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4호 - 2024.06.30 일요일(음력 : 05.25)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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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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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말에 성난 말로 대꾸하지 말 것. 말다툼은 언제나 두번째의 성난 말 때문에 비롯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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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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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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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애먼
“아버지가 엄하셔서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해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의 말을 해석해 준다는 유머 사이트에 따르면 데이트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거절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때 ‘엄하다’는 규율이나 예절을 지키는 태도가 바르고 철저하다는 뜻이다. ‘엄격하다’로 바꿔 쓸 수 있다. ‘학생들에게 엄한 선생님’ ‘싸우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엄하게 일렀다’처럼 쓰인다.
그런데 이 ‘엄하다’가 잘못 쓰이는 경우가 있다. ‘하라는 숙제는 않고 엄한 짓만 한다’거나 ‘멧돼지 잡으려다 엄한 사람 잡겠네’ 같은 데 쓰인 ‘엄한’이다. 이때는 물론 ‘엄격하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엄한’이 아니라 ‘엉뚱한’의 뜻을 지닌 ‘애먼’으로 써야 맞다.
‘애먼’은 ‘일의 결과가 다른 데로 돌아가 엉뚱하거나 억울하게 느껴지는’을 뜻하는 관형사다. ‘애먼 사람이 누명을 썼다’거나 ‘애먼 짓 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처럼 쓴다.
‘애먼’과 비슷한 뜻으로 쓸 수 있는 말에 ‘애매하다’와 ‘앰하다’가 있다. ‘애매하다’는 모호하다, 즉 분명하지 못하다는 뜻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뜻의 ‘애매하다’와 달리 아무 잘못 없이 누명을 쓰게 돼 억울하다는 뜻의 ‘애매하다’가 따로 있다. 우리 속담 중에 ‘애매한 두꺼비 돌에 치었다’거나 ‘천 냥 시주 말고 애매한 소리 말라’ 등에 쓰인 ‘애매하다’가 바로 그것이다. ‘앰하다’는 이 ‘애매하다’가 줄어든 말이다. ‘앰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라’거나 ‘잘못한 것도 없이 어머니께 앰하게 꾸중을 들었다’처럼 쓴다.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기 쉽지만 ‘엄한’과 ‘앰한’ ‘애먼’은 구분해서 써야 한다. ‘엄격하다’의 뜻에는 ‘엄한’을, 억울하거나 엉뚱하다는 뜻으로 쓸 때에는 ‘애먼’이나 ‘앰한’을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말씀은 가만가만
고속도로를 오가다 보면 졸음운전의 위험성을 일깨우는 표어들이 곳곳에 보인다. 그런데 그 말이 섬뜩하기 그지없다. ‘졸면 죽는다’ ‘졸음운전은 살인운전’ ‘졸음운전! 자살운전! 살인운전!’ ‘겨우 졸음에 목숨을 거시겠습니까?’. 그 표어를 보는 운전자의 정신이 번쩍 들긴 하겠지만 그 뒷맛은 그리 좋지 않다. 죽는다느니, 자살이니, 살인이니 하는 표현은 일종의 협박이요, 언어폭력이다.
물론 고속도로 관계자들의 고충도 이해 간다. 어떤 방법을 써도 줄어들지 않는 졸음운전 사고. 이렇게 자극적인 표현을 통해서라도 소중한 생명을 지키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고육책이니 한편으로는 고마워할 일이기도 하다. 보도에 따르면 그 효과도 적잖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목적이 숭고하더라도 그 방법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언젠가 순천의 선암사에 간 일이 있다. 그 경내의 대웅전을 오르는 돌계단의 난간 끝머리에 부탁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한쪽에는 ‘걸음은 조용조용’, 다른 쪽에는 ‘말씀은 가만가만’이라고 씌어 있다. ‘뛰지 마시오’라든가 ‘떠들지 마시오’라는 위압적 표현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오히려 그 부드러움에 읽는 이들의 마음도 따뜻해져 절로 걸음이 조용해지고 말소리가 낮아진다.
그렇게 낮고 겸손한 목소리로 말해도 그 간절한 뜻이 전달된다. 높고 거친 말은 잠깐의 효과는 있을지라도 결국은 마음을 병들게 한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말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졸음과 싸우는 운전자에게 산뜻한 청량제가 될 수 있는 그런 표어는 없을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의당’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안철수 의원 등이 창당을 추진 중인 국민의당을 [궁미늬당]으로 발음해야 할까? 아니면 [궁미네당]으로 발음해야 할까? 이는 ‘의’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가 문제인데, 표준발음법 제2장 제5항을 보면 “‘ㅢ’는 이중모음으로 발음한다”고 되어 있다. 즉 ‘ㅢ’는 입모양을 ‘ㅡ’에서 ‘ㅣ’로 바꾸어 ‘국민의당’을 [궁미늬당]으로 발음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제5항의 ‘다만 4’ 조항을 보면 “조사 ‘의’는 [ㅔ]로 발음함도 허용한다”는 규정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의 경우 원칙은 [우리의]로 발음하지만 ‘의’가 조사로 쓰였으므로 [우리에]로 발음하는 것도 허용한다. 그렇다면 ‘국민의당’의 ‘의’를 조사로 보아 [궁미네당]으로 발음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국민의당’의 경우 ‘국민의 당’처럼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를 조사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표기대로만 놓고 보면 ‘국민의당’은 [궁미네당]이 아닌 [궁미늬당]으로 발음해야 한다. ‘국민의당’의 홍보 담당자에게 문의한 결과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국민의당’에서도 당명을 [궁미네당]이 아닌 [궁미늬당]으로 발음해주기를 원한다는 공식 답변을 확인했다. 앞으로 발음이 조금 어렵더라도 국민의당을 [궁미늬당]으로 발음해야겠다. 덧붙여 ‘ㅢ’의 발음을 좀 더 살펴보면 ‘띄어쓰기’, ‘무늬’처럼 자음을 첫소리로 가지고 있는 음절의 ‘ㅢ’는 [ㅣ]로 발음해 [띠어쓰기], [무니]와 같이 발음하고, ‘주의’, ‘협의’처럼 단어의 첫 음절 이외의 ‘의’는 [ㅣ]로 발음하는 것을 허용해 [주의(원칙)/주이(허용)], [혀븨(원칙)/혀비(허용)]로 발음한다는 것도 함께 알아두면 좋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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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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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꽃의 위치에 대하여 - 천상병
꽃이 하등 이런 꼬락서니로 필 게 뭐람
아름답기 짝이 없고 상냥하기 소리없고
영 터무니없이 초대인적이기도 하구나.
현명한 인간도 웬만큼 해서는 당하지 못하리니
어떤 절색황후께서도 되려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런 이름짓기가 더러 있었지 않는가 싶다.
미스터 유니버시티일지라도 우락부락해도
과연 이 꽃송이를 함부로 꺾을 수가 있을까
한다는 수작이 그 찬송가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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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尋牛莊) 2 - 한용운
선(禪)은 선(禪)이라고 하면 선(禪)이 아니다.
그러나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별로히 선(禪)이 없는 것이다.
선(禪)이면서 선(禪)이 아니요. 선(禪)이 아니면서 선(禪)인 것이 이른바 선(禪)이다.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모래 위에 갈매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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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기관차 - 정지용
느으릿 느으릿 한눈파는 겨를에
사랑이 수이 알어질가도 싶구나.
어린아이야, 달려가자.
두뺨에 피여오른 어여쁜 불이 일즉 꺼져 버리면 어찌 하자니?
줄 달음질 쳐 가자.
바람은 휘잉. 휘잉.
만틀 자락에 몸이 떠오를 듯.
눈보라는 풀. 풀.
붕어새끼 꾀여내는 모이 같다.
어린아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새빨간 기관차처럼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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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 김수영
1
토끼는 입으로 새끼를 뱉으다
토끼는 태어날 때부터
뛰는 훈련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있었다
그는 어미의 입에서 탄생과 동시에 타락을 선고받는 것이다
토끼는 앞발이 길고
귀가 크고
눈이 붉고
또는「이태백이 놀던 달 속에서 방아를 찧고」......
모두 재미있는 현상이지만
그가 입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은 또한번 토끼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은 나의 몇사람의 독특한 벗들과 함께
토끼의 탄생의 방식에 대하여
하나의 이덕을 주고 갔다
우리집 뜰앞 토끼는 지금 하얀 털을 비비며 달빛에 서서 있다
토끼야
봄 달 속에서 나에게만 너의 재주를 보여라
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너의 새끼를
2
생후의 토끼가 살기 위하여서는
전쟁이나 혹은 나의 진실성모양으로 서서 있어야 하였다
누가 서있는 게 아니라
토끼가 서서 있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캉가루의 일족은 아니다
수우나 생어같이
음정을 맞추어 우는 법도
습득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서서 있어야 하였다
몽매와 연령이 언제 그에게
나타날는지 모르는 까닭에
잠시 그는 별과 또하나의 것을 쳐다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하나의 것이란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는 곡선같은 것일까
초부의 일하는 소리
바람이 생기는 곳으로
흘러가는 흘러가는 새소리
갈대소리
「올 겨울은 눈이 적어서 토끼가 은거할 곳이 없겠네」
「저기 저 하아얀 것이 무엇입니까」
「불이다 산화다」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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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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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破竹之勢)
破:깨뜨릴/깨어질 파. 竹:대나무 죽.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동의어] 영인이해(迎刃而解), 세여파죽(勢如破竹).
[출전]《晉書》〈杜預專〉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라는 뜻. 곧
① 맹렬한 기세.
② 세력이 강대하여 적대하는 자가 없음의 비유.
③ 무인지경을 가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진군함의 비유.
위(魏)나라의 권신(權臣) 사마염(司馬炎)은 원제(元帝)를 폐한 뒤 스스로 제위에 올라 무제(武帝:265~290)라 일컫고, 국호를 진(晉)이라고 했다(265년). 이리하여 천하는 3국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오(吳)나라와 진나라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이윽고 무제는 진남 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에게 출병을 명했다. 이듬해(280년) 2월(음력),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한 장수가 이렇게 건의했다.
“지금 당장 오나라의 도읍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이제 곧 잦은 봄비로 강물은 범람할 것이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단 철군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찬성하는 장수들도 많았으나 두예는 단호히 말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아군의 사기는 마치 ‘대나무를 쪼개는 기세[破竹之勢]’요. 대나무란 처음 두세 마디만 쪼개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이 닿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버린단 말이오.”
두예는 곧바로 휘하의 전군을 휘몰아 오나라의 도읍 건업[建業:남경(南京)]으로 쇄도(殺到)하여 단숨에 공략했다. 이어 오왕(吳王) 손호(孫晧)가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진나라는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를 통일했다.
[주] 두예 : 진(晉)나라 초엽의 명장, 정치가, 학자. 자는 원개(元凱). 진나라의 초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오(吳)를 정벌하고 삼국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 무공을 세움.《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도 유명함. 저서로는《좌전집해(左專集解)》《춘추석례(春秋釋例)》등이 있음. (222~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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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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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51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에 속해있으며 자연의 일부분이다. 모두 근원이 같기 때문에 그대에게 유익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명심하라,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다투기보다는 서로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52
우리는 점차 성장하면서 현실의 세계와 친숙해지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의 참된 모습을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교육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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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빛을 찾아가는 길 - 오도환(번역문학가)
쇼펜하우어는 1788년 2월 22일에 출생, 1860년 9월 21일에 사망한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였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는 고집이 세고 독립심이 강한 성격이었으며 자유를 옹호하는 상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 헨리에테는 저명한 여류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1793년 단치히 지방이 폴란드에 의해 합병되자 쇼펜하우어의 아버지는 자유의 도시 함부르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쇼펜하우어는 아버지의 일을 배우면서 신중한 태도와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세계에 대한 지식을 배우게 된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쇼펜하우어를 서재 철학자나 강단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철학자로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아버지로부터 강인한 의지를 물려받았으며 어머니로부터는 지성을 물려받았다.
쇼펜하우어는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지만 항상 세상에 대해 냉소적이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위대한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흙 속에 묻힌 보석이었던 그는 내면으로 눈을 돌리면서 자신의 영혼을 성숙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쇼펜하우어는 철저하게 고독했다. 그 당시에 유럽을 휩쓸던 민족주의의 열기도 그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1813년에 쇼펜하우어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해방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무기까지 구입했지만 현실의 모습을 직시하게 되면서 출전을 포기하고 철학 박사 학위 논문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위를 받은 후에「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했다. 그 논문은 낡은 관념의 개작이 아니라 독창적인 사상의 정연한 체계를 담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수많은 책의 원전과 계기가 될 거라고 자찬하면서 이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책은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가난과 궁핍에 대한 근원을 밝히는 책을 읽기에는 너무나 가난하고 지져 있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는 어느 한 시대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저서에는 모든 시대를 포함하는 사상이 깃들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자신의 사상을 모두 담아 놓았으며 따라서 그 후의 저서는 이 책의 주석에 지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스스로 자신의 율법에 대한 해설자가 되었던 것이다. 1836년 쇼펜하우어는「자연의 의지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나중에「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상당 부분 흡수되었다. 1841년에는「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 문제」 1851년에는「여록과 보유」가 출판되었다. 「여록과 보유」는 쇼펜하우어의 저서 가운데 가장 가치있고 지혜와 기지가 풍부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 대학에 강사의 자격으로 초빙된 쇼펜하우어는 일부러 헤겔의 강의에 맞추어 자신의 강의 시간을 선택했다.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의 학생들이 자신과 헤겔을 대등하게 평가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텅 빈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고 결국 헤겔의 압도적인 명성에 밀려 사직을 결심하게 된다.
1831년에 콜레라가 베를린을 휩쓸자 프랑크푸르트 지방으로 이주한 쇼펜하우어는 그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된다. 철저한 염세주의자였던 쇼펜하우어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회사의 주식을 상속받아 다른 사업에 투자하면서 막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쇼펜하우어는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언제나 식탁 위에 금화를 올려놓았다가 식사를 끝나면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곤 했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어 보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영국 장교들이 말이나 여자 혹은 개 이외의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나는 그 즉시 이 돈을 자선함에 집어넣을 생각이네.”
쇼펜하우어의 철학상의 모든 발전은 대학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독일의 대학은 쇼펜하우어와 그의 저서를 철저히 무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이 널리 인정받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 믿음은 사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변호사나 의사, 상인들은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적인 전문용어를 늘어놓지 않으면서도 현실의 다양한 사건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철학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마침내 유럽은 절망을 대변하고 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받아들였다. 신학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가난과 전쟁에 대한 분노, 생존 경쟁의 생물학적 강조, 세상을 통찰하는 지혜, 자아의 확립을 비롯한 수많은 요소들이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철학을 찬양하면서 ‘니벨룽겐의 반지’를 헌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진리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혜의 빛을 찾아가는 여행
생명력이 있는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가 있지만 화석이 된 꽃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고 해도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멀리서 지혜를 찾는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의 발 밑에서 지혜를 키운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지혜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릿한 과거의 향수를 누리면서 새로운 미래의 시간을 용기를 가지고 준비하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내 운명의 주인은 오직 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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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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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2. 허정 과도정권 출범
통치권자의 사상, 이념, 그리고 시국관(時局觀)은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허정이 비록 선거를 통한 대통령이 아니라 시한부 대통령직 권한대행이라 하더라도 그가 통치권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 이념, 시국관이 시국수습과 제2공화국 탄생과 진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허정이 4.19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과도정권의 임무와 책임은 <헌정의 정상화>였다. 허정이 과도정부를 맡기로 한 것은 자기 자신마저 이승만과 함께 물러나게 되면 헌정의 중단이라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되기 때문에 정치도의상의 문제를 떠나 막중한 과도정권의 수반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숨김 없는 진실이었다. 뒷날, 그가 군사정권이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 <국민의 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한 일이 있다고 해서 정권욕에서 과도정권 수반을 맡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본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허정도 정치인이었다. 정권욕이 없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있어서의 맡았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허정은 4.19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는 4.19를 결코 혁명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뒷날 그가 이끌 과도정권의 문교부는 4.19와 4.26을 묶어 <4월 혁명>으로 호칭토록 결정했지만, 허정은 그 시점에 이르러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4.19사태는 꺼져 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는 조금의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고 혁명보다는 차원이 높은 것이다. 4월의 사자(死者)들은 혁명의 전투원은 결코 의사(義士)들이었다.> 이것이 4.19를 보는 허정의 시각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4.19 의거가 혁명이 아니었던 것처럼 과도정부가 일을 처리해 나가는 방식도 혁명적이어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변칙적인 방법을 피하고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시책을 수행해 나가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비혁명적 방법에 의해서 혁명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허정이 애국심에서 과도정권을 맡게 되었던 것이라고 마치 허정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이 말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 허정의 <8.15까지 새 정부를 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정부 탄생을 질질 끌면서 정권이양을 지연시킬 수가 있었다. 구실은 충분했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져 있는데 그까짓 구실쯤 찾지 못하겠는가? 국회는 아직도 자유당 국회이겠다, 그들을 회유해서 손아귀에 거머쥐고 군부의 실력자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사람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깐놈의 정권은 얼마든지 오랫동안 거머쥐고 있을 수가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아직도 계엄령은 발동중에 있었다. 사령관 조재미를 회유해서 어느 놈이고 꿈틀거리려고만 해도 잡아다 족치고 주리를 틀라고 명령만 내려도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방법이야 없겠는가! 그러나 허정은 그따위 생각은 상상조차 정상화시키자>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의지였다.
8.15까지 헌정을 정상화시키려면 개헌과 총선거를 서둘러야만 했다. 개헌은 민주당의 오랜 꿈이었다. 차기 정권 담당자가 민주당 이외에는 달리 세력이 없고 보면 개헌은 필수적인 정치 과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도정권의 당면한 목표를 민심수습과 질서회복에 두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 하야 직후의 사회상은 엉망이었다. 엉망이 돼버린 사회상을 바로잡지 않고는 개헌이고 나발이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4.19의 원인이었던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한데, 부정선거 관련자를 모두 다 처벌하자면 행정력, 경찰력이 모두 마비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경찰력을 포함한 전 공무원이 부정선거 관련자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허정은 1차적으로 원흉(元兇)급만을 처벌하고 나머지 송사리떼들에 대해서는 새 정부에 맡긴다는 기본 방침을 세워 놓았다. 허정의 <과도정부 응급실론>은 이래서 생겨나게 되었다. <과도정부의 역할은 응급조치에 있다. 그러므로 과도정부는 응급조치만을 취하고 자유당 정권이 저질러 놓은 온갖 부정과 부패로 대수술이 필요한 환부는 새 정부가 맡아야 한다.> 그런데 허정은 이 응급처치의 한계를 어디까지 그어놓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들 한민족의 민족성은 어떤 것일까? 이승만이 하야를 하고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향할 때,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시라!> 하며 박수로서 환송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들을 연출해 내고 있다. 그 사건들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어제까지 상사로 깍듯이 모시고 있던 부하라는 무리가 그 상사를 몰아내기 있었던 것이다. 과도정권도 정권은 정권이었다. 비록 시한부라고는 하나 어김없는 정권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과도정부한테 맡기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것을 부하들이라는 것들이 <이제 세상은 뒤집혔다!> 하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상사를 몰아내고자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으니 어찌 한민족을 선하고 착한 민족성을 지닌 민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속담을 뼛속 깊숙이 실감해야만 했다. 세상은 분명히 뒤집혔다. 그와 함께 어제까지는 정의였던 것이 오늘은 불의로 전락해 버린 게 사실이다. 한데, 세상이 뒤집혔으니까 과도정권이 들어서게 된 어제까지의 정의에 대해서는 과도정권이 알아서 다스리면 된다. 그래야 법치국가라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것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식으로 폭력을 휘둘러댔으니 밝은 세상에 이런 행위가 용납될 수 있단 말인가? 과도정권의 수반인 허정은 이미 결의를 다진 바 있었다. 그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과도정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만천하에 천명한 바 있었다. 또 4월 29일의 첫 국무회의에서도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인사를 겸해서,
"여러분, 오늘의 우리 국가가 우리 과도정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같이 인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이 난국을 슬기롭게 개척해 나가는 데 일사보국(一死報國) 일련탁생(一連托生)의동지적 결합으로 국민이 바라는 바를 유감없이 척결해 나가야 할 줄로 압니다."
하고 과도정권의 사명에 대해서 거듭 천명했던 것이다. 그랬으면 됐다. 과도정권을 믿고 과도정권에게 맡겨 놓고 있었으면 족했다. 그런데 <세상이 뒤집혔으니까> 하고 어제까지 상사로 모시던 사람을 내쫓으려 들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칙한 짓이란 말인가! 부하들이 야합애 상사를 몰아내려는 소위 <자가숙청>에 불씨를 던진 것은 서울 동대문경찰서 서원들이었다. 그들은 과도정권이 막 출범을 하기 시작하려는 4월 27일, 서원 모두가 사복을 입고 출근을 하여금 서장 앞에 내놓도록 했다.
"서장님, 이건 우리 서원 모두가 서장님의 퇴임을 요구하는 연판장입니다. 우리는 서장님의 명령에 따라 부정선거에 관련한 것인즉, 명령권자인 서장님은 당연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마땅하다고생각합니다."
부하 직원들이 내놓은 연판장을 들여다보는 동대문 경찰서장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 사람들아, 자네들만 피해자가 아니라 나도 피해자야! 내가 부정선거를 지령하고 싶어서 지령했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상사의 명령을 거역 못했던 것이란 말이네. 그것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 날더러 물러나라니 이럴 수가있단 말인가?> 서장은 이렇게 항변하고 부하직원이 상사를 내몰려는 행위는 좀 심하게 표현하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 원흉(元兇:최고의 지령자)을 제외한 부정선거 관련자들은 모두가 꼭 같은 피해자들이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내몰려는 획책을 하다니,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따위 놈들을 부하라고 믿고 일을 해온 서장도 팔자가 기박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나면 지성(知性)도 개떡이 되고 마는 모양이었다. 같은 날 사법부에서도 자가숙청에 착수했다. 서울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의 법관 일동은 긴급회의를 열고 대법원장 이하 전 대법관의 사퇴를 권고하는 결의를 했다. 가나, 흔히 <사법부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들 해왔다. 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던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압력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대법원장 이하 전체 대법관이 그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인과응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런 결의를 한 법관들은 양심에 티끌만큼이라도 가책받을 짓을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나는 어떤 압력,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는 법관으로서 양심을 끝까지 지켜왔다> 하고 떳떳이 소리칠 수 있는 법관이 과연 몇이나 됐겠느냔 말이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승만 12년 집권 기간 중 숱하게 벌어졌던 정치음모의 하는 것을. 그런데도 그런 위인까지도 자리를 같이 해서 자가숙청을 합네 하고 설쳐댔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마침내 자가숙청의 바람은 회오리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확산됐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조용한 곳이 없었다. <세상이 뒤집혔으니까!> 하고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민족의 치사스러운 속성이 너무나 알알이 드러나 있어 서글프기만 했다.
정치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목청이 더 우람했고 요란했다.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과 당 간부는 정치적 형식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정치권 분위기였다. 죽었는지 자유당 소속의 박만원(朴晩元), 최인규(崔仁圭), 손도심(孫道心) 등은 4월 29일에 자진해서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하기야 이런 자들은 원흉에 속하는 무리였으니 물러나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이날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서울 지방검찰청에 자진 출두, 구속을 당했다. 최인규의 자진 출두에는 말도 많았다.
"거 배짱 한번 좋군! 도망갈 생각을 않고 자진 출두를 하다니?"
"뛰어야 벼룩이지, 제놈이 도망간다면 어디로 도망을 가?"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위인이야. 도망가자면 일본이구 미국이구 도망갈 데가 없겠나."
그런데도 출두했다는 것은 가상할 나중에 최인규는 사형을 당했지만, 그는 사형을 각오하고 자진 출두했던 것일까? 아니면 <몇 해만 콩밥을 먹으면 밝은 세상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안이한 계산으로 자진 출두했던 것일까? 하여간 자진 출두했다는 사실만은 가상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를 했던 사람으로서는 의당 마음가짐이 그래야 옳았다. 이에 비해서 한희석(韓熙錫), 이존화의 행위는 어떠했던가? 이 두 사람은 최인규에 버금가는 원흉이었다. 그런 중죄인인 이 두 사람은 체포당하는 것이 두려워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줄행랑을 쳤었다. 나중에는 체포당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정치를 했다는 작자들의 그 행위가 얼마나
(누굴 국방장관에 기용해야 옳단 말인가?) 과도내각의 조각에 착수한 허정이 가장 골치를 썩은 것은 국방장관 등용 문제였다. 인재는 제제다사(濟濟多士)였다. 그러나 도무지 적임자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허정이 국방장관 기용에 그토록 골치를 썩혔던 이유는, 국방장관에 따라 군부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고 헌신짝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처음 민주당 인사들이 과도정권을 맡아달라고 간청을 할 때, 그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군부였다. 것인가?> 하는 것이 그로서는 숙제였던 것이다. 허정이 군부 사정에 밝았다면 또 모른다. 그는 군부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문외한이었다. 그에게는 친근하게 지내는 장성 하나 없었다. 장성들이란 자기의 출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도가하고나 가까이 하려 했지 별볼일 없는 허정하고 가까이 지내려고 접근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군부 사정에 대해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장성들이 허정한테 접근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는 허정의 소문난 성격에도 원인이 있었다.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위인, 사람을 끌어올려줄 줄 모르는 위인.> 이것이 허정의 소문난 성격이었다. 그러니, 오겠는가. 누구누구였다고 밝히기는 거북한 일이지만 장성들이 어떻게 한 자리를 얻어볼까 하고 허정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한 것은 그가 과도내각을 맡겠다고 한 후부터였다.
이때라도 좀 못 이기는 체하고 그들과 친교라도 맺어두었더라면 이럴 때 자문을 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는 소문난 성격 그대로 행동했다. 물리치기 거북한 사람의 소개장을 들고 오는 사람까지도 그는 일체 수인사(修人事) 정도의 선을 넘지 않도록 애를 썼다. 물론 청탁 따위는 귀조차 빌려주려 하지를 않았다. 자연 접근해 오던 사람들의 수가 뜸해지고 말았다. 허정은 며칠을 두고 고민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듯 허정이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이종찬(李鍾贊) 바로 그 사람이었다. 허정은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왜 진작 이 사람을 생각해 내지를 못했지?) 허정은 서둘러 이종찬의 현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육군대학 총장이라고 했다. (날이 밝거든 지체없이 연락을 취해야겠군.) 허정은 이종찬이란 인불에 대해서 남다른 외경심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6.25로 정부가 피난살이를 일이 있다. 그때 이종찬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일어난 것이 그 무렵이다. 허정은 5.26정치파동이 터지기 직전에 국무총리 서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이종찬은 정치파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한데 이승만은 정치파동이 벌어지자, 이종찬에게 병력을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대는 국가민족의 수호를 사명으로 하고 있는 국가의 간성으로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딱 잘라 거부했다. 대통령은 국군의 통수권자다. 그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못할 일이다. 통수권자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명령불복종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종찬은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군부가 정치 문제에 개입한다는 것은, 국가의 간성인 군대의 순수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취하게 했던 것이다. 육군본부 작전교육군 차장인 대령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논의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때 이종찬이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원용덕을 이용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원용덕은 점차 정치장군(政治將軍)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쨌든 허정은 이때의 이종찬의 처사를 높이 평가하게 것이다.
국방장관 문제가 일단락되자, 내무와 법무를 제외한 여타의 인물에 대해서도 일사천리로 메모해 나갔다. 재무부 장관 윤호병 문교부 장관 이병도 상공부 장관 전택보 보사부 장관 김성진 교통부 장관 석상옥 부흥부 장관 전예용 과도정권이라는 것이 어차피 시한부 정권이니까 각료인선이 잘 됐느니 안됐느니 시비할 것도 못 된다. 그리고 허정이 인물등용에 있어서 애쓴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되 허정쯤 되는 인물도 인사문제에 있어서는 다분히 인사를 통해서 엿볼 수가 있다. 비록 시한부의 과도정권이라 할망정 국민 대중은 그래도 산뜻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등용하겠지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실에 치우친 인사라는 인상을 받게 되자 적잖이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이병도는 허정과 보성전문학교 동기동창이었고,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한 전택보는 보사부 장관으로 발탁한 김성진은 허정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교통부 장관으로 발탁한 석상옥은 허정이 교통부 장관 재임 때의 부하인 교통부 자재국장이었다. 진정 정실을 배제한인 물을 골랐다고 하면 국방부 장관 이종찬 정도였다. 이종찬을 내각에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는 유비 현덕이 삼고초려로 제갈양을 맞아들이듯 해야만 했다. 그 경위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날이 밝자, 허정은 내무부 장관 이호를 시켜 진해에 있는 이종찬을 불러 올리도록 했다. 군령여산(軍令如山)이 몸에 밴 이종찬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부른다는 말에 지체없이 상경했다.
이호의 안내를 받아 내각수반실로 찾아온 이종찬을 대하자 허정은 거두절미하고,
"과도정권의 국방부 장관직을 맡아 주셔야겠소!" 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이종찬이 뭐라고 대꾸했는가.
"저한테는 노모가 한 분 계십니다. 상의를 해봐야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허정은 꼭 그래야 한다면 노모하고 상의한 후에 확답을 해달라고 했다. 이종찬은 노모와 입각 문제를 상의한 모양이었다. 곧 다시 찾아온 이종찬은 이렇게 말했다.
"노모께서 한사코 반대하시니 도저히 입각을 수락할 수가 없습니다. "
장관 감투를 씌워 주겠대도 싫단다. 허정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비록 시한부 장관이라 하더라도 장관 감투 한번 써보고 싶어서 자천타천으로 모여드는 인사로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는데, 장관 감투를 씌워 주겠대도 싫다니 이 사람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건국이후 숱한 인물들이 장관 감투를 쓰고 벗고 정도가 아니었을까? 역대 정권의 누구라 이름을 들기엔 좀 거북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름을 밝히는 것만은 삼가지만 그 인물은 개각이 있을 때마다 <이번에는 대통령께서 꼭 나를 부르게 될거야!>하면서 예복으로 갈아 입고는 종일토록 전화통 앞에 지켜 앉아 연락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장관 감투란 그만큼 매력적인 감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이종찬은 감투 따위는 탐을 내지 않고 있었으니, 이종찬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각설하고.
허정은 이종찬이 입각을 사양하자, 이호를 대통령 권한대행의 특사자격으로
"지금 우리 나라는 가장 어려운 고비에 있습니다.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자면 아드님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아드님의 입각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호는 계속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는 이종찬의 노모를 설득하느라 진땀깨나 흘려야만 했다. 그렇게 한 결과로 해서 간신히 승낙을 얻어냈던 것이다. 조각을 끝내고 나자, 허정은 과도정권의 임무와 결의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극도로 무력해진 경찰의 체계를 바로잡아 엄중 중립을 지키며 질서 회복에 진력토록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불만과 등의 적폐를 일소하고 민심을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의욕으로 전환시키도록 모든 제도를 개혁하겠다.
-내각책임제 개헌은 바람직하지만 국회의 자율적인 결론을 존중하겠다.
-3개월 이내로 새 정부를 수립하겠다.
의욕은 좋았다. 그렇게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루기에는 3개월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버리자, 그의 추종자들의 축 늘어진 어깨란 보기만 해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반해 민주당 인사들은 어떠했던가? <세상이 뒤집혔다. 이제 천하는 민주당 것이다> 하면서 목에 힘을 주며 갑자기 우쭐대기 시작했다. 의기양양했다. 권력이 있을 때는 우쭐거리고 권력이 떨어지면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이 인간의 숨김 없는 속성인 것 같았다. 우쭐해진 민주당은 국회에서 이기붕, 최인규, 이존화(李存華), 장경근(張璟根), 박만원, 신도환(辛道煥), 손도심 등 여덟 명 의원에 대한 사퇴권고 결의안과 부의장 임철호(任哲鎬)와 한희석의 의원직을 사퇴시키는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국회는 아직도 자유당 국회였다. 만일, 수 없다며 마음을 다부지게 먹기라도 하는 날엔 그러한 결의안이 통과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갓끈 떨어진 쪽박 신세가 되어 버린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처해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결의를 해주고 의원총회를 연 자유당 의원들은 <3.15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 였고,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들로서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을 깊이 사과한다>라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사과문을 발표한 다음 <개헌이나 하고 나거든 전원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기로 하자>고 결의했다. 개헌이란 물론 대통령 중심제의 정치 제도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꿈이었다. 대통령제는 독재로 흐를 위험성이 다분히 있으므로 대통령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로 정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었다. 더구나 민주당이 3.15 정.부통령 선거 때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이 틀림없이 개헌 문제를 들고 나오리라 믿고 개헌을 하고 나서 총사퇴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에 접수되어 수리된 1960년 4월 27일이었다. 한데, 각급 기관에서 3.15 부정선거를 둘러싸고 하극상이 벌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날인 28일에는 이기붕 일가 내려앉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망해도 깡그리 망해 버리게 된 판국에 개헌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개헌이란 말이오? 당장 물러나 버리고 말도록 합시다."
충격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자유당 소장의원들 가운데서는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서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만일, 이들 소장의원들의 주장에 동조해서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사퇴서 한 장씩 써서 내던지고 물러나 버리는 날에는 큰일이었다. 시국수습의 길은 막막해지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허정에게 과도정권을 맡겼던 것도 그 방법밖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방법으로 새 술은 새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무정부 상태를 어떻게 메꾸어 나가느냐 하는 것도 문제였고, 무엇보다도 우방 각국의 승인도 새로이 얻어야 하기 때문에 그 복잡한 절차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헌정의 중단 없이 시국을 수습토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허정에게 과도정권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유당 의원들을 달래야 합니다. 자유당 의원들을 달래자면 그들에게 어떤 확고한 보장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래서 부랴부랴 제안하게 된 것이 <보복행위 엄단을 요구하는 대 정부 긴급 건의안>이었다. 이 건의안은 민주당의 되어 제안했었다. 물론 원흉급에 속하는 인물은 이 건의안에서 제외시켜 놓았다. 이 건의안은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을 진정시키는 데 큰 효력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선개헌(先改憲) 후선거(後選擧)>라는 시국수습의 일환으로서 정치 일정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터졌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자유당 소속 위원들은 또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폭을 해버리고 말자구! 우리 당의 총재가 경무대에서 쫓겨나고 있는 판국인데 시국수습이고 나발이고 다 내동댕이치고 자폭해 버리고 말자구!"
"옳아! 우린 민주당 놈들의 거수기 뭐가 어쨌다구 민주당 놈들의 거수기 노릇이나 하고 있어야 하느냔 말야?"
저마다 악을 바락바락 쓰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내쫓긴 것이 아니었다. 당신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경무대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젠 대통령이 아니니까 대통령 관저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허정이 경무대로 달려갔다.
"선생님,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그대로 머물러 계십시오."
허정은 경무대를 떠나려는 이승만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집을 부려 내막을 모르는 자유당 정권들은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쫓겨난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이다.
"동지들, 위리는 그래도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아니오? 우리가 뿌린 씨는 우리가 거둬야만 해요. 그것이 오늘의 우리 자유당 의원들이 해야 할 일이란 말이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사람들을 달래고 어루만지고 한 것은 국회 부의장이었던 이재학(李在鶴)이었다.
"이성을 되찾읍시다. 이성을! 더 이상 역사에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성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이재학이 달래고 쓰다듬고 나서야 흥분에 휩싸여 있던 소장의원들이 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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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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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외교전
아르메니아 문제에 대한 전권과 5만 명의 병력을 받은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영토로 들어간 지점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로마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성채는 모조리 공략하여 파괴하고, 파르티아파 귀족의 영지는 불태우고 약탈하면서, 마치 불도저가 지나가는 것처럼 진격했다. 아르메니아는 온 나라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군을 총지휘하고 있는 티리다테스도, 파르티아 본국에서 동생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고 있는 볼로가세스도, 코르불로의 로마군이 어떤 식으로 진격하고 있는지를 알고, 이번에는 로마도 진지하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코르불로 진영에 사절을 보내 강화를 맺자고 청했다. 코르불로는 파르티아 사절을 정중하게 맞이하여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회신은 파르티아 사절한테 주지 않고 자기 휘하의 백인대장에게 주어, 티리다테스 진영으로 보냈다. 코르불로의 회신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그대응 시시한 전투(페투스를 상대로 한 전투를 가리킴)에서 이겼다고 오만해진 모양인데, 그런 그대의 눈을 뜨게 해주기 위해 말하건대, 내가 진격하기 시작한 뒤 로마군이 올린 전과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대로 가면 우리 로마군은 아르메니아를 초토화할 것이다. 로마는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따라서 그대는 초토화되기 전의 아르메니아를 로마 황제의 선물로 받는 편이 현명하지 않을까. 볼로가세스도 로마와 우호관계를 빨리 회복하고 자국 통치에만 전념하는 편이 현명하다. 늘상 동쪽의 외적에 시달리고 있는 파르티아는 서방의 로마와 대결하는 데 군대를 투입할 여유가 없다. 반대로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제외하면 다른 모든 지역은 모두 평화롭기 때문에 현재보다 더 많은 군사력을 투입할 수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양국이 정면으로 격돌하면 로마가 이길 것은 뻔하고, 그렇게 되면 볼로가세스도 그대로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코르불로의 회신에는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위를 로마 황제의 선물로 받는 편이 현명하다고 적혀 있지만, 왕관을 받는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코르불로의 회신을 받은 티기다테스도, 그 내용을 통고받은 볼로가세스도, 로마가 결국 볼로가세스의 제의를 수락했다고 해석했다. 볼로가세스는 네로에게 보낸 친서에서, 티리다테스가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 왕관을 받을 마음은 있지만, 황해가 금지되어되 있는 제사장의 신분이라 로마에 갈 수가 없으니까 로마군 진영에 있는 황제의 조상 앞에서 왕관을 받겠다고, 구체적인 대관방법을 제시한 걱이 있었다. 로마측이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파르티아측에도 불만은 없다고 생각한 볼로가세스와 티리다테스는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는 것을 수락하고, 강화 교섭을 위해 휴전하겠다는 뜻을 코르불로에게 전해왔다. 그러자 코르불로는 일부러 구체적인 대관 방법을 말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티리다테스를 직접 만나서 결정할 작정이었다. 따라서 티리다테스와의 회담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했다.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와의 회담을 요구하는 사절로 티레리우스 알렉산드로스와 아니우스 비니키아누스라는 두 고관을 보냈다. 티베리우스 알렉산드로스는 유대교를 버리고 로마 시민이 되어, 로마의 군인으로서 제국의 일원이 되기로 작정한 유대인이다. 칼리굴라 황제 시절에 로마인과 유대인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서술할 때 소개한 바로 그 사람이다. 코르불로 휘하에서는 병참 책임자였다. 아니우스 비니키아누스는 코르불로의 사위로, 코르불로 휘하에서는 제5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둘 다 코르불로에게 꼭 필요한 사람인 것은 파르티아측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와의 회담이 끝날 때까지 이들 두 사람을 파르티아군 진영에 볼모로 잡아두라고까지 말했다. 티리다테스는 이것이 코르불로의 성의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믿고, 회담을 수락하는 회신과 함께 회담 날짜와 장소를 정하는 일은 코르불로에게 일임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코르불로가 지정한 회담 날짜는 며칠 뒤, 장소는 페투스가 패배를 맛본 곳이었다. 불과 며칠 뒤를 회담 날짜로 지정한 것은 '쇠는 뜨거울 때 두드리라'는 격언을 실천한 것이고, 페투스의 패전지를 회담 장소로 지정한 것은 그곳을 동방 로마군 총사령관과 파르티아 왕제이자 이제 아르메니아 왕이 될 사람의 회담장으로 만들어 페투스의 로마군이 파르티아에 패배한 기억을 씻어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리하여 코르불로와 티리다테스의 회담이 실현되었다. 둘 다 20기의 기병만 거느리고 회담 장소로 간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중시했는지 디리다테스가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것을 보고 코르불로도 말에서 내렸다. 서로 다가간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포옹했다. 코르불로는 티리다테스가 모험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확실하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칭찬했다. 젊은 티리다테스는 코르불로를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지금까지 8년 동안 단 하루도 코르불로의 이름을 듣지 않은 날이 없었다. 적에게도 존경받는 것은 코르불로의 특기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도 코르불로는 비록 적장이었지만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다. 눈앞에서 자기를 칭찬해주었다. 순진한 파르티아 젊은이는 감격한 나머지, 안해도 좋을 말을 해버렸다. 자기가 직접 로마에 가서 왕관을 받아도 좋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회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를 말해주는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후의 경과로 미루어보아, 코르불로의 외교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며칠 뒤에 대관식의 전반부가 진행되었다. 로마군 진영 한복판에 네로 황제의 조상이 놓였다. 그 앞에 제단이 마련되고, 제각기 다른 차림으로 무장한 로마인과 파르티아인들이 제단 주위를 에워쌌다. 정장을 하고 아르메니아 왕관을 머리에 쓴 티리다테스가 제단 앞으로 나아갔다. 코르불로는 제단 옆에 선다. 티리다테스는 네로의 조상을 향해 절을 하고, 왕관을 벗어서 제단 위에 놓았다. 티리다테스는 로마에서 네로에게 이 왕관을 받아 다시 머리에 쓰게 될 것이다. 대관식의 후반부는 로마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티리다테스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항해가 금지되어 있는데, 어떻게 로마로 갈까. 코르불로는 긴 여행이 되겠지만 육로로 가면 된다고 말했다. 파르티아에서 로마까지는 까마득히 먼 거리이고,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고 있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는 문제는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지만, 육로로 가려고 생각하면 갈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티리다테스가 왕관을 받으러 로마에 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제사장 신분이라서 항해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동생의 로마행을 막았던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는 이로써 코르불로에게 완전히 한 방 먹게 되었다. 육로로 가면 제사장의 계율을 어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로마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티리다테스는 코르불로의 말에 설득되었고, 이것을 기정 사실로 들이대자 볼로가세스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왕관을 맡기는 의식이 끝난 뒤 잔치가 열렸다. 주빈인 티리다테스는 로마군 진영인데도 완전히 마음을 터놓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코르불로에게 젊은이다운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질문을 퍼부었다. 로마군 진영에서는 야간에 세 시간씩 네 교대로 보초를 서는데, 그것을 시작할 때마다 백인대장이 일부러 보고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식탁에서 일어날 때도 뿔피리 신호를 듣고 일제히 일어나는데,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령관 막사 앞에는 밤새 횃불이 커져 있는데, 그것은 무엇때문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코르불로는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아르메니아의 젊은 왕은 로마군의 엄격한 규율에 감탄해버렸다. 로마에 대한 호기심도 점점 높아졌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당시 오리엔트에서 가장 널리 통용된 그리스어로 이루어졌을게 분명하다.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떠나기 전에 파르티아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싶다고 말했다. 코르불로는 당연한 일이라고 승낙했다. 티리다테스는 성의의 표시라면서 어린 딸을 볼모로 맡기고 파르티아로 떠났다.
귀국한 티리다테스를 만나 모든 사정을 안 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에게는 로마로 가는 동생이 새로운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는 코르볼로에게 편지를 보내 몇 가지 사항을 약속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요구는 네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로마로 가는 동안은 물론 로마에 도착한 뒤에도 티리다테스가 로마 황제의 신하로 보일 수 있는 대우는 절대 하지 않는다. (2) 티리다테스가 여행길에 만나는 속주 총독들이 티리다테스를 마중하고 포옹하는 것을 금지하지 말아달라. 이것은 동생에게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고관과 대등한 대우를 해달라는 의미였다. (3) 수도 로마에 머무는 동안 티리다테스를 집정관과 동등하게 대우해달라. 집정관이 가는 곳에는 늘 12명의 릭토르가 '선도자' 역할을 맏는 것이 로마의 전통인데, 이것이 상징하는 경의를 티리다테스한테도 표해달라는 뜻이다. (4) 티리다테스에게는 네로 황제를 만나는 자리에 칼을 휴대할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달라. 무장을 해제당한 모습으로 황제를 만나는 것은 황제의 신하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얼핏 보면 동생을 염려하는 형의 애틋한 심정이 전해져오는 것 같아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칼을 들이대고 싸운 적의 본거지로 들어가는 동생이 걱정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파르티아 왕의 걱정은 동생의 신변 안전보다는 체면 유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처 소생인 파르티아 왕자가 로마인에게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다면, 첩의 자식이면서 파르티아 거세질 터였다. 볼로가세스는 그게 걱정이었다. 코르불로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평화 회복은 코르불로가 스스로 주도한 일이다. 그로서는 이 일을 반드시 성사시켜야 했다. 코르불로는 볼로가세스에게 편지를 보내 네 가지 조건을 엄수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티리다테스 일행이 로마까지 가는 길에 만나게 될 속주의 총독과 장관들에게 그 뜻을 적은 명령서를 보냈다. 로마 제국 동방의 최고지휘관을 부여받은 코르불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문제 해결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도 기정 사실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지만, 로마 황제 네로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코르불로에게 '한방 먹은' 것이다. 네로가 코르불로의 보고를 받은 것은 서기 63년 말부터 64년 봄 사이였을 것이다. 파르티아군을 이겼다는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평화조약 체결했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아무리 백지 위임장을 주었다 해도, 코르불로가 한 일은 황제와 내각의 방침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황제에게는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 또한 로마 제국의 법적 주권자인 원로원과 시민은 로마의 사령관이 적과 맺은 협정을 승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어느 경우든 이 권리가 행사되면 코르불로의 외교 성과는 수포로 돌아가버린다. 하지만 네로도 원로원도 시민도 거부하기는커녕 기꺼이 승인했다. 네로는 티리다테스 일행의 여비를 로마측이 부담하겠다는 뜻을 코르불로를 통해 파르티아측에 전하기까지 했다. 로마가 이런 뜻밖의 반응을 보인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오랜 숙적이었던 파르티아 왕가가 일부러 로마까지 와서 황제에게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는 것을 승낙했다. 이것이야말로 로마가 파르티아보다 우위에 있다는 증거였다. 일반 시민들도, 원로원 의원들도, 황제도 그것으로 만족했다. 로마인 대다수는 무릎을 끓은 파르티아 왕제에게 로마 황제가 왕관을 씌워주는 광경을 상상하기만 해도, 오랫동안 로마가 걱정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파르티아인에게 빼앗기는 것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달리, 보고 싶지 않은 현실도 직시할 수 있는 소수의 로마인이 납득한 이유였다. 코르불로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페르시아 문명권에 속하는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를 계속 떼어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가 파르티아 쪽에 완전히 붙어버리면 제국 동방의 방위전략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니까, 로마는 아르메니아를 자기쪽에 붙잡아둘 필요가 있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의 진의가 로마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동생한테 한자리 마련해주는 데 있다는 것은 코르불로의 보고를 통해 황제와 원로원도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아르메니아 왕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파르티아 왕제라도, 로마와 동맹관계를 유지한다면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하자고 그들은 생각했다. 네로도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네로가 허영심은 강하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현실적인 선택도 할 줄 아는 남자였다.
티리다테스는 파르티아로 돌아가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다음, 오리엔트 군주답게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아내와 자식까지 대동하여 여로에 올랐다. 도중에 속주에서는 총독을 비롯한 고관과 유력자들이 총출동하여 극진히 환대했기 때문에, 티리다테스가 로마에 도착하는 데에는 무려 9개월이나 걸렸다. 군단이 육로로 이동할 경우, 로마에서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까지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 이틀 동안의 항해를 포함하여 125일이 걸린다. 파르티아에서 안티오키아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도, 군단은 150일이면 이동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두 배가 걸렸으니 정말 느긋한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로마 기병대와 파르티아 기병대가 공동으로 티리다테스 일행을 호위했다. 이들 일행이 쓴 여비는 하루에 80만 세스테르티우스였으니까, 9개월 동안의 여비는 로마 국고에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평화를 위한 비용으로 간주되어, 어디에서도 불평이 나오지 않았다. 9개월이나 되는 긴 여행을 마치고 일행이 무사히 이탈리아에 상륙한 것은 서기 65년으로 해가 바뀐 뒤였다. 로마군 진영에서 네로의 조상 앞에 아르메니아 왕관을 바치는 대관식 전반부를 거행한 뒤 1년 남짓한 세월이 흘렀다.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말한 것은 티리다테스 일행이 아드리아 해를 뱃길로 건너온 게 거의 확실하기 때문이다. 네로가 일행을 마중하기 위해 나폴리로 간 것을 보면, 티리다테스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는데 필요한 이틀만은 제사장에게 금지되어 있는 항해를 택한 모양이다. 계속 육로를 고집했다면 북이탈리아로 들어와야 한다. 파르티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해로로는 이틀도 안 걸리는 거리니까, 제사장의 제율에 잠시 눈을 감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폴리까지 마중을 나간 네로는, 거기서 로마까지 이어진 아피아 가도를 따라 파르티아 왕제와 함께 여행한다. 속국의 왕이 아니라 제국 빈객을 맞는 대우였다. 동년배이기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당장 죽이 맞는 사이가 되었다.
대관식은 포로 로마노에서 거행되었다. 중앙 연단 위에 보랏빛 옷차림의 네로가 왕관을 들고 서 있고, 그 앞에 황금빛 예복 차림의 티리다테스가 무릎을 끓는다. 네로는 아르메니아 왕관을 티리다테스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연단 위쪽에는 하얀 토가 차림의 원로원 의원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에는 가지각색의 오리엔트식 정장을 차려입은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고관들이 늘어서 있다. 포로 로마노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환성을 지른다. 아르메니아 왕이 된 파르티아 왕제에게는 '로마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호칭이 주어졌다. 대관식이 화기애애하게 끝난 뒤, 폼페이우스 극장에 딸린 넓은 회랑으로 자리를 옮겨 축하연이 벌어졌다. 잔치는 호화로웠지만 역시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다. 기분이 좋아진 네로는 아르메니아 왕이 된 티리다테스에게 호화로운 선물을 주었을 뿐 아니라, 7년 전에 코르불로가 공략하여 불태운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재건하는 일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건축기사와 유능한 직공을 파견하여 도와주겠다는 것이므로, 말하자면 기술 원조다. 이 약속은 실행되었다. 이를 고맙게 여긴 티리다테스는 재건되 아르탁사타를 네로니아(네로의 도시)로 개명했다. 모든 일을 끝낸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와 그 일행은 귀로에 올랐다. 돌아갈 때도 육로를 택했다. 하지만 또다시 긴 여행을 한 뒤 티리다테스가 도착한 곳은 파르티아가 아닌 아르메니아였다. 그리고 필요가 없어진 동방 로마군 최고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된 코르불로는 네로의 명령으로 다시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돌아가 있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로마와 파르티아의 관계가 계속 유지되도록 감시하는 것이 코르불로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 승진은 아니었지만, 코르불로는 만족하여 그 임무에 전념했다. 이 임무의 중요성은 양국 관계 개선에 노력한 코르불로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분을 버리고 실리를 취한 것은 파르티아측이었다. 그렇다면 로마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만 취했을까.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아르메니아 왕국은 다른 동맹국들과 비교하면 특별 대우를 누리고 있었다. 동맹국은 독립국이니까, 로마에 속주세를 낼 의무는 없다. 하지만 로마가 군사행동에 나설 때는 병력을 지원할 의무가 있고, 요즘 말로 하면 '후방지원'을 제공할 의무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맹국이다. 하지만 유독 아르메니아에는 참전 의무도 후방지원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다. 오리엔트에서는 대국 파르티아에 버금가는 강국이었기 때문이지만, 특별 대우인 것은 분명하다. 로마느 왕위에 앉을 사람을 직접 고르거나 승인하는 방식으로 아르메니아를 통제해왔지만, 이런 아우구스투스 방식과 네로 방식의 차이는 아르메니아 왕위에 파르티아인이 앉았다는 것뿐이다. 물론 이 파르티아인이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일이고, 로마는 감시를 게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리아에 4개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도박이다. 하지만 외교는 어차피 일종의 도박이다. 그리고 로마는 이 도박에서 이겼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는 파르티아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로마측도 티리다테스를 존중하여, 그의 처지를 위태롭게 할 만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파르티아인이 통치하는 아르메니아 왕국이 태평하면 파르티아 왕은 만족이니까, 파르티아와의 관계도 좋아진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대에 들어설 때까지 반세기 동안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다. 50년 동안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갖는지는 오늘날에도 많은 나라 사람들이 증언해줄 게 분명하다. 네로가 티리다테스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준 날부터 3년 뒤, 네로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자살한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는 로마 원로원에 이런 서한을 보내왔다. 당신들이 네로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당신들 문제지만,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는 네로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해마다 거행해온 '네로 감사제'를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 파르티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로마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원로원도 파르티아 왕의 요구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전쟁은 무기를 사용한 외교이고, 외교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전쟁이다. 코르불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무인이었다. 하지만 코르불로의 이런 생각을 네로가 좀더 일찍 받아들여 실행했다면, 파르티아-아르메니아 문제를 해결하는 데 12년이나 소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코르불로는 시리아 총독에 부임한 지 몇 년 뒤,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에 즉위하는 것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겨하자고 진언했기 때문이다. 유능한 지도자란 인명과 노력과 시간을 절약하는 데 능한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수 데뷔
티리다테스가 육로를 따라 천천히 로마로 향한 것은 서기 64년의 일이다. 아직 로마에서의 대관식은 거행되지 않았지만,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네로에 대한 원로원과 시민들의 지지는 이 공적으로 더욱 높아져 있었다. 지지율이 올라가면 더 많은 자제력이 필요해지는 법이지만, 네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동안 하고 싶은데도 자중해온 일을 지지율이 높아진 틈을 타서 실행에 옮기는 게 네로의 버릇이었다. 이때도 그 버릇이 나왔다. 네로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다. '키타라'라는 일종의 리라를 연주하면서 자작시를 노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스 문화의 정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걸 혼자 즐기면 좋을 텐데, 재딴은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니까 남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어진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시를 노래하는 것이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는 문화적 이유는 남들에게 들려주는 데 좋은 핑계가 되었다. 이제까지는 황궁 안에서 궁정인이나 측근들만 모아놓고 자작시를 낭송했다. 그리스 문화는 유약하다고 싫어하는 일반 시민들의 반응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가 된 지도 벌써 10년째다. 나이도 27세. 게다가 높은 지지율도 네로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지금까지도 인사치레로 박수를 치는 궁정인이 아닌 대중에게 자신의 재능을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제 그것을 실행에 옮길 결심이 선 것이다. 하지만 역시 '로마혼'의 발상지인 수도 로마에서는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데뷔 장소를 나폴리의 야외극장으로 결정했다. 나폴리는 네아폴리스라는 그리스어 이름이 보여주듯 원래는 그리스인이 이주하여 세운 도시였고, 로마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그리스색이 짙게 남아 있었다. 타키투스도 그리스 본토 도시 같다고 말했다. 이 나폴리의 주민이라면 그가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고 믿는 리라를 타면서 자작시를 낭송하는 것도 이해하고 인정해주리라고 네로는 믿었다. 극장은 입추의 여지도 없을 만큼 관중으로 가득 메워졌다.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맛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노래하는 황제'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황제로서가 아니라 예술가로 데뷔하고 싶었기 때문에, 황제의 보랏빛 옷도 입지 않고 황금 월계관도 쓰지 않고, 프로 가수보다 더 수수한 투니카 차림이었다. 관중은 여기서 다소 실망했지만, 무대 위에서 열심히 리라를 타면서 노래하는 것은 틀림없는 네로 황제였다. 관중은 무척 즐거워하며 성대한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이 성공적인 데뷔로 자신감을 얻은 네로는, 다음에는 로마혼의 아성인 로마에서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 다음에는 드디어 본바닥인 그리스로 진출하여 그리스인들 앞에서 재능을 펼쳐 보이자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 직후, 이런 꿈을 일단 접어둘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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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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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가 - 머리맡에두고자(슬리핑 바이 히즈 필로우) - 블랙푸트 족
"알 수 없어라, 남자들이란 것은..."
나는 본래 검은발(블랙푸트) 족 인디언 전사의 아내였다. 나는 현재 그와 헤어져 이곳 네즈 페르세 족의 인디언 천막으로 와서 살고 있다. 나는 남편을 잘 섬긴 여자였다. 그 사람만큼 자기 아내로부터 섬김을 받은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그 사람의 인디언 천막만큼 깨끗하고 잘 정돈된 천막이 또 있을까? 이른 새벽이면 나는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불 피울 나뭇가지를 주워 모으고, 집안에는 항상 물이 떨어지지 않게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외출하면 들판 멀리까지 나가 그가 귀가하기를 기다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음식을 대령했다. 그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에도 나는 신경을 썼다. 또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을 미리 알아, 굳이 그가 말하는 수고를 덜도록 했다. 그의 심부름으로 다른 인디언 부족을 만나러 가면 그 부족의 추장과 전사들이 나에게 유혹의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어떤 용기 있는 자는 은밀히 들꽃과 부드러운 말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내 발은 한 번도 길 아닌 길로 들어선 적이 없으며, 내 눈에는 그 사람 이외의 다른 남자가 어른거린 적이 없다. 그가 사냥을 떠나거나 전투에 나설라치면 나말고 누가 그 모든 채비를 맡았겠는가? 그가 돌아올 때면 나는 문간에 기다리고 서 있다가 총을 받아들었다. 그는 뒷마무리를 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쉴 수가 있었다. 그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 나는 말을 마구간으로 데려가 묶어 놓고 장비를 내린 다음 곧바로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모카신이 젖었으면 벗기고 다른 따뜻한 신발을 신겼으며, 늘 새 옷을 대령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사슴과 영양과 들소를 사냥했으며, 적이 오나를 관찰했다. 그밖의 일은 모두가 내가 도맡아서 했다. 우리 부족이 다른 캠프로 대이동할 때도 천막을 거두고 말들을 관리하는 것은 나의 임무였다. 그 사람은 그냥 자기 말 위에 올라타고 앞서서 떠날 뿐이었다. 그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처럼 자유로웠다. 그는 집안일에 대해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대이동 중에 저녁이 되어 휴식을 취할 때면 그는 다른 어른들과 담배를 피울 뿐, 천막을 세우는 것은 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늦지 않게 식사를 대령하고 잠자리를 정리했다. 그가 잠들면 나는 늘 그의 머리맡에서 새우잠을 잤다.
나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남편을 섬겼다. 그런데 알 수 없어라, 남자들이란 것은. 그렇게 해서 나한테 돌아온 보상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언제나 눈썹에 비구름을 달고 살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날카로운 번갯불뿐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개였지,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내 몸의 흉터는 누가 만들었는가? 바로 그 사람이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을 떠난 것이다. 어느 날 새벽 나는 첫번째 지빠귀 울음소리와 함께 블랙푸트 족의 캠프를 떠나 여기에 있는 다른 부족에게로 도망쳐 왔으며, 그 이후 자유롭게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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