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7호 2023.5.27 토요일 (음 4.8)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충돌했을 때 더 안전한 자동차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행자를 개조할 방법은 없는 듯.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도긴개긴
여자 친구의 짜증과 국민연금의 공통점은? ‘개그콘서트’ 에 따르면 왜 내는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도찐개찐’ ‘오십보백보’란다. 인기 개그 프로그램 덕에 ‘도찐개찐’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행어가 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이 말의 원말인 ‘도긴개긴’이 새 표제어로 수록되게 되었다.
‘도긴개긴’은 윷놀이에서 상대편의 말을 ‘도’로 잡을 수 있는 거리나 ‘개’로 잡을 수 있는 거리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데서 유래한다. 조그마한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엇비슷한 일을 빗대어 이를 때 쓴다. 여기서 ‘긴’은 윷놀이에서 남의 말을 쫓아 잡을 수 있는 거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앞 말을 잡게 됐을 때 ‘긴이 닿았다’라고도 하고, ‘걸 긴’이니 ‘윷 긴’이니 하는 말로 앞선 말과의 거리를 표현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는 윷놀이를 즐겨 하지 않게 되면서 이런 말들이 점점 잊혀져 가고 ‘도긴개긴’만 남아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백수오나 이엽우피소나 도긴개긴’ ‘생수 가격이나 석유 가격이나 도긴개긴이다’처럼 쓰인다.
'도찐개찐’은 ‘도긴개긴’의 방언형으로 보인다. ‘긴’이 ‘진’이 되는 것은 ‘길’을 ‘질’로 발음하거나 ‘기름’을 ‘지름’으로 발음하는 등 우리말 방언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것을 입말로만 접한 사람이 ‘도찐개찐’으로 방송에서 쓰게 되면서 갑자기 온 국민들에게 익숙해지게 된 것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말을 예전에는 ‘도 긴 개 긴’이라는 각각의 명사들의 결합으로 보아 따로 표제어로 수록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최근 이 말이 널리 쓰임에 따라 하나의 명사로 굳어졌다고 판단하여 표제어로 수록하고 붙여 쓰도록 한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
|
시나눔 → 우리시
|
|
|
밤은 고요하고 - 한용운
밤은 고요하고 밤은 물로 씻은 듯합니다.
이불은 개인 채로 놓아두고 화롯불을 다듬거리고 앉았습니다.
밤은 얼마나 되었는지, 화롯불은 꺼져서 찬 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오히려 식지 아니하였습니다.
닭의 소리가 채 나기도 전에
그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였는데 꿈조차 분명치 아니합니다 그려
|
|
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
|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5. 좋은 정치란 도덕에 있을 뿐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석지, 장탕)
2) 정치의 올바른 길이란 도덕에 있지 혹독한 법에 있지 않다(장탕)
고기를 훔친 죄로 쥐를 재판하다
장탕의 부친은 재판을 담당하던 한나라의 하급 관리였다. 어느 날인가 부친이 외출하게 되어 어린 장탕에게 집을 보라고 맡겼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쥐가 고기를 물어가 버렸지 않은가. 부친은 화가 나서 장탕을 회초리로 쳤다. 그러자 장탕은 쥐구멍을 찾아 먹다 남은 고기와 함께 쥐를 끌어냈다. 그리고 몇 대 내려친 다음 쥐를 묶어 놓고 재판을 열었다. 우선 영장을 만들고 이어서 공술서를 작성하여 논고하더니 이어 구형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당 끝에 쥐와 증거물인 고기를 내놓고 판결문을 읽더니 찢어 죽이는 벌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낱낱이 보고 있던 부친은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판결문을 읽어 보고는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숙달된 사법관이 한 것처럼 나무랄 데가 한 곳도 없는 게 아닌가. 그 이후 부친은 장탕에게 자기가 쓰던 관청의 판결문을 대신 쓰도록 했다.
법이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
장탕은 커서도 법률에 밝아 정위 벼슬을 했다. 그런데 그는 원래 자신의 본심을 겉에 드러내지 않는 사나이로 사람을 교묘히 움직이는 재능이 있었다. 그가 아직 하급 관리였을 무렵 장사를 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 장안의 부호들과도 폭넓게 사귈 기회가 있었다. 그 뒤 대신으로 승진하자 이름 있는 사대부를 가까이 했고,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 자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정중한 태도로 대해 주었다. 당시 무제는 유학에 관심이 높았다. 그리하여 장탕은 재판의 기본 원리를 유교경전에 두었다. 그러기 위해서 장탕은 "상서"나 "춘추"에 정통한 자를 부관으로 임명하여 도움을 받았다. 또한 이제껏 판례가 없는 안건의 재가를 왕에게 구할 때는 미리 근거가 되는 자료를 함께 제출했다. 그리고 무제가 뜻에 따랐으며, 그럴 때는 언제나 자신의 부하 가운데서 유능한 인물의 이름을 들면서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방금 꾸중하셨던 조항에 관해서 이 부하가 꼭 같은 취지의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하오나 어리석은 저는,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저의 책임이옵니다."
그럴 때마다 장탕의 책임은 용서되었다. 또한 판결문을 올려서 칭찬을 들을 때에도 역시 부하 이름을 들면서,
"이것은 저의 판단이 아니옵니다. 이런 부하가 저에게 제안한 의견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옵니다."
이같이 장탕은 항상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부하를 먼저 생각하고 추천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무제가 중죄에 처하려는 안건에 대해서는 평소에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기고, 죄를 사면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안건에 대해서는 가벼운 판결을 내리는 자에게 맡겼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된 자가 권세를 떨치고 있는 유력자인 경우에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으로 그 죄상을 높게 만들었다. 반대로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자라면,
"법에는 저촉되지만 아무쪼록 배려 있으시기를 바라옵니다."하고 무제에게 아뢰어 번번이 풀려나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용서하면 처벌할 사람이 없다
정탕이 고관이 되고 나서부터는 부쩍 인품이 좋아졌다.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고 친구의 자제 중 관리로 채용된 자나 가난한 형제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았다. 또한 춥거나 덥거나 항상 중신들을 방문하여 문안을 드렸다. 이 때문에 적발은 가혹하고 법 적용이 반드시 공평하지는 않았어도 장탕에 대한 평판은 좋은 편이었다. 더구나 장탕의 수족이 되어 엄격히 법을 집행한 하급 관리 가운데는 학문을 숭상하는 자가 많았다. 그리하여 승상 공손홍도 장탕의 훌륭한 점을 자주 칭찬하곤 하였다. 그 무렵 회남왕과 형산왕 등의 모반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장탕은 사건의 관계자를 철저히 파헤쳤다. 무제는 이 사건에 대해 장탕이 매우 엄격하게 임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관련자 가운데 엄조와 오피만을 사면시키려 했다. 그러나 장탕은 단호하게 반대를 하였다.
"오피는 원래 이 반역 음모를 계획한 인간입니다. 또한 엄조는 폐하의 신뢰가 두텁고 측근에서 폐하를 보좌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제후와 은밀히 내통한 인간입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을 용서하신다면 앞으로 처벌한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무제는 장타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고 그의 판결을 승인했다. 이처럼 특히 재판에 관한 일이라면 장탕은 중신의 간섭도 물리치고 자신의 책임으로 처리했다. 그러므로 그 공적은 거의 모두 장탕의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장탕에 대한 무제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지더니 드디어 어사대부로 승진하기에 이르렀다.
고개숙인 백면서생
그 뒤 장탕이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거나 국가의 재정 문제를 언급하면, 무제는 날이 저물도록 식사하는 것까지 잊어가며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승상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고 중요 사항은 거의 다 장탕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정부가 계획을 세워 지시를 하여도 그 성과가 오르기 전에 각 지방의 악덕 관리가 백성을 착취하여 모처럼의 계획도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러한 관리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지만 그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그 결과, 위로는 정부 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만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일들이 모두 장탕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탕이 앓아 누우면 무제가 손수 병 문안을 갈 만큼 무제의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그 무렵, 흉노가 화평을 청해 왔다. 그것을 수락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신하들을 소집해서 어전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 박사인 적산이 입을 열었다.
"수락함이 마땅할까 아뢰옵니다."
무제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적산은,
"예로부터 무기는 불길한 도구라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함부로 사용해선 안됩니다. 일찍이 고조(유방)께서는 흉노 토벌을 위해 군대를 일으키셨지만 평성에서 고전에 빠져 결국은 협정을 맺고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혜제, 여태후의 시대에는 싸움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은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시대에는 흉노와 자주 싸움을 벌여 그 때문에 북방의 땅은 또다시 황폐해졌던 것입니다. 또한 경제의 시대에는 오, 초 7국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제는 그 대책에 부심하여 황태후의 지시를 받기 위해 수개월 동안이나 황태후가 살고 계신 곳으로 매일 왕래해야만 했습니다. 가까스로 오, 초 7국의 난을 진압하자 지쳐 버리신 경제는 그 후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은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폐하께서는 흉노 토벌군을 일으키고 계시지만 그 결과 나라의 재원은 바닥이 드러나고 변경의 백성들은 몹시 빈궁해졌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화평을 수락하시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무제는 다음으로 장탕의 의견을 구했다. 그러자 장탕은,
"적산은 학문을 겉핥기로 배웠기 때문에 세상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며 적산을 반박했다. 이 말에 발끈한 적산은,
"말씀대로 저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장탕은 어떻습니까. 그의 충성심이야말로 겉치레가 아닙니까? 가령 전에 회남왕의 반란 사건을 취급했을 때 장탕은 어떻게 했습니까? 법을 뒤흔들어서 무리하게 제후들 다스린 결과 육친 사이에도 의심하게 되었고 중신들은 불안에 휩싸여 소신껏 정치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장탕이야말로 거짓 충신입니다."하며 장탕을 몰아부쳤다.
이 말에 무제는 기분이 나빠져서 적산에게 물었다.
"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를 태수로 임명할 테니 흉노의 침략을 철저하게 저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적산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것은 못하옵니다."
현령이라면 어떤가?"
"그것도 무리하옵니다."
"그럼 요새의 수비대장이라면 어떤가?" 여기서 적산은 생각하였다.
'이 이상 피하다간 옥리의 손에 인계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제는 그 말을 듣고 난 다음 적산을 어느 요새의 수비대장으로 전출해 버렸다. 이렇게 한 달쯤이 지났을 때 흉노는 그 요새에 침입하여 적산을 살해해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신하들이 장탕의 권세에 겁을 먹게 되었다.
부하를 잘 써라
하동 사람 이문은 옛날에 장탕과 옥신각신하며 다툰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후에 그의 벼슬이 높아지자 옛 원한을 갚기 위해 장탕을 탄핵하는 데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모아 계속 장탕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장탕에게는 평소부터 아끼던 노알거라는 부하가 있었다. 알거는 장탕이 이문에 대해 심상치 않은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알고 이문의 약점을 잡아 이문을 고발하게 했다. 그러자 장탕은 죄상을 심리하여 사형 판결을 내렸다. 물론 장탕은 그 고발 사건이 알거의 공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제가 장탕에게 물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었는가."
그러자 장탕은 이렇게 시치미를 뗐다.
"이문의 패거리가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한 짓이겠지요."
그후 얼마 지나서였다. 알거가 여행 도중에 앓아 눕게 되어 어느 시골 여관에 묵게 되었다. 그러자 장탕은 일부러 그곳에 내려가 문병을 하고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다.
사면초가
당시 한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에서는 제철업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나라 왕은 중앙에서 파견되어 온 감독관의 행동에 대해 몇 차례나 고소했으나, 그때마다 장탕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조왕은 장탕에게 원한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의 부정을 캐내고 있었다. 또한 조왕은 알거에 의해 취조받은 일도 있어서 알거에게도 원한을 품고 있었다. 조왕은 장탕이 알거의 문병을 하러 간 사실이 있다는 걸 알자 때를 놓치지 않고 무제에게 일러 바쳤다.
"장탕은 중신의 몸으로 일개 말단 관리에 불과한 알거를 문병했을 뿐 아니라 다리까지 주물러 주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이 공모하여 도리에 벗어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정위 앞으로 회부되었다. 그때 알거는 병사하였기 때문에, 그 아우가 공범자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장탕은 그 권세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그 후 얼마가 지나 장탕이 어떤 사건의 범인 취조 때문에 감옥으로 왔다가 여기서 알거의 아우를 만나게 되었다. 깜짝 놀란 장탕은 어떻게든 그를 풀어 주려고 생각했지만, 일단 그 자리에서는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알거의 아우는 장탕이 자기를 버린 것이라 착각하고 성이 나서 사람을 시켜 장탕을 고발했다.
"장탕은 형과 공모하여 이문을 끌어넣은 장본인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가 비화되었고, 이 사건은 감선이라는 자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감선은 전에 장탕과 충돌한 적이 있는 대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기회에 사건의 배후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장탕을 얽어 넣으려 했다. 그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이번에는 효문제의 능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 승상 청책은 장탕과 같이 입궐하여 두 사람의 연대 책임으로 감독이 불충분한 데 대한 사과를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장탕은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도 막상 어전에 들어가 고하게 되자 능을 경호하는 것은 승상의 책임이므로 자기는 관계가 없다고 발뺌을 하면서 사죄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승상이 혼자서 사죄했고 이에 무제는 어사대부 장탕에게 사건의 조사를 명했다. 장탕은 이 명령을 기화로 책임자인 승상을 옭아 넣으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승상은 안절부절을 못했다. 그러자 승상의 부관들은 장탕을 원망하면서 어떻게든 장탕을 실각시킬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주매신은 "춘추"에 정통해 있었다. 일찍이 엄조가 그 점을 높이 사서 무제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원래 주매신은 "초사"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엄조와 함께 무제의 주목을 끌어 무제를 측근에서 섬기게 되었다. 그 무렵에 장탕은 아직 하급 관리였는데 주매신 등의 앞에 나오면 엎드려서 명령을 받는 처지였다. 그러나 장탕이 정위로 승진하면서 회남왕 사건을 담당하여 엄조를 실각시켰을 때 엄조의 은혜를 입고 있던 주매신은 마음속으로 장탕의 처사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 뒤 장탕이 어사대부가 되었을 때 주매신도 회계군 태수에 발탁되었다가 몇 년 후 주매신은 법에 저촉되어 부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무렵에 어떤 일 때문에 주매신이 장탕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장탕은 의자에 몸을 뒤로 젖히고 앉은 채 부하를 대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주매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주매신은 혈기 왕성한 초나라 사람으로 이런 대접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러한 연유로 기회가 오면 장탕을 혼내 주려 벼르게 되었다. 또한 같은 부관 중 한 사람인 왕조는 법에 정통하고 우내사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또 한 명의 부관인 변통도 유세술을 배웠고 남에게 자기 싫어했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전에는 장탕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인데, 지금은 부관으로 좌천되어 장탕 밑에 있었던 것이다. 장탕은 이 세 사람의 부관이 일찍이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보란 듯이 모욕을 주었던 것이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던 세 사람은 상의 끝에 승상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장탕은 승상 어른과 같이 무제에게 사죄할 것을 약속했으면서도 어전에서 승상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요즘에는 승상 어른께 죄를 씌우려 벼르고 있습니다. 이는 반드시 어른 대신 승상 지위에 오르려는 음모로 보입니다. 지금 그를 실각시키지 않으면 다시 돌이킬 수가 없어집니다. 실은 저희가 장탕을 실각시킬 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승상은 즉각 관리에게 명하여 장탕의 죄를 알고 있는 전신 등을 잡아들여 취조했다. 그러자 전신은 이렇게 증언했다.
"장탕은 재정 문제에 대해 보고할 때는 미리 그 정보를 저희들에게 알려 주시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물건을 매점해 놓았다가 값이 뛸 때 팔아서 이윤을 올리고는 그것을 장탕 대감과 반씩 나누었던 것입니다."
취조가 계속되는 동안 전신 등의 증언이 하나도 남김 없이 무제의 귀에 들어갔다. 궁금하던 무제가 직접 장탕에게 하문했다.
"재정 정책이 실시되기도 전에 상인들 귀에 들어가 물건을 매점한다 하니 계획을 밖에다 누설하는 자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탕은 직책상의 해명은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놀라는 시늉을 하면서 대답했다.
"그럴 수 있을 듯합니다."
죽어서 무죄를 증명하다
그 후 감선이 한술 더 떠서 알거에 관한 일을 무제에게 소상히 주상했다. 무제는 장탕이 이제껏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해 차례로 8명씩이나 검찰관을 보내어 죄상을 추궁했다. 그런데 장탕은 그때마다 증거를 제시하면 반론하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무제는 장탕의 옛 동료였던 조우에게 취조를 명했다. 조우는 장탕을 나무랐다.
"너무도 최후가 더럽지 않은가. 자네가 일가 몰살의 판결을 내린 자가 얼마나 많은 지 생각이나 해 보게. 증거도 이미 충분할 만큼 갖춰져 있지만 폐하는 자네를 차마 처형하지 못하고 자결하기를 원하고 계시네. 이제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는 게 좋겠네."
이에 장탕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황제에게 보내는 상주문을 썼다.
"장탕은 아무런 공도 없이 하급 관리의 몸으로 폐하의 은총을 입고 삼공에 이르렀습니다만,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지내 왔습니다. 그러나 저의 죄는 억울하옵게도 세 명의 부관들이 날조한 것이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무제가 장탕이 죽고 나서 유산을 조사시켜 보니 고작 5백 금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것도 모두 봉록이나 하사품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장탕의 형제와 자식들은 의논 끝에 장례만은 성대히 치르자고 했으나 모친이 반대했다.
"그 아이는 중신의 몸으로 불명예스러운 죄록으로 죽은 것이다. 성대한 장례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그 시체는 서민과 같이 허름한 관에 넣어 손수레로 운반되었다. 무제는 이 말을 듣고 감동했다.
"그런 어머니가 있었기에 장탕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무제는 다시금 철저한 조사를 한 끝에 세 사람의 부관이 무고했음을 밝혀내고 그들을 벌하여 주살했다. 승상 정책도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다. 무제는 장탕을 잃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는, 그의 아들 안세를 높은 자리에 앉혔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장탕은 지혜를 다해 황제의 뜻을 살피며 자신의 말과 행동을 맞추는 한편, 옳고 그른 것을 따져 옳은 것을 굳게 지켰다. 그래서 그로 인해 나라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장탕이 죽은 후 법망은 더욱 치밀해져서 관리들은 억지로 법을 냉혹하게 적용시켰기 때문에 정사가 차츰 쇠퇴해 갔다. 그리하여 신하들은 다만 실수없이 자리 지키기에 급급할 뿐 일체의 창조적인 논의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양금택목(良禽擇木)
良:어질/좋을 량. 禽:새 금. 擇:가릴 택. 木:나무 목.
[동의어] 양금상목서(良禽相木棲).
[출전]《春秋左氏專》〈衷公十八年條〉,《三國志》〈蜀志〉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는 뜻으로, 현명한 사람은 자기 재능을 키워 줄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섬김의 비유.
춘추 시대, 유가(儒家)의 비조(鼻祖)인 공자가 치국(治國)의 도를 유세(遊說)하기 위해 위(衛)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공문자(孔文子)가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 공자에세 상의하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사 지내는 일에 대해선 배운 일이 있습니다만, 전쟁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자리를 물러 나온 공자는 제자에게 서둘러 수레에 말을 매라고 일렀다. 제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공자는 ‘한시라도 빨리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며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새는 좋은 나무를 가려서 둥지를 친다[良禽擇木]고 했다. 마찬가지로 신하가 되려면 마땅히 훌륭한 군주를 가려서 섬겨야 하느니라.”
이 말을 전해들은 공문자는 황급히 객사로 달려와 공자의 귀국을 만류했다.
“나는 결코 딴 뜻이 있어서 물었던 것이 아니오. 다만 위나라의 대사에 대해 물어 보고 싶었을 뿐이니 언짢게 생각 말고 좀더 머물도록 하시오.”
공자는 기분이 풀리어 위나라에 머물려고 했으나 때마침 노(魯)나라에서 사람이 찾아와 귀국을 간청했다. 그래서 고국을 떠난 지 오래인 공자는 노구(老軀)에 스미는 고향 생각에 사로잡혀 서둘러 노나라로 돌아갔다.
|
|
글나눔 → 삶속의 글
|
|
|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망신살 부른 세계화
대망의 1992년 12월 25은 저에게는 아주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지난 8년간 숱한 유혹을 뿌리치고 한 남자를 기다렸고 드디어 그 남자와의 결혼식이 있었던 그해 그날! 사실 이 남자와의 결혼은 축복 속에 치러졌습니다. 저는 그렇다 치고, 우리 엄마는 눈에 무엇이 씌었는지, 학교를 졸업도 안한 남자와 그것도 대기업 공채 시험에 번번이 서류전형에도 미끄러지는 사위를 맞이하려고, 곱게 키워 고등학교 때는 우등상도 타면서 비록 지방이지만 비싼 등록금 내가면서 명문 사립대를 졸업하고, 그대는 취직도 해서 월급도 타는 저를 사위 정말 괜찮다고 소문 내면서 결혼을 시켰습니다. 우리 남편 자랑이지만 그 당시는 졸업학점도 좋았고 영어실력도 괜찮아 보였고, 직장은 안 간 거지 못 간 것은 아니라고 강변할 정도로 자신 만만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우리 아버지도 반할 만했거든요. 결혼식장에서 신부 예쁘다는 소리보다는 남편 잘생겼다는 소리를 더 많이 듣는 결혼식은 처음이었으니까요. 8년간의 연애는 꿈 많은 소녀에게는 참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남편 말에는 복종해야 한다. 남편은 똑똑하다. 남편은 영어회화실력은 누구 못지 않게 좋다. 추진력하나는 끝내준다 등등. 그래서 저도 열심히 남편 따라 공부를 해야 했고, 남편이 영어실력이 좋으면 아내는 일어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따라 남편 군대간 사이 저는 열심히도 일본어 공부를 했습니다. '세계화를 외치면서!'
신혼여행도 많은 고민 끝에 우리는 일본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제가 우겼죠, 세계화해야 한다고. 그것도 10박 11일.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결혼식이 중요하지 않고 신혼여행이 중요했던 이유는 일본으로의 배낭 신혼여행. 보잘 것 없는 남편의 기를 팍 죽이고 주도권을 잡으려면 신혼여행지에서 잡으라는 선현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해외여행 그것도 신혼여행으로 제가 잘하는 일본어가 통하는 일본으로 10박 11일이나. 호호호.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남편은 백수니까 그렇다 치고 신부는 직장인 인데 하고 의아해 하실까봐 설명해드릴게요.
10박 11일은 신정연휴 3일에다 결혼휴가 일주일. 가장 중요한 건. 제가 없어도 별로 타격을 입지 않는 회사였으니까 그렇게 오래도록 휴가를 가도 부도 유예결정 같은 거 안 나고 버텼다는 사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일본에 도착을 했습니다. 제가 먼저 공항 외국 심사 대에 올랐죠. 일본어로 무언가를 물어보는데 영 감이 오질 않데요. 분명 젊은 여자가 화장을 짙게 하고(신부화장)있으니 술집에 일자리 구하러 오는 걸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멍하게 있으니까, 이번엔 영어로 "캔 유 스픽 잉글리쉬(영어할 줄 아세요)?"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전 남편을 불렀습니다. 남편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습니다.
"예스, 아이 캔 스픽 잉글리쉬(영어 하죠)."
이러한 남편의 모습에 전 속으로 '역시 백수라도 미래가 보여.'하고 생각했는데 뒤따라 들려오는 말 "티켓 플리즈."티켓을 달라는 거예요. 전 그때 생각했습니다. '티켓이 뭐지.?' 남편도 멍하니 저를 쳐다보더군요. 우리는 고민을 했습니다. 왜 하필 저와 남편의 머릿속에 그 당시 유행했던 영화가 생각났던지. 남편은 또 영어로 말했습니다.
"왓져 티켓(티켓이 뭐예요)?"
그 일본관리 역시 멍하니 쳐다보며 옆으로 비켜 쭈그리고 앉아 있게 하데요. 완전히 불법취업자 취급하듯이. 모든 사람이 입국심사를 통과할 때까지 우리는 그 문제의 티켓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온갖 상상을 다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의 지하철 표가 왜 필요하지, 극장표를 달라고 하는 건가, 일본에도 한국의 티켓이라는 영화가 상영 되었는가, 하며 해외여행이 처음인 신혼부부는 그렇게 다른 나라의 차가운 바닥에 않자 일본관리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알고보니 티켓은 돌아올 항공권을 보여 달라는 거였는데. 남편은 입국 심사 대를 빠져 나오며 혼잣말로 말하더군요.
"비행기표를 보여달라고 하지 괜히 티켓을 달라고 해."
그렇게 우리는 일본에서의 신혼여행을 손짓 발짓으로 기차 안에서 심야버스에서 두 손을 꼭 잡고 잠을 자면서 행복해 했습니다. 티켓으로 영어실력이 들통난 남편의 기를 죽여가면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동경의 디즈니랜드를 갔습니다. 일본 국민성이 워낙 친절해서 그런지, 종업원들의 우리가 구경하려고 줄만 서면 "남매데스까? 남매데스까?"하는 거예요. 저는 싱긋 웃으며 "이이예, 부부데스, 남매가 아니고 부부예요." 했죠. "부부는 닮는다고 하는데 일주일 만에 우린 많이 닮았나봐. 남매냐고 묻는 걸 보면." 천생연분임을 과시하며 티켓사건도 잊어버리고 일본어와 한자는 같으니까, 또 어느 정도 일본에서 생활한 게 있다고 아주 자랑스럽게 '부부데쓰'를 외치고 다녔죠. 그런데 이상한 게 아주 친절하게 "남매데쓰까?" 하며 묻던 사람들이 "부부데쓰." 라고 대답만하면 모두 고개를 갸우뚱하는 거예요. 웃고 떠들며 우린 외국인인데 아는 사람도 없고, 전문용어로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는 사회에서 '부부데쓰'를 외치며 다니는데 웬걸 뒤에서 "저 한국에서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우리 동포를 만나 반가움에 손이라도 덥석 잡으려고 하는데, "저,아가씨. '남매데쓰까'는 몇 명이냐고 묻는 거예요." 하는 겁니다. 남편은 저를 보고, 저는 쥐구멍을 찾고, 그렇게 일본의 신혼 배낭여행은 끝이 났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2명의 아이까지 낳고 잘 살고 있습니다. 직장일로 9번정도 일본을 더 다녀왔는데 아직도 '남매데쓰까?'하면 '부부데쓰'가 엉겁결에 나옵니다. 남편도 그날 이후 살아 있는 영어공부를 한다고 뛰어다니더니, 좋은 직장을 구했고, 영어실력 보여주겠다고 해외여행 가자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
|
글나눔 → 추천글
|
|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4장 올림포스 신 시대 및 그 외 신들
1. 올림포스 산봉의 신
쿠레테스
쿠레테스(Curetes:크레타인)는 어린 제우스를 보호한 레아의 아들들이다. 크로노스는 레아와의 사이에 낳은 자신의 아들들이 태어나자마자 매번 삼켜 버렸다. 이에 레아는 제우스를 낳고는 크로노스에게 아기 대신 돌을 싸주어 삼키게 하고 어린 제우스를 크레타로 보내 아말테이아로 하여금 산양의 젖고 벌꿀로 키우게 하였다. 이 사실을 감지한 크로노스가 추격하자 제우스는 뱀으로, 양육자들은 곰으로 둔갑하여 화를 모면하였다. 이 이야기에 연유하여 생긴 별자리가 뱀과 곰자리다. 크레타 전설에 따르면 제우스는 딕테산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반신인 쿠레테스가 춤추고 노래하며 방패를 두드렸다. 이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크레타에서는 청춘의 신 쿠로스 제가 열렸으며 팔라이오카스트로 지방에서는 근래 제우스 쿠로스에 대한 찬송가사가 적힌 비문이 발견되었다. 크로소스 근교의 기우타스 산(811m)은 제우스의 묘소가 있는 성지로 산세의 그림자 모양이 사람이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말테이아
아말테이아(Amalthea)는 제우스를 산양 젖으로 키운 요정이다. 제우스에게 젖을 먹인 산양 코르누코피아는 풍요의 뿔이라는 의미로서, 이 뿔을 가진 자는 원하는 것은 꽃이건 과일이건 곡물이건 모두 풍성하게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암브로시아
암브로시아(Ambrosia)는 원래 불멸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로 신찬, 즉 신의 음식물이라는 뜻이며 넥타르는 신주를 의미한다. 암리트(Amrit : mrta는 death)는 불로불사의 음료, 즉 감로이다. 암브로시아나 넥타르에는 아마니타 무스카리아 같은 독버섯을 가미하여 환각, 이유없는 폭동, 예언이나 예견력, 성적 에너지, 근육의 괴력을 발휘하게 하였다. 신화시대(유사이전)의 암브로시아와 넥타르는 신이나 왕과 왕비에게 올리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탄탈로스는 터부를 어기고 이를 인간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
이다 산
이다(Ida) 산은 크레타 섬의 최고봉으로 제우스가 코류반테스로부터 교육을 받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연유하여 그 사제들은 이다에이라고도 부른다. 같은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이다 산은 소아시아의 프리지아 트로이 인근에 있는 축복받은 산으로 시모이스 강, 스카만드로스 강, 아이세포스 강, 그라니코스 강 등 여러 하천의 원천을 이룬다. 삼림이 우거지고 능선을 따라 헬레스폰트 해협이 펼쳐져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이 곳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양치기로 있을 때 아프로디테를 미의 여신으로 판정한 곳이자 트로이 전쟁중에는 신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기도 하였다.
가뉴메데스
가뉴메데스(Ganymedes)는 프리지아 나라의 미소년으로 아비 이름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대체로 트로이의 왕 트로스 혹은 라오메돈으로 알려져 있다. 사춘기에 들어 트로이 성 근교 산기슭에서 가축을 돌보던 중 제우스 신에게 유괴되어 올림포스로 갔다. 최고의 주신 제우스는 영생하지 못하는 인간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매를 가졌다는 이 가뉴메데스에게 크게 매료당하여 그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였다.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헤베 대신 술잔에 신주인 넥타르를 따르는 임무를 맡기고 잠자리를 같이하는 미동으로 삼았다. 이 미소년의 유괴 또는 납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제우스 자신이 직접 유괴 또는 주신의 새인 독수리를 시켜 납치하여 하늘 높이 나르게 했다고도 하며, 혹은 제우스가 스스로 독수리로 변신하여 납치했다는 설도 있다. 작가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견해도 있는데, 예컨대 소년을 유괴한 것은 미노스 혹은 탄탈로스, 또는 에오스(아우로라)라고도 한다. 납치 장소에 대해서도 여려설이 있다. 보편적으로는 트로아스의 이다 산 기슭으로 되어 있으나 크레타의 이다 산, 심지어는 에우보이아의 산 혹은 뮤시아의 한 마을 하르파기아(유괴라는 뜻)라고도 한다.
제우스는 소년을 데려간 보상을 명마 두필과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황금 포도덩굴을 보내 주었으며, 가뉴메데스는 영생을 얻어 천상의 물병자리에 오르고 납치를 해 온 독수리도 그 공을 인정받아 별자리가 되었다. 로마 시대에는 소년의 이름을 카타미투스라 하였는데 이는 남색을 상대하는 미동 카타미테에 연유하며 동성애의 원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동성애는 현대의 그것과는 좀 달라, 아직 어른이 되기 전의 아이가 관례를 올리기 전에 어른과 함께하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상류사회에서 인정되는 관행이었다. 툭하면 싸우는 연령층의 아이를 납치 형식으로 데려가 침식과 수렵을 같이하고 어른의 태도와 예절, 용기 혹은 포도주를 따르는 기법을 가르쳤는데, 그 기간은 2개월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마을에 돌려보내지는데 흔히 무사옷이나 소, 포도주잔과 때로는 값진 선물을 그간의 보수 또는 선물로 받고, 황소는 제우스에게 공양하고 잔치를 벌였다. 이 때 둘이서 지낸 동안 즐거웠는지 혹은 학대받았는지에 대한 평가를 통해 보복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 둘사이의 교분은 영예로 자부하였다. 이처럼 성인이 되기전의 소년(eromenos:사랑받는 자)과 성인(erastes:사랑을 베푸는 자)과의 관계는 성인입문의 관행으로, 동성애 관계를 치중한 편향적 보고로 확대한 예도 있으나, 도리어 서구 무사계층에 존재하였던 선임무사와 신출무사 간에 흔히 있었던 동성애 관계와 더 일맥상통하였다.
이디산은 크레타섬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는 2,456미터이다. 여신 레아가 제우스를 이 곳의 동굴에서 숨겨 길렀다고 전해진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