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2호 - 2023.11.22 수요일(음력 :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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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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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滿潮)에는 모든 배가 떠오른다. ― 존 F.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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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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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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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요동치는 말
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 위에 연필 끝을 올려놓고 반대편 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내며 깎는다. 사과는 손바닥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대편 손은 사과 표면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넓게 벌렸다가 집게손가락에 닿아 있는 칼등을 엄지손가락이 있는 데까지 끌어당기면서 깎는다. 둘은 다르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깎는 건 깎는 거니까 같다고? 좋다. 그러면 둘 다 같은 칼로, 같은 방향으로 깎는다고 치자. 그러면, 둘은 같은가? 행위에는 목적이나 결과가 있다. 연필을 깎으면 글을 쓰지만, 사과를 깎으면 먹는다. 두 동작(작동)의 목표와 결과는 다르다.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물과 연결된 미세한 행동방식과 함께 몸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며 이해하며 행위한다. 말은 말 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조응하는 몸의 감각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좀스럽긴 하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밖에'의 띄어쓰기
주말 저녁, 외국의 어느 섬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TV로 보고 있었다. 한 소녀가 뭐라고 말을 하자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어요.’라는 자막이 나타났다.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저 밖에’ 없다면 ‘이 안에’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런 뜻이 아니다. 병든 부모님 대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녀가 학교에도 못 가고 물질을 해야 하는 상황이 곧 펼쳐졌다. 그렇다면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라고 해야 한다. 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띄어쓰기 차이다. ‘밖에’를 앞 말과 띄어 쓸 때와 붙여 쓸 때는 의미가 달라진다.
앞 말과 띄어 쓰는 ‘밖에’는 명사 ‘밖’에 조사 ‘에’가 결합된 것으로, 일정한 범위나 한계 바깥을 의미한다. 이 ‘밖에’는 ‘안에’의 반대말이므로 ‘창 밖에 비가 내린다’는 말은 ‘창 안쪽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문 밖에 누가 왔다’는 ‘문 안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때 ‘밖’은 ‘안’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명사이므로 앞 말과 띄어 쓴다. 물론 다른 말이 앞에 나올 필요 없이 단독으로도 쓰인다. ‘밖에 오래 서 있었더니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가 그런 예이다.
이와 달리 항상 앞 말에 붙여 써야 하는 ‘밖에’는 ‘그것 말고는’의 뜻을 나타내는 조사다. 뒤에는 반드시 부정적 뜻을 지닌 말이 온다. ‘동생이 하나밖에 없다’든가 ‘돈밖에 모르는 구두쇠’처럼 쓴다. ‘동생이 하나밖에 있다’든가 ‘돈밖에 아는 구두쇠’ 같이 긍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말과는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위에 예로 든 TV 자막의 ‘밖에’는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이 저밖에 있다’로 바꾸어서는 문장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앞 말과 붙여 쓰는 조사임을 알 수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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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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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천
비 - 천상병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우수를 씹고 있는 나는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한다
비는 슬픔의 강물이다
내 젊은날의 뉘우침이며
하나님의 보살피심을
친구들의 슬픈 이야기가
새삼스레 생각나누나
교회에 혼자 가서 기도할까나.
∼∼∼∼∼∼∼∼∼∼∼∼∼∼∼∼∼∼∼∼∼∼∼∼∼∼∼∼∼∼
꽃싸움 - 한용운
당신은 두견화를 심을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는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 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을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도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치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
무서운 시계 - 정지용
옵바가 가시고 난 방안에
숫불이 박꽃처럼 새워간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
망토 자락을 녀미며 녀미며
검은 유리만 내여다 보시겠지!
옵바가 가시고 나신 방안에
時計소리 서마 서마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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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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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조로(人生朝露)
人:사람 인. 生:날/살 생. 朝:아침 조. 露:이슬 로.
[원말] 인생여조로(人生如朝露). [유사어] 인생초로(人生草露).
[참조] 안서(雁書), 구우일모(九牛一毛). [출전]《漢書》〈蘇武專〉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다는 말.
전한 무제(武帝) 때(B.C.100)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는 포로 교환차 사절단을 이끌고 흉노의 땅에 들어갔다가 그들의 내란에 말려 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우두머리인 선우(單于)는 한사코 항복을 거부하는 소무를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귀국을 허락하겠다’며 북해(北海:바이칼 호) 변으로 추방했다. 소무가 들쥐와 풀뿌리로 연명하던 어느 날, 고국의 친구인 이릉(李陵) 장군이 찾아왔다.
이릉은 소무가 고국을 떠난 그 이듬해 5000여의 보병으로 5만이 넘는 훙노의 기병과 혈전을 벌이다가 중과 부적(衆寡不敵)으로 참패한 뒤 부상, 혼절(昏絶)중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 후 이릉은 선우의 빈객으로 후대를 받았으나 항장(降將)이 된 것이 부끄러워 감히 소무를 찾지 못하다가 이번에 선우의 특청으로 먼 길을 달려온 것이다. 이릉은 주연을 베풀어 소무를 위로하고 이렇게 말했다.
“선우는 자네가 내 친구라는 것을 알고, 꼭 데려오라며 나를 보냈네. 그러니 자네도 이제 고생 그만하고 나와 함께 가도록 하세.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다[人生如朝露]’고 하지 않는가.”
이릉은 끝내 소무의 절조를 꺾지 못하고 혼자 돌아갔다. 그러나 소무는 그 후(B.C.81) 소제(昭帝:무제의 아들)가 파견한 특사의 기지(機智)로 풀려나 19년 만에 다시 고국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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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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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9장 도래종교
2. 큐벨레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키벨레 상]
큐벨레(Cybele)는 동방의 여신이며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이라고 한다.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메노스라는 리디아의 왕자와 딘듀메네의 딸이라고도 한다. 그리스 신화의 레아와도 동일시된다. 태어나자마자 산에 버려졌는데 산짐승의 젖으로 살아났고 그 산 이름을 따서 큐벨레로 불리게 되었다. 커서 아버지 궁전으로 돌아와 미모의 청년 아티스와 밀통하게 되자 아버지는 청년을 불구자로 만들어 버렸다. 여신의 아티스에 대한 사랑은 프리지아에서의 큐벨레 숭배에 잘 나타난다. 즉 큐벨레는 아티스에게 종신토록 자신을 섬기며 독신을 지킬 것과 이를 어길 경우 속죄를 요구하였다.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티스는 거세되고 소나무 십자가에 처형되어 지상의 죄를 속죄하게 된다. 프리지아에서 큐벨레 축제는 극도로 장엄하게 치러지는데, 그 사제들은 코류반테스 혹은 칼리스로 불리며 미리 신체의 일부를 제거한 선택된 자가 아니면 참여하지 못하였다. 의식은 아티스를 잃은 큐벨레의 슬픔을 표현하는 행사로, 마치 실성한 자의 모임처럼 무시무시하고 예리한 음과 절규, 드럼과 작은 장고소리, 방패와 창 부딪치는 소리가 모두 같이 섞여서 온천지를 진동하였다. 또한 새로 참가하는 자에게 수소를 잡아 그 피로 세례를 주었다(타우로볼리즘).
큐벨레는 건강한 여성을 상징하고 그녀의 임신은 땅의 생식을, 여러 개의 유방은 지상에서 모든 산짐승에 식량을 주는 것을 상징한다. 탑 장식관이나 면사포를 쓰고, 곁에는 두 마리의 사자를 대동한 채 옥좌에 앉아 있거나 사자가 끄는 일륜마차를 타고 있을 때도 있다. 아티스는 잔을 들고 그 옆에 배석하였다. 두 마리 암수 사자는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두 남녀가 신전을 혼인의 신방으로 삼았기 때문에 모독죄로 변신시킨 것이다. 큐벨레 숭배는 그리스에 들어가 엘레우시스의 비의로 절충되어 데메테르 엘레우시스 비의로 자리잡았다. 로마인들도 이들 정중히 받아들여 로마의 최고 모신으로 모시고 바티칸에 신전을 세웠는데 그리스도교가 점거하는 서기 4세기까지 엄존하였다. 로마에서는 시뷸레의 신탁에 따라 프리지아의 페시노스에서 여신상을 모셔와 축제를 벌였는데 그 배가 티베르 강가로 다가오면 클라우디아의 미덕과 순결을 입증하기 위해 허리띠를 끄르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여신 숭배의 핵심이 되는 성석을 실은 배가 티베르 강에서 좌초하였을 때 귀부인 클라우디아가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 그 배를 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이 무속신앙은 매우 강하여 매년 4월 6일에는 여신의 성체를 알몬 강물에 목욕을 시켰다. 축제 때는 음란한 외설이 만발하고 사제들은 외설발언에 열을 올렸는데 이는 음탕하고 부도덕한 행위에서 벗어남을 나타내었다.
아티스
아티스(Attis, Atys)는 프리지아 신화에서 큐벨레 숭배와 동방하여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로, 기원전 204년에는 로마로 들어왔다. 원래 양치기이지만 뛰어난 미모로 큐벨레의 사랑을 받았다. 이 젊은이에 매료당한 큐벨레는 자신의 사원을 맡기며, 평생 동정을 지켜 독신으로 살 것을 약속케 하였다. 그러나 아티스는 한 요정에게 연정을 품어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에 여신의 극심한 역정을 사서 실성하게 되고, 마침내 예리한 돌로 스스로 거세하여 성불구가 되었다. 그 후 큐벨레 숭배를 맡은 승려들은 종신토록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자진해서 거세하였다. 큐벨레와 아티스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큐벨레와 아티스가 사랑에 빠지자 큐벨레의 아비가 젊은이를 성불구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또한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아티스는 강의 신 상가리오스의 달 나나의 아들로, 나나가 편도 가지를 품었다가 잉태하여 태어났다고 한다. 예기인즉 아그디스티스라는 신은 양성을 지닌 괴물이었는데 신들이 그의 남성성기를 제거하여 땅에 던지자 거기에서 편도나무가 솟아났다. 상가리오스의 딸 하나가 그 가지를 모아 가슴에 품었더니 잉태가 되었고 거기에서 아티스가 태어났다. 아티스는 태어나자마자 산에 버려져 산양의 젖을 먹고 자랐는데, 산간에서 남성성기를 제거당하여 여성이 된 아그디스티스 (큐벨레)가 아티스의 미모에 넋이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티스가 페시노스 왕의 딸과 축복된 혼례를 올리게 되자 질투에 휩싸인 아그디스티스는 마법의 능력을 발휘하여 왕과 사위 간에 싸움을 붙이니 격분한 나머지 둘다 성불구가 되었다. 큐벨레는 자해하려는 아티스를 소나무로 바꾸었고 그 후 소나무는 모든 신의 모신에게 바치는 나무가 되었다.
또한 아티스는 큐벨레의 화신인 처녀신 나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티스는 성인이 되자 어느 해 속죄 제삿날에 희생되어 인류 구제를 위하여 거세하고 소나무 십자가에서 처형되는데 아티스의 성혈이 흘러 지상의 죄를 모두 속죄하였다고도 한다. 이 날이 바로 춘분으로 블랙 프라이데이라고 한다. 아티스의 육신은 빵에 넣어져 숭배자들에게 먹은 바 되고, 아티스는 죽은 지 3일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 부활의 날을 카니발 또는 힐라리스라 부르는데 사람들은 부활의 환희에 들떠 거리에서 변장을 한 채 춤추고 돌아다니며 한때의 정사에 빠졌다. 이 날이 일요일이다. 그리스도교도들도 아티스의 부활에서 유래한 부활제를 경축하고 카니발 행사를 겸하였는데 이는 후세에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축제주일의 최종일은 행사의 절정에 달하며 그 날 즉 4월 1일을 만우절이라 하였다.
아티스 숭배는 초기 그리스도교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아티스 수난에 대해서는 3월 25일에 추모를 하였는데 그것은 아티스가 탄생한 동짓날인 12월 25일에서 꼭 9개월째 되는 날이다. 수난의 시각은 또한 그가 잉태된 시각도 된다. 그리스도교도들은 자신들의 구세주의 잉태와 탄생일이 아티스의 그 날과 같은 날이라 하고, 이것이 논쟁거리로 떠오르자 즐겨하는 지론으로 그리스도교가 생기기전에 악마가 그리스도교 정신을 본 떠 이교의 비의를 만든 것이라고 하였다. 아티스 신봉자는 결국 아티스의 희생의 날을 그리스도교도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483~565)는 3월 25일을 예수 잉태의 날로 고지하고 축일로 공포하였다. 따라서 예수도 아티스와 마찬가지로 9개월 후인 동짓날에 태어난 것으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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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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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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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책임이 나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가. 사랑은 햇빛이고 미움은 그늘이다. 인생은 그늘과 햇빛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62
나는 모든 것들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향수를 누리면서 새로운 미래의 시간을 용기를 가지고 준비하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다. 내 운명의 주인은 오직 나뿐이다.
63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용기를 통해 우리는 수많은 경험을 영혼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나는 오직 나만의 경험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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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원이 높은 숭고함은 시련 속에서 얻을 수 있다. 자연은 때때로 사나운 회오리바람을 내보낸다. 주위는 짙은 어둠에 뒤덮이고 하늘에는 거친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다.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는 바위는 거대하며 대지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없다. 강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거품을 일으키며 흐른다. 골짜기를 스치는 바람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우리는 손과 발이 묶인 채 자연과 싸워야만 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도 고통이나 고뇌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지 않고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인식의 순수한 주체는 모든 것을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다. 객관적인 인식과 냉정한 통찰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지혜이다. 이러한 인식과 냉철함이 없다면 우리는 이 수많은 세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무모함과 거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뿐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힘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라. 그대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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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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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 제1장 선각의 인맥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인천시립박물관 옥외전시관에 있는 고유섭 동상]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이 창설되어 일본인 교수들이 미학과 동·서양의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누구의 강의시간이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는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주목을 끌어 2년 후에는 연구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이름은 고유섭, 그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이후 그는 한국미술사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눈부신 연구와 조사활동 그리고 정력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문적인 기초는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있을 때 틀이 잡혔다. 규장각 도서를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와 화론을 뽑기 시작하는 한편, 전국 각처의 유적지와 도요지를 현지 답사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현 고유섭의 출현은 구한말 이후 이 땅의 역사적인 모든 유적과 미술문화재의 근대적인 학술조사 및 연구가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던 그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었다. 1933년에 그는 일제 밑에서 가장 배일 기질이 강했던 개성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다. 이후 그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본격화되고, 일본인 전문가들 속의 유일한 조선인 소장학자로서 민족적인 기개를 펴 나갔다. 이 땅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를 말하는 그의 글들이 개성과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에 끊임없이 실렸고,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관계 학계에서의 그의 존재는 당시 뜻있는 조선인 지식층과 학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족했다. 원 태생지가 강원도였다는 설이 있는 우현은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선택된 가정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의 보성고보(지금의 보성중고교)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비교적 부유했던 인천의 처가에서 많이 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후의 학문 생활도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받은 보수란 기껏 시청의 과장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자세는 언제나 고고했다.
우현의 뚜렷한 목표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사명은 오직 하나, '한국미술사의 완성' 이었다. 그러한 그의 열의와 뜻을 재정적으로 다소 협조해준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는 많은 어려운 조건을 민족애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개성박물관 사택에서 정열적으로 연구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주목케 하는 교양물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했다. 위창의 뒤를 잇는 새세대인 우현의 과학적인 한국미술사 연구·개척은 사랑방 취미의 감상과 감식 위주로 고미술을 관심했던 그전까지의 귀족주의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성박물관으로 있으면서 우현은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개성 일원의 고적을 조사·소개하는 수년에 걸친 장기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있었다. 모두 개성에 집을 갖고 있던 이 학도들은 가까이에서 우현의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와 고적 조사의 중요한 의미에 감명을 받는 동안 어느덧 우현의 뒤를 계승하려는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그들의 지연에 의한 접촉과 인연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미술사학계의 여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3명의 학도, 곧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황수영과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진홍섭, 그리고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있던 최순우는 우현이 1944년에 41로 요절한 후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많은 제3세대의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오늘의 한국미술학계가 틀 잡혀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그들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 형성에 크게 기여한 김원룡 교수가 있으나 이 김교수만이 우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현의 생애는 너무 짧았으나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는 개성에서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황·진·최에 이어져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개발되면서 그는 영광된 개척자의 상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난날의 그의 과학적인 접근과 연구 업적은 오늘날 한국미술사학계에 하나의 우상이 돼있다.
사실 우현은 그의 짧은 생애에 기적에 가까운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사와 문화재에 대한 그의 학문적 정열은 1930년부터 불과 10여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혹은 답사기, 연구 여화, 화가론 외에도 민족문화재를 보호를 위한 시평, 해설, 수필 들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상당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 노트가 있었다. 이 유고들은 우현이 타계하면서 3명의 문도 중의 한 사람인 황수영 교수가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출판되었는데, 곧 (송도고적)(1946년),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고려청자)(1954년), (전별의 병)(1958년),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년), (조선화론집성 상.하)(1965년)이다. 이는 3인의 제자 황·진·최의 스승을 기리는 헌신적인 협력의 소산이었다.
(송도고적)은 1936년부터 4년에 걸쳐 (고려시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우현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간곡히 출판을 권유하여 조판까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자는 인쇄본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애석한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마침내 출판이 되었을 때 그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는 우현의 자서가 있었다.
"고적은 인간 생활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징체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역사의 조백(생명이 없는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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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쪽 → 배경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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