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8호 2023.5.28 일요일 (음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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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발전이 아니라 그 부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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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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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위시 아파트
이런저런 일로 누군가 내 주소를 물어볼 때는 곤혹스럽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이 ‘아이 위시(I-Wish)’인데,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열에 여덟 아홉은 그 이름을 되물어 보기 때문이다. 자주 겪는 일이라서 내 영어 발음이 시원찮아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대개의 예상과 달리 아파트 이름에 영어 단어도 아닌, 영어 문장이 들어가 있어서다.
오래 전부터 아파트 건설사들은 아파트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아파트 이름을 영어식으로 지어 왔다. 우리말보다 영어 및 외국어가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우리의 언어 의식을 반영하여 그런 것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우리 아파트는 편의시설 대부분도 영어로 안내하고 있다. 주차장은 ‘파킹(Parking)’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방향을 각각 ‘인(in)’과 ‘아웃(out)’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급하게 휘어진 통로에는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의 안전을 위해 ‘슬로(slow)’로 서행 안내를 하고 있다. 비상구 표시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엑시트(Exit)’이다. 게다가 이 모든 영어는 알파벳만 적혀 있다.
우리 아파트는 외국인 전용 아파트가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아파트 이름뿐만 아니라 아파트 내 편의 시설 표시가 영어로 적혀 있다. 대외적 성격을 갖는 아파트 이름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아파트 내 편의 시설은 거주자의 편익을 우선으로 안내해야 하지 않을까?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시대가 되긴 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영어에 친숙한 건 아니다. 우리의 영어 사랑은 도를 넘었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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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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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편지 - 한용운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꼬밭 매던 호미를 놓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글씨는 가늘고 글줄은 많으나, 사연은 간단합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글은 짧을지라도 사연은 길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바느질 그릇을 치워놓고 떼어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나에게 잘 있느냐고만 묻고,
언제 오신다는 말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나의 일은 묻지 않더라도,
언제 오신다는 말은 먼저 썼을 터인데.
당신의 편지가 왔다기에 약을 달이다 말고 떼어 보았습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주소는 다른 나라의 군함입니다.
만일 님이 쓰신 편지이면 남의 군함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할 지라도
편지에는 군함에서 떠났다고 하였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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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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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6. 기러기의 큰 날개를 가졌어도 때를 만나지 못한다면(공손홍, 원고생, 동중서)
1) 높아지려거든 먼저 몸을 낮춰라(공손홍)
마흔에야 학문을 시작하다
공손홍은 젊어서 옥리로 있다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그 후 그는 바닷가에서 돼지를 키우며 가난하게 살았다. 마흔이 넘어서야 그는 비로소 "춘추"등 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무제가 즉위하고부터 학문을 장려하고 학자를 우대하게 되었다. 무제는 전국에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게 했는데, 이때 공손홍도 추천될 수 있었다. 그때 공손홍의 나이는 이미 예순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흉농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올린 보고서가 무제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무능자로 간주되어야 했다. 그러자 그는 병을 핑계삼아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5년이 지나 나라에서는 다시 선비를 추천하게 했는데, 공손홍은 또다시 추천되었다. 이에 공손홍은 거듭 사양했다.
"저는 전에 벼슬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무능한 탓으로 벼슬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다른 유능한 사람을 추천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 지방 유지들은 기어코 그를 추천했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올라갔는데, 각지에서 추천되어 올라온 선비들은 백여 명 쯤 되었다. 나라에서는 문제를 내어 답안을 써 보게 했는데, 공손홍의 성적은 그 중 하위였다. 그러나 그 답안들을 보던 황제는 공손홍의 답안을 으뜸이라 말하고 그를 불러 들였다. 그리고 황제는 공손홍의 의젓한 풍모가 매우 마음에 들어 박사에 임명하였다. 공손홍은 대인의 풍포를 지녔으며, 견문이 넓었다. 또 그는 언제나,
"임금의 병은 마음이 넓지 못한 데 있고, 신하의 병은 검소하고 절약할 줄 모르는 데 있다."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실제로 항상 베로 이불을 만들었으며, 상에는 한 접시 이상의 고기를 올려놓지 않았다. 그리고 계모가 죽었을 때도 3년상을 치렀다. 조정에서의 회의 때에는 어떤 문제에 대해 찬성할 수 있는 점과 찬성할 수 없는 점을 함께 말해 황제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갔다. 또 언제나 상대방의 잘못을 정면으로 지적하여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이는 일을 하지 않았다. 황제는 공손홍의 언행이 중후하고 여유 있으며 법률과 사무에 정통할 뿐 아니라 거기에 유학의 이념을 세련되게 가미하는 점을 매우 높이 평가해 그를 총애했다. 그는 또 자기의 제안이 황제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도 조정에서 캐고 따지는 일이 없었다. 그럴 때는 급암이라는 대신과 함께 황제가 한가한 틈에 찾아가 따로 만났다. 그때도 급암이 먼저 말을 꺼내고 자신은 뒤에 동의하는 식으로 했다. 그렇게 되면 황제는 언제나 기분 좋게 그것을 받아들이곤 했다.
학문이 성해야 천하가 태평하다
그 후 공손홍은 학문이 침체되어 있음을 걱정하여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폐하께서는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짐이 듣건대 백성을 이끄는 데 예절로 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데는 음악으로써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예절은 무너지고 음악은 쓰이지 않아 짐은 매우 슬퍼한다. 그래서 천하의 현명한 선비들을 빠짐없이 등용시키고자 한다. 이로써 학문을 권장하되 강론과 토의로 널리 가르치고, 예절을 일으켜 천하에 모범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박사나 제자들과 협의해서 학문을 널리 권장하여 현명한 인재를 배출시키라.' 원래 하, 은, 주 3대 때는 마을마다 학교가 있었습니다. 이를 하에서는 교, 은에서는 서, 주에서는 상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선은 천하에 널리 알리고, 반면 악은 엄격히 처벌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높은 덕을 밝히고 큰 지혜를 열어서 학문을 권장하고 예를 닦으며 어진 선비를 격려하시고 계십니다. 이야말로 태평성대의 근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바탕으로 하여 학문을 부흥시킬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백성 가운데 예의와 품행이 단정한 자를 뽑아 박사를 보좌하는 제자로 삼게 해 주시고, 어른을 공경하며 언행이 일치하는 젊은이들에게는 학업의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하여 1년이 지나면 모두 시험을 치르게 하여 뛰어난 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학업을 게을리 하거나 재주가 모자라는 자는 즉시 돌려보내십시오. 아울러 예를 다스리는 관리에게도 뛰어난 경우에는 승진과 연전의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경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사람부터 채용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폐하의 가르침과 베푸심이 아래 백성들에게까지 분명히 퍼지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난 무제는, "정말 좋은 제안이오."라고 승인하였다. 이때부터 천하의 뜻있는 사람들이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다.
자신을 높이려거든 먼저 낮춰라
언젠가 공손홍은 모든 대신들과 어떤 문제를 논의하다가 이렇게 황제에게 얘기하자고 합의해 놓고는 정작 황제 앞에 가서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급암이 황제에게 공손홍을 비난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공손홍은 처음에 신 등과 함께 이 계획을 세워놓고는 이제 와서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불충스런 행동입니다."
이에 황제가 공손홍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오?"
그러자 공손홍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신을 아는 사람은 신을 충성되다고 생각합니다만, 신을 모르는 사람은 불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공손홍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뒤부터 주위의 대신들이 공손홍을 헐뜯어도 황제는 더욱 그를 총애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승상 다음으로 높은 자리인 어사대부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한나라는 북쪽 국경 지방의 삭방군에 성을 쌓고 있었다. 이때 공손홍은 그것이 별 필요없는 일에 국력을 소모하게 만들어 결국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 뿐이라며 몇 번에 걸쳐 황제에게 중지하자고 간언했다. 그러자 황제는 주매신 등에게 명령하여 공손홍을 비판케 하고 삭방군을 방어해서 얻는 이점 10가지를 제시하도록 했다. 이쯤되자 공손홍은 한마디 변명조차 않고 이렇게 사죄했다.
"신은 산동의 촌사람이라 그 이익이 그토록 클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삭방군을 튼튼히 다스리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급암이 또다시 공손홍을 비난했다.
"공손홍은 지위가 삼공에 있으며, 그 봉록도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도 베를 이불 삼아 덮고 있으니, 이는 거짓된 행동입니다."
이 말에 황제가 과연 사실이냐고 공손홍에게 묻자, 그는 사죄하며 대답했다.
"급암의 비판은 옳습니다. 지금 조정 대신 중 급암처럼 신과 친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 조정에서 신을 비판했는데, 그것은 참으로 신의 결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신이 3공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베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은 참으로 마음에도 없는 일을 하여 겉치레를 하며, 이름을 날려 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오나 관중은 재상이 되어 세 부인에게 살림을 차려 주며, 그 사치한 생활이 임금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이는 임금에 대해 잘못된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안영은 재상이 되었지만 밥상에 두 가지 고기 반찬을 놓지 않았으며, 부인에게 비단 옷을 입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래로 백성들의 생활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지금 신은 어사대부의 지위에 있으면서 베 이불을 덮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3공에서 말단 관리까지 차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급암의 말과 같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만약 급암의 충성이 아니었던들 폐하께서 어떻게 이런 말을 들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에 황제는 그의 겸손함을 더욱 높이 평가하여 후대하더니 마침내 그를 승상에 임명하였다. 그 당시 승상은 제후가 아니고서는 임명되지 않았던 것인데, 공손홍이 승상으로 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공손홍은 이렇듯 겸손하고 또 겉으로 너그러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음흉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자기와 사이가 안 좋은 사람에게도 겉으로는 친한 척했지만, 반드시 그를 보복했다. 그래서 주보언을 죽이고 동중서를 귀양가게 만든 것도 모두 공손홍이 한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밥상에는 고기를 한 가지 밖에 놓지 않았고 현미로 밥을 지어 먹었으며, 한편 옛 친구나 친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있는 재산을 모두 털어 도와 주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재산이라곤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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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롱중물(藥籠中物)
藥:약 약. 籠:농 롱. 中:가운데 중. 物:만물 물.
[동의어] 약롱지물(藥籠之物). [참조] 양약고구(良藥苦口).
[출전]《唐書》〈狄仁傑專〉
약농 속의 약품이란 뜻으로, 항상 곁에 없어서는 안 될 긴요한 인물(심복)을 이르는 말.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628~683)의 황후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의 후궁이 된 그녀(무후)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才色)을 탐낸 고종의 명예 따라 환속(還俗), 그의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655)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많은 명신(名臣)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예종(叡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690~705)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 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狄仁傑:630~700)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잔인하고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원행충(元行沖)과 같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相公) 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良藥苦於口而利於病], 충언을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얄롱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임,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주] 적인걸 : 산서성(山西省) 사람. 당나라 고종(高宗) 때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 치적을 쌓은 뒤 위주 자사(魏州刺史)로 있을 때 거란의 침략군을 물리쳐 공을 세움. 재상으로 있을 때 즉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하여 그녀의 친조카인 무삼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고 당황실을 회복, 수호하는 데 힘씀. 이후 국로(國老)로 예우 받음. 예종(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됨.(63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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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그이가 그립습니다 - 이문희(여, 경남 김해시 구산동)
그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두 짝도 아닌 한 짝의 나무에 분홍 솜사탕을 감아 얼굴이 없는 낯선 사람과 먹는 꿈을 꾸었지요. 왜, 꿈속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미래에 신랑감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평소와 다른 꿈을 꾼 저는 늦잠으로 인해 아침을 굶은 원인도 있겠지만 달콤한 꿈 덕분에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지요. 중2학년 시절 키는 작지만(중1학년부터 고3학년까지 1번을 누구에게도 빼앗긴 적이 없음. 그래서 별명은 모나미였음) 얼굴은 이쁜 편인 저는 미팅에서 한 번의 낙오도 없었고 많게는 세 명의 남자가 저를 선택해 친구들로 하여금 미팅 0순위라는 얘기를 들어야 했지요. 오전 10시쯤 1교시를 마치고 우리의 여군단은 어제 보았던 연속극 얘기가 한창 흥미롭게 진행될 때쯤 쇼킹한 일이 터졌지요. 저희 학교는 여학교로서 학교가 생긴 이후로 남자 교생은 단 한번도 다녀간 일이 없는, 그런 면에서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그런 여학교였지요. 그런데 드디어 왔어요. 단 한명의 남자 교생, 그것도 2학년 10반 우리 반 임시담임으로 말이에요. 그때의 기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good"이었어요. 그 당시 전 제기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자존심상 허락하지 않았고, 남이 나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이치라는 자기도취 병이 중중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저에게 교생 선생님은 신이자 태양이었고, 사하라 사막에 작은 오아시스였지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교생 선생님의 얼굴이 어젯잠 꿈에 솜사탕을 나란히 먹던 남자로 합성이 되더니 급기야는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아! 이건 신이 나에게 내린 계시야. 매일 허구한날 쫓기는 꿈과 떨어지는 꿈을 반복해서 꾸더니, 키 크라고 그런 게 아니라 마음이 크라고, 아, 아! 신의 깊은 뜻을 모르고 일이 안 풀리면 꿈탓을 하다니 이 못난 여인을 용서하소서.' 저는 1번인 관계로 교생 선생님, 아니(이제 그이라고 부르리라) 그이의 귀밑에 점과 얼굴에 솜털, 그리고 중요한 숨소리와 수업중에 간간이 저를 행해 튀는 액체와도 접할 수 있었지요. 뒷자리에 키 큰 애들은 앞자리에 작은 우리를 부러워했고, 그 부러움은 자리를 바꿔 앉자는 말도 안되는, 아니 전혀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얘기들을 해 우리의 자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바꿔주는 대가로 매점에서 제일 인기있는 고로케가 오고 가곤 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콜라에서 햄버거로 햄버거에서 일주일 화장실 청소까지 흥정이 오고 갔지요.
저는 평소 작은 키를 원망했지만 이때처럼 저를 작게 낳아준 아빠, 엄마에게 특히 엄마에게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신들께 특히 삼신할머니께 감사하게 느낀 적은 없을 거예요. 그이의 출현으로 우리 교실에는 점심시간에만 간간이 이용되던 이 사이로 들어간 고춧가루 제거 작업용 거울이 만원사태였고 급기야는 우리의 피 같은 돈을 걷어 대형 거울로 교체되기까지도 했지요. 그이는 교내 인기투표 1위였고, 그이의 책상에는 항상 달콤한 사탕과 시원한 음료가 제공되는 특혜까지 받았지요. 순진한 구이는 그런 먹을 것에 대한 우리에 음모를 모르고 맛있게 아주 맛있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먹어 치웠지요. 그 당시 우리가 사탕과 음료를 선택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어요. 우선 사탕은 우리의 입에 잠시 머물게 한 후 정확히 말하자면 사탕에 새겨져 있는 무늬나 모양이 변하기 전 다시 종이에 예쁘게 넣었고, 음료수는 스트롱 혹은 빨대라고도 하는 것을 이용해 살짝 빨은 뒤, 입 속에 있는 무언 가와 같이 도로 병 속으로 넣는. 그런 작업이 쉬었지요. 즉 자세히 말하자면 간접키스를 하기에는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지요.
그이가 사탕과 음료를 먹을 때면 우리는 합창으로 고함에 가까운 함성을 질러댔고 그이는 우리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너희도 하나씩줄까? 먹고 싶은 사람 나와서 가져가. 맛있다 야!" 하지만 세상에 그걸 먹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또 혹 그이가 당직이라도 하는 날이면 평소 보충수업 땡땡이 군단은 언제 그랬냐는 둥 열심히 남는 일에 충실했고, 당직, 숙직실은 평소 질문이 없던 얘들까지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한 손엔 자판기 커피를 들고 일명 교과서 데이트를 했지요.
하지만 우리에 이런 짓궂은 애정+사랑 표시가 신의 노여움을 받았는지 일주일 전, 정확히 8일전, 우리의 보스인 진짜 담임이 맹장수술을 끝내고 실밥까지 모조리 풀어버리고 우리 앞에 선 것입니다. 왜 맹장 수술은 빨리 낫는지. 왜 실밥은 20일 아닌 7일 만에 풀러야 하는지.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원망했고, 또 학교로 돌아온 보스(별명 : 날으는 돈까스)를 너무나도 미워했습니다. 다시 한번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사탕에 침을 절대로 바르지 않으리라는 맹세도 했지만 벌써 한번 터진 맹장은 다시 터질 리가 없고 그렇다고 꿰맨 자리에 부작용은 더더욱 없을 테고. 아! 정말 그 8일은 행복했노라를 외치며 우리는 영원한 보스 날으는 돈까스를 쓴 웃음으로 반겨야 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심정을 알았는지 우리의 하늘 같은 보스는 그이를 종례와 조회용(?) 담임으로 임명하셨고, 보스의 교과인 영어를 직접 우리에게 가르치라는 자비로운 명을 내리셨지요. 이렇게 우리는 한달 동안 교생실습인 그이와 같이 할 수 있었지요. 비록 한 달 간의 우리의 일방적인 사랑이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저-어 끝에서 무엇인가 움직이는 듯한 감정을 느낍니다.
또 우리의 담임인 날으는 돈까스 보스님의 문병 때 안개꽃이 비싼 이유로 하얀 국화를 한아름 들고 가 욕을 바가지로 먹고 퇴장한 일이 생각나는군요. 사실 저희는 그때서야 흰 국화의 용도를 자세히 알 수 있었지요. 완전이 무식이 보초서고, 유식이 휴가 떠났냐는 보스의 말씀에 사모님께 매 맞지 않고 그곳을 떠나온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렇게 15년이 흐른 지금 우리의 보스는 교직을 떠나 서점을 하신다는데 잘 되시는지. 그리고 저에게 땅콩이란 별명을 없애고 예쁜 모나미라 지어주신 그이는 지금 한 여자의 사랑을 받는 한 왕국의 가장이 되어 있겠지요. 왜 저의 별명이 모나미인 줄 아시는지? 100원짜리 모나미 볼펜 옆에는 153이란 숫자가 써 있다나요. 저의 키가 153이거든요. 그때는 작은 키가 너무도 자랑스럽고 좋았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더. 키가 크면 얼마나 좋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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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4장 올림포스 신 시대 및 그 외 신들
3. 헤라
매우 오래된 옛 여신이며 그리스 이름은 존칭인 헤라(Hera, Juno)로만 통하고 원 이름은 모른다. 유사 전부터 있었던 종교를 그리스인이 내도하여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제우스의 누이이자 배우자이며, 자식으로는 아레스, 헤베, 헤파이스토스 및 에일레이튜이아가 있다. 올림포스 신 중 신성결혼의 수호신으로서 혼인한 여자의 생활을 각별히 보호하였다. 출생지는 아르고스 도는 사모스라고 전한다. 계절의 세 여신 호라이에게 위탁 양육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오케아노스와 테튜스가 키웠다고도 한다. 아르골리스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강의 신인 아스테리온의 세딸들이 길렀다고 하며, 아르카디아의 스튬팔로스 사람들은 바다의 신인 펠라스고스의 아들 테메노스가 보살피며 교육시켰다고 주장한다.
신화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헤라는 아버지인 크로노스가 삼켜 버렸는데 메티스가 마력을 가진 약을 주어, 제우스인 줄 알고 돌을 삼킨 크로노스를 토하게 할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헤라 여신은 새 중에서 매와 거위, 특히 공작을 좋아하였고 꽃으로는 박하, 앵속 및 백합을 좋아하였다. 특히 백합은 원래 사프란색이었으나 제우스가 자고 있는 헤라의 젖꼭지를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물려 빨게 하다 지상으로 떨어진 젖방울로 인해 지금처럼 순백색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청공으로 흐른 젖은 은하(Milky Way)로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다. 한편 신화상에 등장하는 헤라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으며 아이들에게도 애정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배우자도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데다가 부부싸움이 끊임없고 특히 외도가 심한 남편 제우스에 대한 격분과 질투가 심하여 상대여자는 물론 거기서 낳은 자식도 미원하고 원한을 품어 가혹하게 대하였다.
유사시대에도 사모스 섬과 아르고스 지방에서는 헤라 숭배가 성행하였다. 그녀의 출생지 중 하나로 꼽히는 사모스는 크로노스가 지배할 당시 헤라와 제우스가 비밀리에 처음 사랑을 나눈 곳이기도 해서 헤라 여신과는 관계가 깊다. 이는 아르고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이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아르고스 시에서 10km 북쪽에 위치한 옛 신전 헤라이움에서 제우스가 헤라를 유혹하였다 한다. 즉 어느 날 제우스는 눈부시게 화려한 헤라가 늘 산책하는 아르고스 뒷산에 가서 뻐꾹새로 변신하여 기다리다가 소나기에 흠뻑 젖었다. 소나기가 지나가지 때맞추어 헤라가 나타났고(후에 여기에 헤라 신전이 섰다) 비에 젖은 초라한 모습의 뻐꾹새는 헤라의 무릎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몸을 녹였다. 헤라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제우스와 엉키게 된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이는 제우스가 상습적으로 쓰는 유혹 방법으로, 헤라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설득하였다.
'일리아드' 속에서 헤라와 제우스는 항상 말다툼을 하고 서로 반대 입장에 서 있다. 헤라는 확고하게 아카이아(그리스) 편을 들었는데, 파리스와 헬레나가 신성한 결혼의 율법을 위배하여 자신을 성나게 하였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중립을 지키느라 애를 쓰면서도 과거 올림포스의 신들이 모두 자기에게 등을 돌릴 때 도와주었던 테티스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을 헤라는 제우스가 자신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헤라는 때로 여신 아프로디테로부터 빌린 허리띠를 무기로 남편을 매혹시켜 세력을 약화시키고 고집을 꺾기도 하였다.
아르고스에서 열리는 헤라 축제의 경우는 운동경기도 겸하였다. 일반적으로 헤라는 여라 나라의 여신과도 동일시되는데 특히 로마의 유노는 같은 여신으로 간주된다. 원래 유노는 에트루리아의 여신 우니에 기원하는데 로마인은 그녀를 충고하는 자라는 뜻의 모네타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오늘날 돈을 뜻하는 money는 이 모네타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옛날 카피톨리움 언덕의 유노 모네타 신전에 모마의 조폐소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헤라는 옛 조각상에서 홀을 쥐고 왕관을 쓴 여왕으로서 혼자 혹은 남편 제우스와 같이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나온 헬레니즘 원본의 로마 복제품인 캄파나 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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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1788∼1860)는 독일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위대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괴팅겐 대학에서 자연과학과 철학, 역사에 대한 지식을 익힌 그는 칸트의 인식론, 플라톤의 이데아론, 피히테와 헤겔, 인도 철학의 범신론과 염세관을 종합한 철학체계를 수립했다.
세계는 의지의 표현이고 모든 현상의 유일한 핵심은 바로 의지에서 비롯된다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생철학과 실존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바이마르에서 괴테와 두터운 친분을 맺고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그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하면서 독창적인 사상을 정립한다.「자연의 의지에 대하여」와「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여록과 보유」를 통해 사랑과 예술, 윤리, 종교, 허무, 정치, 사회를 분석한 그의 철학은 학계에 놀라운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마침내 유럽은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철학을 받아들였다. 신학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 가난과 전쟁에 대한 분노, 생존 경쟁의 생물학적 강조, 세상을 통찰하는 지혜, 자아의 확립을 비롯한 수많은 요소들이 쇼펜하우어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1854년에는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음악에 대한 철학을 찬양하면서‘리벨룽겐의 반지’를 헌정했다. 모든 사람들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진리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희망에 대하여」는 쇼펜하우어의 저서 가운데 가장 가치있고 지혜와 기지가 풍부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얻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부정의 논리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소중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만드는 지혜
1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며 유일한 것이다. 사랑은 혹독한 겨울에도 장미꽃을 피우는 힘이 있다.
2
사랑의 진실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또한 우리 곁에 숨어있을 때도 있다. 사랑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다. 그렇지만 사랑이 누구에게나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이 세상 어디에나 숨어 있지만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지는 않는다. 사랑은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을 통해 얻어내야 한다. 사랑을 찾기 위해 서로의 따스한 어깨를 만질 때. 비로소 사랑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3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사랑을 실제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은 현실성과 자연성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랑은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시대의 천재 시인과 작가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묘사했다. 사랑이 없다면 그 어떠한 예술적 미도 존재할 수 없다. 사랑의 가치는 세상 어떤 가치보다도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소중함만큼 사랑은 우리의 눈을 어둡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은 유령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스쳐 가는 바람처럼 그 존재의 느낌만을 우리에게 전해 줄뿐이다. 확실히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더욱더 사랑에 목말라하며 예술가들은 그 모습을 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사랑이 눈앞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라면 그렇게 가치가 있을까?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사랑은 희귀한 보석처럼 세상 어느 곳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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