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0호 2023.4.25 화요일 (음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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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참좋은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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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사람의 야심과 반드시 완전한 조화를 이루도록 돼 있지 않은 곳.
― 칼 세이건(美 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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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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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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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양귀비
요즘 강변이나 공원에 나가보면 선홍빛으로 무리지어 핀 양귀비꽃을 쉽게 만난다. 절세미인 양귀비의 이름을 딴 꽃이라서 인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그런데 이 꽃의 정확한 이름은 양귀비가 아니라 개양귀비다. 양귀비는 열매가 아편의 재료로 쓰이기 때문에 재배가 금지되어 있다.
우리말에는 개양귀비뿐 아니라 개나리, 개살구, 개연꽃 등 이름에 ‘개’가 붙어있는 식물이 많다. 접두사 ‘개’가 꽃이나 열매 이름에 붙을 때는 야생이거나, 짝이 되는 본래의 식물보다 질이 떨어지거나, 혹은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이라는 뜻이다. 개나리는 들에 저절로 피어나는 나리를 가리킨다. 개연꽃은 연꽃만큼 탐스러운 꽃을 피우지 못해서, 개살구는 새콤달콤한 살구와 달리 시고 떫은 맛이 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오죽하면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다 있을까.
어쨌거나 이름에 ‘개’가 들어가면 보잘것없거나 변변치 못하단 뜻이다. 개양귀비는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됐을까? 양귀비만큼 예쁘지가 않아서? 꽃의 크기나 모양에서 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개양귀비가 색깔이 더 곱고 아담해서 집 주변에 심어두고 보기엔 더 낫다. 다만 옛 사람들은 약재로서의 효능 때문에 양귀비를 소중히 여겼다. 약이 귀했던 시절에는 열매뿐 아니라 줄기까지도 복통 치료제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에 비하면 개양귀비는 별 쓸모가 없으니 ‘개’가 붙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양귀비 덕을 볼 일이 거의 없다. 금지 작물보다는 오히려 가까이에서 아름다운 꽃을 보게 해주는 개양귀비가 훨씬 소중하다. 그래선지 요즘엔 개양귀비 대신 꽃양귀비라고 부르는 이들이 늘고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관점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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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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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 한용운
언제인지 내가 바닷가에 가서 조개를 주웠지요.
당신은 나의 치마를 걷어 주셨어요, 진흙 묻는다고.
집에 와서는 나를 어린아이 같다고 하셨지요,
조개를 주워다가 장난한다고.
그리고 나가시더니 금강석을 사다 주셨습니다, 당신이.
나는 그 때에 조개 속에서 진주를 얻어서
당신의 작은 주머니에 넣어 드렸습니다.
당신이 어디 그 진주를 가지고 계셔요.
잠시라도 왜 남을 빌려 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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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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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2. 북방의 정복자(흉노전)
백등산에서 유방을 크게 혼내다
묵특은 그 후 북방의 여러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 흉노의 백성들은 모두가 묵특에 감복하여 그를 현군으로 우러러 보게 되었다. 유방이 중국 천하를 평정하여 천하 통일을 이룩한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다. 유방은 천하를 평정하자 한왕 신(유명한 한신 장군과는 동명이인이다)을 흉노와의 경계 지방으로 파견하여 마읍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그러나 한왕 신은 얼마 후 흉노의 맹공격을 받고 수도인 마읍을 포위당하자 여러 차례 흉노에 사자를 보내 협상하려고 했다. 이때 유방은 구원병을 파견했으나 한왕 신이 자주 흉노에게 사자를 왕래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혹시 모반하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 엄중히 문책하였다. 이에 대해 한왕 신은 아무리 변명해도 들어주지 않자 처형될 것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흉노에 항복하고는 오히려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에 한나라는 반격에 나서 한왕 신의 군대를 격파하니 그는 그대로 흉노로 도망쳤다. 그 후 한왕 신을 제 편으로 만든 흉노는 그의 휘하 부대를 포함하여 정예 부대를 투입, 맹렬한 기세로 남하하여 진양성까지 육박하여 왔다. 드디어 한나라와 흉노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유방은 먼저 사람을 보내 정탐하도록 했다. 그러나 묵특은 이미 한 나라의 정탐꾼이 올 줄 알고 군대와 살찐 말들은 모두 숨겨 놓고 노약자와 빼빼 마른 말만을 보이게 하였다. 이에 정탐꾼이 돌아가 유방에게, "묵특을 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유방은 한번 더 확인하기 위해 유경을 보내 살피도록 했다. 그러자 유경이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무릇 전쟁을 하는 두 나라는 서로 자기들의 강한 점을 자랑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런데도 노약자와 초라한 말들만 보이는 것은 필시 무슨 음모가 있는 듯합니다. 공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보고를 받은 유방은 크게 화를 냈다.
"저 놈이 망령된 말을 해 병사들의 사기를 꺾으려 드는구나."
그러면서 당장 유경을 크게 화를 냈다. 유방은 곧바로 흉노 토벌군을 편성해서 스스로 전선으로 향했다. 때는 바야흐로 겨울, 전장에는 혹한이 내습하고 눈이 내렸다. 한나라 군대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동상에 걸려 10명 중 2, 3명은 손가락을 잃었다. 묵특은 이를 틈타 패주를 가장하여 한군을 북방으로 유인하는 작전으로 나왔다. 과연 한군은 영문을 모르는 채 추격해 왔다. 이에 묵특은 정예군을 뒤에 감추고 약병을 방패로 세웠다. 완전히 흉노를 얕보게 된 한나라는 전군을 동원하고, 또 유방은 전군의 선두에 서서 평성 지방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추격을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대열이 길게 늘어져 후속 보병 부대는 아득한 후방에 처져 있었다. 묵특은 그 기회를 이용해서 정예 40만 기를 내보내 유방이 이끄는 선두 부대를 백등산 위에서 완전히 포위했다. 한군은 7일 동안 분단된 채 속수무책으로 포위되었다. 하지만 후속 부대는 구출 작전에 나서지도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군량조차 보급되지 않았다. 이때 흉노의 기마대는 서쪽은 모두 백마요, 동쪽은 모두 청방마(흰바탕에 푸른 색이 섞인 말), 북쪽은 모두 흑마, 남쪽은 모두 성마(적황색 말)로 위용을 자랑하면서 물샐 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작전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항우와의 전쟁 때부터 기발한 꾀로 번번이 유방을 살려낸 바 있던 예의 모사꾼 진평이 또다시 꾀를 냈다. 진평은 묵특의 부인에게 밀사를 통해서 정중히 선물을 보내며, 한편으로는 곧 빼어난 미녀들을 선우에게 바칠 계획이라고 전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그녀는 혹시 한나라의 뛰어난 미녀들에게 사랑을 빼앗길까봐 불안해 묵특에게 이렇게 호소한 것이다.
"이웃한 나라의 군주와는 서로 고난을 주고 받지 마십시오. 설혹 이 싸움에 이겨서 한나라 영토를 모두 얻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계실 곳이 못 됩니다. 게다가 유방에게는 하늘의 가호가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부디 깊이 생각하시어 결정하십시오."
때마침 묵특은 자기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한왕 신의 장군들이 약속 날짜가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그들이 유방과 짜고 있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부인의 호소를 받아들여 포위망의 일부를 풀었다. 유방은 그것을 보고 전군에게,
"활에 화살을 재어 힘껏 당겨라."
하고 명령하며 화살 끝을 흉노에게 향하면서 포위가 풀린 곳으로 단숨에 달려나가 간신히 후방의 대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자 묵특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철수하였으며, 유방도 지친 몸을 이끌고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유방은 돌아오자 마자 묵특의 음모를 경고했던 유경을 석방하면서,
"그대 말을 듣지 않아 백등산에서 큰 곤욕을 치뤘소. 그때 거짓을 아뢴 자는 엄벌하겠소."하면서 맨 먼저 정탐했던 부하를 처형시켰으며, 한편 유경의 벼슬을 올려 주었다. 이때 유경이 유방에게 아뢰었다.
"지금 무력으로는 도저히 흉노를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황공스러운 말씀입니다만, 큰 공주님을 선우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들도 공주님을 정실 부인으로 맞을 것이며, 그래서 아들을 낳게 되면 분명히 태자로 삼을 것입니다. 묵특은 폐하의 사위가 되고 그가 죽으면 폐하의 외손자가 선우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흉노는 점차 신하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유방은,
"참 좋은 생각이오."라며 찬성하였다. 하지만 여후는 이 말을 듣고 밤낮으로 울면서 사정했다.
"제게는 오직 딸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 딸을 어떻게 흉노에게 보낸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유방은 할 수없이 양가집 딸을 큰 공주로 속여서 유경과 함께 흉노로 보냈다. 그리하여 한나라와 흉노는 드디어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흉노와의 평화조약은 유명무실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새가 모여들 듯 거미가 흩어지듯
당시의 중국은 유방이 항우와 격렬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어서 싸움에 지쳐 있었다. 묵특이 세력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 즈음 흉노측에서는 활을 쏠 줄 아는 병사가 실로 30여만 명에 달하고 있었다. 흉노는 전쟁을 할 때 반드시 달의 상태를 보았다. 달이 차면 공세로 나가고 달이 기울면 철군한다. 또한 고을 세운 자, 적을 포로로 한 자들에게는 상으로 큰 잔의 술이 주어졌다. 포획물은 포획한 당사자의 소유물이 되며, 포로도 사로잡은 군인의 노예가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용감히 싸우며, 특히 적을 유인해서 일망 타진하는 전법에 능했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새가 모이듯 일제히 무리져 오며, 패색이 짙어지면 거미가 흩어지듯 도망쳤다. 전사자의 시체를 추스려 돌아온 자에게는 죽은 자의 재산이 그대로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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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침류(漱石枕流)
漱:양치질 수. 石:돌 석. 枕:베개 침. 流:흐를 류.
[동의어] 침류슈석(枕流漱石).
[유사어] 견강부회(牽强附會), 아전인수(我田引水), 추주어륙(推舟於陸), 궤변(詭辯).
[참조] 영천세이(潁川世耳), 청담(淸談).
[출전]《晉書》〈孫楚專〉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뜻. 곧
① (실패를 인정하려 들지 않고) 억지를 씀. 억지로 발라 맞춰 발뺌을 함.
② (남에게 지기 싫어서 좀처럼 체념을 안하고) 억지가 셈의 비유.
진(晉:265~317)나라 초엽, 풍익 태수(馮翊太守)를 지낸 손초(孫楚)가 벼슬길에 나가기 전, 젊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대부간에는 속세의 도덕/명문(名聞)을 경시하고 노장(老莊)의 철리(哲理)를 중히 여겨 담론하는 이른바 청담(淸談)이 유행하던 때였다. 그래서 손처도 죽림 칠현(竹林七賢)처럼 속세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기로 작정하고 어느 날, 친구인 왕제(王濟)에게 흉금을 털어놓았다.
이때 ‘돌을 베개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 싶다[枕流漱石]’고 해야 할 것을, 반대로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漱石枕流]’고 잘못 말했다. 왕제가 웃으며 실언임을 지적하자 자존심이 강한데다 문재(文才)까지 뛰어난 손초는 서슴없이 이렇게 강변했다.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것은 옛날 은사(隱士)인 허유(許由)와 같이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 귀를 씻기 위해서이고, 돌로 양치질한다는 것은 이를 닦기 위해서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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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바지를 좀더 내리세요
살면서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을 많이 겪기도 하겠지만, 이런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2년 전, 저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아주 죽도록 고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콧물이나 두통같은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마치 속을 다 뒤집어 놓으려는 듯 튀어나오는 기침은 정말 참기 힘들었죠.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TV를 보다가도 그놈의 기침은 절 그냥 두는 법이 없이 마구마구 나오더군요. 밤잠을 설쳐가며 기침에 시달린지 어언 석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침을 할 때마다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니 옆구리가 왜 아플까? 혹시 기침이 심해 폐에 무슨 이상이라도... 아니면 늑막염이 된 건 아닐까?' 걱정이 태산 같았죠. 평소, 한국 표준 여성보다 몸무게로 보나 키로보나 월등히 우량했던 저를 건강 그 자체로만 여기시던 부모님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셨던지 병원에 가 보라며 아주 걱정스런 얼굴을 하시는 거 있죠. '아! 얼마 만에 가보는 병원이냐...' 너무 건강하다 보니 오랜만에 가보는 병원은 차라리 반갑더군요. 내과에 가서 만난 의사 선생님께서는 점잖게 생기신 중년 신사였는데, 진찰을 받고 이차저차 증상을 얘기하니 심각한 얼굴로 늑막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자세한 진찰을 위해 방사선과에 가서 X-ray를 찍어오라고 하시기에 전 떨리는 가슴을 안고 방사선과로 갔습니다. 몇 년 전 늑막염을 앓고 있던 친구에게서 뼈에 고인 물을 빼기 위해 갈비뼈에 주사기를 꽂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전 아주 얼어 있었습니다. 방사선과에 있는 선생님은 아주 젊은 분이셨는데 저는 그 와중에도 '어머, 참 참한 총각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 잘생긴 총각이 저에게 약간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일단 골반부를 찍어야 하니까, 침대에 누우시죠."
침대에 누워 제 배위로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카메라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할 때에도 전'참한 총각과 저의 늑막염'생각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목소리로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바지를 조금 내리세요"
전 조금 의외였지만 그냥 찔끔찔끔 바지를 허리 조금 아래까지 내렸죠. 그랬더니 그 남자가 절 냉정한 눈으로 쏘아보더니 말했습니다.
"더 내리세요."
'어머, 어머,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전 조금 당황하여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더 안 내리면 안된다는 시선에 전 그야말로 주눅이 들어 바지를 조금 더 내렸습니다. '아! 빠금히 내보인 내 배꼽!' 부끄러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지르며 이러는 거예요.
"내 참! 아, 허리띠를 풀어서 바지를 엉덩이까지 내리세요."
아니 이 무슨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립니까? 외간 남정네 앞에서 바지를 내리라니... 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아, 바지를 벗어야 단추랑 허리띠가 X-ray에 안 나타날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생각 좀 해보세요. 제가 바지를 내리면 바로 뭐가 나옵니까. 그 자리에서 제 팬티가 노출되는 거 아니겠어요. 전 설마 저 사람이 진정으로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 다시 그 사람을 봤지만 그는 제가 아주 못마땅한 듯 마구마구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불초소녀, 건강관리 잘못하는 바람에 외간남자 앞에서 팬티를 보이고 마는군요.' 전 눈을 찔끈 감고 바지를 내렸습니다. 촬영은 30초도 안되어 끝났지만 전 그 시간이 영원과도 같았고, 그 이후에는 아주 정신이 빠져서 흉부촬영시 가운을 입고는 속옷도 벗지 않고 목걸이도 빼지 않아 그 '참한 총각'을 다시 한번 화나게 하고 말았답니다. 촬영이 끝나고 그는 제 필름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애교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때요? 별 이상 없죠?"
그는 제 흉부필름과 골반필름을 차례로 점검하더니 아주 묘한 미소를 띠우며 내과를 다시 가 보라더군요. '어머, 미소의 참 의미는 뭘까?' 저는 혼자서 예쁜 척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과로 와서 그 점잖은 선생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 선생님도 제 필름을 검토하고 계셨습니다.
"어때요, 선생님?"
제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필름을 잘 살펴보라시며, 불이 들어온 판위에 필름을 끼우셨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커다란 검은 덩어리! '아니, 저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 난 죽나 보다. 저건 무슨 암세포덩어리가 아닐까...?' 무식한 제 머릿속엔 온통 제가 죽는다는 생각만 날 뿐이었습니다. 그 암울함, 그 섬뜩함... 두 분 이해하시겠어요?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때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침으로 인해 폐가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약을 먹고 병원에 좀 다니면 괜찮겠군요. 됐습니다. 처방전을 줄테니 약 받아가고, 주사 한대 맞고 가세요."
선생님은 금세 아무일 없다는 듯 다음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더군요. 전 조금 어리둥절해서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저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런 절 의아한 듯 바라보시더니 말하셨습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럼 저 시커먼 건 뭐예요? 무슨 혹 같은데..."
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물어보았죠.
"아- 저거요?"
선생님은 아까 그 참한 총각과 거의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어요.
"아가씨, 변비 있죠? 저거 변비에요. 말 난 김에 변비약도 처방해 줄까요?"
아! 이 무슨 망신입니까? 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병원을 나왔습니다. 귓불과 등줄기가 후끈후끈 한 것이 그날 어떻게 집엘 왔는지... 그 참한 총각의 묘한 미소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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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2장 동방신화
8. 이슈타르
이슈타르(Ishtar) 여신을 고대 수메르인은 인안나, 아카디아 및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에서는 야슈타르, 페니키아인 등은 아스타르테라 부르고 사랑.아름다움.생식.풍작.전쟁의 여신으로 숭배하였다. 그리스의 신으로는 아프로디테 여신에 견줄 수 있다. 이슈타르는 천공의 신인 아누 또는 달의 신인 신의 딸이라 한다. 아누의 딸이라 할 때는 그 속성을 사랑.생식.식물 생명의 소생등 지모신으로 인식하고, 신의 딸이라 할 때는 전쟁의 여신으로 외경하며 해신 샤마시(수메르의 우투)와는 오누이간이다. '전쟁터의 귀부인'이라는 별칭을 가진 최고로 용맹한 정의의 여신 이슈타르는 아시리아의 주신 아슈르와 마찬가지로 직접 원정 전투에 뛰어들어 적에게 공포를 불어넣었다. 일곱 마리 사자가 끄는 전차를 몰고 손에는 활을 지닌 상징상으로 표출되는 이 여신에 대해 니네베와 아르벨라(이라크 Erbli)에서는 각별히 예배하며 숭배하였다. 이러한 그녀의 속성은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시대에도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며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 수천 년 간 신앙의 대상으로서 숭배되었다. 한편 이슈타르를 여성신으로 인식하는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인과는 달리, 아랍인들의 경우는 그녀를 아트타르라 하여 남성신으로 인식하여 차이를 보여준다.
도시를 넘어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전파되어 오랫동안 지배적 신앙으로 자리잡은 이슈타르 숭배는 기원전 600~500년에는 유대인에게 받아들여져 예루살렘에 탐무즈 비의가 성행하였다. 이슈타르와 유사성이 짙은 이름들, 예컨대 아스타르테나 아슈타르 혹은 아트타르는 모두 '별'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이슈타르 여신은 스스로 "나는 새벽의 샛별, 저녁의 샛별이다"라고 하여 금성의 인격화된 신이 되었다. 바빌로니아 성전에서는 이슈타르를 '세계의 광명', '만군의 지휘자', '자궁을 여는 자', '율법을 정하는 입법자', '여신 중의 여신', '힘을 주는 승리의 여신', '죄를 용서하는 자'로 호칭하고 있다. 또한 하르(그리스의 호라이)라는 칭호도 있으며 여신 스스로 '지혜가 풍부한 창부'라고 칭하고도 있다. 성왕으로 선택된 남성은 창부 여사제와 성교의식을 통하여 여신과 영적 교류를 하고 여신에게 희생공양되었다. 길가메시 왕은 이 때문에 최고의 여신인 이슈타르에게 애인들에 대해 잔인하다고 핀잔을 주었다. 바빌로니아의 이 최고 여신인 이슈타르에게 올리는 기도문은 후대에 유대 사제들에 의해 그대로 모방되어 신에게 올리는 찬사 및 예배문으로 도용되었다. 구약성경의 '하늘 여신'(에레미아 44:19)이란 이슈타르를 지칭한 말이며 그 밖에도 아슈토레트, 아나트, 아쉐라 혹은 에스테르라고도 호칭하였다. 신약성서에서는 '큰 바빌론', '창녀의 어머니'라 하여 혐오와 신랄한 비난을 보내고 있다(요한 계시록 17:5). 이슈타르 여신의 지하세계 행차 신화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로 신앙 차원에서 중요하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판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여왕은 성미가 악독한 에레슈키갈로 이슈타르의 언니였다. 이슈타르는 명계로 간 애인 탐무즈(수메르에서는 두무지)를 만나보기 위하여 지하세계에 가기로 하고 신들에게 동의를 구하였다. 신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이 요청을 마지못해 들어주었다. 여신은 시녀 닌슈부르에게 만약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을 경우 해야 할 일들을 지시해 놓고 길을 떠났다. 성미 급한 이슈타르는 저승으로 들어가는 문 간지르에 닿자마자 문을 격렬히 두드리며 열지 않으면 때려 부수겠다고 소리쳤다. 수문장 네티가 여왕 에레슈키갈에게 아름다운 동생이 찾아왔다고 알리자 전혀 반가워하는 기색 없이 "그 아이의 마음을 나한테 쏠리게 한 게 누구지? 무엇이 그 아이 마음을 여기에 끌여들였을까?"하며 "그 아이가 명계의 법도를 따를 경우에만 들여보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문은 일곱 개가 있고 문을 통과할 때마다 일곱가지 상징적 권위를 하나씩 버려야 했다. 죽은 자들은 지상에서 누리던 권세의 흔적과 재물을 모두 버리는 것이 규칙이었던 것이다. 이슈타르는 먼저 왕관을 벗어 놓고 첫문을 들어선 후 차례로 문을 통과할 때마다 보석장신구를 비롯하여 몸에 지닌 것을 하나하나 풀어놓고 마지막 일곱 번째 문앞에서는 입은 옷마저 벗어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악한 언니는 동생을 보며 "여긴 무엇하러 왔느냐"며 소리쳤다. 에레슈키갈은 지하계의 신들인 아눈다(천상의 신들은 이기기라 한다)를 시켜 죽은 자들의 죄를 처벌하는 형벌(60가지 질병)을 안겨 주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이슈타르는 형벌의 고통으로 초죽음이 된 채 축 늘어져 갈고리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다.
[이슈타르]
한편 이슈타르가 명계에 있는 동안 지상의 농작물은 전혀 자라지 않았으며 모든 동물의 생식작용도 정지되었다. 남자들은 더 이상 여자들에게 씨를 뿌리지 않았으며 소나 말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흘 밤과 사흘 낮이 지났는데도 이슈타르 여신은 나타나지도 않았고 소식 또한 깜깜하였다. 그래서 닌슈부르는 여주인이 떠나기 전 지시한 대로 일을 진행하였다. 그녀는 먼저 니푸르의 엔릴(대기의 신으로 우주 창조신) 신전을 찾아갔다. 그러나 엔릴 신은 분노에 차 있어서 도움을 주기는커녕 지하세계까지 지배하려는 이슈타르의 욕심을 저주하며 지하세계의 권력을 탐내는 자는 누구든 지하계에 머물러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우르의 난나(엔릴이 닌릴에게서 낳은 소생)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혜의 신 엔키를 찾아갔다. 엔키는 이슈타르가 지하계로 떠나기 전에 그녀의 간청으로 방책을 일러준 바 있었던 신이다. 엔키는 두 허수아비 피조물 쿠르 가르 라와 갈라 투르 라를, 혹은 일설에는 거세한 남자피조물로 지상에서 가장 잘 생긴 아수슈마미르를 만들어 딸려 보내며 동시에 생명을 소생시키는 약초와 약수를 주어 이슈타르의 삶을 확실히 소생시키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지하세계로 들어오니 이곳은 알몸인 채로 중노동에 시달리는 모든 죽은 자들이 내는 비탄의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에레슈키갈은 지상에서 온 이들이 가지고 온 선물이 자신을 매우 즐겁해 해 주는 선물임을 알고 자신도 그 보답으로 선물을 내려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사품을 사양하고 대신 이미 숨이 끊어진 이슈타르의 시신을 넘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돌려받은 이슈타르의 시신에 자신들이 가지고 온 약수를 뿌리고 약초를 먹이니 놀랍게도 그녀의 생명이 소생하였다. 이슈타르가 다시 살아난 것에 놀란 명계의 신들 아눈다는 "지하세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은 아직껏 없었다. 더구나 살아 일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항의하며 그녀를 붙들고 만약 이 곳을 떠나려면 대신할 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몰인정하고 적의에 찬 귀신들도 다시 소생한 이슈타르의 뒤를 따르며 대신할 자를 요구하였다. 그때 이슈타르의 눈에 먼저 띈 것은 바로 누더기를 둘러쓰고 그 속을 기어오는 닌슈부르였다. 그러나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이 충실한 시녀를 아귀다툼하는 귀신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참에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찾아헤매던 그녀의 애인 탐무즈가 눈에 띄었다. 그는 쿨라브 들판에 있는 사과나무 거목 아래 찬란한 의상을 걸친채 옥좌에 앉아 있었다. 이 무정한 애인에 격분한 이슈타르는 귀신들에게 탐무즈를 넘겨줘 버렸다. 놀란 탐무즈가 처남이자 해신인 샤마시(야간에는 지하세계로 이동하여 빛을 비춰 주고 죽은 자들을 양육한다. 수메르의 우투)에게 구해 달라고 애원하여 뱀으로 변신, 도피하지만 결국 귀신들의 추격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 다음 이야기는 단편만 남아 있어 확실치 않으나 추측에 의하면 이슈타르 혹은 에레슈키갈이 개입하여 탐무즈는 한 해의 6개월은 명계에서 지내고 나머지 반은 탐무즈의 자매 게슈틴안나가 맡도록 하였다. 어쨋든 이슈타르는 이로써 명계를 벗어나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 때는 지하세계로 들어갈 때와 반대로 첫문을 나와 옷을 돌려받고 다음 문을 나와서는 팔찌와 발찌를, 그 밖의 소지품도 문을 나올 때마다 다시 돌려받아 마지막 지상으로 통하는 문을 나왔을 때는 왕관을 쓰고 일곱 가지 신권을 모두 되찾았다. 마침내 이슈타르가 지상으로 돌아오자 모든 생명체는 다시 생기를 되찾아 열매를 맺고 암수 동물은 생식을 위하여 한 쌍이 되고 남녀는 사랑하여 모든 생물은 지상의 풍요를 구가하게 되었다.
지하세계를 다녀와 저승의 힘을 획득한 그녀는 이렇게 하여 삶과 죽음에 영향력을 지닌 월등한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하세계의 지배권은 여전히 에레슈키갈에게 있었다. 그런데 이슈타르의 간지르(저승문)까지의 여정은 지하가 아니라 지평 이동이며 지상의 여러 곳을 가로질러 지하세계 입구로 왔으며, 그녀는 수메르 여러 곳의 신전을 버리고 지하세계로 갔다고 한다. 예컨대 부켈라티의 추정 여정표에 의하면 그녀는 에레크, 바드티비라, 자발람, 아다브, 니푸르, 키시 및 아카드의 7개 도시를 거쳐갔다. 마지막 목적지는 지하계의 왕 네르갈(에레슈키갈의 남편)의 왕도 쿠투였다고 한다. 이것과는 달리 위 내용이 신화적 여정이기보다는 실제 신앙의식의 순례행차라는 설도 있다. 예컨대 아카디아 서판에는 명백히 지하세계는 쿠투(혹은 쿠루)로 되어 있고 그 문을 들어서자 수문장은 그녀에게 "귀부인이여 어서 오소서! 쿠투는 귀부인으로 인해 기뻐하게 되나이다"라 인사하며 환영하고 있다. 쿠투가 지하세계를 의미하지 않음을 생각할 때 이는 도시기능을 상징한 것이라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여정은 종교적인 신앙의식의 행차가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슈타르의 첫 번째 지하계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저승의 권력을 직접 탐지하는 데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가 명계 여왕의 왕권을 찬탈하는 데 실폐한 것은 우선 명계의 문을 통과할 때 지상의 힘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이며, 이는 라이벌 에레슈키갈의 만만치 않은 전략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이슈타르는 다음 단계에서 닌슈부르에게 지시한 대비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하였다. 그녀의 승리는 '돌아나올 수 없는 땅'에서 돌아나온 데 있고, 따라서 지하계 왕 네르갈의 힘을 얻은 것이다. 즉 명계의 핵심 세력의 저항을 극복하고 한 번 들어가면 누구든 붙잡혀 있어야 하는 곳에서 다시 살아나온 것이다. 원래 죽음의 지배권이라 저승 신들에 속하는 것으로 누구든 함부로 넘겨 볼 수 없다. 누구나 가야 하는 정승에서 다시 이승으로 나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이 죽음의 수수께끼를 이슈타르가 마침내 탐색하고 부활을 체득한 것이다. 명계의 신들 아눈나의 말을 들어보자. "누가 지하계에서 일어났단 말인가! 누가 언제 지하세계에서 살아 일어났단 말이냐?" 따라서 이슈타르의 부활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특권을 간단히 양보하려 들지 않았고, 이 때문에 그녀에게 "이 곳을 떠나려면 대신할 자를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결국 이슈타르 여신은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지상으로 돌아와 그의 신앙을 세계적 신앙으로 확장시키고 이승에서 저승까지 위력을 떨치는 위대한 종교혁신을 완수하게 된다.
탐무즈
탐무즈(Tammuz)는 원래 고대 수메르에서 시작된 농경부족의 숭배신앙으로, 천상의 생식의 여신 이슈타르(혹은 인안나)에게 곡물과 포도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하여 남신 탐무즈를 희생공양하는 의식을 치렀다. 이슈타르는 대창부 또는 대성창으로 호칭되고 남자들은 여자제와 성교의식을 통해서 여신과 영적 교류를 하였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수기에 이 숭배를 받아들여 예루살렘 신전에서 매년 탐무즈를 어버이로서 또는 애인으로 보살피는 여인들에게 성왕으로 희생시켜 여신 이슈타르에게 공양하였다. 이는 대지를 피로 적시면 지상의 생산력이 회복된다는 풍요의식의 하나이며 따라서 탐무즈는 구세주가 된다. 탐무즈는 그리스의 디오뉴소스, 로마의 리베르(바쿠스의 별칭으로 포도주에 의한 자유로운 상태, 혹은 포도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또는 아도니스 등의 히브리판이다.
[이슈타르와 탐무즈의 결혼. 출처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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