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3호 - 2024.06.29 토요일(음력 : 05.24)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권리는 그것을 지킬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 로저 볼드윈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구설’과 ‘구설수’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 등으로 신년 운세를 점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운세를 풀이한 글에는 ‘구설수, 손재수, 요행수’같이 ‘수’로 끝나는 낱말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때 ‘수(數)’는 ‘운수’라는 뜻이다. ‘구설수’는 남에게 헐뜯는 말을 들을 운수, ‘손재수’는 재물을 잃을 운수, ‘요행수’는 뜻밖에 얻게 되는 좋은 운수를 뜻한다. 따라서 ‘이달에는 구설수가 있으니 행동을 조심하라’처럼 이 말들은 ‘있다, 없다, 들다’ 같은 말과 잘 어울려 쓰인다.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서 공연히 흉보는 말을 듣게 될 때 ‘구설수에 올랐다’거나 ‘구설수를 들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때는 ‘시비하거나 비방하는 말’을 뜻하는 ‘구설’을 사용해서 ‘구설에 올랐다’ ‘구설을 들었다’라고 해야 한다. 지난 연말 방송 시상식에서 무례한 행동으로 화제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매체가 ‘구설수에 올랐다’는 표현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역시 ‘구설에 올랐다’로 해야 맞다.
바꾸어 쓸 수 있는 말로는 ‘입방아에 오르내리다’ ‘입길에 오르다’ ‘말밥에 오르다’ 등이 있다. 이 중 ‘입방아’의 대상은 꼭 나쁜 일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좋고 나쁨을 떠나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뒷얘기를 하는 경우에 두루 쓰인다. ‘입길’은 ‘남의 흉을 보는 입놀림’, ‘말밥’은 ‘좋지 못한 화제의 대상’을 뜻하는 말이므로, ‘구설에 오르다’처럼 나쁜 일로 남의 말거리가 될 때 쓴다.
한자 사용을 꺼리는 북한에서는 ‘구설’ 대신 ‘말밥에 오르다’를 주로 쓴다. 이 때문에 한동안은 ‘말밥’이 북한어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남쪽의 문헌에서도 여러 쓰임이 발견되므로 북한어라고 하기는 어렵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 의원입니다
얼마 전 어떤 시민행사에 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이 “안녕하십니까? ○○○ 의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 사례처럼 자신의 이름 뒤에 직함을 붙여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상대방에게 자신을 소개할 경우에는 직함을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이 올바른 화법이다. 그래서 사병이 장교 앞에서 자신의 관등성명을 댈 때 ‘일병 ○○○’라고 하지 ‘○○○ 일병’이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관등이나 직함을 먼저 대고 이름을 말하는 것에는 자신을 높이는 뜻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는 점에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담겨 있다. 그래서 기업체 사장이 고객들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주식회사 사장 ○○○ 드림’과 같이 직함을 이름 앞에 쓰는 것이다.
직함을 이름 뒤에 붙이면 그 사람을 대우해 주는 뜻이 있다. 장교가 부하 사병을 ‘김 일병’과 같이 계급을 뒤에 붙여 부르는 것이나, 회사 사장이 부하 직원을 ‘김 부장(님), 이 과장(님)’처럼 부르는 것은 상대방을 대우해 주는 말하기이다. ‘김 군, 이 양, 최 여사, 박 선생, 정 반장’ 등도 모두 상대방에게 적절한 존중의 뜻을 표한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가리켜 말할 때는 이름 뒤에 직함을 붙일 수 없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것이므로 언어 예절에 맞지 않다. 자칫 이러한 말 한마디에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낄 수도 있으므로 자기를 소개할 때는 ‘의원 ○○○입니다, 사장 ○○○입니다’와 같이 직함을 앞에 두어 겸손하게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스스로 낮추어 말함으로써 오히려 인격은 높일 수 있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우라늄 235’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북한이 실험했다는 수소폭탄 관련 뉴스에 등장하는 ‘우라늄 235’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235’를 문자처럼 [이:삼오]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숫자처럼 [이:백삼십오]로 읽어야 할지 혼동이 된다. 언중들이 ‘보잉 747’ 기종을 ‘보잉 칠백사십칠’이 아닌 ‘보잉 칠사칠’이라고 읽는 것은 ‘747’에 숫자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번호로서 기호처럼 사용하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우라늄 235’의 ‘235’도 기호처럼 [이:삼오]로 읽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라늄 235’는 92개의 양성자와 143개의 중성자로 구성되어 있는 방사성 동위 원소이기 때문에 ‘235’는 ‘92’와 ‘143’의 합인 숫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우라늄 235’의 ‘235’는 [이:삼오]가 아닌 [이:백삼십오]로 읽어야 한다.
이외에도 숫자를 한자어로 읽어야 할지, 고유어로 읽어야 할지 혼동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1학년 2반 3번’ ‘3동 204호’처럼 순서나 차례, 번호를 나타낼 때나 ‘6세’ ‘6개국’‘10여 개’처럼 한자어 단위가 붙을 때에는 [일학년 이:반 삼번] [삼동 이:백사호] [육세] [육개국] [십여개]처럼 한자어로 읽는다. 반면에 ‘6개’ ‘12명’ ‘8쪽’ ‘7번째’ ‘3번’처럼 개수나 횟수를 나타낼 때나 ‘6살’ ‘10곳’처럼 고유어 단위가 붙을 때에는 [여섯개] [열두명] [여덟쪽] [일곱번째] [세:번] [여섯살] [열곳]처럼 고유어로 읽는다. 이 때 ‘8쪽’과 ‘3번’이 개수나 횟수가 아닌 번호를 나타낼 때에는 [팔쪽] [삼번]처럼 한자어로 읽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꽃은 훈장 - 천상병
꽃은 훈장이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내리신 훈장이다
산야에 피어 있는 꽃의 아름다움.
사람은 때로 꽃을 따서 가슴에 단다
훈장이니까 할 수 없는 일이다
얼마나 의젓한 일인가.
인류에게 이런 은상을 내린 하나님은
두고 두고 축복되어 마땅한 일이다
전진을 거듭하는 인류의 슬기여.
∼∼∼∼∼∼∼∼∼∼∼∼∼∼∼∼∼∼∼∼∼∼∼∼∼∼∼∼∼∼∼∼∼∼∼∼
심우장( 尋牛莊) 1 - 한용운
잃은 소 없건마는
찿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시 분명타 하면
찿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찿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엽서에 쓴 글 - 정지용
나비가 한 마리 날러 들어온 양 하고
이 종이ㅅ장에 불빛을 돌려대 보시압.
제대로 한동안 파다거리 오리다.
-대수롭지도 않은 산목숨과도 같이.
그러나 당신의 열적은 오라범 하나가
먼데 가까운데 가운데 불을 헤이며 에이며
찬비에 함추름 취적시고 왔오.
-스럽지도 않은 이야기와도 같이.
누나, 검은 이밤이 다 회도록
참한 뮤-쓰처럼 쥬무시압.
해발 이천 피이트 산봉우리 우에서
이제 바람이 나려 옵니다.
~~~~~~~~~~~~~~~~~~~~~~~~~~~~~~~~~~~~~~~~~~~~~~~~~~~`
웃음 - 김수영
웃음은 자기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
푸른 목
귀여운 눈동자
진정 나는 기회주의적 판단을 잊고 시들어갑니다.
마차를 타고가는 사람이 좋지 않어요
웃고 있어요
그것은 그림
토막방 안에서 나는 우주를 잡을 듯이 날뛰고 있지요
고운 신이 이 자리에 있다면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겠나요
아마 잘있으라고 손을 휘두르고 가지요
문턱에서.
이보다 더 추운 날처럼 나는 여기서 겨울을 맞이하다가
오랜 시간이 경과된 후에도
이 웃음만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시간에 달린 기이다란 시간을 보시오
내가 어리다고 한탄하지 마시오
나는 내 가슴에
또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1948>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퇴고(推敲)
推:밀 퇴/옮을 추. 敲:두드릴 고
[출전]《唐詩紀事》〈卷四十 題李凝幽居〉
민다, 두드린다는 뜻으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자는 낭선(浪仙),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이응의 유
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草徑入荒園(추경입황원)]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그런데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가도는 ‘민다’‘두드린다’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다.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주] 가도 : 당나라의 시인. 하북성 범양(河北省范陽) 사람. 자는 낭선(浪仙).
일찍이 불문(佛門)에 들어감. 법명(法名)은 무본(無本). 한유(韓愈)와의 사귐을 계기로 환속(還俗)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함.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46
청년기에 우리는 사교에 대한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이 시기에는 동등한 사람들과의 접촉과 갈등을 통해 보다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다. 타인을 통해 도움을 주거나 위로를 받기도 하며 다툼을 통해 고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교가 지혜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사교는 우리에게 공허를 주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올바른 지혜일 수는 없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하는 진리도 진리가 아닐 때가 있음을 기억하라. 사교와 지혜 사이의 좁은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47
산책을 하지 않고 오직 집에서만 지내다 보면 육체적인 저항력이 낮아지면서 잔병이 쉽게 찾아온다. 마찬가지로 지나친 고독은 정신을 예민하게 만든다. 일상적인 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소한 언행이나 행동을 불쾌하거나 모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면 고독한 생활에 익숙한 사람은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유기체이다. 고독과 타인과의 만남을 동시에 만족시킨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이성이라는 판단의 기둥이 있음을 잊지 마라. 고독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생활의 긴장과 균형을 잃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 중용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48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직접적인 요소가 아니지만 간접적인 요소는 될 수 있다.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일종의 추천서와 같다.
49
예절은 우리 모두에게 이득을 준다. 예절을 지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며 예절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자신의 적을 만든다면 기름을 들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과 같다. 예절은 위조지폐와 비슷하다. 위조지폐를 아낀다는 것은 미련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위조지폐를 아끼는 것처럼 예절을 절제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50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때때로 많은 어려움과 마주친다. 그 어려운 순간을 혼자 견디기 힘들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어려운 사정을 알아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의 사정은 돌보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만 이끌려 마구 떠들고 있다.
|
|
독서실 → 한국소설
|
|
|
격동 30년 - 이영신
제2권
1. 인생만사 새옹지마
4월 26일에 이승만이 제출한 대통령직 사임서는 국회에서 그 즉시 수리되었다. (대통령이 사임을 했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도 없어지고 말았군.) 허정은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에서 수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택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허정은 이승만에 의해서 수석 국무위원인 외무장관에 취임했던 사람이다. 임명권자가 물러났으니 임명권자와 진퇴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 허정의 생각이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정치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응당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처신이었다. 허정이란 사람은 그렇듯 분명한 사람이었다.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를 수리하고 난 국회는 <3.15 정.부통령 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며, 과도정부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 개헌안 통과와 함께 즉시 총선거를 실시해서 과도기를 마무리짓도록 한다> 등의 정치 일정을 말았다는 소식에 접했던 것이었다. 국회가 당황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허정이 물러나 버리고 나면 정치 일정이고 뭐고 있을 수가 없다.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괘씸한 놈들, 잘코사니다. 잘코사니야!"
자유당 강경파 가운데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 자도 없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쨌든 국회에서는 서둘러 대표 몇 사람을 뽑아 신교동 허정의 집으로 보냈다. 허정을 달래기 위해 평소 그와 친분을 두텁게 하고 있는 사람을 사절로 선정할 정도로 국회는 신경을 썼다.
"우양! 국회에서는 말이오, 수석 국무위원인 우양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서 시국을 수습하기로 결의를 했소. 그런데 어서 나가서 내각을 완료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아니,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나는 이 박사에 의해서 수석 국무위원이 됐던 사람이오. 그런 내가 이 박사가 물러난 이 마당에 무슨 염치로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는단 말이오? 인간적으로나 또 정치도의상으로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그 무슨 말씀을! 지금 인간이 어떻다 정치도의가 어떻다 하고 있을 때요? 무엇보다도 먼저 난국에 처한 시국을 수습해 놓고 볼 일이 아니오?"
국회 대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허정을 억지로 끌고 국회로 향했다. 국회 부의장인 이재학(李在鶴)의 방에는 여.야의 중진들이 직전까지만 해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싸우던 그들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이승만이 물러나고 나자 사이좋게 무릎을 맞대고 시국수습을 논의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한테 차이가 있다면 얼굴에 나타내고 있는 표정 정도였다. 여당인 자유당 중진들의 모습에는 수심이 가득한 반면, 야당인 민주당 중진들의 표정은 지극히 명랑하기만 했다. 인간의 속성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에 허정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재학이 일동을 대표해서 국회의 결의 사항을 알려주고 속히 과도정권을 출범시키기 위한 조각을 서둘도록 하라고 재촉했다.
"아니, 난 그럴 수 없어요."
거절했다. 아까 자택에서 국회 대표에게 내세웠던 거절의 이유를 되풀이 설명했다. 부의장실 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여당 중진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민주당 중진들의 표정은 적잖이 굳어졌다. 그들은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우양! 우양의 그 심정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우양마저 물러나고 나면 행정부는 완전히 공백 상태에 빠지고 말 게 아니겠소? 그렇게 되면 시국수습은 점점 어려워지고 맙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리도록 해보시오."
이렇게 간곡하게 권고하는 이는 민주당의 중진인 곽상훈(郭尙勳)이었다. (공백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렵거든 어째서 시국을 수습하고 나서 이 박사를 물러나게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오? 일은 당신들이 벌여 놓고 나더러는 그 뒷치닥거리나 하고 있으라 그거요?) 허정은 마음껏 호통을 쳐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억지로 속마음을 억눌렀다. 그는 여러 중진들의 간곡한 권고를 완강히 고사하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국회에서는 대표 몇 사람을 또 허정의 집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그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을 골라서 보냈다.
"우양, 고집을 꺾으십시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인간적이다, 도의적이다 하고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나라를 먼저 생각하셔야죠. 고집 하나 아니오?"
그들은 지성으로 허정의 과도정권 출범을 요청했다.
"알겠소. 재고해 보도록 하지요."
허정은 마침내 재고해 보겠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 국회 대표가 돌아가고 난 다음, 허정은 밤 늦게까지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경로로 내가 수석 국무위원에 취임했든, 내가 현재 그 수석 자리에 있다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어느 친구의 말처럼 과도정부를 맡는 것은 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국회 대표가 그를 찾아왔을 때, 어느 국회의원인가 이렇게 말했었다. 운명이오. 인간이란 닥친 운명을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이승만 박사가 국부(國父)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축출당한 것도 운명이었고 우양이 이 혼란한 시국을 떠맡게 된 것도 운명이란말이오. 아예 운명을 거역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렇다. 대통령이 돼 보지 못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을 떠맡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허정은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군부(軍部)의 협력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과도정권의 성패는 가늠된다.) 과도정권의 앞날에 대해서 허정은 이렇게 점쳐 놓고 있었다. 놈 투성이였다. 어느 놈이고 털어 먼지 안 나는 놈 없었고 벗겨서 구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 썩은 놈 천지 속에서 유독 군계일학(群鷄一鶴)격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고한 자세를 지니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면 그들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무슨 놈의 과도내각을 썩은 무리로 구성을 했어? 우린 과도내각을 절대로 지지하지 못하겠어?> 학생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장관보다도 국방장관 기용에 더 신경이 쓰여졌다. (누굴 국방장관에 앉힌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적당한 인물이 국가에서는 국방장관을 문관으로서 기용하고 있지만, 이 시점에서는 문관의 등용을 고집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군부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기용해야만 군부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면 군 출신자를 국방장관으로 기용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누굴 국방장관에 기용한다?) 허정은 도시 군부와 인연이 멀었다. 아니 전혀 인연이 없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허정은 국방장관감만 생각하면 이마가 찌푸려졌다. (국방장관에 기용할 만한 인물이 이토록이나 없단 말인가.) 지금까지 귀에 담아온 군의 고급장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으나 도무지 시큰둥한 느낌만 드는 인물들뿐이었다. 그때 문득, 송요찬이 머리에 떠올랐다. (송요찬이라......?) 그는 지금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허정이 경무대에 들어갔을 때 데모대 대표하는 젊은이들을 이승만한테 데리고 들어온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인상으로는 꽤 듬직해 보였다. 몸집이 크고 우람해서 장군다운 위풍이 당당했다. 허정은 당당한 장군다운 위풍에 적잖이 마음이 끌렸었다. 이러한 송요찬을 기용하리라 마음에 점찍었다. 그 밖의 여타의 장관 인선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과도내각을 맡으리라 결심을 굳히는 그 순간에 벌써 머리 속에서 각부 장관감들의 인물 윤곽을 어지간히 잡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 지도급 인사들이 허정의 과도내각 조각을 이의 없이 받아주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민주주의 지도층의 협력도 당부하고 그들의 속셈을 떠볼 겸해서 안국동으로 해위(海葦) 윤보선을 방문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삼연 곽상훈이 신교동 집으로 방문했다. 그날이 바로 27일 오후 5시였다. 두 진지하게 의논을 나누었다. 그런데 곽상훈은 <과도내각은 우양의 내각이니까 알아서 마음대로 해라>는 투였으나 국방장관에 송요찬을 기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극구 반대하는 것이었다. 허정은 그 반대의 이유가 무엇인지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
"좀 구체적으로 반대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겠나. 송 장군이 어째서 안 된다는 건지?"
"세론(世論)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야."
"세론이 어떤데?"
"송 장군의 별명이 석두(石頭)라는 것도 듣지 못했어?"
"석두라니? 돌대가리라 그 뜻인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석두라는 별명이 붙은 걸 보면 어지간히 뱃심도 좋구 고집깨나 있겠군."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구."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면?"
"하여간 꼬치꼬치 물을 것 없어. 송요찬 기용은 반대야!"
허정은 송요찬을 국방장관에 기용했다가는 민주당 지도층과 꽤 심하게 대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허정은 다시 해위 윤보선을 만나 조각 인선문제를 협의했다.
"앞으로 천하는 민주당 것이 뻔한즉, 민주당 정권의 기틀을 잡는다는 뜻에서라도 과도내각 조각에 협조해 주게나."
"과도내각이야 자네가 이끌어 나갈 협조가 필요하겠나?"
윤보선도 곽상훈과 꼭 같은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내 의지대로 조각을 하리라.) 허정은 그 순간에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누구누구를 부서에 기용할까 하는데 괜찮겠는지를 물었다.
"뭐, 괜찮겠지. 알아서 하게나."
<어차피 과도내각이야 시한부 내각인데 어떤 부서에 누굴 기용한들 대수냐> 하는 투였다. 허정은 그러한 윤보선이 적잖이 섭섭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방장관직이 사람 택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여기까지 운을 떼고 난 허정은 힐끔 윤보선의 눈치를 살피고 말을 이었다.
"송요찬 장군을 국방에 기용할까 하는데
"뭐 송요찬?"
윤보선의 반응은 의외로 컸다.
"응, 그 사람이 괜찮을 것 같아. 여러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자네 미쳤나?"
"내가?"
"송요찬 씨를 국방에 기용하겠다니 말일세."
"그럼 반대란 말인가?"
"반대일세."
"이유가 뭔가?"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어."
윤보선도 곽상훈과 마찬가지로 펄쩍 뛰기만 할 뿐, 어째서 반대하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를 않았다. (원, 고얀 사람 같으니! 안 된다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허정도 그 이상깊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 반면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민주당 친구들하고 더 이상 조각문제를 의논할 필요는 없겠어. 만사는 내가 알아서 하면 그만이야.) 하긴 그렇다. 시한부 정권이든 뭐든 우선 소신껏 일하면 그뿐이다. (민주당 친구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뭐란 말인가? 이쪽은 그래도 생각을 해서 의논을 하는데, 콧대 높게 굴어! 괘씸한 것들!) 허정은 결심을 굳혔다. 결국 그는 자기의 뜻대로 과도내각을 조각하기로 했다.
|
|
독서실 → 세계사
|
|
|
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로마군의 투항
동방에 부임한 페투스는 네로의 명령에 따라 휘하 병력을 모두 아르메니아에 투입했다. 하지만 병력을 양분하고 군량 보급로를 확보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도 로마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연말에 페투스가 로마에 보낸 보고서는 마치 아르메니아 재패를 완전히 끝낸 듯한 낙관적인 내용이었다. 이 보고를 믿은 네로는 파르티아에 대한 승리를 경축하는 승전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페투스가 네로에게 보낸 두 번째 보고서가 아직 지중해를 건너고 있는 동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왕이 직접 이끄는 파르티아군이 페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페투스는 병력을 양분했기 때문에, 당시 그의 휘하에는 2개 군단도 안되는 병력밖에 없었다. 네로는 서기 55년 때와 마찬가지로 서기 62년에도 제국 동방의 지휘계통을 이원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페투스와 코르불로의 지위와 권한은 대등했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병력도 비슷했다. 이래서는 유기적인 기능을 우선해야 하는 전략이 성립될 수 없다. 게다가 페투스는 휘하 병력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생각지도 않고, 그 병력을 다시 양분했다. 페투스가 이끄는 병력은 그래도 파르티아군과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군량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지 않은 겨울철 숙영지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곳도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볼로가세스는 포위만 한 게 아니라 맹공을 가해왔다. 페투스는 코르불로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아군의 위기를 알게 된 코르불로는 휘하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 하지만 그의 경우에는 일관된 전략에 따라 병력을 양분했다. 우선 절반의 병력에는 유프라테스 강 방위선을 사수하라고 명령했을 뿐 아니라, 배를 연결하여 다리를 만들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파르티아 영토에도 요새를 짓게 하여,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라도 파르티아 본국으로 쳐들어갈 수 있는 태세를 갖추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군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에 적지로 들어가는 것이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라는 말이 있지만, 속주 출신인 코르불로가 본국 출신인 페투스보다 훨씬 로마군의 전통에 충실한 사령관이었다. 그렇게 모은 군량을 수많은 낙타 등에 실었다.코르불로가 이끄는 로마군은 시리아에서 소아시아 동쪽을 북상하여 아르메니아로 향했다. 여기가 고대부터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리는 대목이지만, 코르불로가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코르불로 아르메니아 정복보다 포위된 아군을 구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앞정서서 병사들을 질타하고 격려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강행군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페투스는 코르불로가 구원하러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코르불로가 보낸 전령이 파르티아군에 붙잡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적에게 포위되어 있던 페투스가 너무 일찍 체념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파르티아 왕에게 항복을 제의했고, 볼로가세스는 그것을 수락했다. 코르불로의 군대가 도착하기 사흘 전이었다.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는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전투라고 부를 수 없는 소규모 전투라 해도, 파르티아가 로마에 연전연승하는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투항한 페투스의 군대에 대한 관대한 조치는 볼로가세스의 이런 기분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로가세스는 원래부터 로마와 정면으로 대결할 마음이 없었다. 페투스의 군대는 무장해제도 요구받지 않았다. 다만 볼로가세스는 로마 군단이 자랑하는 토목공사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유프라테스강 상류에 다리를 놓으라고 요구했다. 파르티아가 제시한 조건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로마군이 완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페투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서쪽으로 철수한 페투스의 군대와 북상하고 있던 코르불로의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 연안에서 만났다. 로마 군단병들이 다리를 놓은 곳에서 약간 하류로 내려간 지점이다. 코르불로의 병사들은 동정의 눈물을 흘리며, 수치심으로 표정이 굳어진 페투스의 병사들에게 달려가 끌어안고 불행을 위로했다. 병사들과는 달리 사령관끼리의 재회는 짧았고, 분위기도 냉랭했다. 코르불로는 군사적 우세가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파르티아 왕과 평화협정을 맺을 작정이었지만, 이번 패배로 그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페투스는 파르티아 왕이 언제까지나 아르메니아에 눌러앉아 있을 리가 없으니까, 파르티아 왕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쳐들어가면 아르메니아는 다시 로마의 수중에 들어올테고, 따라서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 항변했다.
코르불로는 이 항변을 차가운 어조로 물리쳤다. 나는 네로한테 아르메니아로 진격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다. 내 임무는 시리아 속주를 방위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것은 아군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일대의 적이 주력인 기병에게 유리한 지형이다.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만도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것으로 두 사령관의 회견은 끝났다. 페투스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카파도키아로 떠났고, 코프불로도 휘하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시리아 속주의 수도인 안티오키아로 돌아오자마자 파르티아 왕의 사절이 코르불로를 찾아왔다. 사절은 볼로가세스의 요구사항을 전했다. 내용인즉, 유프라테스 강 동쪽 연안에 코르불로가 지은 요새를 철거하고 다리를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코르불로는 사절에게 대답했다. 파르티아군이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면 유프라테스 강 동쪽 연안의 요새와 다리를 철거하겠다고. 파르티아 왕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파르티아 영토로 되어 있는 유프라테스 강 동쪽 연안에 로마군 요새가 있는 것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칼을 쥐고 있는 것은 코르불로다. 시리아 속주 총독인 코르불로에게는 방위 책임이 있을 뿐, 유프라테스강을 건너 파르티아로 쳐들어갈 권한은 없다. 하지만 파르티아인과 로마군이 충돌했다는 등의 구실로 쳐들아갈 수는 있다. 구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코르불로라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고 볼로가세스는 판단했다. 파르티아인이 격앙할 만한 일이 일어나면, 누구보다도 그에게 먼저 불똥이 튈 위험이 있었다. 이런 속사정을 동방에 주재한 지 8년이 된 코르불로는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 무렵부터 파르티아 왕 볼로가세스와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 사이에는 '물밑 교섭'이 시작된 듯하다. 서기 63년으로 해가 바뀌자 볼로가세스는 로마의 네로에게 특사를 보냈는데, 코르불로 휘하의 백인대장이 특사 일행의 호위역으로 동행했다.
네로를 만난 특사는 파르티아 왕의 친서를 건네주었다. 외교문서는 점잔빼는 표현으로 일관되어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얼른 알 수가 없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이때 파르티아 왕이 보낸 친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의 주장을 조목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파르티아측이 늘 주장해온 아르메니아 영유권은 새삼 문제삼을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파르티아와 로마가 싸울 때마다 신들이 파르티아 편을 든 것만 보아도 분명하다.
(2) 최근의 일만 보아도, 우리는 로마가 왕위에 앉힌 티그라네스와 그를 지키는 페투스의 군대를 포위했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궤멸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모두 철수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은 파르티아 군사력의 우위를 보여주는 동시에, 파르티아인의 관용 정신도 보여준 예다.
(3) 아르메니아 왕위에 오른 내 동생 티리다테스는 제사장이고, 파르티아의 제사장에게는 항해가 금지되어 있다. 그가 직접 로마에 와서 황제에게 왕관을 받으라면, 그 자신은 그럴 마음이 있어도 제사장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티리다테스가 로마군 숙영지로 가서 군단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의 조상 앞에서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아도 좋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렇게 할 용의가 있다. 이보다 조금 전에 도착한 페투스의 낙관적인 보고서 내용과는 사정이 전혀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네로는 파르티아 왕의 특사를 따라온 코르불로 휘하의 백인대장을 불러, 실제로는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다. 백인대장은 로마군이 아르메니아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파르티아군도 철수했다고 대답한 모양이다. 네로는 요즘 말로 내각이라고 할 수 있는 '콘실리움'을 소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제일인자 보좌위원회'는 '제일인자'인 황제를 중심으로 집정관 두 명, 각부 장관에 해당하는 법무관, 회계감사관, 재무관, 안찰관, 여기에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선발된 20명이 모여서 여는 어전회의다. 이 자리에어 네로는 모든 사정을 알린 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물었다. 전쟁에 돌입할 것이냐, 아니면 아르메니아 왕위를 파르티아에 넘기는 불명예를 감수하고 평화를 택할 것이냐. 참석자들은 대부분 '전쟁'에 찬성했다. 로마는 이기고 강화를 맺는 일은 있을지언정 지고 강화를 맺는 전통은 없다는 것이 주전파의 이유였다. 파르티아 왕의 특사는 네로 황제의 회신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전쟁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해도 이제 페투스는 믿을 수 없었다. 역시 코프불로밖에 없다. 그런데 코르불로는 시리아 총독이다. 속주 총독의 임무에는 통상적인 행정과 사법도 포함된다. 그래서 이 임무에는 다른 사람을 임명하고, 코르불로를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코르불로에게는 '마그누스'(최고)라는 형용사가 붙은 지휘관을 주기로 결정되었다. 비록 동방에만 한정된다 해도, 황제와 다름없는 권한이다. 백지 위임장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를 외교로 해결하든 군사로 해결하든, 그것을 결정할 재량권은 그에게 있고, 황제에게 훈령을 청할 필요도 없다. 게르마니쿠스도 동방에 파견될 때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이런 대권을 받았다. 그후로는 코르불로가 처음이었다. 마침내 동장에서도 지휘계통의 통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페투스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문책당할 것을 각오하고 귀국했지만, 네로는 빈정거리는 투로 한마디 던졌을 뿐이다.
"그대를 당장 용서하겠다. 문책을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대가 병에 걸리기 전에, 겁에 질리면 당장 평정을 잃는 것이 그대의 특징인 모양이니까."
최고통수권을 손에 넣고, 4개 군단과 보조병과 동맹국 참가병을 합하여 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된 코르불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그가 관여하기 시작한 지 벌써 8년이 지났다.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아르메니아 본토가 목적지였다. 목적지는 아르메니아지만 싸울 상대는 파르티아군이다. 수도 로마의 민중은 흥분으로 들끓었다. 승전보를 기다리는 것은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네로 자신이 그것을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로마는 파르티아와 싸울 때마다 매번 지기만 했다. 크라수스도 졌고, 안토니우스도 졌다. 그것을 설욕하기에는 이번이 좋은 기회였다. 코르불로는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을 지낼 때부터 과감한 전법으로 알려져 있었다. 코르불로는 당시의 로마군에서는 최고의 용장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다른 장수들까지도 여기에 동의했다. 이기고 돌아올 것을 아무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파르티아를 이기기만 하면, 아르메니아는 자동적으로 로마의 수중에 들어온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처음으로 전권을 손에 넣고 5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코르불로의 머릿속은 전쟁 일색으로 물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민과 원로원은 물론 네로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로마에서는
동방에서 코르불로가 북상하기 시작한 해,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고 있었다. 우선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인 폼페이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피해는 대단치 않아서, 국고 지원금에 의존하지 않고 폼페이 시가 자력으로 복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로부터 16년 뒤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와 그 주변이 매몰된 대재난의 전조였을 것이다. 다음에는 마르스 광장 한켠에 네로가 세운 '체육관(김나시움)이 벼락을 맞고 불타버린 사고가 발생했다. 앞에서 말한 이유로 이 체육관은 로마 시민에게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는 없었다. 날씨도 궂은 날 그런 장소에 찾아갈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네로는 당장 체육관을 재건하기로 결심한다. 그리스적인 신체 단련 습관을 로마에도 도입하고 싶다는 네로의 열의는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그해에 네로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었다. 포파이어가 딸을 낳은 것이다. 젊은 아버지는 기뻐 날뛰며, 갓 태어난 딸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이름을 주었다. 아우구스타는 신성한 존재라는 뜻과 황후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지 석 달도 지나기 전에 죽었다. 네로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네로는 자신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고 아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위해, 포파이아에게 선물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딸이 태어나자 첫 아이를 낳아주어서 고맙다고 선물을 주고, 그 아이가 죽자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선물을 주었다.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포파이아 사비니는 역사에서 말하는 것처럼 악녀는 아니다. '황후'라는 칭호도 요구하지 않았고, 인사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좋아한 우유 목욕을 흉내낸 정도다. 제국의 경쟁력은 계속 향상되고 있었기 때문에, 황후의 여자다운 낭비 정도로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다만 포파이아의 사치벽은 수도 로마의 유대인들이 황궁 안으로 침투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제국의 수도에 사는 것은 커다란 이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사는 유대인의 수는 계속 늘아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에 비하면 아직은 인구도 적고 경제력도 뒤떨어져 있었다. 제국 동방의 유대인 사회는 유대교 계율에 따라 유대인을 재판할 수 있는 특전을 황제에게 인정받고 있었지만, 서방의 유대인 사회는 그런 특전을 누리지 못했다. 제국 서방에서도 유대인도 로마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우구수투tm 이후 모든 황제들의 방침이었다.
하지만 칼리굴라 황제에 대해 서술할 때도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유대교 계율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로마 시민의 되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 세계에서 이방인으로 남아 있다는 의미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이 보호자를 찾는 것은 힘없는 이방인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는 당연한 방위책이었다. 그리고 사치를 좋아하는 황후에게는 호화로운 보석이나 금품을 선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포파이아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친밀한 관계는 유대교에 대한 포파이아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종교 따위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는 현세주의적인 여자였다. 여자답게 현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보호해주는 단체가 종교적 색채를 갖고 있다는 것도 문제삼지 않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남편 네로가 2천년 동안 반 그리스도라는 악평을 받는 원인을 만들게 되었다.
서기 63년에는 그밖에도 로마 제국다운 사건이 두 건 더 기록되어있다. 첫째는 근엄한 타키투스의 말을 빌리면 '수치스러운 관습'을 둘러싼 원로원 회의장이 한바탕 떠들썩해진 사건이었다.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비롯한 로마 중앙정부의 요직은 원로원에서 선출한다. 속주 총독은 집정관을 지낸 사람들 중에서 추천으로 선발된다. 하지만 80년 전에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입법한 '율리우스 법'(제6권 160쪽 참조)은 자식을 가진 자에게 우선권을 인정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법률을 제정한 목적은 제국의 통치를 담당하는 계층의 연소화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였다. 이 법률에 따르면, 선거에서 얻은 표가 같을 경우, 독신자보다는 기혼자, 기혼자 중에서도 자식을 가진 자, 자식을 가진 사람 중에서도 더 많은 자식을 가진 자가 우선권을 갖는다. 속주 총독이나 정부 고위직을 선임하는 경우에도 같은 순서로 우선권을 갖는다. 이런 법률이 80년 동안 시행되었다.
하지만 인간은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법치국가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로마도 예외는 아니었다. '율리우스 법'의 빠져나갈 구멍은 허위로 양자를 들이는 방법이었다. 정부 고위직을 선출하거나 속주 총독을 선임하는 계절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양자 결연이 성행한다. 게다가 선거나 선임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짜 양자와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래서는 타키투스가 '수치스러운 관습'이라고 단죄한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가진 의원들이 이 '수치스러운 관습'에 항의하고 나섰다.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자식이 없는 사람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가짜 양자를 맞아들임으로써, 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자식 가진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다니 될 말이냐. 그래서 이런 양자 결연으로 얻은 공직은 무효로 한다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이 법안은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찬성표를 던진 의원들 중에는 자식이 없는 의원도 있었다니, 과연 법치국가답다. 이 법안은 보충조항까지 덧붙여서 가결되었다. 보충 조항은 이런 양자 결연으로 자식이 된 자에게는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양자가 되는 이점이 사라져서, 이런 양자 결연에 응하는 사람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법률의 성립으로 로마 제국에서는 자식 가진 사람이 '고위 공무원'의 출세 코스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전통이 재확인되었다.
두 번째 사건도 원로원이 무대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속주민이 속주 총독을 고발할 권리가 인정되어 있다. 속주에서의 악정을 막는 것이 목적이지만, 사법은 자칫하면 '무기'로 바뀌기 쉽다. 즉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법정에 끌려나가면 견딜 재간이 없기 때문에, 속주 총독은 임기 동안 속주 유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애쓴다. 로마의 법정에 고발하는 것은 유력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매사에는 한계라는 게 있다. 한도를 넘으면 총독과 유력자가 유착된다. 그러면 유력하지 않은 속주민까지 고려해야 하는 공정한 통치는 실현할 수 없다. 하지만 속주민의 총독 고발권은 오랫동안 인정되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권리를 빼앗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현실을 개선하라는 요구가 나온 것은 속주민이 함부로 내뱉은 한마디 때문이었다. 크레타 섬에 사는 그 사람은 로마에서 파견되는 총독의 평판은 자기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원로원은 분개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을 추방하라고 요구하고, 속주민의 횡포를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네 네로는 법으로 규제하는 데에는 반대했다. 그보다 임기가 끝난 총독에 대해 관례적으로 이루어진 속주민의 감사 결의를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감사 결의는 총독에 대한 '인사고과'가 되기 쉬웠기 때문에, 이것을 완화하는 것이 법안의 목적이었다. 원로원은 이 법안을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그거야 어쨌든, 이 사건은 속주민도 상당히 만만찮았다는 것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어서 흥미롭다. 그러나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속주민은 아니지만, 역시 속주 태생인 코르불로는, 함부로 말을 내뱉은 그 크레타 사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만만찮았다. 이 남프랑스 출신 장수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지속되어온 로마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책을 180도로 전환시켜버렸기 때문이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세상을 보는 방식 - 조셉 추장(하인모트 투얄라케트) - 네즈 페르세 족
"이 대지, 내가 선 이 자리를 나는 세상 어느 것보다도 사랑한다..."
어떤 얼굴 흰 자가 나한테 와서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조셉, 난 당신이 가진 말들이 좋아. 그 말들을 몽땅 사고 싶네." 난 그에게 말한다. "그런 소리 말게. 내 말들은 무엇보다 소중해. 그러니 팔지 않겠어." 그러자 그 친구는 내 이웃에게로 가서 말한다. "조셉이 좋은 말들을 갖고 있는데, 내가 사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팔지 않겠다지 뭐야." 이웃사람이 말한다. "나한테 말 값을 지불하게. 그러면 내가 당신한테 조셉의 말을 팔지." 그 얼굴 흰 자는 나에게 다시 와서 말한다. "조셉, 난 당신이 가진 말들을 이미 사버렸네. 그러니 내가 가져가야겠어." 백인 정부가 우리 땅을 돈 주고 샀다고 하는데, 그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빼앗아간 것이다.
나의 이름은 '하인모트 투얄라케트'이며 그 뜻은 '고산지대로 달려가는 천둥(썬더 고잉 투 더 하이 마운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들 나를 조셉 추장이라고 부른다. 한때 나의 아버지 월로가 기독교로 개종해 조셉이라는 이름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말을 듣고 또 들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좋은 말'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좋은 언어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진 못한다. 문명인들은 말만 늘어놓고 아름다운 언어에 매혹되기만 할 뿐 실천하지 않는다. 아무런 결과도 없는 '말뿐인 말들'에 나는 지쳤다. 그 많은 좋은 언어들과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엔 찬바람이 분다. 세상에는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말을 떠들고 있구나.
우리가 가슴을 좀 더 열어 보인다면 고통과 슬픔은 사라질 것이다. 이제 나는 인디언이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해 당신에게 설명하고자 한다. 문명인들은 인디언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데는 많은 말이 필요치 않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우리에게 많은 법률을 내려주셨다. 그들은 그것들 그들의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그 법률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것들이었다. 그 법률은 우리에게 가르쳤다. 상대방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으로 우리 역시 그들을 대하라고. 우리가 먼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장 사람답지 못한 행위이며, 우리는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또한 아무런 보상도 없이 남의 아내나 재산을 가로채는 것을 부끄럽기 그지없는 행위라고 그 법률은 가르쳤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세상 모든 일을 보고 듣고 계시다는 것을 믿도록 배웠다. 위대한 정령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결코 잊지 않으며, 그것에 따라 모든 인간에게 영혼이 쉴 집을 주신다.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집을, 나쁜 사람에게는 나쁜 집을.
이것을 나는 믿으며, 나의 부족 전체도 같은 믿음을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대추장이신 위대한 정령의 손으로 이 세상에 내보내졌다. 그러므로 모두가 한 형제다. 대지는 모든 인간의 어머니이며, 모든 인간이 대지 위에서 살아갈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 모두에게 삶을 누릴 기회, 성장할 기회를 똑같이 주어야 한다. 자유롭게 태어난 사람을 울타리 안에 가두고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자유를 막아 버린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리가 없다. 그 사람에게 행복을 강요한다면 강물을 거꾸로 되돌리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말을 마구간에 매어 놓기만 한다면 그 말이 야생의 생명력을 갖겠는가? 인디언을 '보호구역'이라고 이름 붙인 좁은 면적 안에 가두고서 그곳에서 살기를 강요한다면 어떤 인디언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인디언도 삶을 누리지 못할 것이며,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종족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도 안다. 문명인들이 설치는 이 세상에서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똑같이 삶을 누릴 기회를 달라고 요구하는 바이다. 나를 자유로운 사람이게 해달라. 여행할 자유, 휴식할 자유, 일할 자유,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장사할 자유를 달라. 나의 영적 스승을 내 스스로 선택할 자유, 내 아버지들의 종교를 따를 자유, 내 자신을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를 내게 달라. 인디언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문명인들도 인디언을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그러면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것이고, 모두가 한 하늘 밑, 한 대지 위의 형제가 될 것이다. 그때 우리를 내려다보는 대추장 위대한 정령께서도 미소를 지을 것이며, 비를 뿌려 대지에 얼룩진 핏자국을 씻어 보낼 것이다. 그렇게 될 날을 우리 인디언들은 기다리고 있다. 상처받은 여인, 상처받은 남자의 울음소리가 대추장 위대한 정령의귀에 더 이상 들리지 않기를 나는 희망한다. 모든 종족이 인간이라는 바탕 위에 한 형제가 되기를.
내가 문명인들의 학교를 마다하는 이유가 있다. 학교를 세우면 문명인들은 교회를 세우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끝없이 하느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곳 네즈 페르세 인디언 주거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어느 곳엘 가나 가톨릭은 개신교와 끝없이 싸운다. 우리는 그런 걸 원치 않는다. 우리는 이 땅에 있는 걸 갖고는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위대한 정령에 대해선 건드리지 않는 법이다. 우린 그런 걸 배우고 싶지 않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만물을 만들어 놓은 대로 세상의 것에 만족하고 손대지 않는다. 그러나 문명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강이나 산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마구 바꿔 버린다. 그들은 그것을 창조라고 부르지만 우리의 눈에는 철없는 파괴로 보일 뿐이다.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강, 이 대지, 내가 선 이 자리를 나는 세상 어느 것보다도 사랑한다. 자기 아버지가 묻힌 대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들짐승보다 못한 자이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