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3호 2023.10.18 수요일(음력 : 09. 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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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급의 인간은 제1급의 인간을 고용한다. 제2급의 인간은 제3급의 인간을 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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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게 도둑질
날이 밝으면 어제와 다른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처럼. 하지만 현실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제자리걸음.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숙명이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붙이는 이름인가 보다.
‘배운 게 도둑질’이란 말에는 지금까지 해온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현실인식이 담겨 있다. 자기 일에 대한 겸손함의 표현이자 삶의 일관성을 부여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그릴 수 있는 원의 반지름은 여기까지! 배울 수 있는 게 한둘이 아니건만, 하필 도둑질이라니. 말이란 참 짓궂다.
도둑질은 직업인가 버릇인가. 물건을 훔치되 잡히지 않으려면 섬세한 기술을 갈고닦아야 한다는 점에서 전문성(?)을 인정해 줘야 할지도 모른다. 약간의 ‘요령’만 있으면 되는 주먹질, 싸움질, 이간질, 걸레질, 망치질과 사뭇 다르긴 하다.
‘도둑질’이란 말에서 풍기는 부정적 느낌을 잠시 접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내가 배운 ‘도둑질’은 무엇인가? 살갗처럼 내 몸에 붙어 있어 떼어낼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나도 회사원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천성이 게을러서 정시 출근과 정해진 업무를 반복하는 게 싫어 그만두었더랬다. 그때 낮게 읊조렸었지. ‘내가 배운 도둑질은 기껏 선생질인가’.
자기 생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분간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혜롭다. 다만, 과거에 사로잡혀 지레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숙명과 분수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경계 너머로 발 내딛는 용기도 필요하다. 도둑질밖에 배운 게 없는 사람들이 권력의 주변에 몰려든다는 소문을 듣고 드는 생각이다.
부정문의 논리
캬, 이 기발한 문장을 떠올리고 나서 얼마나 안도했을까. ‘오염수 방류의 계획상에 과학적 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우리 정부가 오염수 방류를 찬성 또는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줄여서 ‘문제는 없지만, 찬성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없으니, 찬성한다’거나 ‘문제는 없지만, 반대한다’고 하지 않은 게 이 문장의 묘미.
부정문은 고차원적인 논리 게임이다. ‘ㄱ은 ㄴ이다’ 형식의 긍정문이 어떤 대상에 대한 적극적 판단과 해석을 표현한다면, ‘ㄱ은 ㄴ이 아니다’라는 부정문은 소극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가 아니다’, ‘~이지 않다’,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그것 아닌 모든 가능성을 허용한다. 세상사가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뉘지 않으므로. ‘너를 싫어해’ 대신 ‘너를 좋아하진 않아’라고 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너를 존경해’ 또는 ‘너를 사랑해’라는 ‘반전’을 꾀할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길수록 나는 안전해지고 책임은 옅어진다.
당신도 이런 적이 있을 거다.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지 않을래.”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그 자리에서 사는 사람보다,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더 많다. 돈이 없어서, 비슷한 옷이 있어서, 먼저 사야 할 게 있어서. 판단의 근거는 무한대.
잔머리를 굴려 ‘찬성하지 않는다’는 고급 표현을 썼지만, 그 판단의 근거가 ‘찬성한다’는 뜻으로 읽히기 충분한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들이댄 게 잘못이겠지. 차라리 ‘일본이 오염수 방류를 밀어붙이고 있고 우리는 그걸 막을 힘도 의지도 없지만, 그렇다고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랬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함께 나누며 해양생태계의 궤멸을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말의 실패. 정치의 실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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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때 - 한용운
꽃핀 아침, 달 밝은 저녁, 비오는 밤,
그 대가 가장 님이 기루운 때라고 남들은 말합니다.
나도 같은 고요한 때로는, 그때에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사람이 모여서 말하고 노는 그 때에
더 울게 됩니다.
님있는 여러 사람들은 나를 위로허여 좋은 말을 합니다마는,
나는 그들이 위로하는 말을 조소로 듣습니다.
그때에는 울음을 삼켜서, 눈물을 속으로 창자를 향하여 흘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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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교근공(遠交近攻)
遠:멀 원. 交:사귈 교. 近:가까울 근. 攻:칠 공.
[참조] 누란지위(累卵之危). [출전]《史記》〈范雎列傳〉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정책.
전국 시대, 위(魏)나라의 책사(策士)인 범저(范雎)는 제(齊)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모함에 빠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진(秦)나라의 사신 왕계(王稽)를 따라 함양(咸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진나라는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之危]’고 자국(自國)의 정사를 혹평한 범저를 환영하지 않았다. 따라서 범저는 소양왕에게 자신의 장기인 변설(辯舌)을 펼쳐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소양왕 36년(B.C. 271), 드디어 범저에게 때가 왔다. 당시 진나라에서는 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 양후(穰侯)가 재상으로서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그는 제나라를 공략하여 자신의 영지인 도(陶)의 땅을 확장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안 범저는 왕계를 통해 소양왕을 알현하고 이렇게 진언했다.
"전하, 한(韓)/위(魏) 두 나라를 지나 강국인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득책(得策)이 아닌 줄 아옵니다. 적은 병력을 움직여 봤자 제나라는 꿈쩍도 않을 것이옵고, 그렇다고 대군(大軍)을 출동시키는 것은 진나라를 위해 더욱 좋지 않사옵니다. 가능한 한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위 두 나라의 병력을 동원코자 하시는 것이 전하의 의도인 듯하오나 동맹국을 신용할 수 없는 이 마당에 타국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제나라를 공략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옵니다. 지난날 제나라의 민왕이 연(燕)나라의 악의(樂毅)장군에게 패한 원인도 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초(楚)나라를 공략하다가 과중한 부담을 안게 된 동맹국이 이반(離反)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때 덕을 본 것은 이웃 나라인 한나라와 위나라이온데, 이는 마치 ‘적에게 병기를 빌려주고[借賊兵(차적병)] 도둑에게 식량을 갖다 준 꼴[齎盜糧(재도량)]’이 되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나이다. 지금 전하께서 채택하셔야 할 계책으로는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이 상책(上策)인 줄 아옵니다.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촌토(寸土)이옵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척지(尺地)가 아니옵니까? 이해득실(利害得失)이 이토록 분명 하온데 굳이 먼 나라를 공략하는 것은 현책(賢策)이 아닌 줄 아옵니다.”
이 날을 계기로 소양왕의 신임을 얻은 범저는 승진 끝에 재상이 되어 응후(應侯)에 봉해졌고, 그의 지론인 원교근공책은 천하 통일을 지향하는 진나라의 국시(國是)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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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10. 헤파이스토스
헤파이스토스(Hephaestus, Vulcanus)는 원래 소아시아(동방)의 화산신인데 그리스에 와서 불을 다루는 신으로서 대장간의 신, 부엌의 신이 되었고 로마로 전파된 후에는 화산신 불카누스로 존중되었다. 그는 쇠붙이나 각종 금속을 불에 달구어 무기, 기계, 공예품을 만드는 장인의 신이기도 하였다. 전하는 얘기로는 헤파이스토스는 헤라가 낳아 데려 왔다고 한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그는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인데 추한 외모에 절름발이의 기형이라 헤라가 기겁을 한 나머지 낳자마자 바다로 내던졌다고 한다. 바다에 떨어진 그를 구해 낸 것은 테튜스와 에우류노메로 9년간 바다동굴에서 키웠다. 헤파이스토스는 이 곳에서 야금의 명수 케달리온의 지도를 받아 교묘한 기구를 제작하고 보석을 조탁하는 기술을 익혔다. 다른 설에 의하면 헤파이스토스는 천상에서 다른 신이 키웠는데 제우스와 헤라간에 싸움에서 헤라를 편든 데 대해 화가 난 제우스가 올림포스에서 차냈다고 한다. 아흐레가 걸려 지상에 닿은 그는 마침내 렘노스 섬에 떨어졌는데 그 곳의 주민 신티에스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를 보고 팔을 벌려 잡았다. 그러나 땅에 닿으면서 한쪽 다리를 다쳐 그 후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한다. 렘노스에 자리를 잡은 헤파이스토스는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대장간도 차려 쇠붙이와 공예품, 생활용품을 만들어 냈다. 주민들은 그로부터 근면함과 교묘하고 유용한 기술을 배우고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야만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문명사회를 위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헤파이스토스의 첫 걸작품은 마법의 황금옥좌로, 쇠사슬과 비밀 용수철 고랑이 달려 있어서 그 의자에 앉는 자는 누구든 그대로 묶어 버리는 의자였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멸시한 어미에게 앙갚음을 하고자 이 옥좌를 헤라에게 보냈다. 황금옥좌를 선물받은 헤라는 아무 의심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으나 곧 손발이 쇠고랑에 묶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들이 몰려와 헤라를 옥좌에서 떼어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헤파이스토스만이 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당장 와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아레스는 우격다짐으로 헤파이스토스를 연행하려 하였다가 용광로의 불똥세례만을 받고 돌아왔다. 결국 디오뉴소스가 나서서 헤파이스토스를 포도주로 만취하게 한 후 나귀에 태워 올림포스로 데려와 크게 환대해 주었다. 그래서 모자가 다시 한자리에 만나 화해하게 되었다.
시문에서는 헤파이스토스가 천재적인 솜씨로 여러 가지 걸작을 만들었으며 그 중에서도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인간처럼 그를 옆에서 도와주는 로보트도 만들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또한 제우스의 지시로 인간이 사랑에 매혹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덫이 될 아름다운 낭자를 만들었는데 그 낭자가 바로 지상의 첫 여성이 된 판도라이다. 시칠리아의 큐클로페스는 전속 직공 혹은 대행자로서 헤파이스토스와 함께 제우스의 벼락을 만들고 신이나 혹은 유명한 영웅들의 무기와 갑옷을 제작하였다. 화산이 있은 곳에는 어디나 대장간이 있다고 상상하였는데 특히 시칠리아의 에트나 산 동굴 속 대장간은 유명하다. 헤파이스토스가 인간에게 제공한 제작품 중에서 아킬레스의 무기, 아이네아스 및 헤라클레스의 방패는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카드모스의 아내 하르모니아에게 준 목걸이와 아르고스 및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소유가 된 홀도 이름난 물건이다. 후에 하르모니아 목걸이의 소유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 운명을 지게 되었으나 홀은 아가멤논 사후 카이로네아에 잘 보전되어 신성한 유물로 존중되었다.
헤파이스토스의 사랑이야기는 많지 않다.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에게 그가 원하는 여신이면 어떤 여신이건 결혼시키겠다 하여 아테나를 원했으나 그녀로부터 거절당하였다. 이에 그는 아테나를 우격다짐으로라도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그녀의 다리에 열정의 흔적만을 남긴 채 놓치고 말았다. 당시 아테나는 그 불쾌한 흔적을 털헝겊 조각으로 닦아 낸 후 땅에 내던졌는데 여기에서 에릭토니오스가 태어났다. 제우스는 실의에 빠진 헤파이스토스를 위해 미의 세 자매 중 한 여신인 아프로디테와 맺어주었다. 그러나 정실이 된 이 아프로디테의 부정 행각은 유명하며, 특히 아레스와의 정사 사건이 헬리오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남편인 헤파이스토스는 두 사람의 밀회 현장으로 덮쳐 신들에게 폭로하였다.
헤파이스토스 숭배는 이집트, 아테네 및 로마에서 성행하였으며, 공양하는 희생물은 통째로 구워 바치되 다른 신에서와 같이 희생물을 남겨 놓지 않았다. 그의 상징은 대개 땀에 범벅이 되어 있는 억센 팔로 대장간에서 달군 쇠붙이를 치는 상이며 가슴에 털이 많이 나 있고 검정색 앞이마를 갖고 있다. 또한 절름발이에 기형이며 공중에 올린 망치를 내려치는 상, 또 한 손으로 족집게를 잡고 벼락을 모루(받침쇠)에서 돌리고 있는 상, 그 옆에 한 마리 독수리가 제우스에게 벼락을 가져갈 차비를 하고 있는 상도 있다. 수염이 길고 헝클어진 머리에다 반나상을 하고 또한 작은 모자를 쓰고 있기도 하다. 물키베르, 팜파네스, 클륨토테크네스, 판다마토르, 큘로포데스, 칼라유소다 등의 별칭이 있는데 절름발이이나 전문직을 의미한다. 다른 신에 비해 엉뚱한 방식으로 천상에 합류한 헤파이스토스는 바람기 심한 아내를 가진 올림포스의 대표적인 오쟁이 남편이며, 아내는 절름발이 흉내를 내면서 밀통한 연인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 기욤 쿠스투 1세의 〈대장간의 헤파이스토스〉 (루브르 박물관) ]
다이달로스
다이달로스(Daedalus)는 아테네의 헤파이스토스의 후손 에우팔라모스의 아들로 그리스 전설상 가장 천재적인 장인이자 발명가로 알려져 있다. 건축에 쓰이는 쐐기, 도끼, 송곳, 수평기, 톱, 다림줄(먹통), 아교 등을 발명하였으며 배의 돛과 돛대의 역할을 인식한 최초의 인간이었고, 그가 만들어 놓은 조각상은 어찌나 신묘한지 마치 살아 있는 사람같았다 한다. 여동생의 아이 탈로스를 수습공으로 삼았는데 뛰어난 학식과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어 생선 등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쇠톱을 만들고 컴퍼스를 발명하였다. 이에 소년의 재능을 시기한 다이달로스는 그를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밀어뜨려 죽게 하였다. 아테나 여신이 이 소년을 수습하여 낮은 곳만 나는 자고새로 화신시키니 소년은 그 후 페르딕스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탈로스를 죽인 후 그 보복을 두려워한 다이달로스는 크레타로 도피하여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왕비 파시파에를 섬겼다. 그런데 해신 포세이돈이 미노스에게 기증한 우아한 황소에 욕정을 느낀 왕비는 다이달로스가 만든 살아 있는 듯한 암소모형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떼와 함께 섞여 암소로 착각한 황소와 교접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황비가 낳은 소산이 바로 우두인신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이다. 미노스는 다이달로스에게 미궁을 짓게 하여 미노타우로스를 여기에 유폐시키고 다이달로스와 그 아들 이카로스도 마찬가지로 미궁에 가둬버렸다. 미노스 왕은 왕비의 비행을 방조한 그의 행위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이달로스 부자는 육지와 바다가 엄히 감시당하고 있었으므로 공중을 통해 탈출하기로 하고 깃털 두 쌍의 날개를 만들어 반복연습을 한 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아들 이카로스는 아비의 주의를 잊고 사모스 섬 근방에서 너무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에 깃털을 붙인 왁스가 녹는 바람에 떨어져 추락해 버렸다. 이카로스는 미노스의 여자노예 나우크라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혹은 아테네에서 같이 도피해 왔다고도 하는데, 그를 깊이 사랑했던 다이달로스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그 곳을 아들의 이름을 따 이카리아 섬, 이카리아 해라고 명명하였다.
그 후 다이달로스는 시칠리아로 가서 그 곳의 왕 코칼로스의 환대를 받았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그를 잡기로 마음먹고 시칠리아로 가서, 고동껍질에 실을 꿰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준다고 선언하였다. 시칠리아 왕은 그 일을 해 낼 수 있는 딱 한 사람이 왕궁에 있다고 말하였고, 미노스의 생각으로는 이를 해낼 수 있는 그 영리한 자가 바로 자신이 찾은 죄수일 것이라 짐작하였다. 코칼로스는 과연 이 고동을 망명해 온 다이달로스에게 가져갔다. 다이달로스는 궁리 끝에 고동 끝 부위에 아주 작은 구멍을 낸 후 거미줄을 매단 개미를 구멍으로 집어넣고 고동의 입구에는 꿀을 발라 놓았다. 아니나다를까 개미는 단맛이 나는 곳을 향하여 나선통로로 바삐 달려갔다. 다음에는 같은 방식으로 실을 매단 개미를 통과시켜 어려움은 있었지만 실을 고동에 넣는데 성공하였다. 기쁨에 넘친 코칼로스는 이를 급히 미노스에게 가져가 보였다. 그러자 미노스는 그 일을 해낸 자는 틀림없이 자신의 죄수인 다이달로스일 것이니 그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요구를 받은 시칠리아 왕은 매우 화가 났으며 또한 그간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고 친근한 사이가 된 왕의 딸도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다이달로스에게 크레타의 왕이 왔음을 알리고 괴롭히는 미노스를 함께 없애 버리기로 모의하였다. 이에 궁의 목욕탕 천장에 수로를 설치하고 미노스가 사치스러운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 보이지 않게 가려 놓은 수로를 열어 끓는 물을 분출시켰다. 결국 미노스는 질식하여 열탕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어 계획대로 비통한 사고사처럼 가장하고 엄숙한 장례를 치른 후 왕릉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일설에는 크레타로 운구하였다고도 한다. 다이달로스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여 시칠리아에 여러 작품과 기념물을 남기고 그 후 사르디니아 섬으로 가서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위대하고 천재적 장인으로 그 이름을 길이 남겼으며, 다이달로스라는 이름 자체도 '교묘하고 정교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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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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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16
우리에게는 인내하면서 주위를 둘러볼 수 있는 마음의 평안이 필요하다. 마음이 평온하지 않다면 행복은 절대로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모든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불행이 다가오기도 전에 걱정부터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가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현재의 일을 주저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미래의 불행은 불확실한 것이지만 현재의 행복은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평온한 마음은 현재의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미래의 불행 때문에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17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즐겁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 중에도 언제나 우울하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재물이 행복의 척도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오히려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음의 여유는 행복과 직결되지만 재물은 마음의 안정보다는 그 재물이 사라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을 가져온다.
18
고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이득은 진정한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다른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
행복은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하라. 지나친 방탕과 쾌락의 늪으로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라. 분노나 격정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혼란을 피하고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날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섭취하는 음식물에 대한 조절이 필요하다. 인간을 행복하고 불행하게 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사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런 느낌과 인식은 건강을 전제로 할 때 올바를 수 있다. 건강하면 모든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다.
20
플라톤은 인간이 지닌 다양한 성격의 특징을 디스콜로스(음의 기질)와 에우콜로스(양의 기질)로 나누었다. 이것은 행복과 불행을 나누는 근본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성격은 디스콜로스와 에우콜로스의 영향에 의해 형성된다.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떤 사람은 절망의 나락으로, 또 어떤 사람은 극복의 기회로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두 영향에 의한 성격 차이 때문이다. 쾌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에우콜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디스콜로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내면서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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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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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욕망 - 마르틴 콜랭
제 2 부
정념, 학문의 새로운 대상
2. 스피노자 : 감정의 학문
전통철학과는 반대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이성주의의 가장된 형태로조차 욕망의 파괴를 추구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간본성을 만들어 내고 또 실제로 존재하는 인간본성을 훼손시켜 가면서 도덕을 만들어 내는 대신 이 인간본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추구한다. 그 결과 욕망은 인간 경험을 가로질러 헤쳐 나가며 경험을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 인간은 욕망을 갖는 존재이다. 게다가 욕망은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흡사 도전장처럼 들리는 이러한 문장은 스피노자 철학 즉욕망의 철학이며 이성의 철학이 독창적임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지만 영혼과 육체의 관계, 인간본성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심한 이론적 개조는 감정의 진정한 학문을 이룩하게 만들었다.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대부분의 고전주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도 기계론을 계승하였다. 그의 저서는 그 시대에 있어서의 자연에 대한 이성적이고 정연한 학문의 조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정념은 우리 본성의 결과이며 이 본성은 일반적으로 자연과 분명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감정에 대한 학문은 전체 자연에 대한 학문의 토대 위에서만 세워질 것이다. 이 문제는 모든 문제 제기, 특히 데카르트의 문제 제기를 거친다. 스피노자는 기계론의 필요를 완성시키며 이러한 측면에서 데카르트의 이론을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자유스러운 의지와 정념에 대한 절대적인 힘을 영혼에 부여하였다. 그래서 법률과 규칙에 따르는 세계 속에서 자유의지는 일종의 자유구역을 설정하여 국가 속의 또 한 국가를 세운다. 인간은 자유를 행사하면서 법률을 만들지만 그 법률에 따라야 할 필요가 없는 신과 유사한 상태를 부여 받는다. 오성과 구분되는 자유스러운 의지에의 사상과 절대 자유의지의 존재, 임의적인 신적 존재에의 생각 등은 모두 스피노자가 그의 전작품 속에서 계속 신랄히 비난하고 있는 문제점들이다. 자연은 엄격하고도 일률적인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데카르트와 물리학자들의 주장에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다. 모든 자연이 다 그렇다. 물체와 인간, 즉 물질적자연과 인간적 자연이 모두 이것에 따른다. 육체는 움직이는 기계이며 자동인형과도 같다는 데카르트의 단정에 덧붙여 스피노자는 영혼은 영적인 자동장치로 서 육체의 구조장치가 인간의 감정이란 구조장치를 떠받쳐 단지 연장하게끔 만든다고 말한다. 관성의 원리에 의해 육체는 움직이는 동안에건 멈추어 선 동안에겐 무엇인가가 그것을 바꿔 놓지 않는 한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다. 위의 사실에서 감정의 구조장치에 대한 기본원리가 파생된다 : 모든 사물은 관성의 원리를 갖는 한 계속 존재하기를 고집한다. 이러한 노력은 자연의 모든 사물에 공통된 것이며 사물 각각의 힘은 이 노력의 정도와 강도로 측정한다. 하나의 존재란 존재가능한 태를 말하고 결국 본질과 힘을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다. 욕망이 이 힘을 표현하고 또한 이 힘자체라는 점에서 욕망은 인간의 본질과 완전히 동일하다. 존재란 욕망한다는 것이고 계속해서 존재하려는 것은 욕망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더 이상 의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욕망은 각기 다른 양식으로 모든 인간본성을 표현한다. 그것은 존재 안에 그 전체 속에 또한 그 자신의 더 깊숙한 곳에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노력은 그것이 오직 영혼에게만 관계될 때 의지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영혼과 육체에 관계될 때엔 욕구라고 한다. 욕구는 인간의 보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을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본질과 다르지 않으며 그런 이유로 인간은 욕구를 갖는 것이다. 더욱이 욕망이 보편적인 인간에 관계되며 인간은 그의 욕구를 자각한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욕구와 욕망엔 차이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욕망은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는 욕구이다라는 정의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얻으려고 애쓰거나 원하고, 욕구나 욕망을 갖는 것이 전혀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얻으려고 애쓰고 원하며, 욕구나 욕망을 가지므로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윤리학"
다른 어떤 사물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자신의 보전을 추구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유해한 것을 원할 수는 없으므로 인간은 그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천성적으로 이성의 가르침을 좇아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덕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이 사실을 한탄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본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인간본성이란 감정에 좌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욕망은 의지의 계속적인 행사와 금욕생활로써 벗어날 수 있는 군더더기의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이 존재에 대해 자유로운 것보다 욕망에 대해 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욕망은 우리가 욕구, 의지, 욕망, 충동이라는 단어로 나타내는 인간본성의 모든 노력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므로 인간에게 있어 필수적이다. 욕망의 대상은 또한 욕망에 대해 부차적인 관계를 갖는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적인 점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을 문제를 근본부터 바꾸어 놓았다. 만약 욕망의 대상을 부차적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쁜 사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를 사물로 이끄는 욕망은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이 좋은 것이라서 그 사물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욕망하므로 그것이 좋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욕망과 판단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문제 제기에 비하여 전환되어졌다. 즉 우리를 자연적으로 밝혀 주는 것은 오성이 아니라 오직 욕망뿐이다. 이성에 의해 욕망을 구속하는 것은 인간본성을 부인하며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인간본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만이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고 통제하도록 하며 그의 이해, 즉 유용한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 만일 욕망이 분명히 인간의 본질이라면, 욕망을 다른 것(예를 들어 오성같은)에다 종속시킴으로써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도덕론자들의 의도는 무지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문제에 대해서는 욕망의 필수성(육체를 전락하게 만드는 것과 동일한)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특성들을 모두 추론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부질없는 가상적인 명령은 내세우는 도덕을 다루는 대신 자연에 대한 학문의 모델을 바탕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학문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물리적인 사물의 특성보다 정념이 더 무익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정념을 선과 악의 등급으로 나누어 계급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공통된 원인들로부터 출발하여 정연하게 연역해 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철학은 가치관에 있어서 혼란을 가져 온 것이 아니라 가치관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학문 체계에 대한 요구는 끊임없이 주장되어 졌다.
감정의 학문
"감정과 인간생활의 영위에 대해 저술했던 이들은 대부분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을 따르는 자연적 사물에 대해서가 아닌 자연 밖의 사물을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그것을 깨뜨리고 그의 고유한 행동에 대해 절대적인 힘을 가지며 그 자신이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고 믿었다. 그래서 인간의 무기력과 변덕스러움의 원인을 자연의 보편적 힘 속에서가 아닌, 무언지 모를 인간본성의 결함 안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이 점을 한탄하고 그것을 비웃으며 경멸하여 대개의 경우에 인간본성을 증오하였다. 그래서 가장 구변 좋고, 가장 교묘하게 인간 영혼의 무능력함을 비난할 줄 하는 사람이 숭고한 인물로 여겨졌었다. 물론 (노동과 산업 측면에서 우리가 많은 덕을 보았다고 해야 할) 뛰어난 사람들은 삶을 올바르게 영위하기 위한 고상한 것들을 논하고 인간들에게 매우 신중한 조언을 해주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감정의 본질과 힘, 또한 감정들을 지배하는 그들 입장에서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는 내가 아는 한 아무도 그것들을 밝혀 내지 못하였다. 여기서 잠시 인간의 감정과 그 감정을 인식하는 인간의 행위들에 대해 증오하거나 비난하기를 더 좋아했던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내가 기하학자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악덕과 그들의 결점을 다루려고 한다든지, 엄격한 추론에 의해 그들이 끊임없이 이성에 반대되고 부질없으며 부조리하고 명예가 걸린 문제라고 선포했던 것들을 제시하려 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 속에 존재하는 악덕에게 부여될 수 있는 자연 속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은 실제로 항상 동일하다. 그의 도덕이나 행동력은 하나이며 어느 곳에서나 같다. 다시 말해서 자연의 법칙과 규율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되었다가 다시 변형되면서, 항상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것들로 작용된다" 스피노자, "윤리학"
전통적인 도덕주의자의 입장은 그들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대립시키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수용될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은 현실을 개선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들을 정화시키려 하면서 현실이 다른 형태로 될 수 있거나 또 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하고 그들의 요구에 좀더 부응되는 자연을 가상한다. 그리고는 마치 사건 자체가 어떠한 법칙이나 아무런 필연성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는 듯이 법칙의 측면과 사건의 측면을 따로 구분한다. 인간성을 개조하려는 것, 이것은 이 인간성이 다른 것으로 될 수 있으며, 그의 실제적 현실적인 존재에 어떠한 필연성도 개입되지 않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엄격한 법칙에 따라야만 하는 자연 속에다 인간이 자신들의 법칙을 제정하는 자유스런 고유 영역을 확보해 놓는 것이며, 곧 제국 속의 또 다른 제국을 가정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본성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다. 만약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연 속에 내재하는 법칙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칙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의적인 명령으로서 군주, 혹은 자연의 지배자의 선의에 의존하여 그의 마음대로 변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칙은 명령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오성뿐만 아니라 신의 오성도 그것에 복종한다. 우리가 신을 무한한 자유를 가진 군주로, 또는 세계를 자유자재로 창조하고 지배하는 최상의 힘으로 가정했을 때, 우리가 신에게서 표상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가졌다고 믿거나 또는 바라는 자유가 아닐까? 만물이 인간들을 위해 그들의 형상대로(신까지도)만들어졌다고 믿는 인간은 신과 자연의 질서에 반대되는 표상을 세운다. 인간이 신에게 부여하고 스스로도 가졌다고 믿는 이 자유의지는 먼저 자연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는 그 질서 속에서의 감정의 필요성과 그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비판되어져야 한다. 실제로 데카르트 철학에 있어서 신과 우주와의 관계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와 유사하다. 곧 신과 영혼에 있다고 여겨지는 주도권은 그들의 절대적 자유에 기인한다.
-자유라는 환상
궁극목적론 비판 : 궁극목적론에 대해 비판을 떼어놓고 자유의지를 비판할 수는 없다. 스피노자의 말대로라면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사람들은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을 바라는 행동의식을 갖고 있다.
"모든 인간은 사물들의 명분에 대해 어떠한 의식도 갖지 않은 채 태어나, 자신에게 유익한 것들을 추구하려 하며 그것들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1도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력과 욕구에 대해서는 인식하면서도, 왜 의지를 갖고 욕구를 느끼는지의 동기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며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 2도 인간은 자신이 욕구를 갖는 것의 유익을 안다는 궁극목표를 향해 항상 행동한다. 인간이 늘 자신이 수행한 일의 궁극적인 명분을 알고 싶어하며 그것을 알고 난 후라야 더 이상 불안해 하지 않고 안도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피노자,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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