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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1호 - 2024.9.14. 토요일(음력 : 8.12.)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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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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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할 때 매우 조심해야 되지만 바꿀 때는 더욱 조심해야 되는 것이 輿論
- 조쉬 빌림즈(美 유머리스트, 1818~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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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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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와 ‘아니요’
‘가다, 보니, 많아, 좋은’에서 ‘-다, -니, -아, -은’ 따위를 ‘어미’라고 한다. 어미는 어말어미와 선어말어미로 나뉘고, 어말어미는 다시 종결어미와 연결어미로 나뉜다. 종결어미는 문장의 끝에 쓰여 그 문장을 마무리하는 어미이고, 연결어미는 앞말과 뒷말을 이어주는 어미이다. ‘비가 오면 좋겠다.’에서 ‘-면’은 ‘비가 오다’와 ‘좋겠다’를 이어주는 연결어미이고, ‘-다’는 그것으로써 문장이 끝나므로 종결어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그것은 정답이 아니오/아니요.’에서 맞는 표기는 뭘까? 답은 ‘아니오’이다. 문장을 끝맺는 자리이므로 종결어미인 ‘-오’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요’는 연결어미이다. ‘어서 오십시오.’가 맞고 ‘어서 오십시요.’가 틀린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식당 같은 곳에서 듣곤 하는 ‘어서 옵쇼.’는 ‘어서 오십시오.’가 줄어든 말이다.
‘우리는 형제가 아니오/아니요 친구랍니다.’에서는 ‘아니요’가 맞다. 이때는 뒤에 ‘친구랍니다’가 이어지므로 연결어미인 ‘-요’를 써야 한다. ‘-요’는 ‘이다’나 ‘아니다’하고만 결합하는 연결어미로서 뜻은 ‘-고’와 비슷하다. “여관에 행장을 풀고 밖에 나서니 앞도 산이요, 뒤도 산이요, 산허리에는 구름과 안개뿐이요, 들리는 것은 물소리뿐이다.”‘정비석,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네가 유리를 깨뜨렸니? 아니오/아니요, 형이 깨뜨렸어요.”에서도 ‘아니요’가 맞다. 단, 이때의 ‘요’는 연결어미가 아니다. 여기서 쓰인 ‘아니요’는 윗사람이 묻는 말에 부정하여 대답할 때 쓰는 감탄사로서, ‘아니’에 높임의 뜻을 더하는 조사 ‘요’가 결합한 것이다. ‘아니, 형이 깨뜨렸어.’와 비교해 보면, ‘요’를 붙임으로써 높임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맥베스’와 ‘맥아더’
요즘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사드’ 배치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이다. 이 ‘사드’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필자는 당연히 ‘S’로 시작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원어는 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였다. 영어 ‘th’ 발음은 우리말에 없는 것이어서, 때로는 ‘ㅅ, ㅆ’, 때로는 ‘ㄷ, ㄸ’ 등으로 다양하게 발음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서는 ‘ㅅ’으로 표기하도록 정해져 있다.
이 표기 규정에 따라 종전의 익숙한 표기가 바뀐 것이 일부 있는데, 세대에 따라서는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전설적인 왕 ‘아서 왕’이다. 이는 그 동안 ‘아더 왕’으로 쓰던 것으로서, 지금도 ‘아더 왕의 전설’, ‘킹 아더’와 같은 영화 제목이 통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아서 왕’의 표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셰익스피어 희곡 작품의 주인공 ‘오셀로’로 마찬가지다. 필자에게도 익숙한 이름은 ‘오델로’이지만, 지금은 ‘오셀로’라는 새 이름에 적응해야 한다. ‘맥베드’ 역시 잘못된 표기이며 ‘맥베스’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맥아더’는 어떨까. 한국전쟁 참전 장군인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알 정도로 익숙한 인물이다. 표기 원칙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머카서’로 적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 장군의 이름만큼은 관용에 따라 ‘맥아더’로 쓰도록 하고 있다.
‘사드’ 소식을 자주 접하다가 그 발음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분단국으로서의 아픔이 느껴지는 요즘, ‘맥아더’ 장군을 떠올리면서 ‘사드’ 문제도 슬기롭게 해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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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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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 천상병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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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반 - 정지용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나의 영혼안의 고운 불,
공손한 이마에 비추는 달,
나의 눈보다 값진이,
바다에서 솟아 올라 나래 떠는 금성,
쪽빛 하늘에 흰꽃을 달은 고산식물,
나의 가지에 머물지 않고
나의 나라에서도 멀다.
홀로 어여삐 스사로 한가러워 - 항상 머언 이,
나는 사랑을 모르노라 오로지 수그릴 뿐.
때없이 가슴에 두 손이 여미여지며
구비 구비 돌아나간 시름의 황혼길 우-
나 - 바다 이편에 남긴
그의 반 임을 고이 지니고 걷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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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蟻(백의) - 김수영
내가 비로소 여유를 갖게 된 것은
거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에 있어서도 저 무시무시한 백의를 보기 시작한 때부터이었다
백의는 자동식문명의 천재이었기 때문에 그의 소유주에게는
일언의 약속도 없이 제가 갈 길을 자유자재로 찾아다니었다
그는 나같이 몸이 약하지 않은 점에 주요한 원인이 있겠지만
뇌신보다 더 사나웁게 사람들을 울리고
뮤우즈보다도 더 부드러웁게 사람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준다
질책의 권리를 주면서 질책의 행동을 주지 않고
어떤 나라의 지폐보다도 신용은 있으나
신체가 너무 왜소한 까닭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를 않는다
고대 형이상학자들은 그를 보고「양극의 합치」라든가 혹은 「거대한 희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십구세기 시인들은 그를 보고「도벽의 왕자」혹은 단순히 「여유」라고 불렀다
그는 남미의 어는 면공업자의 서자로 태어나서
나이아가라강변에서 수도공사에 정신하고 있었다 하며
그의 모친은 희랍인이라고 한다
양면이 모두 담홍색을 하고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오랜 세월을 암야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맏누이동생은 그를「하니」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꼬와서
내가 어느날 그에게「마신」이라고 별명을 붙였더니
그는 대뜸
「오빠는 어머니보다도 더 완고하다」고 하면서
나를 도리어 꾸짖는 척한다
(그가 나를 진심으로 꾸짖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의 은근하고 매혹적인 표정에서 능히 감득할 수 있었다)
- 비참한 것은 백의이다
그는 한국에 수입되어가지고 완전한 고아가 되었고
거리에 흩어진 월간 대중잡지 우에 매월 그의 사진이 게재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어느 삼류신문의 사회면에는 간혹 그의 구제금 응모기사같은 것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진과 기사를 볼 때마다
이것은 「아틀랜틱」과「하아파스」의 광고부의 분실이 나타났다고
이곳 저널리스트의 역습의 묘리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백의는 이와같은 나의 안심과 태만을 비웃는 듯이
어느틈에 우리 가정의 내부에까지 투입하여 들어와서
신심양면의 허약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나를 독촉하여
「희랍인을 모친으로 가진 미국인에게 대한 호소문」과 「정신상으로 본
희랍의 독립선언서」를 써서
전자를 현재 일리노이주에 있는 자기의 모친에게 보내고
후자는 희랍국립박물관관장에게 보내달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무리한 요청에 대하여 나는 하는수없이
「그것은 나의 역량 이상의 것이므로 신세계극단의 연출자 S씨를 찾아가보라」고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가지고 즉석에 거절하여버렸다
오히려 이와같은 나의 경멸과 강의로 인하여
나는 그날부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로 어저께 내가 오랜간만에 거리에 나가니
나의 친구들은 모조리 나를 회피하는 눈치이었다
그중의 어느 시인은 다음과같이 나에게 욕을 하였다
「더러운 자식 너는 백의와 간통하였다지? 너는 오늘부터 시인이 아니다 . . . . . .」
- 백의의 비극은 그가 현대의 경제학을 등한히 하였을 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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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시간의 얼굴) - 이해인
1
오늘은 가을 숲의 빈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흰 구름을 바라봅니다.
한여름의 뜨거운 불볕처럼 타올랐던 나의 마음을 서늘한 바람에 식히며 앉아 있을 수 있는
이 정갈한 시간들을 감사합니다.
2
대추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우리집 앞마당.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몇 마리의 참새가 올리는 명랑한 아침기도.
바람이 불어와도 흩어지지 않는 새들의 고운 음색.
나도 그 소리에 맞추어 즐겁게 노래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며 -
3
한 포기의 난(蘭)을 정성껏 키우듯이 언제나 정성스런 눈길로 당신을 바라보면
그것이 곧 기도이지요? 물만 마시고도 꽃대와 잎새를 싱싱하게 피워 올리는
한 포기의 난과도 같이, 나 또 한 매일 매일 당신이 사랑의 분무기로 뿜어 주시는 물을,
생명의 물을 받아 마신다면 그것으로 넉넉하지요?
4
기도서 책갈피를 넘기다가 발견한 마른 분꽃 잎들. 작년에 끼워 둔 것이지만
아직도 선연한 빛깔의 붉고 노란 꽃잎들. 분꽃잎을 보면 잊었던 시어(時語)들이 생각납니다.
당신이 정답게 내 이름을 불렀던 시골집 앞마당, 그 추억의 꽃밭도 떠오릅니다.
5
급히 할 일도 접어두고 어디든지 여행을 떠나고 싶은 가을.
정든 집을 떠나 객지에서 바라보는 나의 모습, 당신의 모습, 이웃의 모습.
떠나서야 모두가 더 새롭고 아름답게 보일 것만 같은 그런 마음.
그러나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오늘을 더 알뜰히 사랑하며 살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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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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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문명을 집어던져라
인생의 향연은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 요컨대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식욕은 느끼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먹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이 빈둥빈둥 놀면서 먹고 있는데 대체 왜 인간만이 사회 생활 속에서 애써 먹이를 찾아 일을 해야만 되는 걸까? 만일 한 마리의 들짐승이 도시 한복판에 풀려나 인간들의 행위를 지켜본다면 깊은 회의와 곤혹감에 빠져들고 말리라. 집을 지키는 개도 대개는 집안에서 놀고 있으며, 부잣집 고양이는 하루 종일 졸고 있다. 말이나 소를 제외하고는 어떤 가축도 먹기 위해 노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인간만이 날 때부터 길들여지고 교육받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대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인간 생활에도 좋은 점은 있다. 그것은 지식의 기쁨과 공상하는 즐거움, 완성의 보람 따위이다. 그러나 그 외의 90퍼센트의 행위는 먹이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문명이란 먹을 것을 찾는 일이고 진보란 먹이찾기가 점점 심각해짐을 의미한다. 먹이를 찾는 일이 그처럼 어렵지 않다면 인간이 지금처럼 부지런히 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인간들은 대도시의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퇴색된 더러운 굴뚝과 빨랫줄과 전깃줄이 교차된 멋없고 우중충한 공간에서 단지 몇 송이의 꽃을 장식해 놓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들의 참다운 생활이란 무엇일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뒤 남편이 직장으로 가면 아내는 걸레를 빨아 집을 청소한다. 그리곤 이웃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고 아이들의 공부를 돕다가 밤이 되면 지쳐 돌아온 남편과 잠자리에 든다. 대체 이것이 참다운 삶의 모습이란 말인가. 좀더 여건이 좋다면 돈걱정을 하지 않는 가족도 있을 것이고, 문화 생활을 즐기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성가신 다툼이 있고 이혼이 있으며, 기분전환을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골에 사는 사람은 도시가 하나의 탈출구로 보이고, 도시인들은 시골이 하나의 안식처쯤으로 보곤 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가령 도시의 경우 한 시간쯤 돌아다니면 약국, 슈퍼, 이발소, 세탁소, 식당, 극장, 주유소 등의 세트일 뿐이라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된다. 그 단순함, 그들은 또 어떻게 살아가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세탁소 주인은 이발사와 식당종업원의 옷을 세탁하고, 식당 종업원은 세탁소 주인과 이발사의 식사를 배달하며, 이발사는 세탁소 주인과 식당 종업원의 머리를 손질해 준다. 어처구니없지만 이것이 소위 문명이란 것이다. 이쯤 되면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일까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행복의 의미, 행복의 배경은 언제나 단순한 무대 장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아니 의미없는 문명이란 적군에 포위되어 있다. 백발이 될 때까지 먹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고 끝내는 즐거움을 잊어버리는 문명이란 존대. 아아, 무섭도록 현명한 인류들이여.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그대들은 문명을 그리워하는가.
천국은 지상에 있다
우리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면 알 듯 모를 듯한 애련에 물든다. 인생무상, 이런 단어를 생각하게 되면 사람들은 오히려 강하고 과격하게 인생을 즐기려는 시도를 하곤 한다. 이 땅 위의 생명이 인간에 주어진 전부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음껏 즐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헛되이 영생을 원하면 삶의 즐거움은 손상된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던 아더 키드 경의 말과 같다. '지상이야말로 유일한 천국이다. 이 한 가지를 나와 더불어 세상 사람들이 믿는다면, 이 지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데 더욱 힘쓰게 될 것이다.'
중국 문학을 읽고 나면 우리들은 종종 인생무상과 생자필멸의 감상에 젖곤 한다. 우리들이 놀이와 환락에 빠져 있을 때 가끔 어두운 마음이 되는 것은 인생이 덧없다고 생각하는 슬픈 감정 때문이다. 이백이 '뜬 세상 꿈과 같으니 기쁨을 이룸이 그 얼마랴'라고 읊은 것은 봄 밤에 도리원의 잔치를 베풀고 술잔을 들었을 때였다. 또 왕희지가 불후의 명문 "난정집서"를 지은 것도 벗들과 한자리에 모여 마음껏 즐거움을 나눈 다음이었다. 그러나 이런 애틋한 감정이 없다면 인생은 하나의 아득한 명제가 될 것이다. 인간은 죽는다. 인간에게는 한정된 수명이 있다. 그러므로 주어진 조건 아래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은 생활을 안배해야만 한다. 이것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유교의 가르침과 통하는 바가 있다. 그리하여 인간이 동물이고, 정상적인 본능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참된 행복을 얻게 된다. 이런 사실을 믿어야만 본능과 관능의 인생에 눈을 뜰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은 영과 육, 두 개의 문은 가지고 있다. 음악이란 우리들의 정신을 높은 세계로 이끌어가지만 그것은 청각이라는 육신의 기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현실적으로 연인을 생각해 보라. 연인의 마음과 육체를 구별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한 여성을 사랑한다면 그 모습의 가하학적인 비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몸짓과 미소와 성격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몸짓과 미소가 정신적인 것인지 육체적인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모호해진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의 논리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그들은 인생 그 자체를 통찰하기보다는 정신만을 강조하여 우리들의 인생을 절름발이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구애와 구혼만을 할 뿐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장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보무 당당히 행진하는 영국군인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의 철학자들은 너무나 시시하다.
그들은 열렬한 연인처럼 진리에 구애는 하지만 결혼을 신청하는 법이 없다. 지적이니 관능적이니 하는 말들은 생활에서 우리가 즐거움을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어느 한 켠에 집착하여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우리들의 삶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보다는 인생을 알기 위한 과정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동물이다
유사 이래로 아무도 남자에게 여자와 사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묘하게도 남자는 언제나 여자와 함께 살아왔다. 남자들이여, 명심하라. 여자 없이는 그 누구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 진리를 안다면 아무리 가벼운 입이라 할지라도 여자에 대해 경멸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남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로서의 여자, 아내로서의 여자, 또 딸로서의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설사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윌리엄 워즈워드처럼 자기 누이에게 의지하거나 허버트 스펜서처럼 가정부의 신세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어머니나 누이와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라도 워즈워드의 마음을 구제하지 못할 것이며, 가정부와의 사이마저 원만하지 못할 정도라면 신이여, 스펜서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가정에서 적절한 관계에 이르지 못하고 비뚤어진 도덕적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가련하다. 저 문제아 오스카 와일드처럼 '남자는 여자하고는 살 수 없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4000년 전의 힌두교의 한 작가와 20세기의 오스카 와일드 사이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힌두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창조설은 오늘날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남녀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신이 여자를 만들 때 꽃의 아름다움, 새의 고운 소리, 무지개 빛깔, 미풍의 입맞춤, 물결의 웃음, 양의 얌전함, 여우의 교활함, 구름의 분방함, 소나기의 변덕 같은 것들을 모아 여성의 몸에 집어넣었다. 이런 아내를 얻은 힌두의 아담은 행복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지상에서 뛰놀며 창조주를 찬양하였다. 그런데 얼마 후 아담이 신에게 달려와서 말했다.
"이 여자를 어디로든 쫓아내 주십시오. 도저히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신의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아담의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래서 아담은 다시 신을 찾아가 간청했다.
"여자를 제게 되돌려 주십시오. 생각해보니 여자 없이는 못살 것 같습니다."
신의 또 그 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또 아담이 신 앞에 나타났다.
"제발 이 여자를 데려가 주십시오. 맹세코 말씀드리지만 그녀와는 함께 살 수 없습니다."
신은 무한한 예지와 자비로 아담의 말을 다시 들어주었다.
드디어 아담이 네 번째로 찾아왔을 때 신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서약하게 하였고, 이는 종신토록 인간 세상에 유전되었다.
첫째 다시는 변덕을 부리지 말 것
둘째 좋든 싫든 여자와 운명을 같이할 것
셋째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이 지상에서 함께 살아갈 것.
왜 혼자라고 생각하는가
어떤 인간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려 한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반드시 자신의 주위보다 큰 집단과 결합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아는 신체의 크기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과 사회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한 고립된 자아보다는 더 큰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가정에 속해 있고, 이후 계속 가정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곧 자연이다. 또 핏줄이란 것이 자아를 좀더 뚜렷하게 해 준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진실이다. 이런 가정 생활을 잘 해나가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집단 생활에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그리하여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젊은이여. 가정에서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경하며, 삼가 성실하게 한 후, 널리 사랑하고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런 다음에 여유가 있으면 그때 글을 배우라.' 가정의 중요성을 덮어두고 생각한다면, 남자가 자신을 표현하고 자기를 충실케 하며 그 개성을 최고로 발전시킬 수 있는 공간이란 적당한 이성으로부터 주어지는 조화호운 마음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남자보단 강한 생물적 감각을 가진 여자는 이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모성 본능이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온갖 정신적 도덕적 특질이 나타나고 결합된다. 이를테면 여자의 판단력, 현실주의, 참을성, 동정심, 감상적인 눈물, 이기주의적인 성격 등이다. 여성이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심신 전체를 변화시키고 성격과 습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인생의 사명이나 목적에 대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어느 부유한 가정의 응석받이 외동딸이 성장에서 결혼을 한 후 몇 달 동안 잠 한숨 자지 않고 자기 아기의 병간호를 하는 모습을 나는 본 적이 있다. 자연에서 아버지의 본능은 이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그런 본능조차 없다. 이것이 자연적인 본성일지라도 여자들은 심리적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 하는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외형적 생활의 피상적인 영달보다는 좀더 높은 곳에 깊숙이 가로놓인 남녀의 본성의 근원에 접촉하여 정당한 배출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개인 경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독신 생활에는 뭔가 개인주의적인 데가 있을뿐더러, 쓸데없는 주지주의적인 점이 있다. 그 후자 때문에 독신주의는 배격당해 마땅하다. 단지 좋다는 이유만으로 쓸모없는 주지주의자가 된 독신주의자나 미혼여성은 그 외형적인 모습에 너무 치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가정 생활 이외의 다른 면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으며, 싶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지적인 흥미와 예술적인 흥미, 직업적인 흥미를 어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충족된 생활을 하지도 못하면서 그 대용물로 경력이니 공적이니 무슨 운동에 끼여든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고 우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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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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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다키아 문제
서기 14년에 사망한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영토를 더 이상 확대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긴 지 9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더 이상'의 한계를 라인 강, 도나우강, 유프라테스 강, 사하라 사막까지로 명확하게 못박은 것은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다. 그 후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잉글랜드)를 정복했지만, 이곳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미 손을 댄 지역이니까 아우구스투스의 유훈에 어긋나는 군사행동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브리타니아 정복을 제외하면 로마 제국의 군사행동은 모두 제국의 방위선 유지나 제국 내부의 반란 진압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렇게 로마 제국 역사상 특기할 만한 사건인데도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은 자세한 내용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트라야누스는 역사가를 비분강개시키지 않은 현제였기 때문에 오히려 전기조차도 씌어지지 않았고, 다키아정복에 관한 사료도 다음 세 가지뿐이다.
(1) 트라야누스 자신이 쓴 것으로 알려진 <다키아 전쟁기>
(2) 카시우스 디오가 쓴 <로마사>의 다키아 전쟁 부분.
(3) '트라야누스 원기둥' (코론나 트라야나)이라고 불리는 승전기념 비에 새겨진 부조. 길이가 200미터를 넘는 이 돋을 새김에는 전쟁의 진 전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이 세 가지 사료를 실증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고고학적 조사 연구는 전쟁터가 오늘날의 루마니아 국내인 탓도 있어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마사 연구자들은 누구나 <다키아 전쟁기>만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아쉬워하지만, 트라야누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본받아 기술했다는 이 저작은 훗날 다른 사람이 인용한글에 한 줄의 흔적을 남긴 채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또한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도 오현제 시대를 다룬 부분은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19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건설 당시와 같은 장소에 서 있지만, 로마 교외의 에우르에 있는 '로마 문명 박물관'에 정교한 복제품도 존재하니까, 좀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고 싶은 사람은 이곳을 찾아가면 된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펜이 아니라 끌로 쓴『다키아 전쟁기』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에는 결함도 있다 전체 길이가 200미터를 넘고 장면도 140개를 헤아릴 정도지만, 문장으로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정확성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리얼리즘을 중시했다는 증거로 하얀 대리석에 돋을 새김으로 묘사된 병사들이 들고있는 창과 칼은 모두 구리였다. 제국이 멸망한 뒤 이것을 녹여서 다른 물건으로 만들어버렸겠지만, 그것이 당초 위치에 있었을 때의 박진감은 상당했을 것이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역사적 자료로서 중요할 뿐 아니라 로마 조형예술의 걸작품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다키아 전쟁을 서술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작업이 되어버렸다. 전문 연구자들의 저서를 읽어보아도 그 전모가 떠오르지 않은 것을 보면, 그들도 어지간히 애를 먹은 모양이다. 명쾌하게 이해할 수 없으면 명쾌하게 서술할 수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어떻게든 다키아 전쟁의 상황을 알았다고 생각한 것은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새겨진 장면들을 추적하기 시작한 뒤였다. 그래서 여기서도 전쟁의 진행 상황을 내 생각대로 정리하여 서술하는 작업은 아예 포기하고, '원기◎의 각 장면을 해설하는 것으로 대신할 작정이다. 모든 장면의 사진을 싣는 게 이상적이지만, 비용 관계로 어렵기 때문에 사진도 몇 장면만 싣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원기둥]
제1차 다키아 전쟁
트라야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서기 101년 봄에 어느 지점에서 도나우강을 건넜는지에 대해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는 전혀 언급하고있지 않다.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기』 중에서 남아 있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음 한 줄뿐이다.
"inde Bertobim, deinde Aizi processimus"
번역하면 "베르조비스로, 그리고 아이지스로 우리는 진군했다'가된다.
베르조비스는 오늘날 루마니아의 레시차라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지만, 아이지스가 어딘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목적지는 다키아족의 본거지인 사르미제게투사(오늘날에도 같은 이름)였을 테니까,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산맥 북쪽에 있는 이 땅으로 쳐들어가려면 산맥서쪽을 지나 도나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따라서 베르조비스를 거쳐 북동쪽으로 진군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도나우강을 건넌 지점은 로마 군단기지를 기원으로 하는 오늘날의 베오그라드에서 직선거리로 60킬로미터 동쪽에 있는 로마 시대의 비미나키움(오늘날의 코스트라크)이 아니었을까. 서기 101년에 로마군은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의 접경 부근에서 도나우강을 건넌 다음, 그대로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루마니아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보다 1898년 뒤에 이루어진 나토(NATO)군의 유고 폭격에서는 도나우강에 걸려 있는 다리가 대부분 파괴되지만, 트라야누스는 거기서 조금 하류로 내려간 지점에서 도나우강을 건넜을 것이다.
하지만 군단기지나 요새에 일부 병력을 수비군으로 남겨두고 왔다해도 10만 명은 족히 넘는 대군이 배다리로 강을 건너려면 시간이 너무 걸린다. 또한 이런 대군을 한 군데 집결시킨 다음 며칠에 걸쳐 어렵게 큰 강을 건너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현명한 방식이 아니다. 그래서 군대를 양분하여 강을 건넜다는 설이 유력해지는데, 그렇다면 코스트라크 이외의 도강 지점은 어디일까.
첫 번째 도강 지점으로 되어 있는 코스트라크보다 직선거리로 100킬로미터쯤 동쪽으로 가면, 도나우강이 북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물굽이가 나온다. 서기 98년부터 101년까지의 전쟁 준비 기간에 도로 등의 토목공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절벽을 깎아서 길을 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제1차와 제2차 전쟁 사이의 기간을 이용하여 도나우강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최초의 돌다리를 건설했는데, 그 다리도 이 부근에 있다. 제1차 전쟁 당시에는 여기서도 배다리를 가설하여 건넜을 게 분명하고, 뒤따라온 제2군의 도강 지점도 이 일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도나우강을 건넜다면, 그대로 곧장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레시차에서 제1군과 합류할 수도 있었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에 새겨진 <다키아 전쟁기>는 원기둥 아래쪽에서 위쪽을 향해 나선형으로 올라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각 장면은 가느다란 나무로 구획되어 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가 서론도 없이 다짜고짜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다키아 전쟁기>도 도나우강 연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1)도나우 강에 면하여 세워진 감시용 요새가 보인다 모두 소형이 지만 석조 건물이고, 주위에는 목책을 둘러 이중으로 보호하고 있다 목책을 만들기 위해 엇갈리게 쌓아놓은 통나무들도 보인다 높은 요새인 경우에는 맨 위층에 만들어진 테라스에서 긴 횃불이 튀어나와 있다. 긴급할 때의 의사전달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요새 근처에는 완전 무장한 보초들이 서 있는 것도 보인다.
(2)석조 건물 몇 채를 나무 울타리로 둘러싼 구역은 군량 창고였을 것이다. 포도주 통이 배에 실리고 있다. 로마 병사들의 식사에는 포도주가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제패한 땅에는 기후만 허락하면 어디에나 포도밭을 만들었다. 독일의 대표적 포도주인 모젤 와인의 산지는 모두 과거 로마 제국의 국경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3)장면이 바뀌어, 회당(바실리카)이나 높은 석조 건물이 줄지어 늘 어선 도시가 보이고, 그 성문에서 완전 무장한 군단병의 행렬이 나타나 배다리를 건너기 시작한다. 강물 속에서 상반신을 드러낸 도나우강의 신이 로마군의 도강을 축복이라도 하듯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완전무장이라 해도 전투용이 아니라 행군용 차림인 것은, 무기만이 아니라 식량에다 냄비며 식기까지 창 끝에 동여매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로마군의 주전력인 군단병이 행군할 때 짊어져야 하는 군장의 무게는 몸에 걸친 갑옷을 합치면 40킬로그램이나 되었다고 한다. 배다리를 놓는다 해도, 그냥 배를 잇대어 나란히 늘어놓고 그 위에 널빤지를 걸쳐놓으면 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흐르는 물살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배의 고물을 상류 쪽으로 돌려서 늘어놓는다. 그것도 빈틈없이 늘어놓으면 물살을 정면으로 받아서 떠내려가게 되니까, 배 한 척의 너비만큼 간격을 띄워놓고 배들을 굵은 목재로 연결한다. 그 위에 널빤지를 걸쳐놓아 사람이 지다 다닐 수 있게 한다. 로마인이 만드는 이런 종류의 다리에는 말이나 수레가 강물로 떨어지지 않도록 나무난간까지 달려 있었다. 다리를 놓는 지점도 강폭이 좁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강폭이 좁으면 물살도 빨라지기 때문이다. 다리를 놓을 때는 강폭이 넓고 물살도 느린 편이 적당했다. 그렇다면 유럽 최대의 하천인 도나우강에 놓은 배다리의 전체 길이는 적어도 1킬로미터를 넘었을 게 분명하다.
(4)여기서 처음으로 트라야누스가 등장하치만, 화려한 최고사령관의 군장으로 말을 탄 모습은 아니다. 다리를 다 건넌 병사들이 행군을 계속하는 옆에서 의자에 앉아 참모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주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황제 왼쪽에 역시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어있는 인물이 트라야누스의 친구이자 다키아 전쟁 때 부사령관 역할을 맡은 술라라고 한다.
(5)적지인 도나우강 북안으로 건너가 최초의 제사가 거행된다. 71물로 바쳐질 소와 양이 끌려오고, 병사들도 노력하겠지만 신들도 로마에 승리를 베풀어달라고 최고제사장 차림을 한 트라야누스가 기원한다. 제사장 차림이라 해도, 붉은 망토와 강철 흉갑을 벗고 하얀 투니카 위에 토가를 걸치고, 그 토가 끝자락으로 머리를 덮는 것뿐이니까 간단하다.
(6)장면이 바뀌면, 다시 군장 차림으로 돌아간 트라야누스가 등장한다. 이번에는 숲처럼 늘어선 군단기를 등지고 병사들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경청하는 병사들의 군장이 다양한 것으로 보아, 황제의 연설이 군단병만 대상으로 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군단병이 전과를 올리려면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부대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경우, 사령관이 병사들 앞에서 행하는 연설은 '힘내라!"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트라야누스의 연설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다른 장수들의 연설문을 보면 설득을 통해 병사들을 독려하는 경우가 많다. 연설에서는 우선 병사의 수와 군량 같은 확정적인 요소를 언급하고, 병사들의 사기나 전의 같은 비확정적인 요소는 맨 마지막에 언급한다. 이러이러한 면에서는 적보다 우리가 단연 우세하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분발하라는 것이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을 들은 것도, 병참이라는 확정적 요소들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정신력이라는 비확정적 요소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7)적지에서 최초의 격려 연설을 했으니까 그대로 적진을 항해 돌진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그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다. 제사를 묘사한 장면의 배경에도 보이듯이, 도나우강을 건넌 병사들은 사령관들이 작전회의를 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견고한 숙영지 건설에 착수해 있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네 장면은 모두 돌과 나무로 숙영지를 만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공사에는 군단병과 보조병이 모두 참여한다. 다만 중요한 부분의 공사는 토목공사에 노련한 군단병이 맡는다. 비슷한 시기에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속주에서는 그곳에 주둔하는 제3군단이 군단병만 동원하여 팀가드 시가지 전체를 건설해버렸을 정도다. 사하라 사막과는 기후와 지세가 정반대인 다키아 지방에서도 숙영지 만들기는 로마 군단병들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병사들이 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장면마다 그것을 시찰하는 트라야누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견고한 숙영지 건설은 중요한 전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군 병사의 퇴로를 차단하고 병사들을 전쟁터에 투입하는 편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을 확보해줌으로써 병사들을 안심시키고, 그 안도감을 용수철로 이용하여 사기를 높이는 편이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케이스 비이 케이스'인 것은 당연하지만, 로마 장수들은 대부분 후자를 채택했다.
(8)공병으로 변모한 로마 병사들의 토목공사는 숙영지 만들기에 머물지 않는다. 당시 유럽은 삼림지대이기도 했다. 나무를 베어 길을 내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진군할 때는 도로포장까지 하지 않지만, 새로 낸 길을 평탄하게 고르는 작업은 한다. 도중에 강을 만나면 나무다리 정도는 순식간에 만들어버린다. 이런 일은 모두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만, 적군이 사정을 잘 아는 지역에서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가장 무섭다. 로마군 사령관은 되도록 아군 병사의 눈에 적군이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9)진행중인 공사를 시찰하던 트라야누스 앞에 다키아족 포로가 끌려온다. 다키아족지배층의 풍습인 빵떡모자를 쓰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단순한 척후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척후병이라도 포로는 사령관이 직접 심문하는 것이 로마군의 관례였다. 정보 수집은 객관적 사실(데이터)을 모으는 것만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들 사이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에 남에게 맡길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10)포로를 심문한 결과, 적군이 강 건너 숲 저편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 장면에는 전투를 앞둔 준비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흥분해저 날뛰는 말들, 대오를 지어 기다리는 군단병들의 긴장한 얼굴. 생동감 넘치는 리얼리즘이다. 선발대는 기병과 보병. 보병의 역할은 숲을 뚫어 길을 내는 것. 뒤따르는 군단병도 나무를 베어 길을 내면서 진군하지 않으면 안 된다.
(11)아니나다를까, 다키아군은 숲이 끝나는 곳에 펼쳐진 평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치러진 전투가 트라야누스의 로마군과 데케발루스의 다키아군 사이에 벌어진 첫 번째 전투로서, 역사상 '타파이 전투'라고 불린다. 2천 년 뒤인 오늘날에는 전적지를 확정할 수 없지만, 다키아 왕국의 수도인 사르미제게투사에서 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이었던 모양이다. '타파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그들이 가장 장기로 삼고 있던 진형-좌익 · 중앙 · 우익으로 나뉜 회전 진형-을 갖출 시간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트라야누스 원기둥'에는 이 전투 장면이 몇 개나 이어져있는데, 모두 기병과 중장비 보병인 군단병, 경장비 보병인 보조병이 뒤섞여 싸우는 혼전 상황이다. 이렇게 뒤섞인 로마 병사들 사이에 다키아 병사들까지 어지럽게 뒤얽힌 백병전이 '타파이 전투'의 실상이었던 것 같다. 다키아 병사들은 투구도 흉갑도 없이 짧은 상의에 바지를 입고 칼과 방패만 든 모습이다 반면에 로마 군단병은 강철 갑옷을 입고, 보조병은 가슴에 가죽 흉갑을 대고 있다 보조병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평소 방식대로 반나체로 싸우는 게르만 병사들이다. 이때쯤 서기 101년의 겨울이 다가온 모양이다. 트라야누스는 군대의 절반을 다키아에 남겨놓고, 나머지 절반과 함께 도나우강 연안의 군단기지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남쪽으로 돌아갔다.
(12)그러나 다키아왕은 수도에서 50킬로미터 거리까지 바싹 다가온 로마군의 창 끝을 피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그것은 도나우강 하류에 있는 로마 군단기지에 대한 공격이었다 공격 목표가 된 것 은 먼 모에시아속주에서도 제1군단이 주둔해 있는 노바에. 오늘날 불가리아의 스비슈토프다. 다키아족 본거지에서 강을 따라 남하하기만 하면 도중에 로마군과 마주치지 않고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키아왕 데케발루스의 첫 번째 오산은 도나우강 건너기를 가볍게 생각한 것이었다. 기병은 면밀한 준비도 없이 말을 탄 채 강물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건너게 했다. 이 조직력 결여 때문에 도강 단계에서 많은 병사를 잃었다. 하지만 다키아족이 로마에 위협적 인 존재가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구가 많다는 점이었다.
(13)노바에 앞 강변에 도착한 다키아군은 떼를 지어 군단기지를 공격한다. 성벽 위에서 로마 병사들이 그들을 맞아 싸운다. 다키아 공략에 병력의 절반 이상이 동원되었을 테니까, 수비군도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데케발루스는 또 한 가지 오산을 범했다 일개 군단기지에 불과한 노바에를 구원하기 위해 로마 황제가 직접 나서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 자신이 노바에 공략전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장이 노바에를 구원하러 갈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14)원경에 즐비하게 서 있는 석조 건물과 원형경기장으로 미루어보아, 트라야누스가 겨울철 숙영지로 택한 곳은 도시화가 진행된 군단기지였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로마인이 가까운 모에시아 속주의 도읍으로 삼고 있던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도나우강을 따라 600킬로미터나 하류로 내려가야만 노바에에 닿을 수 있다. 육로로 간다 해도,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상고 있던 도로도 역시 강을 따라 깔려 있었다. '원기둥'에는 기지 앞 강변에서 군량을 배에 싣는 병사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군장을 갖춘 병사들도 차례로 배에 올라탄다. 트라야누스는 평복이라 해도 좋은 토가 차림으로 승선한다. 로마는 도나우강을 방위선으로 정한 뒤, 이 강에도 라인 강과 똑같은 규모의 함대를 상주시키고 있었다. 말만 실어 나르는 군마 전용 수송선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15)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는 로마 함대. 그중 한 척은 황제가 직접 키를 잡는다 도나우강도 하류로 접어들면 대하라는 이름에 걸맞게 강폭이 넓어져 동쪽을 향해 유유히 흘러가기 때문에,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속력을 낼 수 있었다. 별동대는 육로를 따라 동쪽으로 달려갔을 게 분명하다.
(16)트라야누스와 병사들은 적이 공격하고 있는 노바에에서 서쪽으로50킬로미터쯤 떨어진 오에스쿠스 기지 부근에 상륙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육로로 달려온 별동대와 합류하여 노바에를 구원하러 가는 트라야누스는 이미 완전군장을 갖추고 있다 앞장서서 말을 달리는 황제 그의 좌우를 지키며 뒤따르는 갖가지 군장차림의 병사들.
(17)정찰을 나갔던 기병대가 돌아와 적군의 상황을 황제에게 보고한다.
(18)적군의 동정을 안 트라야누스의 명령에 따라, 선발대로 결정된 북아프리카 출신 기병대가 출동한다.
(19)이 마우리타니아 기병대를 맞아 싸운 것은 병사도 말도 온몸이 비늘 갑옷으로 덮여 있는 게 특징인 사르마티아족 기병대다. 사르마티아족은 다키아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부족이다 하지만 마우리타니아 기병의 맹공 앞에서는 전신 무장도 효과가 없었다 트라야누스가 앞장서서 이끈 로마 기병대도 공격에 합세하자, 다키아군은 저항하지 못한다. 곧이어 반나체 차림의 게르만 병사를 포함한 보병대도 공격에 가세한다. 원경에는 기지 주변의 민간인 거주구역을 습격하여 얻은 약탈품을 가득 실은 다키아군의 짐수레 행렬이 보인다 적군과 아군이 뒤섞인 백병전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20)세 명의 참모를 거느린 군장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병사들의 노련한 솜씨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숙영지 건설 작업을 시찰하고 있다. 그런 트라야누스에게 다키아족 노인들이 아녀자들을 데리고 찾아온다 투항의 뜻을 전하고 목숨을 구걸하러 왔다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그들의 차림으로 보아 정식 사절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키아족도 게르만족과 마찬가지로 아녀자들을 전쟁터까지 데려가는 습관이 있었다.
(21)서전에서는 이겼지만, 노바에 기지를 구원하는 목적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포로의 손을 뒤로 묶어 염주처럼 엮고 있는 병사가 있는가하면,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들도 보인다. 다른 한편에는 내일로 다가온 두 번째 전투를 위해 군기와 나팔을 점검하는 병사도 있다.
(22)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서의 전과를 결정하는 두 번 전투는 주전력인 중장비 보병을 주역으로 벌어졌다 이곳 일대는 평원이기 때문에 로마군이 장기로 삼는 회전 방식으로 치러진 듯하다 로마인의 회전방식은 적을 포위하여 궤멸시키는 병법이다. 이 장면에서는 포위한 적군에게 덤벼드는 로마 군단병이 모두 창을 높이 치켜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 박진감은 오늘날 극장의 대형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전투 장면을 보는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23)포위 섬멸 작전이 성공하려면 기병의 참전이 필수적이다. 적군의 배후로 돌아간 기병대가 창을 치켜들고, 이미 로마군에 압도당하여 퇴각하기 시작한 다키아 병사들에게 덤벼든다. 자칫 쓰러지기라도 하면 말발굽에 짓밟히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다키아군은 전쟁터에 시체 무더기를 쌓을 뿐이었다.
(24)전투가 끝나고,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을 치하하는 황제의 연설장면이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트라야누스를 존경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회전 방식으로 싸웠을 경우, 승리는 총지휘를 맡은 사람의 군사적 재능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25)숙영지 안에 수용된 다키아족 포로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바로 다음에는 특히 용감하게 싸운 병사들을 황제가 일일이 치하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26)발가벗겨진 포로 셋이 여자들에게 고문당하고 있는 장면. 그 중 한 사람은 로마식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수염도 없기 때문에, 사로잡은 로마 병사 세 명을 다키아 여인들이 고문하는 장면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의자에 앉아 병사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트라야누스 바로 옆에서 전개되고 있다. 어쩌면 다키아 병사들의 습격으로 식량이고 뭐고 몽땅 강탈당한 기지 주변 주민들이 이제상황이 바뀌자 다키아 병사들을 놀림감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마군은 군량을 지참하고 싸우러 가지만, 다키아족은 현지 조달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다.
(27)노바에 기지를 구원한 트라야누스는 다시 배에 올라탄다. 다키아족 노인들이 황제에게 탄원을 계속하지만, 아녀자를 포함한 포로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이리하여 다키아군의 도나우강 하류 교란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도나우강 상류 쪽으로 떠나는 트라야누스와 병사들은 이제야 안심하고 겨울을 날 수 있는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28) '원기둥'은 해가 바뀐 서기 102년 봄부터 다키아 전쟁에 대한 서술을 재개한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배에 군량을 싣는 병사들과 배다리를 건너는 군단이 묘사되어 있다. 군단기에 달린 표지로 보아, 라인 강 방위선의기지 가운데 하나인 본에 주둔해 있는 제1군단임을 알 수 있다. 길을 뚫고 숙영지나 요새를 건설하면서 진군하는 것은 지난해와 마찬가지지만, 트라야누스의 전략은 바뀌어 있었다. 다키아족이 도나우강 하류의 군단기지 노바에를 공격한 것이 전략 변경의 실마리를 준게 분명하다. 서기 102년, 트라야누스는 산맥 북쪽에 있는 다키아의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를 양쪽에서 협공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산맥을 서쪽에서 우회하는 방법과 동쪽에서 우회하는 방법을 병행하기로 한 것이다. 도나우강 남쪽의 군단기지에서 출동할 때 이미 포위 섬멸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한 셈이다. 지난해 겨울 노바에를 공격한 다키아군은, 대군이라도 얼마든지 산맥을 동쪽에서 우회하여 도나우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행군할 수 있다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행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산맥을 서쪽에서 우회하는 길은 지난해에 이미 돌파하여 숙영지와 도로가 만들어져 있는 데다 병력도 절반이 남아 있는 반면, 동쪽에서 우회하는 길은 여러 가지로 불리했다. 우선 로마군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땅이다. 게다가 거리도 세 배나 된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동쪽 우회로로 가는 병력을 기병과 젊은 정예 군단병으로 편성한 다. 이 제2군의 총지휘를 맡은 것은 마우리타니아 기병대를 이끌고 용 명을 떨친 루시우스 퀴에투스였다 트라야누스와 같은 에스파냐 태생인 리키니우스 술라가 제2인자였다면, 북아프리카 태생인 퀴에투스는 제3인자라 해도 좋았다. 트라야누스 자신은 술라와 함께 서쪽 우회로로 진격하는 제1군을 이끈다.
(29) '다키아 전쟁' 2년째를 서술하고 있는 부조는 오로지 제1군의 진격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만 중점을 둔 것 같다. 이어지는 몇 장면 은 모두 견고한 숙영지나 나무 난간까지 갖춘 다리를 건너는 로마 병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런 장면에는 모두 술라를 비롯한 참모를 거 느린 황제의 모습이 보인다. 병력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와는 달리, 트라야누스는 병사들과 함께 진군하는 황제였을 것이다.
(30)적지에서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던 병사들과 재회하여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트라야누스.
(31)황제 옆에서는 벌써 병사들이 나무를 베어 길을 내는 작업에 매달려 있다. 서쪽 우회로는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짧아서 느긋하게 진군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나우강 이북에 펼쳐져 있는 다키아지방과 도나우강 남쪽의 로마 영토를 잇는 간선도로는 제1군이 택한 이 서쪽 우회로가 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전투 결과도 나오기 전에 벌써 승리한 뒤를 생각하여 기반시설을 정비해버린다.
(32)공사 현장을 시찰하는 트라야누스를 세 명의 다71아 사절이 찾아온다. 몸에 걸친 옷은 유복한 사람의 것이지만 모자를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들은 다키아왕의 중신이 아니라 다키아의 한 지방 대표일 것이다 이들은 왕을 떠나 독자적으로 로마군에 투항하고, 트라야누스황제에게 복종을 맹세했다. 다키아족의 내부 분열은 로마가 바라는 바였다.
(33)장면이 바뀌어, 숙영지 안에서 거행된 제사 광경이 묘사된다. 토가 자락으로 머리를 덮은 제사장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의식을 주재한다. 소나 양을 제물로 바친 것은 전투가 눈앞에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34)제물을 바치고 신들의 가호를 기원한 트라야누스가 이번에는 군장 차림으로 병사들 앞에서 격려 연설을 한다. 전투를 앞두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과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는 것은 로마군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행사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에 기습을 당하여 맞아 싸우는 경우에는 느긋하게 제물을 바치고 연설을 할 여유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럴 때는 제물을 바치는 것을 뒤로 미루어도 신들이 용서해줄 거라고 로마인들은 믿고 있었다. 크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이 보여준 특색이기도 하지만, 격려 언설이 끝나자마자 당장 전쟁터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원기둥'에도 토목공사 상황이 몇 장면에 걸쳐 묘사되어 있다 공사의 주역은 방패나 창을 옆에 놓고 일하는 군단병이다 그들이 군장 차림인 것은 적이 기습해 오기라도 하면 당장에 맞아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 위에는 조금이라도 허술한 구석이 보이면 기습하려고 로마군의 동정을 살피는 다키아 병사의 모습이 보인다.
로마군은 전투 자체보다 토목공사에 종사하는 시간이 더 많은 듯한 느낌이 들고, "로마군은 곡괭이로 이긴다'는 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의 말이 생각난다 이렇게 토목공사 전문가가 되면, 20년 동안의 병역을 마치고 제대한 뒤에도 훌륭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17세부터 20년이니까, 백인대장으로 진급하지 않고 일개병사로 제대했다면 37세. 만기 제대 때 지급되는 퇴직금을 밑천으로 건설업이라도 시작하면, 대규모 건설업자가 개입하지 않는 지방 도시나 마을에서는 틀림없이 성공하지 않았을까. 현대 국가의 군대도 전문가를 양성하지만, 만기 제대까지의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복무하면서 습득한 기능을 사회생활에서 활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인 군단병의 복무기간을 20년, 속주민인 보조병의 복무기간을 25년으로 정한 것은 인적 자원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점만으로도 흥미로운 시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5)군단병들이 석재를 쌓아 성채를 짓고 있는 옆에서 군장 차림의 트라야누스가 다키아 사절을 접견하고 있다. 황제 앞에 무릎을 꿇은 다키아인은 둥근 빵떡모자에 옷차림도 단정한다 지금까지 찾아온 사절들과는 다른 것을 알았는지, 병사들도 멀리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다키아왕이 정식으로 강화 사절을 보내온 거라면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키아왕 데케발룬스는 강화 사절을 보내왔다. '원기둥' 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트라야누스도 이번에는 강화 교섭을 위해 심복인 술라와 근위대장인 리비아누스를 왕에게 파견한다. 하지만 양측의 조건이 맞지 않아서 교섭은 결렬되었다. 전쟁이 재개된다. 동쪽 우회로로 진군한 루시우스의 제2군도 목적지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36)결전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다키아군이 모든 전력을 한꺼번에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케발루스가 로마 대군과의 정면 충돌을 꺼렸기 때문이지만, 덕분에 로마는 게릴라 전법으로 나오는 다키아군을 격파하고, 보초를 세워둔 채 토목공사를 하고, 또다시 습격해오는 게릴라와 싸우고, 다시 토목공사로 돌아가는 식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지휘를 맡은 트라야누스의 군사적 재능은, 적의 의표를 찌르는 전략 전술이 장기였던 카이사르 스타일이 아니라, 넓게 쳐놓은 그물을 조금씩 끌어당기는 스타일이었다. '원기둥'의 부조도 그런 상황을 충실하게 추적하고 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실제로 참전하지 않았어도 트라야누스의 이 병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대 전쟁 당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택한 것도 이런 형태의 병법이었다. 그러나 30년 전의 유대 전쟁에서도 보았듯이, 로마군이 본격적으로 그물을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은 없다. 성채를 하나씩 함락시키고, 거기까지 뚫은 도로를 통해 운반된 식량으로 병사들은 원기 왕성하다. 반대로 다키아 병사들은 전투에서 죽고, 성채를 빼앗겨 달아날 곳도 없이 수도 쪽으로 계속 밀려날 뿐이었다. 좋든 싫든 완전히 포위 당한 상태에서 결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7)결전에는 로마군도 모든 전력을 투입했지만, 다키아군도 후방에 포진한 데케발루스의 질타와 독려를 받으며 용감하게 싸운다. 하지만 로마 쪽도 결전으로 몰고 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평원에서 벌어지는 회전으로 몰고 가지는 못했다. 로마인이 보기에 미개지인 다키아지방은 수도 바로 옆에까지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쯤에는 다키아 쪽도 숲을 개척하면서 싸우는 로마식 병법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 부조에 묘사되어 있다.
(38)하지만 그것도 결국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사르미제게투사는 아니지만, 그에 버금가는 대도시가 로마군의 수중에 들어 간 것이다. 왕의 누이까지 포로가 된다. 로마군에 붙잡힌 다키아 유력자의 수도 계속 늘어났다.
(39)그래도 여전히 토목공사를 계속하는 로마군 진영에 모자를 쓴 다키아 유력자들이 칼과 방패를 버리고 강화를 청하러 찾아·왔다. 이번에는 한눈에 유력자임을 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도 많다. 게다가 '원기◎에는 이들 뒤쪽에 다키아왕 데케발루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다키아족 융성의 주역인 데케발루스가 육체적으로도 당당한 체구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데케발루스는 승자인 트라야누스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묘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다키아왕이 강화를 청해오긴 했지만 직접교섭에 나서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도 강화교섭에 입회하지는 않았다.
로마에서는 제정으로 이행한 뒤에도 공화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전선 의 총사령관에게 군사 지휘권만이 아니라 강화 교섭에서부터 체결에 이르기까지의 전권을 부여했다. 양쪽이 조건에 합의하면 총사령관이 강화 문서에 서명하여 수도 로마로 보낸다. 공화정 시대에는 민회와 원로원, 제정 시대에는 황제와 원로원이 이 문서를 승인하면 비로소 강화가 정식으로 성립된다. 서기 102년 당시 트라야누스도 이 전통을 답습할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황제다. 원로원의 승인만 얻으면 강화는 성립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키아 대표들을 로마로 보내, 이들이 직접 원로원과 교섭하는 방법을 택했다. 트라야누스의 이 같은 방식을 원로원은 트라야누스가 원로원을 중시하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듯싶다. 다키아와의 강화라는 '공'을 원로원에 넘긴' 것이다. 트라야누스는 이것으로 다키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오래 끄는 것도 총사령관인 그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1년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제1차 다키아 전쟁은 끝났다. 강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다키아왕에게는 '로마 시민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가 주어지고, 다키아는 앞으로 로마제국의 동맹국이 된다.
(2) 데케발루스와 모든 중신의 지위는 로마가 보장한다.
(3) 다키아왕은 로마의 1개 부대가 수도 사르미제게투사 근교에 주둔하는 것을 인정한다.
(4) 다키아가 소유하고 있는 공성기 등의 병기 일체는 로마 가 몰수한다.
(5)도나우 강 북안에 있는 다키아의 성채와 요새는 모두 파괴한다.
(6) 포로는 양국이 공히 송환한다.
(7) 다키아는 앞으로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는 도나우강 이북의 부족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승리한 로마군이 수응한 것치고는 너무 온건한 조건으로 여겨지지만, '로마 시민의 친구이자 동맹자'는 실제로는 로마의 속국이라는 뜻이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로마 제국과 대등한 강화조약을 맺은 적이 있는 데케발루스가 이 상태를 견딜 수 있을지 어떨지가 의문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40) '트라야누스 원기둥'은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를 묘사하는 것으로 일단 끝난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다키아와는 정반대로 겨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로마에서 트라야누스가 주역을 맡은 개선식이 거행되었다. 49세의 개선장군에게는 다키쿠스(Dacicus)라는 존칭이 부여된다. '다키아를 제패한 자' 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서기 103년과 104년에는 로마와 다키아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가 유지된 것은 제국의 다른 방위선도 마찬가지여서, 트라야누스의 군장은 깊숙이 간수된 채 지나간다. 토가 차림의 황제는 열심히 원로원 회의에 출석하고, 다키아 전쟁 전에 법제화한 각종 정책의 시행 상황을 감독하면서, 황제의 또 다른 중대 임무인 내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나우강에서는 대공사가 시작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 공사는 다키아와 강화를 맺은 직후에 착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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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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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2 화 소생한 후 딴 인격으로 바뀐 자스비아
1954년 인도 무자파르나갈 지방의 라스르푸울이라는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당시 마을에는 천연두가 나돌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세살 반 되는 자스비아라는 아이도 이 병으로 죽었다. 아이가 죽은 시간이 너무 늦은 밤이라 그 부모는 시신 앞에서 밤을 새우고 있었는데 시간이 흘러서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들의 유해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문득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작은 유해가 희미하게 살짝 꿈틀거린 것이다. 그러고서 또 유해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차츰 꿈틀거리는 동작이 분명해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라르의아들 자스비아는 완전히 되살아났다. 이 사례를 조사한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혹시 죽지 않은 것을 잘못 알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여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분명히 자스비아는 호흡이 정지되고, 입이 열려져 있었고, 항문과 신체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확실한 것이다. '부활'한 지 몇 주일이 지나 몸이 회복되어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자스비아는 부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나는 바라문이다. 이집의 음식은 먹을 수 없다. 바라문 식으로 조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먹겠다"는 엉뚱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이나 옷을 가리킬 때에도 바라문계급만이 사용하는 고상한 말로써 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를 놀라게 한 것은 자기는 자스비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상카 소바 라므 차기이고 베디 마을에 산다. 그리로 데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 이었다. 계급과 다른 계급과는 식사 습관에서 조리법까지가 다르게 되어 있는데, 그는 차기 가(家)의 사람으로서 바라문계급이니 바라문 식으로 조리를 한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계속 음식을 먹지 않자 그의 부친은 하는 수 없어 한 동네에 사는 바라문 가에 요리를 부탁하였다. 자스비아는 결국 가족들의 강압에 의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2년 가까이 바라문 가에서 조리한 음식을 먹었다. 자스비아는 세살 반에서 예닐곱살이 될 때까지는 자라는 동안에 라므로서의 생애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곧 자기는 바라문 가문으로, 베디마을의 샹카의 아들 소바 라므이고 아내는 모르나 마을 태생이며 아들도 있다고 하였다. 집앞에는 피이 팔나무가 있고 마을에는 암거(暗渠)의 배수로가 있다고 하였으며,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도 열심히 이야기하였다. 어느 결혼식에서 베디 마을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머리에 부상을 입고 그로 인해 죽었다는 것이다. 곧 결혼식장에서 독이 든 음식을 먹은 탓에 현기증이 심해져 우차에서 떨어졌는데, 자기에게서 돈을 꾸어간 사람이 빚을 면하기 위해 자기를 죽이려 한 것이라며 그 이름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여기고 라므의 생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자스비아가 일곱살이 되던 1957년의 일이다. 샤모스크라라는 바라문계급의 여인이 5년 만에 친정이 있는 이곳 라스르푸울 마을에 다니러 왔는데, 그녀는 자스비아가 다섯살이 될 때까지 바라문 음식을 만들어주던 사람과 아는 사이였다. 거기에서 자스비아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다. 샤모는 자신이 베디 마을로 시집을 갔기 때문에 베디 마을의 이야기를 한다는 아이에 흥미를 가진 것이다. 샤모가 방문했을 때 자스비아는 집에 있었다. 문으로 들어오는 샤모를 보자 자스비아는 "큰어머니!"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샤모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는 베디 마을의 샹카 차기의 형이었다. 그러므로 자스비아는, 적어도 그의 말에 의하면, 차기의 아들 라므였던 것이니 그의 말은 맞는 것이다. 얼마 후 베디 마을로 돌아온 샤모는 자스비아라는 기이한 아이가 라스르푸울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남편인 닷트 스크라와 라므의 부친 샹카 차기에게 전했다.그들의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라므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바 라므는 결혼식장에서 돌아오는 도중 우차에서 떨어져 입은 상처로 죽었다. 그것은 1954년 5월 22일이었다. 그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다. 자스 비아는 라므로서의 사망 날짜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밖의 것은 정확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순한 사고사(事故死)로 믿고 있었던 그 죽음을 독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이리하여 샹카가 가족을 데리고 며칠 뒤에 라스르푸울에 옴으로써 베디 마을의 차기가(家)와 라스르푸울의 라르 가(家) 사이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처음 샹카네가 라스르푸울에 와서 자스비아의 집 가까이에 왔을 때 자스비아는 집앞에서 놀고 있었다. 문득 길 저쪽을 바라보던 그는 표정이 싹 변하더니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갔다.
"뭘 그렇게 허둥지둥해?"
그의 형이 물었다.
"응, 큰일났어. 나의 아버지가 왔어, 베디 마을에서 온 거야."
자스비아는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들떠서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어머니에게 급히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니까 얼른 바라문의 식사를 준비해 주어요!"
이때 샹카와 함께 라스르푸울을 방문한 이는 라므의 동생과 숙부였는데 자스비아는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또 전생의 가족의 이름을 하나하나 대더니,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바르슈와르다"고 했다. 아들이있었다는 이미 수년 전부터 말했지만 이름을 말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뒤에 차기 가(家)에서는 여러가지로 노력하여 자스비아를 베디마을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자스비아의 부모는 그가 차기 가의 사람들에게 보인 친근감을 보고는 아들을 차기가에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그의 베디행을 어렵게 승락하였다. 자스비아는 여러 날 동안 차기 가에 머물면서 그 가족들을 분간해보였다. 농장으로 안내되어서는 구획이 많이 나있는 밭들 속에서 정확하게 차기 가의 것을 지적했다. 그리고 아들인 바르슈와르에 대해서는 특히 강렬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한 침대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바르슈와르가 학교에 가고 안보이자 아 들이 없어진 데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1957년의 첫방문 이후로 자스비아는 베디 마을에 가기를 퍽 좋아하였고 다시라르 가(家)에서 데리러 오면 언제나 울면서 반항하였다. 자스비아는 그가 세살 반이었을 때, 한 때 죽어 있던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라므)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는 동안에 영계(靈界)에서 한 성자(聖者)를 만났는데, 그 성자가 나에게 라르의 아들 자스비아의 육체 속에 숨으라고 말했다."
제3 화 전생의 직업에 집착하는 피아모드
이야기의 주인공인 피아모드 샤르마는 1944년 10월 11일 모라다밧드에서 남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작은 도시인 비사우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라르 샤르마는 대학교수이다. 그가 두살 반쯤 되었을 때 어느날 부엌에 들어오더니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혀로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자기 음식은 만들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다. 왜냐고 어머니가 물으니까 모라다밧드에 부인이 있어서 그녀가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는것이었다. 이때부터 점차로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뒤 그가 세살에서 다섯살 사이에 말한 것을,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피아모드는 전생에 모한 브라더즈 회사의 직원으로서 모라다밧드에서 비스켓과 소다수를 파는 큰 상점을 갖고 있었는데, 아내와 아들 넷 그리고 딸 하나가 있었으며, 또 모한 브라더즈는 더욱 번창하고 있어서생활도 호화롭고 좋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금의 가정이 너무 검소한데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피아모드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마당에서 흙을 반죽해서 과자처럼 만들어 놓거나 벽돌을 쌓아서 집처럼 만드는 장난밖에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흙으로 만든 과자는 비스켓이고 벽돌집은 상점이었다. 때로는 흙으로 만든 비스켓과 물을 가져와서 부모에게 "자 어서 잡수셔요"라고 할 때도 있었다. 이 때의 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차(茶)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부모를 곤란하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목욕과 카아드(요구르트와 비슷한 것으로 이유기에 먹는 음식)를아 주 싫어한다는 것이다. 목욕뿐만 아니라 물에 들어가는 것도 질색하며 싫어하였다. 강제로 목욕을 시키려고 하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카아드는 더운 지방인 인도사람의 중요한 영양원이어서 이것을 싫어하는 인도인은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카아드 거부증은 단순히 먹기 싫다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병적인 공포라고 말할 수있었다. 또 그는 가끔씩 영어 단어를 입에 올리기도 하였다. 샤르마 교수의 가정에서는 힌두어를 쓸 뿐 영어를 쓰는 일은 없었다. 특히 그가 자주 쓰는 말은 바스 터므[목욕조], 베이커리[제과점], 타운홀[공회당]- 그는 '도운 홀'이라고 발음했다. - 의 세 가지 말이었다. 피아모드가 네살 반이 되던 1949년 초여름에 그의 아버지는 동료인 그라셔드 교수에게 무심코 아들의 이상한 언행을 이야기했었다. 그 얼마 뒤에 이 교수댁에 그의 친척이 다니러 왔고, 교수는 이 친척에게 피아모드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이 사람이 피아모드가 전생에 살았다는 모라다밧드에 살고 있다는 점이 교수의 입을 가볍게 했는지도모른다. 교수의 친척은 우연히도 모한 브라더즈라고 불리는 모라다밧드의 메헤라 가(家)와도 아는 사이였다. 그는 모라다밧드로 돌아오자 곧 메헤라 가를 찾아가서 비사우리에서 들은 이야기를 주인인 모한 메헤라에게 들려주었다. 그 아이의 이야기는 모한의 남동생인 파아마년드의 경우라면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5월 9일 복막염으로 죽었는데, 평소에 좋아하던 카아드를 과식한 탓으로 만성 위장병이 악화되어서, 그 치료를 위하여 입욕요법(入浴療法)을 하던 중에죽은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피아모드가 자기는 "카아드의 과식으로 병이 되었고, 그리고 욕조 안에서 죽었다"고 하던 말과 꼭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피아모드가 자신도 결코 카아드를 먹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에게도 "몸에 해로우니 먹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라든지, 목욕을 하지 않으려고 병적인 공포를 보인것 등도 전인격인 파아마넌드의 죽음의 상황과 견주어 보면 잘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해 여름 메헤라 가에서는 파아마넌드의 사촌형이 비사우리의 샤르마 가(家)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마침 피아모드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후 곧 피아모드는 그의 아버지와 사촌형과 함께 모라다밧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라다밧드 역에 내렸을 때 피아모드는 마중나온 그의 사촌형을 알아보고서 인사하였다.
"아, 저카라므 챤드 형, 난 파아마넌드야!" 그는 처음으로 자기의 전생 이름이 파아마넌드라고 하였다. 이들은 곧 마차를 타고 1Km쯤 떨어진 모한 브라더즈의 비스켓 상점으로 갔다. 피아모드는 그 사이의 꾸불꾸불한 길을 잘 지시하였으며, 상점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공회당을 지날때에 "도운 홀"이라고 하면서 가게에 가까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상점 안으로 안내된 그는 두 가지 일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根다. 하나는 소다수를 만드는 복잡한 기계장치를 정확히 설명하였는데, 그를 시험할 목적으로 일부러 연결호스를 모두 풀어두었던 것이다. 또 그는 상점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주인이 앉도록 해 둔 '가데이'라는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그의 사망후에 상점을 개조하면서 없앤 것이다. 이어서 그는 메헤라 가의 전생의 가족들을 알아보았고 각자의 이름도 말하였다. 그는 방가운데 앉아서 전생의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매우 즐거운 듯이 보였다. 스무살이 넘는 아들들이 그를 "피아모드"라고 부르면 "나를 피아모드란 이름으로 부르는 게 아니야,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가끔씩 모라다밧드에 가서 메헤라 가의 가족들과 만날 때에는 언제나 파아마넌드에 적합하고 어울리게 행동하였다. 그가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까지도 전생의 딸이 자주 찾아오지 않으면 슬퍼하였다. 어린 시절의 피아모드는 지능이 우수한 아이로 여겨졌지만 차츰 다른 동급생보다 뒤떨어지게 되었다. 진학도 뜻대로 되지 못했고 스물다섯살이 되던 1969년에는 주(州)의 임시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상점 경영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나 당신의 인도에서는 시대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4 화 전생의 어머니에게 환생을 예언한 프라카슈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스라로 통하는 연변에는 코시카란과 쳇다라는 두 도시가 겨우 10km 정도의 간격으로 차례로 나타난다. 인구 구천의 작은 도시 쳇다에서 1951년 8월 프라카슈는 태어났다. 그는 네살반쯤 되어서부터 조금씩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코시카란 사람이고 이름은 니르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강경하게 부모를 졸라대는 것이었다. 한밤중에 밖으로 뛰쳐나가서 거리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도 코시카란에 가고 싶다는 표현이었다. 그가 너무도 강경하게 졸라대니까 어머니는 시동생 다르에게 그를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보라고 했다. 한번 데리고 가주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르는 푸라카슈를 데리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이때 잘못해서 코시카란의 반대 방향인 마스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러자 프라카슈는 삼촌의 잘못을 곧 알아채고 울면서 길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서 코시카란으로 갔다. 그날 프라카슈가 말한, 코시카란의 아버지의 상점은 '아버지'가 부재중이어서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얼마 뒤에 프라카슈가 말한 그 상점의 주인인 보라나스의 귀에 자신을 찾아온 쳇다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들어갔다. 프라카슈는 이전보다 더 강경하게 자기를 코시카란으로 데려다 달라고 우기며 또 니르말로서의 생애에 대하여도 상세하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이 무렵에 말한 것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코시카란의 사람으로 이름은 니르말이다. 아버지 이름은 보라나스이고 상점을 네 개 갖고 있다. 곡물가게, 옷가게, 잡화점 등이다. 그리고 누이의 이름은 타라다."
그리고 그밖에도 몇 사람의 이름을 말하였다. 프라카슈의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자신을 니르말이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고 프라카슈라고 부르면 대답을 안 하는 때도 가끔 있었다. 또 그는 전생의 집은 좋은 벽돌집이었는데 지금 집은 흙벽집이라 옹색하다고도 했다. 또 지금의 어머니는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고도 하였다. 프라카슈는 긴 못을 하나갖고 있었는데, 코시카란에 있는 자기 금고의 열쇠라는 것이었다. 다섯살이 되면서부터 그런 전생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더욱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되어갔지만, 아버지의 억압이 심했기 때문에, 실제로 눈에 띄는 행동은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1956년부터 5년 동안은 평화로운 상태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1961년 초여름이 되었을 때였다. 보라나스는 상업상의 볼일로 딸 메모를 데리고 쳇타 시에 왔다가 용무를 끝내고 코시카란으로 가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이들 쪽을 향해 오는 한 소년이 있었다. 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소년은 잠시 후 그들 곁에 다가와 보라나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 난 니르말이예요. 아버지는 코시카란에서 샤쓰를 팔고 있는…."
보라나스의 표정이 싹 변했다. 분명히 그의 잡화점에서는 샤쓰를 팔고 있다. 그러나 그가 표정이 변한 것은 좀더 이상하고 기이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5년 전인 1956년에 쳇다에서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왔더라는 이야기를 상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는 10년 전의 이상한 광경을 생각해 내고 있었다. 1950년 4월 보라나스의 아들 니르말은 열살 때 천연두에 걸려서 죽었는데, 죽기 전에 니르말은 헛소리를 하는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다. 당신은 쟈트계급의 여자다.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으로 마스라와 같은 방향에 있는 쳇다 마을 쪽을 가리켰다. 니르말은 물론 쳇다라고 도시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히 쳇다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서 몇 시간 뒤에 그는 죽었다. 지금 프라카슈가 '코시카란의 아버지'라고 했을 때에 보라나스는 바로 그 광경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는 그 광경을 마음속에 떠올리면서 곁에 있는 딸 메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너의 오빠다." 소년은 메모의 손을 잡았다. "비로마, 내 여동생!" 이라고 하며 프라카슈는 메모를 향해 니르말의 누이 타라와 형 자레이슈의 일도 물었다. 그러나 지금 프라카슈의 말 중에서 메모의 이름만은 정확하지 않다. 비로마는 실은 니르말의 또 다른 여동생의 이름이었다. 보라나스는 프라카슈와의 이 우연한 만남을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여러 날 뒤에 보라나스 제인 가(家)의 사람들이 바아슈나이 가(家)를 찾아왔다. 제인 가에서온 세 사람이 바아슈나이가에 도착하자 입구로 달려나온 프라카슈는 "아아, 타라 누님" 하면서 처음 보는 젊은 여성에게 달라붙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들이 응접실로 안내되자 프라카슈는 타라의 무릎에 올라앉아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하며 니르말의 어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사람은 내 어머니다." 그리고 열 대여섯살쯤 된 한 소년에게 말했다. "너는 내 동생데베드라!" 사실 찾아온 세 사람은 니르말의 모친과 누이와 동생이었던 것이다. 프라카슈는 무척이나 기뻐하며 들떠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코시카란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며 졸라댔다. 결국에는 우는 프라카슈를 달래기 위해 할 수 없이 코시카란에 가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프라카슈는 그의 아버지 브리지랄 등과 함께 코시카란으로 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보라나스의 집까지는 약 1Km의 거리로 복잡하고 옆골목이 많은 길이지만 프라카슈는 일행의 앞에 서서 당당히 보라나스의 집까지 도착하였다. 이리하여 전생의 가족과 이웃 사람들을 만난 코시카란은 여러가지의 전생에 대한 지식을 나타내 보였다. 그 때까지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그대로 사실임이 판명됨은 물론이고 그밖에도 그의 전생 지식은 정확했다. 니르말의 생존중에는 아직 태어 나지 않았던 여동생 메모의 이름을 모르고 그 위의 여동생인 비르마와 혼동해서 이름을 부른 것이나 제인 가의 개조한 대문 앞에 머물러 서서 망설였던 것은 모두 니르말 생존 중의 지식을 그가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지금은 가게를 하고 있지 않는 이웃사람들의 이름을 부르 면서 알아 보았고 그들의 가게에 자주 물건을 사러 갔다고도 말했다. 또 그는 니르말이 죽을 때 있었던 방에 와서는 그가 죽은 방이라고 했고, 금고가 있는 방에 와서는 그 금고 속에 있는 니르말의 서랍을 지적했다. 금고 안에는 여러 개의 서랍이 있어서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서랍을 가지고 있었고 저마다 열쇠도 가지고 있었다. 프라카슈가 어렸을 때 말한 못은 이 금고 서랍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 뒤 프라카슈는 스무살이 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세일즈맨으로 일하였다. 이 때에도 한달에 한 두번은 코시코란에 다니고 있었다. 이전에 기억했던 것을 아직까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제5화 목에 칼자국 흉터를 가진 샹카
라뷔 샹카는 1951년 7월 카나우지 시(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테어나면서부터 목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는데 마치 칼로 입은 큰 상처가 아문 것 같아보였다. 이 아이도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 세살 때부터 자기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이발사 제게스와르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는부모에게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할때는 언제나 "전생에 그 장난감을 갖고 있었어. 그러니 그걸 갖고싶다"고 하면서 사 달라고 졸랐다. 그가 전생에 가지고 있었다는 장난감은 용수철이 달린 공, 크리슈나왕(王)의 장난감 상(像), 목제 코끼리, 장난감 권총 등이었다. 프라셔드의 아들이었던 그는 죽을 때의 상황에 대해 살해되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전생에 그는 목이 잘려 살해된 뒤에 매장되었다. 살해되기 전에 구우바스를 먹고 있었으며 강가로 끌려가서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살인범의이름까지 말했다. 목 주위에 있는 모반(母斑)은 전생에 목이 잘리울 때 생긴 상처 자국이라고 말했다. 샹카가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지 1년이 지난 1955년 초여름, 그의 나이 네살이 되기 조금 전에, 프라셔드가 샹카가 지금 살고 있는 구프타가(家)를 찾아왔다. 샹카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샹카의 아버지 구프타는 샹카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프라셔드의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래서 프라셔드는 얼마 후 샹카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겨우 샹카와 만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1955년 7월 30일의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오다 말고 프라셔드 씨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멈춰 서더니, 잠시 후 그에게 다가와서 무릎에 앉으며 말했다. "아버지, 난 치팟테이의 학교에서 책을 잘 읽었지. 내 나무접시는 찬장 속에 들어있고…." 샹카는 첫 대면인 프라셔드씨를 자기의 아버지로 알아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치팟테이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것, 나무접시가 찬장 안에 있다는 것 등의 새로운 전생 지식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프라셔드 씨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했다.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프라셔드의 죽은 아들믄 나의 생애와 부합되는 것이었다. 믄나의 살해사건은 1951년 1월 19일 샹카가 태어나기 6개월전의 일이었다. 믄나의 시체는 잘려진 머리와 함께 옷만 발견되었다. 믄나는 밖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살해된 것으로 보여졌고, 두 사람의 용의자가 나타났지만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들은 근방에 사는 사람으로 한 사람은 프라셔드의 친척인 이발사이고, 또 한 사람은 세탁부였다. 샹카가 전생기억에서 말한 살인범도 이 두 사람이었다. 그라셔드씨가 샹카를 만나서 직접 들은 구체적 살해 상황은 프라셔드를 만족하게 했다. 그 뒤에 그는 처음의 용의자에 대한 재 수사를 청구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샹카는 프라셔드와 만난 뒤에 어머니를 따라서 사원의 재에 갔다가 거기에서 범인의 한 사람인 세탁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샹카는 즉시에 그를 알아보면서 공포를 나타내었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로 구프타는 샹카에 대해 더욱 엄중해졌으며, 나중에는 샹카를 집에 두지 않고 다른 먼 곳에 맡겨버렸다. 집에 두면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전생기억은 살인사건을 포함하고 있으니만큼 실제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샹카는 한때는 범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지만 성장하면서 차츰 그런 감정이 엷어졌고 1969년 이후로는 범인들에 대한 감정이 모두 없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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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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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부(秋聲賦) - 구양수(歐陽修) / 김학주 옮김
구양자(歐陽子)가 밤에 책을 읽고 있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찟 놀라 귀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바스락바스락 낙엽지고 쓸쓸한 바람부는 소리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0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또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듯했다. 내가 동자(童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동자가 말했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色)은 암담(暗淡)하여 안개는 날아가고 구름은 걷힌다. 가을의 모양은 청명(淸明)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난다. 가을의 기운은 살이 저미도록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파고 들며, 가을의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한 것이다. 풍성한 풀들은 푸르러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볼 만하더니,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그것들이 꺾여지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가을은 형관(刑官)이요, 때로 치면 음(陰)의 때요, 전쟁의 상(象)이요. 오행(五行)의 금(金)에 속한다. 이는 천지간의 정의로운 기운이라 하겠으니, 항상 냉엄하게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 맺게 한다.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商聲)으로, 서방(西方)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夷則)으로 칠월(七月)의 음률에 해당한다. 상(商)은 상(傷)의 뜻이다.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傷)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육(戮)의 뜻이다.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니 마땅히 죽이게 되는 것이다.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마음 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게 되어서는, 마땅히 홍안이 어느 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 버리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되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금석(金石) 같은 바탕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려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죽이고 해하고 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하는가?“
동자는 아무 대답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우는 소리만 찌륵찌륵 들리는데,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고문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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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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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7장 첫 로마 사절 시기
마키아벨리가 내내 로마냐 사절의 임무에 매달리다가 돌아온 이후에도, 발렌티노와의 협상은 여전히 서기장으로서 그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임자 역시 그가 실패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협상이 순조로울 수 없었던 데에는, 피렌체인의 차가운 기질뿐 아니라 교황과 프랑스 왕 사이의 복잡다단한 정치 게임과 나폴리 왕국 내에서 에스퍄냐의 프랑스 간에 벌어지고 있던 전쟁의 불확실한 행로 등의 이유가 있었다. 교황은 왕과의 동맹으로 별 이익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야망이 와에 의해 여러번 좌절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참에 프랑스 군의 위세가 하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바로 지금이 자신의 군세와 계획을 에스파냐 쪽으로 몰아줄 때라고 판단하였다. 또 왕은 왕대로 이러저러한 점들을 예상하면서 벤티볼리오와 피렌체 공화국, 루카와 시에나를 움직여 교황과 그의 똑똑한 아들의 힘을 견제할 새로운 동맹을 내심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보르자 가의 분노와 치욕감은 아랑곳없이 시에나에다 앞서 축출되었던 페티루치 가를 북귀시켰다.
그 시간, 피렌체는 발렌티노로부터 여전히 위협을 느낀 데다 피사전쟁을 재개할 욕심을 군대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먼저 돈 문제를 고려치 않을 수 없었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려 해도, 바로 그 세금을 낼 사람들이 투표할 대평의회에서 그렇게 하기란언제나 곤란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곤랄로니에레가 내홍는 법단들은 많았지난, 이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하자 모두 부결되고 말았다. 결국 통과된 것이라고는, 만일 교황이 허락한다면 성직자들에게도 데치마 decima(10분의 1세 - 옮긴이)를 부과한다는 안뿐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재정 조달을 위한 연설 Parole sopua la provvissione del denaio)을 쓴 (말하지 않고 (글 제목 제목 속의 (parole)는 글이 아니라 말을 뜻하기 때문에 이를 장난조로 슬쩍 건드린 것 - 옮긴이)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글의 목적은 법안에 유리한 쪽으로 말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것은 피렌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자유를 방어어하고 스스로의 군대로 무장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짤막하면서도 힘 있는 문체로 씌어진 연설이었다. (항상 다름 사람의 칼에 의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적이 침입해 올 때 언제나 허리에 찰 수 잇도록 칼은 몸 가까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초기 작품들로부터 그의 날갯짓이 더욱 힘차게 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월 중순, 교회 재산에 부과하는 데치마 문제도 그렇고 다른 문제도 잇어서 교황과의 협약 건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즈음 복권된 판돌포 페트루치에게 의심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해 1503년 4얼 25일 마키아벨리는 협약 체결을 둘러싼 상황을 그에게 설명해 준다는 목적을 가지고 시에나로 파견되었다. 이는 매우 짧고도 간단한 임무였다. 하지만 그 협약은 지켜지지도 않았을 분 아니라 피렌체가 그것을 완전히 파기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임무는 사실 아무 소용도 없었던 셈이다. 피렌체가 얻은 것이라고는 소데리니 주교의 추기경 모자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주어진 이유도, 그의 형인 곤팔로니에레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는지, 주교가 대사로 가 잇던 프랑스에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또는 각각 1다카토 금화의 가치 정도는 나가는 수많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는지 알쏭달쏭한 상황이었다.
피렌체와 교황간의 협상이 깨어진 주요한 이유는 교황이 협약 문구에서 프랑스 왕에 유리한 듯한 부분을 빼자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군이 나폴리 왕국에서 패배와 퇴각을 거듭할수록, 노회한 교황은 승승장구하는 에스파냐에 더욱 가까이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교활한 머리 때문이었는데, 그는 좀더 확실한 결과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평화 협상은 처음에 두 왕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콘살보 Consalvo(Gonzalo Fernandez de cordoba를 가리킴. 이탈리아 전쟁 당시 에스파냐의 장군. (대장군 el Gran Capitan)이란 별명으로 불렸음 - 옮긴이)가 평화냐 아니냐를 택일하라며 프아스 군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서 다시 무찌르자, 교황은 그들을 구하러ㅡ올 프랑스 원군의 존재로 인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프랑스와, 그리고 발렌티노는 에스파냐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둘 중 아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결코 입에 담는 법이 없고, 아버지는 자신이 말한 바를 그대로 행한 적이 없었다는 속담 비슷한 말이 한창 떠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들의 야망은 이 원대하고도 은밀한 게획에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1503년 8월 18일, 삼일열을 3일간 앓고 난 뒤, 교황은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불어 건강 면에서 교황과 비슷한 상태였던 발렌티노 역시 같은 날 같은 병으로 자리에 눕는 처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보르자 가계의 별은 그 무덥던 로마의 저녁에 갑자기 스러져가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발렌티노는 그가 후에 마키아벨리에게 말했듯이, 오랫동안 아버지 사후를 준비하고 있엇다. 그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경우를 예상하였지만, 정작 자기 자신이 같은 순간에 삶보다 죽음에 가까운 상태에 있게 될 줄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그의 국가들은 마치 종이 성처럼 갑작스럽게 무너져내렸고, 페루자, 치타 디 카스텔로, 우르비노, 카메리노, 시네갈리에서는 옛 통치자들이 속속 복권된 반면, 자신의 군세는 본인 주변의 군대로 축소되엇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콜론나 가와 화해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에 반대하는 오르시니 가와 연합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에게로 향한 증오와 재난과 불운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하였다. 줄어든 입지에도 불구하고 교황 선출회의 때문에 프랑스와 에스파냐 모두로부터 꼬드김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보다는 또다시 프랑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실 프랑스 군은 그 당시 교황 선출에 압력을 행사할 요량으로 나폴리 왕국으로 진군하는 기에 로마 성벽 부군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그 위압적인 군세로 훨씬 더 쉽게 그를 방어해 줄 수도 있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루앙 추기경과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다시 한번 왕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루앙은 이 협약을 맺으면서 이제 발렌티노 휘하의 추기경들이 가진 표를 모으면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무력으로 자신이 원하는 인물을 교황으로 앉히려는 애초의 희망이 무산되자, 발렌티노는 투표를 통한 방법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파와 에스파냐파의 두 적대적인 무리로 나뉘어 서로를 제압하려고 필사적이었던 추기경들은 결국 피콜로미니를 선출하는 것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는 그의 노령과 유약함을 감안할 때, 양파간의 휴전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피오 3세는 겨우 26일 후 운명하였다. 상황은 다시 한번 원점으로 되돌아간 셈이었다. 그 소식이 피렌체에 전해진 것은 10월 20일이엇다. 그리고21일,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마치마벨래를 로마에 파견해 두기로 결정되었다. 사실 8월 28일 안렉산드로 6세가 죽었를 때 이미 같은 결정이 내려진 바 잇었다. 그때는 니콜로가 대규모의 프랑스 군을 거느리고 피비차노로부터 시에나 쪽으로 오고 있던 상드리쿠르를 접견한 다음, 뒤이어 교황 선출 회의에 참가하기 위하여 볼테라로부터 로마로 향하던 소데리니 추기경을 만나 꽤 오래 동행하면서 한여름 태양의 이글걸리는 열리 속으로 허덕허덕 막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서기장의 출발이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어 버렸지난, 이 새 교황까지도 운명한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는 10월 24일 아침 길을 떠났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에 우호적인 유력 추기경들에게 줄 신임장을 가지고 갔다. 그는 그들에게 새 교황은 그리스도교권과 이탈리아 모두의 요구에[ 부합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말을 전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지시외에도 그는 공화국의 이름을 빌려 프랑스 왕이 내린 잠파올로 발리오니의 용병 계약 건을 지정된 조건으로 체결하는 특수한 임무도 하달받고 있었다. 이 건은 비롯한 다른 모든 문제에서 사절은 누구보다도 먼저 소데리니 추기경과 의논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에는 또 하나의 피렌체인 추기경 조반니 데 메디치가 와 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그를 만나지 않은 것으로 보이도록 암묵적으로 양해되어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27일 로마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이 인물과 그 유서 깊은 도시의 유적들이 조우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 그의 글 속에는 이에 대해 슬쩍 언급하거나 생각 해 본 듯한 날조차도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리비우스의 책을 뒤지고 다녔던 것과는 달리(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 논고)를 쓴 사실을 비유한 말 - 옮긴이), 로마의 유적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정도 외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설사 그가 그렇게 했다 해도, 그것이 적어도 사절로 막 왔을 무렵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한듯하다. 무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잇던 당시의 로마를 어슬렁거리는 것은 결코 즐거운 일도 안전한 행동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곳은 병사보다는 시골 농부들과 좀도둑들, 그리고 새로 힘을 얻은 로마 소제후들의 졸개들로 들끓고 있었다. 프라티 가문과 보르기 가문은 발렌티노의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소요와 의심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마키아벨리가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이었으며, 또 첫 사절 보고서에서 정무위원회에 알린 모습이었다. 그는 소데니리 추기경과 읜논 한 후, 잠파올로 발리오니와의 계약 건에 대해 편지를 올렸으며, 아울러 교황 선출 회의의 추이를 예상하는 편지도 썼다. 우리는 여기서 발렌티노의 그림자가 여전히 그에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발렌티노는 성 안아 앉아 그 어느때보다 더 위대한 일을 이루려는 희망에 부풀어 있다.) 하지만 그는 곧 발렌티노의 희망이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달려 잇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타인에게는 해를 입히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해준 적이 없었던 그가 말이다.(발렌티노 공이 교황이 되고자하는 사람들로부터 큰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선호하는 에스파냐의 추기경들은 물론이고, 그 외의 많은 추기경들이 매일 성으로 몰려와서 그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잇는 상황입니다. 그리하여 생각건대, 누가 교황이 되든지 그에게 빚을 지는 셈이어서, 그는 새 교황이 자신에게 우호적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으로 산 피에트로 인 빈쿨라, 즉 추기경 줄리아노 델라로베레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그에 대한 이러한 선호도는 누가 교황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마키아벨리가 두 번째 보고서를 올렸던 10월 28이, 은행들은 줄리아노가 교황이 되는 데에 32퍼센트의 배당금을 걸었으며, 30일에는 그 비율이 60퍼센트로 올랐다. 추기경들이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가기 직전인 31일, 그의 뒤에는 발렌티노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교황 선출이 무산된 루앙이 잇다는 소문이 돌자, 그의 주가는 즉시 9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발렌티노 같은 인물이 단지 약속만을 믿고서, 10년동안 보르자의 이름을 증오하며 망명 생활을 해온 사람에게 자신의 표를 몰아주려고 했다면, 그의 머리는 병마와 불운으로 인해 어떻게 된 것이 분명하다. 하기야 사태가 궁해지면 어떠한 쪽으로 흐를지 모르는 것이 인간사인 법이니, 우리의 사절께서 썼듯이 추기경들은 더 부자가 되고 싶었고 발렌티노는 회생을 원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하여, 시스토 4세의 그 성마른 조카는 이미 교황이 다 된 채 교황 선출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바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당시 떠돌던 소문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그날 밤 피렌체로 보낸 편지에서 교황 선출의 결과가 공표되기도 전에 새 교황의 이름뿐 아니라 줄리오 2세라는 교황명까지도 거명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는 그가 그러리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못할 만큼 매우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이제는 확실해진 이 엄숙한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오는 아침 산 피에트로 인 빈쿨라 추기경이 새로운 교황위에 오르게 되었음을 감히 신의 이름으로 위원님들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신께서 그를 그리스도교권 전체에 유익한 목자로 만드시기를.) 그뿐이었다. 하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은 자신의 편지에 날개를 달아야 할 중요한 시점 시점에서 그다지 운이 좋지 않았다. 돈에 인색한 공화국은 그가 특별 전령을 보낼 수 잇도록 해주지 않음으로써 그의 날개를 잘라버린 셈이었다. 세니갈리아 사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새 교황의 출건 역시 사절이 보낸 편지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미 다른 경로들을 통해 피렌체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그 소식을 제일 먼저 안 사람들 중 하니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앞에서 잠시 사라졌던 마키아벨리의 야심에 찬 미소는 같은 날인 11월 초하루, 그가 10인위원회에 보낸 네 통의 편지 중 마지막 편지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는 여기서 교황 선출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적이고도 극히 세속적인 세세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와 약속을 한 사람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과연 그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교황이므로, 그가 누구와 진실된 약속을 했는지는 곧 밝혀질 것입니다.) 3일 후, 마키아벨리는 줄리오2세가 (놀랍도록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를 자세히 서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가 이러한 지지를 받은 이유는 자신이 요청받은 사항이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데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약속들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알려지기로 그가 발렌티노에게 한 약속 중에는 로마냐 전체를 그에게 되돌려주겠다는 말도 들어 있었다. 당시 그곳은 옛 통치자들과 베네치아의 야욕 사이에서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으나, 그래도 한때는 다른 누구보다도 그에게 충성했던 지역이었다. 이와 더불어 교황은 발렌티노에게 그의 개인적 안전을 위하여 오스티아 같은 조그만 선심과 함께 교회의 곤팔로니에레 직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교황이 자신의 묵은 원한과 쓰라린 망명 시절을 잊었을 리 없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간파한 이 피렌체인은 조소 띤 어조로 다음과 같이 결론 지었다. (발렌티노 공은 스스로의 기백 있는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제 무덤을 파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말보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신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황은 즉위가 공표된 직후, 우리의 사절은 이번 선출이 피렌체에는 매우 잘된 것이라는 점을 10인위원회에 서둘러 주지시켰다. 그 이유는 당시 피렌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로마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발렌티노의 몰락 이후 오히려 더 달갑지 않고 더 위험스러운 세력들과 이웃하게 되었던 것이다. 공작의 힘에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자 로마냐는 분열되어 한쪽은 교회에 충성하는 편으로 복귀하고 다른 쪽은 이전의 통치자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상태가 되었다. 예컨데, 오르델라피 가는 피렌체의 도움으로 포를리에 다시 입성하였다. 파엔차 역시 피렌체인들과의 묵계 아래 결국 만프레디 가의 한 사생아를 청해 왔는데, 이곳은 원래 다른 어떤 도시들보다도 더 오래 발렌티노에 복속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미 리미니를 점령했고 때로는 힘으로 때로는 힘을 앞세워 협상으로 수많은 성을 빼앗았던 베네치아는 마침내 파엔차마저도 공격 끝에 함락시켜 버렸다. 발렌티노는 한 단명한 교황의 그늘에서 마치 독 버섯처럼 돋아나온 한 명의 신군주에 지나지 않았지만, 베네치아는 그곳의 석호만큼이나 유서 깊은 강력하고도 부유한 공화국으로서, 피렌체와 능히 맞설 만한 적국이었다. 이 두 도시국가 간의 관계는 항상 질시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야말로 서로가 화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10인위원회는 줄리오 2세의 등극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교황에게 베네치아의 이러한 침탈 행위를 항의토록 하라는 편지를 홍수처럼 내려보냈다.
11월 5일, 마키아벨리는 관례적인 예를 치르기 위해 새로운 신임장을 가지고 교황의 발치에 섰다. 그리고 다음날 그는 다시 교황을 찾아 그들의 항의 사항을 고하였다. 그는 유력 추기경들에겍도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기억하셔야 할 것은 이 무제가 토스카나의 자유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자유에 관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만일 베네치아인들의 세력이 더 커진다면 교황은 한 낱 그들의 예배당 신부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권리가 존중되는 것만큼 그들의 이러한 행위에 대한 제재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 발렌티노의 마음을 들쑤셔놓으려 했으나, 발렌티노는 피렌체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적이었다고 말하면서 심한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확실히 그것은 사실이었다. 발렌티노는 스스로 베네치아와 손을 잡음으로써 이에 복수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리고는 악의와 격분에 찬 말을 하며 계속 이 문제에 관하여 길게 붙잡고 늘어졌다. 우리의 사절은 똑같은 어조로 그의 말을 뒤받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그의 기분을 누그러뜨릴 몇 마디 말을 한 뒤, 정말 일각이 여삼추 같았던 그와의 이야기를 서둘러 끝내 버렸다. 로마냐 사절의 시간은 이렇게 지나갔고, 더불어 마키아벨리와 발렌티노 사이의 마키아벨리주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근사했던 대화들도 함께 흘러갔다.
그러나 5일 뒤, 발렌티노는 사람을 보내 마키아벨리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정화하게 늘어놓으면서, 교황이 그들 돕고 있으며 피렌체도 마찬가지로 이에 동참하여 공동의 적인 베네치아에 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제 다른 방도가 없는 그로서는 말로써나마 초지일관 스스로의 뜻을 옹호하고 있는 셈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가 발렌티노 자신의 입으로 우리가 앞서 말한 바 있던 그의 몰각에 대한 연유를 들게 된 것도 아마 바로 그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법의 힘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를 이제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치 주검을 관찰하는 해부학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제 주구도 그를 되살려낼 수는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이 발렌티노와의 약속을 지키려 하지 않고 있으며 또 그러한 심중을 너무 일찍 그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사태를 관망중임을 간파하고는, 발렌티노의 많은 헛된 희망을 내심 조소하였다. 공작은 여전히 교회의 곤팔로니에레가 될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왕을 믿었고, 그를 주변에서 쫓아버리기 위해 그에게 로마냐로 가라고 닦달하는 교황을 믿었다. 하지만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한 약속을 저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물론 이점에서는 누구도 그보다 더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발 밑의 땅이 서서히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망연자실했으나 어떻게 해야 하지를 모르고 있었다.
발렌티노는 피렌체인들이 자신에 대한 안전 통행권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이 지금 베네치아로부터 받는 위협보다는 그에 대한오 랜 원한의 감정이 더 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악명 높은 부하 돈 미켈레에게 군대를 주어 토스카나로 보낸 뒤, 스스로는 배를 타기 위해 오스티아로 갔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피렌체가 안전 통행의 보장을 거절한 데 대해 격렬히 비난하면서, 자신이 피사 및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피렌체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레에게 그의 위협은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졌으므로 별로 동요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단 한번도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그가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을 하겠다고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닌가 피렌체의 서기장은 사태를 능란한 솜씨로 처리하였고, 약간의 고무적인 말도 해주었다. 어차피 그와 그의 군대의 운명은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뒤 그는 10인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군대가 토스카나 쪽으로 가고 있으며, 그들을 저지하든 통과시키든 그것은 그들의 권한 안에 있음을 설명하였다. 얼마 후 그는 (돈 미켈레와 그의 군대가 그곳을 향하고 잇긴 하지만, 일이 잘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는 적중하였다.
하지만 마티아벨리와 공작 간의 이러한 토론과 함께, 그가 편지에서 이를 중시 한데 대해 피렌체에 있는 누군가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듯이 보인다. 저어도 소심한 보오나코르시가 편지로 전한 바에 의하면 그러하다. 이는 사실 매우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피렌체가 발렌티노를 싫어한다고 할 때, 그를 지켜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더없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다면, 사절로서는 그가 나눈 대화들을 얘기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더욱이 그가 이러한 일에 관하여 (신바람나게) 썼다는 것은 사실이 아 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문제의 편지들엑서 마키아벨리는 공작의 행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만 그의 운명이 (계속해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고 말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실 바로 그 순간 이후, 발렌티노는 급전직하의 상태에 있었다. 오스티아에서 그는 교황이 보낸 두 사람의 추기경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발렌티노에게 충성하는 로마냐의 성채들을 교황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베네치아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되면 되돌려준다는 것이었다. 그가 이를 거절하자, 교황은 그를 체포하여 로마의 감옥에다 가두어버렸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간, 아무런 안전 보장책도 없이 토스카나에 들어갔던 그의 군대 역시 피렌체령에 이르러 습격을 받고는 가진 것을 약탈당했다. 보르자휘하의 장군이자 그의 교살로 악명 높은 돈 미켈레 또한 피렌체인들의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앞서 피렌체가 보르자의 안전 통행을 거부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을 표시했던 교황은 이제 그의 마지막 남은 군세가 분쇄된 데 대해 마키아벨리의 면전에서 매우 흡족해하면서, 그 악한 돈 미켈레를 자신에게 넘기라는 교서를 피렌체에 보냈다. (그가 체포된 이때야 말로 지난 11년 동안 로마에서 자행된 온갖 불경하고도 반인륜적인 행위들, 즉 강도, 살인, 신성모모독, 그리고 여타 끝없는 범죄들을 들추어 밝히 좋은 기회)라는 것이다. 보르자는 이런 식으로 매일 매일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가고 있엇다. 일찍이 그의 배반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 우르비노 공 (보르자는 1502년 - 1503년 우르비노를 침탈했는데, 이때의 군주는 귀도발도였으며, 보르자의 죽음 1년후인 1503년 교황 줄리오 2세의 아들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가 그를 이어 우루니노 공이 되었다. - 옮긴이)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비참하게도 스스로를 변명하며 부친이 영혼을 저주하는 바로 그날, 그는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는 셈이 될 것 이었다. 아마 자신의 아들이 내뱉는 이 저주야말로 알레싼드로 6세의 영혼을 향한 유일무이한 기원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를 위해 기도한 사람은 없었다. 혹시 있다면, 바로 그 자신에 의해 화형주에 달린 한 도미니쿠스 수도사(1498년 알레싼드로 6세의 명으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질로라모 사보나롤로를 일컬음 - 옮긴이)정도 일까.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영웅이 파멸해 가는 마지막 순간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 교황이 자신의 빚을 정말 멋있게 같아나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잉크병을 솜으로 닦아내고 있지만, 정작 그의 손은 모두로부터 축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가.) 이틀 후 그는 다시 발렌티노를 가리켜 (우리는 그의 죄악이 조금씩 조금씩 그를 참회의 순간으로 데려가고 있음을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해서 공작은 점점 더 무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고 썼다. 아멘.
피렌체의 서기장이 몰락하는 영웅을 이렇듯 냉혹한 어조로 그리고 있는 데 대해 분노하면서 그를 비난한 사람들이 있다. 하잔 그들은 그를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발렌티노의 항해가 수조로울 때, 군주로서의 그의 어떤 측면들을 찬양했을 뿐이었다. 그와 같은 악한은 이단 파멸하게 되면 누구의 동정도 얻지 못하는 법이다. 더욱이 그처럼 마지막 순간에 일말의 영민함도 꿋꿋함도 보이지 못하는 경우에는 더 말해 무엇하랴. 마키아벨리는 뒤에 자신의 (리비우스 논고 Discorsi)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행위에서건 영광의 획득은 가능하다. 보통의 경우, 그것은 승리를 통해 얻어지지만, 패배했을 때라 할지라도(...) 그것을 덮을 만한 용기 있는 행동을 즉각 취한다면 영광은 획득 될 수 잇는 것이다.) 하지만 발렌티노는 로마에서의 그 마지막 나날 동안 우유부단하고도 비참한 행동거지 외에 아무런 용기도 보여주지 목하고 다만,
남들에게서만 찾으려고 했었지
자신도 생전 몰랐던 동정심을.
이러한 말들은 마키아벨리의 첫 (십년기(십년기, Decennale)를 비롯한 다른 유사한 시구들에 나타나는 것으로, 그가 비록 정치학의 저술가로서는 보르자의 그 비열한 도덕적 품성들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그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잇다. 사실 그는 정치학 저술가로서 이 비참한 인물의 슬픈 최후로부터 무언가를 배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것은 자신이 배반하고 해를 입힌 사람들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에게 발렌티노의 그 같은 모습은 틀림없이 그가 저지른 다른 모든 범죄만큼이나 용서 받을 수 없는 잘못으로 보였을 것이다.
로마냐 공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있던 그 즈음에도, 그곳에서 일어나는 당시의 사건들은 여전히 마카아벨리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그는 냉담한 교황의 마음의 베네치아에 대한 공격의 열기로 바꾸어 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말로는 호의를 보이면서도 행동에서는 더디고 마치 북풍처럼 오싹한 그를 보면서, 이러한 태도가 원래의 성품 때문은 아닌 듯하다고 느낀 마키아벨리는 혹시 그가 자신의 교황 선출에 도움이 된다면 누구에게나 무언가를 약속했던 그 당시, 베네치아 쪽에서도 무슨 약조를 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만일 그 같은 경우라면, 그가 베네치아에도 앞서 발렌티노에게 했던 대로만 해주기를 바랄 도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말과 행동을 면밀히 검토한 끝에 그가 비교적 솔직한 인물임을 안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렸다. 즉 그가 온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자신이 새 교황으로서 아직 군대로 재정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가 (확고한 권력을 얻을 )때까지 사태를 관망하면서 행동거지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에서 확실한 것은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명에를 추구하면서도 성마른 그의 성격입니다.) 그리고 4일 후, 그는 베네치아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상하였다. (교황의 성격은 그들에게 전 이탈리아를 내어주는 문이 되든가, 아니면 거꾸로 그들을 몰락의 길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중 두 번째 예상은 진짜 예언자로 만들어버렸다.
11월도 다 지나가 버렸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에 체류한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다. 이번의 경우, 언제나 쉴 틈이 없는 그에게 이례적인 일은 그가 휴가를 청하는 말도 불평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딱 한번, 비용이 많이 들어 돈이 더 필요하니 봉급을 올려달라는 편지를 정부에다 보냈을 뿐이다. 만일 봉급 인상이 불가능하다면, 전령에 드는 비용이라도 대신 지급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이처럼 힘든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끝 맺었다. (제가 어떻게 해보겠지만, 요즘 사람이란 게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일하지 뒤로 물러나려고 일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서기장이라고 험한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번은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한 정무위원이 교황의 로마냐 정책에 대해 자신에게 개인적을 좀 알려달라고 요구하고는 소식을 빨리 전해 주지 않느냐고 안달을 하자,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되받아쳤다. (제가 그랬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만약 알아먹기 어려운 말로 보고서를 썼다면 이제부터는 쉽게 쓰도록 하지요.) 그는 또 언젠가 보고에 태만하다는 지적을 받자, 역시 강경하게 응답하였다. 위원님들이 주는 봉급이나 제가 지닌 수단으로는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비용을 감수하면서, 큰 불편과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일한 대가가 태만하다는 비난이라니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짜증스런 이러한 일들을 제쳐놓는다면, 당시 유행하던 역병에도 불구하고 미키아벨리에게는 로마에서의 생활이 괜찮은 것이었음을 확실하다. 상상은 좋지만 톰마시니가 이 시기 그의 로마 체류를 (아무 재미도 없었을) 뿐더러 (유쾌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말한 데는 찬성하기 어렵다. 거꾸로 그는 그곳에서 매우 만족스럽게 지냈다. 그래서 12월 중순 10인위원회가 이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는 못 들은 척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다른 때에는 빨리 돌아가게 해다라고 요청할 때난 써먹던 몸이 불편하든 변명을 이 당시엔 귀국을 늦추려고 이용하고 있었다. 즉 그는 이미 한 차례 병으로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달에 겪었다는 기분 나쁜 병상의 불안간에 대해서 별다른 기억을 남기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귀국을 원할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역별이 돌고 있었고, 피렌체에는 장녀를 본 이후 두 번째 아기를 막 낳기 직전에 떠나온 젊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좀 방탕한 편이었던 그가 아내든 역별이든 그리 개의치 않았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이 제 막 태어난 두 번째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것도 아들임에랴! 아이는 11월 9일 세례를 받고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베르나르도로 부르게 되었다. 아이의 대부들 중에는 공화국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와 마키아벨리의 친구 보오나코르시가 들어 있었다. 부오나코르시는 편지 속에서, 정무위원 한 사람이 변덕스럽다는 두, 왜 그렇게 친구에게 냉담하냐 둥 하면서, 마르첼로가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서기국의 자질구레한 소식들을 전한 후 마키아벨리의 아기 이야기도 빼먹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이 아기가 잘 컸다는 칭찬을 듣도록 힘을 쏟고 있네. 그건 열며 말게, 그런데 이해는 마치 까마귀 새끼 같아. 너무 새까맣거든.) 그의 아내 역시 몸을 추스르자마자 애정 어린 편지 속에서 이 남자아이 이야기를 써 보냈다. (얘는 당신을 닮았나봐요. 피부는 눈처럼 흰데 머리는 검정 벨벳 같아요. 당신처럼 몸에 털이 많고요 그리고 당신을 닮아 그런지 내게는 아주 미남으로 보여요(...)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는 온 집이 떠나가라고 울어댔지요.)
그러나, 이 모든 것과 10인위원회의 명령까지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마키아벨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종종 소데리니 추기경의 집으로 가서 그와의 오랜 친분 관계를 다지곤 했으며, 자기 나라에 유리한 큰 계획을 그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당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추기경의 칭찬을 하기 바빴고, 추기경은 또 그대로 피렌체에다 마키아벨리의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좀 심해서 정무궁 내에서는 두 사람간의 이러한 친분 관계를 좋지 않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에 대해 가장 못마땅해하는 쪽은 아마도 곤팔로니에레의 정적들일 것인데, 그들의 수와 세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는 형편이었다. 추기경 역시 마키아벨리의 아들에게 기꺼이 대부가 되어주었으며, 10인위원회의 첫 소환명령을 따르지 말도록 부추긴 것도 바로 그였다. 결국 마키아벨리가 소환에 따르기로 작정하자, 추기경은 10인위원회에다 그를 빼앗아가는 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면서, 그는 매우 총명하고 성실한 인물이니 잘 봐주라고 부탁하는 편지까지 써주었다.
12월 18일, 우리의 사절은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체류를 끝내고 추기경의 편지를 마실 물 삼아 길을 떠났다. 그의 전기 작가 한 사람은 로마에서의 이 체류 시기가 마키아벨리에게는 (아무 재미도 없었던) 것처럼 생각했지만, 차라리 좀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마키아벨리가 유적들이나 대사들로 붐비는 교황청 접견실, 맛있는 음식을 내놓는 식당들, 그리고 로마의 멋진 여성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더라면 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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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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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혁명은 부드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 사람의 손해는 다른 사람의 이익이다.
생일잔치 기다리다 굶어 죽는다
‘풀이 자라는 동안에 말들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꿈이나 기대가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그 사이를 이겨내기 힘이 든다는 뜻이다. 솔 심어 정자 만든다는 말도 그러하다. 어린 소나무를 심어 뒷날에 정자를 만들 제목으로 쓴다 함이니 그 결과를 보기가 아득하다는 말이다. 조니 버나드 쇼(1856~1950)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한 극작가이며 비평가였다. 그는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에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하였는데, 후에 당시의 고통을 이런 말로 나타내었다.
“원맨쇼 후에 내년의 공연표도 빠른 시간 내에 팔 수 있는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생일날 잘 먹으려다 굶어 죽게 생겼다.
철부지급
어느날 굶주림을 참다 참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장자가 마침내 자존심을 버리고 벼슬하는 친구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 장자의 초췌한 몰골을 본 친구는 딱 잡아 거절하고 싶었으나 차마 냉정하게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빌려주지, 그런데 지금은 없고 한달 후에 세금을 걷으니 그때 가서 빌려 주겠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장자가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어제 내가 여기로 오는 길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돌아보니 수레바퀴로 파인 곳에 고인 물 속에 붕어 한 마리가 있었네. 내가 그 붕어에게 ‘그 곳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묻자 붕어가 말하길, ‘나는 동해 용궁의 왕이다. 그런데 지금 곤경에 처해 있다. 나를 도와 주시오‘하고 애원하질 않겠나. 그래서 나는 또 말했네. ‘좋다. 나는 지금 남쪽의 물나라에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 곳에 가서 큰 강물을 그대에게 돌려 대주겠다. 그때까지 기다려라’고 말일세. 그러자 붕어가 나에게 또 말하는 것이었네. ‘나는 있어야 할 곳을 잃어 위급한 지경에 있다. 그러나 지금 한 되나 한 말쯤의 물만 있으면 산다. 그대가 갖고 있는 것 조금만 나누어주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삶은 호박에 이도 들어가지 않을 헛소리를 하는가‘라고 말하면서‘그대가 나를 다시 찾으려면 시장 건어물전에 가서 찾으시오’라고 말하더란 말씀이네.“
철부란 수레바퀴로 패인 곳에 고인 물속의 붕어를 뜻한다. 사람이 다급하고 곤궁한 처지에 이른 경우를 두고 이런 말을 쓴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굶다가 장자양반 제삿날 젯밥 공양 받을라! 솔로몬은 <지혜의 글>에서 “선을 베풀 능력이 있거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주저 하지 말고, 너에게 가진 것이 있으면, ‘네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면 내일 주겠다’라고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고통에 쌓인 사람에게 위로하는 말이라도 하여 주자.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마저 깨려 해서는 곤란하다.
생일날 잘 먹으려고 기다리다 굶어 죽는다.
죄와 법
법의 정신은 과실이나 무지로 지은 죄는 크더라도 너그럽게 대하고 고의성이 짙은 죄는 작더라도 엄하게 벌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또 죄가 있다는 심증이 가더라도 확증이 없으면 처벌하지 않는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생각하여 준다는 말이다.
몇년 전, 경찰관이었던 사람이 살인죄로 형이 확정되어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진범이 붙잡혀 풀려난 사건이 있었다. 조사를 한 경찰, 기소한 검찰, 선고한 법원 모두가 마구잡이 수사와 선고를 한 셈이됐다.‘심증이 가더라도 확증이 없으면 죄를 주지 않는’원칙에서 벗어난 경찰, 검찰, 법원은 신뢰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법 집행자들이 금과옥조로 삼아야 할 말이 있다. ‘형벌을 주는 것은 죄를 없애는 데 있지 사람을 처벌하는 데 있지 않다‘는 서경의 말이 그것이다. 옥사를 다스리는 목적은 죄인을 선도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논어는 ‘법 집행을 하는 사람은 죄인을 문초할 때 그의 죄상이 밝혀진 것을 기뻐할 것이 아니라 범인이 죄를 범한 이유와 원인을 따져 그의 처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 새겨들어야 할 말임에 틀림없다.
법을 몰라서 저지른 죄도 죄다. (ignorance of the law is no excuse for breaking it) 법에 대한 무지로 저지른 죄 역시 죄에 해당된다. 법에 관한 격언 즉 법언으로,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이다.
위선자의 상술
악마는 자신의 본체를 속이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그의 행위에 합당하도록 인용한다. 그래서인지 사기꾼이나 위선자들은 감언이설로써 사람들을 꼬드긴다. 그래서 예수는 ‘아무에게나 속지 않도록 주의하여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이 ’내가 그리스도이다‘라고 말하며 속일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이에 덧붙여 ‘너희는 뱀과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면서 사기꾼들에게 ‘속지 말 것’을 충고하고 있다.
위선자들은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고, 무거운 짐은 남에게 지우고 자기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잔치자리의 상석이나 연단에 앉아 사람들을 내려다 보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선생’이라 불러주기를 원하고, 하는 일마다 남에게 자랑하려고 큰 소리를 친다고 한다. 호주에서는 정치인과 중고자동차 판매상이 이에 해당되는데 한국에서는 어떤 부류가 해당될까?
양두구육은 겉으로는 훌륭하게 내세우나 속으로는 그렇지 않은 위선자의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제 보신탕(일명 멍멍탕) 때문에 이 말 자체가 변화를 강요당하고 있다. 개고기가 양고기보다 훨씬 비싸므로 구두양육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다. 말이란 시세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가?
악마는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 (The devil can quote Scripture for his own ends.)
위선자를 나무랄 때 사용하는데 위선자들은 양가죽을 뒤집어쓴 이리와 같이, 자신을 미화하기 위하여 양의 머리인 성경을 인용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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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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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 최재환
햇볕을 물어 나르던
새들이
그만 지쳐 돌아간
어느 해질녘,
옹기종기
정다운 눈망울에
꺼질 듯 꺼질 듯
까많게 타는
모닥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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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없는 강 - 김원석
꽃봉오릴 틔울
한 방울 이슬이
묵은 꺼풀 씻어 내릴
한 자락 빗물이
나, 이슬 아니고
너, 빗물이 아니어
서로 섞여 흐르고
때론
이슬이 빗물같이
빗물이 이슬같이
서로
함께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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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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