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3호 - 2024.07.09 화요일(음력 : 06.04)
angelo@nownforev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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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과 물가가 맞물고 반복 인상되는 과정에서 정말 문제는 모두들 올라가려고만 들지 내려서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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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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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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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오프’의 운명
4ㆍ13 총선을 앞두고 여야 각 당이 공천 심사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컷오프’라는 용어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원래 ‘컷오프(cutoff)’는 골프 등의 스포츠에서 사용되던 말로 ‘일정 성적 이하인 선수를 탈락시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말한다. 보통 4라운드로 진행되는 프로골프 경기에서 2라운드까지의 성적을 기준으로 상위 70여 명만 3라운드에 진출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탈락하게 되는데, 이를 ‘컷오프’라고 한다.
‘컷오프’는 최근 총선을 앞둔 각 당의 공천 심사에도 사용돼 ‘정당에서 현역의원을 평가해 하위에 속한 사람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제도’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컷오프’는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 외래어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신문, 방송을 비롯한 공공언어에서는 ‘컷오프’라는 말 대신 우리말로 순화한 표현을 써야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2002년 컷오프를 ‘탈락’으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고했는데, 최근의 공천 심사에서 쓰이는 컷오프는 ‘공천 탈락’ 혹은 ‘공천 배제’ 등의 말로 순화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거와 관련해 또 자주 등장하는 말로 ‘매니페스토’가 있다. ‘매니페스토(manifesto)’는 ‘공직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선거 공약의 정책 목표와 실현 시기, 예산 확보 근거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역시 외래어로 등록되지 않은 말로서 ‘참공약’으로 순화해 사용해야 한다.
이외에도 ‘정책의 현실성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뜻하는 ‘포퓰리즘(populism)’은 ‘대중주의’ 혹은 ‘대중영합주의’로 순화해 사용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집밥, 친오빠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특히 새로 만들어진 말이나 갑자기 사용이 증가한 말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최근 눈에 띄는 현상은 ‘집밥’과 ‘친오빠’라는 말의 사용 증가다.
본래 밥은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해 먹는 것이기에 집에서 먹는 밥을 이르는 말은 따로 없었다. 집에서 먹는 밥은 그냥 ‘밥’이고 어쩌다 한 번씩 밖에서 먹는 밥을 가리키기 위해서 ‘외식’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식생활 문화는 상당히 달라졌다. 외식이 점차 일상화되고 그에 따라 집에서 만들어 먹는 밥을 따로 가리킬 말이 필요해졌다. 빅데이터 분석가들에 따르면 최근 일상적인 대화에서 음식을 ‘만든다’는 말보다 ‘먹으러 간다’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지난 연말 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비의 40%를 외식비로 지출했다고 한다. ‘집밥’이란 말이 탄생한 데에는 우리 사회의 이런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말은 아니지만 ‘친오빠’의 사용 증가도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는 상당히 낯설다. 그냥 ‘오빠’라고 하면 당연히 친동기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친척 오빠’ ‘선배 오빠’ 등으로 구분해 쓰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오빠’는 대개 연인을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젊은 여성들이 ‘우리 오빠’라고 하는 사람은 대개 남자친구거나 심지어 남편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어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해외 한류 팬 중에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드라마를 보고 한국에서는 남매간에도 결혼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언어사용이 지속된다면 머잖아 ‘오빠’는 연인을 가리키는 말에 자리를 내주고 ‘친오빠’만이 손위 남자형제를 특정해 부르는 말로 굳어지게 될지 모르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세 가지 꽃 이름
오늘 이야기는 꽃 이름 세 가지.
첫째는 오래 전 이 땅에서 태어나 전해 오는 이름들이다. 전래의 봄꽃 이름만 해도 진달래, 민들레, 꽃다지, 남산제비꽃, 나도바람꽃, 은난초, 히어리, 봄맞이, 골무꽃, 양지꽃 등 그야말로 지천이다. 김용택 시인은 ‘흉년 양식’이라는 시에서 밀래초, 코딱지나물, 풍년초 등을 일러 “저 남산 꽃산자락에 이 모든 풀이 다 우리들의 밥이었니라 목숨이었니라”라고 노래하였는데, 이를 흉내 내어 말한다면 이 꽃 이름들은 우리말의 목숨 같은 양식이다.
둘째는 이 시대에 태어난 이름이다. 지난해 학교 행사용으로 주문한 물품 중에 이른바 ‘코르사주’라는 게 빠져 있었다. 필자도 그리 익숙지 않은 단어라 더듬거리고 있는데, 배달 온 분이 “가슴꽃 말이죠?”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슴에 다는 꽃, 가슴꽃. 참 쉽고 편한 말이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나중에 보니 해당 업계에서 조금씩은 쓰이고 있었다. 프랑스어에서 온 ‘코르사주(corsage)’는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종종 ‘코사지, 꽃사지’ 등으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정부의 공식적인 순화어는 ‘맵시꽃’이지만 ‘가슴꽃’은 당당히 언중들 사이에서 태어난 말이다. 그래서 더욱 애정이 간다.
셋째는 꽃이 아닌 꽃이다. 이 무렵 필자가 사는 남해안에는 바다에도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는 벚꽃 필 때가 되면 바다 밑에는 멍게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멍게꽃’은 발갛게 물이 오르는 멍게가 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눈꽃’처럼 언중들이 만들어낸 멋진 비유적 표현이자 어민들의 기쁨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이다. 세 가지 꽃 이름들, 우리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이런 말들이 정말 고맙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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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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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국화꽃 - 천상병
오늘만의 밤은 없었어도
달은 떴고
별은 반짝였다.
괴로움만의 날은 없어도
해는 다시 떠오르고
아침은 열렸다.
무심만이 내가 아니라고
탁자 위 컵에 꽂힌
한 송이 국화꽃으로
나는 빛난다!
∼∼∼∼∼∼∼∼∼∼∼∼∼∼
풍랑몽 2 - 정지용
바람은 이렇게 몹시도 부옵는데
저달 영원의 등화 !
꺼질 법도 아니하옵거니,
엊저녁 풍랑 우에 님 실려 보내고
아닌 밤중 무서운 꿈에 소스라쳐 깨옵니다.
~~~~~~~~~~~~~~~~~~~
시골 선물 - 김수영
종로네거리도 행길에 가까운 일부러 떠들썩한 찻집을 택하여 나는 앉아있다
이것이 도회 안에 사는 나로서는 어디보다도 조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나의 반역성을 조소하는 듯이 스무살도 넘을까말까한 노는 계집애와 머리가 고슴도치처럼 부수수하게 일어난 쓰메에리의 학생복을 입은 청년이 들어와서 커피니 오트밀이니 사과니 어수선하게 벌여놓고 계통없이 처먹고 있다
신이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가 어디있느냐고 나를 고루하다고 비웃은 어제저녁의 술친구의 천박한 머리를 생각한다
그다음에는 나는 중앙선 어는 협곡에 있는 역에서 백여리나 떨어진 광산촌에 두고온 잃어버린 겨울모자를 생각한다
그것은 갈색 낙타모자
그리고 유행에서도 훨씬 뒤떨어진
서울의 화려한 거리에서는 도저히 쓰고 다니기 부끄러운 모자이다
거기다가 나의 부처님을 모신 법당 뒷산에 묻혀있는 검은 바위같이 큰 머리에는 둘레가 작아서 맞지 않아서 그 모자를 쓴 기분이란 쳇바퀴를 쓴 것처럼 딱딱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시골이라고 무관하게 생각하고 쓰고 간 것인데 결국은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아까워서가 아니라
서울에 돌아온 지 일주일도 못 되는 나에게는 도회의 소음과 광증과 속도와 허위가 새삼스럽게 미웁고
서글프게 느껴지고
그러할 때마다 잃어버려서 아깝지 않은 잃어버리고 온 모자생각이 불현듯이 난다
저기 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먹고 떠들고 웃고 있는 여자와 젊은 학생을 내가 시골을 여행하기 전에 그들을 보았더라면 대하였으리 감정과는 다른 각도와 높이에서 보게 되는 나는 내 자신의 감정이 보다 더 거만하여지고 순화되어진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구태여 생각하여본다
그리고 비교하여본다
나는 모자와 함께 나의 마음의 한모퉁이를 모자 속에 놓고 온 것이라고
설운 마음의 한 모퉁이를.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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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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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지벽(和氏之璧)
和:화할 화. 氏:각시 씨. 之:갈 지(…의). 璧:둥근 옥 벽.
[준말] 화벽(和璧). [동의어] 변화지벽(卞和之璧)
[유사어] 완벽(完璧). 연성지벽(連城之璧)
[참조] 완벽(完璧). [출전] ≪韓非子≫ 〈卞和〉
천하 명옥(天下名玉)의 이름.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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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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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6. 옥에 티를 남긴 7.29 총선 (1/2)
흔히들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만 되면 <정치가(政治家)>로 대접을 하고 또 그렇게 호칭해 주고 있다. 웃기는 얘기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고 다 정치가는 아니다. 일단은 정치인(政治人)으로 호칭해야 마땅하다. 정치인과 정치가는 그 뜻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어떤 경우에 정치인이 정치가로 승격할 수 있는가? 여기 사나이다운 사나이, 세 사람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정치제도를 바꾸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개헌시 재적 218인 중 투표에 참가한 자는 211인이었다. 그리고 그중 찬성표를 던진 것이 208표였다. 누군가 세 사람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감히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당초,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투표에 붙일 때는 기명(記名) 투표토록 했다. 행여 부결되는 경우에 있어서는 <정국 수습이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 기명투표를 하려던 이유였다. 아닌게 아니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정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8.15까지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과도정권의 정치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민주당 신파에서 어떤 정략을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국회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는 국민의 눈도 전혀 의식 밖으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대학생만 의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의식해야 할 판이었다.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자>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반대투표를 한 국회의원은 누구였을까? 사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붙여지기 전에 <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반대투표를 하겠다>고 이미 자신의 입장을 천명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창동(金彰東), 김공평(金公平) 등 세 사람이었다. 이옥동의 반대 이유는 이러했다.
"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서명을 하지 않고 반대했던 사람인데 그 이유는 <자유당 의원들은 불법과 부정과 관권과 금권으로 당선되었다>고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자격 없는 국회의원들로서 양심이 부끄러워 더 이상 의석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차제에 모든 사회적 부정과 불법 및 부패가 원인이 되어 이 나라를 소생시킨 고귀한 혁명이 일어났으므로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사과와 속죄를 하고, 혁명 세력이 국회를 즉시 해산하라고 외치는 것처럼 총사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와 같이 하기 위하여 자유당 의원 원내총무에게 맡기기로 했다. 따라서 이 이상 법률을 심의할 수 없고 더불어 오늘의 사태를 수습할 능력도 부족함으로......."
즉, 지금의 국회의원은 물러나고 새 국회가 구성된 다음에 이 법률안을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이옥동은 말했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승만이 하야했고 이기붕은 일가족이 집단자살을 했으며 자유당의 당무위원급들은 모조리 잡혀가고 있는 판국이라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치고 풀이 죽지 않는 사람이 없는 형편인데 자기의 시국관대로 행동했다는 것은 칭찬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정치인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이다. 신념이 없는 정치인이 무슨 놈의 이 세 사람은 국회에서 그렇게 활발한 의정 활동을 별였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느 구석에 앉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별반 이름 석 자도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랬지만 세 사람은 용감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신대로 행동했다. <너 이 새끼, 그게 무슨 허튼 수작이야?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찬성투표를 던지지 않으면 당장에 죽여 버리고 말겠어> 하고 목에 칼을 갖다댔다 하더라도 그들은 서슴지 않고 소신대로의 행동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수없이 협박을 당했다. 한밤중만 되면 요란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신경쇠약이 될 지경이었다. 자식아, 자격 없다는 놈이 그 자리에 왜 앉아 있어? 당장 물러나!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네놈의 자식, 귀신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말겠어!" 실컷 욕설을 듣고 수화기를 놓으면 따르릉 하고 벨이 또 울린다. 수화기를 집어든다. "이봐, 잘난 체하지 말어! 네놈이 아직도 뜨거운 맛을 덜 봤구나. 아예 두 눈깔에서 번쩍하고 불꽃이 튀도록 패 줘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거야, 뭐야 잉?" 욕설이니까 그렇긴 하겠지만 점잖은 욕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욕설 듣기 싫으면 수화기를 내려 놓고 있으면 그만 아니냐 할는지 모르지만 이들의 뱃심 또한 두둑했다. 소신대로 했을 뿐, 네놈들이 그런다고 내가 네놈들 앞에 굴복할 줄 알았어? 천만의 말씀!) 그들의 어떤 협박 전화에도 눈썹 한번 찡긋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정치가(政治家)라 하는가? 바로 이런 소신 있는 정치인을 정치가라 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정치인은 결코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소신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그런 위인을 정치가라 하는 것이다. 한국 같은 정치적 후진 국가에서는 바로 이들 세 사람 같은 정치인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념을 위해서는 그까짓 목숨쯤 가볍게 내밀 수 있는 정치인! 펼치다보니 이 세 사람에 대한 얘기를 소개할 자리를 잃어 이쯤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민주당의 공천신청 마감은 6월 2일이었다. 허정은 민주당의 당책에 맞추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 정부에 이송되자 그날로 이것을 공포했다. 빨랐다. 정말 빨랐다. 허정이 얼마나 그의 정치 일정에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회의장인 곽상훈이 내각수반실로 허정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날 저녁
"우양, 나 우양하고 의논을 해보고 국회의장직을 사임할까 해서 찾아왔소."
허정은 좀 어리둥절해지는 모양이었다.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 권한 대행을 맡도록 되어 있는 국회의장이 아니겠소. 내가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게 될 것 같으면 여러 가지 잡음도 일 것이고 또 우양이 과도내각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많을 것 같고 해서 사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단 말이오."
하긴 그렇다. 새 헌법이 공포되었으니 궐위중에 있는 대통령직은 새 헌법에 따라 국회의장이 그 직무를 대행해야 했다. 그러자면 과도내각으로서는 번거롭게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필요했다. 새 헌법에 따라 허정은 내각수반이 아니라 행정수반인 국무총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인 곽상훈이 국무총리를 새로 지명해야 할 형편이었고, 새로 지명을 하면 국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곽상훈이 국회의장을 사임하고 지금의 국회를 즉시 해산해 버리면 허정의 과도정부는 여전히 과도정권으로 존재하게 된다.
"어떻소 우양? 새 정부가 들어설 때가지는 우양이 계속해서 과도정권을 맡아나가 줘야 하지 않겠소?"
허정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곽상훈의 말이 옳을 것 같았다. 새 국무총리 지명이다, 인준이다 해가지고 난마처럼 엉클어져 있는 시국을 하루 속히 수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재촉해서 새 정부의 탄생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예, 삼연(三然)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이외다."
이래서 곽상훈은 다음날 즉시 국회에 국회의장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것이 원의로서 수리된 것은 6월 23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한 날은 새 헌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나흘 만인 6월 19일이었다. 아이젠하워가 그의 생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처럼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온 일이 있었을까? 과거에 외국 귀빈 누가 한국을 방문한다 하면 으레 통.반을 통해서 관권으로 시민을 관권동원을 금지했었다.
"어디까지나 시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장군을 환영하도록!"
이렇게 원칙을 세우고 관권으로 시민을 동원하는 행위를 일체 금했다. 그런데도 그를 환영하고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관권동원의 몇 배나 되는 대성황이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동남아 각국을 순방하고 일본에 이어 마지막으로 6월 22일에 한국을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마침 안보(安保)문제로 해서 전학련(全學聯)과 좌익계가 아이젠하워의 방문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자, 일본 방문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직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흐뭇했던 한때가 아이젠하워를 영접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김포공항에서 아이젠하워를 영접한 허정은 그와 함께 헬리콥터 편으로 용산의 미군 콤파운드로 갔다. 거기에서 자동차로 갈아탄 아이젠하워는 열렬한 서울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정동의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자동차는 서울역 앞에 이르러 한치도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
환호성을 지르는 인파가 그 넓다란 길을 꽉 메웠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아마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더욱더 밀려들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 그와 악수 한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서였다. 당황한 것은 허정이었고 아이젠하워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렇다고 밀려드는 군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젠하워의 탑승차가 서울 시청 앞에 이르면 거기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허정은 그 환영식을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서울역에서 서울 시청까지 이르자면 대포라도 쏴서 군중을 해산하지 않는 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탑승차는 옆 골목으로 빠져서야 정동의 미국 대사관에 이를 수가 있었다. 경무성에서 신선로가 곁들여진 환영오찬회가 있기 전, 허정은 아이젠하워의 한국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한 다음,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각하께서 후르시쵸프 소련 수상과 여러 번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문제에 관해서 의견교환을 한 일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한국문제에 관해서 직접 얘기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후르시쵸프하고 의견교환을 해본 결과, 3차 대전을 유발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소. 그러니 한국의 안보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는 것 같소이다." 허정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각하, 일본은 믿을 수 없는 나랍니다. 보십시오, 미국이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에 뿐만 아니라 지금껏 경제부흥을 돕고 있으나 미군의 군사기지 문제로 저렇듯 소동을 벌이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일본에 있는 군사기지를 한국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젠하워의 얼굴에 가득 환한 웃음이 번졌다.
"아주 중요하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소. 하지만 나는 임기가 거의 다 끝난 대통령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가 못 됩니다. 말하자면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이죠. 그렇기는 하나 돌아가면 각하의 뜻을 주위 사람들한테 전해서 각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보겠소이다."
-대한 공약을 재확인
-통일에 대한 한국민의 갈망을 인정
-계속적인 경제원조의 필요성을 인정
-유엔에서 결정된 여러 원칙을 준수할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
새 국회를 구성하고 새 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한 민.참 양의원 총선거가 실시된 것은 1960년 7월 29일이다. 민.참 양의원 후보가 등록이 개시된 것이 6월 28일부터였으니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은 꼭 한 달 동안이었다. 7월 2일에 마감한 민의원 입후보자는 1,524명이었고 참의원 입후보자는민의원은 7대 1, 의석수가 58석인 참의원은 4대 1의 경쟁률이었다. 차기 정권담당자로 자처하고 있던 민주당의 민의원 입후보자를 계파별로 볼 것 같으면 신파가 113명에 구파가 106명, 중도파가 8명이었다. 이들은 물론 민주당에서 <공천>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운 인물들이었다. 공천을 받지 못한 인물은 무소속으로 입후보를 했기 때문에 민주당원으로서 입후보를 한 자의 수는 실질적으로는 3백 명을 웃돌고 있었다. 구파 공천자에 비해 신파 공천자가 7명이나 더 많았다. 그 이유는 당선 가능성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참의원은 신.구파 각기 29명씩 동수를 공천해 놓고 있었다. 7명이나 더 많이 공천된 것을 보면, 그 과정에서 꽤 티격태격 심한 진통을 겪었을 것 같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꽤 오손도손 잘해 주었다.
"역시 정치를 하는 사람은 다른걸. 줄곧 파벌싸움만 벌이고 있기에 저놈의 집안 꼴도 다 됐다 했더니, 역시 정치하는 사람은 달라. 됐어, 됐어!"
정당에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것이 공천 심사였다. 공천이 떨어지게 되면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신.구파의 싸움이 잦은 집안이기에 반드시 공천 심사과정에서 치고받고 하는 싸움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다, 이렇게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손도손 말썽이 없으니 권외의 사람들이 오히려 이때의 공천 심사위원은 신파에서는 홍익표(洪翼杓), 이철승(李哲承), 강영훈(姜永薰) 세 사람을, 그리고 구파에서는 유진산, 이영준(李榮俊), 김영삼(金泳三) 세 사람을, 이렇게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가 정치에는 관록이 붙은 이른바 정치가라 호칭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었으니 말썽을 일으키는 일 없이 오손도손 일처리를 잘 해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공천 심사과정에서는 별 탈이 없었으나 <준비 땅!>하고 막상 선거전에 뛰어들자 상황이 확 바뀌어 버렸다. 신파는 신파대로, 구파는 구파대로 각기 파벌 위주로 선거전을 치르려는 태세를 갖추어 놓은 것이다. 신파는 중앙당사 안에 구파는 따로 살림을 내 가지고 전업회관(電業會館) 안에 선거지휘본부를 차렸던 것이다.
"공천도 말썽 없이 끝냈기에 이제부터는 꽤 잘 하려는가 보다 했더니 역시 제 버릇은 개를 못 주는가 보군."
아마 이때 언론에서 이들이 딴 살림을 차린 것을 참을성 있게 눈감아 주고 있었기에 그렇지, 만일 <민주당 사실상 분열!> 하고 선동적으로 대서특필했더라면 아마도 선거 결과는 엄청난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민주당은 선거를 치르면서 단 살림만 차렸던 것이 아니었다. 공천에서 떨어진 자를 슬쩍 무소속으로 입후보시켜켜 놓고는 집중적으로 그런 자들을 지원해 주었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도덕한 것도 마다않는 그런 그들이 만일 정권을 잡았을 경우, 이승만 이상으로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여간에 마침내 선거전은 벌어졌다. 열기가 대단했다. 자유당 치하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타락된 양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정치권 외의 구경꾼들의 마음도 흐뭇했다.
"됐어, 됐어.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란 바로 이래야 하는 거야."
"박수를 보내고 싶어. 이제 이것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기틀을 잡았다 할 수 있게 됐어."
누구 할 것 없이 흐뭇해 했고 즐거워했다. 한데, 총선거에 불이 붙은 7월 17일, 허정은 난데없이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으로 하여금 <국군은 정치적 중립을 엄수하겠다>는 선서를 하도록 했다. 삼군 수뇌의 <헌법 준수 선서식>은 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열렸다.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헌법 준수 선서는 먼저 육군 참모총장인 최영희의 순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수행을 사명으로 하는 국군의 참모총장으로 국헌을 준수하고 정치에 관여함이 없이 엄정중립하여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오른손을 <대한민국 헌법 원본>에 얹고 왼손에 선서문을 들고 선서를 하는 군 수뇌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기만 했다. 최영희에 이어 해군 참모총장인 이용운(李龍雲)이, 이어서 공군 참모총장 김창규(金昌圭), 그리고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金聖恩)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선서를 한 참모총장들은 선서를 하고 나자, 선서문에 각기 서명을 했다. 각 군 참모총장이 이런 헌법 준수 선서식을 가진 것은 창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2조, 제6조, 그리고 제27조에는 국군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정이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모아 헌법을 준수할 그것은 그 무렵 난데없이 군부 쿠데타설이 시정에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들어가 있는 족청계가 이범석(李範奭)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더군."
"이범석이 능히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인물이지."
"아무렴!"
이런 소문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거 기간 중에 이런 소문이 나돈다는 것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범석의 족청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범석을 보기에 이태리의 무솔리니나 일본의 도예죠오 히데끼에 버금가는 족청계의 쿠데타설에는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정이 제헌절(制憲節)을 맞아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모아 대한민국 헌법 원문에 손을 얹고 정치적 중립을 선서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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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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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비텔리우스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자칭하다
4월 15일에 벌어진 베드리아쿰 전투, 이튿날인 16일에 밝혀진 오토 황제의 자살, 그후 며칠도 기다리지 않고 공표된 원로원의 비텔리우스 승인.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의 정보 전달 속도로 미루어보아 5월 중순이나 늦어도 5월 말에는 제국 동방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무키아누스는 총독 관저가 있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잠시 휴전중인 베스파시아누스는 당시 머물고 잇던 유대의 카이사레아에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 장관 관저가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각각 이런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6월에 접어들자 마자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불만과 원한을 품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뒤이어 무키아누스는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보낸 밀사를 맞이한다. 밀사는 무키아누스에게, 당신을 황제로 추대하고 싶은데 의향이 어떠냐고 의사를 타진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보아도, 6월 말께에 베리투스(오늘날의 베이루트)에서 열린 삼자회담은 무키아누스의 주도로 실현되었을 게 분명하다. 은밀히 베이루트에 모인 세 사람 사이에 은밀히 열린 회담은 아니었다. 셋 다 대낮에 당당하게 자기 휘하의 군단장, 대대장, 상급 백인대장들을 거느리고 회담에 참석했다. 그들 외에도 유대의 아그리파 2세를 비롯하여 콤마게네와 나바테아의 왕 등, 제국 동방에 있는 동맹국 원수들도 참석했다. 주도면밀한 사전 교섭을 거친 회담임은 분명하다. 이 회담은 '도나우 군단'을 포함한 제국 동방의 장병들이 본국 이탈리아에 있는 비텔리우스에게 반대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도 갖고 있었다. 도나우 강 방위를 담당하는 7개 군단,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는 2개 군단, 합해서 16개 군단이나 되는 병력이다. 비텔리우스를 지지하는 '라인 군단'은 로마군에서는 최강이라지만 7개 군단에 불과하다. 브리타니아에 주둔해 있는 3개 군단과 에스파냐에 주둔해 있는 2개 군단, 북아프리카에 주둔해 있는 1개 군단은 비텔리우스 자신의 실책 때문에 그의 편에 설 가능성이 희박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방위를 소홀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16개 군단을 모두 서쪽으로 데려가서 비텔리우스 진영의 7개 군단과 맞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제국 동방을 지키는 16개 군단이 모두 비텔리우스에 반대하여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주는 충격은 엄청났다.
베리루트 회담의 세 주역은 베스파시아누스를 제위에 앉히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차례로 결정했다. 그것은 크게 나누면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1단계- (1) 세 사람은 각자 휘하 군단의 만기 제대병을 재소집한다. 만기 제대한 병사들은 토지나 퇴직금을 받아서 민간인 생활로 돌아가 있지만, 로마 군단병은 제대한 뒤에도 근무지 부근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지원을 받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2) 무기 제조는 몇 군데에 집중하여 효과적으로 추진한다. 전투에 대비하여 무기를 새 것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로마 제국 동방의 3대 선진 지역인 안티오키아와 카이사레아 및 알렉산드리아에서 집중적으로 무기를 생산한다는 뜻이다. (3) 안티오키아에서 금화와 은화를 주조한다. 이것은 군자금을 현금화하기 위해서다. 금화와 은화 주조권은 황제에게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동방 일대의 부자들에게 강제로 모금한 모양이다. 이 세 가지 결정을 실제로 수행하는 것은 속주를 통치하는 공무원들이었지만, 이들을 감독할 책임은 무키아누스와 율리유스 알렉산드로스가 맡았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역할은 군단기지를 돌아다니며 군단명들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를 알고 있는 것은 유대의 3개 군단뿐이고, 시리아의 4개 군단이나 이집트의 2개 군단 병사들은 그의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겠지만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군단기지를 돌아다니면서 우수한 병사는 칭찬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병사에게는 정신 바짝 차리라고 나무라는 등, 아버지 같은 온정으로 병사들의 호감을 샀다. 돈을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인색해서라기보다 그런 데까지 돈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1단계에 해당하는 일들을 추진하면서, 세 사람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도 착수했다. 첫째, 본국 이탈리아에 밀사를 보내, 비텔리우스에게 해고당한 근위병들이 베스파시아누스 편에 서도록 공작을 벌였다. 여기에 성공하면 본국 안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둘째, 아르메니아 왕국과 파르티아 왕국에 특사를 보내,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해 달라고 요구하여 그것을 얻어냈다. 병력을 서쪽으로 이동시킨 틈을 이 두 나라가 이용하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네로 황제 시대에 코르불로의 노력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는 두 나라에도 이익이 되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도 우호관계를 깰 마음이 없었다. 파르티아 왕 볼로게세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돕기 위해 기병 2만 기를 보내주겠다고 제의하기까지 했다. 세 사람은 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파르티아의 경기병은 용맹하기로 유명하니까, 2만 기라면 강력한 지원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거절한 것은, 자기들끼리 싸울 때는 절대로 외세를 끌어들이지 않는 것이 로마인의 일관된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우스와 술라가 싸울 때에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싸울 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싸울 때에도 다른 민족을 끌어들인 적이 없었다. 서기 69년에도 세 사람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파르티아 왕의 제의를 거절했을 것이다. 제1단계를 끝낼 무렵에는 전략의 제2단계도 시작되어 있었다. 여기서도 역할 분담은 완벽했다. 무키아누스는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간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로 가서 기다린다. 유대 전쟁은 이듬해인 서기 70년 봄에 재개하고, 총지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맡는다. 티투스는 지금까지도 유대 전쟁에서 진두지휘를 맡아 상당한 재능을 보였지만, 뭐니뭐니 해도 아직 30세의 젊은 나이인데다 전쟁터에서 총지휘를 맡은 경험이 없다. 그래서 경험이 풍부한 이집트 장관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가 옆에 붙어서 보좌역을 맡기로 했다.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비텔리우스 황제군가 직접 싸우는 역할을 왜 베스파시아누스가 아니라 무키아누스가 맡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겠지만, 나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손을 동포의 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태생의 명문 귀족이었다. 말하자면 고귀한 혈통이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의 양자다. 비텔리우스는 고귀한 혈통은 아니지만, 아버지 대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한다. 반대로 베스파시아누스는 고귀한 혈통은커녕 아버지의 직업도 확실치 않고,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출세한 인물이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짊어진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만들고 싶으면, 동포의 피로 손을 더럽혔다는 불리한 조건을 또 하나 덧붙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를 이집트에 대기시키기로 한 데에는 이런 이유말고도 네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이집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이집트 장관인 율리우스 알렉산드로스를 유대 전쟁에 보낸 이상, 다른 누군가가 이집트를 맡을 필요가 있었다. 둘째, 본국 이탈리아에서 필요로 하는 밀의 절반, 적게 잡아도 3분의 1을 공급하는 이집트를 장악해두면, 필요할 경우 군량 공급을 중단하는 방법으로 본국 이탈리아(곧 비텔리우스)를 공격할 수 있다. 셋째, 필요하면 무키아누스와 호응하여 베스파시아누스 군대가 해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넷째, 이집트와 유대는 가깝다. 유대의 상황이 예상보다 어려워질 경우에는 지금까지 총지휘를 맡았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전선으로 달려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유대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은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지위를 확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었다. 로마 황제의 두 가지 책무는 안전보장과 식량보장이다. 외적에 대한 방위 외에 국내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도 안전보장의 일부다. 유대는 로마의 속주다. 유대 민족의 반란은 로마인이 보기에 속주민의 반란이고, 제국 내의 안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다. 그것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로마 황제로는 부적격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거나 마찬가지다.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집트의 2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안티오키아에서는 시리아에 주둔해 있는 4개 군단이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뒤이어 소아시아의 각 속주에 주둔해 있는 부대들도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동맹국 왕들도 베스파시아누스의 즉위에 찬성하고, 오리엔트의 군주들답게 정중하고 호화롭고 위풍당당한 축하 사절단을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보내왔다.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를 외치는 목소리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도나우 강 유역의 군단기지로 퍼져갔다.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는 이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황제의 지위를 확실히 굳히기 위한 군사행동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지금까지는 공격하는 쪽이었으나 이제는 수비하는 쪽에 서게 된 비텔리우스는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지 않아도 좋은 일만 하고, 꼭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비텔리우스가 본국 이탈리아에 들어온 것은 베드리아쿰 전투가 끝난 지 한 달 뒤인 5월 15일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5월 24일에는 비텔리우스 진영의 아성 같은 느낌을 주는 북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 도착했다. 여기서 검투사 시합을 즐긴 뒤, 발렌스와 카이키나의 안내로 베드리아쿰 전쟁터를 시찰했다. 여기서 비텔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이런 무신경한 언사는 해롭기는 할망정 이로울 건 전혀 없는 실언의 표본이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도나우 군단' 병사들은 격앙했을 것이고, 비텔리우스 진영인 '라인 군단' 병사들도 이 말을 듣고 비텔리우스에 대한 충성심을 새롭게 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 황제 비텔리우스의 이 말은 비텔리우스파도 아니고 베스파시아누스파도 아닌 일반인들한테까지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전쟁터 시찰을 마친 비텔리우스는 그 지점에서 포 강을 건너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동쪽으로 향한다. 바로 근처에 오토의 무덤이 있었지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오토의 무덤은 훼손을 면할 수 있었다. 아이밀리아 가도가 끝나는 리미니부터는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 수도 로마로 향한다. 말을 채찍질하면 사흘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다. 느긋하게 가면서 날마다 숙박소에 묵는다 해도 열흘이면 충분하다. 그런데 비텔리우스는 50일이나 걸렸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하연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 비용은 가도 연변의 중소 도시들이 부담했다. 오늘날에도 3번 국도로 쓰이고 있는 플라미니아 가도는 고대에는 현재의 1번 국도인 아우렐리아 가도 및 2번 국도인 카시아 가도와 더불어 수도 로마와 제국의 북방을 잇는 간선도로였다. 남쪽으로 뻗어있는 아피아 가도는 오늘날 7번 국도가 되어 있다. 현대 이탈리아에서는 고속도로를 제외한 국도가 대부분 고대 로마 시대의 가도를 조금 손질하여 쓰고 있는 셈이다. 플라미니아 가도는 기원전 220년께에 건설되었으니까 무려 2천 200년이 지났다. 깊은 골짜기에 걸린 구름다리는 지금 남아 있는 잔해만 보아도 로마 시대의 높은 기술 수준을 짐작케 한다. 그것을 보면 로마 가도가 당시의 고속도로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플라미니아 가도가 수많은 구름다리를 필요로 한 것은, 해변을 따라 곧장 북쪽으로 뻗어 있는 아우렐리아 가도나 완만한 구릉 사이를 누비고 나아가는 카시아 가도와는 달리, 이탈리아 반도를 등뼈처럼 양분하고 잇는 아펜니노 산맥을 가로지르는 가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악지대는 평야에 비해 전체적인 경제력이 훨씬 뒤떨어진다. 현재의 3번 국도 연변은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자력 복구가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는 달랐다. 간선도로 연변에 늘어서 있는 중소 도시들은 완벽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런 도시들이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새 황제를 만족시킬 만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 발굴된 로마 시대 유물의 양과 질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비텔리우스 일행은 황제와 그 측근만이 아니었다. 6만 명에 이르는 '라인 군단' 병사들도 거느리고 있었다. 플라미니아 가도 연변의 주민들은 자기네 황제와 그 일행의 경비를 부담한다기보다 정복자에게 재물을 강탈당하는 꼴이 되었다. 라인 강 유역의 변경에서 힘들고 고달픈 생활밖에 몰랐던 병사들에게 초여름의 이탈리아는 천국이었다. 상관들의 감독도 없는 상태에서는 로마 군단도 무뢰배나 마찬가지였다. 비텔리우스와 6만 명의 병사는 7월 18일에야 겨우 수도에 들어왔다. 로마에서는 아직 아무도 몰랐지만, 이미 보름 전에 제국의 동방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를 자칭하고 있었다. 정보전달 속도로 미루어보아 비텔리우스가 그것을 몰랐던 것은 분명하지만, 예상조차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실적을 토대로 겨우 '기사계급'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감히 황제를 꿈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비텔리우스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통찰하지 못하고, 새로운 시대를 짊어질 새로운 인재는 기존 지배층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비텔리우스의 수도 입성은 무지와 동의어인 오만함의 전형이었다.
로마에는 공화정 시대부터 무장한 군대는 수도 로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규정도 800년 동안이나 계속 지켜지면 전통이 된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이 전통을 깼지만 (제3권 참조)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루비콘'을 건너 국법을 어긴 카이사르조차도 로마에 무장한 병사를 들여놓지 않는다는 전통을 존중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근위대의 주둔지를 수도로 옮긴 사람이지만,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14개 행정구 바깥쪽에 근위대 주둔지를 마련했다. 적은 물론이고 아군 병사들조차 무장한 차림으로는 로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플라미니아 가도는 테베레 강에 걸린 밀비오 다리를 건넌 뒤에는 도심인 포로 로마노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비텔리우스 휘하의 장병들은 마치 승자가 정복한 도시에 입성하듯 무장한 채 대열을 짜고, 군단기와 대대기를 앞세워 이 길을 행진했다. '독수리'(아퀼라)라면 로마 군단기를 말한다. 은으로 만든 독수리 밑에 각 군단을 나타내는 표장을 단다. 이 군단기를 앞세우고 행진하는 것은 군단 전체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서기 69년 7월 18일의 입성 행진에서는 은독수리 깃발이 네 개 등장했다. 4개 군단이 통째로 수도에 들어온 것이다. 6천 명이 정원인 군단 단위가 아니라 대대 단위로 행진에 참가한 경우에는 각 대대를 나타내는 대대기를 앞세운다. 이날 행진에 등장한 대대기는 4개여대대. 군단병이 모두 참가하지 않더라도 1천 명이 정원인 대대가 행진에 참가했다면, '라인 군단'의 7개 군단 가운데 나머지 3개 군단도 역시 비텔리우스를 지지한 것을 의미한다. 이 입성 행진은 라인 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4개 군단과 하류를 지키는 저지 게르마니아군 3개 군단이 모두 비텔리우스를 지지한다는 것을 수도 주민에게 과시하기 위한 시위이기도 했다. 중무장 보병인 군단병이 앞장서고, 군단에 딸린 기병, 활을 쏘거나 공성용 무기를 담당하는 경무장 보병, 속주민으로 구성된 보조부대가 그 뒤를 따른다. 보조병들도 출신지별로 대열을 짜고, 같은 부족 출신인 부대장과 부대기를 앞세워 행진한다. 전체가 6만 명이나 되면, 선두가 포로 로마노에 도착한 뒤에도 후위에 있는 병사들은 아직 밀비오 다리를 건너는 중이었을 것이다. 비텔리우스 황제도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달린다. 뚱뚱한 체격에 완전무장을 갖추었다. 게다가 로마는 한여름이다.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지는 않았지만, 개선장군처럼 카피톨리노 언덕에 올라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승리를 감사했다. 길가에 모여 구경하고 있던 로마 시민들은 비텔리우스와 그 군대의 행진을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다. 하지만 역사가 타키투스는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다. 로마는 승자가 누구든 박수갈채로 맞이하는 도시라고. 그 환영이 오래 지속될지 어떨지는 별개 문제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이 점에서 참으로 엄격한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다.
'라인 군단'이 지지세력이라는 것을 수도 주민에게 과시하고 싶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눈감아주어도 좋다. 하지만 그후에도 6만 명의 병사를 수도에 계속 머물게 한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만 명의 병사밖에 수용할 수 없는 근위대 주둔지에 6만 명을 다 수용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근위대 주둔지에 들어가지 못한 대다수는 그대로 도심에 '방목'되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포룸도, 회당(바실리카)도, 거룩한 신전 안팎도 헝겊만 둘러친 야영지로 바뀌었다. 비텔리우스는 부하들의 식사까지 걱정하지는 않았으니까, 강탈해온 식량도 거기서 요리된다. 게다가 계절은 한여름이다. 북쪽 나라 독일의 기후에 익숙해진 병사들은 남쪽 나라 로마에서는 거의 벌거벗다시피 하고 잠자리에 든다. 몸을 씻고 싶으면, 라인 강이나 모젤 강과는 달리 흐름이 완만하고 수온도 높은 눈앞의 테베레 강에 텀벙 뛰어들기만 하면 된다. 수도 로마는 인구 백만 명의 대도시다. 6만 명이라면 그 10퍼센트도 안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모르나, 뉴욕 맨해튼 일대가 텍사스에서 몰려온 카우보이로 가득 메워진 것과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속주민이라도 보조부대에서 25년 동안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군제를 확립한 지 한 세기가 지났다. 로마 시민권은 세습권이다. 로마 시민권을 얻은 속주민의 아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이 되어 군단병에 지원할 수도 있었다. 또한 퇴역한 로마 군단병은 근무지 근처에 사는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라인 군단' 병사들의 몸 속에는 게르만족이나 갈리아인의 피가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텔리우스를 따라 로마에 들어온 '라인 군단' 병사들의 대다수는 본국 땅을 밟아보는 것도 난생 처음이고, 수도를 보는 것도 난생 처음이었을 것이다. 플라미니아 가도 연변의 주민들은 이들이 자기네 마을에 눌러앉는 게 아니라 지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접촉을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도 로마의 주민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이 로마에 눌러앉아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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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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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인디언 달력
인디언들은 달력을 만들 때 그들 주위에 있는 풍경의 변화나 마음의 움직임을 주제로 그 달의 명칭을 정했다. 이 명칭들을 보면 인디언 부족들이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들에 대해 얼마나 친밀하게 반응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외부 세계를 바라봄과 동시에 내면을 응시하는 눈을 잃지 않았다.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이라고 부르거나 12월을 '무소유의 달'이라고 부른 것이 그것이다. 또한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며 살았던 그들의 삶이 이 달력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들은 4월을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이라 이름을 정했으며,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로 불렀다. 그러나 여기에 적힌 것처럼 그들이 한 해를 정확히 열두 달로 나눈 것은 아니었으며, 달의 주기가 대략 28일로 정해졌기 때문에 열세 달 정도가 한 해를 이루었다.
1월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아리카라 족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수우 족
눈이 천막 안으로 휘몰아치는 달/오마하 족
나뭇가지가 눈송이에 뚝뚝 부러지는 달/쥬니 족
얼음 얼어 반짝이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바람 부는 달/체로키 족
2월
물고기가 뛰노는 달/위네바고 족
너구리 달/수우 족
홀로 걷는 달/체로키 족
기러기가 돌아오는 달/오마하 족
삼나무에 꽃바람 부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새순이 돋는 달/키오와 족
3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달/체로키 족
연못에 물이 고이는 달/퐁카 족
암소가 송아지 낳는 달/수우 족
개구리의 달/오마하 족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아라파호 족
4월
생의 기쁨을 느끼게 하는 달/블랙푸트 족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체로키 족
거위가 알을 낳는 달/샤이엔 족
얼음이 풀리는 달/히다차 족
옥수수 심는 달/위네바고 족
5월
말이 털갈이 하는 달/수우 족
들꽃이 시드는 달/오사지 족
뽕나무의 달/크리크 족
옥수수 김 매주는 달/위네바고 족
말이 살찌는 달/샤이엔 족
오래 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아라파호 족
6월
옥수수 수염이 나는 달/위네바고 족
더위가 시작되는 달/퐁카 족
나뭇잎이 짙어지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황소가 짝짓기 하는 달/오마하 족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게 되는 달/체로키 족
7월
사슴이 뿔을 가는 달/키오와 족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유트 족
옥수수 튀기는 달/위네바고 족
들소가 울부짖는 달/오마하 족
산딸기 익는 달/수우 족
열매가 빛을 저장하는 달/크리크 족
8월
옥수수가 은빛 물결을 이루는 달/퐁카 족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쇼니 족
노란 꽃잎의 달/오사지 족
기러기가 깃털을 가는 달/수우 족
건조한 달/체로키 족
9월
검정나비의 달/체로키 족
사슴이 땅을 파는 달/오마하 족
풀이 마르는 달/수우 족
작은 밤나무의 달/크리크 족
옥수수를 거두어 들이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10월
시냇물이 얼어붙는 달/샤이엔 족
추워서 견딜 수 없는 달/키오와 족
양식을 갈무리하는 달/퐁카 족
큰 바람의 달/쥬니 족
잎이 떨어지는 달/수우 족
11월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크리크 족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체로키 족
강물이 어는 달/히다차 족
만물을 거두어 들이는 달/테와 푸에블로 족
작은 곰의 달/위네바고 족
기러기 날아가는 달/키오와 족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아라파호 족
12월
다른 세상의 달/체로키 족
침묵하는 달/크리크 족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수우 족
큰 뱀코의 달/아라카라 족
무소유의 달/퐁카 족
큰 곰의 달/위네바고 족
늑대가 달리는 달/샤이엔 족
* 훙크파파 족 얼굴에내리는비(레인 인 더 페이스)의 연설은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이라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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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 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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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오상순
- 가을에 영사(映寫)된 조국의 풍광 -
봄은 동방에서 꽃수레를 타고 온다는데 가을은 지금 먼 서방에서 내 파이프의 연기를 타고 온다.
오늘 아침. 내 파이프의 연기는 산뜻하고 선명하고 맛이 있다. 가을 맛이다. 일엽(一葉) 떨어짐을 보고 천하의 가을 됨을 알았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오늘 아침 세수할 때 손가락 끝에 감촉되는 물의 감각, 세수하고 나서 생긋 웃는 가인의 소리 없는 미소 소리와도 같은 경금속성(輕金屬性)의 산뜻한 바람이 피부를 스쳐 오는데 머리에 빗질을 하다가 머리카락이 한두 낱 빠짐을 보고 가을을 느꼈다. 심신이 쾌적하게 긴장한 가운데 책상머리에 망연히 앉아 있으려니 머리도 꼬리도 없는 단편적인 나의 가을 수상의 실마리는 내 승화하는 자연(紫煙)의 방향을 따라 푸른 가을 허공에 곡선을 그리며 단속하고 명멸한다.
가을은 온대지방의 지리적 위치와 기상의 특색이요 선물이요 혜택이다. 가을은 이상하게도 환희와 비애가 서로 됴차하고, 융합하는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모르는 중에 무엇인지 하나씩 둘씩 여의어 가고 시들어 가고 떨어져 가고 없어져 가는 호젓하고 고독하고 애달픈 반면에 건강하고 씩씩한 생의 환희의 힘이 골절(骨節) 속에서 샘솟듯 솟아오르는 계절이다. 조선의 가을 하늘은 한없이 높고 속모르게 깊고 애타게 푸르다.
이 가을의 하늘이 맛 있는 조선의 곡선적 예술과 문화와 인물을 낳았다. 나의 육체와 영혼은 저 푸른 가을 하늘 속으로 이끌려 빨려 올라간다. 나는 그 속에 사라지고 싶다. 이 땅에 가을이 오면 심신이 침착해지고 침참해지면서도 청천백운만리통(靑天白雲萬里通)의 저 지평선 끝까지 가보고 싶은 영원한 향수적 유혹을 감당치 못하겠다. 이 땅의 가을의 감정은 삼간초가 지붕 위에 태양이 반사하여 불타는 붉은 피빛보다도 짙은 고추에 있고, 이 땅의 꿈과 시는 초가 지붕이나 담장 위에 창백하고 그윽한 월광 속에 꿈꾸며 잠자는 흰 박 속에 어리어 감추어져 있다.
조선의 가을밤의 청아한 다듬이 소리는 두 방망이의 장단으로 울리어 나오는 가을의 음악이다. 자연과 인간의 합주곡이다. 태백의 문자로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에 만호도의성(萬戶도衣聲) 속에는 응당 멀리 나그네길을 떠난 님, 혹은 먼 이역에 무자리 간 님, 혹은 영오에 갇힌 님, 또는 모진 바람부는 삭북만리 원정의 길을 떠난 님을 그리워하고 호소하는 단장곡에 애상적인 한숨소리도 얽히고 서리어 있음을 들을 수 있다. 이는 가을만이 가질 수 있는 서럽고도 감미(甘美)한 음악적 정조(情調)이다. 밤 늦도록 애정과 정성을 다하여 두드리던 다듬이질을 쉬고 등불을 낮추고 독수공방에 누웠으려면 바로 베개 밑에서 밤새는 줄도 모르고 줄줄거리며 우는 가련한 가을밤의 악사인 귀뚜라미 때문에 꿈을 못 이루어 전전반측(輾轉反側)하다가 밤을 새우는 정경은 적시 가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견 그다지 반갑지 못 한 가을 선물의 하나이다. 동방여류시가의 그 대부분은 이러한 가을의 적막과 고독과 애수의 소산일 것이다. 그 기원은 아마도 사람의 속을 알지 못 하는 무심코 가련한 귀뚜라미를 원망하는 순간에 있었을 것이다.
대동강의 가을, 낙랑(樂浪)의 이국적인 정조의 여음은 천년을 흘러간 대동강 가을 물결 위에 아직도 어리고 감돌아든다. 가을 석양에 애절한 수심가는 가을 자신이 우는 소리다. 달성(達城)의 가을, 달성의 가을은 밉지도 곱지도 않고 그저 어리무던한 평범한 여인이다. 금강의 가을, 만이천봉(萬二千峰) 새새 틈틈이 피빛보다 더붉게 타오르는 단풍빛은 적나라한 계골(계骨)의 해탈을 예감하고 각오(覺悟)한 직전, 행자의 마지막 청춘이 약동하는 혈조(血潮)이다. 해운대의 가을, 해운대의 가을은 신들의 <그랜드 오케스트라>요 무도장이다. 경주의 가을, 신라 천년의 영화는 가을바람과 함께 갔다. 운명의 가을을 고하던 봉덕사의 범종(梵鍾)만이 영원한 침묵 속에 엄연하다. 낙화암의 가을, 낙화암의 추색은 깊은데 백마강의 창백한 수색과 월광은 낙화한 삼천궁녀의 추상같은 그 결백한 충절의 넋을 머금은 듯... 서울의 가을, 가을 아침 저녁에 청량리 깊은 숲사이로 우러러 보이는 창고장엄하고 서릿발 나는 만고부동의 북악만장봉의 위용... 대각한 고승의 위엄... 거기에 가을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영원 그것이다.
천만년의 유구한 광음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일년중에 사계절이 촌분을 어기지 않고 순환하고 변천하고 추리하는 현상과 활동은 실로 대자연의 엄연하고 엄격한 입법정신의 상징적 표현작용이요, 자연의 심장의 고동이요, 그 대동맥의 맥박이요, 자연생명의 간단 없는 영원한 호흡이다. 천지 삼라만상은 이 신비한 호흡 속에서 생성하고 소장(消長)한다. 그 형태와 현상과 내용에 있어 소천지요, 소우주인 인생에 이 대자연 법칙에 준칙한 춘하추동 사계의 율동적 순환이 있음도 엄청나게 기이하고 자연스럽다. 따라서 자연의 자연과 인생의 자연은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때의 흐름의 추리와 변천에 따라 그 인과적 결연이 깊고 지극히 복잡미묘한 것이다.
천지간 일절의 유기물과 무기물... 유기체와 무기체, 유생물과 무생물의 대부분은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추이를 따라 비교적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고 소극적으로 반영하고 반응하면서 변화한다. 그러나 비교적 고도의 진화과정을 걷고 있는 생물고하 식물과 동물은 비교적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그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하고 진화함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생물, 동물의 세께에서 최고도의 진화를 완수하고 최고단계의 왕자적 지위를 획득한 인간... 천지간에 유독히 입체적으로 우뚝선 우리 인생은 계절을 따라서 각기 특이하고 독특한 그 무궁한 자연의 영향과 감화를 받아드릴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연 자체에 영향과 감화를 줄 줄 알고 자연의 법칙을 본받아 무한한 그 소재를 섭취하고 자원을 발굴하고 치용(治用)하여 생활에 응용하여 이용후생에 이바지하고 천문, 지리, 기상 기타의 이법을 연구하고 구명하여 계기적(季期的)으로 돌아가는 자연의 현상과 표정과 그 행동을 관찰하여 분석하고 해부하고 분류하고 종합하고 정리하고 조직하고 체계를 세우고 인간의 생활의욕과 기도와 계획과 설계와 경륜과 그 목적을 위하여 자유로 취사선택하고 절장보단(折長補短)하여 활용해 쓰는 방법과 기술을 연마하고 정밀한 기계를 발명하여 때로는 자연의 모습을 변혁하고 때로는 자연의 진행과정을 신축하고 때로는 그 행동을 예언하고 감시하고 경계하고 자연의 목적동향을 휘어잡아 틀어서 인간의 의사에 복종시키고 인간생활 목적에 부합하도록 조정하고 조화한다.
그리하여 자연의 의사를 무시하고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한다. 자욘환경이 인간을 한정하고 지배하는 동시에 인간이 자연환경과 내용을 결정한다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일보 나아가 인생이 자연을 창조한다. 인간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구의(究意)의 자각점까지 도달했다. 사실 위대한 개인이나 위대한 민족은 위대한 자연을 창조한다.
구경(究竟) 능동소산의 자연과 수동소산의 자연은 둘이 아니다. 따러서 자연과 자연 인생과 자연은 율동적으로 혼연히 융합일치한다. 우주는 결국 신비적 예술적 절대경이다. 무궁한 시간적 공간적으로 영원히 순환하면서 생멸유전하는 삼라만유는 실로 대자연의 예술적 극적 표현작용이요, 만화경적 조화이다. 자연은 그 자체속에 본질적으로 예술적 율동과 운명을 포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연의 능산(能産)인 동시에 소산적(所産的) 존재인 인간은 자연과의 예술적 공연자요, 불가분의 협력자이다. 자연의 호흡과 인생의 호흡이 상통하고 자연의 혈맥과 인생의 혈맥이 서로 연하고 자연의 맥박과 인생의 맥박이 함께 고동한다.
춘하추동의 사계는 그 현상의 표현작용이 서로 다르고 특이함은 물론이나 그 근저는 동일한 자연의지의 표현활동인지라 봄 없는 여름이 없고 여름 없는 가을이 없고 가을 없는 겨울이 있을 수 없고 또 다시 겨울 없는 봄이 없는 것이다. 자연의 동일한 통일체의 시간적 특수성인지라 그 근저에 불가불리의 맥락이 연쇄적 상관성이 있음도 물론이다. 봄의 자연의 생명은 자유분방하여 샘같이 용출하고 홍수같이 격류하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입체적으로 약동한다.
여름의 자연은 백열적으로 연소하고 왕성하고 무성하다. 가을 자연의 성격은 성숙과 결실과 축복이 그 특색이요, 이동과 유전과 별리와 조락과 휴식이 그 특징이요, 명랑성과 청정과 청초가 그 본색이다. 가을의 자연은 봄이나 여름이나 겨울의 자연의 성격이나 표현과 같이 그 기질과 성미와 분위기가 단조롭지 않고 단순치 않다. 둔탁하지도 않고 비습(肥濕)하지도 않고 건조치도 않고 우울치도 않다. 그 감정은 유리같이 투명하고 예민하고 천재적 신경질이요, 기질은 양질이요, 성미는 까다롭고, 성질은 냉정하고, 체질은 섬약질이요, 감상적이고, 애상적이다. 따라서 고독하고 쓸쓸하고 그런만큼 님을 동결하고 연모하고 포옹을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몽상적이요 회고적이요 반성적이요 내향적이요 사색적이요 시가적이고 음악적이고 신앙적이고 정신적이다. 가을의 품성과 품격은 가장 세련되고 침착하고 고아하고 고독하고 지극히 경견하고 간건하고 자기 희생적이다. 탈속하고 고답하고 해탈적이요 종교적이다. 오도한 고승과 냉철한 철인과 불혹의 고개를 넘어서 지천명하는 사군자(四君子) 숙연한 풍모를 연상케 한다. 가을의 석격은 이와 같이 그 특색이 다채 영롱하고 복합 미묘하여 어느 계절보다도 인간적으로 공명하고 침투될 다분의 요소를 포함한 만큼...
인간과의 감정이입의 작용이 민활하고 자연의 심회와 인간의 감회가 상통하고 융합하여 자연과 인생의 거룩한 향연이 벌어지고 일대 교향악이 전개된다. 따라서 가을은 자연의 가을인 동시에 인생의 가을이요, 운명의 가을인 것이다. 가을은 자연의 호흡이 교차하는 순간이요, 자연의 호흡과 인생의 호흡이 교통하는 계절이다. 가을은 자연생명이 그 맹렬한 활동기를 거쳐 그 근본에 환원하여 잠시 휴식하려는 순간이요 상태이기 때문에 가을의 자연은 정적이요 평화적이다. 등화가친의 계절이요, 인생을 반성하고 사색하고 관조하기에 절호한 기회이다. 가을은 과연 자연의 끝없는 귀향심과 향수의 정서를 자아낸다. 조선의 가을은 식욕과 미각의 계절이다. '봄미나리 살찐 맛을 님께 보내고저......' 운운하는 시조도 있거니와 초춘의 미각의 첨단인 향기로운 봄미나리와 아울러 삼동에 쌓이고 쌓였던 눈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흙을 헤치고 나와 소녀들의 색바구니를 배부르게 하는 씀바귀, 물쑥, 소리쟁이, 냉이 등속은 첫봄의 미각으로서 식탁에 올라 미각을 새롭게 하고 혀를 차게 하며 봄 소식과 한가지 님을 생각케 하는 것은 약동하는 봄의 소식이거니와 드높은 푸른 하늘 밑에 나무가지가 벌어지고 휘어질 만큼 무겁게 누르고 주렁주렁 복스럽고 풍성하게 경건히 매어달려 이슬을 머금고 일광과 월광에 빛나는 오색이 영롱한 가지각색의 과실 - 밤, 대추, 감, 배, 추자, 능금, 포도, 연밥, 치자, 석류, 은행, 머루, 다래, 송이, 등속은 가을의 음악적 회화적 조소적 소식이요 가을 자연의 생명의 상징적 결정체요 가을의 시가적 주옥편이요 가을의 선물이요 축복이요 혜택이요 공덕이요 감격이요 감사이다.
이 자연의 소식과 선물과 축복을 볼 때마다 먹을 때마다 님 생각이요, 먹고난 뒤에까지라도 님 생각의 그윽한 여운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고마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 이 얼마나 힘차고 씩씩하고 건강한 말(言)이냐. 바로 건강 그것의 매력있는 생리적 구체적 시적 표현이다. 오곡이 풍성한 넓은 들 복판 여위어 들어가기는 하나 자양분과 영양소가 충실한 풀두덩(草原)에서 풀뜯어 먹다가 터질 듯이 살찌고 기름져 가는 속에서 솟아오르는 생의 활력과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감사하는 듯이 가끔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코를 벌렁거리고 발굽으로 땅을 파헤치며 으흥... 소리를 높이 힘차게 지르는 그 소리만 들어도 가을의 건강이 저 푸른 하늘빛과 한가지 몸에 스며드는 듯 생의 환희의 공명감을 억제할 수 없다. 그렇다. 가을의 건강은 말의 그 울음소리 속에 들어있다. 나는 염불하듯이 때때로 '아... 천고마비!' 하고 입속으로 불러봄으로써 건강증진법을 삼는다. 사실 이 한마디로 가을을 표현하기에 족하지 않을까. 가을의 미각은 어느 계절보다도 신선하고 청결하고 상냥하고 싱싱하고 풍부하고 귀족적이고 음악적이고 시가적이요 종교적이다. 사람은 물론 육축(育蓄)과 비금주수(飛禽走獸)와 어족까지도 풍부히 살찌고 기름지고 향기나고 맛(味)나는 때는 정녕 가을철이다. 가을은 진실로 미각과 시각과 청각의 계절이요 식욕과 동경의 철이다. 식욕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손톱 발톱이 다 먹으려드는 왕성한 식욕의 충동이 일어나고 동경의 감정도 심각해진다. 가을은 욕망의 낙원인 동시에 위기이다. 건전히 융성하고 발전하는 개인이나 민족의 교양의 중점은 자연적 동물적 욕망 조절과 조정과 그 조화에 있을 것이다.
가을의 미각은 무덤에까지 연장하나니 신곡으로 각종 떡을 만들고 국화로 술을 빚고 각종 과물을 갖추어 천지신명에게 고사지내고 조상께 제사하고 하나님께 추수감사제를 지내는 미풍양속은 자연의 혜택에 대한 당연한 인간의 지정(至情)이다. 유명(幽明)이 경계를 달리하여 지척인 듯 억만리요 한번가면 다시 못오는 주검의 길을 떠난 조상과 부모와 부처와 형제와 자녀와 친구의 무덤을 찾아 백종의 과실과 술과 떡을 헌수하여 결국은 다 같은 운명의 길을 밟을 인간이 희노애락을 작용하는 생리적 육체적 현실 속에 호흡을 함께하고 말을 통하고 정을 나누던 그 육친지기를 그윽히 추모하고 상기하는 인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지정의 제전을 전역적으로 남녀노소 총동원하여 성대히 거행하는 팔월추석을 의미심장한 가을 선물의 하나로 나는 지극히 좋아하고 친애하나니 영원히 나를 떠나간 그리운 님을 만나는 듯 진실한 진정의 분위기 속에 나를 침잠할 수 있는 고마운 날이기 때문이다.
기나긴 장강, 은하수를 동서로 격하여 다리도 없고 배도 없어 건너 오도 가도 못하고 불붙는 연모의 정열을 가슴에 안고 태우는 고민과 고뇌를 호소할 곳 바이 없어 속절없이 초조히 불타면서 일년삼백육십일을 멀리 서로 바라다만 보고 눈물로 지내다가 지상의 길조인 까치들이 그 지극한 정곡을 이해하고 측은한 동정을 금치 못하여 족중회의(族中會議)를 열고 구수상의한 결과 전족이 감연히 하나의 외인부대 의용군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가지고 일제히 천상으로 날아가서 은하수에 다리를 놓아서 일년일도(一年一渡) 단 한 번의 상봉을 가능케 했다는 천고에 가련한 견우와 직녀의 신비적 전설의 밤인 칠월칠석도 고마운 가을의 빛나는 선물의 하나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전설이며 이 얼마나 위대하고 청고한 '로맨스'이냐. 전설의 백미이며 '로맨스'의 극치이다. 이는 진실로 인류의 천재적 상상력과 구상력의 구체적 결정이요, 인간의 우의적 상징적 표현력의 극한이라 할 것이다. 인간은 이 상징적 구상력과 상징적 표현력으로 능히 또 하나의 우주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되어 있다는 자신을 가져도 망발은 아닐 것이다. 주옥같이 빛나는 간결하고 소박한 이 일편의 전설시 속에 얽힌 자연과 자연의 아름답고 따뜻한 이해와 동정, 자연과 인생의 지극히 아름답고 따뜻한 이해와 동정과 그 실천력을 통해서 능히 천지신명의 가호와 축복과 그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고 지상의 주인공으로서 땅위의 만유를 상속받을 영예와 영광을 누리기에 족하지 않을까.
지상생활의 피로와 불안과 불평과 불만이나 번뇌나 고민이 있을 때 잠시 밖으로 나아가 하늘의 별을 쳐다 보라. 부지중에 일체번뇌가 운산무소(雲山霧消)하여 너의 흉중에 운권청천(雲捲靑天)의 별을 보리라. 조선사람은 사족동물(四足動物)도 아니건만 별하늘 쳐다보는 것을 잊은 지 오래인 것 같다. 농촌에서 소박한 농민들이 은하수(銀河水)가 입 위에 바로 빗기면 햅곡식을 먹는 때라 해서 간혹 쳐다보는 이외에는 천문학자에게 일임하고 있다. 그러나 칠석(七夕)이 되면 비교적 일반적으로 저 전설의 은하수의 성운(星雲)을 일년에 한번이라도 쳐다보는 기회와 효과를 주는 일건(一件)만으로도 이 전설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임술지추(壬戌之秋) 칠월기망(七月旣望)에 철풍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派)는 불흥(不興)하고 백로(白鷺)는 횡강(橫江)하고 수광(水光)은 접천(接天)한 적벽강상(赤壁江上)에서 벗과 더불어 술잔을 나누며 명월지시(明月之詩)를 송(誦)하고 요조지장(窈窕之章)을 노래하며 빙허어풍(憑虛御風)하고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듯한 가운데 미인을 천일방(天一方)에 바라보며 흥겨워 놀 제 천지간에 부유(부유)같이 붙어 있고 창해(滄海)의 일속(一粟) 같은 인생이라 스 생이 수유간(須臾間)에 번뜩 지나감을 서러워하고 장강(長江)의 무궁함을 부러워 하는 그 소리가 여읍여소(如泣如訴)하여 여음(餘音)이 요뇨부절(요뇨不絶)하는 퉁소(泣)소리를 듣고 그 변하는 자(者)로 볼진데 물여아(物與我)가다 무궁하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오. 천지간에 물각유주(物各有主)하여 나의 소유가 아니면 일호(一毫)라도 취할 바 아니나 청풍(淸風)과 명월(明月)은 취해도 금할 자 없고 용지불갈(用之不竭)하니 이는 조물주의 무진장이라고 간파한 것은 소동파(蘇東坡)의 달관이다. 이는 동파가 그 세련된 시인적 감각과 정서와 순수한 직관과 예지적 섬광을 통하여 가장 평온하고 정일(靜일)하고 유현(幽玄)하고 순수한 가을 자연의 감각을 스치고 그 정수에 혼연히 융합하여 법열에 도취한 심경을 표현한 적벽부(赤壁賦)의 대의다. 동서고금에 가을 시편으로 이보다 더 우수한 걸작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이 일품을 역사적으로 오래오래 애송해온지라 가을이 되면 추칠월기망(秋七月旣望)을 바라보며 적벽부를 상기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그러나 자연도 인생도 무상한 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확호부동(確乎不動)의 사실이요 오직 대자연만이 변전과 무상을 일관하여 엄연히 영원하고 유구하다 하리라. '추풍이 일어남이여 백운이 날으도다. 초목이 누르러 떨어짐이여 기러기는 남으로 돌아가도다. 난초가 빼어남이여 국화가 꽃다웁다. 가인을 생각함이여 잊을 수 없도다. 환락이 극함이여 비애가 많도다. 소장(小壯)한 때가 얼마나 되느냐. 늙어옴을 어이할꼬' 이는 배를 분하중류(芬河中流)에 띄우고 군신으로 더불어 주안을 배설(排設)하고 가을의 청량한 풍광을 상주며 흥겨워 즐기다가 문득 가을의 자연풍경속에 이른바 흥진비래(興盡悲來)와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인생소식을 듣고 자연과 인생의 극한의 환락과 애상의 정서가 교교히 엉클려 끝없이 감도는 당대 천하를 평정하여 그 위엄이 천하에 떨치고 영화의 극치를 자랑하던 가장 인간적인 영웅 한무제(漢武帝)의 추풍사(秋風辭)에 나타난 탄식이다. 가을 선물 가운데 약간 쓸쓸하고 섭섭한 비애의 선물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삼월 삼일에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가 돌아가는 구월 구일이 즉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자비한 것도 아니고 가벼운 미소 가운데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어쩐지 그지없이 애달픈 애수의 실마리가 끝간데를 모르게 사라지지 아니하는, 말하자면 일종의 시적 정서의 그것이다. 이 애수는 사람의 심성을 해하거나 다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마음을 약간 시적으로 고요하게 만들고 그윽하게 하고 일종의 정화작용을 하는 그것이다.
구월 구일이라면 늦은 가을 중허리라, 가을도 그 번화하고 빛나고 유쾌라고 즐겁던 한창 시절을 청산하고 일체의 아름다운 허영의 가장을 벗고 자기도 자기를 이별하고 장차 겨울이라는 고담(枯淡) 엄격(嚴格)한 노골적 해탈경(解脫境)으로 돌아가려는 직전의 순간인지라 철저한 해탈삼매(解脫三昧)를 위한 빈틈없는 만단준비(萬端準備)와 방위(防衛)때문에 인간이 가을에서 받은 많은 아름답고 귀중한 선물에 대한 감사의 보답이나 추억의 미련이나 속정(俗情)의 유혹을 돈망일척(頓忘一擲)키 위하여 자기에게로 향하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하는 인간적 정서의 실마리의 가는 방향을 그 교묘한 수법으로 넌즈시 강남 가는 제비쪽으로 돌려놓은 결과나 아닐까, 상상해보는 것도 아주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점은 어찌 되었던 간에 제비도 유쾌한 가운데 그 생활을 즐겨오던 터라 어느덧 서리가내리기 시작하여 맑은 강이나 냇물도 점차 줄어들고 그 조그마한 발로 쏜살같이 차고 스치며 다니던 수양버들 잎도 하나 둘 누르러 떨어져 가고 그 맛있는 파리, 벌, 나비, 잠자리 등속의 식량도 떨어져 가고 사위(四圍)가 적요(寂寥)해지고 만일소조(滿日蕭條) 해가는 정든 이역의 이 땅도 쓸쓸하여 향수의 정을 못 이김인지 촌가의 빨랫줄 위에 또는 도회의 전선줄 위에 악보의 보표와도 같이 늘어 앉아서 힘 없이들 나즉나즉 지저귀는 소리는 아마도 고향 그리워하는 사향가(思鄕歌)나 몽상곡(夢想曲)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여하간 저 어여쁘고 아름다운 가련한 이국의 방랑적 음악가들과 이별치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만은 그지없이 섭섭하고 애달프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조선사람은 동족을 사랑하기에 급급하여 여가가 없어 그러함인지 대체로 동물이나 곤충이나 조류를 사랑할 줄 모른다. 불친절하고 잔인하기까지도 하다. 애마주간(愛馬週間)이란 것이 매년 강조되고 실천되어 왔으나 그것도 진정한 동물애에서 출발한 것이 못 되고 일종의 형식적 연중행사에 불과한 인상을 주고 마는 것은 실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일반동물에 대하여 냉정한 조선사람도 사랑할 줄 아는 동물이 있다면 그것은 제비족에 대한 애정이 그것이다. 이상하게도 유일한 예외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기호지방에서는 제비를 해하면 학질에 걸린다고즐 하고 영남지방에서는 제비를 만지면 물속에 들어갈 때 뱀이 덤빈다고까지 하여 제비를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보호한다. 그 동기를 살펴보면 제비는 사람이 땀 흘려 만든 곡식을 먹지 않고 해치지 않는 익조(益鳥)요, 가인(佳人)을 가리켜서 제비 같다느니 곡식에 제비 같다고 형용하는 말속에 표시된 바와 같이 그 자태가 아름답고 색이 곱고 소리가 애련(哀憐)하고 그 행동이 활발하고 기민해서 착하고 애정이 갈 만큼 사랑스러워서 그러함인지 또는 흥부와 놀부의 아름다운 전설속에 포함된 바 은혜를 아는 동물이라서 그러함인지 또는 삼월 삼일에 날아왔다가 구월 구일에 어김없이 돌아간다는 지후조(知侯鳥)로서 감각과 신경이 예민하고 정확한 총명을 사랑하여 그러함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하간 사람과 공통된 지정의(知情意)를 가진 동물이라기보다 영물(靈物)로서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엄연한 불문율의 계명이 역사적으로 인심가운데 계시되어 동물에 대한 동물로서의 본능적 애정과 동시에 동물 학대의 잔인성도 겸유(兼有)한 소년들까지도 전역을 통해서 제비를 잡아 가지고 장난치거나 해롭게 하는 자는 절무(絶無)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놀랄만한 사실이다.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태도라고까지 할 만하고 일종의 종교적 심정이라고도 할 만하지 않을까. 대개 조선사람은 일반동물에 대해서 너무도 무관심하고 냉정하고 무정하고 불친절하고 심지어 잔인하기까지 한 것을 볼 때 증오를 느끼고 진정한 동포감이 마비됨을 느끼고 개탄하여 마지 않는 바이나 제비에 대한 지극히 조심스러운 관심과 사랑과 친절과 축복을 봄으로 인하여, 그러면 그렇지, 몰라서 그렇지 동물에 대한 애정의 본능이 마멸된 바 아니요, 교육과 교양과 좋은 관습의 양성에 의하여 동물애의 본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의 싹을 이 제비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동정과 진정한 애정과 친절 가운데 보고 안심하는 바이다. 인자는 신의 아들로서 대지를 상속(相續)받고 만물을 지배하는 명예스러운 특권에 빛나는 반면에 만유를 진정으로 사랑치 않으면 안되는 엄숙한 의무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 의무를 이행치 않을 때는 그 거대한 영예는 소멸되고 특권은 박탈되고 만다. 왜냐하면 정신적으로 동물과 같이 피지배적 지위에 추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조선사람의 제비에 대한 참된 사랑만은 부앙천지(俯仰天地)에 부끄럼 없이 자랑할 만한 것이다.
조선사람은 누구나 삼월 삼일이 되면 초춘(初春)의 상서(祥瑞)러운 호소식(好消息)이나 가져오는 반가운 귀빈을 맞이하듯이 깃들일 장소를 준비하고 강남서 찾아 올 제비를 손꼽아 기다리며 남녀노소 온 가족이 제비 이야기를 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과 자연의 교향악(交響樂)이며 이 얼마나 순수한 사랑과 축복의 교환(交驩)이냐. 구월구일은 애달픈 명년 춘삼월의 신의 있는 약속은 있지만 그지없이 애달픈 날이다. 제비 얘기를 하고나니 제비와 같이 상서러운 길조(吉鳥)요 지후조(知侯鳥)요 신조(信鳥)로서 인간생활, 특히 - 우리 민족의 정신생활 - 그 중에서도 예술과 시가생활(詩歌生活)과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고 그 상호부조의 영향이 원대한 거러기를 연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긴 이야기는 생략하고 제비는 춘래추거(春來秋去)하고 기러기는 추래춘거(秋來春去)하고 계절적으로 거취가 분명하여 제비와 더불어 무슨 숙약(宿約)이나 있는 듯 질서정신의 상징인 듯 정확히 거래교대(去來交代)하여 이 하늘과 이 땅의 가을을 소조적막(蕭條寂寞)치 않게 장엄하나니 그지없이 고맙고 반갑고 즐거운 자연의 연중행사로서 가을 소식의 일장이다.
하늘이 높고 달이 밝은데 장강백사지(長江白沙地)나 흰 갈대숲 우거진 속에서 또는 벽공추월(碧空秋月)을 횡단하여 쌍쌍이 짝을 지어 혹은 단독으로 혹은 떼를 짓고 혹은 질서정연한 대오(隊伍)를 지어 끼이룩 하며 긴 목을 빼어 기이하고도 속 모를 소리로 우는 그 소리 속에는 무한한 시가 깃들어 있다. 우리들은 그 소리 속에 한없고 끝없이 감도는 시를 배운다.
기러기는 순위와 절차 등의 질서정신이 투철하여 자기위치의 순서를 추호도 어기지 않고 엄수하여 그 개체가 단체생활 행동에 있어 그 질서정연한 품이 인간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도리어 그들의 질서정신과 행동을 배우며 부러워하고 예찬하며 그들을 본받아 그들을 모범삼음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자랑삼을 만한 노릇이다. 사실 인간이 참으로 그들의 질서정신을 배우고 질서행동을 완전히 본뜨기만 한다면 진실로 이상적인 인간사회질서의 완벽을 기할 것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공맹지도(孔孟之道)나 소학(小學)이나 대학지도(大學之道)를 교육하지 않아도 이 수치스럽고 자기모욕적인 극도의 무질서 상태와 난마(亂麻)이상으로 엉클어진 인간사회의 이 혼란지옥(混亂地獄)을 능히 전복하고 탈출하여 가장 평화로운 인간사회의 이상향(理想鄕)을 무난히 건설하고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기러기는 확실히 그 엄격한 질서정신과 그 실천행동에 있어 인간의 사표(師表)되기에 족하고 훌륭한 자격자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인류형제간의 순위를 안항(雁行)이라 함은 자미진진(滋味津津)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기러기는 신의 있는 신조(信鳥)인지라 심(沈)봉사의 천출(天出)의 효녀 심청이가 그 부친의 전맹개안(轉盲開眼)을 위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의 염원이 목족을 달성코자 희생적 제물로 뱃사공들에게 쌀 삼백석에 팔려 갔을 때 투해(投海)의 희생물이 되기 직전에 끼이룩 하며 추공(秋空)을 날아가는 기러기소리를 듣고 단장의 피눈물 어린 편지를 써 가지고 '소중랑(蘇中郞)의 편지 전하던 저 기럭아 도화동(桃花洞) 우리 아버님께 이 편지 전하여 달라'고 목 메어 울면서 호소하며 부탁하는 단장곡(斷腸曲)의 가사속의 정경은 실로 우리 민족의 골수(骨髓)에 깊이 침투되어 있는 비곡(悲曲)의 하나이다. 기러기는 인간이 따르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애처가 임을 알지니 암놈이 죽을 때는 숫놈이, 숫놈이 죽을 때는 암놈이 재혼하거나 재가하지 않고 독신으로 각자 죽은 이를 생각하며 여생을 마친다는 것이다. 이야말로 가위 열녀(烈女)는 불갱이부(不更二夫)하고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하는 윤리정신의 실천적 구현이 아닐까. 옛날, 어느 농가에서 혼사에 사용할 목적으로 기러기 한쌍을 열심히 구해 보았으나 겨우 암놈빡에 구하지 못한 나머지 혼일이 당도하여 부득불(不得不) 한 마리만을 사용하여 혼례식을 거행하였다. 예식이 진행되는 도중 돌연히 난데없는 기러기 한 마리가 비창(悲愴)한 비명(悲鳴)과 아울러 하늘에서 떨어지듯 쏜살같이 홍사(紅絲)로 단단히 비끄러매어 놓은 암기러기에게로 달려들어 그 기다란 목으로 암놈의 목을 비꼬아 감아서 밀며 땡기며 하다가는 급기야 두놈이 함께 죽어 버리고 말았다는 설화가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나고 철저하며 심각한 부부애(夫婦愛)의 비극미(悲劇美)의 극치일까.
그럼으로 해서 구식혼사(舊式婚事)에는 부부애의 금슬(琴瑟)이 좋으라고 축복하는 의미에서 반드시 기러기 한 쌍을 쓰되 그 발목에다 청사홍사(靑絲紅絲)를 매어 늘임으로써 신랑신부(新郞新婦)의 길상(吉祥)스러운 백년가약(百年佳約)의 체결을 상징하고, 산 기러기가 없을 때는 목제의 기러기라도 상징으로 쓰는, 아름답고 놀라운 습속을 우리들은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또 기러기의 모성애(母性愛)는 절대적인 것이라 한다. 모성애라면 인간에게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금주수(飛禽走獸)도 거의가 다 공통적 보편성으로 다소 정도의 차는 있으나 대체로 거개가 상당히 투철한 모성애를 발로하고 발휘함을 볼 수 있거니와 특히 기러기의 모성애란 거의 절대적이라 하나니 예를 들면 어미가 새끼를 품고 있다가 야화(野火)가 나서 불이 맹렬히 타들어 오는 위기일발에 직면했을 때 품에 품은 새끼와 함께 타서 죽을지언정 결단코 새끼 홀로 내어비리고 도망갈 줄 모른다는 것이다.
오호~ 불속에서도 타지 않는 영원한 모성애의 정신이여~
불의를 은폐코자 하는 사심(邪心)과 부정한 체면을 억지로 새우려는 허영과 약간의 생활고 등등으로 기아(棄兒)를 예사로 하는 인면귀심(人面鬼心)의 인간이란 것이 적지 아니하거늘 이 얼마나 철저하고 절대하며 거룩한 모성애의 극치일까. 절대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의 신애(信愛)와도 방불(彷彿)하고 육박(肉迫)한다느니 보다도 차라리 완전합치(完全合致)한 그것, 아니 그것이 바로 신의 모성애가 아닐까. 이렇고 보면 인간이 그 반생이나 일생을 도(賭)하는 근근자자(勤勤孜孜)히 고심참담(苦心慘憺)한 양육과 교육과 수양을 통하여 극소수의 우수한 인간이 겨우 달성하고 성취할 수 있는 일생의 대사업을 그 천부의 천재적 예지(叡智)와 절대적 의지력으로 이지지격(而知之格)으로 능히 달성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자 일대 정신미(精神美)의 실천자 즉 일대 인격자와 같이 숭앙하며 선망하며 찬탄하지 않을 수 없나니 만사는 도시 절대불가사의(絶對不可思議)의 희롱(戱弄)이라 아니 할 도리가 없다. 현대 일본의 문호인 아리시마다께오(有島武郞)는 일찌기 죽음보다도 강한 그 심각한 애욕의 절정에서 영원히 다시 없을 생존의 마지막 순간에 '아~ 일본의 가을이 한번 더 보고 싶다'라고 했다. 이것이 일세의 문장이 그 명예와 지위와 형제와 자녀와 그 거대한 개성과 그의 조국까지 아낌없이 버리고 가는 죽음의 순간 그 유일한 소원이요, 다시 없는 유한이었다.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다'라는 말은 그의 창작이었다. 과연 그 말과 같이 심각하고 철저한 사랑 때문에 다시 없는, 그렇다 ! 두 번 없는 그의 목숨, 그리고 그의 목숨과 유기적으로 종횡으로 관련되고 결연된 무수한 세계 전체, 하늘의 별도 땅 위의 꽃도 아낌없이 빼앗겼다. 사랑을 위하여 태양을 빼앗기고 밤을 잃어버려도 애석(愛惜)할 줄 모르는 그에게 맑고 푸르게 개인 자기국토(自己國土)의 가을만은 빼앗기기가 아까울 뿐 뼛속에 사무치게 원통했던 모양이다. 그가 비련의 주인공으로 자진(自盡)한 그 문학적 운명은 실로 의외의 일대 경악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여기에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나는 그의 조심루골(彫心鏤骨)의 문학적 생명의 결정인 그 수십권의 전집이 가사(假使) 회진(灰진)해버린다 할지라도 그토록 애석하지 않으려니 '아~ 조국의 가을이 한번 더 보고 싶다.' 그가 최후에 남기고 간 이 한 마디의 말이 나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서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상히 여길지도 모르나 이 한 마디의 반향이 나의 흉저(胸底)에서 소멸하지 않는한 그는 나에게 있어 우상적이 아니요 창조적․진화적으로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그리고 아리시마(有島) 자신도 그의 업적 어느 구석에서 보다도 그 마지막 한 마디 말속에 창조적 예술적으로 영원히 살아있지 않을까. 청고(淸高)하고 숭엄(崇嚴)한 대지의 가을의 미를 사랑하는 마음... 조국향토의 청정한 추광(秋光)을 충정(衷情)으로 사모하고 동경하여 그 마펼의 순간에도 차마 눈감지 못하는 그 절절한 심정은 실로 '이데아'적 본질본체의 세계에 향한 영원한 사모동경(思慕憧憬)의 '에로스' 그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을이 더 한번 보고 싶다.' 이 말 한 마디를 남기지 않았던들 죽은 그 자신이나 그를 알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그 얼마나 공허하고 적막할까. 아마도 그의 인상과 기억은 어느덧 망각의 사막속에 사라졌겠지만 때때로 홀연히 '오아시스'로 나타나 사람의 추억을 새롭게하고 사모하는 마음과 사랑을 깊이하는 매력은 실로 이 한 마디 말의 비밀이라고 나는 생각치 않을 수 없다. 나는 아리시마(有島) 그 사람 전체보다도 그 한 마디 말을 더 좋아 한다. 아리시마는 죽었다. 그러나 그 말은 죽지 않았다. 죽을 수가 없다. 가을이 올 때마다 그의 생애와 예술과 그의 죽음과 동시에 그의 영원한 시인적 진실을 토로(吐露)한 그 한 마디 유언(遺言)이 나의 심금(心琴)을 울려 가을의 적막과 무상과 감상을 심각케 하며 가슴을 무겁게 눌러 그지없이 괴롭게 하고 까닭모르게 눈물을 자아내며 살아서 육안으로 가을의 자연을 볼 수 있는 은총과 혜택에 대한 감사의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바이다. 시인은 의사동(意思同)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가을은 세계 제일의 가을이다. 조선의 가을 하늘은 우리의 독특하고 특수한 예술과 문화적 생명의 모태요, 그 원천인 것이다. 조선의 무한신비(無限神秘)한 가을 하늘빛 속에서 고려자기(高麗磁器) 청자기(靑磁器)의 영원한 빛과 끝없는 선과 우리들의 고전아악(古典雅樂)과 무용예술(舞踊藝術)의 유구하고 고아하고 멋들어진 곡선미의 유동적 운율이 배태되어 유출되었음을 상기하여 보라. 아시아 어느 나라의 가을 하늘이나 '유럽'의 '이태리'나 서서(瑞西)의 가을 하늘이나 '아메리카'와 '카나다'의 가을 하늘, 천하의 가을을 총집성하여도 조선의 가을 하늘엔 못 미칠 것이다. 우리들은 다행히도 그지없이 신성하고 은혜롭고 고마운 가을 하늘 그 속에 호흡하는 영광스러운 민족임을 깊이 반성하고 자각하여 하늘에 보답하고 땅에 평화를 가져올 엄숙한 사명이 부여된 백성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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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현장 기행 - 이하석
감은사지와 대왕암 - 죽어서도 나라 지킨 문무왕
[감은사지]
호국의 성지
감은사지와 대왕암, 그리고 이견대가 있는 월성군 양북면의 동해안 지역은 옛부터 동해구로 불리웠으며, 신라 호국이념이 깃들인 성지일 뿐만 아니라 만파식적의 현장이다. 감은사지의 동쪽 대본해수욕장 앞 동해바다에 떠있는 대왕암은 신라 30대 문무왕의 해중릉 또는 산골처(유골을 뿌려놓은 곳)로 알려져 있다.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위업을 있기 위해 지은 절이다. 이 일대가 호국의 성지로 일반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7년 신라 오악조사단(한국일보사주관)이 동악인 토함산과 동해구 유적조사를 하던 도중 바닷속에서 능침(능의 자리)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 능침의 발견으로 지금까지 건설로만 문무왕의 능으로 전해오던 것이 사실임이 드러난 것이라고 이 조사단은 흥분된 어조로 강조했다. 문무왕은 재위 21년(681년)에 죽었다. 그는 생전에 자주 지의법사에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다.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동해구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 절의 완공을 못 보고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신문왕이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체를 화장하여 동해에 안장 또는 산골하고, 감은사를 완공했다.
삼국유사에는 이 절의 금당(절에서 불상, 혹은 고승의 영정을 두는 불당. 금으로 장식하여 지은 집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밑에 동쪽을 향한 구멍을 뚫어 동해의 용이 이 절에 와서 돌아다니게 해놓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현재 감은사지(양북면 용당리)는 쌍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감은사지는 1959년에 국립박물관이 주관하여 1차 발굴조사를 했으며, 80년대 초에 문화재연구소가 주관하여 사지전역을 발굴하여 옛 가람 배치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 절은 조사결과 정연한 쌍탑식 가람배치였으며, 남쪽으로부터 중문을 들어서면 좌우에 동탑과 서탑이 서 있었고, 그 정면에 금당이 서고 금당 뒤에 강당이 있었으며, 중문과 강당을 연결한 회랑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금당 밑의 구조였다. 삼국유사에 적힌 대로 금당 밑에 구멍을 파서 문무왕의 화신인 동해 용이 드나들었다는 얘기의 근거가 과연 있는지의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발굴 결과 금당의 중앙에는 공간이 있었으며, 물이 드나들 수 있는 수조장치가 드러나 세인을 놀라게 했다.
[대왕암]
수중에 잠긴 능
감은사지에 서면 동쪽에 바로 대왕암이 보인다. 대본해수욕장 왼편으로는 토함산에서 발원하여 감은사지 앞을 지나 바다로 흘러드는 대종천이 있다. 추측컨대, 대종천의 물길이 옛날에는 감은사 바로 밑을 흘렀으며, 동해 용은 대종천을 거슬러 올라와 감은사 금당 밑의 구멍을 통해 오갔음직하다. 절 남쪽에는 용담이라 불리는 못이 아직 남아 있다. 이 못과 절이 연결되어 용이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됐다고 본다면, 대종천과 이 못이 연결됐으리라는 추측을 쉽게 해볼 수 있다. 설사 이러한 얘기가 허황된 거짓이라 할지라도, 왕의 능침이 있는 바다와 절터를 이런 식으로 연결하고, 그 연결의 의미를 호국의 의미로 끌어올리려는 신라인의 배려가 놀랍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이 일대의 지명도 여기에서 연유된 게 많다. 절 뒷산을 용당산이라 하며, 감은사지가 있는 마을을 용당리라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감은사를 떠나 동해로 나와 대본국민학교가 있는 언덕에 오르면 이견대가 있다. 이견대는 용의 출현을 바라보던 누각이었다고 한다. 이견대는 역시 신라오악조사단에 의해 그 터가 발견되어, 80년대 초에 새로 누각을 세웠다. 이견대에서 바라보면 바로 눈앞에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오른편 대종천을 건너 대본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오며 해수욕장 앞바다에 대왕암의 돌섬이 솟은 것이 보인다. 저 돌섬이 삼국을 통일한 불세출의 영주 문무왕의 무덤이거나 산골처라 생각하니 감개가 새롭다. 대왕암은 겉으로 보기에는 돌섬으로 보이나 섬에 오르면 그 교묘한 구조에 놀란다. 돌섬의 중앙을 깊숙이 파내어 동서남북 사방에 수로를 뚫었으며, 바닷물은 동쪽 수로로 들어와 서쪽 수로로 빠져나가도록 높낮이를 잡고 있어 그 안에 가득 찬 바닷물은 파도도 없이 그지없이 맑다. 문무왕의 뼈는 사리함(석관)에 넣어져 그 청정한 물 밑에 안치했다고 발견당시의 조사단은 주장했다. 석관으로 추정되는 돌(길이 3.7m, 폭 2.06m, 높이 4.45m)의 밑은 역시 교묘하게 배수로 같은 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정말 문무왕의 무덤이라면 이러한 수중릉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무덤을 수중에 잠기도록 한 것은 용으로 변해서 나라를 돕겠다는 문무왕의 유지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견대'
만파식적의 현장
대왕암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호국 이념을 간직한 설화들이 꽤 전해온다. 특히 감은사지가 낙성된 후 신문왕은 이곳에서 '만파식적'이라는 신비한 피리를 얻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피리는 동해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이 마음을 같이하여 내린 보물이며,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질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올 때는 비가 개고, 바람이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 피리를 얻는 데는 이적이 따랐다. 감은사를 세운 이듬해에 동해안에 작은 섬이 떠서 감은사로 오는데, 섬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 섬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로 되었다. 두 섬이 하나로 합칠 때 섬의 대나무도 하나로 합쳤으며, 그때 그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든 것이었다. 이 설화의 사실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설화를 낳게 한 현장이 이곳이라는 사실이 더 관심을 끈다. 이 일대가 성역이라는 것은 여러 면에서 비쳐지고 있다. 당시 이 지역을 조사했던 신라오악조사단은 토함산 석굴암 대불의 시선이 이곳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 유적지대에 닿아 있음을 알아내고 크게 주목했다. 고대에 절을 창건할 때는 그 방위문제가 가장 중요한 만큼 석굴암과 동해구 유적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당시 조사단의 최대 관심사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석굴암을 조성한 김대성이 당시 국정을 잡았던 김씨 왕족임에 주의, 그가 선조들의 묘역을 위해 석굴암을 지었으며, 그래서 석굴암이 동해구에 모신 문무왕릉 등 김씨일족의 묘역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이 조사단의 주장이다. 동해안 지역은 문무왕 이외에도 34대 효성왕이 동해에 산골 되었던 만큼 이들 역대 군주를 본받아 김씨 일족들이 동해를 장지로 택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문무왕이 죽은 후에 석굴암을 비롯한 많은 유적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곳 동해구와 관련을 가질 만큼 이곳이 신성시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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