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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4호 - 2024.07.10 수요일(음력 : 06.05)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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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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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나 매일 대하는 여러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에 맞서기란 가장 힘든 영웅적 행위 가운데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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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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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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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슬픔의 봄
봄은 겨우내 얼어붙은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의 계절이다. 그러나 T.S.엘리엇은 봄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했다. 그는 ‘황무지’에서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다”며 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봄을 잔인한 계절로 묘사한 것이다. 김영랑 시인도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봄을 ‘찬란하지만 슬픈 계절’로 묘사했다. 그런데 ‘찬란’과 ‘슬픔’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다. ‘찬란함’은 ‘아름다움’과 ‘빛남’을 표현하는 말이어서 ‘슬픔’과는 호응할 수 없는데도 김영랑 시인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했다. 김영랑은 슬프지만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슬픔이라는 의미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했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의미를 강조하는 역설법은 문학작품에서 많이 사용된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조지훈 ‘승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상생활에서도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때 아닌 호황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조직을 재편해야 한다’ 등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들이다. 올해 우리나라의 봄은 ‘잔인한 계절’이 되고 있다. 경기침체와 극단적인 남북 대치상황, 4ㆍ13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뒤숭숭한 분위기까지 겹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꽃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시인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마뜩잖다, 마땅찮다
“… 이름을 줄줄이 거론하며 시간을 늘이는 배우들의 수상 소감이 마뜩한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과 관련한 신문 기사 중 일부다. 신세진 사람들을 일일이 거명하는 수상 소감을 금지키로 한, 주최 측의 지침을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이 중에 ‘마뜩한’은 잘못 쓰였다. ‘마뜩하다’는 ‘상당히 흡족하다’는 말이므로 여기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마뜩하지 않은’이라고 하거나 준말인 ‘마뜩잖은’으로 써야 한다. ‘마뜩하지 않다’의 준말을 ‘마뜩잖다’로 쓴다고 하면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뜩하지 않다’와 뜻이 비슷한 ‘마땅하지 않다’를 줄여서 ‘마땅찮다’로 쓰는 것처럼 ‘마뜩찮다’로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혼란스러울지 모르나 ‘마뜩잖다’와 ‘마땅찮다’로 각각 구분해 써야 한다.
이는 ‘하지 않다’가 줄어들 때 ‘잖다’와 ‘찮다’ 두 가지로 발음되는 현상을 표기에 반영한 결과다. ‘-하다’로 끝나는 용언의 어간이 어미 ‘-지 않다’와 결합해 줄어들 때는 그 앞소리가 울림소리인지 여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우선 울림소리(유성음: 모음과 ㄴ, ㄹ, ㅁ, ㅇ) 뒤의 ‘하’는 모음 ‘ㅏ’만 떨어지고 ‘ㅎ’은 남아, 뒤에 있는 ‘지’와 결합하여 ‘치’ 소리를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울림소리인 ‘ㅇ’ 받침으로 끝나는 ‘마땅’에 ‘하’가 결합한 ‘마땅하지 않다’는 ‘마땅ㅎ+지 않다’로 줄어서 ‘마땅치 않다’가 된다. 이것을 더 줄여 ‘마땅찮다’로 적는 것이다.
반면에 안울림소리(무성음: 유성음을 제외한 모든 소리) 뒤에서는 ‘하’ 소리가 통째로 탈락한다. 곧 ‘마뜩하지 않다’는 ‘마뜩+지 않다’로 줄어들어 ‘마뜩지 않다’가 되고 다시 ‘마뜩잖다’로 줄여서 적는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배트 플립
미국의 메이저리그 개막을 앞두고 우리나라 출신 선수들에 대한 관심이 높다. 국내 언론의 경우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등장하는 야구 용어로 ‘배트 플립(bat flip)’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타자가 홈런을 치고 나서 배트를 내던지는 행위를 가리킨다. 배트를 들고 뛸 수는 없으므로 손에서 놓는 것은 당연한데, 이를 집어던지는 식으로 하기에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이를 상대 투수를 조롱하는 비신사적 행위라 하여 금기시한다고 한다. 이 낯선 야구 문화에 우리 선수들이 어떻게 적응할지 관심사가 되었고, 그 덕에 ‘배트 플립’이라는 용어도 덩달아 언론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국내 야구팬들은 이를 ‘빠던’으로 부른다고 한다. ‘빠따 던지기’의 준말로서 ‘배트’의 일본식 외래어 ‘빠따’와 ‘던지기’의 첫 음절을 따서 만든 말이다. 국립국어원 조사에 따르면 이 용어는 2014년에 등장하였다. 당시 우리나라 프로야구 선수들이 홈런을 친 직후 배트를 던지는 행위가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를 다시 국내 언론에서 뉴스거리로 다루면서 ‘빠던’을 비롯해 ‘배트 플립’, ‘배트 던지기’ 등의 용어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배트 플립’이든 ‘빠던’이든 정식 용어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배트 플립’은 낯선 외국어여서 어렵게 느껴지고, ‘빠던’은 속된 느낌이 강하다. 이 말들보다는 ‘배트 던지기’가 훨씬 쉽고 품격이 있다. ‘빠던’은 정식 용어로 잘 쓰이지 않으므로 차치하더라도, ‘배트 플립’과 ‘배트 던지기’는 언론 보도에 비슷하게 나타난다. 언론사에서 이왕이면 더 쉽고 바람직한 표현인 ‘배트 던지기’로 통일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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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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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막에서
편지 -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이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
바다 1 - 정지용
오, 오, 오, 오, 오, 소리치며 달려 가니
오, 오, 오, 오, 오, 연달어서 몰아 온다.
간 밤에 잠살포시
머언 뇌성이 울더니,
오늘 아침 바다는
포도빛으로 부풀어졌다.
철석, 처얼석, 철석, 처얼석, 철석,
제비 날어들듯 물결 새이새이로 춤을 추어.
~~~~~~~~~~~~~~~~~~~
구라중화(九羅重花) - 김수영
― 어느 소녀에게 물어보니
너의 이름은 글라지오라스라고
저것이야말로 꽃이 아닐 것이다
저것이야말로 물도 아닐 것이다
눈에 걸리는 마지막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듯
영롱한 꽃송이는 나의 마지막 인내를 부숴버리려고 한다
나의 마음을 딛고 가는 거룩한 발자국소리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마지막 붓을 든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 나의 붓은 이 시대를 진솔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치욕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곳에
나란히 옆으로 가로 세로 위로 아래로 놓여있는 무수한 꽃송이와 그 그림자 그것을 그리려고
나의 붓은 말할수없이 깊은 치욕
이것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글이기에
(아아 그러한 시대가 온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나의 동요없는 마음으로
너를 다시한번 치어다보고 혹은 내려다보면서 무량의 환희에 젖는다
꽃 꽃 꽃
부끄러움을 모르는 꽃들
누구의것도 아닌 꽃들
너는 늬가 먹고 사는 물의것도 아니며
나의것도 아니고 누구의것도 아니기에
지금 마음놓고 고즈너기 날개를 펴라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마당은 아닐지나
(그것은 골고다의 언덕은 아닌
현대의 가시철망 옆에 피어있는 꽃이기에)
물도 아니며 꽃도 아닌 꽃일지나
너의 숨어있는 인내와 용기를 다하여 날개를 펴라
물이 아닌 꽃
물같이 엷은 날개를 펴며
너의 무게를 안고 날아가려는 듯
늬가 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생사의 선조뿐
그러나 그 비애에 찬 선조도 하나가 아니기에
너는 다시 부끄러움과 주저를 품고 숨가뻐하는가
결합된 색깔은 모두가 엷은 것이지만
설움과 힘찬 미소와 더불어 관용과 자비로 통하는 곳에서
네가 사는 엷은 세계는 자유로운 것이기에
생기와 신중을 한몸에 지니고
사실은 벌써 멸하여있을 너의 꽃잎 우에
이중의 봉오리를 맺고 날개를 펴고
죽음 우에 죽음 우에 죽음을 거듭하리
구라중화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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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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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생가외(後生可畏)
後: 뒤 후. 生:날 생. 可:가히 가. 畏:두려울 외.
[출전] ≪論語≫ 〈子罕篇(자한편)〉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
곧 젊은 후배들은 선인(先人→先生)의 가르침을 배워 어떤 훌륭한 인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에 가히 두렵다는 말.
춘추 시대의 대철학자/사상가인 성인(聖人) 공자는 말했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後生可畏].’ 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焉知來者之不知今也] 그러나 40세, 50세가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두려워할 바 없느니라.”
[주] ‘후생가외’는 공자가 제자 중 학문과 덕행이 가장 뛰어난 안회[顔回:자는 자연(子淵), B.C. 521~490]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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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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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6. 옥에 티를 남긴 7.29 총선 (2/2)
한편에서는 선거전이 벌어지고 또 한편에서는 혁명재판(?)이 벌어지고 있던 1960년의 7월은 너무나 어수선하기만 했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재판은 두번째부터 본격적으로 사실심리에 들어갔으나, 그 내용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여기에서는 최인규에 대한 정.부통령 선거 때 최인규가 어떤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는지 그 편모만을 엿볼 수 있도록 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관련 피고인 전원에 대한 사실심리를 소개하자면 방대한 시간과 지면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부정선거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두 번째 공판은 제1회 공판이 열린 지 사흘 만인 7월 8일에 열렸다. 방청객은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었다. 7월의 폭염과 인체에서 내뿜는 열기로 해서 법정 안은 어김없는 찜통이었다. 그런데 공판 전, 방청객들이 입정할 때 정장을 한 30대 여인이 20대 아가씨와 손을 마주 잡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인은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 최인규 마누라 아냐?"
몰려 있던 각 신문기자들이 일제히 여인한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맞아 틀림없어, 어김없는 최인규의 마누라야!"
최인규의 아내 강(康) 여인은 남편이 내무부 장관에 취임할 때 식장에까지 나왔던 일도 있었고 또 소위 <공무원 친목회> 회장으로 치맛바람을 날렸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 사이에는 꽤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사진기자들은 무슨 특종기사감이라도 발견한 듯이 우하고 몰려갔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졌다. 그제야 강 여인은 <아차> 하는 모양이었다. 잽싸게 일어나 쏜살같이 법정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뒤쫓는 짓궂은 난다는 듯이 내뱉았다.
"남편의 장래가 걱정스러워서 방청을 나왔거든 좀 수수하게 차리고 나올 일이지, 그래 여기가 파티장이야! 값진 갑사 치마 저고리로 호사스럽게 차려입고 나오게. 그 몸가짐은 뭐야, 껌을 질겅질겅 씹구....... 그 남편에 그 아내라니까!"
결국 최인규는 먹지 않아도 좋을 욕을 아내 때문에 또 한번 먹은 꼴이 되었다. 법정 밖에는 아침부터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사실심리가 시작되는 날에 궂은 비가 내리는 것일까, 부정선거 관련 피고인들의 운명을 서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유쾌하지가 않았다. 공판은 오전 9시 10분에 열렸다. 법정에 입정한 피고인들은 더욱 형편없이 국가보안법 제1조가 적용되어 기소되었다고 통보되었기 때문이었다. 법정 태도가 공손했다는 동정을 얻고자 해선지 몸가짐에는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방청객의 동정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날에 있었던 사실심리에 대해서 중요한 대목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최인규 피고인, 4292(1959)년 김일환(金一煥)이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7개월 만에 피고인이 다시 내무부 장관을로 임명된 것은 이승만, 이기붕을 반드시 정.부통령에 당선시키고야 말겠다고 사전에 맹세한 까닭이지?"
재판장 정영조의 물음에 최인규는 펄쩍 진술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붕 씨로부터 통지를 받고 중앙의료원에 갔더니 이기붕 씨가 김일환의 후임으로 저를 내무장관에 추천했으니 일 잘 하라고 했으며 사전 약속은 없었습니다."
"4285(1952)년 7월 14일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 선거를 직접선거로 개헌한 이유를 알고 있는가?"
"죄송합니다. 재판장님, 그 당시에는
정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이승만이 간접선거로는 당선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헌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발췌 개헌안은 계엄령을 선포한 후,
국회의원을 협박해서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네, 그렇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사 5입 개헌이란 무엇인가?"
"초대 대통령은 종신 집권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압니다."
"4사 5입 개헌 이전의 헌법 55조에는 <대통령은 두 번 이상 재선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 조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 사람이 오래 집권하면 독재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4 파동은 무엇인가?"
"개정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킬 때 일어난 파동을 말합니다."
"선거제도였던 지방자치제를 임명제로 개정한 이유는?"
정부 시책에 대해서 지방행정을 강력히 심문하는 재판장의 태도는 꼭 대학 입시생을 앞에 두고 구두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았고, 최인규의 태도는 구두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 이상으로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재판장 정영조는 최인규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질문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피고인 최인규, 피고는 4292(1959)년 3월 20일에 내무부 장관에 취임할 때, 전 내무부 직원에게 취임사를 했는데 그때 뭐라고 했는가?"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전 공무원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씨를 당선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내무부 장관으로서 첫날부터
선거운동을 지시했는가?"
"......."
재판장이 매섭게 쏘아붙이는 바람에 최인규의 심장이 얼어붙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답변을 하자니 궁색하기도 했을 것이다.
"매월 1일 내무부 월례회의에서 선거운동을 지시하고 1962년 5월부터 11월까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공무원 선거운동을 독려했지?"
"네."
"국무회의에 6인위원회라는 게 있었는가?"
"6인위원회는 4292년 3월경에 조직이 국무회의에 상정하기 전에 예비적으로 상의하고, 대통령의 특명 사항을 토의하는 것입니다. 구성원은 내무, 법무, 외무, 재무, 체신, 교통장관 등이었습니다."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6인위원회에서 합의한 일이 있는가?"
"작년 3월경, 6인위원회를 지방행정 연구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인 후 비공식 양해로 합의했습니다."
"국무회의에서도 의결했는가?"
"역시 비공식으로 합의하고 각부 장관에게 공무원 선거운동을 지시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공무원 친목회는 언제 조직했는가?"
"4292(1959)년 7월경, 유충렬(柳忠烈) 시경국장에게 지시해서 서울에서 10월경 국무회의의 의결에 따라 각 소속 장관의 협조를 얻어서 지방경찰의 사찰 담당자가 책임을 지고 지방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했습니다. 공무원 가족 친목회는 각 기관장이 책임지고 조직하도록 했습니다."
"공무원 친목회는 왜 만들었는가?"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전국 경찰국장, 사찰국장 등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부정선거를 지시한 일이 있지?"
"네."
"이번 선거에서 만약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투표함을 바꿔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하고, 그래도 안 될 때는 하라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선거의 의의를 참작해서 그런 뜻의 말을 한 적은 있습니다."
"유권자의 4할에 해당하는 표를 사전에 투표하라고 지시했다지."
"그런 일이 있습니다."
"3인조, 9인조 공개투표로 지시했다지?"
"네."
"피고인은 선거 당시 뜻대로 안 되면 민주당 선거위원을 투표장에서 축출하라고 했다면서?"
"매수되지 않으면 축출하라고 했습니다."
최인규에 대한 재판장의 심문 내용은 이미 3.15 정.부통령 선거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에 언론에 의해서 하더라도 저지른 죄과에 대해서 애써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을 않는 최인규의 법정 태도는 참으로 훌륭했다. 최인규는 역시 사나이였다.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 의원을 뽑았던 선거를 세칭 <7.29 총선거>라 호칭한다. 1960년 7월 29일에 총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에 민의원에 입후보한 자는 1,5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은 입후보자들이 난립하게 되었던 이유는 이른바 <혁신정객>들의 정치 참여가 현저하게 혁신정객이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를 말한다. 4.19 사태로 해서 이승만 정권이 쓰러지고 완전한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것 같이 보여지게 되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혁신정객들이 대거 정계로 뛰어들어 끼리끼리 모여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을 만들었다. 그런 정당들 가운데의 대표적인 정당이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이었다. 이 정치집단은 과거 조봉암을 당수로 해서 결당되었던 진보당(進步黨) 출신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보수 세력에 대항하려면 혁신 세력도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으나 역시 한국인의 생리는 분파 작용에서그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점쳐놓고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당 간부라는 감투나 하나 얻어 쓰자 해서 끼리끼리 정당을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4.19 직후의 두드러진 현상은 혁신 정당의 출현만이 아니었다. 교육자인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교원노조(敎員勞組)를 결성하는 등 의식화 경향이 짙게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육자가 노조를 결성하는 따위 사회운동을 벌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이냐 해서 논란도 많았다. 교육자도 어떤 면에서는 노동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교육자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교육자였다. 교육자에게는 교육자로서의 긍지와 자세가 내동댕이치고 의식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것도 군사 쿠데타의 구실이 되어 주었었다. 그건 그렇고, 7.29 총선거는 투표에 이르기까지는 유례없이 공명했다.
"어떻게 해서 지켜낸 자유민주주의던가? 젊은 학생들의 피를 숱하게 흘려놓고야 겨우 지켜낸 자유요, 민주주의가 아니던가! 이것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랴!"
국민 각자의 마음에 누구나가 이런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를 치르려 하지 않았으므로 공명선거를 치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표가 시작되자 공명선거에 먹칠을 하기 시작했다. 반혁명 분자의 표가 압도적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이오? 투표에 부정이 없었던들 내 표가 이렇게 적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부정선거의 결과야! 그놈의 투표함을 모조리 불살라 버려!"
이래서 개표가 진행되던 중 곳곳에서 잇달아 불상사가 야기되었다. 반혁명 분자의 표가 많이 나왔다고 해서 투표함을 불지르는가 하면 난동을 부렸던 선거구는 어떤 곳이었던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위해서 폭력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무법자들을 여기에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로 한다. 폭력이 가장 처절한 정도로 난무했던 선거구는 경상남도 창녕(昌寧)이었다. 이 선거구는 박기정이란 인물이 민주당 공천을 도의원(道議員)을 지낸 신파에 속한 인물이다. 이 박기정과 대결한 인물이 당년 45세인 신영주(辛泳株)였다. 자유당에서는 성보경(成輔慶)이란 인물을 공천자로 내세웠기 때문에 신영주는 자유당 당원이었으나 무소속으로 입후보해야만 했다. 이 밖에 무소속으로 5명이 출마를 했기 때문에 창녕 선거구는 8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개표가 시작되자 쏟아져 나오는 표는 모두가 신영주를 찍은 표들뿐이었다. 으레 당선될 것이라고 자만해 있던 박기정이 분통이 터질 지경에 이르렀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투표함을 모조리 불사르고 신영주란 놈을 잡아다가 혼줄을 내버려!"
어떤지 확인할 길은 없다. 어쩜 그의 선거 참모들이 이런 지령을 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군민이 감히 트럭 등을 탈취해 타고 개표장으로 몰려가 88개의 민.참의원 투표함을 모조리 불사르는 만용을 부릴 수가 있겠는가! 그들 폭도화한 군민들 3천여 명은 투표함만 불살랐던 것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표를 얻고 있던 신영주를 잡아다가 개 패듯 팼다.
"너 이놈, 선거위원들을 돈으로 매수했지? 어서 매수했다고 자백을 해! 자백을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박기정의 지지자들은 이런 자백을 강요하며 신영주를 떡이 되도록 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신영주의 지지자들이 박기정 지지자들과 맞섰다. 마침내 난투극이 벌어졌다. 치고 받고 때리는 난투극 끝에 양쪽 도합 80명이나 되는 부상자를 내는 결과를 빚었다. 전라남도 광산(光山). 광산 선거구는 11명이 입후보했다. 민주당 공천 입후보자는 고몽우(高夢尤)라는 구파 소속의 인물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개표 도중 고몽우와 민주당원(신하)이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김삼길(金三吉) 두 사람한테 똑같이 찍은 <쌍가락지> 표가 발단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이 사회대중당 후보인 강대창이었다.
"이건 명백한 개표부정이요! 따라서 이 투표는 무효요!"
강대창이 이렇게 외치자 <옳소!> 하고 호응하는 것이 고몽우의 참관인들을 제외한 여타 후보자들의 참관인들이었다.
"개표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다!"
"이 선거는 무효다!"
"투표함을 모조리 불질러 버려라!"
급기야는 난동이 벌어졌고 개표장 밖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 80명이 이 난동에 가세했다. 투표함이 불살라지고 개표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비경찰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폭도화해 버린 무리를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는 군대가 출동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난동은 진압되었으나 26개나 되는 재선거를 치르지 않고는 당선자를 가려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충청북도 괴산(槐山). 충청도 양반도 이제는 옛말이던가? 괴산 선거구에서는 타도에 질세라 투표함을 파괴하는 난동을 벌였다. 괴산 선거구에는 모두 6명이 입후보했다. 훨씬 뒤에 윤보선과 박정희가 대통령직을 놓고 자웅을 겨룰 때, <경상도에는 빨갱이가 많다>라는 말로 결과적으로 윤보선에게 갈 야당 지지표를 박정희한테 던지게 하는 발언을 했던 김사만(金思萬)이 민주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고 여기에 대항한 인물은 자유당원이나 무소속으로 입후보해야 했던 안동준(安東濬)과 자유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던 김원태(金元泰) 한데, 68개 투표함 중 38개의 투표함을 개표한 결과 안동준의 표가 7천여 표나 김사만을 누르고 있었다. 이것을 본 김사만의 지지자들은,
"우리 괴산 땅에서 반혁명 세력을 민의의 대변자로 낼 수는 없다"며 고함을 지르고 투표장으로 몰려들어와 22개나 되는 투표함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강원도 인제(麟蹄). 강원도 인제땅 유권자들도 결코 타도에 질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선거구에는 민주당 신파의 김대중(金大中)이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고 자유당에서는 전형산(全亨山)을 공천자로 내세웠다. 여기에서는 투표지 전부를 불살라 버리는 난동을 벌였는데, 원인은 30일 하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형산 후보의 당선을 선포합니다> 하고 전형산이 당선되었음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지 3시간 뒤인 저녁 6시경에 약 400명의 군중이 선거관리위원회로 몰려왔다.
"4.19 정신에 위배된 반혁명 분자는 사과하라!"
아우성치며 데모를 벌였는가 하면 8시경에는 참의원의 개표가 진행중에 있는 개표장으로 몰려와서 이미 개표가 끝난 민의원의 투표용지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이 밖에 대전(大田) 갑.을 선거구에서 18개의 투표함을 불살랐고, 부산영도(影島) 을구와 경기도 화성(華城) 을구에서는 도망치는 불상사를 빚어내기도 했다. 각지에서 난동을 부린 난동자들은 하나같이 <4.19 정신>과 <반민주혁명 분자>를 들먹였는데 아전인수(我田引水)도 이에 이르르면 더 이상 뭐라 할 말을 잃고 만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의 헌정사는 이런 아전인수를 떡먹듯이 잘 하는 무리로 해서 얼룩이 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무리야말로 정권의 아첨자였으며 불의를 정당화하는 전위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무리가 판을 치고 있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런던 타임스] 기자가 혹평했듯이 <시궁창에서 장미꼬칭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난제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파가 80명의 당선자를 냈고 구파에서는 신파보다 하나가 부족한 79명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모두 167석을 얻었다. 233석 중 167석이라면 압도적인 승리라 장담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총선 결과에 대해서 식자들은, "민주당이라고 하면 막대기를 꽂았어도 투표해 주었을 것이다"라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것도 인물이라고 국회의원으로 뽑았느니> 하고 빈축을 사기에 족한 경력의 인물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33개의 의석 중 나머지 66개의 의석 분포는 어떠했던가? 구 자유당계가 11석, 순무소속이 24석, 무소속 중 신파 1석, 사회대중당 3석 등이었다. 나머지 19석은 개표 때에 난동으로 재선거를 치르거나 일부 재선거를 실시해야만 당선자를 낼 수 있는 지역들의 몫이었다. 한데, 7.29 총선거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이변이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돼 있는 전 심계원장 최하영(崔夏永)과 전국회부의장 이재학(李在鶴)이 옥중 출마를 해서 당선된 것이다. 최하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선거구에서, 그리고 이재학은 강원도 홍천(洪川) 선거구에서. 이 사실을 놓고 사람들은,
"두 사람이 평소에 선거구 관리를 잘한 덕분이다."
"한국 사람은 원래 심성이 곱고, 약자 사람한테 표를 몰아주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부정선거에 가담할 그런 부도덕한 인물이 아닌 인격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등의 이유로 옥중 당선의 명예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했다. 어느 평이 진실성을 띠고 있는지는 하늘과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옥중 당선은 역사에 기록할 만한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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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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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비텔리우스 황제
그래도 황궁의 주인이 된 비텔리우스가 과감하게 정치를 시작했다면 갑갑증만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텔리우스는 54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소극적이었다. 악한 사람은 아니다. 베드리아쿰 전투의 사실상 승리자인 발렌스와 카이키나에게 지나치게 마음을 썼다. 정부 요직에 앉힐 사람을 고를 때에도 경쟁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두 장수에게 의논하고, 그들의 뜻에 맞는 인물만 임명했다. 덕분에 두 집정관을 비롯한 모든 관직은 두 파로 나뉘어, 일관된 정책을 펼 수 없게 되어버렸다. 병사들은 무질서, 주민들은 불만, 발렌스와 카이키나는 황제 앞에서도 거리낌없이 말다툼을 벌인다. 비텔리우스는 그의 타고난 버릇인 과식에 점점 탐닉했다. 원로원은 비텔리우스에게 반대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비텔리우스가 원로원 회의에만은 이따금 참석했기 때문이다. 원로원은 무시당하기만 않으면 그걸로 만족한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의 혼란이 보여주듯, 원로원은 이제 더 이상 제국의 키잡이가 아니었다. 동방에서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한 것도, 거기에 호응한 '도나우 군단'의 움직임도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분명히 로마에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해서 비텔리우스의 소극성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했다는 말을 듣고도 코웃음만 쳤고, '도나우 군단'의 움직임도 1개 군단이 무슨 짓을 하든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고 말했을 뿐이다. 실제로 로마에 맨 처음 들어온 정보는 모에시아에 주둔해 있는 제3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옹립했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후에는 마치 눈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같은 정보가 비텔리우스를 덮쳐왔다. 언젠가는 틀림없이 일어날 사태도 예상하지 못하고, 거기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않은 채 쾌적한 수도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던 비텔리우스 진영과는 달리,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의 작전이 착실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제국의 동방에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에서는 각자의 역할 분담을 명확히 정해놓고 있었다.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즉 본국 이탈리아로 간다. 유대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대기한다. 파시아누스의 맏아들 티투스가 총지휘를 맡는다.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티투스의 실질적인 부장으로서, 유대 전쟁의 총결산이 될 예루살렘 공략에 참전한다. 문제는 시리아 주둔군 4개 군단, 유대 전쟁을 치르고 있는 3개 군단, 이집트에 있는 2개 군단을 어떻게 배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선 예루살렘 공략전에는 4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했다. 도시 하나를 공략할 뿐인데, 유대 땅의 대부분을 제압하는 데 사용한 3개 군단도 충분치 않다고 하여 시리아의 1개 군단을 그 쪽으로 돌려서 모두 4개 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사카 성을 공격하는 전투를 머리에 떠올려서는, 지중해 세계에서 성을 공략하는 전투를 이해할 수 없다. 지중해 세계의 동성전은 전투원만 농성하는 일본의 성을 공격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비전투원, 즉 일반 민간인까지 틀어박혀 있는 성을 공격하는 싸움이다. 오사카나 에도의 성벽과 해자는 성채만 둘러싸고 있을 뿐이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는 도시 전체를 성벽이나 해자로 둘러싼 것이 그 증거다. 아니, 그 점에서는 고대를 계승한 중세 이후의 서구도 마찬가지여서, 성벽이 아니라 시벽이라고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따라서 공격하는 쪽에서도 병사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라는 비전투원 집단까지 적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수많은 비전투원을 떠안은 상태에서 성을 방어하는 것은 거치적거려 불리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방어전은 칼과 칼을 맞대기만 하면 되는 회전이 아니다. 파괴된 성벽은 당장 복구해야 하고, 무기공장은 밤낮없이 가동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직접 방어를 담당하는 전투원이 전력을 다해 성을 방어하려면 비전투원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까닭에 비전투원의 수가 많은 것은 오히려 유리하기도 하다. 포위된 도시 안에 비전투원이 많을수록 물이나 식량이 떨어지는 시기도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근교에서 아무리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다 해도, 내부에서 식수를 확보할 수 없는 곳에는 도시를 세우지 않는 법이다.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보급하느냐, 빗물을 모아서 이용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물 확보도 도시가 존속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예루살렘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음은 물 못지않게 중요한 식량 문제를 살펴보자. 어떤 지방을 제압할 때는 그 지방 최대의 도시가 공략 대상이 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유대 땅에서의 반란은 서기 66년 중반에 일어났다. 네로 황제의 명으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진압에 나선 것이 서기 67년 봄이었다. 하지만 68년 가을에는 네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그 후임 황제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유대의 대부분을 제압하고 예루살렘 공략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도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대를 철수시켰고, 유대를 제압한 로마군은 휴전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가 베스파시아누스 대신 티투스가 총지휘를 맡아 예루살렘 공략을 재개한 것이 70년 봄이었다. 예루살렘은 농성을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을 1년 반이나 가질 수 있었던 셈이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태로 휴전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 전쟁이 시작된 뒤부터 헤아리면 만 3년, 휴전 때부터 헤아려도 1년 반이다. 그만한 시간이면 충분히 시내에 생필품을 비축할 수 있다. 게다가 생활이 검소한 유대 서민의 식량을 대는 것은 생활 수준이 높은 도시에 비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대도시를 공략하는 데에는 보통 3년이 걸린다. 카르타고를 공략하는 데에도 3년이 걸렸다. 서기 69년 당시의 예루살렘도 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생필품을 비축했을 뿐 아니라 견고한 성벽도 구축해놓고 있었다.
한편 베스파시아누스 쪽은 느긋하게 공격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없었다. 예루살렘을 공략하지 않고는 유대 반란이 진압되었다고 할 수 없다. 그 예루살렘 공략에 애를 먹고 있으면 베스파시아누스의 능력이 의심받고 비텔리우스 쪽에 반발할 수 있는 재료를 주게 된다. 유대 전쟁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자리를 굳히기 위한 시험이기도 했다. 조기 해결이 예루살렘 공략전의 최대 목표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개 군단을 더 투입한 4개 군단과 거기에 딸린 보조병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보고 이집트 주둔군의 일부도 참전시켰다. 게다가 동방의 동맹국 왕들과 그 휘하 군대, 그리고 생활권이 겹치는 경우가 많아서 예로부터 유대인과 사이가 나쁜 아랍인까지 동원했다. 유대인 출신이라서 유대인을 잘 이해하고 있는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를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시킨 것도, 잘되면 대화로 안되면 무력으로, 강경책과 유화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되풀이 말하지만, 유대 문제에 애를 먹고 있으면 베스파시아누스의 황제 자리도 백일몽이 될 터였다.
이집트에 주둔해 있는 2개 군단 가운데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한 것은 대대 규모였지만, 나머지를 서쪽으로 가는 무키아누스에게 딸려 보내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집트에서 대기하기로 결정한 베스파시아누스를 휘하 군단도 없이 놓아둘 수는 없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예루살렘 공략전이 오래 끌 경우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또는 배를 타고 본국 이탈리아로 쳐들어가는 경우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4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시리아 주둔군에서 예루살렘 공략전에 참가한 1개 군단을 뺀 나머지 3개 군단도 그들의 사령관 무키아누스가 모두 서쪽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르메니아 왕과 파르티아 왕은 로마와 맺은 상호불가침협정을 재확인해 달라는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 하지만 외국인에 대한 로마 지도자들의 신뢰는 다소 색다르다. 2천 년 뒤인 이제 와서 생각해도 흥미롭지만, 로마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신뢰할 수 없는 상대를 구분하여 신뢰할 수 있는 쪽만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경우는 신뢰하지만, 그것도 신뢰할 수 있는 데까지만 신뢰한다. '신뢰할 수 있는 데까지'의 선을 어디에 긋느냐. 로마 지도자들은 상대의 선의나 도덕성을 그 선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기준으로 삼은 것은 자기 쪽의 군사적 방위력이었다. 평화조약을 맺은 상대와의 국경에도 전과 다름없는 규모의 군사력을 계속 배치했다. 그렇게 하여 상대가 우호조약을 계속 유지하게 만들고, 상대가 그것을 깨뜨리려 해도 상당히 생각한 끝에 깨뜨리게 했다. 이런 사고방식을 현대식으로 말하면 '전쟁 억지력'이 아닐까 싶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하여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반석 위에 올려놓은 제정 로마의 전략은 바로 이 전쟁 억지에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인간이나 국가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아르메니아나 파르티아 왕국과 로마 제국의 경계인 유프라테스 방위선을 텅 비워 \놓은 채 서쪽으로 가는 것은 무키아누스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무키아누스가 서쪽으로 데려간 군사력은 보조병을 포함해도 2만 명을 웃돌지 않았다. 이 정도 군사력으로 서방행을 결행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겠다고 밝힌 '도나우 군단'의 7개 군단을 믿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도나우 군단'이 애당초 황제로 옹립하려고 생각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니라 무키아누스였다. 무키아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는 역할을 맡은 것은 이런 사정도 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서기 69년 가을이 되기 전에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의 작전은 착착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기 69년 여름이 끝날 무렵부터 가을까지, 비텔리우스 진영과 베스파시아누스 진영이 아직 직접 접촉하지 않은 시기에, 양쪽 다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라인 강 방위선과 도나우 강 방위선에서 일어났다. 라인 쪽 당사자는 로마 군단에 딸린 보조부대의 속주병이었고, 도나우 쪽 당사자는 '도나우 군단'의 군단병이었다.
예정대로 진행되는 사태에 대처하는 데에는 특별히 뛰어난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재능이 문제되는 것은 예기치 않은 사태에 대처할 경우다. 이 점에서도 비텔리우스와 베스파시아누스의 동지인 무키아누스의 능력 차이는 분명해진다. 라인 강 방위선에서 속주병들이 일으킨 반란에 대해서는 황제 자리를 둘러싼 투쟁이 끝나는 서기 70년 시점에서 한꺼번에 기술하고자 한다. 바타비족의 반란으로 시작되어 '갈리아 제국' 건설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는 비텔리우스도 무키아누스도 일단 방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의 대처 방식은 겉보기에는 같지만 알맹이는 달랐다. 비텔리우스는 당면한 적인 베스파시아누스파 군단병들에 대한 대처를 우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라인 강 일대에서 일어난 속주병의 봉기는 어쩔 수 없이 방치했다. 반대로 무키아누스는 일부러 방치했다. 비텔리우스의 지지 기반은 라인 강 방위를 맡고 있는 7개 군단이다. 그 군단병들에게 협력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보조병들의 봉기는 '라인 군단'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무키아누스가 방치한 것은 그런 사정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도나우 군단"
또 하나 예기치 못한 사태는 '도나우 군단' 장병들의 행동이었다. 무키아누스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나우 군단' 장병들은 불과 다섯 달 전에는 오토 편에 서서 싸웠지만, 베드리아쿰 전투에서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은 탓으로 참패를 당한 사람들이었다. 아퀼레이아까지는 왔지만 베드리아쿰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한 병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승자가 된 비텔리우스는 참전한 병사든 참전하지 않은 병사든 가리지 않고 '도나우 군단' 전체를 패배자로 다루었다. 군단의 척추라고 일컬을 만큼 중요한 백인대장들은 오토 편에 섰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하고, 병사들은 정복당한 야만족처럼 로마인들이 즐기기 위한 원형경기장 건설공사에 강제로 내몰렸다. 그후 간신히 근무지 복귀를 허락받고 도나우 강 유역으로 돌아간 병사들의 가슴이 분노와 굴욕과 증오와 원한으로 폭발할 지경이 된 것도 당연했다. 그때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게 반대하여 궐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황제를 자칭한 것은 그들이 애당초 원했던 무키아누스가 아니라 베스파시아누스였지만, 그것은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비텔리우스 타도를 기치로 내걸고 누군가가 일어난 것만으로 충분했다. 게다가 베스파시아누스는 무키아누스가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도나우 군단' 장병들은 더 이상 얌전히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무키아누스가 2만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났다지만, 그가 도착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복수심에만 사로잡혀 무작정 서쪽으로 달려갔다. '도나우 군단'은 도나우 강 하류의 방위를 맡고 있는 모에시아의 3개 군단, 도나우 강 상류를 맡고 있는 판노니아 속주의 2개 군단, 판노니아 바로 남쪽에 아드리아 해를 사이에 두고 본국 이탈리아와 마주보고 있는 달마티아 속주의 2개 군단, 합쳐서 7개 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을 한데 뭉뚱그려 '도나우 군단'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3개 속주에 분산되어 있으니까 그들을 지휘하는 속주 총독도 세 사람이다. 제국 변경에서는 방위가 주된 임무이기 때문에, 속주 총독은 곧 군사령관이고, 임명권도 제국의 통수권자인 황제에게 있었다. 그러나 서기 69년 늦여름에 병사들 사이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불온한 분위기는 총독들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령관인 그들은, 비텔리우스의 부당한 조치에도 항의하지 않고 부하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사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총독 가운데 두 사람은 이탈리아로 달아나버렸다.
사령관이 없는 '도나우 군단'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군단장급 지휘관들이다. 2개 군단을 전략 단위로 생각하는 로마군에서 1개 군단을 맡은 정도로는 사령관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군단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실력위주로 군단장에 발탁될 기회도 많고, 능력만 인정되면 30대 나이에 군단장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69년 가을, 주도권을 쥔 군단장들 중에서 특히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와 아리우스 바루스가 두드러진 행동을 하게 되는데, 둘 다 30대 중반에 불과했다. 냉소적인 타키투스의 언급에 따르면, 남프랑스의 툴루즈 태생인 안토니우스 프리무스는 이런 유형의 남자였다. "평화의 시대에는 최저의 인물이지만, 전란의 시대에는 두각을 나타낸다." 복수심에 불타는 병사들이 혈기왕성한 장교들에게 이끌려, 자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무키아누스의 명령을 무시라고 행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군단장들이 명령을 무시하고 나섰을 때 사령관 무키아누스가 취한 행동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 해볼 가치가 있다. 첫째, 달리기 시작한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에게 자기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되풀이하여 내리지 않았다. 둘째, 자신이 이끄는 동방 군단의 행군을 서둘러, 앞서가는 '도나우 군단'을 따라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셋째, 방위를 맡고 있는 군단이 거의 다 서쪽으로 떠난 틈을 이용하여 도나우 강을 건넌 다키아족이 로마 영토로 침입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서쪽으로 가는 것을 중지하고 야만족을 일단 격퇴한 뒤에야 행군을 재개했다.
네로 황제 시대에 제국 동방의 안전을 보장하는 열쇠였던 강대국 파르티아와 관계를 개선하는 데 전력투구한 명장 코르불로 밑에서 근무했고, 코르불로가 자결한 뒤에는 줄곧 동방 안전의 최고 책임자였던 무키아누스는, 자신이 담당한 유프라테스 방위선이 아니라 도나우 방위선이라도 외적의 침입을 못 본 체할 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때 침입한 야만족을 격퇴하는 데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침입한 야만족이 제국의 안전보장에 큰 타격을 줄 만한 규모는 아니었던 듯하다. 갈 길이 급하다는 이유로 이 문제 해결을 뒤로 미루어도 무키아누스가 비난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도나우 강 북쪽 연안에 사는 야만족이 강을 건너 로마 영토를 침범하는 사태는 악화되기 전에 해결해두어야 할 문제였다. 따라서 무키아누스와 그의 군대가 '길을 돌아간' 것은 정당한 판단이고 대처였다. 하지만, 이렇게 '길을 돌아간' 탓도 있어서, 무키아누스가 '도나우 군단'을 따라잡은 것은 서기 69년 말이었다. 내 상상이지만, 무키아누스는 일부러 '도나우 군단'과의 합류를 늦춘 게 아닐까. 그들과 싸우러 나올 게 뻔한 비텔리우스파의 '라인 군단'과 격돌하는 일은 안토니우스 프리무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에 맡길 속셈으로 그들과의 합류를 서두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후에 취한 행동으로 미루어보아도 무키아누스는 참으로 냉철한 남자였다. 냉철하다는 건 성격이 차갑다는 뜻이 아니라, 냉정하고 투철한 두뇌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cool'일까? 내전은 이기는 것만으로 수습할 수 없다. 적이라 해도 동포다. 제 손을 동포의 피로 더럽히는 짓은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한다. 내전이라는 국난 극복의 기수인 베스파시아누스가 이집트에서 대기하기로 결정한 이유 중의 하나도 내전이 끝난 뒤에 로마 황제가 될 사람의 손을 동포의 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베스파시아누스의 오른팔로 자타가 인정하는 무키아누스의 손도 동포의 피로 더럽히지 않을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 복수심에 불타는 '도나우 군단'과 그들에게 복수심을 불러일어킨 '라인 군단'의 격돌이다. 많은 피가 흐를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무키아누스가 이끄는 동방 군단이 가세해도 전투에 참가한 자들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리하여 이른바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가 크레모나에서 베드리아쿰까지 뻗어 있는 지름 30킬로미터의 평원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공격과 수비의 당사자는 바뀌었지만, 제1차 베드리아쿰 전투와 마찬가지로 비텔리우스 진영의 '라인 군단'과 겉으로는 베스파시아누스 지지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옛 오토파인 '도나우 군단'이 격돌한 전투다. 무키아누스와 '유프라테스 군단'은 아직 본국 이탈리아와 속주 달마티아를 가르는 경계선에도 이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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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흥륜사지 - 이차돈이 순교한 절
[홍륜사지]
서라벌 최초의 절
흥륜사는 서라벌 최초의 가람(절)이며 창건자는 아도이다. 삼국유사에는 아도는 신라시대 비처왕(서기 479~499년)때에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인 일선군(현 선산국)에 포교를 위해 숨어들었으며, 차차 경주에 그 모습을 드러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하여 왕실과의 관련을 맺으면서 비로소 천경림에 흥륜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특히 연대기록에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불교전파와 흥륜사 창건의 확실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아도 이전(19대 눌지왕 때)에 묵호자라는 중이 역시 신라에 들어왔다는 기록으로 봐서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눌지왕(서기 427~457년)때부터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아도에 의해 띠풀로 지붕을 한 흥륜사가 세워졌으나, 아도를 비호했던 왕이 죽자 불교배척의 바람이 불어닥쳐 흥륜사도 없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는 다시 지하로 잠입하며, 그후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흥륜사가 다시 창건된다.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의 터(최초의 절터라는 뜻)는 이렇듯 우여곡절을 거쳐서 이룩되었다. 이 절을 완공하고 신라에 불교를 공인한 진흥왕은 만년에 출가하여 이 절에 머문다. 아도가 머물렀던 초라한 초가집, 이차돈이 순교한 이 절은 그리하여 신라인의 가장 중요한 사찰로 자리잡으면서 왕실의 원찰로 신라에 '절들이 별처럼 벌여 있고, 탑들이 기러기 행렬처럼 연이어 있는'(삼국유사) 불교문화의 융성을 일으킨 첫 사찰로 떠오르게 된다.
의문점이 많은 절터 지정
이처럼 중요한 사찰인 흥륜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흥륜사는 조선 때에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현재 학계와 문화재 당국에서는 흥륜사를 경주시 사정동 281번지에 있는 절터로 잡고 있다. 오릉의 북편 남천 건너편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사적 15호 지역으로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절터는 흥륜사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현지에서 많이 나오고 있다. 즉 이 절터는 영묘사터이며, 원래의 흥륜사지는 고속버스 터미널 남쪽의 경주공고 자리라는 것이다. 흥륜사와 영묘사는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천왕사, 담엄사와 더불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7처가람'의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흥륜사가 금교 동쪽 천경림에 있으며, 영묘사는 사천의 꼬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사천은 바로 남천을 가리킨다.(삼국유사 '원효불패조') 그렇다면 '현 흥륜사터의 위치가 바로 사천의 끝(고리)에 해당되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흥륜사지는 그 동안 두 차례 발굴했는데, 발굴 결과 절터가 모래밭으로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어 남천의 하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더욱 그 자리에서는 그 동안 많은 와당조각들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여러 개는 '대령묘사' '영묘지사'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 명문이 새겨진 기와파편은 김태중 씨(경주문화고교), 최기주 씨(근화학교), 경주박물관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동국대학생 등이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봐서 이 절터는 영묘사지이지 흥륜사지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명문와당의 출토는 이 사실을 거의 결정적으로 밑받침해주고 있다. 이 지역의 절터를 개인적으로 조사해 온 김원주 씨(불국사 신라여관 주인)에 의하면 "영묘사지가 흥륜사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일본인들에 의한 짓이었다"는 것이다. 즉 일제 침략 당시 사정동 일대를 조사하던 중 이 일대가 '흥륜들'로 불리고 있었는데, 절터라곤 이 곳밖에 보이지 않아 현 영묘사터를 흥륜사지로 단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원래 터는 경주공고 자리
원래의 흥류사지로 추정되는 경주공고 자리는 완전히 흙에 묻혀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30여 년 전 경주공고의 운동장을 닦던 도중 흙에 묻힌 절터가 비로소 발견되었다. 당시 그 절터의 굉장함에 놀랐으나 미처 발굴할 겨를이 없어 그 위에 흙을 덮고 그대로 운동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곳이 흥륜사지였을 거라는 추측은 여러 문헌을 비교하여 확실시되고 있다. 삼국유사 '미추왕조'에 보면 '능(미추왕릉)은 흥륜사 동쪽에 있다'고 되어 있다. 경주공고는 미추왕릉의 서쪽에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나오는 흥륜사의 위치를 보면, 이 절이 '금교동쪽'으로 되어 있는 만큼 '이 다리는 서천 위에 놓였으며, 그 위치가 경주공고 가까운 서편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흥륜사는 진흥왕이 만년에 귀의한 절이다. 또한 영흥사는 진흥왕의 왕비가 귀의한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영흥사가 삼천지에 있다고 되어 있다. 삼천지란 바로 남천과 기린내 그리고 건천지역에서 흘러드는 물이 합쳐지는 지역이다 그곳은 경주공고 가까운 서편이었으며, 그 강바닥에서 거대한 절터가 발견되어 그곳이 영흥사였을거라는 추측이 나온 바 있다. 왕과 왕비가 귀의한 흥륜사와 영흥사는 지척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 또한 흥륜사가 경주공고 자리였으리라는 사실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 "영묘사는 남천 가에, 흥륜사는 서천 가에 있어야 논리적으로 맞는다"고 윤경렬 씨(민속공예가)는 주장하며, 그런 점에서 현재의 흥륜사지는 잘못 지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확실한 자리고증의 필요성
영묘사는 오릉에서 포석정 일대에 많았던 귀신(두두리)들을 위해 지은 절로 다른 절과는 달리 무속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절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인면문 와당의 미소짓는 얼굴은 무속적인 면과 닿아 있는 특이한 유물이다. 15세기 말에 쓴 김시습의 시에 보면 흥륜사는 보리밭이 되었으며 석조만 외로이 남아 있다고 되어있다. 최근 흥륜사지(영묘사지) 발굴 결과 쌍탑의 탑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탑지는 바로 목조탑의 탑지임을 보여 주고 있다. 탑은 바로 부도를 뜻하는 만큼 이 곳이 영묘사지임을 뒷받침해준다는 것이 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조선 인조 때 경주 부윤이 옮겼다는 흥륜사지의 석조는 바로 경주공고 자리에서 가져간 김시습이 얘기했던 그 석조인 듯하다. 석조는 지금 경주박물관에 옮겨다 놓았다. 흥륜사는 서라벌 최초의 가람이었던 만큼 그 확실한 자리 고증이 있어야겠다. 현재의 흥륜사지가 기실은 영묘사지이며 그것을 밑받침할 만한 자료가 출토된 이상 문화재당국은 그 점을 보다 면밀하게 조사하여 확실한 자리를 밝혀야 할 것이다. 더욱 그것이 일제침략 시대에 함부로 정해진 것인 만큼 민족사의 바른 이해와 주체성있는 사료제시를 위해서도 이의 시정이 시급하다고 현지의 뜻있는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다.
구지봉 - 가락국 수로와의 출생지
가야국의 터전인 김해
김해는 옛 가락국의 터이다. 부산에서 구포대교를 건너면 낙동강하구의 '델타'가 이룬 김해평야가 질펀하게 펼쳐진다. 김해는 이 비옥한 하구에 터를 잡은 유서 깊은 고장이다. 그러나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를 보면 2백 년 전만 해도 지금의 김해평야는 낙동강 하구의 강바닥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동안 강바닥이 퇴적되고 한편으로는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평야를 이룬 것이다. 김해는 수로가 왕업을 닦을 때만 해도 '여뀌잎처럼 협소하나 지세가 빼어나 16나한이 살 만한 곳'으로 일컬어졌던 곳으로, 아득한 옛날에는 강변의 작은 분지였다. 그러나 한반도 남부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의 큰 강 하구라 이곳에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의하면 이곳에는 원래 아홉 추장이 백성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산이나 들에 자리잡아 우물을 파서 물 마시고 밭을 일궈 먹었다'고 한다. 이들 아홉 추장인 9간은 신라의 6부장과 같은 부족장들이다. 그러다가 1세기 중엽(서기 42년)에 비로소 수로라는 인물이 출현하여 이들 부족들을 통합, 가야국으로 출범한다.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
수로의 출현은 여느 개국설화와 마찬가지로 신화적이다. 그 출현지는 수로왕릉이 있는 김해시 서상동의 숭선전 서북쪽 8백m 지점에 있는 구지봉이다.
후한 광무제 18년(신라 유리왕 19년, 서기 42년) 3월 계욕일(3월의 첫 사일'육십갑자로 된 일진이 뱀의 형세를 갖는 날'에 목욕하고 물가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 풍습)에 구지봉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주민 2백여 명이 모여 들었다. 소리는 사람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이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9간들이 구지임을 밝히자
"황천께서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대들은 산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라
'거북아 거북아/머리를 내밀어라/내밀지 않으면/구워서 먹을래'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이로써 대왕을 맞아 기뻐 춤추게 될 것이다."
9간들이 그 말대로 노래하고 춤추니 하늘에서 붉은 보에 싼 금합이 달린 보랏빛 줄이 내려왔다. 금합을 열어보니 여섯 개의 금빛 알이 들어 있었다. 알들을 아도간의 집에 두었는데, 이튿날 알들은 여섯 이이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 태어난 아이를 수로라 했다. 수로는 그 달 보름에 즉위했다.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렀으며,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이상이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의 건국신화이다. 이 얘기대로 받아들인다면 가야국은 서기 42년 수로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기술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이병도 박사는 이 설화를 가락국의 개국신화가 아닌 6가야 연맹설화로 파악한다. 즉 가야는 더 오랜 변한의 상고적에 이미 부족국가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서기 42년에 비로소 가락국의 왕 수로를 맹주로 하는 연맹체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또는 이 설화는 북쪽에서 이주한 유이민집단인 수로족과 농경과 어로에 종사하던 토착씨족집단인 허왕후족들이 연맹을 결성하는 과정을 상징화한 신화로, 뒤에 보이는 수로와 허황옥과의 결혼 이야기와 결부시켜 파악하려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는 대부분 난생 설화이다. 고구려의 동명왕, 신라의 혁거세왕 등의 탄생 설화가 그것인데, 이는 태양숭배와 통치자의 외국유입설 또는 추대즉위설을 포함하고 있다. 수로왕의 경우에도 새로운 통치자가 외부로부터 들어왔으며, 그 때문에 '카리스마'적인 신화설정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구지봉의 위치
이 설화를 간직한 구지봉은 김해시의 뒷산인 분산(또는 분성산)이 뻗어내린 산봉우리이다. 해발 2백m 정도의 나지막한 이 봉우리 위에는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대가야의 첫번째 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어난 곳)'라 새긴 비가 서 있으며, 80년대 이전 조성한 탄생지가 있다. 탄생지는 화강암으로 궤 위에 얹힌 여섯 개의 알을 용들이 얽힌 채 둘러싸고 있는 모양을 조각해서 조성했다. 구지봉은 동편으로 뻗친 능선을 따라 분산과 이어진다. 지금은 동편으로 창원과 마산으로 가는 도로가 뚫려 분산과 구지봉이 끊어져 있지만, 산세는 분산이 거북의 몸뚱이가 되고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가 되어 전체적으로 거북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분산과 구지봉의 사이도로는 나중에 터널식으로 조성되어, 터널 위로 하여 분산과 구지봉이 연결되도록 해놓았다. 분산 기슭, 구지봉에서 분산으로 가는 터널을 넘으면 바로 동편에 수로의 왕비인 허황옥의 능이 있다. 이 능 지역은 현재 조성이 잘 되어 김수로왕릉과 함께 김해지역의 주요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분산 위에는 산성이 남아 있으며, 산성의 남쪽 약 1백m 떨어진 곳에 해은사가 있다. 해은사는 옛 성조암의 터이다. 2백 년 전에 성조암이 불타 그 자리에 지은 절이 해은사이다. 이 절의 어귀에는 뿌리 둘레를 석축으로 싼 몇 아름드리 느티나무(당수목)가 서 있다. 절 안에는 해마다 월 단오일에 당산제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으나 1979년 해은사를 개축하면서 사당이 너무 낡아 헐어버렸다고 한다. 이 사당에는 수로와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었으며, 영정 앞에는 허왕후의 전설이 깃든 망산도에서 가져왔다는 '봉돌'이라 불리는 영험한 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정은 사당이 헐린 후 절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봉돌은 10년 전에 왕의 영정 앞에 이런 불경한 돌을 놓아선 안 된다고 반대가 일어 다른 데로 옮겼다가, 지금은 하황옥의 능 앞에 비각을 세워 안치해 놓았다. 김택규 씨(전 영남대 교수)는 분산에 있는 이 사당 자리는 성황신을 모신 자리이며, 해은사는 재래신앙의 제사를 지내던 장소(성황사)였던 곳에 후대에 이르러 세워놓은 절이라고 파악한다. 특히 분산의 성황당은 분산이 김해의 진산인 점으로 봐서 그 성격이 호국신을 모신 사당임이 분명하다. 분산 위에 있는 거대한 당수목은 보다 원초적인 신목의 잔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락의 9간들이 '즐거이 춤추고 노래하며' 수로를 맞이한 장소(구지봉)는 바로 이곳이라 볼 수 있다고 김택규 씨는 말한다. 그러면 현재 구지봉으로 되어 있는 성지(원래의 구지봉인 분산정)를 올려다보면서 제사를 지내던 '굿하는 장소'로 볼 수 있다고 풀이한다.
굿형식과 많이 닮은 설화
수로왕의 탄강설화는 그 내용이 굿의 형식과 흡사한 점이 많다. 한국의 굿은 비의와 음복의 이중 구조를 갖는다(김택규씨 견해)고 할 때 '가락국기'에 보이는 '소리'(풀이)와 '놀이'는 굿의 형식과 많이 닮았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분산 위 성황당에서 이루어지던 굿은 가야인들이 봄을 맞아 풍요를 비는 굿이었으며, 또는 조상신을 위한 조령제로 볼 수도 있다. 그것이 수로왕 탄생설화의 구조를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구지봉을 중심으로 김해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결혼과 관련되는 설화를 간직한 지역이 많다. 그러나 옛날 바다였던 곳이 평야로 바뀐 현재 그 지역들을 밝히기는 퍽 힘들다. 수로의 능은 숭선전 안에 있다. 옛부터 능에 딸린 전답이 많았다고 삼국유사에는 적혀 있지만, 지금도 1만 평의 능 전답을 갖고 있다. 능 전답의 터로 보이는 '진상답'(주촌) '진상 미나리 '(서상동일대) 등의 들 이름이 전해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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