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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7호 - 2024.9.20. 금요일(음력 : 8.18.)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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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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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패는 시기가 좌우한다. 시기를 맞추는 것은 방법을 아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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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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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라는 이름
이틀 뒤면 한글날이다. 1443년의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한글날은 1926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가 ‘가갸날’을 선포한 데서 시작되었는데, 1928년부터 ‘한글날’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글날이 근대에 시작되었듯이 ‘한글’이라는 명칭이 생겨난 지도 오래지 않다. 한글 창제 당시 문자의 이름은 ‘훈민정음’이었는데, 그것이 ‘한글’로 불린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이다. 이 ‘한글’이라는 이름을 처음 만든 이가 누구인지는 주시경, 이종일(독립 운동가이자 국문학자로서 3ㆍ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일인), 최남선 선생이라는 주장이 있어 왔는데, 대체로 학계에서는 최남선 선생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한 기록에 따르면 1910년 광문회의 회의 석상에서 최남선 선생이 ‘한글’ 명칭을 제안하였고, 이를 주시경 선생이 수용함으로써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최남선 선생도 “조선 상식 문답”이라는 책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한글’의 ‘한’은 크다(大)는 의미와 한나라(韓)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1910년이면 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조선문, 조선 문자와 같은 명칭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해이다. 그래서 국어학자인 임홍빈 선생은 ‘한글’이 대한제국의 멸망을 수용한 이름으로서, 민족의 아픔과 더불어 운명 극복의 의지도 담고 있다고 말한다. 한글의 원래 이름 ‘훈민정음’에도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담겨 있다. 문자가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던 시절, 세종은 백성이 글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어엿비’(가엾게) 여기는 마음에서 새 문자를 만드셨다. 단순한 이름에 불과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한글’에 담긴 민족정신, ‘훈민정음’에 담긴 인간 존중의 정신이야말로 한글의 또 다른 가치일 것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한글 창제의 원리
어제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지 570돌이 되는 한글날이었다. 한글날은 2013년부터 법정 공휴일로 다시 지정돼 한글의 소중함과 우수성을 기리고 있는데, 한글의 우수성은 과학적인 창제 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실제 백성들이 사용하는 말을 분석해 소리 하나하나에 대응하는 글자를 찾아내 자음을 창제했다.
먼저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보고 만들었는데, 여기서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획을 더해 ‘ㅋ’을 만들고, 소리가 세짐에 따라 ‘ㄱ’을 겹쳐 ‘ㄲ’을 만들었다. ‘ㄴ’은 혀끝이 윗니 뒤쪽에 붙는 모양을 보고 만들었는데, 여기서 획을 더해 ‘ㄷ’을 만들고,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ㅌ’을, 소리가 세짐에 따라 ‘ㄸ’을 만들었으며, ‘ㄷ’에서 혀가 더 구부러지는 모양을 본떠 ‘ㄹ’을 만들었다.
또한 ‘ㅁ’은 소리를 낼 때 마주 붙는 두 입술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여기에 획을 위로 더해 ‘ㅂ’을,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ㅍ’을, 소리가 세짐에 따라 ‘ㅃ’을 만들었다. ‘ㅅ’은 아랫니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여기서 획을 더해 ‘ㅈ’을 만들고,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ㅊ’을, 소리가 세짐에 따라 ‘ㅆ’과 ‘ㅉ’을 만들었다.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는데, 여기에 소리가 마찰함에 따라 획을 더해 ‘ㅎ’을 만들었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분석해 글자를 만들어냄으로써 인간이 실제 말하는 것에 가장 가깝게 한글을 창제해 후손들에게 남겼고 한글은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정작 우리 후손들은 정체불명의 은어, 줄임말, 외국어 등으로 한글을 오염시키고 있으니 자성이 필요하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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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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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1 - 천상병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성당 입구 바로 앞
저는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입구 지키는 교통순경이
닦기 끝나면 닦으려고요.
교통순경의 그 마음가짐보다
저가 못한 데서야 말이 아닙니다.
오늘같이 맑은 가을 하늘 위
그 한층 더 위에 구름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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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동 - 정지용
골짝에는 흔히
유성이 묻힌다.
황혼에
누뤼가 소란히 싸이기도 하고,
꽃도
귀향 사는 곳,
절터ㅅ드랬는데
바람도 모이지 않고
산그림자 설핏하면
사슴이 일어나 등을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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玲瓏한 目標(영롱한 목표) - 김수영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나는 오늘부터 지리교사모양으로 벽을 보고 있을 필요가 없고
노쇠한 선교사 모양으로 낮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만한 강인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목표는 극장 의회 기계의 치차
선박의 삭구 등을 주조하지 않는다
사람이 지나간 자죽 우에 서서 부르짖는 것은
개와 도회의 사기사뿐이 아니겠느냐
모든 관념의 말단에 서서 생활하는 사람만이 이기는 법이다
역을 떠난 기차 속에서
능금을 먹는 아이들의 머리 우에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희열 우에서
사십년간의 조판경험이 있는 근시안의 노직공의 가슴속에서
가장 심각한 나의 우둔 속에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엄숙하게
귀고리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종소리보다도 더 영롱하게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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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31~34) - 이해인
31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깨는 가을밤. 머리맡에 놓인 성서를 펼쳐들면
귀에 익어 더 반가운 당신의 음성.
오직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푸성귀처럼 푸르고 싱싱해진 이
마음의 뜨락에 당신은 어서 주인으로 오십시오.
32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 빗속에서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은 꼭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의 창을 열고 조용히 들어서는 당신의 그 낮은 목소리.
비가 와도 비에 젖지 않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따뜻한 목소리.
그보다 더한 음악이 아직은 내게 없습니다.
33
바람 부는 들녘, 저마다의 자리에서 유순한 얼굴로 꽃들이 일어섰습니다.
뜨거운 여름의 불길을 지나 더욱 단단해진 믿음의 보석 하나 빛나는 첫 선물로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연한 눈빛으로 일어서야겠습니다.
34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감꽃의 그 얼굴도 떠올리면서,
조그만 불덩이 하나 입에 넣듯이 감을 먹었습니다.
어느 해 가을, 가시 박힌 아픔을 잘 익은 말로 삭혀 주던 어느 사제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뜨거운 마음으로 감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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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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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자녀를 낳고 기르는 53가지 지혜 - 루스 실로
제1장. 지를 기른다
11.추상적 사고는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에 있다
유태민족 중에는 높은 추상적 사고력을 요구하는 학문과 사업부문에 종사하는 인물이 많다. 이론물리학자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심리학자로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비지니스에서도 실제로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금융, 유통에 관계되는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이 많다. 뉴욕 금융의 중심지인 월 가의 금융브로커 중 과반수가 유태인이라고 하며, 미국인이 소매상점에 지불하는 총 금액의 17%를 좌우하는 카탈로그 판매회사인 시아즈 로바크도 유태인이 경영하는 회사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유태인이 추상 능력에 뛰어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는 어릴 적부터 '추상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습관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태인은 어떠한 우상 숭배도 거부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면의 그림이나 조각 등은 너무나 많다. 말하자면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는 추상이 아닌 구상인 만큼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유태교에서는 인간과 똑같이 그려진 예는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추상의 영역 속에 존재하며 그런 까닭에 유태인은 항상 '구상화될 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훈련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것이 사물을 논리적, 추상적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을 것이다. 유태인 어린이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 가운데 최초의 유태인인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부친이 우상을 만들어 파는 것을 보면서 자란 아브라함의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어린 나이의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만든 우상을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섬기며 사는 것이 이상하기 작이 없었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아브라함은,'하나님이란 어떤 존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손으로 만든 우상이 하나님일 수 없다면 하나님은 우상이 아닌 다른 것, 혹은 태양일지도 모르며 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태양은 해가 지면 사라져 버리고, 달은 날이 밝으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태양이나 달과는 다른 더 멋진 존재가 틀림없으리라는 결론 내리기에 이른다.
왜 '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까?
이로써 아브라함은 유태인의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추상적 영역에서 이해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오늘날 많은 유태민족의 어린이들에게 훌륭한 교훈이 되고 있다. 즉, 유태의 어린이들은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애써만든 우상을 모조리 파괴하면서,'우상이란 말도 할 수 없고 스스로 움직일 수도, 걸어다닐 수도 없는데 어째서 하나님이 될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왜 우상을 숭배하고 절을 합니까? 우상에게 예배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하고 반박하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란 실체가 아닌 추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의 확대를 통해 아이들의 사고력을 증진시키는 교육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생각처럼 쉬운 일만도 아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수학 공부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것은, 학령기 이전에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12.어머니의 과보호가 때론 아이의 독창적인 재능을 살릴 수도 있다.
과보호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유태의 격언에,'하나님을 언제, 어디에나 계신 것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머니로 만들었다'하는 말이 있다. 아버지가 한 가정의 지도자인 것은 틀림없으나, 어머니의 애정은 자녀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못지않게 절대적이다 때로는 애정이 너무 지나쳐 '유태의 어머니'라는 말이 마치 과보호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렸다. '랍비' 요셉은 이러한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는데, 자기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성령이 가까이 오시는 구나, 빨리 일어나야지'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탈무드>에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과보호는 어린 자녀들의 장래를 그르친다는 것이 통상적인 관념이어서, 응석을 부리는 아이를 보면 '엄마가 귀엽다고 떠받들어주었기 때문'이라는 비난을 받기 일쑤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사리에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과보호가 반드시 어린이의 성격형성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부모의 과보호가 어린이의 독창적인 재능을 개발시킨 사례도 흔히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유태계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대단한 응석받이로 자라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집을 보라고 하면 신경질을 부리면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가 열세 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그의 엄마가 물었다.
"너에게 가장 비참한 일은 무엇이냐?"
그러자 프루스트는 '엄마와 헤어져 있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서른세 살 때까지 편지의 첫머리에 '진정으로 좋은 어머니'라고 썼을 정도로 응석받이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어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한 것은 그다지 신가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프루스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어머니와 나는 언제나 무선전화로 연결되어 서로 곁에 있건, 멀리 떨어져 있건 항상 긴밀하게 마음이 오가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적혀 있을 만큼 마치 연인들 사이에 오가는 러브레터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프루스트는 이렇듯 어머니와 친밀하게 지냄으로써 다른 어린이들과는 전혀 다른 감성의 소유자로 자라날 수 있었다. 대학 예비학교인 리세에 다닐 때도 방자하리만큼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프루스트는 마치 여자처럼 차분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의 영향으로부터 비롯된 이런 차분한 성격이 그의 문학적 소양과 연결되어 만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명작을 쓰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과보호로 성공한 위인들
프루스트뿐 아니라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도 과보호라 할 정도로 어머니의 '열정적인 애정'의 비호 밑에서 성장했다. <꿈의 해석>으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어렸을 때, 날카로운 부리를 가진 기묘한 새를 닮은 남자들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있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대드는 꿈을 꾼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워낙에 특이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가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열정적인 애정이 밑바탕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과보호는 확실히 어린이의 정신적인 균형을 무너뜨리지만, 한편으로는 독특한 재능을 최대한으로 키워주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개성을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유태의 어머니들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기보다는 개성이 뚜렷한 어린이가 되는 쪽을 바람직스럽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호를 권하는 것은 아니지만, 푸르스트 등의 예에서처럼 어린이에 대한 어머니의 과보호가 결코 나쁘다고만 단정지을 일도 아닌 것 같다.
이것이 포인트!
프르스트,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의 성공 뒤에는 과보호라 할 정도로 열정적인 '어머니의 애정'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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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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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속주 통치
속주 통치가 잘되느냐의 여부는 제국의 명운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대한 문제였다. 속주는 원래 로마가 정복하여 자국 영토로 편입한 지방이다. 속주민은 곧 정복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로마에 저항하여 일어나면 로마는 군단을 보내 진압할 수밖에 없다. 반란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면 로마는 군사력을 상주시켜야 한다. 국경에 상주하는 군사력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줄일 수 없다. 그렇다면 군사력을 증강할 수밖에 없고, 그 비용은 속주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을 증액하여 충당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증세에 대한 불만 때문에 속주민이 봉기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로마는 우선 세율을 올리지 않는 것을 기본전제로 삼는다. 둘째, 사치간접자본을 정비하여 속주 경제를 활성화하고, 그로써 속주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려고 애썼다. 휴머니즘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굶주릴 필요가 없으면 온건해진다. 과격함은 절망의 산물이다. 그리고 로마의 세제가 소득에 대한 비율로 성립되어 있는 이상, 경제가 활성화하면 속주세도 관세도 매상세도 저절로 많이 걷힌다. 세 번째 속주 대책은 철저한 지방분권이다. 로마는 만기 제대병을 이주시켜 창설한 식민도시(콜로니아)와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를 속주 활성화의 핵으로 삼았지만, 로마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인정받은 도시들은 원래 원주민, 즉 속주민의 도시였다. 그 '자치' 방식은 지역에 따라 달라서, 본국 이탈리아나 오랜 폴리스전통을 가진 그리스계 도시들은 선거, 부족장이 다스리는 게 전통이었던 갈리아에서는 세습 통치였다. 이런 차이는 있었지만, 현실적인 로마인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떤 방식이든, 주민이 납득하는 방식으로 자치를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방분권을 너무 많이 인정하면 국가가 해체된다. 그 광대한 로마 제국이 오랫동안, 게다가 상당히 만족스럽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래 모순되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짜맞추느냐는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었다 로마는 '지방'의 내정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맡기되, 그 지자체들이 속해 있는 속주는 '중앙'이 통치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속주 총독은 중앙인 로마에서 파견되었다. 속주민은 이 총독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의무만 부과하고 권리를 주지 않으면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도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로마는 총독의 통치에 불만이 있으면 중앙에 고발할 수 있는 권리를 속주민에게 인정했다 고발은 총독 임기가 끝난 뒤에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것은 속주 총독의 임무 수행에 대해 고발이라는 형태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임기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고와 피고가 모두 출석해야 하는 재판이 수도 로마에서 열리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속주 총독의 임기는 1년이니까, 속주민도 그리 오래 참을 필요는 없었다.
원고인 속주민을 대리하여 검사 역할을 맡는 것은 변호사를 겸업하고 있는 소 플리니우스나 타키투스 같은 원로원 의원이다. 원로원은 황제와 협력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기관인 이상, 속주민의 불만 원인을 밝혀내는 것도 원로원 의원의 책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도 공무였다. 변호사 수임료의 상한선은 1만 세스테르티우스(병사의 10년치 연봉)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고발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이 제도가 기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제정 시대에 접어든 뒤였다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했기 때문에 선정을 펴서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황제들을 그토록 헐뜯은 타키투스도 속주 총독의 '청렴도'는 공화정 시대보다 제정 시대에 훨씬 높아졌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황제들이 이런 재판을 중시하여, 몸소 법정에 나가 재판 과정을 참관했기 때문이다. 재판 결과는 피고의 동료이기도 한 원로원 의원들의 표결로 결정된다. 황제가 재판에 참관하는 것은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최고권력자가 피고와 원고 사이에 적극적으로 개재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피고도 변호인을 세우는 것은 당연히 인정되었지만, 처지가 바뀐 전임 속주 총독이 피고 석에 서는 법정에 가장 열심히 나간 것으로 알려진 황제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도미티아누스 황제다 티베리우스는 날카로운 질문을 퍼부어 피고만이 아니라 변호인까지 쩔쩔매게 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화살 같은 질문은 던지지 않았지만, 트라야누스도 열심히 법정에 나간 황제였다. 그건 그렇다 쳐도, 왜 전임 속주 총독을 고발하는 이런 현상이 끊이지 않았을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속주를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로 나누었다 그 차이는 군대가 상주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로마군 최고사령관은 황제니까 황제 휘하 군단이 주둔하는 곳은 황제 속주, 주둔하지 않는 곳은 원로원 속주가 된다. 황제 속주는 방위선에 자리잡고 있어서 군단이 상주할 필요가 있고, 원로원 속주는 방위선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속주화의 역사도 길어서 안정된 속주이기 때문에 군사력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 차이는 그것이었다. 황제 속주에 파견되는 총독은 군사적 능력이 문제되기 때문에 황제에게 임명권이 있다. 반면에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집정관을 지낸 사람들 중에서 원로원의원들의 호선으로 결정된다. 양쪽 다 총독으로 번역하고는 있지만, 그리고 당사자들이 거의 다 원로원 의원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라틴어로는 관명부터가 다르다. 황제 속주의 총독은 '레가투스 임페리알레'이고,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프로콘술'이다. 전자는 '황제의 대리인'을 의미하고, 후자는 '전직집정관'이라는 뜻이다. 현대식으로 생각하면 전자는 군인, 후자는 민간인이었다. 황제 속주 총독의 임기는 1년으로 끝나지 않고 몇 년씩 계속되는 게 보통이다. 임명도 해임도 직속 상관인 황제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원로원 속주 총독은 집정관과 마찬가지로 1년 임기이고, 되도록 많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1년을 넘기는 경우가 거의 없다. 게다가 원로원 의원부터가 명예직이니까, 속주 총독이 되어도 무보수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외적의 침입에 항상 대비해야 하는 황제 속주와는 달리, 원로원 속주의 특징은 '평화'다. 온종일 긴장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이 기회에 한몫 잡아보자고 생각하는 사람도 간혹 나오게 된다. 어쨌든 후세의 우리도 알 수 있는 속주 총독 재판의 피고는 예외없이 원로원 속주의 총독들이다. 그렇다면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의 구별을 없애고, 원로원 속주총독도 황제가 임명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일을 단행하면 아무리 평판이 좋은 황제라도 당장 제거되었을 것이다. 로마 제국의 공식 주권자는 황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이다. 따라서 원로원 속주 총독을 인선하는 일은 계속 원로원 관할 아래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을 견제하는 기능이 바로 속주 총독에 대한 고발제도였다. 원고나 피고측에 서서 직접 재판에 관여한 소 플리니우스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거기에 이런 종류의 재판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두 가지 사례만 소개하고 싶다. 둘 다 황제가 참관한 자리에서 진행된 재판이었다.
에스파냐 남부의 베티카 속주(트라야누스는 이 속주 출신이다) 총독이었던 클라시쿠스 재판. 이 재판의 원고는 몇 명의 속주민이 아니라 속주 전체였다. 고발 이유는 수뢰. 총독 시절 클라시쿠스가 한 재산 모을 정도의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로마를 방문한 베티카 속주의 주의회 의원들은 플리니우스에게 소송 대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의뢰를 받아들여 검사 역할을 맡게 된 플리니우스는 동료 의원 한 명과 팀을 짠다. 증거를 수집할 필요도 있어서 혼자서는 해낼 수 없었다 또한 속주 총독재판은 단순한 사법 절차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있기 때문에, 황제를 비롯하여 그 결과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았다. 검사인 플리니우스 팀은 재판에 들어가기 전에 작전을 짰다. 피고전원을 한데 뭉뚱그려 추궁하지 말고, 한 사람씩 개별적으로 추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베티카 속주가 고발한 사람은 총독 클라시쿠스와 부총독 2명, 클라시쿠스의 아내와 딸과 사위, 그리고 베티카 속주 경찰청장 등 7명이나 되었다. 플리니우스는 클라시쿠스의 명령서와 클라시쿠스가 로마에 있는 정부에게 보낸 자필 편지라는 유력한 물증을 찾아냈다. 따라서 클라시쿠스의 죄상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자필 편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됐소! 됐어! 이제 빛에서 깨끗이 해방된 몸으로 당신한테 돌아갈 수 있게 된 거요. 벌써 40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모았소. 베티카 속주의 절반을 팔아서이긴 하지만."
그런데 원고측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잡혀서 절망했는지, 아니면 이제 끝장이라고 각오했는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클라시쿠스가 죽어버렸다. 병사인지 자살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피고가 죽어도 고발 이유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로마법은 결석 재판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은 수뢰죄 이외에 배임죄에도 해당했다. 피고 대다수가 '공직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피고측도 변호인을 세운다. 그 변호인은 플리니우스와 같은 원로원 의원이었고, 플리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이런 재판에 풍부한 경험을 가진 노련한 인물이고 유연한 두뇌를 갖고 있어서, 예측할 수 없는 증거나 증인을 들이대도 즉석에서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냉정한 변호인인 레스티투스도 클라시쿠스에 대해 무죄 판결을 얻어내는 것은 단념한 모양이다. 그래서 부총독 두 명만 집중적으로 변호했다. 상급자의 명령이니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부총독 두 명도 수뢰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다. 부인하기는커녕, 뇌물을 강요하여 받아낸 사실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자기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행위였다고 변명했다.
이제 법정의 쟁점은, 상관의 명령이라면 하급자는 무조건 복종할 의무가 있느냐 하는 문제로 옮아간다. 피고측이 제기한 이 주장을 뒤엎느라 플리니우스 팀은 "봬 진땀을 뺐다. " 하지만 판례를 찾아내기 위해 군단까지, 즉 군법정까지 가서 기록을 뒤진 원고측 변호인단의 노력은 보상을 받았다 피고측 변호인에게 이렇게 반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군단병에게도 상관의 명령이 법률에 위배될 경우에는 복종할 의무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
총독에 대한 재판의 재판장은 집정관이 맡고, 배심원은 원로원 의원들이 맡는다. 클라시쿠스 재판에서는 이런 판결이 나왔다. 전임 총독 클라시쿠스-유죄.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체형은 부과할 수 없고, 재산만 몰수한다 다만 총독에 취임하기 이전과 이후의 재산은 나누어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취임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딸이 상속받는 것을 인정했다. 취임 이후에 모은 재산은 모두 베티카속주에 변상한다. 또한 빛을 갚는 데 사용된 돈도 채권자한테서 돌려 받아 베티카 속주에 변상하기로 결정했다. 이 판결에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부터 이미 정착하기 시작했지만, 부모의 죄가 자식한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사고빙식에 바탕을 둔 판례가 클라시쿠스 재판으로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둘째, 도미티아누스 시대와 비교하면 형이 가볍다는 사실이다. 속주총독의 부정부패를 엄벌한 것도 도미티아누스가 원로원의 미움을 산요인의 하나였다. 그것을 꺼린 트라야누스의 의향이 판결에 반영된 것일까. 부총독 두 명-유지. 수뢰 이외에, 상관의 명령에 맹종한 것부터가 공직자로서는 부적격하다는 것도 유죄 사유에 추가되었다. 둘 다 5년 동안 변경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베티카 속주 경찰청장-유죄. 본국 이탈리아에서 2년 동안 추방당하는 형을 받았다. 2년 동안은 수도 로마에도 본국 이탈리아에도 발을 들여놓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클라시쿠스의 사위-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베티카에는 아내와 동행했을 뿐, 공적인 일도 사적인 일도 하지 않았다. 클라시쿠스의 아내와 딸-무죄.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었다기보다 혐의가 희박하다는 의미의 무죄였다 이들 두 사람에 대해서는 원고측 변호인인 플리니우스도 무죄로 생각하여 증언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승소한 플리니우스 팀이 상한선인 1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수임료를 받았다면, 로마 시대의 수임료 분할 지급 규정에 따라 변호인으로 선임될 때 6천 세스테르티우스, 판결이 나온 뒤에 나머지 4천 세스테르티우스를 받았을 것이다. 수임료에는 증거나 증인을 모으는 데 드는 경비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패소했을 경우를 생각한 대책이었는지도 모른다. 덧붙여 말하면, 허위 고발을 한 자는 명예훼손죄로 처벌되었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민사재판의 배심원 수가 늘어났다 그때까지 100명이었던 것을 180명으로 늘린 것이다. 100명일 때는 25명씩 네 팀으로 나누어 네 건의 재판을 동시에 진행했지만, 180명으로 늘린 뒤에는 재판 한 건을 담당하는 배심원 수가 45명으로 늘었는지 , 아니면 동시에 진행하는 재판 건수가 늘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180명으로 늘어난 뒤에도 '100명의 남자'를 뜻하는 '켄툼비리' (centumviri)라는 명칭은 바뀌지 않았다 <12명의 분노자>라는 미국 영화가 있었지만, 배심원단은 로마 시대부터 그런 식으로 불리고 있었다. 두 번째 사례는 플리니우스가 피고측 변호를 맡은 경우다. 원고는 소아시아 서북부의 비티니아 속주 주민, 피고는 그 속주의 총독을 지낸 바수스였다. 바수스가 총독 시절에 선물을 즐겨 받았고, 좋아하는 속주민과 싫어하는 속주민을 분류하여 좋아하는 사람만 중용했다는 것이 고발 이유였다. 이에 대해 피고측 변호인단은 이렇게 반론한다. 바수스의 통치는 지극히 공정했으며, 그것은 일부속주민의 반발을산 것으로도 증명된다. 따라서 통치 담당자로서는 규탄받기는 커녕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러자 원고측은 방침을 바꾸었다. 바수스가 받은 선물의 개수와 가격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래서 속주 총독에게 주는 선물은 어디까지 허용되느냐가 쟁점이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법률에서는 선물 총액이 1만 세스테르티우스만 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속주 총독에게 엄정함을 강력히 요구한 도미티아누스의 15년 치세의 영향으로 선물은 무엇이든 일절 받지 않는 태도가 칭찬 받게 되었다.
재판에 참관한 트라야누스도 고지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을 지낼 때 선물을 받은 적이 있지만, 그것도 생일과 사투르누스 축제(로마인에게는 겨울 휴가) 때뿐이고, 그나마 나중에 돌려주었다고 고백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선물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파와 상식선 이내에서는 인정해도 좋다는 파로 양분되어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상식선 이내라면 인정해도 좋다는 파가 다수를 차지한 듯, 바수스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율리우스 바수스는 그 후에도 계속 원로원의석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바수스 제판에서는 원고측 변호인으로 비티니아 편에 선 벨라누스가 그 후 비티니아 속주 총독에 부임했다가 1년 뒤 로마로 돌아온 직후에 비티니아 속주민에게 고발당했다. 하지만 재판까지는 가지 않았다. 속주민이 전임 총독에 대한 고발을 취하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사건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경계경보와 같은 작용을 했다. 비티니아 속주민의 고발이 너무 많은데, 이는 파견되는 총독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속주 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비티니아는 원로원이 관할하는 속주였다. 즉 황제의 관여가 인정되지 않는다. 황제가 주도권을 행사한다면, 원로원 의원만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설치하여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고하는 정도였다. 이것은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시작하여 그 후 정착된 방식이지만, 트라야누스는 장애물에 부닥치면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보다 정면 돌파를 강행하는 타입이다. 법으로 명확히 금지되지 않은 일이라면 해도 상관없다.
또한 황제에게는 필요하다면 원로원 속주도 잠정적으로 황제 속주로 변경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것도 티베리우스 황제가 선례를 만들어주었는데, 트라야누스는 황제에게 인정된 이 권한을 활용한다. 일시적이나마 비티니아 속주는 황제 관할 아래 들어갔다. 이 속주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을 밝혀내어 그 문제를 해결할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총독의 관명은 '프로콘술'이 아니라 '레가투스'가 된다. 집정관 경험자의 출세 '종착역'이 아니라 황제 직속의 행정관이다. 트라야누스는 그 총독에 플리니우스를 임명했다. 바수스 재판 때 보여준 식견을 높이 평가한 게 분명하다. 그때까지 플리니우스는 비티니아에 발을 들여놓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 속주든 원로원 속주든 총독을 지낸 경험도 없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의 속주 통치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해주는 <플리니우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왕복 서한>이 후세에 남게 되었다 이 편지들이 씌어진 것은 플리니우스가 비티니아에 체류한 서기 111년 가-을부터 113년 봄까지 1년 반이다. 당시 플리니우스의 나이는 쉰 살 안팎, 트라야누스 황제는 50대에서 60대로 접어드는 시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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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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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2. 한번 이상 사는가
제1장 서문
나는 신문기자와 TV 방송기자로 여러 해 일하는 동안 이상한 이야기를 많이 취재해 보았다. 그중 대부분은 지나간 일들에 근거를 둔 탐정이야기들이다. 예를 들면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게 되어 자살을 한 중국의 공주 이야기라든지 또는 절세미인과 결혼한 후 역사의 기록문서에서 그 이름이 삭제된 이단자 '파라오'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그중 어떤 것은 농담삼아 조작된 것이거나 또는 사기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며 '무명(無名)'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독교 종파를 창설한 스코틀랜드 여인의 이야기처럼, 망상에 불과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내가 일찌기 취재했던 이야기들 가운데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탐정 이야기가 갖추어야 할 모든 이상스럽고 괴이한 요소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아주 우연하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취재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아이버슨 씨는 BBC TV 방송 프로그램에 넣을 수 있느냐고 문의하여 왔다. 그것은 좀 특수한 프로그램이었다. 왜냐하면, 아이버슨 씨가 내게 설명했던 것처럼, 그 때 카디프시에는 최면요법사인 브록샴이라는 유명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의 환자들이 수백명이나 최면상태에서 전생을 기억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 및 고고학에 흥미가 있었으므로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게, 비판적으로 그리고 그에 대한 지식을 갖춘 다음 이 주장을 조사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전생으로 돌아가서 그 당시를 기억했다는 것이 정말일까?"
나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의 가정부인인 머피 여사가 최면상태에서 19세기 영국인 소녀로서의 전생을 생생하고 세밀하게 기억해 낸 것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밖에도 최면에 든 사람이 자신이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는 것과,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나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역사의 어느 한 기간에 대하여 아주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에 관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러한 전생을 조사하려고나는 카디프 시에 갔다. 나의 조사는 사실은 인간의 마음 그 자체에 대한 조사였다. 요크 지방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여인이 유태인 대학살 당시 젊은 유태여인으로서 요크 지방에 살았던 경험을, 겁에 질려서, 아주 자세하고 조금도 꾸밈없이 말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일생 동안 바다라고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의 소형 구축함 속에서 프랑스 연안지대를 봉쇄하다가 한쪽 다리를 잃은 해전 경험 등을 듣는다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프리 아이버슨과 나는최선을 다해 이들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조사해 보았다. 우리는 그들이 전생에 살았다는 곳을 가보았고,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모조리 검토해봤다. 우리는 역사학자, 고고학자, 기록보관인 및 심리학자들을 찾아가 이야기해 보았다. 우리는 조사해 보고, 연구해 보고, 의문해 보고 의논해 보았다. '브록샴 테이프'에 실린 세부적인 전생기억은 과연 틀림 없는 것인가? 최면상태에서 피술자들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세밀한 전생기억은 도대체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얻은 것인가? 이러한 전생이 고의적으로 꾸민 것일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을진대 그러한 사실에대한 합리적인 설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기억력인가? 꿈을 꾼 것인가? 아니면 잠재의식으로부터 마음 표면으로 흘러나온, 숨겨졌던 기억들이가? 그러면 이러한 조사 결과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답변은 독자 자신이 해야겠다. 그러나 나는 최소한 논쟁할 여지가 없는 한 가지 결론에는 다달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한없이 복잡다단하고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그러한 '어떤것'이라는 것이다.
제 2 장 인생을 일곱 번 이상 산 에반스
나는 브록샴 씨가 모은 전생기억 가운데서 가장 놀라운 테이프에 관해서 연구를 시작했다. 곧 여섯 번의 전생을 기억해 낸 삼십대의 직장여성에 대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기혼여성으로서, 금생을 더하면 무려 일곱 번이나 태어난 셈인 이 여인은 여섯 번의 자기의 과거 신분들을 밝힐 수 있었다. 나는 우선 이 여인의 전생담이 실린 테이프를 경청해 보았다. 내가 첫번째로 경청한 세 개의 테이프에 실린 전생담들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의 역사와 관계가 있었으므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테이프에 실린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어떤지 조사해 보았더니 많은 이야기들이 사실임이 계속 드러났다. 나는 역사책을 읽어 본 후에야 그리고 역사학자들을 찾아가 면담을 해본 후에야, 이 여인이 녹음테이프에 진술한 세부 사항들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었다. 그녀의 문제의 전생들 가운데 한 번을 3세기 경에 영국의 '에보라쿰'곧 '요크 시'에서 보냈는데, 당시 영국은 로마가 집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기 1190년 경의 유태인 대학살 당시 그녀는 또 다시 '요크시'에서 살았다. 그리고 15세기 경에 불란서의 '브르스 시'에서 대부호인 꿰르 씨의 하녀로서도 살았다.
이 여인에게는 앞의 세 번의 놀라운 전생 외에도 세 번의 전생이 더있다. 곧 16세기 스페인의 케더린 공주의 시녀로서 스페인에서 살았던 전생과, 17세기 초 영국에서 앤 여왕 재위시에 런던에서 바느질로 생계를 이어 가던 가난한 소녀로서의 전생과, 20세기 초 미국 메릴랜드 주의 수녀원에서 수녀 노릇을 했던 전생 등이 있다. 그녀의 전생들은 서로 겹치지 않았다. 전생들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가장 짧은 것이 15년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수녀였던 전생과 1939년 태어난 금생과의 간격이 15년인 것이다. 이 전생 목록이 그녀의 전생 전부를 포괄한 목록은 아니다. 다만 여섯 번의 최면에 들어 여섯 번의 전생을 기억해 내어 경험한 뒤에 더 기억해 보는 것이 싫증이 나고 무서워서, 더 이상 최면상태에 들기를 거절했을 뿐이다.
내가 그녀와 만나 이야기한 것은 그녀가 최면 상태에서 전생을 기억한 지 만 5년이 지난 뒤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최면에 들어서 전생을 기억해 볼 수 있겠느냐고 청했다. 나는 이번만은 녹음기는 물론 촬영기도 가지고 참석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요청을 받고 며칠 동안 생각하더니 전화로 승낙을 알려왔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자기가 최면 상태에 있는 것을 촬영해도 좋으나 자기의 이름만은 밝히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자기 처가 일곱 번의 인생을 가진 사실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의 이러한 요구가 타당하다고 생각되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본명 대신 '제인 에반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로 했다. '제인 에반스'여사가 최면 상태에서 기억해낸 여섯 번의 전생들과 거기에 딸린 날자들은 다음과 같다.
1. 로마제국 통치하의 영국에서 살았던 통치자 가정교사의 아내로서의 전생(서기 286년 경)
2. 영국 '요크 시'에서 유태인 여성으로서 산 전생 (서기 1190년 사망)
3. 불란서 '부르스 시'에서 꿰르 씨의 하녀로서의 전생(서기 1451년 사망)
4. 스페인 케더린 공주의 시녀로서 산 전생(케더린 공주는 1451년 부터 1536년까지 살았음)
5. 앤 여왕 재워시에 런던에서 바느질 품팔이 소녀로 산 전생 (앤 여왕은 서기 1665년부터 1714년까지 살았음)
6. 미국의 메릴랜드 주 수녀로서의 전생(1920년 무렵에 사망)
7. 금생의 '제인 에반스'(1939년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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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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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의 도야(陶冶) - 유협 / 최신호(崔信浩) 옮김
고인(故人)의 말에 ‘몸은 해변을 거닐면서도 마음은 영화(榮華)를 꿈꾼다.’라 하였다. 이것은 상상력의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문학의 구상(構想)에 있어서 상상력의 작용은 실로 원대한 것이다. 조용히 응려(凝慮)하면 상상은 천 년이란 먼 시간에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고요히 마음을 움직이면 만리의 공간도 꿰뚫어볼 수 있다. 작가가 음영(吟詠)하는 사이에서 주옥(珠玉)의 묘성(妙聲)을 나타낼 수도 있고, 바로 눈썹 앞에서 풍운의 빛을 말았다 펼쳤다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상상력이 작용하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상상력의 작용은 미묘한 것이어서 인간의 정신과 외적 사상(外的事象)과의 상호 작용에서 만나게 된다. 정신이 도사리고 있는 흉중(胸中)의 관건을 장악하는 것이 의지라면, 외적 사상이 이목(耳目)에 촉발(觸發)될 때 가장 긴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다. 언어가 그 기능을 다하면 외적 사상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의지의 관건이 잠겨 버리면 정신은 흉중에서 숨어 버린다.
그러므로 문장의 상상력을 도야하는 데 필요한 것은 허정(虛靜)이다. 오장(五臟)을 씻고 정신을 맑게 하며, 학문을 쌓고 지성을 기르며, 이지(理智)를 작용시켜 재능을 풍부히 하고, 견식(見識)을 연마하여 관조(觀照)의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되면 다시 수사법을 수련해야 한다. 이런 연후에 비로소 작가로서의 완전한 숙련이 생겨 성률(聲律)을 좇아 붓을 휘두르게 되고, 거장의 창의적 의상(意想)을 따라서 작품을 써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개 문장도(文章道)의 기본이 되고 창작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대개 상상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만 갈래의 가능성이 다투어 나타난다. 작가의 허구 속에 구상(具象)의 표준이 드러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에서 창작은 이뤄져 가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 감정은 산에 가득 차고 바다를 바라보면 상념은 바다에 넘쳐 흐르는데, 재능의 다소에 따라 작가는 풍운과 함께 천공(天空)을 치닫는 것이다. 바야흐로 붓을 들어 언어를 선택하려고 할 때 그 의기는 충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해 놓고 보면 처음 생각했던 것의 절반도 표현이 안 된다. 체(體)를 붙잡아서 언어로 정착시켜 보려고 하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구상(構想)은 사고에서 생겨나고 언어는 구상에서 생겨난 셈이어서 삼자(三者)의 접촉이 밀접되면 상호의 관계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되지만, 반대로 그 사이가 성기게 되면 삼자의 사이에는 천 리의 간격이 나타난다.
그러나 도리는 흉중에 있는 법인데 혹자(惑者)는 이것을 찾아 세계의 끝까지 헤매거나, 지척에 의미를 두고 산하(山河) 저쪽에서 사고를 찾으려고 하는 결함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시켜 술법(術法)을 양성하고, 쓸데없는 고심(苦心)을 그치고, 잘 음미하여 적절한 표현에 마음을 모아 수고로운 감정에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 <문심조룡(文心雕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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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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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10장 독일 사절의 시기. 피사 전쟁과 탈환 2/2
새로운 군대의 도착으로 그의 계획이 힘을 얻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미 그를 떠나가는 다른 군대로 인해 분위기는 냉각되고 있었다. 그의 각료 한 사람이 황제를 한 번은 속일 수 있어도 두 번은 속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마키아벨리는 이에 빈정거리는 어조로 되받기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일을 통해 매번 알면서도 속는 수가 허다한데, 궁정의 기류가 수시로 바뀌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탈리아 원정을 향한 바람이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 사람들의 수다에 익숙해 잇던 피렌체인으로서 더 어리둥절한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조차 쉬쉬 하며 감추는 이곳의 거의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비밀스런 분위기였다. 공대한 크기의 영토와 원거리로 인한 자국과의 통신상의 난점에다 이러한 비밀주의까지 겹치자, 마키아벨리와 베토리는 (마치 자신들이 무슨 잃어버린 고도(고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두 피렌체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계 황제를 따라 모든 사절들이 모여있던 트렌토에서 볼차노와 메라노로 차례차례 옮겨갔는데, 알려지기로는 군대의 이동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황제의 첫 움직임은(왕의 군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소제후의 군대)에 더 가까울 정도였다. 특히 베네치아가 카도레에서 그의 수염을 멋있게 뽑아버린 이후로는 더욱 그렇게 보였다.
그러자 막시밀리안은 도움을 청하려고 울름에서 의회를 소집했는데, 당시 베토리가 병중에 있였기 때문에 마키아벨리 혼자 그곳에 보내기로 결정이 났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가지 않았다. 그는 볼차노에서 궁정이 있던 트렌토까지의 짧은 여행을 빼고는 죽 베토리 옆에 남아 있었다. 이는 우리 후세인들에게는 손실이겠지만, 둘 사이로 보아서는 좋은 일이었다. 바로 이 사절 시기를 시작으로 피렌체 서기장의 삶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우정이 싹튼 것이다. 그가 비록 이러한 관계로부터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어떤 것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둘 사이의 우정은 그에게 자신의 훌륭한 편지글 가운데에서도 가장 기억될 만한 것을 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베토리에게는 바로 그 당시의 마키아벨리라는 존재가 너무 소중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도착 당일 바로 10인위원회에다 동료를 데리고 돌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베토리는 자필로 오히려 반대의 뜻을 전하였다. (원컨데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우리를 머물게 해주십시오. 그는 여기에 있어야만 합니다.) 이윽고 3월 13일 그들 둘은 함께 인스브루크로 이동했다가, 볼차노를 거쳐 트렌토로 되돌아왔고, 바로 그곳에서 황제의 최종 대답을 들었다. 그의 요구는 육만 두카토를 세 번으로 분할해서 지불하되, 각각의 시간 간격은 짧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0인위원회로부터 특히 돈 문제를 포함하여 확고하고도 분명한 훈령을 받아내기 위해, 마키아벨리는 다시 편지 쓰는 작업에 노력을 쏟아부었다. 5월 30일자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애하는 여러 정무위원님들게 말씀 올립니다. 정부가 짜아놓은 실이 이처럼 너무 가늘어 정작 베를 짤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저는 이미 아무도 그의 침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점을 써 올린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그럴 수 잇고 또 의지에 따라서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누구도 그가 침입하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은 한번도 그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그러리라는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결론은 이러하였다. (필요한 것은 두 길 중 하나를 택하되, (...) 어느 쪽이 덜 위험한가를 살피고,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신의 이름으로 마음을 단단하게 가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이처럼 큰 일을 콤파스로 어설프게 재려고 덤비다가는 단지 실소만 범하게 될 뿐인 것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은 다시 한번 이른바 (사간의 이점)을 택한 피렌체 사람들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또다시 베네치아 군에 패배햐였고, 수중에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프리울리 전 지역과 끝으로 피우메만이 남았을 때, 베네치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간단히 말해서 쌍방은 빼앗은 만큼 가진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모든 영토는 베네치아에 돌아갔고,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손실과 치욕뿐이었다. 이탈리아 원정도 로마에서의 대관식도, 프랑스에 대한 응징도 제국 권위의 회복도, 모두가 허망한 꿈으로 남게 되었다. 피렌체인들은 결코 허깨비를 현실로 잘못판단하지 않았고, 그래서 주어야 마땅한 액수 이상의 돈을 주는 일도 없게 된 셈이었다.
6월 10일, 베토리가 궁정에 다시 합류할 채비를 하고 있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이제 독일 문제에는 식상한 데다 결석(결석)까지 있어서 치료차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하고는 트렌토를 떠났다. 그는 귀향길을 재촉한 끝에, 14일에는 이미 볼로냐에 도착하였고 16일에는 피렌체에 닿을 수 있었다. 그가 그처럼 빨리 도착할 수 있었던 데는 결석증 말고도 고향에 대한 향수가 작용했을 것임이 틀림없을 테지만, 그는 귀향 직후 또다시 전장의 고달픔을 참아야만 하였다. 공화국은 피사 문제를 이번에는 확실히 끝낸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팔망미인인 서기장은 먼저 산 미니아토와 페쉬아로 가서 민병대를 모집하고는 그들을 대동하고 폰테데라에서 다시 모병한 뒤, 그곳으로부터 피사로 갔으며, 8월 21일에는 포위 상태에 있는 도시 주변을 초토화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처음에는 프랑스 왕아. 그리고 이어서 아라곤의 왕이 불쌍한 피사인들을 어여삐 여겨 이리저리해서 결국 150,000두카토를 받고 그들의 손을 들어준 후에, 피렌체는 피사 공략에 훨씬 더 열성을 보이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그들의 새로운 민병대를 시험하여 소득을 올릴 기회였다. 마키아벨리에게는 희열의 순간임과 동시에 우려의 순간이기도 했다! 10월에 시작하여 11월과 12월에 연이어, 그는 모병과 사열을 위해 산 미니아토와 발디니에볼레, 키안티 교구와 발디체치나 등지를 돌아다녔다. 1509년 1월말, 이미 그는 민병대와 함께 물러나 디 쿠오사에서 경계 근무에 들어가 있었다. 2월 중순에는 포위된 도시에 대한 외부 원조를 끊기 위해서 피우메모르토 강 하구에 배치된 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있었다. 아르노 강과 모든 운하는 다리와 말뚝과 성채로 차단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훈련과 경계 근무와 노역과 그 외 모든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이 편지들이 80인회에서 읽혀지자, 부오나코프시는 그에게 평상시에 쓰던 그런 편지를 보내다라고 부탁했으나 소용 없었다. 10인위원회는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니던) 서기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당신의 어깨 위에 이 모든 일을 맡겼다)고 썼다.
그러나, (준둔지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은 오직 니콜로 마키아벨리 외에는 없을 정도로), 그가 어깨에 진 짐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알라만노 살비아티와 안토니오 다 필리카이아가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인 3월 4일, 마키아벨리는 포위된 도시를 돕지 않는다는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 자청하여 루카 공화국으로 갔다. 감독관들이 도착하자, 10인위원회는 그를 피옴비노의 군주에게로 보냈다. 소문에 의하면 피사인들이 그에게 피렌체와의 협상을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그 소문이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시간을 벌기)위한 술책인지를 가려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대 전쟁의 조짐이 일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쪽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무언가 실낱같은 것이라도 기대할 여지가 있었다. 반면 피렌체인들로서는 이미 밥을 한 술 뜬 상태에서 지금은 결코 지체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갔다. 그리고 3월 14일 야코포 다피아노(피옴비노의 군주 - 옮긴이)와 피사의 사절단을 만났다. 사절은 일반적인 말로 말머리를 뗐으나, 자신들의 정무위원이 동석하지 않는 한 어떤 결론적이 말도 할 수 없다고 나오자 논쟁은 격화되었다. 이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들어 보자.
(저는 앞부분의 말에 대해서는 제 생각에 따라 대답했습니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실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에 저 역시 아무것도 대답할 수 없으며, 저의 대답이 듣고 싶다면 그들부터 무언가 알맹이 있는 것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생명과 명예와 재산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되물었고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대답을 원한다면 먼저 어떤 정도의 보장을 바라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고, 만약 그 요청이 합리적이고 존중해 줄 만하다면, 우리 정부는 단지 복종을 바라는 것뿐이기 때문에,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협상은 깨어졌으나, 마키아벨리는 피사의 사절들간에 의견 차이가 나도록 유도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는 이 과정을 피옴비노에서 10인위원회에 편지로 보고했으며, 그 뒤 피렌체에 돌아와서 직접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전장의 생활을 병사들과 나누기 위해 되돌아왔다.
4월 16일 그는 니콜로 카포니가 감독관으로 전군을 위한 후방 업무와 보급을 관장하고 있던 카쉬나로 자신을 보내려는 것이 10인위원회의 뜻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곳에 있는 것이 덜 위험하고 힘도 덜 든다는 사실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위험이나 힘든 일을 마다했다면, 피렌체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무위원님들게 바라건데, 저로 하여금 이 주둔지에 남아 감독관들과 함께 관련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여기서는 제가 무언가 소용에 닿지만,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좌절감으로 죽고 말 것입니다)
여기서 사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애국심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랄하고 조소적인 그의 또 다른 면모 아래에서 불쑥 솟아나곤 하는 그 열정적인 성격은 또 얼마나 우리를 매혹하게 하는가!
그래서 그는 민병대를 나누어 배치해 놓은 세 군데의 주둔지를 여기저기 돌아보면서, (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녔다.) 병사들은 총감독관보다 그의 권위를 더 인정하였으며, 이에 화가 난 살비아티가 어느 날 한 지휘관에게 평상시와는 다른 과격한 언사를 쓰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키아벨리가 편지로 이에 항의하자, 그 역시 편지로 답하여, 자신은 그 지휘관을 모욕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화를 낸 것은 그가 감독관의 권위에 적절한 존경심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그들이 자네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어한다해도, 자네가 언제 어디서나 그들을 통솔 할 수 없지 않은가? 물론 그들이 항상 자신들과 매일같이 생활하는 자제를 좋아하고 따르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복종심을 더 키워야 하고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알아야 할 것이네.)
5월 중순께, 마키아벨리는 보급선을 더 효율적으로 짜기 위해 이삼일 간 주둔지를 떠나 피스토이아로 갔다. 하지만 전쟁은 그쯤에서 끝나 있었다. 5월 20일, 그는 감독관들과 함께 피사 사절들을 만나 항복의 첫 단계에 관해 협상을 벌였다. 그가 자필로 10인위원회에 쓴 몇 통의 편지가 남아 있어서 당시의 진행 과정을 말해 주고 있다.) 피사의 항복 사절이 피렌체로 갔고, 어디에나 모습을 빼놓지 않는 그도 행동을 같이하였다. 하지만, 막상 합의에 도달해서 조약이 체결되고 항복 조인식을 하는 자리에 이르자, 그의 이름은 제1서기장 마르첼로 비르질리오 아래에 씌어 있었다. 15년의 긴 전쟁 끝에, 드디어 8일 피렌체 감독관들은 피사에 입성했으며 마키아벨리와 그의 민병대 역시 그들과 동행하였다.
나는 당시 피렌체인들이 승리의 희열을 만끽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이 범상한 지위의 서기장에게 그러한 승리의 몫을 인정해 주고 그에게 마땅히 돌아갈 만큼의 찬사를 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고스티노 베스푸치는 바로 당일 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이처럼 영광된 장소에 당신이 함께 했음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이 일에 결코 적지 않은 역할을 한 데 대해서도 치하드립니다.)
글은 계속된다.
(감히 말하건데, 당신이 민병대와 같은 훌륭한 조직을 만들어내었기에 그처럼 늦지 않고 신속하게 피렌체의 영토가 회복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얼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신께 맹세컨데, 너무 기뻐서 우리는 당신에게 키케로식 연설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필리포 다카사베키아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고귀한 도시를 정복한 위업을 천번 만번 축하하네. 사실 이 일은 실질적으로 자네 작품이고, 어쨌든 자네의 기여가 컸던 것 아닌가.)
이어 글의 어조는 더 강해진다.
(자네의 철학이 우둔한 사람들에게까지 이해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법이지.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네. (...) 날이 더할수록 나는 자제야말로 유대인이나 다른 민족들이 가졌던 대예언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네. 오, 니콜로여,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라네)
마키아벨리는 그 승리를 입성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한 대리석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살비아티(그는 입성 직후 말라리아로 피사에서 사망하였다), 피리카이아, 카포니의 이름만이 그곳에 박혀 있었다. 그는 단지 종이에 쓰인 이러한 찬사에 만족했을 따름이다. 언제나 결과를 바꾸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당시로는 혹시라도 과장과아첨이었을지도 모를 이러한 찬사는 이제 단순명료한 진실로 바뀌어지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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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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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말을 바꿔 타기
1864년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링컨 대통령의 전쟁 수행 방법에 불만이 많던 인사들이 그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링컨은 스스로도 자신이 대통령직에 적합한 인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공객석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여 반대파의 입을 막았다고 한다.
“저는 여러분께 어느 네덜란드인 농부가 그의 동료에게 충고해준 대로, ‘강을 건너는 도중에는 말을 바꾸어 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대형사고가 나면 관련 부서의 장관이나 실무자에게 책임을 묻고 새 사람으로 바꾸어 버린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책임이 있는 현직 장관이 사고 뒷처리를 하여 수습하게 하고 일이 정상화된 후 장관을 바꾼다. 강 가운데서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이 불리하다.
강 가운데서는 말을 바꾸어 타지 말라. (Don't change horses in midstream.)
말을 타고 가다 다른 말로 바꿔 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과 말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강 가운데서 타고 가던 말을 버리고 다른 말로 갈아탄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므로 변화가 필요할 때 조금 힘이 들더라도 일을 그대로 진행시킨 후 적당한 시간을 택해 그 일을 시행하는 것이 좋다.
목수의 변명
‘훌륭한 일꾼은 그가 맡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하여 먼저 사용할 연장을 잘 손질하는 사람이다’라고 논어는 말한다. 성경 전 도서에도 ‘도끼 날을 갈지 않아 날이 무디면 그만큼 힘이 더 든다’고 하였다. 도끼날을 날카롭게 갈 듯이 연장을 잘 준비하여 두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하여 앞길을 망치고도 하느님을 탓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서투른 기술자는 자신의 능력은 생각치 않고 연장 탓만 하고, 또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들이 주위 환경만 탓하는 법이다. 무당이 장구탓만 해서는 영험이 늘지 않듯, 기술이 부족한 자가 자기 기술의 미숙함을 반성하지 않고 도구만 나쁘다고 해서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훌륭한 기술자는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사람이다. 그래야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다. 그래서 논어는 ‘훌륭한 기술자는 자신의 잘못은 따지지만 남의 잘못에는 관대하다’고 한다. 무엇이 안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자.
서투른 목수 연장 탓만 한다. (A bad workman always blames his tools.)
참고 기다리는 사람
불가의 고해라는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인생은 험난하다. 세상살이는 험한 산길을 가고 위험한 계곡을 건너는 것 같아 참고 견디는 인내심이 없으면 이겨내기 힘이 든다고 채근담은 말한다. 아울러 성경에 이르길, 인생은 전쟁을 하는 것과 같아 어수선하고, 사는 날이 품팔이꾼의 생활과 같고, 종살이하는 사람이 해가 져서 쉬기만을 기다리며 일하는 것과 같고, 품팔이꾼이 품삯을 기다리듯이 고통을 받으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다. 인생살이가 이러하니, 아무리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참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맹자는 ‘장차 큰 일을 맡기려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곤궁하게 하고 육신을 괴롭혀서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한다‘고 하였다. 그는 사람의 덕행이나 재지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 단련된다고 하였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그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어려움이 닥쳐 왔을 때 쉽게 절망하여 자포자기하지 말고 반드시 이루어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 시인 롱팰로우(1807~1882)는 ‘참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큰 일을 이루어낼 수 있나니’라고 읊었다.
참고 기다리는 자만이 큰 일을 할 수 있다. (All things come to those who wait.)
위선
슬픈 일을 당했다고 동네가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는 사람들도 정작 그 슬픔이 깊지 않은 경우가 많다. 밤새도록 슬프게 울고 나서 누가 죽었냐고 물어보는 식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몸가짐은 예를 갖추나 마음가짐은 다를 때 위선이 나온다. 조선시대의 곡쟁이같이 남을 대신하여 곡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말고, 진심을 보여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금식할 때 위선자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말라. 들은 금식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부러 슬픈 표정을 짓는다.‘고 마태복음은 말한다. 진실한 것은 있는 그대로 보이면 된다. 또 솔직하고 정직하면 된다. 곤란한 일에 부딪쳤을 때 구차스럽게 변명하거나 속이지 말자. 개구리같이 헛배를 불리다가 배가 터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는 매일 4시에 일어나 네다섯 시간 동안 기도하면서 찬송을 했다. 수십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기독교인의 모범이 된다고 하였다. 마침내 하느님도 그의 성심성의에 감화 감동을 했다. 어느날 하느님이 그 위대한 기독교인의 뒤로 가서 기도하고 있는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축복해주기 위해서였다. 기도를 하고 있던 그가 번쩍 고개를 들면서 말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요. 내가 성심성의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소. 지금 이 신성한 시간에 꼭 나를 방해해야겠소?”
하느님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고 있다.
밤이 새도록 곡하고 누가 죽었냐고 물어본다. (Abellowing cow soon forgets her calf.)
진실과 회개
진실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끝내 밝혀지는 완고함을 지녔다. 남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영원히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의 마태복음에는 ‘감추어진 일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일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진실은 하나다. 허위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진실은 완고하다. 절대로 허위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다. 중용은 ‘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다’고 하여 은밀히 숨기려는 비밀도 곧 알려지게 된다고 하였다. 솔로몬도 진실은 영원히 살아 있지만 거짓은 그 수명이 매우 짧다고 하였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자. 많은 거짓말들이 진실을 왜곡하고, 정의를 파괴하고, 민중을 유린하고, 역사를 훼손하였지만 거짓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고 진실이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가?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진실은 곧 밝혀지기 마련이다. 살인자도 곧 밝혀진다.”고 하였다.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요한복음의 말처럼, 모른다고 거짓을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회개하고 용서를 받자
자신의 죄와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면 반 이상이나 고쳐진 것이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면 바로 그 순간이 선한 순간이 된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 예수 앞에 유태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왔다. 유태법으로 간음하는 여자는 돌로 쳐서 죽이는 형벌을 받는다. 예수는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쳐라.”
몰려든 군중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남의 죄만 떠들어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사람들이 다 가버리자 여자와 예수만 남았다. 예수는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하였다. 죄는 뉘우치기만 하면 죄업이 사라진다. 마음속의 걱정과 근심도 고백하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가 ‘여자’에게 말했듯이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Facts are stuborn things.)
정직
논어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정직하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를 지키지 못하고, 지나친 욕망에 따라 그릇된 일을 저지른다. 정당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하는 것이 일을 이루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정직은 도덕적 만족을 줄 뿐 아니라 돈이 적게 들기 때문에 경제적이다. 부정직한 방법을 쓰면 잠시 동안은 이익이 되는 것 같아도, 장기적 입장에서 보면 정직만이 큰 이익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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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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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 - 임인수
고개 넘어가는 길
봄이 오는 길
봄 길 쪼르쪼르
눈이 녹는다.
길은 진흙길
산으로 가는 길
나무하러 차박차박
짚신 신고 가는데
봄 길 쪼르쪼르
눈이 녹는다.
임인수 : '아이생활'에 동시를 발표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시, 동시, 동화를 발표하면서 주로 잡지편집을 하였습니다. 펴낸 책으로는 (어디만큼 왔나), (땅에 슨 글씨), (눈이 큰 아이), (임인수 아동문학독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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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 - 최갑순
누가 왔나
창문을 열어 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창문에 난 손자국
누구 짓일까?
누가 만지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촉촉한 머리카락
누구 짓일까?
최갑순 : 1995년 '아동문예'에 동시 (굴렁쇠) 외 2편이 당선되었고, '창조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한국아동문예작가상을 받았으며, 펴낸 책으로는 (달려간다, 굴렁쇠) (3학년 6반)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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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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