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8호 2023.4.21 금요일 (음 3.02)
|
|
글나눔 → 참좋은한줄
|
|
|
아무도 보고 있는 사람이 없을 때의 당신이 당신의 참다운 모습.
― 앤 랜더스(美 칼럼니스트)
|
|
쉼터 → 자유글판
|
|
|
|
|
글나눔 → 말글
|
|
|
댄싱 나인 시즌 스리
얼마 전 한 방송의 ‘댄싱9 시즌3’이 인기리에 막을 내렸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 제목을 ‘댄싱 나인 시즌 스리’로 읽는다. 숫자 ‘9’와 ‘3’을 ‘아홉’, ‘셋’이나 ‘구’ ‘삼’으로 읽지 않고 영어인 ‘나인’ ‘스리’로 읽는 것이다.
우리말에서는 아라비아 숫자 ‘1, 2, 3, 4’ 등이나 로마 숫자 ‘Ⅰ, Ⅱ, Ⅲ, Ⅳ’ 등은 고유어 수사로 읽거나 한자어 수사로 읽는다. 일반적으로 일상생활에서 물건의 수효를 셀 때에는 ‘하나, 둘, 셋, 넷’ 등처럼 고유어 수사로 읽고, 그냥 숫자를 셀 때에는 고유어 수사로 읽거나 ‘일, 이, 삼, 사’ 등처럼 한자어 수사로 읽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아라비아 숫자나 로마 숫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것이 일반화되고 있다. ‘넘버1, 넘버2, 넘버3’ ‘슈퍼스타K1, 슈퍼스타K2, 슈퍼스타K3’ 등의 ‘1, 2, 3’ 등이 일반적으로 ‘원, 투, 스리’ 등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숫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건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숫자 읽기가 아니다. 혹, ‘넘버’ ‘슈퍼스타K’ 등이 영어 또는 영어에서 유래한 외래어라서 그 뒤 숫자를 영어식으로 읽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냐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식샤를 합시다1, ‘식샤를 합시다2’의 ‘1, 2’도, ‘수학Ⅰ, 수학Ⅱ’ ‘물리Ⅰ, 물리Ⅱ’ 등의 ‘Ⅰ, Ⅱ’도 영어 ‘원, 투’로 읽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그렇게 볼 수 없다. 영어식 숫자 읽기의 남용에 불과하다.
수사는 한 언어에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에 꼭 필요한 기초 어휘이다. 그런데 숫자 읽기에서 우리말의 기초 어휘인 수사가 영어에 밀려 홀대 받고 있다. ‘엠피스리(MP3)’ ‘스리디(3-D)’ 등은 별개의 단어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냥 숫자를 차례대로 셀 때에는 그 숫자를 우리말 수사로 읽는 것이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조교수
|
|
시나눔 → 우리시
|
|
|
최초의 님 - 한용운
맨 처음에 만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 처음에 이별한 님과 님은 누구이며 어느 때인가요.
맨 처음에 만난 님과 님이 맨 처음으로 이별하였습니까,
다른 님과 님이 맨 처음으로 이별하였습니까.
나는 맨 처음에 만난 님과 님이 맨 처음으로 이별한 줄로 압니다.
만나고 이별이 없는 것은 님이 아니라 나입니다.
이별하고 만나지 않는 것은 님이 아니라 길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은 님에 대하여 만날 때에 이별을 염려하고,
이별할 때에 만남을 기약합니다.
그것은 맨 처음에 만난 님과 님이 다시 한번 이별한
유전성의 흔적입니다.
그러므로 만나지 않는 것도 님이 아니요,
이별이 없는 것도 님이 아닙니다.
님은 만날 때에 웃음을 주고, 떠날 때에 눈물을 줍니다.
만날 때의 웃음보다 떠날 때의 눈물이 좋고,
떠날 때의 눈물보다 다시 만나는 웃음이 좋습니다.
아아, 님이여! 우리의 다시 만나는 웃음은 어느 때에 있습니까.
|
|
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
|
|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1. 돌아오지 않은 장군(경포, 팽월, 난포)
3) 마치 집에 가듯 죽음을 맞는다(난포)
난포는 팽월과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두 사람 모두 가난해 술집 심부름꾼 일을 하다가, 팽월은 도둑이 되었고 난포는 노예로 연나라에 팔려갔다. 그런데 거기서 능력을 인정받아 벼슬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장군까지 되었다. 그 후 난포는 유방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팽월이 이 소식을 듣고 유방에게 부탁해 그를 풀려나게 한 후 자기 나라 대부로 삼았다. 난포가 사신으로 다른 지방에 나가 있을 때 팽월이 반란 혐의로 붙잡혀 죽었다. 그리고 팽월의 목을 낙양 성문에 걸고,
"이 목을 건드리는 자는 처벌한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난포는 낙양으로 가서 팽월의 목 앞에서 사신으로서의 보고를 마친 뒤 그 자리에서 제사를 지내고 곡을 했다. 이에 관리가 그를 체포해 유방에게 끌고 갔다. 유방이 꾸짖었다.
"너도 팽월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는가? 내가 팽월의 목을 거두지 못하도록 명령했는데, 네 놈이 와서 제사를 지내고 울었다니 함께 모의한 것이 분명하다. 여봐라. 저 놈을 당장 삶아 죽여라!"
관리가 난포를 끌고 끓는 가마솥으로 갔다. 한동안 태연히 걷던 난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죽기 전에 한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무슨 말인가?"
"전에 폐하께서는 항우와 싸워 형양에서 패하였을 때, 항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였습니까? 바로 팽왕(팽월)이 항우의 뒤에서 끊임없이 괴롭혔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해하의 싸움에서도 만일 팽왕이 합류하지 않았다면 쉽게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무 증거도 없이 반란 혐의를 씌워 팽왕을 죽이셨습니다. 이래서는 모든 공신들이 불안에 떨 수밖에 없음을 걱정합니다. 저는 팽왕이 이미 죽고 없는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삶아 죽이십시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난포를 풀어 주도록 했다. 그리고 도위라는 벼슬도 내렸다. 그 뒤 문제 때에 난포는 장군의 자리까지 올랐다. 난포는 이렇게 말했다.
"곤궁해졌을 때 몸을 낮추고 뜻도 낮추지 못하면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부귀할 때 뜻을 펴지 못하면 현명하지 못하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에게 후하게 보답했고, 원한이 있던 사람은 법에 따라 엄하게 처벌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위해 '난포사'라는 사당을 지어 그를 기렸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난포가 팽월에게 곡을 하고 죽으러 갈 때 마치 자기 집으로 가는 듯했다. 그는 진실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으므로 죽음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열사가 그를 능가하겠는가!"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송양지인(宋襄之仁)
宋:송나라 송. 襄:도울 양. 之:갈 지(…의). 仁:어질 인.
[출전]《十八史略》〈卷一〉
송나라 양공(襄公)의 인정이란 뜻. 곧
① 쓸데없는 인정을 베푸는 것의 비유.
② 무익한 동정이나 배려.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부가 위(位)에 올라 양공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643), 춘추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 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제/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열세(劣勢)한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하는 바람에 결국 이듬해 죽고 말았다.
|
|
글나눔 → 삶속의 글
|
|
|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뒷집의 빠른 놈(?) - 윤일형(남.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동)
'천사의 말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한낱 꽹가리 소리에 지나지 않고,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덩(?) 이야기라도 예술적으로 승화되면 함박꽃보다 더 환한 웃음꽃으로 핀다.' 물론 덩(?)이 예술적으로 승화될지는 미지수지만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직원이 고작 스무 명 남짓한 조그마한 회사에 디니고 있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아주머니들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총각이 하나 있었으니 봉고차 기사인 바로 나. 또한 거기엔 아가씨까지 하나 있었으니 경리 일을 보는 문제의 그녀. 그녀는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춘향이와 잘 아는 사이이거나 아니면 양귀비를 하녀로 부리는 사람인 줄로 알았으니까요. 저 또한 미남 그 자체였구요. 물론 남들은 한사코 인정하지 않지만. 아가씨 하나에 총각 하나. 무언가 역사가 이루어질 것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녀의 콧대는 그 미모만큼이나 도도하고 높았습니다. 그녀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 할 때면 그녀는 여지없이 콧방귀로 저의 자존심을 어두운 구석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전 이렇듯 매번 구겨지는 자존심을 추스르다 보니 차츰 제 마음도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오히려 미운 감정만 쌓여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기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우습고 창피하고 또 엉뚱한...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것이 기회였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저의 두 가지 특이한 버릇이랄까 습성에 대해 소개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못말리는 건망증과 또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뒷집(?)에서 빠른 놈(?)을 만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뒷집은 다 아시리라 믿고 빠른 놈에 대해 잠시 설명드리겠습니다. 본디 '덩'이라는 것이 성질이 제각각이라 무겁고 신중하게 내리 누르는 놈들이 있는 반면, 칼루이스처럼 빠른 속도로 내리 꽂히려는 놈들이 있습니다. 술 마시고 탈 날 때 내려오는 놈들이 바로 빠른 놈들입니다. 운명의 그날 저는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뱃속에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더니 갑자기 엉덩이 쪽에서 빠른 놈이 출발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가 왔습니다.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구야, 이러면 안 되는데. 회사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이걸 어째. 회사까지 그냥 가? 아니야 이 놈은 보통 놈이 아닌 것 같아. 중간에 적당한 데 들러서 해결하는게 좋겠어. 이건 인간으로서 참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야. 어디 보자. 저 건물에는 화장실이 있겠다. 옳지, 여기다 주차해 놓고 으으- 차에서 내리는 것은 일단 성공. 이거 걷는 것도 어렵네. 그렇다면 팽귄같이 살살 걸어가 볼까. 혹시 문이라도 잠겨 있으면 안되는데. 어디 보자.
어라 잠겼네.
우리나라 이거 문제 있어. 살다보면 나처럼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잠가 놓으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다른 데로 가 보자. 저 건물은 왠지 안 잠겨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옳지, 여기는 안 잠겼군. 화장실 같아 보이지? 계단! 계단은 한 손으로 난간을 꽉 붙잡고 하체 쪽은 힘을 빼고 이러-케. 한 칸 성공. 또오 한 칸. 또오오 한 칸. 또오오오... 휴-. 땀이 비오듯 쏟아지누만. 세상에 계단에서 사우나 한다는 건 보다 듣다 처음이네. 이제 마지막 계단이지! 화장실이 바로 저긴데 예서 멈출 수 있나, 마지마악- 한 칸.
다 올라왔어. 삐그덕 문을 열고...
'아이쿠 이런 하느님 맙소사. 창고잖아.'
아아!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미칠 것 같아. 이 일을 어쩐다. 기왕 들어왔으니 한층 더 올라가? 아니야. 계단은 빠른 놈에게 아주 치명적이야. 내려가는 게 좋겠어.
후- 후- 후-
이제 내려가는 것도 만만치가 않네. 오- 빠른 놈이여. 아니 빠른 님이여, 빠른 분이시여, 세상 구경이 그렇게도 하고 싶으시나이까? 제발 조금만 참아 주소서. 아이고 하느님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저는 천천히 운전해야 했습니다. 차가 갑자기 덜컹거리면 빠른 놈이 주인도 모르는 사이에 난감한 사건을 터트릴지 모르거든요. 가까스로 회사에 도착한 저는 화장실 앞에까지 차를 몰고 갔습니다. 뒷집 들어가 앉자마자 시동도 걸지 않았는데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오토바이는 쌩쌩 달렸고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좋았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오토바이를 다 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화장지를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우째 이런 일이. 뭘로 해결한다. 그래 재활용이라는 게 있지. 어디 쓸만한 것이... 짜식들 좀 여유있게 쓰지 이게 뭐야. 순간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침에 옆칸에 들렀을 때 프로 야구 해태 타이거즈의 김 아무개 선수가 방망이를 들고 환하게 웃는 사진이 실린 스포츠 신문이 생각났던겁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방은 조용했습니다. 일이 아직은 완전히 끝난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옆 칸으로 갔습니다. 김 아무개 선수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음, 그런대로 쓸만 하겠어.' 신문을 집어들고 다시 처음에 일보던 칸으로 돌아서는 순간! 아뿔사, 이게 웬일인가! 그녀가 정면으로 들이닥친 것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이게 무슨 일인가 멍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더니 이윽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습니다.
"으아악-."
으이구. 이게 뭣 놈의 댄스(Dance)여. 엉거주춤도 무슨 춤이라고 추고 있는 것이여, 시방. 그때 제가 왜 처음 일보던 칸으로 돌아가려 했을까요? 까닭모를 일종의 동물적 회귀 본능이거나 아니면 제 것에 대한 본능적 애착일까요? 한마디로 정신없는 놈의 정신없는 짓이었습니다. 그후 그녀는 저를 보면 피식피식 웃거나, 무언가 못 볼 것까지 보았다는 듯 얼굴을 붉히거나, 혹은 손가락을 머리 근처에서 빙빙 돌려가며 미친놈 아니냐는 시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일이 이것으로 끝났으면 저만 창피당하고 끝났을 일이지만 또 한번의 엉뚱한 사건이 저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신은 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역시 거래처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수모를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저였기에 전날 회식자리에서 조금은 술을 자제했습니다. 그래도 주거니 받거니 했던 술이 과했던 탓인지 자꾸 엉덩이 쪽으로 신호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무지막지한 놈은 아니었습니다. 차가 덜컹거리지 않도록 조심하는 정도에서 회사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화장지도 잘 챙겼구요. 예전 같지 않게 정신도 말짱했죠. 전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 들어가 노크를 했습니다.
"똑, 똑."
"네, 들어오세요."
그녀의 목소리였습니다. 저는 아주 당당히 문을 열었습니다. 또 정신이 나간 겁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눈이 더 둥그래지더군요. 그래도 저는 아무 생각없이 그녀 앞에 아주 태연히 서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녀가 발딱 일어서 문을 쾅 닫았죠. 쾅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실성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며 옆칸으로 갔습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그 문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여자 엉덩이가 조그만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엄청 뚱뚱했습니다. 옆칸으로 들어간 저는 실실 웃어가며 오토바이를 사정없이 몰았습니다. 오토바이의 요란한 폭발음을 내며 예전보다 더 신나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옆칸에서 그녀가 저보다 더 크고 요란한 속도로 오토바이를 모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고상하고 도도하고 콧대 높은 여자가 오토바이를 저렇게 인정사정 없이 몰다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저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
한참 웃고 있는데 옆칸에서 그녀가 빽하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만 해요"
"그만 하라니까요."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 어떡해요."
"창피하게시리 그만 해요."
"좋아, 그만 하는 대신 나하고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지요?"
"알았어요."
"영화도 같이 볼 수 있지요?"
"야! 이 야만인아."
"내 입은 그렇게 무거운 편이 못 되는데요?"
"좋아, 알았어요."
"드라이브는?"
"알았다니까요."
우리는 뒷집에서 서로에게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화장지 챙기는 걸 잊어버리듯, 그녀도 급하면 문고리 잠그는 걸 잊어버리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무데서나 사무실로 착각해서 '네,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건망증이 닮았고, 또 과음한 다음날이면 둘 다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후 우리는 아주 좋은(?)사이가 되었습니다.
|
|
글나눔 → 추천글
|
|
|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2장 동방신화
4. 신성과 종교
이집트의 산과 신앙은 물론 그 고대문명은 어떠한 세계 문명보다도 선행한다. 아득한 옛날 기원전 2500년에 건립한 쿠푸의 피라미드는 오늘날의 기술로도 능가할 수 없는 위용을 자랑하는 고도의 과학문명이다. 세월이 흐르자 신과 신성의 변천이 일어나고 신의 계보는 매우 혼란해지게 되었다. 초기 기록은 망실되어 남은 자료는 충분하지 않으나 후세에 발굴을 통해 옛 신전이 밝혀지고 피라미드(세계 7대 불가사의 중 가장 오래 되고 또한 현존하는 유일한 구조물이다)에 보존된 왕조 기록, 묘비명, 파피루스 문서, 많은 석상과 조각에서 이끌어 낸 사료와 그리스인들(역사가 헤로도트스 등)이 남긴 기록이 주요 재료이다.
유구한 문화를 가진 이집트인은 독특한 신앙과 종교를 창출해 냈으며 신의 수효 또한 엄청나 발굴 초에만도 기록상 800 이상이 산정되었다. 시초에는 여러 부족집단이 각각의 지역신을 갖고 있었으나 부족들의 정치적 통합으로 각 부족신 사이에 합동이 일어났으며, 기원전 3100년경에는 최종 통합이 달성되어 나일 계곡신들과 남부신들이 손을 맞잡고 만신전에 자리잡았다. 시대가 지나자 일부 지역신은 권위와 세력이 커지고 한 주 전체, 혹은 나이가 나라 전체의 주신으로 존경되기도 하였다. 우주신은 외부에서 이집트로 유입되어 공존하였는데 지역신과는 달리 동물이나 물신 형태는 없고 또한 인간 생활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로 경외되었다. 나라의 위대한 신이 된 천공신, 대지신, 태양신, 달신, 위대한 강신은 외경하지만 제의는 올리지 않았다. 후기에는 많은 신들을 숭배하고 신들의 이름과 신성도 적지 않게 융합되면서 혼란스러워졌지만, 개개의 숭배자는 습관상 지역신과 지역신에 동반하는 신들 및 물신에만 친근하게 되었다.
신화상으로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혼돈이 있을 뿐 물(바다)이 대지를 덮고 암흑이 우세하며, 신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물에서 만물의 생성요소와 정이 태동하고 최초의 모신이 출현하였다. 구왕구시대에 이미 세 도시(헤리오폴리스, 멤피스, 헤르모폴리스)에 종교 중심지가 조성 발전되고, 각 지역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하는 사제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들의 신과 동반 신들이 우주 창조를 어떻게 시작하였는지 과시하려고 노력하였다. 창세 과정은 모두 비슷하게 전진적.진화적인 창조적을 제시하였지만 단 한 군데 '첫 시작'에 차이가 있으며 창조 역할을 연출한 시점에 대해서는 확실히 의견을 달리하였다. 여신 마예트는 황금시대가 되자 모든 법전과 윤리 및 제도를 인류에게 만들어 주었다.
천지창조설은 헬리오폴리스 사람들의 것이 가장 중요하며 또한 널리 받아들여진다. 창조신은 모두 아홉 주신 엔네아드로 아툼이 원초신이다. 그는 원초섬의 물 위에서 현현하여 공기신 슈를 내뿜고 증기의 여신 테프누트를 토해 냈다. 이 두 신은 결합하여 대지의 신 게브와 천공여신 누트를 낳았다. 다시 이 두 신이 결혼하여 낳은 신들이 바로 천지신이 아닌 오시리스, 이시스, 세트와 및 네프티스 형제자매들이다.
- 창조의 신 Atum(아툼)
멤피스에서는 도시의 최고신 프타가 현현하여 나우네트를 출현시키고 그녀에게서 아들 아툼을 낳았다고 한다. 아툼에게서는 헬리오폴리스의 아홉 주신이 출현하였다. 이와 같이 멤피스에서는 그들의 신이 처음으로 창조를 시작하였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프타는 솜씨 좋은 장인신이며 세상을 구축한 창조신으로 숭앙되었다. 프타의 한 아들 임호테프는 제3왕조 조세로 왕의 묘를 사카라에서 계단식 피라미드로 건립한 최초의 인물이며, 또한 의료의 신(그리스의 아스클레피오스)으로 존중되었다.
헤르모폴리스에서는 여덟 주신 오그도아드가 세상을 창조하였다고 한다. 원초의 바다신 눈, 내세의 신 후, 암흑의 신 쿠크와 대기신 아문과 그 각각이 낳은 나우네트, 하우헤트, 카우케트 및 아마우네트가 그들이다. 다른 설에서는 세상은 껍질 없는 우주알 혹은 연꽃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태양숭배는 일찍이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것 같다. 고왕국시대(기원전 2686~2181)에는 온(헬리오폴리스)에서 태양신이 왕의 비호신으로서 공적으로 숭배를 받았다. 태양신 레는 지역 창조신 아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대한 신전에 모셔지고 특히 제5대왕조 때는 그 숭배가 절정에 달하였다. 레 신앙은 왕실과 접목되어 왕실종교로 발전하고 이집트 왕은 공식적으로 레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레를 모시는 신관 사제들의 세력도 커졌으며 종교신학도 정립되었다. 제4왕조 때부터는 모시는 으레 왕은 하늘나라의 태양에 오른다는 내세관이 발전하고 이에 연유한 구조물인 피라미드에 매장되었다. 고왕국 말기에는 왕실세력이 쇠퇴하면서 태양신앙은 주춤하게 되는데, 왕실이 약화되는 반면 레 사제의 세력은 계속 커져 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분란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 와중에 서민적으며 민주적인 오시리스 신앙이 두드러지면서 숭배대상의 교체가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장례의식과 부활은 태양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신왕국시대(기원전 1552~1069)가 되자 제18대 왕조 때 그 전까지는 지역신이던 아문을 '신중의 신'으로 올리고 레 숭배와 통합하여 나라의 위대한 신 아멘 레를 창출하였다. 여기에서 염두에 둘 것은 이집트 신들의 경우 합체는 하지만 원 모습과 특성을 포기하고 융합하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제18대 왕조 말 아케나텐 왕은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삼아 태양신 아텐 숭배에 집중하였으나 유일신앙의 성립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케나텐의 아텐 숭배는 초기의 태양숭배와는 여러 모로 다르면서도 초기의 이집트 통치자처럼 왕실과 태양신 간의 일체성을 시도하여 공통점이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태양숭배는 어는 때나 일반인들과는 거리가 있었고 관련성이 적어 원칙적으로 왕실과 나라의 신앙으로 존속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테베의 사제들은 신왕국시대 후기에 와서 그들의 신 아문에 전지전능성을 부여하고 아문 신이 비밀리에 자기 자신과 모든 다른 신을 창출하였으며 또한 천지창조를 이룩하였다고 선언하였다. 또 다른 설에서는 나일 강의 작은 섬 엘레판티네의 염소머리 신 크눔이 아문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그 고장 흙을 재료로 녹로를 돌려 인간을 만들었다고도 주자하였다. 이집트 사람은 신들을 세상에 실존하는 성스러운 동물의 형태로 표출시켰다. 호루스는 매, 바스트(그리스의 아르테미스)는 고양이, 사랑의 신 하토르(그리스의 아프로디테)는 암소로 나타났다. 또한 몸은 사람이고 머리만 동물현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예컨대 아누비스는 개 또는 재칼, 토트(신의 대변인, 그리스의 헤르메스)는 따오기다. 원시시대 토템 신앙의 유풍일 것이며, 기이하고 신비성이 풍겨 이집트 신성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물 신들은 신성시되는 짐승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다양한 형태의 동물적 생명력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로 전파된 이집트 신 중 중요한 신으로는 헤리오폴리스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멤피스의 세라피스를 꼽을 수 있다.
[Serapis(세라피스 두상)]
- 세라피스에 관한 최초의 기술로서, 기원전 323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의문이 남는 임종의 한 장면이 있다. 바로 바빌론의 '세라피스 신전에 중태에 빠진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신사의 경내로 옮겨야할 것인가를 신탁을 통해 물었다'라는 기술이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세라피스가 바빌론에서 모셔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기원으로 한다는 설과 모순되기 때문에, 아리아누스(Lucius Flavius Arrianus)의 시대 착오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바빌론에는 엔키(에아)라고 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을 세라프시(Serapsi, 심연의 왕)라고도 부르고 있었다. 따라서 아리아누스가 세라프시와 세라피스를 혼동했다는 설, 혹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과 관련된 세라프시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세라피스와의 습합에 관련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이시스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Isis)는 파라오 만신전의 주신으로 이 여신에 대한 숭배와 신화는 그리스와 로마 세계로 널리 퍼졌다. 대지의 신 게브와 천상의 여신 누트는 두 아들 오시리스와 세트와 쌍둥이 딸 이시스와 네프티스를 두었다. 이시스는 오시리스의 아내가 되고 네프티스는 세트(그리스 사람은 튜폰이라 한다)와 결혼하였다. 오시리스는 왕권으로 통치하고 이시스는 왕비가 되어 다들 호루스를 낳았다. 원래 이시스의 뜻은 '왕좌'로서, 오시리스의 왕권이 의인시으로 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시리스는 후에 동생 세트의 반란으로 죽음을 당하는데 그 내력을 보면 이렇다. 왕이 출타했다가 돌아와 세트의 환영 만찬회에 참석하였는데 세트는 왕에게 딱 맞는 우아한 장식상자를 내놓고 누구든 상자 안에 누워서 맞으면 선물로 주겠다고 여흥 삼아 말하였따. 여러 내빈들이 시험해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세트는 오시리스에게 은근히 권하였다. 이에 오시리스가 장난 삼아 들어갔더니 세트를 추종하는 반역자들이 바로 상자의 뚜껑을 닫고 못질을 한 후 상자에 무거운 돌을 달아 나일 강에 던져 버렸다. 이 소문을 듣고 상자를 찾아나선 이시스는 오랜 세월 갖은 고초를 겪은 끝에 마침내 상자를 찾아내 오시리스의 시신을 챙겨 부토 근방의 델타 풀밭에 숨겨 두었다. 그리고 세트의 눈길을 피해 살면서 유복자의 출산을 기다렸다. 그러나 달밤에 사냥 나온 세트에 발각되어 오시리스의 시신은 발기발기 14토막으로 해체되어 다시 나일 강 속에 던져지고 이집트 땅 널리 흩어져 떠내려갔다. 이시스는 또다시 오시리스를 찾아나섰고 그 슬픔에 찬 통곡 때문에 유복자 호루스는 어미의 원수를 갚게 된다.
오시리스는 하이집트의 영주로 신격화한 왕이고, 세트는 원래 상이집트의 영주로 마찬가지로 신격화된 왕이니 이는 나일 강 상부지역과 하부지역 간의 세력갈등을 표현한 신화이다. 모든 실들의 어미로 세트의 세력을 꺾어 승리를 거둔 이시스에 대한 신앙은 급속도로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스 종교의 많은 여신들이 이시스와 동격신성을 나타내는데, 이오의 이야기나 지하계의 왕 하데스에게 납치된 자신의 딸을 찾아나선 곡물의 증식을 가져오는 지모신 데메테르의 유명한 설화가 모두 이시스 신화와 융합된 것들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통치시대에는 그리스와 이집트 종교 간에 병합이 일어나면서 이시스 여신의 모습은 헬레니즘 요소를 지니게 되어, 머리에만 옛 파라오의 상징인 왕관을 썼을 뿐 그리스식 의상을 걸친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집트 성전의 첫장은 "오래 된 것 중에서 가장 오랜 신에 이시스가 있고, 이시스는 생명과 변화하는 모든 것을 탄생시킨 여신이다"라고 적혀있다. 창조의 여신으로서 이시스는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양을 탄생시켰다. 로마시대에 이시스를 숭배하는 비교에서는 여신을 '만물의 여신'으로 호칭하였고, 철학자이자 시인인 파트라이의 루키우스는 이시스 여신을 '신성하고 영원한 인류의 구세주'로 극진히 찬양하는 시문을 남겼으며, 경건한 이시스 숭배자 아풀레이우스는 수많은 여신이름을 부르면서 이시스의 응답으로 찬양하였다. 이처럼 이시스는 가장 고귀하며 자비로운 만물의 모신으로서 높은 신성을 획득하고 특히 증식을 가져오는 여신으로서 자애와 환희를 주는 영험이 있어 화류계 여인들에게 널리 보급되었으며 이는 애가로 남아 있다.
[isis(이시스)]
이집트 사람은 이시스를 모든 신의 여왕이며 지상에서 명계에까지 신비한 능력을 지닌 지고의 신으로 찬양하였다. 바다에 길을 냈다는 모세의 기적이나 태양을 정지시켰다는 그 후계자 여호수아의 기적도 그 원형은 이시스에서 나온 것이었다. 기원전 80년경 로마에 도래한 이시스 숭배는 서기 4세기 그리스 도교에 밀려날 때까지 대단히 성행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시스 여신은 배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 내지 융합되어 성모 숭배를 촉진하였다. 호루스의 어미 이시스 및 사이스(기원전 7세기경 이집트의 수도)의 여신 네이트의 속성은 그리스도의 어미 마리아의 속성과 동일하다.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교도 중에는 자신들을 '양치기'로서 '이시스의 시종'의 호칭인 파리토포리라고 자칭한 자도 있었으며 목사라는 뜻의 파스터(Pastor)라는 낱말은 여기에서 연유하여 생겨난 것이다.
오시리스
오시리스(Osiris)는 그를 시기하는 형제 세트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그 신체는 조각내어 나일 강에 던져졌다. 정숙한 부인 이시스는 쌍둥이로 태어난 자매 네티프스(세트의 부인)와 아누비스의 협력을 받아 신체 조각들을 모았다. 이시스는 그의 생명을 다시 되찾아 부부로 결합하고 그 결합으로 태어난 호루스는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 그런데 이 오시리스는 헬레니즘에서는 이시스계의 신이 아니었다. 즉 이집트의 일부 지역에서 사자의 세계를 다스리며 장례신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나일 강 유역 밖으로는 그 숭배가 퍼지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세라피스가 이시스의 옆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명확히 이시스 종교과 그 '비의'가 성행하고 사후 세계의 삶을 약속받기 위해 오시리스에 대한 관심이 재현되었다. 이에 따라 오시리스는 나일 강의 성스러운 물과 풍요의 상징이자 생에 상응하는 존재로서 로마제국의 이시스 신전 의식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신전에는 성수를 담은 저수지와 수조가 있었고 제기로는 휴드리아와 시툴라이가 사용되었다. 오시리스 카노푸스신 의 조각상 중에는 그러한 그릇을 머리에 올려 놓은 모습을 묘사한 것도 있다.
11월의 중요한 이시스 축제는 로마 수도에서도 올려졌고, 신의 수난 및 죽음과 부활을 되새겼다. 폼페이의 이시스 신전에는 여러 장식 외에 두 점의 오시리스 수난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증식의 신으로 계속 다시 태어나므로 때로는 디오뉴소스와도 결부되었다. 로마에 오시리스 '비의'가 존재했음은 익히 아는 바이나 오시리스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 대신 수많은 동으로 만든 조상이 로마제국 전역과 무덤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의 오시리스는 고대 이집트의 미이라형으로 휜 홀과 도리깨를 지니고 측면에 깃털 장식이 달린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그리스인은 오시리스의 어미를 세멜레와 동일시 하였다.
세라피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이시스 숭배가 퍼진 초기에 이시스 여신에 동반하는 신은 오시리스가 아니라 바로 이 세라피스(Serapis)이다. 오시리스와 아피스(성스러운 소)의 합일신으로(멤피스에 장엄한 세라피스 신전이 있다) 그리스.이집트의 신이지만 그 출현을 둘러싸고는 의견 차이가 있다. 즉 고전 작가는 세라피스 숭배를 기원전 3세기 초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연유한다 하고, 다른 설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스스로 세라피스 숭배를 창출시켰다 하는데 이 견해가 유력하다.
세라피스 신전으로는 프톨레마이오스 3세 때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진 것이 유명한데, 라코티스 언덕에서 나온 여러 유물들을 살펴보건데 프톨레마이오스 2세 치세 때부터 알렉산드리아에서 공식 신으로서 숭배되었음이 확실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의 이름난 신상과 초상의 기원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세라피스는 오시리스에서 기원하여 죽음과 번식과 재산의 신으로서 지하의 신과 풍요의 신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지만, 헬레니즘에서는 심각한 표정에 풍부한 머리 및 수염, 가운과 겉옷 매무새가 완전히 그리스 명계의 신 하데스를 상기시킨다. 이 지하의 신이 거느리는 괴물도 명계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케르베로스로, 시간(영겁)의 신인 아이온의 상장인 개의 머리, 늑대머리 및 사자머리를 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세라피스는 시간과 영원의 주인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쓰고 있는 두관은 농사의 풍요를 표시하는 것으로 세라피스가 풍요를 나누어 주는 신이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원래 이시스와는 달래 프톨레마이오스 치세에는 환영받지 못하였던 세라피스는 헬레니즘 시대에 전파되어 이시스 신전에 봉안되었으나 이시스 여신의 배우자 역에서 좌천되었다. 콤모두스, 카라칼라 및 셉티무스와 세베루스 황제시대에는 풍요의 신, 치료의 신으로 존숭되었고, 점차 태양신 헬리오스와 동일시되어 신의 머리에서 관선이 비치는 조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 전에 이미 그의 위신은 실추되었고,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명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신전은 파괴되었다.
|
|
첫쪽 → 배경화면
|
|
|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