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4호 2023.11.01 수요일(음력 : 09.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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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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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한번 쓰다듬어 주면 계속해서 내내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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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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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되돌려주기
이상야릇한 이야기. 비슷한 말로 ‘유언비어’, ‘뜬소문’, ‘가짜뉴스’, ‘허위사실’이 있다. ‘괴담’은 언제나 있었다. 1914년 8월1일 매일신보엔 ‘경성의 도깨비 이것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는데, 그 한 대목을 읽어볼작시면 이렇더라. “매일 밤 열한시나 자정이면 광희문 밖 정류장에 어떤 젊은 여성 하나가 괴이한 행동으로 차에 올라탔다가 차장이 돈을 받으려고 하면 갑자기 사라진다고 한다. 그는 서양식 여학생 복장을 하고 있고 늘 청량교 정류장에 내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광희문 밖에서 타고 청량교에서 내리는 일이 하도 괴이하여 차장들 사이에서 도깨비장난이라는 말이 낭자하다.”(신출귀몰하는 상습 무임승차자였나 보군.)
시인 김지하는 1972년 ‘창조’ 4월호에 ‘비어’(蜚語)(맥주, 아니다)를 발표한다. “지치고 처지고 주리고 병들고 미쳐서 어느 날 노을 진 저녁때 두 발을 땅에다 털퍼덕 딛고서 눈깔이 뒤집혀 한다는 소리가 ‘에잇 개같은 세상!’ 이 소리가 입 밖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철커덕 쇠고랑이 안도(安道)놈 두 손에 대번에 채워지고 질질질 끌려서 곧장 재판소로 가는구나. 땅땅땅― 무슨 죄던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아가리로 유언비어를 뱉어낸 죄올시다. 호호 큰 죄로다.”(시인은 체포된다. 박정희는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긴급조치를 내린다.)
항간에 떠도는 괴담이 있다. “녹아내린 핵연료와 뒤섞인 물을 바다에 아무리 갖다버려도, 어머니 품처럼 넓디넓은 바다는 모든 걸 정화해 주니 아무 문제가 없다.”
괴담은 불안과 불만에서 나온다. 어두운 골목에서 피어오른다. 그런데 요즘엔 권력자와 엘리트들의 입에서 나온다. 그들은 무엇이 불안하고 무엇에 불만인 걸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내 부인’이 돼 달라고?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되는 여자’, 즉 ‘아내’를 이르는 말에는 ‘안사람, 집사람, 처, 마누라, 부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가리키는 대상은 같지만 쓰임새가 조금씩 다르다.
‘아내’는 특별히 낮추거나 높이는 뜻이 없어 가장 편하게 쓸 수 있는 말이다. ‘처’는 20여년 전만 해도 흔히 쓰는 말이었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팔순이 넘은 어느 노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미 1960년대에도 ‘처’는 ‘머리를 쪽 찌고 치마저고리 입은’ 구식 아내를 연상케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아내를 ‘제 처’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점잖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안사람, 집사람’은 아내를 남 앞에서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지만 아내의 역할이나 활동 공간을 집안에만 한정하는 듯하여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누라’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적어도 중년 이상의 아내에게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에는 상대를 약간 낮잡는 느낌이 있다.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자기 아내를 허물없이 가리킬 때 ‘마누라’를 흔히 쓴다. 이 말은 어떤 상황에서 쓰느냐에 따라 정답게 들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내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므로 가려 쓰는 게 좋겠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나이든 아내를 함부로 대했다간 노후가 편치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부인’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므로 자기 아내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 우리말에서는 나와 가까운 사람을 남 앞에서 높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언어 예절이다. 아내를 존중해 주는 것은 좋지만 ‘우리 부인’ ‘내 부인’ 등으로 쓰는 것은 잘못이다. ‘청혼가’라는 가요의 노랫말에 ‘네가 나의 부인이 돼줬으면 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때 ‘나의 부인’도 ‘나의 아내’로 해야 맞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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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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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 비밀 - 한용운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습니다.
심의도 짓고, 포도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습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는 것 뿐입니다.
그 주머니는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습니다.
짓다가 놓아두고 짓다가 놓아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이 아프고 쓰런 때에는 주머니에 수를 놓으려면,
나의 마음은 수놓는 금실을 따라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넣을 만한 무슨 보물이 없습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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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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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
遠:멀 원. 水:물 수. 不:아니 불. 救:구원할 구. 近:가까울 근. 火:불 화.
[출전]《韓非子》〈說林篇〉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는 뜻으로, 먼 데 있으면 급할 때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
《한비자(韓非子)》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노(魯)나라 목공(穆公)은 아들들에게도 진(晉)나라와 형(荊)나라를 섬기게 했다. 그 무렵 노나라는 이웃 나라인 강국 제(齊)나라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위급할 때 진나라와 형나라 같은 강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속셈에서였다. 목공의 그런 속셈을 이서가 간했다.
“사람이 물에 빠진 경우, 먼 월(越)나라에서 사람을 청해다가 구하려 한다면 월나라 사람이 아무리 헤엄을 잘 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사오며, 또 집에 불이 난 경우, 발해(渤海)와 같이 먼바다에서 물을 끌어다가 끄려 한다면 바닷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때는 역시 늦사옵니다.
이처럼 ‘먼 데 있는 물은 가까운 곳에서 난 불을 끄지 못한다[遠水不救近火]’고 했듯이 노나라가 이웃 제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먼 진나라와 형나라가 강국이긴 해도 노나라의 위난은 구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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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11.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Aphrodite, Venus)는 그리스의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후기 로마인이 이탈리아의 여신 비너스와 동일신으로 융화하여 숭배하였다. 아프로디테의 출생을 둘러싸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가 우라노스의 딸이라는 설로, 크로노스에게 참패하여 거세된 우라노스의 남근이 바다에 던져지자 거품에 싸인 우라노스의 씨들에서 탄생하였다 한다. 또 하나는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이라는 설이다. 아프로디테가 바다에서 나오자 곧 바람의 신 제퓨로스가 큐테라를 거쳐 동쪽 키포로스 섬 해안으로 데려갔고, 이 곳에서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환대하여 옷을 입히고 치장시켜 영생하는 신족의 거처로 인도하였다. 루키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를 처음 데려온 것은 네레우스였다고 한다. 후에 플라톤은 아트로디테를 두 가지 성격을 지닌 여신으로 규정하였는데, 즉 우라노스의 딸인 아프로디테는 천상의 사랑의 여신, 디오네의 딸 아프로디테 판데미아는 일반 서민의 여신으로 구분하였다. 신화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는 철학적 견해다.
아프로디테에 관한 일화는 상당히 많은데, 서로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고 여신의 성격상 개별적으로 색다른 역할들이 추가된 것이다. 아프로디테는 렘노스 섬의 절름발이 신 헤파이스토스와 결혼하였지만 전쟁의 신 아레스와 정을 통하였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태양신 헬리오스가 어느 날 아침 두 연인의 뜨거운 관계를 목격하고 이를 헤파이스토스에게 일러 바쳤다고 한다. 이에 헤파이스토스는 마법의 망을 쳐 둔 후 출타할 일이 있다며 집을 떠났다. 아프로디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레스를 불러들여 동침하는데 이를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헤파이스토스가 부정을 저지른 두 신을 망으로 씌워 놓고 올림포스의 신들을 불러들이니 모두 이 흥미진진한 모습에 야유를 보내고 재미있어 하였다. 헤파이스토스는 포세이돈의 간절한 요청을 받고서야 망을 걷었고 아프로디테는 창피하여 키프로스로 도망갔다. 아프로디테는 아레스와의 사이에 에로스, 안테로스, 데이모스(공포), 포보스(두려움) 및 하르모니아를 낳았다.
아프로디테의 연애행각은 아레스에 한하지 않았다. 디오뉴소스와 관계하여 프리아푸스를 낳았으며, 헤르메스의 사랑고백을 듣고 하룻밤을 지낸 후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낳았다. 또한 색다른 일화도 있다. 파포스 왕 키뉴라에게는 뮤라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자신의 아비를 사랑한 나머지 아비가 만취한 틈을 타 동침하고 대단히 귀여운 아도니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된 아비가 딸을 죽이려 하자 아라비아로 달아나 뮤르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페르세포네에게 돌보게 하였는데 페르세포네가 아이를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아프로디테는 제우스에게 호소를 하니, 1년을 3계절로 나누어 한 계절은 페르세포네, 또 한 계절은 아프로디테와 지내고 나머지 계절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지내도록 해 주었다. 아도니스는 이 결정에 따라 페르세포네와 한 계절을 지내고는 나머지 두 계절은 아프로디테와 지냈다. 그런데 사냥을 좋아했던 아도니스는 결국 멧돼지에 받혀 죽고 말았고, 비통함을 이기지 못한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아네모네 꽃으로 화신시켰다. 일설에 아프로디테가 아도니스를 너무 사랑하는 데 질투를 느낀 아레스가 죽였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페르세포네가 상처입은 아도니스를 다시 살려내어 반년은 자기와, 나머지 반년은 아프로디테와 지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이밖에 트로아스(수도는 트로이)의 이다 산에서 안키세스와 사랑을 나누고 두 아들 아이네아스와 류르노스를 두었다.
아프로디테는 분노를 폭발시켜 저주를 내리기도 하였다. 그 중 자신의 연인 아레스와 사랑에 빠진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벌주기 위해 에오스의 연인 오리온에게 격정을 갖도록 사랑의 열기를 불어넣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또한 렘노스 섬 여인들이 사랑의 신인 자신을 숭배하지 않은 데 분노하여 이들에게서 고약한 악취가 나게 함으로써 남편들이 이 여성들을 버리고 트라키아의 노예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맹랑한 렘노스 여인들은 섬에 있는 남성을 모조리 죽이고 여인천하를 만들었고 후에 아르고 호 대원들이 들어오고 나서야 아들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아름답고 친절함의 대명사로 알려진 아프로디테에게는 잘 어울릴 성 싶지 않는 다른 이름들도 있다. 예컨대 그녀를 '삶 속의 죽음'의 여신이라고도 하며, 아테네에서는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의 가장 맏언니 또는 복수의 여신 에리뉴에스의 자매라고도 한다. 다른 곳에서는 검은 여신이라는 뜻의 멜라이니스 혹은 암흑 속의 여신이라는 뜻의 스크티아라고도 불렀는데, 파우사니아스의 풀이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랑의 교제가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플루타르크는 심지어 무덤의 여신이라는 뜻의 에피튬브리아라고 불렀는데 사랑의 종말이 죽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아프로디테 여신의 친절도 여신의 분노나 다를 바 없이 위험하였다. 불화의 여신 아레스는 황금사과를 내놓고 헤라, 아테나 및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주겠다고 충동질하여 갈등의 씨를 뿌렸다. 제우스는 헤르메스를 시켜 세 여신을 트로아스의 이다 산에 모이게 한 후 양치기로 있는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판가름을 내게 하였다. 세 여신은 각기 어마어마한 선물을 약속하며 파리스의 환심을 사고자 했는데, 천하의 아름다운 처녀 헬레나를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가 사과를 넘겨받았다. 이것이 트로이 전쟁의 씨앗이 될 줄이야! 전쟁중 아프로디테는 트로이를 지원하고 특히 파리스를 도와주었다. 메넬라오스와 단둘이 붙어 싸우다 패하게 될 찰나 위기에서 파리스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아프로디테이며 그 결과 전쟁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마찬가지로 트로이 쪽의 아이네아스도 돕는데, 디오메네스에게 죽음을 당하는 순간 아이네아스를 구하고 자기 스스로 상처를 입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수호에도 불구하고 트로이 시의 함락과 파리스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트로이 민족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데는 성공하여 아이네아스와 그 부친 및 아들이 불타는 트로이를 탈출하여 신천지에 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은 모두 아프로디테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로마인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보호신으로서 각별히 모시게 되었다.
원초적으로 아프로디테는 생식과 풍요의 여신인데 시문에서 성의 본능과 사랑의 위력으로 화신시켜 표현하였다. 결혼 예식도 주관하였는데 이때 키프로스의 아프로디테는 수염을 가진 남성형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결혼은 헤라 여신의 영역이다. 코린트에서는 매음의 보호 여신으로도 숭배하였고, 키프로스의 도시 파포스에 있는 여신의 신전은 찬란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예배날에는 수천 군중이 모여 축제를 벌였다. 또한 우라노스 혹은 아레스와 합동으로 숭배하는 곳도 있고 항해 또는 전쟁의 여신으로 모시는 스파르타, 아르고 및 코린트의 신전 경내에는 무장한 여신상이 서 있다. 로마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가문 율리우스의 선조신으로 비너스 여신을 모시기 위하여 장대한 신전을 봉헌하였다. 비너스는 원래 전원 혹은 뜰의 여신인데 아프로디테도 같은 성질의 여신으로 모신다. 신화에서 아프로디테는 아주 드물게 자신의 마법 허리띠를 딴 여신에게 빌려주는데 이 허리띠를 차고 있으면 상대가 마력에 걸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프로디테 여신이 좋아하는 새로는 비둘기, 백조, 제비 등이 있고 여신이 탄 이륜차는 비둘기 무리가 끌었다. 꽃 중에서는 장미과 도금양(MYrtaceae)꽃을 좋아했고 여신에게는 비둘기를 공양하고 향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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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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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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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든 고뇌는 혼자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복잡한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다. 몹시 소중하고 귀중한 것들을 삶 속에 묻어 둔 채 우리는 그곳을 지나온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마음의 평화를 누린다.
22
참을 수 없는 것으로부터 인내하는 방법을, 수다스러움으로부터 침묵하는 방법을, 불친절로부터 친절함의 방법을 배우라. 행복과 불행이 반반의 확률일 때 천성이 우울한 사람은 불행한 결말을, 쾌활한 사람은 행복한 결말을 예상한다. 우울한 성격의 사람은 열 가지 계획 가운데 아홉 가지가 성공하면 성공한 아홉 가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실패한 한 가지 일에만 집착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 그러나 쾌활한 사람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행복과 불행을 받아들이는 성향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한다. 인생을 행복한 것으로 만드는 몫은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23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실재로 자기 자신을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그러나 그는 내가 모르고 있는 불행 때문에 나보다 더 불행할지도 모른다. 재난을 당했을 때, 가장 좋은 위로는 나보다 더한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돌아보는 일이다. 질투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서 나를 위로할 때, 우리는 그 일을 통해 커다란 위안을 얻을 수 있다.
24
사람들이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이유는 자신보다 나은 처지의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자신보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비참함을 돌아보게 된다. 모든 불행의 시작은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 지구상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들, 한 끼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 그들도 역시 그대의 주변에서 그대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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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분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한다. 똑같은 태양도 추울 때에는 온몸을 따스하게 녹여 주는 고마운 존재지만 더운 여름에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바뀌어 버린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과 사건이지만 그것을 바라볼 때의 기분에 따라 판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는, 그것을 당신이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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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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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욕망 - 마르틴 콜랭
제 2 부
정념, 학문의 새로운 대상
제2부
정념, 학문의 새로운 대상
인간은 자연 전체와 신에 대해 똑같은 결론을 내린다. 만일 신이 어떤 목표를 갖고 행동하고 이러한 목표가 바로 인간이라면 신은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보다 우월한 자리와 지위를 부여한 것이 된다. 신의 목적을 수행하는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보편적인 관할 속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신은 그 관할 중앙에다 인간의 선택적 여지를 마련해 놓고는 이것을 창조의 조건과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법칙에 복종하는 기계장치와 같을 수 없는 신의 권능을 반영하는 힘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지 않고 오히려 그 중앙을 차지한다.
인간과 신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스피노자가 볼 때에는 모든 편견의 원천으로서 인간의 눈을 멀게 하여 자연에 대한 또 인간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이 인간중심주의가 자유라는 환상의 뚜껑을 여는 열쇠이다. 만약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고 세계와 인간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욕망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의 본능적 욕구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겁쟁이는 도망가지 않고 어린 아이는 젖을 달라고 칭얼거리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여 알 듯이 인간이 언어를 갖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은 없으며 자신의 욕구를 지배하는 것보다 다 힘든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돌멩이가 낙하하거나 낙하를 멈추는 것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도 다른 모든 사물처럼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가? 만일 인간이 신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법칙들에 의해 존재하도록 정해지고 계속 존재해 온 것이라면, 그 법칙들은 인간본성에 특유한 것이 아닐까? 어떻게 해서 인간이 그 법칙을 알고 그러므로써 자신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지?
욕망이 그 자체의 원인이 아니다: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행동하게끔 결정하는 원인,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것을 탐할 때의 동기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욕망에 가득 찬 인간은 자기가 바람직하다고 여겨 그 대상을 향해 접근해 가는 자신의 욕망과 그 욕망의 원인들을 혼동하여 인식한다. 인간은 자신이 욕망을 느낀다는 것은 알면서도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욕망이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의 욕망 실제로는 미지의 메카니즘의 산물인 이 자신에 기인한다고 즉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정한 철학은 이렇게 가르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필연성을 가지고 존재하며 사물들 사이에는 정해진 관계가 있어 자연 전체의 명령에 따라 서로 연계되어 있다. 철학자는 인간만이 자연 전체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것은 인간에게 특수한 운명이 주어진 덕택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상상이란 자연의 질서를 모르고 오해하는 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의가 아닌 행동을 경험해서 알 듯, 신체의 모든 움직임을 추징하고 통제할 수는 없다. 자유의지를 모르거나 아니면 편드는 사람은 육체가 자율의 여지를 갖는 기계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발적이고 자유로운(즉 육체의 운동과는 무관한) 영혼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이러한 논리는 데카르트의 논리로서 삼중 대응관계를 제기한다. 우주에 있어서의 신, 자연의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인간, 육체에 대한 영혼은 모두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힘으로서 우주와 자연, 육체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스피노자는 육체와 영혼의 본성 그리고 이 두가지의 결합체의 본질에 대하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 영혼은 육체가 갖는 관념이다
스피노자의 말에 따르면 영혼은 육체가 갖는 관념이다. 이 황당하고 매우 혁신적인 제안은 육체를 그 총체로서가 아닌 이러저러한 감정들로 간주할 때 설명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영혼은 이러한 감정에 해당하는 관념들을 갖게 된다. 그래서 육체가 고통을 받을 때엔 두려움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고 육체가 만족을 느낄 때엔 쾌락이라는 관념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육체의 각 감정은 영혼의 각 관념에 대응한다. 육체(다시 말해서 생겨났다 소멸하는 일련의 감정들)는 영혼이 갖는 관념의 대상이며 감정의 관념들 총체이다. 이러한 대응 영혼과 육체간의 평행관계는 그들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다. 영혼은 육체의 감정을 관념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지만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영혼과 육체는 동시에 존재하고 동시에 소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혼이 육체의 관념이라고 했을 때, 육체가 없어지면 관념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 동시적인 평행관계는 또 다른 중요한 결론을 갖는다. 바로 관념은 그 관념의 대상을 반영하고 그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반영하여 나타낸다. 슬픈 감정(육체의 괴로움)에 슬픔의 관념(영혼의 괴로움)이 해당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은 육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육체는 방해가 되거나 무질서를 만들어 내기는 커녕 영혼의 자연적인 풍요로움을 생성시킨다.
"육체가 다른 것들보다 더 쉽게, 동시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행동하고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이 육체의 영혼은 다른 것들보다 더 쉽게 동시에 여러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
정념과 부적합한 관념
결론적으로 영혼의 힘은 육체의 힘을 능가하지 못하며 이 둘 사이에서 하나는 다른 하나를 지배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이 정념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육체가 정념인 감정에 지배된다면 영혼은 단지 부적합한 관념, 다시 말해서 손상되고 혼동된 관념만을 형성한다. 영혼은 감정을 받아들이지만 감정을 유발시키는 동기까지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감정의 동기는 감정을 받아들이는 육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육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념의 부분을 줄이고 행동의 부분이 늘어나도록 해야 한다. 영혼이 적절한 관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육체는 행동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여야 하며 결과적으로 육체에 의한 행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영혼의 의사란 다름 아닌 본능적 욕구 자체이며 이것은 육체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모든 처신을 한다. 모순되는 감정들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영혼의 의사와 욕구 육체의 결정들이 본래부터 같이 존재하는 것임을 명백히 증명한다"
스피노자, "윤리학"
인식에서 오는 자유
- 인간의 예속
인간이 계속된 여러 감정들로 동요를 느끼며 그의 인생과 사고를 이성적으로 이끌어 가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로서 스피노자는 이를 예속 상태라고 부른다. 스피노자의 견해는 데카르트의 것과 일치한다. 그는 하나의 정념이 다른 정념들을 쫓아낸다고 보고 하나의 감정은 이 감정과 모순되고 훨씬 더 강한 것에 의하지 않고서는 축소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의 예속 상태는 그가 수동적으로 재현하는 감정들의 흐름에 묶여 있으며, 그 스스로는 적합한 관념을 형성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계속 무지한 한, 인간은 선과 덕행을 권고하는 것이 공허하고 무상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곧 인간이 자신의 정념에 구속된 채 살도록, 자신의 육체의 기본에 따라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말인가? 욕망은 악한 것이 아니지만 슬픔은 악하다. 왜냐하면 영혼은 슬픔에 대해 완전히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두 개의 모순되는 양태로 표현된다. 육체가 받아들이는 감정에 따른 슬픔과 기쁨이 곧 그것이다. 기쁨은 육체의 행동능력을 증가시키고 슬픔은 반대로 이것을 감소시킨다. 이 감정들이 인간의 존재를 계속 유지시키는 데 도움을 주거나 방해를 한다. 슬픔에서부터 생겨난 욕망들은, 인색함과 음주벽처럼, 외부적 원인들을 인정하고 혼란한 관념에 해당한다. 이 혼란한 관념은 욕망의 원인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인간을 불안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반대로 인간을 이성의 지시에만 따르도록 하려는 욕망의 확고함은 기쁨을 가져온다. 기쁨이란 슬픔과 대립하면서 사고능력과 행동능력을 증가시키는 확실성의 정념이다. 기쁨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작동된 욕망은 자신을 결정짓는 원인들을 지배하며 그의 고유한 목적을 추구한다. 이 목적이란 계속적인 존재의 유지(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본능과 일치한다)뿐만 아니라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 욕망, 이성, 자유
그러므로 인간이 정념에 예속된 것은 운명적으로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다. 예속으로부터자유로워지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인간은 자유롭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은 채로 태어났지만 그렇게 될 수는 있다. 이성의 힘에 의해 정복되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이다. 스피노자의 초기 저서 중의 하나인 "오성개혁론"에서 제기된 문제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어떻게 삶을 변화시킬 것인가?" 현실의 삶과 추상적인 이상을 바꾸어 생각한다면 규범은 인간들 위에서 전혀 통치기능을 갖지 못하며 인간은 본보기에 맞춰 순종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성은 자연에 모순된 것은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성과 정념이 서로 싸운다고 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욕망이 반드시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욕망은 융성하고 명철해져야 한다. 즉 스스로 사고해야만 하는 것이다. 욕망이 맹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은 단지 정념에 빠졌을 때에 그렇다. 그럴 경우에는 만족을 찾아 헤매면서 자주 슬픔과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정념에 눈이 먼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행복감은 한 순간뿐이며 뒤따른 슬픔으로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욕망과 이성이 동시에 협력하여야 하며 실수나 슬픔과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쫓아내야만 한다. 기쁨이란 우리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며 서로 융화된 욕망과 이성에의 확신이다.
- 윤리와 정치
각 개인에게 계속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은 종종 그 자신과 갈등을 일으킨다. 사회나 공동체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러한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대립만을 할 뿐이다. 개개인들간의 분열은 개인의 분열 상태와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이성에 의해 영위되는 삶의 통합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에도 해당된다. 이러한 통합이 사회적, 정치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인간들은 정념이라는 감정에 지배되는 한 성격상 서로 다를 수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인간내에서도 변화와 변덕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정념은 인간을 분열시키며 오직 이성만이 인간을 통합시켜 준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정치에까지 연장시키는 것을 "윤리학"속에서 볼 수 있다. 이성은 개인을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며 유일하고 동일한 운동으로써 무지와 정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나아가 감정적, 이념적, 혹은 정치적인 모든 반발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완만한 작업을 인간 전체가 추구하도록 한다.
결론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은 자신을 인식하려는 노력과 혼동되어진다. 그래서 욕망은 인간의 실제적이고 개별적인 본질과 일치한다. 이 욕망은 본래가 이성적인 것이 못되므로 노력을 표현하는 환상적, 착란적인 표상 속에서 인간을 소외시킬 수는 있지만 그 힘은 훼손되고 축소된다. 정념에 빠진 인간이란 소외되고 쇠약해져서 결국 보잘것 없어진다. 자유로운 인간이라야 힘을 증강시키며, 이성을 지니고서 충분한 노력을 행사할 수 있다. 결국 진정한 인식이란 기쁨인 것이다. 우리의 행동능력은 이럴 경우 우위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사건 행위의 모든 원인이 되며 실제로 우리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그에 대한 욕망은 더욱더 강해진다. 그러므로 철학은 인간이 이성의 절정에까지 고양되어지고 힘의 관계를 자기에게 유리하게끔 바꾸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감정들을 이용하면서도 더 이상 그것들의 노예가 되지 않게 된다. 자유란 인식의 결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본질인 욕망의 억제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윤리학"의 훌륭한 마지막 명제가 이를 증명해 준다.
"만족감이란 덕행의 댓가가 아니라 덕행 자체이며, 감각적 욕구를 억제하는 데서 환희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환희가 우리의 감각적 욕구들을 억제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덕행은 그의 고유한 본성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다름 아니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고유한 본성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1도 덕행의 원리는 인간 자신이 존재하기 위한 노력 그 자체이고, 행복감이란 인간이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2도 덕행은 자기 스스로가 본능적 욕구를 가져야 한다. 덕행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나 더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덕행에 대해 본능적 욕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외부의 사물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또한 이들과 아무런 교류도 없이 우리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다른 측면에서 인간 영혼을 고려해 볼 때, 만약 영혼이 유일한 것이고 영혼 자신을 벗어나게 되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할 때, 우리의 오성은 더욱 불완전해질 것이다. 우리의 외부에는 우리에게 유익한 사물이 수없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욕구를 가져야 한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 인간의 본성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사유로써 창조해 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완전히 동일한 본성을 가진 두 개인이 서로 결합하게 되면 그들은 각각 떨어져 있을 때보다 두 배로 강력한 힘을 갖는 한 개인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 인간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
스피노자,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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