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1호 2023.10.09 월요일(음력 : 08.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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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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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는 편할 때가 없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어른을 존경해야 한다더니
이제 와서는 젊은 세대를 존중하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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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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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적
‘연필이 한 자루 있다’ ‘강아지가 한 마리 있다’ ‘소금이 한 톨 있다’ ‘사람이 한 명 있다’라는 문장들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그렇다. ‘1’. 수는 추상화의 끝판왕이다. 숫자가 없다면, ‘연필=강아지=소금=사람’이라는 등식을 상상할 수 없다. 수는 이질적인 것들 속에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공통점을 매개로 새로운 관계로 만든다.
우리는 수가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수량화에 가장 적합한 체제다. 인간을 비인격적 숫자로 등치시키고 대체 가능성을 점점 확대해 왔다. ‘인력수급’만 잘 되면 그만. 누구든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 성과지표는 사람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니, 수량화야말로 사회의 핵심 작동방식이다. 이 복잡다단한 사회에서 수량화 말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공기 속에 숫자가 섞여 떠다니고, 어떤 숫자는 나를 옥죄고 있다.
수량화는 개인의 우여곡절과 사연을 몰수한다. 모든 정황을 균질화한다. 숫자로 표시할 수 없는 것은 무시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비틀어 말하면, ‘수량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그런데도 인간은 말을 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말의 힘은 지금 당장 눈앞에 없는 것, 논증할 수 없는 것, 숫자로는 표시할 수 없는 것을 말할 때 발휘된다. ‘사랑, 우정, 아름다움, 희망, 하나님, 새 세상’ 같은 말은 속이 비어 있는 과자 같지만, 우리에게 각기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예측 불가능한 삶의 질곡을 담는 데 ‘말의 유연성(불확실성)’만큼 적당한 그릇이 없다. 숫자는 말의 적이다. 말의 성에 살면서 숫자의 공격에 뻗대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화무십일홍
‘삼류 무림의 세계로구나!’
자신이 한때 몸담았던 공간을 이렇게 풍류(?)를 담아 선언하고 나면, 격동하던 마음도 가라앉고 ‘이 풍진 세상’을 견딜 힘이 생긴다.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이 어디 천하를 경영하는 자들의 세계에서만이랴. 작고 구체적인 삶일수록 더욱 치졸하고 비루한 법.
'세상은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나는 왜 이러고 있는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금언은 미리 알려진 모범답안이다. 게으른 방식이지만, 상황을 이겨내는 데 유용할 수 있다. 군에 갓 입대한 젊은이에게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은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준다. 곤궁한 사람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위로와 용기를 선물한다.
하지만 금언은 진실의 유령. 진실을 담고 있으나 직접 목격하기가 힘들다.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현실을 그럴듯한 희망의 말로 바꿈으로써 그 불가항력마저도 내 손아귀에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다. 그렇지, 활짝 핀 꽃도 열흘을 버티긴 힘들지. 변치 않는 진실이긴 한데, 재차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핀 꽃이 도무지 시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피지 못한 꽃망울들은 도무지 필 기회조차 없는 현실 때문이겠지. 권불십년(權不十年). 십년을 넘기는 권력이 없다는데, 얼굴만 바꾸어 연년세세 권력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 느낌은 뭐지? 권력을 상대화할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이 세상이 저당 잡혀 있어서인가. ‘권불십년’이라 호기롭게 되뇌지만, 현실 권력을 ‘당분간’ 묵인하는 쓸쓸한 알리바이인지도 모른다.(‘십년만 해먹어라. 딱 십년이다!’)
확고한 금언일수록 믿을 수 없다. 화무십일홍이 맞는가? 권불십년이 맞는가? 이토록 삼류 무림의 세계에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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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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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먼저 알아 - 한용운
옛 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의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다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아 보았습니다.
꽃송이에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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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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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完璧)
完:완전할 완. 璧:둥근 옥 벽.
[동의어] 완조(完調).
[유사어] 화씨지벽(和氏之壁), 연성지벽(連城之壁).
[출전]《史記》〈藺相如列傳〉,《十八史略》〈趙篇〉
① 흠이 없는 구슬[壁:환상(環狀)의 옥(玉)]. 결점 없이 훌륭함.
② 빌려 온 물건을 온전히 돌려보냄.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는 천하명옥(天下名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어떻게든 화씨지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城) 15개와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혜문왕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혜문왕은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했다.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강자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 하여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혜문왕은 중신들에게 물었다.
“사신으로는 누가 적임자일 것 같소?”
그러자 대부인 목현(繆賢)이 말했다.
“신의 식객에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라는 자가 있사온데 그 자라면 차질 없이 중임을 완수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리하여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고 화씨지벽을 바쳤다. 화씨지벽을 손에 들고 살펴보던 소양왕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했으나 약속한 15개 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는 조용히 말했다.
“전하, 그 화씨지벽에는 흠집이 있사온데 그것을 외신(外臣)에게 주시면 가르쳐 드리겠나이다.”
소양왕이 무심코 화씨지벽을 건네주자 인상여는 그것을 손에 든 채 궁궐 기둥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양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약속하신 15개 성을 넘겨주실 때까지 이 화씨지벽은 외신이 갖고 있겠나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화씨지벽은 외신의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깨지고 말 것이옵니다.”
화씨지벽이 깨질까 겁이 난 소양왕을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다. 인상여는 숙소에 돌아오자 화씨지벽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국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양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인상여를 잡아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죽였다가는 신의 없는 편협한 군왕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그대로 곱게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화씨지벽은 ‘온전한 구슬[完璧]’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인상여는 그 공으로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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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5장 포르큐스-괴물의 출생
6. 셀레네
셀레네(Selene)는 달을 화신하여 숭상한 여신으로, 로마인은 루나라 하였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티탄족인 휴페리온과 테아의 딸이며 헬리오스와 에오스의 자매라 하나, 이와 달리 거인족인 팔라스 혹은 헬리오스와 에우류파이사의 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쌍의 말 혹은 황소가 끄는 달수레를 타고 달리는 셀레네에 관한 신화는 별로 없고 제우스와 관계하여 판디아를 두었다고 한다. 그녀는 엔듀미온과 사랑을 나누었는데 이를 알게 된 제우스가 그를 라트모스 산 동굴 속에 던져 영원히 잠들게 하자 셀레네는 밤마다 천상에서 내려와 그 곳으로 찾아갔다. 다른 전설에는 판이 아름다운 백색 양모를 진상하여 셀레네를 산 속에서 유혹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셀레네는 제우스와의 사이에 헤르세(이슬)를 낳았다고도 하고 또한 헬리오스의 사이에 후르스(시간)를 낳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한편 셀레네는 헤카테 혹은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그리스 세계에는 원래 달 여신 숭배가 없었으며, 라코니아 탈라마이에 있는 셀레네 파시파에 신전은 신탁을 내리는 장소이다. 프리지아에는 달의 남신이 있어 여러 그리스 도시로 퍼져 숭배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셀레네는 여신으로서의 역할보다는 달의 광채를 미술, 노래, 시문에서 표현할 때 더 중요시되었다.
헤카테
헤카테(Hecate)는 옛적 보이오티아에서 예찬된 여신으로, 인간에게 부와 승리, 육아와 동물사육의 성공 등 여러 면에서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알려졌다. 카이오스와 포이베의 손녀 혹은 페르세스와 아스테리아의 딸이라고도 한다. 올림포스 신족이 아닌 독자성을 가진 여신이지만 제우스는 헤카테에게 각별한 명예를 주고 지상, 바다 및 천상에서 명성을 갖게 하였다. 때로 셀레네나 아르테미스와 혼동되고 후기에는 천상에서는 루나, 지상에서는 디아나, 지하계에서는 헤카테로 불러 디바 트리포미스, 테르게미나, 트리켑스라고도 한다.
헤카테에 관한 신화는 별로 없고, 콜키스의 으뜸가는 마술사 가계와 연관되어 여자 마술사 키르케 혹은 메데이아의 어미라는 주장도 있다. 그리스 세계에서도 마술과 마법을 주관하고 말.개.멧돼지로 분장한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세 개의 몸으로 또는 한 몸에서 세 개의 다른 얼굴을 지닌 형상을 하고 있다. 헤카테의 성찬은 특이하여 매월 개의 날고기, 어린 양고기, 꿀 등을 바쳤다. 교차로, 특히 세 교차로와 대로상에서 마술활동을 하여 트리비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여신은 그 세력이 천상과 지상 및 지하 세계에까지 미쳤으므로 왕이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강이 여신의 은혜 때문이라고 믿고 존경하였다. 매년 여신의 축제 헤카테시아가 개최되었으며 이 축제 때는 빈곤한 사람들에게 특히 많은 음식이 제공되었다.
7.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Narcissus)는 하신 케피소스와 요정 리리오페의 아들로, 보이오티아의 테스피아이에서 태어난 뛰어난 미모의 젊은이다. 그는 애정의 기쁨 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고 경멸하였다. 그에게 애끓는 연정을 가졌던 요정 에코는 사랑을 거절당하자 죽어 바위로 화신하였다. 아메이니아스라는 젊은이도 그를 열렬히 사랑하였으나 그가 대꾸도 않고 단검을 선물하니 나르키소스 집 대문 앞에서 그 단도로 자살하며 무정한 친구라고 신에게 저주하였다. 그 저주로 인해 어느 날 나르키소스는 샘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아름다운 샘물의 요정으로 알고 짝사랑에 빠져 연모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이 때 흘린 피에서 수선화가 피어났다. 이러한 전설은 테스파이아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숭배사상에서 연유했으며 여기서 나르시시즘이라는 낱말과 꽃이름 수선화(narcissus)가 생겨났다. 반면 파우사니아스는 다른 설을 주장하는데, 즉 나르키소스에게는 아름다운 여동생이 있어 같이 수렵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는데 여동생이 죽자 사는 재미를 잃고 숲의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생생한 동생의 영상을 누리며 감상에 빠졌다고 한다.
에코
에코(Echo)는 보이오티아 헬리콘 산의 요정으로 케피소스 강에서 살았으며 한때는 헤라의 시중을 들며 제우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말이 많아 제우스의 기분을 상하게 한데다 제우스와의 관계를 의심한 헤라의 미움을 받아 말하는 기능을 제거당하여 누군가 부르면 끝음절만을 반복하여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판이 그녀를 찬미하여 연정을 품었으나 호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닌 사튜로스를 사랑한 데 앙심을 품고 실성한 양치기를 보내 그녀를 박살내었다. 그러나 메아리만은 계속 남았다고 전한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에코는 나르키소스를 애타게 사랑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절망에 빠져 초췌하져 돌로 화신하였고 아직도 울림의 힘이 남아 메아리(echo)가 난다고 한다.
8. 미다스
미다스(Midas)는 고르디오스의 아들로 프리지아의 왕이다. 어릴 때 보리알을 운반하는 개미 행렬이 요람 옆을 지나면서 아기 입술 사이에 곡물을 쌓아 놓자 이상히 여겨 점을 쳐 보니 거부가 될 징조라는 답이 나왔다. 과연 커서 매우 부유한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 되었다.하루는 먼 곳에서 현인 실레노스(혹은 사튜로스)를 우연히 만났는데 헌주를 마셔 혼수상태에 빠진 실레노스의 정체를 알아낸 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려 후히 대접하고 교훈과 지혜를 내려줄 것을 희망하였다. 일설에는 실레노스가 왕궁의 이름난 장미 뜰의 샘을 자주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미다스 왕이 샘에 포도주를 채워 취하게 했다고도 한다. 하여간 실레노스는 미다스에게 그리스 세계에서 매우 먼 경건한 나라 에우에베스와 전쟁으로 지새우는 나라 마키모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째 나라의 주민은 행복하게 살며 웃음으로 생을 마쳤고, 둘째 나라의 주민은 태어나자마자 무장을 하고 생애를 전투로 영일없이 지냈는데, 두 나라의 공통점은 모두 매우 부자고 금은이 어찌 많은지 마치 우리네의 쇠붙이 만큼이나 흔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때 두 나라 사람들이 딴 세상을 방문하고자 대거 길을 떠나 넓은 바다를 건너 그리스 세계에 와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산다는 휴페르보레안스(북방 정토주민)의 영토를 찾아왔다. 그런데 휴페르보레안스의 비참한 생활 상태를 보고서는 더 이상 다니기를 원치 않아 다시 돌아가 버렸다고 말해주었다. 또한 신기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즉 그곳에는 가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 곳에는 격류와 공포의 소용돌이를 오랫동안 지나야 갈 수 있어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고장에는 두 줄기의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첫째 강기슭에 있는 나무의 과일을 먹으면 비참한 마음이 되어 슬피 울며 괴로워하고 몸이 점점 수척해지나 다른 강기슭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게 되면 나이 먹은 사람도 다시 젊어져 중년에서 사춘기를 지나 아동이 되고 다시 어린이가 되어 마지막에는 사라진다고 하였다. 모두 다 미다스의 자만심을 깨우치고자 하는 함축성 우화였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는 미다스가 실레노스와 조우하는 또 다른 장면이 나온다. 즉 디오뉴소스 일행에서 뒤처진 실레노스는 딴 길로 가다가 프리지아 산 속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이 모습이 지나가는 농부들의 눈에 띄어, 수상히 여긴 농부는 그를 묶어 미다스에게 끌고 갔다. 왕은 일찍이 디오뉴소스 비밀의식에 참석한 일이 있어 단번에 그를 알아보고 결박을 풀어 예의를 갖춰 영예로운 대접을 하며 궁에서 편안히 지내게 한 다음 디오뉴소스 일행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다. 디오뉴소스는 스승을 무사히 돌아오게 해준 은혜에 정중히 치사를 하고 그 답례로 미다스에게 소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미다스는 곧 자기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나 황금으로 변하게 해주기를 소원하였다. 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자 미다스는 신기한 약속의 선물을 가지고 기쁨에 넘쳐 왕궁에 와서 실험을 해 보았다. 과연 손이 닿기만 하면 돌이고 꽃이고 모두 빛나는 황금으로 변하였다. 참으로 신기하고 황홀한 일이었다. 그런데 식사 때가 되어 음식을 집었더니 황금으로 변하고 심지어 포도주마저 금으로 둔갑해 버렸다. 이에 허기와 굶주림으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 미다스는 디오뉴소스에게 이 곤욕의 선물을 걷어 줄 것을 애원하였다. 이에 디오뉴소스는 그에게 팍톨로스 개울의 원천을 찾아가 그 샘물에 머리와 손을 씻으라고 일러주었다. 미다스가 지시한 대로 하니 곧 곤욕의 능력에서 벗어났고 그 후 팍톨로스 냇물의 모래는 황금입자로 가득차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우화도 있다. 즉 미다스가 나라 변두리에 있는 오지를 방문하였는데 그만 길을 잃고 사막에서 헤매게 되었다. 심한 갈증이 났으나 목을 축일 물이 없는 참에 마침 대지에서 샘이 솟아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는 샘물이 아니고 황금이었다. 그래서 미다스는 디오뉴소스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이 소원이 받아들여져 황금 대신 물이 솟아나게 되었다. 이것이 미다스샘의 유래라 한다. 그 외 마르슈아스(혹은 판)와 아폴론의 전설에도 미다스가 등장한다. 어쩌다 미다스는 트몰로스 산에서 열린 신들의 음악회에서 들르게 되었는데 경연 후 벌어진 우열 판정에 참견을 하게 되었다. 즉 트몰로스가 미다스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아폴론을 승자로 선언하자 미다스가 심사가 뒤틀려 판정이 공평하지 않다고 시비를 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아폴론은 심술을 부리는 미다스의 귀를 당나귀 귀로 변형시켜 버렸다. 미다스는 이 귀를 창피하게 여겨 특별히 만든 프리지아 모자로 귀를 가리고 다니며 유일하게 이 비밀을 알고 있는 이발사에게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다. 따라서 이발사는 말하고 싶어도 왕이 두려워 누설할 수 없으니 답답하고 참을 수 없어 바닷가에 가서 구멍을 판 후 거기에 대고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는 흙으로 다시 구멍을 덮어 버렸다. 이듬해 여기에서 자라난 갈대가 바람에 나부끼면서 왕의 비밀을 속삭이니 소문이 나라 안팎으로 좍 퍼졌다. 이발사는 결국 화가 난 미다스에 의해 황소피를 마시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아드메토스
아드메토스(Admetus)는 페레스와 클류메네의 아들로 테살리아 지방 페라이(아버지 이름을 딴 것이다) 나라의 왕이 되었다. 테스토르의 딸 테오네와 결혼하였으나 부인이 죽자 펠리아스의 딸 알케스티스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즈음하여 올림포스에서 쫓겨난 아폴론은 아드메토스의 양치기가 되어 그의 가축을 돌보고 있었는데 그에게 후히 대해준 대가로 모든 가축으로 하여금 쌍으로 새끼를 낳게 하여 수를 늘려 주고 아드메토스의 혼인이 성사되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잔치석상에서 포도주에 취한 모이라이로부터 아드메토스 왕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 즉 아드메토스의 죽음을 대신해 줄 사람이 있으면 죽지 않아도 된다는 정보를 얻어내 전해주었다. 과연 아직 젊은 나이의 아드메토스가 죽게 되었는데 부인 알케스티스가 사랑으로 기꺼이 대신 죽어 아드메토스의 생명을 구하였다. 여기에 첨가된 이야기에 의하면 마침 이 곳을 방문한 헤라클레스가 이 아름다운 미담을 듣게 되자 명계에서 알케스티스를 다시 데려와 아드메토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드메토스는 아르고 호 원정대에 가담하고 칼류돈의 멧돼지 사냥에도 참가하였다.
알케스티스
알케스티스(Alcestis)는 펠리아스와 아낙시비아의 딸로, 페라이의 왕 아드메토스의 왕비가 되었다. 결혼 전에 알케스티스 자매는 아비의 젊음과 활력을 되찾게 할 수 있다는 여자 마술사 메데이아의 꾐에 넘어가 아비를 살해하였다. 엄청난 범행의 두려움 때문에 자매는 아드메토스 왕실로 도피하고 거기서 아드메토스와 결혼을 하였다. 그런데 형제인 아카스토스가 죄인을 잡는다고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공격을 가하여 아드메토스를 포로로 삼았다. 알케스티스는 푸짐한 보상을 베풀어 남편을 살려 낸 후 자신은 아비의 넋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자진 희생되었다.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펠리아스는 혼기가 찬 공주 알케스티스의 신랑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사자와 멧돼지가 끄는 전차를 몰 수 있어야 한다는 참으로 어렵고 기상천외한 숙제를 내걸었다. 아드메토스는 아폴론 신의 도움을 받아 이일에 성공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았다. 당시 아폴론은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가 제우스의 벼락으로 죽자 벼락을 만든 큐클로페스를 멸망시킨 벌을 받아 아드메토스의 노예로서 9년간 귀양살이를 했는데 아드메토스가 호의를 베풀어 준 보상으로 사자와 멧돼지가 끄는 전차를 달릴 수 있게 해준 것이다. 결혼잔치에서도 아폴론은 운명의 여신 모이라이를 취하게 하여 아드메토스가 타계하는 순번이 될 때 만약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대신 보내면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그리고 아드메토스가 죽게 되자 대신 죽어 줄 사람을 물색하여 먼저 그의 노친에게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런데 마침 옆에서 듣고 있던 정절의 부인 알케스티스가 기꺼이 대신 죽는 희생심을 발휘하였다. 그야말로 미담의 극치이다.
에우라피데스의 극작이 공연되면서 이야기는 계속 덧붙여졌다. 즉 알케스티스가 임종하던 참에 마침 헤라클레스가 찾아왔다가 사정을 듣고 감동하여 죽음의 정령 타나토스에게서 그녀를 빼앗아 되살려 냈던 것이다. 또 다른 설에서는 명계의 왕비 페르세포네가 그녀의 자진 희생에 동정해서 다시 이승으로 보냈다고도 한다. 남편을 위해 용감히 자신을 희생하는 이 아내의 이야기는 더 윤색되면서 남편은 자기의 이기주의는 제쳐놓고 노부에게 대신 명계로 가지 않는다고 비난을 가하는 뻔뻔스러운 인간성의 일면을 우스꽝스럽게 전개시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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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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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행복의 비밀
6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행복과 불행은 서로 자리를 바꾼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조력과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 성공했다고 해서 자만하거나 실패로 좌절할 필요는 없다. 성공과 실패는 행복과 불행처럼 번갈아가면서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성공이나 실패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7
지적인 생활은 우리에게 행복을 선물한다. 지적인 생활을 누리거나 즐기려면 비범한 정신적 소양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친 지적 활동은 도리어 불행을 초래하기 쉽다. 지나친 지적 활동은 일상생활의 혼돈과 소란을 감당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적인 풍요로움과 현실의 활동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지만 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8
시야가 좁을수록 행동의 범위가 작을수록 우리는 더욱 편안하게 행복을 느낀다. 시야와 행동의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그만큼의 걱정과 욕망이 증가하기 때문에 만족을 쉽게 얻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행하지 않다. 인생의 노년기가 청년기에 비해 비극적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9
마음의 동요가 적을수록 고통도 줄어든다. 행복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활동의 영역을 좁히면 외부의 자극에 대한 마음의 동요를 줄일 수 있으며, 정신적인 활동을 제한하면 불안에 대한 자극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활동의 제한은 안정을 주는 대신 우리를 권태에 빠지게 한다.
10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특별한 쾌감을 느끼는 것은 단조로움이 행복의 요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행복은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우러난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생활은 삶의 무거운 짐을 덜어준다. 단순함을 실개천에 비유한다면 이 실개천은 사나운 풍랑에도 변함없이 조용하게 흘러 바다에 이르는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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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한국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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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 이영신
제 1 부 쿠데타의 새벽 (1)
1. H아워에 출동하라!
2. 박 장군, 지금 당신은 어디에......?
제6관구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은 그룹 멤버들은 자기 방에서 대기하도록 이른 다음, 사령부 참모들을 부사령관실에 모이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그는 본부사령 계충의에게 명령했다.
"지금 곧 병력 2개 소대를 차출해서 완전무장시켜 사령부 외곽경비를 담당케 하고, 또한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에게 권총과 칼빈총을 지급하라."
이때 당직사령 이경화가 들어왔다. 그는 김재춘이 귀대하기까지 참모총장 장도영과 사령관 서종철한테서 몇 차례 전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지금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어디 계신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수시로 전화 주시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령부에 나타났다 하면 어차피 체포를 해서 어디엔가 감금을 해야 한다. 그래도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처지, 아무리 혁명을 일으키는 마당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상관을 체포해야 한다는 것이 말과 같이그리 쉬운 노릇인가. (차라리 잘된 일이야.) 김재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김재춘의 입장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르나 역사(歷史)의 입장으로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이 시간 6관구 사령부 안에 있어야 한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분명히 <지금 귀관의 사령부 안에서 반란 모의가 진행중에 있다는 >라고 서종철에게 명령했었다. 그랬는데도 그는 어째서 이 자리에 나타나 있지 않았는가?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겁을 집어먹고 감히 귀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제6관구 예하의 부대로 피신해서 반란모의를 진압할 대책을 강구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서종철은 전화를 통해서 김재춘에게 부대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참모장 김재춘은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이었다면 반란모의자들에 의해서 김재춘이 체포당했을 법한 일인데 그는 무사했고 사령관의 전화까지를 받지 않는가? 사령부에 나타났어야 옳았다. 그랬어야 군인으로서의 그의 자세는 당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지껏 이 시간까지, H아워가 지난 시간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명령 불복종죄>를 저질렀고 <직무유기>를 범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육군 소장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임명됐다고 해서 누구나 별을 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성 심사위원회 위원들한테 돈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니며 뇌물로써 별을 단 것이 아닌 이상에는 그만한 능력이 인정되어 별을 달았을 것이다. 그런 능력 있는 서종철이 반란을 진압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지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화를 끊자, 그는 제6관구 사령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차를 몰아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조 장군,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6관구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이라니? 오늘 퇴근하는 그 시간까지도 반란 같은 징후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모르겠소. 꼭 도깨비한테 홀린 듯한 느낌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총장은 즉시 헌병을 동원해서 반란모의자를 체포하라는 추상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헌병을 6관구 사령부로 보내기는 보냈습니까?"
"예, 보냈습니다."
조흥만이 헌병을 급파했다고 말하자, 서종철은 제6관구 상황이 어찌돼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제6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김재춘을 찾았으나 부재중이라고 했다. 5분 간격으로 계속 다이알을 돌려 김재춘을 찾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당직사령을 불러 명령했다.
"즉각 비상을 걸어 각급 참모들을 전원 소집하고 참모장이 귀대하면 보고하도록 하라!"
김재춘이 귀대하거든 귀대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보고하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비상을 건 사실을 참모장한테 보고하라는 소리인가? 하여간에 서종철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 9시에서 9시 반 사이, 그리고는 그는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춘이 귀대하기 전 헌병감 조흥만이 급파한 헌병감실 수사관 70명은 이미 제6관구 사령부에 도착해 있었다. 헌병감실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한 지휘자는 헌병차감 대령 이광선(李光善)이었다.
"이 대령, 귀관은 지금 즉시 수사요원들을 대동, 제6관구 사령부로 긴급 출동해서 거기에 모여 있는 쿠데타 관련 장교들을 전원 체포해 오시오."
사령부로 급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허나, 그들로서는 누가 반란음모자들인지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얼키고 설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재춘은 쿠데타 그룹 멤버들을 참모장실에 대기시켜 놓은 다음 헌병감실에서 파견한 수사요원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다. 우선은 옥석을 구분해야 제관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될 줄로 안다. 나 역시 지금으로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귀관들은 잠시 저기 창고에 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라!"
제6관구 사령부 건물 옆에는 김재춘은 특파된 수사요원들을 모조리 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앞으로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위치를 이탈하지 말라! 알겠나?" 하고, 엄명까지 내렸다. 김재춘의 이 조치로 일단은 위급한 상황은 모면한 셈이었다. 이때가 10시경이었다. 수사요원들을 창고에 연금시키고 나자 김재춘은 즉시 신당동 집의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30사단의 부사단장하고 참모장이란 놈이 사단장한테 밀고를 하는 바람에 일이 탄로났습니다. 그래서 30사단 출동도 어렵게 되었고, 지금 제6관구 사령부는 뒤죽박죽입니다."
"탄로가 났다고?"
"네, 각하!"
박정희의 두번째 반문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듯한 목소리였다.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간신히 말소리가 이어졌다.
"알겠소, 내 곧 그리로 가겠소."
박정희와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자 김재춘은 이번에는 이광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광선은 김재춘과 육사 5기동기였다.
"여보 이 대령, 박 장군하고 통화내용을 들어 알겠지만 이 쿠데타는 박 장군이 주도해서 일으키려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헌병감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겠지만 사실은 자온영 총장 각하께서도 우리를 은근히 지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러니 헌병감의 명령을 수행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협력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광선은 난처하기만 했다. 그는 처음 제6관구 사령부로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달려왔을 때에는 누가 쿠데타 모의자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흥만이 그를 보낼 때, 쿠데타 음모자들은 이러저러한 장교들이라고 이름을 분명히 밝혀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덮어놓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해서 쿠데타 음모자들을 잡아오라고 막연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가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치는 즉시로 체포의 손길을 뻗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자들이 쿠데타 음모자들이냐 하는 것은 대강 눈치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령을 수행하려 하는데 김재춘이 수사요원들을... 이광선은 김 대령이 자기의 사령부에서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을 알고 책임상 자기 스스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사요원들을 창고로 몰아넣고는 박정희에게 쿠데타가 탄로났다고 전화보고를 하는 게 아닌가. 전화보고를 들으면서 이광선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듯한 느낌이었다. (김 대령도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김 대령이 쿠데타 음모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상에는 동기생이라는 정에 이끌려 방치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광선이 이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는데, 김재춘이 그를 붙들고 설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광선은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이며, 재령 명신중학교를 나왔다. 황해도인을 가리켜 석전경우(石田耕牛) 운운하고 있지만 순수 황해도 토박이는 사람됨이 여간 무르지가 않다. 이광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자꾸 <김재춘은 동기생인데> 하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재춘의 입을 막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눈치챘는가? 김재춘이 더욱 열을 올리며 그를 설득하였다.
"이 대령, 우리하고 손을 잡읍시다. 우리가 왜 쿠데타를 하려고 하는지는 이 정권을 이대로 놔두다간 안 되기 때문이오. 그래 군인이 돼 가지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겠소?"
"어찌된 노릇이야, 죽든 살든 나오겠다고 했으면 나와야 할 게 아냐?"
김재춘은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곤두섰다. 당초의 계획은 박정희는 H아워 직전까지 제6관구 사령부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박정희가 H아워까지 나오지 못한 것은 김재춘이 혁명모의가 누설됐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차질은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나오겠다고 약속한 있어야 옳았다. 그런데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여지껏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으니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혹시 출동하다가 방첩대에 체포된 것이나 아닐까?) 자꾸만 체포됐을 것이라는 상념만이 일었다. 쿠데타 모의가 밀고된 이상에는주모자가 누구라는 것도 밀고됐을 것이고, 그러고 보면 방첩대에 체포당했을 가능성이 너무나 짙었다. (빌어먹을, 사람의 애간장을 이렇게 태우다니?) 김재춘은 연방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다시 한번 확인할 양으로 신당동 집에 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陸英修)였다. 그녀의 대답은 떠난 지가 한 시간 가량이나 됐다는 것이다. 신당동에서 이태원을 거쳐 영등포 제6관구 사령부까지 오는 데 30분이면 넉넉했다. 집을 떠난 지가 한 시간 가량이나 됐는데도 여지껏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사고임이 분명했다. 김재춘의 마음은 또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박정희가 갔을 만한 곳에 전화를 걸어 수소문해 보았다. 여전히 오리무중일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혁명 총지휘자가 거사시간이 넘어도 지휘소에 나타나지를 않고, 그래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김재춘은 치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참모장님, 뭐라 지시를 내려주셔야..."
비상소집에 응해서 허둥대며 달려온 제6관구 사령부 소속 장교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지시가 없는 데에 뭔가 이상한 공기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육군본부에서 비상소집을 감독하러 나왔다는 장교들도 참모장실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헌병감실 수사관들은 무엇 때문에 출동을 했고 참모장은 왜 그들을 제사공장 창고에 쓸어 넣었는가? 모든 움직임이 수상쩍게 보여졌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참모장님......."
"별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김재춘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박 장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김재춘의 속은 자꾸만 타들어갔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붙기조차 했다.
3. 버마식 쿠데타
박정희는 D데이 H아워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동정을 살펴보기 전에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리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D데이에 이르기까지 장면 정권의 수사기관에서는 여기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던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다. 장면 정권하의 수사기관에서도 정보는 입수해 놓고 있었다. 그 내용은 국무총리 장면에게까지 보고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좋을 것 같다.
장도영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1960년 8월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할 때의 장도영의 계급은 육군 중장으로서 대구에 있는 제2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출신으로서 관서(關西)의 명문인 신의주 동중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도요(東洋)대학 영문학부에 진학했다. 당시 도요대학은 삼류급에 속하는 대학이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에 학병으로 끌려나갔다. 다행히 종전이 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교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했다. 이때 신의주 학생사건이 터졌다. 1945년 11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주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자연 혐의가 씌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체없이 38선 이남으로 월남을 해버렸다. 그러나 서울에 생활 근거가 없는 그로서는 호구지책을 마련할 길조차 막연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처지의 북한 출신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군대에 들어감으로써 호구지책을 세울결심을 했다. 그가 월남해 왔을 그 무렵 때마침 미군정에서는 군정법령 제28호로국방사령부를 설치한 다음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개설,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해독하는 미군 지휘관의 목적이었다.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이었다. 이렇게 군사경험이 있는 자들 가운데서 60명을 선발, 1945년 1월 14일,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미 군정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을 그들의 예전의 군사 경력을 참작해서 육군 소위에서대령까지의 계급을 주어 임관시켰다. 장도영은 1946년 1월 15일부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이때는 경비대 창설 초기라 장도영은 마치 우후죽순처럼 계급이 뻗어올라가 한국전쟁을 치르고 4.19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들어설 무렵에는 벌써 별이 세 개나 되는 육군 중장에까지... 한데, 장도영이 별을 단 직후부터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는 <정치 장군>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여진 까닭인즉,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인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景武臺)라 불리던 국회의장 이기붕의 집에 이들 부부가 무시로 출입하며 이기붕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셨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가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서 이기붕의 집을 드나들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장인인 백기호(白基昊)는 이기붕과는 일제 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 그래서 이기붕 또한 백기호의 딸이자 장도영의 아내를 친조카딸처럼 대하고 있어 서대문 경무대를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들만이 살고 있지는 않다.
"장도영이 그 작자 권력에나 아첨을 하고 있고, 그래 가지고서야 국군의 체면이 뭐가 돼?"
이래서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권좌에서 밀려났고 그와 함께 자유당 정권은 망해버렸다. 난처해진 것은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장도영이었다. 세상에서는 그가 육군 중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기붕이가 뒤에서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겠지?) 자신의 처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정군(整軍)을 주장하고 나서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정치 장군으로 낙인찍혀 있는 그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몰골 사납게 젊은 장교들한테 쫓겨나기보다는 스스로 내 발로 걸어나가자.) 장도영은 끝내 결심을 굳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심을 굳히고 나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1개월 가까이 된 1960년 9월 17일, 육군 참모총장인 최경록(崔景祿)에게 예편원을 제출했다. 막상 예편원을 제출하고 나니 아쉬움만이 남았다. 이때 그의 보직은 제2군 사령관으로서 운이 좋으면 곧바로 육군 참모총장읗 했다. (끝내 육군 참모총장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고 말아야 하나?) 그의 꿈은 육군의 총수인 참모총장까지 승진하는 일이었다. 하기야 별을 단 장군치고 육군 참모총장이 되는 것이 꿈이 아닌 장군은 없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육군 참모총장 의자 근처에 접근도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장도영이 서울로 올라와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예편신청을 내고 대구로 내려왔는데, 10여 일 뒤 최경록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장 장군, 당신의 예편신청서는..."
"반려되었다구요?"
장도영은 속으로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소, 그러니 장 장군, 당분간 예편을 잊고 현직에 더욱 더 충실해 주시면 고맙겠소."
최경록은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그것도 별을 두 개나 셋을 단 장군이 예편원을 내면 군말없이 즉각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였다. 이종찬, 백선엽(白善燁), 유재흥(劉載興) 등 6.25한국전쟁의 영웅들이 4.19 이후의 사회분위기에 밀려 예편해야 했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장군다운 장군들도 군말없이 예편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정치 해서 예편원이 반려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내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었다. 미국 유학 출신인 그의 아내는 영어가 능통했다. 그로 인해서 한.미 고급 장성들이 부부동반으로 파티를 가질 때는 장도영의 아내는 단연 으뜸가는 스타였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군 장성들 가운데서는 장도영만큼 미 8군 장성들과 친숙한 장군도 없었다. 아내가 발 벗고 나서 주었다.
"젊은 장교들이 부패 장군, 정치 장군 나가라는 소리가 드높지만 저의 남편만큼 오로지 군의 발전을 위해서 수고한 장군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의 남편은 후배들한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면서 에편원을 냈습니다. 지금 한창 말입니다. 장군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먹힙니까?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들어진 장군인데 이제 젊은 장교들의 성토 소리가 높다해서 군을 떠나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옳은 말이었다. 장군 하나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 더구나 장도영은 아직도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인 38살이다. 한국군의 인사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 8군의 수뇌들은 장면 정권에 장도영 장군을 예편시켜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압력을 넣었다.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했던 장도영 또한 영어가 능통했다. 한국 장성들 가운데에는 장도영만큼 영어에 능통했던 장군도 없었다. 그 영어 하나 잘하고 있던<유능한 한국군 장성>으로 인정을 받고있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장도영은 아내의 이면공작과 그의 유창한 영어 덕분에 군에서 밀려나는 치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장도영이 낸 예편원이 수리되었더라면 박정희의 운명 또한 삼백육십도로 뒤바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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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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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욕망 - 마르틴 콜랭
제 2 부
정념, 학문의 새로운 대상
인간본성에 대한 연구는 16, 17세기에 다시금 관심을 끌게 되었다. 몽테뉴는 인간의 조건에 대한 프로필을 세우려고 하였다. 파스칼과 말브랑슈는 자연에 대한 최초의 합리적인 학문을 이룩한 한 세기에 있어서 인간에 관한 학문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인간이 현실 속에서 연장하려는 소망은 크고 너무나 빨리 바뀌어지며 다양해서, 이 소망은 그때까지 수학과 물리학을 지배하고 있었던 엄격성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만일 격렬하고 변덕스러우며 분석하기에 곤란한 인간의 정념이 사실은 외부적이라고 하는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따서 고유성에 근거하며 항구불변한 메카니즘을 숨기고 있다면 어떠할까? 고전적인 희곡(라신느, 꼬르네이유)과 도덕론자들(moralist-라 로슈푸고, 파스칼)은 정념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갈등과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을 날카롭게 비난한다. 도덕은 정념의 힘과 싸워 이겨 인간을 이성에 꼭 붙들어 매어 놓을 만큼 충분히 강한 것인가? 정념은 그것을 체험하여서 자제력을 잃어버린 인간을 위협한다. 이러한 위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최선의 방법은 도덕론자나 심리학자로서가 아닌 학자의 입장에서-즉, 원인을 구명함으로써-정념의 메카니즘을 앎으로써 그 위험을 예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신느와 라 로슈푸코가 인간 자신의 욕망에 의한 인간의 소외를 밝히려 했던 시기에 데카르트(1596-1677)와 스피노자(1632-1677)는 그들이 자연에 관해 가졌던 물리학자의 입장을 정념에 대하여도 그대로 견지하여 그 원인을 설명해 보고자 하였다.
1. 데카르트:의지의 절대적인 힘
이론적 토대
욕망과 정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점들(고대에서는 이 두 개념이 매우 흡사하게 혼동되었다)은 육체와 영혼에 대해 그리고 질서 있는 세계 전체 속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내려진 판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17세기초에는 각각의 요소들이 전체의 계획 속에서 미리 예정된 위치에 자리를 잡는 뚜렷한 등급의 우주 Cosmos 대신에 세계의 수학적인 구성과 그 표현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사물들은 운동법칙에 의해 지배되며 계산에 의해 표현되는 관계를 갖는 질료material의 동질 부분들로 이해된다. 사물들이 움직이는 공간은 기하학적인 좌표로 이해되며 그들의 움직임은 궤도를 형성한다. 물리학이 학문으로 성립되면서 물체간의 운동에 대한 연구가 행하여졌다. 이 운동은 엄밀한 기하학적인 운동이므로 물리학은 수학을 질료에 적용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갈릴레이는 물체 낙하 운동의 법칙, 즉 두 가지 변수(여기서는 공간과 시간)간의 계산될 수 있는 관계에 대하여 처음으로 언급하였다. 데카르트는 자연의 법칙(세 가지의)이라고 명명한 분명한 원리를 도출해 내었는데, 이 속에 고전 역학의 기본인 관성의 원리가 포함된다.
-자연의 지배자, 소유자
자연의 묘사에 대한 이러한 수정은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한 가운데에서 구성되어진다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인간은 자연의 통치자, 소유자가 되려고 하며 세계를 향해 과감히 개방적인 태도로 그의 행동법칙을 제한하고 규정하려는 외부의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다. 그리하여 인식에서부터 행동으로의, 다시 말하자면 이론에서부터 실천으로 옮겨가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옳다고 판정한 것에만 복종을 하게 되고, 이제부터는 행동하기 위해서 알고자 하며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능한 한 가장 좋은 것을 인식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인생에 있어서의 행동과 이 행동의 법칙들(즉, 도덕)은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과 직접 연관되며 인간도 역시 자연의 한 구성요소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도 자연의 다른 사물들처럼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소크라테스의 교훈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리키게 되었다. 철학자들의 명상에 의해 얻어진 인식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의한 인식으로의 전환은 분석의 대상과 방법론적인 변화를 모두 의미한다. 이전에는 물리학이 도덕의 직접적인 토대가 되었지만, 데카르트에 와서는 물리학이 그의 욕망을 조절해야 할 육체에 대해 필수적인 인식을 얻게 해주는 의학을 만들어 낸다. 고로 이 의학은 도덕을 뒷받침해 주고, 육체의 건강 없이는 영혼의 의학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도덕, 지혜의 최고 단계
과학이 도덕을 대신할 수는 없다. 도덕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도덕이 인식과는 별개의 동떨어진 영역을 구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도덕은 과학 속에 위치해야 하며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점이 제기된다.
-인간 행동에 관한 것으로는 어떠한 과학이 있는가?
-이것이 다른 과학들간에서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데카르트는 이렇게 대답한다
"도덕은 가장 완벽한 최고의 과학이다. 도덕은 학문의 체계를 완성하여,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된다. 그 뿌리는 형이상학이요, 그 줄기는 물리학인데, 이 줄기로부터 뻗어 나오는 가지는 각각 다른 학문으로서 세 가지 열매, 즉 의학, 역학 및 도덕을 맺는다. 다른 학문들을 총괄적으로 인식한다고 가정할 때, 가장 고상하고 가장 완벽한 도덕은 지혜의 최고 단계이다" R. 데카르트, "철학원리 서문"
명석과 판명에 있어서 도덕은 다른 학문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도덕은 오히려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므로 목적과 그에 따른 일이 중요하다. 즉,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인식해야 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정확히 측량하며 그 힘을 좀 더 실재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성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러한 실재성의 요구는 합리성의 요구와 혼동된다. 물리학과 의학에 의해 정보를 받은 도덕은 인간이 욕망을 느끼고 필수적인 정념을 가지며, 이 정념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무시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식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유형을 만들어 놓고는 인간본성의 불완전한 모습은 내던져 버린 채 그 만들어진인간형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전통적인 도덕과는 전혀 다른 발전이었다. 그러나 물리학과 의학은 겨우 학문으로 성립되기 시작한 상태였고, 인생은 인식이 명백히 밝혀 주고 인도해 주기를 무한히 기다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절박한 상태를 자각한 데카르트는, 개인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경우를 위해 몇 가지 도덕적 준칙을 마련해 놓았다. 그는 이 금언들 덕택에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이 금언들 중 가장 훌륭한 것을 보도록 하자.
"세계의 질서를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욕망을 바꾸라"
-"나의 세번째 준칙은 운명을 이기느니 차라리 나 자신을 자제하고, 세계의 질서를 바꾸느니 차라리 나의 욕망을 바꾸려고 항상 애쓰는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우리의 능력에 완전히 따르는 것은 없다고 믿으며, 우리의 사고가 우리가 외부의 사물들과 접촉하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한 후에 성공할 뻔했던 것은 모두 우리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또한 이것만이 앞으로 내가 가질 수 있다고 욕망하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막아 주며 그럼으로써 나에게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여지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의 의지는 원래부터 우리의 오성이 어떤 점에서는 가능하다고 의지에게 판단 내린 것만을 욕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외부에 있는 모든 선을 모두 우리 능력으론 미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러한 것들을 빼앗겼거나 중국이나 멕시코와 같은 왕국을 소유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출생에 기인한 것들의 결핍에 대해 더 이상 한탄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필수적인 것을 덕행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병들어 있으면서도 건강해지기를 더 이상 욕망하지 않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유롭게 놓여 나기를 욕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부패하지 않는 육체, 또는 새처럼 날 수 있는 날개를 가지게 된 것이다" R. 데카르트, "방법서설"
처음 언뜻 보아서는 데카르트적인 입장을 체념이나 기성관념의 추종에서 분리시키는 것과 비밀이나 고행적인 도덕과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데카르트는 매우 용의주도하게 나태함과 무기력을 정당화시키고 세상에 대해 그 속에서 상연되는 희극들을 보는 관객의 태도를 취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데카르트는, 미덕이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찾아내고 신의 섭리라는 질서의 좁은 그물코 속으로 정확히 끼어 들어가 그 안에서 잘 지내는 데에 있다고 믿었던 스토아 학파의 명상적 이상으로 다시 귀환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원문을 좀 더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위의 것들은 모두 틀린 해석이며 데카르트의 이론적 혁명이 그의 움직임 속에서 실천적 영역을 이끌어 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을 분명히 구분지었다. 인간은 하나의 영역 속에서 다른 영역 속에서와 동일한 정확성을 가지고 도달되어지기를 바랄 수는 없다. 만일 확정적이거나 명백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어떠한 판단에도 동의를 하지 말라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면, 우리의 경험상 일상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것 중에서 진실 되게 보이는 견해에만 잘 관여해야 한다. 첫번째의 경우에는 우리의 오성이 참이라고 결정 내리지 않는 한 우리의 판단, 다시 말해서 동의를 보류해야만 한다. 두번째 경우에서는 위와 반대로 생활의 어쩔 수 없는 유혹에 대해 때로는 재빠르게 응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과 관습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에서 다른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따뜻이 덥혀진 방안에서 진리만 탐구하도록 제한을 받는 철학자가 아니다. 비록 습관의 명령이 이성의 명령과 같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은 둘다 생존하고 인식하기 위해 복종해야만 하는 명령, 즉 불가피한 욕구들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은 우리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도덕을 따르는 것처럼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어야 한다. 진리의 규칙을 무시하는 체하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도덕의 규칙을 무시하게 되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법률을 무시하려 할 때에는 서둘러 정숙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이 인식과 행동에 어떠한 힘을 미치는지 확실히 알아야만 한다.
- 능력과 욕망
인간의 오성은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인식하지는 못한다(한계가 있다). 또한 오성이 그의 한계를 넘으려고 한다면 사물들의 내부에서 작용하도록 갖고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인식하기 이전에 인간이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소망은 한이 없고 천성적으로 모든 한계를 뛰어넘고 싶어한다. 우리가 소망하거나 욕망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망하는 것이 곧 소유하는 것은 아니며 소유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능력 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세계나 타인들, 법률이나 관습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것은, 단지 이것 혹은 저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뿐이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이 문제는 단순하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만을 욕망 해야 한다. 하지만 행복을 원하고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자제할 수 있을 것인가? 때때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그 욕망을 어떻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욕망이란 내 자신에게 속해서 나에 의해서만 좌지우지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욕망은 엄밀히 비판해 보면 편견이나 자기도 모르게 붙어 버린 습관에 지나지 않는 대부분의 사고처럼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도 일종의 사고이며 또한 바뀔 수가 있다.
데카르트가 사고한다는 것이 인간의 본질에 속하며 이 사고행위만이 인간을 특징지어 준다고 했을 때, 사고행위가 직관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이 행위는 그 형태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오성의 작용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 된다. "성찰" 2권에서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사유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회의하고, 인지하고, 긍정하고, 부인하고, 원하거나, 원하지 않고, 또한 상상하며, 감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욕망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에게 있어 욕망을 느끼는 것이란 소망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존재 깊숙이 뿌리 박혀서 그 욕망의 거역할 수 없는 충동이 우리의 존재 표면에 샘솟아 나오는 막연한 힘이 아니다. 욕망은 특수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닌 신체조직의 욕구나 소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배고픔이나 갈증 같은 욕구가 아닌 의지의 움직임이다.
- 모든 욕망을 버리라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유형을 구분해야 한다 : 우리의 권한에 완전히 속하는 것과 완전히 속하지 않는 것. 데카르트는 뒤의 것을 외부적인 것이라고 명명하면서 이 두 가지를 철저히 구분하였다. 이 외부적인 것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우리는 창조자나 선동자가 아니다 : 키가 크거나 작게 태어나는 것, 아름답거나 못생기게, 병약하거나 건강하게 그리고 어느 나라, 어느 마을, 어느 가정에서 태어나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구성된 것은 우연이 어떻게 작용했는가에 따라 되어진 것이다.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부질없이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할 수 있을 뿐이다.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으므로 그것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간에 우리 자신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으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우리의 자질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외부의 사물들이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 이런 유의 사물들은 오직 우리에 의해 좌우되는 사물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 속한다. 외적인 사물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우리와 관계없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약 내가 중국이나 멕시코의 왕이 되기를 끈질기게 소원한다면 이는 내가 단지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또한 이러한 것들이 (적어도 출생에 관한 것에 대해서일 때) 불가역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쓰라림을 맛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확실히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므로써 더욱 허망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제기한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 우리의 욕망이 항상 만족하고 충족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도 마찬가지로 간단하다. 욕망과 그것에 대응하는 힘을 균등하게 하면서 이 둘을 일치시키도록 각각을 정확히 진술해야 할 것이다.
- 가능한 것을 원하라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원한다면 내 힘을 충분히 활용한다는 조건하에 언제나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의 힘을 넓이(연장)면에서 축소한다면(이것은 사물의 제한된 수를 포함할 것이다) 동시에 깊이에 있어서는 더 심오해지게 된다.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게 아니라(욕망은 환각을 품게 하여 실망을 느끼게끔 한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는 것만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오성의 전략을 인식할 수 있지 않는가? 즉, 모든 것을 알기보다는 하나를 완전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에게 없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은 완전히 빗나갔지만 (중국의 왕이 되거나, 새처럼 날개를 갖고자 하는 것 등) 다른 것들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것도 있다 (건강해지는 것, 자유로움). 어째서 앞의 것을 원하지 않고 뒤의 것만을 소원하는가? 앞의 것은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고 완전히 비현실적이며 허구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가능하게 보이는 것만을 소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것의 두 가지 양태를 구별해 보아야겠다.
- 확실히 도달할 수 있는 것(다시 말해서 오직 나 자신, 나의 생각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들).
-확실하게 도달할 수 없는 것, 즉 절대로 도달할 수 없다고 할 만한 것: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포기할 것이다.
- 자신에 대한 힘
가능한 것에 대해 욕망할 것을 규정하면서 나는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를 바꾸었다. 더 확장되고 불확실한 힘 대신에, 축소되었지만 매우 확실한 힘을 대체시킨 것이다. 즉, 나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세계를 바꾸려는 무능력함의 증거로 실망을 겪는 것 대신에, 나 자신에 대한 힘의 결과로 산출되는 만족감을 아는 것이다. 이러한 힘이야말로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확실한 힘이며, 탐구되고 시행되어져야 할 유일한 힘이기도 하다. 철학은 그 힘을 가르치고, 거기에 이르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철학이 연구대상으로 하는 지혜는 단순한 신중함과 혼동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혜는 삶을 이끌어 갈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고 모든 기술을 발명해 내기 위해서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다. 그래서 유명한 그의 방법론을 보자면, "철학하지 않고 사는 것은 마치 눈을 꼭 감은 채 떠보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의 눈을 사용하여 우리의 발길을 인도하는 일보다도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여 처신하기 위하여 더욱필요하다" 데카르트, "철학원리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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