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6호 - 2024.01.06. 토요일(음력 : 11. 25.)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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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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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악하다고 보는 한, 전쟁의 매력은 계속 남을 것이다. 전쟁을 만일 천박하다고 여긴다면 인기가 없어질 테지만. ―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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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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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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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한글날’
북한에도 한글날이 있을까? 북한에도 우리글을 기념하는 날이 있긴 하다. 그런데 날짜도 이름도 우리와 달라서 북한 사람들에게 한글날이 있는지 물어보면 아마도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북한에서는 ‘한글’ 대신 ‘조선글’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조선글날’이 있는 것은 아니고 1월 15일을 ‘훈민정음 창제일’로 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남북한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데 이처럼 기념일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이 훈민정음 ‘창제’를 기리는 데 반해, 우리는 ‘반포’를 기념하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년) 음력 12월에 창제되어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되었다.
한글날은 1926년에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한 것이 시초이다. 1928년부터는 이름을 한글날로 바꾸고, 광복 후에는 불편한 음력 대신 양력 10월 9일로 날짜를 정하였다. 10월 9일로 정한 데에는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있는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이라는 기록이 근거가 되었다. 9월 상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1446년을 기준으로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10월 9일이다.
북한은 ‘조선왕조실록’ 1443년 12월 30일자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으셨다”라는 기록으로부터 창제일을 추정했다. 정확히 12월 어느 날에 새 문자가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어 그 달의 중간인 15일로 정하고, 그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월 15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우리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정해 놓고 해마다 다양한 기념행사를 벌여 우리 말과 글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기회로 삼는다. 이와 달리 북한은 훈민정음 창제일을 비교적 조용히 지내기에 북한 사람들 중에는 1월 15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사라져 가는 한글 간판
거리에서 한글로 표시한 간판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젊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번화한 거리일수록 한글 간판을 찾아보기 더욱 힘들다.
간판은 사람들이 통행하는 장소에서 눈에 잘 뜨이게 걸거나 붙이는 것으로서 ‘옥외 광고물’의 한 종류이다. 그런데 간판은 ‘옥외 광고물 등 관리법’ 및 동법 시행령에 따라, 원칙적으로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로마자(영문 알파벳)와 같은 외국 문자로 표시할 경우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그럼에도 거리에서 한글로 표시한 간판이 줄어들고 로마자로만 표시한 간판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대형 할인점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등은 각각 ‘emart’, ‘Lotte Mart’, ‘Home plus’ 등으로, 영화관 체인점 시지브이, 롯데시네마, 메가박스 등은 각각 ‘CGV’, ‘Lotte Cinema’, ‘Megabox’ 등으로, 커피 전문점 스타벅스, 커피빈, 엔젤리너스, 카페베네 등은 각각 ‘Starbucks’, ‘The Coffee Bean’, ‘Angel-in-us’, ‘Caffe bene’ 등으로 표시하고 있다. 그 밖의 간판도 이와 사정이 다르지 않다. 간판에서 한글 표기 기피 현상이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이다. 이제 드문드문 눈에 띄는 한글 간판에서 반가움과 안쓰러움마저 느끼게 된다.
한글은 우리에게 한국인임을 확인시켜 주는, 아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는 한글을 더욱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 계승해 줄 책무를 지고 있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세종 대왕의 한글 창제 및 반포를 기념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는 날이다. 한글날을 맞아 이러한 한글 사용 실태를 한번쯤 돌이켜 봤으면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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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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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무덤 - 천상병
동양의 무덤은 자연주의 같고
서양의 무덤은 합리주의 같고
동양의 무덤은 지연합일이고
서양의 무덤은 편리
풀과 흙
부드러운 선과 부피
아름드리 고요한 분위기
이것이 우리의 무덤의 모습이고.
빈틈없이 짜여진 공간 속에
되도록 조그마한 부리로 섰는 십자가
찾는 사람 별로 없는 곳
이것이 코쟁이의 무덤 모습이고.
우리집 산소는
경남 창원군 진북면
대티마을 뒷산인데
일 년에 한 번씩 설날에 찾아간다.
∼∼∼∼∼∼∼∼∼∼∼∼∼∼∼∼∼∼∼∼∼∼∼∼∼∼∼∼∼∼
잠꼬대 - 한용운
「사랑이라는 것은 다 무엇이냐.
진정한 사람에게는 눈물도 없고 웃음도 없는 것이다.
사랑의 뒤웅박을 발길로 차서 깨뜨려 버리고
눈물과 웃음을 티끌 속에 합장(合葬)을 하여라.
이지(理智)와 감정을 두드려 깨쳐서 가루를 만들어 버려라.
그리고 허무의 절정에 올라가서 어지럽게 춤추고 미치게 노래하여라.
그러고 애인과 악마를 똑 같이 술을 먹여라.
그러고 천치가 되든지 미치광이가 되든지 산 송장이 되든지 하여 버려라.
그래 너는 죽어도 사랑이라는 것은 버릴 수가 없단 말이냐.
그렇거든 사랑의 꽁무니에 도롱태를 달아라.
그래서 네 멋대로 끌고 돌아다니다가 쉬고 싶거든 쉬고
자고 싶거든 자고 살고 싶거든 살고 죽고 싶거든 죽어라.
사람의 발바닥에 말목을 쳐놓고 붙들어 서서 엉엉 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 세상에는 이마빡에다 <님>이라고 새기고 다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연애는 절대 자유(絶對自由)요, 정조(貞操)는 유동(流動)이요, 결혼식장은 임간(林間)이다.」
나는 잠결에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아, 혹성(惑星)같이 빛나는 님의 미소는
흑암(黑闇)의 광선(光線)에서 채 사라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잠의 나라에서 몸부림치던 사랑의 눈물은 어느덧 베게를 적셨습니다.
용서하셔요, 님이여, 아무리 잠이 지은 허물이라도
님이 벌(罰)을 주신다면, 그 벌을 잠을 주기는 싫습니다.
∼∼∼∼∼∼∼∼∼∼∼∼∼∼∼∼∼∼∼∼∼∼∼∼∼∼∼∼∼∼∼∼~~~~∼∼
무어래요 - 정지용
한길로만 오시다
한고개 넘어 우리집.
앞문으로 오시지는 말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늦은 봄날
복사꽃 연분홍 이슬비가 나리시거든
뒤ㅅ동산 새이ㅅ길로 오십쇼.
바람 피해 오시는이 처럼 들레시면
누가 무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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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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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과부적(衆寡不敵)
衆:무리 중. 寡:적을 과. 不:아니 불. 敵:대적할/원수/적수 적.
[출전]《孟子》〈梁惠王篇〉
적은 수효가 많은 수효를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
전국 시대, 제국을 순방하며 왕도론(王道論)을 역설하던 맹자가 제(齊)나라 선왕(宣王)에게 말했다.
“전하 스스로는 방일(放逸)한 생활을 하시면서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천하의 패권(覇權)을 잡으려 드시는 것은 그야말로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는 것[緣木求魚]’과 같사옵니다.”
“아니, 과인의 행동이 그토록 나쁘단 말이오?”
“가령, 지금 소국인 추(鄒)나라와 대국인 초(楚)나라가 싸운다면 어느 쪽이 이기겠나이까?”
“그야, 물론 초나라가 이길 것이오.”
“그렇다면 소국은 결코 대국을 이길 수 없고 ‘소수는 다수를 대적하지 못하며[衆寡不敵]’ 약자는 강자에게 패하기 마련이옵니다. 지금 천하에는 1000리(里) 사방(四方)의 나라가 아홉 개 있사온데 제나라도 그중 하나이옵니다. 한 나라가 여덟 나라를 굴복시키려 하는 것은 결코 소국인 초나라가 대국인 초나라를 이기려 하는 것과 같지 않사옵니까?”
이렇게 몰아세운 다음 맹자는 예의 왕도론을 설파했다.
“왕도로써 백성을 열복(悅服)시킨다면 그들은 모두 전하의 덕에 기꺼이 굴복할 것이오며 또한 천하는 전하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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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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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9. 선택
육가의 말에 진평은 다시 놀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대가 눈치를 챘다는 얘기요?"
"물론이오. 그대의 지위는 재상이오. 폐하 다음으로는 최상의 직위요. 식읍이 3만 호나 되니 부귀 역시 극에 달했구려. 인간으로서 이상 더 바랄게 아무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심이 있다면 딱 한 가지밖에 더 있겠소."
"맞소! 딱 한 가지요!"
"폐하를 걱정하는 일일 거요."
"맞았소! 여씨들의 움직임이 걱정스럽소.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했으면 좋단 말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나한테 한가지 계략이 있소."
육가는 초나라 사람이었다. 빈객으로 유방을 따라다니며 천하 평정하는 일을 도왔다. 구변이 능해 사람들은 그를 변사라 했다. 그런 재능을 살려 그는 제후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신 역할을 했다.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였다. 즈음에 남월에는 위타라는 자가 그곳을 평정한 뒤 왕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자가 한제국을 넘보지 못하도록 미리 단속해 둘 필요가 있소. 인장을 가지고 가서 남월왕으로 삼아 한의 속국이 되도록 잘 타일러놓고 오시오."
유가가 남월에 도착하자 위타는 남만의 풍습대로 북상투를 한채 거만한 자세로 두 다리를 뻗고서 육가를 맞았다. 육가는 모른 척하고 위타에게 말했다.
"그대는 중국사람이오. 친척과 형제와 조상의 분묘도 모두 진정(하북성)에 있소. 그런데도 그대는 지금 본성을 어겨가며 중국의 의관과 속대를 버린 채 구구한 월나라를 믿고 천자와 맞상대해 적국이 되고자 애쓰고 있소.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소."
"뭐요? 내가 그까짓 한나라 쯤을 겁낼 줄 아오!"
위타가 벌컥 화를 냈지만 육가는 역시 모른 척했다.
"진나라가 정치에 실패하자 천하 제후들과 호걸들이 일시에 봉기했으나 오직 한왕 유방만이 먼저 관중으로 돌입해 함양을 점령했소."
"그게 어쨌다는 얘기요!"
"항우는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초패왕이 되어 천하 제후들을 귀속시켰으니 그 위세는 막강했다고 볼 수 있소. 그러나 한왕은 천하를 채찍질해 제후들을 정복하고 드디어 막강 항우까지도 주멸했소. 불과 5년 동안에 이룩해낸 위업이오."
육가의 변설에 남월왕 위타는 신경질을 내었다.
"어서 요점이나 말하시오!"
"그런 위업은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이 일으켜 세운 위업인 거요. 지금 폐하께서는 천하의 폭도와 반역자를 쳐 무찌르실 때 당신은 남월의 왕으로서 조금도 협조하지 않았다 하여 많이 섭섭해 하고 계시단 말이오. 대신들과 장군들이 그런 당신을 주멸하라고 다투어 주장했으나 폐하께서는 백성들이 새삼 고통 당할 것을 불쌍히 여겨 토벌을 중단하고 대신 당신에게 왕인을 주고 할부를 갈라 평화롭게 살자고 이같이 사절을 보내게 된 게 아니겠소."
"나를 왕으로 인정한다는 얘기요?"
위타의 태도가 갑자기 수그러들었으나 그 점 역시 육가는 모른 척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황제의 사절인 나를 마땅히 교외까지 마중 나와 환영하며 북면하여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어야 옳았단 얘기요. 그런데도 이제 갓 세운 허약한 남월이 제 능력도 모른 채 강대한 하나라에 대해 이토록 강경하게 나오니 당신은 웃겨도 예사로 웃기고 있는 게 아니오. 만일 이런 사실이 한나라에 알려지면 한에서는 즉각 당신네 조상의 분묘를 파헤치고 일족을 몰살한 뒤 장군까지 출정할 것 없이 부장 정도 한 사람에게 십만 병력을 주어 남월을 쓸어버릴 것이란 말이오."
위타의 얼굴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예의를 갖추지 못했던 건 용서하시오. 오랫동안 오랑캐 나라에 와서 살다보니 이렇게 예의를 까맣게 잊었던 거요. 그런데 한 가지 묻겠소. 한나라의 소하와 조참과 한신을 나와 비교해서 누가 더 현명한 것 같소?"
육가는 잠깐 계산한 뒤에 대답했다.
"당신이 더 현명하오."
위타는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다.
"좋소, 좋소! 그럼 황제와 비교해서는 어떻소?"
"황제는 포악한 진을 치고 강력한 초를 멸한 후 천하의 폐해를 제거한 뒤 이익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삼황, 오제의 대업을 계승해 중국을 통치하고 계신거요. 그 백성은 억을 헤아리며 영역은 사방 만 리이고 천하에서 가장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계시오. 인구는 조밀하고 수레는 들끓고 만물이 풍성한 데다 정치는 황제의 손으로 좌우되니 이런 일은 천지개벽 이래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오. 그런데 고작 인구 수십 만에 모두가 미개한 오랑캐인 데다 산과 바다 틈새에 끼어 구차한 생활을 하고있는, 기껏 한제국의 일개 군밖에 되지 않는 나라의 왕이 어찌 한제국의 황제와 비교해 보겠단 말이오!"
그래도 위타는 여전히 육가에게 호기를 부렸다.
"내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왕이 된 것이오. 내가 중국에서 일어났다면 어찌 한의 황제만큼 못했겠소."
"물론 농담이겠지요."
그제서야 위타는 기분이 풀렸다.
"그렇소. 농담이오. 난 그대가 몹시 마음에 드오. 몇 개월이라도 좋으니 여기 머물면서 즐기다 가시기 바라오. 실은 이곳에서는 함께 얘기를 나눌 만한 상대가 없소. 선생에게 유익한 얘기들을 많이 듣고싶소."
육가가 돌아갈 때가 되자 위타는 육가에게 수천금이나 되는 재보를 선물했다. 육가가 돌아와 남월에 사신갔던 사정을 황제 유방에게 보고하자 몹시 기뻐하며 태중대부의 벼슬을 주었다.
육가는 때때로 유방 앞으로 나아가 고전의 훌륭함을 역설했는데 그럴 때마다 유방은 짜증을 냈다.
"짐은 마상에서 천하를 얻었소. <시경> <서경>같은 게 짐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천하는 마상에서 얻었지만 마상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탕왕과 무왕은 역도(무력)로 천하를 얻었지만 순도(문덕)로 이것을 지켰습니다. 문무를 병용하는 것이 국가를 장구히 유지하는 길입니다. 옛날 오왕 부차나 진의 지백은 무를 극도로 사용해 멸망하였고, 진은 형법 일변도로 일관하다가 자멸했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통일한 뒤 인의의 정치를 행하면서 성천자를 모범으로 삼아 탄탄한 국가로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폐하에게 천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겠습니까."
가만히 듣던 유방은 약간 부끄러운 기색을 띠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생각이 옳소. 그런데 짐을 위하여 책을 지어 주겠소?"
"어떤 책을 필요로 하십니까?"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짐이 천하를 얻은 이유를 서술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하겠습니다. 옛 고대국가가 성공하고 실패한 사례들까지도 아울러서 원인분석을 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육가가 고조 유방을 위해 책을 지어 이름을 <신어>라 해서 올렸다. 국가 흥망의 특징을 12편으로 약술한 저서를 받아본 유방은 무릎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육가는 인재다!"
육가는 그런 인물이었다. 육가 역시 여태후 일족이 정권을 잡고 왕위에 오르려는 음모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육가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여태후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병을 핑계로 벼슬을 사직하고 집안에 들어 앉아버렸다. 육가는 전답이 비옥한 호치에다 집을 짓고 일단 정착했다. 육가에게는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남월에서 얻어온 재보를 풀어 천금을 받고 팔아 아들들에게 각각 2백 금씩을 주어 생업을 유지하도록 했다. 육가는 언제나 안락한 사두마차에다 배우와 무희들을 태워 가무를 즐겼으며 거문고와 비파 타는 시종까지 거느리고 백 금짜리 비싼 보검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런 호사도 시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다섯을 모두 집으로 불렀다.
"앞으로 내가 너희들 집에 번갈아 방문을 할 터인데 너희들은 내 일행에게 주식을 주고 말에게는 먹이를 주어라. 결코 한 집에 열흘 이상씩은 머물지 않겠다. 그리고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보검과 수레와 말 그리고 시종들을 소유해가. 그러나 내가 유람도 떠날 것이고 친구 집으로도 방문할 터이니까 너희들 집을 찾는 일은 고작 두어 서너번 밖에 되지 않을 테니 너무 긴장할 건 없다. 오래 묵으면서 너희들을 번거롭게 할 생각도 없고 또 자주 만나면 싫증도 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득 우승상 진평을 만나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집으로 방문했던 것이다. 육가에게 계략이 있다는 말에 진평은 육가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어서 방법을 말씀해 보시오."
"말씀드리겠소. 천하가 안온하면 사람들은 재상을 주목하고, 천하가 위급하면 사람들은 장군을 주목하오. 장군과 재상이 화친하면 선비들이 사모하여 따르고 일단 선비들이 따르면 천하에 이변이 생긴다 하더라도 권력은 분산되지를 않소. 국가의 대계는 오직 두 분에게 달렸소."
"두 분이라면 누구요?"
"승상과 장군 주발이오."
"그렇지만 우린 친한 사이가 못되오."
"물론 그건 알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승상께서 주발장군과 친교해 깊은 우정을 쌓아두란 얘기요."
"우정을 이야기한다면 그대가 주발장군과 농치고 지낼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겠소."
"그렇지만 재상은 내가 아니오. 도구나 너무 친한 사이라 그런 의논을 하려 해도 내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을 것이오."
"결국은 내가 주발과 친교하라는 얘기 아니겠소. 그럼 어떻게 해야 강후(주발)와 내가 친밀해질 수가 있겠소?"
"우선 5백 금을 푸시오. 그런 뒤 주발의 장수를 비는 축하연을 승상께서 마련하시오."
"그토록 호화롭게?"
"승상께선 부자요. 주발은 몹시 기뻐할 것이오."
진평은 곧 육가가 일러준 대로 주발을 초청한 뒤 푸짐한 주연을 베풀었다.
"승상. 고맙소! 나 역시 이대로 가만히 받아먹고 있을 수만은 없지!"
주발 역시 가만 있지 않았다. 며칠 뒤 주발 쪽에서 주연상을 차려놓고 진평을 초청했다.
"우리가 이토록 우의를 나누니 조정의 공경들조차 모두 좋아하며 부러워들 하는구려."
"이 우정 영원히 변치 맙시다!"
육가의 계략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부자인 진평에게 부탁했던 노비 백명, 거마 50승, 돈 1백만 전이 도착하자 그것으로 조정의 공경들과 교제하기 시작했다.
"공신들이 화기애애하게 똘똘 뭉쳐있으니 보기에도 좋고 듣기에도 좋구려. 특히 진승상과 주발장군의 교제는 조정의 부러움을 살만도 하오!"
육가는 그런 식으로 조정의 대신들에게 진평과 주발의 사귐을 떠들고 다녔다. 한편 이런 분위기를 어처구니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여씨 일족이었다.
"재상과 장군이 한편이고 조정 대신들 모두가 저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으니 우리들로선 술수를 부려볼 방법이 없구먼!"
여씨 일족은 당분간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있었다. '이젠 안심이다. 이렇게 되면 여씨 일족의 음모도 위축될 수밖에 없겠지.' 어느 날 넷째 아들 집에서 본가로 돌아온 육가는 주건의 모친상 소식을 들었다.
주건은 초나라 출신이었다. 한때 화남왕 경포의 재상이었다. 경포는 반기를 들려할 때 신하들에게 가부를 물었다.
"황제는 작년에 한신을 주살하더니 이번에는 소금 절이 팽월의 시체를 내게 보내왔소! 다음에는 내 차례라는 암시 아니겠소. 그래서 나는 살기 위해 모반하려는 거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소?"
주건이 대번에 반대했다.
"저는 반대합니다."
"어째서 반대하는 거요?"
경포가 벌컥 화를 내었다.
"성공할 수 없는 모반은 시도하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어째서 성공할 수 없다는 거요?"
"실력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경포는 주건에게 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질렀다.
"그건 유방 그 늙은이가 이제는 기력이 다해 싸울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그대가 모르고 하는 소리요. 더구나 한신과 팽월이 죽었는데 유방 밑에 나보다 유능한 장군이 어디 한 놈이라도 있겠소? 모반은 확정적이오!"
결국 경포는 반기를 들었고 모반은 실패했다. 경포가 주살될 때 주건 역시 연루되 체포되었으나 모반에 끝까지 반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간신히 죽음만은 모면했다. 주건은 변설이 능란하면서도 엄정하고 강직하며 또한 청렴했다. 의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절대로 가담치 않는 성격이라 각박한 성격으로 오해받아 남과 잘 어울리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벽양후 심이기는 여태후의 애인이었다. 마음에 둔 여자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수중에 넣는 재주가 있었던 심이기로서는 세력가 여태후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끊임없이 여태후를 유혹하여 결국은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심이기도 인물됨을 알아보는 안목은 있었던지 주건과 몹시 사귀고 싶어했다. 그러나 주건은 심이기를 단번에 거절했다.
"어리석은 인간!"
어쨌건 평소에 주건과 친했던 육가가 문상을 갔다. 그랬는데 주건의 집은 너무도 가난했던 탓으로 아직 상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구까지 남의 집 것을 빌려야 되는 처지였다. 육가는 기가 찼다. 한참을 궁리하고 궁리한 뒤에 상주 주건에게 말했다.
"걱정 말고 우선 상부터 발표하게."
주건을 일단 안심시킨 후 육가는 곧장 심이기를 찾아갔다.
"축하하오. 주건의 모친이 돌아가셨소."
심이기는 의아스런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별일이군. 주건의 모친이 돌아 가셨는데 왜 날 보고 축하한다 그러시오?"
"전날 당신은 주건과 몹시 사귀고 싶어 했잖소."
"그건 사실이오. 그러나 단번에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왔소."
"당신이 왜 주건과 사귀지 못했는지 그 사실을 아오?"
"모르겠소. 아니오. 알 것도 같소. 내가 여자들한테 많은 흠모를 받으니 남자들이 질투해서 잘 사귀지 못했는데, 주건 역시 그런 축에 드는 사내 아니겠소."
"천만의 말씀. 그건 주건을 모욕하는 발언이오. 실상 주건이 당신과 사귀고 싶어도 사귈 수 없었던 사정이 따로 있었소. 그건 주건의 모친이 아들에게 당신같은 인간과는 교제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셨기 때문이오."
육가의 말에 심이기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건의 모친이 주건과 나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얘기요?"
"그렇소. 이제는 주건의 모친이 돌아가셨으니 당신은 이제 주건과 사귀어도 되는 거요."
"그럼 내가 주건과 교제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요?"
"마침 기회가 좋지 않겠소. 주건에게 당신이 정성껏 조의를 표하면 주건은 당신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을 거요."
옳은 얘기다 싶었다. 심이기는 수레를 몰아 주건의 집으로 달렸다. 정중한 조문을 한 뒤 부의금 백 금을 내놓았다.
"아니, 이토록 많은 부의금을!"
주건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감격해 마지않았다.
심이기가 주건에게 거금의 부의금을 내놓았다는 소문은 금새 퍼졌다. 심이기는 태후의 애인이기도 하며 그로 인해 세력가이기도 했다. 열후와 귀인들이 주건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심이기의 체면을 보아 주건을 조문하고 후한 조의금을 내었다. 도합 5백 금이나 걷혔다. 그것으로 주건은 모친의 장례를 후하게 치를 수가 있었다.
즈음에 환관 조청이 효혜제에게 심이기를 비방했다.
"폐하, 황실의 처지에서는 너무나 너저분한 사건입니다. 어떻게 태후에게 그런 불경스런 행동을 하지요!"
"무어? 그게 사실이냐!"
"많은 사람들이 쑥덕거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들 알고 있던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심이기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태후궁에 무상으로 드나든다고 합니다."
태후를 이가 갈리도록 미워하던 효혜는 마침 잘됐다 싶었다. '어디, 태후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두고 보자!' 효혜는 조청에게 소리질렀다.
"어서 형리에게 연락해 심이기를 잡아서 엄히 다스리라고 해라!"
심이기가 체포되리라는 소문은 삽시에 퍼졌다. 그런 소문이 여태후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자신과의 난행에 관한 사안이라 아무 말도 못했다. 심이기를 살리는 조처 역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태후께서도 주인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계시답니다."
태후궁으로 바삐 다녀온 가신의 보고였다. 심이기는 절망적이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심이기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거기서 감옥으로 찾아온 가신으로부터 더욱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대신들 모두가 주인님을 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가신의 보고에 감옥 안의 심이기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 목숨을 구하려고 애쓰는 인간이 조정에 한 놈도 없더란 말이냐!"
"애쓰는 게 다 무업니까. 주인님의 평소 행실을 미워해 차라리 주살 되기를 바라고 있다던데요."
심이기는 분한 생각으로 가슴을 쳐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후조차 손 쓸 처지가 못된다면 속절없이 죽는 일만 남는 것이었다.
"그런데요. 길거리에서 우연히 엿들은 얘긴데, 평원군 주건 어른이 폐하께 간청하는 길만이 주인께서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들 쑥덕거리던데요."
가신의 말을 음미해 보던 심이기는 갑자기 무릎을 쳤다.
"오, 그렇구나! 청렴, 강직으로 소문난 주건이 폐하께 간청만 해 주면 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데! 무얼 꾸물거리고 서 있느냐! 어서 주건 어른한테 달려가서 지금의 내 처지를 자세히 전하고 구명을 간청하더라고 해라. 그분은 결코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가신은 나는 듯이 감옥 밖으로 달려나갔다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어찌되었느냐? 주건 어른께선 물론 나를 살리는 일에 적극 나서 주시겠다고 했겠지."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무엇이라고?"
"깨끗이 거절하셨습니다. '이미 끝난 판결을 가지고 되지도 않을 일을 들쑤셔 봤댔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시며 싹 외면하셨습니다."
"정 그렇게 나오더란 얘기냐! 세상에 주건이 그럴 수가 있는가! 제 모친상 때 나는 그토록 정성을 다해 조문을 했는데도 나의 생사에 관심도 없더란 말인가!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마지막 희망마저 무너져버린 심이기는 정작 절망적이 되어 말문까지 닫아버리고 말았다.
한편 주건은 효혜제의 총신 굉유를 찾아갔다. 굉유는 남창으로 효혜의 동성연애 상대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굉유는 황제한테서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굉유를 하필 주건이 방문한다는 자체는 누가 보아도 엉뚱한 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건으로서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굉유는 굉유대로 주건의 방문을 뜻밖이라 생각했다.
"평원군께서 무슨 일로 저같은 사람을 다 찾아주셨습니까?"
굉유가 어려워하며 몸들 바를 몰라하는데도 주건은 더욱 강압적이 태도로 일괄했다.
"세상에 당신이 그럴 수가 있소!"
"무슨 말씀 이신지요?"
"당신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이유를 천하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소. 그런데 지금 심이기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하여 형리에게 넘겨진 사실을 알고 있소?"
"소문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심이기를 중상하여 죽이려 한다면서?"
"결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심이기를 중상합니까. 더구나 그분은 태후의 총애를 받는데 제가 폐하한테서 받는 총애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에서는 당신의 짓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소."
"하늘에 두고 맹세하지만 저는 심이기를 중상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이 없소. 문제는 심이기가 정작 죽게되면 당신도 온전할 수 없다는게 문제란 말이오."
"제가요?"
"여태후는 무서운 사람이오. 무슨 방법으로든 당신에게 복수할 거요."
주건의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어떻게 해야 제가 살아남지요?"
"심이기를 살려야 당신도 살아남소."
"심이기를 어떻게 살리지요? 더구나 제가 무슨 힘이 있어 심이기를 살립니까?"
"어째서 당신은 윗도리를 벗어버린 채 황제께 나아가 심이기를 위해 대신 빌지 않지?"
"그렇게라도 하면 과연 폐하께서 심이기를 살려 주실까요?"
"당신이 간청하면 폐하께선 틀림없이 들어주실 거요. 어디 그뿐이겠소. 태후도 당신에게 몹시 감사할 거요. 결국 황제나 태후 모두가 당신을 총애하게 될테니 당신의 부귀는 몇 배로 더 늘어나게 되지. 아, 글쎄, 당신 지금 생사문제가 걸린 중대한 순간에 그런 걸 따지고 있게 됐소!"
굉유는 주건의 계략에 따라 속절없이 황제한테로 가서 심이기의 죄를 빌었다. 얼마 자나지 않아 심이기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석방되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주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디 두고 보자! 언젠가는 그 위선자의 얼굴에다 침을 뱉어야지!"
심이기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욕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육가가 들었다.
"무슨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심이기가 살아남은 건 모두 주건 때문인데."
심이기도 나중에사 그 사실을 알고는 몹시 놀라고 또 주건에 대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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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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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며
11
우리는 운명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과 싸워 나갈 갑옷과 강철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인생이라는 싸움터에서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면 서서히 다가오는 고통의 괴물을 창으로 찔러야 한다. 손에 칼을 든 채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삶을 비관하거나 낙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겁한 사람이다. 우리에게는 그 운명과 싸울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12
질투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감정이다. 질투의 감정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질투는 우리 모두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그것은 불행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질투를 행복의 적으로 인식하면서 그 감정을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13
만족하면서 인생을 즐기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질투를 유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나보다 못한 조건의 사람을 생각하라. 그것이 바로 삶을 밝히는 지혜의 등불이다.
14
성숙은 자아가 파괴되는 과정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자아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잃어버리지 않는 역량이다.
15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비롯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독한 장소에 있을 때에도 사색을 통해 진정한 즐거움을 맛본다. 어리석은 사람은 고독을 견디지 못해 연회를 베풀거나 연극을 관람하고 여행을 즐기면서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권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선량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불행한 상황에서도 만족을 느끼며 욕심이 많고 어리석은 사람은 수많은 재물을 소유하더라도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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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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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광개토왕릉비와 일본 스파이
1879년, 그때 이미 대륙 침략이 치밀한 작전 음모에 착수하고 있던 일본 군국주의의 참모본부로부터 특수 임무를 부여받은 12명의 청년장교와 하사관이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를 거쳐 중국 각지에 비밀리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전략적인 정세 정탐, 곧 10여 년 후에 벌어질 청일정쟁을 염두에 둔 첩보행위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스파이였다. 그들은 "군작전상 필요할 모든 지역의 지리·정지를 완벽히 파악해두라" 는 야마가다 육군사령관의 지시·명령을 받고 있었다. 표현상으로는 '어학 연습생으로서의 청국 여행' 이라는 행색을 가장했던 전략적으로 훈련받은 이때의 일본 스파이 장교들 가운데 한·청 국경지역에서 암약하던 사고 가게노부라는 포병 중위가 있었다. 그는 압록강 중류의 만포진 대안에 위치하는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인 통구지방(만주 집안현)의 국내성 유적지에서 거대한 자연석을 세워 만든 높이 약6.3m의 비석 하나를 주목하고 즉시 4면의 비문을 쌍구법으로 떠냈다. 그러나 이때의 스파이 장교의 쌍구란 것은 -최근에 와서야 그 가공할 내막이 과학적 연구로 폭로돼 가고 있지만-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었고, 특히 비문 일부를 일제의 침략주의에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다시 없이 중요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가 일제 군국주의에 의해 악랄하게 유린되던 순간이었다. 왕이 죽은 지 1년 후인 서기 414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돌비석은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광개토왕의 영웅상과 업적을 기념한 것으로 그 비문은 한국의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비문 중에는 신라·가야·백제를 도와 왜군을 무찌른 사실도 있는데, 1884년에 일제 군국주의의 첩자였던 사고 중위가 본국의 참모본부로 가져갔다는 최초의 비문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서기 391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만들었다"로 해석이 가능하게 돼 있었다. 놀라운 음모였다.
일제 참모본부는 사고 중위가 조작해 온 비문을 놓고 한학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옛 문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나오는 "진구고고의 신라 침공 및 야마토 정권의 출병에 따른 가야지역의 '임나일본부'(식민지) 설치" 라는 허상의 전설기록을 확실한 사실로 확정시키는 2단계의 음모에 착수했다.
드디어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에 이르러 일제 참모본부는 재차 '광개토왕릉비' 의 탁본을 정확히 떠 오게 하여 사고 중위가 가져온 비문과 비교 검토한 후, 이미 조작해놓은 부분을 영구히 사실 원문으로 만들어버기리 위해 현지에 기술자를 보내 비면 전체에 석회를 이겨 바르고는 조작한 문구의 글자를 새겨넣어 감쪽같이 위조했다. 그러나 이 석회물질이 세월이 지나고 풍우에 씻기는 동안 부분적으로 부스러지고 혹은 떨어져 나가면서 본시의 비면각자가 아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1910년대 이후 수차에 걸친 탁본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 1930년대에 이름녀 조각의 핵심부인 '내도해'(왜군이 바다를 건너왔다)의 3자는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없다. 결국 그 3자는 원비문엔 없었던 조각된 석회각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일본에서 발표된 교포 사학자 이진희의연구 결론).
앞서와 같은 일제침략 초기의 놀라운 '광개토왕릉비' 일부 비문 조작은 이제 국내와 일본 사학계에서 거의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이미 비문의 일부 조작 사실을 비친 일본인 조사자가 있었다. 1914년에 세키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세히 조사해 보건대, 문자의 간지는 석회로 메워져 있을 뿐 아니라 왕왕 자획을 보태고, 또는 완전히 새로운 석회면에 문자를 새긴 것도 있다. 이같은 보족은 대체로 원자와 잘못이 없는 것 같으나 그렇더라도 절대적으로 믿긴 어렵다. 다소의 오독도 있는 것 같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음모가 오래 전부터 그토록 치밀했다.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
1910년을 전후해서 약 10년간 개성과 강화동 일원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감행되었던 고려고분의 남김 없는 파괴와, 수만 점 혹은 그 이상의 고려자기 부장품 약탈에 이어서 1925년을 전후한 약 5년 동안 대동강 하류의 악랑고분 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던 대대적인 도굴은 지난날 한국의 역사유적과 지하의 매장문화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되고 수탈당했던가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규모의 조직적인 고분 도굴과 유물 약탈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 하류와 경주지역에 무수히 널려 있는 가야 및 신라고분군도 앞의 두 지역에 맞먹는 무진장한 부장품의 보고였다. 아니, 초기의 소규모적인 도굴과 유물 약탈은 이쪽에서 먼저 착수되고 있었다. 일본 무법자들의 상륙 루트가 부산, 대구, 서울, 개성, 평양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일확천금의 야욕은 그들이 가장 먼저 접촉할 수 있었던 신라와 가야의 유적지에서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계획적인 고분 도굴 및 모든 종류의 지상문화재 약탈을 뒤에서 조정했던 일본인 골동상이 맨 먼저 거점을 확보한 것도 부산에서였다. 그리고 나서 차차 대구.서울로 제2.제3의 일본인 골동상들이 속속 북상했다. 물론 그들과 함께 해적이나 다름없는 무법자였던 호리꾼들도 북으로 북으로 보물 약탈지역을 확대시켰다.
고령·창령·선산·함안·진주 일대에 널려 있는 5∼6세기 가야고분의 부장품들이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되던 초기의 몇몇 사실기록이 일본인 조사 확인자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1911년 3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 잡지에서 세키노가 발표한 조사보고 (가야시대의 유적)에 이런 증언기록이 나온다.
"작년(1909년인 듯)에 가야유적을 조사학 때, 창년에 이르러 고령에서 본 것보다고 더 큰 고분을 조사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미 발굴되어 석곽 일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진주 동북쪽의 옥봉에도 이미 발굴된 고분이 있었다. 이 고분에서 도굴된 숱한 도기(가야토기)와 칠기가 진주경찰서에 보관돼 있었다(도굴자로부터 압수했던 듯). 이것들은 공과대학(동경제국대학 공대)에 기증하기로 되어 근일 중에 도착할 것이다."
그자가 그자였다. 일본인 무법자가 도굴했을 유물을 일본인 경찰서에서 불법행위로 압수해 갖고 있다가 학술조사를 나왔다는 세키노를 통해 저들 맘대로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낙동강 하류에 산재하는 수천 기의 고분들이 개성 일원의 고분과 대동강 하류의 고분처럼 일본인 호리꾼과 배후의 조종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도굴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께부터였다. 1917년에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참상을 보고하고 있다.
"선산군:본군에 유존하는 약 1천 기 혹은 그 이상의 고분은, 2∼3년 전부터 이 지방에 고분 속의 유존고물을 완롱하는 폐풍이 일어 사리의 도당들이 매수하는 바람에 무뢰한의 끊임없는 도굴장이 되었다. …군집하는 고분이 도굴로 인해 파잔. 황폐하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실로 잔인혹심의 극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이 고분 군집기를 가 보라."
그 광경이 얼마나 처참하고 분노를 금치 못하게 했었으면 이마니시의 조사보고를 이처럼 흥분하게 했을까. 그러나 그도 그런 천인공노할 대규모의 고분 도굴이 주범이 일본인이란 말은 차마 못 쓰고 간접적으로만 시사하고 있을 뿐이다. 경북 선산지역에서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이마니시의 조사보고엔 또 이런 증언이 포함돼 있다.
"제6구:2∼3년 전에 고적조사원(총독부 소속)이 발굴·조사했는데, 전문한 바로는 완전한 광(묘혈)이 유존하여 금환 등이 유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상세한 사실을 알 수 없음은 유감이다. 또 1기의 외에는 모조리 도굴되었는데 그 중엔 아직 생토가 채 마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총독부에서 내려갔던 고적조사원이란 자까지도 순금 팔지 같은 값진 출토품은 슬쩍 제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례가 암시적으로 고발돼 있다. 이마니시는 계속해서, 선산군 옥성면의 고분지역에서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손쉽게 값진 유물들을 꺼내 가질 수 있게 무덤 속이 드러난 것조차 있는데도 주민들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그런 것에 조금도 손을 대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에 감동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곳의 고분들 중에는 묘광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도 있다. 고분의 봉토가 유실되어 그렇게 광을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거기에 접근하지 않고, 또 침해하지도 않는 순박함이여. 사자에 대한 예를 결하고 있는 현대의 도굴·파괴, 고인의 분묘에 능욕을 가하고 있는 현대인(일본인)에 비하면 송연한 바가 있다. 구조선의 도덕을 보려거든 이 옥성면의 제분을 가 보면 족하리라."
이 조사보고는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고분 도굴범은 조선인 중엔 없으며, 모두가 도의를 상실한 일본인 무뢰한들' 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또 서울의 한 골동가게(주인은 물론 일본인이었을듯)에서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산지방에서의 도굴품임이 분명한 가야문화의 귀중한 유물들이 일본인들에게 팔려 나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그때 메모했던 유물 목록까지도 그는 조사보고에 밝히고 있는데, 1)순금귀고리(경주 보문리의 부부총 부장품과 동일형식) 2)순금팔지(여러 개가 나왔을 듯) 3)곡옥 4)관옥 5)유리옥 6)기타 옥류 7)검두 8)무기·철창·직도 9)마형대구 등이 그것이다. 이중 2) 3) 4)는 그후 교토대학으로 들어갔다. 이마니시는 다시, 함안과 창녕에서도 그때 대다수의 가야고분이 도굴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함안군: 본군 고분들도 이미 상당수가 도굴당했으나 최근 수년 동안은 뜸했던 것 같다."
"창녕군: 이 지방의 대부분의 고분도 파괴·도굴되어 그 패해가 너무나 심하다. 목마산 동남쪽 언덕 위의 제1군 8호분은 수년 전에 병사(일본 병사)가 발굴하여 다수의 와기(토기)를 획득했다는 설이 있다. 창녕읍의 북쪽 제5군에서도 대규모의 도굴이 시도되다가 중지한 흔적이 있었다."
이 같은 무법의 고분 도굴사태가 조사·보고되자 총독부는 아직 성한 고분이 많이 있는 창녕 교동 일대에서 약 100기를 서둘러 발굴했다. 이때의 부장품 출토 상황에 대해 다니는 마차 20대, 화차 2간 분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17년도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 그러니 일본인 무법자들이 선산과 기타 지역에서 수천 기를 도굴한 가야고분의 부장품 유물의 분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능히 상상된다. 그 도굴품들은 그 즉시로 대구.부산.서울 그리고 본토의 일본인 수집가 수중으로 사라져 갔다. 순금귀고리의 경우만을 말한 다음과 같은 후지다의 증언적인 지록은 그 전모의 일각을 알려주는 데 불과하다.
"조선에서 발견된 귀고리(순금)는 실로 상당수로, 학술적 발굴조사를 거친 것만도 70쌍에 이르지만 사인의 비장품이 되어 조선과 도쿄·교토에 있는 것도 대단히 맣다. 도쿄의 네즈, 교토의 기요마치와 모리야가 가진 것만도 수십 쌍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신라와 가야지역인 경주·달성·선산·안동·합천·고령·거창 등지에서의 출토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친 무법자들
경주 일원의 신라고분들도 낙동강 하류 일대의 가야고분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수난을 겪었다. 순금의 왕관·팔지·귀고리를 비롯한 1천 수백 년 전의 고귀한 미술품과 값진 유물이 무진장 부장 돼 있던 신라고분들은 가야고분과 함께 일본에서 맨손으로 건너온 무법의 보물 약탈자들에게 입이 벌어지는 일확천금의 광대한 지하보고였다.
일제 초기의 한 조사기록은 경주 부근에서만도 수만 기의 삼국시대 신라고분들이 있었다고 조사돼 있다. 1915년네는 총독부 위촉으로 최초의 학술적 조사발굴이 경주 남산 밖의 황남리고분에서 이루어져 철검·철창, 기타 토기들을 출토시켰다. 같은 때 보문리에서도 또 하나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순금으로 된 팔찌·귀고리·반지가 발견되었다. 뒤에 이 고분은 '부부총' 으로 명명되었다. 이어서 1918년에는 경주 동쪽의 명활산 기슭에 있는 고분이 조사·발굴되었는데 여기서도 순금 귀고리, 금·은 팔지와 반지, 기타 옥류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고분의 놀라운 부장품 내막은 소위 학술적 발굴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고분 파괴자들에 의해 갈수록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그 내막은 경주지역에서 일확천금의 유물 약탈을 노리던 도굴꾼들에겐 더욱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었다. 무법자들을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1921년에 경주 남문 밖의 파괴된 커다란 고분 속에서 황금보관을 위시해서 역시 순금으로 된 귀고리·팔지·반지·과대·요패·은합 등이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뒤에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 고분의 출토유물들은 신라미술의 극치를 집중적으로 입증시키기에 족했다. 이때의 출토품인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로, 그리고 과대와 요패는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3년 후인 1924년에도 황금보관과 귀고리·요패·도제기마인물상, 기타 주형토기 등이 부장돼 있던 금령총이 발굴되었다. 이때 출토된 금관은 현재 보물 제388호, 도제 기마인물상은 국보 제91호로 지정돼 있다. 이러한 일련의 찬란한 신라유물 발굴은 도굴꾼들의 사리심을 갈수록 자극시켰다. 1925년 4월 15일자 (경성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경주지방은 신라 천년의 구도로 세인이 알다시피 최근 수년간 고분 발굴로 귀중한 출토품이 있었고, 황금의 보관·패도, 기타 고고학상 심대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근자엔 밀굴자가 많아, 어떤 소식통을 빌면 그 상습자가 약 20명에 달하고 있으며, 그 출토품(도굴폼)은 주로 일본인 고매자(고물 매수자)가 착착 구입하여 부당한 이익을 보고 있는데, 최근의 현저한 출토품으로서 '당삼채' 와 같은 항아리를 밀굴하여 수천 원에 밀매한 자가 있으나 그 항아리 속에는 또 5개의 금자(금붙이 유물)가 들어 있어 비상히 귀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일본인 고매자에 의해 대구의 호사가에게 팔려 갔다고 하는데 그러한 부정밀굴에 대해서 당국의 엄중한 취체가 기대되고 있다."
당시 대구에는 그러한 도굴행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혹은 직접 지원한 돈 많고 악질적인 일본인 수집가가 여럿 있었다. 오구라와 이치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23∼1924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에 그들의 장물 컬렉션 일부가 소개돼 있는데 먼저 오구라에게서 전문가가 주목한 것은, 1)은제투조패식금구(완전품) 2)물고기를 물고 있는 조형토기 3)안구가 얹힌 마형토기 4)쌍배차륜토기 등으로, 출토지는 '남선(영남지역) 발견' 이라고만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치다는 역시 '남선 출토' 라는 금동관의 '조형전립금구' 와 양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칠유경' 등을 갖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1905년 가을에 수학여행이란 명목으로 한국에 건너와서 고대 역사유적을 답사하며 유물 실태도 조사했던 동경제국대학의 사학도 하나가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 그는 경주에 이르러 남산 쪽에서 신라시대의 와당과 토기, 기타 불상(석불이었던 듯)의 파편을 채집했고 사천왕사 근처에서는 보상화문이 나타나 있는 전과 10여 장의 와당을 주워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으로 갖고 갔다고 여행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당시의 도굴실태를 기록하고 있다.
"소생은 대형 고분 하나와 중형의 것을 몇 기쯤 조사했는데, 그중 하나는 이미 발굴(도굴)되어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서는 83개의 고기(토기)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주의 신라고분들은 근년에 와서 한국정부의 정령문치의 결과, 소생이 여행할 ㄷ시는 도굴이 끊임없이 행애져 그 발굴품은 모두 일본인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고분 속에서 꺼내진 유물이 부산과 대구에 나와 있어 소생은 비교적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발견품(도굴품)은 거의 토기 뿐이지만 이 토기들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 극히 우수한 작품이다.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고분 도굴이 성하진 않았으나 개성 부근에서의 고려시대 분묘 도굴이 크게 유행하자 그후 경주에서도 맹렬히 발굴되어 소생은 작년(1909년)에 대구에서 그런 발굴품이 고물상의 손에 적취함을 보았는데, 2∼3점의 철기 외엔 토기들이었다."
이 이마니시의 기록은 1905년 당시 이미 신라고분의 도굴이 착수되고 있었고, 출토유물들은 모조리 일본인 상인(골동항) 수중에 들어가고 있었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부산과 대구의 일본인 골동상이 신라와 가야고분에서 도굴한 토기와 철기들을 산적해놓고 있음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다가 총독부의 학술조사와 발굴로 촐토된 황금빛 보관·순금귀고리·팔지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도굴은 극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풍부한 재력으로 마음껏 도굴품을 사들이고 또는 뒤로 돈을 주어 계속 도굴해 오도록 지원했던 악명 높은 수집가 오구라가 아주 작고 완전한 순금관을 입수한 것도 그때였다. 국보급인 이 작은 순금관은 현재 일본에서 '중요미술품' 으로 지정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물론 소장자는 '오구라 컬렉션' 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한 경주지방의 유적 파괴와 고분 도굴은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25년 8월의 일이었다.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하라라는 교수가 신라시대의 정원을 조사·연구한다고 경주를 찾아왔었다. 그는 총독부의 사전 승인도 받지 않고 현지의 고적보존회를 움직여 인부를 사서 임해전지(현재 사적 18호)의 유구를 함부로 출토시키고는 큰 발견이라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파헤친 자리도 그대로 버려둔 채 도쿄로 돌아가버렸다. 물론 그가 빈손으로 갔을 리는 없었다. 그의 불법적인 발굴은 물론 뒷수습조차 하지 않은 그의 처사는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게 했던 듯, 총독부가 뒷조사한 보고서에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자였다. 엄중한 취체가 있어야겠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1934년 4월에는 같은 임해전지에서 또다시 매장문화재를 무더기로 도굴한 경주 거주의 일본인 무뢰한이 있었다. 다음은 그때 경주박물관이 서울 총독부박물관에 보고한 내용이다.
"최근 석빙고 근방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임해전지 부근의 토지를 발굴하여 전돌과 기와 등을 채취했음을 탐지하고, 즉시 현지 도굴상태를 조사해 본바, 도굴자는 인왕리 입구에 거주하는 하시모토라는 자로서 목하 경찰에서 취조 중임. 도굴 유물은 화강석 석재 이백 수십 개, 전돌 188개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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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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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필자 개인에 관한 얘기를 여기에 언급하기는 무척 송구스러운 얘기나 역사 목격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자 자신을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민주당 정권이 성립되자 필자는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의해서 공보비서실의 촉탁으로 채용되었다. 필자가 담당하는 것은 방송분야였다. 4.19라는 시대정신은 방송에까지 파급되어 방송인들도 민주화를 운운하며 도에 지나친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시정 건의하는 것이 필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오후 1시 퇴근 시간이 되자, 필자는 송원영의 전용 지프에 동승해서 효창공원으로 갈 요량으로 중앙청을 나섰다. 조선호텔 앞에 이르자 송원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헤어지세." (송 비서관이 어째서 갑자기 심경에변화를 일으켰을까?) 필자는 적잖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명동에 있는 목동다방으로 향했다. 이날, 송 비서관은 어떻게 해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틀 뒤인 5월 15일에 들었다. 갑자기 비서관 정주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장면이 장도영을 불렀을 때 그 자리에 입회했던 그는 대검찰청으로, 육군본부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처리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2,3일 전이었던가? 정주성이
"제가 못할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장도영 참모총장의 태도에 의심이 가는군요."
어째서 정주성은 장도영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장면이 장도영에게 박정희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사에 착수하고 있지 않았기때문이었다. 정주성이 장도영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총리께서 지시하신 일 어떻게 됐습니까?"
정주성은 장도영에게 독촉하기까지 했었다.
"아, 지금 조사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때마다 장도영은 얼버무리려고만 의심을 품게 될 수밖에.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자 중앙청을 나섰던 송원영은 차 안에서 문득 정주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축구 경기를 단념했던 것이다. 조선호텔 앞에서 내린 송원영은 조선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퇴근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저녁에 장도영 총장하고 같이 옥류장에서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송원영이 의향을 묻자 선우종원은 좋다는 것이었다. 선우종원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송원영은 이번에는 장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통하게도 장도영 역시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세 사람이 종로 화신 뒤에 있는 옥류장에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은 것은 7시경이었다.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을 무렵, 송원영은 마치 문득 생각이 나서 묻는다는 듯이 쿠데타에 대한 얘기를끄집어냈다.
"참, 장 총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런 그는 손을 휘이휘이 내저으며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
"아, 그 이야기 말이오? 그거 모략입니다, 모략."
"모략이라니요? 한 사람뿐이라면 모르지만 선우 사장께서도 송우범 씬가한테서 정보를 입수했다는데, 그런데도 모략이란 말입니까?"
송원영은 힐책하듯 물었다.
"일어나시지요?"
장도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참으로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군. 쿠데타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몸이 불편하다고 자리를 피하려고 해?) 이번에는 송원영이 부쩍 장도영을 의심하게 되었다. 한데, 여기 세월이 20여 년 흘렀는데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김흥수는 분명히 김덕승이 사흘 만에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전모를 자백했다고 했다. 그런데 장면한테는 <김덕승이란 자를 체포해서 취조했던 바, 그 자가 돈이 탐이 나서 쿠데타를 빙자해 보고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고는 검찰총장 이태희가 했다. 그러면 이태희가 허위보고를 했단 말인가? 법률가인 이태희가 그런 허위보고를 했을 리는 없다. 그는 예사로운 공인이 아니요, 검찰총장이라는 공권력의 최고 책임자가 아닌가? 더구나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허위보고를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김덕승을 취조해서 받아낸 자백이 어디에서 변조되었던 것일까? 서울시 경찰국장 이귀영(李貴永)한테서? 이 선에서 변조되었다고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장면 내각 성립과 함께 정보비서실의 수석비서관으로 있다가 서울시 장면이 그를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내보냈던 것도 4.19로 사기가 저하된 경찰의 사기진작에 있었다. 그러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전직을 했던 그가 쿠데타 음모의 전모를 변조시키려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어느 선에서 김덕승의 자백 내용이 변조되어 장면에게 보고되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지금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6. 해병대, 자정에 출동하다
이제 이쯤에서 얘기를 쿠데타 총수인 박정희한테로 돌리자. D데이 H아워인 5월 15일 밤 10시경 신당동 자택을 나선 박정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박정희에 대한 얘기는 5월 15일 밤 10시 이후의 행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겠으나, 기왕에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낸 이상에는 그가 쿠데타를 지휘하기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의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박정희의 보직은 제2군 부사령관, 그가 쿠데타 지휘를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월 12일이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자 조카사위인 예비역 중령 김종필(金鐘必)로부터 쿠데타에 따른 세부계획에 대한 것까지 자세하게 브리핑을 받았고, 그런 다음 그 자신이 이 계획을 엄중 재검토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쿠데타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먹으려면 계획 자체에도 차질이 없어야 하고 실행에도 차질이 없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틀 뒤인 5월 14일 일요일에 쿠데타 주체 중의 주체인 알짜들만을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金鐘洛)의 집에 불러모았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우선 이 집에 모였던 주체 중의 주체인 알짜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 공수단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金悌民), 제30사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 제33사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오학진(吳學鎭), 제6군단 포병단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浚),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신윤창(申允昌), 제6군단 대대장 육군 중령 구자춘(具滋春),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백태하(白泰夏),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정오경(鄭五敬),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김인화(金仁華),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 제6관구 사령부 해병여단 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金潤根), 해병여단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吳定根), 해병여단 부연대장 해병 중령 조남철(趙南哲), 해병여단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 육군본부 소속 육군 대령 오치성(吳致成), 육군 중령 옥창호(玉昌鎬), 육군 중령 김형욱(金炯旭), 육군 중령 이석제(李錫濟), 육군 중령 유승원(柳承源), 그리고 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과 박정희 등이다.
여담부터 미리 한마디 해두자. 지금 여기 김종락의 집에 모인 24명의 주체들은 쿠데타가 성공한 지 불과 1,2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각도가 달라지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그런가 하면 엄청난 출세를 해서 그 자신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치부를 해서 떵떵거리며 살게 된다. 이들 24명의 인생 역정만을 살펴보고 연구를 해도 인생이란 것을 대강은 체득하게 된다. 각설하고. 이날의 소집은 오전 10시에 이루어졌다. 소집의 목적은 각 부대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데 있었다. 모여야 할 사람이 다 모이자 박정희의 인사말이 있었고, 각 부대에 대한 임무부여와 작전계획을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인 박원빈이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쿠데타에 참가한 각 부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 중대장 육군 대위 차지철. 육군 제1공수단은 쿠데타에 있어 한강교를 도하, 반도호텔과 중앙방송국(KBS)를 점령하고 요인 체포. 일부 병력은 중앙청, 국회의사당을 장악한다.
-해병대: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 부연대장 해병 중령 조남철. 쿠데타 제2부대로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을 점령한다.
-제30사단:참모장 육군 대령 이갑영(李甲榮), 부사단장 육군 대령 박상훈,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 전투대대장 육군 소령 고병만. 제30사단은 중앙청, 청와대, 서울시 경찰국 탄약고, 서대문 형무소, KBS 연희 송신소를
-제33사단:연대장 육군 대령 이병엽(李秉燁), 작전참모 육군 중령 오학진. 제33사단은 서울 시청앞과 덕수궁에 위치, 방송국, 국제 전신전화국, 마포 형무소를 점령한다.
-제6군단 포병단:포병사령관 육군 대령 문재준, 군단 작전참모 육군 대령 홍종철, 5개 대대장 육군 중령 신윤창, 백태하, 구자춘, 정오경, 김인화. 제6군단 포병단은 5월 16일 새벽 3시 40분까지 육군본부를 점령한다.
제6관구 사령부: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 제6관구 사령부를 제1지휘본부로 정한다.
-반도호텔(국무총리 장면 숙소):육군 소령 박종규(朴鐘圭) 지휘하에 국무총리 같다. 엘리베이터조 육군 대위 차지철, 계단조 육군 대위 김인식(金仁植), 정문 계단조 육군 대위 유국준(柳國俊), 우측층계조 육군 대위 장종원(張鐘源), 좌측 계단조 육군 대위 차병섭(車炳燮).
-요인 체포조:내무부장관, 대위 김상목(金相睦). 외무부장관, 대위 오필생(吳泌生). 국방부장관, 대위 손기훈(孫基勳). 무임소장관, 대위 이덕기(李德基). 치안국장, 대위 안충인(安忠仁).
-특수 활동조: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은 연락업무와 인쇄물을 준비한다. 육군 대령 오치성, 육군 중령 김형욱, 김동환(金東煥)은 반혁명 및 국내외 정보를 취급한다.
조창대(曺昌大), 이종근(李鐘根), 박용기(朴勇琪), 심이섭, 엄병길(嚴秉吉)은 사령부 안에서, 정문순(鄭文淳), 윤필용(尹必鏞)은 방송을 신호로 육군대학에서 각각 혁명세력에 대한 지지활동을 벌인다.
이상과 같이 발표하고 나서 박원빈은 다음과 같이 엄숙히 말하는 것이었다.
"먼저 D데이 H아워를 16일 오전 3시로 정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이 참모장 이갑영한테는 D데이 H아워가 15일 오후 10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5시간씩이나 차이가 나게 된 이유는 박원빈은 각 부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난 다음 말했다.
"오전 3시 목표점령을 기준으로 해서 각 부대에서 목표까지의 거리를 감안, 각 부대별로 출발시간을 정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강 서편에 위치한 부대의 한강 인도교 통과 순서를 해병여단, 공수단, 제33사단의 순서로 정했습니다."
<귀신 잡는 해병>, 한국 해병이 얼만 용감한 군대냐 하는 것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한마디로도 설명이 충분하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까지도 잡을 정도니 한국 해병이 얼마나 용감한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쿠데타를 위한 작전계획을 짠 사람들, 그들은 김종필을 위시한 오치성, 옥창호 등 잡는 해병대의 용감성을 가장 높이 평가했기에 한강 다리를 제일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거사를 하다 보면 어떤 장애가 부딪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장애를 물리치는 데 있어 해병대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 여단장인 김윤근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해병여단이 제일 먼 곳에 위치해 있는데 어떻게 한강 인도교를 제일 먼저 건널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해병여단을 맨 뒤로 바꾸어 주시오."
"그래서 각 부대별로 목표까지의 거리를 감안해 가지고 출발시간을 정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까?"
하여간에 이미 세워 놓은 작전계획대로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는 투로 김윤근의 이의를 물리치려 했다. 박정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가 아니오? 아무래도 제일 용감한 부대가 제1진으로 선두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해병대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것은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무슨 착오가 생겼을 때 혼란을 덜하게 하자면 해병대가 맨 뒤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착오가 생겼을 때라니? 무슨 착오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이유를 내세우며 김윤근은 자기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해병대가 제3진에 해병대의 임무가 경찰을 제압하는 데 있는 만큼."
해병대에 주어진 임무는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의 점령이었다. 모두가 해병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가 앞장서 줄 것을 간청했으나 김윤근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박정희가 단안을 내렸다.
"그럼 공수부대를 제1진으로 세우도록 합시더."
박치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군사혁명에 있어 공수단이 선봉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궐기하는 일만이 남았소. 승패는 하늘에 맡기되, 동지 여러분은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최후의 일인까지라도 싸워서 꼭 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도록 해야겠소."
박정희의 짧은 격려사로서 이날의 회의는 끝났다. 벌써 어둠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회의가 길었던 것이다. 모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좀 그대로 앉아 주십시오."
그때 김종필이 제지했다. 모두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거사를 하자면 아무래도 군자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신문지에 싼 돈을 부대 단위로 나누어 주었다. 일금 30만 환씩이었다. D데이까지는 앞으로 이틀, 이미 모든 출동을 해서 임무만 수행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돈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의 경우, 나중 일이지만 김윤근은 30만 환을 보관하고 있다가 거사가 성공한 후에 <5.16혁명기념>이라는 반지를 만들어 출동했던 장병 1,500명에게 하나씩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나......?
마침내, 마침내 D데이로 정해져 있는 5월 15일은 밝았다. 이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기가 무섭게 박정희의 가슴은 고동치기 지경이었다. (오늘이 내 운명을 건 대도박의 날이렷다!) 그는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며 천장을 응시하면서 새삼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10년을 두고 가슴에 품어온 계획이 아니냐!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 계획을 성공시키고야 말 테다.) 그렇다. 10년을 두고 가슴에 품어 왔던 계획이었다. (이놈의 나라, 뒤집어 엎어 버리고 말아야 돼!) 이렇게 내뱉고 그가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은 1952년 5월 26일,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졌을 때였다. 이때의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 그러나 육군 대령 신분으로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육군 참모총장인 이종찬(李鐘贊)을 과업 계획을 세웠다. 이종찬이 육군의 총수라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군부의 인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각하, 지금의 정치적 혼란을 방치해 두었다간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이제야말로 군이 나서서 국정을 바로잡아야 할 때입니다."
그는 이종찬에게 쿠데타를 건의했다.
"무슨 허튼 수작을 하고 있어. 오히려 군이 정치에 간섭하게 되면 나라를 망치고 마는 거야!"
이종찬은 일갈하면서 단 한마디로 만일 이때, 이종찬이 박정희의 흑심을 외면만 해버릴 것이 아니라 예편조치를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는 더욱더 쿠데타에 대한 꿈을 다져나갔고, 끝내는 쿠데타를 단행함으로써 군부 독재정치의 막을 열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천려일실(千廬一失)이었다. 하여간에 이종찬이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쿠데타를 반대했다고 해서 그 꿈을 버릴 박정희가 아니었다. (그래, 싫어? 싫다면 좋아, 너 아니면 사람이 없는 줄 아냐? 나도 언젠가는 별을 달겠지. 별을 달게 되면 나 스스로 테다.) 오히려 박정희는 더욱더 쿠데타에 대한 결심을 굳건히 다졌다. 이런 경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표현이 합당할까? 아무튼 그는 10년 세월을 두고 칼을 갈았고, 급기야는 이제 거사를 하기까지 일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당동 박정희의 집은 참으로 부산했다. 그가 미처 조반상을 대하기도 전에 김종필이 찾아왔고, 김용태(金容泰)도 찾아왔다. 장태화(張太和)도 찾아와서 민주당 정권의 동태를 보고하기도 했다. 오늘이 거사의 날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陸英修)는 가정부의 아침 설거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오세요."
가정부의 고향은 육영수와 같은 옥천군이었으나 마을이 달랐다. 육영수의 고향은 능월리였고, 가정부의 고향은 청산리라는 곳이었다.
"갑자기 고향엔 왜요?"
가정부는 꽤나 의아한 모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분부였기 때문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니 좀 쉬다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육영수는 행여 가정부가 언짢아 할세라 미소를 지어보이며 별 뜻이 아님을 암시해 주었다.
"오늘 따라 손님이 저렇게 많이 오시는데 혼자서 어쩌시려고요?"
"내 걱정은 마세요. 그깟 하루 이틀쯤 육영수는 싫다는 가정부를 기어이 설득해서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노자돈도 넉넉히 주어서.......
15일 밤 9시 45분. H아워인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박정희의 가슴은 더욱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이 일기도 했다. 그는 그 무거운 가슴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안방으로 건너갔다. 정장하고 있던 군복을 벗고 작업복에 잠바 차림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 다음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내 가방 속에 있는 권총 좀 꺼내 주겠소?"
"예."
박정희가 대구에서 들고 올라온 가방 속에서 권총을 꺼내는 육영수의 손이 아내가 건네 주는 권총을 받아 허리에 차고 나자, 박정희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녀오겠소."
"여보, 아이들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시지 않겠어요?"
"아이들 숙제를?"
박정희는 아이들의 숙제를 봐달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곧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아이들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 떠나라는 암시임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지."
박정희는 아이들의 방으로 건너갔다. 이제 겨우 국민학생인 근혜, 근영 자매가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아랫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유치원생인 외아들 지만이가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세 아이의 모습을 한번 더 번갈아 보고 나서 조용히 물러 나왔다. 다시 응접실로 건너왔을 때가 밤 10시. 박정희가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늘 같은 파장으로 울리는 전화벨이었으나 이날 밤의 벨소리는 유별나게도 크게 그의 귀청을 두드렸다. 순간, 이상한 예감이 일었다. 모두가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H아워가 다 되었는데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었으리라.
들었다.
"신당동이오."
"각하, 김재춘이올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었다.
"응, 김 대령, 무슨 일이오?"
"각하, 30사단의 부사단장하고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일이 탄로났습니다."
"뭐라고?"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한순간 숨이 딱 끊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던 것이다.
"각하, 부대 출동이 어렵게 됐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제 뭘 어쩌겠소. 제2안으로 할 것이오."
"제2안? 제2안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여기에 대해서는 쿠데타 그룹의 그 누구도 기록으로 남긴 바가 없다. 그가 응접실을 나서는데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 준장 한웅진(韓雄震)과 육군본부 교육처장 육군 준장 장경순이 나타났다. 원래 이 두 사람들하고는 김포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획이 탄로나 차질이 생기게 되자, 신당동 박정희의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박 장군, 계획이 탄로난 모양인데 이제 어쩌면 좋겠소?"
한웅진이 물었다.
"계획이 탄로난 이상 댁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일단 피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시죠. 거기에서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웅진의 권고였다. 그는 지난 토요일에 서울로 올라와서 종로구 청진동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합시다."
박정희는 앞장서 걸어나갔다. 그는 자기 차에 한웅진과 부관 육군 소령 이낙선을 태우고 나서 차에 올랐다. 장경순이 몰고 온 차에는 그와 한웅진이 데리고 올라와 있던 정보학교 장교 세 사람이 동승했다. 두 대의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한 대의 검은 지프가 그들 뒤를 따랐다. 506방첩대에서 파견한 박정희 감시조의 지프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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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7 - 시오노 나나미
제2부 칼리굴라 황제 (재위:서기 37년 3월 18일~41년 1월 24일)
힘의 대결
황제를 맞아 라인 강 전선에서 벌어진 것은 단순한 군사훈련에 불과했지만, 수도 로마에서도 그걸로 개선식을 거행해주었을 정도니까 제국의 동방 유대에는 칼리굴라가 게르만족에 대승을 거둔 것으로 전해진 모양이다. 그것을 기뻐한 그리스계 주민들은 칼리굴라를 위해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 제물을 바치려고 했다. 이것이 유대인을 자극했다. 성난 그들은 제단으로 몰려가 대리석 제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렸다. 이 사건은 로마로 돌아와 있던 칼리굴라에게 보고되었다. 원래 유대인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던 칼리굴라는 이 보고를 받고 격분했다. 그리고는 센세이셔널한 힘의 대결에 호소했다. 유대를 관할하고 있는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편지를 보내 칼리굴라를 본뜬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상을 만들어 예루살렘 신전 안에 세우라고 명령한 것이다. 요즘 같으면 텔레비젼의 톱뉴스나 신문의 1면 머릿기사가 될 게 분명하다. 선황 티베리우스가 등용한 페트로니우스는 칼리굴라의 명령에 깜짝놀랐다. 게다가 칼리굴라는 이 명령을 페트로니우스에게 보낸 편지에만 쓴 게 아니라 공표까지 해버렸기 때문에 유대인들도 모두 알아버렸다. 유대 전역이 스트라이크에 돌입했다. 남자도 여자도, 늙은이도 젊은이도, 심지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총독 관저로 떼지어 몰려가, 신을 모독하는 이런 행위가 실현되지 않도록 손을 쓰라고 요구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해외의 유대인 사회도 이 소식에는 동요을 감추지 못했다. 예루살렘 신전은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꽃'이었기 때문이다. 내버려두면 유대 민족의 총궐기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페트로니우스 총독은 태업하는 길을 선택했다. 티루스(오늘날 레바논의 티레)의 공방에서 제작되고 있는 신상을 되도록 천천히 만들라고 은밀히 명령한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말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방법으로, 다시 말해서 증거가 남지 않는 방법으로 답했다. 이로써 시위도 스트라이크도 진정되었다. 칼리굴라는 자기 명령이 빨리 실현되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상숭배를 엄금하고 있는 유대교의 총본산에 유피테르 신상이 세워졌다는 보고는 좀처럼 들어오지 않고, 신상이 완성되었다는 보고조차도 들어오지 않는다. 칼리굴라는 페트로니우스에게 다시 편지를 보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의 선물을 선택한 모양이군. 그대에게 부과된 임무를 수행하기보다 그들의 호의를 얻는 쪽을 선택했다는 건데, 이는 황제에 대한 불복종에 해당이오. 그래서 황제인 나는 황제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대가 스스로 거기에 결말을 짓는 것이 가장 적절한 해결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소."
한마디로 말하면 자살을 명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로마에서 안티오키아까지 가는 데 한 달이 걸렸다. 칼리굴라의 명령이 아직 지중해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 명령을 내린 장본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나 있었다. 페트로니우스도 목숨을 건졌지만, 로마 황제와 유대교도인의 전면 대결도 이로써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칼리굴라 때문에 생긴 제국 통치의 '균열'은 유대 문제만이 아니었다. 파르티아 왕국과의 우호관계도 아르메니아 왕국이 로마 쪽에 붙느냐 파르티아 쪽에 붙느냐를 둘러싸고 또다시 위태로워지기 시작했다.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도 파르티아와의 경계인 유프라테스 강에 2개 군단을 못박아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70년 동안이나 로마의 믿을 만한 동맹국이었던 북아프리카 서쪽의 마우리타니아 왕국에서도 칼리굴라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오늘날의 모로코와 알제리 서부를 합한 면적을 가진 마우리타니아왕국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왕가의 대가 끊어졌을 때에도 속주화하지 않고 동맹국으로 존속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누미디아의 마지막 왕 유바의 아들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 태어난 딸과 결혼시켜, 그에게 마우리타니아 왕국을 맡긴 것이다. 칼리굴라 시대에 마우리타니아 왕은 이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트로메우스였다. 이 왕의 외조부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다. 칼라굴라의 증조부도 역시 안토니우스다.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동맹국이라 해도 실제로는 속국인 마우리타니아의 왕에게 자기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트로메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우리타니아 왕국을 속주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선언했다. 마우리타니아인들은 여기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제국을 다스리다 보면 항상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기는 법이지만, 로마인들이 걱정도 하지 않은 마우리타니아에서도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칼리굴라의 치세는 국가 재정의 파탄을 낳았을 뿐 아니라, 외치에서도 여기저기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반정의 칼
테러 행위는 문명이 미숙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선거로 낙선시키는 수단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테러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죽이면 정치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기 40년부터 41년까지 칼리굴라를 둘러싼 환경은 즉위 당시의 열광이 거짓말로 여겨질 만큼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열광이 차갑게 식기까지는 3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칼리굴라는 로마에서는 책임있는 공직을 맡을 수 있는 나이로 여겨진 30세도 채 되지 않았다. 사회복지대책인 '빵'과 인기 정책인 '서커스'가 주어지고 있는데도, 외치의 실패 따위에는 관심한 일반 시민의 지지도까지 떨어진 것은 땔감에 부과된 세금 때문이었다. 칼리굴라로서는 폐지된 매상세를 되살리는 대신 땔감에 세금을 부과한 것이겠지만, 땔감은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밀을 무상으로 배급받고 있는 빈민들도 땔감이 있어야 빵을 만들 수 있다. 검투사 시합이나 각종 오락에 초대받아 공짜로 즐기면서도, 땔감에 대한 과세에는 항의하는 목소리가 일어난 것도 당연했다. 칼리굴라는 경기장에서 그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을 근위병들을 출동시켜 진압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알 수 있는 처지에 있고 그것을 이해할 능력도 있는 원로원이 외치를 포함하여 제국 전역에 걸친 칼리굴라의 실정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마치 뱀의 시선을 받은 개구리 같았다. 원로원이 꼼짝 못하고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국가반역죄 처벌법을 무기로 이용한 칼리굴라의 공격은 오로지 원로원 계급만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일은 내 차례가 아닐까하는 공포가 그들을 꽁꽁 묶어놓고 있었다. 둘째, 아직도 '게르마니쿠스 신화'가 살아 있는 라인 강 연안의 군단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인 칼리굴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본명이 가이우스인 로마 제국 제3대 황제는 '작은 군화'라는 의미의 '칼리굴라'로 불리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로마군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라인 강 연안의 군단병에게, 그들의 마스코트였던 가이우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여전히 '작은 군화'였고, 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가 젊은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떠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다.
셋째, 칼리굴라를 타도한 뒤 제국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에 대해 원로원 의원들 자신이 명확한 생각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로원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뿌리깊은 공화주의자로서 공화정 부활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제정으로 바뀐 지 벌써 70년이 지났다. 의원들 대다시는 아우구스투스가 쌓아올린 '팍스 로마나' 체제하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부활시킨다는 생각이 현실적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칼리굴라의 실정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와 있었다. 넷째, 칼리굴라를 죽이기가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의 신변 경호는 완벽했다. 카이사르 암살에서 교훈을 얻은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해체한 게르만족 경호원 체제를 부활시켰다. 이것이 그가 천수를 누린 원인이기도 했지만, 칼리굴라는 이것을 더욱 확대하여 근위병들도 경호에 가담시켰다. 로마군의 꽃이라고 불린 근위대에는 제국 각지에 주둔하는 군단에서 선발된 정예들이 모여 있다. 칼리굴라는 자신의 신변 경호를 강화하기 위해, 근위대장교들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한 게르마니아 군단에서 발탁했다. 즉 '게르마니쿠스 신화'의 신봉자들만 주변에 모아놓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용기있는 원로원 의원도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자기한테 충성스럽다고 믿었을 게 분명한 '게르마니쿠스 신화'의 신봉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서기 41년 1월 24일, 신격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팔라티노 축제가 황궁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열리고 있었다. 축제 때에는 으레 그렇듯이, 제물을 바친 뒤에는 연극이나 경기대회가 이어진다. 팔라티노축제가 닷새째를 맞은 그날은 연극을 상연하는 날이었다. 선황 티베리우스가 이런 행사에 참석하지 않은 것이 인기를 얻지 못한 하나의 원인임을 알고 있는 칼리굴라는 연극이든 경기대회든 열심히 얼굴을 내밀었다. 그날도 오전에 상영된 연극을 끝까지 열심히 감상했다. 오후 한 시쯤, 그는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극장과 황궁은 짧은 지하도로 이어져 있다. 그 지하도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근위대 대대장(트리부누스)인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뒤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칼리굴라가 비틀거렸다. 그러자 또 다른 근위대 대대장인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가 정면에서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다음 순간, 카이레아가 쓰러진 칼리굴라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게르만족 경호원이 달려왔을 때는 황제만이 아니라 황제의 네 번째 아내인 카이소니아도 심장을 단칼에 찔려 숨을 거둔 뒤였고, 한 살바기 딸 드루실라도 죽어 있었다. 근위대 대대장들은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드루실라를 낚아채어 지하도 벽에 내동댕이쳤다. 칼리굴라라는 애칭으로 불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케르마니쿠스의 통치는 이로써 3년 10개월인 6일 만에 끝났다. 28세 5개월에 맞은 죽음이었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이유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모두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죽었기 때문에 연구자들도 추측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중에는 칼리굴라 살해로 근위대가 황제 교체에 개입하는 선례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하고, 그 이유를 근위병들이 돈에 유혹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최초의 선례가 만들어졌다는 데에도 나도 동의하지만, 돈에 유혹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납득할 수 없다.
칼리굴라를 죽이고 클라우디우스를 제위에 앉힌 공로자라는 이유로 근위병들이 일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포상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이 끝난 뒤의 이야기다. 또한 근위대 9개 대대의 9천 명 병사들이 모두 황제 살해에 가담한 것은 아니다. 가담한 것은 2개 대대뿐이고, 게다가 2개 대대의 2천 명병사도 모두 가담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는 2개 대대를 이끄는 두 대대장과 20명 안팎의 병사들만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황제를 죽이는 큰일을 결행했다. 직접 손을 댄 대대장 두 명은 포상금을 받기는커녕 황제 살해죄로 사형선고를 받고 순순히 승복했다. 그들의 직속 부하들도, 단결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근위대의 다른 병사들도 두 사람의 죽음에 전혀 반발하지 않았다. 이것도 단지 돈에 유혹당한 결과일까. 칼리굴라 살해의 주모자이고 실제로 손을 댄 두 사람 가운데 하나인 카시우스 카이레아가 27년 전인 서기 14년에 게르마니아 군단에서 백인대장을 지낸 것은 시료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서기 14년이라면 아우구스투스가 죽고 티베리우스가 제위를 물려받은 해였고, 황제가 바뀐 지금이야말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병사들이 스트라이크를 벌여 라인 강 연안의 군단기지가 시끄러웠던 해이기도 하다. 당시 2세였던 칼리굴라가 간접적으로나마 병사들의 폭동을 진정시키는 데 이바지 한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그리고 게르마니아 군단 총사령관인 게르마니쿠스 일가를 지키기 위해, 폭도로 변한 병사들 앞을 칼을 빼들고 막아선 사람이 바로 백인대장 시절의 카이레아였다. 로마 군단의 등뼈라고 불리는 백인대장은 대개 80명의 병사를 휘하에 두고, 근위대로 치면 중대장이다. 하지만 로마군에서는 하사관이고, 장교의 경력은 800명을 지휘하는 대대장부터 시작되는 게 보통이었다. 명문 자제나 유력자의 연고자는 입대한 뒤 적응 기간을 거치면 곧바로 대대장에 임명된다. 유대인이라도 필로 같은 유력자의 아들은 백인대장도 거치지 않고 장교인 대대장이 된다. 따라서 군단장이든 대대장이든, 백인대장을 지낸 경험이 있다는 것은 군대에서 '밑바닥부터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한 단계씩 올라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이처럼 연줄도 없는 사람은 17세에 군대에 지원했다 해도 30세 안팎이 된 뒤에야 백인대장가지 진급할 수 있다. 카이레아도 서기 14년에 30세 안팎이었다면, 서기 41년에는 50대 후반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50대 후반에 근위대 대대장이라면 '밑바닥부터 한 단계씩 올라간 사람'치고는 순조로운 출세였다. 근위병은 16년간의 병역을 마친 뒤에 퇴역하지만, 이것은 사병한테만 적용되고 대대장 같은 장교급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50세 후반에 헌역이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군단장이 아닌 한, 60세가 넘으면 현역에서 은퇴하는 게 보통었던 모양이다.
서기 14년부터 41년까지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14년부터 16년까지 2년 동안 게르마니아 군단 총사령관인 게르마니쿠스는 다시 질서를 되찾은 8개 군단을 이끌고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과 싸우는 데 열중했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원정을 하고, 겨울철에는 라인 강 연안의 기지로 돌아오는 생활이었다. 소요가 일어났을 때 이름을 날린 백인대장 카이레아가 2년 동안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원정을 떠나고 다시 기지로 돌아오는 생활을 했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전투에 부적합한 겨울을 지내는 군단 기지에서는 병사들이 '작은 군화'(칼리굴라)라고 부르는 총사령관의 아들 가이우스가 병사들이 만들어준 유아용 '군화'(칼리가)을 신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자라고 있었다.
서기 17년 5월에 수도 로마에서 거행된 게르마니쿠스의 개선식에는 카이레아도 참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은 개선장군의 전공을 축하할 뿐 아니라, 그 휘하에서 전공을 세우는 데 협력한 병사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개선식을 통해 장수와 병사들은 명예를 나누어 갖는다. 게르마니쿠스는 다정다감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들고 병사들 앞을 막아서 카이레아를 잊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휘하 병사들 가운데 누구를 로마로 데려가 개선식에 참가시킬 것인지는 개선장군이 결정할 문제였다.
게르마니쿠스가 그해 가을에 오리엔트로 떠날 때도 카이레아는 따라 갔을지 모른다. 티베리우스가 오리엔트 문제를 해결하도록 파견한 게르마니쿠스의 수행단 명단에는 군단장과 대대장을 비롯한 게르마니쿠스의 측근들 이름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라인 강 연안의 총사령부가 그대로 유프라테스 강으로 이동한 느낌이다. 만약 카이레아도 수행단에 끼어 있었다면, 게르마니쿠스와 아내 아그리피나와 아들 칼리굴라를 따라 이집트 여행에도 동행했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시리아로 돌아온 직후에 병으로 쓰러져 죽은 게르마니쿠스의 곁을 지키다가 남편의 유골을 가슴에 안고 일곱 살바기 칼리굴라의 손을 잡고 귀국한 아그리피나를 따라 고국 땅을 밟았을게 분명하다.
그후 카이레아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다. 상상력을 발휘하려 해도 최소한의 사료는 필요한데, 그것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총사령관을 잃은 병사가 갈 곳은 군대밖에 없다. 카이레아는 라인 강 연안의 군단 기지로 돌아간 게 아닐까.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북쪽 방위선을 라인 강과 도나우 강으로 정착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다. 방위선 확립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임무였다. 그리고 카이레아처럼 우수하고 충실한 군사 전문가는 그런 임무에 꼭 필요한 인재였다.
카이레아가 군단병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근위대 대대장으로 승진하여 수도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은 '작은 군화'가 황제에 즉위한 뒤가 아닐까. 그리고 그후 카이레아의 임무는 칼리굴라의 신변 경호가 되었다. 칼리굴라가 가는 곳이라면 리옹에도, 라인 강 전선 기지에도, 도버 해협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갈리아 북부에도 그림자처럼 따라가는 것이 카이레아에게는 일상생활이 되었다. 이 생활도 어느덧 4년째에 접어들어 있었다. 칼리굴라는 결혼도 하지 않고 계속 독신으로 지내는 카이레아를 동성애자락 놀렸다고 한다. 여기에 원한을 품고 칼리굴라를 죽였다는게 수에토니우스의 주장이지만, 병사로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한 황제를 그 정도의 원한으로 죽였다는 건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미숙한 채로 끝난 칼리굴라의 성격을 생각하면, 카이레아를 업신여기고 놀렸다기보다는 일종의 응석이 아니었을까. 나이로 치면 아버지뻘인 카이레아도 친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도 인연이 멀었던 칼리굴라를 아버지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지만 칼리굴라 황제의 언동에도 그토록 충성스런 카이레아도 가슴이 아플 뿐이었다. 60세가 가까워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제대한 뒤의 쓸쓸한 독신생활뿐이었다. 그런 카이레아가 자식을 죽이는 아저지의 심정으로 '작은 군화'에게 칼을 휘두른 건 아닐까. 마치 가족의 불상사는 가족이 처리하겠다는 듯이. 칼리굴라를 죽인 뒤, 카이레아는 두려움에 떨며 숨어 있던 클라우디우스를 데려오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끌려오자, 그를 데리고 근위대 병영으로 돌아가 병사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환호를 받게 했다. 칼리굴라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다. 다시 말해서 클라우디우스도 어디까지나 '가족'이었다. 카이레아는 원로원이 행동에 나서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이것을 기정 사실로 만들어버렸다. 가부장권이 강한 로마인들의 가족의식이 있었기에 이처럼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정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원로원의 추인으로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가 황제 살해라는 대역죄를 지었으니 죽으라고 요구했을 때, 카이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다. 동지인 사비누스도 카이레아를 뒤따라 자결했다. 둘 다 대대장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휘하에 있던 2천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폭군 칼리굴라를 죽이고 클라우디우스를 제위에 앉힌 공로자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죽어갔다.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대역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근위대 병사들에게 주어진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상여금은 두 대대장의 죽음에 대한 병사들의 저항을 봉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다.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것은 다음 사항뿐이다. 서기 41년 1월 24일, 가이우스 황제가 살해되었다. 아내도 딸도 함께 살해되었다. 범인은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 그리고 소수의 근위병들이다. 원로원 의원이 가담한 사실은 전혀 없다. 황제를 죽인 직후, 황제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찾아내어 근위대병영으로 데려가 "황제!"라는 환호를 받게 한다. 원로원도 어쩔 수 없이 추인했다. 카이레아와 사비누스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죽음에 승복했다. 살해에 가담한 다른 병사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 칼리굴라의 죽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칼리굴라를 테베레강에 내던지라는 목소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눈물을 흘린 사람도 없었다.
칼리굴라의 유해는 에스퀼리노 언덕의 정원 구석에서 서둘러 화장한 뒤 매장되었다. 황족의 묘지인 '황제묘'(마우솔레움)에는 묻히지 않았다. 무덤이 어디인지는 분명치 않다. 칼리굴라 자신이 수없이 만들어 제국 각지로 보낸 그의 조상은 눈에 띄는 족족 파괴되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게 놀랄 만큼 적은 까닭도 그가 피살된 직후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한시라도 빨리 잊고 싶은 악몽이라도 되는 것처럼 칼라굴라 황제의 흔적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별다른 기대도 없이 50세의 새 황제를 맞이했다.
[칼리굴라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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