왕과 유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유태인들은 법정에서 재판 받을 때 헨리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고 왕은 그 보답으로 돈을 지불받았다. 그러나 레베카는 왕이 서거한 해에 일어난 사건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유태인을 이단자로 몰아 위협하는 기독교인들에 관한 레베카의 진술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초래한 사건을 사실상 설명하고 있다. 반회교 감정은 물론 반유태인 감정이 한창 고조 되고 있던 그 무렵의 불란서와 영국에서는 군중들이 이단자로 몰린 유태인을 향해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살인과 폭동이 뒤따르게 되었고 유태인은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레베카는 남편인 죠셉에게서 돈을 빌려간 메베리제와의 재판이후 몹시 두려움을 느꼈다. 문 단속을 철저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밤에 돈을 받으러 갈 때에는 유태인이란 표지를 위해 달게 되어 있는노란 뱃지를 떼고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레베카가 말한 메베리제라는 사람이다. 레베카는 당시 연대기 편자가 '유태인 학살의 주모자'라고 기록한 메레비제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는 것 같다. '메레비제'와'메베리제'는 서로 거의 비슷한 이름이다. 이 사람은 후일 유태인 학살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고 유형에 처해졌다고 전해진다. 메레비제라고 불리는 요크 시의 이 미미한 귀족은 유태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그 돈을 갚지 않으려고 그들을 살해함으로써 빚을 청산하려 했다는 것이다. 위급한 상태가 계속 되자 레베카의 가족들은 성을 빠져나와 성당에 피난처를 마련하여, 성당 밑바닥에 있는 지하실로 내려갔다고 한다. 레베카의 가족들이 숨은 곳은 요크성 성문 밖에 위치한 조그만 성당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곳에서 레베카는 딸 레이첼을 빼앗겼다. 그리고 레베카 역시 성당 안의 지하실에서 살해당했다.
레베카의 말을 담은 테이프를 욕크대학교의 역사학 교수인 도브슨 박사가 들었는데, 그는 '1190년의 유태인 대학살'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한 사람이다. 도브슨 교수는 레베카가 사용한 언어는 중세영어라기보다는 12세기에 쓰던 영어라고 밝혔다. 또 레베카의 얘기는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고 했다. 도브슨교수는 레베카가 성에서 성당으로 도망했다는 설명을 듣고 그 성당이어느 성당인지 찾아내고자 했다. (그 도시에는 약 40개가 넘는 성당이 있었는데 지금도 약 반수 가량이 형태가 조금씩 달라진 채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브슨 교수는 성모마리아 성당이 레베카가최후를 맞았던 곳이라고 짐작하게 되었는데, 그 성당은 레베카가 말한 것처럼 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다고 한다. 그런데 틀린 점이 있다면 대성당 하나를 제외하고는 어느 성당도 지하실을 가지고 있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1975년 9월, 성모마리아 성당을 수리하던 한 일꾼이 이 성당에서 예배실처럼 보이는 지하실을 발견했다. 일꾼은 석굴과 둥근 천정 등을 보았다고 말했다. 또 이 건물이 로마풍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서기 1190년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이라고 다. 레베카는 말하던 도중에 군중들이 이단자라고 유태인을 몰아 세우며 위협을 하던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리듯, 두렵다는 말을 반복했다. 유태인들은 자기의 자식이 남의 손에 살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스스로 죽이기도 했다고 레베카는 말했다. 이는 '자비살인'이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요크대학살 당시 일어났던 일 중에서 가장 가슴아픈 일이었다.
제3장 에반스 여사의 세 가지 전생
2. 로마시대 가정교사의 아내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전생에 유태인으로 태어나 살았던 곳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로마인의 아내로서 살았던 장소로 바뀐다. 브록샴 씨의 최면에 의해 12세기 경의 레베카는 리보니아가 되었다.(곧 요크 시는 제인 에반스 여사가 유태인으로서 산 곳인 동시에 로마인의 아내로서 산 곳이기도 하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 경 영국에서 일어났던 음모와 반란사건에 대하여 자신이 본 대로 솔직하게 묘사했다. 서기 3세기경의 이 인생은 제인 에반스가 살았다고 말하는 여섯 번의 전생들 가운데 최초의 전생이며 녹음한 전생 기록 가운데 마지막의 것이다. 그녀는 리보니아의 전생까지를 기억한 후 더 이상 최면에 드는 것을 거절하며 몸이 몹시 피곤하다고 말했다. 리보니아는 타이터스의 아내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훨씬 나이가많았다. 타이터스는 콘스탄티우스라고 불리우는 저명한 로마인의 아들에게 라틴어와 희랍어, 그리고 시를 가르치는 가정교사였다. 콘스탄티우스의 가족은 에보라쿰이라는 요크 시 외곽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리보니아는 냉대받고 탄압받는 유태인 그룹에 속했던 12세기경의 레베카와 비교해 볼 때, 훨씬 교양있는 그녀는 더 많은 이름과 사실들을 열거해가며 영국 역사의 격동기 동안에 살았던 자신의 전생을 기억했다. 그녀가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때는 거의 정확했으나 이야기 가운데 숨길 수 없는 큰 흠이 있었다. 역사책에는 로마의 황제로 커다란 치적을 남긴 콘스탄티우스가 언급되지만, 어디에도 그가 서기 286년에 로마 집정하의 영국에서 살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리보니아는 그가 영국의 총독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중대한 역사적 사실을 그릇되게 말했다면 그녀의 전생기억은 전부거짓말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리보니아는 역사적으로 있었을 법한 일에 대하여 불가사의하게도 많이 알고 있었다. 또 이상하게도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리보니아의 설명은 역사책에 기술된 것과는 꽤 달랐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그녀의 설명이 틀렸다고 논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리보니아의 말을 엄밀하게 추적해 보았더니 그 유명했던 여러 인물들이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책에 공백으로 비어 있는 시기를메꾸어 놓은 그녀의 이야기는 너무나 놀라웠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이 헬레나이며, 자신의 남편타이터스가 가르치는 소년, 곧,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이름이 콘스탄틴이라고 말했다. 리보니아의 말처럼 콘스탄티우스의 부인은 헬레나였으며, 그 아들은 콘스탄틴이었는데 그가 바로 나중에 콘스탄틴 대체(大帝)로 알려지고 콘스탄티노를 시를 이루었으며 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았던그 유명한 황제이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책의 어디에도 콘스탄티우스의 가족들이 서기286년에 영국의 총독으로서 리보니아가 말한 에보라쿰에 살았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대 영국사의 대가인 리드대학교의 브라이언 교수는 그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는 리보니아가 진술한 대로 콘스탄티우스가 영국에 총독으로 갔을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기 283년, 콘스탄티우스가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알려졌을 당시부터, 서기 290년, 다시 기록에 의해 나타날 때까지의 행방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일생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기 286년 경에그가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과,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콘스탄틴 대제의 자서전 작가조차도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명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의 출생 연도는 서기 272년부터 280년 사이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는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서기 272년을 합당한 것이라 보고 있다. 콘스탄틴이 서기 272년에 태어났다면, 에보라쿰의 정원에서 리보니아의 남편에게서 무기를 쓰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던 당시의 나이를 열네살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 리보니아의 전생기억을, 공백으로 남겨져 있는 역사상의 시기를 토대로 꾸며낸 단순한 허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녀는 콘스탄티우스가 역사상으로 행방불명이었던 기간에 대한 자신의 진술과 완전히 부합되는, 실증이 가능한 사실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콘스탄티우스의 저택에서 연회가 있을 때면 쓰여지곤 했던 육류와 과일들이며 은잔에 담긴 사이프러스산 포도주 등 그 시대에 애용됐던 연회용 준비물의 이름들을 자세하게 열거할 때, 오늘날의 사학도들은 논박할 여지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리보니아는 콘스탄티우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칙명을 가지고 온 알렉터스라는 사람과 그 후의 정변에 대해서도 말했다. 서기 286년에 콘스탄티우스와 그의 가족들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역사에 기록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알렉터스가 이 무렵 영국에 체류하면서 권력을 잡으려고 계획했다는 것은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알렉터스는 해군대장 카라시우스와 함께 영국 내의 로마인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카라시우스는 당시 게소리아쿰에 있는 로마함대의 책임자였는데, 그들은 로마인 정권의 전복에 성공하여 몇 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의 얼굴이 오늘날 자주 독립을 기념하는 영국 주화의표면에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보니아는 서기 286년에 있었던 불명료한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카라시우스와 알렉터스가 로마로부터 독립하여 다스린 9년 동안과 그 다음또 다시 9년이 지나기까지, 다른 사람 아닌 콘스탄티우스가 로마로부터 돌아와 다시 영국을 정복하기까지, 리보니아와 헬레나의 가족들은 숨어살았다. 콘스탄티우스는 알렉터스의 세력들을 몰아낸 후 10년이 지난 서기 306년에 에보라쿰에서 죽었는데 헬레나가 아닌, 정략결혼한 황제의 딸데오도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셋 등 모두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은 뒤에 영국에 주둔한 로마군에 의해 황제로 추앙받아 후일 로마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사람은 헬레나의 아들인 콘스탄틴이었다.
리보니아는 남편 타이터스와 함께 숨어 사는 기간 동안 앨바너스라는 사람을 통해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또 콘스탄티우스와 헤어진 헬레나와 아들 콘스탄틴도 앨바너스에게 소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리보니아의 남편인 타이터스는 가장 열렬한 기독교 귀의자였다. 학살을 영국에서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 콘스탄티우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와 남편 타이터스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리보니아가 말하는 앨바너스는 오늘날 성자 앨반으로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현재, 리보니아가 숨어 살다가 앨바너스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 했다는 베룰람 시는 '성 앨반스 시'로 명명되어 불리고 있다. 또한 성자 앨반이 베룰람에서 순교했다는 기록이 있다. 앨바너스가 곧 성자 앨반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기독교가 헬레나의 가족과 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헬레나와 아들 콘스탄틴이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 경위는 역사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그들은 고금을 통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기독교인이다. 헬레나는 대단히 믿음이 깊은 기독교인이라 후일 성자로 추앙되어 '성(聖) 헬레나'로 추존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에서 이교도의 신을 몰아내고 기독교를 국교로삼은 최초의 황제라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콘스탄틴은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최초의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모든 부하들의 방패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안을 그려 넣었으며, 그 자신도 똑같은 방패를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도안에는 창살을 포개어 만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이름 가운데 첫번째 글자를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이 도안은 로마의 국기에 그대로 보이게 된다. 현재의 사가들은 콘스탄틴이 종교 고문이었던 스페인 대주교 오씨우스에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오씨우스는 리보니아의 이야기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리보니아의 남편이 죽는 날 방에 "그를신부로 만들기 위해 베룰람에 온 사람이 바로 오씨우스"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오씨우스는 영국 출신이 아니라고도 했다. 리보니아의 전생기억을 들은 역사가들은 그녀의 말이 대체로 믿을 만하며 역사적으로 밝혀진 사실들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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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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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우정기(喜雨亭記) - 소식(蘇軾) / 김도련 옮김
정자를 비(雨)로써 이름함은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옛날에 기쁜 일이 있으면 곧 그것으로 물건의 이름을 지었으니, 이는 잊지 않을 것을 나타내려 함이다. 주공(周公)은 벼를 얻고서는 그것으로 책의 이름을 지었고, 한무제(漢武帝)는 보정(寶鼎)을 얻고는 그것으로 연호(年號)의 이름을 지었고, 숙손(叔孫)은 적(敵)을 이기고 그것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 기쁨의 크고 작음은 같지 않으나 그 잊지 않음을 나타냄은 똑같다.
내가 부풍(扶風)에 부임한 다음 해에 비로소 관사를 손질하며 당(堂)의 북쪽에 정자를 짓고 못을 그 남쪽에 파고는 흐르는 물을 끌어 오고 나무를 심어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었다. 그 해 봄에 기산(岐山) 남쪽에 보리를 뿌리니 그 점괘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이윽고 한 달이 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백성들이 바야흐로 걱정을 하였다. 3월 을묘일 (乙卯日)에 비가 오고, 갑자일(甲子日)에 다시 비가 내렸는데 백성들은 아직도 부족하게 여겼다. 정묘일(丁卯日)에 큰 비가 내려 사흘만에야 그치니, 관리들은 서로 뜰에서 경하(慶賀)하고, 상인들은 서로 시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농부들은 서로 들에서 손뼉치며 기뻐하여, 근심하던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병든 사람들은 병이 나았는데, 내 정자가 이 때 마침 이루어졌다. 이에 나는 정자 위에서 술잔을 들어 손님들에게 권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닷새를 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닷새를 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보리 농사가 안 되었을 테지요.”
“열흘을 더 비가 내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열흘을 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면 벼농사가 안 되었을 테지요.”
“보리도 없고 벼도 없어지면 이 해는 장차 거듭 흉년이 들 것이요, 옥송(獄訟)이 크게 일어나고 도적이 들끓을 것이니, 내 여러분들과 더불어 비록 이 정자에서 한가히 놀며 즐기려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늘이 이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어 처음엔 가물다가 비를 내려주셔서 나와 여러분들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한가히 놀며 이 정자에서 즐기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비의 덕택이라, 그 또한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짓고 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하늘이 구슬을 뿌린들 추운 사람들 그것으로 옷을 마련할 수 없으며, 하늘이 옥(玉)을 뿌린들 굶주린 사람들 그것으로 곡식을 삼을 수 없네. 한 번 비가 사흘이나 온 것은 그 누구의 덕일런가? 백성들은 태수 덕분이라 하나 태수는 그렇지 않다 하고는 그 덕을 천자(天子)에게 돌렸네. 천자께서 그렇지 않노라 하시며 그 덕을 조물주에게 돌렸네. 조물주는 자기 공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태공(太空) 에게 돌리니, 태공은 아득하고 아득하여 이름할 수 없으니, 내 이로써 정자의 이름을 희우(喜雨)라 하노라.”
<고문진보(古文眞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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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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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1장 만토바, 베로나 사절시기. 세 번째 프랑스 사절 시기(1/2)
피사 전쟁의 불꽃이 조용히 사그라들고 있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다른 더 큰 화염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캉브레에서 프랑스 왕과 막시밀리안 사이에 반베네치아 동맹이 맺어졌고, 여기에 주리오 2세와 아라곤 왕이 마지못해 가세하였다. 그리하여 바로 이해 1509년 봄이 되면서 레오네 디 산 마르코(마르코 성인의 사자, 즉 베네치아를 가리킴 - 옮긴이)가 이들 모두의 공격을 받는 상태가 되었다. 롬바르디아 지역의 경우, 베네치아 5월 14일 아다의 자갈밭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곧 베르가모와 브레쉬아르를 잃었다. 로마냐에서는 24일 파엔차가 함락되고 연이어 라벤나도 넘어갔으며, 교황의 2개국 연합군에 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리미니와 체르비아를 포기해 버렸다.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듭하는 프랑스 군의 기세에 암도되어 베로나, 비첸차, 파도바까지도 적의수중에 떨어졌으며, 황제는 캉브레 조약 덕분에 스스로의 힘과는 관계 없이 그 지역들을 차지할 수가 있었다.
일이 이쯤 진척되자, 황제는 프랑스 왕과 교황의 부담으로 결집된 대 군세를 거느리고 산맥을 넘어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진군은, 느려터지고 우왕자왕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그 모습도 모습이지만, 다른 군대가 빼앗아놓는 족족 잃기만 하는 것엔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했다. 왜냐하면, 파도바는 곧 베네치아로 넘어갔으며, 막시밀리안이 대군세에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대로 그곳을 포위했지만, 으레 그렇듯이 치욕만 안고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선 베로나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프랑스 원군을 허망하게 기다리다가, 마치 패자가 승자를 인정하지 않는 격인 휴전을 베네치아에 제의하고는 더 안전한 것으로 물러서 버렸다.
그러나, 그는 베로나를 떠나기에 앞서 피렌체와 그 유명한 조공 액수에 합의했는데, 40,000두카토를 네 번에 갈라서 지불하는 조건이었다. 이 정도는 전 같으면 베토리에게서 얻어낼 수도 있었던 금액보다 적은 돈이었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프랑스의 전례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이만한 액수를 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튼 이거라도 그가 이탈리아로 와서 얻어낸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였음에랴! 첫 회 할부금이 10월에 즉시 전해지자, 그는 (이 세상에서 돈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없지)라는 말로 사절들을 환영하였다고 한다. 11월 중순 만토바에서 전달키로 약속된 두 번째 할부금을 처리하기 위해 그들은 마키아벨리를 파견하였다. 11월 10일, 그는 두 명의 마부와 함께 10,000피오니노 금화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가 15일 만토바에 도착하자마자 거의 같은 시각에 비첸차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의 수비대를 축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에게는 금화라는 짐 외에도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살피는 책무가 떨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돈 문제를 해결한 뒤, 21일에 베로나로 향했는데, 그곳의 공기 속에는 이미 폭풍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루만 더 지체했더라면 길이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곳이 전쟁이 진행되는 길목이라 짐작하고, 거기서 황제를 기다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첫 번째 편지에서, 귀족들과는 달리 평시민들은 모두가 산 마르코 공화국 편인 도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을 맺었다. (베로나 사람들은 비첸차인들을 닮고 싶어하지만, 가까이 있는 성채들과 프랑스 군의 존재가 그들의 욕구를 저지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들의 생각대로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또 5밀리오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제국 군과 베네치아 군의 상태를 이야기하고, 그 도시의 위치와 성벽에 관해서도 기술하였다. 그는 앞서 보오나코르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금 자신이 뛰어들고 있는 함정에 대해 다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긴 했으나, 그래도 곧 다가올 충돌의 위험 속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모습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는데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네치아 군을 베로나를 떠났고, 황제는 궁지에 몰려 하릴없이 프랑스 왕의 도움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왕은 그에게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산 마르코의 사자는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다시 힘을 얻은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만일 이 왕들이 서로를 경계하면서 짧지만 격렬한 이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지금까지 빼앗은 영토를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되돌려주어야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12월 1일자 편지에서는 또 이렇게 썼다. (이 두왕들 중에서, 하나는 싸울 능력은 있지만 싸우고 싶어하지 않고, 다른 하나는 싸우고는 싶지만 능력이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후자는 물론 막시밀리안이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가 베로나에서 할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일을 한다는 것으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10인위원회에도 설교 조의 말들을 써갈겨) 보냈다. 그는 또 (칸타파볼라 cantafavola) (시 형식을 빌린 이야기를 가리킴 - 옮기이)라 부를 만한 작품을 써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냈는데, 당시 만토바에 있었던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글을 한번 써보라고 재촉한 바 있었다. 이 작품이 바로 두 번째 (십년기)란 설이 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십년기)의내용 역시 묘하게도 1509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럴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는 쪽은 종료 시점이 일치하는 사실 외에도 두 번째 (십년기)의 몇몇 구절이 이 시기에 씌어진 편지 속의 표현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예컨데, 그는 칭송받던 시민이었던 자코미니에게 바친 송덕문에서 그를 가리켜 (시력으 앗긴 노인)이라는 말을 썼는데, 1509년 당시 자코미니의 나이는 경우 53세였을 뿐 아니라 아직 눈이 먼 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증거들은 놔두더라도,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두 번째 (십년기)가 1514년 이후에 씌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저자가 1505-1514년 사이 십 년의 역사를 쓰겠다고 작정한 때가 바로 이 해이거나 그 다음 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마키아벨리가 송덕문에서 자코미니를 노인아라 부르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잃은 뒤) 그의 죽음으로 (어찌할 바 모를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한 말을 정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가 당혹해했건 슬픔에 잠겼던 간에 그는 여가를 얻었고, 이는 다시 그에게 글쓸 마음을 불어넣어주었다. 그의 글 중에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뤼지 귀차르디니에게 보낸 제기발랄한 편지 한 통이 있다. 뤼지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사람으로,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즐거운 경험을 이야기하거나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편지를 써보내곤 하였다. 마키아벨리 역시 이에 응답할 마음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뒤에 또 하나의 별난 피렌체인이 벰보의 유명한 소네트를 패러디한 것과 비슷한 경우였다. 그래서 그는 친구에게 자신이 (부부 생활을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한 포주 할머니와 어둠에 속은 사건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여기서 세세히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떻게 (그녀로부터 도망쳤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순식간에 그 절절하던 욕구를 채운 뒤, 그는 불빛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워준 여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 이런 일이라니! 글쎄 그 여자라는 게 추악한 모습의 늙어빠진 할망구였던 것이다. 이런 유의 묘사에서는 이전의 그 어떤 문인도 마키아벨리를 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그 소름끼치는 모습을 그리면서도(...입은 로렌초 데 메디치같이 생겼는데, 한쪽으로 비뚤어진 그 입에서는 허연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 뭔가...) 하는 식으로 특유의 재치를 발휘하고 있다. 그러한 괴물을 보고 속이 뒤집히기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독자도 마찬가지일 정도이다. 이 이야기의 골격 자체는 아마도 진짜였을 법하다. 하지만 이야기가 모두가 진짜라기엔 그 세부 묘사가 너무 아귀가 딱딱 맞고 너무 리얼하다(나에게는 단순한 농담 이상으로 보일 만큼).
그러나, 피렌체의 서기장은 3주 동안 장난기 어린 글들을 끄적이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실컷 즐긴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12월 1일 그는 10인위원회에다 (만약 황제가 트렌토에 머물게 되면, 저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라고 썼다. 그 후, 황제가 인스브루크로 갔으며, 제국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에서 다시 아우크스브루크로 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자, 그는 11일 만토바로 되돌아와서 이제 귀향하게 해달라는 편지를 썼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의회의 진행 상황을 보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로 간다는 것이 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게다가 그곳의 다른 군주들이 외국의 사절들과 접촉하는 것을 황제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7일에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이 소식은 21일이나 22일이 되어서야 그에게 전해졌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크리스마스가 지나서야 길을 떠났고, 피렌체에 도착한 대가 1월 2일이었던 사실로 보아 여행은 급할 것이 없었던 듯하다.
그가 이렇게 늦었던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혹시 베르나에서 미처 채우지 못한 욕구를 만토바나 볼로냐에서 벌충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향에서느 유감스럽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오는 도중에 부오나코르시로부터 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에게 전하라는 12월 28일자 편지 한 통을 받았다.(원문에는 27일로 되어 있으나, 이는 28일을 잘못 쓴 것이다 - 옮긴이). 그는 매우 흥분하고 성난 어조로 전하기를, (투라토 un turato), 즉 얼굴을 가린 작자 하나가 증인이랍시고 다른 두 녀석을 대동하고 와서는, 법령 등기소의 공증인에게 마키아벨리란 사람은(어쩌고저쩌고 한 위인을 애비로 두었기 때문에) 지금의 직분을 도저히 수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접수시켰다는 것이다. 보오나코르시는 계속해서, 비록 법률상으로는 친구가 유리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입방아를 찧고 여기저기 소문을 퍼뜨리고 있으며, 심지어는 만일 무슨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두고 보자는 식으로 위협까지 하고 있는 터라, 일이 좋지 않은 상황에 있으므로 무언가 강력한 도움을 받아서 일을 조심스럽게 처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편지는 시종일관 이런 식으로 사태는 위험하게 되어가고 적대적인 사람의 숫자 및 정도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한껏 부풀려 전하고 있다.
아버지와 관련하여 그 무엇이 니콜로로 하여금 이처럼 관직츨 수행 할 수 없다는 말까지 듣게 했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톰마시니는 (어쩌고저쩌고)란 말에 자극을 받아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틀림없이 사생아였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톰마시니에게는 부오나코르시의 표현이 (분별 있게 제대로 한) 것으로 보였을지 모른지만, 원래 그 친구의 편지라는 것이 분별 있게 제대로 된 것과는 거리가 먼 (어쩌고저쩌고)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베르나르도가 (엔체 채무자 명부(중세와 르네상스기 이탈리아 코무네에서 상환 불능 연제 채무자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명부. 스페키오specchio'로 불림-옮긴이)에 등재되어) 있었다는 것, 즉 코무네의 상환 불능 연체 채무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며, 이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아들까지 관직에서 밀려나게 말든 뻔했던 것은 아버지가 사생아른 엉뚱한 사실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제적 상황이었다. 톰마시는 다른 동료들 몇몇도 마키아벨리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말이 같은 편지에 나온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연체 채무자 명부에 이름이 등재된 시민드은 수천 명에 달했던 반면, 서기국이 온통 사생아 아버지를 가진 자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는 점도 당연히 생각했어야만 했다.
부오나코르시는 대책이 강구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으나, 그래도 도착을 며칠 늦추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간곡히 얘기하였다. 볼로냐의 이쪽 어딘가에서 그 편지가 마키아벨리에게 전해진 때는 틀림없이 12월 28일 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의 간청에 따라 발걸음을 늦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하루 이틀 이상은 아니었다. 단지 더 새로운 소식이 없을까 기다렸을 만한 시간 정도였다. 그 서기본의 우려는 조금 지나쳤던 것으로 부인다. 그는 원래 소심한 데다 흥분을 잘하며, 평소 그런 유의 이야기로 마키아벨리를 성가시게 하곤 하였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적도 많지만 동시에 곤팔로니에레처럼 힘 있는 친구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적이라 해서 곤팔로니에레가 자신의 (심복)이 잘못되는 것을 그냥 내버려두리라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그리 높은 직급에 있지도 않은 서기장을 겨냥했다기보다는 단지 곤팔로니에레를 괴롭히려는 계획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마키아벨리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또 하나 있었는데, 자신에게는 이쪽이 더 심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사적인 편지를 통해 당시 로마에서 그와 관련된 한 거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단지 추측만 한다는 것은 불확실하고 소용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것이 어떤 식으로 그와 동생 토토 간의 계약 관계와 관련된 교회 성직록 문제에 일어난 재판이 아닐까 추측해서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설사 이 추측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리 큰문제는 아니다). 토토는 바로 그때인 1510년 1월 5일 수련의 과정을 벗어나 사제에 서품된 상태였다. 프란체스코 넬리와 피에로 델 네로의 중재로 마련된 이 계약에 의해, 토토는 형인 니콜로에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몫을 양도 한 바 있었다. 그 주요 내역은 피렌체의 집과 페르쿠씨나의 산탄드레아에 있던 땅 약간이었다.
로마에서의 소송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피렌체에서의 투서 사건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후 그에게 일어난 일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와 9인관제위원회 서기장에다가 정무위원회 서기장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10인 위원회의 명으로 3월 12일에서 23일 사이 몬테 산 사비노로 가서 피렌체령 가르곤차의 주민들과 시에나령 아르마이올로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5월25일에서 6월 3일 사이에는 9인관제위원회의 일로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의관구들에 파견되어 모병 작업을 돌보았다. 그리고는 피렌체로 돌아와 며칠 쉰 뒤, 세 번째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줄리오 2세는 이제 누구와도 부딪힐 일이 없었다. 베네치아와는 묵은 것이든 새것이든 모든 문제를 청산한 상태였고, 따라서 더 이상이 영광스런 공화국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처리해야할 문제는 많은데 해결은 난망인 막시밀리안에게 이러한 상황은 썩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프랑스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교황이 베네치아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것만큼이나 그 나라를 쳐야 하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의 위치를 확고히하기 위해서 산 마르코의 사자를 길들이 필요가 있었고, 반면 교황은 프랑스인들을 내쪼츠는 데에 베네치아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줄리오 2세는 프랑스에 대항하여 다른 세력들을 끌어모으는 한편, 페라라가 프랑스 보호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여 그 도시를 공격할 채비르 갖추었다. 서로 경멸하고 불신하는 가운데 교황의 증오와 왕의 분노는 나날이 커져 갔으며, 이제 최악의 상황만이 남지 않았는가 생각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교속의 두 군주 사이에서 언제나 조정 역할을 담당했던 루앙 추기경이 지난 5월 세상을 뜸으로써 사태는 더욱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피렌첸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줄리오를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데리니의 말처럼, (교황은 우방으론 시원찮지만 적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픈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궁정에 상주할 대사를 파견하면서 자신들이 그 불 같은 교황과의 협상을 최대한 신중하게 처리하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동행시켰다. 그는 공적인 임무 외에 곤팔로니에레가 사적으로 부탁한 일까지 맡고 있었다. 곤판로니에레는 10인위원회의 훈령이라는 천 위에 자신의 이름 첫 그르자를 아로새기는 것(공문서에 자신이 서명한 것을 비유한 말 - 옮긴이)말고도, 그러한 중대 국면속에서도 자신과 그의 동생인 추기경은 개인적으로 여전히 프랑스 왕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확신시키고 싶어하였던 것이다. 추기경은 마키아벨리의 출발 소식을 듣자, 곤팔로니에레가 그랬던 것처럼 곧 로마로부터 교황과 왕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편지를 뒤딸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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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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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클리브랜드 대통령
18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민주당 클리브랜드 후보에게 열살난 사생아가 있다는비밀이 드러났다. 그의 선거 참모들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라고 권고했다. ‘깨끗한 정치’를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던 그에게 그런 스캔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리브랜드 후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면서, 자신은 지난날 어떤 과부와 관계를 가져 그 사이에 아이가 하나 있으며 그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 아이의 양육비 등을 대어왔다고 하나도 숨김 없이 말했다. 공화당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공격거리가 없었다. 그에 대한 각종 소문을 만들어내면서 그를 공격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유권자들은 거짓말하지 않은 정직한 지도자를 택한 것이다.
‘정직한 대답은 감미로운 입맞춤과 같다’고 성경은 전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잘못된 것이 너무 많다. 법정에서도 거짓이 통하고 반드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에 불의가 있다. 또 악인이 잘 되고 잘 사는 경우도 있다.
‘하느님은 죄인을 즉시 벌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담대하다’고 전도서는 전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흠 없고 정직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또 악한 자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성경 욥기는 전하고 있다. 악한 자, 거짓이 많은 자는 물고기가 그물에 걸리고 새가 덫에 걸리듯 걸려들기 마련이지만, 정직한 사람은 모든 환란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정직은 인생을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이다. 곤란한 일에 부딪치면 구차스럽게 변명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말고 당당하게 사실을 말하고 대처해야 한다.
정직이 제일이다. (Honesty is the best policy.)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이롭다고 여길 때만 정직을 지킨다. 그렇지 않을 때는 거침없이 정직의 탈을 벗는다고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자신을 알기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 델파이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져 있던 말이다. ‘인간이여 너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아라. 모든 지혜는 그곳에서 나온다’에서 연원한 이 말은 아테네에 민주주의 기초를 세운 정치가 사론(B.C 6세기)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사용하여,“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외에는 없다.”고도 하였다. 영국 소설가 로렌스는 <마지막 시>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야‘너 자신을 알라’란 격언의 굴레를 벗어났다‘고 하였다.
무본지학
유학은 인간의 근본을 파악해가는 학문이다. ‘근본이 서게 되면 나아갈 길이 저절로 생긴다’라는 논어의 말은 겉모양이나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근본을 파악하라는 가르침이 담겼다. 논어에 의하면 인간의 근본을 파악하여 가는 방법으로 ‘마음을 경건히 하여 자기를 갈고 닦고’, ‘나를 다스려 사람을 편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나를 닦는 것은 자신의 근본을 알고 자기를 다스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가족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국가를 사랑할 수 있고 세계를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너 자신을 갈고 닦아라’는 말과 같다.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
심판
마태복음 제7장에 나오는 말이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판단하는 만큼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며 저울질하는 것만큼 너도 저울질을 받을 것이다. 너는 왜 형제의 눈 속의 니튼 보면서 네 눈 속의 기둥은 보지 못하느냐?’
대부분의 한국 성서번역은 ‘심판(판단)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판단)하지 말라는 말이다. 하느님은 불완전한 인간이 다른 불완전한 인간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하고 있다. 왜냐하면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만져본 부위만 진실이라고 믿는 군맹평상의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나를 판단하는 이는 주님이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 날까지 판단하지 말고 주님이 오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 서로 비판하지 맙시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논어에서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지도록 노력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을 그 사람에 비추어 반성하여라‘로 하면서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오직 자신을 꾸짖기를 엄하게 하라‘고 하며 자신을 냉철하게 반성하고 판단하라고 하였다. 현명한 성인의 생각은 시공을 뛰어넘어 한결같고, 지혜로운 사람은 보는 바가 대체로 같다.
하느님께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 (Judge not, that you be not judged.)
일이 꼬이고 꼬여 가더라도...
랍비 한 사람이 당나귀와 개를 데리고 작은 램프만을 지닌 채 여행을 떠났다. 날이 어두워지자 그는 외딴 오두막을 한 채 발견하여 그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아직 잠잘 시간이 되지 않아 랍비는 램프에 불을 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름이 떨어져 불이 꺼지자 할 수 없이 잠을 청했다. 캄캄해지자, 이때다 싶었는지 이리떼들이 몰려와서 마당에 있던 개를 물려 죽였다. 마음이 상해 있는 랍비에게 이번에는 사자가 나타나서 당나귀마저 물고 어디론가 가져가 버렸다. 겁먹고 흥분한 랍비는 당장에라도 이웃 마을로 내달려 가서 도움을 청할까도 생각했으나, 날도 어둡고 타고 갈 당나귀도 없고해서 정신을 가다듬은 후 그냥 잠을 자기로 했다. 아침이 되자 그는 빈 램프만 가지고 터벅터벅 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전날 밤 흉악한 도적떼들이 쳐들어와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까지 죽였던 것이다. 만약 램프가 꺼지지 않았다면 그도 도적떼에게 발견되어 황천에 갔을 것이다. 개가 살아있었다면 개짖는 소리에 도적에게 발견되었을 것이다. 당나귀가 사자에게 물려죽지 않았다면 당나귀를 타고 마을에 갔을 것이고, 그러면 그도 도적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가지고 있던 것들을 모두 잃은 덕택에 우주보다 소중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항상 연결되어 있다. ‘불행은 성공의 전단계‘이며 위기는 기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실망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성심성의껏 해보자. 절대로 손해나는 일이 없다. 비록 그일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얻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마음으로 정성껏 구하고 열심히 하면 비록 과녁은 맞추지 못하더라도 그곳에 더 가깝게 이르게 된다’고 대학에서 이르듯이, 성심성의로 하는 일에는 손해가 없다. 맹자가 ‘성실은 하늘의 도리이고, 성실해지려는 생각은 사람의 도리이다’고 하였듯이 성심성의로 하는 일은 실패가 되더라도 전화위복이 된다.
성심성의로 하는 일에 손해가 없다. (There is no great without some gain.)
구더기와 장
시험에 떨어질 것이 두려워 시험을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실패할 것이 두려워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머뭇거리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과감하게 시행하면서 잘못이 있으면 고쳐가는 것이 훨씬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외국에 이민 간 사람들 중 서투른 영어를 하다 창피를 당하면 어떨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말 한마디 못해도 친구를 사귀고 빨리 배운다. 애들보다 더 나은 영어실력을 가진 부모들은 ‘집어던져도 개도 쳐다보지 않을 체면’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지내다 십 년 아니 이십 년이 지나도 영어를 못하고 더듬거린다. 혼자 있으면 그런대로 꾸려가는데 누가 옆에서 지켜보면 그만 벙어리가 되는 것이다. 남의 눈을 의식하여 잘못을 저지르면 어쩌나 하는 마음때문이다.‘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어리석은 짓이다. 외국인이 유창하게 한국말을 할 수 없듯이 한국 사람이 영어를 유창히 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고 싶은 말을 당당히 하면 좀 실수를 하더라도 빨리 영어룰 배우게 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준비는 신중히 하고 일은 과감히 처리하자. 일을 당해서 우물쭈물하지 않고바로 시행하는 것도 용기 있는 일이다.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는 일은 하지 말라. (If you don't make mistakes, you don't make an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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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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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의 속삭임 - 강소천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느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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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 문명래
고운 이름으로
보슬보슬
조용히
산도 적시고
땅도 적시고
나무도
그리고
장대비가 할 수 없는
마음까지
촉촉히 적셔 주는
넌
조금씩 조금씩 다가와
어느 새
내 마음 차지한
친구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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