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0호 - 2023.12.28. 목요일(음력 : 11. 16.)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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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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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흔히 우울증이라고 하는 것은 일을 적게 해 몸에 탈이 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 로레인 핸스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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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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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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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소끔과 한 움큼
신혼 시절, 찌개라도 한번 끓이려면 친정어머니께 전화를 너 댓 번은 했다. “뭉근하게 오래 끓여야 맛이 우러난다.” “그건 팔팔 끓여야 되는 거야.” “한소금 끓으면 바로 건져내.” 불 조절이 요리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때 다른 건 알겠는데 ‘한소금’이 얼마만큼인지는 정확하게 감이 오질 않았다. 어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거품이 한번 부르르 올라올 때까지’가 ‘한소금’이란다. 그런데 ‘한소금’을 사전에 찾으니 나오지 않는다. ‘한소쿰’ 혹은 ‘한소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한소끔’이 표준어다.
‘한소끔’은 ‘한번 끓어오르는 모양’을 말한다. 조리법에서는 ‘새로운 재료를 넣은 뒤에 그 재료가 다시 한 번 끓을 정도의 시간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밥이 한소끔 끓으면 불을 줄여야 한다’와 같이 쓸 수 있다. ‘한소끔’은 또 ‘일정한 정도로 한차례 진행되는 모양’이라는 뜻도 있다. ‘한소끔 잤다’라고 하면 ‘한숨 잤다’는 뜻이 된다. ‘한소끔 되게 앓았다’고 하면 ‘한차례 심하게 아팠다’는 뜻이다.
‘한 움큼’이라는 말도 자주 틀리는 말 중 하나이다. ‘움큼’의 발음이 쉽지 않기 때문인지 ‘웅큼’이라고 쓰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움큼’은 ‘손으로 한 줌 움켜쥘 만한 분량을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아이가 과자를 한 움큼 집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근거는 없지만 ‘움켜쥘 만큼’이 줄어서 ‘움큼’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말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단어를 소리 내는 것만으로 신기하게도 모양이나 소리, 느낌까지 그대로 연상이 될 때다. ‘한소끔’과 ‘한 움큼’도 나에게는 그런 말 중의 하나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실 한국연구부장
‘며칠’과 ‘몇 일’
‘오늘이 몇 월 며칠이지?’라고 할 때 ‘며칠’ 대신 ‘몇 일’을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며칠’이 맞는 표기라고 하면 ‘몇 년’이나 ‘몇 월’처럼 ‘몇’에 ‘일’이 결합한 것이니 ‘몇 일’로 적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되묻곤 한다.
그러나 ‘며칠’은 ‘몇’에 ‘일’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이 말의 발음이 ‘며딜’이 아니라 ‘며칠’이기 때문이다. ‘몇 월’, ‘몇 억’ 등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들은 ‘며춸, 며척’이 아니라 ‘며둴, 며덕’으로 발음된다.
우리말에서는 종성에 ‘ㅅ, ㅈ, ㅊ, ㅌ’ 등의 소리가 날 수 없어 대표음인 ‘ㄷ’으로 중화되는 현상이 있다. 이에 따라 ‘몇’ 다음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명사가 오면, 받침의 ‘ㅊ’이 ‘ㄷ’으로 소리가 변한 뒤 이 ‘ㄷ’이 다음 음절의 첫 소리로 연음되어 ‘며둴’, ‘며덕’으로 소리가 나게 된다. 이는 ‘옷+안’, ‘낱+알’과 같은 말이 ‘오산’, ‘나탈’이 아니라 ‘오단’, ‘나달’로 소리 나는 것과 같은 음운 현상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것은 ‘몇’에 ‘을’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말로 추측한다. ‘을’은 ‘일(日)’을 뜻하는 고유어인데, ‘사흘, 나흘, 열흘’ 같은 말에 남아 있다. ‘몇’에 ‘을’이 결합하여 ‘며츨’이 되었다가 모음 ‘으’가 ‘이’로 바뀌어 ‘며칠’이 된 것이다. 실제로 옛 문헌에 ‘며츨, 몃츨’ 같은 표기가 있어 이런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며칠’은 ‘그 달의 몇 째 되는 날’과 ‘몇 날 (동안)’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두 의미를 구분하여 ‘몇 일’과 ‘며칠’로 구분해서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 경우 모두 ‘며칠’로 소리 나므로 둘 다 ‘며칠’로 적는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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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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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찬물 - 천상병
나는 찬물 잘도 마십니다
"물민족"이라며, 자꾸자꾸 마십니다.
그러면 생기가 솟구치며
남들에게 뒤지지 않게 됩니다.
자연의 정기를, 멀기는 하지만
흉내라도 내야 할 일이겠습니다.
만주의 송화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올 때
우리 선조들이
"물" "물" 했듯이.
하늘 날으는 새처럼, 하늘투성처럼
나는 그저 찬물투성입니다.
생기가 있어야
인생을 놓치지 않는 법입니다.
나의 노래는 미약하지만
그 노래 끝에는
반드시 찬물생기가 있어서
먼데까지 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情天恨海(정천한해) - 한용운
가을 하늘이 높다기로
정(情)의 하늘에 따를소냐.
봄 바다가 깊다기로
한(恨) 바다만 못하리라.
높고 높은 정하늘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손이 낮아서
오르지 못하고
깊고 깊은 한 바다가
병 될 것은 없지마는
다리가 짧아서
건너지 못한다.
손이 자라서 오를 수만 있으면
정하늘은 높을수록 아름답고,
다리가 길어서 건널 수만 있으면
한바다는 깊을수록 묘(妙)하니라.
만일 정하늘이 무너지고 한바다가 마른다면
차라리 정천(情千)에 떨어지고 한해(恨海)에 빠지리라.
아아, 정하늘이 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이마보다는 낮다.
아아, 한바다가 깊은 줄만 알았더니
님의 무릎보다는 얕다.
손이야 낮든지 다리야 짧든지
정하늘에 오르고 한바다를 건너려면
님에게만 인기리라.
∼∼∼∼∼∼∼∼∼∼∼∼∼∼∼∼∼∼∼∼∼∼∼∼∼∼∼∼∼∼∼∼~~~~∼∼
바람 - 정지용
바람.
바람.
바람.
늬는 내 귀가 좋으냐?
늬는 내 코가 좋으냐?
늬는 내 손이 좋으냐?
내사 원통 빨개졌네.
내사 아므치도 않다.
호 호 칩어라 구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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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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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탁마(切磋琢磨)
切:끊을/자를 절. 磋:탄식할/찬탄할 차. 琢:쫄 탁. 磨:갈 마.
[원말] 여절여차여탁여마(如切如磋如琢如磨). [준말] 절마(切磨).
[출전]《論語》〈學而篇〉,《詩經》〈衛風篇〉
뼈/상아/옥/돌 따위를 깎고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 곧
① 수양에 수양을 쌓음의 비유.
② 학문/기예 따위를 힘써 갈고 닦음의 비유.
언변과 재기가 뛰어난 자공(子貢)이 어느 날 스승인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하더라도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貧而無諂] 부자가 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富而無驕]. 그건 어떤 사람일까요?”
“좋긴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도를 즐기고[貧而樂道] 부자가 되더라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느니라[富而好禮].”
공자의 대답에 이어 자공은 또 이렇게 물었다.
“《시경(詩經)》에 ‘선명하고 아름다운 군자는 뼈나 상아(象牙)를 잘라서 줄로 간 것[切磋]처럼 또한 옥이나 돌을 쪼아서 모래로 닦은 것[硏磨]처럼 밝게 빛나는 것 같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선생님이 말씀하긴 ‘수양에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일까요?”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賜:자공의 이름)야, 이제 너와 함께《시경》을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과거의 것을 알려주면 미래의 것을 안다고 했듯이, 너야말로 하나를 듣고 둘을 알 수 있는 인물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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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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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4. 새로운 태양
유방은 닷새에 한 번씩 부친인 태공에게 문안을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안을 드리러 갔더니 문 밖을 나와 비질을 한 뒤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런 행동거지는 존귀한 사람을 영접한다는 의미였다.
"아버님, 어찌된 일입니까?" 유방이 질색하면서 수레에서 뛰어내려 부친 태공을 부축하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태공은 손을 내저으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으며 땅에는 두 사람의 왕이란 없소. 나의 집 가령이 그나마도 이런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끝내 큰 결례를 저지를 뻔 했소. 그대는 비록 내 아들이긴 하지만 분명히 인군이오, 내가 그대의 부친이긴 하지만 분명히 인신에 지나지 않소. 어떻게 인주가 인신에게 배례를 할 수 있겠소. 서민들이 부자간에 치르는 예의가 우리들한테는 당치도 않소. 그렇게 되면 황제로서의 무거운 권위는 천하에 시행되지 못할 것이오."
그제서야 유방은 사정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버님의 가령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뜻이 가상합니다. 황금 5백 근의 상을 내리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문안인사는 올리지 못하겠으나 아버님을 태공에서 훨씬 높여 태상황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신하나 백성들이 아버님을 존경할 것입니다."
장량은 병이 많았다. 곡식도 먹지 않으면서 도인술을 연마하고 지냈다. 도인술이란 도가의 양생술로서 호흡을 부앙하고 수족을 굴신시켜 기혈을 충족케하는 기술이었다. 유방을 따라 관중으로 따라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도 도인술을 연마하고 있는데 여후의 오빠 여택이 방문했다. 여택은 장량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따지고 들었다.
"귀공께선 자주 좋은 계책을 세워왔기로 폐하께서는 귀공의 말이라면 절대로 신용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폐하께서는 저의 계책을 믿고 신용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지금 폐하께서는 까닭도 없이 태자를 바꾸시겠다는 큰 변혁을 계획하고 계시는데 이토록 중차대한 때에 어찌 귀공께선 베개를 높이 베고 나 몰라라 하시며 가만히 누워만 계신단 말입니까!"
장량은 여택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여태후는 유방이 아직 미천했을 때 얻은 여자였다. 그녀는 아들 효혜와 딸 노원을 낳았다. 그런데 한왕이 된 유방은 척희를 얻어 총애했는데 아들 여의를 낳고부터는 더욱 사랑을 주고 있었다. 언젠가는 태자 책봉 문제로 피바람이 일 것이라는 사실을 장량은 미리 알고 있었다. 지금의 태자 효혜는 사람됨이 인자하기 했으나 유약한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유방은 자기를 닮지 않은 태자를 폐하고 척희의 아들 여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장량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택이 달려온 것도 불안을 느낀 여후가 닦달해서 장량한테로 보내 묘책을 물어오라 한 것이었다. 장양은 짐짓 모른 척하며 되물었다.
"여후께서 장군을 저한테 보내셨습니까?"
"자신이 낳은 아들이 폐위될 것이 너무나 뻔한데 어찌 불안해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폐하께서는 곤궁하고 위급할 적에 저한테 계책을 물으신 적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천하가 안정된 지금은 폐하께서 저의 계책을 물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 거지요.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염두에 두시고 태자를 바꾸시겠다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하니 골육간의 문제라면 더군다나 저같은 신하 백 명이 몰려가서 간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택은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간청했다.
"그러지만 마시고 방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귀공이 지혜 주머니란 사실은 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공도 마음 속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부디 계책을 마련해 주십시오."
그 때부터 장량은 말문을 닫아버렸다. 저만치 문쪽으로 여택이 걸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입을 꾹다물고 있던 장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글쎄, 이런 문제는 폐하의 생각을 말로써는 움직일 수가 없지. 어떤 행동이 필요한데...."
여택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다시 장량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 필요하다는 행동이란 어떤 것입니까?"
"감히 폐하께서 부르시는데도 입궐하지 않는 인사가 천하에 네 분 계십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면 혹시 모를까....."
"그들이 누굽니까? 가서 묶어서라도 오겠습니다!"
"아서요! 폐하께서도 함부로 못하시는 사람들인데 그런 무례한 행동으로 그들이 올 것 같습니까. 또 강제로 끌고 와서 될 일도 아니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노인입니다. 우리 폐하께선 선비들을 곧잘 모욕 주었기로 그것이 싫어 산중으로 몸을 숨겨 한나라의 신하되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지요. 그렇지만 페하께서는 그들 네 분이 고결한 인격을 지니신 분이라 판단하여 여전히 존경하고 계십니다. 태자께 말씀드려 직접 그분들을 움직여보라 그러시지요."
장량의 귀띔에 여택은 물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표정으로 바짝 장량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렇다면 태자는 어떻게 해야 그분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지요?"
"우선 태자의 정성어린 초청장과 함께 고급한 금옥벽백을 아끼지 말고 잔뜩 보내시지요. 물론 겸손하면서도 말 잘하는 사자를 파견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누구누구입니까?"
"동원공, 기리계, 하황공, 녹리선생이 그들이지요. 상산에 숨어 사는 신선같은 분들이기에 이들을 일컬어 상산의 사호라 합니다."
"모시고 와서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습니다."
"특별히 해야 할 일은 없다니요?"
"우선 빈객으로 잘 예우하며 때때로 그들을 거느리고 말없이 입조만 하면 됩니다."
"말없이?"
"어차피 그들은 폐하의 눈에 띌 것입니다. 띄게되면 또 그들에 대해서 하문하실 것이고 그들이 상산의 사호들이라는 걸 아시는 순간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태자 자리는 안전할 것이고 일은 다 된 것입니다."
여택은 돌아가 여후에게 장량의 계책을 알렸고 여후는 태자를 불러 장량이 준 계책을 수행하도록 했다. 결국 상산의 사호 노인들을 만난 곳은 심산유곡에서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봉두난발에 산삼인지 불로초인지 도라지 뿌리인지 어쨌건 그런 풀뿌리를 씹고 있었다. 여택은 그들 앞에서 큰 절을 올린 후 소리쳤다.
"상산의 사호이시여, 천하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어르신네들의 하산이 필요합니다." 사호들은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서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자가 지금 무슨 얼어죽을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가?"
동원공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녹리선생이 여택을 빤히 들여다 보다말고 물었다.
"그대는 조정에서 나왔소?"
"그렇습니다."
"무엇 때문에?"
"모시고 하산하려고 왔습니다."
"누구 맘대로?"
"그건....!"
여택이 머뭇거리고 있자 녹리선생이 다안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돌아가시오. 우리는 선비들이오. 폐하께서는 선비들을 곧잘모욕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게 싫어서 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오."
여택은 바로 지금이 기회이다 하고 말했다.
"어르신네들을 모시는 분은 폐하께서가 아니라 태자이십니다. 태자께서는 페하와 달리 선비들이라면 극진히 모시는 분입니다."
"태자가 왜?"
"한나라는 이제 건국된 나라인지라 국기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천하 인재들의 머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호를 모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같은 늙은이를?"
"부디 하산해 주십시오. 태자께서는 사호께 드리라면서 선물도 잔뜩 주셨습니다."
"선물까지?"
"모쪼록 태자는 폐하와 인품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만 알아주십시오."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네 노인을 하황공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려가 봄세. 태자가 마음에 들지 않거든 다시 올라오면 되지 않겠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데야 우리의 고집은 명분이 없는 거지."
일단 사호는 여택의 집에 묵게 되었다.
경포가 모반하는 사건이 생겼다. 유방이 때마침 병석에 있었으므로 태자를 장군으로 삼아 출격하도록 했다. 그 소문을 들은 여택이 사호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자 사호는 펄쩍뛰었다.
"무슨 소리! 아주 위험한 발상이오! 태자에게 출격하지 말도록 이르시오!"
"그건 어째서입니까?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기리계가 대표로 말했다.
"설사 공로가 있더라도 더 이상 오를 지위가 없소. 혹시 공적 없이 귀환하는 일이 생기면 얻게 되는 것은 화뿐이오. 가만히 듣자하니 이번에 태자와 함께 출격하는 장군들은 모두가 폐하와 함께 일찍이 들판을 같이 뛰던 천하의 용장들이 아니겠소."
"그러니까 태자께선 안심하고 출정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반대요. 태자를 위하여 그들은 힘을 다하기를 즐겨하지 않을 거란 얘기요. 지금 태자가 그런 용장들의 장군이 되게 하는 것은 마치 양으로 이리를 이끌게 하는 것이나 다름 없소. 그러니 태자는 기필코 공적을 세우지 못할 것이오."
그제서야 여택도 더럭 겁이 났다.
"그렇다면 지금 어떤 조처가 필요하겠습니까!"
"모친이 사랑받고 있을 때에는 그 자식도 보호되는 것이오."
"무슨 뜻입니까?"
이번에는 동원공이 나섰다.
"지금은 척부인이 밤낮으로 폐하를 곁에서 모시고 있는 게 아니겠소."
"사실은 그렇습니다. 여후께서 이를 갈고 계시지만 폐하께서는 척부인만 사랑하시니...."
여택이 기죽은 소리를 하자 동원공은 꾸짖듯이 말했다.
"지금 폐하께서는 여의를 높이기 위해 태자를 사지로 내보내는 거요! 그렇게 되어도 괜찮겠소?"
"방법을 못찾고 있으니 그렇게 되어도 속절없는 거지요."
"여후가 움직이게 하시오."
"어떻게요?"
"직접 폐하께 찾아가 울면서 말씀드리라 하시오.'경포는 천하의 맹장이며 용병 또한 능수능란합니다. 그런데 이번의 토벌대장들은 모두 폐하의 동료 전우들입니다. 이런 장수들을 태자에게 거느리게 하는 것은 양에게 이리떼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은 분명코 태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경포가 이런 사실을 알면 좋아라 하고 겁없이 북을 치면서 달려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비록 병중이긴 하나 치거(포장마차) 속에서라도 누워 출정하시면 장수들은 폐하를 위하여 힘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하니 괴로우시더라도 폐하께서 직접 분발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이오."
여택은 여후에게로 달려갔다. 여후 또한 옳게 생각하고 유방에게 달려가 동원공이 일러준 그대로 호소했다. 가만히 듣던 유방은 한숨을 쉬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태자 그녀석을 보내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데.... 역시 내가 가는 게 옳겠지!"
고조 유방이 직접 동진해 가게 되자 남아있던 군신들은 모두 패수가에까지 나와 전송했다. 장량 역시 병중임에도 억지로 일어나 곡우까지 와서 말했다.
"신도 마땅히 종군해야 하거늘 중병이라 뜻과 같이 못하옵니다. 하온데 초나라 인간들은 표독하고 재빠르니 폐하께서는 부디 나서서 접전하지는 마십시오."
유방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소."
"그런데 떠나시기 전에 태자를 장군으로 임명하십시오. 관중의 군사들을 감독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아 참, 잊을 뻔했소. 그렇게 하겠소. 뿐만 아니라 그대가 비록 병중이긴 하나 병상에 누운 채라도 좋으니 태자의 부(스승)가 되어주시오. 숙손통이 태부로 있으니 자방은 소부의 일이라도 보아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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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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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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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마치 시계추처럼 고뇌와 권태 사이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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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의 불안은 무서운 고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미래의 불안은 미래의 것이다. 현실의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불안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에 대한 상상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꿈에서 깨어나라. 모든 걱정은 환상에 불과하다. 고개를 돌리면 평화로운 현실이 있다. 불안은 미래의 불행에 대비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때의 고통을 미리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무게를 덜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은 종종 극단적으로 흐르게 때문에 불안은 우리에게 이득보다 손실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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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예민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권태를 덜 느끼는 대신에 고통은 두 배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감각이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감수성의 결함 때문에 고통보다는 권태를 더욱 참기 어렵다. 우리가 권태를 느끼는 사람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에서 자극을 찾는다. 권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면의 부를 쌓는 일이다. 풍요로운 정신은 모든 종류의 권태를 물리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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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얻게 되는 지식은 독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색에 의한 것이다. 사색은 자신의 생각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서 보다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길러 준다. 사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가치관의 정립은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 독서도 간접적인 경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독서가 가치관의 정립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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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사람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나친 열의와 성급한 태도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권위 있는 말을 인용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해력이나 통찰력 대신에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을 동원하면서 마음 속으로 커다란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복종을 선택하고 스스로 명령하기를 거부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논쟁할 때 즐겨 사용하는 무기는 바로 권위이다. 그들은 권위라는 무기를 가지고 서로 싸움을 벌인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미 모든 생각이 굳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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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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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행방불명된 보리사터의 부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공관 정원에 보물 제351호로 지정돼 있는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있다. 고려 초기의 우아한 석조유물이다. 문공부 발행의 (문화재대관)(보물편) 상권은 이 부도의 원위치에 대하여, "확증은 없으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로 추정되고 있고, 일찍이 원위치를 떠나 서울 시내 남산동 집에 와 있던 것을 현위치로 옮겨온 것"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양평의 보리사터에서 일본인이 반출해 온 것이 분명한 것 같으나 확실한 기록이나 증언이 없어 그저 '석조부도' 라고만 명명돼 있는 이 보물을 이화여대가 입수한 것은 1956년이었다. 총장공관을 새로 짓고 정원을 꾸미게 되었을 때 정원 설계를 맡았던 사람이 남산동 1가의 어느 큰 정원이 있는 집에서 값진 나무들을 팔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니 과거 일제때에 증권으로 치부했던 일본인 닛타가 살았었다는 집이었다. 좋은 나무가 많았고 귀한 식물도 있었다. 이화여대에선 그것들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그때 남산동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놓여 있던 이끼 낀 부도 하나도 묻어 왔다. 이화여대로선 뜻하지 않았던 굉장히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앞의 부도는 총장공관 정원에 옮겨 세워진 후 금세 관계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어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몇몇 전문가는 이 유물이 1911년에 일본인 악당들에 의해 양평에서 서울로 반출된 후 자취를 감추었던 보리사터의 석탑(부도) 같다는 심증을 굳히고 현지조사까지 하였는데. 확증은 못 잡았지만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수십 년 동안 행방불명으로 증발했던 보리사터의 귀중한 유물 하나를 되찾게 된 셈인데, 과거 총독부 조사자료에는 이 부도를 가리킨 것이 분명한 반출경위가 밝혀져 있다. 먼저 1916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당시 조사자는 일본인 전문가 이마니시였다.
"(현재 보리사터에는) 현가탑비의 비신·귀부·이수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그외 현기탑이었을 하나는 마을의 김선호 등의 말을 빌리면 수년 전까지 귀부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는데 일본인이 서울로 운반해 갔다고 한다."
조사자 이미나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단서로 붙이고 있다.
"이미 서울 방면으로 반출된 현기탑을 색출해내어 박물관에서 영구히 보존시키도록 할 것을 간절히 바람."
여기서 현기탑일 거라고 이마니시가 추측한 것은 대경대사 현기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부도를 말하는 것으로, 부도도 탑의 일종이다. 현기는 신라 말엽의 고승으로 경순왕의 스승이었다. 왕건(고려 태조)이 신라를 멸망시킨 후, 현기를 양평 미지산 기슭의 보리사에 가 있게 했었다. 대경대사는 시호. 그래서 보리사에는 그를 기념하는 탑들이 세워졌던 것인데 그후 절은 폐멸하고 탑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마니시는, 이미 반출당한 부도탑은 그 행방을 찾되 현지에 쓰러져 버림받고 있는 탑비라도 서울로 옮겨 오는 것이 좋겠다고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천 년의 옛 비석이 선려하게 유존됨은 경탄할 일임. 국보로서 보존시켜야 함.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보존시키기는 어렵고 서울의 박물관에 옮겨서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람."
그후 총독부는 이마니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현기탑비를 서울로 옮겨 1915년에 경복궁 안에 건립했던 총독부박물관(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호하도록 했다. 현재 경복궁 잔디밭의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제361호의 '대경대사탑비' 가 본래의 절터를 이탈한 경위이다.
한편 1917년 12월에 경기도 경찰부장은 총독부 정보과장 앞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양평 보리사터 석탑(부도탑) 반출 내막의 조사보고를 올리고 있다. 이마니시의 조사 정보와 의견에 따라 총독부가 지시했던 일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에는 이중탑(지금 이화여대에 있는 부도는 얼핏 이층석탑 같은 형태이다)이 있었는데, 절터의 논밭 임자인 함백용·박영범·박돈양 세 사람이 이웃의 상원사로 하여금 그것을 옮겨 가도록 기부했던바, 1909년 7월 어느날 일본인 3명이 상원사를 찾아와서 그 석탑을 비싼 값으로 사겠다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거듭 끈덕지게 요청하였다 함. 그러자 최화송이란 주지가 기증자인 앞의 세 사람과 협의하여 결국 120원을 받고 석탑을 팔아 넷이서 분배해 가졌다 함. 그러나 그들은 그때 석탑을 산 일본인의 주소 성명을 모르고 있었으며, 다만 서울에 살고 있다고만 말하더라고 함. 한데 조사해 보니 그때 석탑을 삼으로써 어디로든지 반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일본인은 본정(지금의 충무로) 2가 18에 살고 있는 다나카와 약초정(지금의 초동)에 사는 다카하시란 고물상이었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그 석탑을 1911년 8월에 명치정(지금의 명동) 2가에 사는 시로로쿠에게 500원을 받고 다시 팔았음. 그렇게 석탑의 소유권을 인수한 시로로쿠는 730여 원의 운반비를 들여 그것을 반출하였고, 현재도 그가 가지고 있음."
이 경찰조사는 양평에서 반출된 보리사터의 부도탑이 1917년 12월엔 당시 서울 명동에 살고 있던 시로로쿠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준다. 이렇게 소재지가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그것을 압수하거나 다시 사들여서 이마니시가 제의한 것처럼 박물관에 넣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부도는 그후 또 다른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아주 행방을 감추었다. 이렇게 완전히 잊혀졌던 것이 45년 후인 1956년에 명동과 바로 이웃인 남산동의 과거의 일본인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인데, 전의 집주인이었던 닛타가 시로로쿠에게서 직접 사들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과거의 닛타의 집에서 나타난 부도가 1911년에 시로로쿠가 사서 가지고 있던 양평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 바로 그것이라는 확증을 잡을 길이 없다는 이유로 오늘날 보물로서의 지정 명칭이 다만 '석조부도' 라고만 돼 있는 것은 이 부도가 일제 아래의 비운에서 아직도 깨끗이 풀려나지 못한 억울한 숙명이다. 문제는 8·15해방 때 닛타가 아무말도 남기지 않고 일본으로 쫓겨감으로써 그의 정원에 숨겨져 있던 부도는 10여 년간 완전히 족보 불명이 돼버렸던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유물은 언젠가는 전문가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산동의 부도가 이화여대로 옮겨진 후 전문가들은 과학적인 연구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평 보리사터의 그 현기탑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동안 족보를 잃었던 부도는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밑의 가장 전형적인 수난과 비운의 문화재인 이 부도에 대하여 장문의 학술논문을 쓴 김화영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현기탑이 서울로 반출된 장소와 이화여대의 부도가 발견된 장소가 동일한 지점은 아니나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은 해방후 명동 부근에서 발견된 유일한 부도인 데다가 각 부의 양식과 조각수법이 고려 초기로 현기탑비와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현기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총) 12·12합집, 고려대사학회, 1968년)
반출경위가 인멸된 원공국사승묘탑
앞의 양평 보리사터 현기부도탑은 서울에서 찾아갔던 일본인들의 끈덕진 강청에 따라 상원사 주지가 그전의 소유권 주장자인 3명의 마을사람들과 공동으로 팔아먹은 것이었다고 당시 일본 경찰은 조사, 보고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본인들은 이 땅을 강점한 일제의 강세를 배경으로 거리낌없이 조선인을 위협하고 공갈하며 최소의 돈으로 그들을 매수함으로써 값나갈 유물을 아무 데서나 불법반출한 악질적인 고물상(골동상) 패거리였다. 그들은 양평의 현장에서 현기부도를 120원으로 사 놓고는 서울에 앉아서 또 다른 일본인에게 500원에 팔아 넘김으로써 당장 380원을 벌어들였다. 이런 일은 일제 초기엔 비일비재했다. 일찍이 이 땅에 건너왔던 일본인들 가운데 일부 악질배들은 앞서와 같은 수법의 문화재 반출 및 큰 부자가 되었고, 그들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철수할 때까지 큰소리치며 이 땅에서 살았다. 그때까지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한국문화재의 종류와 수는 부지기수였다. 그중엔 총독부 법령에 따라 등록된 것도 많았다. 해방전까지 서울 남대문 시장께에 살았던 와다가 그의 정원에 갖다놓고 즐겼던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이웃인 남산동의 닛타가 몰래 점유하고 있었던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과는 달리 전문가들의 조사·평가에 따라 1938년 10월 이후 이미 고려 초기의 중요한 유물로 지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원위치인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터에서 언제 어떤 일본인들이 어떤 수법으로 서울로 반출해 왔고, 또 어떤 경로로 남대문께의 와다의 집으로 팔려 들어갔었는지의 경위를 알려주는 기록이나 자료는 하나도 없다. 보리사터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수난 조건을 갖고 있다. 보리사터의 것은 반출경위는 뻔한데 물건이 서울에서 행방불명됐고, 이 거돈서터의 것은 서울에서 줄곧 있는 곳이 확인돼 있었으나 반출경위와 그 증거가 완전히 인멸돼 있다. 그러나 둘은 공통점이 있다. 다같이 지대석까지 일괄하여 반출하지 않고, 위의 탑신부만 들어옴으로써 지금 이화여대에 있는 보리사터의 부도나 경복궁에 있는 거돈사터의 승묘탑이 모두 지대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돈사터의 원공국사승묘탑은 해방 후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과는 또 다른 경로로 현재의 위치인 경복궁의 석물군 속에 들어갔다. 그것은 1948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군정청의 미술·고적 담당 고문으로 채핀이라는 미국인 할머니가 와 있었다. 그녀의 출근 근무처는 국립박물관이었다. 어느날 그녀는 과거에 총독부가 지정한 문화재의 소재지를 재확인하려고 일본인 와다가 살던 집을 찾아 남대문 시장께로 발길을 돌렸다가 거기에 분명이 있어야 할 원공국사승묘탑이 어디론가 없어진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해방 후에 누군가가 실어 갔다는 것이었다.
채핀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자 당시 박물관 연구원이었던 황수영에게 어찌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놀란 그들은 즉시 사라진 지정문화재의 행방을 조사, 추적했다. 몇몇 증언으로 승묘탑의 행선지는 금세 밝혀졌다. 이아무개라는 사람이 성북동 골짜기의 별장에 실어다가 계류와 정자 옆에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미 국가에 등록돼 있는 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있던 이아무개는 박물관측의 설명에 따라 순순히 탑을 도로 내놓았고, 승묘탑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보물 제190호로 지정돼 있다.
보령의 절터에서 사라진 비운의 오층석탑
일제 초기인 1910년대 중엽에 인천 부회의원(시의원)으로 고노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도 석탑을 탐내어 충남 보령지방에서 오층석탑 하나를 지능적인 수법으로 불법반출해서 인천의 자기집 마당에 놓고 있었다. 그는 보령군 대천면 남곡리 당동의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있던 오층석탑을 반출해 오는 방법으로서 한 사람의 조선인을 돈으로 매수하고, 그가 절터의 땅임자에게 가서 석탑을 사는 간접적인 간계를 썼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매수자로부터 석탑을 말썽 없이 다시 사는 형식으로 무난히 인천까지 실어 왔다. 그러나 총독부의 고적조사과가 그 사실을 알고 보령군수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자 고노의 완벽했던 석탑 반출음모는 즉각 탄로가 나고 말았다. 보령군수의 현지 진상보고와 인천의 이전지 확인을 토대로 총독부 고적조사과가 작성한 조사서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석탑을 판 사람이 그것은 예전부터 자기집의 소유물이었다고 주장하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 조선의 풍속은 개인집에 탑을 세우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임. 설사 집을 지은 자리가 예전의 절터여서 석탑이나 석불 같은 것이 있었다 해도 조선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음. 한데 그것을 매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래의 생긴 폐습이며, 그들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팔아먹는다는 점을 익히 알면서도 감히 그런 짓을 하는 자들임. 이번 사건만 해도 고노가 직접 그것을 사지 않고, 표면상으로는 다른 조선인에게 일단 석탑을 팔게 한 후에 다시 자기 소유로 만들었는데, 매각인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음. 따라서 이번 사건의 석탑은 그들의 매매를 취소시켜야 하며, 인천의 고노 조사관을 보내 그럴 필요가 있다면 서울의 박물관으로 가져오는 것이 좋을 듯함."(1916년)
이 조사서의 주목할 만한 마지막 대목인 '불법적인 매매의 취소와 경우에 따라 인천에서의 석탑 압수' 건의가 총독부에 의해 실행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불법적인 일본인 매수자 고노는 인천의 부회의원쯤 되던 신분이어서 무슨 수를 썼던 것 같다. 비운의 오층석탑은 보령의 원위치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서울의 박물관으로도 오지 않았다. 인천항에서 재빨리 일본 본토로 빼돌렸는지, 그후에 인천에서 그 석탑을 조사했거나 확인한 전문가가 없다. 반면 해방 후, 과거에 고노가 살았던 인천 송학동의 별장에서는 많이 깨지고 형태나 연대도 신통치 않은 삼층석탑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도 충청도 어디선가 가져온 것이라는 막연한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령에서 반출했던 문제의 오층석탑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3층과 5층이라는 차이가 있다. 해방 후까지 남아 있던 신통찮은 삼층석탑은 현재 인천공보관 앞으로 옮겨져 있다.
앞의 총독부 조사서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첨가돼 있다. 인천의 고노가 충남 보령군 대천면의 폐사지에서 오층석탑을 반출하던 무렵에 같은 보령군의 미산면 성주리에 위치하는 성주사터의 석탑에도 반출음모자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다는 내막이다. 그것은 인천으로 불법반출된 석탑 사건을 조사하는 중에 잡힌 또 다른 음모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음모는 진행 중에 포착, 제지되었고 성주사 탑들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성주사터의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그리고 삼층석탑 둘은 보물 제20호와 제47호로 지정돼 있다.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석탑 외에도 이 성주사터에는 신라 말엽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비문을 쓴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가 있어 국보 제8호로 지정돼 있다.
[충남 보령 성주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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