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9호 2023.3.6 월요일 (음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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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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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모든 예술의 장녀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의 양친이다.
- W. 콩그리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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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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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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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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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때의 님의 얼굴 -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로 볼 수가 없을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더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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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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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9. 여걸 천하(여후, 진평)
1) 유방이 천하를 얻은 이유는?
큰 바람 일어나 구름 날아오른다
천하를 덮는 위세와 더불어 고향에 돌아오니
어찌 용맹한 자와 더불어 이 땅을 지키지 않을 것인가!
유방은 천하 통일을 이룬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패에 돌아와 잔치를 벌이고 이 노래를 불렀다. 유방은 노래를 부르며 일어나 춤을 추었고 감개무량해 눈물까지 흘렸다. 이름하여 대풍가이다. 난세에 큰 뜻을 품고 일어나 여러 영웅들의 도움을 받으며 천하를 평정하고 금의환향한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용맹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으로 천하를 지키겠다는 희망도 드러내고 있다. 일찍이 유방은 신하들 앞에서,
"그대들은 왜 항우가 천하를 잃고 내가 천하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하고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때 왕릉이 이렇게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부하들을 가볍게 생각하시는데 반해 항우는 솔직하며 부하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부하에게 성을 공략케 한 후 항복해 오는 자를 부하가 부리게 하고 땅과 재물을 똑같이 나누십니다. 이에 비해 항우는 현명하고 재주있는 부하를 시샘하고 공이 있는 부하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부하에게 공을 돌리지 않고 재물을 얻어도 부하에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항우는 비록 70번에 걸쳐 계속 승리했지만 결국 이 때문에 천하를 잃은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이 말했다.
"좋은 말이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오. 장막 안에서 계략을 짜서 천 리 밖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면에서 내가 장량을 따르자 얻게 된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렇게 훌륭한 이들을 잘 활용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천하를 얻게 된 것이오. 하지만 항우는 천하의 재사인 범증이 있었지만 활용하지 못했소. 그것이 나에게 사로잡힌 이유인 셈이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유방이 '대풍가'를 부른 것은 반란을 일으켰던 경포를 토벌하고 돌아오던 길에 고향을 들었을 때였다. 더구나 그는 그 토벌전에서 화살을 맞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찍이 장량이 해하 전투에 앞서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장군들이 필요하다'고 했던 한신, 팽월, 그리고 경포! 그 세 용맹한 부하들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했던, 그리하여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기막힌 탄식을 들어야 했던 유방이었다. 그라고 사무친 감회가 없었겠는가? 그래서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고 했는지 모른다. 어쨌던 이제 유씨 왕족이 아닌 왕으로는 오직 연나라의 왕인 노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원래 노관은 유방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죽마고우였다. 그들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 태어났으며, 아버지끼리도 친구였다. 그래서 친구끼리 같은 날에 사내 아기를 낳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몰려들어 축하하기도 했었다. 그 때문에 노관은 태어날 적부터 계속 유방과 함께 다녔으며, 항우와 천하 결전을 벌일 때도 언제나 함께 있었다. 심지어 침실까지도 출입할 만큼 친한 사이였다. 천하 통일 후에도 기꺼이 유방은 노관에게 연나라의 왕을 내 주었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이 '결코 노관만은 배반하지 않겠지'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노관은 진희가 망하면 바로 자기가 다음으로 당할 차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부하를 진희에게 보내 최대한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해 승패를 결정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그 후 진희가 죽고 반란이 진압되자, 진희의 부하가 이렇게 폭로해 버렸다.
"연나라 왕 노관이 부하를 진희에게 보내 공모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유방이 진상을 알아보려고 노관을 불렀으나, 노관은 두려워 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에 유방의 의심은 짙어갔다.이에 노관은 더욱 무서워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살면서 탄식했다. '유씨가 아닌 왕은 나뿐이다. 그런데 지난해 한신이 죽었고 또 팽월도 죽었다. 이 모두 여후의 음모였다.
'지금 폐하께서 병이 들어 나라 일은 여후가 틀어쥐고 있으면서, 공이 있는 신하들을 모두 죽이고 있구나!'
그런데 이 탄식소리를 누군가가 듣고 유방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자 유방은 크게 노했다. 설상가상으로 흉노에서 항복해 온 자 하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장승이라는 자가 흉노에 와 있는데, 알고보니 연왕 노관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장승은 원래 노관이 흉노에 정탐하기 위해 보낸 밀사였다. 그러나 유방은 그 말을 듣고,
"과연 노관이 배반했구나!"하고 판단해 번쾌를 시켜 토벌을 명령했다. 이때 노관은 가족들과 수천의 병사들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피다가 자기가 직접 유방을 만나 사죄하려고 했다. 그러나 때마침 유방이 죽자, 그는 할 수 없이 부하들을 데리고 흉노 땅에 들어가 언제나 한나라에 다시 돌아갈 날만 생각하다가 1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나라는 유방의 친족과 여후의 친족만이 권세를 잡게 되었다.
유방이 죽기 전 앓아 누웠을 때였다.
여후가 다가와 유방에게 물었다.
"폐하께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재상을 맡겨야 합니까? 지금 소하 대신도 너무 연로하셨는데...."
"소하 뒤는 조참에게 맡기시오."
"그 다음은 누가 맡아야 하는지요?"
"왕을이 적임자이지만, 조금 우직하니 진평이 그를 돕도록 하시오. 진평도 비록 략이 뛰어나지만 단독으로 국사를 맡기 어렵소. 그러니 정치는 왕릉과 진평 두 사람에게 맡기고, 군사는 중후하고 소박한 주발에게 맡기시오. 유씨를 안정시킬 사람은 반드시 주발뿐이니, 그에게 총사령관을 맡기시오."
여후가 다시 물었다.
"그 후는 누가 좋습니까?"
유방은 아내의 욕심에 기가 막혔다.
"아니, 당신은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러시오?"
유방은 드디어 기원 전, 195년,그러니까 천하통일을 이룬 지 8년이 되던 해 4월 장락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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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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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고초려(三顧草廬) - 三:석 삼. 顧:돌아볼 고. 草:풀 초. 廬:풀집 려.
[준말] 삼고(三顧).
[동의어] 초려삼고(草廬三顧), 삼고지례(三顧之禮).
[유사어] 삼고지우(三顧知遇). [참조] 수어지교(水魚之交).
[출전]《三國志》〈蜀志 諸葛亮專〉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 곧
① 사람을 맞이함에 있어 진심으로 예를 다함[三顧之禮]
② 윗사람으로부터 후히 대우받음의 비유.
후한 말엽, 유비[劉備:자는 현덕(玄德), 161~223]는 관우[關羽:자는 운장(雲長), ?~219]/장비[張飛:자는 익덕(益德), 166~221]와 의형제를 맺고 한실(漢室) 부흥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가 없어 늘 조조군(曹操軍)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가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에게 군사를 천거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伏龍)이나 봉추(鳳雛)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후 제갈량[諸葛亮:자는 공명(孔明), 181~234]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저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 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유비는 그후 제갈량의 헌책에 따라 위(魏)나라의 조조, 오(吳)나라의 손권(孫權)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三分)하고 한실(漢室)의 맥을 잇는 촉한(蜀漢)을 세워 황제 [소열제(昭烈帝), 221~223]를 일컬었으며, 지략과 식견이 뛰어나고 충의심이 강한 제갈량은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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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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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바지를 좀더 내리세요
살면서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을 많이 겪기도 하겠지만, 이런 경험을 해보셨는지요? 2년 전, 저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아주 죽도록 고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콧물이나 두통같은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마치 속을 다 뒤집어 놓으려는 듯 튀어나오는 기침은 정말 참기 힘들었죠.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TV를 보다가도 그놈의 기침은 절 그냥 두는 법이 없이 마구마구 나오더군요. 밤잠을 설쳐가며 기침에 시달린지 어언 석달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기침을 할 때마다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는 게 아니겠어요?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니 옆구리가 왜 아플까? 혹시 기침이 심해 폐에 무슨 이상이라도... 아니면 늑막염이 된 건 아닐까?' 걱정이 태산 같았죠. 평소, 한국 표준 여성보다 몸무게로 보나 키로보나 월등히 우량했던 저를 건강 그 자체로만 여기시던 부모님께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셨던지 병원에 가 보라며 아주 걱정스런 얼굴을 하시는 거 있죠. '아! 얼마 만에 가보는 병원이냐...' 너무 건강하다 보니 오랜만에 가보는 병원은 차라리 반갑더군요. 내과에 가서 만난 의사 선생님께서는 점잖게 생기신 중년 신사였는데, 진찰을 받고 이차저차 증상을 얘기하니 심각한 얼굴로 늑막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거였습니다. 자세한 진찰을 위해 방사선과에 가서 X-ray를 찍어오라고 하시기에 전 떨리는 가슴을 안고 방사선과로 갔습니다. 몇 년 전 늑막염을 앓고 있던 친구에게서 뼈에 고인 물을 빼기 위해 갈비뼈에 주사기를 꽂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에 전 아주 얼어 있었습니다. 방사선과에 있는 선생님은 아주 젊은 분이셨는데 저는 그 와중에도 '어머, 참 참한 총각이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그 잘생긴 총각이 저에게 약간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일단 골반부를 찍어야 하니까, 침대에 누우시죠."
침대에 누워 제 배위로 이상하게 생긴 거대한 카메라 같은 것이 왔다갔다 할 때에도 전'참한 총각과 저의 늑막염'생각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윽한 목소리로 그 남자가 말했습니다.
"바지를 조금 내리세요"
전 조금 의외였지만 그냥 찔끔찔끔 바지를 허리 조금 아래까지 내렸죠. 그랬더니 그 남자가 절 냉정한 눈으로 쏘아보더니 말했습니다.
"더 내리세요."
'어머, 어머,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전 조금 당황하여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더 안 내리면 안된다는 시선에 전 그야말로 주눅이 들어 바지를 조금 더 내렸습니다. '아! 빠금히 내보인 내 배꼽!' 부끄러웠지만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갑자기 소리를 버럭지르며 이러는 거예요.
"내 참! 아, 허리띠를 풀어서 바지를 엉덩이까지 내리세요."
아니 이 무슨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립니까? 외간 남정네 앞에서 바지를 내리라니... 전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아, 바지를 벗어야 단추랑 허리띠가 X-ray에 안 나타날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생각 좀 해보세요. 제가 바지를 내리면 바로 뭐가 나옵니까. 그 자리에서 제 팬티가 노출되는 거 아니겠어요. 전 설마 저 사람이 진정으로 저런 소리를 하나 싶어서 다시 그 사람을 봤지만 그는 제가 아주 못마땅한 듯 마구마구 째려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용서하세요. 불초소녀, 건강관리 잘못하는 바람에 외간남자 앞에서 팬티를 보이고 마는군요.' 전 눈을 찔끈 감고 바지를 내렸습니다. 촬영은 30초도 안되어 끝났지만 전 그 시간이 영원과도 같았고, 그 이후에는 아주 정신이 빠져서 흉부촬영시 가운을 입고는 속옷도 벗지 않고 목걸이도 빼지 않아 그 '참한 총각'을 다시 한번 화나게 하고 말았답니다. 촬영이 끝나고 그는 제 필름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애교스럽게 물었습니다.
"어때요? 별 이상 없죠?"
그는 제 흉부필름과 골반필름을 차례로 점검하더니 아주 묘한 미소를 띠우며 내과를 다시 가 보라더군요. '어머, 미소의 참 의미는 뭘까?' 저는 혼자서 예쁜 척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내과로 와서 그 점잖은 선생님 앞에 앉았습니다. 그 선생님도 제 필름을 검토하고 계셨습니다.
"어때요, 선생님?"
제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필름을 잘 살펴보라시며, 불이 들어온 판위에 필름을 끼우셨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커다란 검은 덩어리! '아니, 저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 난 죽나 보다. 저건 무슨 암세포덩어리가 아닐까...?' 무식한 제 머릿속엔 온통 제가 죽는다는 생각만 날 뿐이었습니다. 그 암울함, 그 섬뜩함... 두 분 이해하시겠어요?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때 한 줄기 햇살과도 같은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기침으로 인해 폐가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약을 먹고 병원에 좀 다니면 괜찮겠군요. 됐습니다. 처방전을 줄테니 약 받아가고, 주사 한대 맞고 가세요."
선생님은 금세 아무일 없다는 듯 다음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시더군요. 전 조금 어리둥절해서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저 괜찮은 거 맞아요?"
그런 절 의아한 듯 바라보시더니 말하셨습니다.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럼 저 시커먼 건 뭐예요? 무슨 혹 같은데..."
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물어보았죠.
"아- 저거요?"
선생님은 아까 그 참한 총각과 거의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어요.
"아가씨, 변비 있죠? 저거 변비에요. 말 난 김에 변비약도 처방해 줄까요?"
아! 이 무슨 망신입니까? 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병원을 나왔습니다. 귓불과 등줄기가 후끈후끈 한 것이 그날 어떻게 집엘 왔는지... 그 참한 총각의 묘한 미소도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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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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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 마루야마 겐지
그때 나는 수평선을 보고 상당히 겁을 먹었다. 세상에 이렇게 드넓은 공간이 있었단 말인가 하고 얼이 빠지고 말았다. 밀려오는 파도에 압도되어 하염없이 한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랬던 내가 바다로 나가자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번 거부했던 세계로 자신을 던져보자고 생각한 것이다. 문학의 힘은 위대하다. 나는 친구한테 선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해양학교나 해양대학에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성급한 나는 좀더 빠른 길은 없겠냐고 물었다. 친구는 그러면 통신사가 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자격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배를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통신사를 양성하는 국립 고등학교-현재는 공업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고 한다-가 전국에 세 군데 있는데,나가노(長野) 현에 살고 있으니 센다이(仙臺)에 있고 아직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새파란 젊은이가 한정된 조건 안에서 인생에 대하여 결단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당최 경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그런 나이에 인생의 목적을 빈틈없이 터득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그러고자 하니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괴롭다. 농담이 아니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삶은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얽매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물론 부모나 선생은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안정된 길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그러고는 입을 모아 '성실이 제일' 이라고 떠들어댄다. 절대로 도산하지 않을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입사하여 아무튼 성실하게 몇십 년 일하면 퇴직금도 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 삶만이 성실한 것일까.그것만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그렇게 바랐던 안정의 결과가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되어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다시 한번 선생의 눈을 보라. 다시 한번 부모의 눈을 보라, 입으로는 거창한 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그 표정이라니, 도대체 무언가.왜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라도 있다면,이번 인생은 이 정도로 해두고,두번째 세번째 인생을 마음 껏 누리자고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사람에게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한 번도 자기 스스로 생각하여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신들은 언젠가는 늙어 죽는다는 전제에다 하늘도 마음대로 날 수 없는 육체를 주고서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자 이제 알아서 잘 살아보라'고 한다. 당시 나는 이런 말을 종종 했다.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학교에도 안 가고 일도 하지 않았을 거다. 우리집에는 남아 돌아가는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일한다.' 나는 취직 문제에 대해서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았다. 부모는 물론 선생님과도 반 친구와도.
어떤 상사(商社)에서 우리 학교로 텔렉스 오퍼레이터를 구한다는 요청이 왔기에 입사 시험을 치러보기로 했다. 텔렉스 오퍼레이터란 직업이 어떤 일을 하는 것인지도 알아 보지 않고.아니 그 상사가 어떤 회사인지조차 몰랐다. 마루베니라 회사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었다. 베니(紅)'란 글자가 붙어있기에 화장품 회사인가 하고 생각해 봤을 따름이었다.
그런 어느 날,제법 성적이 좋은 친구가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상사에 들어가고 싶은데 양보해줄 수 없겠느냐고. 모집 인원이 딱 한 명이라,둘이 함께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회사가 유명한 대기업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네가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한다면 양보를 하지. 그 대신 내가 취직할 회사를 찾아줘"라고. 그는 신나서 그날로 당장 다른 상사의 팜플렛을 내게 들고 왔다. 그렇게 정해졌다. 나는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팔십 명 중에 팔십등이란 성적이지만 학교측의 추천장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기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입사 시험이었다. 담임 선생이 나를 비웃었다. 시험을 보고 안 보고는 네 마음이지만 필기 시험에서 영락없이 떨어질 것이라는 의미의 웃음이었다. 나도 그 점은 인정했다.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여기저기 회사를 쑤 시고 다녀보다가 정 안 되면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뭐 굳이 넥타이를 얌전히 매고 다니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 던 것은 아니다. 몸만 성하면 무슨 일을 해서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쯤 익히 알고 있었고, 정 안 되면 마지막에는 뒷골목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어디든 들어갈 수 있는 자신도 있었다. 입사 시험 용지를 받기는 했는데. 역시 알쏭달쏭이었다. 작문도 거의 엉터리 문장으로 메웠다 사람들은 내게 곧잘 이렇게 말한다.
"소설가가 될 정도니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 겠군요"라고. 말도 안 되는 오해다. 나는 글쓰기를 지독하게 싫어 했다. 겨우 원고지 한 장을 메우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방학 때면 일기도 '오늘은 잤습니다. 일어났습니다'란 말밖에 쓰지 못할 정도 로 한심했다. 필기 시험을 치르고 나서, 늘 자신만만해하던 나는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사과 담당자가 내게로 오더니 남아 있으라는 것 아닌가. 일부러 먼 데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면접 시험까지 치르자는 것이었다. 수험자들이 전부 돌아간 뒤에. 나는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의자에 앉아 중년 남자 세 사람으로부터 이런저런 질문 공세를 받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일어서더니 방 구석으로 가서는 뭐라 쑥덕쑥덕거리다 다시 내게로 돌아와 "채용이 내정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놀랐다. 그렇게 쉽게 사람을 고용해도 정말 괜찮은 겁니까,라며 가슴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 큰 어른이 그렇게 말한 것이니 틀림은 없으리라.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입사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전보가 도착했다. 그 전보는 필기 시험에 낙방한 자 전원에게 보낸 전보였는데,중역들의 지시가 하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혼선이었다. 며칠 후에는 다시 정정한다는 전보가 왔다. 가장 놀란 것은 학교측이 아니었을까. '저 농땡이가 어떻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마루베니를 양보해달라고 했던 친구는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그가 떨어졌을 정도이니 내가 시험을 쳤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으리라. 참으로 재미있는 세상이다. 일단 취직만 결정되면 그 다음은 내 세상이다. 왜냐하면,그렇게 된 이상 학교는 나를 졸업시키지 않으면 안 되고 추천장에는 중간 정도의 성적이라고 쓰지 않으면 안 되므로.학교측이 졸업도 할 수 없는 학생을 추천한다면 학교는 신용을 잃게 될 것 아닌가. 이번에는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차례였다. 어떤 선생이 나에게 이렇게 위협했다.
"지금부터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따지 않으면 졸업 안 시켜줄 테니까 알아서 해.' 나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이곳은 재미있는 학교니까 몇 년이든 남아 있기로 하죠"라고 맞받아쳤다. 나는 어른에게 그런 건방진 말을 툭툭 내뱉을 수 있는 아주 얄미운 농땡이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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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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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운명 빅뱅과 그 이후 - 트린 후안 투안
제4장 별의 탄생과 죽음
초신성의 격렬한 죽음
좀더 무거운 별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죽음에 대한 이들의 투쟁은 매우 격렬하다. 그러나 최종 결론은, 또 다시 별들의 초기 질량에 따라서-별들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5배를 초과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최후가 결정되는 것이다. 먼저 질량이 태양의 1.4∼5배인 별들의 최후에 대해 살펴보자. 이런 별들은 무거운 질량 때문에 반지름이 10㎞정도의 작은 물체로 쪼그라든다. 별을 이루는 모든 물질이 중성자로 바뀌기 때문이다. 중성자별에서는 찻숟가락 하나 정도의 물질이 10억 톤이나 된다. 100여개의 에펠탑을 볼펜 끝의 구슬만하게 압축하면 이와 똑같은 밀도로 만들 수 있다. 별 중심부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폭발은 어마어마한 폭발의 도화선이 된다. 별의 바깥층은 초당 수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우주 공간 속으로 날아가버리고 동시에 태양 10억 개에 해당하는 빛을 쏟아낸다. 한 별에서 그 별이 속한 은하 전체와 맞먹는 밝기를 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초신성이다. 이런 폭발적인 죽음은 은하마다 100년에 한번 정도 발생한다. 우주에 있는 은하가 1000억 개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매초마다 이런 폭발이 일어나는 셈이다. 역사시대 이후, 인류는 은하계 내에서 약 10변의 초신성을 보았다. 젊은 티코 브라헤가 1572년에 카시오페이아 자리에서 본 '새로운 별'-이것이 브라헤가 하늘은 불면이라는 생각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 계기였다-은 바로 그런 사건이었다. 이 새로운 별의 유물이 초신성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1987년 2월 23일, 우리 은하에서 15만 광년 떨어져서 우리 은하 주의를 돌고 있는 난쟁이 은하인 대마젤란 은하에서 초신성이 나타나 천문학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천문학자들은 대구경 지상 망원경, 우주 위성, 중성미자 검출기 등의 최신 장비를 동원하여 완전무장한 채, 처음으로 가까운 별의 죽음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게성운:객성
천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신성은 현재 게성운이라고 부르는 별의 잔해와 관련된 것이다. 1054년 7월 4일 아침, 하늘에서 이상한 물체가 빛을 내었다. 중국의 천문관리들은 이것을 객성(객성)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너무나 밝아 몇 주일이 지나서도 여전히 낮에 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유럽은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별은 불변의 존재라고 믿은 서양인들의 생각이 그들을 '장님'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이제 객성은 더 이상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망원경을 이용하더라도 그 이름과 같은 게딱지 모양의 희미한 자국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게성운은 애초부터 유명해질 운명을 타고났다. 1967년 천문학자들은 게성운의 중심부에서 중성자별을 발견했는데, 이 별에서는 1초에 30번씩 점멸하는 에너지의 섬광이 관측되었다. 천문학자들은 이 이상한 현상, 즉 깜빡이는 별(pulsaying star) 또는 줄여서 펄서(pulsar)가 생기는 것에 대해 두 가지 요인이 관련돼 있음을 알아냈다. 우선 첫째로 중성자별에서 이루어지는 복사가 별의 전표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 줄기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중성자별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전한다는 것이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회전할 때, 두 팔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면 또 빨리 회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축된 별도 원래의 크기로 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자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펄서의 전파 줄기가 지구를 향할 때마다 마치 거대한 등대에서 나오는 섬광처럼 전파의 섬광이 관찰되었던 것이다. 회전하는 팽이처럼 게성운 속의 펄서는 중력 붕괴 때문에 생긴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 자전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멈추고 다시는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죽은 별이 될 것이다.
- 게성운 : 게성운은 별의 진화 마지막 단계인 초신성이 폭발해 만들어진 초신성 잔해이다. 성운 중심에는 지름 30km에 달하는 중성자별인 펄서가 존재하며 1초에 30.2회 자전하면서 전자기파를 방출한다.-
블랙홀:최후의 죽음
질량이 태양의 5배 이상인 별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런 별들은 연료를 다 사용하고 나면 극단적으로 쪼그라든다. 즉, 강력한 중력장을 만들어서 공간을 내부로 굽게 하여 빛조차 그 속에 영원히 가두어버린다. 블랙홀(검은 구멍)이 된 것이다. 빛도 탈출할 수 없다면 다른 어떤 것도 탈출할 수 없다. 블랙홀의 손아귀에 잡힌 물질은 모두 일방통행만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모든 물체가 블랙홀이 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물체가 극히 작은 점으로 압축돼 빛이 그 중력 때문에 되돌아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만일 거인의 손이 우리의 몸을10의 -23승 분의 1cm적게, 즉 원자 하나 크기의 1천조 분의 1로 압축한다면 우리도 블랙홀이 될 수 있다. 또한 지구가 당구공 만하게 쪼그라들면 역시 블랙홀이 된다. 하지만 그만한 압력을 만들기가 어렵기 때문에 블랙홀은 아주 드물다. 원자와 분자를 묶어 결정이라는 격자 구조를 만들어내는 전자기력은 그와 같은 극단적인 압축 상태가 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랙홀이 만들어지려면 태양보다 질량이 5배 이상인 별의 중력이 필요하다. 블랙홀에서는 빛조차 탈출할 수 없다는데 천문학자들은 어떻게 그 존재를 알려주는 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가? 일단 블랙홀이 만들어지면 블랙홀을 그 영역으로 잘못 들어선 것들을 모두 끌어당겨 파괴하며, 이 과정에서 크기와 무게가 점점 늘어난다. 바로 이 잔인한 동족상잔의 행위를 통해 블랙홀은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는 것이다. 중량급 별들은 대부분 하나의 별이 다른 별의 주위를 도는 쌍성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두 별 가운데 더 무거운 별이 붕괴해 블랙홀이 되면 나머지 별의 운동을 제어하는 중력장은 단지 전체 질량에만 관련이 있으며, 전체 질량은 여전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장에는 상당한 혼란이 발생한다. 블랙홀이 눈에 보이는 별의 대기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따라서 가스 입자들이 빠른 속도로 블랙홀을 향해 빨려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가스 원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엄청난 양의 X선을 방출하게 된다. 그리고 동료 별의 물질은 괴물의 뱃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초신성이 우리에게 만들어준 세상
중성자별처럼 블랙홀은 초신성 속에서 만들어진다. 별의 내부에서는 헬륨보다 무거운 원소들이 매우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원소들이 별 내부에만 남아 있다면, 그 신비한 연금술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다음 단계의 좀더 복잡한 원자들을 합성하기 위해서 전자기력은 핵주위의 궤도에 전자들을 묶어놓아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별 내부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별 내부에는 엄청난 열이 원자들 사이로 쏟아지며, 복잡한 원자가 만들어진 순간 다시 그것들을 흩뜨리기 때문이다. 원자의 증식에는 좀더 차갑고 조용한 환경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별들 사이의 50∼1만K의 공간이 이상적이다. 그렇다면 핵은 어떻게 해서 그것들을 만든 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초신성이 폭발하면서 무거운 원소의 핵들-생명을 품은 매래 행성의 씨앗-을 우주 공간으로 흩뜨려놓는 것이다. 별 내부에서 열 핵융합 반응은 철을 만드는 단계에서 반응을 유지할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해 끝이 나고 만다. 그러나 초신성은 여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별의 바깥층이 폭발할 때 생긴 어마어마한 열이 핵융합 반응의 고리를 연결하고, 철보다 무거운 은, 금, 납, 우라늄을 포함한 나머지 원소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초신성은 이밖에도 높은 에너지를 지닌 전자와 양성자를 우주 공간으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이처럼 고속으로 움직이는 우주선 중 일부는 하루만에 지구에 도달해 생물의 유전자 구조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러므로 초신성은 지구의 생명체가 원시 상태의 세포에서부터 진화하는 과정에 나타났던 돌연변이에도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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