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3호 - 2024.03.29. 금요일(음력 : 02. 20.)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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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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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열의를 가지고 하라. ― 끌로딘느 꼴레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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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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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등장하는 말 중에 ‘갑질’이 있다.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말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약자인 상대에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가리킨다. 이 말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갑’에 접미사 ‘질’이 결합해서 만들어졌다. 보통 계약서를 쓸 때 계약의 두 당사자를 편의상 ‘갑, 을’로 칭하게 되는데, 이때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쪽이 ‘갑’이 된다. 이런 관습으로부터 ‘갑’에는 권력이나 지위가 높은 쪽, ‘을’에는 낮은 쪽의 의미가 덧씌워지게 되었다. 여기에 ‘질’이 붙어 새말이 만들어진 게 흥미롭다. ‘질’이 붙은 말은 대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물론 ‘가위질’이나 ‘바느질’처럼 부정적인 뜻 없이 단순히 그 도구를 사용해서 하는 일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직업이나 직책, 또는 사람이 하는 행위에 ‘질’이 붙을 때는 그 일을 비하하거나, 또는 그 일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가치 평가가 덧붙는다.
비단 ‘도둑질’ ‘싸움질’ ‘고자질’ 같이 본래 나쁜 일을 가리킬 때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선생질’이 있다. 학생들을 교육하는, 존중 받는 직업에 ‘질’이라는 접미사가 결합됨으로써 그 일을 하찮게 여기거나 낮잡는 상황에서만 쓰는 말이 돼버린다. ‘전화질’이나 ‘자랑질’도 마찬가지다. 쓸 데 없이 자주 전화를 하거나 지나치게 자랑을 많이 하는 경우를 비난하는 의미로만 쓰인다. 그런데 북한말에는 ‘질’에 그런 비하의 뜻이 없다고 한다. 새터민들 중에는 ‘선생질’을 ‘교사로서의 직분’이라는 평범한 의미로 썼다가 남한 사람들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사전에 없지만 ‘갑질’이란 말에는, 그런 행동이 해서는 안 될 ‘못된 짓’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머스트 해브’와 ‘워너비’
우리 언어생활에서 영어를 남용하고 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영어 단어를 가져다 쓰는 수준을 넘어, 둘 이상의 영어 단어를 결합한 구 구성도 무분별하게 쓰고 있다. ‘머스트 해브’와 ‘워너비’가 대표적이다. ‘머스트 해브(must have)’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의 준말로,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필수품’ 정도로 바꾸어 쓸 수 있다. 그럼에도 상품 판매자들이 상품을 광고하거나 홍보할 때 ‘필수품’ 대신 ‘머스트 해브’를 즐겨 쓴다. 최근에는 ‘머스트 해브’라는 말에 유추하여 ‘머스트 고(must go)’, ‘머스트 시(must see)’란 말까지 쓰고 있다. 반드시 찾아가 구경해야 할 장소를 가리킨다. 특정 여행지를 추천할 때 즐겨 쓴다.
‘워너비(wanna be←want to be)’란 말도 빈번하게 쓰고 있다. 유명 연예인을 동경하여 그들의 행동이나 복장 등을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아지다 보니 ‘워너비 현상’이란 말도 생겨났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수인 ‘SG 워너비’도 미국 팝 가수인 ‘사이먼과 가펑클(Simon & Garfunkel)’을 동경하여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시리즈로 방영되는 드라마에서 ‘(다음 회에)계속’이란 뜻으로 ‘to be continued’란 영어 자막을 쓴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유명 연예인이 방송에 출연하여 ‘너무하다’는 뜻으로 ‘투 머치(too much)하다’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다. 이 정도면 우리의 영어 남용이 정말이지 너무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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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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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에게도 길이 있다
인생서가 - 천상병
격언은 진리 이상이야.
진리는 합리주의 의존이고
인생은 진리의 수박 겉핥기이다.
인간은 체험만이 그것에 반역한다.
경력은 흥망성쇠의 골짜구니
모든 진리는 세월의 악세사리.
내 친구는 거의 모든 것에
통달했지만 모습이 바보고,
인생은 바보까지 관대하게 처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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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花(낙화) - 한용운
떨어진 꽃이 힘없이 대지(大地)의 품에 안길 때
애처로운 남은 향기가 어데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가는 바람이 작은 풀과 속삭이는 곳으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떨어진 꽃이 굴러서 알지 못하는 집의 울타리 사이로 들어갈 때에
쇠잔한 붉은 빛이 어데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부끄러움 많고 새암 많고 미소 많은 처녀의 입술로 들어가는 것을 나는 안다.
떨어진 꽃이 날려서 작은 언덕을 넘어갈 때에
가엾은 그림자가 어데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봄을 빼앗아가는 악마의 발 밑으로 사라지는 줄을 안다.
∼∼∼∼∼∼∼∼∼∼∼∼∼∼∼∼∼∼∼∼∼∼∼∼∼∼∼∼∼∼∼∼~~~~∼∼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불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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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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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려일실(千慮一失)
千:일천 천. 慮:생각할 려. 一:한 일. 失:잃을 실.
[원말] 지자천려 필유일실(智者千慮必有一失).
[동의어] 지자일실(智者一失). [반의어] 천려일득(千廬一得).
[참조] 배수지진(背水之陣). [출전]《史記》〈淮陰侯列傳〉
천 가지 생각 가운데 한 가지 실책이란 뜻으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하나쯤은 실책이 있을 수 있다는 말.
한나라 고조의 명에 따라 대군을 이끌고 조(趙)나라로 쳐들어간 한신(韓信)은 결전을 앞두고 ‘적장 이좌거(李左車)를 사로잡는 장병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공언했다. 지덕(知德)을 겸비한 그를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전 결과 조나라는 괴멸했고, 이좌거는 포로가 되어 한신 앞에 끌려 나왔다. 한신은 손수 포박을 풀어 준 뒤 상석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어 위로했다. 그리고 한나라의 천하 통일에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 있는 연(燕)/제(齊)에 대한 공략책을 물었다. 그러나 이좌거는 ‘패한 장수는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敗軍將 兵不語]’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한신이 재삼 정중히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패장이 듣기로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많은 생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하나쯤은 실책이 있고[智者千慮 必有一得]고 했습니다. 그러니, 패장의 생각 가운데 하나라도 득책이 있으면 이만 다행이 없을까 합니다.”
그 후 이좌거는 한신의 참모가 되어 크게 공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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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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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권오석
제1권 영웅대망 편
예산에서
바람이 아직도 차가운 정월. 군데군데 갯벌의 흔적을 남긴, 스산한 겨울 풍경이 펼쳐진다.
"대체,어디로 가는 거여? 엉뚱한 데로 가고 있지 않나!"
범강 장달이 같은 하인 두 녀석이 '사인교'의 뒤를 따르면서, 씩둑거렸다.
"야 덕보, 목소리가 높다. 우린 대감마님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둘 다 스물 안팎의 억세게 보이는 젊은이였다. 흰 무명의 겹으로 된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는 있지만 솜을 두지 않아 추워 보인다. 머리엔 '패랭이'를 썼고 등에는 상자처럼 생긴 별로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 봇짐을 엉덩뼈 위에 걸치듯 짊어졌다. 무슨 까닭인지 바짓가랑이는 무릎 밑까지 걷어올려져 털북숭이 정강이가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배도 고프다니까."
하고 덕보는 중천에 떠있는 엷은 햇살의 해를 올려다본다.
"덕산에선 뭘 했길래..."
억만이는 덕보를 놀리듯이 히죽 웃으며 말한다.
"흥,남이야."
덕보는 마른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아침 일찍 떠나는 상전 때문에 그는 허겹지겁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고 덕산에서 이곳 예산까지 40리 남짓이나 내내 걸어왔다. 배도 고플 만하다.
"배가 고파도 싸지,넌 바보니까."
억만이는 여전히 이기죽거린다.
"내가 왜?"
"어제 저녁,대감마님께선 분명히 우리한테 술밥을 사 먹으라고 돈을 주셨잖은가."
"그야 그렇지만..."
"그런데 넌 그 돈을 몽땅 '갈보'한테 쑤셔 넣었어,그러고서 아침엔 밥 사먹을 돈도 없어 주모한테 통사정을 하면 성앳장이 둥둥 든 막걸리를 한 사발 빈 속에 들이켰을 테지."
"아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아침에 제 입에서 술내가 푹푹 나더라.게다가 푸석푸석한 얼굴이며 움푹 기어들어간 눈을 보면 알쪼일세."
"흥!"
덕보는 코방귀를 뀌었지만 대꾸할 말은 없었다. 그러니 더욱 화가난다.
'개자식! 남의 속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알고 있잖아?'
사인교는 어느덧 논두렁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사인교란 문자 그대로 네 사람이 베는 가마이다. 가마꾼 넷이 지나기에는 너무도 좁은 길. 그럼에도 그런 길을 용케 지나려 한다.
"저놈들 꼴 좀 보라구!"
머쓱해졌던 덕보가 가마꾼을 가리키며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게처럼 걷고 있어."
가마꾼이 옆으로 한 말짝씩 번갈아 한 발을 들어 옮기고 있다. 하지만 게걸음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가 않다. 가마꾼은 언 듯 보기에도 하체가 발달되어 있었다. 그런 하체로 앞에서 두 명,뒤에서 두 명이 각각 균형을 앓는다면,아니 가마꾼기리의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가마째 검푸른 감탕인 논바닥에 나가떨어지고 말리라.
"너, 떨고 있잖아. 입술이 새파란 것이 추워 보인다."
억만이는 또 놀렸다.
"내가 왜 떨어?"
"추우면 가마 뒤에 가서 흔들리지 않도록 가마 횃대나 잡아 주지 그래."
"싫다. 그러다가 나까지 바닥에 뒹굴 거 아냐..."
덕보는 그렇게 말하다가 자기 말이 지나쳤다 싶었는지,얼른 둘러댔다.
"난 대감마님이 걱정되어서야,그런에 대감마님은 까딱도 하지 않으시네.혹시 여느 때처럼 졸고 계신 게 아닐까?"
아닌게 아니라 가마에는 학처럼 몸이 여윈 '노재상'이 올라타고 있었다. 그는 바로 강원도 평강사람 채제공으로, 호를 번암이라고 한다. 번암은 이때 나이 73세.좌의정이라는 현직 고관이었다. 그런 번암이 어째서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고을에서부터 서북 쪽 외진 오족산을 바라고 공로도 아닌 논두렁길을 가는 걸까? 본디 예산의 진산은 금오산이며, 고을 동북에 도고산이 솟았고 오족산은 그 지맥인 셈이다. 그리하여 예산의 옛이름은 오산 또는 고산이라고 불렸다. 고려 태조이후 지금의 이름이 되고, 조선조에선 천안부에 딸린 현이었다. 지명은 대체로 이두와 관걔가 있으므로 금오산이 곧 '오산'이고 도고산이 '고산'이었다고도 추정된다. 또 도고산이 계지맥 오족산은 우리말로 '까마귀발'인데 원래는 '검메' 아니면'검돌'이었을지도 모른다. 성종 때(1481) 노사신 등에 의해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범근내포라는 갯벌이 예산,대흥은 물론이고 청양까지 들어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범근재초는 분명한 이두 표기이고, 그것이 내포로 바뀌는 것이다. 지금, 번암은 흔들리는 높은 '좌대'에 않아 눈을 감고 있다. 아직도 기력이 정정한 그의 귀에 멋대로 지껄이는 하인들의 말이 들렸다.
"역시 가마꾼은 다르다구. 용케도 논두렁을 다 건넜어."
덕보는 감탄했지만,억만이는 여전히 핀잔을 준다.
"그러니까 넌 형편없는 멍텅구리야."
덕보도 이 말엔 약이 올랐다.
"듣자 듣자 하니까.이 자식! 사람을 병신으로 만들고 있잖아? 바보는 뭐고 멍텅구리는 뭐지!"
"멍텅구리가 바보보다 더한 거지."
"힝!"
"머리를 써 보라구. 내가 가마꾼이고 애당초 건널 수 없는 논두렁이라면 건너가지 않는다.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가든가 대감마님께 죄송하지만 잠깐 내려 주신시도, '쇤네'들이 업어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사인교는 접어서 가지고 건넜을 게 아니겠어."
덕보는 얼굴이 빨개졌다. 분하지만 듣고 보니 억만이의 말이 맞는다.
"그리고 가마꾼이 논두렁 길을 건넜다고 해서 뭐가 대단하지? 그들은 그들로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야. 너만 빼놓고서 그들이라도 우리만 못한 점도 있지."
"뭔데?'
억만이는 대답을 늦추며 히죽거렸다.
"말하자면...넌 덕산 고을에서 동전 한 푼 남기지 않고 다 까먹었지만, 나는 술밥에 고기까지 공짜로 실컷 얻어먹었단 말이야."
"그게 정말이야?" 하고 덕보는 눈이 둥그레졌다.
"어떻게?"
"우리가 누굴 모시고 있지? 영의정을 지내시고 지금은 '판중추부사'로 계신 대감마님을 모시고 있잖아?"
"음."
덕보는 아직도 영문을 몰랐으나, 억만이의 목소리는 번암에게 들으란 듯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넌 바보 멍텅구리, 아니 그보다 더만 멍충이라고 할까...히히."
덕보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옳거니, 대감마님의 이름을 팔아 손을 벌렸다는 거로구나."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내가 시골 녀석들에게 손을 벌린다고 생각돼?"
하고 억만이는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잇는다.
"귓구멍이나 후벼내고 똑똑히 들으라구. 주막에서 보니까 이방인지 호방인지 아니면 형방인지 그건 몇 녀석들이 계집을 하나씩 끼고 앉아 흥청거기고 있잖아."
"그래서?"
덕보는 입 안이 바작바작 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덮어좋고 들어갔지."
"그랬더니?"
"놈들은 놀란 듯,아니 흥이 깨졌다는 듯이 도끼눈을 뜨면서 내 아래위를 훑어보더군. 그가짓 촌놈들이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나는 무서운 게 없어. 하지만... 이 점이 중요해."
덕보는 아주 넋을 잃고 있다. 억만이의 말에 넘어가고 있었다.
"상대편이 세게 나오면, 이쪽은 한 발 물러선다. 그리고 한 방 꽝하며 먹여 주는 걸세."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어?"
하고 덕보는 화제가 어리둥절하겨 물었다.
"싸우는 요령이다. 아니면 우리 같은 종들이 쉽게 살아가는 방법이랄까..."
그래도 덕보는 억만이의 말뜻을 잘 모르고 있다. 번암은 가마 속에서 귀를 기울이며 혼자 미소지었다. 두 하인의 말이 그로선 많은 참고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어떤 방식을 좇아 살고 있다. 신념이라고 해도 좋다. 번암 채제공은 당시의 인물로는 속이 트인 분이었다.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라도 무조건 무시하거나 위엄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이런 점에서도 그는 당대의 명신이었다. 시대를 좀 엎선 인물이었다.
"그래서..."
억만이는 조금 사이를 두었다가 앞서의 말을 게속했다.
"그때 나는 허허 웃고,사실인죽 헤헤거리며 굽실거렸지만, 이것 어르신네들 자리인 줄 모르고 불쑥 들어와서 미안하외다. 참,인사돌리겠습죠. 쇤네로 말하면 홍주목까지 채대감 나리를 모시고 갔다 오는 길입지요 했지."
"그랬더니?"
"그러자 그 말 한마디에 녀석들의 설설 기는 골이란..." 하고 배를 잡아가며 웃는다. 아전은 지방의 '구실아치'인데 그 횡포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백 명이면 아흔아홉가지 그런 부류들이 많았으리라. 도 으건 인간일수록 권력에 약하다. 상대편이 서울 대감 집의 하인일망정 단번에 주눅이 들고 만다. 아마도 주모의 젖가슴을 떡 주무르듯 하든가 치마 아래로 손을 집어넣고 있던 녀석들이 허겁지겁 당황하며 억만이를 술상머리에 않도록 했으리라. 덕보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자네는 술밥을 공짜로 얻어막었다는 건가?"
"두말하면 잔소리지. 싫다 하여도 저쪽에서 입에 퍼 넣어 줄 정도였네."
그러자 덕보의 눈은 번쩍인다. 그리고 다시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노자라는 명목으로...?"
번암은 이 대목에서 귀를 기울였다. 물론 참견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억만이 무슨 대답을 하는가 궁금했다. 그런데 억만이는 히히 웃을 뿐 그런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상전의 귀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받았나?"
덕보는 다그친다.
"야, 까마귀가 날고 있다. 동네가 가까운 모양이다."
가마는 아까와 다르게 흔들린다. 노인이라 남부이(방한용 두건)를 쓰고 있지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왱왱거렸다. '생각하면 긴 일생이었어.' 그 바람소리에 수많은 사람들의 외침이 섞여 있는 거만 같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공명정대하게 살아왔다.' 번암은 감았던 눈을 뜨고 전방을 응시한다. 제법 넓고 죽 뻗은 '방죽'ㅡ이 둑길을 사인교가 나는 듯이 가고 있다. '길, 사람이 다니는길!' 소리내어 중얼거렸다.노인은 과거를 돌이켜보기를 좋아한다지만, '도대체 조선에 길이란 게 있었던가.' 하며 젊었을 때엔 과격한 생각을 가졌었다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입가에 새겨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지금도 같았다. 번암은 영조 19년(1743),24세로 임금이 직접 시럼관이 되는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라는 최말단 벼슬아치로 첫발은 내딛었다. 그것도 남인이던 번암으로선 이례적 발탁이었다. 당시로선 문벌이나 당파만이 아니라 학통 역시 중요했다. 번암은 성호 이익의 문하이다. 동문으로 순암 안정복,동호 윤동슈,소호 윤동식,운암 이한영이 있지만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간 것은 그뿐이었다. '그것도 50년을 험악한 관계에서 보냈었다. 앞으로 몇년을 더 살지,험한 꼴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남인,정식 명칭은 오인이다. 오는 12자로서 남쪽을 나타낸다.번암이 소년(젊은이를 말함)시절,오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있었다. 번암은 '탕평책' 덕분으로 등용되었는데, 영조는 깊은 고죄라기보다 한이 있었다. 탕평이란 왕이 가진 한의 간접 표현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영주대왕은 임술년(1742)3월 반수교 모퉁이에 탕평비를 세웠다. 반수교는 대궐이던 창경궁의 반궁,곧 세자의 거처옆을 흐르는 개천에 걸렸었다. 그러고 보면 탕평비는, '세자,너는 아침저녁으로 이를 보고 명심하고서 절대로 당파라는 것이 조정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렷다.'는 뜻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개천이라 하면 더러운 오물이 흐르는 하수도를 연상하기 쉽지만,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도시 계획으로 도랑을 만들어 깨끗한 물이 늘 흐르는 내였다. 이곳은 현재의 명륜동 성균관과도 이웃한 곳으로,산 좋고 물 맑기로 다른 나라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장헌세자는 이때 아홉 살.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영조에겐 장헌세자에 앞서 경의군이 있었다. 정빈이씨 소생으로 숙종 45년(1719)에 탄생했소,영조의 즉위와 함께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무신년(1728)에 열 살로 승하해ㅛ다. 이 왕자는 나중에 진종으로 추존되고 정조 대왕은 이분께 출계(양자로 나감)했다는 형식으로 왕위에 오른다.젊은 번암으로선 당시 임금의 한이 무엇인지 알 까닭이 없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가문과 조상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오인에 대해 여기서 아직은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그 결정적 몰락은 역시 숙조으이 계비 장희빈 사건과 관련이 있다. '평강 채씨'의 족보를 보면 번암의 고조로 호주 진후가 있는데 효종 대의 문장가로서 대제학,이조판서를 역임했다.택당 이식과 친교사이 였으며 우계와 율곡을 논하는 상소문을 올린 일도 있었다. 당시 거의 신성시되었던 두 분을 비판한 것이므로 그 내용(전하니 않아 불명)을 떠나 뼈있는 문인이라 하겠다. 그리소 형주 유후의 아드님으로서 시귀가 곧 출계하여 소주의 후사가 되었던 것이다. 시귀는 부사까지 지냈는데,호주의 아드님으로 시상이란 분이 있다. 뒤늦게 태어났던 모양으로,이 시상공이 바로 번암의 증조부였다. 시귀공의 사촌 또는 재종간으로 시흠,명귀의 이름이 보인다. 명귀의 양자인 겸길은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홍문관 정품)였는데 숙종 9년(1683)에 형사한다. 그 상세한 내용은 불명하지만 허적,윤건의 사사에 뒤이은 여러 옥사와, 또한 서이니 노소론으로 분당되는 때이므로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을 가져온 때이다. 또한 시흠의 아드님으로 이장(현길, 마찬가지로 자를 피한 이름)은 무인으로 어영의 초관(봉화관계)이었지만,기사년(1689)에 숙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폐비(여기서의 왕비는 인현왕후 민씨)가 옳지 않음을 주장하고 있다. 채이장은 당연히 철퇴를 맞고 유배되었지만, 용기 있는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번암의 증조부 시상송은 명윤,성윤,정윤,팽윤 4형제를 두었다 그 차남이던 구봉 성윤은 문장이 뒤어났고 참판을 지냈으며 번암의 조부였다. 성윤공은 다시 응겸,응만,응일 3형제를 두었는데, 막내인 응일공이 번암의 아버지로 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이씨로 이만성의 따님이었다.번암이 배치된 승무누언은 외교문서, 주로 청나라와의 교린문서를 관장하는 곳이다. 이른바 대국을 상대하는 국서를 취급하므로 글자 하나라도 잘못 쓰면 목이 달아나는 막중한 짖책이다. 그거나 선비라면 누구라도 부러워하는 엘리트 코스였다.번암은 열심히 일했고 보람도 있었다. 이 해 3월, 세자의 관례(성인식)가 올려진다. 그리하여 다음해 정월, 풍상 홍시 홍봉한의 따님이 세자빈으로 책봉된다. 이런 경사들은 청나라에 보내는 교린 문서에 올라가는 사항이므로 번암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었다. '그때는 좋았어. 아직 젊었고,세상에 무서운 것이 하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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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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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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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양분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 무엇으로도 보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인생은 미래를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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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사물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없는 저녁에는 중대한 사건을 처리하거나 어려운 결정을 내리지 마라. 아침이 되면 우리의 정신은 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사물들이 선명하게 인식되면서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귀중한 시간을 늦잠으로 단축시키거나 헛된 일에 허비하지 말아야 한다. 아침 시간을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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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도 피곤한 저녁 시간이 아니라 선명한 아침 시간처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공기 중에 녹아 있는 신선함과 생명의 풋풋함을 호흡하라. 그것은 저녁의 어스름한 공기 속에 떠 있는 피곤함이나 몽롱함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침 공기는 불쾌하거나 우울하던 그 전날의 기분을 완전히 소멸 시키고 새로운 희망의 소리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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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감할 때가 되면 피로한 몸과 마음 때문에 이해력과 판단력이 흐려진다. 따라서 현실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이성도 마비된다. 불안은 어둠과 쉽게 결합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어둠 속에서 더욱 커진다. 피로로 인해 판단력이 약해지면 상상력은 더욱 날카롭게 변한다. 날카로운 상상력은 우리의 심장을 위협할 만큼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물이 음울한 모습과 불길한 형태를 취하면서 우리를 괴롭힌다.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한밤중에 눈을 떴을 때, 우리는 무서운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환영을 보기도 한다. 환영은 공포로 우리를 위협한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 오면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상상의 악몽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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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작은 일에 얽매여서 미래의 중요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주의하라. 아주 작은 물체라도 눈앞에 있게 되면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아서 외부 세계의 다른 것들을 차단해 버린다.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은 때때로 실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일에 시간을 빼앗겨서 다른 중요한 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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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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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해병대는 무난히 한강 다리를 건넜다. 공수단도 건넜다. 한강 다리를 건넌 해병대는 서울 시청 쪽으로 달려가면서 분산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새벽 4시 20분. 그들한테 주어진 임무는 서울시 경찰국산하의 각 경찰서와 경찰국, 치안국, 내무부를 접수하는 일이었다. 해병대가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손을 흔들며 환영하는 장병들이 있었다. 이미 장병들이었다.
"시내는 무방비 상태다. 자동차를 타고가라!"
그 중의 어떤 장교가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새벽 4시 30분. 해병대 선두부대의 일부가 위협사격을 가하며 용산경찰서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한강 다리 쪽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총소리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숙직서원들은 별안간에 위협사격을 가하며 돌격해 들어오는 해병대에 혼비백산, 도망칠 구멍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어떤 자는 엉겁결에 책상 밑에 숨는가 하면 또 어떤 자는 지붕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윤보선과의 통화를 끝내고 506방첩대를 떠난 장도영이 육군본부 참모총장실로 들어선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그는 비서실장 김병삼을 통해서 쿠데타군이 육군본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참모부장들은 뭘 하고 있나?"
장도영이 물었다.
"지금껏 참모부장 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리자 달려나온 각 참모부장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참모총장이나 참모차장이 주재한 회의가 아니니까 그저 의견교환을 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들 일치를 보고 있었다. 쿠데타군과 싸우게 되면 모두가 자멸하게 된다. 그러니까 희생자를 적게 사태수습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 의견은 옳았던 것 같다. 동족간의 유혈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쿠데타를지지하느냐, 아니면 반대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참모부장들은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의견일치라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각하, 이제 각하께서 육군본부로 오셨으니 각하께서 친히 참모부장 회의를 주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 김병삼이 의견을 구신했다. (육군본부가 이미 쿠데타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또 다른 쿠데타군이 지금 서울 시내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을 텐데 참모부장 회의를 주재해서 그 어떤 결정을 내린단 말인가?) 아마도 장도영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김병삼의 의견따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왼손을 턱에 고이며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이 양반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쿠데타 진압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지지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김병삼은 도무지 장도영의 마음속을 읽기가 어려웠다.
공수단과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너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비상이 걸린 모양이군. 불이 환히 밝혀져 있는 것을 보니.) 그는 한동안 그 불빛들을 노려보고 있다가 차를 남산으로 몰았다. KBS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계획으로는 KBS가 제2지휘부로 정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때가 새벽 4시경이었을 것이다. 헌병감 조흥만은 헌병 1개 분대를 보내 KBS 경비 임무에 다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그러나 한강의 저지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흥만은 서둘러 KBS에 파견했던 헌병분대에게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었다. 그는 이 시간까지도 제6관구 사령부에 있으면서 이 철수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공수단 1개 중대 병력이 그를 따라 붙었다. 박정희를 경호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와 그를 경호하는 공수단 병력이 남산 KBS 청사 앞에 당도한 것은 경비헌병이 철수한 직후였다. 이때 시간은 새벽 4시 30분쯤. KBS 앞에 이르자 드리쿼터에서 뛰어내린 공수단 장병들은 공중에 대고 잇따라 위협사격을 퍼부어 댔다. 그때 마침 아침 방송을 위해 막 숙직실에서 나와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아나운서실로 향하고 있던 숙직 아나운서 박종세(朴鐘世)는, 별안간 고막을 찢어대는 총소리에 놀라 아나운서실로 뛰어들기가 무섭게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꼭꼭 숨어버렸다. (기습공격하고 있는 게 아냐?) 그는 된 새벽의 총소리가 어김없는 괴뢰군 게릴라 부대의 기습공격이라고 판단했었다. KBS 뜰에서 퍼부어대는 총소리에 놀란 것은 박종세만이 아니었다. 그때 방송준비를 하느라 방송기재를 점검하고 있던 숙직 엔지니어도 총소리에 놀라 후다닥 믹서실에서 뛰쳐나가 방송국 뒷담을 넘어 도망쳤다. 공수단이 방송국 청사를 완전히 장악하자, 박정희가 들어왔다.
"혁명공약을 방송해야겠어."
그러나 방송 기술자들이 없었다.
"방송 기술자들을 찾아내!"
박정희의 명령에 집총을 하고 경호하고 있던 공수단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술자를 찾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가 온 청사 안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한 공수단 병사가 책상 밑에 숨어 있는 박종세를 발견했다.
"이리 나와!"
총구를 들이대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박종세는 엉금엉금 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병사의 총부리에 밀리어 박정희 앞으로 끌려갔다.
"이름이 뭔가?"
박정희가 물었다.
"박종세라고 합니다."
박종세라는 이름은 박정희도 라디오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때 한창 이름을 날리던 아나운서였다.
"혁명방송을 좀 해줘야겠소."
박정희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혁명방송이라니 어떤 방송을 하란 말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엔지니어가 있어야 방송을 할 것이 아닌가?
"방송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박종세는 기술자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꽁무니를 빼려 했다. 이들이 혁명군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어떤 종류의 혁명군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칼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방송을 했다 하더라도 사태가 급전직하(急轉直下)하게 되면 방송을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다시 명령했다. 한데 총소리에 놀라 뒷담을 넘어도망쳤던 숙직 엔지니어는 일단 위급을 면하기 위해서 도망치기는 했으나 방송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어디 먼 데로 도망을 치지 못하고 방송국 밑 민가의 처마 밑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총소리가 멎자 다시 방송국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송을 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는 언덕을 올라와 청사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공수단 병사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방송 기술자라고 하자 병사는 그를 박정희 앞으로 끌고 갔다. 이제 방송을 할 수 있는 여건은 갖추어졌으나 문제가 또 생겼다.
"종필이, 종필이, 어디 있어?"
박정희는 두리번거리며 김종필을 찾았다. 방송원고는 김종필이 갖고 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김종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소령, 이 소령은 어디 있어?"
김종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박정희는 이번에는 부관 이낙선(李洛善)을 찾았다.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구 있기에 여지껏 나타나지 않고 있는 거야?"
박정희는 역정을 냈다. 김종필, 이낙선 이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었을까?
"내가 갔다 오지!"
박정희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같은 시각. 새벽 4시 40분. 장도영으로부터 즉시 시청 앞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은 휘하의 연대장인 육군 대령 권용성(權用性)에게 3개 소대를 지휘케하고, 자신은 1개 소대를 지휘하며 지체없이 시청 앞으로 달려왔다. 그때가 새벽 4시 40분이었다. 막상 시청 앞에 이르러 보니 공수단과 제6관구 사령부 병력으로 꽉 차 있었다. 이상국은 기가 막혔다. 공수단과 제6관구 사령부 병력이 쿠데타군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대를 대기시켜 놓고 506방첩대로 달려갔다. 장도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총장께선 어디로 가셨습니까?"
이희영에게 물었다.
"총장께선 육군본부로 가셨습니다."
이희영의 대답을 듣자, 이상국은 또 한번 기가 막혔다. 시청 앞으로 출동하라고 했으면 어떤 후속 조치를 취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뭐 이런 참모총장이 다 있어? 쿠데타를 방조하자는 거야?) 욕설이 절로 솟았다. 그는 육군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나, 30사단 이상국 사단장이오. 총장님을 좀 바꿔 주시오."
"지금 회의중입니다."
전화를 받는 자가 부관인 모양이었다.
"그럼 총장님께 내가 부대를 이끌고 서울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달해 주시오."
전화를 끊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그는 막막하기만 했다. 서울 시청 앞광장에는 쿠데타군이 꽉 차 있고, 그렇다고 명령 없이 부대를 귀대조치할 수도 없고, 그는 답답한 가슴을 안고 대기시켜 놓은 부대로 돌아왔다. 그가 부대로 돌아온 것을 보았는지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인 육군 중령 박원빈이 이상국 앞으로 달려왔다.
"사단장님은 부대를 이끌고 중앙청으로 가서 경계임무를 맡아 주시오."
(중앙청으로 가서 경계임무를 맡으라? 그러면 날더러 쿠데타군으로 둔갑을 하란 말인가?) 그는 반감이 불끈 일었다. 그렇다고 있기도 싫었다. 그들하고 떨어지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국은 지체하지 않고 부대를 돌려 중앙청으로 향했다. 새벽 4시 59분. KBS의 전파는 애국가를 실어보내고 있었다. 방송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원고를 가질러 간 박정희는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새벽 5시 정각. 시보가 울리자 박종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금부터 5월 16일 아침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박종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아나운서 멘트가 끝나자 새벽의 방송담당자들은 우선 잔잔한 음악을 내보냈다. 혁명을 했다는 사람들이 방송준비를 하라고 명령하고는 어떤 방송을 하라는 후속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잔잔한 음악을 대신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성공할 때에 대비해서 혁명공약 인쇄를 맡겨 놓은 인쇄소는 안국동에 있는 이학수(李學洙)가 운영하는 광명인쇄소였다. 이 인쇄물의 담당이 바로 김종필과 이낙선이었다. 박정희는 방송시간이 돼도 김종필이 나타나지 않자 몸소 광명인쇄소로 달려가 인쇄물을 가지고 다시 KBS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때가 새벽 5시 2분. 원고지를 박종세 앞에 내놓고 읽으라고 눈으로 신호를 했다. 박종세는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는 군부는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군사혁명위원회는 6개 항의 공약을 내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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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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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3부 클라우디우스 황제
우편제도
하지만 개개의 톱니가 아무리 잘 만들어져 있어도, 그것만으로 기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의 톱니를 맞물리게 해야만 기능도 향상된다. 시속 500킬로미터의 고속을 낼 수 있는 열차가 하루에 한 편씩 다니는 것보다 시속 300킬로미터의 열차가 15분마다 한 편씩 다니는 게 더 효율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식 가도는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에 이미 존재했다. 하지만 그것을 도로망이라는 네트워크로 만든 것은 로마인이다. 우편도 페르시아 황제가 이미 개발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국 전역에 걸친 우편망으로 만든 것은 로마인이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국영 우편제도를 쿠르수스 푸블리쿠스'(cursus publicus)라고 부르는데, 의역하면 공용 파발'이다. 문자 그대로, 공적인 명령과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창설한 것이었다.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려면 이런 제도를 확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시대에는 무언가를 남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을 때는 사설 우체국에 맡기거나 자기 집 노예에게 심부름을 시켜야 했다. 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우편제도를 '공용' 파발이라고 불렀을 정도니까, 공적인 경우에만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다. 개인은 여전히 공화정 시대와 같은 방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군용 도로로 부설된 로마 가도가 민간에게도 활용되었듯이 '공용 파발'을 위한 네트워크를 개인 파발꾼도 이용할 수 있었다. 로마 가도 연변에 10킬로미터 내지 15킬로미터의 거리를 두고 무타티오네스'(mutationes), 즉 역참이 설치되었다. 역참 사이의 거리는 지형에 따라 결정된다. 산악지대라면 10킬로미터, 평야지대라면 15킬로미터가 보통이다. 역참에는 몇 마리의 파발마가 항시 준비되어있고, 장소에 따라서는 파발꾼도 대기하고 있었다. 역참 다섯 곳마다 만시오네스'(mansiones)라는 역관이 설치되었고, 거기에는 교대할 파발마와 파발꾼 외에 나그네를 위한 숙박시설도 완비되어 있었다. 식사도 해결할 수 있는 여인숙과 마구간은 물론, 마차 수리공과 우체국 직원들도 있었다. '무타티오네스'는 요즘으로 치면 고속도로 연변에 있는 주유소와 비슷하다. 그리고 aostus의 어원인 '만시오네스'는 모텔과 레스토랑과 차량 정비소까지 갖춘 대형 휴게소 같은 곳이다. 게다가 여행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기도 했다.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곧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고, 일반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치안이라고 확신한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이 네트워크를 더욱 확장하는 동시에, 만시오네스에 경비원 대기소까지 설치했다. 사람의 여행도, 편지의 여행도 더욱 안전해진 것이다. 그리고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실시한 개선책은 이 국영 우편제도를 공용만이 아니라 민간에게도 개방항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에게 이 아이디어가 어떻게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사료는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도로 시작된 브리타니아 정복에 매진하고 있는 장병들의 생활 환경을 개선해주기 위해 여러 가지 배려를 아끼지 않은 황제였다. 공기 맑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하늘도 땅도 습기가 많은' 브리타니아에 간 병사들이 하다못해 고국에 남아 있는 가족과 편지라도 쉽게 주고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게 아닐까. 당시 영국은 로마 제국의 어디보다도 생활 수준이 낙후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도 국영 우편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결과, 민영 우체국은 장사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민영 우체국이 다시 활약 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제국이 쇠퇴기로 접어든 뒤였다. 우편제도 개선책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치자로서의 클라우디우스는 일반인의 생활 환경 향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변호비 상한선을 법제화한 것이다. 아무리 로마인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법체계의 창시자가 로마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로마인은 법체계의 창시자답게 변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어서, 옛날부터 변호사가 활약하고 있었다. 변호는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사람의 책무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변호비는 무료였다. 하지만 개인의 책임감에만 의존해서는 체제가 존속하기를 바랄 수 없다.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에만 의지하면, 능력은 있어도 가난한 변호사(오라토르)는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결국 공동체의 불이익을 초래한다. 또한 고매한 이상을 내건 체제에는 항상 빠져나갈 길이 생기게 마련이다. 변호비는 무료지만, 의뢰인에게 선물을 받거나 의뢰인의 유산 상속인이 되는 편법을 사용하여 실제로는 변호비를 받고 있었다. 공화정 말기의 로마에서 제일가는 변호사로 명성을 날린 키케로가 지방의 기사계급 출신인데도 엄청난 재산을 모은 것은 바로 이 편법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하정 시대의 로마에서 우수한 변호사가 많이 배출된 것은 변호사로 성공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변호사로 성공하면 정치가로 출세할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을 민회에서 선출하던 시대였다. 변호 능력은 곧 득표 능력과 연결되었다. 그런데 이미 변호를 의뢰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앞으로 의뢰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유권자로서 표를 던지니까, 능력은 있어도 변호비가 지나치게 비싼 변호사에게는 표가 모이지 않는다. 그래서 변호비에도 자연히 제동이 걸렸다.
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여전히 집정관을 비롯한 국가 요직(군무에 종사하는 무관을 제외한 문관)은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이들을 선출하도록 제도를 바꾸었다. 칼리굴라는 선거권을 민회에 돌려주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그것을 다시 원로원으로 옮긴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서 선거를 하느냐가 아니었다.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것 자체가 두 가지 이유로 매력을 잃어버렸다. 우선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집정관은 이제 더 이상 국정의 키잡이가 아니었다. 둘째, 집정관을 지낸 뒤 전직 집정관이라는 이름으로 부임하는 속주총독도 이제는 공화정 시대처럼 한재산 모을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는 직권을 이용하여 축재한 총독을 엄하게 다스렸다. 총독의 지위를 이용하여 속주민을 등친 사실이 밝혀지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형뿐이다. 목숨을 걸고 모은 재산도 유죄판결을 받으면 몰수당한다. 따라서 그들이 변호사업으로 돈을 버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은 당연하다. 다만 변호비는 원칙적으로 무료니까, 편법만 발달해서 변호비도 천장부지로 올라갔다. 이래서는 변호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꿈에 불고하다. 클라우디우스는 변호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그 상한선을 정했다. 상한선은 1만 세르테르티우스. 병졸의 10년치 봉급에 해당한다. 싸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한선이다. 그리고 로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이 사유재산 보호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로마인들은 유형의 재산이든 무형의 재능이든 개인의 소유물을 존중해 주는 전통을 갖고 있었다. 우수한 변호사는 비싼 대가를 받는 게 당연했다.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는 상당히 훌륭했지만, 황제에 즉위하기 전에 역사를 연구하던 시절의 버릇이 고개를 들 때도 있었다. 역사가는 자칫하면 사소한 문제에 구애받기 쉽다. 서기 48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세기제'(Lu야 saeculares)를 거행한다고 발표했다. 로마건국 800주년을 기념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난번에 '세기제'를 거행한 지 64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왜 또 축제를 치르는 걸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역사가 황제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기원전 1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아그리파와 공동으로 거행한 '세기제'는 계산을 잘못한 것이고, '세기제'가 한 세기마다 거행하는 것이라면 로물루스가 건국한 지 정확히 800년이 서기 48년에 거행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하면 납득할 수밖에 없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17년에 처음으로 '세기제'를 거행하고, 시인 호라티우스에게 세기제 찬가'(카르멘 사이쿨라레) 제작을 의뢰하고, 축제를 어디서 어떤 식으로 치를 것인지를 자세히 규정한 아우구스투스는 자기 계산이 틀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잘못을 저질렀다. 건국한 지 몇 년이 지났는지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내전을 끝내고, 제정을 확립하고, 그리하여 로마 제국 전역에 '평화'가 확산되고 있던 기원전 17년, 유일한 패권자로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해야 할 운명인 로마 시민에게 로마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재인식시키는 것이 '세기제'의 목적이었다. 기원전 17년은, 기원전 30년에 최고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에 사실상의 황제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로마 제국 확립에만 골몰할 수 있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 '세기제'를 어디서 어떻게 거행할 것인지를 세부까지 규정하고, 그것을 새긴 대리석판을 포로 로마노 한켠 벽에 박아넣은 것도 한 세기마다 이 축제를 거행함으로써 로마인의 자긍심을 재인식하라는 의미였다.
이 의도에는 클라우디우스도 찬성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격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일이라 해도, 잘못된 계산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클라우디우스의 학자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기 48년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지 800년째가 되는 해였다. 최고제사장이기도 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과 함께 '세기제'를 주최할 동료로 비텔리우스를 임명한다. 그리고 서기 48년의 '세기제'는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세부 규정에 따라 거행되었다.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제6권(171쪽)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세기제' 거행으로 로마 제국의 기관차라는 자긍심을 재인식한 것은 누구보다도 클라우디우스 황제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해에 그는 58세를 맞았다. 황제에 즉위한 지 7년이 된다.
브리타니아 정복은 느리게나마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제국의 다른 전선에서도 방위체제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황제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제국의 안전보장은 어디에도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로마의 군단기지, 로마의 퇴역병을 이주시켜 건설하는 식민도시, 원주민에게 모든 자치를 맡기는 자유도시, 원주민에게 내정의 자치만 맡기는 지방자치단체 등을 핵으로 하고, 이 핵들을 로마식 가도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대동맥 시대를 지나 제국 전역에 모세혈관을 뻗치는 시대로 접어들어 있었다. 다만 이런 수수한 일은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처럼 수도의 가십거리를 뒤쫓는 경향이 강한 인텔리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진 권력을 이용하여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과 권력은 없지만 비판능력은 있는 사람의 차이는 있지만, 양쪽 다 같은 로마인이다. 사회간접자본이 중요하다는 것은 로마인들에게는 피와 살처럼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이 면에서 클라우디우스가 큰 공헌을 한 것은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항'
속주까지 범위를 넓히지 않고 수도와 그 주변에만 한정해도, 클라우디우스의 공공사업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칼리굴라 시대인 서기 38년에 착공한 수도공사는 클라우디우스 시대에도 착실히 진행되어, 전체 길이 70킬로미터는 고가수도로 만들 수밖에 없는 대공사인데도 4년 뒤에는 완공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과 동시에 착공한 또 하나의 수도가 완성되면 수도 로마에 집중된 수도는 모두 아홉 개가 되고, 수도 주민에게는 1인당 하루에 900리터나 되는 물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은 위생 수준이 높아진다는 것도 의미했다. 하지만, 자기가 시작한 사업에 더 많은 애착을 갖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칼리굴라의 유업인 수도공사보다 오스티아 항만 공사에 더 관심을 쏟은 것도 당연히 것이다. 이 공사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한 이듬해에 착공되었다. 그는 이런 대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처지가 되자마자 당한 오스티아 항만 공사를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착공한 지 12년 만에 이 항만이 완공되었을 그는 암살당했고, 완공식은 네로 황제가 거행하게 된다. 처음엔 건축가들도 황제의 생각에 맹렬히 반대했다. 고대에 최초의 건축서를 간행한 비트루비우스도 강어귀에 항구를 건설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단언했다. 하천에서 흘러나오는 토사를 결국 항구가 메워져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는 역사가였다. 세계의 수도이기도 한 로마의 외항은 지형적으로 적합하면 어니나 좋은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건축가나 엔지니어들의 반대를 물리쳤을 게 분명하다. 물론 이것은 내 상상일 뿐이지만, 역사가의 시야에는 항상 인간이 있다. 테베레 강은 로마인의 '혼'이다. 그 테베레 강에 로마인은 다음 페이지의 복원 모형에서도 볼 수 있는 완벽한 설비를 갖추어 항구로 활용했다. 하안에 있는 이 항구는 강어귀에 있는 오스티아 항과 짝을 이루고 있다. 오스티아 항이 항구로서 기능을 발휘해야만 테베레 강을 수로로 활용할 수 있다. 로마의 외형은 테베레 강어귀에 자리잡고 있는 오스티아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테베레 강에서 흘러나오는 토사로 메워질 위협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있다. 오스티아에 본격적인 항구를 만들겠다는 황제의 결단에 따라,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엔지니어들에게 맡겨졌다. 전문가들이 생각해낸 방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언젠가는 토사로 메워질 게 뻔한 강어귀 부근에는 항구를 건설하지 않는다.
(2) 항구는 오스티아에서 북서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에 건설한다. 오늘날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공항의 바로 남쪽에 해당한다.
(3) 이 항구와 테베레 강은 운하로 연결하여, 오스티아를 거치지 않고도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와 연락할 수 있게 한다.
(4) 새 항구와 로마 사이에는 가도를 부설하여, 육로로도 로마와 직접 연결될 수 있게 한다. 이 발상은 '비아 포르투엔시스'(직역하면 '항구 가도')로 실현된다.
(5) 황구에는 선착장 창고 및 필수불가결한 설비만 갖추고, 교역장이나 교역회사 사무소는 오스티아에 남겨둔다. 새 항구와 오스티아항구는 가도를 통해 육로로도 연결될 수 있게 한다. 오스티아와 로마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로와 육로인 '오스티아 가도'로 이어져 있었다.
후세의 우리들은 그로부터 반세기 뒤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크게 개조한 모습밖에는 알 수 없지만,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애초에 항구를 건설한 첫째 목적은 제국 각지와 로마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선박의 피난항을 건설하는 게 아니였을까. 로마와 역사를 함께 한 오스티아 항구의 기능은 그대로 남겨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스티아는 강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피난항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로마의 외항 오스티아를 계속 활용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여 오스티아 항구의 결함을 보완하려 한 게 아닐까. 그래도 '클라우디우스항'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항구의 건설공사는 인간이 자연에 도전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그것을 보면, 로마인의 토목사업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공사는 우선 해안의 땅을 파내려가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해안이라서 군데군데 늪이 있는 모래땅이라는 이점은 있었지만, 적어도 5미터 깊이까지는 파내려갈 필요가 있다. 지중해를 오가는 화물선이 드나들고 정박하려면 수심이 그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림으로도 알 수 있듯이, 바다로 튀어나간 제방 건설공사와 테베레강의 오른쪽 연안을 잘라서 테베레 강과 새 항구의 둑을 연결하는 운하 공사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 운하는 50년 뒤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조하여 '트라야누스 운하'로 불리게 된다. 깊이가 5미터를 넘는 대규모 둑의 총면적은 약 90만 제곱미터, 너비는 약 1천 100미터, 선착장의 총길이는 2천 500미터에 이르러, 300척의 화물선이 한 줄로 나란히 닻을 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항구를 양쪽에서 감싸안고 있는 방파제는 커다란 석회암을 죔쇠로 연결한 7톤짜리 돌덩어리를 바다 속에 수없이 가라앉혀 만들었다. 좌우 방파제 사이의 바다에는 등대를 겸한 방파제가 또 하나 있었다. 따라서 항구로 드나드는 출입구는 두 군데가 된다. 출입구의 너비는 둘 다 206미터였다.
등대가 서 있는 중앙 방파제의 기반이 된 것은 칼리굴라의 대형선이었다. 이 배에 암석을 가득 실어 가라앉힌 뒤, 그것을 토대로 방파제를 만든 것이다. 칼리굴라가 이집트에서 높이가 25미터나 되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오기 위해 특별히 만든 선박이다. 이 대형 선박에 대해서는 칼리굴라의 동시대인이었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의 서술과 현대의 고고학적 조사로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데, 선체는 전나무로 되어 있고 흘수선 아래의 중량만 해도 800톤에 이른다. 중앙 돛대도 엄청나게 굵어서, 선원 네 명이 두 팔을 활짝 벌러야만 겨우 둘러쌀 수 있을 정도였다. 전체 길이는 105미터. 너비는 20.3미터. 모두 6층으로 되어 있고, 짐을 가득 실었을 때의 배수량은 7천 400톤, 선원이 700명 내지 800명은 필요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인이 최고의 조선술을 발휘하여 만든 선박이었을 게 분명하지만, 단지 오벨리스크를 운반하기 위해 이런 배를 만들게 했으니까 국가 재정이 파탄난 것도 당연하다.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가 이런 대형 선박은 실제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이리하여 고대의 '타이태닉'호는 왼쪽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침몰되었다. 목재는 바닷물에 잘 견딘다는 이유도 있었다. 돛대와 선교를 모두 해체하여 '껍데기'만 남긴 뒤, 암석을 채워넣어 수심 7미터 바다에 가라앉혔다. 그런 다음 철재 죔쇠로 연결한 암석들을 그 전후좌우에 가라앉혀 배를 고정시키고 그 위에 등대를 세웠다. 이리하여 칼리굴라의 대형선은 등대를 딸린 방파제로 다시 태어났다.
클라우디우스가 본격적인 로마 외항을 완성한 덕택에, 세금 우대 조치를 받은 곡물 수송선은 겨울철에도 안심하고 로마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타키투스 같은 이들은 주식을 수입에 의존하는 체제 자체가 나쁘다고 비난하지만, 로마는 그후에도 주곡 수입 정책을 견지하면서 그로 말미암은 결함을 보완하는 쪽을 선택했다. 거대한 소비지인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밀을 수출하지 않으면,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경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주곡 수입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경제를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완벽하게 이루어진 공사는 반드시 다른 목적에도 이바지하게 된다. 지류를 만들어 테베레 강의 물줄기를 분산한 결과, 바다의 조류와 상류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충돌하여 걸핏하면 물에 잠기던 로마 시가지의 침수 현상도 크게 완화되었다. 강어귀에서 로마까지는 20킬로미터다. 조류가 어떻게 20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는가 싶지만, 1966년에 피렌체 대홍수를 본 뒤로는 나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멀리 떨어진 티레니아 해의 조류가 아느로 강을 거슬러 올라와, 장마로 불어난 강물과 베키오 다리 근처에서 부딪쳐 시가지로 범람했다. 조류는 그렇게 무섭다. 클라우디우스 이후 로마에서 홍수가 났다는 기록이 크게 줄어든 것은 새항구 건설이 낳은 부수적인 효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반세기 뒤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항구를 크게 개조한 뒤로는 독이 두 군데로 늘아나 각각 '클라우디우스 항'과 '트라야누스 항'이라고 부르지만, 전체는 '황제항'(Portus Augusti)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항'과 직접 연결되어 있던 테베레 강 지류와 오스티아를 경유하는 테베레 강 본류가 양쪽 다 흘러내리는 토사로 물줄기가 바뀌어, 해안선이 왼쪽 그림처럼 바뀌었다. '황제항'은 육지로 둘러싸이게 되었고, 과거에는 '트라야누스 항이었던 육각형의 만에 물이 차 있을 뿐이다. 그러나 2천 년 뒤의 이 현상은 강어귀에 항구를 건설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의 정당성을 입증해준다기보다, 국가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와 기능을 발휘하지 않게 된 시대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처럼 여겨진다.
로마 가도를 건설한 군단 소속 엔지니어는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100년 동안은 개조할 필요가 없는 도로를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말은 개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보수할 필요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패권국이 된 뒤로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소에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만 비로소 평화가 지속되는 법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토목사업도 완성한 뒤의 보수는 필수불가결하다. 로마다 국가로서 기능을 발휘하고 있던 시대에는 강바닥을 준설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때 카르타고 항구의 두 배에 이르는 지중해 최대 규모를 자랑하면서 500년 동안 기능을 발휘한 '황제항'을 늪지대와 약간의 유적으로 바꾸어버린 것은 로마 제국의 붕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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