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5호 2023.4.18 화요일 (음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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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실패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안이하게만 산다는 증거. ― 우디 알렌(美유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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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나는 말이 하염없이 느리다. 사이버대학에 올린 내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곧장 게시판에 항복 문서를 올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밀려옵디다. 재생 속도를 1.25배로 하니, 졸음이 조금 늦게 오시더군요.’
‘보통’ 속도로 보는 건 손해다. 1.25배속으로 봐도 ‘줄거리 파악’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출연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바쁜 시간을 알뜰하게 아껴 쓴다는 실용주의자의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서 영상예술에 대한 감각이 변질되더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으며,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 말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우리 귀는 내용(메시지)만을 쫓는다. 조각난 작품을 읽고 재빨리 주제를 파악하는 걸로 국어 실력을 가늠하는 것처럼, 줄거리만 간추리면 영상을 다 본 것. 목소리나 말의 속도, 음색 같은 건 선물을 싼 포장지일 뿐.
우리는 줄거리, 핵심 내용, 주제를 뽑기 위해 영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가 갖는 고유한 물질성, 질감, 현장성 같은 것에 녹아 들려고 본다. 우리가 예술에 다가가는 이유는 그 속에 낱낱의 고유한 삶의 형식들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느리고 어눌하고,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을 간섭하고 뒤엉키는 그 머뭇거림의 형식 자체에 마음이 격동되기를 바라며. 형식에 대한 무시는 예술을 메마르게 한다. 말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허공과도 같은 빈틈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속도를 늘릴수록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것, 표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더 근접해 있다는 걸 망각하게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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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 - 한용운
가을 바람과 아침 볕에 마치맞게 익은
향기로운 포도를 따서 술을 빚었습니다.
그 술 괴는 향기는 가을 하늘을 물들였습니다.
님이여, 그 술을 연잎잔에 가득히 무어서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님이여, 떨리는 손으로 거쳐서 타오르는 입술을 축이셔요.
임이여, 그 술은 한 밤을 지나면 눈물이 됩니다.
아아, 한 밤을 지나면 포도주가 눈물이 되지마는,
또 한 밤을 지나면 나의 눈물이
다른 포도주가 됩니다.
오오, 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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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10.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 보이는 법이다(숙손통)
호랑이의 입 속에 있을 때는
숙손통은 원래 진나라 2세 황제 때에 학식을 인정받아 등용되었다. 몇 년 뒤 진승이 산동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2세 황제는 즉시 신하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 초나라 지방에서 진승의 무리가 군사를 일으켜 소란이 일어났다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야 좋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30여 명의 신하들이 일제히 말했다.
"신하된 자로써 반역을 하다니,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품어도 반역죄인 것입니다. 단호하게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당장 군대를 파견해 진압하십시오."
2세 황제는 반역이라는 말을 듣자 매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이때 숙손통이 나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의 의견은 잘못입니다. 지금 온 천하가 한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벽은 허물어졌고, 무기는 모두 녹였으니 이제 전쟁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자애로우신 황제 폐하의 은총으로 무든 법령이 충실히 지켜지고, 모든 백성들은 각기 맡은 직분에 충실합니다. 이와 같은 태평성대에 어떻게 반역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진승이란 작자는 한낱 도적떼에 지나지 않을 뿐이므로, 폐하께서는 신경쓰실 필요조차 없는 일입니다. 금방 관리들이 모조리 일망타진해 처벌할 것입니다."
그러자 2세 황제는 금새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신하를 한사람 한사람씩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의견은 반역설과 도적설로 나뉘었다. 다 듣고 난 2세 황제는 반역설 이야기한 신하들을 모두 옥리에게 넘겨 취조하게 했다. 반면 도적설을 말한 신하들은 위로했고, 특히 숙손통에게는 비단 20필과 의복을 내림과 아울러 박사로 승진시켰다. 숙손통이 궁궐에서 나오자 동료들이 비꼬았다.
"아니, 어떻게 그 정도로 아부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숙손통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우리는 지금 호랑이의 입 안에 있지 않소? 내가 그렇게 아부하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무사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그리고는 바로 고향인 설 땅으로 도망쳤다.
난세에는 용사가 필요하다
숙손통이 설 땅에 가 보니 그곳은 이미 초나라의 지배 아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우를 모시게 되었다. 그 뒤 유방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에 들어오자, 숙손통은 유방에게 가담하였다. 숙손통은 원래부터 유학자로서 선비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이 선비옷을 싫어하자 곧 그 옷을 벗어 버리고 짧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유방이 그 사실을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또 숙손통이 유방에 가담했을 때 제자 백여 명을 데리고 있었는데, 그들중 누구도 유방에게 천거하지 않았다. 대신 도적질을 했던 자나 건달들만 자꾸 추천했다. 이에 제자들이 불평불만을 터뜨렸다.
"저희는 선생님께 여러 해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당연히 저희들의 앞길을 열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건달, 깡패만 계속 추천하고 계시니 정말 그 이유룰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숙손통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지금 대왕께서는 싸움터를 전전하며 화살과 칼을 무릅쓰고 다니신다. 학자들이란 전투엔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우선 적의 머리를 베어 올 수 있는 용감무쌍한 자들을 추천하는 것이다. 너희는 좀 기다리도록 해라.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숙손통은 용사들을 추천한 공로로 벼슬이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수성에는 학자가 중요하다
그 후 드디어 천하 통일 이 이루어졌다. 숙손통은 황제 즉우식의 책임을 맡아 잘 처리했다. 원래 유방은 진나라의 번거로운 의식을 모두 없애 버리고 대폭 간소화했었다. 의식과 규율이 간소화되자 신하들은 제 멋대로 술을 마시고 서로 공적을 다투었으며, 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칼을 빼어 들고 궁궐 기둥을 치는 자도 있었다. 사태가 이쯤되자 유방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때 숙손통이 유방에게 아뢰었다.
"학자란 건국 사업에는 별 소용이 없지만, 나라를 유지시켜 가는 수성에는 매우 쓸모가 있는 법입니다. 바라옵건대 학식이 높은 노나라 학자들을 초청하여 제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의식을 제정했으면 합니다."
"괜찮은 생각인데, 너무 어려운 일 아니오?"
그러자 숙손통이 말을 이었다.
"의식이란 시대에 따라서, 그리고 풍속에 따라서 간단할 수도 있고 복잡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 은 , 주의 의식은 각각 이전의 의식을 따르면서 취사선택했다.'는 공자의 말씀도 어느 나라에나 똑같은 의식이 없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로부터 전해온 의식에 진나라의 의식을 가미해 우리 나라의 새로운 의식을 만들 생각입니다."
"좋소, 한번 만들어 보오. 하지만 알기 쉽게 만드시오."
그 뒤 숙손통은 노나라에 가서 30명의 학자를 초청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숙손통을 비난했다.
"당신은 벌써 열 명도 넘는 주군을 섬기면서, 그때마다 면전에서 아부하며 중용되었소. 이제야 비로소 천하가 평정되었지만, 아직 전사자의 장례도 끝나지 않았고 부상자들은 완치되지 못했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악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오? 본래 예악이라는 것은 황제가 백 년 이상 덕을 쌓아야 비로소 일어나는 법이오. 그러니 당신이 하는 일에 찬성할 수 없소.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옛날의 법에 맞지 않는 일이오. 그냥 돌아가시오. 더이상 우리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그러자 숙손통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고루한 선비들이오. 시대가 얼마나 변했는데."
황제의 자리가 이렇게 귀할 줄이야
숙손통은 노나라 학자 30여 명을 대동하고 궁궐로 돌아왔다. 그래서 궁주의 학자들과 제자 백여 명과 함께 야외에서 한 달에 걸쳐 의식을 만들고 실제 모의 훈련도 했다. 그런 뒤 숙손통은 황제에게,
"폐하, 한번 구경하십시오."라고 청했다. 유방이 실제로 그 의식 절차를 보더니,
"잘 만들었소. 그 정도면 나도 황제 노릇 잘할 수 있겠소."하는 것이었다.
그 뒤 장락궁이 준공되자, 만조 백관들이 그 의식에 따라 입조했다. 뜰 가운데에는 경비병들이 무기를 갖추고 줄을 지어 서 있고, 궁전 밑에는 계단마다 수백 명의 호의 군사가 늘어서 있었다. 공신, 제후, 장군 들이 서열에 따라 서쪽에 줄을 지었으며, 문관은 승상 이하 서열대로 동쪽에 줄을 지어 섰다. 이때 드디어 황제가 탄 수레가 나오자, 백관들이 깃발을 흔들어 환영했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 6백 명 이상되는 고관들이 차례로 어전에 나가 축하했는데 모두 엄숙한 표정이었다. 하례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이 다시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고, 서열에 따라 일어나며 축배의 술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 다시 주연이 베풀어졌으나 시끄럽게 하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자 유방은,
"오늘에야 비로소 황제의 자리가 고귀함을 알았노라."하며 숙손통을 의전 장관으로 임명하고 황금 5백 근을 하사하였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숙손통이 말했다. "저의 제자들은 오랫동안 저를 따르며 함께 의식을 만들었습니다. 바라옵건대 그들에게도 관직을 내려 주십시오."
유방은 즉시 그들을 모두 시종에 임명했다. 숙손통은 궁궐에서 나오자 하사받은 황금 5백 근을 모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모두 감동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참으로 성인이시다. 세상사를 한눈에 꿰뚫어보신다."
그 후 숙손통은 태자의 교육담당으로 옮겨졌다. 그런데 유방은 그때 사랑하는 척희의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다시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숙손통이 유방을 찾아가 비판하였다.
"옛날 진시황은 큰아들 부소를 태자로 세우지 않아 결국 조고 등이 호해를 내세워 음모를 꾸몄고, 그 때문에 나라까지 망했습니다. 지금 태자의 인덕은 모두가 칭송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황후께서는 페하와 온갖 고난을 함께 겪어 온 조강지처이옵니다. 이것을 절대 배신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그래도 태자를 바꾸셔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저를 죽이시고 그 피로 궁전의 땅을 더럽힌 후에 하십시오."
그러자 유방이 적당히 무마하려고 했다.
"알았소. 그만 두시오. 내가 농담으로 그래 본 것인데...."
그러자 숙손통은 더욱 정색을 하며 말했다.
"태자를 세우는 문제는 천하의 근본인데 어찌 천하 대사를 농담으로 하실 수 있습니까? 근본이 흔들이면 모든 것이 흔들이는 법입니다."
"이제 됐소. 그대의 말이 맞소."
그 후 궁중의 주연이 열렸을 때 장량이 초대한 도사 네 명이 태자와 함께 나타나자, 유방이 태자를 바꾸겠다는 생각을 깨끗이 단념하게 되었다. 실로 숙손통은 항상 아첨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 일처럼 목숨을 걸고 비판할 때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갈 때와 들어올 때를 잘 알았으며,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해 적응을 나갔던 것이다.
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그 후 유방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니 혜제의 시대가 되었다. 어느 날 혜제가 숙손통을 불렀다.
"이 나라에 의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구료. 아무래도 선생께서 다시 의전 장관을 맡으셔야 하겠소."
그리하여 숙손통은 의전 장관으로 복귀했다. 결국 그에 의해 종묘 사직의 의식들이 모두 완성되었으며, 한나라의 모든 예법이 이때 정해졌다. 그런데 혜제는 장락궁에 있던 어머니 여후에게 아침마다 문안드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교통이 통제되어 백성들의 피해도 컸다. 그래서 생각 끝에 이층으로 길을 내어 궁궐 담 위로 쉽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하루는 숙손통이 혜제에게 말했다.
"폐하, 무슨 연유로 이층 길을 내셨습니까?
그리하여 선제의 묘 위로 지나다니도록 되었지 않습니까? 나라의 시조를 모시는 종묘를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됩니다."
그러자 혜제는 크게 두려워해,
"그럼 빨리 허물어 버리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숙손통은 또다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안됩니다. 황제께서는 잘못이 없는 법입니다. 이제 와서 허물어 버리면 폐하께서 잘못이 있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는 결과가 됩니다. 이번 기회에 종묘를 위수 북쪽에 새로 모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종묘를 넓히고 많이 짓는 일은 큰 효도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혜제는 숙손통의 지혜에 감탄하며 즉시 새 종묘를 만들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층 길은 새 종묘를 짓기 위한 꼬투리가 되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한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천금의 값이 나가는 가죽 옷은 여우 한 마리의 털로 만들 수 없고, 높은 누대의 서까래는 나무 한 그루로 만들 수 없다.'
하, 은 , 주의 성대함도 한두 사람의 지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유방이 미천한 신분으로 몸을 일으켜 천하를 평정했는데, 그것은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합해진 결과이다. 숙손통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람으로서 사물을 잘 판단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구하고 의식을 제정하여 한나라 유학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처세 또한 진퇴의 절도를 잘 지켰으며, 시대의 흐름에 적절해 대처하였다. '참으로 돋은 길은 굽어보이며, 길은 원래 꾸불꾸불한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숙손통의 경우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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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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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즉제인(先則制人)
先:먼저 선. 則:곧 즉(…그러면), 법 칙. 制:억제할 제. 人:사람 인.
[대응어]~후즉위인소제(後則爲人所制).
[유사어] 진승오광(陳勝吳廣).
[출전]《史記》〈項羽本記〉,《漢書》〈項籍專〉
선손을 쓰면(선수를 치면) 남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元年:B.C. 209)의 일이다. 진시황(秦始皇)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항거하여 대택향[大澤鄕:안휘성 기현(安徽省)]에서 900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궐기한 날품팔이꾼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단숨에 기현을 석권하고 진[秦:하남성 회양(河南省淮陽)]에 입성했다. 이어 이곳에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른 진승은 옛 6개국의 귀족들과 그 밖의 반진(反秦) 세력을 규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강동(江東)의 회계군수(會稽君守) 은통(殷通)은 군도(郡都) 오중[吳中:강소성 오현(江蘇省吳縣)]의 유력자인 항량(項梁)을 불러 거병을 의논했다.
항량은 진나라 군사에게 패사(敗死)한 옛 초(楚)나라 명장이었던 항연(項燕)의 아들인데, 고향에서 살인을 하고 조카인 적[籍:항우(項羽)의 이름]과 함께 오중으로 도망온 뒤 타고난 통솔력을 십분 발휘하여 곧 오중의 실력자가 된 젊은이다.
“지금 강서(江西:안휘성.하남성) 지방에서는 모두들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코자 하는 시운(時運)이 되었기 때문이오, 내가 듣건대 ‘선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先則制人]’ 뒤지면 남에게 제압당한다고[後則人制] 했소.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하오.”
은통은 오중의 실력자일 뿐 아니라 병법에도 조예가 깊은 항량을 이용, 출세의 실마리를 잡아볼 속셈이었으나 항량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거병하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자는 오직 제 조카인 적뿐입니다. 그러니 지금 밖에 와 있는 그에게 환초를 불러오라고 하명하시지요.”
“그럽시다. 그럼, 그를 들라 하시오.”
항량은 뜰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항우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이렇게 일렀다.
“내가 눈짓을 하거든 지체 없이 은통의 목을 치도록 하라.”
항우를 데리고 방에 들어온 항량은 항우가 은통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기를 쳐다보는 순간 눈짓을 했다. 항우는 칼을 빼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들어 은통의 목을 쳤다. 항량과 항우가 은통에 앞서 ‘선즉제인’을 몸소 실행한 것이다.
항량은 곧바로 관아를 점거한 뒤 스스로 회계 군수가 되어 8000여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전사하고 말앆다. 뒤이어 회계군의 총수가 된 항우는 훗날 한왕조(漢王朝)를 이룩한 유방(劉邦)과 더불어 진니라를 멸망시켰다(B.C. 206). 그러나 그후 유방과 5년간에 걸쳐 천하의 패권을 다투다가 패하여 자결하고 말았다(B.C.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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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오늘 이렇게 제가 틈틈이 기회를 엿보다가 쉬는 날 마음을 먹고 펜을 든 것은 도저히 저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에 간직하고 살기엔 너무도 가슴 시린 추억이 있어서 용기를 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유망한 중소기업에 잘 다니고 있던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아무하고나 싸우지도 않고 누구와 섞여 있어도 눈에 띄거나 구별되진 않는 한마디로 말해서 몹시 내성적이지만 그래도 할일 다하는 착실한 직원이었지요. 이런 저의 취미는 바둑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밤새도록 TV의 바둑해설을 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비디오 바둑 테이프를 빌려다 보곤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주위사람들은 샌님이니 목사님이니 하고 놀렸지만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걱정을 하시는 건 제 부모님들이셨습니다. 나이 30이 다 되도록 데이트는 커녕 집에 전화오는 여자 하나 없이 밤낮 바둑만 보고 어쩌다가 맞선을 보게 해도 나가서 퇴짜나 맞고 오질 않나 하니, 특히 어머니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그래 제 부모님들은 저 때문에 곧잘 다투기까지도 하셨답니다.
"아이고, 재가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내가 그래도 재를 가졌을 땐 태몽으로 용꿈을 꿨는데, 어찌 저리도 숫기가 없는 것이 꼭 미꾸라지 같냐."
하시는 어머니께 아버지께선 되레 어머니를 나무라시며 말하시는 겁니다.
"꿈도 그리 못꾸나. 꿈을 꿀라카면 최소한 호랑이 꿈을 꿔야지. 우리 어머이가 나 볼 때 꾸신 꿈 말이다."
이렇듯 저를 사이에 두고 이유 아닌 이유로 속타하시던 부모님은 결국 제게 태권도를 강요하셨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체육시간에 결코 즐겨워서 공을 찬 적이 한번도 없었을 뿐더러 누구하고 싸우다가도 큰소리만 치면 움츠러드는 성격이기에 태권도는 꿈에도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분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니는 태권도를 배워야 한다. 안 그라모 니 성격에 평생 여자 만나기는 틀렸다."
어머니는 마치 태권도만 배우면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듯이 저를 도장으로 내몰았습니다. 다 큰 어른이 하얀띠를 매고(태권도는 흰띠부터 시작 노란띠 파랑띠 빨강띠 빨강반 검정반띠로 승격함) 태극 폼새를 배우자니 진땀 나고 창피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장엔 정말로 무서운 사범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말 한마디에 저는 가끔씩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습니다.
"자, 뒷발차기 실시! 이야 압"
그 기합소리는 우렁차고도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자 사범님이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비극의 드라마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제가 성격이 나약하고 숫기가 없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그녀는 저만 보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더 호되게 연습을 시키는 거였습니다.
"앞차기가 그게 뭡니까? 자 앞차기 50회 실시!"
그러나 그녀는 그것도 모자라서 저를 앞으로 따로 불러내어서 앞차기를 해보라, 돌려차기를 해보라, 또 자세가 안 좋으니 토끼뜀을 뛴 다음에 해보라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완전히 졸지에 군대에 다시 들어간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고, 한 달쯤 지나자 드디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도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녀는 우리집에 전화를 하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왜 운동하러 안 나오냐? 언제 다시 할 거냐? 하고 묻더니, 저녁은 무얼 먹었느냐? 회사는 어디 근처냐? 하고 자기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까지 묻는 겁니다. 저는 또다른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바둑 좀 볼라치면 느닷없이 울리는 벨소리.
"여보세요?" 그러면 바로 "예! 저예요, 왜 오늘도 안 나왔어요? 내일은 나올 거죠? 지금 뭐하세요? 오늘 석현씨 회사 근처 갔었어요. 다음에 다시 가면 전화할께요. 오늘은 제가 시간이 없었지 뭐예요."
하며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다 떨었습니다. 저는 본래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화가 계속되자 견딜 수가 없어서 결단을 내고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녀가 "석현씨, 내일 시간 있죠? 제가 져녁때 회사 근처에서 전화할게요. 또 저번때처럼 싫다고 하시면 안돼요." 했을 때 저는 알았다고 하고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저는 굳은 마음을 먹고 그녀 앞에 나갔습니다. 그녀는 먼저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제 손을 잡아 끌더니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습니다.그러더니 자신의 지프차에다 저를 태우고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디 가느냐고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악을 쓰며 묻자 그녀는 무서운 눈초리로 저를 쳐다보더니 가보면 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이러다가 인신매매 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왈칵 겁이 났고, 제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그녀가 귀신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40여 분 달려서 그녀가 차를 세운 것은 인천의 월미도였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무슨 결심을 한 듯 그녀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석현씨! 석현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입니까? 저는 놀라서 되물었죠.
"아니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아니 참 저를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니까요?"
저는 말을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물었습니다.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렇다면 태권도장에서 제가 제 마음을 표현한 것도 모르셨어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제 방식대로 마음을 표현해요."
그녀의 말에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제 기억엔 그녀에게 기합받고 맞고 벌 선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저는 석현씨가 마음에 들어요. 석현씨처럼 순수하고 착한 사람은 처음 봤어요. 이제부터 저랑 데이트하지 않으실래요?"
그녀는 약간은 수줍은 얼굴로 그렇게 말을 했지만 제겐 마른 하늘의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말했지요.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 지영씨랑 사귀어요. 참 내."
그러나 바로 그때 엄청나고도 가공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뭐욧!"하고 째지는 음성과 함께 "방금 제 말을 무시한다는 뜻인가요? 저는 자존심 상하고는 못살아요." 하며 그녀는 갑자기 태권도 대련 자세를 취하는 겁니다.
"자, 어서 저에게 사과하세요. 그리고 앞으로 사귈 거예요, 말 거예요. 석현씨가 만일 저를 이긴다면 제가 다시는 전화 안할게요. 하지만 석현씨가 진다면 제 뜻대로 할 거예요."
그러며 그녀는 준비도 안된 제 앞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주위에는 놀러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그들은 슬슬 우리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이제 그만 갑시..."
아니 그런데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갑자기 그녀의 앞차기가 저의 턱에 정면으로 일격을 가했습니다. 저는 "억!" 하면서 턱을 잡았습니다. 그 다음 그녀는 옆차기로 저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강타했습니다. 이종환, 최유라씨! 여자에게 맞는 남자의 심정을 아십니까? 그때 저는 맞은 데가 아프고 쑤셔서 눈물이 핑 돌았고,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하늘의 갈매기도 끼룩끼룩 울었습니다. 저는 그만 하자고 손짓하면서 차 있는 데로 어기적어기적 가려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돌려차기로 무자비하게 저의 여린 가슴을 짓이겼습니다. 저는 월미도 앞바다를 보면서 큰 대자로 길게 누워버렸고, 제 귀에는 이런 말들이 들려오더군요.
"어머, 여기 영화찍는다."
"와! 정말 실감나네."
"그런데 카메라는 어디 있어?"
"야, 요즘에는 몰래 카메라 있잖아"
"뭐? 그럼 우리도 나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웃어"
그때 그녀가 저에게 와서 손을 뻗어 일으켜 주었습니다.
"자, 차로 가요. 이 길 좀 터주세요."
그녀는 저를 차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는 턱이 아프고 옆구리가 결리고 가슴이 뻐근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를 그녀는 집까지 태워다주면서 "사과 받은 것으로 할게요. 그럼 내일 만나요." 하고는 사라졌습니다. 방으로 들어온 저를 보고 집에선 난리가 났지만 저는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님께 어떻게 사실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인천 앞바다에서 여자에게 개 맞듯이 맞았다고. 저는 분노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잡자리에 들었고, 그날 사나이 가슴엔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종환,최유라씨! 사람의 마음은 왜 그렇게 간사한 걸까요?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가 조금씩 좋아지는 겁니다. 한 번 만나니 좋아지고, 두 번 만나니 정이 들어서 지금은 이렇게 같은 베개를 베고 잠을 잔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2년 전의 그 일만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서 저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 툭 털어놓고 싶어 못쓰는 글이나마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남자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할말 다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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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제 5장 행성의 탄생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고대문명
문화와 문명이라는 말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낱말을 대비시켜 비교적 물질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사회의 편리를 위한 발전적 소산은 문명(Civilization)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바 큰 성과를 문화(Culture)라 하는 견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는 예술.도덕.종교.학문 등 인간의 내적 정서 활동의 소산을 가리키고, 주로 언어와 얽혀 있다.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를 만들어 시민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독일 문화철학에서는 문명에 대비하는 문화상위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독창적인 정신 소산을 문화라 하며, 현실적 인간 생활 영위에 요구되는 합리적 수단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류발달사에 있어서는 야만, 미개에 이어지는 단계를 문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스에는 구석기시대에도 주민이 있어 문명을 지닌 흔적이 있고 신석기인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나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2000년간 융성한 에게 세계를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그리스의 초기 문화와 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후반까지 이뤄진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기원전 2200~1400)이다. 그리스 본토 문명(기원전 1600~1200)과 구분되는 키클라데스 문명도 특징적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의 빛나는 유물, 예컨대 옥제품이나 대리석 조각상, 항아리 등의 발굴로 입증되었으며 미노아 문명이나 헬라스(미케네) 문명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기원전 1600~1400)에 이르러 상류사회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궁전과 정원, 대리석 층계로 이은 웅장한 고층건물, 발달된 위생시설을 갖춘 거실, 침실, 광 등을 미로형으로 배치하였다. 상쾌한 채색벽화는 이 시대 사람의 모습과 습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굴자 에반스는 멋들어진 한 여인의 프레스코 초상회에 '파리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전, 가옥 및 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귀중품, 생활용품, 상아조각상, 광택 있는 홍색 고급토기, 정교한 금동제 기물들, 석각인, 반지 등은 그들이 누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는가를 뒷받침한다. 부유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락으로서 장기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운동경기를 즐겼으며 왕과 여러 신, 특히 뱀여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의 교역과 접촉으로 해외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기념비적 문명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장식적 예술을 창안하였으며 그 문화는 인근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었다. 테라(산토리니) 섬 유적, 특히 아크로티리 도시의 출토물은 크레타 유적과 맞물려 플라톤의 대화편(기원전 4세기)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실체라고 추리하는 견해도 거듭 나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 초반, 크레타와 주변 섬에 관련이 있는 인종과 소아시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침투 혹은 침입하였다. 청동기시대 중반 기원전 2000년 직후에 그리스 본토는 두 차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재 그리스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북방 코카서스의 아리안 인도족이 들어와 점차 융화되었다. 초기 그리스인은 에게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크노스스에 나라를 건설한 후 점차 섬을 넘어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서방으로는 리파리 제도, 이스키아, 남부 이탈리아로 뻗어나가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를 크게 확산시켰다. 본토인은 크레타의 성숙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미로식 궁전은 성채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내부 장식벽화, 작은 조각품, 금속공예, 항아리 등은 크레타의 그것과 유사하며 흔히 미케네 문명으로 불린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1600~1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문명의 후반기인 기원전 1400~1100년은 그리스의 영웅시대라 하며 아가멤논 왕의 세력권 아래 있던 미케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 전쟁을 감행하였다. 트로이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청동기 말기에 미케네족은 멸망하고 많은 도시가 파괴 소각되었다. 멸망의 일부 원인은 먼 혈연의 도리스인이 일리리아인의 대이동에 밀려 침입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북방에서 새로운 그리스족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 후예의 귀환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토착문화를 덮치면서 문화 수준이 하락하고 건축, 항아리 모양등이 완연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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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아 전쟁(참고자료)
그리스측 주장
이 전쟁의 유래는 ‘퀴프리아’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제우스는 너무 증가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큰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거의 대부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의를 다졌다.
올림푸스에서는 인간의 아들 펠레우스와 티탄 족의 딸 테티스의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자 화가 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치라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를 신들의 자리에 보냈다. 이 제물을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격렬한 대립이 벌였고 제우스는 이 사과가 누구에 적합한 지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파리스의 심판)
세 여신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 파리스 앞에 섰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아테나는 어떠한 전쟁도 승리를 할 수 있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젊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하였고 아프로디테의 권유에 의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아 갔다. 파리스의 여동생이자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폴론의 저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형인 뮤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에 그 사건을 말하였고, 또한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에,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 반환과 트로이를 징벌하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라져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를 편들었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를 편들게 되었다.
페르시아측 주장
페르시아측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지중해를 건너간 여성들은 사실 납치혼의 피해자들이었고 신화속 파리스가 헬레나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도 그 납치혼의 보복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설속의 여신 이오는 사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이오를 납치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헬라스측도 이에 보복해 포이니케의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등 보복 납치혼으로 신경전을 일삼다가, 일리온(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보복 목적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헬레나를 납치했고 이것이 악화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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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특기해야 할 유물은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서판이다. 크레타에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림표기가 있었으며, 중기에는 드물지만 상형문자가 나타나는데 말기에는 2획문자로 선문자 A(기원전 2000~1500)와 선문자 B(기원전 1500~1100)가 등장하였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선문자 B는 1952년 벤트리스가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문자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이다. 서판의 기록은 영구적 문서가 아니고 그때 그때에 기록해 둔 비망록 정도에 불과한데, 기원전 1400년경의 화재로 점토서판이 구워지는 바람에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밖에 기원전 1200년경 불에 탄 본토 도시 퓰로스의 서판은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진 점토판으로 대량 출토되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단지의 무늬에 연유하여 기하학기로 부르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이 무늬단지는 500년간의 암흑시대에 드물게 남겨진 유물이다. 기원전 8세기경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암흑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알파벳 문자가 보급되어 다시 예술, 철학, 서사시(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세이아)가 정착하여 고전문화가 가꾸어졌다.
각 도시마다 독자적인 화폐가 주조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달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외침을 받으면 국가 간에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올림파아 축제기간이나 질병 등의 극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중지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분립주의는 폴리스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났고, 빈약한 영토에서 발전된 정치제도는 앞서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개방적이고 시민 개개인의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단 이러한 모든 시민(여자.어린이.노예는 제외)의 참여는 오직 소규모 정치단위들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아테네와 그 주변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이며, 서구의 지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스는 그의 저서 '고대 그리스사'의 권말에서 "대다수 그리스인들이 그들 문명의 독특한 장점이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생각에 동의하길 주저할 까닭은 없으며 또 그 자유의 현상을 그리스인들이 의도하였던 정치영역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우리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걸작품을 바라볼 때는 물론이고 일상적 사항을 볼 때조차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우리 세계와는 판이한 것이면서도, 그들을 움직였던 문제들이 오늘날의 문제와 대체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두 세계는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연구는 그저 기원을 알고자 하는 호고성 탐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유리피데스와 플라톤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고, 나아가 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맺음말은 서구인의 의향이며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지 이제 100년이 넘고 더구나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현대화 물결에 휩싸여 온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하고 의미있는 충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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