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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0호 - 2024.9.12. 목요일(음력 : 8.10.)
angelo@nownforever.co.kr / 風文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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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번 돈을 한 잎 두 잎 세듯, 차근차근 소중히 간직하시도록 - 칼 샌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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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경이 맛있다
김해국제공항에서 수속을 마치고 나오다 보면 “야경이 맛있다”라는 광고 문구가 손님을 맞는다. 지역 도시 홍보 문안인데, 그 특이한 단어조합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또는 한국어를 착실히 배운 외국인이라면 “어, ‘멋있다’ 아닌가?” 하고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국어사전을 보면 ‘맛있다’에는 ‘음식의 맛이 좋다’는 한 가지 뜻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전적 의미에서 벗어난 표현을 종종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맛있는 인생, 맛있는 여행, 맛있는 대한민국, 맛있는 음악회’ 등은 인생이나 음악회가 음식이 아니라는 점에서 은유적인 표현들이다. 다만 이런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의 제목들은 맛 기행처럼 먹는 것과 관련된 내용들이어서 쉽게 그 연결고리를 이해할 수 있는 예들이다.
그러나 ‘야경이 맛있다’는 음식과 무관한 것이어서 더 확장된 용법을 보여 준다. ‘맛있다’가 ‘다채롭다, 즐겁다’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이러한 쓰임은 ‘맛있는 공부’ ‘맛있는 논술’ ‘맛있는 중국어’ 등과 같은 예들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야경이 맛있다’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신한 표현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점에서 이는 성공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야경’과 ‘맛있다’의 조합이 아무래도 어색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사전적으로 ‘맛있다’는 음식과 관련된 뜻만 지니고, 그래서 이 문구는 오류로 여겨질 가능성조차 크다. 그 표현의 창의성은 공감되지만, 적어도 공공의 목적이라면 보다 정제되고 명확한 표현을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침에 직장에서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는 것을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아침’은 영어의 아침 인사말인 ‘Good Morning’을 우리말로 그대로 직역한 것으로, 우리식 인사말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안녕’이라고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는데 굳이 영어식 표현을 번역해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인사말은 어떨까.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문장의 주어를 설정해 보면 ‘(당신이) 좋은 하루 되세요’가 되는데, 이는 ‘사람이 좋은 하루가 되라’는 뜻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은 표현임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을 주어와 서술어의 의미 호응이 적절하도록 고쳐 보면 ‘(당신이) 좋은 하루(를) 보내세요’가 되는데, 그래서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하는 것이 우리 어법에 맞는 자연스러운 인사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즐거운 주말 되세요’라는 인사말도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라고 고쳐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말의 동사와 형용사는 모두 문장 내에서 서술어의 기능을 하는 용언(用言)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동사는 ‘동작’을 나타내고, 형용사는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낸다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형용사는 동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명령형을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행복하다’ ‘건강하다’라는 형용사를 가지고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라고 명령형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우리 어법에 맞지 않다. 이 경우에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혹은 ‘건강을 빕니다’ ‘행복을 빕니다’라고 인사를 해야 우리말의 어법에 맞는 인사말이 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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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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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 천상병
멀잖아 북악에서 바람이 불고
눈을 날리며, 겨울이 온다.
그날, 눈 오는 날에
하얗게 덮인 서울의 거리를
나는 봄이 그리워서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다음"이 있었다.
이 새벽, 이 "다음".
이 절대한 불가항력을
나는 내 것이라 생각한다.
이윽고, 내일
나의 느린 걸음은
불보다도 더 뜨거운 것으로 변하여
나의 희망은
노도보다도 바다의 전부보다도
더 무거운 무게를 이 세계에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은
눈 오는 날의 서울 거리는
나의 세계의 바다로 가는 길이다.
∼∼∼∼∼∼∼∼∼∼∼∼∼∼~~~~~~~~~~~~~~~~~~~~~~~~~~~~~~~~
갈릴레아 바다 - 정지용
나의 가슴은
조그만 갈릴레아 바다).
때없이 설레는 파도는
미한 풍경을 이룰 수 없도다.
예전에 문제들은
잠자는 주를 깨웠도다.
주를 다만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 복되도다.
돛폭은 다시 펴고
키는 방향을 찾었도다.
오늘도 나의 조그만 (갈릴레아)에서
주는 짐짓 잠자신 줄을-.
바람과 바다가 잠잠한 후에야
나의 탄식은 깨달었도다.
~~~~~~~~~~~~~~~~~~~~~~~~~~~~~~~~~~~~~~~~~~~~~~~~~
여름 아침 - 김수영
여름 아침의 시골은 가족과 같다
햇살을 모자같이 이고 앉은 사람들이 밭을 고르고
우리집에도 어저께는 무씨를 뿌렸다
원활하게 굽은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간밤의 쓰디쓴 후각과 청각과 미각과 통각마저 잊어버리려고 한다
물을 뜨러 나온 아내의 얼굴은
어느틈에 저렇게 검어졌는지 모르나
차차 시골동리사람들의 얼굴을 닮아간다
뜨거워질 햇살이 산 위를 걸어내려온다
가장 아름다운 이기적인 시간 우에서
나는 나의 검게 타야 할 정신을 생각하며
구별을 용사하지 않는
밭고랑 사이를 무겁게 걸어간다
고뇌여
강물은 잠잠하게 흘러내려가는데
천국도 지옥도 너무나 가까운 곳
사람들이여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
여름 아침에는
자비로운 하늘이 무수한 우리들의 사진을 찍으리라
단 한장의 사진을 찍으리라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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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편지 - 이해인 (25~30)
26
오늘은 모짜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굴이 핼쓱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 한 켤레의 고독을 신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버리는 나의 마음을 창 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당신 사랑의 秘法을 들려 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더 겸허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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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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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무엇이 사는 것인가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의 즐거움, 가정 생활의 즐거움, 삼라만상을 보는 즐거움, 또 어떤 형태의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유쾌한 대화, 독서의 즐거움 등이 그것이다. 또 좋은 음식, 모임, 단란한 가족과 같이 분명한 즐거움도 있고, 음악, 미술, 사색, 등의 즐거움처럼 그 형체가 불분명한 것도 있다. 이런 것을 일러 우리들은 흔히 물질적이라든가 정신적인 즐거움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공원에 소풍 나온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서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즐거움인지 구별할 수 있겠는가. 한 아이는 잔디밭에서 깡충거리고, 어머니는 과일을 깎고 있다. 삼촌과 조카는 공을 차고 있는데 아버지는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누워 있다. 할아버지는 담배연기를 뿜으며 어린 손자들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또 누군가는 조용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멀리 계곡에서 물소리가 난다. 이러한 즐거움 중 어느 것이 물질적인 것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것이겠는가? 그런 경계선을 긋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 일컫는 사과를 베어 무는 즐거움보다 더 고급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즐거움이란 어떤 모습이 아니라 마음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행복한 인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주말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생의 신비가 찾아가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어려운 철학적 문제보다는 훨씬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의 목적을 목청 높여 외치는 것은 기실 우리들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을 어떤 목적적인 존재로 보는 사회나 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만일 인생에 있어서 목적이나 설계가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그다지도 어렵고 난해할 리 만무할 것이다. 여기에 집착한다면 문제는 결국 신을 위해 살 것이냐, 인간을 위해 살 것이냐라는 두 가지로 고착된다. 하지만 인간의 지능으로 신을 추측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같은 이론의 최종 결과는 신을 우리 군대의 기수로 삼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맹목적 애국자로 만들고야 만다. 인간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아니다. 즉 실제 문제이며 형이상학적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월트 휘트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런 방향에서 바라보면 문제는 아주 간단하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외에 인생에 다른 어떤 목적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구원이나 천국 등등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즐거움에 대한 인간의 위치는 다소 빈약해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인간에게는 인간의 위치가 있으므로 주위와 조화로운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실질적으로 분별 있는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행복한 느낌이다
인간의 행복은 생물적인 행복이다. 곧 관능적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뒤따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행복에 대한 정신적인 측면에 너무나 많이 기만당해왔다. 나는 정신적 행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이루어진 어떤 상태이다.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적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내게 있어서 행복이란 주로 소화기관의 문제이다. 나의 말에 어떤 증명이 필요하다면 나는 미국의 저명한 한 대학 총장의 연설 뒤로 숨어야만 하겠다. 그는 신입생에게 훈시할 때 항상 이렇게 현명한 표현을 썼다고 한다.
'제군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즉 성서를 읽을 것과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정말 지혜롭고 훌륭한 연설이다. 내장을 움직이면 행복하고, 내장을 움직이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오직 이것뿐이다.
행복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슬픔과 괴로움, 육체적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런 행복의 적극적인 모습을 환희라고 부른다. 나의 경우는 이렇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 공기를 마시면 허파가 신선한 기분으로 가득해진다. 그러면 더 깊이 숨을 들여 마신다. 가슴 주위의 피부나 근육에 기분 좋은 운동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곧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손에 파이프를 쥐고 의자에 발을 쭉 뻗고 앉으면 담배연기가 천천히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그런 때. 여름날 여행길에서 목이 마른데 맑은 샘물이 눈에 띈다. 구두와 양말을 벗어 던지고 그 콸콸 솟아나는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그런 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난 뒤 안락의자에 기대앉는다.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앉아 흥겹고 즐거운 이야기를 끝없이 한다. 몸과 마음도 천하 태평인 그러한 때. 아이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듣거나, 그 통통한 다리를 보거나 할 때,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정신적인 의미에서 사랑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환희와 육체의 환희를 구별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할까? 또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웃음과 미소와 몸짓, 온갖 사물에 대한 각각의 태도, 그런 것을 해부하거나 분석한다는 것이 남자에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어떤 여성이라도 좋은 옷을 입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루즈나 향수는 여자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런 것들은 여성 자신에게는 참되고 명료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기쁨이 전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생명이 있는 육신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의 차이란 미미한 것이다. 어떤 섬세한 정서나 위대한 정신의 아름다움의 극찬을 받는다 해도 감각을 무시하고 그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촉각, 청각, 시작에는 도덕성이 없다.
우리가 인생의 적극적인 환희를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대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또 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로 세상은 우리의 관능에 의해서만 즐길 수 있도록 펼쳐진 인생의 향연이다. 그러나 이같은 관능적 기쁨을 인정할 만한 교양이 있어야만 그것들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분명하다. 자신의 관능에 떨고 있는 이 호화로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눈을 감는 것은 유심론자들이 관능을 죄악시하고 세뇌시킨 결과물이다. 좀더 고상한 철학이란 우리가 육체라 부르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수 기관에 대한 신뢰를 고쳐 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 경멸 사상을 몰아내고 관능의 공포를 몰아내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자신의 진실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그것만이 참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것은 또 참으로 건전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동심으로 돌아가라
일반적으로 고상하다고 생각되는 지적인 쾌락과 정신적인 쾌락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것들은 언제나 인간의 감각 속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가지 사물이나 행동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 종교, 철학 등 고급의 정신적 쾌락들은 대개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에 비해 매우 무력하다. 미술의 경우에도 풍경화나 초상화의 경우 실제 풍경이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관능적인 즐거움을 상상하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문학의 경우 인생의 모습을 그 안에 재현시켜 그 정취와 명암을 묘사하며, 목장의 아름다운 내음이나 뒷골목의 실상을 유추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종교가 타락하고 있다는 것은 대개 그 종교가 이론 그 자체에 빠지는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산타야나는 '불행하게도 종교는 이론의 옷을 입은 미신이 되기 위해, 공상 세계의 예지이기를 그만둔 지 오래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종교가 타락한 이유란 분명히 신조와 신앙 형식과 신앙 개조에 빠진 교설 및 그 변명 등의 연구에 몰두하여 현학적 정신에 빠졌기 때문이다. 신앙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여 옳다고 믿음으로써 경건한 마음은 감소하게 된가. 모든 종교가 오로지 자기만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편협에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결과 자신들은 정당화하면 할수록 그 편협의 골은 깊어져만 간다. 그리하여 종교는 가장 질이 나쁜 집착과 고루와 편파, 더불어 이기주의까지 결부되기에 이른다. 미술과 시와 종교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그것들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공상의 신선미와 보다 큰 정서적 미감과 발랄한 생명력을 부활시키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듦에 따라 차츰 무감각해지고 고통과 부정과 잔인 등에 대한 희로애락의 정서도 희미해진다. 냉혹한 현실의 포로가 되어 인생에 대한 꿈도 왜곡되어간다.
그런데 다행히도 세상에는 소수의 시인들과 예술들이 있다. 그들의 날카로운 감수성, 섬세한 정서적 감응이나 공상의 신선미가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들의 양심이 되고 무감각해진 공상을 바로잡는 거울이 되며 위축된 신경을 조정해 주는 의사가 된다. 예술이란 우리들의 마비된 정서나 생기 잃은 사고나 부자연스러운 생활을 풍자하고 경고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이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치며 생활의 건강함과 건전성을 회복시키고, 열광과 착란을 바로잡아준다. 곧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이성과 인간성과의 관계를 재건하여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시킴으로써 균형 잃은 생활의 파편을 모아 완전성을 되찾아주는 것이다. 이해가 없는 지식, 감상이 없는 비판, 사랑이 없는 아름다움, 정이 없는 진실, 자비가 없는 정의, 온정이 없는 의례가 판치는 세상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우리들은 생활을 사색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야만 정신적인 열광이나 압도의 분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리하여 동심으로 돌아가 직관의 신선함과 소박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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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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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9 - 시오노 나나미
고대 로마의 '군주론'
이런 트라야누스의 방식 덕분에 집정관이 된 소 플리니우스가 서기100년 9월에 원로원에서 연설했다는 취임사가 남아 있다.「트라야누스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제목인데, 요컨대 집정관이 될 기회를 준 트라야누스에게 감사한다는 것이다. 취임 날짜가9월인 것으로 보아, 당시 마흔 살 안팎이었던 소 플리니우스는 정규 집정관이 아니라 보결 집정관에 선출된 모양이다. 그런데 이「송가」는 소 플리니우스가 변호사로 성공한 것도 당연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장황해서, 계속 읽으려면 트라야누스 못지 않은 인내심이 필요하겠구나 싶을 정도다. 장문인데다,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대한 비난과 트라야누스 황제에 대한 찬사가 줄기차게 되풀이되는 데에는 질려버린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인어 나가다 보면, 황제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양질의(소 플리니우스는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었다) 원로원 의원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트라야누스에게 바치는 송가」는 고대 로마인이 쓴'군주론'이다. 여기서 요점만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가 "황제에 즉위한 것은 혈연 때문이 아니며, 선제 네르바가 그를 양자로 삼은 것도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지 그의 개인적 야심이 낳은 결과는 아니"라고 강조한다. 정국의 불안정을 피하기 위해 세습제를 받아들인 로마인이지만, 그래도 항상 세습제에 의문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도자의 개인적 야심, 즉 사욕을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은 "나서고 싶어하는 사람보다 내세우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라'는 격언을 생각나게 한다. 이어서 소 플리니우스는, 로마 황제란 "원로원과 로마 시민, 군대, 속주, 동맹국으로 이루어진 제국의 통치를 위임받은 유일한 존재이며"그 목적은 "오직 만민의 자유와 번영과 안전보장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만민에 대한 통치자는 만민 가운데 선택된 자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한마디-라틴어 원문으로는 'Imperaturus omnibus eligidebet ex omnibus"-는 계몽주의를 거친 근대 서유럽 국가의 위정자들에게도 "늘 명심해야 할 말'이 된다 이 구절은 영국 하원 의사당에서 라틴어 그대로 말해도 누구나 당장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 만큼 유명한 구절이다. 법치국가에서의 황제의 권력에 대해, 소 플리니우스는 바로 눈앞에 앉아 있었을 게 분명한 트라야누스를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우리 원로원 의원을 넘어서는 권력을 탐내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권력을 당신이 가져주기를 바란 것은 우리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잇는다. "황제란 법 위에서는 존재가 아니라, 법이 황제 위에서는 존재입니다. " 듣고 보면 당연한 말이다. 로마 황제는 취임할 때 집정관 앞에서 국법에 충성할 것을 서약하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똑같은 선서를 또 한번 해야 한다. 이번에는 포로 로마노의 연단 위에 올라가, 몰려든 로마 시민 앞에서 서약하는 것이다. 그러면 후천적으로 강대한 권력을 부여받은 황제는 어떻게 행동해야는가. 소 플리니우스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전제군주가 아니라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라고.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쾌활한 동시에 진지하고, 소박한 동시에 위엄이 있고, 상냥하면서도 당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래서는 슈퍼맨이 되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최고권력자는 초인적이어야 한다고 로마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덧붙여 말하면,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맨 처음 주어진 '국가의 아버지' (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이어받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다. 트라야누스도 수도에 귀환했을 때 이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근대 국가는 이 사고방식을 퍼터널리즘' (온정주의 ·가부장주의)이라고 부르고, 전근대적이라 하여 물리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어서 원로원과 함께 제국의 양대 주권자인 로마 시민권 소유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당신이 위임받은 통치권은 국익을 지키는 데 행사되어야 하지만, 그 국가는 시민 모두의 것입니다. 따라서 황제는 시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습니다. "
트라야누스의 후임 황제인 하드리아누스 시절의 일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제사를 거행하러 신전으로 가는 길에 한 여자가 황제를 불러 세웠다. 여자는 황제에게 무언가를 청원하려고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지금은 시간이 없다'고 대답하고 그냥 지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는 황제의 등에 대고 외쳤다. "그러면 당신은 통치할 권리가 없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발길을 돌려 여자에게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빈부에 관계없이 실리에 민감한 생물이기도 하다. 소 플리니우스의 '군주론'에도 돈에 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중 하나는 네르바 시절에 시작되어 트라야누스도 답습한 황제의 재산 사용법인데, 소 플리니우스는 그것을 칭송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황제의 재산을 마치 공동 소유권이라도 갖고 있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을 뿐더러, 우리 개개인의 사유 재산권은 완벽하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
로마의 세금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원로원 속주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은 국고로 들어가고, 황제 속주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은 황제에게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제도인데, 당시에는 이집트를 제외한 황제 속주는 모두 변경에 있어서 방위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공과 사를 혼동한다는 비난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원래 나랏돈인데 사유재산처럼 낭비한다는 것이다. 경기장이나 공중목욕탕 같은 공공시설을 짓는 데 쓰면 좋지만, 호화 별장 따위를 지으면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지은 광대한 팔라티노 궁전이 비난을 받자, 다음 황 제 네르바는 'Villa publica'(공관)라고 새긴 석판을 내걸고 정문을 항 상 열어두게 했다 물론 트라야누스는 그런 일로 악평을 받은 도미티아누스의 전철을 밟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시대에도 선제 네르바가 내건 석판은 고대로 걸려 있었다. 로마 시민권 소유자는 군무에 종사한다는 이유로 속주세를 면제받고있었지만, 상속세는 면제받지 못했다. 상속세는 로마 시민에게 부과된 유일한 직접세다. 이 세금을 제정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군무에 실제로 종사하지 않는 로마 시민까지 직접세를 면제받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상속세를 만들었고, 따라서 이 상속세만은 만기 제대자에게 주는 퇴직금으로 사용하는 목적세다. 세율은 5퍼센트, 7촌 이내의 근친자는 면제되었다. 하지만 로마인도 탈세는 한다. 6촌 이내의 근친자가 되기 위해 양자로 들어가는 등의 편법을 쓰려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상속세를 면제받지 못하도록 세법이 바뀌었다 이 세법 개정도 도미티아누스가 단행한 모양이다.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된 뒤 제위에 오른 네르바는 이 세법을 다시 개정하여, 부모와 자식간에 상속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세금을 전액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2만 세스테르티우스 이하는 누가 상속하든 상속세를 전액 면제해주기로 결정했다. 소 플리니우스는 이것도 트라야누스가 계승해야 할 정책 가운데 하나로 들고 있다. "로마 시민권은 매력 있는 권리여야 하고, 근친을 잃은 슬픔에다 재산을 잃는 슬픔까지 덧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황제에게 통치권이 위임된 여러 분야 가운데 소 플리니우스가 원로원과 로마 시민 다음으로 거론한 것은 군대였다. 군대와 황제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그는 지금까지 군단에서 트라야누스가 취한 태도를 칭송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트라야누스가 병사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태도가 낳은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병사들은 당신과 함께 굶주림도 목마름도 견뎌냈습니다. 훈련에도(로마군의 훈련은 실전보다 더 진지했다) 당신은 병사들과 함께 참가하여, 당신의 뒤를 따르는 기병들과 똑같이 땀을 흘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썼습니다. 그들 속에서 당신이 유독 눈에 띄었다면, 그것은 병사로서 당신의 탁월함과 용맹함 때문이었습니다. 투창 훈련에서는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창을 던지고, 상대가 창을 던지면 누구보다도 재빨리 몸을 피했습니다. 당신의 갑옷이나 방패를 찌른 병사에게는 당신의 노여움이 아니라 칭찬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냉철한 관찰자요 사령관이었습니다. 병사들의 무기를 일일이 점검하여 부적당한 것은 바꾸게 하고, 병사가 짊어진 짐이 너무 무거워 보이면 당신이 대신 져주었습니다 부상병은 육친처럼 정성껏 돌봐주었습니다 게다가 병사 전원에 대한 최종 점호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막사에 들어가지 않고, 모든 병사들에게 휴식을 준 뒤에야 자신도 휴식을 취했습니다. "
하지만 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먼저 도발해서도 안됩니다." 라틴어로는 Non times bella next provocas"다. 이 구절은 오늘날의 사관학교에서도 가르치는 격언이다. 소 플리니우스가 군대 다음으로 언급한 것은 속주다. 황제는 속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소 플리니우스는 "속주민도 로마인의 일부'라고 강조하면서, "자연은 어디에나 균등한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므로, 도움이 필요한 지방을 원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속주를 포함한 로마제국의 현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교역은 서방과 동방을 이어주고, 따라서 제국 안의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물산 가운데 수출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자기네 고장에서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수입할 필요가 있는 물산이 무엇인가를 이제는 완전히 알고 있다. "
이 말은 로마 제국이 현대의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오리엔트 지방을 망라한 대경제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경제권을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황제의 최대 책무라는 것이 소 플리니우스로 대표되는 당시 로마의 지적 · 사회적 · 경제적 지도층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참으로 복잡미묘한 존재여서, 호평을 받은 일은 계속하고 악평을 받은 일은 그만두면 그걸로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호평을 받았다고 해서 계속하다 보면 싫증을 내고, 악평을 받은 정책을 그만두고 정반대의 정책을 택하면 그때까지 비난을 퍼붓는 데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뒤늦게 이전의 정책의 필요성을 깨닫고 부활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네르바는 오현제의 첫 번째 황제인 만큼 1년 반도 채 안 되는 짧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선정을 베푼 사람이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지나치게 의식한 것이 그의 통치의 결함이 되었다.
엄격한 위정자이기도 했던 도미티아누스는 속주 통치를 담당하는 총독들의 행동을 항상 빈틈없이 감시했지만, 네르바는 원로원 의원들한테 평판이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그만두어버렸다. 그 결과는 당장 나타났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접어들자마자 속주민들이 총독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사례가 급증한 것이다. 임기 중에는 총독을 고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임기가 끝난 뒤에 재판이 열리는데, 속주민의 의뢰를 받으면 검사로, 전임 총독 편에 서면 변호사로서 재판에 관여한 것이 타키투스나 소 플리니우스 같은 원로원 의원 겸 변호사들이었다. 도미티아누스를 혹평한 그들도 고삐를 놓아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재판은 대부분 속주민 측의 승소로 끝났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원로원의 반감에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방임의 폐해를 더욱 무겁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라야누스도 도미티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속주 통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제국 전체의 명운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원로원 속주는 공식적으로는 황제 관할이 아니다. 이런 속주에 파견되는 총독은 원로원 의원들이 집정관 경험자들 중에서 호선으로 선출한다. '황제 속주'에 파견되는 총독은 황제에게 임명권이 있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 속주나 원로원 속주의 구별 없이 모든 총독을 엄격하게 관리 감독했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사망한 나이인 45세에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가 총독을 단속하는 방법은 상당히 교묘했다. 속주민의 고발이 잦아서 감시할 필요가 있는 속주가 원로원 속주인 경우, 트라야누스는 그 속주만 일시적으로 황제 속주에 편입시켰다. 그러면 황제 관할이 되니까, 선정을 베풀기에 적당한 인재를 속주 총독에 임명할 수 있었다.
공동화 대책
나아가서 트라야누스는 도미티아누스가 발을 들여놓지 않은 데까지 뛰어든다. 원로원 회의장에서 트라야누스는 '말에 담긴 진실감, 강하고 의연한 음성, 위엄에 찬 얼굴, 솔직하고 성실한 눈빛"으로 법안 하나를 가결해달라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로마 사회의 지도층인 원로원 의원은 적어도 재산의 3분의 1을 본국 이탈리아에 투자해야 한다는 법안이었다. 당시의 주요 산업은 뭐니뭐니 해도 농업이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작농 진흥책으로 '농지법'을 제정한 이후 본국 이탈리아의 농업은 중소 자작농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이고 따라서 유권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이 법이 적용되지 않는 속주에서는 대농장이 지배적인 구조가 되어 있었다. 본국은 중소기업 사회이고 속주는 대기업 사회 같은 느낌이었다. 이 격차가 분명해질수록 재산가인 원로원 계급의 투자가 속주로 몰리는 것은 당연한 추세다. 대기업에 투자하는 편이 더 안전하고 수익도 높기 때문이다. '팍스 로마나'가 정착될수록 본국과 속주 사이에 투자 위험도의 격차도 계속 줄어든다 속주 출신 원로원 의원의 수가 늘어난 것도 이 경향에 박차를 가했다 본국 이탈리아에는 수도 로마의 저택과 해변 별장만 있을 뿐, 나머지 재산은 모두 속주에 투자했다고 큰소리치는 의원도 나오는 형편이다. 이를 방치해두면 제국의 중추여야 할 본국 이탈리아가 공동화할 것은 뻔했다.
트라야누스가 제출한 법안은 여기에 제동을 거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하한선을 3분의 1로 정한 것은 그게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전 재산을 본국에 투자하라고 하면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는 사람이 나타나, 훌륭한 법도 사문화되게 마련이다. 3분의 1정도면 괜찮다고 의원들도 생각했는지, 이 법안은 간단히 가결되어 당장 시행되었다. 소 플리니우스가 남긴 편지에 주인의 저택은 물론 농업 생산에 필요한 농지와 농민의 주거와 작업장까지 갖춘 본국 이탈리아의 대농장 가격이 올랐다는 말이 나온다. '트라야누스 투자법'의 성립으로 말미암아 속주에 투자한 자본 일부를 회수하여 본국에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원로원 의원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본국 농장에 투자할 경우에는 금리 우대 조치도 받을 수 있었다.
본국 이탈리아 농업의 건전한 발전이야말로 이탈리아가 계속 제국의 중추 역할을 맡는 데 가장 긴요한 요소라고 생각한 것은 악정으로 단죄된 황제들도 마찬가지여서, 이탈리아의 중소 자작농은 그 황제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다. 그 혜택 가운데 하나가 금리 우대책이다. 연리 12퍼센트가 보통인데, '중소기업은행'이라 해도 좋은 국가기관에서 돈을 빌리면 이자를 5퍼센트만 내면 된다. 대규모 농장이라도 본국에 있으면 6퍼센트의 낮은 금리가 적용된 모양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담보는 필요했지만, 원금 상환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매년 5퍼센트 내지 6퍼센트의 이자만 지불하는 영구대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육영자금
트라야누스는 또 하나의 본국 공동화 방지책을 시행했다. 통칭 '알리멘타' (Alimenta)라는 법인데, 당시 로마인은 이것을 차세대 육성기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요즘 말로 바꾸면 '육영자금제이다. 트라야누스 이전에 이런 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개인 규모로는 이미 훌륭하게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네로 황제 시절, 나폴리 근처의 작은 도시 아티나 출신인 엘비우스라는 인물은 고향의 진흥기금으로 40만 세스테르티우스를 기부했다. 시의회가 이 기금을 운용하여 얻은 수익금 중에서, 결혼하여 아티나에 정착한 젊은이들에게 1인당 1천 세스테르티우스의 보조금을 주는 것이 기부 조건이었다. 또한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부자에다 사회적 책무(이것을 후세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라고 부른다)에도 열심이었던 소 플리니우스는 북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코모 호숫가에 있는 고향에 신전과 도서관을 기증했고, 차세대 육성도 잊지 않았다. 그는 백만 세스테르티우스 상당의 토지를 코모 시 당국에 기증하면서, 1년에 3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예상되는 수익금을 시에 거주하는 빈곤 가정의 자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육영자금으로 쓰라는 조건을 달았다. 덧붙여 말하면 3퍼센트라는 수익률은 당시 기준으로도 낮은 편이니까, 소 플리니우스가 기부한 땅은 당시 로마인들이 안전성이 높은 대신 수익률이 낮은 투자 대상으로 여겼던 삼림지대였는지도 모른다. 예를 드는 것은 이 정도로 그치겠지만, 트라야누스 황제가 시작한 것은 이런 육영제도의 국책화였다.
본국 이탈리아의 농업을 진흥하기 위해 설립된 '중소기업은행'에는 국고 세입(Erarium)이 아니라 황제 세입(Fiscus)에서 자금이 출자되었다. 그리고 그 이자 수입을 '알리멘타'의 재원으로 삼았다. 이자를 받는 곳도 '중소기업은행'이 아니라 이자를 내는 사람의 농지가 있는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였다. 이자가 1년에 5퍼센트밖에 안되기 때문에 원금을 갚지 않고 계속 이자만 내는 영구 대출의 비율이 높았고, 따라서 지방자치단체에 들어오는 이자도 정기적이고 항구적인 수입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이처럼 액수가 안정되어 있고 매년 들어오는 수입이 육영자금의 재원으로는 이상적이었다. 트라야누스의 '알리멘타 법'에는 미성년자만 보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규정되어 있고, 그 액수도 정해져 있었다.
적출 남자-매달 16세스테르티우스
적출 여자-매달 12세스테르티우스
서출 남자-매달 12세스테르티우스
서출 여자-매달 10세스테르티우스
남자의 성년은 17세, 여자의 성년은 14세다. 로마 시대의 육영자금은 성년이 된 뒤에도 갚을 필요가 없었다. 분할 상환도 요구받지 않았다. 군단병 월급이 75세스테르티우스였던 시절이다. 현대의 여권론자들은 남녀가 받는 보조금 액수의 차이를 비난할지 모르지만, 1900년 전에 여자를 포함시킨 것만도 커다란 진전이고, 게다가 액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서출 자녀까지 포함시킨 것은 획기적이기까지 하다. 로마 시대에 뒤이은 기독교 시대는 신에게 서약한 정식결혼에서 태어난 자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기독교 국가에서 서자도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차세대 육성을 목적으로 한 트라야누스의 '알리멘타 법'은 직접 수혜자인 본국의 빈곤 가정을 돕는 데 머물지 않았다.
첫째, 자기가 내는 이자가 제 고장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자, 농민들도 기꺼이 이자를 내게 되었다.
둘째, 법률 시행을 위임받은 지방자치단체가 분발했다. '알리멘타법'에는 1인당 보조금 액수는 정해져 있지만 인원까지는 정해져 있지 않았다. 재원은 이자 수입이니까 자치단체에 따라서는 적은 곳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가정의 자녀수가 재원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되도록 많은 아이들이 이 법의 혜택을 받는 것이 황제의 소망임은 분명했다. 그래서 이자 수입이 적은 자치단체에서는 소 플리니우스 같은 부자들의 기부를 유도하여 부족한 액수를 벌충하려고 애썼다.
이리하여 개인의 육영제도와 국가의 육영제도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법은 이탈리아 본국의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풍조에 대한 대책'으로도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트라야누스가 애당초 이 법을 입안한 의도의 결과였던 게 분명 하다. 공동화는 우선 인구 감소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알리멘타법'의 수혜자가 이탈리아 전역에 몇 명이나 되었는지 는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베레이아라는 도시의 경우 는 알려져있다. 베레이아는 북이탈리아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인 피아첸차 근교의 아주 작은 도시인데, 여기서 육영자금을 받은 사람은 남자 18명, 여자 1명이었다고 한다.
많은 이자 수입을 바랄 수 없는 것은 농지가 적은 수도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로마는 대도시인 만큼 빈곤 가정의 수도 많다. 그래서 트라야누스는 빈민층에게 매달 약 30킬로그램의 밀을 무상으로 배급하도록 규정한 '소맥법'을 빈곤 가정의 미성년 자녀한테도 확대 적용했다. 밀을 무상으로 배급받을 자격은 성년이 된 시민한테만 주어지는데, 그 자격 연령을 10세까지 낮춘 것이다. 소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이로써 주식인 밀을 공짜로 받게 된 빈곤 가정의 자녀는 무려 5천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원로원 의원은 재산의 3분의 1을 본국 이탈리아에 투자해야 한다는 법률과 빈곤 가정의 자녀에게 육영자금을 제공하도록 규정한 법률은, 입안자인 트라야누스가 의식했든 안 했든 또 하나의 무시할 수 없는 효과를 낳았다. 600명의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속주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은 늘어나기는 할망정 줄어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속주 출신 황제까지 등장했다. 본국 출신 의원들은 이런 상황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었다. 속주 출신인 트라야누스의 등장으로 제국의 중심이 로마와'이탈리아를 떠나 트라야누스의 고향인 에스파냐로 옮아가버리는게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위의 두 법률은 본국을 중시하고 이탈리아의 활성화를 노린 정책으로서, 그들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트라야누스 자신도 이런 불안을 해소할 필요성은 의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황제에 즉위한 뒤에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 이베리아 반도에는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고향 이탈리카에 신전 하나 세워주지 않았다. 오늘날 유적으로 남아 있는 신전 같은 공공건물은 트라야누스가 죽은 뒤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본국과 속주의 격차를 명확히 하기 위해 위의 두 법률-그 중에서도 특히 '알리멘타법'-을 성립시킨 것은 아니다. 본국 출신 원로원 의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성립시킨 것은 더더욱 아니다. 트라야누스는 본국 이탈리아를 속주의 본보기가 되어야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도 로마의 시가지가 속주 도시들의 본보기가 되었듯이. 이탈리아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의 자치기구가속주 도시들의 본보기가 되었듯이. 그렇긴 하지만 두 법률의 목적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원로원 의원은 재산의 3분의 1을 본국 이탈리아에 투자해야 한다는 법률의 목적은 본국에 대한 지도층의 관심을 높이는 데 있었다 인간은 자기 돈을 투자해야만 투자 대상의 성쇠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트라야누스는 육영제도가 속주까지 확대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황제와 아이들을 형상화한 도안은 금화(아우레우스)만이 아니라 일상 통화로 널리 보급되어 있던 은화(데나리우스)나 동전(세스테르티우스)에도 사용되었다.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통화에 비해 로마의 통화는 도안이 다양하고 문자도 많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은 로마의 위정자들이 통화를 선전매체로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로마의 통화는 후세 연구자들에게 일급 사료가 되었지만, 트라야누스도 통화의 로마71 활용법을 실천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수도에서 시작되어 속주까지 파급된 공공건설러시로도 유명하지만, 트라야누스가 수도에 머물러 있었던 서기 99년 가을부터 101년 봄까지는 이 분야에서의 활약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다른 일로 머리가 꽉 차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 시기의 로마는 공공건설의 필요성이 적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공공건설에도 열심이었기 때문에, 살해되었을 당시에도 몇 건의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공사는 모두 네르바 시대에 완성된다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탓도 있어서 포룸토테베레 강 연안의 대규모 창고도 네르바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지만, 고대 로마인은 현대 이탈리아인과 달리 공사의 진척 속도가 빨랐다 해도 이런 대형 건물을 1년 남짓만에 완성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착공은 모두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이루어졌을 텐데, 그 때문에 수도로마의 주민들에게는 공사 현장과 인접하여 사는 생활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교통규제법'에 따라 수도 로마에서는 낮 동안에 짐수레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다만 공공건물 공사용 짐수레는 통행이 허용되었다.
로마는 인구 100만의 도시다. 트라야누스 시대에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는 학자도 있다. 도심은 대단히 혼잡했을 것이다. 무거운 석재를 산더미처럼 실은 짐수레 행렬이 인파를 헤치고 바퀴소리를 내면서 지나간다. 도로는 포장되어 있지만 고무 타이어까지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대, 공사용 자재를 실은 짐수레의 통행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거리가 아름답고 훌륭해지는 것은 좋지만, 주민들은 때로 이 소음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았을까. 누구나 교외에 별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트라야누스와 동시대인이었던 소아시아 출신의 그리스 사람인 디오클리소스토무스는 로마 황제의 3대 책무로 첫째 안전보장, 둘째는 내치, 셋째로는 사회간접자본 정비를 들고 있다. 황제의 책무를 누구보다 훨씬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트라야누스가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무관심할 리는 없었다 실제로 그는 훗날, '러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공공건설사업을 앞장서서 벌인다. 하지만 아무리 의욕이 넘쳐도 건축기사의 협력이 없으면 뜻을 실현할 수 없다. 서기 100년 당시 이런 엔지니어들은 대부분 도나우강 전선에 파견되어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다키아족과의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그러려면 먼저 주도면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전쟁에 투입하기로 결정한 전력도 도미티아누스 때의 3배나 된다. 도나우강 중류에서 하류까지의 전선을 맡고 있는 7개 군단 외에, 라인 강 방위선에서도 빈디슈에 주둔해 있는 제11군단과 본에 주둔해 있는 제1군단에 이동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제2군단과 제30군단도 새로 편성되어 훈련에 들어갔다. 그밖에 라인 강 전선과 유프라테스 강 전선에서 분견대 규모로 참전하는 병력까지 합하면, 주전력인 로마 군단병만 해도 8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로마군은 항상 보조전력인 보조부대나 특수 기능에 뛰어난 부대와 함께 싸우는 방식을 취한다. 반나체 차림으로 싸우는 게르만 병사, 전쟁터에서도 긴옷 차림을 고집하는 오리엔트 궁사, 맹공으로 이름난 북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 출신 기병 등 국적도 다양하고 군장도 다채로운 것이 로마군이다. 온갖 언어가 오가는 가운데, 화려한 갖가지 군장을 갖춘 로마군(트라야누스 원기둥에서)한 군장을 갖춘 근위대가 말을 타고 달려간다. 로마 군대는 곧 로마제국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트라야누스가 벌인 다키아 전쟁에는 군단병 8만 명과 그보다 조금 적은 수의 보조병을 합친 15만 명이 투입된다. 로마 황제가 이끄는 전력으로는 로마 역사상 최대 규모가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현지에서의 모든 준비를 리키니우스 술라에게 일임한다. 술라는 트라야누스가 수도로 귀환한 서기 99년 여름 이후에도 전선에 계속 남아 준비 작업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트라야누스와는 동년배이고 동향인데다 군단 경력도 함께 쌓은 사이였다. 트라야누스의 친구라 해도 좋은, 황제가 누구보다도 신임하고 있던 사내였다. 하지만 준비가 갖추어졌다고 해서 당장 공격에 나서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소 플리니우스도 말했듯이,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되지만 먼저 도발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로마와 다키아 사이에는 도미티아누스와 데케발루스가 맺은 평화협정이 건재해 있었다. 다키아 쪽에서 평화협정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이쪽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다. 다키아 쪽의 도발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도나우강 건너편에 대군이 집결한 것을 보고 겁을 먹은 다키아군의 일부가 분별 없는 행동을 저지른 모양이다 이 소식은 당장 수도 로마에 전해졌다 원정에 적합한 봄이 찾아오자마자 트라야누스는 수도를 떠난다 서기 101년 3월2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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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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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제5편 영원한 자유인
부록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큰스님께서 동서고금의 여러가지 실례를 들면서 자세하게 윤회에 대한 법문을 하셨습니다만, 좀 더 과학적이며 현실적인 윤회의 확증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그에 관한 두 책 -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와 [한번 이상 사는가?] - 의 내용을 짤막하게 간추린 것을 부록으로 엮어 소개합니다.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 가지 사례]는 미국의 이안 스티븐슨교수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윤회에 대한 사례를 1973년까지 약2,000건을 수집 연구한 것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스무 가지를 수록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근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아이들 上,下]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한번 이상 사는가?]는 영국 BBC방송의 프로듀서인 아이버슨 씨가 지은 책입니다. 그는 브록샴 씨가 소장하고 있던, 400여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전생기억에 대하여 조사 연구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여섯 번의 전생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에반스 여사의 전생을 추적 조사하여 윤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을 기술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세번의 전생만 실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윤회하는 인생을 이해하여 이웃과 화목하며, 모든 미망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1. 윤회를 나타내는 스무가지 사례
제1 화 전생의 춤을 추는 스완라타
불교의 발생지이며 힌두교를 믿고 있는 인도에는 종교적으로 전생이나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그에 대한 조사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직접 조사한 사례들이다. 첫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스완라타 미슈러는 1948년 3월 2일 마디아프라디슈 주(州)의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녀의 나이 스무세살 때였다. 1971년 11월의 어느 날,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한 지방도시 중류 가정집 응접실에서 스완라타가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을 보았는데 곁에는 이 집의 주인인 스완라타의 아버지도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춤의 율동에 따라서 벵골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벵골 지방의 가을추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스완라타가 처음으로 이 춤과 노래를 보여준 것은 그녀가 대 여섯살 때였다. 그런데 춤을 추지 않고 노래만 생각해 내거나 노래는 부르지 않고 춤만 추거나 하지는 못하고, 반드시 양쪽을 함께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스물세살의 스완라타는 젊은 나이로 챠타라푸울 지방대학의 식물학 강사로 재직하고 있지만 벵골어는 한 마디도 이해하는 것이 없었다. 인도에는 열 가지도 넘는 언어가 있고 그녀는 힌두어(語) 지역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결국 스완라타는 다섯살 때부터 이 노래와 춤을 추어 왔지만, 전생기억의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에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으로 그녀는 두개의 전생기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벵골 지방과 마디아 프라디슈 주의 두 곳에서두개의 서로 다른 전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 이 벵골의 춤은 물론 벵골 지방에서 생활한 전생에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대개의 경우 열살쯤되면 전생기억을 잊어버리는 것과 달리, 성장한 후에도 전생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스완라타가 마디아 프라디슈 주에서 살았던'비야'로서의 전생 이야기는다음과 같다.
스완라타는 1948년 3월 2일 샤푸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반쯤되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는 도중에 카트니 시(市)를 지나가다가 스완라타는 문득 "우리 집 쪽으로 가줘요"라고 말했다. 이들이 카트니 시내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차를 마셨는데 이때에 또 그녀는 자기 집에 가면 더 맛있는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아버지 미슈러 씨는 딸아이의 말에 난처해졌지만 별로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스완라타는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은 전생에 카트니 시의 파사크 집안의 딸인데 이름은 '비야'라고 하며 결혼해서 아들이 둘 있었다고 말하더니 그들의 이름을 대는 것이었다. 스완라타는 가끔씩 이렇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행동은 퍽 평범한 아이였다. 그래서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몇 년을 지냈다. 그러는 동안에 그녀가 대여섯살쯤 되었을 때 앞에서 말한 춤을 처음으로 가족들 앞에서 추어 보였다. 그리고 춤과 함께 벵골에서의 전생에 대해서도 단편적인 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8년, 그녀가 열살 때, 가족이 챠타라푸울 시(市)로 이사를 했는데, 이때 우연한 계기로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커다란 화제거리가 되었다. 스완라타는 어버지와 함께 어그니호트리 교수댁을 방문하였다. 교수의 부인이 다과를 들고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지금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스완라타가 갑자기 얼굴을 들더니 부인을 지긋이 바라보는데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을 담은 표정이 떠올랐다. 부인은 괴이하게 생각했다. 인도에서는, 특히 계집아이는 자기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친밀감을 보이지 않도록 엄격히 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완라타가 갑자기 일어서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어요. 나는 카트니 근방에 살던 파시크가(家)의 비야예요."
사람들은 놀랐다. 입을 다문 채 그녀를 응시하는 부인에게 스완라타는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는 티롤러 촌(村)의 결혼식에 함께 갔었지요…."
교수 부인은 비야와 함께 시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과 그때 화장실을 찾느라고 애먹었던, 아주 오랜 옛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인도의 농촌에는 화장실이 집 밖에 있는데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줄 알고 온 집 안을 찾아 헤매었던 것이다. 스완라타의 부친은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딸이 하는 말의 진실성을 인정하고 그녀가 하는 말들을 문서로 기록해 두었다. 1958년 9월의 일이다. 스완라타의 나이로 보면 세살 반에서부터 열살 사이에 그녀가 한 말들이다.
"전생에서 그녀는 카트니 시의 파사크 가의 딸 비야였다. 두명의 아들이 있고 이름은 크리슈나 다타와 시빈 다타라고 했다. 파사크 가의 주인은 하리 라르 파사크이다. 집에는 자동차가 있었다. 목의 병으로 죽었다. 자바르푸울의 나피 가(街)에 있는 S.G. 바브랫드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스완라타의 전생기억이 본격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한 것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반년 후인 1959년 3월에 이 방면의 연구가인 버너어지에 의해서이다. 그는 스완라타에게서 전생 이야기를 듣고 카트니 시의파사크 가를 찾아나섰다. 오직 스완라타의 말만을 의지하여 찾아낸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파사크 가는 백색 건물로 문은 검은색이고 쇠빗장이 걸려 있다. 앞문에는 석판(石板)이 깔려 있다. 집 뒤에는 여학교가 있고 가까운 곳에있는 석회 공장과 철도 선로가 집에서 보인다. 파사크 가에는 석회를 바른 방이 넷 있고, 다른 방은 별로 고급으로 꾸며놓지 않았다."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찾아갔을 때 그는 비야의 제일 큰 남동생인 프라서드 파사크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버너어지 씨는 스완라타가 말하던 전생의 이야기들이 그녀 자신의 전인격(前人格)이라는 비야의 생애와 꼭 부합하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비야는 카트니 시 북쪽에 있는 도시 마이하르에 사는 친타미니 판데이라는 사람에게 시집 갔으며 1939년에 사망한 것 등을 프라서드 씨로부터 알아냈다. 진정 이것은 믿기 어렵지만 스완라타가 세살 반 무렵부터 얘기했던 것은 모두 정확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버너어지 씨는 파사크가를 방문해서 스완라타의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고 상세한것을 보고는 그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해서 한 가지 실험을 시도 하였다. 이 해 여름 프라서드 파사크 씨는 아무런 예고없이 챠타라푸울의 미슈러 씨를 방문했다. 스완라타는 부친 미슈러와 함께 이 낯선 방문객과 만났다. 스완라타는 "하리 라르 파사크" 하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은 비야의 부친의 이름과 프라서드의 이름을 뒤섞은 것이었다. 프라서드가 말이 없자 그녀는 정확하게 그를 기억한 듯 다시 '바브'라고 불렀다. 그것은 가족끼리 부르던 그라서드의 애칭이었다. 카트니에 돌아온 프라서드는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마이하르의 비야의 유가족에게 전했다. 그러고서 약 한달 뒤에 비야의 남편과 아들을 비롯한 열한 명의 사람들이 챠타라푸울의 스완라타를 만나러 갔다. 스완라타는 그곳에 찾아온 사람들을 한 사람씩 지적하면서 모르는 사람은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인 친타미니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한 태도로 "당신을 카트니와 바이하르에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타미니가 40여년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자 그중에서 소년 시절의 친타미니를 가리켰다. 또 아들을 보자 "내 아들 줄리"라고 정확히 이름을 대어 지적했다. 이전에는 기억이 혼란해서 아들의 이름을 크리슈나 다타라고 불렀지만 이 때에는 아들을 보고 정확하게 기억을 되살렸던 것이다.
이 만남에서 스완라타는 한 가지 사건을 말했다. 그것은 비야가 아니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으로, 남편인 친타미니가 자기가 상자 속에 넣어둔 돈 1,200루피를 훔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도난 사건은 비야와 남편 이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런 놀라운 만남이 있었던 같은 해 여름, 스완라타는 비야의 생애와 관련이 있는 고장으로 옮겨가면서 전생 일을 확인해 보였다. 먼저 카트니의 파사크 가에 갔을 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형제들은 물론이고 친척, 가정부 등 모두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비야 생전의 사실 두 가지를 그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 하나는 파사크 가의 집밖에 달려 있던 난간인데 이것은 비야가 죽은 뒤에 집을 개조하면서 없어졌다. 또 하나는 마당에 있던 나무에 대해서 "왜 그 나무를 베었는가?" 하고 물은 것이었다. 그 나무는 이, 삼 개월 전에 태풍으로 뿌리채 뽑혀버려서 아무도 거기에 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버린것이다. 그리고 파사크 가에서 '바다'라는 과자를 내놓자 그녀는 "예전에 잘 먹던 과자다"라고 했다. 사실 비야가 좋아한 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바다'는 챠타라푸울의 미슈러가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과자였다.
또 바이하르의 시댁에서는 마흔 명쯤 되는 사람들 중에서 아는 사람을 지적해냈다. 또 비야의 방과 강으로 목욕가는 길을 알고 있었고, 비야보다 먼저 사망한 시누이의 이야기도 했다. 티롤러 부락은 비야가 죽기 직전에 있던 곳이데, 여기서도 비야가 죽은 방을 가리키는 등 비야 생전에 있었던 집안 일에 대해 질문하기도 해서 전생기억의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앞에서 말한 춤과 노래는 벵골지방에서의, 스완라타의 또 하나의 전생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 그녀가 벵골의 전생 이야기를 시작한 것도 비야로서의 전생기억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서너살쯤의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두개의 전생기억이 서로 뒤섞여 혼동되는 듯 싶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그녀는 두개의 기억을 따로따로 구별하게 되었다. 벵골에서의 스완라타는 다음과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앗삼 지방 지렛트에서 생활하였고 이름은 카무렛슈였다. 그것은 비야의 다음 생애였다. 아홉살까지 살다가 미슈러 가에 환생했다."
곧, 스완라타의 전생이야기에 의하면, 그녀의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은 비야로서의 전생과 현생의 스완라타와의 중간에 끼어 있는 약 9년 동안 이 되는 셈이다. 곧, 다시 말해 비야의 죽음이 1939년, 스완라타의 탄생이 1948년임을 생각하면 그 중간의 9년간이 카무렛슈의 생애인 셈이다. (비야의 죽음이 1939년인 것은 버너어지 씨가 파사크 가를 방문한 1959년 3월에 비로소 확인된 것이다.) 중간적 전생이 9년 정도라는 그녀의 주장은 실제의 사실과 잘 부합된다. 또 카무렛슈로서의 전생에 대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비야에 비하면 훨씬 단편적이지만, 그래도 지렛트 지역의 지리적특성에 대한 그녀의 말은 현실적인 지렛트의 지리적 상황과 잘 부합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무렛슈가 지렛트의 어느 집의 누구였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앗삼 주의 지렛트 지구가 1947년 인도의 파키스탄 분할에 의해 현재는 방글라데시에 편입되어 조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스완라타의 춤'은 벵골 지역의 앗삼 주에있는 지렛트에서의 그녀의 전생에 의거한 춤이라는 것이다. 스완라타가 보통 사람들이 노래나 춤을 배우는 것과 같은 방법, 곧,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서 '스완라타의 춤'을 배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완라타가 자라온 마디에 프라디슈 주는 힌두어를 쓰는 곳으로서 벵골지방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러나 그녀가 춤을 출때에 부르는 노래는 벵골어인데 그녀의 양친은 물론이고 친지중에도 벵골어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의 노래가 벵골어라는 것이 판명된 것은 1963년으로 열다섯살 때이다. 벵골 출신의 파르 교수가 그 춤을 보고 이를 기록한 후조사해 보니 그녀가 부르는 세개의 노래 중 두개는 벵골 출신의 시성(詩聖) 타골의 시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노래는 인도에서 1940년 이후 영화, 라디오, 레코드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스완라타는 열살이 될 때까지 영화관에 간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처음 춤을 보여 준 것은 대여섯살 때의 일이다.) 파르 교수는 그 뒤 타골 자신이 설립한 학교를 방문했을 때 스완라타가 부르는 노래와 춤의 일부분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곡조나 춤이 그녀가 하는 것과 꼭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봄의 축제가 열리고 있고 그 때에는 스완라타의 춤의 일부분이 소녀들에 의해서 연출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사실에서 "지렛트에 살고 있을 때 벵골어의 노래와 춤을 알고 있는 친구로부터 배웠다"고 하는 말은 그녀의 말대로 전생에 지렛트이 카무렛슈라면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현세의 스완라타가 살고 있는 미슈러 가(家)와 전생의 비야가 살았던 파사크 가(家)의 양 집안 사이에 접촉이 이루어진 때로부터 2년이 지난 1961년, 스완라타가 열 세살일 때, 이안 스티븐슨 교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 때 전생 일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파사크의 가족에 대해 강한 친밀감을 보이고 그들과 헤어질 때나 만날 때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비야의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머니 비야' 로서의 태도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이미 장성한 서른다섯살의 아들과 열세살의 어린 어머니, 이는 세상에서도 진기한 모자간인 것이다. 그러 나 그 자리에 미슈러 가의 사람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현재의 미슈러의 가족들에게도 애정을 갖고 있었다. 스완라타의 경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열살쯤 되면 전생기억이 차츰 희미해지는 많은 다른 사례들과는 달리 그녀의 기억이 오래 유지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에도 '스완라타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1973년 5월 그녀는 결혼한다고 했다. 그녀 스스로 두개의 생애에 대한 기억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난 생애의 일에 생각히 몰입되어 있을 때에는 현재의 일은 잊어버립니다만 그러다가 곧 현재로 되돌아옵니다.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뭔가 특별한 것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에 나의 마음에는 그것과관련이 있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라서 전생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나를 만족시켜 줍니다. 요컨대 과거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커다란 요소는 그 시점에서의 상황 조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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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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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마지막 수업 - 모리 슈워츠
열하나. 삶으로 이어지는 죽음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우리가 느끼는 것만큼 멀지 않다는 생각을 즐겁게 간직하십시오. 죽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과 계약을 맺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죽음에 대해 그처럼 소란을 떨고 필사적으로 이를 거부하고자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자연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태어난 것은 모두 죽습니다. 나는 이 간단하면서도 아주 심오한 진리를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 명상 선생이 며칠 전에 나를 아주 흥분시키는 말을 했습니다.
"모리, 어쩌면 삶과 죽음에 관한 당신의 시작을 재검토해야 할 것 같아요. 어쩌면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멀지 않을지도 몰라요."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커다란 두 개의 산 사이에 있는 깊은 계곡 같은게 아니라는 겁니까? 작은 강에 세워진 조그만 다리 같은 것이라는 말이에요?"
나는 언제나 삶과 죽음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명상 선생과 틈틈이 대화를 나누었고, 혼자서 명상을 계속했으며, 전에 읽은 적이 있는 불교 서적의 가르침들을 다시 기억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나도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이제 죽음 쪽으로 건너가야 하는 내게 아주 큰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해줍니다.
죽음의 두 번째 의미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을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내 경우 나의 질병과 임박한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들이 다시 한데 모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서로를 돌보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과 계속 연락을 하고 그들 역시 나와 계속 연락을 합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고, 같이 모여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영적인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교환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이야기하고, 끌어안고 함께 울기도 합니다. 친구들은 죽어 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법에 대해 나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내가 살아가는 것을 봄으로 해서 용기와 의욕을 얻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반면에 그들의 기대가 나게 용기를 심어 줍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연민과 사랑,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말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자리에 누워서야 이것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는 안 됩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아직 삶이 계속되는 동안 이 말들을 실천하십시오. 스티븐 레바인은 말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하게 이성적인 행동이다."
똑같은 얘기를 비틀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입니다."
W. H. 오든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라. 그러지 못할 바에는 죽어라."
이밖에 예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요? 우리의 자아가 언제나 방해를 하면서 '나, 내가 제일 먼저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서로를 위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 중에서 가장 사랑이 많이 담겨 있는 행동입니다.
영혼의 동반자
여러분의 영적인 탐구에 한 명 이상의 친구를 포함시키십시오. 영적인 유대를 향해 가는 길이 조금은 덜 힘들게 느껴질 것입니다. 최근에 나는 가까운 친구 몇 명과 '죽음과 영(신령 영) 클럽'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맞는 영적인 유대와 영적인 적응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란 문제를 놓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 우리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이런 것들입니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내세라는 것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정말로 죽은 다음에 다시 태어나는가? 우리가 죽음 다음에 무엇이든 있기는 있는 것인가? 탐구의 과정에서 무언가 삶과 죽음에 관해 도움이 될 만한 작은 깨달음들을 얻을 수만 있다면,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친구들과의 이 모임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부드럽고 착한 부분을 어루만져서 우리의 공통된 인간다움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시 공식적인 모임을 만들지는 않더라도 가족이나 친구에게 정기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화제가 빈곤해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일대일 대화나 소그룹 토론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깊은 이야기를 할 때는 무슨 화제가 나와도 좋은 토론을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말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는 서로가 공감하고 있다는 느낌 역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내가 도달한 지점에 도달하면, '젊었을 때는 누구나 자기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들어 있는 순수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는 조만간 가라앉을 것입니다. 앞으로 110년 후면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사람중에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자신의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물건을 모아들이고, 우리의 공통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참다운 삶과 죽음의 길
살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죽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는 법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살아가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훌륭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언제라도 죽은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임박하면 목적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하고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끝이 가까웠다고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병에 걸린 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설정한 목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꿈꾸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용기, 위엄, 관대함, 유머, 사랑, 열린 마음, 인내심, 자기 존중심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해서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기가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더 급하게 노력해야 할 필요가 생겨날 뿐입니다.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적어질 것입니다. 나는 내 명상 선생이 이야기해 준 우화로 이 책을 끝내고 싶습니다. 그것은 어떤 물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작은 물결이 하나 있었습니다. 남자인 그 물결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에서 위아래로 흔들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자신이 곧 해안에 부딪치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커다랗고 널다란 바다에서 그는 서서히 해안을 향해 움직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 있으면 그의 존재가 사라져 버릴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난 어떻게 되는 거야?"
그는 절망에 찬 표벙으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와 함께 오는 물결 중에 여자 물결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었습니다. 그 여자 물결이 남자 물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왜 그렇게 축 처져 있니?"
남자 물결이 말했습니다.
"넌 몰라? 우린 조금 있으면 해안에 부딪쳐서 사라져 버릴 거야."
그러자 여자 물결이 말했습니다.
"모르는 건 너야. 우린 그냥 물결이 아니라 바다의 일부야."
나도 이것을 믿습니다. 나는 물결이 아니라 온 인류의 일부입니다. 나는 죽겠지만 동시에 계속 살아갈 것입니다. 다른 형태로 살게 되는 것일까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내가 더 커다란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믿습니다.
죽음을 가르치는 겸손한 교사
너는 이 정원으로 늘 되돌아왔다. 네가 홀로 고통스러워했던 길들이 지워진다. 풀들은 죽은 너의 얼굴을 의미한다. -이브 본느프와, [위협당하는 증인]
근대와 죽음 - 죽음은 이제 추문이다
인간이 인간적 사실들을 중심으로 세계 원리를 직조하기 시작한 근대화 과정은, 모순되게도,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구성 요소인 육체를 서서히 소외시킨 과정과 일치한다. 자아의 위대함에 눈뜨기 시작한 인간은 신을 쫓아내면서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을 꿈꾸었다. 인간은 자기가 언젠가 죽는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자필멸(살 생, 놈 자, 반드시 필, 멸망할 멸)의 원칙을 따르는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부정해 왔다. 인간의 자연은 제도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통제되고 소독되기 시작한다. 원수인 자연. 그 때문에 인간이 죽어 가야 하는 자연. 베르사이유의 그 발작적 인공(사람 인, 장인 공)은 자연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맹렬한 증오이다. 자아의 대표자인 왕을 위해 예쁘게 단장한 시녀로 전락한 자연. 그런 자연관은 여성의 육체에도 고스란히 투사된다. 인간의 대표자인 남성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코르셋 속에 부푸는 육체를 우겨 넣은 베르사이유의 궁녀들과, 마지막 나뭇잎까지 다듬어진 베르사이유 정원은 완전한 데칼코마니이다. 그렇게 근대의 빛나는 이성주의는 자연인 인간의 필멸성으로부터 단호하게 고개를 돌린다.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19세기를 지나 20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지칠 줄 모르고 달려온 근대의 천사는 자연의 악마를 무저갱에 가둔다. 그렇게해서 인간의 자연인 육체와, 그 육체의 가장 중요한 생물학적 특성의 발현인 성(성 품 성), 그리고 육체의 궁극적 귀결인 죽음은 서서히 인간의 지평으로부터 쫓겨가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병원을 발명해서 병든 자들을 격리시키고, 양로원에 노인들을 처박고, 변소를 화장실(화할 화, 단장할 장, 집 실)로 바꾸어서, 냄새를 풍기는 육체를 소독한다. 육체의 귀결인 죽음, 아니 오히려 주검은 인간의 지평으로부터 철저하게 감추어진다. 죽음은 이제 추문이다. 인간은, 홀로, 외롭게, 죄지은 자처럼 죽어간다. 그대 이전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달랐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인간적 사실들 중의 하나였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죽음은 개별자의 고독한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겪는 공적인 사건이었다. 죽은 자의 주변에는 산 자들이, 그러니까 언젠가 죽어 갈 자들이 모여든다. 어린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죽음의 장면을 지켜보면서 근대 이전의 인간들은 미리 죽음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은 형이상학적으로 규명되는 사건이었다. 죽은 자는 형이상학의 울타리 안에서 죽어 간다. 죽은 자의 육체는 와해되지만, 그의 존재는 형이상학이라는 다른 형태 안에 간직되는 것이다. 죽음은 두렵기는 하지만, 설명되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죽음을 배울 어떤 기회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신도 종교도 더이상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닥치는 죽음 앞에 홀로, 형이상학적 설명도 없이 홀로 서 있다.
발달된 의술 덕택에 평균 수명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인간이 질병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학의 발달과 더불어 병도 진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온갖 종류의 현대병들이 세로 등장하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교통 사고, 테러, 갈수록 잔혹해지는 범죄 등, 발달한 의술이 병을 정복한 비율 이상으로 인간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을 확률은 어느 때보다도 크다. 게다가, 현대 사회의 문명은 죽음뿐만 아니라, 육체의 노쇠 자체를 구조적으로 외면한다. 모든 문화가 젊은이들을 위주로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노르베트 엘리아스는 현대 문명이 죽음뿐만 아니라 늙음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구성원들에게서 죽음을 배울 기회 자체를 빼앗아 버린다고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노인들은 스스로를 '창피스럽게' 느낀다. 젊은이들은 언제까지나 젊은 채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빠져 있다. 이제 아무도 한 개인에게 죽음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컴퓨터가 발달하고, 사이버 문화가 발달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점점 더 가속화되어 가고 있다. 육체는 점점 더 육체의 이미지에 의해 지워져 가고 있다.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미지의 의미는 점점 더 타락해 간다. 이미지는 생의 직접성을, 그것의 필멸성을 조롱하면서 실재 위에 군림한다. 죽다니? 추접스럽기도 해라.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난 이렇게 한결같은데!
죽음을 가르치기 - 다시 공동체 안으로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엄연히 필멸의 준재이며, 자연이 생자필멸의 법칙을 따르듯, 인간도 그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육체는 여전히 두께이며 불명이며, 들쭉날쭉한 물질이며, 언젠가 쓰러져 썩는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탈근대 사회에서 들어서서 육체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따오른 것은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다. 인간은 너무나 오랫동안 주제넘게 신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이제 죽음이 되돌아온다. 죽음은 다시 인간적 사실 안에 편입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죽음을 배울 기회가 없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자청하고 나선 모리 슈워츠의 결정은 시대적으로 대단히 시의적절하다. 이 '죽음 강의'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요소들이 숨어 있다. 첫째, 모리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는 루게릭 병에 걸려 있다. 그 병은 육체의 능력을 하나씩 빼앗아, 결국 나중에는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간다. 둘째, 그는 사회학 교수였던 사람이다. 셋째, 모리의 강의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리의 마지막 강의의 성격을 분명히 규명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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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강의는 텔레비젼을 통해 일반인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늙고 병들어서 죽어 가는 육체를 대중 앞에 텍스트로 제시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 없이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결정은 현대의 매끈한 이상적 육체의 이미지에 대한 항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모리는 육체가 텔레비젼 스타들의 육체처럼 이상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정작 자신의 육체처럼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물질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가르친다. 그야말로 몸으로, 몸을 읽을거리로 사용해서 가르치는 셈이다. 아직은 살아 있는, 그러나 곧 죽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자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살아 있는 장례식'. 모리의 육체가 서서히 능력을 잃어서 어쩔 수 없이 타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또 그가 전직 사회학 교수였다는 사실도 이 강의의 중요한 특성이다. 모리는 인간은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며, 인간이 겪는 일은 그 무엇이나 타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병은 육체적 사실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분명한 현실이다. 그 사실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는 병든 자가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세심하고 찬찬하게 보여 준다. 죽음은 다시 공동체의 사건으로 탈바꿈한다.
모리의 강의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이다. 이 강의가 대중들을 향해서 발언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필수적인 선택이다. 모리 자신의 학문적 소양은 대중과의 만남을 위해 겸손하게 유보된다. 이 선택 역시 죽음을 공동체적 사건으로 만드는 데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죽어 가는 자가 죽음에 대해 하는 강의는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리는 죽음이 죽어 가는 자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자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따라서, 이 책은 '죽음' 그 자체에 관한 책이 아니라, '죽음' 또는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는 '병'을 매개로 죽어 가는 자와 건강하게 살아 있는 자가 맺고 잇는 관계에 대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죽음은 인간적 사실의 전부를 상대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 인간은 죽음을 매개로 열린 관계 안에 다시 자리잡는다. 내가 나인 바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네가 죽어 가듯이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죽음의 통로를 통하여 나보다 먼저 이 세상에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에 있게 될 모든 사람들과 연계된다. 따라서 죽음은 벽이 아니라 통로이다.
영적 유대에 관하여
그러나 모리의 가르침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적인 관계 안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지만, 그러나 모리는 그것만이 인간됨의 본질을 결정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관계에 의해서 규정되지만, 그러나 '핵심 자아' 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그런 가르침은 희미한 밑그림만으로 그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화된 이 노학자가 죽음 앞에서 어떤 영적 실존에 대해 말하고 싶어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사회학적 자아가 아닌 다른 자아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다는 가정에 동의한다. 결국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할 이 숨겨진 자아와 조우하는 것, 그것이 모리의 가르침의 최종적 메시지이다. 사회학자 어빈 고프만은 양파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가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해체주의자들도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같은 말을 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믿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속의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 핵심 자아라고 일컬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서 활동하는 이 숨겨진 자아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내적 공간'을 확보하는 일은, 타인들과의 관계에 관심이 없는 나르시스트가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리의 입장은 단호하다. 즉, 각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자아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아도 공동체와 타인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존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주변의 세상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리가 영적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까닭은, 한 인간이 깊은 내적 자아와 조우함으로써 진정으로 겸손한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형제 자매들'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소외된 떠돌이들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서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진실로 아는 자는 진실로 자신을 귀하게 여기며, 자신에 대한 귀한 존경심을 통하여 타인들을 자기 자신처럼 귀하게 여기는 방법을 배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 줄 모른다. 왜냐하면, 자신을 믿지 못하므로, 인간성에 대한 확실한 비젼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깊은 자아에 도달한 자는 오만하지 않다. 한 인간의 깊은 자아는 사적인 자아가 아니라 공적인 자아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모리는 조심스럽게 '신'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뭐라고 불러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우리보다 더 높은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논의는 깊이 진전되지 않는다. 세속화가 깊이 진행된 세대답게 그 역시 너무나 오랫동안 불가지론자로 살아왔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영적 유대'에 대해 조심스럽게 운을 뗀다. 그가 말하는 '영적 유대'의 본질이 어떤 것이든, 나는 모리의 생각을 여기서 길게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귀와 눈을 열어 두라고 여러분께 부탁하고 싶을 뿐이다. 세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영적 유대'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영혼'은 이제 더 이상 전근대의 잠꼬대가 아니다. 영혼은 오히려 모든 첨단의 담론들이 즐겨 다루는 화두가 되어가고 있다. 어떤 의미심장한, 그러나 고요한 항의가 지구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영상주의는 전근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오고 있다. 성인(성인 성, 사람 인)들이 무덤을 열어짖히고 우리들 사이로 돌아오고 있다. 어쩌면, 당신 자신이, 부활한 성인의 환생인지도 모른다. 후기산업사회의 온갖 욕망의 지꺼기 아래서 심음하고 있는 당신 자신이 바로 성인의 숨겨진 씨앗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다만, 눈과 귀와 마음을 열고 영혼을 다해 생을, 그리고 당신 자신을 바라보기 바란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만, 있는 힘을 다해 당신 자신이 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은 생을 읽는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저절로 죽음을 읽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죽음은 생의 엄연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당신을 죽이지 않는다. 죽음은 당신을 살린다.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게 한다. 죽음을 받아들인 당신은 외롭지 않다. 당신은 공동체의 운명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기 때문이다. 김정란(시인,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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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사회/문화/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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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6장 발렌티노에 대한 사절 시기 (2/2)
편지에는 쓰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려는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는 가엾은 아내 마리에타의 불평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불평을 막기 위해서 이번 출장이 8일 정도면 끝날 것이라고 말해 놓았으나, 이제 벌써 8주가 지나고 보니 그녀의 심정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혼자 지내기가 싫었던 그녀는 생질인 피에로 델 네로의 집으로 가버렸다. 그곳에서 남편도 돈도 없는 자시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된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도 재산도 모두 내동대이쳐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잘아려 있지 않지만 그를 매우 근심케 한 듯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관직을 재임용받을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당사자가 본국에 없다는 사실이 언제나 불리하게 작용함을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출장중에 자신의 관직을 잃게 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친구들은 곤판로니에레가 그를 특히 좋아하고 또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거듭 이야기했으며, 곤팔로니에레가 그에게 보낸 편지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재임용 문제에 대해 알라만노 살비아티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 동안 공적으로 보아 재임용에 관해 부탁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정부 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특히 피렌체인들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스스로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오나코르시에게서 온 소식 역시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새 정부가 먼저 서기들의 봉급을 깎고 나서, 이어 그들 자체를 줄이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관계하는 두 서기국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는 동안, 제2서기국은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관장 아래 있었으나, 서기보들의 말로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는 또 대학 쪽에도 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지금 난 내 일과 당신 일에다 강의까지 겹쳐서 죽을 지경이네.) 그를 대신해서 10인위원회 일을 하고 있었던 그의 친구 비아조는 편지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자네가 맡던 일을 보고 있는데,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일에 대해 또는 동료들에 대해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 주곤 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서로 다투거나 운수 사나운 일을 당하곤 했다. 예컨데 안드레아 디 로몰로가 주사위 노름에 푹 빠져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안토니오 델라 발레와 안드레아가 노름 때문에 사무실에서 다투다가 안드레아가 안토니오를 발로 차 그의 등허리를 다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사무실에서의 이러한 장난들이 음담패설로 윤색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보다 좀더 그럴 듯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 준 사람은 다른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가 겪은 재수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루는 어수룩한 정무위원 한 사람이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는 (어이, 어이, 이것 좀 받아써보게) 하고 소리쳤는데, 다른 동료들은 모두 슬금슬금 도망쳐 버리고 자기만 잡혀서 그 지겨운 글을 받아써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지들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우울한 보르자의 궁에서 빠져나와 잠시나마 톡톡 튀는 피렌체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모두들 포복절도하게 만든) 자신의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남아 잇지 않다. 그가 친구들에게 쓴 다른 편지들로 미루어볼 때, 이는 이탈리아 문학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귀환을 원했던 모든 이유들에 앞서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실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탄원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신의 귀환 문제를 좀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실제보다 더 아픈 척했는지 어떤지는 자세히 알 지 못한다. 하지만 11월 22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틀 전 열이 심했으며, 지금도 틍증은 여전합니다.) 12월 6일에는 또 이렇게 썼다. (열이틀째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들것에 실려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렌체 정부는 그를 귀환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들것에 실려서라도 발렌티노의 뒤를 쫓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발렌티노 공작은 전군을 휘몰아 이곳저곳 집적거릴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 누군가가 분명히 손해를 입게 되겠지만 불똥이 어디로 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피렌체인들은 공작의 이러한 움직임과 가능하다면 그의 속마음까지도 가까이서 지켜볼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그 일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정부의 무리한 요구에 참다 못한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정무위원회에는 죄송한 말이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누구도 그러한 일들을 알아맞추기란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이곳의 군주는 만사를 그 자신이 혼자 결정하나는 것입니다. 공상이나 꿈같은 일은 쓰려고 하지 않는 다음에야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사람들을 모아야만 하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어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에서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을 읽고 상황을 분석했지만, 발렌티노의 첫 일격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목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가 사태를 관망하면서 군세를 모으고 있으며, 그리하여 적이 그를 치기 전에 그가 적을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미 보르가 패배하여 군세를 상실했던 그 당시부터 내내 마카아벨리가 의심 많은 정무위원회에 보고해 온 사실이었다. 11월 19일, 여느 때처럼 발렌티노와 사담을 나누게 된 그는, 자신이 항상 그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사절로 온 첫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겨놓았더라면 (발렌티노에게는 그것이 마치 예언처럼 보였으리라는 것)을 아첨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자신감 속에서 감히 이야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말했으나, 대체로 (발렌티노는 혼자이고 적은 다수이므로 그러한 추론의 연결고리는 쉽사리 끊어질 수도 있음)을 주지시켰다.
사실 평화는 바야프로 가까이 와 있었다. 발렌티노느 마음이 바뀐 프랑스 왕이 다시 휘하에 받아들인 벤티볼리오뿐만 아니라 그가 주도면밀한 계산 아래 (반군 무리에서 꾀어낸) 그 진중치 못한 오르시니 가의 인물들과도 화평을 맺었으며, 이에 다른 반군 우두머리들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조네에서 공모자들을 묶어놓았던 결속의 끝이 끊어지게 된 데는 왕과 교황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렌티노의 끈질긴 위장도 한몫을 하였다. 그에게는 어제의 적들과 그럴 듯하게 쌓아놓은 유대를 파기해 버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세상사가 흘러가는 방식이라는 점은 마키아벨리가 (특히 오늘날 신의라는 것이 얼마나 유명무실한가를 생각하게 하면서) (이처럼 평화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전쟁을 분비하는 발렌티노의 태도에 대해) 10인위원회에 써보낸 편지에 예견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비텔로초가 발렌티노에게 (복종과 감사의 정이 넘치는 )편지를 보냈음을 10인위원회에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발렌티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읽거나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가 무슨일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무언가 견해를 말하라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곧 맞아떨어지게 된다.
12월 9일 발렌티노는 군대를 체세나로 이동시켰고, 마키아벨리는 이틀 뒤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는데, 그것은 몸도 돈도 좋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설사(상황이 돌아가는 대로 따른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위협조의 편지까지 쓴 바 있었다. 이에 대해 소데리니는 (지금 무엇보다 긴급한 일은 당신의 경비를 조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답장과 함께 그에게 25두카토의 돈을 보내왔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어려운 형편을 크게 도닥거려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당신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진행되는 지를 계속 주시하면서 수시로 상황을 보고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그쪽 형편이 불리는 대로 당신의 복귀를 주선할 것이며, 그때까지도 발렌티노공과 계속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당신의 후임자를 임명할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도 당분간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일을 충실히 봐지기 바라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해나갔음은 물론이다. 곤팔로니에레의 처방이 그에게 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세나에서의 상황 판단은 이몰라에서보다 결코 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누구는 발렌티노가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베네치아에 대적하기 위해 라벤나와 체르비아로 갈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가 먼저(자신을 모욕되게 했고 나라까지도 거의 잃게 하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위인들을 확실히 처리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단지 방관자에 불과하지 또는 그이 행동을 부추기는 배후의 힘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교황은 로마에서 사태가 이렇게 지연된 데 대해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그가 큰 소리로 (이 창녀의 자식 같은 놈, 이 사생아 같은 놈!) 하면서 그를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포도주 맛을 속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란 화를 내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속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법인 것이다.
12월 26일, 발렌티노는 4일 전 갑자기 그곳을 떠난 프랑스 창기병을 제외한 모든 군세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구한 억측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떠나면서, 한때 로마냐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 자신의 충실한 도구였던 그 권세 있고 잔혹했던 라미로 로르콰의 둘로 절단된 시체를 시 광장에 두고 갔다.((군주론) 7장에 나오는 동일 인물 라미오 데 오르코의 예를 참조할 것 - 옮긴이). 이 피비린내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는 자신의 부하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를 털어내고, 스스로가 (부하의 자리를 그 공과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로운 군주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숨기려 하였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유명한 사건 역시 그로부터 어떤 교훈과 행위 규범을 끌어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주목하였다.
바로 그 12월 26일, 그리고 그 해의 남은 마지막 5일 동안, 사태는 마치 체스판에서처럼 연이어 숨가쁘게 돌아갔다.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는 발렌티노의 이름 아래 그 명령을 받들어 세니갈리아르 점령하였다. 그는 그의 군세를 숨기기 위해서 병사들을 소규모 분대로 편성하여 파노로 이동시켰는데, 정작 그 자신은 그곳에서 매우 신속하게 세니갈리아로 달려갔다. 도중에 비텔로초, 파올로 오르시니, 그라비나 공작 등과 우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난 그는, 그들과 화기애애하게 담소하면서 자신이 군대 일부를 거느리고 그 동시에 입성하엿따. 도착 후, 그는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신호를 보내면 즉시 장군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뒤, 보르자니 가와 비텔리의 군대를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이미 파노에서 발렌티노로부터 이 일에 대해 슬쩍 암시를 받앗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 이 혼란의 장면을 목격하였다. 사태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10인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약탈이 진행중이고, 지금 시각은 23시입니다. 저는 매우 걱정이 됩니다. 이 편지를 전해 줄 사람을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올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내일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비텔로초와 올리베로토에겍 그 해의 말일은 곧 자신들의 생에서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다른 둘의 처형은 교황이 오르시니 추기경과 그 가문의 나머지 인물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의 행위는 물론 죄악이었지만, 그것은 완벽한 일격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에게는 발렌티노라는 인물이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왔다.
새벽 2시경, 보르자는 그를 불러 (더없이 환한 얼굴로)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였다. 그리고는 피렌체인들로서는 (매우 똑똑하고 솔깃하게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아마 2O만 두카토라도 쉽게내놓았을 것이고, 또 (설사 그랬다 해도) 결코로 자신이 한 것만큼(그렇게 깨끗이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었을)바로 그 시점에 그들을 없애준데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치타 디 카스텔로와 페루자 공략에 일조할 군대를 보내줄 것을 피렌체에 요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발렌티노의 움직임은 이 편지들을 가재고 간 전령들보다 더 빨랐다. 1503년 1월 1일, 그는 이미 전군을 몰아 코리날도에 가 있었으며, 3일에는 사쏘페라토에, 그리고 5일에는 괄도에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그날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치타 디 카스텔로의 사절들로부터 항복의 뜻을 전해 받았고, 이튿날에는 페루자의 사절들이 역시 같은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들의 말로는 도시민들이 (두카 두카) (두카란 공작이라는 뜻 - 옮긴이)하고 발렌티노의 이름을 외치면서 일어났으며, 잠파올로 발리오니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의 얼마 남지 않은 잔당을 이끌고 황급히 시에나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에나 판돌포 페트루치 역시 발렌티노의 발톱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판돌포는 1487년 36세의 나이로 시에나의 정권을 장악한 뒤, 자신의 장인을 암살하고 마조네 가를 부추겨 보르자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만든 인물임 - 옮긴이)
페루자도 시에나도 들었네
히드라의 숨소리를.
두 참주는 도망쳤네
그의 분노를 피해.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랜 후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썼다. 당시 이히드라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8일 그는 아씨시에 있었고, 10일에는 토르차노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시에나 사건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페트루치를 내쫓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피렌체가 이 일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의중을 내보였다. 그의 군대는 이제 시에나의 속령인 큐시를 향하고 있었다. 발렌티노와 또 한번 긴 말의 공방전을 나눈 치타 델라피에베에서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는 자신이 되풀이해서 올렸던 진언을 받아들여 그들이 마침내 발렌티노에 보내는 대사로 명망 인사인 야코포 살비아티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20일, 판돌포 역시 히드라로부터 도망치고 잇을 때, 마키아벨리는 보르자 진영을 떠나 피렌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23일 집으로 돌아왔다.
마키아벨리의 사절 임무는 보르자의 그 은밀한 심중에서 복수의 계획이 처음 싹 튼 때에 시작하여 1502년말 피로 물든 복수극이 일어나던 그 비극적인 날 밤에 끝난 셈이었다. 그가 이러한 사적의 기간을 통해 얻은 유일한 결실이 유명한 (발렌티노가 비텔로초 비텔리 등을 죽이는데 사용한 방법에 관한 묘사 Descrizione del modo tenuto dal Duca Valentino nell'sammazzare Vitellozzo Vitelli ecc)인데, 이는 복수극의 전말을 보고서 형식이 아닌 순수한 문학 작품의 형식으로 짤막하게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르나 이 작품을 그 사건에 관한 공식 서한들과 비교해 본 학자들에 따르면,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하거나 또는 사시을 과장하면서 서건의 과정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로르 이상화라려 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그 군주가 지닌 어떤 품성과 조건들을 각별히 칭송했을 뿐이며, 그리하여 마치 화가가 자신의 이상저인 그림을 위해 삶으로부터 어떤 측면들을 취하는 것과 같이, 그도 이러한 품성과 조건들을 어떤 추상적인 군주상에 대입시켜 당시의 다른 군주들 속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런 인물을 찾지는 못했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이 사절 임무중 보르자란 선생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해 왔고, 우리 역시 그것을 이 자에서 지적한 바 잇다. 이 말의 뜻은, 무언가 분명히 위대하고 기억될 만한 행적, 무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러한 행적 앞에서, 그는 그로부터 과학적 이론들을 끌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마키아벨리가 바로 오직 그때 그곳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배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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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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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지혜가 담긴 109가지 이야기 - 김방이
1.사물을 바로 보는 눈
혁명은 부드러운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쭈그렁 밤송이
건강에 대해 관심이 높아가는 시대이다. 건강에 스트레스는 악이고 즐거움은 선이라고 한다. 과연 꼭 그런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드는 까닭은 건강하게 활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이 많은 반면, 잔병치레를 자주하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노자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장자의 이야기를 보자.
우산에 아름답고 곧게 자란 나무가 많았다. 그 나무가 곧고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재목으로 쓰려고 마구 도끼질을 해댔다. 나무가 없어지자 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소나 양을 방목하여 마구 뜯어먹게 하였다. 우산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버리고 벌거숭이의 추한 산이 되었다. 쭈그렁 밤송이 삼년 가듯 완전치 못한 것, 보기 싫은 것은 그대로 놔두기 때문에 오래 간다. 곧게 자란 나무는 그럴 염려 없이 제 수명을 다한다. 도덕경의 ‘곡즉전’이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건강관리에 이 이야기를 도입해 보자. 건강하다고 몸을 마구 써보라. 우산과 같이 쉽게 망가진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한 산도 자꾸 관리를 하다 보면 아름다워지듯이 우리 몸도 마찬가지이다. 잔병치레 많이 하는 사람은 건강에 조심하기 때문에 오래 사는 데 비하여 건강한 사람은 건강을 과신하여 몸을 함부로 하기 때문에 갑자기 죽는 일이 많다. 항상 적절한 긴장과 자극, 건전한 위기의식이 있어야만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 생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
논에 미꾸라지를 키울 때 한쪽 논에는 미꾸라지만 넣고, 다른 쪽에는 미꾸라지와 함께 메기를 키우면 메기를 넣어 키운 미꾸라지가 훨씬 더 통통하게 살이 쪄 있다고 한다. 미꾸라지들이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항상 활발히 움직였기 때문에 더 많이 먹어야 했고 그 결과 더 튼튼해졌던 것이다.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쭈그렁 밤송이 삼년 간다.
열고 닫을 때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문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열지 않고 오랫동안 놔둔다. 소동파는 ‘자고로 아름다운 여자는 박명하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미인이니 이 남자 저 남자가 자꾸 귀찮게 하니 빨리 죽을 수 밖에...
손해와 이익
아들을 둘 둔 어머니가 있었다. 큰아들은 소금 장수였고 작은 아들은 우산 장수였다. 이 어머니는 항상 웃고 울었다. 비가 오면 우산 파는 아들이 잘 되어 좋으나 소금 장수 아들이 걱정이었고 날이 개면 그 반대였다. 한 사람이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는 뜻의 이야기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의 한 이야기를 하나 더 살펴보자. 초나라 왕이 사냥을 갔다가 아끼던 활을 잃어버렸다. 활은 명품이었다. 신하들이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왕은 “초나라에서 잃어버린 것이니, 초나라 사람이 얻을 것이다. 내가 꼭 찾아서 무엇하랴.”고 말했다. 공자는 이 말을 전해 듣고, “왕의 생각이 왜 그렇게 크지 못한가? 왜 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얻을 거라고 말하지 않는가?“고 했다. 자칭 ‘국문학의 국보적 존재’였던 고 양주동 박사는 ”아깝다! 공자의 생각이 왜 그리 크지 못하냐. 왜 자연에서 잃은 것, 자연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느냐“며 공자보다 한 술 더떴다.
다이어트
뚱뚱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살찐 몸매가 싫었다. 어느날 의사를 찾아간 그녀는 몸매가 날씬해 질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누드 모델의 사진을 주며 말했다.
“냉장고 안에 이 사진을 붙이세요. 무엇이 먹고 싶어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사진을 볼 것 아닙니까? 그때마다 정신이 바짝 들어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의사의 처방은 정말 효험이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 적마다 아름답고 멋진 몸매의 사진을 보고 식욕을 억제하였고, 마침내 아무개 대통령 후보의 아들처럼 한 달만에 몸무게를 10kg이나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일어났다. 거꾸로 그녀 남편의 몸무게가 10kg이나 불어난 것이다. 우연히 냉장고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나체 사진을 본 남편은 그 사진을 보기 위해서 자주 냉장고 문을 열었고 그때마다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익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해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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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동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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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워 좋겠다 - 서원웅
시커먼 먹장구름
떼지어 몰려다니다
한바탕
소나기 되어 퍼부어 대니
가벼워 좋겠다.
알알이 여물어
무겁다고 고개 숙인
가을 들녘의 곡식과 과일들
농부들이 수확해서
가벼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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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없으면 - 황 베드로
하늘이 없으면
산도 없겠지
하늘이 쉬고프면
산에 내리고
산이 크고프면
하늘을 바라보는데
그 속에 사는 새는
산에서 크고 하늘을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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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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