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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2호 - 2024.07.28 일요일(음력 : 06.23)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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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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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웃지 않는 사람과 잘 웃는 사람을 경계할 것. - 아놀드 H.그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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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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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틀린? 개틀린!
리우 올림픽이 12일 앞으로 다가 왔다. 리우 올림픽에는 세계의 별들이 대거 출전하는데, 외국 선수들의 이름은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표기해야 한다. 먼저 육상의 꽃으로 불리는 남자 100m에서 우사인 볼트와 우승을 다툴 미국의 ‘Justin Gatlin’의 바른 외래어 표기는 ‘저스틴 게이틀린’이 아니라 ‘저스틴 개틀린’이다. 또한 수영 여자 자유형 3관왕이 유력시되는 미국의 ‘Katie Ledecky’의 바른 이름은 ‘케이티 레데키’가 아닌 ‘케이티 러데키’이다.
올해 5월 LPGA에서 3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태극 낭자들의 우승 경쟁자로 떠오른 태국의 ‘Eriya Cuthanukal(Ariya Jutanugarn)’은 ‘아리야 주타누간’이 아니라 현지 발음을 따라 ‘에리야 쭈타누깐’으로 표기해야 하고, 기계체조 개인종합의 우승 후보인 일본의 ‘?村航平’는 ‘우치무라 코헤이’가 아닌 ‘우치무라 고헤이’이다. 남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인 세르비아의 ‘Novak Djokovic’는 ‘노박 조코비치’가 아닌 ‘노바크 조코비치’, 여자 테니스 세계 랭킹 1위인 미국의 ‘Serena Williams’는 ‘세레나 월리엄스’가 아닌 ‘세리나 월리엄스’로 표기해야 한다.
러시아 전체 선수단의 올림픽 출전이 유동적인 상황이지만 올림픽 싱크로 듀엣과 단체전 4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러시아의 주역인 ‘Natalia Ishchenko’는 ‘나탈리아 이시첸코’가 아닌 ‘나탈리야 이셴코’, 손연재가 출전하는 리듬체조의 금메달 후보인 러시아의 ‘Yana Kudryavtseva’는 ‘야나 쿠드랍체바’가 아닌 ‘야나 쿠드럅체바’로 표기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하룻강아지는 몇 살?
스스로를 과신하여 제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에 함부로 덤벼드는 사람을 보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한다. 이 속담에 쓰인 ‘하룻강아지’를 난 지 하루밖에 안 된 강아지로 아는 사람이 많다. 아무리 속담일지라도 갓 태어나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강아지가 범한테 대드는 상황은 너무 비현실적이다. 어미 젖은 떼고 나와야 범은 아니더라도 옆집 개한테라도 대들 엄두를 낼 것이 아닌가. “동쪽으로 울바자가 쳐져 있긴 했지만 그 허술한 울바자는 하룻강아지도 넘나들 수 있는 높이였다.”(김주영,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이 용례를 보면, ‘하룻강아지’는 갓 태어난 강아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살 정도는 돼야 나지막한 울타리라도 넘나들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룻강아지’는 본래 한 살짜리 강아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짐승의 나이를 세는 말은 따로 있는데, 한 살을 가리키는 말은 ‘하릅’이다. 그러니까 본래는 ‘하릅강아지’였던 것이 ‘하룻강아지’로 변한 것이다. ‘하릅송아지, 하릅망아지, 하릅비둘기’ 같은 말도 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짐승의 나이를 세는 말은 다음과 같다. 한 살은 ‘하릅/한습’, 두 살은 ‘이듭/두습’, 세 살은 ‘사릅/세습’, 네 살은 ‘나릅’, 다섯 살은 ‘다습’, 여섯 살은 ‘여습’, 일곱 살은 ‘이롭’, 여덟 살은 ‘여듭’, 아홉 살은 ‘구릅/아습’, 열 살은 ‘열릅/담불’이라고 한다. “송아지는 이듭가량 되어 보이는데 목이며, 허리며, 머리며를 오색 천으로 단장하고 왈랑절랑 방울 소리를 울리며 걸어왔다.”(허해룡, 황소 영감)
본래 우리말은 사물의 종류에 따라 세는 말이 다양한 것이 특징인데 점차 그런 말들이 사라져 가는 듯하여 못내 아쉽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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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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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 천상병
해뜨기 전 새벽 중간쯤 희부연 어스름을 타고 낙심을 이리처럼 깨물며 사직공원길을 간다. 행인도 드문 이 거리 어느 집 문밖에서 서너 살 됨직한 잠옷 바람의 앳된 계집애가 울고 있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지겹도록 슬피운다. 웬일일까? 개와 큰집 대문 밖에서 유리 같은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이 애기는 왜 울고 있을까? 오줌이나 싼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걸까? 자주 뒤돌아보면서 나는 무심할 수가 없었다. 아가야, 왜 우니? 이 인생의 무엇을 안다고 우니? 무슨 슬픔 당했다고, 괴로움이 얼마나 아픈가를 깨쳤다고 우니? 이 새벽 정처없는 산길로 헤매어가는 이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아가야, 너에게는 그 문을 곧 열어줄 엄마손이 있겠지. 이 아저씨에게는 그런 사랑이 열릴 문도 없단다. 아가야 울지 마! 이런 아저씨도 울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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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협 - 정지용
정오 가까운 해협
백묵 흔적이 적력한 원주 !
마스트 끝에 붉은기가 하늘보다 곱다.
감람 포기 포기 솟아오르듯 무성한 물이랑이여!
반마같이 해구같이 어여쁜 섬들이 달려오건만
일일이 만져주지 않고 지나가다.
*
해협이 물거울 쓰러지듯 휘뚝 하였다.
해협은 엎지러지지 않었다.
지구 우로 기여가는 것이
이다지도 호수운 것이냐 !
외진곳 지날제 기적은 무서워서 운다.
당나귀처럼 처량하구나.
해협의 칠월 해ㅅ살은
달빛보담 시원타.
화통 옆 사닥다리에 나란히
제주도 사투리하는 이와 아주 친했다.
스물 한 살 적 첫 항로에
연애보담 담배를 먼저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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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질 - 이해인
예쁜 色紙도
무늬 고운 헝겊도
쏙닥쏙닥 오리길 좋아했었네
기인 머리채도
결 고운 비단도
나를 자르듯
잘라낼 수 있었지만
칼끝 같은 가위로도
도려낼 수 없는
아득하고 아득한
너를 향해
펼쳐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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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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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2 장 자유로 가는 길
2. 큰 신심
그러면 자기 개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의 개발이라는 큰 과제를 두고서, 우리는 어떠한 결심을 해야 되는가? 우리가 어떤 결심 을 해야만 자기 능력을 완전히 개발하여 불보살이 되고 조사가 되고 그리고 선지식이 되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살 수 있는가? 법을 위해서 몸을 잊어버려야만(爲法忘軀) 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모든 행동의 근본이 되는 몸까지도 잊어야만 비로소 대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보기로 부처님을 들 수 있습니다. 대도를 위해서 왕자를 버리고 천추만세에 일체중생을 위해서 얼마나 큰 공을 이루었습니까 근대에 와서는 오직 진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린 사람, 법을 위해서 몸을 버린 사람으로 청나라 태종 순치 황제를 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만주족이 만주에서 일어나 십팔 년 동안을 싸워 중국을 통일하여 대청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세력 판도는 남, 북만주, 내, 외몽고, 서장, 안남에 이르러서 중국 역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런 순치 황제가 대청제국 창업주의 영광을 차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본디부터 불교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부귀영화란 일시적인 것이며, 또 대청제국의 황제 노릇도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되는 무한한 시간에 비하면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며 아이들의장난일 뿐이라고 깊이 통찰했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굳은 각오로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모습을 감추고 금산사에 가서 나뭇꾼이 되어 머슴살이로 스님들 시봉을 하면서 공부를했습니다. 그때 출가시를 썼습니다.
나는 본래 인도의 수도승인데
무슨 인연으로 타락해서 제왕이 되었는가.
我本西方一納子 (아본서방일납자)
緣何流落帝王家 (연하류락제왕가)
천자 되는 것을 타락 중에서도 가장 큰 타락이라고 보니 이것이야말로 참되게 수도하는 근본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동네 이장만 되어도 만금 천자라도 된 것 같이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을 따른다면 부처님의각오와 결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잊고 무상대도를 성취해서 일체 중생을 위해 이 대도를 위하는 큰결심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사꾼이나 날품팔이하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일반 학생들에게 공부하는 목적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어느 회사의 직원이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답하곤 하는데, 이런 장사꾼 깉은 심리 가지고는 절대로 무상대도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혹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 채 넘겨짚거나 너무 무시한다고 항의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사람 보고 뼈가 부러지도록 절하렵니다. 그런 사람은 참으로 귀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를 믿는 데는 만승천자도, 곤룡포도 내버리는 그런 큰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2. 큰 의심
지금까지 이야기했듯이 불교의 근본은 자기개발에 있습니다. 초월적인 신은 부정합니다. 부처도 믿지 말고 조사도 믿지 말며, 석가도 필요없고 조사도 필요없다는 말은 불교의 근본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이 부처님이고 절대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자기 자신이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자기개발을 완전히 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설하신 팔만대장경이 있으니 그 문자만 많이 독송하면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얻을 수 있는가? 아닙니다. "널리 배워서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점점 어두워진다(廣學多知 神識轉暗;광학다지 신식전암)"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옛사람들도 말하기를 "도의 길은 날로 덜어가고 학문의 길은 날로 더해간다(爲道日損 學爲日益;위도일손 학위일익)"고했습니다. 참으로 깨치는 길은 한 생각 덜어서 자꾸자꾸 덜어 나아가야하고 학문을 하려면 자꾸자꾸 배워 나아가야 됩니다. 도(道)와 학(學)은 정반대의 처지에 서 있습니다. 듣고 보고 하는 것은 무심삼매를 성취하는 데에서는 설비상(雪砒霜)과 같은 극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근본 목표인 대도(大道)를 성취하여 성불하는 데에서 이론과 문자는 장애물이 되지 이로움을 주지 못합니다. "모든 지식과 언설을 다 버리고 오직 마음을 한 곳에 모으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으로써 성불하였지 이론과 문자를 배워서성불하였다는 소리는 없습니다.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면 중도(中道)를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얻으려면 선정(禪定)을 닦아서, 곧, 참선을 해서 무심삼매를 성취해야 됩니다. 무심삼매를 거쳐 진여삼매에 들어가야 하는데, 하물며 망상이 죽 끓듯하는 데에서 어떻게 진여삼매를 성취하여 중도를 증득한 부처님의 경계를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교(敎)라는 팔만대장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약방문입니다. 약처방이란 말입니다. 그것에 의지해서 그대로 약을 지어 먹어야 병이 낫습니다. 밥 이야기를 천날이고 만날이고 해봐야 배부르지 않듯이, 약처방만을 천날 만날 외어봐야 병은 낫지 않습니다. 약을 직접 먹는 것이 실천하는 것이므로 선정을 닦는 좌선을 해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평생 가르친 것이 이 좌선입니다. 지금도 저렇게 좌선하시며 앉아 있지 않습니까.
2. 큰 의심
1) 아난존자
옛날 스님네는 어떻게 공부해서 어떻게 무심삼매를 성취하여 도(道)를 이루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들아가신 뒤 그 제자들이 부처님이 법문하신 것을 모아 놓은 것이 경(經)입니다. 그 무렵에는 녹음기도 없고 속기(速記)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부처님을 삼십여 년 동안 모시고 다시며 시봉했던 아난존자는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총명함은 고금을 막론하고 견줄 데가 없으니 한번 들으면 영원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문을 결집(結集)하는데, 대중 모두가 아난이 주동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웃사람인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가 소집 단계에 가서 그에 반대하였습니다.
"아난은 부처님 말씀은 잘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 진리는 깨치지 못했으므로 참석할 자격이 없다."
가섭 존자는 아난 존자가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잘 기억하지만, 다시말하여, 팔만대장경이 모두 자기 뱃속에 있지만 아직 자기 마음을 깨치지 못한 봉사이므로 이 결집에 참여할 자격이 없으니 아주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아난 존자가 애걸복걸하며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나의 대법(大法)을 가섭에게 전했으니 그를 의지해서 공부하라'고 하셨는데 이제 가섭 사형이 나를 쫓아내면 누구를 의지해서 공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섭존자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불법을 깨친 사자(獅子)만 사는 사자굴인데 깨치지 못한 여우가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할 수 없이 울며 쫓겨난 아난 존자는 비야리성(城)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니 국왕이며 대신 등을 비롯한 많은 신도들이 큰스님 오셨다고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하고 법문을 청하므로, 이난 존자는 가섭 존자에게서 쫓겨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잘난체하며 법문을 했습니다. 이때 그부근에 발기라고 하는 비구가 있었는데 아난이 그곳에 온 뒤로 많은 신도들이 모여 법석을 떠니 시끄러워 도저히 공부가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발기 비구가 게송을 하나 지었습니다.
좌선하고 방일하지 말아라
아무리 지껄인들 무슨 소용있는가.
坐禪莫放逸 (좌선막방일)
多設何所利 (다설하소리)
입 다물고 참선하라는 말입니다. 아난 존자가 그 게송을 듣고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이제 참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참회하고는 다른 곳으로 가서 불철주야로 앉아서 정진했습니다. 졸릴 듯하면 일어나 다니고 다리가 아프면 앉았다 하면서 자꾸 선정을 익혔습니다. 며칠이 되었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여러 날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어찌나 고달픈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잠깐 누워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목침(木枕)을 베려고 턱 드러눕다가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참으로 무심삼매를 성취한 것입니다. 목침을 집어던지고 밤새도록 걸어서 가섭 존자에게 갔습니다. 가섭 존자가 몇 가지 시험을 해보니 확철히 깨친 것이확실하므로 결집하는 사자굴에 참가할 자격을 주었습니다. 경에 보면'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난의 말입니다. 결국 부처님의 십대 제자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은 아난 존자이지만, 근본 법은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전했고 가섭은 다시 아난에게 전했습니다. 곧 부처님은 시조(始祖)이시고, 초조(初祖)는 가섭 존자, 이조(二祖)는 아난 존자입니다. 아난 존자 밑으로 상나화수 존자로 이어지고…, 이렇게 해서 정법(正法)은 이십팔대(代) 달마대사가 중국에 옴으로써 동토(東土)에 전해졌습니다. 이 선종이 중국에 소개되어 육조스님 뒤로는 천하를 풍미해서 모든 불교를 지배하게 되었는데, 육조스님을 오조 홍인(弘忍)대사 밑의 제일 큰제자로서 일자무식이었습니다. 당시 홍인스님의 제자로 신수(神秀)라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등에서도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대지식가가 있었지만 이 신수스님은 도를 바로 깨치지 못했으므로, 법은 일자무식인 육조스님에게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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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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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생각하는 사람들의 최고의 화두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완전주의가 아니다. 알 수 없는 의혹을 풀어내기 위한 집착도 아니다. '단지 우리들의 인생을 직시하고 평화롭게 일하며 의연하게 참으며 유쾌하게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일 뿐이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이것은 최초의 질문이면서 몹시 곤란한 질문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밖에 대답할 수가 없다. 일상 생활에 분주한 우리들의 자아는 결코 진실한 본연의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을 찾는다면 뭔가 모자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뭔가를 분주하게 찾는 사람을 가리키면서 어떤 현자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저 사람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맞춰 보거라.'하지만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을 아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과 신일 뿐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대답은 듣지 않아도 틀린 말이다. 물론 현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사람은 뭔가 몹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오.'이 말이 지당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생활도 현자가 들어준 예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바삐 살아가면서 참된 자신을 잃어버리곤 한다. 그것은 마치 사마귀를 노리는 새가 독수리를 보지 못하고, 사마귀 또한 여치를 노리느라 새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듯이 맹자는 장자와 동시대에 살았다. 맹자와 장자는 각기 다른 스승으로부터 배웠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일치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이란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맹자는 '위인이란 그 어릴 때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문명의 기교적 생활이 인간의 출생부터의 천진함에 끼치는 영향을, 산의 나무를 마구잡이로 베어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맹자가 말하기를 우산의 나무가 전에는 아름다웠다. 그런데 마을 근처에 있어서 도끼에 찍혀 고이 자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밤과 낮이 숲을 쉬도록 해주고 비와 이슬이 거름을 주어 그루터기에 싹이 돋아나지만 소와 양을 방목하자 다시 벌거숭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 벌거숭이산을 보며 우산에는 큰 나무가 없었던 줄로 알지만 그게 어찌 산의 본모습이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자 어찌 본디 인의의 마음이 없었으랴. 그 양심을 잃음이 또한 도끼로 나무를 찍음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이를 찍어내면 양심이 밤낮으로 되살아나고 새벽공기에 소생하나, 인의를 좋아하고 불의를 미워함이 남과 같지 못함은 낮에 하는 행위가 또 이것을 어지럽혀 잃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쉬지 않고 도끼질하면 밤 동안의 휴식과 건강의 회복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밤사이의 휴식이 전혀 효험이 없으면, 그 인간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람들이 그 짐승 같음을 보고 본디 인의의 재질이 없는 줄로 알지만, 이것이 어찌 인간의 본성이겠는가. 그러므로 만물이 자랄 만한 힘을 얻으면 반드시 자라고, 그 힘을 잃으면 반드시 소멸된다. 공자가 '꼭 잡아 지키면 남아 있고 방치하면 없어진다. 드나듦이 일정치 않고 머물러 있는 일정한 장소를 알 수 없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2
무엇을 보고자 하면서 걷는 나그네들은
실상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걷는 나그네만이
실제로 많은 것을 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하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온전한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언제나 강하지 않는 법이다.
- 칼 힐티
창 밖의 새소리를 들으라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먹고, 자고, 친구들과 만났다가 헤어지고, 울고, 웃고, 이발하고, 목욕하고, 화초에 물을 주는 등의 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단순한 현상에 대하여 현학적인 장광설을 편다면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이다 철학적 완성의 대부분은 깊은 밤, 혹은 새벽녘의 침대에서 떠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보다도 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다. 잠을 자는 데도 방법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편안한 자세는 '잠잘 때 시체같이 않도록 하라.' 는 공자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 이 말은 곧 시체처럼 반듯하게 눕지 말고 항상 좌우 한 쪽을 아래쪽으로 기울여 웅크리고 자라는 것이다. 잠자리에 누워 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잔다는 것은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동시에 잔다는 말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육체적이라는 것은 휴식과 안정과 명상에 가장 적합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다. 곧 바깥 세상과 동떨어져 완전히 자기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낮에 만난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 수다를 떨던 친구들, 충고하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로부터 녹초가 된 뒤에 취하는 최고의 휴식이 곧 잠이다. 그런데 이런 완전한 휴식에서 좀더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심야 1시든지 새벽 6시든지 관계없이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이불 속에서 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거추장스런 옷에서 해방되어 완전히 육체적인 자유를 얻은 그때야말로 정신도 함께 해방되어 있을 때이다. 그와 같은 편안한 상태라면 어제의 성과와 실수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오늘의 계획 중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노예처럼 출근하거나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할 일에 대하여 완전하게 파악하고 나서 10시쯤 사무실에 나타나는 것이 훨씬 낫다. 잠자리에서 한 시간 정도 조용히 있는 다는 것은 사색가나 발명가,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효과가 있다.
글쓰는 사람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서 무얼 쓸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보다 잠자리에 잠시라도 누워 있는 편이 그 주제의 방향을 포착하기에 용이하리라 믿는다. 그 시간에는 전화라든지, 선의의 방문객, 일상사의 자질구레한 번거로움에 관계없이 자신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다. 그때 눈에 비쳐드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인생이 아니라 깊은 영감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현실을 초월한 참된 회상이다. 모름지기 누워서 아침에 누운 채로 창 밖의 새소리를 들어 보라. 그것을 얼마나 감미로운 영혼의 아늑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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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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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공공사업(2)
개인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중시된 시대니까 로마 황제가 공공사업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겠지만, 공공 건설사업은 로마 황제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임무였다. 로마 황제는 마치 건설부 장관도 겸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도미티아누스의 업적은 아버지와 형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수도 로마의 공공 건축물을 제외하더라도, 발굴된 비문을 통해 도미티아누스가 착공한 것으로 확인된 건축물만 해도 상당수에 이른다. '기록말살형'으로 비문이 파괴된 것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 근교의 티볼리, 로마의 외항인 오스티아, 플라미니아 가도의 종점인 리미니, 시칠리아 서부의 항구도시로서 북아프리카에 있는 카르타고와의 연락항인 마르살라 등의 수도공사. 이집트 나일 강 유역의 관개공사. 이집트는 본국 이탈리아가 필요로 하는 밀의 3분의 1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리스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의 복구. 아버지나 형과 달리, 도미티아누스는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 아피아 가도보다 먼저 건설된 라티나 가도의 전면 보수공사. 라티나 가도는 수도 로마와 카푸아를 잇는 도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수도 로마에서 오리엔트로 가는 길목인 남부 이탈리아와 로마를 잇는 도로가 아피아 가도 하나뿐일 리가 없다. 여러 개 있는 것이 당연하다. '도미티아나 가도' 건설.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으로 단죄 되었는데도, 건설자의 이름을 딴 이 가도의 명칭은 '도미티아누스 경기장'(오늘날에는 나보다 광장)과 함께 로마 시대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마에서 남하한 아피아 가도는 지금은 폐허가된 시누에사에서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카푸아에 이르지만, 도미티아누스가 건설한 가도는 시누에사에서 그대로 바다를 따라 남하하여 무역항 포추올리를 거쳐 나폴리에 이른다. 덕분에 육로를 따라 군항 미세노로 가기도 훨씬 쉬워졌다. 동틀녘에 로마를 떠나면 해질녘에 도착하는 게 보통이었던 여정이 두 시간이면 끝나게 되었다고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또한 아피아와 라티나라는 두 간선도로가 합류하는 카푸아에서 포추올리와 나폴리로 가는 도로도 건설되었지만, 그것을 도미티아누스가 건설했는지, 아니면 그가 죽은 지 2년 뒤에 황제가 된 트라야누스가 건설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로마 가도는 단순한 도로가 아니라 정책적인 사업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사르데냐 섬의 도로망 정비. 사르데냐에 도로망을 깔아서 로마화-로마인의 생각으로는 문명화-하는 것은 낮에도 컴컴한 게르마니아 숲에 로마식 가도를 뚫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즉 약탈을 나쁜 짓으로 여기지 않는 게 양치기들의 전통이지만. 도로망이 깔리면 그들도 그렇게 제멋대로 날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에스파냐의 베티카 속주에 건설한 '아우구스스타 가도'의 전면 보수. 이 공사는 서기 90년에 끝났다. 아프리카 속주의 총독 주재지인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속주에 있는 티베스테(오늘날의 테베사) 군단기지를 잇는 가도 보수. 소아시아에서도 특히 흑해에 면한 북부지방의 도로망 정비. 도나우 강 하류의 모에시아 속주(오늘날의 세르비아)에 있는 두 개의 군단기지를 연결하는 가도 건설. 이 공사는 서기 92년에 끝났다. 그때까지 '모에시아 속주'라고 부른 도나우 강 하류 전역을 방위상의 이유로 양분한 것도 도미티아누스였다. 하나의 속주를 두 개의 속주로 나누면, 한 사람이었던 속주 총독도 두 사람이 된다. 전방에 잇는 속주의 통치는 곧 방위를 의미했고, 황제가 임명하는 속주 총독은 전략 단위인 2개 군단 이상의 지휘권을 가진 무관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최전방이라 해도 좋은 이 일대의 도로망 정비에 열성을 쏱은 것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다키아족과 싸운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몸젠은 로마 제국의 국경을 군사적 국경과 정치적 국경으로 나눈다. 군사적 국경이란 그 선을 넘어 쳐들어오면 당장 반격체제가 가동한다는 점을 적에게 보여주기 위한 방위선이다. 앞에 강이 있으면 그 연안에 군단기지를 건설하고, 하천 같은 천연 요새에 의존할 수 없는 지역에서는 '리메스'를 건설하여 적의 침입을 억제하는 것이다. 군사적 국경은 이런 효력 외에, 투입해야 하는 병력을 줄이는 효과도 있었다. 한편 정치적 국경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방위선을 가리킨다. 그곳을 국경으로 삼을 생각은 늘 갖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필요성에 쫓기지 않은 탓도 있어서 방위선을 구축하는 작업을 서두르지 않았을 경우, 그것을 정치적 국경이라고 한다. 그래도 로마 제국은 정치적 국경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하는 쪽으로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라인 강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한 것은 티베리우스였고, '게리마니아 방벽'을 건설하여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상류 지역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였다. 도나우 강을 군사적 국경으로 확립하는 사업의 마지막 단계도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시작되었다. 다만 그는 시작만 해놓았고, 도나우 강 방위선을 군사적 국경으로 완전히 확립한 사람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였다.
'야간경기'개최
도미티아누스는 이런 '큰 사업'만이 아니라 '작은 일'의 중요성도 아는 황제였다. 이것을 후세는 '빵과 서커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비난하지만, 유권자라면 누구나 국정에 대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성에 대한 환상이다.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선전의 필요성은 사라진다. 어쨌든 굶어죽을 걱정도 없고 경기도 공짜로 즐길 수 있다면 서민들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게다가 도미티아누스는 사상 처음으로 '야간경기'를 제공한 황제이기도 했다. 등불을 켜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서민들은 해가 뜨면 일하기 시작하고 해가 지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대에 5만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콜로세움 전체를 환히 비추는 수많은 등불빛 아래서 야간경기를 관전하는 것만큼 서민들을 호사스러운 기분에 잠기게 해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황제나 부자들은 등불에 둘라싸여 저녁을 먹는게 보통이었지만, 일반 서민층은 공화정 시대와 마찬가지로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끝내는 것이 당연했다. 로마의 밤하늘은 결코 암흑이 아니다. 특히 여름에는 미드나이트 블루란 바로 이런 색깔을 말하는가 하고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감청색을 띤 맑은 밤하늘이 펼쳐진다. 그 밤하늘 밑에서 야간경기를 관전하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야간경기를 개최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 들었을 것이다. 역사가들이 기록을 보아도 야간경기는 국가에 특히 중요한 축제일에만 벌어진 모양이다. 중요한 축제일에 열리는 행사에는 황제가 '도시락'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야간경기를 관전하는 동안 '핫도그나 콜라'를 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리메스'를 건설하고, 사회간접자본에도 돈을 쏟아붓고, 야만족을 상대로 전쟁도 치르고, 야간경기까지 제공하면 국가 재정이 파탄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건전 재정을 계속 유지했으니 흥미롭다.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은 네르바도, 그 뒤를 이은 트라야누스도 국가 재정을 재건하느라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들 티투스와 함께 실시한 국세 조사를 통해 "세율은 올리지 않되, 받아야 할 곳에서는 정확히 세금을 받는" 세제를 확립한 덕분에 세수입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대인한테는 '인색하다'는 평을 듣고 후세의 연구자들한테는 이상적인 국세청장감으로 평가받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있었기 때문에, 아들 도미티아누스가 대규모 사업을 광범위하게 벌일 수 있었던 게 분명하다.
기능적이고 공정한 세제는 선정의 근간이고, 이것을 안전보장이나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더불어 '중앙정부'의 임무로 생각한 로마인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정치적 인간'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치적 인간'은 많지 않은 것이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그리고 무언 가를 이루면 이룬 대로, 거기서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예상된 일이기는 했지만, 34세가 된 도미티아누스에게 부여된 임무는 도나우 강 방위선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면 도나우 강을 군사적 국경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브리타니아
서기 85년부터 도나우 강 북쪽의 다키아족과 로마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지만, 그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브리타니아 제패에 대해 언급해 둘 필요가 있을 듯싶다. 다키아 전쟁과 브리타니아 제패는 얼핏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은 뜻밖에 깊은 관계가 있다. 로마가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잉글랜드와 웨일스)만이 아니라 칼레도니아(오늘날의 스코틀랜드)까지 완전히 제패하기를 고집했다면,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일은 로마 제국에도 엄청난 부담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브리타니아 제패는, 이 사업에 처음 손을 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에 상륙했다 철수한 뒤, 90여 년 동안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 일을 다시 시작한 것은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였다. 따라서 브리타니아에 대한 본격적인 제패는 서기 43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하겠지만, 제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지방은 완전히 정복되고 스코틀랜드 제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브리타니아 속주의 수도도 콜체스터에서 로마인들이 '론다니움'이라고 부른 오늘날의 런던으로 옮겨와 있었다. 그렇긴 해도,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정복하는 데에만 40년 세월이 걸린 셈이다. 브리타니아보다 세 배나 넓은 갈리아를 제패하는 데 8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지나치게 느린 것 같지만, 그 이유로는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알프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본국 이탈리아와 맞닿아 있는 갈리아는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라도 되도록 일찍 제패를 끝내야 했다. 이런 갈리아와는 달리, 좁긴 하지만 바다 건너에 있는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구태여 제패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둘째, 갈리아에서는 군사력 외에도 갈리아인을 협박할 수단이 있었지만, 브리타니아에는 그것이 없었다. 갈리아 지도자들에게 카이사르는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피지배자도 공동운명체로 대하는 로마의 지배를 받을 것이냐, 아니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별이 엄연한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기를 바라느냐. 라인 강을 건너오는 게르만족의 위협은 갈리아인들에게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카이사르 시대에도 로마를 택한 갈리아인들은 그로부터 120년 뒤에 일어난 '갈리아 제국' 소동 때에도 게르만족보다는 로마를 선택했다. 갈리아인과 달리 브리타니아인에게는 협박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게르마이아와 브리타니아 사이에는 북해가 가로놓여 있고, 아일랜드의 켈트족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갈리아를 제패하는데 8년이 걸리고 브리타니아를 제패하는 데 40년이 걸린 것은 갈리아인이 약하고 브리타니아인이 강했기 때문은 아니다.
셋째, 정복 사업을 시작한 두 인물이 제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하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사고방식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카이사르는 우선 갈리아 전역을 무력으로 제패하고, 그 직후에 내가 제4권에서 '전후 처리'라고 말한 갈리아 재편성까지 해치워, 갈리아 전역을 재빨리 속주로 만들어버렸다. 기존 부족들도 그래도 놓아두고, 부족장들에게는 자신의 씨족의 이름인 '율리우스'와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의 구성원으로 만들었다. 유력 부족의 부족장들에게는 원로원 의석까지 주었는데, 이것이 키케로나 브루투스 같은 보수파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클라우디우스는 로마의 패권을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을 채택했다. 우선 무력으로 정복한 다음, 그 지역을 재편성하고, 그와 병행하여 사회간접자본을 정비한다는 순서는 카이사르와 같지만, 카이사르가 전국 규모로 전개한 것과는 달리 지방 규모로 추진하면서 패권의 고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이었다. 어느 쪽이 타당했는지는 별 문제로 하고, 이 정략의 차이는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돌릴 수밖에 없다. 넷째,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 대한 로마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로마인으로는 최초로 도버 해협을 건넌 카이사르에게, 브리타니아는 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리 싸워두는 상대에 불과했다. 브리타니아인은 로마에 굴복하기를 싫어하는 갈리아인과 공모하여 갈리아에 개입할지도 모른다. 갈리아 제패를 진행하고 있는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인에게 타격을 주어 개입 가능성을 사전에 꺾어버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리타니아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정략으로 미루어보아, 브리타니아를 완전 제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었다면 제패는 단기간에 끝났을 테고, 브리타니아에서도 카이사르식 전후 처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은 '만약'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도미티아누스 시대에는 600명의 원로원 의원 가운데 갈리아 출신이 40명을 차지한 반면, 브리타니아 출신은 한두 명 있을까 말까 한 정도에 머물렀다. 이 경향은 그후에도 변치 않는다.
로마 원로원의 성격으로 보아,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은 제국 전체의 정치를 담당하는 위치에 선다는 뜻이다. 영국은 로마 연구가 가장 활발한 곳이고 연구자들도 가장 열심이라 더욱 딱한 느낌이 들지만, 로마 시대의 잉글랜드는 제국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낙후되고 소외된 변경의 색채가 짙었다. 원로원 의원의 출신지를 보아도 이 차이는 뚜렷하다. 이왕 로마에 정복당할 바에는 클라우디우스가 아니라 카이사르에게 정복당하는 편이 나았다. 생각난 김에 한마디 덧붙여 두자면 맨체스터처럼 '체스터'가 붙는 지명은 요새를 뜻하는 라틴어 '카스트룸'(Castrum)에서 유래했다. 도미티아누스 시대의 브리타니아로 다시 돌아가보자. 아무리 제패를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행했다 해도, 당시에는 가장 조직적이었던 로마군이 40년이나 소비했다면 성과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는 군단기지가 콜체스터 하나뿐이었는데, 도미티아누스 시대에는 카디프와 체스터 및 요크에 군단기지를 두고 브리타니아에 상주하는 3개 군단을 배치하게 되었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용한 아그리콜라가 총독에 취임한 서기 78년부터 84년까지 7년동안은 로마인들이 칼레도니아라고 부를 스코틀랜드 깊숙이까지 제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에든버러와 글래스고를 잇는 선 북쪽까지 진격했을 뿐 아니라, 로마함대는 스코틀랜드 북쪽을 도는 항해를 감행했다. 동시대인이자 아그리콜라의 사위인 타키투스가 브리타니아만이 아니라 칼레도니아까지 제패하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후세의 유럽인들이 인정하는 타키투스인 만큼, 로마를 제국주의 국가라고 비난하고 싶어하는 후세가 반드시 인용하는 말도 했다. '아그리콜라'라는 저서에 나오는 카르가쿠스의 연설이 바로 그것이다. 카르가쿠스라는 인물은 사료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저자인 타키쿠스가 가공의 브리타니아인을 내세워 자신의 생각을 대변시킨 게 분명하다.
"로마인은 굴복도 복종도 할 가치가 없는 민족이다. 그들은 세계의 약탈자다 육지에는 더 이상 분탕질하고 다닐 땅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바다 속에까지 손을 집어넣고 있다. 적이 유복하면 그들은 탐욕스러워진다. 적이 가난하면 오만해진다. 동방도 서방도 그들 로마인의 굶주림과 갈증을 채워줄 수는 없다. 그들은 제국이라는 거짓 이름으로 도둑질과 살인, 약탈을 저지른다. 그러고는 말한다.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실제로는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고 있으면서." 타키투스가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칭송받는 이유는 정복자의 일원이면서도 조국에 대한 비판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군에 공격당한 쪽에서 보면, 세계평화 따위는 알 바 아니니까 자기들을 그냥 내버려두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제3권에서 로마에 계속 반항한 폰투스 국왕 미트리다테스의 주장을 소개했듯이 나도 타키투스만큼은 아니지만 양심적인 것에는 무관심하지 않다.
하지만 그 타키투스가 다른 곳에서는 또 다른 생각을 토로하고 있으니,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건 참 복잡하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게르마니아'라는 저서에 나오는 문장인데,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로마인의 숙적인 게르만족을 다룬 책이다. 타키투스는 우선 공화정시대의 상황을 언급한 뒤에 이렇게 말을 잇고 있다.
"그 시대부터 트라야누스 황제가 두 번째 집정관을 맡은 해까지 무려200년 세월이 지났다. 게르만족을 무찌르는 데 실로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했는가! 그동안 얼마나 숱한 희생을 치러야 했는가! 삼니움족도 카르타고인도 에스파냐인도 갈리아인도, 아니 파르티아인까지도 우리에게 이렇게 골치아픈 걱정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은! 게르만족에게 패한 우리 집정관은 또 얼마나 많은가. 카르보(기원전 113년), 카시우스(기원전 107년), 스카우루스와 카이피오와 마리우스(기원전 105년). 이런 패배로 로마는 집정관 군단 5개(즉 10개 군단)를 잃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테우토부르크 숲에서 발루스와 3개 군단이 전멸한 사건(서기 9년)은 최대의 비극이었지만, 이긴 싸움에서도 로마는 적잖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탈리아 안에까지 쳐들어온 게르만족은 마리우스의 반격으로 쫓겨났고(기원전 101년), 신격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싸웠고(기원전 58년), 드루수스는 적지 게르마니아로 진격해 들어갔고(기원전 12년), 티베리우스와 게르만쿠스가 그 뒤를 이어 차례로 게르마니아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런 싸움에서는 모두 치열한 전투 끝에 로마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에는 칼리굴라의 어리석은 책동을 빼고는 한동안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서기 69년에 로마의 혼란을 틈탄 바타비족이 반란을 일으켜 갈리아 제국 소동이 일어난다. 이때 게르만족은 로마군의 군단기지까지 파괴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다행히 일찍 해결할 수 있었다. 오늘날(서기 100년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게르만족과 싸우면 으레 로마군이 이기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게르만족을 완전히 굴복시킨 것은 아니다." 양심적인 지식인이라도 상대에 따라서는 호전적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 쓴웃음이 나오지만, 로마가 제패한 브리타니아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질 수 있어도, 끝내 완전히 제패하지 못한 게르만족에 대해서는 아무리 조국에 비판적이 타키투스라 해도 애국심이 앞섰을 것이다. 서기8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게르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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