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2호 2023.10.15 일요일(음 : 9.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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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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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과 봄이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 되는가를 보면 당신의 건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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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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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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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다’, 약속하는 말
인간만이 ‘약속’을 한다. 생각해 보라.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세상은 돌아가고 어떤 일이든 벌어진다. 그런데도 굳이 인간은 수시로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한다. 약속은 인간이 말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하게 될 행위를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것이다. 자신과 세계를 맞물리게 함으로써 ‘말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본성에 다다른다.
문제는 약속을 무엇으로 보증하냐는 것이다. 약속은 그만큼 불이행의 가능성, 거짓 약속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다. 약속을 어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모든 약속은 윤리적이며 정치적이다. “오늘부터 술을 끊겠어”라는 약속을 할라치면 “그 말을 어떻게 믿어?”라는 핀잔을 듣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걸다’라는 낱말이 등장한다. 화투를 치더라도 뭘 걸지 않으면 ‘놀이’이지 ‘노름’이 아니듯.
애초에 ‘걸다’는 튀어나온 곳에 어떤 물건을 달려 있게 하는 행동을 뜻한다. 벽에 못을 박아 놓으면 옷이든 모자든 쉽게 걸어 둘 수 있다. 안 보이는 곳에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고 도드라지게 한다. 쓸모가 많은지 다양한 상황에 쓰인다. 전화를 걸고, 시동을 걸고, 말을 걸고, 시비를 걸고, 기대도 건다.
약속은 자신을 거는 것. 내뱉자마자 사라지는 말에 책임을 지겠다고 스스로 자신의 목에 족쇄를 채우는 일.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더라도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을 ‘다 걸기’(올인) 하는 것이다. 양심을 걸고, 명예를 걸고, 이름을 걸고, 직을 걸고 뭔가를 약속하는 장면은 얼마나 숭고하고 인간다운가.
부조리한 자들일수록 입만 살아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자리를 걸며 거짓 약속을 한다. 그들은 약속의 윤리성을 짓밟고, 세계를 타락시키며, (힘이 아닌) 말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한 인간 문명 자체를 파괴하는 자들이다.
‘존버’와 신문
쌍스러워 보이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신문에 ‘존나’라는 단어를 써도 된다고 보는가? 알다시피 ‘존나’는 거친 욕을 살짝 달리 발음한 것이다. ‘졸라’, ‘조낸’으로 바꿔 쓰기도 한다. 양의 차이는 있지만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즐겨 쓴다. 그래도 신문에 욕을 쓰는 건 무리겠지?
그렇다면 ‘존버’는 어떤가? ‘존나 버티기’의 준말인데, ‘끝까지 버티기’ 정도로 ‘예쁘게’ 의역한다. ‘존버 정신’이나 ‘존버 장인’이란 말로 확대되기도 했다. 생긴 걸 품평하는 ‘존잘(잘생겼다)’, ‘존예(예쁘다)’, ‘존멋(멋있다)’은 ‘존버’와 사촌지간이다.
말은 사전적인 뜻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모종의 감정이 들러붙는다. ‘존버’는 욕이기보다는 효율과 성과, 불합리, 과로를 강요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자구책 또는 삶의 지혜 같은 것이다(그게 ‘버티기’라니). 역설적이게도 긍정적인 느낌의 ‘끈기’나 ‘인내’와 비슷한 뜻이 되었다.
‘존나’라는 욕설이 섞인 ‘존버’는 이미 신문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다. 아직 조심스러운지, 제한적이긴 하다. 외부 기명칼럼, 인터뷰, 문화면, 주식면 등에 주로 노출되는데, 대부분 따옴표를 쳐서 쓴다. 예컨대, “경력도 쌓고 퇴직금도 받으려면 ‘존버’해야죠” “(주식이) 언제 회복될지 감도 안 잡힌다. ‘존버는 승리한다’만 믿고 가야 하나” 식이다.
사람들은 일일이 어원을 따져가며 말을 쓰지 않는다. 당대의 상황을 생동감 넘치고 현장감 있게 담을 수만 있다면, 그 말이 하위문화나 비(B)급 언어이면 어떤가. 가끔 더 좋을 때도 있다. 입말과 글말의 문턱이 사라져 가는 조건에서 시대를 기록하는 기자들의 고민은 더 깊어지겠군. 존버할 건 존버하되, 유연하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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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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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라도 - 한용운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 놓으면,
당신은 대야 안의 가는 물결이 되어서
나의 얼굴 그림자를 불쌍한 아기처럼 얼려 줍니다.
근심을 잊을까 하고 꽃동산에 거닐 때에
당신은 꽃 사이를 스쳐오는 봄바람이 되어서, 시름없는
나의 마음에 꽃향기를 묻혀 주고 갑니다.
당신을 기다리다 못하여 잠자리에 누웠더니
당신은 고요한 어둔 빛이 되어서 나의 잔부끄럼을 살뜰히도 덮 어 줍니다.
어디라도 눈에 보이는 데마다 당신이 계시기에
눈을 감고 구름 위와 바다 밑을 찿아 보았습니다.
당신은 미소가 되어서 나의 마음에 숨었다가, 나의 감은 눈에 입맟추고
'네가 나를 보느냐'고 조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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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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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지시(遼東之豕)
遼:먼/나라 이름 요. 東:동녘 동. 之:갈 지(…의). 豕:돼지 시.
[준말] 요시(遼豕). [동의어] 요동시(遼東豕).
[출전]《文選》〈朱浮書〉,《後漢書》〈朱浮專〉
‘요동의 돼지’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고 오만한 탓에 하찮은 공을 득의 양양하여 자랑함의 비유.
후한(後漢) 건국 직후, 어양태수(漁陽太守) 팽총(彭寵)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꾀하자 대장군(大將軍) 주부(朱浮)는 그의 비리를 꾸짖는 글을 보냈다.
“그대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요동 사람이 그의 돼지가 대가리가 흰[白頭] 새끼를 낳자 이를 진귀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려고 하동(河東)까지 가 보니 그곳 돼지는 모두 대가리가 희므로 크게 부끄러워 얼른 돌아갔다.’ 지금 조정에서 그대의 공을 논한다면 폐하[光武帝]의 개국에 공이 큰 군신 가운데 저 요동의 돼지에 불과함을 알 것이다.”
팽총은 처음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반군(叛軍)을 토벌하기 위해 하북(河北)에 포진(布陣)하고 있을 때에 3000여 보병을 이끌고 달려와 가세했다. 또 광무제가 옛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을 포위 공격했을 때에는 군량 보급의 중책(重責)을 맡아 차질 없이 완수하는 등 여러 번 큰공을 세워 좌명지신(佐命之臣:천자를 도와 천하 평정의 대업을 이루게 한 공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오만 불손한 팽총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일컫고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가 2년 후 토벌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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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9. 아테나
그리스의 아테나(Athena, Minerva) 여신을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수공예 여신 미네르바와 동일시한다. 아테나는 제우스와 메티스의 딸인데 메티스가 임신하여 분만일이 다가오자 제우스는 그녀를 삼켜 버렸다.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말이 아들을 낳으면 신권을 찬탈할 것이고, 딸을 낳으면 외손자가 생겨 제우스를 천상에서 추방할 것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제우스는 심한 두통을 느끼고 헤파이스토스에게 도끼를 가져와 머리에 일격을 가하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거기서 창과 방패 등으로 완전 무장한 낭자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그녀는 함성을 질러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 낭자가 바로 아테나로, 리비아의 트리토니스 호반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트리토게네이아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어린 아테나는 트리톤이 길렀으며 트리톤의 딸 팔라스와 사이좋게 지냈으나 전쟁놀이를 하다 팔라스를 죽게 하였다. 이에 아테나는 팔라스를 신상으로 조각하여 신통력을 지니게 하였는데 이 신상이 트로이 시의 방어신인 팔라디움이다. 또한 그녀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계승하여 팔라스 아테나라고 하였다.
거인족과 신족 간의 격전에서 팔라스 아테나는 거인족의 괴물 팔라스(트리톤의 딸과 동명이인)와 엔켈라도스를 처치하였다. 처치한 팔라스의 가죽을 벗겨 자신의 가슴받이로 하고 엔켈라도스는 멀리 시칠리아까지 추격하여 에트나 화산으로 덮쳐 묻어 버렸다. '일리아드'에서는 아카이아(그리스) 쪽에 서서 싸우고 있는데, 이다 산의 미의 경연에서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내린 판가름에 한을 품고 트로이에 적개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중에 여신은 디오메데스, 오듀세우스, 아킬레스 및 메넬라오스를 비호하였다. 마찬가지로 헤라클레스도 비호하였는데 특히 어려운 노역을 하게 되자 그를 무장시켰고 또 놋쇠징을 주어 스튬팔로스 호수의 새떼인 스튬팔리데스를 놀라게 해 활로 쏘아 떨어뜨리기 쉽게 해 주었다. 이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노역을 마친 후 에우류스테우스에게서 헤스페리데스의 황금사과를 돌려받아 아테나에게 주었으며 거인족과의 싸움에서는 아테나를 도왔다.
아테나는 인간 중에서는 오듀세우스를 가장 아꼈다. 오듀세우스의 이타카 귀향을 도와주기 위해 표류중에 어려 모양의 인간으로 변장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파이아키아 왕의 딸 나우시카에게는 꿈을 통해 왕궁의 빨래를 나귀에 싣고 궁녀들과 바닷가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여기에서 난파당한 오듀세우스를 만나 구조케 하고 자비심을 발휘케 하여 귀중한 배 한 척을 내 주어 고향으로 떠날 수 있게 하였다. 오듀세우스가 오규기아 섬에서 난파당하였을 때는 요정 칼륨소로부터 후대를 받고 함께 산다면 불사신으로 화신하게 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 7년간이나 체류하였으나 아테나가 제우스에게 오듀세우스를 고향으로 보내는 것이 본인의 의사이며 도리라고 하여 5결국 놓아주게 만들었다. 당시 오듀세우스는 칼륨소와의 사이에 나우시투스와 나우시누스라는 아들을 두었다고도 전한다.
아테나는 그리스 세계에서 자신에 대산 숭배가 지배적이었던 도시 아테네를 매우 아꼈다. 이성, 입법, 예술, 문예를 꽃피게 한 아테나 여신은 음악의 신으로도 추앙받았으나 실질적으로 시문과 음악보다는 철학에 더 긴밀한 연계성을 갖고 있었다. 또한 기능공의 여신으로 직물, 자수 수공예를 발달시켰으며 그에 대한 자부심 또한 컸다. 그래서 직물자수에 능한 아라크네라는 한 낭자가 우쭐하여 아테나도 자신을 따를 수 없다고 한 말에 그녀와 경연을 벌인 끝에 억지로 이기고 그녀를 거미로 화신시켜 버린 일도 있었다. 아테나의 천성을 전투정신에 연결시켜 4필의 말이 이끄는 전차, 2륜 전차를 발명하였다고 하기도 하며 거대한 아르고 호의 건립도 지휘한 것으로도 추앙하였다.
한편 아테나의 천성을 평화의 기량으로 추앙하여 아티카에 올리브 나무 재배와 올리브유를 발견한 여신으로도 숭배하였다. 즉 아티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포세이돈과 갈등이 생겼을 때 두 신 중 아티카에 최고의 선물을 한 신에게 그 권한을 부여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땅을 찔러 아크로폴리스에 소금물 샘이 솟아오르게 하고 아테나는 이 언덕에 올리브 나무를 자라게 하였다. 올림포스 주신은 올리브 나무가 더 귀중하다고 판정을 내렸고 이후 아티카는 아테나의 관할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아테네의 아크로 폴리스 언덕에 서 있는 장엄하고 우아한 파르테논은 바로 이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신전이다. 이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아테나 여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떠 받들어졌다. 아테네에서 멀리 떨어진 스파르타, 메가라, 아르고스 및 그 외 나라 성체에서 여신의 신전을 봉현하였다. 트로이에서도 옛 팔라디움 성상을 모시고 숭배하였으며 팔라디움이 있는 한 트로이 시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졌다. 그래서 디오메데스와 오듀세우스가 야밤에 트로이 시에 잠입하여 이 성상을 몰래 들고 나와 도시 수호의 상징을 없앴던 것이다. 역사시대에 와서는 로마의 베스타 사원에 모신 팔라디움이 바로 그 성체이며 로마시 수호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아테나는 처녀성을 자부하고 순결을 지키는 신으로 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아들이 있다고 한다. 즉 어느 날 아테나가 갑옷을 부탁하기 위하여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 들렀는데 때마침 아프로디테에게 배신당한 헤파이스토스가 아테나를 보고 첫눈에 반하여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였다. 이에 기겁한 아테나는 그를 피해 도망쳤으나 결국 헤파이스토스에게 붙잡혀 포옹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그 이상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헤파이스토스의 열정의 흔적인 정액이 아테나의 다리에 묻게 되었다. 불쾌히 여긴 그녀는 털헝겊으로 이를 닦아 땅에 내던졌다. 이것이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 수정되는 바람에 에릭토니오스가 태어났는데 이는 털(erion)과 땅(chthon)의 합성어다. 아이를 받은 아테나는 그를 자기 아들로 삼기로 마음먹고 다른 신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길렀다. 아이를 불사신으로 만들고자 바구니에 넣어 뱀에게 감시하게 하고, 아테네 왕의 공주 아글라우로스에게 극비로 양육할 것을 위탁하였다. 그런데 공주의 자매들이 호기심이 발동하여 바구니를 열어보았다가 아기와 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 실성, 아크로폴리스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에릭토니오스는 신성한 경내로 옮겨져 후에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 아테나의 상징은 창, 헬멧 및 양가죽 방패이며 제우스와 같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페르세우스가 여신에게 선사한 고르곤족 메두사의 머리를 방패에 달았다. 비록 잘린 머리지만 메두사의 눈은 이를 쳐다보는 모든 인간을 돌로 화신시키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식물은 올리브 나무고 새는 부엉이다. 아테나가 '부엉이 눈을 한'이라는 뜻의 별칭 글란코피스로 불리는 것이나, '쓸데없는 짓을 하다'나 '사족을 붙이다'는 뜻의 영어속담 'Bring owls to Athens'가 생긴 것은 모두 이 부엉이와 연관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아테나는 크지만 조용한 자세로 부드럽고 기품을 풍기는 여신으로 전해진다. 시문에서는 맑고 아름다운 눈의 여신이라 하고 심리학에서는 지혜와 진실의 여신으로서 정신적 투쟁을 상징한다.
[Mattei_Athen - 루브르 박물관]
니케
니케(Nike)는 승리의 뜻을 의인화한 여신신으로 로마인은 빅토리아라 하며 날개가 있고 빠른 속도로 난다.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티탄족인 팔라스와 스튝스의 딸이며 그녀에게는 젤로스, 크라토스 및 비아라는 자매가 있다고 한다. 올림포스 신들 편에 서서 티탄족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제우스의 찬양을 받은 니케는 경기에서는 승리의 여신이며, 그리스가 페리시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급격히 각광을 받아 군대의 여신으로 아테나 여신과 대응하는 여신이 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는 니케 신전(아테나 니케 신전이라고도 한다)이 있으며 그 외 그리스 각지에 신전이 있다. 로마에는 팔리티네 언덕에 여신의 신전이 있다. 올림피아 출토 여신상과 사모트로라케 여신상이 유명하다.
[파이오니오스의 《니케상》]
팔라스
팔라스(Pallas)는 티탄족의 한 명으로 크레이오스와 에우류비아(폰토스의 딸)의 아들이며 아스트라이오스와 페르세스와 형제간이다. 스튝스를 아내로 맞이 하여 네케, 젤로스, 크라토스 및 비아라는 네 딸을 두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팔라스는 기간테스와 올림포스 신족 간의 전재에서 아테네에게 살해당한 거인이다. 아테나는 이 거인의 껍질을 벗겨 갑옷으로 만들고 그 날개를 발에 부착하였다. 일설에는 아테나 여신의 아비였는데 딸을 범하려다 죽임을 당하였다 한다. 또 같은 이름을 가진 것으로 어려서 아테나 여신과 함께 자란 트리톤의 딸이 있는데, 아테나와 전쟁놀이를 하다 잘못하여 죽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비통해한 아테나는 그녀의 목상을 파서 갑옷을 입히고 신상으로 하였다. 이 신상을 팔라디움이라 하며 이것을 소유하는 도시를 수호해 주는 영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 아테나는 자신의 이름을 팔라스 아테나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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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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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11
“나는 모든 소유물을 내 마음 속에 이미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그는 행복을 얻기 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행복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 세상에서 확신을 가지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혐오와 손실의 위험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확신을 가지는 자는 이미 행복하다.
12
고독은 그대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만든다. 정신적인 고독과 육체적인 고독을 동반할 수 있는 일만큼 세상에서 행복한 일도 없다. 정신적으로는 고독하지만 육체적으로 고독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세상에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그는 진정한 자유와 안정을 빼앗긴 채 사람들 속에서 공허를 느낀다. 반면에 육체적으로만 고독한 사람은 고독의 순간을 고통스럽고 힘겹게 받아들인다.
13
운명은 우리의 노력과 선택에 의해 언제나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은 변하지 않는다. 고귀한 성품이나 뛰어난 두뇌, 쾌활한 성격, 예민한 판단, 건강한 육체 등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한 중요한 요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이나 명예보다는 건전한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행복을 형성하는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쾌활한 성격이다.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삶을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느낀다.
14
삶이 어떤 것으로 다가오는가 하는 문제는 그 사람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그 사람의 운명이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해도 긍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비극을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런 의지는 비극적인 운명을 풍부하고 아름다운 운명으로 바꾼다.
15
젊고 아름답고 부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지 아닌지는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행복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을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는 평온한 마음이다.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젊거나 늙거나 크거나 작거나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항상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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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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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 1 부 쿠데타의 새벽 (1)
1. H아워에 출동하라!
장도영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아무래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간관계 또한 미리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만 앞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서 믿어지기 때문이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막 출범했을 그 무렵, 육군본부에서는 박정희의 예편문제가 거론되었다.
"제너럴 박을 예편시키십시오. 사상이 불투명한 사람을 군에 오래 놔두는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은 정군 운동을 일으키고 있던 한국군의 영관급 장교들이 아니라 바로 미 8군 수뇌부였다. 미 8군 수뇌부가 한국군의 장성 인사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는 했으나 누구를 꼭 집어서 에편시켜라 말라 하고 압력을 가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해서는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대놓고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유로서 <사상적으로 불투명>을 운운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이었고 진실된 이유는 박정희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박정희를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박정희가 다른 한국군 장성들처럼 미 8군의 장성들하고 골프를 친다든가 또 파티를 연가든가 하면서 의식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고, 또 미군 고문의 참견에 고분고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사회란 동서를 막론하고 자주 어울림으로써 정도 생기고 유대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는 때문에 박정희는 미 8군 장성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생리적이라 할 만큼 미국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장군이 되고 나서도 <미국놈, 미국놈> 하고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미 8군 수뇌들이 박정희의 예편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의 그의 보직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作戰參謀副葬)이었다.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보다도 미군 장성들하고 우의를 돈독히 해두고 있어야 할 자리라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일단 유사시에는 한.미 합동작전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기 박정희가 미국인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미 8군 수뇌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십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상적 불투명을 운운하며 박정희의 예편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황해진 박정희는 미군 장성들하고 누구보다도 친한 장도영에게 <살려 달라>고 SOS를 쳤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지금 당장 박정희를 살려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장도영 말고는 누구도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로부터 구원의 탄원이 있자, 장도영은 주저치 않고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최 장군, 박 장군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부탁을 했다. 물론 최경록은 장도영의 부탁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의 예편을 강력히 요구하는 미군 장성의 압력을 뿌리치고 그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내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박정희는 세번째로 장도영의 은혜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박정희는 언제, 어느 때 장도영의 은혜를 입었던 것인가? 첫번째 박정희가 장도영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군복을 벗고 보수 없는 문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의 사실이 탄로난 것은 1949년의 여순반란사건 직후 벌어졌던 숙군작업 때였다. 이때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중에 있던 그를 밝은 세상으로 끄집어 내준 것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동료들이었던 정일권(丁一權), 백선엽, 김안일(金安一) 등이었다. 박정희는 옛 동료들의 덕분에 밝은 세상으로 풀려 나오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당장에 할 일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군에서 불명예 제대한 그를 써주는 일터도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에 호구지책도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국장님, 어떻게 제가 좀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인 육군 대령 장도영에게 매달렸다. 매정하게 뿌리치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직제에도 없는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해 주었다. 직제에 없으니 보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월급 때만 되면 장도영이 정보비에서 얼마를 쪼개고 또 정보과장 육군 소령 유양수(柳陽洙)로 하여금 과원들의 월급에서 얼마씩을 떼내어 그것으로 박정희의 호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돌봐주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박정희에게 그런 인정을 베풀지 않았던들 어쩌면 그도 문관 자리마저 얻지를 못하고 다른 직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궁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에 그는 장도영의 은혜로 끼니를 때웠고, 계속 군에 몸을 담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족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김일성 집단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박정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 애썼다. 군의 대.소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턱없이 부족할 때라 현역으로 복직하기에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복직하는 데에는 장애가 없지도 않았다. 군 인사법에는 전과로 파면된 자는 2년이 경과되지 않으면 장교로 복직될 수 없다고 못박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과도 전과 나름이다. 박정희는 사상문제로 해서 파면된 자, 아무리 그가 전향을 했다 해도 현역으로 복직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살려 주시오!"
장도영에게 또다시 매달렸다. 장도영이 정에 무르다는 것은 익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가엾기도 하고 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당시 육군의 복직 심사위원장은 황헌친(黃憲親)이었다. 장도영은 황헌친에게 매달리기도 했고, 강문봉(姜文奉), 이기건(李奇建) 등을 설득해서 공동으로 육군 총참모장인 정일권(鄭一權)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 결과, 박정희를 파면 때의 계급인 육군 소령으로 복직시켜 줄 수가 있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박정희는 눈물로써 장도영의 인정에 감사를 표했다. 장도영이 백방으로 뛰지 않았던들 복직이라니, 그것도 파면 때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는 장도영의 그 고마움에 어찌 결초보은(結草報恩)을 다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번씩이나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장도영이 10년 뒤, 다시 또 예편될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줌으로써 세번째로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가 육군 소장에 진급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도영의 무른 인정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장도영의 인정 덕분에 예편을 면한 대구로 내려온 지 얼마 뒤의 일이다.
"박정희를 엄중 감시하고 그의 동태에 대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보고하라."
방첩부대장 육군 준장 박창록(朴昌錄)으로부터 이런 지령이 제2군 방첩대장 이희영한테 떨어졌다. (무엇 때문에 박정희 장군을 감시하라는 거야. 그분이 뭘 어쨌다고?) 이희영은 부대장의 지령이 떨어지자 불끈 반발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6.25 이전의 사상문제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가 하고 생각한 그는 대원 중에서 몇 사람을 선발해 특별히 감시조를 편성해서 박정희를 감시토록 했다. 이희영한테는 꽤나 괴로운 임무였다. 그럴 사람의 관계는 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이희영이 5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1947년 1월 1일, 이때 박정희는 육군 대위로서 생도대의 제1중대장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두 사람 사이에 남다르다 할 만큼의 인간적 유대가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이미 남로당의 육군사관학교 군사책으로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38선 이북 평양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해 온 이희영을 증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듯 소원하기만 한 사이였던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은 1954년 박정희가 제2군단의 포병사령관으로 부임해 오고 나서였다. 이때 이희영은 제2군단의 병기참모였다. 출신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일이 있지만 1951년 이른바 <5.26 정치파동> 이래 오매불망으로 쿠데타에 대해서 꿈꾸고 있던 박정희였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쿠데타 동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음직한 일이었다. 박정희는 의식적으로 이희영, 이회영 두 사람한테 접근을 했다. 인간 생활에 있어 계급이 낮은 사람이 계급이 높은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드는 법이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거꾸로 되어 있었다.
"어떻소? 좋은 막걸리가 있는데 같이 한잔 하지 않겠소?"
"보신탕 잘하는 집을 발견했소. 우리 오늘 저녁에 보신탕이나 같이 합시다."
보신탕 집으로 초대했다. 평양 태생인 이희영과 신의주 태생인 이회영은 소주파였다. 그런 그들도 어느 사이엔가 막걸리를 즐기게 되었다. 막걸리파인 박정희와 어울리다 보니 두 사람도 이제는 술이라고 하면 청탁을 가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오입쟁이가 계집을 가리지 않듯이 애주가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아야지.> 이것이 술에 대한 박정희의 지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이라고 하면 박정희는 청탁을 가리지 않았었다. 사나이들이란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이희영(물론 이회영도 마찬가지였지만)은 이렇게 2군단 시절 자주 박정희와 어울리다 남다른 친숙한 사이가 돼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박정희가 어쩌면 두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1952년 이래 박정희는 앞의 두 사람한테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갈 때마다 똑똑하다고 느껴지는 장교들이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품안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을 해왔었다. 자리를 옮기고 나더라도 이미 유대를 맺어 놓은 장교한테는 가끔 안부편지도 하고, 또 생일 같은 날에는 생일 축하 서신을 띄워 당사자를 감격하게 해 주기도 했었다.
과묵하기만 한 그의 성품으로 볼 때 어느 구석에 이런 자상한 정이 있었까 하는 있어서는 그의 그러한 모든 행동은 미래에 대비해 두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에서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희영은 인간적 의리상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상급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박정희 감시반을 편성해서 그를 엄중 감시케 해놓고 있었으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두 달, 석 달이 흘러도 도무지 그에게서는 이렇다할 이상한 낌새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희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61년 1월 중순쯤의 일이다.
"이 대령, 부사령관 관사로 좀 와 주시오."
그의 부름을 받은 이희영은 적잖게 의아해 했다. 부사령과으로 부임해 온 이래 그는 한번도 관사로 초청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관사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축농증을 수술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박정희는 포단 밑에서 한 장의 편지봉투를 꺼내 이희영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이 대령, 알맹이를 좀 꺼내 보시오."
이희영은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알맹이를 꺼냈다. 그것은 접은 편지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희영은 그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군고구마 장수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게 누구의 사진입니까?"
이희영은 접혀 있는 편지를 펼쳤다. 첫 줄에 <사랑하는 근혜 아빠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사모님의 편지 같은데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읽어 봐!!"
박정희의 목소리가 좀 거칠었다. 평소에는 경어를 쓰던 그가 이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희영은 육영수의 편지를 읽어 보았다. 편지를 읽고 나서야 그는 동봉해 있는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서울 506방첩대 요원이었다. 박정희를 감시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은 이 요원은 군고구마 장수로 있었던 것이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육영수가 감시자 모르게 사진을 찍어서 박정희에게 보냈던 것이아. 이희영은 다시 한번 그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드럼통에다 불을 지펴 고구마를 굽고 있는 장사치의 배경에 나와 있는 집의 모양이 낯이 익었다. 바로 박정희의 신당동 집이었던 것이다. 사진을 살펴보던 이희영은 고개를 쳐들고 누워 있는 박정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쏘는 듯한 박정희의 두 눈총이 이희영의 시야로 파고들어 왔다. 박정희의 눈빛은 증오에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다.
"이 대령, 방첩대에선 나를 빨갱이라고 해서 감시를 시켜 놓고 있는 모양인데 그래, 내가 빨갱이라면 어떻게..."
육군 박정희는 또다시 경어를 쓰고 있었다.
"안 그렇소, 이 대령?"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각하!"
이희영은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내가 어떤 길을 걸었건 간에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이오. 그런 장성을 사상적으로 의심을 하고 감시를 시켜놓고 있다니 이게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오?"
그의 항변에 이희영은 마치 자기가 감시시켜 놓고 있기나 한 듯이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하기야 그런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게 된 것은 그의 말이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과거가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상이란 경우에 따라 청산할 수도 아닌가. 과거 일을 문제삼아 가지고 육군의 장성을 감시케 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매카시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희영은 박정희에게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그가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대령, 이 대령이 수고 좀 해주시오."
"어떻게 말입니까?"
"방첩대에서 이런 짓 좀 안하게 해달란 말이오."
"알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희영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정희와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를 생각해서 감시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해서였다. 서울역에 내리자 그는 먼저 소공동 이때 506방첩대장은 육군 대령 이행주(李幸柱)였다.
"박 장군 댁을 감시시켜 놓고 있는 이유가 뭐요?"
이행주는 명확한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효자동에 있는 본부로 방첩부대장 박창록을 찾아갔다. 이희영은 박창록을 대하자, 박정희를 감시시켜 놓고 있는 처사는 부당하다 역설하고 항의조로 이렇게 말했다.
"꼭 필요해서 감시를 시켜야겠다면 본인이나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뭡니까. 사진으로 찍히고. 이거야말로 미라잡이가 미라가 된 것하고 뭐가 다르단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이희영은 가지고 올라온 사진을 내보였다. 그 사진을 들여다본 박창록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입이 쓴 모양이었다.
"우리가 박 장군을 감시하고 싶어서 감시하고 있겠소. 위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이지."
방첩부대장 박창록의 윗사람이라면 정보 참모부장, 참모차장, 참모총장 세 사람이다. 참모차장은 육군 중장 김형일(金炯一)이었고, 참모차장은 육군 중장 최경록이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 박정희를 감시하도록
"감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든 군고구마 장수는 철수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 마음이 놓여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느껴지거든 차라리 옷을 벗겨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희영은 그렇게 항의를 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로 박정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이행주, 박창록 등과 주고받은 말을 가식 없이 털어놨다. <정 위험한 인물이라 느껴지거든 차라리 옷을 벗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의견까지 제시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박정희의 입에서 뜻밖의 대꾸가 흘러나왔다. "소리, 아마 저희들이 나보다도 먼저 옷을 벗게 될걸!" 이게 무엇을 뜻하는 대꾸였을까? 이희영은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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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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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욕망 - 마르틴 콜랭
제 2 부
정념의 역학
데카르트의 철학이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로 한계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건강을 유지하라, 삶을 이끌어 가라, 품행을 규제하라. 데카르트는 윤리와 의학, 영혼의 건강과 육체의 건강을 분리하여 보지 않았다. 데카르트적인 전체 형이상학은 영혼과 육체의 구분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렇다면 윤리 전체가 이 둘의 결합에 근거를 갖는다는 것은 모순되지 않는가?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가?
- 영혼과 육체
영혼과 육체는 두 개의 구별되는 실체로서 전자는 사고에서부터, 후자는 넓이(즉, 연장)로부터 생겨난다. 넓이를 차지하는 영혼이나 사고하는 육체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표현에 반대하는 오성은 거꾸로 영혼과 육체, 사고와 연장의 분명하고도 확연히 구별되는 관념을 형성한다. 이 두 실체는 그것들의 이름이 가리키듯이, 오직 오성이 그 각각을 분리시켜 생각한다는 사실로써만 다른 하나가 없이도 존속할 수 있다. 영혼은 사고의 실체로서, 오직 사고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그의 본성이다. 육체는 넓이를 갖는 물질적 실체로서, 움직이는 기계, 기관의 배치에 의해 요구된 움직임을 역학적으로 작동시키는 자동장치에 비유된다. 영혼이 없는 육체를 상상하면서도, 데카르트는 생명, 즉 사고가 없는 육체는 상상하지 않았다. 육체는 혼자서 그 속의 톱니바퀴들만의 조립에 의해서도 잘 움직일 수가 있다. 마치 벽시계처럼 말이다.
"육체가 어떤 움직임을 위한 모든 가지고 있을 때엔 그 움직임을 실행시키기 위한 영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데카르트, "인간의 육체에 대한 서술"
여기서부터 데카르트는 정념에 대해 전통적이고 진절머리나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육체가 하나의 기계라면 그것이 움직일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기계의 구조와 규칙적인 운행으로 생긴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육체는 육체에만 특수한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작동되며, 영혼에게 육체적 요구의 본성과 빈도를 알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욕구는 배고픔, 목마름, 고통, 기쁨 등의 감정을 말한다. 그러나 만일 육체가 하나의 기계라면, 영혼은 배에 타고 있는 항해사와 같은 단순한 기계 조작자는 아니다. 실제로 영혼은 육체가 감각하는 것을 예민하게 느낀다. 영혼은 육체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을 구성하는 이 두 실체의 친밀한 통합체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과 육체를 구별하여 한쪽의 특성을 다른 한쪽에 부여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육체에 작용을 미치고 파생되어지는 정념을 규제하여 그 힘을 억누르기 위해서는 의학적, 물리적으로 육체를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려면, 즉 효과적으로 육체에 작용을 미치려면 알아야만 한다. 영혼이 조용히 사고하기 위해서 육체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육체는 스스로 유지되어지고, 그 육체가 결합해 있는 영혼을 간직하기 위해 표현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육체의 건강, 다시 말해서 총체적 합성물인 인간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도덕은 의학을 내놓게 된다.
"나의 목적은 연설가로서나 도덕 철학자로서가 아닌, 오직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정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 "편지"
만일 데카르트가 다음에 나오는 '영혼의 정념' 두번째 항목에서 지적했듯이, 영혼에 있어서의 정념이 육체에 있어서는 행동이라면, 정념의 얼개를 알게 되는 길은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의학이나 물리학에 의해서이다.
- 영혼의 정념
정념과 무기력 : 흔히 영혼은 정념을 체험하면서 그 영혼이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고 다만 무한히 재현하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하는 얼개의 결과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정념은,
"우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지각이나 인식이라고 일컬어진다. 왜냐하면 흔히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아니며, 영혼은 언제나 지각과 인식에 의해서 나타나는 사물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정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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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육체는 정해진 이러한 장소에서 서로 교감되며, 이것은 영혼 속의 정념을 불러일으키고 사물들을 욕망하도록 하는 그리고 육체로 하여금 이러한 사물들을 향하거나, 반대로 피하게끔 만드는 동물정기 (뇌와 신경, 근육 등의 구성에 관여하는 매우 섬세한 공기 air:동물 정기는 육체의 혈액순환이 되도록 작용하는 힘과 같다)의 움직임과 동일한 것이다. 이러한 교감으로 영혼 쪽에서의 반대 시도가 완전히 배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와 같은 정의는 정념이 우리 육체나 또는 외부적 물체의 움직임에 연결된 표상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념은 자연기관으로부터 유래하며 유용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에 의해 천국에라도 오른 듯 즐거워하고는 우리의 행동이 그릇된 것이었다고 판단하는 일을 수 없이 되풀이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가?
영혼의 절대적인 힘 : 영혼의 절대적인 힘이란 곧 의지이다. 정념의 얼개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두 가지 원동력을 볼 수 있다.
- 동물 정기에 의해 만들어진 인상이나 흥분, 영혼에게 이러한 인상(또는 흥분)에 상응하는 감각을 전해주는 선(gland)위에서 생겨난다.
- 선위에서 생겨진 이러한 움직임에 사고나 표상이 결합하는 습관. 결과적으로 영혼과 육체간의 규칙적인 상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실행되며, 영혼은 동물 정기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상에 의해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서 우리에게 해로운 것에 대처하여 반대되는 사고나 의지를 대립시킨다. 예를 들어, 위험의 존재는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습관적으로 도망치려 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위에서 말한 습관에 의해 도망에다가 치욕이나 비겁함의 표상을 덧붙이게 되면, 도망하려는 성향과 이러한 표상 사이에 갈등이 생겨난다. 그래서 영혼이 도망에 대해서 치욕이나 비겁함의 표상을 강하게 나타냈을 경우엔 사람으로 하여금 용기를 내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의 얼개에는 다른 얼개가 상응한다. 앞의 얼개는 자연적으로 우리 안에 내재된 것이고, 뒤의 것은 우리의 의지로 구성된다. 정념과 의지가 대립되어 맞설 때 나타나는 것이 숭고한 영혼과 비열한 영혼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자존심이 관계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는 오성에 의해 지지될 때에만 정념을 이겨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투쟁에서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두 개의 얼개가 아니라 하나의 얼개(육체와 육체의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표상의 얼개) 및 힘, 즉 오성에 의해 강해진 의지의 지속적인 운동의 얼개이다.
"영혼의 힘과 연약함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또 가장 약한 것의 악은 무엇인가? 그러므로 개인이 그의 영혼이 강한지 약한지를 아는 것은 이 싸움의 승리에 의해서이다. 왜냐하면 의지로써 매우 쉽게 정념을 물리치고 그 정념에 동반되는 육체의 운동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강한 영혼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힘을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들이 의지에 대항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무기를 가지고 싸운 것이 아니라, 오직 어떤 정념들이 다른 것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무기를 가지고 싸우게 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만의 독특한 무기라고 명명한 것은 선과 악의 인식에 관한 단단하고 확정적인 판단들이며, 이러한 판단에 따라 영혼은 그의 생명에 관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므로 가장 연약한 영혼이란, 그의 의지가 확실한 판단을 따르도록 확정지어지지 않은 채 계속해서 눈앞의 정념에 이끌려 가게 되는 영혼으로서, 이 정념은 종종 하나가 다른 하나에 반대되면서 번갈아 가며 영혼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기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싸우도록 하여 영혼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끔 한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죽음을 극악한 것인 양 나타내고 단지 도망침으로써만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을 때, 한편에서는 공명심이 치욕스런 도망은 죽음보다 더 나쁜 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정념이 다양하게 의지를 동요시키고, 의지는 이쪽 저쪽의 정념의 따르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갈등하여 그 결과, 영혼을 천하고 불행하게 만든다"
데카르트, "정념론"
행동을 이끄는 의지의 확고함은 정념에 대한 절대적 치유책이며 데카르트 도덕의 절정인 관용을 정의한다.
"관용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관용은 인간이 보다 높은 관점에서 자신을 정당하게 평가하도록 해주고, 이 관용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는 진실로 그에게 소속된 것이 없으며 이것을 잘 사용하느냐 잘못 사용하느냐에 따라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앎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또 부분적으로는 인간이 그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려는 확고하고 단단한 결심, 다시 말해서 인간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사물들을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를 부족하지 않도록 하려는 결심을 그 스스로 느낀다는 사실로써 구성된다고 믿는다. 이는 곧 덕행을 완전하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카르트, "정념론"
결론:관용은 최고의 선이다.
우리는 반대되는 정념으로써 다른 정념을 쫓아내 버렸다고 스스로를 평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불안정한 균형 상태가 임시변통적으로 만족감을 가져다 주기는 하지만우리의 능력에 의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은 인생의 어떠한 우여곡절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아무 것도 그의 자제력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도리어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 재난에 처했을 때에 그것을 극복하고 그의 의지력을 변함없이 굳게 함으로써 재난의 영향을 축소시키면서이다. 그는 그의 행복과 지락이 오직 그 자신, 그가 최선으로 여기는 것들로 안내되어진 행위로부터 얻는 만족에 달려 있음을 안다. 자신의 행동을 사물과 자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것이 도덕을 정의한다)위에서 조절하면서 인간은 오직 선만을 추구한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는 선에 다가갈 수가 없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선에 이르도록 하고 그것을 생산해 내도록 하는 것을 아무리 원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우리의 능력과 자유의지를 일컫는다. 이 능력을 원한다는 것은 그가 욕망을 지배하는 능력을 원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족과 쾌락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닌 덕행(즉, 우리의 이성이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명령한 바를 행하는 것을 덕행이라고 본다)을 실행할 수는 절대로 없다. 쾌락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신에만 속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곧 육체와 결합한 정신에 속하는 것이다. 후자의 쾌락은 상상 속에서 막연히 표현되며, 특히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기 전에는 인생의 모든 악과 과실의 원천이 되는 것이 더욱 크게 나타나곤 한다. 왜냐하면 이성의 법칙에 따라서 각각의 쾌락은 그 쾌락을 산출해 내는 완벽성의 정도에 따라 측정되어져야 하며 우리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원인을 갖는 것들을 측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념은 종종 우리에게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훨씬 훌륭하고 바람직하다고 믿게끔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을 가까스로 획득하고 대신 더욱 진실된 다른 선들을 소유할 기회를 잃었을 경우, 향락이 우리의 잘못을 깨닫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경멸감과 한탄, 뉘우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성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다. 요컨대, 비록 행운이 우리의 목표와 대립되고 그것이 완성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경우에라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과실에 의한 손실은 없었다는 만족감을 느낄 것이며, 우리의 능력에 따라 획득되어질 자연적인 도취감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어질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그래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악보다 선이 항상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가 사물을 잘 이용할 줄 알 때에 그 사물에다 항상 선의를 부여하고 또 그것이 우리에 의한 것인 경우와는 반대로 우리 외부에 속하며 우리의 자유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사물을 모두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것들을 사용하여 커질대로 커진 오부로부터의 악이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해로운 행동들을 나타내 보이는 경우, 이 악이 위선자를 자극하는 슬픔보다도 먼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생에 초연해야 함을 밝혀 둔다"
데카르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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