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1호 - 2024.06.26 수요일(음력 : 05.21)
잠시 쉽시다.
6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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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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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자선은 그것이 면세가 되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 댄 베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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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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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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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적 언어 표현
얼마 전 법제처는 법령에 쓰이고 있는 ‘파출부’, ‘사생아’, ‘혼혈아’ 등을 각각 ‘가사도우미’, ‘혼외 자녀’, ‘다문화 가정 자녀’ 등으로 바꾸어 쓰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언어 표현이 특정한 직업, 성, 출생 등을 비하하는 등 차별적 의미를 지닌다고 본 데 따른 것이다.
‘파출부’는 사회적으로 ‘남의 집에서 하찮은 일을 해 주는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파출부’라는 언어 표현 자체에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파출부’의 ‘부(婦)’는 ‘가정부’, ‘간호부’ 등처럼 일부 명사 뒤에 붙어 ‘~하는 여자’의 뜻을 더하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파출부’는 특정 직업과 성을 아울러 비하하는 언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파출부가 하는 ‘가사 서비스’는 정식 직업의 하나이다. 여자들만 선택하는 직업도 아니다. 이로 보면 ‘파출부’는 시대착오적인 언어 표현인 셈이다.
한편 과거에는 ‘사생아’와 ‘혼혈아’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특정 출생을 비하하는 의미가 이들 언어 표현에 담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혼전 동거, 국제결혼이 급증함에 따라 이들을 바라보는 부정적 사회적 시선이 크게 개선되었다. 그런 점에서 법제처가 ‘사생아’와 ‘혼혈아’를 ‘혼외 자녀’와 ‘다문화 가정 자녀’로 바꾸어 쓰기로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린다”라고 한다.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누군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간단한 언어 표현도 남을 배려하여 세심하게 골라 쓸 필요가 있다. 특히 차별적 언어 표현은 삼가야 한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생각건대/ 생각컨대
‘단언하건대’의 준말은 ‘단언컨대’, ‘고민하건대’의 준말은 ‘고민컨대’이다. 그렇다면 ‘생각하건대’의 준말은? 유감스럽게도 ‘생각컨대’가 아니라 ‘생각건대’이다. ‘무심하지 않게’의 준말은 ‘무심치 않게’이지만 ‘섭섭하지 않게’를 줄이면 ‘섭섭치 않게’가 아니라 ‘섭섭지 않게’가 된다.
‘-하다’가 붙은 말을 줄일 때 어떤 경우에는 ‘하’가 모두 줄고 어떤 경우에는 ‘하’의 모음인 ‘ㅏ’만 줄어들기 때문에 헷갈리기 쉽다. 어려운 것 같지만 원칙 하나만 기억하면 쉽다.
‘-하다’ 앞에 ‘ㄱ, ㅂ, ㅅ’ 등의 무성음 받침이 있으면 ‘하’가 모두 준다. ‘생각하건대’는 ‘-하다’ 앞의 말(생각)이 ‘ㄱ’받침으로 끝나기 때문에 ‘하’가 통째로 줄어 ‘생각건대’가 되고 ‘생각하지 않다’는 ‘생각지 않다’가 된다. 같은 이유로 ‘섭섭하지 않게’는 ‘섭섭지 않게’, ‘깨끗하지 않게’는 ‘깨끗치 않게’가 아니라 ‘깨끗지 않게’ 로 준다. ‘답답하지 않다’는 ‘답답지 않다’, ‘갑갑하지 않다’는 ‘갑갑지 않다’, ‘넉넉하지 않다’는 ‘넉넉지 않다’가 되는 이유이다. 다소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나 ‘무색하게 하다’는 ‘무색케 하다’가 아니라 ‘무색게 하다’, ‘거북하게 하다’는 ‘거북케 하다’가 아니라 ‘거북게 하다’가 맞는 표현이다.
‘하’의 모음인 ‘ㅏ’만 줄이는 경우는 ‘-하다’ 앞에 모음이나 ‘ㄴ, ㅁ, ㅇ’ 등의 유성음 받침이 있을 때이다. 이 경우에는 ‘ㅎ’의 음가가 살아 다음 말과 결합한다. 따라서 ‘단언하건대’는 ‘단언컨대’, ‘고민하건대’ ‘고민컨대’, ‘무심하지 않게’는 ‘무심치 않게’, ‘연구하도록’은 ‘연구토록’, ‘수사하도록’은 ‘수사토록’과 같이 줄여 쓸 수 있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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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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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변두리 - 천상병
이 근처는 버스로 도심지까지 가려면
약 1시간이 걸리는 변두리.
수락산 아랫마을이다.
물 좋고 산 좋은 이곳.
사람도 두터운 인심이다.
그래서 살기 좋은 고장이다.
오늘은 부실부실 비가 오는데.
날은 음산하고 봄인데도 춥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좋아 이곳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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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矛盾) - 한용운
좋은 달은 이울기 쉽고
아름다운 꽃엔 풍우(風雨)가 많다.
그것을 모순이라 하는가.
어진 이는 만월(滿月)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느니
그것을 모순의 모순이다.
모순의 모순이라면
모순의 모순은 비모순(非矛盾)이다.
모순이냐 비모순이냐
모순은 존재가 아니고 주관적이다.
모순의 속에서 비모순을 찿는 가련한 인생
모순은 사람을 모순이라 하느니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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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해ㅅ살 - 정지용
불 피어오르듯하는 술
한숨에 키여도 아아 배고파라.
수저븐 듯 놓인 유리컵
바쟉바쟉 씹는 대로 배고프리.
네 눈은 고만스런 흑단초.
네입술은 서운한 가을철 수박 한점.
빨어도 빨어도 배고프리.
술집 창문에 붉은 저녁 해ㅅ살
연연하게 탄다. 아아 배고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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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타임지 - 김수영
흘러가는 물결처럼
지나인의 의복
나는 또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
기회와 유적 그리고 능금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야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와사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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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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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북두(泰山北斗)
泰:클 태. 山:메 산. 北:북녘 북. 斗:말/별자리 두.
[준말] 泰斗(태두). 山斗(산두). [동의어] 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출전] ≪唐書≫ 〈韓愈傳贊〉
태산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말. 곧
① 권위자. 제일인자. 학문/예술 분야의 대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러러 받듦을 받거나 가장 존경받는 사람.
당나라 때 사대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파직(罷職) 당했다가 재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24년).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자는 자후(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당서(唐書)》〈한유전(韓愈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태산북두’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주] 태산 : 중국 제일의 명산. 산동성(山東省)의 태안(泰安)에 있는 오악(五嶽) 중의 하나인 동악(東嶽)으로, 중국에서는 옛부터 태산을 성산(聖山)으로 추앙해 왔음.
북두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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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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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생명의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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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성직자, 군인, 의사, 변호사, 철학자 등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무수히 만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외적인 요소가 그들의 참모습은 아니다. 직업은 가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가면 뒤에는 현실에 대한 욕망과 참모습이 깃들어 있다.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욕망은 항상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양심은 뒤로 물러나라고 한다. 누구나 이 점을 마음에 깊이 새겨 놓아야 한다. 양심의 길은 곧게 이어지고 있지만 욕망의 길은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욕망과 양심 중에서 어느 쪽을 따라갈 것인가?
37
어느 누구도 고통을 피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사막에서 고독하게 혼자 성장한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홉즈와 후펜도르프 그리고 루소는 전혀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홉즈는 두 사람이 서로 적대시하게 될 거라고 대답했으며 후펜도르프는 우호적으로 다가설 거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루소는 그들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지나칠 거라고 말했다. 이들 세 사람의 의견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막에서 대면한 두 사람의 성격이 어떠한가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막은 우리의 성격을 측정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저 사람은 내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 적의를 품게 될 것이고‘또 하나의 내가 다가오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친절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38
우리의 삶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범위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행동 속에는 사회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 연필을 다듬거나 향기로운 차를 끊이기 위해 주전자를 준비하는 사소한 일에도 사회적인 의미는 숨어 있다.
39
우리는 사회 속에서 나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나와 사회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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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조심성과 관대함을 지니도록 하라. 손해나 손실로부터 몸을 지키는 일에는 조심성이, 싸움이나 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관대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이 필요하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의 도덕적 성품이나 생각, 기질 등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우리가 어떤 사람의 개성을 비난하는 것은 상대방이 누릴 수 있는 생존의 기회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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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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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10. 곡! 제2공화국
윤보선의 밀서에 대한 이한림과 그의 휘하 군단장들의 반응은 지체없이 군사혁명위원회의 박정희에게 전달되었다. 최석 이외에는 모두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박정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휴우 하고 길게 내뿜었다. (이제 이한림이 그 새끼만 체포해 버리면 쿠데타는 성공했다고 장담해도 되겠군.) 이렇게 생각한 박정희는 쿠데타 동지인 오치성에게 말했다.
"오 동지, 이한림이만 체포하면 이제 혁명은 성공이오. 그러니 오 동지가 1군에 있는 동지들한테 비밀리 연락을 취해서 이한림 체포작전을 개시하라 하시오."
"알겠습니다. 곧 지체없이 체포작전을 개시하라고 지령하겠습니다."
오치성은 호기있게 명령을 수령했다. 사실은 이한림 체포문제도 5월 16일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그날부터 구상되어 왔다. 이 구상은 제1군에서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조창대(曺昌大), 이종근(李鐘根), 심이섭(沈怡燮), 엄병길(嚴秉吉) 등에 의해서 논의되었다. 그들 모두는 계급이 육군 중령으로서 육사 8기 출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쿠데타 체포한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아니었다. 여건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다분히 정리론(情理論)도 작용되었다. 육사 8기 출신자들만 하더라도 유교적인 가정 분위기와 유교적인 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들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한림 체포문제에 있어 정리론이 작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치성으로부터 조창대에게 <이한림을 체포하라!>고 지령이 떨어진 것은 5월 17일 한밤중이었다.
이날 밤 10시.
제1군 내의 쿠데타 가담자 전원이 포병참모실에 모였다. 오치성의 지령에 따라 조창대가 전체회의를 소집했던 출신 중령들 외에 헌병참모 육군 대령 박태원(朴泰元), 포병참모 정봉욱(鄭鳳旭), 심리전참모 육군 대령 허순오(許順五) 등도 참석을 했다.
"군사혁명위원회에서는 왜 여지껏 사령관을 체포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어서 체포하라고 독촉이 성화 같습니다. 어차피 해결해야 할 사안이고 보면 오늘 밤 안으로 단행했으면 합니다."
조창대가 <이한림 체포>를 서둘러야겠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헌병참모 박태원이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오늘밤 하루만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기다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모시고 있던 상관이 아니오? 사령관이 체포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고 체포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는 상황에 이를 때까지 좀 기다려 보잔 말입니다."
또다시 정리론이 작용했던 것이다. 8기 출신 중령들도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 놓으라고 한다면 <모시고 있는 상관을 차마 어떻게 체포한단 말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숨김없는 참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 8기 출신 중령들은 치성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쿠데타 공로> 문제였다.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혁명 후에는 반드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베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제1군 쿠데타 주체자들은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이거 우리는 혁명 후의 논공행상에서 탈락되는 게 아냐?) 하는 초조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한림 체포를 서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령급들이 반대를 하고 나서니 계급이 하나 아래인 중령들로서는 그들의 주장을 고집하기가어려웠다. 때문에 이한림 체포를 위한 회의는 또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오치성의 독촉은 빗발치듯 했다.
"뭘 하고 있어, 아직도 사령관을 체포치 않고? 이것은 박 소장의 강력한 지시야! 혁명의 주체자로서 혁명 영도자의 지령을 거역하겠다 그건가?"
날이 새면 5월 18일이다. 새벽 4시에 다시 모였다. <어서 이한림을 체포하도록 하라>는 것이 혁명 최고 영도자의 지령이라고 하자, 그때는 대령급들의 정리론도 쑥 들어가고 말았다. 5월 18일 새벽 6시. 새벽 4시에 다시 모여 <이한림 체포작전>을 숙의한 끝에 이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새벽 6시였다. 먼저 헌병참모 박태원으로 하여금 사령관 숙소 배치해 놓은 100명의 경비헌병을 철수시키는 일에서부터 <이한림 체포작전>은 개시되었다. 헌병참모 박태원은 5월 16일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는 사령관 관사의 경비헌병을 100명으로 그룹에 가담해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보더라도 한국군의 상관과 부하 사이가 얼마나 끈끈한 <정리>로맺어져 있었느냐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그런 다음 허순오가 지휘하는 80여 명의 심리전 선전중대를 완전무장시켜 사령관 관사를 포위케 했다. 그러는 한편, 야전군 연병장에는 12문의 고사포를 배치,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이제는 사령관 관사로 뛰어들어가 이한림을 체포하기만 하면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령관 체포>를 누가 담당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모시고 있는 상관을 체포하기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해도 어려운 일이기만 했다. 더구나 별명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줄로 안다. 그러므로 평소 사령관에게 외경심을 품고 있던 부하들로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데, 이때 지원자가 나섰다. 엄병길, 박용기(朴容琪), 그리고 육군 대위 안찬희 등 세 사람이었다. 그들이 지원을 하고 나서자 박태원은 그들에게 헌병 완장을 차게 하고 헌병 헬멧을 씌워 헌병으로 위장을 시켰다. 그런 다음 그들이 사령관 숙소로 향하려고 할 때 박태원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사령관의 호송 도중에 사령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날엔 호송장교를 모조리 사살해 버리고 말겠어. 알겠나?"
박태원으로서는 <사령관 체포작전>에 꽤나 가슴을 앓았던 모양이었다. 쿠데타 그룹에 가담해 있는 이상 최고 영도자의 지령에 따르지는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사령관 체포작전>을 수행하기는 하나사령관의 신변안전만은 완전무결하게 유지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는 사령관 체포작전을 펴면서 속으로는 통곡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침 6시 40분.
헌병으로 위장한 세 장교가 사령관 관사에 도착한 것이 이 시간이었다. 이때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은 참모장 육군 소장 황헌친(黃憲親)과 군수참모 육군 준장 박원근(朴元根) 셋이서 아침상을 받아 놓고 식사중이었다.사령관을 박임항 장군으로 교체한다고 날아든 전통(電通)에 모아져 있었다. 이날 아침 이한림은 식사를 하면서 황헌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인수인계할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독자 제씨는 파면당했던 박정희가 현역에 복귀할 때 애를 써준 한 사람이 이한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헌병장교로 위장한 세 사람이 식사중인 자리로 뛰어든 것이 이때였다. 이한림이 그들을 보자, "박정희가 날 잡아오라고 시키드냐?" 하고 호령을 했다. 그렇지 않고야 사령관이 식사중인 자리에 무례하게 뛰어들 놈들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엄병길이 말했다.
"포위되었습니다. 순순히가주셔야겠습니다."
"가자니 어디로 가잔 말이냐?"
"서울 혁명위원회로 가셔야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비행기로 가도록 하자."
"안 됩니다. 차로 가셔야 합니다."
"알았다."
이한림은 그러면서 천천히 일어나 풀어 놓았던 권총혁대를 맸다. 그러한 이한림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던 박용기가 앞으로 다가섰다.
"사령관님, 무기는 안 됩니다. 그 권총을 이리 주십시오."
박용기가 손을 내밀자, 이한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적장의 투항을 받을 때도 너희놈들이 감히 그럴 수가 있어? 야전군 사령부 마크를 단 장교는 나를 체포할 수 없어! 군인이 무장을 해제당하면 생명을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야.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과연 이한림은 진시황이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냥 당당하기만 했다. 보다 못해 군수참모 박원근이 나섰다.
"사령관님, 그럼 제가 탄창만 빼고 권총은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한림의 권총을 뽑아 탄창을 빼고 도로 권총집에 넣어 주었다. 이한림을 호송하는 지프의 핸들은 엄병길이 잡았다. 옆에 대위 안찬희가 타고, 이한림과 그의 부관 한 사람은 뒷좌석에 태워졌다. 그들의 차를 헌병 1개 에스코트했다. 이한림이 서울로 압송되어 오는 하늘에서는 줄곧 헬리콥터가 압송차량을 감시하며 따라붙었다. 미 고문단장 재브로스키가 이한림의 신상을 염려한 나머지 감시역으로 띄운 헬리콥터였다. 오전 10시. 이한림의 압송차는 덕수궁 앞에서 세워졌다. 이때 공수단은 덕수궁에 진을 치고 있었다. 쿠데타 그룹은 반쿠데타 장성을 체포해 올 때마다 덕수궁에 연금시켜 공수단으로 하여금 파수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떨어진 대한문 앞에서는 지프에서 내리는 이한림을 쏘는 듯한 눈매로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었다. 그들은 이한림이 헌병들의 시작하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이한림과는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인 박정희는, 체포당해 오는 이한림을 대하기가 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이한림한테는 유독 묘하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쿠데타 그룹이 이한림 체포에 성공했다는 것은 곧 쿠데타 그 자체를 성공의 궤도 위로 올려 놓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앗댐!"
이한림이 체포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매그루더는 한마디 내뱉았을 뿐이었다. 이한림 체포 소식에 <쿠데타는 진압돼야 한다>고 전의을 다지던 최석도 맥이 탁 풀리는 모양이었다.
"됐는가 보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맥이 빠지기는 김응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젠 도리 없이 패전지장의 신세가 되고 말았군. 허허......."
그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란 너무나 어이없는 경우를 당하게 되면 비감보다는 너털웃음만이 터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5월 18일 이날 아침, 유진산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이철승, 박준규, 모윤숙, 박병배, 이종린, 박권희(朴權熙), 김상흠 등을 뉴우쟈팬호텔로 불러 모았다.
"오늘이 쿠데타가 일어난 지 벌써...... 모양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우리들의 거취를 정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누구나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눌려 말을 끄집어내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으로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의견을 이러했다.
"방송을 들으니 쿠데타는 반공혁명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과거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고 해서 사람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 같소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모윤숙이 반론을 폈다. 쿠데타를 일으킬 때 피를 얼마만큼 흘렸는지느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인데 국회의원이고 정부 사람이고 간에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어요. 그런 만큼 사태가 진정되고 신분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는 여기 그냥 눌러 있어야만 합니다."
쿠데타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그들은 모두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들의 운명이 어찌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가 쿠데타를 일으킨 자가 누군지 그자는 어떤 사상을 품고 있는지 전혀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쿠데타는 분명했다. 만일 쿠데타를 일으킨 자가 공산주의를 위해서였다면 반공사상이 투철한 60만 국군장병이 방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쿠데타를 주도한 자의 인품이었다. 사람됨이 제대로 돼 있다면 피를 보는 일이 없을 테지만 만일 성격이 괴팍하다든가 포악한 인물일 때는 쿠데타의 명분을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집권자를 위시한 그 주변 인물들을 처형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이렇듯 가뜩이나 불안에 싸여 있는 그들이었는데 모윤숙이 국회의원이고 정부 사람이고 가만둘 리가 없다고 단언하듯이 말했으니 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될 유진산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의 명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피땀 흘려온 사람들인데 저들이 우리를 함부로 다루려고 할 리야 있겠소?"
"아니,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그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없는 죄도 만들어 뒤집어 씌우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모 선생 말씀과 같이 당분간 여기에 머물고 있으면서 추이를 지켜보구 나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이종린이었다. 여기에 모윤숙이 덧붙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진산 선생님. 공연히 말구요."
"아니, 나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빠른 시일 안에 돌아가도록 해야겠소!"
유진산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의 의지가 너무나 단호했던 탓인지 그 이상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5월 18일 오전 9시.
동대문에 집결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 생도대의 앞에는 쿠데타군으로 동원된 공수단 장병들이 사관생도들을 에스코트하듯이 선도행진을 이 사관생들의 쿠데타 지지행진을 보며 많은 식자들이 길게 탄식을 했다. 장차 이 나라 국군의 간성이 될 사관생도들을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내게웠다는 것은, 그들에게 쿠데타를 교육시키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을 내세워 쿠데타지지시위를 벌이게 하는 발상을 한 것은 물론 박정희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 지지시위를 위해 거리로 내세움으로써 정치에는 중립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앞으로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있어 쿠데타를 단행해도 그는 한마디 항변도 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결박짓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이르자 곧 <혁명 축하식>이 벌어졌다. 식이 벌어지자 장도영이 박정희, 오치성, 유원식 등 쿠데타 그룹들을 거느리고 사관생도대의 사열을 받았다. 어제 그러니까 5월 17일 오후 4시 30분 전까지만 해도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장도영은 사관생도대의 사열을 받으며 이렇게 지껄여댔다.
"남북한의 동포와 자유, 평화, 평등을 사랑하는 전인류가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과연 재빠른 변신이었다.
오전 10시 30분. 장면의 정치고문인 위태커가 육군본부로 장도영을 찾아왔다. 부관실로 들어선 그는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사이에 새삼스럽게 명함을 내놓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보좌관은 받아든 명함의 뒷면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영어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I have very important information(내게 중요한 정보가 있다)> 보좌관은 지체 않고 위태커를 장도영한테로 안내했다.
"중요한 정보라는 게 뭣입니까?" 장도영이 물었다.
"장면 총리의 은신처를 알고 있소."
"그래요?"
장도영은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스터 위태커, 어서 같이 가십시다."
장도영은 무척이나 서둘고 있었다. 장도영은 벌써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오전 11시 10분. 장도영은 장면이 은신해 있는 방으로 들어오자 입부터 씰룩거렸다. 터지려는 울음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각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장도영은 한마디 뇌까리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는 입을 씰룩거리면서 다시 이었다.
"각하. 모든 것이 제 불찰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각하를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장면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장도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도영은 좀 멋적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처음 위태커가 장면의 거처를 알려주었을 때는 너무 반가운 김에 앞뒤 재볼 겨를이 없이 달려왔던 것이나, 장면이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노여움도 또 그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자 머쓱해졌던 것이다. 이 경우를 제3자가 보았다 해도 장도영의 강심장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것이다. 쿠데타를 막는 체 흉내만 냈을 뿐 그 어떤 강력한 조치도 취하지 않아 정권이 넘어가게 된 마당에 상판대기에 철판을 깔지 않고야 어찌 장면 앞에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장면이 그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자, 장도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도영으로서는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어서 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야지.) 그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각하, 송구스럽습니다만 이제 쿠데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 길로 나가셔서 수습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장면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시선을 창 밖으로 던져놓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도영은 어색함을 털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각하, 각하나 여타 각료들의 신변은 제가 책임을 지고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이 길로 나가 주시면......"
그제야 장면이 밖으로 던져 놓고 있던 시선을 장도영 쪽으로 돌렸다. 그의 두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아, 이놈아. 내가 쿠데타 정보를 입수하고 너한테 박정희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했더니, 그때 네놈이 뭐라고 했지? 박정희는 쿠데타 같은 것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그리고 이놈아, 16일 새벽에 네놈은 나한테 뭐라고 했지? 해병대가 술에 취해가지고 주정을 부리고 있다고? 이 개만도 못한 놈! 네놈이 나하구 쿠데타 그룹 양쪽에 각기 한다리씩 걸치지 않고 있었다면 그따위 식으로 쿠데타를 막으려고 했을 리가 있겠어? 이 개만도 못한 놈! 네놈을 같은 인동 장(仁同張) 씨라고 해서 참모총장에 기용을 했으니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고얀 놈!) 장면의 두 눈은 점차 증오에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장도영에 대한 증오심을 밖으로 표출시비지 않았다.
"각하......."
장도영이 다시 재촉하려고 입을 열었다.
"알았네."
장면은 한마디로 가로막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날로서 기억되어져야 할 1961년 5월 18일 정오 12시 30분. 장면이 중앙청 국무회의실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국무위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현석호, 부흥부장관 주요한, 상공부장관 태완선(太完善), 체신부장관 한통숙, 무임소장관 오위영, 그리고 국무원사무처장 정헌주(鄭憲柱) 등 9명이었다. 장면은 정헌주에게 재무부장관 김영선(金永善)과 문교부장관 윤택중(尹宅重)은 어찌 됐느냐고 조용히 물었다.
"윤 장관은 병원에 입원중이라 위임장을 보내왔습니다. 김 장관은 아무래도 좀 늦는 모양입니다."
정헌주의 보고를 듣고 나자 장면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힘이 하나도 배어 있지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제69차 임시 국무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의 안건은 계엄령 추인과 내각 총사퇴 문제요. 계엄령을 추인하는 데 이의가 없소?"
누구도 이의 있다고 대답하는 국무위원은 없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계엄령 추인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소."
장면은 일방적으로 선언을 하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다음은 내각 총사퇴에 대한 안건이오. 여기에 대해서도 누구도 이의 없으시죠?"
장면은 이렇게 묻고 또 일방적으로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국무회의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안 걸려서 끝마쳤다. 향했다. 국무위원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모습을 보인 것은 이때였다. 기자실로 들어서자 장면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메모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성명서. 정치인 장면으로서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는 성명서였다. 장면은 그저 아무 감정 없이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금번 군부 쿠데타 발생에 대하여 우리 일동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하는 바이니 국민 제위의 양해 있으시길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태수습에 있어서는 유혈을 방지하고 반공태세를 강화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이것으로 민주당의 장면 정권, 곧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니 막을 내렸다는 표현은 너무나 미지근한지도 모르겠다. 총칼의 위력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9개월간의 짧은 생애였다.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민주주의가 화사하게 꽃피었던 제2공화국, 과연 장면 정권은 5.16 군사 쿠데타 그룹이 지탄했듯이 쿠데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부패하고 무능했던 정권>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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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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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4부 네로 황제
어머니 살해
네로는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경우에는 극단적인 해결책밖에 생각해내지 못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나약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20세를 맞이할 무렵, 네로는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포파이아 사비나였다. 특별히 고귀한 혈통은 아니지만, 하층계급 출신도 아니다. 할아버지는 역사가 몸젠이 말하는 '티베리우스 문하생'의 한 사람으로, 도나우 강 방위선을 확립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포파이아는 미인이었다지만, 로마 최고의 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머리도 뛰어나게 영리하지는 않았다. 네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 같은 야심가는 아니지만, 여자로 태어난 이점을 헛되이 하지 않는 타입의 여자였다. 첫 남편은 기사계급에 속하는 유복한 남자였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첫 남편과 이혼한 것은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명문 출신 젊은이와 재환하기 위해서였다. 재혼 상대는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자 네로 황제의 놀이 친구인 오토였따. 결국 네로는 친구의 아내를 사랑한 셈이다. 네로는 '황태자' 시절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딸인 옥타비아와 정식으로 결혼했으니까, 첫 결혼은 정략결혼이었다. 하지만 정략결혼이라서 네로와 아내 사이가 항상 소원했던 것은 아니다. 옥타비아가 수수하고 심심하고 우울한 성격을 가진 여자였기 때문이다. 네로가 맨 처음 반했던 노예 아크테는 정성을 다해 진심으로 네로를 사랑했지만, 그녀도 재치있는 여자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네로는 이 첫사랑 여인에게 금세 싫증이 나버렸다. 그때 나타난 것이 아름답고, 출신 가문도 황제의 애인에게 어울리고, 무엇보다도 재치가 있는 포파이어였다. 훼방꾼을 멀찌감치 떼어놓는 것은 간단했다. 네로는 오토를 오늘날의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하여 멀리 보내버렸다. 그런데 속주 총독이 된 오토는 밤마다 네로와 함께 놀러 다니던 사람치고는 꽤 유능했다. 9년 동안이나 벽지에 근무했는데도, 오토의 속주 통치는 선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네로가 파멸한 뒤에 제위를 이어받았다가 죽는 세 명의 황제가 등장하는데, 오토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랑의 걸림돌을 제거했는데도, 포파이아는 네로의 애인이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토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인의 처지로 만족하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로는 난감해졌다. 포파이아를 아내로 맞이하려면 옥타비아와 이혼해야 한다. 하지만 옥타비아와 이혼하는 것은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단호히 반대했다. 아그리피나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네로가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선황인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고, 그 자리가 더욱 확고해진 것은 선황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했기 때문이니까, 이혼은 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들볶았던 어머니-대 아그리피나-를 닮아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몸이라는 것만 코에걸고 살아온 여자였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지 23년 뒤에 태어난 네로는 황제에게 중요한 것은 '피'보다 '실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아그리피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니의 단호한 반대가 벽처럼 앞을 막아서자, 그 벽을 어떻게 뛰어 넘어야 졸을지 알 수 없게 된 네로는 극단적인 해결책으로 치달았다.
어머니를 죽일 하수인으로는 능력은 있지만 인격이 비열한 아니케토스가 선정되었다. 해방노예인 아니케토스는 당시 미세노 해군기지 장관을 지내고 있었다. 소년 시절의 네로를 가르친 체육교사였고, 그후에도 네로와는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그런 자기를 아그리피나가 중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황태후에게 원한을 품과 있었다. 살해는 우연한 사고로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네로는 아니케토스의 진언을 받아들여, 밑창의 일부를 떼어내면 간단히 침몰해버리는 배를 은밀히 만들었다. 배가 만들어지는 동안, 네로 자신은 어머니와 화해하겠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잔소리가 심한 어머니지만, 어떤 결점이 있더라고 어머니는 어머니라면서. 결행 날짜도 결정되었다. 미네르바(그리스어로 아테나) 여신의 축일이었다. 미네르바는 장인의 수호신아라서, 그날은 장인들도 일을 쉰다.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Idus Martiae'(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 날)의 닷새 뒤니까 3월 20일이다. 그날 나폴리 서쪽의 미세노 곶 근처에 있는 바코리 별장에서 네로가 잔치를 베풀고 어머니를 초대한 것으 그날이 미네르바 여신의 축일이라는 이유도 있었다.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이었다. 22세의 아들이 다정하면서도 공손하게 어머니르 대접하는 모습은 동석한 세네카와 부루스에게는 오랜만에 보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광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별장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도 3월치고는 보기 드물게 잔잔하여, 커다란 은쟁반에 물을 담아놓은 듯했다.한밤중이 지나서 아들은 가까운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선착장까지 배웅했다. 배에 올라타는 어머니를 아들은 소년 시절처럼 다정하게 포옹했다. 배는 예정대로 침몰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예정대로 물에 빠져죽지 않았다.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 황제 시절에 1년 동안 벤토테네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수영의 명수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침몰 장소는 칼리굴라가 배를 잇대어 급조한 발판 위를 말을 타고 달려갈 수도 있었을 만큼 파도가 잔잔한 포추올리 만이다. 또한 그날 밤에는 바다가 유난히 잔잔해서 수면이 거울 같았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황태후는 멋진 수영 솜씨를 뽐내며 유유히 헤엄쳤을 게 분명하다. 밤중에 고기를 잡으로 나온 어부가 건져 올렸을 때도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침착한 목소리로 자기가 황제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리고, 배를 바닷가에 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별장에 돌아온 아그리피나는 조난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 아들 네로가 꾸민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해방노예인 시종에게 편지를 주어 아들에게 보냈다. 편지에는 배가 침몰하긴 했지만 나는 어깨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을 뿐 무사하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적혀 있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잠도 자지 않고 기다리던 네로는 이 편지를 일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네카와 부루스를 급히 불러 모든 것을 자백하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메달렸다. 둘 다 오랫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그리피나가 모든 것을 눈치챘다고 판단했다. 그 점은 네로도 마찬가지였다. 아그리피나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끝날 리는 없었다.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네카는 근위병을 보내 아그리피나를 죽이는 게 어떠냐고 말한 모양이다. 하지만 부루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딸에게 칼을 들이댈 근위병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실패한 자가 책임을 지게 한다는 이유로, 아니케토스에게 아그리피나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우선 아그리피나의 시종인 해방노예를 많은 시종들 앞에 불러내어, 아그리피나의 명령으로 황제를 죽이려 한 고얀놈이라고 규탄하고, 시종이 뭐라고 항변도 하기 전에 재빨리 죽여버렸다. 해방노예라도 단검은 갖고 있다. 그 단검이 증거물이 되었다. 그후 아니케토스는 부하들을 데리고 아그리피나의 별장으로 갔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별장을 포위한 뒤, 문을 부수고 침입하여 시종들을 쫓아냈다. 침실에서 쉬고 있던 아그리피나는 쳐들어온 사내들을 보고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아들이 병문안을 위해 보낸 사람들이라면 상처는 다 나았으니 걱정 말라고 아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말했다. 아니케토스와 부하들은 침상을 에워쌌다. 아그리피나도 만사가 끝난 것을 깨달았다. 죽이려면 네로가 들어 있었던 여기를 찌르라면서 아랫배를 가리켰다. 그 손짓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랫배만이 아니라 온몸에 칼이 꽃혔다.
포추올리에서 바이아나 바코리를 지나 미세노 곶에 이르는 해안에는 로마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별장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하수인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그리피나의 유해를 몰래 별장 밖으로 운반하여 재빨리 화장해버렸다. 용기있는 노예들이 무덤을 만들고, 아그리피나의 뼈를 매장했다. 황제의 누이이고 아내이며 어머니이기도했던 여인의 무덤을 네로는 한번도 찾지 않았다.
세네카는 고심 끝에 아그리피나가 국가반역죄로 죽음을 맞았다고 공표했다. 원로원도 일반 시민들도 속으로는 믿지 않았지만, 아그리피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믿는 '척'했다. 하지만 어머니 살해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가족을 중시하는 로마인에게는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 대죄였다. 그것은 에로도 이해하고 있었다. 원로원과 시민들의 반응이 두려워 한동안은 수도 로마에 가까이가지 못했을 정도다. 망설인 끝에 겨우 마음을 다잡고 로마로 돌아왔지만, 시민들이 적개심을 보이기는커녕 따뜻하게 맞아주었기 때문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파이어와 재혼하는 일은 금방 실행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는 시민들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로마에서는 이혼 사유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포파이아도 장차 정실로 삼겠다는 조건이라면 애인이 되는 것을 승낙했을지도 모른다. 아그리피나라는 걸림돌이 제거된 뒤에도 이런 상태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민심을 자극할 만한 언행은 당분간 삼가라는 세네카의 설득이 주효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그리피나의 죽음으로 마음에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것은 누구보다도 네로 자신이었다. 22세의 네로는 밤마다 망령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망령은 제삼자에게도 보이는 경우가 있고, 본인밖에는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전형적인 예는 햄릿이 본 부왕의 망령이고, 후자의 좋은 예는 브루투스가 본 카이사르의 망령이다. 네로를 괴롭힌 망령은 후자 쪽이었을 것이다. 네로가 지르는 비명소리에 놀라 달려온 시종들한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로원에서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제국을 직접 통치하겠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해방노예를 보내 자기를 죽이려 했다고 말했다. 의원들도 납득한 듯한 표정으로 그 말을 들었다. 하지만 네로 자신은 납득한 듯한 표정조차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네로에게는 아내와 이혼하는 것보다, 애인과 재혼하는 것보다, 자신의 정신을 추스르는 것이 선결 문제였다. 슬럼프에 빠져 있는 사람은, 초발심으로 돌아가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보고, 그 일을 해보라는 충고를 받는 경우가 많다. 당시 로마의 지식은들이 모두 그랬듯이, 네로도 그리스 문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좋아하면서도 그 정신까지 로마에 도입하여 로마인 사이에 뿌리내리게 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그리스 문화에 조예가 깊은 세네카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네로는 자칫하면 극단으로 치닫는 성벽을 갖고 있었다. 네로는 그리스 문화를 도입하여 로마에 뿌리를 내리게 함으로써 로마를 문화국가로 변모시켜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로마 황제들의 초상이 언제 제작되었는가를 대충 구분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리스 문화 애호가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를 경계로 하여, 그 이전의 황제들은 수염이 없고 그 이후의 황제들은 수염을 기른 얼굴이기 때문에,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나 페리클레스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인은 풍성한 수염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로마인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었다. 로마 남자들은 수염을 깨끗이 깎는 것이 어엿한 사나이의 몸가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인의 철학이나 미술이나 문예는 존중했지만, 그리스인의 정치나 군사는 경멸하고 있었다. 그런 그리스인과는 분명하게 선을 긋겠다는 로마 남자들의 기개가 수염을 깨끗이 깎는 풍습에 나타나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전에는 황제들이 모두 수염을 깎았지만, 유독 네로만은 수염을 기르고 있다. 하지만 젊기 때문인지, 수염을 길렸다해도 풍성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턱 언저리를 간신히 덮은 게 고작이다. 황제에 즉위했을 당시의 초상에는 수염이 없다. 턱 언저리에 수염이 있는 초상은 어머니를 죽인 시점을 전후하여 나타난다. 이것은 그리스 애호가 표출되기 시작한 시기와도 겹친다.
'로마 올림픽'
서기 60년, 어머니가 죽은 지 1년이 지났다. 그해는 1년 동안 준비해온 일을 수도 로마에서 실행에 옮긴 첫 해가 되었다. 그것은 공식적으로 '루디 퀸케날리'(Lu야 quinquennali, 5년마다 열리는 제전)로 불렸지만, 일반적으로 '네로 제전'이라고 불린,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의 로마판이었다. 다만 네로는 그리스도 좋아했지만 새로운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과 구별하여, 로마에서는 5년마다 열기로 한 것이다. 기원전 776년에 처음 열렸다는 '올림피아 제전'의 경기 종목은 현대 올림픽의 육상 종목에 권투와 레슬링을 추가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다만 출전 선수는 남자뿐이다. 현대 올림픽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것은 마라톤이지만, 마라톤은 근대 올림픽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것은 마라톤이지만, 마라톤은 근대 올림픽 때 창설된 종목이니까 고대의 경기 종목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 대시 마지막 날 관중을 가장 열광시킨 경기는 네 필의 말을 몰고 속도를 겨루는 전차경주였다. 신체 하나로 승부할 수 있는 경기와 달리, 전차경주에 출전하려면 돈이 든다. 그래서 이 경기에는 유명인사가 출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전차경주가 인기를 얻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대에 전차경주에서 우승한 아테네 정치가 알키비아데스는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아테네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올릭피아에서 우승한 것이 그후 알키비아데스의 정치 경력에 도움이 된 것을 보면, '올림픽' 우승자가 영웅시되는 것은 고대에나 현대에나 별 차이가 없다. 티베리우스도 로도스 섬에 은퇴해 있을 때 이 전차경주에 참가하여 우승했다. 네로의 외조부인 게르마니쿠스도 월계관의 영예에 빛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로마 상류층에 속하는 이들도 전차경주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에 나갔다. 티베리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전차경주를 로마에 도입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반대로 네로는 그것을 생각하고 실행했다. 로마 제국 남자들도 그리스 남자들처럼 신체 단련에 힘써야 하고, 5년마다 그 성과를 대중 앞에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로는 운동경기만이 아니라 문예나 음악의 재능을 겨루는 자리도 마련해야만 그리스 문화를 완벽하게 이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반 로마인들도 그리스 문화의 정수인 시와 음악에 친숙해지게 함으로써 로마 제국을 문화국가로 변모시키려 했다. 네로 자신도 정치나 군사보다 시와 음악을 더 좋아했다. 그리고 재능도 있다고 자부했다. 애호가와 창조자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애호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네로도 애호가와 창조자는 일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문화국가를 외치며 문화 이식이나 교류에 열심히 몰두하는 데에는 창조자보다 애호가가 더 적합하다. 네로의 '로마 올림픽'은 성황리에 끝났다. 대중이 '네로 제전'이라고 불렀듯이, 수도 로마에 있는 공공시설을 모두 사용한 대대적인 축제였기 때문이다. 대경기장, 바티카누스 경기장, 폼페이누스 극장, 마르켈루스 극장, 발부스 극장 등 로마 전체가 행사장이 되었고, 입장료는 모두 무료였다. 게다가 프로 선수는 출전 자격이 없고 아마추어만 출전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또 그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네로는 대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아우구스티아니'-직영하면 '황제단'-라는 응원단까지 조직했다. 축제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되었다. 그러나 운동경기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깨우쳐주고, 그러려면 날마다 거르지 않고 신체를 단련해야 한다는 것을 로마인에게 자각시키려는 목적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네로는 체육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김나시움'을 지었지만, 여기에 와서 운동하는 사람은 청소년뿐이고 성인 남자들은 이곳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네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나시움 바로 옆에 로마식 목욕탕을 지었다. 여기에는 목욕 설비만이 아니라 마사지실과 오락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성인 남자들은 목욕탕에는 왔지만 체육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로마인에게 신체 단련은 어른이 될 때까지 몸을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일 뿐, 어른이 된 뒤에도 열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네로가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과 쌍벽을 이루는 '로마 올림픽'으로 발전시킬 계획이었던 '네로 제전'은 5년 뒤에 한 번 더 개최되었을 뿐, 결국 네로의 죽음과 함께 잊혀버린다. 김나시움도 같은 운명을 걸어서, 얼마 후에는 헐리고 다른 건물이 대신 들어섰다. 목욕탕은 그후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네로가 그리스적인 아름다움에 차츰 심취해가는 것과 반비례하듯, 네로 자신의 육체는 추하게 변해간 것이었다. 17세에 황제가 되었을 당시의 네로는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폐에 새겨진 옆얼굴은 갈수록 뚱뚱해진다. '네로 제전' 당시의 네로는 아직 스물두세 살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투실투실 살이 쪄서 보기가 흉하다. 굵은 목만 보아도 정상은 아니다. 로마 시민들 중에는 누구보다도 신체 단련이 필요한 건 네로 자신이 아닐까하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살이 찌는 것은 체질 때문이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네로는 육체적 아름다움과는 무관한 정치에-즉 로마적인 것에-전념하지 않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리스적인 것에 정열을 기울였다. 이렇게 모순되고 굴절된 정신의 균형을 잡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네로 제전' 이듬해인 서기 61년, 로마 제국의 변경이 오랜만에 소란해졌다. 브리타니아인이 로마에 반대하여 총궐기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역시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였다. 다만 소란해진 것은 제국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이고, 제국 전체의 '평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로는 로마 제국 전체의 안전을 보장하는 최고책임자다. 그 책무를 완수해야만 '황제'라고 불릴 자격을 갖는다. 일반 시민은 그런 일에 무관심한 나날을 보낼 수 있지만, 황제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응급조치는 현지 지휘관의 임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은 황제의 임무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24세의 황제가 취한 브리타니아 대책은 적절했지만,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조치는 잘못이었다. 하지만 이 실책은 결코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또 코르불로가 나서야 했지만, 최종적으로 네로의 외교가 성공한 사례로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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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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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 와헤니 - 히다차 족(북부 다코타 족)
"그것들은 곧 흘러가고 마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며, 그 밑바닥에는 영원히 변치 안는 흐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나는 늙은 인디언 여자다. 들소떼와 검은 꼬리 사슴들은 사라졌고, 우리 인디언의 삶의 방식도 거의 사라졌다. 어떤 때는 한때 내가 그것들과 함께 살았었다는 것이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내 아들은 얼굴 흰 문명인들의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책을 읽을 줄 알고, 자신의 소유로 된 가축떼와 농장을 갖고 있다. 이제 내 아들은 우리 히다차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사람들이 문명인들의 방식을 따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아들은 나한테 잘 대해 준다. 우린 이제 더 이상 옛날처럼 땅바닥에 세운 인디언 천막 속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집에는 굴뚝이 있으며, 내 아들이 결혼한 여자는 화덕 옆에서 음식을 만든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우리 부족이 누렸던 옛날의 방식을 잊을 수가 없다. 여름날이 되면 나는 종종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옥수수가 자라는 들판으로 몰래 나가곤 했다. 그곳에 서서 나는 옥수수 줄기를 붙잡고 노래를 부른다. 어렸을 때나 젊었을 때 했던 것처럼. 이제는 아무도 우리 부족의 옥수수 노래에 관심 갖지 않는다. 때로 저녁 나절이면 나는 강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다. 해는 기울고 저녁 어스름이 물 위에 번진다. 그 어스름 속에서 나는 자주 우리의 옛 인디언 마을을 본다. 인디언 천막마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리고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강물에서 사라진 전사들의 고함소리며 아이들과 늙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우리 부족은 강에서 조금 떨어진 들판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나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 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떤 날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친구와 함께 마을 앞쪽의 잡목 숲으로 열매를 따라갔다가 처음으로 그 강을 발견했다. 나와 내 친구는 그날 하루 종일 그 강에서 놀았다. 그리고 강가에는 우리가 한번도 만나지 못한, 어떻게 보면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남자가 인디언 천막을 짓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우리는 저녁 어스름이 안개와 함께 밀려오는 강물 아래쪽을 바라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덧없는 것이라고.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으며, 한 순간에는 반짝이지만 다음 순간에는 헤엄치는 사람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 버린다고. 하지만 흐름 그 자체는 영원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아직 어리지만 강물을 잘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렴풋하게나마 그걸 이해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걸 이해하게 되면 인생에서 아무리 슬픈 일이나 고통스런 일이 닥쳐와도 그것들이 곧 흘러가고 마는 물방울과 같은 것이며, 그 밑바닥에는 영원히 변치 않는 흐름이 있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그는 말했다. 또한 사람들이 세상의 일에 매달리는 것은 이러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 순간의 일을 전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꿈에 매달려 쫓아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나와 내 친구는 마을의 어른들에게 우리가 마을 동쪽의 강에 놀러간 얘기며, 그곳에서 만난 신비한 남자에 대한 얘기를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모두 우리더러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그런 강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더구나 신비한 남자 따위의 얘기는 우리가 지어낸 얘기라는 것이었다. 어떤 어른은 아마도 우리가 독성이 있는 열매를 잘못 먹고 환각 상태에 빠졌던 게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나와 내 친구는 억울하기도 했지만 정말로 우리 두사람이 환각 상태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우리는 마을의 어느 누구도 그 강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는 걸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강이 정말로 거기에 있다면 강에 다녀온 사람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나는 혼자서 들판으로 또 열매를 따러 나갔는데 또다시 강을 발견했고 그곳에 인디언 천막을 짓고 사는 남자도 다시 만났다. 나는 마을 어른들이 나와 내 친구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 것이 억울해서 그 남자에게 나와 함께 마을로 가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마을 어른들의 말이 옳다고... 내가 갔던 그 강은 세상에 존재하는 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 강이냐고 내가 묻자 남자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이 강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내 마음 안에 존재하는 강이라고. 그리고 강가에 인디언 천막을 짓고 살고 있는 자기는 바로 내 마음의 목소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만의 강을 갖고 있고 또 강가의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나는 아직 어려서 그러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발견한 마음의 세계를 사람들에게 자랑한 것이며, 또 자기만의 강에 대해선 누구에게도 자랑해선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을 어른들이 일부러 우리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의 세계란 비밀로 간직할 때 더욱 아름답게 반짝이고 더욱 깊고 푸른 강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자기만의 강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간혹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공허하고,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재물을 모으거나 권력을 얻는 데 그토록 열중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러한 사람일수록 어쩌다 발견한 실개천 같은 것을 큰 바다인 양 부풀려서 떠들게 마련이고, 그렇게 하면 그 실개천마저도 금방 말라붙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앞으로의 인생에서 힘들 때나 고요히 있고 싶을 때면 강으로 찾아와 그 남자를 만나겠노라고 내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아직 어린 나이의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은 한낱 인디언 여자에 불과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흘러가는 것들에게 마음이 붙잡히지 않게 해주었고, 나이가 들수록 삶의 흐름 자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모든 것이 다만 한 늙은 여자의 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을 바라보면 또다시 저녁 어스름 속에서 인디언 마을이 나타나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안다. 우리 인디언의 삶의 방식은 영원히 가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생명의 흐름 그 자체는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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