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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0호 - 2024.07.26 금요일(음력 : 06.21)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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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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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고 덮어둔 책은 휴지 뭉치에 불과하다. - 중국 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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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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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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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실게요
며칠 전 동네 병원에서 수액을 맞았다. 얼마 후 간호사가 간단히 상태를 물어보면서 주삿바늘을 빼 주었다. 필자는 침대에 누운 상태라 그저 귀로만 듣고 대답했는데, 간호사가 바늘을 꽂았던 자리를 누르면서 “꼭 누르실게요. 좀 있다가 반창고 붙여 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반창고를 붙여 주거니 하면서 가만히 있었더니, 간호사가 “여기 눌러 주세요”라고 재차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팔에 댄 지혈용 솜을 누르라는 뜻이었음을 깨달았다. 주사 맞을 때면 흔히 하는 일인데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이유는 ‘꼭 누르실게요’를 간호사가 누르겠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데 있었다. 흔히 ‘-ㄹ게요’를 청자에게 명령하는 뜻으로 쓰는데도 순간적으로 이를 간호사 자신이 무언가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요즘 고객 응대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하실게요’ 식의 표현은 직접적인 명령을 피하여 완곡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쪽으로 가실게요” “여기 앉으실게요” “이쪽 문으로 나가실게요”와 같은 표현에서 대접받는다는 만족감보다는 뭔가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만 남는다. 더욱이 앞서 간호사는 ‘누르실게요’에서는 명령의 뜻으로 ‘붙여 드릴게요’에서는 의지의 뜻으로 말하였으니 듣는 이로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ㄹ게요’는 “곧 연락할게” “먼저 갈게”처럼 약속이나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명령의 뜻으로 ‘하실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당연히 “꼭 누르세요” “저쪽으로 가세요” “여기 앉으세요” “이쪽 문으로 나가세요.”와 같이 표현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친절한 화법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오랜만에 한잔할까요?
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자고 제안할 때 “오랜만에 한잔할까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잔’을 붙여 써야 할까? 아니면 띄어 써야 할까? ‘한’은 수량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관형사이고 ‘잔’은 명사이기 때문에 ‘한 잔’으로 띄어 쓰는 것이 맞지만 이 경우에는 ‘한잔하다’가 ‘간단하게 한 차례 차나 술 따위를 마시다’는 의미의 동사이기 때문에 모든 음절을 붙여 써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후배에게 “그럼 정말로 딱 한 잔만 하는 거다”라고 말할 때 ‘한 잔’을 붙여 써야 할까? 아니면 띄어 써야 할까. 이 경우에는 ‘한’이 수량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관형사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형사 ‘한’과 명사 ‘잔’을 띄어 쓰는 것이 맞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같은 음절이라도 의미에 따라 띄어쓰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꽤 많이 있다. “오래 못 봤는데 언제 한번 봐야지?”라고 말할 때 ‘한번’은 ‘어떤 일을 시험 삼아 시도함을 나타내는 말’을 의미하는 부사이기 때문에 붙여 쓰지만 “그런데 정말 한 번만 보고 말 건 아니지?”라고 말할 때 ‘한’은 수량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관형사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형사 ‘한’과 의존명사 ‘번’을 띄어 쓰는 것이 맞다. 또한 “아기를 잘 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라고 말할 때 ‘큰소리’는 ‘남 앞에서 잘난 체하며 뱃심 좋게 장담하거나 과장하여 하는 말’을 뜻하는 한 단어이기 때문에 붙여 쓰지만 “괜히 큰 소리 내 자는 아기 깨우지나 마라”라고 말할 때 ‘큰 소리’는 소리가 강하다는 의미의 형용사 ‘크다’의 관형사형 ‘큰’과 명사 ‘소리’를 띄어 써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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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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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 천상병
내년 이 꽃을 이을 씨앗은
바람 속에 덧없이 뛰어들어가지고
핏발선 눈길로 행방을 찾는다.
숲에서 숲으로, 산에서 산으로
무전여행을 하다가
모래사장에서 목말라 혼이 난다.
어린양 한 마리 돌아오다
땅을 말없이 다정하게 맞으며
안락의 집으로 안내한다.
마리아.
나에게도 이 꽃의 일생을 주십시오.
∼∼∼∼∼∼∼∼∼∼∼∼∼∼
촉불과 손 - 정지용
고요히 그싯는 손씨로
방안 하나 차는 불빛 !
별안간 꽃다발에 안긴 듯이
올빼미처럼 일어나 큰눈을 뜨다.
그대의 붉은 손이
바위틈에 물을 따오다,
산양의 젖을 옮기다,
간소한 채소를 기르다,
오묘한 가지에
장미가 피듯이
그대 손에 초밤불이 낳도다.
~~~~~~~~~~~~~~~~~~~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 김수영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너와 나 사이에 세상이 있었는지
세상과 나 사이에 네가 있었는지
너무 밝아서 나는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결코 너를 격하고 있는 세상에게 웃는 것은 아니리
너를 보고
너의 곁에 애처로울만치 바싹 다가서서
내가 웃는 것은 세상을 향하여서가 아니라
너를 보고 짓는 짓궂은 웃음인줄 알어라
음탕할만치 잘 보이는 유리창
그러나 나는 너를 통하여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려운 세상과같이 배를 대고 있는
너의 대담성
그래서 나는 구태여 너에게로 더 한걸음 바싹 다가서서
그리움도 잊어버리고 웃는 것이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밝은 빛만으로 너는 살아왔고
또 너는 살 것인데
투명의 대명사같은 너의 몸을
지금 나는 은폐물같이 생각하고
기대고 앉아서
안도의 탄식을 짓는다
유리창이여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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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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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 4 편 영원한 자유
제 1 장 오매일여
1. 영겁불망(永劫不忘)
우리가 도를 닦아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고(苦)가 따릅니다. 미래 겁이 다하도록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되며 무한한 고가 항상 따라 다니는 이것이 이른바 생사고(生死苦)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한한 고를 어떻게 해야 벗어나며 해결할 수가 있는가? 그러기 위하여서는 굳이 천당에 갈 필요 도 없고 극락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사람마다 누구나 갖고 있는능력, 곧, 무한한 능력을 개발하여 활용하면 이 현실에서 대해탈의, 대자유의,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근본원리입니다. 불교에서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능력을 '불성(佛性)'이니 '법성(法性)'이니 또는 '여래장(如來藏)'이니 '진여(眞如)'니 등등으로 말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이것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개발하면 곧 부처가 되므로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생사해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가? 일찌기 선문(禪門)에서 조사(祖師) 스님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산 법문 끝에서 바로 깨치면
영겁토록 잊지 않는다.
活句下 薦得 (활구하 천득)
永劫不忘 (영겁불망)
곧 불교의 근본 질리를 바로 깨치면 그 깨친 경계, 깨친 자체는 영원토록 잊어버리거나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운 기술이나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잊기도 합니다만, 도를 성취하여 깨친 이 경계는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금생에만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생에도, 내내생에도 영원토록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동시에 생활의 모든 것을 조금도 틀림없이 모두 다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영겁불망(永劫不忘)이라는 것입니다. 마조(馬祖)스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깨치면 영원히 깨쳐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一俉永俉 (일오영오)
不復更迷 (불복경미)
그러므로 깨쳤다가 매(昧)했다 또 깨쳤다 하는 것이 아니고 한번 깨치면 금생, 내생, 여러 억천만 생을 내려가더라도 영원 토록 어둠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원오스님도 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깨치면 영원히 얻어서
천겁, 만겁을 두고 그와 똑같을 뿐 변동이 없다.
一得永得 (일득영득)
億千萬劫 亦只如如 (억천만겁 역지여여)
깨친 경계에 조금이라도 변동이 생기면 그것은 바로 깨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에 따르는 그 신비하고 자유자재한 활동력인 신통묘력(神通妙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참으로 불가설 불가설(不可說 不可說)입니다. 대자유에이르는 길, 곧 영겁불망(永劫不忘)인 생사 해탈의 경계를 성취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빠른 것이 참선입니다. 참선은 화두(話頭)가 근본이며,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하여 바로 깨치면 영겁불망이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영겁불망은 죽은 뒤에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전에도 얼마든지 알수 있습니다. 숙면일연(熟眠一如)하면, 곧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절대 매(昧)하지 않고 여여불변(如如不變)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숙면일여가 여래(如來)의 숙면일여가 되면 진여일여(眞如一如)가 되지만, 보살의 숙면일여는 8지 보살의 아라야(阿梨耶 ; Alaya) 위(位)에서입니다. 제8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나고 죽음에서, 곧 분단생사(分段生死)에서 자유자재합니다. 그러나 미세한 무의식이 생멸하는 변역생사(變易生死)가 남아 있어서 여래와 같은 진여위(眞如位)의 자재(自在)함은 못 됩니다. 그러므로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는 바로 깨친 것이 아니며, 여래위, 진여위에서의 숙면일여가 되어야만 참다운 영겁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지 이상의 아라야 위에서의 숙면일여만 되어도 결코 죽음으로 인하여 다시 매하지는 않습니다. 영원토록 퇴진(退進)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라야 위에서의 불망(不忘)과 진여위에서의 불망은, 차이는 있지만, 다시 매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은 같습니다. 오매일여도 여래 위에서의 오매일여와 아라야 위에서의 오매일여가 다르면서 또한 같은 것과 흡사합니다. 숙면일여라고 하여 잠이 깊이 들어도 여여한 것이라고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대종사, 대조사치고 실제로 수면일여한 데에서 깨치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 깨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식심분별(識心分別)이므로 앞 못 보는 영혼에 불과합니다. 봉사 영혼이 되어서 수업수생(隨業受生)하니 곧 업따라 다시 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김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되고, 박 가가 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중처변추(重處便墜)로서 곧 자기가 업을 많이 지은 곳으로 떨어집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자기의 자유가 조금도 없는 것을 수업수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자재한 경계가 되면 수의왕생(隨意往生)하니 곧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김 가가 되든 박 가가 되든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의왕생으로, 불교의 이상이며 부처님 경전이나 옛 조사스님들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의왕생이 되려면 숙면일여가 된 데에서 자유자재한 경계를 성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리 아는 것이 많고, 부처님 이상가는 것같아도 그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몸을 바꾸면 다시 캄캄하여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송나라 철종(哲宗) 원우(元祐) 7년(1092)이었습니다. 소동파(蘇東坡)의 동생이 고안(高安)에 있을 때 동 산문(洞山文)선사와 수성 총(壽聖聰)선사와 같이 지냈습니다. 그 동생이 하루 밤에 두 스님과 함께 성밖에 나가서 오조 계(五祖戒) 선사를 영접하는 꿈을 꾸었는데, 그 이튿날에 형인 동파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동파의 나이가 마흔아홉이 었는데 계(戒) 선사가 돌아가신 지 꼭 오십 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오십 년전 그의 어머니가 동파를 잉태하였을 때 꿈에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윈 중이 찾아와서 자고 가자고 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계선사였습니다. 계 선사는 살아서 한쪽 눈이 멀고 몸이 여위었더랬습니다. 동파 자신도 어려서 꿈을 꾸면 스님이 되어서 협우에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계 선사가 바로 협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실들로써 동파가 계 선사의 후신인 줄 천하가 다 잘 알게 되어서 동파도 자신을 계 화산(戒和尙)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동파는 자주 동산(洞山)에게 편지를 해서 '어떻게 하든지 전생과 같이 불법(佛法)을 깨닫게 하여 달라' 하였으나 전생과 같이는 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오조 계(五祖 戒) 선사는 운문종의 유명한 선지식이었는데, 지혜는 많았지만 실지로 깊이 깨치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어두워져 버린 것입니다.
실제로 옛날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오매일여가 기본이 되고, 영겁불망이 표준이 되어서 수도하고 법을 전했습니다. 여기에 실례를 들어이야기하겠습니다.
2. 대혜 선사
앞에서 나온 오조 법연 선사의 제자에 원오 극근 선사가 있고, 그 제자에 대혜 종고 선사가 있습니다. 강원에서 배우는 [서장(書狀)]이라는 책이 대혜 종고 선사의 법문으로, 그는 임제의 정맥으로서 천하의 법왕(法王)이라고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대혜 스님이 어떻게 공부했고 어떻게 인가를 받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대혜스님은 스무살 남짓 되었을 때, 요즘 말로 '한소식'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은 진짜 소식이 아니라 가짜 소식이었습니다. 그래도 전생 원력이 크고, 또 숙세(宿世)의 선근(善根)이 깊은 분이어서 그 지혜가 수승했습니다. 그래서 가짜 소식을 진짜 소식으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 가짜 소식을 가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는데, 이 가짜 소식에 모두 속아 넘어갔습니다. 비유로 말하자면 대혜 스님이 성취한 것은 엽전에 불과한데 세상 사람들은 진금(眞金)처럼여기고 '바로 깨쳤다'고 인가를 하여 대혜스님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날뛰고 다녔습니다.
그 무렵 '천하 5대사'라는 다섯 분의 선지식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담당 무준(湛堂無準) 선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대혜스님이 이 선사를 찾아가며 '천하 사람이 나를 보고 참으로 깨쳤다고 하고 진금(眞金)이라고 하니 이 스님인들 별 수 있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병의 물을 쏟듯, 폭포수가 쏟아지듯 아는 체하는 말을 막 쏟아부었습니다. 담당스님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자네 좋은 것 얻었네. 그런데 그좋은 보물 잠들어서도 있던가?" 하고 물어왔습니다. 자신만만하게 횡해천하(橫行天下)하여 석가보다도, 달마보다도 낫다 하던 그 공부가 잠들어서는 없는 것입니다. 법력이 천하 제일이라고 큰 소리 텅텅 쳤지만잠이 들면 캄캄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담당스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님, 천하 사람들이 모두 엽전인가 봅니다. 저를 엽전인줄 모르고 금덩어리라고 하니 그 사람들이 모두 엽전 아닙니까? 스님께서 제가 엽전인 줄 분명히 지적해 주시니 스님이야말로 진짜 금덩어리입니다. 사실 저도 속으로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 자유자재하지만 공부하다 깜박 졸기만 하면 그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깨달은 이것이 실제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담당 부준 선사는 크게 꾸짖었습니다.
"입으로 일체 만법에 무애자재하여도 잠들어 캄캄하면 어떻게 생사를 해결할 수가 있느냐! 불법이란 근본적으로 생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야. 생사해탈을 얻는 것이 근본이야. 잠들면 캄캄한데 내생은 어떻게 하겠어."
그러면서 담당스님은 대혜스님을 내쫓았습니다. 대혜스님의 근본 병통(病痛)을 찔렀던 것입니다. 또, 옛날에 경순(景淳)선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자신의 법이 수승한 듯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잘못하여 넘어진 뒤로 중풍에 걸렸는데, 그러고 나니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과 법문했던 것을 모조리 잊어 버리고 그만 캄캄한 벙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 법을 아는 체했지만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한번 넘어지는 바람에 모든 것이 다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때 도솔조 선사라는 이가 행각(行脚)을 다니다가 이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한번 넘어져도 저렇게 되는데 하물며 내생이야." 이 생사 문제는 영겁불매가 되어 억천 만겁이 지나도록 절대 불변하여 매(昧)하지 않아야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넘어져도 캄캄하니 몸을 바꾸면 두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천하에 자기가 제일인 것 같았던 대혜스님도 무준 선사가 그렇듯 자기의 병통을 콱 찌르니 항복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정진하고 있었는데 담당 무준 선사가 시름시름 병을 않더니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 돌아가시면 누구를 의지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경사(京師)의 원오 극근 선사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그는 원오 극근 선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가서 무슨 말을 걸어 보려고 하나 원오스님은 절벽 같고, 자기공부는 거미줄 정도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원오 극근 선사가 자기의 공부를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기색이면 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찾아갔는데,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하, 내가 천하가 넓고 큰 사람 있는 줄 몰랐구나 !'라고 크게 참회하고 원오 선사에게 여쭈었습니다.
"스님, 제가 공연히 병을 가지고 공부인 줄 잘못 알고 우쭐했는데, 담당 무준 선사의 법문을 듣고 그 후로 공부를 하는데 아무리 해도 잠들면 공부가 안 되니 어찌 해야 됩니까?"
"이놈아, 쓸데없는 망상 하지 말고 공부 부지런히 해. 그 많은 망상 전체가 다 사라지고 난 뒤에, 그 때 비로소 공부에 가까이 갈지 몰라."
이렇게 꾸중 듣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번은 원오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확철히 깨달았습니다. 기록에 보면 '신오(神悟)'라 하였는데, 신비롭게 깨쳤다는 말입니다. 그 때 보니 오매일여입니다. 비로소 꿈에도 경계가 일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원오스님에게 갔습니다. 원오스님은 말조차 들어보지 않고 쫓아냈습니다. 말을 하려고만 하면, "아니야, 아니야 [不是不是]"라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그러다가 원오스님은 대혜스님에게 '유구와 무구가 등칡이 나무를 의지함과 같다 [有句無句 如藤倚樹;유구무구 여등의수]'는 화두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대혜스님은 자기가 생각할 때는 환하게 알 것 같아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원오스님은 거듭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놈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야. 공부 더 부지런히해!" 대혜스님이 그 말을 믿고 불석신명(不惜身命)하여, 곧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더욱 부지런히 공부하여 드디어 깨쳤습니다. 이렇듯 대혜스님은 원오스님에게 와서야 잠들어도 공부가 되는데까지 성취했습니다. 이렇게 확철히 깨쳐 마침내 원오스님에게서 인가를 받았습니다. 동시에 임제의 바른 맥(臨濟正宗)을 바로 깨쳤다고 하여 원오스님이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대혜스님은 임제정맥의 대법왕으로서 천하의 납자(衲子)들을 지도하고 천하 대중의 대조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대혜스님 어록에 남아 있습니다. 잠이 깊이 들어서도 일여한 경계에서 원오스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애석하다. 죽기는 죽었는데 살아나지 못했구나(句惜 死了不得活)."
일체망상이 다 끊어지고 잠이 들어서도 공부가 여여한 그 때는 완전히 죽은 때입니다. 죽기는 죽었는데 거기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면어떻게 해야 살아나느냐?
"화두를 참구 안 하는 이것이 큰 병이다(不疑言句 是爲大病)."
공부란 것이 잠이 깊이 들어서 일여한 거기에서도 모르는 것이고, 거기에서 참으로 크게 살아나야만 그것이 바로 깨친 것이고, 화두를 바로안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마음의 눈을 바로 뜬 것입니다. 이처럼 바로 깨치려면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항상 이 오매일여를 주장한다고 오매일여병에 들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오매일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불법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고, 또 선(禪)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대혜스님과 같은 대근기(根機)도 오매일여가 되기 전에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부처님께서 오매일여를 말씀했으니 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부처님 말씀이 거짓말 아닐까?'하는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다가 자기가 완전히 오매일여가 되고 보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대혜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오매일여라 하신 말씀이 참말이요, 실제로구나(佛設寤寐一如 是眞言是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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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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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안데르센을 찾아가라
세상 사람들은 불만을 신성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아무튼 불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듯싶다. 불만이라는 생활의 권태로움에서 나온다, 요컨대 모든 철학은 이런 감각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이상에 대한 슬픔, 종잡을 수 없는 동경의 늪 속에 빠져 있는 인간들. 인간은 현세에 살면서도 또 다른 차원을 꿈꾼다. 하지만 인간은 지루해 하지만은 않는다. 거기에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한 인간과 원숭이의 차이점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현실이나 과거에서 탈피하고 싶어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외의 다른 무엇을 하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군대에서 하사는 중사를 꿈꾸고 상사는 장교를 꿈꾼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낮은 시선조차 흥겨워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의미에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상력이 크면 클수록 불만의 키도 자라난다. 때문에 인간은 소처럼 행복하고 만족해하기보다는 원숭이처럼 슬픈 듯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꿈꾸는 사람은 슬픔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지극한 슬픔과 방황으로 인해 인간은 더 큰 황홀이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어린 시절의 꿈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듯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생 동안 가슴에 남아 그의 진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 모델은 안데르센이 될 것이다. 인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공상, 인어로서 육지의 왕자님을 만나 보고 싶은 감정, 그런 마음으로 동화를 쓰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섬세하고 큰 기쁨이 되지 않겠는가. 어린이들은 길거리에서나 다락방, 헛간이나 물가에 뒹굴면서도 항상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은 대개 이루어진다. 토머스 에디슨이 그러하였으며 링컨이나 나폴레옹이 그러했다. 그러나 꿈이란 분명 이런 유명인사들만의 경우는 아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환상과 내용은 다르더라도 정도에 알맞은 기쁨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동경에 가득한 눈은 아침에 일어나면 대개 아쉬움으로 바뀌지만 그것이 불행을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생기발랄한 하루의 시작을 예고해 준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린이가 성장하고자 하는 자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인간에게나 현재와 다른 자기가 되고 싶다는 욕망,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것은 무엇이든 변화를 주는 것이라면 대중의 심리를 가공할 매력으로 끌어당기곤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유토피아의 꿈, 영생 불사의 꿈과 같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지는 말기로 하자. 그것은 거꾸로 해석하면 정 반대의 자살 심리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현실을 아름답게 보고 그에 걸맞는 꿈을 꾸라. 봄 햇살을 맞으며 멋진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 나가는 꿈을 꾼다는 것, 그런 생활은 참으로 행복하지 않겠는가?
당신에겐 유머가 없다
유머는 오늘날 쓰기에 따라 인간의 모든 문화 생활의 수준이나 성격을 변화시키는 정치, 학문, 인생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나는 이를 의심한다. 유머는 기능은 그처럼 물리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어서 사상과 경험의 기본적 조직을 변질시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빌헬름 황제는 웃지 않았기 때문에 한 제국을 잃었다. 이것을 미국식으로 표현하면 독일 국민은 빌헬름 황제가 웃지 않았기 때문에 수십억 달러를 탕진한 셈이다. 물론 그도 사생활에서는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웃음을 던진 대상이 누구였느냐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이다. 그의 웃음은 승리와 성공의 웃음, 군림의 웃음이었다. 그는 언제 웃어야 할지 무엇을 보고 웃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묘하게도 유능하고 영리하며 야심만만한 사람들은 동시에 가장 겁쟁이이며 얼간이들이다. 그들은 유머리스트로서의 용기와 깊이와 명민성이 모자랐다. 단지 시시한 문제만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했을 뿐이다. 진정한 유머리스트들은 보다 넓은 정신의 힘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러므로 가령 외교관에 비위나 맞추고 굽신거리는 사람을 임명한다면 그는 분명 실패하고 말 것이다. 외교관의 유머는 전쟁조차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머는 하나의 굳은 사고를 풀어주는 작용이다. 인류의 이상 세계는 합리적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불완전성으로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는지도 모른다. 유머에는 사고의 소박성, 철학의 쾌활함 등이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이런 도구로 만들어진 세계를 사람들은 쉽게 꿈꾸지 못한다. 현실이 너무나도 혼란스럽고 학문은 진지하며 철학은 음울하고 사상조차 너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상을 유머러스한 행복한 삶보다는 투쟁하여 이겨내 가야만 하는 전장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활과 사상의 단순성은 문명과 문화에 대한 최선과 최고의 시상이라는 것, 문명이 단순성을 상실하고 난해한 이론이 순수한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문명이란 하층 고달프고 퇴폐적으로 변해가리란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야심과 사회 조직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한데 이런 모든 개념과 사상을 초월하여 미소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유머이다. 유머리스트는 프로 골퍼가 유연하게 스윙을 하듯 숙련된 여유와 확실성으로 그 문제를 풀어낸다. 결국 자신의 사상을 소탈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사상의 주인공이다. 그런 사람만이 사상에 예속되지 않는 진실성을 찾게 될 것이다. 진실성이란 곧 노력이다. 노력이란 여전히 숙달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때문에 졸부들은 돈 쓰기를 어색해 하고, 진지한 작가도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아직 자신의 사상에서 여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석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대학강사의 강의는 대체로 난해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숙련된 노교수들의 강의는 단순하면서 소탈하고 나름의 깊이와 여우를 가지고 있다. 전문적인 세계에서 한 경계를 넘어 단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 단순함이 곧 성숙인 것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리들의 사상은 점점 더 명료해지고, 우리를 불안에 빠뜨리는 실수는 적어진다. 관념은 더욱 명확한 형태를 갖추게 되고, 장황한 사상의 연속은 차츰 간편하게 정리된다. 따라서 비로소 예지라고 불리는 절대 진리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깨달음의 진리. 유머리스트는 어떤 복잡한 문제일지라도 단순하게 만들어낸다. 그들은 번갯불처럼 상식이나 기지의 번득임을 마음대로 구사한다. 그들은 현실 속에 있으므로 탄력성이 있으며, 경쾌하고 섬세한 묘미를 갖추고 있다. 온갖 형태의 자세, 허위, 현학적 난센스, 아카데믹한 어리석음, 사회적 허식을 슬쩍 요령 있게 쫓겨나고 만다. 생각하는 바가 섬세해지고 기지를 이해하게 되므로 자연히 현인의 품격을 갖추게 된다. 모두가 단순하고 모두가 명료하다. 유머러스한 사고방식,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더욱 건전하고 분별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개인 역시도 그런 유머의 세계로 발전해야만 된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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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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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기록말살형'
로마 제국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nmanatio Memoriae)라는 형벌이 있었다. 의역하면 '기록말살형'이 될까. 원로원에서 원고측이 고발 이유를1 진술하고 피고측 대리인인 변호사가 변론을 전개한 뒤에 비로소 의원 전원이 판결을 내리는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쳐야만 성립되는 황제 탄핵제도다. 요즘으로 말하면 의회가 불신임한 권력자를 탄핵재판에 회부하는 제도와 비슷하지만, 미국 대통령보다 훨씬 강력한 권한을 부여받고 있었던 로마 제국 황제에 대한 것인만큼, 탄핵이 이루어지는 방식도 훨씬 엄격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조치가 내려진다.
(1) 유죄 판결을 받은 황제의 조상은 모두 파괴한다.
(2) 모든 공식 기록, 비문, 통화에서 당사자의 이름을 삭제한다.
(3) 그 황제의 자손은 대대로 프라이노멘(개인이름)으로 인정받은 '임페라토르'를 사용할 권리를 박탈당한다.
(4) 황제의 치세중에 이루어진 잠정조치(원로원 의결을 거치지 않고 발표된 칙령)는 모두 폐기된다.
내세를 믿지 않고, 따라서 현세에서 이루어진 업적과 그에 따른 사후의 명성을 가장 중시한 로마 엘리트들에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만큼 불명예스러운 중벌은 없었다. 황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었던 것이 로마 원로원이었다. 로마 제정에는 후세의 어느 제정에도 없었던 견제 기능이 있었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원로원과 더불어 로마 제국의 양대 주권자였던 로마 시민권 소유자, 실제로는 수도에 사는 시민들이 단결하여 황제를 지지하면, 아무리 원로원이라 해도 이 '무기'를 사용하는 데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황제의 통치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려면 경기장에서 직접 반응을 보이거나, 회의를 열고 있는 원로원에 쳐들어가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국회처럼 의원이 선거로 선출된다면 유권자의 뜻을 무시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겠지만, 로마 원로원은 종신제여서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의석을 잃는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시민이 명확한 의사 표시를 하지 않으면,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반황제파가 다수를 차지하면, 원로원은 이 '무기'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가결시킨 '황제법'도 이 권한까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로마 제국 특유의 이 제도는 황제와 원로원 사이를 긴장시키는 요인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로마 황제와 원로원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미국 대통령과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의회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이 지름길이다.
이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된 황제 중에는 네로가 있었다. 칼리굴라황제도 사실상 이 조치를 받았지만, 공식적으로는 단죄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칼리굴라의 성격 자체가 지리멸렬해서, 수에토니우스처럼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언동은 많이했지만 통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말살할 만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온후한 성격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전임자에 대한 과격한 조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네로는 치세 기간이 4년인 칼리굴라보다 훨씬 긴 14년이고, 말살할 만하다고 판단된 '기록'도 많았다. 게다가 네로의 경우는 살아 있는 동안에 단죄가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현직 최고 권력자에 대한 탄핵재판의 색깔이 짙었다. 공식 기록이 동판에 새겨져 있으면, 동판 자체를 녹여버린다. 대리석에 새겨져 있는 경우에는 쓰러뜨리고, 부술 수 있으면 부숴버린다. 하지만 크기가 크고, 단죄된 대상자 이외의 인물이나 사실이 새겨져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 경우에는 대상자의 이름만 깎아 내거나 메워서 없애버린다. 2천 년 뒤에 그것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에게는 지식과 상상력을 시험받는 기회가 된다. 다만 화폐에 대한 조치는 달랐다. 화폐는 제국 전역에 널리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회수한 뒤에 녹여서 다시 주조한 새 화폐와 교환해주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네로의 얼굴을 새긴 화폐는 여전히 사용되었다. 이런 조치는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무솔리니가 건설한 각종 건축물도 같은 운명을 당했다. 건물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으니까, 벽면에 새겨진 그의 이름에만 시멘트를 부어 없애버리는 방식을 택했다. 또한 동상이나 석상을 파괴하는 것은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졌을 때 우리도 자주 본 장면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칼리굴라와 네로의 동상이나 석상이 이상하게 적은 것도 죽은 뒤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도미티아누스도 사후에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받게 된다.
네로 황제에 대해서라면 나도 황제로서 부적격자였다고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그렇게 간단히 황제 부적격자로 단정할 수 없다. 역사가 타키투스의 평가를 전적으로 믿는다면 별문제지만, 제7권 말미에서도 말했듯이 타키투스가 아무리 제정 시대 최고의 역사가라 해도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
또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라는 형벌의 존재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로마인은 공화정과 제정을 불문하고 자기가 당한 패배나 저지른 실수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 민족이었다. 그런데 기록 말살이란 무엇인가. 생각조차 하기 싫은 황제와 그의 치세를 잊고싶어서, 거기에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래 놓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잊고 싶은 황제의 얼굴이나 업적이 새겨진 통화는 계속 사용한다. 이건 로마인답지 않은 방식이다. 게다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에 이어 오현제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하마터면 '기록말살형'으로 단죄될 뻔했다. 후임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필사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면, 오현제 중에서도 이 치욕적인 형벌로 단죄된 사람이 나왔을 것이다. 원로원이 선고하는 '기록말살형'은 원로원의 보복 조치가 아니었을까. 보복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간 도미티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아들인 도미티아누스가 임페라토르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도미티아누스(Imperator Caesar Augustus)라는 이름으로 제위에 오른 것은 형 티투스가 죽은 다음 날이었다. 서기 51년에 태어났으니까, 30세의 젊은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제위 계승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다음에는 맏아들 티투스, 그 다음에는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를 계승자로 정해놓고, 원로원의 승인도 받아두었기 때문이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살아 있을 때부터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는 이제 제위계승자의 칭호가 된 '카이사르'라는 칭호로 불렸기 때문에, 티투스가 즉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도미티아누스의 제위 계승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30세의 젊은 나이에 제위를 계승한 것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계산에는 들어 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두 아들이 차례로 제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궤도는 확실히 깔아두고 죽었지만, 두 아들의 나이로 보아 티투스가 불과 2년 만에 죽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을게 분명하다. 물론 티투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생각을 추측해보면, 자기 다음에 황제가 될 티투스는 40세라는 나이로 보아 적어도 10년 내지 15년은 제국을 다스릴게 분명하고, 그동안 티투스가 제위계승자로 결정되어 있는 동생 도미티아누스에게 통치 경험을 쌓을 기회를 마련해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티투스도 황태자 시절에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밑에서 통치 경험을 쌓을 기회를 얻었으니까, 동생한테도 그렇게 해줄 게 틀림없다고 믿었던 게 아닐까.
베스파시아누스는 일찍부터 티투스를 사실상의 공동 황제로 삼아서 통치 경험을 쌓게 했다. 황제가 된 티투스는 그때까지 해온 일을 계속하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둘째아들 도미티아누스에게는 전혀 그런 배려를 하지 않았다. 티투스가 제위에 오르면, 아버지한테 받은 배려를 동생한테 그대로 베풀어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형제 사이에는 열한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아마 티투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제위에 올랐을 때 그는 40세도 채 안된 나이였다. 10년 내지 15년, 어쩌면 20년은 더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하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자기한테 베풀어준 기회를 이번에는 자기가 동생한테 주면 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그런데 실제로는 2년 동안 재해대책에만 골몰하다가, 그 일이 겨우 끝났나 했더니 이번에는 죽음이 닥쳐온 것이다. 궤도가 확실하게 깔려 있었기 때문에 도미티아누스의 즉위는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30세의 새 황제는 통치에 필요한 실무 경험도 없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게다가 도미티아누스의 즉위는 또 하나의 불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군사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다.
로마 황제의 가장 큰 책무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가 보여주듯 최고 사령관으로서 제국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필요하면 군단을 이끌고 적과 맞서야 한다. 전쟁이 없을 때에도 방위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감독할 의무가 있다. 요컨대 전략과 전술을 잘 알고, 그것을 적절히 구사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전략적 재능은 대개 천부적인 자질이니까, 반드시 전쟁터에서 경험을 쌓을 필요는 없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백인대장이라고 해서 몇 개 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술적 능력은 실제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전투는 임기응변의 능력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군단에서 잔뼈가 굵은 아버지를 따라 제국 각지의 기지를 돌아다니고, 3년 동안은 유대 전선에서 사령관 경험까지 쌓은 티투스는 군사적 능력을 키울 기회가 많았다. 게다가 다행히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의 12년에 걸친 치세는 평화로웠다. 두 사람이 충분한 방위대책을 세운 보람이 있어서, 아직도 제패가 진행되고 있는 브리타니아를 제외하면 로마 제국 어디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도미티아누스는 군사적 능력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모두 입을 모아 좋은 황제라고 칭송한 티투스에 이어 젊은 나이에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툭하면 형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불쾌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를 그만둘 수는 없다. 이 형과 아우는 많은 면에서 대조적이었고, 게다가 그 차이가 두 사람의 통치의 실상에 다가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위에 올랐을 때 티투스는 29세였다. 한편 도미티아누스는 이제 갓 18세가 되어 있었다. 티투스는 서른 살이 다될 때까지 자기가 언젠가는 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살아왔다. 반대로 동생은 18세 때부터 언젠가는 황제가 된다는 확신과 함께 성장했다. 서민적이었던 티투스에 비해, 도미티아누스는 늘 자기가 차지할 지위를 의식한 귀족적인 생활방식을 고집했다. 이런 차이도 성장 환경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티투스 쪽은 제위에 대한 야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의문이지만, 도미티아누스는 강력한 의지와 함께 제위에 올랐다. 여기에도 두 사람의 나이 차이와 성장 환경의 차이가 큰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여겨진다.
이들 형제가 아내로 맞은 여인들의 출신을 보아도 차이는 뚜렷하다. 티투스의 아내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딸인 반면, 황제의 아들이 된 뒤 도미티아누스가 아내로 맞이한 여자는 네로 시대의 명장 코르불로의 막내딸이었다. 네로가 코르불로에게 자살을 명령한 것이 군단병들의 마음을 네로 황제한테서 멀어지게 한 진짜 원인이라고 할 만큼, 코르불로는 명망이 높은 장수였다.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는 전혀 다른 인격 형성기를 보냈고, 그 중요한 시기인 11년의 차이는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게다가 외모도 달랐다. 티투스는 땅딸막한데, 도미티아누스는 키도 훤칠하고 늠름한 체격에 얼굴도 잘생긴 젊은이였다.
로마 황제란
후세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고대 로마의 역사를 다룰 때, 별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로마 황제'라고 말하거나 쓴다. 하지만 고대 로마인들은 제정이 된 뒤에도 '황제'(임페라토르)가 아니라 '제일인자'(프린켑스)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임페라토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군사령관을 부르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이 낱말이 성립된 사정으로 보아도, 제정 시대의 로마인들 중에서 평소에 '황제'(임페라토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군단병뿐이었다. 물론 개선식 때는 일반 시민도 이 호칭을 사용했지만. 다음에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호칭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의 차이다. '임페라토르'가 최고 사령관인 이상, 부하 장병들은 그에게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다.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군대는 군사조직으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일인자'가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프린켑스'(Princeps)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 가운데 '넘버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호칭도 공화정 시대부터 존재했다. 한니발을 격파하여 숙적 카르타고와의 대결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이 호칭으로 불렸고, 변호사로 성공한 철학자 키케로도 법조계의 '프린켑스'라고 불렸다. 이런 성립 과정이 보여주듯, 로마 시민은 '제일인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넘버원을 뜻하는 이 호칭을 사실상의 군주에 대한 호칭으로 삼은 것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독재관'이라는 호칭으로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명확히 한 것이 암살당한 요인의 하나라고 믿은 아우구스투스는, 군주정을 연상시키는 '독재관'이 아니라 공화정 냄새를 풍기는 '제일인자'라는 호칭을 택하여,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면 종래의 지위와 권력이 줄어들 게 뻔한 원로원-기존 지배층-을 회유하려 했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러나 이로써 로마 황제는 절대 복종 대상인 '임페라토르'인 동시에 절대 복종 대상이 아닌 '프린켑스'라는 모순을 내포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도 내가 로마 제정을 두고 '미묘한 허구'라고 표현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역사학자들 중에는 이런 애매한 형태로 제정을 시작했다고 아우구스투스를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500년이나 지속된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꾸려면, 실제로는 '황제'이면서도 계속 '제일인자'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는 로마를 제정으로 이행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로마를 보면, 그가 이 일을 결행한 덕택에 거둔 성과는 분명하다.
첫째,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려면, 합의를 특색으로 하는 공화정보다 우두머리가 말단까지 통제하면서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군주정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통치 효율상의 문제였다.
둘째, 대제국을 운영하려면 그것을 담당할 인재가 필요한데, 인재확보에는 어느 체제가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다. 6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은 자연히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숙명을 피할 수 없고, 따라서 폐쇄적인 지배계급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군주는 한 사람이기 때문에 널리 인재를 구하려고 애 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원로원 체제와 군주정 가운데 어느 쪽이 인재 확보에 효과적인지는 자명하다. 로마가 피정복자인 속주민에게까지 문호를 개방한 것은 황제 주도의 제정을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로마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원로원 의원들이 계속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예컨대 키케로나 폼페이우스나 브루투스 같은 '공화파'가 승리했다면, 로마 제국은 후세의 대영제국처럼 본국이 식민지를 지배하는 형태의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브루투스일당에게 살해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구상에 따라, 본국과 속주를 포함하는 거대한 공동운명체라는 형태의 제국을 창출해냈다. 역사가 기본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가 왜 멸망했느냐고 묻기보다, 로마는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 사회인 로마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기 어려운 제국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처럼 오랫동안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를 문제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로마인은 타민족을 지배한 것이 아니라, 타민족까지도 로마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의 쇠퇴는 식민지들이 독립했기 때문이지만, 로마 제국에서는 속주들의 독립이나 이반은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가 국가로서 누린 긴 수명을 생각하면, 아무리 애매한 형태라고 비난해도 아우구스투스가 창작한 '미묘한 허구'는 효과적이었다. 다만 '미묘'하기 때문에 이 체제를 운영하는 당사자의 성격이나 자질이 체제 운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황제 부적격자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칼리굴라와 네로를 제외하고, 이 미묘한 체제를 운영한 당사자들을 나름대로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로마 황제는 로마 시민들 중에서 제일인자일 뿐이라고 믿었던 사람-통치 전반기의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티투스.
(2) 그렇게 믿지는 않지만, 믿는 척했던 사람-아우구스투스, 베스파시아누스.
(3) 그렇게 믿지도 않았고, 믿는 척하지도 않은 사람-통치 후반기의 티베리우스, 도미티아누스.
언젠가는 황제가 될 거라고 확신했지만, 형이 뜻밖에 일찍 죽는 바람에 30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 도미티아누스가 맨 먼저 한 일은 아내 도미티아에게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존칭을 부여한 일이다. '아우구스타'는 황제의 존칭으로 정착된 '아우구스투스'(Augustus)의 여성형이다. 나는 '황후'라고 번역했지만, 황제의 아내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이 존칭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공화정이 계속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자기가 죽은 뒤에야, 즉 유언으로 아내 리비아에게 이 존칭을 주었다. 리비아에 이어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받은 황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이자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였다. 도미티아는 제정으로 바뀐 지 100년 동안 '아우구스타'라는 존칭을 받은 세 번째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원로원도 진심으로 동의한 모양이고, 경기장에서 민중의 야유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도미티아가 제국의 공로자로 누구나 인정하는 코르불로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는 첩밖에 두지 않았고, 티투스는 유대 공주와의 사랑을 체념한 뒤에는 독신을 고수했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시대부터 사실상의 '퍼스트 레이디'는 도미티아였다. 날씬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에다 행동거지도 기품이 있어서, '아우구스타'라는 호칭에 도미티아만큼 잘 어울리는 여인도 없었을 것이다. 단정한 미모라서 차가운 인상을 주지만, 그 점도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인 리비아를 연상시킨다. 또한 도미티아누스가 젊었을 때 유부녀인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겨우 아내로 삼은 것도 전남편 자식을 데리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시집온 리비아와 비슷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의 남편과 직접 담판하여 아내를 양보 받았지만, 도미티아누스는 전혀 그런 배려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리비아의 전남편은 전처의 결혼식에서 보증인을 맡았지만, 도미티아의 전남편인 아일리우스 라미아는 결혼식에 참석하기는커녕 아내를 빼앗은 남자에게 평생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기쁨을 시민들과 함께 축하하고 싶다면서 즉위한 뒤 반 년을 축제와 향연으로 보낸 칼리굴라 황제를 흉내내지는 않았다. 대규모 축제도 벌이지 않은 모양이다. 황제로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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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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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홍효사지 - 효도의 열매인 돌종에 얽힌 설화
자식 묻으려다 얻은 석종
경주시에서 서쪽으로 서천을 건너 동학의 성지인 용담정을 지나 한참 가면 경주시 현곡면 사동이란 마을이 나온다. 경주에서 7km 가량 떨어진 이 마을은 나지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이 마을의 산골짜기를 북골이라 한다. 동네 중심을 흐르는 개울을 따라 산골 후미진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북골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절터로 추정되는 곳이 물가에 있다. 이 동네에는 이밖에도 동남쪽 산골짜기(절골이라고도 한다)에 절터를 갖고 있다. 북골의 절터는 10여 년 전 이곳 주민들이 개간하여 초석들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절골에는 두 개의 절터가 발견되는데, 한 곳은 밭으로 개간되어 있고, 다른 한 곳은 대나무숲으로 덮여 있다. 마을 사람들은 북골에서 옛날에 돌종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터를 주민들은 종동사지라 부른다. 이 마을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유명한 '손순이 아이를 묻다' 설화의 현장이다. 이 설화는 한국 효자설화의 대표적인 형태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순은 모량리 사람으로 학산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자 그는 아내와 함께 남의 집 품팔이로 쌀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했다. 손순은 아내에게 말했다.
"자식은 또 얻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다시 얻지 못한다. 저 애가 어머님의 밥을 늘 빼앗아 먹으니 어머니가 오죽 시장하실까. 차라리 저 애를 묻어버리고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드리자" 부부는 마침내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로 갔다. 아이를 묻기 위해 땅을 파는데 뜻하지 않은 돌종이 그 속에서 나왔다. 그들 부부가 놀랍고 이상스러워 종을 나무에 매달고 쳐다보았다. 웅숭깊은 소리가 더없이 좋았다. 이에 손순의 아내는 말했다.
"이렇게 신기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 이 아이의 복인 듯하니 묻지 맙시다."
손순 역시 동감했다. 이들 부부는 아이와 종을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 돌종을 집의 들보에 매달아두고 두드렸다. 그 돌종소리는 서라벌 대궐에까지 들렸다. 흥덕왕은 이 소리를 듣고 '이상한 종소리'의 출처를 알아보게 했다. 사자의 보고를 듣고 왕은 말했다.
"옛날 곽거가 자식을 묻으려 하자 하늘이 금솥을 내리더니, 오늘날 손순이 아이를 묻으려 하매 땅이 돌종을 솟구쳐냈구나. 이는 하늘과 땅이 살피신 게다" 왕은 손순에게 집 한 채를 하사하고 해마다 벼 50석을 주어 그 지순한 효도를 가상히 여겼다. 손순은 그의 옛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서 홍효사라 부르고, 그 돌종을 안치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이 돌종은 진성여왕 때 후백제군의 침입으로 없어졌고, 지금은 절만 남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손순이 돌종을 얻은 곳의 이름은 완호평인데, 지금은 와전되어 지량평이라고들 부르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홍효사터의 위치
이 얘기를 염두에 두고 남사동일대의 절들을 살펴보면 이곳 절터들 중의 하나가 홍효사지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장소는 알 수 없다. 억지로 추측해본다면 남사동의 동남쪽 절골에 있는 두 개의 절터 중 한 곳이 홍효사지이고, 북골의 종동사지는 돌종이 솟아나왔던 곳이 아니었을까. 이 마을의 남쪽 3km 거리에 있는 소견리에는 '갓들' 또는 '갓질'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갓들' 또는 '갓질'은 지량평이 음전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거리상으로 이곳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마을 부근에는 '순의정' 또는 '순정'이라 부르는 곳도 있는데, 이 일대에서는 이곳이 손순이 살던 곳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이 부근에는 근세의 학자인 성제 허전이 서술한 손효자유허비가 있었다고 하나, 누군가가 엎어버린 후 그 자취가 없어졌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일대에는 지금도 여전히 손순의 얘기가 '손수자설화'로 남아 전하고 있다. 이 일대를 집중적으로 조사하면, 뜻밖의 구체적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돌종의 불교적 영향
손순의 설화는 삼국유사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간보의 수신기'에 나오는 곽거의 얘기와 흡사하다. 곽거는 진나라 사람으로 형제가 3명이었는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2천만금의 아버지 유산을 그의 두 아우가 각각 1천만금씩 가져가버리고, 곽거는 혼자서 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아내와 품팔이로 봉양했으나 아이 때문에 노모의 끼니가 줄어짐을 걱정하여 아이를 땅에 묻으려다가 석개로 덮여진 황금 일부를 얻었다는 줄거리이다. 손순의 얘기가 '수신기'의 영향을 받아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곽거의 경우처럼 바로 황금이 나오지 않고 돌종이 나온 것은 불교적인 영향이 짙게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설화는 어쩌면 홍효사의 창건에 따른 연기설화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 설화의 중심이 되는 '돌종'을 염두에 둔다면, 이 설화는 당시 그의 효행사실이 종소리가 울려퍼지듯 널리 퍼져 그 소문이 국왕에까지 미친 것을 설화화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는 마지막에 '효선'편을 두어 끝맺고 있다. 손순의 설화도 이 효선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배려는 평소 효성스러웠던 일연이 효행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도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유교적인 가치관과 합일시키는 본보기로 '효'를 내세웠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일연이 살았던 고려 중기만 해도 유교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에 비해 불교는 고답적인데 머물렀으며, 신비화의 색채마저 강하게 띠고 있어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므로 '효'라는 인간 근본의 덕목을 제시함으로써 불교적인 면과 유교적인 면을 통합하려는 일연은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손순의 설화가 불교적인 면이 강하면서도 신비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감동을 주어 후대에 효자설화의 한 전형을 이룬 것은 이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경주 손순 문효사와 홍효문]
손순(孫順)의 신위를 봉안한 문효사와 홍효문 모습. 문효사의 인근에 경상북도 기념물인 경주 손순 유허(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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