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7호 2023.2.2 목요일 (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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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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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또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상이다.
- 아인슈타인
방향이 잘못되면 속도의 의미가 없다.
-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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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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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려고 너무나 많은 시간을 쓴다.
다섯 번이나 점검을 해서
고칠 필요가 없는 것까지도 고치려고 한다.
한 번으로 일을 끝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믿어 보자.
물론 한 번쯤 더 들여다 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내야 한다.
< 마이크 넬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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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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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시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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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미의 창조 - 한용운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없는 황금과
밤의 올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한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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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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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2/2)
소 열두 마리로 나라를 구한 현고
목공 32년 겨울에 문공이 죽었다. 그런데 정나라 백성 중에 자기 나라를 진나라 목공에게 팔아 넘기려는 자가 나타났다.
"정나라 도읍의 성문은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손만 쓴다면 쳐들어가는 것은 간단합니다,"
목공은 곧 건숙과 백리해, 두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나라에 가려면 다른 나라 영토를 여러 곳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먼 나라에 쳐들어 가서 승리를 거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정나라에 그런 매국노가 있는 이상, 우리 나라에도 그런 자와 닮은 자가 나타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그만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하며 반대 의견을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공은 초조하게 서둘렀다.
"그것은 모르는 소리요. 나는 이미 결심했소."
이렇게 말한 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을 곧 원정군의 장수로 임명했다. 마침내 출진하는 날, 백리해와 건숙은 통곡했다. 그러자 목공이 화를 버럭 내며 비난했다.
"이제 출진을 하는 마당에 물다니 웬일이오? 아들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오?"
이에 두 신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성상의 부르심에 따라 저희 자식들이 출진을 하게 되었으나, 소신들은 이미 늙은 몸이라 원정기간이 길어진다면 이 세상에서 다시 그 애들을 만나 볼 기회는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슬퍼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어전에서 물러서서 자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만약 패한다고 하면, 반드시 그곳은 효산 골짜기일 것이다."
목공 33년 봄, 진나라는 드디어 정벌에 나섰다. 애당초의 예정을 바꿔 진나라 영토 안을 통과하지 않고 주나라 도읍의 북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제후의 군대가 천자가 다스리는 주나라를 지날 때는 갑옷을 벗고 무기도 거둬 한데 묶어야 했다. 그러나 진나라 군대는 이를 전혀 지키지 않았으며, 줄도 맞지 않고 기율도 엉망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나라의 대신 왕손만이 이렇게 말했다.
"천자가 계시는 성의 문을 그대로 지나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더구나 경솔하기까지 하다. 경솔하면 생각이 얕고, 예의가 없으면 기율이 없는 법이다. 그래 가지고는 싸움에 이길 수 없을 것이 분명한 일이로다."
이윽고 진나라 군대는 약소국인 활나라에 닿게 되었다. 이때 우연히 현고라는 정나라 상인이 소 12마리를 끌고 주나라로 팔러 가던 도중에 진군을 만났다. 그런데 자세히 알아보니 자기 나라를 치러 간다는 것이 아닌가! 즉시 그는 사람을 왕에게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꾀를 냈다. 현고는 자기의 열두 마리 소를 끌고 진나라 장군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가 정나라를 치러 온다는 말을 듣고 정나라 군주는 조심스럽게 방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 12마리를 바치는 것은 원정중인 군사를 위로하게 하라는 정나라 군주의 분부이십니다."
그 말을 듣자 두 장군은 이마를 맞대고 의논했다.
"아무래도 정나라가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린 모양이오. 지금 공격을 해봤자 실패할 것 같소."
그래서 부리나케 방침을 바꿔 정나라 대신 진나라의 속국이었던 소국, 활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말았다. 꿩 대신 닭을 잡았던 것이다.
들어맞은 예언
이때 진나라는 문공의 상중인데다가 아직 매장도 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 진나라의 공격 소식을 듣자 태자 양공은 화를 버럭 냈다.
"그 놈들이 나를 멸시하다니! 상중인 기회를 틈타 내 속국을 공격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당장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전군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효산 골짜기에 군대를 매복시키고 진군이 나타나자 모조리 쳐부수었다. 무사히 살아 남은 자는 하나도 없다시피 되었고 두 사람의 장군도 생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이야기했듯이 문공의 부인은 진나라의 공주였기 때문에, 생포된 두 장군의 목숨을 구하려고 양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명을 거역하고 활나라를 공격한 이 장군들을 내 아버님께서는 골수에 맺히도록 원망하고 계실 것이오. 그러니 이 자들을 다시 돌려보내서 아버님께서 처벌하게 해주세요."
그러자 양공은 그 말을 받아들여 두 장군을 돌려보냈다. 목공은 상복을 입고 두 장군을 도읍의 교외에까지 나가 마중하며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자손인 그대들에게 수치를 끼치게 되었소. 나에게는 그대들을 처벌할 자격이 없소. 앞으로 수치를 벗어나도록 전념해 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오."
그러면서 두 장군에게 전보다도 더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그 후에도 목공은 또다시 맹명시 등 두 사람을 장군에 임명하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나 또다시 패배한 채 철수해야만 했다.
유혹과 이간
어느 대인가 오랑캐족인 융나라 왕이 유여라는 사자를 보내왔다. 본래 유여의 선조는 진나라에서 망명한 자였으므로 유여는 중국의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 관계로 목공의 풍모에 대해 전해 들은 융왕은 유여를 진나라에 보내 시찰토록 한 것이다. 목공은 의기 양양해서 자기의 힘을 과시하려고 궁중에 모아둔 금은 보화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유여는 이렇게 말했다.
"귀신이 이런 것을 만들었다고 하면 틀림없이 귀신도 지쳤을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만들었다면 백성들은 반드시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목공은 그 말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이렇게 물었다.
"우리 중원의 모든 나라는 시서, 예악, 법도에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소. 하지만 그런데도 소란이 그치지 않소. 그런데 귀국에는 별로 이렇다 할 통치의 기준이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고 있소? 그런 기준이 없으면 틀림없이 어려움을 겪을텐데 말이오."
그 말을 듣자 유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애당초부터 중원이 어지럽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악이나 법도의 제정은 고대 성왕이신 황제 이후부터의 일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는 황제께서 솔선해서 법도를 따르셨기 때문에 이럭저럭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이르자 위정자들은 날로 교만해지고 법도가 문란해져서 백성들만 책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착취 때문에 시달리는 백성은 인의를 방패로 삼아 위정자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위정자와 백성들의 다툼이 왕위를 찬탈하게 하고, 다시금 종족의 멸망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법도의 위력만을 너무 믿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다릅니다. 위정자는 유수한 덕성을 몸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으며 백성들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뢰로 윗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흡사 몸을 키워 나가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참다운 성인의 정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목공은 내전으로 들어가 신하를 불러 상의했다.
"참으로 저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오. 이웃 나라에 성인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두통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오늘 유여와 같은 인물을 보니 정말 불안해서 견딜 수 없소.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소?"
그러자 신하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융왕은 벽지에 살고 있으며 아직 중원의 음악에 대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미녀 가무단을 보내 유혹함으로써,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유여가 여기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처럼 꾸며서 그의 귀국을 지연시킬 일입니다. 즉, 유여를 가능한 한 여기에다 잡아 두고 융왕과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융왕은 유여에 대해서 크게 의혹을 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군신을 이간하는 일에 성공한 뒤에는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융왕이 가무에 유혹당하면 자연 정사에 태만해질 것은 뻔한 일입니다."
이 말에 목공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야말로 과연 묘안이오."
그 후 목공은 유여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연회석에서 함께 나란히 자리를 잡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식사를 할 때에는 손수 요리를 권하면서 매우 친근한 정을 보여줌과 동시에, 융나라의 지형과 군비 등을 질문해서 나라 정세의 대부분을 파악했다. 그런 다음 16인의 미녀로 구성된 가무단을 융왕에게 보내게 했다. 그랬더니 과연 융왕은 완전히 빠져 해가 바뀌어도 가무단을 돌려보내려 하지 않았다. 목공은 그러한 융왕의 사정을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유여를 귀국시켰다. 유여가 돌아가보니 왕은 매일같이 가무단만 끼고 노는 것이었다.
"폐하. 그만 가무단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유여가 거듭 말했지만, 융왕은 이젠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목공은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어 다시 유여를 초청했다. 이윽고 유여는 조국을 떠나 진나라로 돌아왔다. 목공은 그를 빈객으로 맞이하고, 국정의 고문 노릇을 담당하게 했다.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힌다
목공이 즉위한 지 36년, 목공은 맹명시 등을 더욱 후대하고 군대를 일으켜 또다시 진나라를 공략하게 했다. 진군은 황하를 건너가자 배들을 불살라 버리고, 결사적인 각오로 공격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진을 단번에 무찌르고 땅을 빼앗아 버렸다. 이로써 전날 효산 골짜기에서 패전한 복수를 한 셈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목공은 황하를 건너 그동안 효산 골짜기에 버려진 병사들의 시체를 모다 제사를 지낸 후 매장했다. 또한 모든 병사들로 하여금 사흘 동안에 걸쳐 통곡하게 한 다음 이렇게 선언했다.
"그대들 병사들이여, 나의 맹세를 들으라. 우리들의 조상들은 매사에 있어 노인들의 말씀을 항상 따랐었다. 나는 그 계율을 어기고 건숙과 백리해의 충언을 무시했기 때문에 수많은 충성스러운 병사를 죽음에 이르게 했도다. 실로 통탄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새로이 태어나는 후세와 자손들을 위하여 나의 과오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다."
모든 병사들은 목공의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머리를 숙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 대왕 폐하께서는 참으로 우리 병사들을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승리를 얻은 것이 분명하다."
이듬해에 목공은 유여가 세운 작전 계획에 따라 서쪽의 융족을 토벌했다. 그리하여 융왕 치하의 열두 나라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천 리나 넓히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융나라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 주나라 천자는 목공에게 금으로 만든 북을 하사하고 그 공적을 찬양했다.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한 이유
목공은 재위 39년 만에 사망하여 옹땅에 매장되었다. 그러자 목공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순사(왕이 승하하면 이를 따라 그를 모시던 신하들이 함께 자살하는 것)한 사람이 1백 77명에 달했다. 모두 목공의 유언에 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황조의 시"를 지어 읊으며 그들의 순사를 슬퍼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목공을 이렇게 평가했다. '진나라 목공은 영토를 넓혀 나라를 번영시켰다. 동쪽으로는 강국 진을 제압했고 서쪽으로는 융족을 지배했다. 그만한 업적을 이루었으면서도 그는 제후들의 맹주가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노릇이라고 하겠다. 자기가 죽으면서 후사를 세우기를 잊고, 또한 신하들을 순사시킨 것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역대의 성왕들은 서거할 때에도 또한 후세를 위하여 은덕을 베풀어서 그 본을 보였다. 하물며 백성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유능한 신하들을 순사시키지는 않았다. 목공이 중원에 진출하지 못했던 것은 그러한 결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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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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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전백승(百戰百勝)
百:일백 백. 戰:싸울 전. 勝:이길 승.
[동의어] 연전연승(連戰連勝). [유사어] 백발백중(百發百中).
[반의어] 백전백패(百戰百敗). [출전]《孫子》〈謀攻篇〉
백 번 싸워 백 번 이긴다는 뜻으로, 싸울 때마다 반드시 이긴다는 말.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서 오왕(吳王) 합려(闔閭:B.C. 514~496)를 섬긴 병법가 손자(孫子:孫武)가 쓴《손자》〈모공편(謀攻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승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서 얻는 승리와 적을 공격한 끝에 얻는 승리인데 전자는 최상책(最上策)이고 후자는 차선책(次善策)이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겼다[百戰百勝]’해도 그것은 최상의 승리가 아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승리인 것이다. 곧, 최상책은 적이 꾀하는 바를 간파하고 이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 다음 상책은 적의 동맹 관계를 끊고 적을 고립시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적과 싸우는 것이며, 최하책은 모든 수단을 다 쓴 끝에 강행하는 공성(攻城)이다.”
[주] 여기서 ‘백(百)’이란 단순과 숫자상의 ‘100’이 아니라 ‘삼(三)’ ‘구(九)’ ‘천(千)’ ‘만(萬)’등과 마찬가지로 ‘많은 횟수’를 가리키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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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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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앞과 뒤의 엄청난 차이.
전 30대 중반의 여성입니다. 아울러 안양시 여성의 건강을 책임지고 에어로빅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기도 합니다. 눈치 빠른 분은 벌써 헬스복 차림의 여자를 떠올릴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저희 체육관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이라고도 밝히지 않겠습니다. 지난 겨울 어느 날, 저녁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그분이 문을 열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여자 마피아 의상이었어요. 검은 코트를 팔도 끼우지 않은 채 걸치고 있었고 코트 자락 밑으로는 헬스 스타킹과 하얀 운동화 차림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분도 미리 옷을 입고 오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집이 가까운 분들은 와서 옷을 갈아입지 않고 미리 입고 오시곤 했습니다. 어쨌든 그분은 우아하게 코트를 벗고 맨 뒤쪽에 섰고 저는 수업 중이었으므로 거울 속에 비친 그분에게 눈인사나 하려던 순간 저는 그만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습니다. 왜인지 밝혀야 하는 제가 쑥스럽네요. 글쎄 푹 패인 헬스복 앞자락 사이로 두 젖가슴이 다 쏟아져 나와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자세히 보니 헬스복의 앞과 뒤를 바꿔 입고 있었어요. 원래 헬스복이란 것이 수영복과 비슷해서 등이 많이 파여 있는 게 기본형인데 그것을 돌려 입은 거예요. 검정색 헬스복은 하얀 피부와 형광등 조명 아래 더욱 검게 돋보였습니다. 헬스복의 가장자리는 고무줄 처리가 되어 탄탄히 누르고 있어 처음에는 거의 가슴의 정상부분까지만 노출이 되었는데, 그 가장자리가 누르고 있는데다 마구 흔들어대는 바람에 조금씩 조금씩 밀려 급기야는 완전히 쏟아져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오늘 처음 오셨으니 잘 되지도 않는 동작을 단단히 각오라도 하고 오신 듯 상.하.좌.우로 열심히 흔드는 거예요. 상상이 되십니까?
다음 순간 저는 어찌해야 이 난관을 처음 나온 분에게 무안을 주지 않고 넘기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그 동안에도 그분은 열심히 뛰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인 곳에서 오래 감춰질 수는 없었지요. 초보자들은 얼마간은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거의 벗다시피한 모습으로 다른 사람과 공개된다는 게 쑥스러워서인가봐요. 그런 까닭에 그분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 반란은 눈치도 못채고 열심히 제 동작을 쫓아 하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가서 얘기해 줘야지.' 하고 제가 그분 쪽으로 걸어가는 것과 동시에 체육관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입술을 깨물며 참던 회원들이 풋!풋!하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털썩 주저앉는 사람, 거울에 기대어 몸부림치는 사람, 마루를 내려치는 사람, 모두 눈물을 닦아내며 웃어댔습니다. 사정을 뒤늦게 눈치 챈 뒤 그분은 이러더군요.
"집에서 입고 거울을 보면서 헬스복이 야하다는 말만 들었는데 야하긴 진짜 야하네. 이게 무슨 망신이야."
그날 이후로 저녁반 회원들은 그분만 나타나면 웃음을 참아내며 그분의 옷차림을 몰래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며칠 후 어느날, 그날도 그분은 검은 코트를 걸치고 들어왔고 밤무대 댄서처럼 벗어던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더욱 빨리 뒤집혔습니다. 또 다시 체육관 안이 숨이 넘어갈 듯한 웃음과 몸부림으로 들끓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랫도리에서 일이 벌어졌습니다. 헬스복 중에는 외국 모델들이 많이 입는 아슬아슬한 비키니 수영복 같은 것이 있습니다. TV에서 세계 에어로빅 대회 같은 데서 선수들이 즐겨 입기도 합니다. 엉덩이 쪽은 1.5cm 쯤 되는 하얀색 가느다란 띠로 처리된 헬스복이지요. 오늘은 그 팬티의 앞뒤를 바꿔 입은 것입니다. 회원들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다 이젠 안면도 생겼고 해서 이번에는 아예 처음부터 까놓고 웃어댔습니다. 장미꽃 한송이가 가슴에 활짝 핀 흰 탑을 받쳐입고 아랫도리는 1.5cm 가량의 가느다란 흰 끝이 묘하게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했으니 양옆으로 어지럽게 흩어진 검은 무엇인가를 고탄력 스타킹만으로는 가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지난번 모습까지 떠올리다 보니 저조차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분은 지난번 일을 만회해보고자 헬스복 매장에 가서 예쁘면서 야한 옷으로 달라고 졸라 몸매에 무리인 줄 알면서도 초보자들은 감히 입을 수 없는 문제의 그 원라인을 사다가 앞뒤 바꿔입은 것입니다.
에어로빅은 다들 잘 아시다시피 90% 이상이 다리를 벌리고 하는 동작입니다. 오랫동안 상상하지는 마세요. 사실 이 내용이 방송불가가 될까봐 걱정했는데 며칠전 치질로 고초를 겪게 된 동네 아저씨 얘기를 해주신 어느 분 편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사실 제 편지의 내용은 위치상으로 볼 때 항문보다는 덜 은밀한 곳에 있지 않습니까? 다시 얘기로 돌아갑니다.
그 상황이 더욱 우습게 된 것은 그분이 이번에는 당당하게 맞섰다는 겁니다. 뭐가 잘못이냐는 거지요. 다 알고 있는 이유를 혼자만 몰라 하더니 결국 나중에야 하시는 말씀이 더 걸작이었습니다.
"앞 동네가 좀 쑥스럽기는 했지만 팬티란 무조건 앞쪽이 좁고 뒤쪽이 넓은 것 아니야?"
이겁니다. 그러나 사실을 아시고 난 후 울상을 지으시며 말하더군요.
" 왜 헬스복과 수영복만이 예외여서 내게 이런 수난을 겪게 하느냐!"
그리고 그분은 그날 이후로 날마다 맨 먼저 와서 제게 복장 검사를 마친후 운동을 하게 됐답니다. 덕택에 지각하는 습관을 고치게 됐지요.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에어로빅을 시작하시려는 분이 계신다면 제가 감히 충고 한마디 하지요.
"헬스복 예쁘다 방심말고 입은 옷도 다시 보자."
그럼 계속해서 즐겁고 유익한 방송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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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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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박완서편"
여류 소설가. 경기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중퇴. 1970년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온 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일약 각광을 받아,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감각적인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분석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40대의 비 오는 날
앉은뱅이 거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요즈음은 꼭 장마철처럼 비가 잦다. 청계천 5가 그 악마구리 끓듯하는 상지대도 사람이 뜸했다. 버젓한 가게들은 다 문을 열고 있었지만 인도 위에서 옷이나 내복을 흔들어 파는 싸구려판, 그릇 닦는 약, 쥐잡는 약, 회충약 등을 고래고래 악을 써서 선전하는 약장수, 바나나나 엿을 파는 아줌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인도가 텅 빈 게 딴 고장처럼 낯설어 보였다. 이 텅 빈 인도의 보도 블록을 빗물이 철철 흐르며 씻어내리고 있어 지저분한 노점상도 다 빗물에 떠내려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떠내려가지 않는 게 있었다. 앉은뱅이 거지였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씩은 그 곳을 지나칠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그 거지가 그 곳 노점상들 사이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 봤기 때문에 그 거지를 알고 있었다. 그 날 그는 외톨이였고 빗물이 철철 흐르는 보도 블록 위에 철썩 앉아 있는 그의 허리부터 발끝까지의 하체가 물에 홈빡 젖어 있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한 손으론 비닐 우산을 펴들어 머리를 빗발로부터 가리고 한 손은 연방 행인을 향해 한 푼만 보태 달라고 휘젓고 있었다. 나는 전에 그를 봤을 때 각별하게 불쌍히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앉은뱅이라는 것조차 믿었던 것 같지가 않다. 앉아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는 것도 봤고, 앉아서 다니기 편하게 손에다 슬리퍼를 꿰고 있는 것도 봤지만 그게 반드시 앉은뱅이란 증거가 될 순 없었다. 허름한 바지 속의 양다리는 실해 보였고 아마 아침엔 걸어나와 온종일 저렇게 흉물을 떨다가 밤이면 멀쩡하니 털고 일어나 걸어들어가겠거니 하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약아 빠졌달까, 닳아 빠졌달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 날도 물론 그가 앉은뱅이란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앉은뱅이가 아니란 증거 또한 없었다. 그냥 빗속의 모습의 충격적으로 무참했다. 찬 빗물에 잠긴 누더기 속의 하체가 죽어 있는 물건처럼 보였고 그래서 행인을 향해 휘젓고 있는 한쪽 손이 비현실적이리만치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순간 무참한 느낌으로 숨이 막히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리곤 잠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한 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 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이렇게 마음을 모질게 먹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 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 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 도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 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 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
그 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거지에 대한 한두 푼의 적선이 거지를 구제하기는커녕 이런 적선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제책이 늦어져 거지가 마냥 거지일 뿐이라는 제법 똑똑한 생각을 요즈음은 어린이까지도 할 줄 안다.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 작용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장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 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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