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교육개혁
네로 황제와 같은 서기37년에 태어난 마르쿠스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는, 이름만 보면 본국 태생의 로마인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에스파냐 북부의 사라고사에서도 에브로 강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칼라오라라는 도시에서 태어난 속주민이다. 하지만 교사인 아버지에게 이끌려 어릴 때 로마로 이주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자랐다 해도 좋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교사도 의사와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고, 시민권은 세습권이기 때문에 퀸틸리아누스도 성년이 되자마자 로마 시민이 되었다. 수도 로마에서는 아버지의 배려 덕분에 경제력이 허용하는 수준보다 더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22세에 그는 고향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퀸틸리아누스는 고향에 돌아와 교편을 잡았지만, 소도시인 칼라오라가 아니라 속주 총독의 주재지인 타라고나를 직장으로 선택한 모양이다. 네로 황제의 후임으로 추대된 에스파냐 총독 갈바가 로마로 갈 때 퀸틸리아누스도 동행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야 퀸틸리아누스는 세 명의 황제가 차례로 교체된 서기 68년부터 69년까지의 로마를 자기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를 발탁하고 돌봐준 갈바가 살해된 뒤에도 퀸틸리아누스는 그대로 로마에 머무르면서, 제국의 수도에서 다시 교편을 잡는다. 교사로서는 아버지보다 성공했다. 40세가 되기 전에 변론술 학교를 개설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하버드 대학의 '로스쿨'(법과대학원)같은 곳이었다. 어쨌든 제자들이 쟁쟁했다. 타키투스와 소 플리니우스도 퀸틸리아누스의 '로스쿨' 졸업생이었다. 나중에 황제가 된 하드리아누스도 청년 시절에 여기서 공부했다. 퀸틸리아누스는 제자들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법정에 서서 변론도 했으니까. 교과 과정은 이론과 실제가 균형있게 배합되어있었을 게 분명하다.
학교를 개설하고 변호사도 겸하고 있었지만. 퀸틸리아누스는 청빈하기로 유명했다. 그렇지만 그는 "변호사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재능을 발휘하여 남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이라는 신조를 스스로 실천했을 뿐이다. 이런 신조를 가진 사람을 아버지로 두면 가족이 고생하는 법이다. 딸 하나는 돈이 없어서 결혼도 못하고 있다가, 보다 못한 소 플리니우스가 결혼자금을 마련해준 덕분에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빈을 좋아하는 베스파시니아누스황제가 그런 퀸틸리아누스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이 에스파냐인은 1년에 10만 세르테르티우스의 봉급을 받게 된다. 국가에서 봉급을 받은 교육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황제가 티투스에 이어 도미티아누스로 바뀐 뒤에도 퀸틸리아누스에게는 연봉이 계속 지급되었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 고명한 교육자를 다른 일에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가 생각해낸 일인지, 아니면 퀸틸리아누스가 자주 궁전에 초대되어 황제와 대화를 나눈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고대의 유일하고도 체계적인 교육론은 이렇게 탄생했다. 라틴어로 '엘로퀜티아(eloquenza :영어로는 eloquence, 이탈리아어로는 eloquenza)는 웅변이나 변론으로 번역되고, 자기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기술을 뜻하는 웅변술이나 변론술로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엘로퀜티아'는 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자기 생각을 적절히 표현하는 수사법(rthetorica)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웅변이나 변론이 아니라 설득력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엘로퀜티아'를 배우는 목적이 우선 자기 생각을 남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사용하는 '무기'가 언어인 이상, 두번째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효능도 갖고 있지 않을까. 그것은 머릿속에서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고정에 생각 자체가 좀더 명료해지는 효능이다. 이렇게 되면 '엘로퀜티아'는 인격 형성의 한 수단이 된다. 고대 로마인들이'엘로퀜티아'를 중시한 것은, 다시 말해서 수사학이 빼놓을 수 없는 교양 과목으로 여겨진 것은, 수사법을 습득하여 정치가나 변호사로 출세하려는 목적 외에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해주는 효능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나 타키투스의 저서에서 볼 수 있듯이, 로마인들의 문체는 간결하고 명쾌한 것이 특징인데, 그것도 '엘로퀜티아'를 중시한 성과로 여겨진다.퀸틸리아누스가 쓴 12권의 '인스티투티오 오라토리아'(institutio Oratoria)는 말뜻 그대로 번역하면 '변론술 대전'이라고 해도 좋다. 이 저작은 퀸틸리아누스가 20년 이상 교육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미래의 지도자가 될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교양을 어떻게 가르치면 좋은가를 교사들에게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엘로퀜티아'의 실제 형태인 '오라토리아'의 역사, 의미, 교육법, 법정에서의 활용례 등 다양하지만, 어디까지나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가르치는 교사를 대상으로 씌어 있다. 이 책을 쓰라고 주문한 도미티아누스도, 그 주문을 받아 책을 쓴 퀸틸리아누스도, 국가에서 교육이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은, 내버려두어도 스스로 성장하는 천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지력(知力)향상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교육에 종사하는 자에게는 인종이나 민족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주고, 그로써 직접세인 속주세를 면제해주는 특전을 부여한 카이사르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의 중요성에 착안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처음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칭찬일까.
이 저술은 서기 95년에 완성되어, 이듬해 로마에서 간행되었다. 그로부터 몇달 뒤에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된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지도층 육성을 위한 교과 과정을 집대성한 이 저술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교육 관계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간행된 지 1천 년이 지난 중세 후기에도 재간행되었으니까, "라틴어로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우는 데 가장 좋은 교과서"라는 어느 중세 지식인의 평가도 납득이 간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두면 ,로마인의 언어였던 라틴어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거의 1천년 동안 서양 기독교 세계의 공용어와 지적 언어로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시대인은 언제나 엄격한 법이다. 이 저술이 간행되었을 당시의 반응도 칭찬 일색은 아니었다. 냉소가로 유명한 풍자시인 마르키알리스에게 걸리면, 퀸틸리아누스가 그토록 공들여 집필한 저술도 이런 평가를 받게 된다. "교실 걸상에 차분히 앉아 있지도 못하는 학생들과 악랄하기로 이름난 로마 변호사들을 영원히 세상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책이야말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가장 완벽한 입문서다." 내 독후감도 '이 책은 역시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 과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내용이구나' 하는 것이었으니까, 마르티알리스의 평가를 보고는 웃어버렸지만,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는 쾌감을 교육론에 기대하는 쪽이 잘못이다. 그래도 오늘날의 교육부 지침에 비하면 훨씬 재미있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라틴어로 계속 출판되고 있으니까.
공포정치
이 책 첫머리에 소개한 타키투스의 '역사'첫 부분을 여기서 다시 이용하고자 한다.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는 소홀히 하고, 거리낌없이 간통을 저지르고, 바다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나르는 배가 넘쳐흐르고, 암초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다. 수도 로마에서 자행되는 극악무도한 행위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 무시무시했다. 고귀한 혈통도, 제물도, 공적도, 공직을 거부하는 것조차도 죄로 간주되었다. 고발자에게 금품을 주어 그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 결과는 더 많은 악을 낳을 뿐이었다. 고발자들은 사제나 집정관 같은 명예직만이 아니라 황제 재무관을 비롯하여 실권을 가진 관직까지 대가로 요구하고, 그리하여 사회를 온통 증오와 공포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돈에 매수되어 오랫동안 모셔온 주인을 배반하고, 해방노예는 옛 주인에게 반항하고, 적이 없었던 사람조차도 친구 때문에 파멸당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여기에 씌어진 일들은 모두 서기 81년부터 96년까지 지속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일어난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타키투스의 문장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지만, 진상은 어떠했을까.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를 소홀히 했다'는 비난은 내전으로 제사를 바칠 계제가 아니었던 갈바와 오토 및 비텔리우스에게는 해당되지만, 도미티아누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도미티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한 '세기제'를 거행하기 위해 도나우 전선에서 로마까지 먼 길을 달려오기도 했다. 수도에 머물고 있을 때는 최고 제사장의 역할을 고지식할 만큼 성실하게 수행했다. 도미티아누스가 복고파인 타키투스의 불만을 샀다면, 그것은 로마인들이 외국에서 들어온 신으로 여기고 있는 아폴로나 이시스 같은 신들에게 바쳐진 신전을 세우고 수리하는 데 열심이었기 대문이 아닐까. 그리고 도미티아누스는 네로와 마찬가지로 운동과 시가와 변론의 우열을 겨루는 경연대회를 장려했다. 그리스를 발상지로 하는 이런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팔라티노 언덕의 절반을 차지하는 궁전 안에는 본격적인 경기장도 만들어졌다. 4년마다 황제가 주최하는 이 로마식 올림픽이 그 원조인 그리스 올림픽과 다른 점은, 로마에서는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바쳐졌다는 점뿐이었다.
황제가 장려한 덕분에 이런 경기대회는 수도나 본국만이 아니라 속주에서도 열리게 되었다. 종목은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달리기, 권투, 레슬링, 전차경주 등이었다. 출전 자격에는 제한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로마의 지식인들은 그리스의 학문과 예술은 좋아하면서도, 왠지 그리스식 경기대회는 싫어했다. 따라서 로마식 올림픽은 그들에게 평판이 나빴다. 존경하는 타키투스처럼 완고하게 도미티아누스를 반대하지 않았던 소 플리니우스조차도 그가 머물고 있는 남프랑스에서 경기대회가 중단된 것을 기뻐하는 편지를 남겼다. 편지가 당시의 '언론'이라면, 도미티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도 소홀히 한 것처럼 비친 게 아닐까. '거리낌없이 간통을 저지른다'는 타키투스의 언급은 완전한 오해다. 도미티아누스의 법집행은 지나칠 만큼 엄격했고, 아우구스티누스시대의 간통죄 처벌법을 되살린 것도 도미티아누스였다. 도미티아누스 자신도 남의 눈을 꺼리지 않고 태연히 바람을 피울 수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바다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나르는 배가 넘쳐흐르고, 암초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대못은 도미티아누스의 공포정치를 규탄하고 있지만, 우선 희생자가 몇 명이었느냐가 문제다. 이 경우에는 도미티아누스 반대파였던 역사가들이 남긴 숫자를 믿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도미티아누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한 주된 이유였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의 치세 15년 동안 사형이나 추방형에 처해진 사람은 주로 후반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사형당한 사람은 8명 내지 9명, 추방당한 사람은 5명 내지 6명, 공직생활에 절망하여 은둔한 사람은 3명 내지 4명이었다. 이들은 거의 다 원로원 의원이다. 원로원 의원인 타키투스에게는 동료들이었다. 그밖에 본국 이탈리아에서 추방된 사람으로는 점쟁이와 그리스인 철학자 집단이 있었다. 점쟁이를 추방한 것은 운명을 예견한다면서 민심을 현혹하고 돈까지 뜯어낸다는 이유 대문이다. 로마 지배층은 전통적으로 점쟁이에게 냉담하여, 이들에게는 로마가 살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어쨌든 로마는 '세계의 수도'다. 돈은 넘쳐흐르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점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점쟁이를 추방하기 시작한 것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지만, 아무리 쫓아내도 그들은 어느새 로마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스인 철학자들을 본국 이탈리아에서 추방한 문제에 관해서는 당시의 철학자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스 철학이 풍부한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기원전 3세기까지다. 그후의 철학자들은 동시대의 로마인이 적절히 표현했듯이 "과거에 쌓아둔 것을 조금씩 꺼내 팔아먹는 것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손에 넣은 로마인은 그리스인의 정치적 능력은 경멸하면서도 학문적 능력은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 철학자들의 '시장'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 뒤 오히려 급증했다. 그리스인 가정교사를 두는 것은 그 집안이 유력하고 유복하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그라쿠스 형제도 그리스인 학자에게 교육을 받았다. 당시 학문의 도시로 유명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갈리아인을 가정교사로 고용한 카이사르의 집안이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오히려 예외였다. 하지만 제정이 진해되면서 수도 로마에는 제국 전역의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교사 우대책이 교육계의 그리스인 독점 상태를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다.도미티아누스가 교육 과정을 작성해달라고 의뢰한 상대는 에스파냐 출신의 퀸틸리아누스였다. 교사라면 당연히 그리스인이었던 상황은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라틴어와 함께 국제어로서 그리스 어의 중요성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그리스어도 갈리아인이나 에스파냐인이나 북아프리카 출신이 가르치는 시대가 되어 있었다. '시장'이 줄어들면 당사자들이 맨 먼저 생각하는 것은 남에게 없는 특징을 드러내는 것이다. 철학자를 자칭하는 그리스인들은 민주체제와 폭군의 대립관계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는 전성기의 그리스 역사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민주체제는 원로원과 시민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공화정 시대의 로마였고, 폭군은 제정으로 바뀐 뒤의 황제였다. 황제들에게 그리스 철학자들은 '기피 인물'이 되어버렸다. 요즘 같으면 비자가 나오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을 본국 이탈리아에서 추방하는 일은 티베리우스 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리스 철학이나 언어를 가르치는 것뿐이라면 반사회적 언동이 아니고, 그리스인 교사에 대한 수요도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추방은 점쟁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효과밖에 발휘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리스 철학자에 대한 추방 조치는 수없이 되풀이되었지만, 이 조치가 일반 시민의 반감을 사지 않은 것은 로마인이 본질적으로 탁상공론을 싫어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도미티아누스는 그리스 철학자들을 추방하여 로마 지식인들의 비난을 사기보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처럼 이런 말로 끝내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한테 처형당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소리든 지껄일 작정인 모양인데, 하지만, 나는 깽깽 짓는다고 해서 그 개를 죽이지는 않소."
그후 그리스 철학자들은 '견유파'로 불리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추방한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부자지간이라 해도 성격 차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타키투스는 공포정치에 희생된 사람의 수를 문제삼기보다, 공포정치의 최전선에 선 이른바 고발자들(델라토르)과 그들의 암약을 허용한 도미티아누스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후세의 연구자들이 '밀고자'나 '밀정'이나 '고발자'로 번역한 제정 시대의 '델라토르'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델라토르'
로마 법정은 다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재판장은 원로원에서 선출된 법무관이 맡는다. 임기를 마친 속주 총독이 속주민에 의해 고발당할 경우에는 '오라토르'(Orator)라고 불린 변호사가 원고측을 대리하여 검사 역할을 맡는다. 물론 '오라토르'가 피고측 변호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델라토르'(Delator)는 고발자로 번역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고발이 전문이기 때문에, 피고측에 서는 경우는 전혀 없었다. 배심원은 '켄툼비리'(Centumviri)라고 불렸는데, 직역하면 '백 명의 남자들'이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부터는 180명으로 정원이 늘었지만, 배심원의 명칭은 여전히 '백 명의 남자들'을 뜻하는 '켄툼비리'였다. 배심원은 원로원 계급과 기사계급 및 평민계급에 속하는 유자격자들 중에서 1년에 한번씩 추천으로 선발되었다. 배심원이 되려면 일정수준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이런 자격 조건을 설정한 것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져야만 판단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수도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운 '바실리카 율리아' 회당에서 재판이 열렸다. 이 건물은 가로 101미터에 세로 49미터인 직사각형이지만, 재판이 열리는 날에는 중간에 칸막이를 쳐서 네 구역으로 나눈다. 네 건의 재판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서인데, 법치체제의 창시자인 로마인인 만큼 사소한 일도 재판으로 시비를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100명의 배심원도 네 팀으로 나뉘어, 25명의 배심원이 평결을 내렸다. '바실리카 율리아'는 사방이 트여 있어서, 방청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방청할 수 있었다. 로마에서는 변호사들도 목청을 높여 변론 솜씨를 겨루었지만, 방청객들도 얌전히 듣고만 있지는 않았다. 키케로처럼 대중적 인기를 얻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변호사가 고발이나 변론을 맡으면, 수많은 청중이 몰려들어 박수갈채를 보내거나 환성을 지르곤 했다. 그래서 다른 세 건의 재판을 진행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밋밋한 변론이 지루하게 계속되면, 방청객들도 외면한 채 회당 계단에 주저앉아, 바닥에 새겨놓은 장기판에서 돌멩이로 심심풀이 삼아 장기를 두면서 판결을 기다리곤 했다. 퀸틸리아누스는 키케로를 로마가 낳은 최고의 변호사라고 칭송했지만, 키케로는 배심원도 방청객들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게 실정이라고 말했다. 법을 다루는 당사자가 법집행의 불공정성을 고백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것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변함이 없는 인간성의 일면인지도 모른다. 검사 역할도 맡고 변호사 역할도 맡는 '오라토르'와 달리 '델라토르'는 검사 역할만 전문적으로 맡는다. 로마 제국에서는 델라토르도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공직이 아니라 민간 직업이었다. 즉 보수를 전제로 하는 자유업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든 간에 겉으로는 엘리트의 책무로 되어 있었던 '오라토르'의 수임료 상한선이 1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정해져 있었던 것과는 달리, '델라토르'는 유죄 판결을 받은자에게 몰수한 재산의 일부를 보수로 받는다. 델라토르는 재산 사냥꾼이나 마찬가지라 하여 사람들이 꺼리고 싫어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몰수 재산의 일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연구자들 중에는 4분의 1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델라토르'가 혐오 대상이 된 것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시 말하면 함정수사나 협박으로 증언을 끌어내는 짓까지 동원해서 증거나 증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토대로 피고를 법정에 세우는 수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델라토르'는 익명의 정보제공자는 아니다. 공인은 아니지만, 법정에 나와서 고발 이유를 진술하니까, 밀고자나 밀정처럼 그늘에 숨어 있는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영어 'delate'(고발하다)와 그 명사형인 'delation' (고발, 고소)은 '델라토르'라는 타틴어에서 유래한 낱말이다. 따라서 '델라토르'는 '밀고자'나 '밀정'으로 번역하기보다 '검사'나 '검찰관'으로 의역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오늘날에는 검사가 공직이지만 로마 시대에는 개인의 자유업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델라토르'가 미움받는 직업이었다지만, 그들을 혐오하는 정도는 사람에 따랄 다르지 않았을까. '델라토르'의 공격이 오로지 원로원 의원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타키투스나 소 플리니우스 같은 원로원 의원들이 꺼리고 싫어한 것은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검찰과 관련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검찰과는 되도록 관계를 갖고 싶어하지 않는 게 일반인의 심정이 아닐까. 소 플리니우스가 남긴 편지에는 "이번 델라토르는 만만찮다"는 말이 나온다. 또 다른 편지에는 '델라토르'와 '오라토르' 사이에 오가는 뜨거운 설전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원로원 의원이면서 '변호사'(오라토르)이기도 했던 타키투스나 소 플리니우스가 '검사'(델라토르)를 적대시한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다만 다음 사실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오라토르'이면서 원로원 의원인 사람은 많았지만, '델라토르' 중에는 원로원 의원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델라토르'는 법치국가에 꼭 필요한 존재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직업은 분명 아니었던 듯하다. 적절한 비교는 아닐지 모르나,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클린턴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려고 애쓴 스타 특별검사가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의 유력한 의원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면 로마 제국의 '델라토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미국의 대통령과 의회 의원들은 선거로 뽑힌 사람들이고, 따라서 낙선이라는 배제 수단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로마의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은 종신제였기 때문에 상대를 배제할 수단이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 사이의 투쟁이 격렬해진 것도 당연하다. '델라토르'는 표적이 된 원로원 의원들한테는 미움을 받고, 공인으로 출세할 길도 막혀 있었던 모양이지만, 사회에서도 배척당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네르바가 황궁에서 만찬을 열었을 때의 일화다. 그날 밤 만찬회의 주빈은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델라토르'로 명성을 날린 베인토네였다. 네르바는 신사적인 성품의 소유자답게 부드럽고 유쾌하게 만찬을 진행하다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메살리누스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말년에는 눈이 멀어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지만, 메살리누스도 베인토네처럼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맹위를 떨친 '델라토르'였다. 네르바 황제의 말을 듣고, 만찬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지체없이 대답했다.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겠지요." 오현제 시대에도 '델라토르' 제도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이 제도 자체는 로마인도 용납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문제는 희생자 수가 아니라, 황제가 원로원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이 제도를 이용했느냐 아니냐에 있다. 티투스는 '델라토르'의 고발에 귀를 기울이는 것조차 거부했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이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바다에는 불쌍한 자들을 추방지로 실어나르는 배가 넘쳐흐르고, 암초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로 물들었다'는 타키투스의 표현은 좀 지나치다는 느낌도 들지만, 변호사이자 원로원 의원이고, 원로원의 의의를 확신하기 때문에 공화주의자이기도 했던 타키투스의 관점에서 보면 도미티아누스가 증오할 만한 적으로 보인 것도 당연하다. 그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제정 사상 처음으로 종신 재무관에 취임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형 티투스만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에서 네로에 이르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들도 종신 재무관에 취임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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