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6호 2023.4.19 수요일 (음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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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가 끝나면 將軍도 士卒도 다시 장기망태기로 들어간다. ― 이탈리아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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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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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연녀와 동거인
가끔 연락하는 <한겨레> 기자가 있다. 말을 주제로 기자끼리 토론이 붙나 보더라. 말에 대한 감각이 천차만별이니 토론이 자못 뜨거워 보였다. ‘기자들이 말에 대한 고민이 많군’ 하며 즐거워한다. ‘내기’ 를 거는지는 모르지만, 급기야 생각 없이 사는 나한테까지 질문을 한다. 내 대답은 늘 ‘어정쩡’ 하다.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소이까?’
며칠 전엔 아트센터나비 관장 노소영씨가 티앤씨(T&C)재단 이사장 김희영씨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김씨를 에스케이(SK) 회장 최태원씨의 ‘내연녀’ 라 할지 ‘혼외 동거인’ 이라 할지로 논쟁이란다.
상식적(?) 으로 보면, ‘내연녀 / 내연남’은 개인의 사생활을 매도하고 편견을 조장하는 말이니 ‘혼외 동거인’ 이라 쓰는 게 맞다고 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연락해온 기자는 노소영씨 입장에 주목했다. 노씨가 소송을 한 데에는 두 사람의 내연 관계에서 받은 정신적 상처가 영향을 끼쳤을 텐데, 김씨에게 ‘혼외 동거인’(‘동거녀’ 도 아닌) 이란 중립적인 표현을 쓰는 게 온당한가? 은밀함, 비도덕성, 부적절함 같은 말맛이 풍기는 ‘내연녀’ 란 말을 써야 ‘본처’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담을 수 있지 않겠냐는 마음일 듯. 이렇게 볼 수도, 저렇게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다른 데에 눈길이 갔다. ‘내연녀’ 와 ‘혼외 동거인’ 사이에서 새삼 고민하게 된 계기가 뭘까 하는 것. 유사 이래로 혼외 연애 범죄는 끊임이 없었다. 그걸 다룬 기사는 한결같이 ‘내연녀 / 내연남 고소 / 협박 / 폭행 / 살해’ 였다. 그렇다면 혹시 고결한 재벌가의 연애사를 다루다 보니 비로소 번민이 시작된 건 아닐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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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얼굴 - 한용운
임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어여쁘다는 말은 인간 사람의 얼굴에 대한 말이요,
님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쁜 까닭입니다.
자연은 어찌하여 그렇게 어여쁜 님을 인간으로 보냈는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자연의 가운데에는 님의 짝이 될 만한 무엇이 없는 까닭입니다.
님의 입술같은 연꽃이 어디 있어요.
님의 살빛같은 백옥이 어디 있어요.
봄 호수에서 님의 눈결같은 잔 물결을 보았습니까.
아침 볕에서 님의 미소같은 방향(芳香)을 들었습니까.
천국의 음악은 님의 노래의 반향입니다.
아름다운 별들은 님의 눈빛의 화현(化現)입니다.
아아, 나는 님의 그림자여요.
님은 님의 그림자밖에는 비길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님의 얼굴을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적당한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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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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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1. 돌아오지 않은 장군(경포, 팽월, 난포)
1) 고독한 올빼미(경포) - 형벌을 받고 왕이 될 관상
경포의 원래 성은 영씨였다. 젊을 때 어떤 사람이 그를 보더니,
"당신은 형벌을 받고 나서 왕이 될 관상이오." 라고 말했다.
그 뒤 그가 남의 죄에 연루되어 얼굴에 문신형(경형:경포라는 이름도 경형을 받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껄껄 웃으며,
"전에 어떤 사람이 내 관상을 보고 형벌을 받은 다음에 왕이 된다고 하더니 정말인가 보구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 웃을 뿐이었다.
경포는 판결을 받은 다음 다른 죄수들과 함께 여산으로 보내졌다. 그곳에는 수십만 명의 죄수가 와 있었는데, 경포는 그 중 쓸 만한 사람들과 사귀었다. 얼마 뒤 경포는 친한 사람들을 이끌고 도망쳐 양자강 유역에서 도적이 되었으며, 물론 경포는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 진승이 반란을 일으키자, 경포도 군대를 일으켜 수천 명을 모았다. 그래서 진승이 패한 후에도, 경포는 진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하였다. 경포는 때마침 항량이 군사룰 일으켜 양자강을 건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항량의 군대는 계속 북상하여 진나라를 쳤는데, 경포의 공적이 항상 으뜸이었다.
그 뒤 항량이 죽자 항우의 지휘 아래에 들어간 경포는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특히 경포의 군대는 용맹스러워 적은 수로 많은 병력을 깨뜨렸기 때문에 항우의 큰 신임을 받았다. 경포는 진나라 주력 부대였던 장한의 군대까지 격파했으며, 항우가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이 되자, 경포는 구강 자방의 제후로 임명되었다.
경포를 얻어야 천하를 얻는다
그 뒤 제나라 왕 전영이 항우를 배반한 사건이 일어났다. 항우는 가장 신임하는 경포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경포는 부하에게 적은 수의 군사만 주어 보냈을 뿐이었다. 또 유방이 초나라의 팽성을 공격했을 때도 경포는 병을 핑계삼아 출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항우는 경포를 몹시 원망하면서 서울로 자주 올라오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경포는 점점 두려워져 가지 않았다. 항우는 마음 같아서는 경포를 토벌해 혼내고 싶었으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고, 또 경포의 재주를 아껴 참고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계속 수세에 몰린 유방은 경포를 어떻게든 끌어들이기로 하고 수하를 보내 경포를 설득하기로 했다. 수하의 능란한 설득과 공작에 넘어간 경포는 드디어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 편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 뒤 경포는 항우의 오른팔 격인 주은을 설득해 항우를 배반하게 했으며, 전쟁에 나가 자주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천하 통일이 된 후 경포는 회남왕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잔치가 벌어졌는데, 유방이 수하를 가리키면서,
"수하는 쓸모없는 선비에 불과하지, 저런 친구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하가 말했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아직 경포 장군이 초나라에 있을 때, 그를 보병 5만, 기병 5천으로 공격할 수 있으셨겠습니까?"
"그 정도면 할 수 있었겠지."
"폐하께서는 그 때 저를 보내셔서 전쟁을 안하고도 경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보병 5만, 기병 5천의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폐하께서는 신을 쓸모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이에 유방은 할 말이 없었다.
"좋소, 그대의 말이 맞소."
그러면서 수하에게 벼슬을 주었다.
여자와 질투
한 고조 11년에 한신이 처형되자 경포는 불안해졌다. 또 그해 여름에는 팽월이 처형되어 그 시체가 소금에 절여져 그릇에 담긴 채 모든 제후들에게 보내졌다. 그 인육자반을 본 경포는 두려움에 몸을 떨고는 차라리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경포에게는 아끼는 미희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미희가 몸이 아파 의원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편 비혁이라는 관리도 그 의원의 맞은편 집에 살고 있었는데 예전에 경포의 부하였던 관계로 미희와도 안면이 있었다. 하루는 비혁이 의원 집에 놀러가서 미희에게 선물도 바치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그 뒤 미희가 경포와 이야기 하던 중에 비혁이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칭찬했다. 그러자 경포가 놀라면서 물었다.
"아니, 언제 그 자를 만난 적이 있었는가?"
미희는 아무 생각없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경포는 두 사람이 수상한 관계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눈치챈 비혁이 두려워해 몸이 아프다며 바깥 출입을 삼가자 경포는 더욱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드디어 비혁을 잡아 죽이려고 하니 비혁은 도망쳤다. 도망친 비혁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경포를 반역죄로 죽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장안에 들어가 유방에게 투서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빨리 그를 잡아들이십시오."
유방이 이 글을 읽고 소하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에 소하는 놀라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경포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마 무슨 원한 때문에 무고했을 게 틀림없으니, 우선 비혁을 잡아들여 조사하고 은밀히 사람을 경포에게 보내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한편 경포는 비혁이 투서한 사실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또 사람이 은밀히 내려와 조사하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유방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소?"
그러자 등공이 대답하였다.
"저의 식객들 중에 설공이라는 자가 있는데, 매우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유방이 설공을 불러 물었다. 그러자 설공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경포는 한신, 팽월과 함께 용맹스런 장군이었습니다. 이제 한신과 팽월이 처형되자 자기도 머지 않아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경포가 상책을 들고 나오면 회남 땅은 한나라 땅으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중책으로 나오면 승패는 알 수 없으며, 다만 하책을 들고 나오면 폐하께서는 베개를 높이 베고 주무실 수 있습니다."
"그럼 경포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그는 하책을 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오?"
그러자 설공이 대답했다.
"경포는 원래 여산의 도적떼였습니다. 지금 그는 왕이 되었지만, 모든 일이 자기 일신을 위함이었지 후세의 백성 만대를 위해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에도 하책을 쓸 것입니다."
한편 경포는 반란을 일으키며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지금 유방은 나이가 많아 싸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반드시 친정하지 않고 부하들을 내보낼 것이다. 나는 이제껏 한신과 팽월만을 두려워했는데, 그 두 사람 모두 죽었으니 두려울 게 없다."
그 당시 유방은 건강이 안 좋은 상태였다. 그래서 자기는 경포의 토벌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태자를 내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자를 염려한 여후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경포는 천하의 맹장입니다. 그 자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폐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건 이 싸움에 친히 출정하시옵소서."
이에 유방은 하는 수 없이 출정에 나섰다. 경포는 과연 설공의 예측대로 하책을 썼다. 즉 크게 제나라, 한나라, 연나라까지 생각을 못하고 겨우 자기의 땅만 지키려 했던 것이다. 유방이 가서 경포의 군대를 보니, 그 배치가 항우의 전법과 똑같았다. 유방이 경포에게,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하고 물으니 경포는,
"황제가 되고 싶소."하고 대답했다.
그때까지도 경포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던 유방이었지만 그 말에는 크게 노하여 공격에 나섰고 격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경포는 크게 패해 겨우 백여 명의 부하만을 이끌고 강남으로 달아났다. 유방도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유시를 맞아 부상을 당했다. 경포는 그 후 번양 지방으로 달아났으나, 한 농가에서 농민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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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成蹊)
成:이룰 성. 蹊:지름길(샛길) 혜.
[원말]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下自成蹊).
[출전]《史記》〈李將軍列傳〉
샛길이 생긴다는 뜻. 곧 덕(德)이 높은 사람은 자기 선전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사람들이 흠모하여 모여듦의 비유.
전한 6대 황제인 경제(景帝:B.C. 157~141)때 이광(李廣)이라는 명장이 있었다. 당시는 북방 흉노족(匈奴簇)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인 만큼 이광의 무용담(武勇談)도 자연히 흉노족과의 전쟁과 결부된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도 그중 하나이다. 어느 날, 이광은 불과 100여 기(騎)를 이끌고 적 후방 깊숙이 쳐들어가 목적한 기습 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곧 적군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광은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침착하라. 그리고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어라.”
적은 깜짝 놀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표를 찔린 적은 필연 뭔가 계략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믿고 주춤했다. 이때 이광은 10여 기를 이끌고 질풍처럼 적진에 돌입하여 한칼에 적장을 베었다. 그러자 적은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달아났다. 이리하여 이광은 한 사람의 병사도 잃지 않고 개선했다. 그 후에도 많은 무공을 세운 이광을 칭송하여 사마천(司馬遷)은 그의 저서《사기(史記)》〈이장군 열전(李將軍列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군은 언변은 좋지 않았으나 그 덕과 성실함은 천하에 알려져 있었다. 복숭아와 오얏 꽃은 아무 말 하지 않아도[桃李不言:덕 있는 사람의 비유] 그 아름다움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들므로 ‘나무 밑에는 자연히 샛길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下自成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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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강변가요제여 영원하라!
지금부터 10년 전, MBC 강변가요제가 열리던 여름이었습니다. 우짜든지 그녀와 단둘만의 여행을 호시탐탐 꿈꾸어 오던 저는 대학 가요제와는 달리 서울에서 직접 예선이 열리는 강변가요제를 의도적으로 노렸습니다. 이리저리 짜집기한 노래를 한 곡 만든 다음, 그녀한테 명가수로서의 포부까지 큰소리 뻥뻥 쳤습니다. 악보까지 본 그녀는 '강변가요제'라는 미명에 훌러덩 속아 서울행에 순순히 응했습니다. 예심이 있던 날, 저는 그녀의 묘한 기대를 십분 악용해 장닭이 암탉 꼬시듯 한껏 목청을 돋우어 불러제끼긴 했지만, 사실 저에게 있어 가요제는 물건너 보낸 지 오래고, 오로지 그녀와의 추억만들기에만 눈탱이 벌겋게 현안이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폼생폼사' 있는 폼 없는 폼 혼자 다 잡아가며 홀가분하게 한 곡조 뽑고는 기타 들쳐메고 예심장을 물러났습니다. 정동 라디오 극장을 나온 우리는 한쌍의 장닭, 암탉처럼 덕수궁 돌담길을 거닐었습니다. 그런데 암탉의 불길한 한마디!
"덕수궁 돌담길을 애인끼리 걸으마, 그 사랑이 깨진다카던데 들어봤으예?"
"그기 무신 쓸데없는 소리고! 그거이 다 애인없는 놈들이 만들어낸 헛소리잉기라. 만약에 진짜로 그렇다카마, 지금까지 이 돌담이 이래 성하겠나? 벌써 뚜껑이 열린 놈들한테 박살나고도 남았지. 안 그렇나?"
그녀의 난데없는 위협에 큰소리로 입막음은 우선 했지만, 속으로 뜨끔했던 저로서는 그녀의 흔들리는 사랑에다 쐐기 말뚝 아니 그 무엇이라도 박아두어야겠다는 의지를 굳히기에 이르렀습니다. 덕수궁을 둘러본 우리는 뭔가 사랑의 흔적을 남기기로 합의했고, 유치한 줄도 모르고 영혼 합체의 의미랍시고 각자 머리카락 세 올씩을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보다 완전한 합체를 위해 머리카락의 주인을 확실히 밝혀 두고자 했고, 그래서 무식하고도 과감하게 주민등록증에서 사진을 떼냈습니다. 위대한 대한민국의 국적마저도 사랑에 쓸개빠진 저를 말리지는 못했습니다. 각하께 송구스러울 뿐이었습니다. 한낱 사랑을 위해 나라를 배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넋나간 저는 그렇다 쳐도 그 여자! 여인의 몸으로 주민등록증을 찢어내는 그녀야말로 영심이도 애심이도 아닌, 바로 흑심 품은 연필 부인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보물단지의 영구 보관을 위해 저는 타임캡슐을 본떠 알루미늄으로 된 담배 속종이로 주민등록증의 사진과 머리카락을 단단히 싸서는 덕수궁 어느 문설주 사이에다 꼭 끼워두었습니다. 말초신경의 감각과 소뇌(잔머리)의 직감으로 무르익은 분위기를 탐지한 저는 춘천을 거쳐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꼬셨고, 그녀도 좋다고 했습니다. 하늘도 귀신도 이미 제 편이었습니다.
소양강 땜에 도착한 저는 이제 2단계로 뱃놀이를 제안했고, 마침내 양구행 배를 타는 데 성공했습니다. 본디 한 마리 슬픈 늑대였던 저로서는 우짜든지 깊숙한 골짜기로 그녀를 유인해야만 했으니까요. 하기사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녀가 쳐둔 그물에 오히려 제가 걸려든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기분은 입을 째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쾌속선, 그림같은 주변의 풍광, 우리는 분위기에 흠뻑 취해 서로 손을 꼬옥 잡고 끈끈한 눈빛을 주고 받았습니다. 마치 소양강 강바닥을 자유로이 노니는 한쌍의 빠가사리 같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어느덧 배는 양구 선착장에 닿았습니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경찰의 검문을 받았는데, 군사지역이라 외지인에 대한 의례적인 검문 같았습니다. 태어나 지금까지 부모님께 책값 삥땅친 것 말고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저는 당당하게 신분증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신분증을 받아든 경찰 아저씨의 인상이 완전히 썩은 배추벌레 씹은 표정이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진! 덕수궁에다 가출 신고하고 온 놈이 붙어 있을 리 만무였고, 앙꼬없는 찐빵이야 미운 놈 준다지만, 사진 없는 주민등록증을 엇다 쓰겠습니까? 아저씨는 그녀한테도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역시 주인공이 도망가고 없는 그녀의 주민등록증을 본 아저씨의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면서 별안간 외치면서 다짜고짜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었습니다.
"너거들 혹시 간첩 아니가?"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까딱하다간 총각 딱지도 못 떼고 염라대왕 맏사위 될 형편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두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이어 아저씨는 제 어깨에 멘 기타를 낚어채더니 기타 통속을 샅샅이 훑었고, 찔찔 짜고 있는 그녀가 처년지 아줌만지는 안중에도 없는듯 그녀의 소지품까지 하나하나 검사를 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난수표나 독침이 나오질 않자, 아저씨는 월척 놓친 표정으로 경찰서로 가 신분을 확인해야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졸지에 간첩으로 몰려 한쌍의 도살장 끌려가는 암수소처럼 끌려갔습니다.
결국 자초지종을 다 듣고 신분까지 확인하고서야 아저씨는 인상을 폈습니다. 하지만 아저씨는 "장난칠 게 없어서 하필 주민등록증으로 장난이가 응? 국가 공문서 훼손에다 위조 미수까지 죄가 얼마나 큰 줄알기는 아나? 자슥들아." 우리를 나무랐고, 반공 정신교육을 철저히 받고서야 우리는 겨우 간첩에서 다시 선량한 민간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밖은 이미 캄캄했고 억수 같은 비마저 내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솔 담배 5갑을 사서 귀찮게 해서 죄송했다며 아저씨께 드렸습니다. 그러자 소금 먹은 놈이 물쓴다고 아저씨는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로 양구는 군사지역이라 신분증 없이는 숙박하기가 어려울 거라며, 뜻밖에도 직접 여관까지 순찰차로 데려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그녀와 첫차도 막차도 아닌 순찰차를 타고 둘만의 공간으로 달려가는 기분, 두 분께야 고비사막 낙타 방귀 소리쯤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제게 있어서는 호강에 빠져 요강에 헤엄치는, 바로 그 기분이었습니다. 우리 시대 마지막 철부지 간첩에 대한 융숭한 대접이었다고나 할까요? 순찰차 안에서 저는 내심 아저씨께 뽀뽀라도 해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심각한 표정으로 내내 한숨만 푹푹 내쉬며 위장전술을 폈고, 간첩으로까지 몰렸던 그녀 또한 권총 찬 아저씨 앞에서는 차마 찍 소리 못하고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저로 봐서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고맙게도 방까지 잡아주고서야 돌아갔습니다. 실랑이 하나없이 정체(늑대)마저 숨긴 채 합법적으로 그녀를 납치하는 혁혁한 전과였습니다. 그야말로 공권력의 힘은 위대했습니다. 두고 온 덕수궁과 주인 없는 주민등록증이 저를 감격케 했습니다. '아, MBC 강변가요제여 영원하라!' 그렇게 낯선 곳 양구, 경남장 여관의 여름밤은 깊어만 갔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저의 4반세기 짧은 인생은 기쁨과 환희의 새 장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칼날처럼 도도하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저의 의관을 말끔히 정제해 놓고, 박카스까지 대령한 자세로 그녀는 서방님의 기침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두 분께서야 수박 껍데기 핥는 맛이겠지만, 강변가요제와 공권력의 승리가 가져다 준 한 여름밤의 깊은 사연을 아쉽지만 여기까지만 밝혀둡니다. 원주 역전에서 저는 강변가요제 탈락의 비보를 접했지만 결코 슬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득한 심원의 뿌리로부터 뭔지모를 뿌듯함이 용솟음침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제 곁에는 강변가요제가 가져다 준 평생의 선물이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니까요.
추신: 5년뒤, 우린 한쌍의 토끼가 되어 결혼했고, 지금은 토끼 같은 딸래미 하나 두고서 그런대로 잘살고 있습니다. 덕수궁에 끼워 둔 머리카락과 사진이 잘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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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2.그리스의 조소미술과 도자기
조소미술
그리스인은 일반적으로 조각의 목적을 신과 신화적 광경을 묘사하는 데 두었고 각각의 조각에서 순수한 미적 쾌감도 역시 종교적 체험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하였다. 프로클로스에 따르면 그리스 조각에서는 오직 오성에 새겨진 상에 따라 만들어진 자연의 이상적인 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스인은 대리석과 청동을 사용하여 참으로 열정적으로 수많은 조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들은 오늘날 서구를 위시한 온 세계 대형 박물관의 경쟁적인 수집 대상이 되고 있으며 때에 따라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풍부한 그리스 조상 더미에 당혹감을 느낄 정도이다. 그러나 진품은 이미 옛적에 사라져 버리고 독창적 작품을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유품은 없다. 그 엄청난 수집품 속에는 반복하여 모방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변형되어 딴 물건이 되어 버린 것, 반쯤 생명이 없어진 모조품, 또한 후대 헬레니즘 복제 등만이 존재할 뿐 진정 설득력있는 품목은 하나도 없다. 다만 상고기(기원전 500년 이전)의 조각과 부조는 페르시아 전쟁으로 파괴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을 재건할 때 성책의 기초로 묻혔다가 근래 발굴되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남아 있어 그 면모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기(기원전 5~4세기) 조각은 박공과 소벽의 부조 일부가 존재할 뿐 거장의 손으로 된 작품은 없다. 거장의 작품으로는 파락시텔레스의 '어린 디오뉴소스를 안은 젊은 헤르메스상' 정도가 고작인데, 그나마도 그의 대표작으로 치는 작품이 아니며 또한 일부 설에는 기원전 340년경의 헬레니즘 모작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전기 예술을 마무리하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 남아 있는 페이디아스의 박공과 소벽의 부조 조각은 대부분 반출되어 런던 박물관의 어두운 광 속에 쌓여 광채를 잃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 조각에 대한 진수와 원천은 이처럼 믿음직하지 못하고 개탄스러운 상태다. 더구나 대부분의 고대 예술가들은 돌을 쪼는 것을 주로 한 것이 아니라 청동으로 주조하였다. 고전기의 세 거장인 기원전 5세기의 뮤론과 폴류클레이토스, 또한 기원전 4세기의 류시포스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손수 만든 청동상은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각처의 대형 박물관에 청동상의 수가 매우 적은 이유도 고대 말기 이후 청동제의 원작이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거장들의 작품을 알아보고 탐구하는 데는 후세의 복제, 그것도 원작의 재질과는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모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청동 걸작을 녹여서 종, 화폐, 심지어 대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작을 접할 수 있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언제나 모작, 그것도 두 번째 아니면 네 번째, 다섯 번째 모작일 뿐이라고 보나르는 통절히 개탄한다.
도자기
고대 그리스에서 도자기 생산은 매우 중요한 산업으로, 가마에서 구워 낸 단지는 식수, 올리브유, 포도주 같은 액체 음식의 저장에 불가결하였다. 아테네 및 아티카와 코린토스를 비롯한 모든 도시국가에서는 요업이 성행하여 그리스의 주 농작물인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단지나 항아리에 담아 수출하고 대신 곡물 특히 소맥을 수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밖에 제기와 생활 도자기도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었으므로 그리스 세계의 요업은 크게 번창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단순한 둥근 무늬없는 토기였고 제조 수법도 간단하였으나 문명기(미노스 및 미케네 문명)에 들어서 기술이 향상, 모양과 장식이 다양해지고, 그림 새기는 기법도 도입되어 채문도기가 나타났다. 그러나 미케네의 멸망과 함께 도자기 숙련 기술은 사라졌고, 그 후 멀리 키프로스로 피난간 그리스인이 만든 미케네 기형의 단지가 본토에 역수입되었는데 장식은 간단한 원형, 삼각형, 사각형 무늬 정도에 그쳤다. 다시 아티카에서 도자기 요업이 재개되어 기원전 1100~660년 사이에는 단지의 표면 무늬가 단순성을 벗어나 다양한 기하학 무늬로 지그재그, 음영삼각형, 체크무늬, 그물 세공, 탄젠트 및 동심원, 반원, 웨이브 줄무늬, 장미꽃, 수레바퀴 장식, 만자, 구불구불한 무늬가 나타났다. 이처럼 단지 무늬가 두드러지는 때를 시대구분상 기하학기로 부른다.
한편 암흑기(기원전 1125~900)를 벗어나면서 기존의 단일 문양에서 탈피하여 인물과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동물 그림이 나타나고 자유로운 활동상과 표정까지 담아내게 되었다. 상고기의 화공들은 신화, 전설, 일상생활을 표현하였는데, 특히 영웅의 무용담 서사시 음송과 더불어 신화에 나오는 개개의 인물과 신의 속성을 그림으로 묘사해 냈다. 기원전 7세기부터는 가정의 단지와 식기에까지 빠짐없이 신화장면이 등장하고 그 외 향수와 기름을 담은 화장용기나 약병도 마찬가지였다. 그림 내용은 기품 있고 자비에 찬 신과 인간의 탁월성, 싸우고 죽이는 냉혹한 전쟁장면, 신들의 불화, 납치, 유혹상, 인간사회의 이면상으로 도둑과 노상강도, 유곽에서의 성행위 장면도 거침없이 담고 있다. 신과 인간사회의 희로애락을 소재로 삼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의 신관, 개인관 또한 예술관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그림도자기는 그리스 본토, 크레타, 키클라데스 군도, 시칠리아, 키프로스로 퍼져나가 각 도시국가의 도예 단지에서 생산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리스의 그림도자기 수는 수십만 점에 달하며 그것도 전에는 모사품이 없었고 근래까지(1960년대) 위조품도 나돌지 않아 그리스 미술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이 도기 그림에서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옛 벽화나 판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마당에 풍부한 도자기 그림은 고고학적 가치 이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옛 기록에는 미술 작품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어 아쉬움을 지울 수 없지만 도자기 그림으로 시대 측정은 어려움이 없다. 시대구분상 고고학에서는 원시기하학(기원전 1050~900)와 기하학기로 나누고 있으나, 역사학에서는 초기 철기시대로 총칭하고 이를 대략 기원전 750년까지로 잡는다. 다음은 상고기라 부르며 시기는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침공을 물리친 기원전 480년까지로 한다. 다음 시대는 고전기로 구분하고,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한 후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기까지는 헬레니즘기라고 칭한다. 그러나 공예, 미술 및 건축상으로는 시대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의 도기 화공은 원 고장의 연구기관의 집계에 따르면 1000명을 훨씬 웃돌며 그 중에는 화풍이 훌륭하며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는 자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도기에 명이 있는 예도 수백 종류가 넘는데 대부분 기원전 6~5세기 아티카 도자기에 서명한 것이다. 예컨대 '아무개가 만들었다'라든가 '아무개가 그렸다'라는 식의 명기이다. 고대에는 도기 형태를 만드는 기술이 그림장식 기술보다 더 높게 평가되어 화공이 도공의 이름을 적어 놓는 등, 도공의 명이 화공보다 더 많다. 초기에는 요업주 자신이 도공이자 화공이었을 것이다. 오듀세우스가 외눈박이 폴류페모스를 눈 멀게 하는 장면이나 페르세우스와 고르곤의 그림은 기원전 650년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필치가 거칠다. 그후 단지 그림(기원전 650~600)은 더 착실하고 온건한 화풍을 나타내 사람과 동물의 모습이 훨씬 정상적이고 일부 기명 도기에 의하면 엑세키아스, 두리스, 프시악스 같은 화풍이 뛰어난 화가가 묘사한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도기에는 도공이나 화공의 서명 표지가 없어 장인들은 명성이나 실리에 구애받지 않은 직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형태와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고 대강 마무리한 것이 대부분인데 채식그림 단지는 일반 생활그릇으로서 염가품이라 공들여 만들 의욕이 적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편의상 옛 화공의 명칭을 별칭으로 불러 구분하고(예:아킬레스 화공, 아우로라 화공 등), 또한 도공과 화공의 서명이 있는 도자기 작품이라고 발굴자의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인 프랑수와 꽃병은 불치(티베르 강 서북부 에트루리아 도시)의 에트루리아인 묘에서 발굴된 대형 크라테르(높이 66cm)로 기원전 570년경에 제작된 것이다. 신화를 소재로 한 찬란한 그림으로 가득 덮여 있고 인물과 동물 등이 270, 명이 121개, 도공은 에르고티모스, 화공은 클레이티아스라고 적혀 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이후 자신의 그림에 이렇듯 서명을 남겼다는 사실은 장인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과 개성을 엿보게 한다. 같은 화가의 손으로 그린 수십 내지 수백 점(200점 이상)의 그림단지도 있다. 상고기 그림은 대체로 농담없이 단조로운 색채에 거친 선으로 그려져 있으며 또한 화가의 서명은 페르시아 전쟁 이전(기원전 475년까지) 날짜에 한한다.
도자기 그림은 흑색그림과 적색그림으로 구분하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흑색그림 : 기원전 7세기 말경부터 약 100년간 아티가(아테네 포함) 도기 화공은 녹로에서 붉은 빛이 도는 진흙으로 단지를 빚어 말린 다음 철화합물이 섞인 흙물로 검정 실루엣 그림을 그려 가마에 구워 냄으로써 그림자 그림이 나타나게 하였다. 코린토스에서는 더 오랫동안 이 기법이 지속되었다. 그림안의 세밀한 부분은 바늘로 긁어서 새기고 어떤 부분은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검정 바탕 위에 백색과 자색 도료를 덧칠하였다. 엑세키아스의 큘리스 술잔 그림(기원전 540년경) '디오뉴소스의 해상 귀로'에 잘 나타나 있다.
적색그림 : 기원전 530년경 아테네에서 발전한 도기 그림으로, 흑색그림과는 반대되는 기법을 사용하여 그림 묘사의 제한성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는 철분흙물 페인트를 묻힌 붓으로 그림 윤곽을 그려 불에 구우면 흑색으로 변하고 그림 내용은 붉은 진흙색으로 남게 되는 기법을 이용한 것이다. 정밀한 세부묘사로 얼굴 표정을 세밀하고 또한 돋보이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재현 실험을 근거로 한 추정설에 따르면, 흑.적색의 채색은 산화철의 환원.산화 작용 기법에 의한 것으로 철분도료로 그림을 그리고 가마의 온도를 조절하여 공기 차단으로 흑색을, 자유로운 통풍으로 적색을 표출케 한 것이라 한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옛 도공이 온도 조절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우리 나라의 한 도공이 읊은 시 한 수가 떠오른다.
도자단상 - 한익환
도자기에다
내 영혼을 넣는다고
그 많은 세월을
부셔 깼지만
언제부터인가
흙의 참 맛을 알게 되면서
침묵의 스승
자연을 알게 되었고
자연을 알게 되면서
인간의 길
깨닫게 되었다.
한잎 잎새와도 같은
도공의 꿈
도자기에다
내 하찮은 영혼을
넣는다는 것이
어느덧
흙의 영혼이 내 속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도자기(단지, 항아리, 생활용기) 명칭
피토스 : 독 혹은 큰 항아리, 족자리(손잡이) 또는 위아래 및 몸체에 밧줄고리가 달려있다.
암포라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타원형 단지. 구형 단지는 펠리케라 한다.
크라테르 : 혼주 단지로 아가리가 넓다. 손잡이 장식의 모양에 딸 볼루테(나선), 칼륙스(꽃받침), 콜룸(기둥) 크라테르라 한다. 그밖에 벨(종) 크라테르가 있고, 식탁용으로는 스탐노스, 손잡이가 없는 들통 모양의 칼라토스도 있다.
프슉테르 : 포도주 냉각용 단지로 대야의 찬물 속에 담근다.
휴드리아 : 작은 물항아리로 두 손잡이 외에 물을 쏟는 데 필요한 손잡이가 하나 더 길게 붙어 있으며 칼피스라고도 한다. 소녀가 모리에 똬리를 얹고 이고 다녔다.
오이노코이 : 한 개의 손잡이가 길게 붙어 있는 포도주 조끼로 받침대가 없는 것을 올페라 한다.
칸타로스 : 두 손잡이와 긴 축 받침대가 있는 포도주 잔으로, 주신의 잔이다.
큘릭스 : 운두가 낮은 사발 술잔. 한 쌍의 손잡이와 홀쭉한 축과 굽이 있으며, 굽이 없는 잔은 스템리스 큘릭스라 한다.
스큐포스 : 두 귀가 달린 작은 술잔. 더 깊고 수평 손잡이가 달린 코듈레도 있다.
레큐토스 : 향료 단지. 낮고 폭이 넓은 스쿠아트 레큐토스도 있다.
아류발로스 : 화장 기름병, 램프 기름병은 아스코스라 하며 아가리가 좁다.
알라바스트론 : 향수, 기름 또는 약을 담는 병. 뚜껑 있는 약병은 퓩시스라 한다.
레베스 : 고기 삶는 솥. 두 귀 달린 후기의 솥은 데이노스, 결혼 선물용 솥은 레베스 가미코스라 한다.
루트로포로스 : 정수를 긷는 단지, 또는 제의에 쓰이는 꽃병이다.
류톤 : 짐승머리 모양의 잔 혹은 뿔잔으로, 유방형 잔은 마스토스라 한다.
피알레 : 운두가 낮은 헌주 사발로, 손으로 잡기 위해 한가운데가 돌출된 것은 피알레 메콤팔레스라 한다.
레카니스 :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대야(수반)로, 뚜껑과 기대가 달린 수반도 있다.
아미스 : 휴대용 요강.
- 오트리콜리에서 발견된 제우스 흉상(바티칸, 피오-클레멘티노 미술관, 원형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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