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0호 - 2023.11.20 월요일(음력 : 10. 08)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아무리 좋고 알뜰히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때로는 그들이 옆에 없을 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법. ― 앤쇼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까치발
신호등 앞에서 한 노인이 뒤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종아리 근육을 강화하고 혈액 순환을 원활히 하며 하지정맥류를 예방하는 만병통치의 까치발 운동. 속으로 ‘하나 둘 하나 둘’ 구령을 붙이고 있겠지.
새들은 모두 뒤꿈치를 들고 다닌다. 까치를 자주 봐서 까치발이려나, 한다. 제비발이나 까마귀발이라 해도 문제없다. 네발짐승들도 뒤꿈치를 들고 발가락 힘만으로 걷는다. 네발이니 땅에 닿는 면적이 좁아도 괜찮다. 강아지만 봐도 발꿈치뼈는 땅에 닿지 않는다. 두발짐승인 사람만 넓적한 발바닥 전체로 땅을 디뎌야 ‘서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언제 까치발을 하나? 시선을 초과하는 현장이 궁금해서겠지. 마음은 이미 장벽 너머로 넘어가 있건만, 육신은 날 수도 튀어오를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까치발은 ‘너머’를 보겠다는 의지의 육체적 표명. 육신의 한계 때문에 일렁이는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분투. 도구도 필요 없다. 오직 내 몸뚱이를 최대한 늘려서 기어코 보고야 말리라.
‘너머’에 대한 갈망은 까치발을 딛음과 동시에 턱을 앞으로 쑥 내밀게 한다. 동물계에서 이탈한 인간이지만, 이때만큼은 최적의 몸 상태를 만드는 동물에 가까워진다. 손으로 시야를 가리고, 턱을 앞으로 내밀어 보라(눈은 뜨고!). 가린 손 너머로 풍경이 훤히 보일 게다. 목이 원의 중심이 되어 턱을 내미는 만큼 눈이 원의 꼭짓점을 향해 ‘올라간다’. 와, 턱을 내밀면 눈이 올라간다는 우주적 발견!
내 눈높이, 내 키 너머에 다른 풍경이 있을지 모른다. 풍경만 그렇겠는가. 내 한계 너머에 다른 진실이 있을지 모른다. 텅 빈 마음으로 맞이하는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죽음 너머의 진실이 보고 싶다. 끽해야 까치발 정도의 간절함이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가오’와 ‘간지’
최근 베테랑 형사와 안하무인이며 후안무치인 재벌 3세의 대결을 그린 액션 영화를 봤다. 그런데 영화 한 장면에서 형사가 ‘가오’란 말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써서 많은 관객을 웃겼다. ‘가오’는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들여와 쓰이기 시작한 말로, 일본어 ‘가오(かおㆍ顔)’에서 유래한다. 광복 이후 이 말을 ‘얼굴’ 또는 ‘체면’으로 순화해 쓰도록 했고, 그 결과 공적인 언어 상황에서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사적인 언어 상황에서는 여전히 ‘가오’가 널리 쓰이고 있다. 주로 ‘가오(가) 서다’, ‘가오(를) 잡다’ 등의 형식으로 쓰인다. 이때의 ‘가오’는 ‘얼굴’ 또는 ‘체면’과 그 의미가 약간 다르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 말을 ‘허세’, ‘개폼’ 등의 의미에 더 가까운 비속어로 인식한다.
‘가오’처럼 사적인 언어 상황에서 널리 쓰이는 일본어로 ‘간지’를 하나 더 들 수 있다. ‘간지(かんじㆍ感じ)’ 또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일본어로, 광복 이후 ‘느낌’으로 순화해 쓰도록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방송이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간지 스타일’, ‘간지 아이템’ 등이나 ‘간지(가) 나다’의 형식으로 ‘간지’가 부활(?)하여 등으로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 ‘간지’가 ‘느낌’보다 더 그럴듯한 의미를 갖는 말로 인식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때부터 쓰이기 시작한 일본어 잔재의 대부분은 현재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일본어는 사적인 언어 상황에서 우리말로 둔갑하여 여전히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널리 쓰이다 보니 우리말보다 더 친숙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광복절을 맞아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일본어 잔재가 남아 있는 건 아닌지 한번 돌아보면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1. 귀천
들국화 - 천상병
84년 10월에 들어서
아내가 들국화를 꽃꽂이했다
참으로 방이 환해졌다
하얀 들국화도 있고
보라색 들국화도 있고
분홍색 들국화도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방은 향기도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
왜 이렇게 좋은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나는 일심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
오셔요 - 한용운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이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요.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이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은 당신을 찿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이리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부드러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애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과 포대가 티끌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
산너머 저쪽 - 정지용
산너머 저쪽 에는
누가 사나?
뻐꾸기 영우에서
한나절 울음 운다.
산너머 저쪽 에는
누가 사나?
철나무 치는 소리만
서로 맞어 쩌 르 렁!
산너머 저쪽 에는
누가 사나?
늘 오던 바늘장수도
이봄 들며 아니 뵈네.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의심암귀(疑心暗鬼)
疑:의심할 의. 心:마음 심. 暗:어두울 암. 鬼:귀신 귀.
[원말] 의심생암귀(疑心生暗鬼). [유사어] 절부지의(竊斧之疑), 배중사영(杯中蛇影). [출전]《列子》〈說符篇〉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오는 듯이 느껴진다는 뜻. 곧
①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면 갖가지 무서운 망상이 잇달아 일어나 불안해짐.
② 선입관은 판단을 빗나가게 함.
① 어떤 사람이 소중히 아끼던 도끼를 잃어버렸다. 도둑 맞은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래도 이웃집 아이가 수상쩍다. 길에서 마주쳤을 때에도 슬금슬금 도망갈 듯한 자세였고 안색이나 말투도 어색하기만 했다.
‘내 도끼를 훔쳐 간 놈은 틀림없이 그 놈이야.’
이렇게 믿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저번에 나무하러 갔다가 도끼를 놓고 온 일이 생각났다. 당장 달려가 보니 도끼는 산에 그대로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웃집 아이를 보자 이번에는 그 아이의 행동거지(行動擧止)가 별로 수상쩍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② 마당에 말라죽은 오동나무를 본 이웃 사람이 주인에게 말했다.
“집안에 말라죽은 오동나무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네.”
주인이 막 오동나무를 베어 버리자 그 사람이 또 나타나서 땔감이 필요하다며 달라고 했다. 주인은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
“이제 보니 땔감이 필요해서 날 속였군. 이웃에 살면서 어떻게 그런 엉큼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
글나눔 → 추천글
|
|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7장 아르고 호 선원
3. 뮤즈
뮤즈(Muses)는 므메모네슈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로 아흐레 밤을 정애로 동침하여 낳은 소산이다. 다른 전승에서는 뮤즈를 하르모니아의 딸, 또는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가계나 족보로 보아 명백히 상징적 음악의 관념에 연유한 인격신일 것이다. 뮤즈는 시문을 읊고 노래와 무용의 재능을 가진 여신(요정)들로, 합창과 반주 및 음송으로 제우스 및 여러 신들을 기쁘게 하고 그 외 인문, 예술 및 과학 등 문화적인 모든 일을 관장한다고 보았다. 헤시오도스는 인류를 위한 뮤즈의 은혜를 찬양하였는데 특히 왕들과 같이 행동하여 싸움을 진정시키며 설득력에 영감을 주어 갈등을 해소하고 다시 평화를 유지하게 하며 왕들에게 온화한 마음을 갖게 하여 주민에게 사랑을 베풀게 한다고 찬양하였다. 뮤즈의 한 여사제는 지난날의 위대한 인물의 행적을 세상에 알리는 시를 읊게 하고 혹은 신과 인간의 고난과 슬픔을 금방 잊도록 하였다. 가장 오랜 노래로는 올림포스 신족이 티탄족에 승리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출시키는 시를 들 수 있는데, 음송과 합창으로 축하하였다. 뮤즈에는 크게 두 가계가 있어 하나는 피에리아 산 마을에 사는 트라키아 여인들이고 또 하나는 헬리콘 산록에 있는 보이오티아 여인들이다. 전자는 올림포스 근방에 거주하며 흔히 시문에서 회자되는 피에리데스인데, 오리페우스 신화와 연줄이 닿고 디오뉴소스 예찬에 관여하며 트라키아에서 강세를 이루었다. 다음 헬리콘 산의 뮤즈는 직접 아폴론의 관할하에 있었으며 천마 페가소스의 발굽이 닿아 솟아났다는 히포크레네(말의 샘)에서 노래를 하였다. 그외 다른 고장의 뮤즈도 있다. 이들은 요정 카리테스의 구성과 같이 세 명이 한 조로 되어 델포이와 시큐온에서 활동하였는데, 레스보스에서는 일곱 명이 한 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옛적 뮤즈는 아홉 명을 정원으로 하며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명단은 다음과 같다. 최고의 존대 대상은 칼리오페이고, 이어 클리오, 폴류흄니아, 에우테르페, 테르프시코레, 에라토, 멜포메네, 탈리아 및 우라니아이다. 이들 뮤즈에게는 작가들에 의해 점진적으로 특기가 부여되었다. 예컨대 칼리오페는 서사시, 클리오는 사실적인 시, 폴류흄니아는 몸짓, 에우테르페는 플루트, 테르프시코레는 경쾌한 시와 무용, 에라토는 서사시 합창, 멜포메네는 비극시, 탈리아는 희극시, 우라니아는 천문의 시를 담당하였다. 이들 뮤즈는 자신들의 전승 고리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시인에게 영감을 부여하였다. 신들이 개최하는 큰 축제와 향연에서는 노래와 반주, 무용을 담당하였는데, 예를 들면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혼인잔치나 하르모니아와 카드모스의 결혼연을 들 수 있다.
칼리오페
[ 칼리오페, 서사시의 무사.]
칼리오페(Calliope)는 제우스와 므네모슈네의 딸이며 9명의 자매 뮤즈 중 한 명으로, 다른 자매들과 달리 특별한 노래 재능은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수금에 맞추어 서사시를 읊는 여신 뮤즈로 등장하고 있다. 페르세포네와 아프로디테가 미소년 아도니스를 사이에 놓고 갈등을 일으켰을 때는 제우스의 지시로 중재역을 맡았다. 바른손에는 트럼펫, 또 한 손에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칼리오페는 때에 따라 세이렌, 리노스와 레소스의 어미라고도 한다. 트라키아의 왕 오이아그로스(혹은 아폴론)와 관계하여 오르페우스, 리노스를 낳았다.
|
|
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
|
|
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51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삶은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지 보상한다. 우울한 사람은 쾌활한 성격의 사람보다 고통을 많이 체험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실재적인 고난에 처했을 때 그는 그 재난을 훌륭하게 견디어 나간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이고 침착하게 재난을 극복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울한 사람은 현실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므로 늘 삶에 지쳐 있다.
52
우울한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권태를 느끼고 자살을 꿈꾸기도 한다. 증세가 심한 우울증 환자는 자살에 대해 고민하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구하기 위한 극히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방법으로써 자살을 선택한다. 그러나 자살은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완전한 방법이 아니다.
53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여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피하고 자신에게 알맞은 일을 찾아서 한다면 행복을 느끼기는 몹시 쉬울 것이다. 헤라클레스처럼 뛰어난 힘을 가진 사람이 수공업에 종사하거나 학문을 연구하는 정신노동에 종사하게 된다면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은 불행을 피하기 어렵다. 이렇듯 행복은 얼마든지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질투와 욕심은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도록 만드는 마음의 눈을 가려 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능력을 확대해서 바라보게 하는 잘못된 눈까지 만든다.
54
결말이 실패로 끝날 거라고 예상되는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인다면 절망하지 마라. 무거운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더라도 한쪽 구석에서 작지만 밝은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다면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마라.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그 빛은 세상을 환하게 비출 수 있으며 우리의 앞길을 열러 줄 수 있다. 저기에 빛이 보이지 않는가. 천지가 뒤집히기 전에는 용감한 사람은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용감한 사람은 어떤 일이든지 한 가닥 희망을 보고 험난한 파도를 향해 뛰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삶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빛보다는 무거운 먹구름만을 의식하면서 두려워한다. 그러나 먹구름은 반드시 걷히기 마련이다.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라면 그 작은 빛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최선을 다할 것이다.
55
어리석은 사람은 쾌락을 찾아 나섰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돌아온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쾌락을 구하는 대신에 실재적인 재앙을 피하는 길을 모색한다. 그렇기 때문에 좀처럼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 쾌락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다. 쾌락은 환상의 산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환상의 산물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우리에겐 아무런 가치도 주지 못한다. 환상은 지치고 힘겨운 사람들에게는 일시적인 위안을 주지만 환상이 깨어진 후에는 고통보다 더한 공허가 찾아온다.
|
|
독서실 → 한국사
|
|
|
한국 문화재 수난사 - 이구열 : 제1장 선각의 인맥
역매 오경석과 불우한 천재 고람
[오경석, 봉래선거도 및 축수시, 1856]
오경석(吳慶錫, 1831년(순조 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 1879년(고종 16년) 10월 7일(음력 8월 22일))은 조선 후기의 역관, 외교관이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작가이자 시인이며 서예가, 서화가였고, 고미술품 감정에도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조선왕조 19세기 중엽의 개화사상의 비조로서,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이다. 역관,서화가,금석학자이며, 특히 전서체를 잘 썼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진재(鎭齋),천죽재(天竹齋)이며, 서울 출신이다. 역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은 그의 아들이다.
1846년 역과에 합격하여 한어(중국어) 역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853년 베이징 체류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개항론을 주장하였다. 또 병인양요의 해결과 강화도 조약 체결에 참여하여 전란 방지에 공헌하였고, 관직은 숭록대부 중추부지사에 이르렀다.
환재 박규수, 유대치, 강위 등과 더불어 초기 개화인사이자, 북학파에서 개화파로 넘어가는 과도기형 인물로 평가된다.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인 이상적(李尙迪)의 문인이었고, 박제가의 손자 박효선을 사숙하였다. - wiki
---------------------------------------------------------------------------------
역매 오경석이 어려서부터 그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우선 이상적에게 글씨와 시문을 지도 받고, 서화의 안목도 높일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가 청나라를 드나들기 직전인 스물 안팎 때의 가장 가까웠던 선배로서 그의 시문과 서화를 늘 예리하게 비판해준 사람은 당시 시,서,화 삼절의 혜성 같은 천재였던 고람 전기였다. 역매보다 불과 여섯 살 위였건만 그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고, 그 때문에 서울 장안의 서화 애장가와 수집가들이 줄곧 그에게 감정과 평가를 의뢰해 오곤 했었다. 역매도 집안에 들어온 서화폭들을 언제나 그에게 보였던 것 같다. 그때의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흥미있는 고람의 편지들이 전해지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위창 오세창이 1879년에 작고한 아버지 역매의 생활기록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고람의 편지들을 서첩으로 꾸민 듯한 (위공소찰)(이겸로 소장)이라는 책자가 그것이다. 역시 위창의 부탁으로 서첩의 표제를 쓴 듯한 몽인 정학교(서울 광화문의 현판을 쓴 당대의 유명한 교양인이며 서화가)가 표제 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고 있다.
"위공이 역매와 주고 받은 편지들이다. 40년 전의 일로서, 손님이 앉은 자리에서 얘기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휙휙 쓰던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 그 글씨들을 대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몽인은 쓴다."
앞의 발문으로 미루어 몽인은, 갓 서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요절하였으나 천분의 재예와 안목으로 출중했던 고람을 그의 가난한 생활의 방편이었던 한약방으로 자주 찾아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몽인은 고람보다 일곱 살 위였다. 그런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창도 그에게 특별히 (위공소찰)의 서첩 표제를 간청했던 것 같다. 다음에 편지 내용을 몇 대목 소개해본다(모두 고람이 역매에게 써 보낸 것).
"담계와 석암-중국의 유명한 서화가들-의 대련 2폭을 어제 저녁에 권군이 가지고 왔는데 우선 여기 놔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당신의 감정이 틀림없는 것 같다. 책 2권을 받았다."
"어제 보낸 서화 12폭 중에서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정수첩)(화첩인 듯) 1권뿐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표(청대의 유명한 화가 황진)의 족자는 돌려보낸다."
"며칠 앓고 일어났다. 마침 부득이한 용차가 있어 부탁하니 가진 것이 있으면 20냥만 4∼5일간 빌려줄 수 없겠소? 이런 일을 부탁하니 미안하오."
"보내준 예서 대련(역매가 써 보낸 글씨)은 재기가 넘쳐서 매우 좋은 데가 있다. 그것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름이 날 만하나, 그러나 붓을 뉘어서 쓰고 중봉(붓의 중봉)을 많이 쓰지 않았고, 짜임새도 어색한데가 있어서 조금 흠이다. 한대의 비첩을 많이 보고 문자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한다면 옛사람 부끄럽지 않겠다."
이 편지 내용만 보아도 청나라를 드나들기 전까지 역매는 고람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모든 것을 상의하면서 교양과 안목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19세기 중엽, 서울에서의 국내외 신,구 서화의 유전 및 감정평가의 내막을 알려주는 고람의 흥미있는 편지들은 (위공소찰)로 묶여진 것 외에도 또 하나의 묶음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돈 많은 수집가였던 모양인 경연재라는 사람(이름은 불명)이 고람에게 서화의 감정 및 검토를 부탁했다가 받은 편지들인데, 이것은 역매의 경우와는 달리 수신인 자신이 생전에 서첩으로 꾸몄음이 분명한 것이, 표지에 '두당척소' 라 쓰고 그 아래에는 '경연재 심장' 이라 적고 있다(임창순 소장). '두당' 은 고람의 별호였다. 이 서첩에는 당시의 그림 값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밝혀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특히 흥미롭다.
"(보내온 그림의) 8폭은 보잘 것이 없다. 살 것이 못 되나 40냥 부른 것을 수차 흥정하여 24냥까지 내려갔는데, 그 이하는 나로선 다시 얘기하기가 어려우나 원한다면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설재의 그림은 값이 15민(냥)이라는데 주인이 도로 찾고 있다(경연재가 가져갔던 듯). 도로 보내라. 그림도 그다지 좋지 않다. 모처(추사나 우선 같은 최고의 안목인을 가리킨 듯)에 감정을 의뢰했다간 코웃음을 받을 게다....요새 들으니 구리개(지금의 서울 을지로) 이첨정 집에 서화 수십 종이 있다는데 들은 적이 있는지? 가서 보고 싶다. 볼 길이 없을까."
역매가 역관으로서 청나라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람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천재의 생애를 마치기 1년 전인 1853년의 일이었다. 이후 1879년에 4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10여 회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했고, 그러는 동안 중국의 서화·골동품·금석문 탁본 등을 무수히 수집해 가지고 옴으로써 서울의 서화가와 교양인 사회의 중국문화 접촉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그는 저쪽의 새로운 문명서적들도 계속 가져옴으로써 이 땅의 개화사상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역매는 그의 교양생활의 중심이었던 귀한 서화 컬렉션을 더불어 감상하고 즐겨주었어야 할 고람이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는 사실에 고독을 금치 못했던 것 같다.
만년에 남긴 문집 (천죽재차록)에서 역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계축년(1853년)부터 갑인년(1854년)에 걸쳐 비로서 연경에 원유하게 되면서 여러 박아지사와 교유하고 견문을 더욱 넓히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원·명 이래의 서화 110여 점을 구득하게 되고 삼대, 진·한의 금석문과 진·당의 비첩도 또한 수백 점을 모았다. 비록 당,송의 진적을 얻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압록강 이쪽에서는 자랑할 만하다. 내가 이것들을 얻는 데는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고, 또 그것들이 천만리 밖에서 모아들인 것이니 마음과 정신을 크게 쓰지 않았던들 참으로 쉽사리 얻을 것이 못된다. 나와 같은 벽을 갖고 있던 사람이 전기 공이었는데, 불행히 일찍 죽어서 내가 수장한 것을 미쳐 보지 못하였다. 죽은 그를 다시 살려서 같이 토론하며 감상할 수 없을까. 이것을 쓰면서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청나라를 드나들던 초기인 1858년에 역매는 저쪽의 금석학 연구가인 유희해의 (해동금석원)과 추사의 (금석과안록)에 자극을 받은 듯 금석학 취미와 각별한 관심으로 (삼한금석록)이라는 자그만한 책자를 엮었다(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내용은 추사가 이미 독자적으로 발견하고 고증하여 그의 (금석과안록)에 기록한 '신라 진흥왕 정계비' 와 역시 추사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고증한 바 있는 '평양 성벽석각' 등의 국내 금석문을 원문으로 모으고 거기에 약간의 해설과 청나라 및 국내학자들의 논평을 곁들인 것이었다. 당시 역매의 나이 28세였다. 역매의 (삼한금석록)에 처음으로 기입된 '평양 성벽석각' 금석문은 추사가 44세 되던 해인 1830년에 묘향산을 탐승하고 돌아오다가 평양의 옛성벽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그의 예리한 고증학적 안목은 성벽에 끼어져 있던 깨진 옛 석각편에서 '물하소형' 등 마멸이 심한 20자 내외의 글자를 판독했을 뿐인데도 자체의 고법과 단편적인 고구려의 관직명을 들어 '틀림없는 고구려의 금석문' 이라고 갈파했었다. 그런데 이 '평양 성벽석각' 은 그후 언제 어떤 경위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의 성벽에서 떼어져 서울로 운반되었다. (삼한금석록)을 적을 당시에 역매가 그것을 직접 입수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훨씬 뒤에 위창이 수집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10년대 중엽의 신문기사는 그 귀중한 석각문화재를 위창이 애장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오늘날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금석문인 이 성벽각자는 1965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들어갈 때까지 위창 집안에서 갖고 있었다.
위창은 역매가 수집한 국내외의 풍부한 미술품 컬렉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이 위창이야말로 한국의 서화시와 기타 민족문화재 연구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최초의 근대인물이었다. 그는 서화와 갖가지 진귀한 문화재가 모아져 있는 선택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미의 안목을 높일 수 있었고, 또 혈통적으로 타고난 취미는 그로 하여금 뒷날에 가서 근대적인 서화 연구의 개척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중국 것이 중심이었던 아버지의 수집품에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고 수집한 희귀한 고서화들을 보탬으로써 2대에 걸친 최대의 컬렉션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서화만을 높이 사려고 했던 그전까지의 문화식민지적인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이 땅의 민족 서화사 기록들을 가능한 모든 문헌에서 찾아내어 정리하는 한편 유존하는 고서화들을 파악 혹은 수집,보호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선각적인 민족사관과 주체의식은, 수집가이자 개화파의 외교관으로 대원군의 쇄국세력 밑에서 박규수 등과 개국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성공시킨 배후의 주역자였던 아버지 역매의 행동적인 사상에서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자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국의 서양문화재와 기타 모든 문화유산에 대한 근대적인 재인식과 민족적 자부는 전적으로 위창 오세창의 학구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싹텄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새로운 사상과 견식의 성장기였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