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5호 - 2023.12.05. 화요일(음력 : 10. 23.)
잠시 쉽시다.
차 한 잔과 함께 같이 읽어요.
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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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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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 가슴 속에는 한때 시인이었다 시들어 버린 혼이 깃들어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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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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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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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
신통하게도 같은 모양의 의자이지만 어디가 상석이고 어디가 말석인지 금세 안다. 문이나 통로에서 먼 쪽. 등을 기댈 수 있는 벽 쪽. 긴 직사각형 모양의 회의실에서 윗사람은 짧은 길이의 변 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평지인데도 상석(上席), 윗자리를 귀신같이 안다. 왜 그런가?
우리는 ‘힘’이나 ‘권력’을 ‘위-아래’라는 공간 문제로 이해한다. 힘이 있으면 위를 차지하고 힘이 없으면 아래에 찌그러진다. 이런 감각은 우연히 생긴 게 아니다. 숱하게 벌어지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몸에 새겨진 것이다. 금메달을 딴 선수가 올라서는 시상대는 은메달, 동메달 선수보다 높다. 경복궁 근정전의 왕좌는 계단 위에 놓여 있다. 선생은 교단 위에 올라가 학생들을 굽어보며 가르친다. 지휘자가 오르는 지휘석도 연주자들보다 높다. 현실세계의 물리적 공간 배치는 사회적 권력과 지배력을 실질적으로 표현한다.
말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윗사람, 윗대가리, 상관, 상사’와 ‘아랫사람, 아랫것, 부하’(그러고 보니 ‘하청업체’도 있군). 위아래 구분은 동사에도 반영되어 있다. 명령을 내리고, 말 안 듣는 부하는 찍어 누른다. 아랫사람은 명령을 받들고, 맘에 안 드는 상사는 치받는다. ‘상명하복’은 관료사회의 철칙이다. 사진에서 상석은 맨 앞줄 가운데 자리이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가, 환갑잔치에서 어르신이 자리 잡는 바로 그곳. 쿠데타 성공 기념사진에서 살인마 전두환이 앉았던 그 자리.
‘상석’은 크고 작은 권력관계를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나타내고 싶어 하는 인간 욕망의 그림자이다. 하지만 인간에겐 상석이 만드는 위계를 거역하는 힘도 있다. 상석에 앉지도, 중심에 서지도 않는 힘. 상석을 불살라 버리는 힘도 있다. (어딘가엔.)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드라이브 스루
2014년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가 2,000만대를 넘어섰다. 세대수가 2,000만 세대니까, 1세대당 자동차 1대를 보유한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자가용으로 직장에 출퇴근하고 여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자가용으로 이동할 때 길거리에서 ‘드라이브 스루(drive-thru)’라는 문구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드라이브 스루’는 자동차 운전자가 차에 탄 채로 물건을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가리킨다. 오래 전부터 자동차 생활이 일반화된 미국에서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의 패스트푸드 체인점이나 은행이 운전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한 서비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부터 맥도날드, 스타벅스 등이 이 서비스를 시작했고, 이는 앞으로 더욱더 확대될 것으로 여겨진다.
‘드라이브 스루’는 ‘drive through’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직까지 우리말로 정착된 외래어로 볼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해 국립국어원은 올해 초 이 말을 ‘승차 구매’로 순화하여 쓰기로 했다. 그런데 ‘drive thru’처럼 한글이 아닌 영어 알파벳을 그대로 노출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이다. ‘drive thru’의 ‘thru’는 ‘through’을 간략화하여 적은 것이다. ‘why’, ‘you’ 등을 ‘y’, ‘u’ 등으로 적는 것과 같다. 줄임말의 한 가지로, 공식적인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비공식적인 말이다.
미국 대중문화의 유입은 불가피하게 영어의 차용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아무런 생각 없이 영어로 가져다 쓰려 하지 말고 그것을 대체할 만한,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찾아보려는 노력을 한 번이라도 해 봤으면 좋겠다. 비공식적인 영어 줄임말까지 별생각 없이 가져다 쓰는 현 상황이 씁쓸하기만 하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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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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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노래 - 천상병
나는 아침 정오가 되면
산으로 간다
서울 북부인 이 고장은
지극한 변두리다
산이 아니라
계곡이라고 해야겠다
자연스레 노래를 부른다
내같이 노래를 못 부르는 내가
목청껏 목을 뽑는다
바위들도 그 묵직한 바위들도
춤을 추는 양하고
산등성이가 몸을 움직이는 양하고
새소리들도 내게 음악을 주고
나무들도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노래한다 나는 노래한다.
∼∼∼∼∼∼∼∼∼∼∼∼∼∼∼∼∼∼∼∼∼∼∼∼∼∼∼∼∼∼
의심하지 마셔요 - 한용운
의심하지 마셔요. 당신과 떨어져 있는 나에게 조금도 의심을 두지 마셔요.
의심을 둔대야 나에게는 별로 관계가 없으나
부질없이 당신에게 고통의 숫자만 더할 뿐입니다.
나는 당신의 첫사랑의 팔에 안길 때에 온갖 거짓의 옷을 다벗고
세상에 나온 그대로의 발가벗은 몸을 당신앞에 놓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당신의 앞에는 그 대에 놓아 둔 몸을 그대로 받들고 있습니다.
만일 인위(人爲)가 있다면 <어찌 하여야 처음 마음을 변치 않고
끝끝내 거짓 없는 몸을 님에게 바칠꼬>하는 마음 뿐입니다.
당신의 명령이라면 생명의 옷까지도 벗겠습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당신을 그리워하는 나의 <슬픔>입니다.
당신이 가실 때에 나의 입술에 수없이 입맞추고「부디 나에게
대하여 슬퍼하지 말고 잘 있으라」고 한 당신의 간절한 부탁에
위반되는 까닭입니다.
∼∼∼∼∼∼∼∼∼∼∼∼∼∼∼∼∼∼∼∼∼∼∼∼∼∼∼∼∼∼∼∼~~~~∼∼
종달새 - 정지용
삼동 내- 얼었다 나온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저리 놀려 대누.
어머니 없이 자란 나를
종달새 지리 지리 지리리...
왜저리 놀려 대누.
해바른 봄날 한종일 두고
모래톱에서 나홀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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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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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천금(一字千金)
一:한 일. 字:글자 자. 千:일천 천. 金:쇠 금.
[유사어] 일자백금(一字百金). [출전]《史記》〈呂不韋列傳〉
한 글자엔 천금의 가치가 있다는 뜻으로, 아주 빼어난 글자나 시문(時文)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전국 시대 말엽,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과 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은 각 수천 명,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과 위(魏)나라 신릉군(信陵君)은 각 3000여 명의 식객(食客)을 거느리며 저마다 유능한 식객이 많음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편 이들에게 질세라 식객을 모아들인 사람이 있었다. 일개 상인 출신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상국(相國:宰相)이 되어, 어린(13세) 왕 정(政:훗날의 시황제)으로부터 중부(仲父)라 불리며 위세를 떨친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B.C.235, 정의 친아버지라는 설도 있음)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의 아버지인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가 태자가 되기 전 인질로 조나라에 있을 때 ‘기화 가거(奇貨可居)’라며 천금을 아낌없이 투자하여 오늘날의 영화를 거둔 여불위였다. 그는 막대한 사제(私財)를 풀어 3000여 명의 식객을 모아들였다.
이 무렵, 각국에서는 많은 책을 펴내고 있었는데 특히 순자(荀子)가 수만어(語)의 저서를 내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불위는 당장 식객들을 시켜 30여만 어에 이르는 대작(大作)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천지만물(天地萬物), 고금(古今)의 일이 모두 적혀 있는 오늘날의 백과 사전과 같은 것이었다.
‘이런 대작은 나 말고 누가 감히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의기양양해진 여불위는 이 책을 자기가 편찬한 양《여씨춘추(呂氏春秋)》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여씨춘추》를 도읍인 함양(咸陽)의 성문 앞에 진열시킨 다음 그 위에 천금을 매달아 놓고 방문(榜文)을 써 붙였다.
“누구든지 이 책에서 한 자라도 덧붙이거나 빼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주리라.”
이는 상혼(商魂)이 왕성한 여불위의 우수 식객 유치책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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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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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2
제2권
13. 한신의 결단 (2/2)
"나의 동향 여하에 한과 초의 승패가 달여있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귀하가 우로 기울면 한왕이 이길 것이고 좌로 기울면 초왕이 이깁니다."
"그 묘한데?"
"만일 귀하가 한왕을 편들어 초왕이 멸망했을 경우 귀하에게는 커다란 변수가 나타납니다."
"어떻게?"
"그 다음에는 귀하가 멸망할 차례라는 뜻입니다."
"무어라고?"
"하온데 귀하께서는 초왕과 일직이 연고가 있지 않았습니까."
"있긴 있었소."
"어찌하여 한을 버린 뒤 초와 제휴하면서 천하를 3분해 그 중의 한 나라 왕이 되실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지금 이토록 좋은 기회를 버리고 스스로 한나라를 믿고 초나라를 치고 계시다니요. 귀하처럼 슬기로운 분이 이토록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계시는지요!"
무섭의 간곡한 설득에 한신은 잠깐 흔들리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한신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내 일찍이 초왕을 섬긴 적은 있지만 벼슬은 낭중에 불과하였고 채용된 적이 없소. 그래서 나는 초를 뒤로하고 한으로 귀속했던 거요."
"그것은 과거의 사건일 뿐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
"들어보시오. 한왕은 나에게 대장군의 인수를 주고 수만의 대군을 의심없이 맡겼으며 자신의 의복을 벗어 나에게 입히고 자신의 밥을 나에게 먹였으며, 진언하면 들어주었고 헌책하면 채용해 주어 오늘에 이르렀소이다."
"지금의 초왕께선 귀하를 당당한 왕으로 인정해 줄 것입니다."
"여보시오. 남이 나를 친근하게 여겨 신뢰해 주는데 내가 그를 배반한다는 사실은 상서롭지 못한 일인 줄 아오. 이런 경우는 배신당해 죽임을 당할지언정 이쪽에서 먼저 변절해서는 안 되는 것이오. 돌아가 나를 대신해 초왕께 그런 간절한 호의를 사양하더라고 말해 주시오."
무섭은 몹시 실망하면서 떠나버렸다. 그런데 제나라를 무력으로 덮치라고 권고했던 괴통이 또다시 슬슬 나타났다. '천하 대권의 행방이 한신에게 달렸다' 기발한 책략으로 한신을 감동시켜 독립하도록 해야지!' 그렇게 작정한 괴통은 한신한테로 가서 엉뚱한 얘기부터 꺼냈다.
"저는 일찍이 관상학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관상을? 선생은 어떤 식으로 남의 관상을 보시오?"
"고귀하게 되느냐 비천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골상에 달려 있고. 근신이 있느냐 기쁜 일이 생기느냐는 얼굴 모양과 그 색상에 달렸으며, 성공과 실패는 결단하는 심상에 달려 있습니다. 이대로 보았더니 만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렇소? 그렇다면 내 관상도 보아주시겠소?"
"그러지요. 그 대신 잠시 동안 좌우를 물리쳐 주셔야 합니다."
눈치를 챈 한신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대들은 물러가라."
단 둘만 앉게 되어서야 괴통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장군의 관상을 보면 제후의 지위가 고작입니다. 그나마도 위태롭기가 그지 없습니다."
"무어요?"
"그런데 장군님의 등을 보니 고귀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대체 무슨 뜻이오?"
"천하가 어지러웠던 당초에는 영웅 호걸들이 다투어 왕이라 칭했습니다. 그들이 한 번 부르자 천하의 인사들이 구름이나 안개 몰리듯 앞다투어 몰려들었으며 물고기 비늘처럼 겹겹이 쌓여와 곁에 앉았고, 그런 형세가 바람의 불길처럼 왕성하게 일어났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근심이라면 오로지 어떻게 하면 진나라를 멸망시키느냐 하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것이 지금은 초와 한으로 분립되어 서로 상쟁하면서 천하 무고한 백성들의 간담을 땅바닥으로 내깔기게 하고 부자의 해골을 들판에 나뒹굴게 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로 통일되면 그런 불행한 일도 끝이 날 거요."
"그런데 초왕은 처음 팽성에서 일어나 도망치는 적을 쫓아 이리 뛰고 저리 치더니 형양에 이르러서는 그 승세가 천하를 흔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군사가 경수와 삭수 사이에서 곤경에 바진 이후로 서산에 틀어박혀 전진할 수가 없게 된 것이 벌써 3년째가 아니오."
"바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그런가 하면 한왕은 지금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도 공과 낙사이로 물러나 산하의 험준을 방패삼아 하루에도 몇 차례씩 싸우고는 있지만 한 자 한치의 땅도 소유하지 못하고 패배하여도 누구 하나 구원해 주는 사람이 없어 좌절만 거듭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한왕을 도울 처지가 못되니 그런 곤욕을 치루시는 것 같소."
한신은 한숨까지 토했다. 그러나 괴통은 한신의 그런 반응을 모른 척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참으로 기묘한 현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슬기로운 한왕도 용맹스런 초왕도 다 함께 괴로움을 겪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둘다 예기는 험준한 요새에서 꺾이고 양식은 창고에서 바닥나며 극도로 피폐해져 이리저리 떠돌며 원망하고. 그렇지만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데가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세는 천하의 현성이 아니고서는 감히 천하의 이런 불행을 종식시킬 수는 없는 게 아니겠소."
그러자 괴통은 손을 크게 내저었다.
"아니오 아니오! 현성이 아니더라도 금새 이런 불행은 종식시킬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지금 한왕과 초왕의 운명이 바로 장군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글쎄요. 누군가도 찾아와서 그 비슷한 얘기를 떠들다가 갔소."
"장군께서 한나라를 위하면 결국 한나라가 최후의 승리를 할 것이고 초나라를 편들게 되면 초나라가 결과적으로 이깁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을 편들라는 얘기 아니겠소?"
"천만에요. 장군께서 독립하셔서 천하를 안정된 솥발처럼 3분 하시라는 얘깁니다."
"무어요?"
괴통의 발언은 생경하면서도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한신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선생의 그 이론을 듣고 싶소."
"제가 속마음을 열어 간담을 터놓고 장군에게 말씀드리려 하나 혹시 우계라 하여 쓰시지 않을까 그게 두렵습니다."
"그렇더라도 계략의 사용 여부는 다 듣고 난 연후에 결정하는 게 아니겠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감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장군께서 가세하여 독립하게 되면 한나라나 초나라나 장군의 나라까지 안정된 솥밭처럼 되어 서로가 분리 존립해 이익을 보는 형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형세는 어느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새가 되므로 천하에는 안정이 오는 것입니다."
"그건 어떻게 해서 그리되오?"
"우선 장군께서 명민하신 데다 또 수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게다가 강대한 제나라에 의지하고 계신 상태입니다. 차제에 연나라와 조나라를 복종시킨 뒤 주인없는 땅으로 나아가십시오."
괴통은 신바람이 났다. 한신이 자신의 변설에 감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런 후 한나라와 초나라의 후방을 제압하십시오. 그러면 그들 두 나라의 전투는 끝이 납니다. 전투를 끝나게 함으로써 장군께서는 만민의 생명을 구해준 인물이 되어 천하는 장군께로 바람처럼 달여오고 메아리처럼 호응해 올 것입니다. 그때쯤이면 누가 감히 장군의 명령을 듣지 않겠습니까."
"과연 그럴까?"
"그런 후 장군께서는 큰 나라는 분할하고 강국은 약화시킨 뒤 각 나라에다 제후들을 세우십시오. 제후들이 일단 서게 되면 천하는 장군께 복종해 따르고 그 은덕은 제나라에 돌릴 것입니다."
"제후들을 세워?"
"제의 옛땅인 교와 사 땅을 보유한 뒤 은덕으로 제후를 회유하고 궁중 기이 계시면서 두 손 모아 읍하며 겸양스런 태도를 보인다면 천하 군주들이 서로 권하여 제나라로 입조할 것입니다. 대개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벌을 받고 때가 왔는데도 단행치 않으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고 들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잘 판단해 주십시오."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한신은 화들짝 놀라 깨었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라니요?"
"한왕은 나를 항상 후하게 대접했으며 자신의 수레에 나를 태웠고 자신의 옷을 내게 입혔으며 자신의 식사로 먹여주었소. 내가 듣기로는 '남의 수레를 타는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몸에 싣고. 남의 옷을 입는 자는 그의 걱정을 제 마음에 품으며, 남의 밥을 먹는 자는 그의 일을 위해 죽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내 이익만 바라고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소."
"그래서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어째서?"
"장군께서는 한왕과 친밀한 사이라 생각하시어 그를 위해 만세 불멸의 업적을 세우시려 하나 사정이 전연 그렇지가 못합니다."
"못하다니?"
"상산왕 장이와 성안군 진여는 벼슬이 없던 어려운 시절에는 서로 목을 대신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막역한 사이였지만 후에 다투게 되자 서로 죽일 듯이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장이는 항우를 배반해 항영의 머리를 베어들고 한왕한테로 귀복했습니다. 그 때 한왕이 장이한테 군사를 빌려주자 장군과 함께 동쪽으로 내려와서 진여를 저수 남쪽에서 죽이지 않았겠습니까."
한신이 설득되는 기미를 보이자 괴통은 다시 열변을 쏟기 시작했다.
"진여의 머리와 다리가 장이에 의해 따로 떨어져 나가니 그들 우정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장이와 진여의 친교는 원래 천하 제일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런데도 결국 서로 잡아먹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우환은 욕심이 많은 데서 생기고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장군께선 충성을 다해 한왕을 보좌하고 계시지만 어차피 그 친밀도는 장이와 진여보다 견고하지 못합니다. 장군과 한왕 사이에 놓인 일련의 석연찮은 일들 역시 장이와 진여를 갈라놓은 그 문제보다 크고 많습니다."
"어째서 사태를 거른 식으로만 보고 있는거요?"
"장군께서 '한왕은 나를 결코 위태롭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 맹목이 위태롭다는 겁니다."
"그럴까?"
"옛날 대부종과 범려는 망해 가는 월나라를 존속시키고 월왕 구천을 패자로 만드는 공을 세우면서 이름을 날렸으나 자기 몸은 망했으며 범려는 도망을 쳤습니다. 말하자면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는 꼴이지요. 그러니까 장군의 한왕에 대한 관계가 우정으로 치자면 장이와 진여보다 못하며 충성과 신으로 말하더라도 대부종과 범려가 월왕 구천에 쏟아부은 것만큼은 못합니다. 앞의 두 사례는 절대로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토록 우정과 충성을 다 바치고도 배신을 당한다?"
"뿐만 아닙니다.''용기와 재략이 군주를 떨게 하는 자는 몸이 위태롭고, 공로가 천하를 덮을 만한 자는 받을 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장군의 공로와 용략을 말씀드리자면, 장군께서 황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고 하열 역시 묶였으며, 군사를 이끌로 정형땅에서 내려와 진여를 주살하고 조나라를 진무했으며, 연나라를 위협하고 제나라를 평정했습니다. 게다가 남쪽으로 진군해 초군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용저를 죽인 뒤 서향해 한왕에게 보고했으니, 이른바 이것은 '공로는 천하에 둘도 없고 용략은 불세출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장군께선 군주를 떨게 하는 위력을 지니고 상받을 이상의 공로를 가지고 계시니 초로 귀속한다 해도 초왕은 장군을 믿지 못할 것이며 한으로 귀속한다해도 한왕은 떨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런 장군께서 도대체 어디로 귀속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신은 괴통의 설득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점차 괴통의 변설에 빠져드는 자신이 불만스러웠다.
"장군께서 신하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군주를 떨게 하는 위력을 지닌데다 명성은 천하에 드높으니 저는 장군을 위해 위험천만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선생은 잠깐 휴식하오. 나도 그 점에 대해 좀더 생각해 보겠소."
"아니 됩니다. 원래 남의 의견을 듣는다는 것은 성공의 조짐이며, 좋은 계략을 선책하는 것은 성공의 계기입니다.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쁜 계략을 취한 일치고 오래 안태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진언을 분별해 첫째로 할 것과 둘째로 할 것을 결단하고, 계략의 본말이 전도되지 않도록 신속히 결심하십시오."
"글세, 결단의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소!"
그래도 괴통은 막무가내였다.
"천하 일에 종사하는 자는 만승천자가 될 권위를 잃어버리며, 한두 섬의 봉록 지키기에 급급한 자는 경사의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는 일을 결단하는 힘이며 의심은 일에 방해만 되는 단서입니다. 또한 작은 계략을 밝히는 데에 구애되면 천하 대국을 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혜로써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단치 않으면 백사의 화근이 됩니다."
"아무리 그렇게 설득해도 주저되는 건 어쩔 수 없소."
"아무리 무서운 맹호라도 꾸물거리고만 있으면 고작 벌에 쏘이는 것 만큼도 못하게 되며, 출중한 준마라도 주춤거리고만 있으면 천천히 걷는 노둔한 말보다 쓸모가 없으며, 맹분같이 용맹스런 자라도 여우처럼 의심만 하고 있으면 평범한 필부의 결행만도 못하며, 순임금, 요임금이 지혜가 있더라도 입다물고 말하지 않으면 벙어리의 손짓발짓보다 나을 게 없습니다. 이제 말씀드린 이 모든 것들은 그만큼 실행의 고귀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공이란 이루기는 어려워도 무너지는 것은 하루 아침이며, 시기란 얻기는 어려워도 잃는 것 역시 잠간인 것입니다. 부디 명찰하십시오!"
"도대체 내가 무슨 명분으로 한나라를 배반한단 말이오!"
"아아, 장군께서는 끝내 제 진언을 들으려 하지 않으시는군요!"
"선생도 잘 생각해 보시오. 내가 한나라에 끼친 공이 얼마나 크오. 설마 나의 제나라를 뺏기야 하겠소. 그래서 배반할 수가 없다는 거요!"
괴통은 더 이상 보채지 않고 물러가 버렸다. 오늘의 진언이 훗날 화근이 될 줄 알고 그 때부터 미친 척하고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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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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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지혜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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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하고 지속적이며 열정적인 영혼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리는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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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걸어갈 길은 스스로 선택하라. 그리고 그대의 영혼이 보다 창조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쌓도록 노력하라. 그대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왜냐하면 사색의 도움을 통해서 현실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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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서 얻을 수 있는 사상은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고 해도 그대의 사색에서 우러나오는 지식보다는 못하다. 그대의 정신 속에서 불타고 있는 사상과 책에서 읽은 다른 사람의 사상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 생명력이 있는 꽃은 아름다움과 향기가 있지만 화석이 된 꽃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고 해도 향기를 풍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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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서 얻은 진리는 우리의 내부로 흡수되지 못한다. 그런 지식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기억될 뿐 우리의 본질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물로 빵을 만드는 것과 같다. 억지로 만든 인위적인 형태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나 스스로 사색하는 과정을 통해 얻은 진리는 살아 있는 우리의 몸에 비유할 수 있다. 사상가와 단순한 학자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 스스로 사색하는 사람의 글은 정확한 빛과 그림자의 배합, 부드러운 그림이 되지만 단순한 학자의 글은 약동하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팔레트가 된다. 색조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그림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모든 색들이 마구 혼합되어 있는 팔레트가 될 것인가? 그것은 그대가 스스로 선택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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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과 독서가 정신에 미치는 영향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독서는 우리가 순간적으로 품게 되는 생각과 거리가 멀 때가 많다. 독서는 성질이 다른 사상을 도장 찍듯이 강제로 정신에 찍어 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정신은 외부로부터 사색의 주제를 강요받게 된다. 그 주제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나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강요된 사색은 우리의 정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흥미도 없는 문제를 독서에 의래 의식하게 되고 그 지식을 정신에 주입시킨다고 해서 그것이 두뇌에 기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들은 두뇌의 표피에서 머물다가 곧 사라지게 된다. 강요는 거부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색은 다르다. 스스로의 의지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진리를 모색하는 것은 새로운 지혜를 터득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사색은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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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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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19세기 말엽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의 근대사를 완전히 짓밟고, 국토까지 빼앗았던 일제와 일본인들의 온갖 죄악상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중의 한 영역인 역사 유적과 문화재의 약탈, 도굴, 파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불법반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제한된 일본인들 자신의 기록과 역시 제한된 국내의 목격담 혹은 증언들이 그 윤곽과 만행의 일변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빙산일각의 확실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과거 일제와 일본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수난이 어느 정도 극악한 상태였는지를 능히 파악할 수가 있다. 일제의 침략세력에 편승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일본인 골동상과 호리꾼('호리'는 '도굴'의 일본말) 패거리가 부산과 인천항으로 줄지어 상륙하여 고려의 왕도인 개성 일원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을 닥치는 대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수백 년전부터 일본인들이 최고의 진품으로 여겨 오던 고려자기였다. 이 20세기초의 왜구들은 장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는 한편 이 땅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백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수백 수천의 고려고분을 모조리 파헤치면서 그들이 목적한 각종 고려자기와 부장품을 노다지로 약탈했는데, 이는 일제에 의한 한국문화재 수난 초기의 최대의 만행이었다. 옛부터 한국에서는 어떤 무덤이라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파헤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회윤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옛부터 내려오는 가장 심한 욕 가운데 '굴총할 놈' 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것은 못된 짓이었다. 그런데 '굴총할 놈' 의 정도가 아니라 '굴총하는 놈' 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줄지어 밀어닥쳤으니 천인이 공노할 노릇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침략과 지배권을 장악한 일제세력을 따라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의 앞잡이들과 현지에서 눈뜬 일본인 흐리꾼, 곧 '굴총하는 왜놈' 들이 개성 일대의 고분 속에서 파낸 고려자기들은 일단 서울로 모아졌다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엔 벌써 서울에서도 이 고려자기의 도굴폼들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세력 있는 일본인 수집가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한 일본인의 기록은 당시 서울에서의 고려청자 수집가로 이미 소문나 있던 일본인으로 아유가이, 아가와 등의 이름을 들고 있다. 또 개성 일원에서 같은 패거리의 일본인들이 도굴해 온 고려청자들을 산같이 쌓아놓고 서울의 일본인 수집가나 일본 본토로 그것들을 중개한 골동상으로는 곤도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지금의 충무로 입구 근처에 가게를 갖고 있었다. 1905년 11월에 일제의 군사적 협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 소위 보호정치의 초대 통감으로 온 한국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저희 천황과 기타 일본의 귀족사회에 선물한다고 실어내간 무려 수천 점의 고려청자도 대개 곤도를 통해서 무더기로 입수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에서도 원흉의 역할을 했다. 그의 고려정자 대량 반출과 수집은 일본인들의 도굴행위를 최악의 상태로 조장시켰기 때문이다.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군림한 1906년에 서울에 건너왔던 일본인 가운데 미야케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이미 개성지방에서 일본인들이 도굴하여 가져간 고려자기들을 접촉 혹은 입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뒷날 그는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전부터 나는 옛 도자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었는데, 애써 한국까지 가게 된 것도 실은 한국의 옛 도자기의 친밀감에 이끌린 때문이었다."
이 미야케라는 사나이는 당시 한국에 몰려 와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던 일본인 무리들 속에선 그래도 양식이 있는 지식층이었다. 그도 결국은 고려자기 같은 한국 도굴품들을 현지에서 헐값으로 마음껏 입수해서 즐기려고 서울을 찾아온 일본인의 한 사람이긴 했으나 당시 그의 눈에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비쳤었던지 약 30년 후에 가서 과거의 죄스런 비화들을 비교적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다음은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 라는 표제로 된 미야케의 회고기에서 추린 일제침략과 한국문화재 수난의 초기 기록이다.
"(1906년 현재) 서울에는 곤도라는 일본인의 골동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는 다카하시라는 사나이가 가게는 따로 없이 고려자기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에게 팔곤 했다. 이 다카하시란 사나이는 본시 순사(경찰)로 오랫동안 개성 방면에 근무했었다는 관계로 개성 부근에서 도굴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혹은 직접 개성에 가서 모아 가지고 오곤 했다. 곤도의 골동가게에 들어오는 고려시대의 발굴품(도굴품)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가져 갔다. 그러자 재미를 붙인 누군가가(물론 일본인) 자꾸 시켰던지, 그후 가게에는 고려자기의 수가 날로 급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서울의 한국인 지식층 가운데 고려청자의 존재나 진가에 눈뜬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또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고려자기는 일본인들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 일본인들끼리만 사고 파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미야케는 다카하시에게서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언젠가는 박식한 한국인이 왔길래 앞에 있는 고려청자를 보였더니 '이건 대체 어디 것이냐?' 고 진귀해 하는지라.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미야케의 증언을 빌리면, 일본인들에 의한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던 1909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토 통감이 서울에서 고려자기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휩쓸어 가져 갔는지에 대해서도 미야케는 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사람(일본인)은 볼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굉장히 수집한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무렵 닛타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토 통감의 연회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던 자인데, 그러다가 여관을 개업했었다.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이 여관에 나타나 닛타를 시켜 '얼마든지라도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오라. 몽땅 사자' 하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여기서 저기까지 30점, 50점' 하는 식으로 선물하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는 곤도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몽땅 사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의 매품이 동이 난 적도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는 데 성공한 일제침략의 괴수이자, 개성 일원에서의 고려고분 파괴와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킨 원흉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 임진왜란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졸개들을 시켜 이 땅에서 저질렀던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과 유적 파괴의 범죄 행위를 또다시 반복한 불법침입자의 두목이었다. 이토가 통감 재임 2∼3년 동안에 그를 믿고 무볍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 호리꾼들의 도굴품인 고려청자를 수천 점 이상이나 무더기로 사들이게 되자 도굴사태는 절정기로 치닫게 되고 서울과 본토의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큰 유행을 이루게 도이었다. 미야케는 자신도 참가했던 당시의 상황을 앞의 회고기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이토 통감이 골동가게의 고려자기를 몽땅 사들이는 일이 있은 후), 그 경기에 자극되었는지 바야흐로 고려청자에 열광하는 시대가 출현하였고, 한때 그것(도굴과 장사)으로 생활하는 자가 수천 명이란 얘기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도굴을 당한 개성, 강화도, 해주 방면의 대소 고분의 수는 놀라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난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한역(임진왜란) 때에도 고려고분 몇 개를 발굴(도굴)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일본)에 전해져 있는 '운학문청자' 같은 명품은 그때에 가져온 것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선조에 대한 공경심이 깊고 특히 분묘는 소중히 여기는 습관이 있어 꿈에라도 그것을 발굴하여 예전 일을 알려고 한다든지 혹은 옛 기물을 파내어 그것을 즐기려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없었다. 이 일(고려자기 도굴)은 춘추의 필법으로 말하면 일본인이 발굴(도굴)한 것이다."
일본인조차도 이 정도로 쓰고 있으니 그 실제의 양상이 어떠했을까. 미야케는 "그러나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 고 말하고 있다 얼마간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하고 무지했던 그들은 총을 가진 해적 같은 일본인의 위협과 다소의 품삯에 매수되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로부터 가장 꺼리고 몹쓸 짓으로 알고 있던 '굴총' 짓을 시켜서 얻은 출토품으로 뒤에 가서 한껏 돈을 번 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청자를 포함한 고려고분의 매장 문화재들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밑천 안 들이고 착취할 수 있는 보물들이었다. 본국에서 먹을 것 없어 맨손으로 돈 벌러 온 무식한 악당들이었던 일부 일본인들에겐 그것은 특히 눈을 까뒤집고 덤빌 만한 노다지 금광 같은 치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개성 일원의 지리와 정보에 익숙해지면서,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 골동품상과 수집가를 통한 판로가 갈수록 확대 보장되면서 만행의 도굴장소를 개성에서 강화도와 해주 쪽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모든 지역의 고려고분이 파헤쳐졌다. 일본인 호리꾼의 수효는 날로 늘어갔고 한국인 하수인 없이 직접 도굴을 감행하는 자도 많아졌다. 미야케도 그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하고 있다.
"고려자기 도굴이 최고조에 달한 때엔 일본인도 직접 참가했는지 모르지만,일본인은 대체로 뒤에 앉아 출토품을 사들여서는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호사가들 사이로 들고 다니며 이익을 취했다."
미야케 말고 또 다른 일본인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1930년대에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의 증언이다.
"(조선의 고분들이) 오늘과 같은 참상을 격게 된 것은 병합(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본인이 조선의 시골까지 들어가게 된 후의 일이며, 일확천금을 꿈꾸며 건너온 자들(일본인)이 황금의 사발이 묻혀 있다든지 정월 초하룻날에는 금닭이 무덤 속에서 운다든지 하는 전설이 있는 고분을 금광이라도 파는 심산으로 파고 다녔다. 곳에 따라서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일본인)까지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자가 있었다니 딱한 일이었다."( (조선) 6월호, 1932년, 조선총독부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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