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7호 - 2023.12.21. 목요일(음력 : 11. 09.)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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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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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 가슴 속에는 한때 시인이었다 시들어 버린 혼이 깃들어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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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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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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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반성문
사는 게 후회의 연속이다. 말을 해서 후회, 말을 안 해서 후회, 말을 잘못해서 후회. 집에서는 말이 없어 문제, 밖에서는 말이 많아 문제.
나는 천성이 얄팍하여 친한 사람과는 허튼소리나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탈이 난다. 며칠 전에도 후배에게 도 넘는 말장난을 치다가 탈이 났다. 아차 싶어 사과했지만, 헤어질 때까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상대방을 살피지 않고, 땅콩 까먹듯이 장난질을 계속하니 사달이 나지.
올해 가장 후회되는 말실수. 지난여름, 어느 교육청 초대로 글쓰기 연수를 했다. 한 교사가 ‘약한 사람들이 할 일은 기억, 연대, 말하기’라고 말한 이유를 물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뻘소리’를 했다. “교실에서 제일 힘센 사람은 선생이잖아요. 뭘 하라고도 할 수 있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니 잘 견딥시다.”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 거였는데, 마음을 고쳐먹으라는 소리나 하다니. 그러곤 얼마 안 있어 교사들의 비극적 선택 소식이 이어졌다. 아찔했다. 교사들은 죽음을 감행할 정도로 깊은 좌절감과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교사인 처제도 학생의 해코지가 두려워 얼마 전 노모를 모시고 이사를 갔다). 폐허로 변한 교실, 붕괴된 교육체계를 응시하기 위해서라도 말을 더 나누며 연대의 길을 찾아보자고 해야 했는데…. 그 말이 들어 있는 글을 다시 보니 ‘죽음은 개인이 당면해야 할 일이지만 개인에게 모든 걸 맡기지 않는 것, 죽음에 대해 말함으로써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라고 씨불이고 있었다.
말에서 비롯한 잘못은 자기감정이 과잉되거나 자기 확신이 강해서 생긴다. 무엇보다 상대를 넘겨짚다가 결국 큰코다친다. 나는 말이 앞서는 사람이다. 몹쓸 놈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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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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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고향 - 천상병
내 고향은 경남 진동
마산에서 사십 리 떨어진 곳
바닷가이며
산천이 수려하다.
국교 일년 때까지 살다가 떠난
고향도 고향이지만
원체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태어나기 전의 고향 말이다.
사실은 사람마다 고향타령인데
나도 그렇고 다 그런데
태어나기 전의 고향타령이 아닌가?
나이 들수록 고향타령이다.
무로 돌아가자는 타령 아닌가?
경남 진동으로 가잔 말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의 고향 무로의
고향타령이다. 초로의 절감이다.
∼∼∼∼∼∼∼∼∼∼∼∼∼∼∼∼∼∼∼∼∼∼∼∼∼∼∼∼∼∼
첫 키스 - 한용운
마셔요, 제발 마셔요.
보면서 못 보는 체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입술을 다물고 눈으로 말하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세계의 꽃을 혼자 따면서 항분(亢奮)에 넘쳐서 떨지 마셔요.
마셔요, 제발 마셔요.
마소는 나의 운명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
할아버지 - 정지용
할아버지가
담배ㅅ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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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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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전긍긍(戰戰兢兢)
戰:무서워 떨/싸움할 전. 兢:조심할 긍.
[준말] 전긍(戰兢). [동의어] 전전공공(戰戰恐恐).
[유사어] 소심익익(小心翼翼). [출전]《詩經》〈小雅篇〉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는 모양.
전전(戰戰)이란 몹시 두려워서 벌벌 떠는 모양이고, 긍긍(兢兢)이란 몸을 움추리고 조심하는 모양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최고(最古)의 시집(詩集)인《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의 ‘소민(小旻)’이라는 시(詩)의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데 그 시의 내용은 모신(謀臣)이 군주의 측근에 있으면서 옛 법을 무시한 정치를 하고 있음을 개탄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감히 맨손으로 범을 잡지 못하고 [不敢暴虎(불감포호)]
감히 걸어서 강을 건너지 못한다 [不敢憑河(불감빙하)]
사람들은 그 하나는 알고 있지만 [人知其一(인지기일)]
그 밖의 것은 전혀 알지 못하네 [莫知其他(막지기타)]
두려워서 벌벌 떨며 조심하기를 [戰戰兢兢(전전긍긍)]
마치 깊은 연못에 임하듯 하고 [如臨深淵(여림심연)]
살얼음을 밟고 가듯 하네 [如履薄氷(여리박빙)]
[주] 요즈음에는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르고 적발당할까봐 쩔쩔매는 경우’에 이 말이 흔히 쓰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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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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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3
3권
2. 대치국면
팽월이 양땅에서 반항해 초군의 식량 보급로를 끊어버리자 항우는 몹시 불편해 하 있었다. '최후의 수단이다. 제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고 하면 유방도 항복하고 말겠지!' 항우는 진작에 인질로 잡아둔 유방의 부친을 데리고 광무산 아래로 나갔다. 거기에는 유방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방은 누벽을 사이에 두고 백 보 거리에서 항우와 대치했다. 꽁꽁 묶인 유방의 부친이 높다란 누대 위에 꿇어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는 가마솥이 있었다. "이를 어쩐다! 저놈이 과인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있는데!" 유방이 비명을 지르자 곁에 있던 장량이 대답했다. "우선 초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시지요." 유방이 한동안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 항우가 먼저 소리질렀다. "당장 항복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아비를 삶아 죽이겠다!" 유방은 겁이 덜컥 났다. 옆의 장량을 두려운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결코 초왕은 태공을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곁에 항백이 있는 한 항우가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태공께선 안전합니다." "그럼 과인이 초왕한테 무어라 대꾸해야 하오?" "한 술 더 뜨시지요. 저자를 바짝 약오르게 할수록 유리합니다." "정말 괜찮겠소?" "태공을 해칠 생각만 있었다면 이미 어떻게든 결행했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를 화나게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힘을 얻은 유방은 거드름을 피며 소리질렀다. "내 아버지를 삶겠다고?" "그래, 삶아먹겠다. 네가 항복하지 않으면!" "삶거든 나에게도 국물 한 그릇을 나누어 주게." "무슨 소리냐?" "그대와 내가 신하의 신분으로 회왕을 섬길 때 우리가 어떤 약속을 했는지 알고 있다면 말이다." "어떤 약속을 했기에?" "우리가 의형제의 의를 맺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자네에게도 아버지가 된다. 꼭 너의 부친을 삶아 죽이겠다면 나에게도 그 국물을 달라고 한 것이다." 유방이 제 부친의 위험을 앞두고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조소를 해오자 항우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무어라고? 제 아비를 삶은 국물을 달라고? 그렇다면 네 소원대로 해주지!" 항우는 태공을 달랑 들어서 물이 끓고 있는 가마솥 안으로 쳐넣으려고 했다. "고정하시오!" 옆에 있다가 황급히 말린 사람은 역시 항우의 삼촌 항백이었다. "고정하라고요?" "천하 대사는 아직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오. 또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가족 같은 것은 돌보지 않는 것이오. 유방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오. 그런 형편이니 태공을 죽인다 한들 무슨 이익이 된단 말이오. 그대에 대한 인식만 나빠지지." "분풀이는 되겠지요!" "아서요! 분풀이는 될지 모르나 유방을 격노시켜 화를 더 불러올 뿐이오. 참으시오!" 항우는 한참동안 씩씩거리다가 분을 삭였는지 그제서야 태공을 내려놓았다. 목소리를 한결 낮춘 항우는 유방한테 이번에는 엉뚱한 제의를 했다. "잘 들어라. 천하가 수년 동안 떠들썩하게 어지러운 것은 오직 우리 두 사람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유방은 고개를 내밀며 반문했다. "단판승부로 결판을 내자는 말이다." "어떻게?" "너와 나 일대일로 싸워서 결정을 내버리자는 뜻이다. 사용할 무기는 네 마음대로 결정해도 좋다." 듣고난 유방은 코웃음쳤다. "무슨 말인가 했지. 난 지혜로 싸우지 완력으로는 싸우지 않는다." "여보게, 부질없이 천하 백성들만 괴롭힐 필요가 어디 있는가. 싸우기 싫다면 대화로써 해결하자." "좋은 생각이긴 하나 내가 어떻게 자네를 믿어." "믿지 못하다니?" "처음에 우리는 회왕한테서 명령을 받았다. 그 때 관중을 먼저 평정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분명히 내가 점령했는데도 그대는 약속을 어기고 나를 촉한땅으로 쫓아보내지 않았는가 말이다." "또 그 소리냐." "그게 그대 죄과의 첫 번째다." "나에게 과실이 그것 말고 또 있다는 거냐?" "있고 말고. 적어도 열 가지는 되지. 그대는 회왕의 명령이라 속이고 경자관군 송의를 죽인 뒤 자네가 상장군 자리를 차지해 버렸으니 그게 당신 죄과의 두 번째라 하겠지." 항우는 유방의 질타를 묵묵히 인내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대는 조나라를 구원한 뒤 마땅히 회군하여 회왕한테 복명해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도 제멋대로 제후군들을 위협해 입관해 버렸으니 그게 당신의 세 번째 죄과이다." 항우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회왕은 우리들에게 진으로 들어가더라도 포학하게 굴지 말고 약탈도 하지 말라고 해서 나는 그 명령을 착실히 지켰으나 자네는 진나라 궁전을 불살랐으며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쳤고 진나라 재물을 사사롭게 탈취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게 당신 죄과의 네 번째이다." "또 있나?" "있지. 전날 곱게 항복해 온 진왕 자영은 왜 멋대로 죽였나. 그대가 무엇이길래. 그를 죽일 자격이라도 있었는가. 이게 바로 당신의 다섯째 죄과이다." "그리고?" "항복해 온 진나라 군사 20만 명을 신안에서 속임수로 묻어죽인데다 굳이 진나라 장수 장한만을 살려놓고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왕을 삼았으니 이게 당신 죄과의 여섯 번째이다." "그게 어째서 죄가 되는가?" "그대는 자기 부하들만 좋은 땅의 왕으로 봉하지 않았나. 그렇게 함으로써 옛적의 왕들은 타지로 추방해 그들로 하여금 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도록 했으니 그게 당신 죄과의 일곱 번째이다." "더 있어?"
"말해주지. 그대는 의제를 팽서에서 내쫓은 뒤 자신이 도읍을 하지 않았는가. 한왕의 땅도 빼앗고 양나라 초나라 땅까지 병합해 왕으로 군림하지 않았나. 자기 혼자만 많은 땅을 독차지하고서 말이다. 이게 당신 죄과의 여덟 번째이다." "그만해라." "더 들어야 한다. 너는 이미 아무 방어능력도 없어진 의제를 사람을 시켜 강남에서 몰래 사살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게 당신 죄과의 아홉번째란 말이다." "글쎄?"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살하고, 이미 항복한 자들을 죽이고 또 그대의 정치는 불공평한데다 약속을 이행함에 있어서도 신의가 없으니 천하가 이를 용납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것이 바로 당신의 대역무도한 짓거리의 결과로 나타난 당신 죄과의 열번째인 것이다." "그러니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나는 의병을 일으켜 제후들의 뜻에 따라 잔인무도한 역적을 주살할 명분을 얻고 있으니 그래서 바로 열 가지 죄과가 있는 항우 당신을 치는 것이다." 유방이 조목조목 죄질을 따져나가자 항우는 다시 격노했다. "무엇이라고! 이 건방진 놈! 너희들 창칼 잘 쓰는 몇이 나가서 저 유방놈을 묶어오너라!" 항우의 명령이 떨어지자 몇 명의 장사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유방도 지지 않았다. "누번이 나가서 저놈들을 한 놈씩 쏘아 죽여라!" 누번은 활쏘기의 명수였다. 날아가는 기러기의 눈을 맞추는 활의 달인이었다. 누번이 유방의 명령에 따라 앞으로 쪼르르 달려나갔다. 누벽에 기대어 달려오는 초의 장사들을 앞선 자부터 하나씩 쏘아 맞췄다. 그들은 비명소리 한 번 제대로 내보지 못하고 하나씩 쓰러져갔다. 그렇게 되자 항우는 불 같이 노했다. "비켜라! 내가 나서겠다!" 항우는 갑옷에 극을 들고 나와서 소리쳤다. "어디 한 번 나를 쏘아보시지! 네놈의 화살이 내 심장도 뚫을 수 있는지 구경하겠다!" 그런데 갑자기 누번의 활 든 손이 덜덜 떨렸다. "쏘지 않고 왜 머뭇거리는가?" 유방의 호통에 누번은 대꾸도 않고 뒤로 도망쳐 들어왔다."어디로 가는 거냐!" "소인은 초왕을 쏠 수가 없습니다!" "쏠 수가 없다니?" "저 눈알을 보십시오. 부릅뜬 초왕의 무서운 눈을 보는 순간부터 두려워서 활을 겨눌 수가 없습니다!" 그러더니 누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중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버렸다. 바로 그 때였다.
항우는 어느새 들고나왔던 석궁으로 유방을 향해 힘차게 시위를 당겼다. "앗!" 화살은 유방의 오른쪽 옆가슴을 스치고 나갔다. 장량이 얼른 나섰다. "다행히도 큰 상처는 아닙니다. 화살에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보여선 안 됩니다." 장량의 말뜻을 이해한 유방은 얼른 큰 소리로 응수했다. "이놈아, 맞히려거든 제대로 맞힐 일이지 어디 맞힐 데가 없어 하필 발바닥이냐! 이 야만인아!" "무어, 야만인? 초나라 명문 출신인 나한테 야만인이라고?" "초나라 놈들은 다 야만인이지." 항우가 더욱 화를 내자 장량이 얼른 유방에게 소리쳤다. "이젠 그만하시고 진중으로 들어가 치료하십시오. 그러나 응급치료를 받으신 후 반드시 진중을 순행하셔야 합니다." "통증이 심하오!" "무리한 청인줄 아오나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한군은 기세가 꺾이고 초군은 승세를 탑니다." 중원땅 동서에 걸친 한군과 초군의 전투는 끝이 없었다. 그런데 싸울때마다 한군은 초의 정예부대에 의해 여지없이 패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중이라는 풍부한 보급원을 가진 한군은 항우가 잠시 물러가는 순간 곧 세력을 회복하는 양상이 되풀이되는 형편이었다. 싸움에는 지면서도 한군이 전략적 우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의 승상 소하 덕택이었다.
소하는 패현의 풍읍 사람인데 법률에 정통했으므로 패현의 관리로 들어갔다. 유방이 벼슬이 없던 서민으로 있을 때 곧잘 그는 유방에게 법령상의 구조를 하곤 했었다. 유방이 정장으로 있을 때 소하는 그의 막하로 들어가 일했다. 진의 어사가 지방으로 내려왔다가 소하의 명쾌한 사무처리 능력을 보고는 중앙으로 올라가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소하를 등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한 바가 있어 한 마디로 이를 사양했다. 그 대신 유방이 일어나서 패공이 되자 그밑으로 들어가 서무를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유방이 서진하여 함양에 이르렀을 때였다. 여러 장군들이 다투어 보물창고로 달려가 재물을 분배받고 있었으나 소하만은 홀로 진의 궁전으로 들어가 진의 승상 및 어사의 율령도서를 찾아내 품안에 간직하고 나왔다. 유방이 한왕이 되자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항우가 제후들과 함께 함양을 불살라버리고 떠난 후에도 유방이 천하의 사정을 쉽사리 알 수있었던 이유는 소하 때문이었다. "걱정 마십시오. 천하의 험한 땅 또는 요새로 불릴 수 있는 장소, 인구의 많고 적음,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 백성들의 성격등을 상세하게 알 수 있는 기록서를 갖고 있습니다." 한신을 대장군으로 추천한 것도 소하였다.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동진해 나갈 때 소하는 승상으로 있으면서 파. 촉의 땅을 수습하고 진무해 이 땅의 백성들로 하여금 불평없이 군량미를 보급하도록 만들었다. 관중땅을 지키면서 법령과 규약을 만들고 종묘. 사직. 궁실. 현읍을 세워놓았다가 한왕이 돌아왔을 때 재가를 얻었다. 관중의 호구를 정확히 계산해 육로와 수로로 군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알뜰히 보급했다. 유방이 가끔 군사를 잃고 도망칠 때마다 소하는 항상 관중의 병졸을 일으켜 결원을 보충했다. 유방은 이토록 성실하고 유능한 소하에게 관중의 모든 일을 맡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방이 항우와 형양 남쪽에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가끔씩 유방은 사자를 파견해 승상의 노고를 위로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소하는 한왕 유방의 위로에 단순히 감사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선비 하나가 충고했다. "승상께서는 그토록 대왕께서 동분서주하며 바쁘신 중에서도 굳이 승상께 위로사자를 보내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질문이라 소하는 어리둥절했다. "거기에 무슨 이유 같은 게 있겠소." "아닙니다.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이유?" "생각해 보십시오. 대왕께선 지금 의복과 수레덮개를 비바람에 드러내 놓고 죽도록 고전하시면서도 자주 승상께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것은 승상을 위로하시기보다 의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무어요?" "대왕께서 계시지 않는 한나라에서는 승상만이 최고 실력자이십니다. 무슨 반심인들 품지 못하겠습니까." "아뿔사!" 소하는 선비의 충고에 동의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좋겠고?" "간단하지요. 승상의 동생, 아들, 손자, 조카 그 누구든 전투에 참가할 수 있는 자라면 모조리 전선으로 보내십시오. 그렇게 되면 대왕께선 승상을 더욱 신임하실 겁니다." 소하가 선비의 권유를 따르자 유방은 몹시 기뻐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어쨌건 한군은 소하로 인해 병력도 충실했고 식량도 풍부했다.
이와 반대로 항우의 군사는 병력도 많이 소모되었고 식량도 바닥나 있었다. "하지만 과인의 부친이 항우의 손에 잡혀 있으니 마음놓고 싸워볼 수가 없구려!" 유방이 한탄하자 장량이 곁에 있다가 대답했다.
"지금 항우는 몹시 궁색합니다. 천하를 양분하는 협상을 다시 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대왕의 부모님을 돌려보낼 것입니다." "어떻게 양분한다는 말이오?" "홍구(하남성)로부터 서쪽을 한나라땅, 동쪽을 초나라땅으로 정한다고 해보십시오." 유방도 싸움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항우한테로 사자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항우는 맹약을 허락하면서 유방의 부모와 처까지 돌려보냈다. 한군에서는 만세를 불렀다. "부모를 돌려보낸 항우가 고맙긴 하다만 이토록 쉽사리 보내준 걸 보니 심상치는 않소." "항우도 이 방법밖엔 도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어쨌건 우리도 철병해 귀국길에 오릅시다." 그러자 이번에는 장량과 진평이 동시에 나섰다. "아아니! 진정으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유방은 어리둥절해졌다. "항우와 휴전맹약을 맺었고 그 대가로 과인의 부모와 처까지 돌려보내주었으니 철병해 귀국길에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대왕께서 지금 천만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싸워볼래도 태공께서 항우 손에 잡혀있어 싸울 수가 없다고 하신 적이 언제였습니까. 이제는 항우가 궁해져서 태공을 보내어 우리 품으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항우와의 맹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는 것은 왠지 찜찜하오."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쨌건 지금 한나라는 천하의 반을 소유한 데다가 대부분의 제후들이 모두 한나라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초나라는 지치고 식량도 떨어진 상태입니다. 바로 하늘이 초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징조입니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건 호랑이를 길러 스스로 우환을 남기는 일입니다."
그래도 유방은 석연치가 않았다. "그런데 말이오. 항우가 아무리 궁핍하다고는 하나 그의 정예병력은 무섭소. 그런데다 과인은 더불어 항우에게 대항할 군사가 없고." 장량이 거들었다. "한신과 팽월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과인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오. 장군사께선 그 이유를 알고 계시오?" "알고 있습니다. 제나라 왕 한신을 본래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 대왕의 진정한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한신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지위가 견고하다고 생각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때문에 과인에 대한 신의 역시 견고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겠구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팽월의 경우는 어떻소?" "아시다시피 팽월은 전부터 위나라땅을 수없이 평정해 그 공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선 위표를 먼저 생각해 팽월을 승상으로 앉혔습니다. 그러나 위표는 지금 죽고 없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선 팽월을 위왕으로 세우지 않고 계십니다. 차제에 한신과 팽월만 달래어서 데려와 초군을 부수면 항우 정도는 금새 항복받을 수가 있습니다." "좋소, 그렇다면 한신과 팽월을 어떤 식으로 달래면 좋겠소?" "팽월에게는 수양(하남성) 이북으로 곡성(산동성)까지의 땅을 주면서 왕으로 삼으십시오. 한신에게는 진땅 이동에서 동해에 이르는 땅을 주십시오." 장량의 말에 유방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신이 무엇 때문에 그쪽 땅을 탐낸단 말이오?" "한신의 고향이 바로 초땅에 있습니다. 그는 고향땅을 몹시 얻고싶어합니다. 그러니 팽월과 한신 두사람에게 땅을 흔쾌히 내주는 것을 대왕께서 허락하신다면 두 사람을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싸움이 바로 자신을 위한 싸움임을 깨닫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일 대왕께서 그땅이 아까워 신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으시겠다면 그 뒷일은 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유방은 곧 한신과 팽월에게 사자를 파견했다. 팽월에게 도착한 유방의 사자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초나라 공격에 힘을 합칩시다. 한의 대왕께서는 팽승상을 왕으로 인정하셨고, 일이 성공하면 진땅 동부지역은 한신 제왕께 드리고 위왕께는 수양땅 북부지역을 드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좋소, 전군을 휘몰아 곧 해하(안휘성)로 달려가겠소!" 한신에게도 유방의 사자가 도착했다. "한의 대왕께서는 이번 싸움이 최후의 결전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때마침 초의 내부에서도 대사마 주은이 초에 반기를 들어 구강의 병력을 장악했다 하니 수춘에서 유가의 군사까지 합류해 성보땅을 공략한 다음 해하로 집결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항우는 식량도 바닥난 데다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군사들을 이끌고 해하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이유없이 가슴이 떨릴까?' 깊은 밤이었다. 항우는 한군과 제후군들이 초군을 사방에서 몇 겹으로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군막에서 일어나 앉아 울적한 심사를 달래느라고 혼자 술을 마시고있었다. 그 때 북쪽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군사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초나라 노래가 아닌가!. 병사들이 울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으로 노래를 부르는 구나.' 그런데 조금 더 있지 남쪽에서도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있자. 남쪽에서도 초나라 노래라니! 우리 군사는 북쪽에 진을 치고 있는데! 그렇다면 초군들이 한군으로 투항해 갔다는 뜻인가!' 다시 얼마 더 있자 동쪽에서도 서쪽에서도 초나라 고향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사면초가라니! 여봐라, 이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서 알아보아라!" 항우는 군막 밖을 향해 소리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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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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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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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독서는 다른 사람의 사상을 머리 속에 강하게 인식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조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독서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사상은 다른 세계에 속한 체계이다. 그대와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있는 이런 사상은 그대의 사색과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혼란만을 일으킨다. 독서는 그대의 유기적인 사고의 틀을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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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여러 갈래의 샛길이 있다.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올바른 길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능력과 어려운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독서로 일생을 보내고 여러 가지 종류의 책에서 지혜를 얻은 사람은 몇 권의 여행 안내서를 읽은 다음 그 지방에 정통한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은 대충 정보를 제공해 줄 수는 있지만 그 나라의 실제적인 사정에 대해서는 사실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상대방이 물어 오는 질문들에 몹시 당황하면서 자신의 허점을 가리기에 급급할 것이다. 그러나 사색으로 일생을 보낸 사람은 실제로 여행을 통해서 그 고장에 직접 가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곳의 풍습이나 사람들의 습관, 심성, 지리 등을 자세하고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다. 때때로 자신이 봉변을 당하거나 도움을 받았던 경험담까지 곁들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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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는 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사색에 잠긴다. 무엇인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는 다양한 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한 결과를 예상한다. 그러나 올바른 결정은 쉽게 내릴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 생각을 낳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할수록 오히려 그 사건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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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급하게 서두르지 마라. 억지로 생각을 짜내기 위해 애쓸 것이 아니라 적당한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 올바른 결정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다. 사색의 성과는 나무 열매가 무르익는 것처럼 서서히 자라난다. 사색은 단번에 가능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색에 익숙해지면 문제를 올바르게 직시할 수 있게 되고 이제까지 어렵게 보이던 문제도 훨씬 수월하고 객관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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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하는 사람은 사물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파악한 다음, 거기에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적용시킨다. 따라서 사색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그들은 다만 사물을 바라보는 입장이 서로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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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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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현해탄을 넘나든 시련의 경천사탑
일제의 통감부 설치로부터 한일합방에 이르는 통분스런 시기(1905∼1910년)를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허겁지겁 탐을 냈던 문화재는 고분속의 고려자기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독은 산간벽지의 옛 절과 절터에서 석탑·불상·범종, 기타 모든 불교미술품과 옛 책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확대되면서 한국 안의 모든 종류의 문화재가 상상을 넘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그때의 일본인 약탈자로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고려자기의 최대의 장물아비였고 고분 도굴의 공공연한 조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한국 통치의 첫 단계로 소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인 1906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정부의 고관이 하나 있었다. 다나카 당시 궁내대신(장관)이었다. 그는 이토가 한국 침탈의 기초작업을 완전히 다져놓은 한반도를 유유히 찾아온 기회에 사적인 야욕의 치밀한 해적행위를 저질렀다. 문화재 약탈이었다.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서해로 해서 도쿄의 다나카 대신댁 정원으로 운반하라."
다나카가 서울에서 직접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인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간 일단의 일본인들은 앞서와 같은 지시 명령을 앞세우며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50리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로 달려갔다. 여러 문헌 기록에 경천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으로 일본인들이 몰려 갔을 때엔 절간 건물이라곤 이미 하나도 없는 황량한 폐사지였다. 물론 한명의 중도 없었다. 다만 고려시대의 특이한 대리석탑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가 13m도 넘는 거대한 탑신마다 온통 섬세한 부조를 가진 걸작 석조유물이었다. 바로 다나카가 노린 탑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이 경천사 자리의 대리석탑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정보 출처는 1902년에 현지를 조사하고 사진까지 찍었던 세키노의 '조사보고' 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뒤에 덜미를 잡히게 한 것도 세키노의 그 조사기록이었다.
여하튼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임금님이 하사했다"는 허위의 주장과 공갈 및 총검의 시위로 인근 주민의 저항과 관할 군수의 항거를 묵살하며 석탑을 마구 해체·포장해서 수십 대의 달구지로 야밤에 개성역으로 빼돌렸다가 기차로 인천까지 운반했고, 다시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의 반출 범행을 성공시켰다(초판에서 말한 서해안 영정포에서의 선적설은 잘못된 증언 얘기였다. 부록1 참조). 그것은 한국의 임금님을 판 치밀하고 완벽한 문화재 약탈작전이었다. 그러나 다나카 궁내대신의 이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은 금세 소문이 크게 나면서 양식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엄중하게 그 불법행위를 지적한 사람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시타케였다. 통감부의 3대 통감으로 이완용과 더불어 한일합방 조약을 성취시켰던 일제 육군대장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총독으로 눌러 앉으면서 이 땅의 독립사상과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지만, 문화재의 경우에서만은 몇가지 가상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다나카가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강력한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으로서 본국 정부의 한 고위층이었던 다나카를 서슴지 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뜻밖에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 다나카 역시 만만찮은 권력자였다. 순순히 속죄하며 애써 탈취해 온 석탑을 되돌려 보낼 리가 없었다. 결국 데라우치는 그의 총독 재임 기간인 1915년까지 도쿄의 다나카 저택 정원에 들어가 있던 경천사 석탑을 반환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가 감정적으로 맞섰던 데라우치 총독이 본국 정부의 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오면서 더욱 약세에 몰렸다. 데라우치 총독이 언제부터 다나카의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 사실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세키노가 1912년 8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5회에 걸쳐 (국화)라는 일본 잡지에 발표한 조사논문 (조선의 석탑파)에서 그 석탑의 행방을 궁금해 한 대목을 읽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주목하게 되고, 또 그 반출자의 신분도 확인한 후 참으로 조선을 위하는 듯한 정치적 제스처로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 한 것이 다나카를 상대로한 '경천사 석탑의 반환요구' 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노는 앞의 조사보고의 '폐경천사 대리석탑'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경천사는 경기도 풍덕군(개풍군의 옛 명칭) 부소산 속에 있었으나 터뿐이고 내가 명치 35년(1902년)에 조사할 때는 대리석 다층탑만이 남아 있었다. 이 탑이 그후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소재지는 알 수가 없다."
이어서 세키노는 이 경천사터의 대리석 다층탑은 고려 말기의 이채로운 걸작이라고 강조하면서 탑의 세부구조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글로 인해 다나카의 불법반출은 오래 숨겨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윽고 경천사 석탑의 반출자와 이전지는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불쾌한 압력과 일부 여론에 굴복하여 탑을 다시 내놓는 모욕을 좀처럼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몇 해 동안 배짱 좋게 버텼다. 데라우치의 후임으로 2대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부임 3년째 되던 1918년에 가서야 전임자 데라우치가 해결치 못했던 경천사 석탑의 반환문제와 과거의 전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를 시켜 그 자초지정을 듣는 한편, 꼭 다시 찾아와야 하는가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고적조사과의 책임자였던 오다(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으로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총독 앞으로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탑은 개성 남쪽 풍덕의 부소산 경천사 자리에 있던 것으로서 지금 개성(서울) 파고다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터 십삼층석탑(10층의 잘못 이해)과 똑같은 형식에 속하며, 그 건립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으로서 원각사터 탑은 이를 모조한 것임. 경천사가 폐사가 된 후 야산에 홀로 서 있던 것을 명치 42년(40년의 잘못, 1907년)께 당시 궁내대신 다나카 백작이 이를 나이치(일본 본토)로 운반하여 물의를 일으켰음. 그 바람에 포장도 풀지 않은 채 현재의 장소(도쿄의 다나카저댁 정원)에 보관 돼 있는 것으로 듣고 있음. 전 총독 때에 수차 반환해 오는 논의가 있었으나 지연되어 오늘에 이르렀음. 다나카 백작은 하등의 수속도 거침이없이 그것을 운반해 감으로써 어떤 구실로도 그의 사유물일 수는 없음. 조선의 습관을 따르면 절이 폐멸함과 동시에 (탑 같은 것은) 나라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며 오늘에 있어서는 국유로서 본부(총독부) 소관에 속하는 것임."(당시 총독부 조사서류철)
이 오다의 조사보고로 미루어 보아도 고종황제가 다나카에게 경천사 석탑을 하사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계획된 조작이었음이 입증된다. 이홍직 교수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종의 하사 운운은 믿을 수 없는 일이며, 고종이 경천사탑을 알 까닭도없었고 다나카 자신이 그것을 강청해 가져간 것은 분명하다."( (사학연구) 18집의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 1964년)
다나카는 피할 수 없이 그를 고립시킨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계속적인 반환요구에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총독부에서 오다의 명확한 전말 보고가 있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탑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포장을 풀고 보니 그것은 도저히 복원 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다. 일본인들이 원위치인 경천사 절터에서 서둘러가며 급히 해체할 때의 심한 상처와 그후 일본으로 운반될 때의 파괴가 가중된 것이었다. 서울에 돌아오긴 했으나 곳곳이 온통 파괴된 경천사탑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 다시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기를 40년. 오늘의 위치인 근정전 동쪽회랑 밖에 과거의 위관으로 보수, 복원 된 것은 1960년의 일이었다. 현재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경천사 십층석탑을 그때 성공적으로 보수 복원한 사람은 그 방면의 전문가로 제일인자였던 임천(당시 국립박물관 연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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