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30호 - 2024.07.16 화요일(음력 : 06.11)
angelo@nownforever.co.kr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지만 목발을 빼앗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없다. ― 제임스 볼드윈(美 흑인작가)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5월은 푸르구나
5월 5일 어린이날이 되면 ‘어린이날 노래’가 울려 퍼진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5월은 푸르구나’로 시작하는 ‘어린이날 노래’의 가사를 보면 하늘도 푸르고 벌판도 푸르고 5월도 푸르다. 그렇다면 ‘푸르다’의 색은 구체적으로 어떤 색을 가리키는 것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푸르다’는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의 뜻으로 나와 있고 그 용례를 보면 ‘푸른 물결’, ‘푸른 가을 하늘’ 등으로 쓰인다고 되어 있다. 즉 ‘푸르다’는 어떤 특정한 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밝고 선명한 느낌의 색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푸른색’은 바다의 색인 ‘파란색’을 지칭하기도 하고 맑은 하늘의 색인 ‘하늘색’, 풀의 색인 ‘초록색(草綠色)’, 완두콩의 색인 ‘연두색(軟豆色)’ 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쓸 수 있다. 이처럼 한 가지의 색 형용사가 여러 가지 색깔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쓰일 수 있는 것은 한국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특정 색에 대응하는 단어가 한정되어 있어서 만약 ‘푸르다’를 영어로 옮기려면 문맥에 따라 ‘green’ 혹은 ‘blue’처럼 특정 색을 선택해야만 한다. 또한 ‘푸르다’라는 말을 통해 한국어는 색깔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세밀하게 발달되어 있는 언어라는 특징을 알 수 있는데, ‘푸르다’의 색깔만 하더라도 ‘푸르스름하다’, ‘푸르스레하다’, ‘푸르무레하다’, ‘푸르죽죽하다’, ‘푸릇하다’, ‘푸르께하다’, ‘푸르레하다’, ‘푸르데데하다’, ‘푸르뎅뎅하다’, ‘푸르퉁퉁하다’, ‘푸르디푸르다’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슈림프
‘새우’를 뜻하는 영어 단어 shrimp의 한글 표기는 ‘슈림프’일까, ‘쉬림프’일까? 한동안 이 문제가 여러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지난달 치러진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이와 관련한 문제가 출제됐기 때문이다. 정답은 ‘슈림프’인데 ‘쉬림프’로 답을 잘못 적은 일부 수험생들이 여기저기 불평을 늘어놓았다. 정답을 못 맞힌 이유가 유명 식품회사의 ‘쉬림프 피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항변이다. 대개 방송이나 신문, 또는 기업의 제품 이름 같은 데 쓰인 표기는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회사의 ‘슈림프 버거’를 즐겨 먹었다는 수험생은 해당 회사 사장님께 감사 드린다는 익살스러운 댓글을 남기기도 했다.
영어에서 주로 sh로 표기되는 이 소리를 한글로는 ‘슈’ 또는 ‘시’로 적는다. ‘슈’보다는 ‘쉬’가 원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 어떤 표기가 더 가까운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영어에서는 자음 소리인데, 우리말로는 ‘쉬’로 적든 ‘슈’로 적든 모음이 합쳐져서 원어 발음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어떻게든지 일관성 있게 적는 것이 중요하다.
‘슈림프’처럼 자음 앞에 이 소리가 올 때는 ‘슈’로 적는다. ‘아인슈타인, 슈만, 타슈켄트’ 등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음 앞이 아닐 때는 ‘시’로 적는다. 이에 따라 ‘잉글리쉬’는 ‘잉글리시’로, ‘대쉬’는 ‘대시’로 적어야 한다. 모음 앞에 올 때는 ‘시’가 뒤의 모음과 합쳐지므로 ‘샤, 셔, 셰, 쇼, 슈, 시’ 등으로 적는다. 이에 따라 ‘슈퍼, 패션, 쇼핑, 리더십’ 등의 표기가 가능하다. 요즘 전문 요리사를 뜻하는 ‘셰프’라는 말이 많이 쓰이는데, 이때도 ‘쉐프’가 아니라 ‘셰프’가 바른 표기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매조지다’와 ‘매조지하다’
스포츠 경기는 승부를 다투는 것이다 보니 승리를 결정짓는 선수의 활약은 늘 주목을 받는다. 이러한 활약을 언급할 때 주로 등장하는 용어로 ‘매조지다’라는 말이 있다.
“11회 말에는 박민석이 마운드에 올라 경기를 매조졌다.”
“승부를 매조진 덩크슛”
‘매조지다’는 ‘일의 끝을 단단히 단속하여 마무리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이다. 그리고 ‘매조지’는 그러한 일을 가리키는 명사이다. 이 ‘매조지다’는 ‘매다’와 ‘조지다’(일이나 말이 허술하게 되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하다)가 결합한 말로 보인다. ‘신→신다, 빗→빗다’처럼 명사 ‘매조지’에서 만들어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어쨌든 맥이 끊겨 가던 말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 반갑다. 그런데 언론 기사를 보면 ‘매조지하다’라는 말도 적잖이 쓰인다.
“9회 말에는 김광수가 등판해 깔끔하게 경기를 매조지했다.”
“기업 구조 조정, 내년 대선 전 매조지해야”
하지만 ‘매조지하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아직 표준어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매조지다’로 고쳐 쓰는 것이 옳다.
다만, ‘매조지(명사)+하다’는 어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이처럼 어법에도 맞고 널리 쓰이는 말을 계속 비표준어로 두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비슷한 예로서 ‘삼가다’에 밀려 표준어로 인정받지 못하는 ‘삼가하다’가 있다. 이 말도 매우 널리 쓰이는 데다가,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관계의 말로서 ‘고소다, 고소하다’, ‘비롯다, 비롯하다’가 병존하다가 오늘날 ‘고소하다, 비롯하다’만 살아남아 표준어가 된 예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매조지다, 삼가다’와 더불어 ‘매조지하다, 삼가하다’도 표준어로 인정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3. 주막에서
광하문에서 - 천상병
아침길 광화문에서 "눈물의 여왕" 그녀의 장례 행진을 본다. 만장이 나부끼고,
악대가 붕붕거리고, 여러 대의 차와 군중이 길을 매웠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죽은 내 아버지도 "눈물의 여왕"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댔지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여인들 장례식도 예총 광장에서 더러 있었다. 만장도 없고, 악대는커녕
행진은커녕 아주 형편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임이었다. 그 초라함을 위해서만이
그들은 "시"를 썼다.
∼∼∼∼∼∼∼∼∼∼∼∼∼∼
3
문득, 영혼안에 외로운 별이
바람처럼 일은 회한에 피어오른다
바다 2 - 정지용
바다는 뿔뿔이
달어 날랴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었다.
흰 발톱에 찢긴
산호보다 붉고 슬픈 생채기 !
가까스루 몰아다 부치고
변죽을 둘러 손질하여 물기를 시쳤다.
이 앨쓴 해도에
손을 씻고 떼었다.
찰찰 넘치도록
돌돌 굴르도록
희동그란히 받쳐 들었다 !
지구는 연닢인양 오므라들고...펴고...
~~~~~~~~~~~~~~~~~~~
PLASTER - 김수영
나의 천성은 깨어졌다
더러운 붓끝에서 흔들리는 오욕
바다보다 아름다운 세월을 건너와서
나는 태양을 줏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설마 이런것이 올줄이야
괴물이여
지금 고갈시인의 절정에 서서
이름도 모르는 뼈와 뼈
어디까지나 뒤퉁그러져 나왔구나
-그것을 내가 아는 가장 비참한 친구가 붙이고 간 명칭으로 나는 정리하고 있는가
나의 명예는 부서졌다
비 대신 황사가 퍼붓는 하늘아래
누가 지어논 무덤이냐
그러나 그 속에서 부패하고 있는 것
-그것은 나의 앙상한 생명
PLASTER가 연상하는 냄새가 이러할 것이다
오욕·뼈·PLASTER·뼈·뼈
뼈·뼈······················
<1954>
|
|
독서실 → 철학
|
|
|
영원한 자유 - 성철스님
성철스님 법어집 - 영원한 자유
제2편 중도의 세계
제1장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
3. 삼천대천세계
이제는 이 불생불멸의 공간적 범위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봅시다.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총장으로 있는 분이 와서 묻기를, "불교를 여러 해 동안 믿어왔는데 부처님이 이 우주를 어느 정도 크게 보셨는지 좀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삼천대천세계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것도 모르느냐"고 웃으면서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일월(日月)이 비치는 우주를 한 세계라고 합니다. 흔히 한 일월이 비치는 우주가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가 천(千)이 모여서 소천세계(小千世界)가 되고, 그 소천세계가 또 천이 모여서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중천세계가 다시 천이 모여서 대천세계(大千世界)가 되며, 대천세계를 세번 곱한 것이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일종의 표현방식일 뿐이고 실지 내용은 백억세계 혹은 백억일월인 것입니다. 또 이 백억세계, 백억일월을 한 불찰(佛刹)이라고 하고 이런 불찰이 미진수(微盡數)로 많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크기입니다. 이런 크기는 혜안(蕙眼)이 열리지 않고는 누구도 쉽게 납득할 수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요즘 천문학에서 이 사실이 실증되고 있습니다. 1955년에 미국 파르마 산(山)에 200인치나 되는 굉장히 큰 망원경을 처음으로완 성하여 설치하였습니다. 200인치라고 하면 직경이 5미터나 됩니다. 그 망원경으로 우주를 관찰하면 10억 광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망원경을 통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주라는 것 밖에도 무한한 우주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단순히 별 하나뿐인 단일체가 아니라 수천, 수만 개의 별이 모인 집단 우주가 무한히 많은 숫자로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그 사실은 사진에도 나타나고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러한 무한한 우주 집단이 대략 40억개 내지 50억개쯤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부처님이 말씀하신 백억세계라는 것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과학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직 과학 기술이 부족해서 10억 광년밖에 볼 수 없지만 더 발달하면 100억 광년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무한한 우주 집단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부처님께서 가장 작게 보신 것으로는 '일적수구억충(一適水九億蟲)'이라고 하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물방울 한 개에 9억개나 되는 많은 벌레가 있다는 것입니다. 최신의 현미경으로도 아직 물방울 한개에서 벌레를 9억개까지는 볼 수 없지만, 그토록 조그만 세계에 그렇게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것도 이즈음에 와서 점차 증명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혜안을 가지고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우주 공간을 보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상주법계, 진여법계라고 하는 것도 중생들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불생불멸을 내용으로 하는 그 법계라는 세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한에서 무한으로 이어지는, 참으로 무한한 세계입니다.
4. 물심불이(物心不二)의 세계
그러면 너르디 너르고 변함이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가 있으며 그 내용은 또한 불생불멸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물질로된 것인지 정신으로 된 것인지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흔히 불교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여 불교가 유심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라고하는 것은 정신과 물질을 떠난, 곧 양변-물질과 정신-을 떠나서 양변이 융합한 중도적인 유심을 말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유물론이나 유심론이 결코 아닙니다. '일체유심조'라고 하지만, 그것은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유심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변견(邊見)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교는 변견으로서는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중도적 입장에서라야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실제로 보면 유심(唯心)도 아니고 유물(唯物)도 아닙니다. 유심도 아니어서 유심과 유물을 완전히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심과 유물이 통하는 세계입니다. 곧 물심불이(物心不二)인 것입니다. 유심도 아니고 유물도 아니면, 결국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서로 융합해서 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심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하고, 유물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로 증명이 안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생물학에서는 인간의 육체나 또는 동물, 식물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이들은 아주 미세한 세포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학계에서 이들 세포를 연구한 결과, 동물의 세포나 식물의 세포가 똑같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또 근래에 와서 어느 세포나 각 세포 가운데에는 핵산이라는 것이 들어 있음을 알아냈습니다. 영문 약자로 흔히 '디엔에이 DNA'라고 하는것입니다. 이 핵산은 순전히 정신적인 역할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동적으로 모든 것을 기억해서 서로서로 연락하고 명령을 전달 하고 신경을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핵산은 결코 신경계통의 기관은 아닙니다. 각 세포 가운데에는 세포핵이 있는데, 핵산은 그 세포핵 가운데에존재하여 기억력과 활동력을 가진 정신체라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조금 더 연구를 깊이 한 생물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세포는 모두 정신 작용을 하는 세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정신 활동을 떠난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물학 연구도 물질과 정신이 실지로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움직이지도 않고 그나마 생명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 광물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광물이 동물, 식물처럼 성장하지도않으니 아예 죽어 있는 무생물로 취급한다든지 운동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대인의 자격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물질의 근본 질량으로 소립자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늘 스핀 Spin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스핀 운동이란 모든 소립자가 일정하게 타원형을 그리며 활동하고 있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소립자든지 늘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으므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보일 따름이지, 이 세상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어떤 광물이든지 또는 무생물이든지 그것들은 모두 활동을 하고 있으며 살아 있습니다. 어떤 물체든지 죽어 있거나 활동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물리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입니다.
어떤 입자든지 스핀운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물질에서 그치는 것이지 정신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이론 물리학에서는 "소립자도 자유의사를 갖고 있다"고들 많이 주장합니다.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결국 정신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동, 식물을 이루고 있는 각 세포마다 그 속의 세포핵에 핵산이 있어서 정신활동을 하고 있듯이, 광물이나 무생물도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각 입자 안에서는 스핀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내용은 자유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불생불멸을 말하면서 이렇게 현대물리학을 도입하여 우리가 일상에서 인식하고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가 아니라 시간을 백억분의 일 초로 나누고 공간을 다시 백억분의 일 밀리미터로 나누어서 극 미세한 상황까지 설정하여 이야기를 펼친것은, 결국 동물이든 식물이든 광물이든 그 모든 것은 물질이라고도 할 수 없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그와 동시에 그것은 또 물질이라고도 할 수 있고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로 양변(兩邊)을 떠나고 또 양변을 포함하는 불교의 중도공식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현대과학은 발달을 거듭하면서 자꾸 불교 쪽으로 가깝게 오고 있습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불교는 과학이 발달될수록 그 내세우는 바가 좀더 확실히 증명이 되고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높이찬탄합니다.
이렇게 해서 3,000년 전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현대과학의 이론으로 입증됨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부처님 말씀은 누구든지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진리의 세계이기에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설령 원자탄이 천 개, 만 개의 우주를 다 부순다 하더라도 불교의 중도사상, 연기사상의 원리는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9. 장면 정권 출범 (2/2)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막 지프차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수위가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아, 저 선생님들, 총리 각하께서 다시 좀 뵙자고 하십니다."
지으며 김도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에 김도연의 표정은 살필 수가 없었다. 김도연이 중얼거렸다.
"할 얘기는 다 했는데 뭣 때문에 보자는구?"
두 사람은 다시 2층의 총리실로 향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유진산은 총리실로 들어서며 성급하게 물었다. 장면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소."
"사정이 달라지다니요!"
유진산은 다시 장면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되물었다.
"사정이 달라졌다니,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조재천이 가로막고 나섰다.
"진산 선생, 구파 민주당의 별도 교섭단체 등록을 보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유진산이 버럭 역정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구파에서 입각하는 것하고 별도 교섭단체 등록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상관이 있어도 많이 있습니다."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을 하게되면 국무원에서 의견일치를 보기가 어렵게 된단 말씀입니다. 그런 만큼 구파에서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을 보류하지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진산은 그만 노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무슨 신의 없는 수작을 늘어놓는 거야?"
"장 박사께서 분명히 말씀하십시오. 경무대 4자회담에서 내가 구파의 별도 교섭단체 등록을 인정하는 조건이라면 조각에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장박사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좋다고 했습니까, 안 된다고 하셨습니까?"
유진산의 험악한 공박에 장면은 좀 면구스러워진 모양이었다.
"물론 좋다고 했소만......."
장면은 수긍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유진산이 더는 참고 있지 못하겠다는 듯
"세상에 단 5분도 못 되어 상황을 뒤집어 놓는 법도 있소? 내가 구파 동지들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아시오? 4시간이나 걸려서 설득을 해놓고 왔는데 처음엔 구파의 입각을 환영하더니 그것이 단 5분도 못 되어 사정이 달라졌느니 어쩌니 하면서 뒤집어놔? 그러고도 당신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오?"
유진산은 마음껏 호통을 쳐주고 도어를 기운껏 여닫고 나와 버렸다. 그는 한동안 씨근거렸다. 도무지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반발하는 구파 동지들을 겨우 무마시켜 놓고 조각 협조를 통고하러 왔는데 처음에는 좋아하던 장면이 돌아가는 어쩌니 하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는 구파 동지들한테 웃음거리가 될 결과를 생각하니 등에서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구파의 입각결정 통고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장면이 어째서 돌아가던 유진산, 김도연을 불러들여 구파의 입각문제를 백지화시키려 들었던가? 그것은 장면이 참모들의 심한 반발을 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초 장면의 참모들은,
"설마하니 구파가 입각에 참여할 리야 있을라구! 아무리 총리께서 거국내각을 표방하고 5, 5, 2의 조각원칙을 언약했다 하더라도 구파는 이미 별도의 교섭단체를 만들겠다고 결의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의원총회의 결의를 통해 입각하기로 결정을 지었다고 하자, 그들장면의 참모들은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파의 입각을 배제시킬 요량으로,
"총리께 누차 말씀 올렸지만 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고집하는 한 절대로 원만한 국무원 운영이 어렵단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총리께서 정 구파를 입각히켜야겠다고 하신다면 저희들이 입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장면을 몰아쳤던 것이다.
장면도 5, 5, 2의 조각원칙이 얼마나 무모하냐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구파 각료들이 무소속과 결탁하기만 하는 날엔 국무회의는 언제나 겉돌게 될 있었다. 그러나 국민에게 이미 <거국내각.을 공약했었고, 또 민주당의 분당도 막아야겠기에 고육지책으로 경무대 4자회담을 열어가면서까지 구파를 조각에 끌어들이고자 애썼던 것이다. 다음날인 8월 22일 유진산이 혼자서 장면을 찾아왔다.
"박사님, 오늘 내가 다시 찾아온 것은 경무대 4자회담을 박사님께서 상기해 주십사 해섭니다. 박사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파의 별도 교섭단체를 인정하겠다 하시잖았습니까? 그것을 지금에 와서 뒤집어 엎는다는 것은 신파가 구파를 교란시키기 위해서 장난을 쳤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유진산은 구파의 교섭단체 인정을 전제로
"그랬으면 난들 얼마나 좋겠소. 그러지를 못하니, 이 아니 답답한 일이오?"
장면은 그저 난처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유진산은 행여나 타협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한번 찾아왔던 것이나 장면이 전혀 타협의 눈치를 보이지 않자 그만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자리에사 일어나자 장면이 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산, 구파에서 입각시키고자 했던 명단이나 좀 보여줄 수 없겠소?"
유진산은 왈칵 역정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그건 보셔서 뭘 하시겠습니까. 다된 밥에 코 풀어 놓고."
유진산이 물러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장면의 표정은 자못 쓸쓸해 보였다. 장면이 조각명단을 배표한 것은 8월 23일이었다.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외무부 정일형 농림부 박제환
내무부 홍익표 상공부 이래용
재무부 김영선 보사부 신현돈
법무부 조재천 교통부 정헌주
국방부 현석호 체신부 이상철
문교부 오천석 무임소 김선태
국무원 사무처장(국무위원) 오위영
12부 1처의 각료 가운데서 무소속이 둘이었고, 구파가 하나 끼어 있었다. 그 밖에는 모두가 신파 일색이었다. 교통부 장관으로 등용된 정헌주(鄭憲柱)가 바로 구파에 속해 있는 멤버였기 때문에 구파의 중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해서 신파 내각에 끼일 수 있었던가? 그것은 그는 구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신파 내각의 출현을 위해서 대단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공로란 물론 국무총리 인준 때 장면에게 던진 한 표를 말한다. 그는 장관 감투 하나 차지하기 위해 구파에 대해서 정치적 배신을 했던 것이다. 구파의 신각휴가 요구했던 농림부 장관 감투가 무소속의 박제환(朴濟煥)한테돌아갔던 것은 하나의 논공행상의 결과였다. 당초 무소속의 도움으로 국무총리 인준을 획득할 수 있었던 장면은 이재형을 입각시켰으면 했던 것이나 그가 족청(族靑) 출신이라는 이유에서 이재형 감투를 씌워주게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정치적 이유에서 등용하게 되었던 인물들이었지만 오직 한 사람 문교부 장관으로 등용된 오천석(吳天錫)만이 순수하게 기용된 각료였다. 하여간 이제 조각을 끝냄으로써 대한민국 초유의 내각책임제 정부는 이로써 닻을 올릴 수가 있었다. 조각에 있어 상당한 우여곡절과 진통을 겪었지만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히 장면 내각이야말로 대한민국 초유의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로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한데, 이게 뭐야 이게! 모조리 고시파, 관료파가 아냐. 이래 가지고 나라꼴이 제대로 되겠어? 총리도 망쪼가 들었지. 몽땅 고시파, 관료파로만 내각을 구성해 할거야?"
조각 명단을 놓고 누구보다도 가장 분개한 것이 신파 내의 이철승, 김재순, 함종빈 등 소장파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고시파(高試派)란 일제시대의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서 관리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시파가 관료파로서 관리로 출세하는 데 있어 반드시 고등고시를 거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말단에서부터 관리 생활을 시작하더라도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고시파 이상으로 출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시파는 곧 관료파라는 등식이면서도 관료파란 호칭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있는 이유가 이들 비고시파들 때문이다. 장면이 임명한 각료들 중 김영선, 따지고 보면 고시파는 친일파라 할 수 있었다. 일본왕이 억압하던 시절에 관리가 되어 일본왕의 녹을 먹고 뼈대가 굵어진 자들이니, 친일파라고 못박아도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이들 고시파를 제외한 나머지가 관료파들이었는데 단 정일형과 오천석만은 관료파가 아니었다. 장면은 어쩌자고 이런 고시파나 관료파를 중심으로 조각을 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장면의 주위에는 고시파나 관료파를 제쳐놓고서는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의 주변에는 이들 말고는 인물이 없었던 것일까?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자유당 이탈자와 재야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을 일이다. 장면이 정당 생활을 시작한 것이 이때인데, 바로 이때 재야에서 들어온 보수주의자들이 바로 고시출신, 관료출신자들이었던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도량이 넓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과 민족운동을 한 사람은 일본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자들과는 어우러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민주국민당을 해온 사람들은 이승만을 꺾기 위해서 과거의 경력을 불문에 붙이고 이들 고시파, 관료파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민족을 배신했던 놈들!) 하며 멸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고시파, 관료파를 노골적으로 멸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고시파, 관료파들은 그들의 그러한 속마음을 읽게 되자, 자연 장면을 중심으로 해서 뭉치게 되었다. 민주주의 신파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장면의 주변에 고시파, 관료파 말고는 인물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그건 그렇고, 신파의 소장파들은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단단히 벼르기 시작했다.
민주당 신파만의 단독 내각조각은 마침내 역겨운 후유증을 부러일으키고 말았다. 장면 정권의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이 방송을 통해서 정헌주가 입각한 것을 안 구파의 청년 당원들이 분노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배신자! 정헌주란 놈은 배신자야! 이런 배신자는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청년당원들은 그 즉시로 정헌주의 집으로 몰려갔다.
"배신자! 정헌주 나와라! 나와서 신파한테 얼마 받아 먹었는지 밝혀라."
처음 청년 당원들은 정헌주의 집 앞에서 그를 성토하는 데모를 벌였으나 점차 열기가 고조되자, 그의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부수고 깨고 하며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구파 청년 당원들은 이것으로 그치지를 않았다. 다음날에도 또 몰려가 정헌주를 벌였다. 첫날과 둘째날에 동원되었던 청년 당원들은 고작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흘째 되는 날엔 그 수가 3백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정헌주의 집 앞에서만 데모를 별였던 것은 아니었다. 용산의 교통부 청사에까지 몰려가서 데모를 벌였다. 죽을 지경인 것은 가족들이었다. <배신자 정헌주, 배신자 정헌주>라는 소리에 가족들은 노이로제가 될 지경이었다. 옛글에도 <계집은 정절, 사내는 지조>라고 했다. 하물며 정치를 한다는 공인이 지조를 팔았으니 야유와 공박을 당할 만도 했다. 지조를 팔 때는 어쩌면 그 정도의 수모와 창피를 각오하고 있어야 할지... 그렇지 않아도 장면이 국무총리에 인준된 직후, <구파 의원 5명이 배신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래서 구파 소속 의원이나 청년 당원들은, "배신을 한 놈이 어떤 놈이냐?" 하며 배신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던 참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배신자로서 정체를 드러낸 것은 유진영(兪鎭靈)이었다.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어 발설을 한 것은 유옥우(劉沃祐)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유진영을 배신자로 낙인 찍게 되었던가? 7.29 총선거에서 유진영은 구파에서 밀어준 덕분에 당선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던 날이었다. 서울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파의 이석기(李錫基)와 김선태였다. 두 사람은 유진영이 출구에서 나오자 재빨리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로 안내, 그를 태우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유옥우 는생각했다. (신파인 이석기, 김선태가 어째서 구파인 유진영을 칙사대접하듯 했겠는가?) 미루어 볼 때, 유진영이 신파한테 매수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유옥우는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 소속 의원 가운데에는, "당장 유진영을 불러다가 사실을 밝히자"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진산이, 내부 혼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만류했기 때문에 우선 덮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영에 대한 구파의 감정은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인 8월 20일에 폭발해 버렸다. 이날 아침 유진영이 구파의 김천수(金千洙)가 묵고 있는 관철동의 광신여관에 들렀다. 김천수의 방에는 마침 역시 구파인 박찬(朴燦)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유진영이 찾아왔는데도 김천수는 조금도 반기는 눈치가 없었다. 반기기는 커녕 더러운 오물이라도 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어?"
유진영은 뜻하지 않은 김천수의 곱지 않은 표정을 대하자, 좀 섬뜩한 느낌이 너스레를 떨었다.
"허허...... 이 사람, 마치 내가 오지 못할 곳을 왔다는 말투로군, 허허......."
"뭐가 어째?"
반문과 함께 김천수의 오른손이 번쩍 들리며 유진영의 왼쪽 뺨을 후려갈겼다.
"이 새끼야, 그럼 너 같은 배신자가 찾아올 곳이야, 여기가?"
박찬도 가만 있지를 않았다.
"이런 배신자는 죽여 버려야 돼!"
박찬은 김천수보다 한술 더 떴다. 주먹으로 유진영을 난타했던 것이다. 실컷 주먹을 휘두르고 나니 박찬은 좀 속이 후련해졌던지,
"이 새깨야, 빨랑 돌아가지 못해! 너 같은 배신자하고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싫다. 유진영은 괜스레 찾아갔다가 공매만 실컷 얻어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10만 선량이라는 국회의원 신분으로서 동료 의원한테 철권제재를 당하다니 이런 창피한 일이 또 있을 수 없다. 유진영 구타사건은 배신자에 대한 구파의 감정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증명해 준예였다. 그렇듯 구파의 감정이 격앙돼 있을 때. 신파 일색의 내각에 구파인 정헌주가 꼭 한 사람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이 되었느니 <정헌주 이놈도 배신자다!> 하고 단정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를 매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헌주는 데모대의 매도데모에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8월 26일, 그는 민의원 본회의장에서 <신상발언>을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그는 단상으로 올라가자 구파의 청년 당원들이 자신을 매도 규탄하는 데모를 벌여 괴롭히고 있다는 진상을 밝히고,
"소위 신파니, 구파니 하는 것은 정책을 중심으로 모인 정치집단이 아니고 개인적인 친소 관계로써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인간적인 클럽입니다. 7.29 총선거 때 일부 구파 의원들에 의해 민주당 분당론이 제기되어 국민들이 걱정할 때, 나는 민주당이 쪼개지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 일하겠다고 사천(泗川) 군민들에게 공약하여 다수표를 얻었습니다. 이같은 입장에 따라 나는 구파 간부회의에서 대통령, 총리겸정에 대해 정면 반대를 했습니다."
그는 신념의 정치인이라 할 수 있었다. <민주당은 쪼개어져서는 안 된다, 구파가 대통령과 총리를 겸정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 따라 행동했다면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한데, 의석에 앉아서 정헌주의 신상발언을 듣고 있던 구파 의원들은 그의 발언을 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았다. 사방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그게 신상발언이야?"
"신상발언만 해!"
"배신자가 하는 수작이 겨우 그거야?"
정헌주의 배짱도 어지간히 두둑했다. 그는 구파 의원의 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목청을 한껏 더 돋구었다.
"독재정권에 대해 다 같이 싸워 왔는데 신파에 주어서 화해해 나가야지, 일파 독점은 사리에 맞지 않고 정리에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 나름대로 옳은 말이다. 파벌이 없다면 모른다. 두 파로 갈라져 있는 이상에는 안배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구파는 자파만의 집권욕에서 이미 선거 도중에 분당을 선언했던 것이다. 어차피 신파와 구파는 물과 기름, 도저히 융합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분당을 전제로 해서 <요직 독정>의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만큼 구파는 또 구파 나름대로 그 이유가 타당하기도 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진산, 조영규, 양일동(梁一東)이었다. 단상에서 발언하고 소리쳤다.
"이 후안무치한 자야!"
"변절자가 무슨 개수작이야!"
"더러운 배신자야!"
세 사람은 모두 구파의 중진들이었다. 사회를 맡아보던 곽상훈이,
"여기는 민주당 의원 총회 자리가 아니니 조용히 해요" 하고 경고를 했다. 곽상훈은 중도파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 경고는 다분히 정헌주를 감싸주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소장파 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신상발언이면, 신상발언만 해!"
정헌주는 소장파 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 발언만 신상발언이야!"
정헌주는 구파 23인위원회의 멤버였다.
"그래 23인 위원이야. 그게 어떻단 말이야?"
"의장, 왜 가만 있소? 발언을 중지시키시오."
여기저기에서 발언을 중지시키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런다고 내가 내려갈 줄 아시오! 여러분!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 무서워서 야단이냔 말야? 그리도 겁이 나요?"
양일동이 더는 못 참겠던 모양이었다. 그 거구가 표범처럼 어깨로 바람을 일으키며 단숨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정헌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철면피한 자야!"
정헌주도 맞섰다.
"뭐가 어째!"
그도 양일동을 발길로 찼다. 마침내 난투극이 벌어졌다. 정헌주도 신체는 건강했으나 양일동의 적수는 못 되는 것 같았다. 멱살을 잡힌 채 단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경위들이 달려왔고 앞줄의 일부 의원들이 달려나갔다.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애를 썼으나 엉겨붙은 두 사람은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때 구파의 이경(李京)과 신인우(申仁雨)가 달려나왔다. 이경은 유도가 6단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헌주의 허리띠를 잡더니 허리치기로 의사당 바닥에다가 메다꽂았다. 그러자 급기야 신.구파의 난투극으로 번졌던 것이다. 국정의 장이 민주당 신.구파의 싸움의 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동안이나 멀거니 서서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의장 곽상훈이,
"5분간 정회를 선포합니다" 하며 의사봉을 세 번 탕탕 쳤다. 그제서야 싸움이 멈추었다. 국정을 논의하는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이런 육탄전을 벌이는 것이 옳은 짓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필자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역설적인 것은 관전자인 국민은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때 민주주의 맛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국정에 골몰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일 때로 쌓인 국회의원들도 간혹 가다가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게 아니냐 느낌도 든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손톱 곪는 것은 알면서 염통 썩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겉에 드러나 있는 문제보다는 드러나 있지 않은 문제가 더 큰 문제로 되어 있을 때에 항상 비유해서 쓰고 있는 말이다. 앞에서 소개한 후유증 따위는 이미 갈라서기로 한 구파와의 문제니까 손톱이 썩는 문제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민주당 내부에는 각료 인선이 끝나자 서서히 동지 상호간의 알력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일기 시작했다. 돈과 정치와의 함수 관계를 이루어 놓고 있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통된 요소였다. 돈줄을 쥐고 있는 자가 권력을 쥐기 마련이었다. 민주당의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은 오위영이었다. 구파를 끌어들이고 무소속을 회유하는 데 쓰여진 정치자금은 모두 오위영의 주머니를 털어서 충당됐었다. 장면이 오위영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아니었던들 국무총리 인준은 도저히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위영의 공로는 절대적이었고, 그것은 곧 오위영이 제2인자의 위치를 굳히는 결과가 되었다. 은행가 출신인 그가 재무나 상공 같은 정치자금과 직결되는 부서를 맡지 않고 인사권을 관장하고 있는 제2인자로서의 권한을 십분 행사하고 싶어서였다. 한데, 오위영의 제2인자의 위치를 빼앗고 도전한 그의 동지가 있었다.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김영선이 바로 그였다. <장면 박사의 후계자는 바로 나다> 하는 꿈이 그에게는 진작부터 있었다. 김영선은 족히 그런 꿈을 꿀 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년 42세인 김영선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서울대학교 전신) 법과 출신으로서 벌써 20대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 군수(郡守)를 역임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수재였다. 법률을 전공한 그가 언제 경제학 공부를 했는지 모르지만 민주당이 내건 경제 정책은 거의가 그의 창작물이었다. 편이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 장로였다. 종교 생활은 그의 성품을 겸손하게 해주었고, 큰 얼굴과 뚱뚱한 몸매는 중후한 인품을 풍겨주기에 족했다. 타고난 재질과 중후한 인품을 갖추고 있는 김영선은 스스로 제2인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제2인자의 조건은 중후한 인품만으로는 부족했다. 돈을 만들 줄 아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와 돈은 함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당 생활을 통해 이 사실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만들어야 한다, 돈을!) 돈을 만들어 오위영을 능가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김영선은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자, 먼저 야합을 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재무부 장관과 재벌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함수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김영선이 <우리 야합을 합시다> 하고 프로포즈를 하지 않더라도 재벌들 스스로가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는 쉽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일이었다. 이른바 7.29 총선 때 민주당의 정치자금을 모으기에 앞장섰던 인물은 이한원(李漢垣)이었다. 그는 대한제분(大韓製粉)과 동아상사(東亞商社)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이었다. 그는 관북(關北) 출신자였기 때문에 관서(關西) 출신인 주요한과 쉽게 유대를 맺을 수가 있었다. 김영선은 재무부 장관으로 등용되자 이병철, 삼호재벌의 정재호 등을 쉽게 그의 영향력 밑으로 끌어들였다. 모두가 부정축재가들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던 것이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처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재무부 장관과 유대를 맺어둬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김영선이 재벌들을 그의 영향력 밑으로 끌어들이자 당황한 것은 오위영이었다. (김영선이 재벌들하고 야합해 가지고 정치자금을 만들 수 있는 길이 트여져선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정치자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서는 안 돼!) 실질적인 제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봉쇄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봉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김영선이 재무부 장관으로 등용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부터가 그의 큰 실책이었다.
(김영선을 재무부 장관 시키는 것이 아니었어.) 오위영은 후회막급 이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김영선에게 재무부 장관의 포스트가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해도 그것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영선의 재무부 장관 취임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민주당의 경제 정책을 혼자서 입안해 온 김영선에게 재부부 장관의 포스트를 안기지 않고 누구에게 안기겠는가. 구파까지도 김영선을 재무에 앉인 것을 적재적소라고 처음부터 김영선을 라이벌로 점찍고 있던 당년 57세의 오위영이 김영선을 꺾자면 3그의 자금동원 능력을 능가할 수 있을 만큼의 정치자금을 마련해 놓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오위영은 부지런히 일본땅을 드나들었다. 일본에는 <교포재벌>이라 일컬을 만한 재벌들이 꽤 있었다. 서갑호(徐甲號), 손원달(孫元達) 등이 바로 교포재벌이었다. 오위영은 그들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하긴 재일 교포재벌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정치인은 오위영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지연(地緣)과 인연(人緣)의 끈을 대어 어떻게 해서든 그들 교포재벌에게 접근하고자 시도하는 정객들은 많았다. 않았다. 산 설고 물 설은 타국 땅에 가서 피와 눈물과 땀으로 재력을 쌓은 그들이었다. 지연이나 인연으로 움직일그들이 아니었다. 권력의 최고핵과 연줄이 이어진다면 모를까 정치인이라는 이름 석 자에 끌려 주머니 끈을 풀 만큼 그들 교포재벌들은 녹녹치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오위영이 으뜸 가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질적인 면에서는 어찌 됐든간에 누구나가 그를 제2인자로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재벌을 국내로 끌어들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된다.) 이래서 오위영은 부지런히 일본땅을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된다는 AGI3 SING 국내에 투자를 하게 하는 것은 산업을 일으키는 첩경이 될 것이었고 그것은 곧 실업자 해소책도 된다. 한국에 자본을투자하려는 외국 자본가가 없는 이상에는 산업을 일으켜 경제부흥을 꾀하는 길은 재일 교포재벌들로 하여금 본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이 점에 먼저 착안한 오위영은 교포재벌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뻔질나게 일본땅을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포재벌을 국내로 끌어들여 정치자금을 마련해 보자는 속셈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못 되었으나 산업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발상이었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제국의 변경에서는
반란
재 속에 묻혀있던 불씨가 활활 타오른 것은, 플로루스 장관이 체납된 속주세 대신 예루살렘 신전이 보물창고에서 7탈렌트의 금화를 물수한 것이 발단이었다. 청년 시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붙잡혔을 때, 해적들이 요구한 몸 값이 20탈렌트였다. 1탈렌트는 6천 드라크라에 해당하니까, 서민의 생활 수준으로는 560명의 1년 수입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다. 플로루스는 어디까지나 체납된 속주세 대신이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액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신전은 유대 교도가 의무적으로 1년에 2드라크마씩 봉납금을 바치는 곳이지, 제 돈을 맡겨놓는 은행이 아니다. 게다가 세금을 체납했다고 해서 멋대로 돈을 꺼낼수 있는 은행계좌도 아니다. 그런데 플로루스는 무신경을 반성하기는커녕, 폭동을 일으킨 유대인에 대해 강경 진압을 단행했다. 이래서는 유대인의 분노가 고조되는 것도 당연했다. 유대인도 분노를 억제할 줄 몰랐다. 유대인의 특질 가운데 하나는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도중에 멈추지 못하고 갈 데까지 가버리는 것이다. 17탈랜트 때문에 일어난 폭동은 예루살렘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서기 66년 6월의 일이다.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이 모두 폭동에 가담했는가 하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대인은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다. 급진파는 이때까지 유대 내륙지역을 휩쓸고 다니다가 예루살렘의 하층민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시카리오이'들이고, 온건파는 예루살렘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구성원들이 굳건히 단결되어 있지 않으면 급진파의 행동은 더욱 과격해지게 마련이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또한 신념 때문이 아니라 입장 때문에 온건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게 되는데, 급진파의 과격한 행동은 그런 효과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급진파가 둘로 분열되어 있었다. 두 파는 서로 경쟁하듯 과격한 행동을 일삼게 된다. 폭도가 두려워 왕궁 안으로 도망친 로마 수비대는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을 듣고 항복했지만 모두 학살당했다. 온건파의 중심인 대제사장은 동생과 함께 테러를 당해 죽었다.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해 있던 마사다 요새도 습격한 급진파의 손데 들어갔다. 북부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 아그리파 2세가 같은 유대인으로서 폭도들을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여름 그리고 가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폭동은 유대 서부와 남부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그리스계 도시의 그리스인들이 여기에 위기감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원래 반유대 감정이 강하다. 위기감으로 증폭된 반유대 감정은 같은 도시에 사는 유대인을 향해 폭발했다. 이같은 현상은 시리아에도 번진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그리스계주민과 유대계 주민의 해묵은 적대감에 불이 붙었다. 로마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집트 장관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가 유대인 이면서도 단호한 조치로 대응했기 때문에 일이 크게 번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유대를 관할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이 직접 나서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는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코르불로의 후임자였지만, 총독에 취임하자마자 병에 걸리는 바람에 2년 동안 부총독인 무키아누스에게 실무를 맡겨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군단을 이끌고 가는 역할은 남에게 맡길 수 없다. 유대 민족의 특수성을 배려하는 로마가 유대교도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군단을 파견하는 것은 무려 130년만 이었다. 130년 전인 폼페이우스 시대 이후로는 한번도 예루살렘에 군단을 파견한 적이 없었다. 케스티우스는 제12군단과 아그리파 2세 등의 우군을 이끌고 남하했다. 반란자 편에 선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예상된 일이지만 유대 쪽의 반격은 격렬했다. 또한 케스티우스의 지휘도 적극성이 부족했다. 결국 예루살렘 최대의 요새라 해도 좋은 신전 언덕을 공략하는데 실패한다. 계절은 늦가을, 어느새 11월로 접어들어 가을도 깊었다. 문제 해결을 이듬해로 미루려고 생각했는지, 케스티우스는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후퇴는 진격보다 어렵다. 진격할 때보다 더욱 결연하면서도 신중한 주의가 필요하다. 병약한 케스티우스에게는 그럴만한 기력이 없었을 것이다. 로마 군단이 후퇴하자 기세가 오른 유대인이 그 로마군을 습격한 것이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단과 우군을 합친 전사자는 보병 5천 300명에 기병이 480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유대쪽의 대승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케스티우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있는 총독 관저로 돌아간 직후에 세상을 떠났다. 병사였다.
로마군의 참패 소식은 그 무렵 그리스에 가 있던 네로 황제에게 전해졌다. 케스티우스의 후임에 무키아누스를 임명한 네로는 이제 결정적인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시리아 속주 총독의 주된 임무는 오리엔트의 대국 아르매니아와 파르티아의 동향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들 두 왕국이 지금은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지만, 언제 어떤 태도로 나올지 알 수 없고, 또한 그들의 향배에 따라 오리엔트 일대의 풍향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로는 유대 문제가 시리아 총독의 임무를 넘어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대 문제만 담당하는 책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자작시를 노래하면서 그리스 전역을 '순회공연'하고 있던 네로가 그래도 이런 문제는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네로가 자작시를 노래하고 있을 때 꾸벅꾸벅 졸다가 들켜서, 이제 출세하기는 다 틀렸다고 믿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기용한 걸 보면, 네로는 시원시원한 성격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반란 진압을 위한 군사행동은 이듬해인 서기 67년 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끌고 갈 병력은 3개 군단으로 결정되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도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30년 동안이나 조정자 역할에 충실했던 로마도 마침내 유대와 정면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유대 문제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로마가 결정적 행동에 나선 진짜 이유는 그런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다. 제국 동방의 대결 구도로 보아, 보통 수단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유대 문제였다. 그리스계 주민과 유대계 주민이 대립관계에 있다 -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그리스계 도시. 유대인 급진파와 유대인 온건파가 대립해 있다 - 예루살렘과 유대의 내륙지역. 그리스계 주민 및 로마군과 유대계 주민이 대립해 있다 - 카이사레아를 비롯한 유대의 항구도시. 이런 상황을 단번에 해결하려면 로마군이 본격적으로 출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의 견해다. 그리고 이 역사가에 따르면, 로마의 본격적인 반격을 앞두고 유대 쪽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를 망라한 수비체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요세푸스
여기서 한 인물에 대해 설명해두지 않으면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이름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 '유대 전쟁기'를 쓴 사람이다. 이름부터가 전형적인 유대인이다. 서기 37년에 태어났다니까, 네로 황제와 동갑이다. 아버지는 제사장 계급. 어머니는 유대 왕가와 혈연관계에 있는 상류층 출신이다. 요세푸스는 지적 수준이 높은 유대의 상류층 자제에게 어울리는 완벽한 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지식보다 지혜가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유대교를 샅샅이 체험하려는 듯 각 종파를 돌아다니며 청년기를 보낸다. 사두카이파와 에세네파에도 접근했고, 사막에서 집단 거주하는 종교단체의 생활도 체험했고, 파리사이파에도 접근했던 모양이다. 출신 계급으로 보나 지적 수준으로 보나, 유대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서기 64년, 27세가 된 요세푸스는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한다. 펠릭스 장관 시절에 반로마 폭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로마에 끌려간 유대인들을 석방해달라고 네로 황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사절단이 파견되었는데, 요세푸스는 그 사절단의 최연소 단원이었다. 두뇌가 명석한 이 유대의 젊은 엘리트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들른 소아시아나 그리스의 도시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도시들을 모두 통괄하는 제국의 수도 로마를 난생 처음 눈으로 보았다. 아마 이때의 체험이 몇 년 뒤 요세푸스의 진로 변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국의 구도 로마에 도착한 뒤에도 유대의 젊은 엘리트는 단순한 여행객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 배우의 소개로 만난 포파이아 사비나 황후와 가까워졌다. 포파이아 황후는 유대인 사회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서로 아는 사이가 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답고 재치있는 포파이아도 잘생기고 지적인 유대 청년을 반갑게 만나주었을 것이다. 네로 황제도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요세푸스 자신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당시 네로는 로마 대화재를 수습하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빴으니까, 유대 사절단의 회연소 단원을 만날 겨를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황후를 통한 탄원은 성공하여, 로마에 붙잡혀 있던 유대인들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유대에서 이탈리아로, 다시 이탈리아에서 유대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고, 계절에 좌우되는 해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고려하면, 요세푸스 일행이 귀국한 것은 서기 66년 가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귀국하자마자 요페푸스는 로마군을 맞아 싸울 최일선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로마 제국의 위세를 방금 보고 온 29세의 젊은이가 그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최전선으로 보내진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현실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든 꿈을 꿀 수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말했듯이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로마 제국만 보면 그만이다. 요세푸스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젊은이였다. 이 점에서는 동포인 유대인보다 적인 로마인 쪽에 가깝다. '유대 전쟁기'는 이런 인물이 동포의 파멸을 기록한 책이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안목의 결합이 빚어낸 역사서의 걸작이다.
유대 전쟁
서기 67년 5월, 요세푸스가 동포를 지휘하며 대기하고 있는 유대 북부의 갈릴라이아를 향해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로마군의 '양'이 아니라 '질'을 안 사람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로마가 진지하게 나오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안티오키아에 주둔하고 있는 1개 군단과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지원군만으로 구성되었던 케스티우스 때와는 달랐다. 주전력인 제5군단, 제10군단, 제15군단은 모두 명장 코르불로의 담금질로 정예화한 군단이다.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문제가 해결된 뒤에도 소아시아에 주둔해 있다가 이번에 지중해 연안을 따라 이동해온 것이다. 이 주전력을 보조하는 보조병도 군단병과 거의 같은 수에 이른다. 이 속주병들의 출신지는 소속 군단의 주둔지 부근이니까, 도나우 강 연안이 원래 주둔지였던 제5군단과 제15군단의 보조병들 중에는 발칸 출신이 많다.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제10군단의 보조부대는 소아시아와 그리스 출신 보조병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휘하에는 유대 북동부를 다스리는 아그리파 2세의 유대인 병사들을 비롯하여 나바테아와 아라비아 병사들도 참가했다. 그들의 왕이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의 총병력은 6만. 로마군 사령관은 언어에서부터 피부색이며 음식까지 서로 다른 병사들을 통솔해야 했다. 군단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라틴어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느닷없이 끌려나와 참전한 아랍 병사들에게 라틴어가 통할 턱이 없다. 로마 황제들 가운데 군인 출신이 많은 것은 로마 제국에서 군인 세력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잡다한 인간 집단을 이끌고 전과를 올릴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면 정치도 잘했기 때문이다.
한편 로마군을 맞아 싸우는 유대군은 유대인만으로 구성된 집단이었다. 선권정치 수립이라는 유대인의 대의명분이 타민족한테까지 공감대를 넓히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도 로마인과 유대인의 싸움은 제7권에서도 말했듯이 고대 사회의 '보편'과 '특수'의 대결이었다. 각지에서 이동해오는 군단과 동맹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령관에 임명된 지 반 년이 지난 서기 67년 5월에야 비로소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있었지만, 군인으로서 그의 능력이 당시 로마군의 다른 사령관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그때까지의 경력을 돌이켜보아도 전략에서는 명장 코르불로에 훨씬 미치지 못했고, 멋진 전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훌륭한 지휘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범하고 용렬한 장수는 결코 아니다. 신중함과 견실함, 지구력과 건전한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제 이것뿐이라면 일반 병사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는 없다. 그런데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수도 로마에서 살라리아 가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60킬로미터쯤 가면 레아테(오늘날의 리에티)라는 도시가 나온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여기서 서기 9년 11월에 태어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신분은 낮다. 따라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수밖에 없었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는 경력은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시작된다. 그 또한 역사가 몸젠이 말한 '티베리우스 문하'의 일원이었다. 군단 안에서 대대장까지 지낸 뒤에는 당시 로마의 관행에 따라 수도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회계감사관에 당선했다. 회계감사관 임기가 끝난 뒤에는 다시 안찰관으로 선출되었다. 안찰관 임기를 마친 뒤에는 잠시 군단으로 돌아간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칼리굴라 황제 시대에 접어들었다. 칼리굴라는 유난히 문제가 많은 황제였지만, 전임자인 티베리우스가 구축한 인재 네트워크는 그대로 보존했으니까, 태풍 같았던 칼리굴라 황제의 짧은 치세도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칼리굴라 시대에 베스파시아누스는 30세의 나이로 법무관에 당선되기까지 했다. 당시 로마에서는 법무관을 경험해야만 1개 군단을 지휘할 자격이 주어졌다. 로마는 패권 국가다. 그래서 드넓은 제국 전역을 방위할 책무가 있다. 자격을 가진 인재를 놀게 내버려둘 여유는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도 법무관 임기를 마치자마자 라인 강 방위를 맡고 있는 제2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저지 게르마니아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서기 43년, 브리타니아 제패를 실행에 옮긴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34세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휘하 군단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브리타니아 전선은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데 공을 세운 플라우티우스가 총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이곳은 젊은 장수들이 재능을 겨루는 무대이기도 했다. 브리타니아 제패에 대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열의를 반영하여, 젊고 유능한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도 경험도 부족하지 않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군사적 자질은 이곳 브리타니아에서 꽃을 피운다. 총사령관이 유능하면 휘하군장단들도 전과를 올리기 쉽다. 베스파시아누스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활약으로 개선훈장까지 받게 되었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 네 필의 백마를 모는 개선식은 황제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군단장급은 격이 낮은 훈장밖에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 훈장을 받은 효과는 커서, 서기 51년에 42세의 베스파시아누스는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다만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보결 집정관이다. 그렇긴 하지만 로마는 10개에 가까운 원로원 관할 속주에 총독을 파견해야 하고, 집정관을 지낸 지 10년이 지난 사람만 총독이 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정관을 대량생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보궐선거라도 집정관에 출마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두 달쯤 집정관을 지낸 모양이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서기 62년에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되어 주재지인 카르타고에 부임했다.
여기서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여러 군단을 지휘하는 이른바 '황제가 임명하는 사령관'(레가투스 임페리알레)이 되어 황제 직할 속주에 부임할 수 있다. 그런데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네로 황제가 자작시를 노래하는 공연장에서 꾸벅꾸벅 졸아버린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제 출셋길이 막혔다고 누구나 생각했지만, 이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에 네로는 유대 전쟁을 담당할 사령관으로 베스파시아누스를 발탁했다. 서기 67년. 베스파시아누스는 58세, 상대인 요세푸스는 30세. 민족도 출신도 성격도 나이도 다른 두 사람이 유대 땅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둘 다 상대의 존재조차 몰랐을 것이다. 6만 명에 달하는 로마군의 진격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의 성격을 반영하여 착실하고 견실하게 진행되었다. 유대 전역을 융단폭격하듯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예루살렘에 접근하는 것이 로마의 작전이었지만, 물론 전략적 요충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요세푸스가 이끄는 유대군은 그런 로마군 앞을 가로막게 되었다. 요세푸스가 고안한 전술은 꽤 훌륭하긴 하지만 기책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의 기록은 다소 자화자찬하는 느낌이 있는데, 하기야 47일 동안이나 이 전술로 로마군 본대를 꼼짝 못하게 못박아두었으니 요세푸스의 자화자찬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전략 전술이 지닌 한계를 보여준다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술라, 전성기의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라면, 기책에 우롱당하여 47일 동안이나 발이 묶이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부사령관 같은 위치에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도 앞장서서 싸우는 용장이긴 했지만, 지략이 뛰어난 지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직이 완벽하고 통솔도 완벽한 로마군을 상대로 기책을 펴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언젠가는 밑천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요세푸스와 유대인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궁지에 몰렸다.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기보다는 자결을 택했고, 그들이 사수해야 할 요타파타는 7월 20일에 함락되었다. 요세푸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사망자가 4만명, 포로가 12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달아났다. 그 일대에 산재해 있는 동굴로 몸을 숨긴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요타파타의 장로 40명이 피신해 있었던 것이다. 요세푸스는 로마군에 투항하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30세의 한창 나이에 죽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요세푸스는 로마 제국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차피 결과가 뻔한 반란에 희생되기도 싫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로마에 항복하면 목숨을 건질수 있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40명의 장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전원 자결하는 것이야말로 유대교도다운 선택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독실한 유대교도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유일신만이 우리의 주인이다. 그분을 받드는 정치체제를 수립하는 일에 우리의 자유를 받쳐야 한다. 이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죽음조차도 하찮을 것이다."
유대교도에게 자결은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를 얻을 수 없을 때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는 동안 숨어 있던 동굴이 로마 병사들에게 발견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사람을 보내 투항을 권고했다. 하지만 장로들의 생각은 그래도 변치 않았다.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 집단 자결하기로 결정했다. 맨 처음 제비를 뽑은 사람을 그 다음에 뽑은 사람이 죽이는 방식이다. 차례로 제비를 뽑다가, 맨 마지막에 남을 사람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40명이 차례로 죽고 마침내 두 명이 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요세푸스였다. 현대 수학자의 말에 따르면 확률이 반반인 이런 경우 고등수학 지식을 활용하면 두사람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고 한다. 어쨌든 요세푸스 자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운명의 장난 때문인지 아니면 신의 뜻인지, 요세푸스와 또 한사람만 남았다. 다시 한번 제비를 뽑으면, 상대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상대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요세푸스는 어느 쪽도 싫었기 때문에, 자기를 믿고 함께 목숨을 건지자고 상대를 설득했다."
이번 설득은 성공했다. 두 손을 들고 동굴밖으로 나온 두사람은 로마군 진영으로 끌려갔다. 로마 병사들은 한 달 반이나 자기네 발을 묶어둔 적장을 증오보다는 호기심으로 맞이했다. 특히 요세푸스의 젊음이 티투스에세는 충격적이었다. 요세푸스와 동년배였던 티투스는 유대 반란을 진압하는 중이긴 했지만, 반유대주의자는 결코 아니다. 이집트 장관인 유대인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에게 심취해 있었고, 아그리파 2세의 누나인 베레니케를 유대의 왕녀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뜨겁게 사랑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만이 아니라 그의 아들 티투스도 인종 편견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순박한 티투스는,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로마 군단을 47일 동안이나 못박아둔 유대 지휘관의 젊음과 인품에 완전히 반해 버렸다. 티투스는 요세푸스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아버지 쪽은 사령관의 책무를 잊지 않았다.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일었다. 요세푸스는 네로 황제에게 압송해야 할 포로니까 감시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요세푸스는 생애 최대의 도박을 한다. 이 유대인 포로는 로마군 사령관과 단둘이 이야기 하고 싶다고 요구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요구를 받아 들였다. 다만만 요세푸스와 만나는 자리에 아들 티투스와 친구 두명을 동석 시켰다. 안전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요세푸스는 적군 사령관에게 덤벼들 마음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포석정 - 신라왕실의 영화와 패망의 상징
[포석정]
신라왕의 놀이터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생각에 잠겨 옛일 돌이켜보네/유상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옳지 못했네/황음한 일 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까
서거정이 읊은 '포석감회'의 앞부분이다. 포석정은 신라왕실의 영화와 패망의 상징이다. 이곳은 임금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이었다. 풍류 넘치는 거나한 술자리의 터이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 말기의 쇠운 속에서 술에 도취했던 왕실의 타락상이 드러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해공왕 이후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말기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사방에서 도적이 끓고,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나타났다. 더불어 왕권을 다투는 권력투쟁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왕실은 도탄에 바진 백성들을 잊고 술잔치로 흥청댔다. 결국 이러한 왕실의 타락이 신라 멸망을 재촉했다. 포석정에 얽힌 경애왕의 슬픈 얘기도 그러한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경애왕 4년(927년) 11월, 왕은 비빈과 종친 등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 전에 후백제의 기린아 견훤이 신라를 침범, 고울부(지금의 영천군)에까지 쳐들어와 경애왕은 왕건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경애왕은 이곳에서 잔치를 벌인 것이다. 한참 취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견훤의 군사들이 포석정을 덮쳤다. 왕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들어가 숨었다. 왕의 종친과 궁녀들은 붙들려 목숨을 애걸했으나 견훤의 군사들은 그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견훤은 왕비를 겁탈했으며 군사들은 궁녀들을 능욕했다. 이어 견훤은 경애왕의 족제 김부(곧 경순왕)를 왕으로 세우고 왕의 동생 효렴과 재상인 영경을 볼모로 잡았으며, 나라의 보배와 병기를 빼앗고 신라의 공인 기술자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못 되어서 신라는 고려에 왕권을 넘겨주게 된다. 천년의 찬란했던 영화가 허망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서라벌의 근처에까지 닥쳐온 적의 침입에 바로 대처하지 못하고 안락에 탐닉했던 당시의 무모함과 국방의 무방비상태를 이 얘기는 단적으로 드러낸다.
신라의 이궁
포석정은 서남산의 포석계곡 입구에 있다. 오릉에서 언양가는 길을 따라 나정을 지나면 창림사지 입구에 닿고 거기에서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포석정에 닿는다. 포석계곡은 윤을곡과 함께 남산성의 바로 아래 골짜기이다. 그 정상은 남산의 최고봉이다. 포석이란 이름은 포석계곡의 바위모양이 마치 전복과 같이 울퉁불퉁하다고 해서 붙여졌다. 포석계곡은 신비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경관이 좋다. 포석정은 포석계곡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으며 담장을 두르고 잘 단장이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임금의 놀이터인 이궁이었던 것 같으나 궁궐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구는 화강암을 다듬어 구불구불하게 만든 것으로 물길이 타원형을 이루면서 감돌아 빠져나가게 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경애왕이 술자리를 벌였던 현장이다. 이곳에서 임금은 유상곡수의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유상곡수란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시를 짓는 놀이를 말한다. 수구의 폭은 30cm, 높이도 30cm정도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물을 붓는 자리에 거북모양의 큰 돌이 있었으며,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수구 옆에는 느티나무 고목이 서 있다. 수구의 물은 남산계곡(포석계)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끌어당겼다. 그 물이 거북에게 연결되어 거북의 입으로 물이 흘러내려, 석구의 홈을 따라 감돌게 된다. 석구는 물이 들어오는 부분과 빠져나가는 부분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도도한 시의 흥취를 자아냈던 것이다. 수구의 거북돌은 19세기 말엽 안동으로 옮겼다고 하나 현재 그 있는 곳은 알 수 없다. 이 석구의 배치는 신라 궁원예술의 독특한 예술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변의 풍치를 배경으로, 자연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한 것이다. 이 포석정은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경애왕의 슬픈 얘기가 전해올 뿐이어서 위정자들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장소로 곧잘 소개되어 왔다.
남산신의 춤
삼국유사에는 포석정에 관한 얘기를 또 하나 전하고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 거동했을 때였다. 남산의 신이 문득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 그러나 그 귀신의 춤이 좌우의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의 눈에만 보였다. 왕은 남산신의 그 춤을 본따서 몸소 춤을 추었다. 어전에 나타난 춤을 춘 남산신의 이름은 '상심'이라 했다. 그래서 그후 사람들은 그 춤을 전하고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했다는 것. 이밖에도 헌강왕 때에는 몇 차례 산신들이 왕 앞에 나타난 춤을 춘 일이 있었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이들 춤을 신라 말기에 보인 쇠운의 경고였다고 파악한다. 귀신들은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므로 이를 경고하기 위해 춤으로 왕 앞에 나타났으나 왕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상서로움으로 받아들여 환락이 갈수록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패망이었다. 옛날 진평왕은 스스로 궁중의 향연과 사냥을 금했다. 문무왕은 검소한 생활을 몸으로 실천했다. 또한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고자 바닷물 속에 장사지내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군주가 이처럼 솔선수범했을 때 나라는 번성했고, 국운은 천하에 떨쳐졌다. 그러나 말기에 오면 신라왕실은 윗대의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환락에 빠진다. 그리하여 포석정에서처럼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의 원성 속에서 술잔과 궁녀의 춤으로 허송하다가 결국 무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