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6호 2023.2.1 수요일 (음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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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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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곳은 집이다.
발은 떠나도 마음이 떠나지 않는 곳이
우리의 집이다.
Where we love is home,
home that our feet may leave,
but not our hearts.
- O. W Hol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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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자유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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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점을 알아야 해.
만약 내가 진실만 이야기한다면
그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이야.
강자중의 강자가 되는 것이지.
진실의 위력 때문에, 아무도 나에게
대항할 수 없단 말이야.
- 발타자르 그라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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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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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세대 차
말의 세대 차를 걱정하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못 알아듣겠다.’ ‘이러다가 소통이 안 될까봐 걱정이다.’ ‘세대 차를 줄이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걱정도 팔자다. 노력하지 말라. 가끔은 뭘 하는 것보다 안 하는 게 나을 때가 있다. 세대 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허황되고 부질없다. 세대 차가 없는 말의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노화 저지’(안티에이징)가 시대적 과제라지만, 가는 세월 그 누가 잡을 수가 있겠나.
기성세대는 버릇처럼 젊은이들의 말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줄임말이나 신조어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기만 한 건 아니다. 새로운 말은 세대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만들어진다. 누가 쓰느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뿐이다. 공식어나 격식체를 쓰는 공간에서도 줄임말이나 신조어를 빈번하게 쓴다. 그런데 정치에 무심한 사람에게는 ‘외통위, 법사위, 과기정통부, 윤핵관’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국가재정사업에 무심하면 ‘예타 면제’란 말을 모른다. 입시에 무심하면 ‘학종, 사배자, 지균’이 뭔지 모른다. 시골 농부는 ‘법카’를 모른다(알아 뭐 할꼬). 어떤 사람들에겐 못 알아듣는 말인데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이 공간을 차지한 사람들에게 친숙한 말이면 ‘모두가 쓰는 말’로 가정한다. 그 공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말만 불온시한다. 편파적이다.
우리는 모든 장소와 시간에 존재할 수 없다. 말은 장소성을 갖는다. 장소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다. 장소성을 갖지 않는, 장소성이 표시되지 않는, 중립적인 척하는 언어가 더 의심스럽다. 차이를 줄이기보다 차이를 밀어붙이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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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시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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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한 밤 - 한용운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가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참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황금의 칼은 들고 한 손으로 천국의 꽃을 꺽던
환상의 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금실과 환상의 여왕이 두손을 마주잡고,
눈물 속에서 정사(情死)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우주는 주검인가요.
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라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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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양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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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곧은 길은 굽어보이는 법이다 - 사마천
2. 변경의 실력자(진나라 목공 1/2)
다섯 마리 양과 바꿔온 오고대부 백리해
기원전 654년 진나라 헌공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고 우나라의 대부인 백리해를 사로잡았다. 진나라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어리석게도 진나라 군대가 자기 나라 땅을 통과하도록 해준 결과 그만 나라를 빼앗겨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또다른 진나라의 왕 목공에게 시집 보낸 공주의 하인으로 삼아 진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하지만 백리해는 도중에서 도망하여 초나라의 완이라는 마을에 은신했으나 그곳에서 그만 억류당하고 말았다. 한편 진의 군주인 목공은 공주의 일행 중에 오기로 한 백리해가 빠져 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전부터 백리해가 현명하다는 소문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떻게든 이 인물을 되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돈을 써서라도 찾으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완 지방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시켜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나의 하인 백리해가 당신들 땅에 억류되어 있다고 하는데, 다섯 마리의 검은 양가죽과 그를 바꿔, 돌려보내 줄 것을 바라는 바이오."
그러자 완 지방 사람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고 백리해를 돌려보내 주었다. 그때부터 검은 양 다섯 마리와 교환해서 그를 차지했기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백리해를 오고대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리해가 오자 목공은 그를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해방시킨 다음. 국사를 논의하는 데 기용하고자 했다. 그러자 백리해는 거듭 사양했다.
"저는 망국의 신하로서, 결코 그러한 막중한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목공은,
"우나라가 망한 것은 군주가 그대의 의견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대의 책임은 아니오."
하고 끝내 마다하는 그를 끈덕지게 설득하며 서로 이야기 나누기를 사흘이나 했다. 그러자 점점 더 그의 사람됨과 능력에 완전히 빠져서 어떻게 하든지 국정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백리해는 그래도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정 그러하시다면 저의 친구 중에 건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제가 감히 따르지도 못할 능력을 가진 인물입니다마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옛날에 제나라에 갔을 때 저는 매우 궁핍하여 걸식하는 몸이나 다름없었으나 그는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 후에 제가 제나라 군주를 받들려고 했더니 그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덕분에 저는 제나라의 내란에 휘말려 들지 않고 목숨을 건지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주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공자인 퇴가 소를 좋아했으므로 소 치는 품을 팔며 그에게 봉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가 저를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때 건숙이 또다시 반대했습니다. 그 때도 그 덕분에 저는 주나라를 떠나 퇴의 죄에 휘말려 죽는 것을 면했습니다. 우나라 군주를 받들 때에도 그는 말렸습니다. 하지만 벼슬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저는 벼슬자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번까지는 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에 화를 면했습니다만, 마지막에 가서 그의 의견을 따르지 않은 탓으로 지금 이렇듯 말려들어 수모를 겪고 만 것이옵니다. 이상 말씀 올린 것으로도 그의 사람됨이 어떤지 잘 아셨을 줄로 믿습니다. '
이에 목공은 당장 사자를 보내, 후한 선물을 주고 건숙을 불러들여 상대부에 임명했다. 며칠 후 목공이 백리해에게 물었다.
"공의 나이가 몇이신지요?"
"벌써 일흔이 되었습니다."
이에 목공은 탄식했다.
"내가 진작에 공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자 백리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분명히 너무 늙었지요. 더구나 새를 잡거나 맹수와 싸운다면 쓸모가 없을 정도로 늙었지요. 하지만 지혜로운 계획을 세우는 일이라면 아직 젊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으면
그 해 가을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침공하였다. 그 즈음 이웃 진나라는 헌공의 애첩인 여희의 음모에 의해서 목공의 처남이 되는 태자 신생이 자살했고,(앞에서 보듯이 헌공의 딸이 목공에게 시집을 갔던 것이다) 또한 공자 중이와 이오 두 사람도 외국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그 후 먼저 탈출해 있던 공자 이오의 사자가 진나라로 목공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이오가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목공은 그 청을 받아들여 백리해에게 군사를 주어 이오가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오는 감사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성공하는 날에는, 하서의 여덟 성을 바치겠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이오는 성공하였고 도움을 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영지를 떼어 주겠다던 약속은 완전히 무시했고, 국내에서는 오히려 여희 일파를 쓰러뜨린 공로자인 이극을 죽여 버리고 말았다. 한편 이극을 죽였다고 하는 소식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고 아직 진나라에 머물던 사자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에 내일이면 나도 어찌될지 모른다고 겁을 먹은 사자는 목공에게 다음과 같은 방책을 올렸다.
"이오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쁩니다. 인망이 있는 것은 오히려 중이 공자쪽입니다. 군주께 약속을 어긴 것도, 이극을 살해한 것도 두 이오의 심복인 여생과 극예가 획책한 짓입니다. 청컨대 감언이설로써 두 사람을 곧 불러다가 여기에 붙잡아 두고 그 동안에 중이 공자를 군주로 세운다면 만사는 잘 될 것입니다."
목공은 끄덕이면서 귀국하는 사자에게 사람을 딸려 보내 여생과 극예 두 사람을 초청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조심성이 대단했다. 무엇인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자 왕 이오에게 귀엣말을 하고는 오히려 그 사자를 죽여 버렸다. 그러자 사자의 아들인 비표가 진나라로 피신하여 목공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이오는 무법자이며 백성들에게 인망이 없습니다. 무찌르셔야 합니다."
그러자 목공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는 군주라면 어떻게 충신을 죽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곧 인심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목공은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앞날에 대비해서 비표룰 신하로 등용하였다. 목공 12년, 진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어서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고 진나라에 양식을 도와 달라고 청해 왔다. 그러자 비표가 목공에게 말했다.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기회를 틈타서 쳐부숴야 할 때라고 봅니다. "
이에 목공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 보았다.
"기근과 풍작이란 번갈아 돌아오는 일이니 지금 여유가 있는 우리가 곡식을 보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백리해의 의견을 들어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이오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고약한 놈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결국 목공은 백리해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좇아 식량을 주기로 했다. 그 날부터 진나라 도읍인 옹으로부터 진나라 도읍 강에 이르기까지 곡식을 운반하느라고 강에는 배들이, 그리고 육지에는 수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나갔다. 목공 14년에 이르자 이번에는 거꾸로 진나라에 기근이 심해서 이오에게 식량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이오가 신하들과 논의하고 있었는데 어떤 신하가 이렇게 말하고 나섰다.
"지금이야말로 목공을 쳐부술 때라고 생각합니다. 승리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이오는 이 의견을 따라 이듬해인 목공 15년에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로 쳐들어 갔다. 목공은 이에 맞서 비표를 장군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동원하는 한편 목공 자신도 출전했다.
명마를 잡아 먹은 용사들
9월 임술날에, 한원 땅에서 목공은 이오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이오 또한 단숨에 승부를 가리겠노라 마음먹고 몸소 나섰다. 그러나 싸움터를 달리며 순찰하고 있던 중 그만 진흙땅에 말의 발이 빠져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이때를 놓칠세라 목공은 부하들을 이끌고 육박해 갔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오를 사로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오의 군대에 포위당함으로써 목공 자신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때 목공을 구원하기 위해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든 용사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목공은 위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여 이오를 생포했다. 그 전투가 있기 수년 전에 목공의 명마가 도망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산 기슭에 살던 건달 패거리 3백여 명이 그 말을 잡아 먹고 있었다. 명마를 수색하고 있던 관리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들을 처벌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공은, "군자는 짐승을 죽였다고 하여 사람들을 헤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말고기를 먹으면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고 하지 않나?" 하고는 도리어 그들에게 술을 잔뜩 주었다. 이 3백여 명의 사나이들이 궁지에 빠진 목공을 구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포위망을 뚫고 달려온 용사들이었다. 그들은 목공이 이오를 친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목공을 돕기로 나섰던 것이다. 그리고 목공이 궁지에 빠진 것을 보자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자기들이 목공의 명마를 잡아 먹었을 때의 그 은혜에 보답한 것이었다.
우는 아내와 천자
결국 목공은 전쟁에서 이겨 이오를 생포하고 자랑스럽게 개선한 후 이렇게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온 백성은 몸을 깨끗이 하라. 과인은 이오를 제물로 바쳐 상제께 제사를 올릴 것이다."
주나라 천자가 그 소식을 듣자,
"진나라의 근본을 따진다면 우리 주나라와 한 핏줄이다. 그러니 죽이지 말라."
하고 목숨을 살려 주라고 청했다. 또한 목공의 부인은 바로 이오의 누나였기 때문에 그녀 또한 상복에다 산발하고 목공에게 호소했다.
"제가 동생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 동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번만 용서해 주소서."
목공은 곰곰이 생각했다. '모처럼 이오를 사로잡아 기뻐하고 있었는데 천자께선 구명을 청하시고, 아내는 애걸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목공은 할 수 없이 이오를 방면해 주기로 했다. 그러면서 숙소와 식사도 군주로서 대우하도록 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이오를 자기 나라로 귀국시켜 다시 왕의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래서 이오는 하서 땅을 목공에게 바치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 이에 목공은 자기 집안의 처녀 하나를 그의 아내로 삼아 주었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의 세력은 크게 강성해져 동쪽으로는 용문강까지 뻗쳐 나갔다.
두 진나라의 경쟁
목공 22년에 인질이 되어 있던 태자에게 그의 아버지 이오가 병상에 누워 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러자 태자는, '목공은 내 아버님이 돌아가시더라도 나를 고국에 보내 줄 리가 없다. 내게는 형제가 많다. 나는 이대로 무시당한 채 있게 될테고 그러면 진나라는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자기 나라로 도망쳐 돌아갔다. 이듬 해인 목공 23년에 진나라에서는 이오가 죽고, 도망쳤던 태자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런데 목공은 태자가 몰래 도망친 사건 때문에 그를 매우 미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 이오의 형인 중이를 망명지인 초나라에서 불러다가 태자의 아내였던 여자와 결혼시켰다. 중이는 일단 결혼하기를 거절했으나, 목공이 거듭 간청하기 때문에 마침내 승낙하였다. 중이가 진나라로 오자 목공은 그를 더욱 더 우대했다. 이듬해 봄에는 진나라 중신들에게 몰래 사자를 보내, 중이를 맞이하여 군주로 세우라고 통고했다. 이에 중신들이 그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목공은 군대를 수행시켜 중이를 고국으로 보냈다. 그 해 2월에 중이는 드디어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문공이다.(사기 2권 '진나라 문공' 편 참조)
한편 그 해 가을 주나라에서는 양왕의 아우인 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때움에 양왕은 피신해서 망명했다. 그리고는 이듬 해에 진과 진, 두 나라에 사자를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목공은 손수 군사를 이끌고 문공과 협력하여 양왕을 입국시켰고, 양왕의 아우 대를 없앴다. 목공 28년, 목공은 성복에서 초나라를 격파시키고 드디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2년 뒤에는 목공과 문공이 협력해서 정나라를 포위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몰래 사자를 목공에게 보냈다.
"우리 정나라를 치면 득을 보는 것은 진의 문공이며, 귀국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습니다. 진나라가 강해진다는 것은 오히려 진나라에 있어서는 화가 미치는 근원이 될 뿐입니다."
이 말을 그럴 듯하게 여긴 목공은 군사를 거두어 귀국해 버렸기 때문에, 문공도 어쩔 수 없이 작전을 중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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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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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안시(白眼視)
白:흰 백. 眼:눈 안. 視:볼 시.
[유사어] 백안(白眼).
[반의어] 청안시(靑眼視).
[출전]《晉書》〈阮籍傳〉
남을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
위진 시대(魏晉時代 : 3세기 후반)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노장(老莊)의 철학에 심취하여 대나무숲 속에 은거하던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에 완적(阮籍)이 있었다. 그는 예의 범절에 얽매인 지식인을 보면 속물이라 하여 ‘백안시’했다고 한다. 어느 날 역시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의 형 혜희가 완적이 좋아하는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왔다. 그러나 완적이 업신여기며 상대해 주지 않자 혜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도망가듯 돌아갔다. 이처럼 상대가 친구의 형일지라도 완적은 그가 속세의 지식인인 이상 청안시(靑眼視)하지 않고 ‘백안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조야(朝野)의 지식인들은 완적을 마치 원수를 대하듯 몹시 미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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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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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둘 - 생활속에 피어나는 웃음안개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이종환, 최유라씨 안녕하세요! 저는 회사차를 운전하는 사람으로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준'청취자입니다. '왕'이 아니고 왜 '준'이나구요? 하루 3교대 근무하는데 3시에서 11시까지 근무하는 때밖에 듣지를 못한답니다. 그래도 보름에 한 번씩 5일간은 들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그래서 말인데 '지금은 라디오 시대' 애청자들을 위하여 뭔가 저도 일익을 해야 한다, 받고만 살 수 있나 주고도 살아야지 하는 사명감에서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겪은 일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 그때 그 일로 인하여 사흘 닷새 밤을 엎드려 자야만 했습니다. 사건은 이러했습니다. 문제의 그날, 제 뒤에 앉은 요시찰들, 문제아들, 가방끈 뒷부분을 잡는 애들, 하복 소매가 팔꿈치를 덮는 애들은 점심시간을 풀(full)로 이용하기 위해 도시락은 일찌감치 까먹고 4교시가 끝나자마자 한문으로 아닐 비자 비슷한 모양을 그린 노트를 펴놓고 접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으찌 먹어."
"에이 니네, 걸렸다."
"이번엔 쌈 먹어."
"으라차차 쌈 깠어."
"떨어진 것 넣고 니 먹어."
일명 쌈치기....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으로 짝궁과 깠니, 못 깠니 하면서 동전을 주고 받는 쌈치기가 그날도 차질없이 벌어진 것입니다. 며칠 전 책값을 타왔다가 고스란히 날려버린 저는 본전이라도 챙기려는 순수한 일념에서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싹싹 비벼댔고 얼마나 비벼댔는지 엄지 손가락 윗부분은 동전의 푸른 때가 운동장 잔디마냥 입혀졌으며, 손톱 사이에는 푸른 녹때가 난초의 연복초를 연상케 하였습니다. 밥먹고 섭취한 HO2량이 많아서 인지 오줌이 심하게 마려웠지만 점심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한판이라도 더 집어 복구를 해야 할 이 시점에서 3층을 뛰어 내려가 100미터 더 가야 하는 화장실에 갔다 온다는 건 저에게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저에게 미소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 손에는 동전 몇 개가 남았고, 5교시를 알리는 수업종 소리가 울려버렸습니다. 누가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엎친 데 덮쳤다고 했던가, 참았던 오줌은 봇물처럼 터질 것만 같았고, 선생님은 금방 들어오실 것 같은데 그렇다고 교실 바닥에다 실례할 수는 없고.... '그래 할 수 없다!' 저는 비장한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오늘도 미안하지만 그곳을 이용해 주자. 저는 일층만 올라가면 옥상이고, 그곳에 제 전용 변기통이 있다는 걸 상기시켰습니다. 빗물이 흘러내리게끔 뚫린 구멍으로 젊음의 상징인 제 힘찬 폭포수를 쏟아 부었습니다. 되도록 밖으로 튀지 않게 정조준하여 힘차게 힘차게 구멍 깊숙이.... 오래도 보았지요. 그리고 나서 세 번쯤인가, 털털 상하 운동을 시켜주고 안전지대로 옮긴 저는 개운한 마음으로 옥상을 내려가고 있는데 밑에서 사정없이 동해안 공비소탕 나온 군인은 저리 가라 하고 민첩하면서도 우악스럽게 튀어 올라오는 기술선생님과 수위 아저씨, 테니스를 치다 오시는지 머리에는 물기가 가득하였고, 와이셔츠는 땀에 흠뻑 젖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걸 느끼는 순간 영문도 모른 채 저는 오뉴월 닭 패대기치듯 계단도 다 내려서기 전에 복지부동하게 되었습니다.
공무원이 복지부동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공무원 시험 한 번 본 일이 없는 제가 복지부동하였으니 어쩐 일입니까. 개처럼 질질 훈육실로 끌려간 저는 대걸레 자루로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해도 셀 수 없이 허벌나게 맞으면서 그 이유를 알았지요. 제가 실례한 옥상 그 구멍을 통해 빗물이 흘러내리게끔 달아논 물통의 맨 밑에 것이 떨어져나가 비라도 많이 올라치면 고공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사방팔방으로 흙탕물을 튀겼고 바로 옆의 길로 다니는 선생님들의 바짓가랑이를 적시고 더럽히는지라 햇볕이 따사로운 점심시간을 이용해 함석으로 새로 짠 물통을 바닥까지 닿게 사다리를 받쳐놓고 열심히 끼워 맞추고 있는 그때, 끊는 피가 용솟음치는 18세가 뿜어내는 엄청난 양의 급류를 두 분이서 순식간에 피할 겨를도 없이, 잘못 움직이면 사다리에서 낙상하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르는 그 상황에서 울며 겨자먹기로 뒤집에쓸 수 밖에 없었던 사연, 머리카락을 타고 눈을 거치는 순간 따가움을 느낀 두 분, 코밑을 흐를 때야 의심했고, 입이 낮은 곳에 임한 죄로 본의 아니게 맛까지 보고 나서 "아, 이거구나."를 외친 두분.
저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말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지를 실감했고, 그 후로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을 그곳에서 실례하는 범인을 색출, 신고하는 비밀요원의 임무를 띠고 한달 동안이나 쌈치기 한번 못해보고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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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읽어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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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송건호 편"(1927~2001)
평론가.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한국 일보,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논설위원과 경향신문. 동아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 저서에 "민족 지성의 탐구"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등이 있다. 역사적 안목의 비판이 실린 많은 평론. 에세이를 발표했으며 한국 지성의 현실과 문제를 일깨우는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고향을 향한 마음
젊어서는 고향을 등지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생활처럼 생각되고 있다. 학교를 나온 뒤 서울이나 지방 도시에서 하다못해 몇만 원 월급쟁이라도 해야만 고향 사람들의 칭찬의 대상이 되지 집에서 농사를 짓거나 마을 일을 돕는 것으로 그친다면 이러한 청년은 사회에서 낙오된 젊은이로 업신여김을 받기 일쑤다. 남자가 듯을 세워 고향을 나온 이상 성공을 못 하고는 죽어도 귀향하지 않는다는 결심이 훌륭한 젊은이로 칭찬을 받는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장성하면 고향을 등지고 이른바 '성공'을 위해 노력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이러한 '성공'에의 야망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고 이러한 야심에 찬 젊은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의 앞날이 양양해진다는 것도 긴 설명을 필요치 않는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야심 많은 사람이라도 고향에 대한 '향수'만은 결코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큰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난 사람일수록 가슴 속에는 고향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 불타오르고 있다. 수만 리 떨어진 먼 외국에 사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마음의 고향'이라고 할까.
살인 강도와 같은 흉악범도 죄를 범하고 난 후에는 많은 경우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에서 잡히는 일이 많다. 일단 죄를 범하고 난 뒤에는 순간적인 격정에서 저지른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마음이 약해져 자기도 모르게 어릴 적에 자란 고향 마을에 찾아갔다가 잡힌다는 것이다. 범인의 이러한 심리적 약점을 알고 있는 수사관들이 미리 그의 고향에 잠복했다가 잡는 것이다. 사람은 평소에는 별로 생각도 느끼지도 못하지만 누구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어릴 적에 늘 만지작거리던 어머니의 젖꼭지와 자랄 때 아침 저녁 대하던 고향 산천은 다 같이 '마음의 고향'으로서 우리의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다. 내가 오늘 있는 것은 고향 산천의 힘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치 않는다.
고향 산천을 대해도 할 말이 없다 - 고향 산천은 고맙기만 하여라.
어느 시인이 부른 시 한 구절이다. 젊어서 고향을 뛰쳐나온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 으레 고향을 그리게 된다. 외국으로 왔다갔다하며 우리 풍습을 거의 잊은 사람도 50이 넘고 60이 되고 하면 점점 고향을 그리게 되고 입는 옷은 물론 취미도 한국적인 것에 심취한다. 일본에 사는 어느 우리 동포가 20대에 고향을 떠나 일본에서 자수 성가, 그 곳에서 뼈를 묻게 됐으나, 생전에 틈만 있으면 "춘향전"의 레코드를 틀어 놓고 고향 생각을 하며, 눈물지었다는 이야기를 그의 아들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아들은 서울에 온 길에 "춘향전"에 관한 레코드를 모조리 구해다가 돌아간 선친의 영전에 바쳤다고 한다. 나는 지방색을 의식적으로 배척하고 반대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를 낳고 길러 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좀더 관심을 보여야 옳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지방색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마을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지는 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누구나 성장한 뒤에는, 특히 고향을 떠나 사회나 나라의 지도적 위치에 선 사람이면, 고향에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했으면 한다. 큰일이 아니라도 좋다.
크게 귀를 했거나 축재한 사람이라면 고향 마을을 위해 좀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게 보람 있는 일이 아니어도 좋다. 오히려 작은 일이라도 정성에 더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자라고 한글과 산수를 깨우쳐 준 고향 모교인 국민 학교에 몇 권의 책을 기증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한국 위인전, 동화집, 또는 학습에 도움이 되는 이것저것 책을 사서 고향의 모교에 보낼 수도 있다. 자라나는 고향의 후배들이 얼마나 좋아하고, 도움이 될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연로하여지면 자기 반성을 하게 된다. 또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출세'를 위해 또는 '축재'를 위해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연로할수록 사람들은 자기의 지난날을 회고하게 된다. 조그마한 일이나마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고자 생각한다. 뜻있는 일은 물론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고향에 대한 무엇인가의 기여도 마지막 인생을 장식하는 좋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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